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의 나른한 어느 오후, 공원 근처 상가 벽에 바싹 붙어 슬금슬금 접근하는 지저분한 실장석. 두 눈은 가판대 너머로 늘어진 시든 당근 잎에 고정되어 있다.
“데에...데에... 데뎃! 뎃스- 뎃스- 뎃스-”
늘어진 잎을 잡아당겨 당근을 훔친 실장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달아난다. 하지만 그늘에 숨어 몰래 접근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벌어진 입에서 걸음마다 흘러나오는 기합소리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가게 주인의 귀에 어렵잖게 들어갔다.
“니미럴, 귀찮게시리...”
멍하니 앉아 부채로 파리를 쫓던 청과물상 토시아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 빗자루를 거꾸로 꼬나잡지만, 심드렁한 모습은 영 맥아리가 없어 보인다.
“데뎃? 데갸아앗!”
무심코 뒤를 확인한 실장석은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쫓아오는 토시아키를 보고 비명을 지른다. 상가 옆 화단을 향해 전력으로 달아나는 실장석. 빵콘한 팬티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튄 똥이 실장석의 온몸에, 그리고 양손으로 거머쥔 당근에 뒤덮인다.
들실장의 침입에 시달리던 토시아키는 평소라면 당장 쫓아가 요절을 냈겠지만,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만사가 귀찮다. 말라빠진 당근 하나 때문에 빗자루며 신발에 똥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빗자루 막대로 등을 벅벅 긁으며 한숨인지 하품인지 모를 숨을 내쉬며 돌아서려는 찰나,
“데프프엑-”
비웃음을 흘리며 화단으로 몸을 날리던 실장석의 몸이 수풀에서 뻗어 나온 금속 막대에 꿰뚫렸다. 혀를 쭉 빼문 채 똥이 비직비직 나오는 몸뚱이가 공중에 걸려 움찔거린다. 위석을 뚫고 등으로 튀어나온 막대의 반대쪽 끝에는, 열 손가락으로 쇠꼬챙이을 단단히 쥐고 있는 독라의 실장석이 있었다.
꼬챙이를 휙 휘둘러 시체를 화단에 던진 독라는 녹색 똥물로 번들거리는 당근을 주워 토시아키에게 내밀었다.
“데스뎃스.”
얼떨결에 두 손가락으로 당근을 받아들었다가 아차 하며 길바닥에 던지고 손을 터는 토시아키. 독라는 개의치 않고 토시아키를 보며 자신의 입을 톡톡, 그리고는 귀를 톡톡 두드린다.
‘린갈을 뜻하는 건가?’
토시아키는 고개를 갸웃하며, 옆 가게 중국집의 사장을 불렀다.
"어이, 철웅이!"
"철웅 불렀나?"
"자네 옛날에 학대파였다고 그랬지? 린갈 갖고 있으면 좀 빌려주게."
"기다려라."
탕수육을 접시에 담아 배달부에게 넘긴 철웅은 손을 앞치마에 슥슥 닦고 서랍을 열어 먼지 묻은 린갈을 건넸다.
"건전지 없다. 건전지 넣어야 한다."
"건전지라면 나한테 있네. 고마우이."
건전지를 찾아 린갈에 끼워 넣으며, 토시아키는 가만히 서 있는 독라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상하게 생긴 실장석이었다.
보통 실장석은 다 커 봐야 한 뼘 반 정도의 비계 덩어리다. 반면 이 독라는 사람 무릎에 닿을 만큼 큰 덩치와 제법 튼실한 근육을 갖고 있었다. 산실장보다도 커다란 그 떡대 덕분에 전체적으로 보아 실장석치고는 꽤 균형 잡힌 비율이다.
앞머리와 뒷머리는 깔끔하게 뽑혀 맨질맨질한 상태다. 이 정도 덩치의 실장석을 독라로 만들 들실장이 있을 리 없으니, 분명 학대파의 소행일 것이라고 토시아키는 짐작했다.
옷이라고는 몸에 감고 있는 너덜너덜한 넝마와 팬티 한 장 밖에 없었고, 대신 등에는 웬 더러운 녹색 보따리를 매고 있었다. 보따리는 푹신한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이리저리 삐져나온 갈색 터럭으로 보아 실장석의 머리카락임이 분명하다. 보따리의 매듭 부분에는 방금 사용한 쇠꼬챙이가 꽂혀 있었다. 꼬챙이의 끝은 돌에다 대고 조잡하게 갈아낸 듯 약간 날카로웠다.
독라의 입은 꼬질꼬질한 천 조각으로 가려져 있었다. 본래는 흰색이었다는 것을 거의 알아보지 못할 만큼 더러워진 마스크는 붉은 실로 귀에 걸려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바로 독라의 손이었다. 평범한 실장석의 손은 엄지손가락밖에 없이 뭉툭하지만, 이 독라의 손은 괴이하게도 5개의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구색을 겨우 갖춘 손가락은 인간의 것에 비해 두껍고 짤똑했지만, 비슷하게 움직이며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실장석이란 워낙 제멋대로인 생물이라니까, 이 녀석은 돌연변이 같은 건가보군.”
토시아키는 린갈의 전원을 넣으며 생각했다. 철웅도 가게 밖으로 나와 이 희한한 실장석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자, 이제 말해도 좋다.”
린갈의 전원을 넣으며 토시아키가 말하자 독라는 마스크를 내리고 입을 열었다.
‘시간 내주어서 감사한데스. 상품이 망쳐져 미안한데스.’
린갈에 출력된 글자를 본 토시아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실장석들은 거래라는 개념을 모른다. 현명한 녀석들은 남는 물건을 서로 교환한다지만, 이는 그저 원시적인 물물교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독라는 ‘상품’이라고 말한다. 상업의 개념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다는 뜻이다.
과거 실장석 열풍이 불었을 때 팔리던 극소수의 최고급 사육실장이 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토시아키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못생기고 지저분한 들실장이 그렇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토시아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그건 그렇고 무슨 용건이지? 도둑을 잡은 보상이라도 원하나?"
‘그런 건 필요 없지만, 대신 닌겐상께 제안을 하나 하는데스.’
토시아키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 그럼 그렇지. 보나마나 너를 키워 '행복'해질 '기회'를 내게 준다는 제안이겠지? 당장 꺼지지 않으면 네놈의 머리통을-"
‘그런 것은 제안이 아닌데스. 와타시는 닌겐상께 거래를 제안하는데스.’
빗자루를 들어 올리던 토시아키의 팔이 멈췄다. 독라는 말을 이어갔다.
‘공원에서 실장석들이 야채와 과일을 갉아먹고 있는데스. 음식물 쓰레기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공원 근처에서 얻을 곳은 이곳밖에 없는데스. 실장석이 여기서 도둑질을 하고 있지 않은데스까?’
독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잠시만 한눈을 팔면 접근해 손닿는 위치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훔쳐가려 드는 들실장 때문에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예상해 일부러 낮은 곳에는 시든 야채만 미끼로 늘어놓고 팔릴만한 건 높은 진열대에 두긴 했지만, 어쨌든 가게 주변에서 들실장이 계속 얼쩡이니 토시아키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었다.
