" ... "
두 번의 절을 마친 남자는 자리에 앉아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장소에 찾아오기 시작한지 20년도 족히 지났지만, 이곳은 과거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단조롭고 칙칙한 도시의 아파트의 숲과는 대조되는 여러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형성된 마을. 시끄러운 도시와는 대조되는 정적.
조용한 마을의 옆의 철길을 때마침 지나가는 기차가 힘차게 연기를 뿜고 있었다.
한동안 산 밑 마을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시선을 돌려 자신이 올라온 길을 바라보았다.
성묘객들이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잘 정돈된 산 아래턱의 묘지와는 달리, 이곳은 지나갈 수만 있도록 최소한의 관리만을 하는 수풀 사이를 통과해서 자연 그대로의 길을 밟아야 도착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이 장소에 오는게 그렇게 싫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도 산 위에 도착해서 산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 볼 때 느꼈던 뭔지 모를 해방감. 그것이 산을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그때의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앞장서서 나아가며 남자의 손을 잡아주어 앞으로 이끄는 큰 손의 주인이 있었다.
상냥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언제나 앞에서 남자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다.
시간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듯이, 손의 주인은 차가운 흙 속에서 남자를 맞이하고 있다.
생명체인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어째서 그 당연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처음엔 도저히 실감이 가지 않았다. 장을 지내며 관을 묻을 때까지, 아니, 명절이 다가와 다시 찾아올 때까지도 믿지 못했다.
뒤에서 몰래 나타나 사실은 짖궃은 장난이었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남자가 다시 아이로 돌아갈 수 없듯이, 그럴 일은 없었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그 모습, 그 목소리 조차도 희미해지고 있다.
남자는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이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이 산에서 들러야 할 곳이 한 곳 남아 있었다.
볼 일을 마치고 부지런히 내려간다면 아마 저녁쯤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식어빠진 음식을 집어먹기보다는 공복을 조금 느끼더라도 집에 돌아가서 따뜻한 음식을 먹는게 더 좋을 것이다.
이번 연휴는 아주 길다. 그러니 다음 2일 동안은 늘어지게 잘 것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푹 잘수 있겠는가? 그래도 마지막 하루정도는 정상적으로 일어나야겠지. 게으름이란건 순식간에 몸에 배기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소리였다.
" 테치? "
이미 남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시 도래했던 실장석 붐 현상은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원인은 자명했다.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기도 힘든 주제에 도와주는 인간조차 노예로 취급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인지능력과, 투분이나 탁아, 절도 등 갖가지 방법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도 모자라서 인간에 의해 길러지는 동족을 보면 질투심으로 죽이려고 덤비거나 자신이 사육실장이 되기 위해 바꿔치기를 시도하는 들실장 따위를 애호할 수 있겠는가?
사육실장이라고 다른 점은 없었다. 고문을 넘어서 생과 사의 험한 갈림길에 내던져진 뒤 선택을 요구하는 그 가혹한 교육조차도 꺾지 못하는 그 분충성과, 스스로의 주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주인의 호의에 감사할 줄 모르며 끝 없이 요구하기만 하는 그 태도가 많은 사육주들이 사육실장의 양육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실장석들이 괴멸했냐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도 길을 걸으며 보면 실장석용 봉지를 가득 채운 실장석들의 사체나 욕설을 내뱉으며 바닥에 늘러 붙은 실장석의 잔해를 치우는 미화원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간혹 너무 가혹하지 않냐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실장석을 동정하지 않는다. 이건 그들 스스로가 쌓아온 결과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살아있는 실장석은 정말 오랫만이다. 산에서 사는 실장석이란건 본 적도 없었고.
말로만 듣던 산실장에 남자는 호기심이 갔다. 실장석이 공원이 아닌 야생에서 스스로 자립이 가능한가? 식량은 어떻게 구하는거지?
계속 솟아나는 의문을 잠시 미뤄두고, 남자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조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장석의 소리는 봉분 왼쪽의 수풀 속에서 나고 있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쓴 듯이 목소리는 일반적인 실장석의 목소리보다는 현저하게 작았다. 실장석의 불행이라면 이곳은 주변에 소음이 가득한 도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적막한 산이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수풀을 살며시 들춰보았다.
" 테치. 테치? "
" 데스. 데스 데스! "
그 안에는 자실장 한마리와 성체실장이 있었다. 자실장은 봉분 앞에 놓여진 음식을 손으로 가르키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친실장은 그런 자실장을 꾸짖으면서 팔을 당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친실장은 당장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 같았지만, 자실장의 두 눈은 좀처럼 음식에서 시선이 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떼를 쓰는 아이와 이를 나무라는 어머니의 모습과 흡사했다.
" 이봐 "
" 텟! " " 뎃! "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두 모녀의 경직된 시선이 위를 향했다.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저 커다란 형체, 분명 인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 앉는 자실장과 그런 자실장을 품 안에 꼭 껴안으면서 자신을 경계하는 친실장.
두 모녀를 바라보며 남자는 입을 열었다.
" 너희... 저기에 있는 음식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거 같은데, 음식의 주인은 엄연히 나라고. 그런데 너희는 뭘 하려고 했던거지?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실장과는 다르게 친실장의 얼굴은 대번에 시퍼렇게 질렸다.
재빨리 제자리에 엎드려서 절하는 친실장의 채근에 아직도 갸웃거리던 자실장도 똑같이 엎드려 절했다.
정말로 신기한 생물이었다. 종도 다른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다니, 다른 애완동물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겠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실장석들을 무시하고 미워함에도 아직도 사육실장을 기르며 귀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는것이.
... 그 사람들 중에서 무책임한 일부가 사육실장을 유기해서 사람들이 미워하는 들실장이 생기는건 별로 비밀도 아니지만.
자신을 보고 엎드려 절하는 두 모녀를 응징하려는 마음은 딱히 없었다. 도시에서 본 들실장이었으면 냉큼 발로 걷어 차 줬을텐데.
그러나 저기 저 자실장. 이해가지 않는 어미의 명령을 따라 절하면서도, 살짝 든 머리로 음식을 힐끔 쳐다보며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저 모습을 보니 왠지 살짝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너희들이 음식을 보고 군침을 삼키는건 자유지. 근데 말했듯이 이건 내꺼야. 같은 인간끼리도 남의 것을 탐내서 도둑질하면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는데, 실장석인 너희가 인간의 것을 도둑질한다? 너희 목숨을 내놔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안해? "
이제서야 이해가 갔는지 안색이 하얘진 자실장도 벌벌 떨기 시작했다.
" 도망가면 벌을 줄테니까, 여기 얌전히 있어. 뭐, 듣지 않아도 좋아. 내 말을 듣지 않은걸 반드시 후회하게 해줄테니까. "
돗자리로 돌아와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던 남자는 곧 가방에서 큰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봉분 앞에 차린 음식을 잠시 응시하다가 하나씩 접시를 기울여서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어차피 잘 먹지도 않고 음식물 쓰레기로 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음식이니 그냥 적선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 대상이 실장석이 될 거라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봉지에 음식을 담은 남자가 돌아올 때 까지, 모녀는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 이봐, 일어나라구. "
남자의 눈치를 살피던 두 모녀는 우물쭈물하며 일어났다. 슬쩍 미소지은 남자는 자실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 테칫! "
검지손가락이 자실장의 머리를 가볍게 밀자,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자실장은 뒤로 데굴데굴 굴러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뛰어가려던 친실장은 남자의 눈치를 보느라 옴짝달싹 못했다. 어쩔 줄 모르는 친실장의 앞에 뭔가 떨어졌다.
" 데? "
그것은 동그랑땡이었다. 이미 만든지 하루가 지나 식었으나, 친실장이 여태까지 본 인간의 음식 중 가장 싱싱하였다.
아직도 배겨있는 기름냄새가 친실장의 코를 자극하여 입 안에 침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친실장은 자신의 자를 공격하고 바로 먹을것 을 주는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고민에 빠졌다.
그 사이, 쓰러졌던 자실장은 일어나서 흙이 잔뜩 묻은 몸과 맨땅에서 놔 뒹군 통증에 울먹이고 있었다.
" 거기 너도 그만 울고 이리 와라. "
" 테에... 테끄윽... 테끄윽. "
앉아서 울먹이던 자실장은 눈물을 훔치며 친실장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남자는 자실장에게도 똑같이 하나 건네주었다.
손에 쥔 음식으로 자꾸 시선이 향하는 모녀, 그러나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에 쥔 채로 남자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 뭘 보고 있어? 이상한 것 안 들었으니까 먹으라고. "
재차 권하여도 모녀는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뒷머리를 긁적인 남자는 봉지에서 동그랑땡 하나를 꺼내어 먹었다. 남자가 먹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보던 모녀는 자신들의 손에 놓인 동그랑땡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봉지에 쓱쓱 문지른 남자가 아무이상 없다는 듯이 팔을 펼치자, 자실장에게 낮게 뭐라고 말한 친실장은 손에 들은 동그랑땡을 잠시 보다가 반으로 쪼개어 입 안에 넣었다.
맛을 음미하듯이 느리게 반쪽을 먹은 친실장은 자신의 팔다리를 흘끔 보거나 자기 주변을 한바퀴 뛰어보는 등 한동안 부산을 떨었다. 친실장의 행동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자실장은 눈이 마주친 친실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잽싸게 자신의 몫을 입에 집어넣었다.
조리된 음식을 처음 먹은 듯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파닥거리며 동그랑땡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자실장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동그랑땡을 다 먹은 자실장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친실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머지 반을 자실장의 손에 쥐어주었다.
동그랑떙을 먹는데 열중인 자실장을 보며 남자는 아마 오늘이 자실장의 생애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모녀의 앞에 남자는 쪼그려 앉았다. 경계를 푼 자실장은 먹을 것을 준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여전히 남자를 경계하는 친실장도 이전보다는 경계심을 많이 누그려뜨렸다. 앉으라고 손짓하는 남자를 보고 모녀도 자리에 앉았다.
" 뭐 이제 대화할 분위기가 된 거 같네. 난 너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 "
" 일단, 대다수의 인간이 들실장을 보면 싫어하는 걸 너희도 알고 있지? 아까 숨어서 지켜보던 걸 생각하면 그건 아는거 같은데. "
고개를 끄덕이는 모녀를 보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 그래, 꼭 너희 잘못은 아니지. 인간을 피할 정도의 생각이 있는 너희들이니까. 문제라면 장소일까. "
아이들한테 말하는 것보다도 힘들다. 어떻게 해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귀찮으니 그냥 링갈이라도 받을까 고민하던 남자의 눈에 뒤늦게 친실장의 팔에 걸린 비닐봉지가 들어왔다.
" 너, 혹시 들실장 출신이냐? "
친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좀 이해하기 쉽겠네. 들실장인 너희가 돌아다니면 괴롭히거나 죽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지. 어쨌든 자신의 공간이 아니니까. 그런데 반대로 탁아를 시도하거나 집에 몰래 들어온 들실장을 살려준 인간을 본 적 있니? 너희도 다른 실장석이 너희 집에 들어오면 좋게 넘어가려고 하질 안잖아. "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실장과는 달리, 친실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거랑 비슷한거야. 이곳은... 너희 말로는 뭐랄까.. 마마의 마마던가? 죽은 부모님이 묻혀 있는 곳이지. 뭐 물론 꼭 부모님만 해당하는건 아니지만 말야. 어쨌든 이렇게 무덤이 있는 장소는 다 죽은 인간이 묻혀있다고 보면 돼. "
" 죽은 사람의 기일이거나 특정한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무덤에 찾아와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의식을 지내곤 하지. 그리곤 죽은 사람들이 돌아와서 꺼내놓은 음식을 먹는다고 하고. "
눈을 동그랗게 뜨는 두 모녀의 모습에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남자는 계속 말했다.