‘와타시가 도울 수 있는데스.’
"가게로 접근하는 녀석들을 막아준다는 말이지?"
독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내게 '거래'를 제안한다고 했지. 거래란 주고받는 거야.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건 뭐냐?"
‘침대와 물, 그리고 와타시의 안전인데스.’
"그게 다야? 뭐 콘페이토를 내놓는다거나 스테이크를 바친다거나 하는건 없어?"
‘필요는 없지만 안 될 것도 없는데스.’
독라는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당돌한 녀석인데...‘
해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하다. 침대야 가게 구석에 수건만 몇 장 깔면 해결된다. 물이야 실장석 한 마리가 얼마든지 써도 표도 나지 않는다.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가게를 더럽히거나 할 것 같지도 않다.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토시아키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네가 농땡이를 피우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와타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쫓아내면 되는데스.’
"네가 상품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지? 들실장과 한 패거리가 아니라는 보장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스.’
"으하하하!"
토시아키는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청산유수로구만! 좋아, 오늘부터 너를 우리 가게의 경비원으로 임명한다."
‘현명한 결정인데스.’
독라는 마스크를 다시 올리며 토시아키가 내민 손을 잡고 흔들었다.
"철웅 이해할 수 없다."
"이 사람아, 부러우면 자네도 우리 경비'실장'에게 부탁하라고! 으하하하."
머리를 긁적이는 철웅을 뒤로하고 독라와 토시아키는 가게로 들어갔다.
"마마, 언제쯤 도착하는테치? 음식은 마마 혼자 구하면 되지 왜 와타시를 끌고 나온테치?"
"이제 다 도착한데스. 저기가 바로 닌겐의 먹이창고인데스."
"귀한 와타시를 이 고생을 시켰으니 콘페이토가 많이 있는 것이 좋을거다테치!"
"닌겐테치? 와타시의 귀여움으로 똥닌겐을 메로메로시켜 노예로 만들고 사육실장이 되는 테치! 마마는 잘 보는 테프픗!"
"안되는데샤! 저곳의 닌겐은 눈이 옹이구멍이라 우리를 보기만 하면 죽이려고 드는 미친 닌겐인데스. 몰래 음식만 접수하고 빨리 집으로 가야 하는데스."
"테챠악! 와타시의 애교가 통하지 않을리가 없는테치! 그런 멍청한 닌겐이라면 운치를 발라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줄테다테치!"
"일단 조용히 하고 마마의 곁에 꼭 붙어있는데스. 마침 닌겐이 없으니 마마를 따라 조용히 가는데스."
"알겠는테치. 산더미같은 콘페이토를 향해 가는테치!"
"이건 말도 안되는테치. 와타시의 애교 한 번이면 모든 닌겐은 자청해서 노예가 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는테치...“
턱
"테쨕!"
"테찍!"
"이 병신오네챠 왜 갑자기 멈춰서냐테쨔!"
"똥마마가 멈춰서서 와타시도 부딪친테챠! 지금 와타치보고 병신이라고..."
"오마에들, 싸우지 말고 저길 보는데스. 닌겐의 창고 앞에 독라가 있는데스!"
"테치? 테퍄퍄퍄! 독라노예가 있는테치!"
"초라한테치! 흉한테치! 보기만 해도 냄새나는테치!"
"데퍄퍄! 꼴불견인데스! 닌겐에게 잡혀서 독라가 된 것이 분명한데스"
"저녀석에게 마마의 운치를 발라 와타시의 노예로 하는테치! 밥도 생기고 노예도 생기고 일석이조인테츄~"
"데퍄퍄! 똥노예! 와타시의 운치를 받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데샤!"
휙, 철퍽.
"데? 데뎃? 저 독라가 지금 피한데스? 데샤악! 정신나간데스? 어딜 감히 잔재주를 부리는데샤!"
"무엄하다테치! 주제넘다테치! 지금 당장 도게자로 사죄하고 와타시의 발바닥을 핥아라테치! 테치? 다가오는테치? 다가와서 어쩔거냐테치! 어서 고개를 조아리고 와타테벡!"
"차..차녀? 차녀! 차녀! 똥노예가 주인을 죽이다니 정신이 나간데샤! 오마에의 팔다리를 자르고 자판기로 만드데벡!"
"마, 마, 마마? 마마 일어나는테치! 왜 엎드려만 있는테치! 테엣! 다, 다, 다가오지 마는테치! 저리가라테치잇! 싫어테치! 싫어싫어테치! 테, 테...테..테츙~ 테츙테...테에엑! 아픈테치! 아파요데치! 미안해요테치! 살려주세요테치! 아파! 아파아파아파! 마마악! 마..."
토시아키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독라는 이미 들실장 가족을 죽이고 뒤처리를 하는 중이었다. 시체를 들고 상가 바깥 수도꼭지로 향한 독라는 물바가지에 물을 받아 가게 주위의 핏자국과 똥을 닦아냈다. 들실장의 시체는 독라의 점심이 될 것이다.
독라가 토시아키의 가게에서 일하게 된 지 어느덧 두 달. 계절은 여름을 지나 완연한 가을이 되었다.
독라의 일과는 간단했다. 아침에 출근한 토시아키가 가게 문을 열면, 잠에서 깨어난 독라는 상가 뒤편 주차장 부지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몸을 씻고 먹이를 먹는다. 영업시간 동안에는 가게에 다가오는 실장석이 있는지 감시한다.
실장석들은 매일같이 야채를 훔치려 들었고, 독라는 매일같이 실장석을 죽여 댔다. 실장석으로 득실대는 공원이 지척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시청에서 파견한 구제반이 몇 번 다녀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다시 창궐하는 실장석에 시도 주민도 손을 놓고 있었다.
언젠가 토시아키는 독라에게 말했다.
"전부 죽이지 말고 한두 놈은 살려 보내서 여기 오면 죽는다고 소문을 퍼트리면 어때?"
그 후 몇 차례 실장석들을 병신으로 만들어 돌려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라면 독라와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실장석. 독라를 기르는 걸 보니 애호파가 분명하다고 생각한 실장석. 이미 분충화가 끝까지 진행된 공원의 실장석들은 갖가지 착각을 하며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결국 오는 녀석은 족족 죽인다는 쪽으로 방침을 되돌렸다.
독라의 손에 죽은 실장석은 대부분 수거함으로 들어갔지만, 일부는 독라의 뱃속으로도 들어갔다. 수돗가로 시체를 끌고 간 독라는 하수구에 오물을 흘려보내고 고기를 뜯어먹었다. 반복되는 동족식에 질겁한 토시아키가 야채 쪼가리나 콘페이토, 먹던 도시락까지 줘 보았지만, 아무리 나무라도 독라의 식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아저씨, 가게 밖에 웬 실장석이 있어요?"
"아, 요 옆에 공원에서 참피들이 자꾸 와서 야채를 훔쳐가서요. 가게 지키라고 세워 놓은 녀석입니다."
"참피가 가게를 지킨다고요? 이거 병균 같은 거 옮고 더러워지고 그런 거 아니예요?"
"글쎄 지킨다니까요? 그리고 병균이라면 동물병원에서 검사도 다 받았고요. 게다가 이 녀석이 퍽 깔끔한 놈이거든요."
"정말요? 신기하네. 자세히 보니까 생긴 것도 특이하고. 이름이 뭔데요?"
"이름은 없습니다. 그냥 독라에요."
독라는 이름이 없었다. 토시아키가 이름을 붙여주려고 했지만, 독라는 자기는 사육실장이 아니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고집불통인 독라는 할 수 없이 계속 독라라는 이름으로만 불렸다.
실장석이 지키는 토시아키의 가게는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며 제법 유명해졌다. 독라를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다. 가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니 토시아키는 기뻤지만, 어쩐지 그럴 때마다 독라의 표정은 어두웠다.
‘닌겐상, '고랭지 배추'가 무슨 뜻인데스까?’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니?"
‘골판지 상자에 써 있는데스.’
"높고 추운 산에서 재배한 배추를 뜻하는 말이다."
‘왜 그런 곳에서 배추를 기르는데스까?’
"배추는 더운 곳에서는 잘 자라지 못해. 그래서 여름에는 비교적 추운 고지대에서 배추를 재배하는 거야."
‘왜 높은 곳이 더 추운데스까?’
"그건 나도 몰라 이놈아."
‘데...’
독라는 글을 더듬더듬 읽을 줄 알았다. 어디서 배웠는지 여러 차례 물었지만 독라는 언제나 의뭉스럽게 대답을 피했다.
‘뜻을 알면 읽는 것은 쉬운데스.’ 독라의 변명이었다.
'범상치 않은 녀석이군.' 토시아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밀도 많은 녀석이야.‘
토시아키는 틈날 때마다 호기심 많은 독라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었다. 독라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아둔했고, 배우는 속도 또한 느렸다. 하지만 숱한 브리더를 절망케 했던 실장석의 지능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었다. 평범한 실장석의 사고력이 먹고 싸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에 비해, 독라는 기억하고,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실장석이 스시와 스테이크를 탐내듯 독라는 지식을 탐냈다.
새로운 것들을 배울 때마다 독라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토시아키는 독라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졌다. 하지만 토시아키가 캐물을 때마다 독라는 항상 교묘하게 화제를 돌릴 뿐이엇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가을이 끝나갈 무렵, 독라는 별안간 짐을 꾸렸다.
‘와타시는 이만 떠나겠는데스.’
가게 셔터를 내리던 토시아키의 손이 멈칫했다.
"떠날 셈이냐."
독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없으면 실장석이 가게에 들끓을 텐데."
‘곧 날이 추워지는데스. 분충들은 월동식 모으기보다는 탁아할 궁리만 하는데스. 편의점 앞이면 몰라도 가게에 기승을 부릴 일은 없는데스. 그리고,’
독라는 물끄러미 토시아키를 바라보며 말했다.
‘와타시가 없을 때에도 들실장은 닌겐상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데스. 닌겐상이 와타시를 받아준 것은 그저... 와타시가 신기했기 때문인데스.’
"그래. 너도 네가 신기하다는 건 아는 모양이지."
토시아키는 피식 웃었다
"넌 확실히 이상한 녀석이야. 말끝만 데스데스 거릴 뿐 손에는 손가락이 달렸지 않나, 글을 읽지를 않나, 이제는 살기 편한 늦여름에 찾아와서 힘든 겨울에 떠나겠다고 하는군. 떠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이건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아니, 넌 정체가 뭐냐?
독라는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와타시는 평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결국 실장석에 불과한데스. 산실장도 들실장도, 사육실장도 아닌 실장석. 와타시는 길실장인데스.’
독라는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닌겐상이 와타시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으니, 이제 와타시가 대답할 차례인데스.’
토시아키가 의자를 끌어다 자리에 앉자, 독라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더니 입을 열었다.
"뎃데로~ 뎃테로게~"
인적 없는 산 속, 개울을 끼고 있는 비탈진 풀숲에서 실장석 수십 마리의 태교 소리가 꽥꽥 울려퍼진다.
"뎃데로게~ 뎃데로게~
삶은 힘든데스. 행복은 없는데스. 죽어라고 노력해도 소용 없는데스.
세상에는 무서운 것들이 가득한데스. 모두들 우리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데스.
짐승들은 무서운데스. 우리들을 꿀꺽 잡아먹는데스.
닌겐은 더욱 무서운데스. 우리를 죽지도 못하게 해놓고 영원히 괴롭히는데스.
닌겐은 강한데스. 닌겐은 산과 강을 만들고 없애는데스. 닌겐과 얽히면 안되는데스.
실장석으로 태어나는건 불행인데스.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은데스."
'(파킨)' '(파킨)' '(파킨)'
어지간한 산실장도 혀를 찰 만큼 절망적인 태교에 좌절하던 태아들이 뱃속에서 죽어가지만, 친실장들은 아랑곳않고 노래한다.
"쓸모없는 자는 죽는데스. 약한 자도 죽는데스.
분충은 최악인데스. 모두 마마가 죽여서 먹는데스.
가장 강하고 현명한 자만이 마마의 자인데스.
행복은 없는데스. 꿈도 꾸지 마는데스.
하지만 언젠가는 모두모두 행복해지리란 것을 믿는데스.“
‘(파킨)’ ‘(파킨)’
마지막 파킨 소리와 동시에 친실장의 두 눈이 적록으로 돌아간다.
"이번 임신도 실패인데스..."
매끈한 대머리를 긁으며 투덜대며 일어나, 풀숲을 들추고 굴로 들어가는 친실장.
"하지만 쓸모없는 자를 낳을 수는 없는데스. 내일 꽃을 꺾어다 다시 해 보는데스.“
한편, 냇가에서는 두 눈이 빨개진 실장석 하나가 한창 출산중이다. 얕은 개울가에 둥글게 자갈을 쌓아 만든 출산소는 자들이 익사하거나 떠내려갈 염려도 없으며, 흐르는 강물이 점막을 저절로 씻어 주므로 아주 편리하다.
"텟테레~" "텟테레~"
태어난 자는 모두 넷. 자실장이 셋에 엄지가 하나다.
"테츙~ 마마인테치? 반가운테치! 낳아주어서 고마운테치! 테츄웅~"
"테퍄퍄퍄! 마마가 독라인테치! 별 거지같은 노래로 가오잡더니 알고보니 그냥 병신 독라였다테치!"
"레에에... 오네챠. 그런 말하면 안되는레치... 마마, 와타시는 엄지로 태어나 죄송한레치. 하지만 와타시도 노력해 반드시 도움이 되겠는레츄!"
친실장의 미간이 꿈틀댄다.
'이번 자들은 파킨하지 않고 여럿 살아남아 기대했더니, 아첨에 분충에 엄지에...이번 임신도 아무래도 실패인데스...'
"똥노예가 뭐하냐테치! 독라는 빨리 고귀한 와타시에게"
쾅.