" 뭐 실제로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리는 없고, 그냥 날을 정해서 그 사람을 떠올리는거지. 죽어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되는거야. "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녀. 남자의 말을 듣는 자실장의 눈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중요한건 이거야. 어쩃든 사람들은 이렇게 찾아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그런데 근처에 실장석이 고인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 너희가 가져갈 생각이 없어도 그래, 사람들은 한꺼번에 묶어서 보기를 좋아하거든. 음식을 가져가려는 실장석이나 그냥 지나가려는 실장석이나 눈에 띈 순간 같은 부류가 되는거지. 어쨌든 너희라면 그렇게 중요한 음식을 가져갈지도 모르는 실장석이 있다면 용서할까? "
고개를 바로 젓는 친실장과는 달리, 고개를 갸웃거리던 자실장은 뒤늦게야 고개를 저었다. 제법 귀여운 모습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자실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테츙♡ "
" 내가 해줄말은 여기까지다. 다음번에는 사람들 근처에도 가지마라? 언제나 이번처럼 운이 좋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모녀에게 남자는 봉지를 건냈다.
" 이건 뭐... 변덕이다. 그냥 니 새끼 날린거랑 너희를 벌벌 떨게 한 것에 대한 사과의 표시라고 하자고. "
친실장은 봉지가 땅에 끌리지 않도록 음식의 일부를 자신이 소지하던 봉지에 덜은 뒤, 빈 팔에 남자가 준 봉지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 뭐 그럼 잘살아봐라, 내가 한말은 절대로 잊지 말고. "
" 테치 테치 " " 데스우 "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수풀 너머로 사라지는 모녀에게 남자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더이상 모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들이 사라진 수풀을 바라보던 남자도 돗자리를 접고 짐을 챙겨서 내려갔다. 무덤은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듯이 적막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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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실장은 원래 공원 태생의 실장석이었다.
원사육실장인 마마로부터 독립한 친실장은 자신감이 넘쳤다. 귀여운 자를 낳고 다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원에서의 삶은 친실장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른 실장석보다 좋은 머리로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게 고작이었다.
친실장은 곧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무사히 어른이 되서 독립한 것은 마마의 희생적인 헌신과 남들보다 더 좋았던 운에 불과했을 뿐이란 것을.
공원은 작은 도시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본디 시민들의 휴식처였던 이곳은 실장석들이 출몰하면서 인간의 발길이 끊겼다.
휴게소에 기르던 애완동물을 버리고 가버린다. 지금도 휴가철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공원의 근처에는 제법 커다란 규모의 휴게소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장소였다는 것이 시민들의 불행이었다.
더이상 귀엽지 않아서, 말을 듣지 않는 분충이 되서, 자꾸 자를 낳고 싶다고 졸라대서, 더이상 기르기 귀찮아서...
여러 이유로 주인들에 의해 버려진 원사육실장들은 처음 보는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주인만을 애타게 찾다가 금세 목숨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중 일부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길을 떠났다.
처음부터 인간의 손에서 자란 출산석의 자식이었기에 어떤 지식도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위석의 강한 주장을 따른 원사육실장들은 하나둘씩 공원에 도착하여 새 삶을 시작했다.
처음의 공원이 그렇게나 가혹했던 환경은 아니었다. 버려진 원사육실장들을 가엽게 보는 인간들의 지원도 있었고, 아직 사육실장으로 주입당한 지식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사육실장들은 공원에 새로 정착한 동족들을 도우며 부족한 자원도 나눠서 사용했다.
주인의 보호이자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혼자만의 삶이 아닌 다른 이웃들과 공존하는 삶. 전과는 다른 형태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자신을 버린 주인을 잊지 못했다. 그날 받은 상처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원사육실장들이 본능을 따라 자를 가지는 것으로 자신이 받은 아픔을 잊으려고 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행복을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파멸의 씨앗도 같이 싹을 틔웠다.
자원은 급속도로 부족해졌다. 처음에는 원사육실장들을 귀여워해주던 시민들도 실장석이 자꾸 늘어나자 서서히 발길을 끊었다.
새로 태어난 자들도 문제였다. 원사육실장들에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자식이었지만, 한번 인간의 손에 인도될 만큼의 충분한 교육을 받은 원사육실장들과는 달리, 인간의 체계적인 교육이 아닌 마마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엉성한 교육을 받은 자실장들은 사람들에게 귀여움보다는 불쾌감을 주기 충분했다. 원사육실장들이 자신에겐 너무나 귀여운 자를 내보이며 들이댈수록, 더 많은 시민이 공원에서 발길을 돌렸다.
결국 버려졌다는 동병상련 아래 만들어졌던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부족한 물자를 차지하기 위해 원사육실장들은 물자를 두고 서로 다툼을 벌였으며, 때로는 서로의 목숨을 노리기도 하였다.
일부는 싸우는 사이에 물자를 가져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동족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원은 투쟁의 장소로 변질되었다.
새로 얻은 안식처가 붕괴되었지만, 원사육실장들에게 후회는 없었다. 서로를 견제하고 상처입히는 투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목을 빼고 마마를 기다리던 사랑스러운 자들이 있었기에. 그 소중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으며 좋아하는 자들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러나 그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원사육실장들은 자들에게 교육을 한 뒤 바로 잠을 청하여 그날 소모한 체력을 회복하는 것에만 신경 써야 했다.
이미 현실의 벽과 마주친 원사육실장들은 과거 사육실장일 때 자를 가지면 같이 놀아주겠다는 소박한 소망도 실현할 수 없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자들이 공원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언젠가 주인이 다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른다며, 아니면 귀여운 자를 어떤 착한 인간이 사육실장으로 데려가 자들이라도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며 기억을 더듬어가며 열심히 가르치던 사육실장의 몸가짐은 곧 공원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모든것을 잃은 뒤 얻는 소중한 자들이 꽃피지도 못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공원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원사육실장은 한마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공원에 도착할 때 까지의 여정. 미지의 세계에 던져진 공포감과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위험들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나 소중한 자들이야말로 그들의 발을 묶는 덫이었다. 혼자서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곳에 자들과 같이 간다는 것은 상황판단이 떨어지는 실장석의 생각으로도 자살행위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원사육실장들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마주했다. 그리고 소중한 자들을 위해 그 모든 아픔과 담대하게 맞서 싸웠다. 그렇게 그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소중한 자들이 독립할 시기가 되었을 때, 공원의 삶에 적응하기 위한 지식을 쑥쑥 흡수하여 그들의 마마와는 다르게 완전한 ' 들실장 ' 으로 일어난 그들이 공원의 주역이 되었을 때, 공원은 지옥이 되었다.
친실장은 경험이 많은 실장이었다. 독립한 뒤 세 번의 겨울을 이겨내고 무사히 살아온 베테랑 실장이었다.
친실장은 운이 좋았다. 굶주림에 미친 동족들의 습격에서, 무시무시한 마라의 전횡으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모든 동족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죽이는 하얀 악마로부터, 친실장은 큰 상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운은 친실장 스스로의 것이었다. 자들은 친실장의 그것을 결코 가지지 못했다.
친실장은 세 번의 겨울을 지낸 베테랑 실장이었다. 그러나 친실장이 공원에서 독립시킨 자는 단 한마리도 없었다.
친실장은 동족들에 비해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자원을 모으고, 많은 위험을 순조롭게 피해갈 수 있었다.
자들의 교육에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영특한 자들도 친실장의 가르치는 지식을 스펀지마냥 쏙쏙 빨아들였다.
그러나 공원은 지옥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성체실장도 공원에서 살아가기 위한 교활함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자들은 영특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했다. 그 부족한 빈틈은 다른 동족들이 물어뜯기에 충분히 커다란 틈이었다.
친실장이 매번 실패했던 것은 아니다. 항상 다른 동족들의 술수에 모든 자들이 희생되었던 것은 아니다.
단 한번, 어떤 자도 희생당하지 않고 무사히 자랐던 때, 맏이 장녀는 독립을 앞둔 중실장까지 길렀던 적이 있었다.
그날은 달이 밝은 날이었다. 2~3일 뒤면 독립하는 장녀와 친실장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지옥같은 공원에서 살아가면서도 장녀는 작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귀여운 자들을 잔뜩 낳아서 훌륭히 기르고 싶다는 소망, 그것은 친실장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곧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모녀는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두 모녀가 대화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골판지 밖에서 놀다가 갑작스럽게 부는 차가운 바람에 놀란 사녀가 바닥에 운치를 흘렸던 것을 알지 못해서 일 수도, 아니면 단지 운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모녀의 꿈을 산산히 부숴뜨린것은 공원의 무법자이자 폭군인 고양이였다.
다음 날, 음식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친실장을 배웅하는 자들. 그 중 장녀를 덮친 커다란 검은 형체는 공원의 폭군, 고양이었다.
친실장의 위석이 미친듯이 신호를 보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떠나서 도망쳐야 된다며 요동쳤다.
이후에 친실장이 회고하기를, 아니 어쩌면 그 당시에도 친실장은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본능을 따라 도망갔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러나 친실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장녀의 두툼한 몸을 입을 크게 벌리고 물고 있는 야옹씨에게 보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몇번이고 앞발에 희롱당하며 나가 떨어지면서도, 친실장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자들은 용감했었다. 친실장의 생애에서 어떤 자들, 아니, 보아온 어떤 동족들조차 그 자들보다 용감했던 실장석은 없었다.
본능이 미친듯이 경고하고 있음에도, 맞이하는 결과가 확실한 죽음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들은 언니를 구하기 위해 폭군에게 덤벼들었다. 야옹씨의 피부를 뚫지도 못하는 이빨로 몸을 물어 뜯었다. 야옹씨에게 저항하기 위해 운치를 던졌다.
장녀도 포기하지 않았다. 폭군에게 물린 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수염을 잡아당기며 가족의 분투를 도왔다.
치열한 싸움의 승자는 친실장의 일가였다. 자들의 끈질긴 방해에 자세가 무너진 폭군의 눈을 친실장의 보검이 꿰뚫었다.
공원을 가득 채우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눈 앞의 친실장을 강하게 후려친 폭군은 공원을 빠져나가 멀리 달아났다.
수많은 상처를 입고,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친실장은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미친듯이 도망가는 폭군의 모습이었다. 친실장은 폭군의 마수로부터 살아남은 것이다.
힘 없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친실장은 자들을 불렀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가는 가혹했다.
야옹씨의 얼굴에 투분하여 코와 얼굴 곳곳에 운치를 맞춘 차녀는 그 보복으로 코 윗부분 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운치를 맞아 괴로워하는 야옹씨를 보며 미소짓던 차녀, 그러나 차녀는 이제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폭군을 공격하는 가족을 위해 시선을 끌려던 삼녀, 네 발로 엎드려 폭군을 위협하던 삼녀는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두동강이 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잿빛의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그 얼굴은 아직도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뭇가지를 들고 야옹씨에게 덤비던 사녀, 결국 야옹씨의 한 발을 못쓰게 만들었던 사녀는 그 나뭇가지에 몸이 반으로 쪼개져서 더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그 눈을 감겨주며 친실장은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야옹씨의 발을 물어뜯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애쓰던 오녀 엄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친실장의 귀에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에 찢긴 옆구리의 틈으로 삐져나와 바닥에 펼쳐진 분대가 알려주고 있었다. 장녀의 꿈은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친실장은 떨리는 두 손으로 분대를 장녀의 몸 속으로 밀어넣었지만, 분대는 힘없이 몸 밖으로 다시 흘러나왔다.
의미 없는 행동을 필사적으로 반복하는 친실장의 손 위로 장녀의 손이 힘없이 올려졌다. 시선이 마주친 장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미소지은 뒤 고개를 떨궜다. 숙여진 장녀의 머리는 두 번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소중한 돌에 크게 금이 가는 것을 느끼며 친실장은 뒤로 쓰러졌다.