내리찍은 친실장의 주먹에 분충의 머리가 봉선화처럼 터져나간다. 거들먹대던 분충의 몸뚱이가 덜컥 멈추더니 찰박 하고 엎어졌다. 흘러나온 피와 뇌가 맑은 물에 서서히 퍼져 나간다.
"테쨔아아!"
"레...레치..."
쓰러져 꿈틀대는 자매의 모습에 엄지와 자실장이 비명을 지른다. 순백의 팬티는 순식간에 녹색으로 팽팽히 부풀었다.
"마..마마...와, 와타시는 저런 분충이 아닌테츄웅~ 테츙~ 테벡."
"치프프픗~ 마마 간지러운레치~ 할짝할짝 더 해주는레치~ 치벡."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미의 손가락이 자신들을 향하자, 덜덜 떨다가 아첨하는 자실장과 행복회로에 빠져든 엄지. 둘의 머리도 친실장의 손에 덧없이 똑똑 따여 입으로 들어갔다.
방금 낳은 자들의 머리를 아작아작 씹으며 친실장은 마지막 남은 자실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실장은 도망치지도, 빵콘하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마에는 와타시가 무섭지 않은데스?"
"쓸모없는 자는 태어나자마자 죽는 편이 낫다고 마마가 말한테치."
"그러는 오마에는 지금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스?"
"와타시가 쓸모 있다면 마마가 지금 죽이지 않을 것인테치. 와타시가 쓸모없다면 여기서 살아도 결국엔 죽게 되는테치."
친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팬티를 추켜올렸다. 두 자실장의 시체를 양팔에 들고, 엄지의 시체를 턱짓으로 가리키는 친실장.
"오마에는 합격인데스. 저걸 들고 따라오는데스.“
이 산실장 마을은 30여 마리의 성체로 구성된 대규모의 군락이다. 개울 근처 비탈, 수십 평 면적에 걸친 굴들이 이들의 거주지다.
각각의 성체는 자신만의 굴을 가졌다. 비가 내려도 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경사진 입구 너머에는 자그마한 토굴이 있고, 그 안에는 낙엽 더미와 돌, 나뭇가지 등 조잡한 생활용품이 보관되어 있다. 더 깊숙한 곳에는 습기 없는 곳에 꽁꽁 숨겨 놓은 보존식이 보인다.
토굴은 땅굴망을 통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눈이나 토사로 출구가 막혔을 때를 위한 비상 통로다. 어둠 속에서 볼 수 없는 실장석의 한계 때문에 개미집처럼 복잡한 굴을 팔수는 없었지만, 굴과 굴을 잇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일반적인 산실장 무리에서 이런 습관은 반드시 파멸적인 결말을 맞는다. 운 좋게 분충성을 숨겼건, 혹은 개념에서 타락했건, 분충이 반드시 발생해 비축분을 좀먹어 들어가고, 점점 더 많은 분충이 생겨나고, 끝내 무리 전체가 폭삭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을은 편집증적인 세뇌와 솎아내기를 통해 그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했다.
"행복은 없다."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뱃속에서부터 주입된 믿음이었다.
이들은 모두 독라였다. 머리카락과 옷이 있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밥보다 똥을 먹는 날이 더 많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솎아낸 자식을 거리낌없이 죽이고 먹었다. 자식을 갖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충은 즉시 죽였다. 어리숙한 자식도 죽였다. 평범한 자식도 죽였다. 가장 강하고 현명한 자식만을 키웠다. 성체로 자라나는 개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평생 하나의 자식도 키워내지 못하는 개체도 있었다.
철저한 선별로 인해 무리는 극도로 느리며 동시에 안정적으로 자라났다. 수십 년 동안 멸절되지 않고 유지되는 산실장 무리는 드물다. 수십 년 동안 두어 번의 분가밖에 거치지 않으면서 30마리밖에 되지 않는,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30마리나 되는 개체수를 갖고 유지되는 무리는 더욱 드물다. 지금까지 솎아내진 수만 마리 자들의 목숨과 스스로 노예처럼 살다 죽어온 수천 마리 실장석들의 희생이 그 밑거름이었다.
다른 실장석이 보면 필시 불행하다고 조롱받을 삶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 의미가 무엇이 있냐고.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불행한 줄도 몰랐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듯이, 행복을 맛본 자만이 불행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행복해지는데스." 앵무새처럼 중얼대지만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도, 삶의 목적도 알지 못하는 실장석들.
방금 낳은 자식과 함께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가는 친실장 뒤편으로, 먹이를 구하러 마을을 나서는 네 마리의 성체가 보인다. 온몸에 진흙과 푸성귀를 덕지덕지 붙여 냄새를 숨긴 이들의 발걸음은 제법 능숙하다.
산에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어설픈 여럿이 꾸물대다 죽어나가는 것 보다는 노련한 소수가 재빨리 다녀오는 편이 낫다. 마을 근처에서 풀 열매를 주워오는 정도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멀리까지 돌아다니며 먹이를 모으고 작은 동물을 잡아 오는 것은 재빠른 실장석들로만 구성된 이들의 몫이었다. 발이 빠른 개체는 사냥을, 힘이 좋은 개체는 굴 파기를, 손재주가 좋은 개체는 도구 만들기를. 분업은 마을을 지금껏 유지해 준 비결이다.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며 조심스럽게 숲 속으로 향하는 네 마리 실장석들은 저마다 초록색 천을 뒤집어쓰고 있다. 솎아진 자들의 옷을 이어 붙여 만든 이 망토는 풀숲에서 훌륭한 보호색의 역할을 한다. 한 손에는 나무 막대기를, 한 손에는 보따리로 쓸 또 다른 천 조각을 쥔 채 네 마리는 살금살금 걸어간다.
마을의 모습은 풀숲과 나무에 가려 금세 사라지고, 적막한 숲 속에는 실장석의 걸음 소리만이 자박자박 울린다. 멀리서 부스럭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대며 경계하지만, 바람 소리라 생각했는지 잠시 후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는 실장석들.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푸드덕 하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자 네 마리는 일제히 망토로 몸을 덮고 바짝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까마귀 정도의 새가 마음만 먹으면 성체 하나를 죽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다행히 새는 실장석들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날갯짓 소리는 그대로 멀어져 가고, 조심스럽게 일어난 실장석들은 다시 먹이를 찾아 숲으로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덤불을 가르며 맨 선두에서 가던 실장석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우뚝 멈춰 선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 풀줄기를 헤치자, 굴에서 고개를 내밀고 코를 킁킁대며 바깥의 동태를 살피는 토끼의 모습이 보였다. 토끼와 이 실장석의 크기 차이는 큰 개와 인간 정도. 싸워 이기기는 어렵지만, 만약 굴 안에 새끼 토끼가 있다면 손쉽게 고기를 얻을 수 있다.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토끼는 굴 밖으로 나와 푸성귀를 뜯어먹기 시작한다. 입구 주위의 풀은 다 뜯어먹어 버렸는지 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다. 네 마리 실장석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금살금 접근한다. 이상한 낌새를 챈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굴로 뛰어 돌아가려는 찰나, 가장 날렵한 실장석이 재빨리 몸을 날려 굴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 다른 세 마리는 후다닥 달려 나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고함으로 토끼를 위협한다.
“데아아!” “데즈우우우!” “데샤앗!”
세 마리에 둘러싸여 불리한 처지에 놓인 토끼는 할 수 없이 새끼를 포기하고 달아난다.
가장 몸집이 작은 실장석이 비좁은 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 손을 뻗자 꼼지락거리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있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새끼들이다. 분홍빛 새끼토끼들을 한 마리씩 집어 들어 굴 밖으로 꺼내자 밖에서 기다리던 실장석들이 받아 들어 이빨로 숨통을 끊는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 젖은 흙 속의 지렁이. 그늘에서 졸고 있는 도마뱀. 실장석의 사냥은 이렇게 연약한 개체를 기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운 좋은 수확 덕분에 오늘은 해 지기 전에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네 마리 실장석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보따리에 고이 담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집으로 향하던 친실장과 자실장에게 시선을 다시 옮겨 보자.
굴에 도착한 친실장은 곧바로 세 시체의 옷과 털을 벗겨냈다. 고기는 볕 잘 드는 곳에 널고, 머리털은 잠자리에 깔고, 옷은 구석에 모아둔다. 실장석의 옷은 일종의 살아 있는 세포 조직이다. 벗겨내고 오래 지나면 세포는 사멸해 버리지만, 세포가 살아 있을 때 두 장을 겹쳐 돌로 며칠 눌러 놓으면 섬유끼리 단단히 얽혀들어 연결된다. 먹이를 구하던 실장석이 두르던 망토, 물건을 옮기는 보따리, 추운 밤에 덮을 이불. 모두 이렇게 솎아낸 자들의 옷감으로 만든 물건들이다.
분류를 마친 친실장이 자실장을 붙들고 향한 곳은 마을 한복판의 오래된 굴. 장로의 집이다. 굴 안에 앉아 돌조각을 깨뜨리던 장로가 모녀의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태어난 자인데스."
장로는 말없이 자실장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이곳저곳을 만져 보고 햇빛에 얼굴을 비춰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뼈도 굵고 눈빛도 독한 것이 쓸 만해 보이는데스."
장로는 굴로 돌아가더니, 집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도구 중 날카로운 돌멩이를 골라 들고 나왔다. 자갈돌을 깨뜨리고 갈아 만든 돌칼이다.
자실장의 손끝을 꾹꾹 눌러보던 장로는 별안간 말랑한 살을 세로로 길게 4번 갈랐다.
"텟...“
고래의 지느러미 안에 퇴화한 손가락뼈가 남아 있듯이, 실장석의 뭉툭한 손 안에도 다섯 개의 손가락뼈가 남아 있다. 다만 짧게 돌출된 엄지손가락을 뺀 나머지 손가락들은 한 덩어리로 붙어 있을 뿐이다. 융합된 4개의 손가락은 근육의 기능이 미약하게 남아있어, 벙어리장갑을 낀 것처럼 물건을 감싸 쥐거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잡한 구조로 인간의 손처럼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기는 역부족이다. 장로는 그 손가락 사이를 째서 5개의 손가락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이를 악무는 자실장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반대쪽 손도 똑같이 한 뒤, 손가락이 도로 붙지 않도록 사이사이에 나뭇잎을 끼우는 장로.
“다 된데스. 조금 있으면 다 아물 것인데스.”
아무 들실장이나 잡아다 손가락을 만들어 주더라도 이를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뭉툭한 손으로 살아온 삶이 이미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산실장들은 자실장이 태어난 바로 그날에 손가락을 만들어 주었다. 마마의 마마, 그 마마, 그 마마의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삶의 지혜였다.
손가락의 존재는 이 실장석들에게 큰 장점을 제공했다. 바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건을 단단히 움켜쥘 수 있게 된 이들은, 돌을 부딪쳐 떼어내고 갈아내 원시적인 석기를 만들었다. 무딘 돌칼을 쥔 실장석들은 건초를 끊어오고, 풀 열매를 수확해 올 수 있었다. 열매가 익어 떨어지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자, 구할 수 있는 먹이가 몇 배로 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손으로 자갈을 골라내고, 넓적한 나무껍질을 삽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 실장석들은 평범한 산실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효율적으로 굴을 팔 수 있게 되었다.
땅굴로 얼기설기 연결된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다. 위험이 닥쳤을 때 모두가 대피하기 위한 대피굴이다.
곰 같은 맹수가 절멸한지 오래인 이 근방에서, 멧돼지는 인간에게도 실장석에게도 무서운 짐승이다. 잦은 동족식과 식분으로 실장취가 축적되어 끔찍한 맛이 나는 실장석의 고기는 멧돼지가 즐겨먹는 식량은 아니다. 하지만 실장석들이 모아놓은 먹이만은 예외였다. 산실장의 보금자리를 뒤지면 약간의 수고만으로 도토리, 말린 열매, 고기 등 맛좋은 식량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실장석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애써 모아 놓은 월동식을 털리는 것은 물론, 난폭하게 땅을 헤집는 통에 굴 속에 숨어있던 실장석까지 덤으로 갈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실장석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대피하기 위해, 땅 속 깊숙한 곳에 커다란 굴을 만들었다. 지난 수십년 간 수많은 실장석들이 틈날 때마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파낸 이 굴은 사람 키보다 깊은 곳에 있고, 크기는 집채만 해 모든 성체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방공호였으며, 무성한 나무뿌리 사이에 위치해 무너질 염려도 없었다.
대피굴은 보존식 저장고가 가득 찼을 때 남는 먹이를 보관하는 역할도 겸했다. 사실 각자의 집에 보관한 식량은 침입자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일종의 미끼일 뿐이고, 실장석들의 월동을 책임지는 식량은 대부분 이 방공호에 저장된 것들이다. 얕은 곳에 묻힌 먹이에 정신이 팔린 멧돼지들은 악취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깊숙한 굴 속의 월동식은 눈치채지 못했다. 덕분에 이 실장석들은 매년 멧돼지의 습격에 시달리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실장석들이 천적으로부터 마냥 도망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참 분주한 실장석들을 노려보는 구슬 같은 두 눈이 수풀 속에서 반짝 빛난다. 코를 킁킁대며 기회를 엿보던 족제비의 기다란 몸통이 실장석의 굴 속으로 재빨리 사라지고,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데샤아악! 길쭉한 녀석이 땅굴로 들어온데스!”
“모두 뾰족이를 들고 모이는데스!"
족제비같이 작은 육식동물은 산실장이 파놓은 굴을 따라 침입해 깊숙한 곳에 있는 식량도 털어먹고 자들을 물어가는 무서운 적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오히려 제 발로 함정에 들어온 사냥감에 불과했다. 마치 맹수를 사냥하는 토인처럼, 이 실장석들은 오랜 세월 끝에 마침내 포식자를 격퇴하는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포식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덩치였다. 수십 세대 동안 가장 튼튼한 자식만을 선별해온 덕분에 이들은 평범한 실장석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고, 족제비나 너구리같은 작은 동물과 맞먹을 수 있을만한 덩치를 갖게 되었다.