작은 두 손으로 몸을 콕콕 찌르며 애타게 깨우는 엄지의 간절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친실장은 먼저 떠난 자들을 만났을 것이다.
큰 부상을 입은 친실장은 며칠이고 집 안에 틀어박혀 몸을 회복시켜야 했다. 그리고 미처 몸이 회복되기 전에, 다시 혼자가 되었다.
엄지실장은 미숙아이다. 그 약해서 보호가 필요한 자실장보다도 더 연약한 존재이다. 앞발에 스쳐서 몸에 새겨진 발톱 자국도 엄지에게는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결국 엄지를 집어 삼켰다. 친실장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얀 악마. 아직 공동체가 유지되던 시절에 마마의 친구인 오바상한테 들은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사실은 인간들이 변장한 모습으로, 공원에 분충이 범람하면 찾아와 모든 분충에게 슬픈일을 하고 돌아가 공원을 다시 인간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깨끗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러니 결코 분충이 되선 안된다며 신신당부하던 마음씨 좋은 오바상이었다.
마마도 분충은 인간한테 피해를 끼치니 절대 분충이 되어서는 안되며, 착하게 산다면 인간들도 해를 끼치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원에 하얀악마가 처음 찾아온 날, 힘든 삶에도 동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려던 오바상과 마마는 슬픈일을 당했다.
그 오바상도 마마도 틀렸다. 인간들은 결코 분충들에게만 슬픈일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비롯해 세 마리의 자를 독립시킨 마마와는 달리, 오바상은 지난 겨울에 자가 모두 얼어 죽어서 한 마리도 독립시키지 못했다.
보온재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슬픔에 빠진 것도 잠시, 그렇다면 자를 많이 낳는다면 서로를 감싸안아서 체온으로 추위를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오바상은 열마리도 넘는 많은 숫자의 자를 낳았다.
자가 너무 많으면 키우기 힘들지 않냐는 마마의 걱정에도 자신이 더 노력하면 된다면서 큰소리를 탕탕쳤다.
다행히도 태어난 자들은 착한 자들이었고, 오바상도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움직여서 자들을 부양하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었다.
마마는 겨울이 걱정된다고는 했지만 오바상과 자들이라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고, 친실장도 그에 동의했다.
부러울 정도로 행복한 가족이었다.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그 가족은 행복한 미래를 손에 쥘 자격이 있었다. 분명히 그랬어야 했다.
그날따라 묘한 불안감에 일찍 일어나 자들을 깨워 밥을 먹고 있던 친실장 일가의 귀에 들려온 것은 그 오바상의 절규였다.
자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뒤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가 비명소리의 근원을 찾던 친실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었다.
오바상의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두 인간이 있었다. 오바상의 말과는 달리 옷은 하얀색이었지만 얼굴에 변장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오바상의 자랑이었던 그 자들, 나머지는 어디갔는지 고작 네마리만이 한 인간이 들고 있는 통 안에 갖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자 한마리는 다른 인간의 발에 비스듬히 눌려있었다. 들려있던 인간의 발이 순간 아래로 내려왔다.
" 지잇! "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친실장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주변에 적록의 얼룩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었다.
친실장이 재빨리 팔을 뻗어서 소리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참상을 목격한 자들의 비명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한편, 자가 눈앞에서 밟혀 죽는것을 눈 앞에서 본 오바상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 데... 데에엥! 데에엥! "
" 울 시간이 어딨어, 멍청한 녀석아. 바로 다음타자 가자고? "
그 인간이 뒤를 돌자, 시선이 마주친 통을 들고 있던 인간은 다른 손으로 통 안에서 자실장을 한마리 꺼냈다.
" 테챠아아앗! 테에엥 테에엥! "
눈 앞에서 자매가 죽어버린 공포스러운 장면에 그 자실장은 발버둥치며 운치를 사방에 흩뿌렸다. 자실장을 건네받은 인간의 얼굴이 순간 확 구겨졌다. 인간은 자실장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시 발로 고정시켜서 눌렀다.
그저 공포에만 질려있던 아까 죽은 자와는 달리, 힘이 가해져 고통스러운지 손으로 인간의 발을 툭툭 쳤지만 발은 미동도 없었다.
" 더러운 똥벌레한테는 시간을 별로 안줘. 자, 다음 라운드라고. 다시 해봐. "
" 데샤아앗! "
주저앉아 울던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오바상은 번개처럼 인간의 발로 뛰어갔다. 도와달라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자의 앞에서, 오바상은 인간의 발을 들어 올리려고 시도했다, 발을 손으로 툭툭 때렸다. 발을 깨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발은 미동도 없었다.
" 떙! 시간초과라고. "
" 데갹! "
오바상은 인간의 발에 맞아서 왔던 길을 날아서 돌아갔다. 그리고 오바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인간은 무정히 발을 아래로 내렸다.
" 치벳! "
" 오.. 오로롱! 오로롱! "
" 전혀 달라지는게 없어, 재미가 영 없다고, 그러니 패널티를 주자고. 새끼가 죽어서 슬프다지만 정작 니놈은 별로 안다쳤잖아? "
이미 그 인간은 또 다른 자실장을 발로 밟고 있었다. 다른 자들과는 달리 엎드린 채로 밟힌 자실장은 팔다리를 바동거리며 마마를 끝없이 외쳤다. 남자가 들어오라는 듯이 손을 까닥거리자 오바상은 다시 포효와 함께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 시간 초과다. 이 벌레야. "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바상이 아무리 기를 쓰고 남자의 발을 치우려고 해도, 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이 눈짓하자, 통을 든 인간이 다가와 그 인간이 밟고 있던 자실장을 대신 밟았다.
인간의 손에 잡힌 오바상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 인간이 앞머리를 쥐고 손을 옆으로 휘두르자, 오바상의 앞머리는
간단히 뽑혀버렸다.
- 부욱 -
인간은 의외로 오바상을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땅에 내려온 오바상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자신의 앞머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손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 지금 그딴 거에 신경 쓸 때냐, 할 마음 없으면 니 새끼 그냥 밟아버린다? "
남자의 말에 정신차린 오바상은 다시 한번 가망이 없는 일에 온몸을 던졌다.
" 데...데...데에에... "
" 테챠아아! 테..테..치벳!
인간은 잔인했다. 자를 포기하지 않고 덤비는 오바상이 실패할 때마다 벌이라며 해를 가했다. 처음엔 두건을 찢어버렸다. 다음은 뒷머리를 뽑아버렸다. 그 다음엔 옷을 찢어버렸다. 그 다음은 신발을, 마지막으로 소중한 팬티를 뺏어버렸다.
그리고 오바상이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자, 인간은 발을 내렸다. 이전에 죽었던 자들과는 달리, 서서히 내려오는 발의 압력에 자는 온몸이 터질 것 같은 압력이 고통스러워하다가 허리가 박살 나고 내장을 입으로 뱉는 끔찍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았다.
마음도 꺾이고 체력도 고갈된 오바상은 자의 비참한 죽음에도 흐르는 눈물조차 닦지 못하고 그저 땅바닥에 엎드려만 있었다.
" 더이상은 무리같은데, 그냥 끝내자고. 뭐 그래도 너도 열심히 했다. "
손에 든 막대기를 들고 다가가는 인간.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에도, 오바상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인간의 막대기가 위로 높이 들렸다.
" 테챠아앗! 테치 테치! "
" 뭐? 니 엄마도 못한걸 니가 할 수 있다고? "
" 테치! 테칫! "
" 하, 웃기지도 않네. 좋다. 어디 한번 해봐라. "
눈짓을 받은 통을 든 인간은 소리를 지른 자실장을 땅에 얌전히 내려주었다. 자실장은 곧바로 오바상에게 쪼르르 달려가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바상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으나, 이미 자실장은 인간의 앞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놀라웠다. 그 자실장의 말처럼 그 자의 주먹은 정말로 웬만한 성체실장의 주먹질보다도 강했다. 아까 필사적으로 인간의 발을 공격하던 오바상보다도 강한 힘으로 발 주위를 돌며 열심히 때리는 자실장의 배 부분의 옷이 볼록 튀어나온 것을 친실장은 뒤늦게 확인했다.
한참 동안 발을 때리던 그 자실장이 자리에 앉아 거친 숨을 고르던 그때였다.
" 야, 다했냐? "
" 테....테? "
" 니놈도 탈락. 그래도 자매를 구하려는 용감함을 봐서 마지막 말을 남길 시간은 줄게. 할 말 있냐? "
자실장은 고개를 획 돌려서 오바상을 보았지만, 이미 체력이 다한 오바상은 제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고, 통 안에 든 자실장은 울면서 통을 손으로 치고 있었지만 통은 미동도 없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간의 시선에 부들부들 떨던 자실장은 팔을 뻗어서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리고...
" 테...테츙♡ "
" 테츙은 개뿔이. 어디서 애교질이야 징그러운 새끼가. "
" 치벳! "
자실장은 단말마를 내뱉으며 남자의 발 밑으로 사라졌다. 남자가 발을 들어올리자, 밟힌 자실장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외로 체액이 사방에 터져나간것을 빼고는 애교를 부리던 그 자세 그대로 쥐포가 된 것처럼 바닥과 일체화되어 있었다.
" 야, 이것봐라, 꼭 프린터로 뽑은거 같지 않냐? "
" 그렇긴 하네요. 저대로면 어디에 그냥 붙여놔도 그림으로 착각하는 거 아닐까요? "
그렇게 인간 둘이 자실장의 시체를 보고 킬킬대는 사이에, 힙겹게 기어 온 오바상은 자실장의 최후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손으로 들어올리려고 해도 오바상의 힘으로는 바닥에 착 달라붙은 자실장의 시체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오바상은 웃고있는 두 인간에게 큰 소리로 짖었다.
" 데샤아아아앗! "
" .... x발새끼가! "
" 데갸악! "
얼굴이 확 일그러진 인간의 분노로 가득찬 발길질이 오바상의 배에 닿았다. 오바상의 몸이 단순에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땅을 뒹굴며 팔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부러진 오바상을 순식간에 쫓아온 그 인간은 손에 든 긴 막대기로 전력으로 내리쳤다.
" 애시당초에 니놈들이 아무 생각없이 새끼를 싸지르니까 이 모양이 나는거 아냐! "
- 퍽 -
" 데붓! "
" 환경을 고려할 머리도 없지! 새끼를 스스로 부양할 능력도 없지! 위험에 빠진 새끼를 구할 수도 없지!
- 쾅! -
" 데벳! "
- 파킨 -
" 어미라면 최소한 자식새끼들이 안전할 수 있는 장소에서 길러야 하는 것 아니냐? 그저 자기가 살기 편한 장소에서 책임도 질 수 없는 새끼를 잔뜩 싸지르고 인간에게 빌붙는 주제에! 뭐? 내가 똥닌겐이라고? "
- 쾅! -
" 똥은 너겠지 이새끼야! 너같이 대가리도 텅텅 빈 실장석 새끼들 때문에 휴일에 강제로 끌려와서 똥벌레나 쳐죽여야 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죽어! 죽어 이새끼야! "
- 쾅! -
- 쾅! -
- 쾅! -
인간은 미친듯이 오바상을 손에 든 막대로 후려쳤다. 오바상은 순식간에 원래의 형태를 잃고 뭉개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숨을 씩씩 내쉬던 그 인간은 다시 돌아와 통에서 남은 자실장 하나를 거칠게 꺼내서 땅에 내팽겨쳤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반쯤 피떡이 된 자실장 위에 인간의 발이 내려왔다. 단 한번의 짓밟기에 피떡이 됐음에도, 그 인간은 미친듯이 자실장의 시체를 짓밟고는 땅에다가 발을 비볐다. 그것이 행복했던 한 가족의 끔찍한 말로였다.
악몽같은 시간이 끝났다. 멀어지는 인간들을 보며 안전한 장소를 친실장이 고민하던 찰나, 너무나 큰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 육녀가 그만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 테.. 테에엥! 테에엥! "
떠나가던 인간들이 걸음을 멈췄다. 친실장은 피가 얼어 붙는 것 같았다. 몸을 돌린 두 인간은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양 팔을 옆으로 쭉 뻗은 친실장, 흩어져서 도망치라는 수신호였다. 지시를 따른 자실장들이 뛰쳐나가기 전에, 친실장이 먼저 나갔다.
" 데샤앗! "
인간의 주위를 돌린 친실장은 네발로 뛰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른 친실장의 속력에 당황한 인간들도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뒤쫒기 시작했다. 이대로 인간들을 자들이 없는 방향으로 유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친실장의 귀에 자의 비명이 들렸다. 친실장은 무심코 고개를 뒤로 돌렸다.
" 테칫! "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막내가 달리다가 그만 넘어진 것이다. 평소라면 돌아와서 부축해줬을 자매들도 공포에 질려서 막내를 외면하고 도망가고만 있었다. 갈등하던 친실장은 자신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막내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막내의 앞에 도달한 친실장은 두건을 벗어 막내를 그 안에 넣은 뒤, 꽉 붙잡으라는 말과 함께 다시 정신없이 달렸다.
가까워진 인간의 발소리에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친실장의 눈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보였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자들이 다시 뭉쳐서 자신의 뒤에 쫒아오고 있었다. 빨리 흩어지라고 팔 대신 머리로 가리켜도, 자들은 울면서 마마를 부르면서 쫒아올 뿐 흩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아까 저멀리 있던 인간들은 어느새 멀지 않은 곳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친실장에겐 더 이상의 선택권이 없었다. 친실장은 자들을 외면하고 계속해서 달렸다.
살려달라고, 두고가지 말라고 울부짖던 자들의 외침이 곧 자신을 버린 마마에 대한 증오서린 저주로, 그리고 곧 사그라드는 갸날픈 단말마로 사라지는 소리를 두 귀로 똑똑히 들으며 친실장은 달려야 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계속 달렸다.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쫒아오는 인간의 발소리가 돌연 들리지 않았다. 달리면서 뒤를 흘끔 보니 인간은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 눈 앞에 나타난 수풀에 뛰어들어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살피는 친실장에게 인간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 안 쫒아가셔도 되요? 저렇게 머리 돌아가는 녀석은 놓치면 나중에 잡기 귀찮을텐데요? "
" 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어차피 우린 아마추어잖냐? 열심히 구제를 했으나 놓쳐버린 몇마리가 있었다. 거 말 되는거 같지? "
" 아닌것 같은데요? 오히려 일을 얼마나 대충했냐고 징계를 내리겠다고 길길이 날뛸거 같은데요? "
" 아니, 좀 생각을 해봐. 애시당초에 망할 놈들이 버린 사육실장이 인근 휴게소에서 걸어와서 정착한 곳이라며? 지금도 심심하면 유기되는 실장석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뉴스가 뜨잖냐. 어차피 우리가 기를 써서 구제해도 금방 다른 놈들이 와서 정착할거라고. "
" 그러니까 차라리 대충하자. 대충하고 왜 구제했는데도 엉망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아마추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고, 그러니까 다음번부터는 전문적인 구제업체를 부르라고 그렇게 말하자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미리 말 해놓을게. 아니, 애시당초에 추가예산이 아직 배정 안됬는데 구제는 당장 필요하니까 직원들보고 휴일에 나와서 하라는게 말이 되냐? "
계속 불만을 토로하는 인간을 난감하게 바라보던 다른 인간이 입을 열었다.
" 대충하시더라도 슬슬 움직여야 되지 않을까요? 저희가 잡은건 큰 놈 한마리랑 새끼 몇마리 밖에 안되니까요. "
" 네네 알겠습니다. 참 고지식하다니까. 그나저나 쟤도 참 불쌍하네. 새끼가 울지만 않았으면 우리한테 들키지도 않았을꺼아냐? "
" 뭐 그건 그렇죠. 근데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죽이는 작은 빌라만한 괴물이 있다면 누구라도 비명을 지르고도 남지 않을까요? "
" 그거 말 되네. 그럼 그냥 운 없던 실장석이라고 하자. 어미가 소리지르라고 시키진 않았을꺼 아냐? 한놈 때문에 줄초상 난거지. "
멀어지는 인간의 발소리에도 친실장은 그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안전하게 숨기 위해 친실장이 움직인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 날, 공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냉혹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극히 일부의 '들실장' 이었다. 소중한 가족을 버려서라도 필사적으로 도망간 그들만은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들 중 자가 남아 있는 실장석은 친실장이 유일했다.
공원은 그렇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살아남은 실장석들은 그들의 모친과는 달리 다른 동족을 해치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는 완벽한 들실장이었지만, 공원 실장석의 거의 전부가 박멸되어 자원이 풍족해진 관계로 당분간은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친실장은 기뻐할 수 없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막내, 그 아수라장 속에서 간신히 살릴 수 있었던 유일한 자는 자매들이 무참히 도살당한 그날을 잊지 못했다. 친실장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약했던 몸은 점차 쇠약해져갔다.
결국 밖에 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에 막내는 그리운 자매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혼자가 된 친실장은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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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음식을 가지고 집에 돌아온 친실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문이 열려있는 골판지였다.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교육이 부족한 자들이 그만 다른 성체실장의 꾀임에 넘어가 문을 열고야 만 것이다.
내부는 참담했다. 겨우내 먹고도 남아 있던 보존식과 집에 차곡차곡 넣어논 가재도구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친실장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보존식도, 가재도구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라도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자들의 온기를 느끼며, 친실장은 보검을 손에 쥐고 자들의 냄새를 쫒았다.
서둘러 냄새를 쫒아온 친실장은 이내 어느 골판지의 앞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체력를 회복하던 친실장은 골판지의 문을 슬쩍 밀어서 틈 사이로 내부를 살폈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은 듯 하였다. 저기 울고 있는 독라엄지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포대기는 삼녀 엄지가 애지중지하던 막내 우지챠의 포대기가 분명하였고, 애교를 부리며 친실장의 피로를 풀어주려고 항상 노력하던 장녀는 발 밑에 쌓인 우지챠 몇마리의 시체 위에 말라비틀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으며, 집에 쳐들어온 독라자실장들을 분투 끝에 몰아냈던 용감한 차녀는 회색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다른 자실장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낙담하는 친실장의 귀에 순간 찢어질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자를 뜯어먹으며 포식하고 있는 자실장의 반대편에는 자들을 꾀어 문을 열게 한 성체실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성체실장의 억센 손에 붙잡혀 비명을 지르는 삼녀가 있었다. 입을 천천히 벌리며 팔을 자신쪽으로 굽히는 성체실장의 행동에 삼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미친듯이 팔을 두드렸으나 성체실장의 비웃음만을 살 뿐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비명을 지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던 삼녀의 시선이 순간 틈새로 내부를 살피는 친실장의 눈과 마주쳤다.
살 수 있다는 희망에 환해진 얼굴로 두 팔을 친실장쪽으로 뻗는 엄지. 친실장이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을 때, 두 눈이 반짝거리던 엄지의 상반신은 원수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친실장이 정신을 차렸을 때, 원수는 이미 팔 하나만 달려 있는 달마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본능이 이끈 결과를 잠시 바라보던 친실장은 묵묵히 두 손을 놀려 원수를 독라로 만들었다. 패배의 대가에 절규하는 원수의 울부짖음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무적인 마마의 비참한 몰락에,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강대한 습격자의 모습에 벌벌 떠는 원수의 자들이 친실장의 눈에 들어왔다.
자들은 결국 단 한마리도 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새로운 자를 낳기에는 늦지 않은 시기였다. 자들이 건강하게 태어나기 위한 영양분이 필요함을 상기한 친실장은 원수의 자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희생당한 자들을 위한 무자비한 복수의 의식이며, 태어날 자들을 위한 양분이었다.
강제로 끌려와서 한 마리씩 친실장의 입에 들어가 꼭꼭 씹히는 자들을 보면서도, 이미 저항할 방법을 상실한 원수는 그저 피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친실장이 독라엄지를 집어들자, 독라엄지는 미친듯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도움을 바라며 애타게 마마를 부르는 독라엄지의 모습. 그 순간 친실장의 뇌리에 자신의 눈 앞에서 희생된 삼녀의 최후가 떠올랐다.
친실장이 힘 없이 팔을 아래로 내려 엄지를 내려주자, 독라엄지는 친실장에게서 달아나 원수에게로 달려갔다.
이전까지 없던 모성애가 발현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뿐인 자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가.
엄지를 그렇게나 냉대하던 과거는 까맣게 잊은 듯이 원수는 단 하나 남은 팔로 힘겹게 엄지를 품에 끌어안고 친실장을 위협했다.
그 모습을 본 친실장은 맥이 풀렸다. 피해자는 자신인데, 자들을 볼 수 없는 건 자신인데 어째서 저들이 피해자인 척 행세를 하는가.
원수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엄지를 본 친실장은 가슴이 아파왔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왔다면 자들이 저렇게 자신의 품에 안겨 있을텐데...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들은 죽는 순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분명히 자신이 있었다. 마마의 가르침대로 분충을 걸러내고 착한 자들을 정성을 다해서 기르면 독립시킬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마치 운명이 친실장의 일가를 시기하듯이 단 한마리의 자도 독립시키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자, 아직 죽고싶지 않다고 벌벌 떨던 자, 다가오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던 자.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간 모든 자들의 마지막 모습,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진 그 낙인들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아 있던 것을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전의 욱신거림은 친실장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마 다음번이 자를 낳을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얻은 결과를 보니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든다. 과연 그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마마의 보호를 받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인간의 눈치를 봐야했던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때에는 여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서 가족이 함께 물로 개운하게 씻을 여유가 있었다.
길러달라는 마음을 품고 사람들의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다른 오바상의 가족들의 엉성한 몸짓을 보고도 인간들이 화를 내지 않고 지켜봐줬던 때가 있었다. 지나가는 오바상의 가족과 마주쳐도 서로 인사를 나누며 평범하게 헤어지는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공원 밖은 너무 위험하니 결코 떠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마마의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어째서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스스로도 힘겹게 살아가는 공원에서 자들이 무사히 독립하길 바랬다니...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었다.
지금 자신이 또 주저앉는다면 마지막 자들은, 아니 설령 자신에게 기회가 더 있었더라도 자들이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진정 최선을 다할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걸 왜 이제서야 간신히 깨달은 것일까.
그러니 떠나자. 이 지옥에서. 추억과 슬픈 기억이 공존하는 이 괴로운 장소로부터.
아무 쓸모도 없는 위협을 계속하는 원수를 무시하고, 친실장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닐봉지를 챙겼다.
그리고는 원수가 자신의 집에서 약탈해온 보존식을 봉지의 아래에, 가재도구들은 그 위에 담은 채로 몸을 돌렸다.
멍하니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원수와 엄지의 시선을 무시하고, 친실장은 집 밖으로 나갔다.
친실장은 걸음을 옮겼다. 원수의 집이 저 멀리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활짝 열린 채 주인을 맞이하는 집도 지나쳐서 계속 걸어갔다.
공원의 입구에 도착한 친실장은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기원이자 전부였던 장소를 떠나는 여정의 발걸음을 디뎠다.
공원을 떠나는 것, 모든 원사육실장이 바랬던, 그러나 아무도 실현하지 못했던 목표를 친실장은 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곧 왜 마마가, 왜 그들이 떠나지 못하고 발이 묶였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길은 끝이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길이 끝 없이 펼쳐져 있었다. 몸을 숨기고 잠을 청하는 일을 반복하며 친실장은 여정을 계속했다.