두 번째는 도구를 활용하는 지능이었다. 이 실장석들이 하루 일과 중 가장 공들이는 것은 나뭇가지를 주워 뾰족하게 갈아 꼬챙이를 만드는 일이었다. 튼튼하고 적당한 것은 무기로 사용하고, 작은 것은 굴 벽에 비스듬히 꽂아두어 함정을 만들었다.
실장석이 아무리 달려봐야 야생동물을 쫓아가서 싸워 이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먹이 냄새를 맡고 함정으로 돌진해 들어온 동물들은 제풀에 날뛰다가 벽에 박힌 나무창에 찔리고 찢겨 손쉬운 사냥감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협동심이었다.
"데뵤오옥!"
"덩치가 쓰러진데스! 길쭉한 녀석이 창고로 가는데스!"
"와타시가 어떻게든 막아 보는데스. 오마에는 덩치를 구하는데스!"
원래 산실장은 동료를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한 술 더 떠, 이 실장석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무리를 위해 행동했다. 한둘만 살아남아도 금세 무리를 복구할 수 있는 산실장과 달리, 자를 극도로 적게 낳아 적게 기르는 이들은 하나가 희생해 전체를 구하지 못하면 대가 끊어지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통로를 틀어막고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실장석. 하지만 덕분에 그 사이 다른 실장석들은 족제비를 포위할 수 있었다. 성체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좁은 굴 앞뒤에서 꼬챙이를 든 실장석이 줄지어 몰려와 차례대로 꼬챙이를 휘두른다.
"죽는데스! 죽으라는데스!"
"눈을 노리는데스, 부, 눈을! 르아아아!"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찌르기나 하는데샤!"
하나가 쓰러지면 곧바로 뒤의 실장석이 나서 공격한다. 통로가 좁기에 족제비도 실장석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 절박하게 날뛰던 족제비는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끝내 축축한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멎었다.
쓰러진 동료는 잘 간호해서 살려내면 된다. 자신이 쓰러져도 동료가 보살펴 줄 것을 알기에 망설임 없이 전진한다. 덕분에 이들은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족제비 격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이 이런 장점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모든 자실장은 성체가 될 때까지 힘든 단련을 거쳐야 했다.
"텟...테...테치...테챠..."
"거기 오마에! 죽고 싶지 않으면 계속 달리는데샤!"
"테에...테햐..."
마을 아래쪽 시냇가 어귀의 공터. 조그만 자실장 십여 마리가 장로의 감시 하에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다.
"똑바로 뛰라는데스! 죽고 싶은데스까?"
"테...테힉...테햐아아! 테챠아! 이건 미친짓인테치!"
계속 뒤쳐지던 자실장이 주저앉아 똥을 싸며 악을 쓰기 시작한다. 장로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목 놓아 소리 지른다. 다른 자실장들도 달리기를 하나둘씩 멈추고 엉거주춤 모여들어 이 광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너무한테치! 심하다테치! 하루종일 미친듯이 달리기만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테치! 죽어라 뛰고서 먹는 건 겨우 운치인테치! 우마우마한 과일과 고기를 내놓아라테치!"
"오마에. 벌써 잊은데스까? 실장석은 먹은 영양이 도로 운치로 나오는데스. 운치를 먹지 않으면..."
"그딴 거 모르는테치! 영양이니 뭐니 그건 또 뭐냐테치! 말을 알아듣게 해라데치! 와타시는 그런건 몰라도 되는테챠!"
"맞는데스. 오마에는 이제 그런 걸 영영 알 필요가 없는데스."
"테?"
장로는 떼쓰던 자실장의 머리통을 붙잡고 비틀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버둥대며 소리를 지르는 자실장의 눈알이 점점 불거져 나오고, 고통에 혀를 깨문 입에서는 피와 침이 줄줄 흐른다. 녹색 얼룩이 번져나가는 팬티는 서서히 부풀어, 가랑이 사이로 똥을 삐직삐직 흘려보냈다. 마침내 우두둑 소리와 함께, 힘줄과 척추가 대롱대는 자실장의 머리가 몸통에서 처참히 뽑혀 나왔다. 장로는 머리통을 휙 던진 다음 빽 소리질렀다.
"무슨 구경났다고 쳐다보는데스! 당장 마저 달리는데샤!"
"하, 하, 하이테치!"
"테, 테챠!"
기겁을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자실장들. 그 와중에 장로의 눈은 한 자실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의 소란에도 꿈쩍 않고 묵묵히 달리던 녀석이다.
“과연 영특한 자인데스. 혹시 저 자라면..”.
자실장들은 태어나자마자 매일 이렇게 훈련받았고, 조금 더 자라면 여러 도구를 다루는 법도 배웠다. 공터를 달리고, 돌멩이를 들고 끌고 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람과 꽤 흡사하다. 멀고 먼 옛날, 이 마을이 세워지기도 전, 마마의 마마의 수많은 위에 있는 한 마마가 산에 올라온 인간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해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장석 특유의 재생력과 넉넉한 마을의 형편 덕분에,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는 환경에서 자실장들의 근력은 빠르게 증가해 들실장은 물론 어지간한 산실장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실장의 교육과 지식 전수는 친실장의 몫이다. 매일 밤, 친실장들은 자들에게 무리의 규칙과 지식, 지혜를 가르쳤다.
"마마, 닌겐은 어떤 동물인테치?"
"닌겐은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커다란데스. 갓 태어난 새끼 닌겐도 어른 실장석과 비슷하고, 어른 닌겐과 비교하면 우리는 무릎까지밖에 못 오는데스."
"테에에... 그러면 새끼 닌겐은 사냥해서 먹을 수 있는테치?"
"미친소리데샤! 절대 닌겐과 얽혀서는 안되는데스. 닌겐은 우리들이 가만히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우리를 죽이는데스. 그런데 우리가 닌겐을 해치는 날에는... 닌겐이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의 실장석이 그날로 죽을 수도 있는데스야."
"테에... 그러는 마마는 닌겐을 본 적이 있는테치? 닌겐이 아무리 대단해도 튼튼한 집에 잘 숨으면 분명 안전하지 않은테치?"
"마마도 사실 닌겐을 직접 본 적은 없는데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한데스. 닌겐의 힘과 닌겐의 생각은 실장석이 알 수 없는데스. 눈이 오고 비가 오는 것처럼, 닌겐은 그저 닌겐일 뿐인데스. 그러니 오마에는 절대로 닌겐에게 관심도 갖지 말고, 얽힐 생각도 하지 말고 사는데스."
"텟! 닌겐을 본적도 없으면서 문자 쓰지 마는테샤! 와타시는 강한 어른이 되는테치. 와타시의 강함으로 닌겐을 노예로 만들고 그 대단하다는 힘을 와타시를 위해 쓰게 하는테치!"
친실장은 나직히 한숨을 쉬며 침대 옆에 놓인 나무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해가 지나며 이렇게 많은 자실장들이 죽어갔다. 태어나자마자 솎아내진 자. 고됨을 견디지 못하고 파킨한 자. 분충성을 드러내 죽임당한 자. 약하거나 멍청한 자. 훈련에서 낙오한 자...
그 해 봄부터 여름까지 잉태된 새끼 수천 마리, 그 중 파킨하지 않고 태어난 새끼 수백 마리 중 이듬해 봄까지 살아남아 성체가 된 자는 단 넷에 불과했다. 아니, 넷이나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단 하나의 새끼도 살아남지 못하는 해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넷은 지금 장로와 다른 성체들 앞에 나란히 서 있다.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다.
"그럼 오마에들이 배운 것을 말해보는데스."
장로가 입을 열자 네 실장석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씩 대답했다.
"실장석은 약한데스. 실장석으로 태어난 우리는 약할 수 밖에 없는데스."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장석을 넘어야 하는 데스."
"실장석이 탐내는 것이 실장석을 약하게 하는 데스. 탐내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하는데스."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 말대로 해 보는데스."
"머리카락이 있으면 벌레가 꼬이고, 덤불에서 나뭇가지에 걸리는데스. 와타시는 머리카락을 버리는데스."
네 마리는 두건을 벗고 앞뒷머리를 뽑아 발밑에 내려놓았다.
"옷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움직이기도 불편한데스. 와타시는 옷을 버리는데스."
네 마리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어 북 찢고 두건, 신발과 함께 머리카락 옆에 두었다.
"입은 다물 수 없어서 계속 목이 마르고 흙먼지가 들어오는데스. 와타시는 입을 가리는데스."
네 마리는 뾰족한 나무로 앞치마의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벗어낸 리본을 끼워서 마스크를 만들어 귀에 걸었다.
"잘한데스. 이제 마지막인데스."
"자를 아끼는 마음은 가장 무서운 마음인데스. 와타시는 자를 버리는데스."
네 마리는 손바닥에 피를 내서 왼쪽 눈에 발랐다.
"텟테레~" "텟테레~" “텟테레~” “텟테레~”
"마마 반가운레츄~. 어서 끈적끈적 핥짝핥짝 해주세요레치!"
"마마 좋아좋아레치! 세상 넓어넓어레치! 신기하다레치!"
영양 상태가 좋아서 그런지, 꾸룩거리는 배에서 태어난 것은 구더기가 아니라 엄지실장이다. 붉게 물든 눈을 닦아낸 실장석들은 점막에 덮인 자신의 자를 집어 들어 빨래 짜듯 비틀기 시작했다.
"마마가 할짝할짝 해주는레치~ 할짝할 치벳-"
"마...마마 저 아줌마 무서운레치! 무서운레치! 치벳-"
"레..레츙~ 마마는 와타시를 아야아야하게 하지 않는레 치벳-"
빈 깡통이 찌그러지듯이, 엄지실장들은 바람 빠지는 소리만을 토하고 핏덩이로 변했다. 점막에 싸인 채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태어난 엄지들은 점막에 싸인 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레에...레치... 마마?"
하지만 마지막 실장석은 자식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점막을 핥아주기 시작했다.
"오로롱... 장로사마... 와타시는 차마 자를 죽일 수 없는데스. 쓸모없는 엄지이지만 그래도 와타시의 사랑스러운 자인데스..."
변명하듯 늘어놓는 넋두리에도 불구하고 주위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돈다.
"이렇게 귀여운 자인데스... 차마 와타시를 받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는데스. 이 아이와 함께 무리를 멀리 떠나 살겠는“
더듬더듬 말하던 실장석은 헉 소리를 내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순식간에 날아든 발길질에 명치를 부여잡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주변의 실장석이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물려들어 팔다리를 붙잡고, 장로가 나무창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장, 장로사마! 제발!”
장로는 무표정하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자만이라도! 자만이라도 살려 주시는데스!”
코앞까지 다가온 장로는 조용히 가슴팍에 나무창을 겨눴다. 체념한 실장석이 피눈물을 흘리며 자를 향해 외쳤다.
“도망치는데스! 어서 도망치는데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는데스! 도망치고 살아남아서 온 세상을 오마에의 자로”
가슴에 꽂힌 장로의 창이 위석을 부수자 황급히 내뱉던 실장석의 목소리가 딱 멈췄다. 두 눈이 급속도로 색깔을 잃고, 두어 번 뻐끔거리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며 실장석은 절명했다.
공포에 질려 주저앉은 채 뒤로 기어가던 엄지는 영특했다. 어미의 말을 듣자마자 냉큼 일어나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마마, 기억할게요레치!”
눈물을 흩뿌리며 엄지는 외쳤다. 동그란 발자국 좌우로 적록의 눈물 자국이 점점이 찍힌다.
“반드시 온 세상을 와타시의 자로 가득 채워 보일게요레치!”
말을 맺고 정확히 세 걸음 후, 엄지는 찌부러졌다. 도망가는 엄지를 벌레처럼 밟아 죽인 건 야속하게도 방금 죽은 실장석의 마마, 엄지의 할머니였다.
잠깐의 소동이 끝난 후, 세 마리 실장석은 장로 앞에 다시 섰다. 마지막 솎아내기가 끝났다. 남은 것은 실장석의 특징과 본능을 모두 잃은, 실장석이지만 실장석이 아닌 세 마리의 성체뿐이다.
“오마에들은 합격인데스.”
세 실장석을 향해 장로가 자애롭게 말했다.
"어엿한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오마에들도 마을을 위해 일하는데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말해보는데스.“
실장석 한 마리가 재빠르게 말했다.
"와타시는 밥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스."
"그렇다면 오마에는 내일부터 밥을 구해오는 일을 하는데스. 오마에의 이름은 이제부터 빠른발인데스.“
구성원 하나하나가 특별하기에, 성체가 된 자들에게는 조잡한 이름이 주어졌다.
"와타시는 굴을 파고 도구를 만들고 싶은데스."
"그렇다면 바위손에게 가서 일을 거드는데스. 오마에의 이름은 힘센팔인데스."
장로의 눈은 마지막 실장석에게 향했다. 자실장 때부터 눈여겨보던 실장석, 그리고 바로 지금 토시아키의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 독라였다.
"오마에는 무슨 일을 하고싶은데스까?"
"...와타시는 길실장이 되고싶은데스.“
무리가 웅성거렸다.
길실장. 길을 떠도는 실장석. 누구보다도 강하며 영리한 자만이 길실장이 될 수 있었다. 길실장은 지식을 모으고 전하는 전령이며, 새로운 마을을 세우는 개척자였다.
오랜 옛날 분가하여 옆 산에 살고 있는 이웃 마을과, 그보단 최근이지만 역시 먼 옛날에 분가했다가 연락이 끊어졌다는 또 다른 마을. 이 무리가 알고 있는 이웃은 이 둘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들과 같은 삶을 사는 마을이 셀 수 없이 더 있었다. 이 마을도 까마득히 먼 옛날, 먼 곳 어디선가 이주해 온 길실장이 터를 잡고 세운 마을이었다.