공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위험도 가득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있는 인간보다도 거대한 물체. 그런 물체가 수도 없이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나 큰 위협이었던 야옹씨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끌고 오던 멍멍씨도 잔뜩 보였다. 그들의 추적을 피해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야 했다. 그들의 추적은 단지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 진심으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많이 보였다. 자실장이던 시절에는 공원에 찾아와서 먹을 것을 나눠주던 인간들, 그러나 이미 친실장의 뇌리에는 오바상과 자들을 무참히 죽이던 무시무시한 하얀악마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 위로 겹쳤다.
최대한 조심하며 인간들을 피해가는 친실장이었지만, 공원의 동족들보다도 훨씬 많은 인간들을 전부 피해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간혹 마주치는 인간들의 시선에는 친실장의 가슴을 후벼파는 경멸과 혐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때로는 친실장을 쫒아오는 인간들도 있었다. 심심해서, 더러운 들실장이 돌아다녀서, 집에 침입하려는 분충일거 같아서. 다양한 이유로 친실장을 쫒은 인간들. 몇몇은 기어코 친실장을 따라잡아 발로 뻥 걷어차는데 성공했다.
악의 어린 행동에 휘말릴 때마다, 친실장은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고통과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꼼짝없이 수풀에 숨어야 했다.
인간을 피해야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을 피해야만 한다. 그 두려움과 공포에 지친 몸을 끌며 힘든 여정을 계속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오랜 여정의 끝에 산에 도착한 친실장은 마침내 깨달았다. 어딜 가도 인간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대신 인간의 손길이 적게 닿은 장소를 목표로 잡았다. 마침 발길이 닿은 산은 인간이 거의 찾지 않는 장소이니 안성맞춤이었다.
만약 인간들이 특정 시기에 몰려 온다는 것을 친실장이 알았다면 다른곳으로 떠났을 것이나, 당시의 친실장은 알지 못했다.
힘든 여정 끝에 도착한 낯선 환경은 친실장에게 큰 도전이었다. 음식을 모으는 방법도, 집을 구하는 방법도 처음부터 가르쳐주는 이 없이 몸으로 부딪히며 하나하나 배워야 했다. 마마의 가르침을 받던 자실장인 시절보다 더 열심히 숙지했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포식자에게 쫒겨 집을 여러번 옮기기도, 처음 보는 것을 먹었다가 배탈이 나 몇일을 고생하기도 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 끝에 친실장은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친실장은 그렇게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봄이 오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친실장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 기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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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실장은 친실장이 기르고 있는 유일한 자였다.
올해 봄, 마지막 출산을 시도한 친실장은 두 마리의 자실장과 한 마리의 엄지실장을 낳았다.
어미가 준비해둔 음식과 젖을 먹고 빵빵해진 배를 문지르며 잠든 자들을 보며, 이 자들은 꼭 독립시키겠다고 친실장은 다짐했다.
친실장은 차별이 없었다. 엄지도 자실장도 똑같은 양의 먹이를 주고, 똑같이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친실장은 엄격했다. 공원에서 죽었던 자들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친실장은 단 한 순간의 실수로 자를 잃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를 사랑하는 만큼 엄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만은 달라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호기심이 가득한 자들을 집 안에만 머무르도록 주의를 주는 일은 친실장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자실장들은 친실장의 말을 잘 따랐다. 그들은 친실장이 얼마나 자신들을 아끼고 걱정하는지를 이해하고 마음속 욕망을 억눌렀다.
그러나 막내 엄지는 친실장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친실장의 낳은 대부분의 자들처럼 엄지도 똑똑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똑똑함은 어디까지나 엄지실장의 기준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엄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마가 말한 집 외부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위험과 포식자들의 이야기. 그건 단지 외출을 막기 위한 거짓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언니들은 엄지와 잘 놀아 주었지만, 엄지는 그 이상을 원했다. 어둡고 축축한 집보다는 밝고 해님과 꽃씨의 냄새로 가득한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본능에 이끌려 언니들의 만류에도 밖에 나가기 일쑤였다.
만약 친실장이 자실장 태생이 아니라 엄지 태생이었다면, 혹은 엄지가 돌볼 저실장이 단 한 마리라도 있었다면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실장 태생인 친실장이 엄지의 심리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고, 거칠고 힘든 삶에 마모되어 온 약해진 몸으로는 단 세 마리의 자를 낳은 것도 버거웠다. 결국 엄지를 집 안에 붙잡아 둘 환경이 아니었기에 엄지는 늘 집 바깥으로 기어나갔다.
친실장이 아무리 주의를 주고 혼을 내도, 엄지는 자신의 본능을 이길 수 없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수집을 마치고 돌아온 친실장은 홀로 굴 밖에 나와 놀고 있는 엄지를 발견했다.
자신을 보고 달려와 안아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엄지를 무뚝뚝하게 바라보던 친실장은 한 팔로 엄지를 안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의 저녁은 푸짐했다. 자들에겐 갓 태어났을 때 이후로 이렇게 배불리 먹은 일은 처음이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손으로 감싸며 누워 있는 자들을 복잡한 눈으로 보던 친실장은 엄지를 불렀다.
어떤 자보다도 가족의 애정을 갈구하는 게 엄지실장의 본능. 끙끙거리며 일어난 엄지는 친실장에게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엄지는 언니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친실장의 품에 안겨 있었다. 친실장은 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애정이 어린 손길에 취해 눈을 감고 있는 엄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머리를 움켜쥐더니 옆으로 돌린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날, 친실장은 사랑하는 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귀여운 막내가 사랑하는 마마의 손에 죽어 커다란 충격을 받은 자매에게 친실장이 뒷짐을 지며 말했다.
엄지가 바깥에서 돌아다니면 포식자에게 죽을 위험이 클뿐더러, 집의 위치를 노출해 다른 가족들까지 위험하게 만들기에 죽였다고 담담히 말하는 친실장. 슬펐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자매들도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짧게 덧붙였다.
올바른 일이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들은 그 선택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고, 산에서 자라 공원에서의 삶을 몰랐다.
공원에 사는 실장석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넘겨야 했다. 고작 한 마리의 자의 잘못으로 일가 전체가 실각당하는 일을 수없이 봐왔다. 그러니 아무리 어리고 착한 자라도 가족을 위험하게 하는 행동을 하면 분충이라는 것을, 다른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분충은 반드시 솎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산은 공원이 아니었다. 느리고 약한 동족들보다도 훨씬 강한 포식자들이 있었지만, 별 사소한 이유로도 죽음과 마주하는 가시밭길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느낌을 자매들은 결코 알 수 없었다.
공원에서 으레 행했던 솎아내기는 자매에겐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 것이었다.
동생을 잃어 슬퍼하는 와중에 장녀는 생각했다. 엄지는 마마의 말을 어기고 자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빼고는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반복해서 말로 타일렀다면 언젠가는 자신들이 집에 얌전히 있듯이 충분히 그 마음을 억누를 수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엄지를 죽여서 슬프다는 마마는 그렇게나 담담하게 말하는 것일까?
하나뿐인 동생을 아끼던 차녀는 이해를 바라는 친실장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 막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친실장이 더는 사랑하는 마마가 아니라 끔찍한 괴물로 보였다.
달라진 환경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친실장의 실수는 가족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을 만들었다.
그날 이후, 차녀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줬을 때는 ' 막내도 같이 먹었으면 좋을 텐데 ', 친실장이 시간을 내서 자들과 놀아줄 때도 ' 막내도 같이 놀았으면 더 기쁠 텐데' 라고 말하며 궁시렁거렸다.
불량한 차녀의 태도에 친실장은 가슴이 아팠다. 은연중에 자신을 원망하는 차녀의 말에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자신이 자였을 때 마마가 했었던 일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듯이, 언젠가는 차녀도 그 이유를 알게 될 거라는 믿음은 계속되는 차녀의 토 달기에 서서히 옅어졌다.
불량한 태도를 지적하며 주의를 줘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가는 차녀의 반복되는 행동.
친실장은 차녀도 언젠가 솎아내야 할 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어느덧 엄지가 죽고 계절이 한번 바뀐 어느 날이었다.
그날, 친실장은 외부에 도사리는 포식자들에 대한 교육을, 일가실각의 위기에 처했을 때의 행동요령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포식자를 만났을 때, 공격당하는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남은 가족들은 전부 도망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장녀가 질문하였다. 보호자인 마마가 공격당하면 어떡하냐고. 친실장은 주저하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다.
이번엔 차녀가 물어보았다. 만약 마마가 아닌 자가 공격당하면 어떡하냐고. 친실장은 같은 대답을 하였다.
마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를 보호해야 하지 않냐고 따지는 차녀의 말에 이길 수 없는 적에 저항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니 자의 죽음이 가슴이 아프더라도 다른 자들이라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친실장이 대답해줬다.
논쟁은 그것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친실장이 현실적인 대답을 하여도 마마의 책임을 강조하며 감성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차녀.
또다시 시작된 투정을 받아주던 친실장도 계속되는 차녀의 트집에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갈수록 분위기가 험해지는 모녀의 사이에 낀 장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점점 격해지던 차녀의 발언은 결국 선을 넘고야 말았다.
마마는 극복할 수 없는 위기를 마주치면 소중하다고 말했던 자들을 미끼로 던져버리고 도망갈 거냐고, 어차피 다시 낳으면 되는 자들은 전부 내팽개치고 혼자 달아나 새로 낳은 자들에게도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는 사탕발림을 말하며 다시 키울 거냐고 물었다.
그 모욕적인 말에 친실장의 뇌리에 하얀악마에게 죽어가며 저주를 퍼붓던 자들, 막내라도 구하기 위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불가항력이었다. 잘 도망가던 자들은 막내를 챙기는 친실장의 모습에 한곳으로 모였고, 모두를 챙기기에 인간은 너무 빨랐다.
도가 지나친 차녀의 말에 가슴 아픈 과거를 떠올린 친실장은 표정이 굳어진 채 그런 무례한 말은 용서할 수 없으니 당장 사과하라고 말했지만, 차녀는 도리어 정곡을 찔렀냐고 이죽거렸다.
엄지가 죽어 차녀가 느꼈을 상실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태까지는 별다른 체벌 없이 넘겼지만 더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잘못이 없는데도 납득하지 못할 이유로 적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분충이 될 징조였다. 이 이상 방치 시켜 둔다면 이미 낌새가 보이는 차녀는 물론 장녀마저도 저런 생각에 물들지 몰랐다. 엄한 훈육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며 친실장은 일어나 차녀에게 다가갔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낀 차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슬리는 짓을 했으니 자신도 솎아낼 것이냐고.
굴 안에 정적이 흘렀다. 차녀에게 다가가던 친실장은 행동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엇나가는 차녀의 모습에 언젠가 솎아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한 적 있으나 그 말을 직접, 그것도 당사자인 차녀에게 듣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말로 자신은 마지막 자들 중 하나를 또 솎아내야 하는가?
친실장이 멈춘 사이에 자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친실장은 더는 마마가 아니라고 외친 차녀는 굴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친실장은 차녀가 나간 굴의 출입구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차녀가 나가버린 굴 밖을 보던 장녀는 얼른 차녀를 쫓아가야 된다며 친실장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 말에 제정신이 든 친실장은 장녀의 애원을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도 따라가겠다는 장녀에게 절대 따라와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나무라며 보검을 챙기는 친실장.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차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굴 밖으로 조심히 고개를 내밀어 살피는 친실장은 급박한 순간이었기에 장녀가 자신의 말을 어기고 뒤에 조용히 따라오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의 동향에 집중했다. 귀 기울여 차녀의 비명이 들린 장소를 찾던 친실장의 귀에 날개짓 소리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으로 다가가던 친실장의 눈에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이 들어왔다. 모녀는 조용히 그 장소로 이동했다.
하늘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빙빙 맴돌던 곳, 그 지표면에는 집을 뛰쳐나갔던 차녀가 있었다.
네 발로 엎드려 위협하는 차녀의 곁을 까마귀가 스쳐 지나간다. 그 풍압에 땅을 뒹구는 차녀를 비웃듯이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항하기 위해 차녀는 투분까지 하며 발악했지만 헛수고였다.
까마귀는 계속해서 차녀를 희롱했다. 차녀의 필사적인 저항은 모두 무의미했다. 차녀는 점점 무기력함과 공포에 잠식되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친실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까마귀는 친실장에 못지않게 똑똑하고 재빠르며 강했다. 좁은 장소에서 대적하는 것이라면 한 마리는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 장소는 사방이 훤히 뚫린 장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기 좋은 불리한 위치였다.
싸움은커녕 차녀를 구해서 도망치는 것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차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비명에 가버린 자들처럼, 또다시 눈앞에서 자가 희생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보기 싫었다.
그러나 차녀를 구하면 자신은 죽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남겨진 자들이 무사히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약한 동족이나 습격하는 동족들의 위협은 없지만, 산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다. 아니, 힘으로 극복할 수 없기에 더 위험했다.
경험이 있다면 산에서 사는 게 더 안전할지 모르지만, 아직 자들은 어렸다. 기본적인 교육은 부지런히 했으나 이론으로 배운 지식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데리고 돌아다니기엔 너무 연약했다. 같이 돌아다니는 일은 아직도 요원한 일이었다.
확신이 들지 않는다. 설령 차녀를 구하더라도, 자신이 죽는다면 아무 잘못도 없는 장녀마저 차녀와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
자들이 자신 없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차녀가 장녀의 목숨도 같이 걸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또다시 자들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했지만 서둘러야 했다. 언제라도 놀이에 질린 까마귀가 차녀의 목숨을 앗아갈지 몰랐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리를 팽팽 돌리던 친실장은 문득 머리를 돌려 장녀를 쳐다봤다.
자신이 따라오는 것을 친실장에게 들킨 장녀는 깜짝 놀랐으나, 차녀를 구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마마의 모습에 동생을 버리기로 결정했다고 지레짐작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친실장의 두 눈이 흔들렸다. 반드시 독립시키겠다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던 소중한 자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친실장이 장녀에게 위험하니 먼저 집으로 뛰어가라고 말하려던 때, 친실장의 코가 낯선 냄새를 감지했다.
익숙한 냄새였다. 공원에서 맡았던 그 냄새와 흡사한 냄새, 이건 분명히 고양이의 냄새였다. 친실장의 안색이 대번에 새하얘졌다.
이길 수 없다. 이전에 본 산의 고양이는 자식들에게 슬픈일을 했던 공원의 폭군보다도 훨씬 날래고 강해 보였다.
망설이지 말고 바로 움직였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차녀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짙은 후회감이 밀려왔으나 이젠 정말 끝이었다.
고양이라면 집 안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 오로지 고양이가 집을 발견하지 못하는 천운이 따라줘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친실장은 옆구리에 장녀를 끼고 바동거리는 장녀의 입을 손으로 막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조용히 돌아가면서도 못 버린 미련 때문에 차마 차녀의 모습에선 시선을 떼지 못하던 친실장은 때마침 고양이의 소리에 두려워하며 사방을 둘러보던 차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두 모녀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절체절명인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마마. 마마가 지금 자신을 떠나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막내를 죽인 마마가 미웠어요, 무서웠어요. 난 정말 나쁜 아이였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두고 가지 말아요. 제발 날 버리지 말아요. 겁에 질린 차녀가 필사적으로 외칠수록, 고양이의 냄새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급해진 친실장은 전속력으로 몸을 날렸다. 이제 망설임은 사치였다. 결국 자신을 버리고 장녀를 옆구리에 끼고 사라지는 친실장의 모습을 본 차녀의 눈에 절망이 번졌다.
수풀을 헤치며 날듯이 뛰어온 친실장은 집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몸의 곳곳에 상처 입었지만, 신음을 내뱉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친실장이 운치굴 뒤쪽의 바닥을 가리고 있던 나무껍질을 치우자, 친실장이 엎드려도 될 만큼의 커다란 구덩이가 드러났다.
본래는 구덩이만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곳은 굴 밖으로 탈출하는 비상통로가 있어야 할 장소였다.
그러나 포식자들이 거의 오지 않는 장소를 찾은 건 좋았지만 지반이 너무 단단했고, 이미 노쇠한 몸으로 자를 부양하기도 벅찬 친실장은 고작 구덩이 옆에 자실장 한둘이 몸을 웅크릴 정도의 공간밖에 만들지 못했다.
만들다 만 통로에 장녀를 밀어 넣은 친실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뒤 아까 치웠던 나무껍질로 다시 구덩이 위를 덮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친실장은 손에 보검을 쥔 채로 쪼그려 앉아 밖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까마귀의 정신 사나운 날개짓 소리와 울음소리, 그사이에 낀 차녀의 비명.
까마귀의 소리가 사라지자 점차 줄어드는 차녀의 비명과 고양이가 무언가를 뜯어 먹는 소리만이 들렸다. 친실장의 몸이 떨렸다.
차녀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고양이는 굴의 근처까지 와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친실장은 벌벌 떠는 장녀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보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떠나지 않던 고양이의 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구덩이 속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모녀는 소리죽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밤중이 다 돼서야 모녀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무껍질을 치우고 굴 밖으로 나가 주위를 한참 동안 살피던 친실장은 굴로 돌아와 장녀를 구덩이에서 꺼냈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는 친실장의 뒤에서 장녀가 울먹이며 물었다. 그렇게 차녀를 버렸어야 했냐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정말로 자신들을 사랑하는 게 맞냐고, 이럴 거면 왜 자신들을 낳았냐고.
멈칫하던 친실장은 뒤돌아본 그 순간, 장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언제나 엄격했던 친실장. 자들과 놀아줄 때도,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무덤덤하던 친실장. 동생들이 죽었을 때조차 담담했던 친실장의 얼굴에서 짙은 색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황하는 장녀를 와락 끌어안은 친실장은 울며 말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과거의 이야기, 가슴에 담아둔 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장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친실장의 고향 공원의 이야기. 친실장이 자였을 때의 이야기. 결코 돌아오지 않던 행복했던 과거의 이야기, 친실장이 마마와 이별했던 때의 이야기.
장녀 이전에 낳았다던 많은 언니와의 추억. 그 언니들이 맞이한 비참한 최후. 자들을 구할 수 없었던 친실장이 느꼈던 무력함.
더는 자를 낳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암담함. 태어날 자를 위해서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그때의 두려움.
행복하게 잠든 마지막 자들을 보며 이 자들만큼은 언니들의 뒤를 따르지 않게 하겠다던, 결국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만 그 맹세.
자꾸 밖으로 나가는 엄지를 보며 타들어 갔던 가슴. 다른 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마마의 품에 안겨서 행복해하는 엄지의 머리를 돌리던 손에 느껴진 그 불쾌한 감촉, 자들 앞에서 필사적으로 감춰야 했던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
엇나가는 차녀를 보며 아팠던 마음. 자신의 입으로 죽음을 담는 차녀의 말에 느낀 그 충격. 제발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차녀를 두고 와야 했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그 아픔, 절망으로 가득했던 차녀의 마지막 모습.
너만이라도 살려야 했다고. 자신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덧없이 죽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마음에 담고만 있었던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은 친실장은 품 안의 장녀를 껴안으며 통곡했다. 친실장의 속마음을 인제야 알게 된 장녀도 친실장의 품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모녀는 서로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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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굴을 나가는 친실장을 붙잡은 장녀는 이제부터는 자신도 마마를 따라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자신을 따라다니기엔 이르다고 생각하는친실장이었지만, 이제는 장녀와 같이 굴 안에 같이 있으며 외로움을 달래줄 자매들도 없었고, 만약 자신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남겨진 장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채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친실장은 장녀의 청을 승낙했다.
비록 너무나 슬픈 일들이었지만 그날 이후 서로에게 진심을 연 친실장과 장녀에게는 꿈과 같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물론 항상 기쁜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가끔은 힘든 일도 있었고, 때로는 생명조차 위험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서로를 의지하는 모녀는 그 모든 난관을 함께 극복했다. 야생의 실장석에게 가장 큰 위기인 겨울도 모녀는 무사히 보냈다.
시간은 계속 흘러 마침내 성체실장이 된 장녀가 독립하는 날이 왔다.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장녀의 새 출발을 축복해주는듯 하였다.
정말로 감개무량하였다. 자신의 생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결실을 인제야 볼 수 있었다.
친실장은 뒤를 돌아 장녀를 보았다. 자신을 따라다니며 수도 없이 산을 타서 단련된 육체, 공원의 동족들과는 다르게 탄탄한 장녀의 몸에 친실장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너무나 소중한 자식을 위해, 이전에 주웠던 멀쩡한 비닐봉지와 산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보검을 장녀에게 건내주는 친실장.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억누른 장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팔에 봉지를 걸어주는 친실장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팔을 벌려 포옹하는 모녀. 이제 이별의 때가 왔다. 그러나 포옹을 마친 장녀는 바로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장녀에게 다가간 친실장은 막 성체가 되었음에도 노년인 자신보다도 살짝 큰 장녀의 머리에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머리를 살짝 앞으로 숙인 장녀는 어렸을 때와 다르지 않은 마마의 따스한 손길을 즐겼다. 쓰다듬기를 마치고 시선이 마주친 친실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녀는 다시 한번 힘차게 포옹한 뒤에 등을 돌려 씩씩하게 걸어갔다.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떠나는 자랑스러운 장녀를 바라보는 친실장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씩씩하게 집을 떠난 장녀는 수풀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 동안 수풀을 헤집던 장녀는 곧 수풀 사이에 있는 좁은 공터에 도착했다.
친실장과 함께 다니던 그 때부터 눈여겨봤던 장소. 흙이 지나치게 단단하지도 않았고, 주위에 큰 나무도 없어서 포식자로부터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을 가능성도 없는 장소였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수풀은 포식자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으로부터 굴을 가려줄 것이다.
미리 봉지에 넣어놨던 돌을 꺼낸 장녀는 흙을 파기 시작했다.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땀을 뻘뻘 흘리며 기본적인 집의 구조를 완성한 장녀는 문득 친실장이 보고 싶었다.
불과 며칠에 불과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못 본 거 같았다. 굴을 나선 장녀는 기억을 따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을 찾아갔다.
친실장의 집에 도착한 장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 자매들과의 추억, 마마와의 추억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선물로 가져온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장녀는 마마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친실장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굴 안으로 들어간 장녀는 잠시 후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굴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녀가 집을 떠날 때도 남아있던 보존식도, 너무 낡고 해져서 바닥에 깔개로 쓰던 비닐봉지도, 우연히 인간이 버리고 간 것을 주워서 때로는 물을 부어 더러워진 몸을 안전하게 씻게 해준 그릇도, 마찬가지로 초겨울에 인간이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얼지 않도록 마마와 함께 껴안고 자서 체온으로 데웠던 깨끗한 물이 가득한 물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친실장은 사라졌다.
장녀는 사랑하는 친실장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산을 헤집었다. 마마와 함께 들렸던 많은 장소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집의 공사도, 식량 수집도 모두 중지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독립의 선물로 받은 보존식으로 배를 채운 뒤 굴 밖으로 나가 더는돌아다니기 힘든 밤이 될 때까지, 온 산을 헤집으며 친실장을 찾던 장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굴로 돌아와 잠을 청하곤 했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육성으로 마마를 부르며 찾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녀를 반기는 것은 친실장이 아니라 포식자들뿐이었다.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다. 온 산을 들쑤셨다. 그러나 장녀는 끝내 친실장을 찾을 수 없었다.
사라진 친실장을 찾아 며칠 동안 미친 듯이 산을 헤집던 장녀는 못내 인정해야 했다. 다시는 친실장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사라진 친실장의 수색을 포기한 장녀는 마마를 찾느라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일들을 마무리했다. 굴을 더 크게 파고 탈출용 통로와 운치굴의 공사를 완성했으며, 생활에 필요한 식량과 물도 부족하지 않게 구했다.
집에 머무르며 일을 하는 사이, 다시 온전한 몸 상태를 회복한 장녀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눈여겨봤던 꽃을 꺾어서 집 안으로 들어간 장녀가 잠시 후 굴 밖으로 나왔을 때, 장녀의 두 눈은 녹색으로 변해있었다.
장녀는 굴 안에 두문불출하며, 생애 처음 가지는 자들과의 행복한 만남을 상상하며 배를 쓰다듬으며 태교에 열중했다.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출산의 때가 온 것을 깨달은 장녀 흙을 파 구덩이를 만들어 그 바닥에 나뭇잎을 깔고 귀중한 물을 부었다.
모든 준비가 끝낸 장녀는 옷을 다 벗고 구덩이의 경계에 걸터앉아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새로운 생명이 세상의 빛을 봤다.
첫 출산을 마치고 자신의 품에서 젖을 빠는 자들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장녀. 그렇게 장녀는 친실장이 되었다.
원만했다. 분충이 된 자들을 솎아내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다지 큰 위험 없이 자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마마로부터 배운 지식과 경험담, 스스로 쌓은 경험과 젊은 패기를 바탕으로 하는 부지런함으로 다섯이나 되는 자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이미 겨울이 한창 진행되고 있음에도, 집안에 쌓인 보존식은 아직 넉넉했다. 자들이 무사히 봄을 맞이하는 것은 명백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었다. 그랬던 친실장은 오늘 생애 처음 겪어보는 어려움에 마주치게 되었다.
" 테에... 테치? 테치 테치! "
" 데스. 데스 데스 데스! "
" 테치? 테치.... 테츄 테츙♡ "
며칠 전부터 산에 또다시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남자에게 들었던 때가 온 것이 분명했다.
인간이 너무 많아 행동에 제약이 걸렸지만, 어차피 겨울이었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었다.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음식, 인간의 음식이 원인이었다. 그 조리된 음식에서 풍기는 기름진 냄새를 맡은 오녀가 먹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친실장이 산에서 자랐듯이, 자들도 평생을 산에서 보냈다. 겨울철에 음식을 수집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기에, 자들은 가을까지 부지런히 모은 맛 없는 보존식을 먹으며 긴 겨울을 버텨야 했다.
경험이 많은 친실장의 마마였다면 자들에게 분식을 시켜서 겨울이 닥치기 전에 입맛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매 없이 홀로 자랐던 친실장과 마마는 두 모녀가 먹기에는 넘칠 정도로 음식을 모았고, 이미 풍족한 상황에서 하나 남은 소중한 자에게 분식을 시키기를 꺼렸던 친실장의 마마는 결국 분식을 시키지 않았다.
이런 지식을 친실장이 스스로 깨달아 터득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 데스! 데스! "
" 테치!.. 테에엥 테에엥 테에엥! "
떼를 써도 친실장이 들어주지 않자 오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다른 자들도 말은 안 했으나 냄새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친실장은 오녀를 따끔하게 혼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자였을 때 단 한 번 먹어본 인간의 음식은 자신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었다. 긴 겨울을 맛없는 보존식을 먹어왔던 자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일 것이다.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흐르는 침을 몰래 닦아내던 차녀와 눈이 마주친 친실장은 마음을 굳혔다.
그 순간, 두 번 다시 인간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마마의 당부가 떠올랐다.
마마의 말은 항상 옳았다. 여태까지 자를 키우면서 마마의 가르침을 따라서 잘못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딱 한 번이라면, 인간을 피해서 가져온다면 괜찮지 않을까? 자신이 힘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가져올 수만 있다면 자들도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바로 행동하기로 결심한 친실장은 외출을 위해 보검과 비닐봉지를 챙긴 뒤 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굴을 나간 친실장의 뒤에서 환호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저은 친실장은 미소지으며 빠른 속도로 집을 떠났다.
아직 겨울임에도 요 몇일 간은 제법 날씨가 풀려서 따뜻했다. 그리고 산에서 자라서 단련된 친실장의 육체는 밖에서도 장시간 돌아다닐 수 있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들어줄 수 없는 자의 부탁은 가볍게 묵살했을 것이다.
탐색은 수월하지 않았다. 많은 인간이 산 곳곳에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들의 눈을 힘겹게 피해서 음식의 냄새를 쫒아가도 아직 떠나지 않은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도로 챙겨서 떠났기 때문에 번번이 허탕을 쳤다.
산 아래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곳에 산 중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의 무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인간들도 많았기에 그 모든 인간을 피해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가 아무리 소중해도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했다.
슬슬 차가워지는 몸에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친실장이었으나, 빈손으로 돌아온 자신에게 실망한 자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친실장은 발걸음을 부지런히 놀렸다.
산에 올라가고 있는 친실장의 앞에 갑자기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실장이 급히 몸을 숨기자, 멀지 않은 장소에서 나타난 인간은 쉴 새없이 투덜거리며 산 아래로 사라졌다. 친실장의 곁을 스쳐 가는 그 인간의 손에서는 묘하게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인간이 사라질때까지 기다리던 친실장의 코가 돌연 가까운 장소의 기름진 냄새를 감지했다. 인간이 완전히 사라지기가 무섭게, 친실장은 냄새를 쫓아 수풀 속을 헤치며 헐레벌떡 뛰어갔다.
과연 그곳에는 음식이 그대로 있었다. 그 인간은 음식을 그냥 두고 간 것이었다. 정말로 운이 좋은 하루였다.
친실장은 주위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몇 번을 살펴봐도 주위에서 위험은 감지되지 않았다.
안전을 확신한 친실장은 수풀에서 튀어나와서 음식을 서둘러서 봉지에 담았다.
이걸로 자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 행복하게 음식을 먹을 자들을 생각하며 친실장의 가슴도 벅차올랐다.
쌀쌀해진 공기를 빠르게 가르며 산에서 내려가는 친실장의 발걸음은 집을 떠나던 순간보다도 가벼웠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자들이 굴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집에 걸어오는 친실장이 보였다. 자들은 달려가서 친실장을 맞이했다.
굴 안에 들어와 두 손을 비비며 추위에 언 몸을 녹이는 친실장. 자들도 그 작은 손으로 친실장의 차가운 몸을 같이 문질러서 도왔다.
친실장이 저녁을 주기 위해 바닥에 놓은 봉지를 손으로 들어 올리니, 자들도 들어 올려진 봉지로 시선이 따라가는 것을 깨달았다.
친실장이 봉지를 오른쪽으로 옮기자 자들의 시선이 오른쪽을 향했다. 봉지를 왼쪽으로 옮기니 자들의 시선도 봉지를 따라갔다.
귀여운 자들의 행동에 작게 웃음을 흘리는 친실장. 조금 전 자신들의 모습을 뒤늦게 깨달은 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였다.
자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친실장은 느슨하게 묶은 봉지를 풀었다.
생애 처음 먹는 인간의 음식에 귀를 파닥이며 열심히 입으로 밀어 넣는 자들의 모습에 친실장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들에게 공평하게 음식을 분배한 후, 친실장은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보존식을 뒤적거렸다. 추위 속에서 종일 뛰어다녔으니 평소보다 좀 더 먹어야 몸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친실장이 보존식을 먹고 있을 때, 인간의 음식을 먹던 차녀가 쫄래쫄래 다가와 친실장에게 음식을 건넸다.
자들이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친실장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차녀는 꿋꿋하게 음식을 친실장에게 건넸다.
모녀가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나머지 자들도 전부 친실장에게 다가와 음식을 하나씩 내밀었다.
음식을 되돌려 줘도 다시 내미는 자들의 행동에 한숨을 쉰 친실장은 받은 음식을 반으로 쪼개서 반씩 돌려주었다.
자들은 받은 음식을 친실장이 먹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그 자리에 앉아서 돌려받은 음식을 입안에 넣어 오물거렸다.
자신을 생각하는 자들의 마음을 대견하게 생각한 친실장은 손으로 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호화로운 식사를 마친 자들은 트름을 하며 두 다리를 쭉 뻗고 바닥에 앉아 아직 입 안에 맴도는 음식의 맛을 상기하고 있었다.
이제 잠자리에 들자고 버려진 헝겊을 바닥에 까는 친실장. 그러나 자들은 친실장과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번갈아 가며 볼 뿐이었다.
자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는 명확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자들의 어리광을 받아줘도 좋은지 친실장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작 하루였다. 원래는 인간에게 접근조차 해서는 안 되는 것, 오늘의 일은 자들이 독립한 후에도 어린시절의 즐거웠던 추억거리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자들의 응석을 받아줘도 될 것이다. 더욱이 해가 져서 추워진 환경은 포식자들도 돌아다니기 힘든 시간이었다.
자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로 결정했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친실장은 계속 어리광을 부리는 오녀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울상을 짓는 오녀를 뒤로 한 친실장은 비상 탈출구를 덮고 있는 나무껍질을 치우고 구덩이 안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구덩이에서 올라온 친실장이 손에는 투박한 타원형의 나무껍질이 들려 있었다.
친실장이 굴의 입구에 조심스럽게 껍질을 끼우자, 껍질은 큰 오차 없이 굴의 입구를 막았다.
아마 태어난 날 뒤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이면 자가 매 끼니 맛있는 음식을 바랄까 봐, 자가 마음껏 떠들고 놀게 하면 소리를 포착한 포식자의 습격이 있을지도 몰라서. 사랑하는 가족과 늘 함께였지만, 산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늘 욕망의 절제와 인내가 필요했다. 이렇게 즐겁게 식사를 하고 원 없이 놀 수 있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을 절제해왔던 자들은 원 없이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 손뼉을 치며 환호하던 차녀도 어느새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맏이였기 때문에, 동생들을 챙겨야 했기에 누구보다도 자신을 억눌러야 했던 장녀도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자들의 행복한 모습에 친실장도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정말로 오랜만에 가족들이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떠들며 놀 수 있었다.
놀다 지친 자들이 하나씩 누워서 잠들자, 친실장은 잠든 사랑스러운 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모두 잠들어 고요 속에 빠진 굴, 친실장부터 막내 오녀까지 모두 행복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사방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눈을 뜬 친실장은 이내 자신이 알 수 없는 장소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분명히 집 안에서 자들과 함께 자고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자들을 하나씩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친실장은 사라진 자들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에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웠지만, 친실장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앞으로 계속 가야만 한다고 깨달은 친실장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계속 걷던 친실장의 눈앞에 물이 흐르는 강이 나타났다. 걸음을 멈춘 친실장은 난감했다. 안개는 제법 걷혀서 주변의 풍경이 어느 정도 보였지만, 어디를 봐도 돌아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망설이는 사이에 자들이 위험할지 모른다며 용기를 북돋우는 친실장은 눈을 질끈 감고 발을 옮겼다. 예상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뜬 친실장은 물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멍하니 서서 눈을 깜빡이던 친실장은 제정신을 차리고 강을 건너서 자를 찾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을 건넌 그곳에는 넓은 꽃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갖가지 색의 꽃들을 보며 친실장은 넋을 잃었다.
두리번거리며 꽃밭을 가로지르는 친실장. 사방에 피어있는 꽃이 은은한 향기가 뿜어내고 있음에도, 굳이 꽃에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부지런히 꽃밭을 걸어가던 친실장의 눈에 저편에 있는 실장일가의 모습이 보였다.
셋으로 구성된 단란한 가족이었다. 엄지실장과 자실장은 공을 던지며 놀고 있었고, 성체실장이 놀고 있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실장과 공을 주고받으며 놀던 엄지가 순간 자실장의 공을 받아내지 못했다. 공을 놓친 엄지가 공을 쫓아가자, 자실장도 엄지를 쫓아서 저 멀리 가버렸다. 가족을 바라보던 친실장은 왠지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남아있는 성체실장을 향하여 다가갔다. 자들을 보던 성체실장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등을 돌렸다.
틀림없었다. 사라져서 생사를 알 수도 없었던 마마가 분명했다. 친실장은 순식간에 자신의 마마에게 뛰어들어서 강하게 껴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친실장은 마마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마마의 품에서 울었다. 마마는 친실장의 등을 손으로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었냐고,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냐고. 궁금한 점을 계속 묻던 친실장은 자신이 기른 귀여운 자들을 보여주고 싶으니 자신을 따라 함께 가자고 마마에게 권유했지만, 마마는 고개를 저으며 슬픈 눈으로 친실장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마마와 같이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며 친실장은 재차 권했으나 마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의 뒤에서 갑자기 들리는 소중한 자들의 비명에 자신이 헤매던 이유를 자각한 친실장은 일단 자들을 찾은 뒤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떠나가는 친실장을 보고 있는 마마의 곁에는 어느새 공을 주으려고 멀리 갔던 엄지와 자실장이 돌아와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친실장을 슬픈눈으로 바라보던 세 실장석은 등을 돌려 꽃밭의 저편으로 걸어갔다. 곧 짙은 안개가 피어나 그들의 모습을 가려버렸다.
자들의 비명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 온 친실장은 눈앞의 광경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꿈에도 보기 두려운 광경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즐겁게 놀며 잠들었던 자들이 하나같이 게거품을 물며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도와주겠다고 뛰어가려던 친실장은 순간 자신이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끔찍한 복통이 친실장을 덮쳐왔다.
정신이 혼미했다. 모든 사물이 흐릿하고 왜곡되어 보였다. 저기 뒹구는 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리가 팽팽 도는 것 같았다.
갓 태어나서 점막에 쌓여 있을 때보다도 몸이 무거웠다. 방금 전까지 뛰어다녔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친실장이 자신의 고통에 괴로워하던 때, 고통에 신음하며 땅을 뒹굴던 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악몽이었다. 마마가 말했던 무력함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꼼짝도 못 하고 땅바닥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친실장의 앞에서, 고통에 발광하는 자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목이 부어올라 숨을 쉬기 버거워하던 자는 땅에 누워 바동거리며 괴로워하다가 두 손으로 목을 붙잡은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아프게 하는 것을 운치로 배출하려던 자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찢긴 총구에서 분대를 쏟아낸 뒤 앞으로 고꾸라졌다.
앞선 자의 최후를 보고 토하려는 자를 간신히 말린 친실장이었지만, 그 자는 곧 두 눈이 터지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두 눈이 녹아내려 빈 눈구멍에 손을 넣어서 가려움을 해결하려던 자는 한참을 손으로 쑤시다가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중한 자들의 생명이 눈앞에서 사그러져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친실장은 피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닥친 비극에 절망하는 친실장의 귀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며 그 자는 머리를 바닥에 몇번이고 처박았다. 친실장이 그만두라고 말해도 자는 머리를 계속 박았다.
아프다고, 도와달라며 비명 지르는 자에게 도와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친실장. 그러나 말뿐이었다. 친실장은 여전히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고통에 미쳐버린 자가 미친 듯이 달려가 벽에 머리를 박았을 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 자는 벽에 박은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가 미끄러져 내린 길을 적록의 혈흔이 따라가고 있었다.
행복하게 잠들었던 자들은 그렇게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았다. 자들의 끔찍한 죽음을 더는 버틸 수 없던 친실장은 정신을 잃었다.
잠에서 깨어난 친실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이 살짝 찌뿌둥한 것을 말고는 정상이었다. 손도 멀쩡했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꿈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난 친실장은 옆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자들은 옆에서 나란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저 악몽이었던 것 같다. 두 번 다시 꾸기 싫은 끔찍한 악몽. 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굴의 입구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보니 이미 아침을 훌쩍 넘긴 시간인 것 같았다.
아무리 즐거웠어도 그렇지 일어나야 할 시간을 놓치다니... 아직 자신은 마마로서 책임감이 부족한 듯했다.
솔선수범해야 할 자신부터가 늦잠을 잤으니 자들을 혼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오늘만큼은 그냥 부드럽게 넘어가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친실장은 아직 눈을 감고 있는 자들을 하나씩 들어서 핥아 주기 시작했다.
마지막 자를 핥아주고 다른 자들을 보니 여전히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착한 자들이지만 정말 잠꾸러기들이었다.
나중에 마마가 된다면 자들을 먹이기 위해 부지런해야 할 텐데... 곧 독립의 시기가 다가오니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눈 뜨지 않는 자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친실장은 다시 자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핥아주었다. 자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는 자들을 계속 핥아주었다. 그래도 자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떨리는 두 손으로 자들을 잡고 핥아주었다. 그러나 자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다섯번이나 자들을 핥아주고도 다시 두건이 찢어진 오녀를 든 친실장의 떨리는 손이 멈추더니 힘없이 오녀를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잘못이었는데... 그저 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바랐을 뿐인데... 마마의 가르침을 어긴 대가는 너무나 잔혹했다.
의젓한 장녀, 착한 차녀, 똑똑한 삼녀, 부지런한 사녀, 귀여운 오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자들.
그렇게나 기뻤는데, 그렇게나 행복했는데... 손에 쥔 행복은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들은 이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다.
" 오로롱! 오로롱! "
차갑게 식은 자들의 시체를 품 안에 끌어안은 친실장의 통곡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
.
.
.
" 데스우 "
굴을 나서며 친실장은 나가보겠다는 말을 습관처럼 뱉었다.
' 테치~ '
친실장의 뒤에서 자들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친실장은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배웅하는 자들, 그 자들의 모습은 하나씩 흐릿해지며 사라지더니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걸어가면서도 혹시나 하여 몇 번을 뒤돌아도, 역시 자들은 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친실장은 쓸쓸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 "
몇분을 걸어 친실장이 도착한 곳은 수풀 속에 가려진 공터였다. 본래는 비어있어야 할 공터에는 전에는 없던 살짝 튀어나온 흙더미가 생겨 있었다. 수풀이 미처 가리지 못한 햇빛이 그 흙더미의 위를 비추고 있었다.
흙더미의 앞에서 친실장은 한동안 서 있었다. 이 차가운 흙더미 속에 사랑하는 자들이 잠들어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친실장은 차가운 흙더미를 꼭 껴안은 뒤에야 솟아나는 눈물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마마로서 정말 빵점이었다. 자를 지키는 게 마마의 책임일 텐데, 자를 위험해 빠지지 않게 해야 했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혹시나 튀어나온 흙더미가 다른 포식자들의 주의를 끌까 봐집 근처에 묻지 못하고 몇분이나 떨어진 이곳에나 자들을 묻을 수 있었다.
단단하게 얼은 흙더미를 파기 위해서는 물을 부으며 파야 했지만, 자신이 마실 물을 더는 구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에 자들을 간신히 묻을 정도로 얕게 파는 게 고작이었다. 자들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사랑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
차가운 흙 속에서 잠들 자들을 덮어줄 것도 없었다. 자들이 입은 옷을 벗겨서 이불처럼 자들의 위어 덮어주는 게 끝이었다. 한기를 막기 위해서는 헝겊이 필요했다. 엉망진창인 마마는 결국 자들에게 엉망진창인 안식처를 만들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따뜻한 봄이 오면 더 좋은 장소에 묻어주리라 친실장은 생각했다.
슬프게도 봄이 오면 자신은 새로운 자들을 낳을 것이고. 그 자들을 기르다 보면 죽은 자들에게 소홀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 마주쳤던 그 남자가 말했듯이, 잠들어 있는 자들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이 몇번이고 다시 들릴 테니까. 흙더미 속을 꿰뚫어 보듯 한참을 내려보던 친실장은 등을 돌려 공터를 떠났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친실장의 봉지에는 또 다른 물병이 들어있었다.
뜻밖의 행운에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집중하는 친실장의 마음에는 별다른 감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걸음을 걷던 친실장이 무언가를 밟은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쓰러져 있는 독라엄지의 모습이 보였다.
자를 잃은 게 너무 슬퍼서 경계가 무뎌진 게 분명했다. 친실장은 양 뺨을 손으로 두드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동족이었다. 포식자들보다도 악랄하며 위험하니 마주치면 최선을 다해서 쓰러뜨려야 한다고 친실장의 마마가 말했던 그 동족. 그러나 눈앞의 동족은 고작 엄지에 독라이고, 심지어 땅바닥에 엎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산에서 자란 자신도 간신히 버티는 추위를 옷도 없는 연약한 엄지가 버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독라엄지를 뒤집어보니 혀를 빼 물은 채로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보였다.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자신이 묻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자실장도 아닌 엄지실장이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엄지의 마마도 근처에 있을 것이다.
보검을 손에 쥔 친실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독라엄지의 시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친실장은 엄지의 가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원 독라인 성체실장과 자실장 한마리 그리고 상반신만 남은 엄지. 세 실장석은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두 모녀의 입에는 무엇인가를 물어뜯은 듯 입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마가 말했던 가족조차 잡아먹는 분충이라는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자를 잡아먹다니... 역겨움을 느낀 친실장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그들의 시체를 묻어줄 가족은 더 없는 게 확실했지만, 자나 잡아먹는 분충을 묻어주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묻어주지 않아도 지나가던 다른 포식자들에게 좋은 양분이 될 것이다. 분충에게는 이 정도가 수준에 맞는 결말이다. 친실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실각한 일가의 시체를 지나가는 친실장의 눈에 문득 자실장의 입가에 묻은 게거품이 보였다.
친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거 같은 느낌인데. 그래... 마치 최근에 본 거 같은 모습 ... 게거품?
머리를 강하게 후려치는 충격에 휘청거린 친실장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다급해진 친실장은 걸리적거리는 자실장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럴 순 없다.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친실장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친실장이 달려간 곳은 자들이 묻힌 안식처. 전력을 다해 뛰어온 친실장은 그만 맨땅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추위를 참으며 열심히 팠던 흙더미. 따뜻한 봄에는 반드시 더 좋은 곳에 묻어주겠다며 아픈 가슴을 참으며 자들을 묻었던 흙더미.
그 흙더미가 파헤쳐져 있었다. 그 망할 분충들이 자들의 안식처를 파헤쳤다.
흙더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차가운 흙 속에 잠들어있어야 하는 자들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흙더미 주변에 있는 적록의 혈흔과 벗겨놨던 자들의 옷만이 쓰레기처럼 구겨져서 근처에 널려 있었다. 마치 더는 이룰 수 없는 친실장 스스로가 다짐한 약속처럼.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며칠 전의 자신은 분명히 행복했는데. 착하고 귀여운 자들이 함께였는데.
자들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은 자들의 안식마저 지키지 못했다.
그것이 그렇게 잘못이었는가, 먹으라고 두고 간 음식을 챙겨서 먹은 것에 불과한데, 어떤 피해도 끼친 적 없는데.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그저 비명에 간 자들을 잊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마음이 무너진 친실장은 무릎을 꿇은 그 상태로 오열했다.
" 데에엥! 데에엥! "
무덤을 내리쬐는 햇빛이 사그라지며 서늘해지는 공터,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친실장의 통곡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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