일정 이상으로 커진 마을은 길실장을 배출해 내는 의무가 있었다. 아무도 강요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위석에 새겨진, 동족을 위한 의무였다. 길실장은 세상으로 내려가 경험을 쌓고 지식을 모은다. 금기시되는 인간과의 교류도 필요하다면 불사한다. 그렇게 지식을 얻은 길실장은 평생 세상을 누비다가, 우연히 새로운 무리를 만나면 자신이 배워 온 지식을 전수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손가락의 장점. 운동의 개념. 돌을 떼어내고 나무를 갈아내 도구를 만드는 법. 모든 지식들이 선조 길실장들이 터득해 전해준 귀중한 보물이었다. 숱한 길실장들의 노력 덕에 이 실장석들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지식을 쌓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습관은 오래 전에 단절되었다.
수년에 한 번씩은 찾아오던 길실장들은 점점 방문이 뜸해지더니 언젠가부터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 마을도 귀중한 머릿수를 기약 없이 낭비하느니, 더 이상 길실장을 배출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고, 외부와의 교류를 끊은 마을은 퇴보하지도 발전하지도 않는 정체에 빠져들게 되었다.
"조용히 하는데스!. 다들 이제 돌아가 할 일이나 하는데스. 그리고 오마에는 와타시를 따라오는데스."
장로의 명령에 실장석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장로는 독라를 자신의 굴로 데려갔다.
독라와 마주 앉은 장로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한데스. 와타시는 오마에가 길실장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데스. 사실, 와타시는 오마에가 길실장이 될 것을 바라고 있었던데스."
"어째서인데스까?"
"장로로 평생을 살다 보면 보는 눈이 생기는데스. 오마에가 태어난 날, 오마에의 눈빛을 보고 와타시는 어떤 예감이 든 데스. 오마에는 분명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 말인데스."
"구하다니, 무슨 말인 데스까? 마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데스까?"
"주위를 보는데스, 오마에."
장로는 굴 바깥을 가리켰다. 정말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은 피어나고...
두 눈이 초록으로 물든 어미들은 태교의 노래를 흥얼대며 일하고, 벌써 태어난 자들은, 일 년 전 독라가 그래왔듯 공터에서 헉헉대며 빙글빙글 달리고 있었다. 올해도, 내년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런 풍경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독라의 마음 한 구석에 느껴지는 빈자리는 무엇 때문일까?
독라와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며 장로가 말했다.
"정말 평화로운 모습인데스. 와타시가 어릴 때도, 와타시의 마마가 어릴 때도 항상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던데스."
"..."
"오마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는데스까?"
독라는 원을 그리며 도는 자실장들을 바라보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쉬지 않고 달려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실장들. 행복을 바라며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한 채 아동바동 살다가 그대로 허무하게 죽게 되고, 저 자들의 자들도, 그리고 그 자들도 똑같이...
"...달라짐."
"맞는데스. 달라짐이 없는데스"
장로는 독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평화로운 삶도 모두 달라짐이 있었기 때문인데스. 다른 길실장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바깥 세상으로 길실장을 보내 배운 것을 나누며 마을은 달라졌던데스. 자는 친보다 나은 삶을, 그 자의 자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데스. 그렇게 조금씩 달라지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온 데스.“
행복. 행복이라.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언제나 되새기던 그 의문을 독라는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자를 낳고 기르는 것? 자는 무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 식사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행복인 것일까. 무엇이 바로 수단이 아닌 목적인 것일까. 실장석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 것인가.
독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고 장로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길실장은 오래 전 사라진데스. 와타시의 마마 때도, 그 마마의 마마의 마마 때도 삶은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고, 지금과 꼭 같았던데스. 하지만 오마에, 여름에 뛰지 않는 실장석은 겨울이 오면 살아남을 수 없는데스.“
독라는 장로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마을이란 없다. 변화를 멈춘 그 순간 마을은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다.
마치 가사 상태에 빠진 실장석처럼 산송장으로만 존재하는 독라의 마을. 마찬가지로 문을 닫아건 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죽어가고 있을 알지 못할 다른 마을들. 그 모든 마을을 구하려면...
"와타시가 길실장이 되어 전하는데스. 다른 마을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데스. 길실장을 다시 만들어 내보내도록 하는데스."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데스. 가까이 앉는데스. 오마에에게 알려줄 것이 많은데스.“
날이 저물도록 독라는 장로에게서 바깥 세상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한때는 모든 실장석이 상식처럼 알고 있었던 지식이지만, 지금은 어느새 잊히고 만 지식이다.
"우리는 닌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닌겐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데스. 하지만 커다란 네모를 들고 있는 닌겐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스."
"닌겐은 실장석을 죽이기도, 보살피기도, 먹기도, 괴롭히기도 하는데스. 닌겐에게 접근하기 전에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데스. 무관심한 닌겐이 제일 좋은데스."
"까만 길을 밟으면 위험한데스. 눈 깜짝할 새에 납작해져 죽게 되는데스."
"작은 닌겐일수록 위험한데스. 하지만 머리카락이 긴 닌겐은 덜 위험한데스."
"밖의 실장석은 닌겐에게 빌붙고, 네모난 집을 주워다 살며, 운치를 모으는 굴에 독라를 가둬 노예로 삼으려는데스."
“달콤하고 울퉁불퉁하며 동그란 것을 조심하는데스. 그걸 먹는 실장석은 대개 죽게 되는데스.”
장로는 간간히 눈썹을 찌푸리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짜 냈다. 한결같이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몇 세대 동안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이 지식들이 장로에서 장로 사이로 아슬아슬하게나마 전해 내려온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를 끝마쳤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넘치는 정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독라는 집으로 돌아가 일찌감치 눈을 붙였다.
이른 새벽, 길을 떠나는 독라를 배웅하는 자는 장로 혼자였다.
"이걸 받는데스."
장로가 내민 것은 튼튼한 나무창과 큼직한 초록색 꾸러미다. 창끝은 보기만 해도 찔릴 듯 날카로웠고, 추자의 두툼한 옷으로 만든 꾸러미는 깨끗한 머리털 한가득과 말린 고기조각 한 움큼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꾸러미라면 추자 수십 마리의 옷감은 필요했을 것이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와타시의 뾰족이인데스. 또 만들면 되니 염려 마는데스. 그리고 밖은 추우니 이 꾸러미를 펼쳐 덮고 자는데스. 길실장을 만나면 머리와 옷을 빼앗아 옷감에 덧대는데스.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하는데스. 그리고... 오마에에게 맡길 일이 하나 있는데스."
장로는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녘 하늘에 장로의 얼굴이 푸르게 보였다.
"이 마을에서 독립해 나간 마을이 둘 있다는 것은 오마에도 알 것인데스."
"하나는 옆 산에 잘 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소식이 끊어지지 않은데스까?"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스. 하지만 사실, 두 번째 마을을 세우려고 떠난 실장석들이 바로 소식이 끊어진 것은 아닌데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을 세운 후 한동안 우리 마을과 연락이 있었던데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실장이 사라지고, 곧 그 마을의 소식 또한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데스."
"마을이 망하고 흔적도 없어지는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데스. 하지만 왜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겨온데스까?"
"그 무리는..."
장로는 모독적인 말을 내뱉듯 표정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듯 말했다.
"닌겐의 곁에서 산 데스."
독라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대답 대신 장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로는 독라의 눈길을 피하고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와타시도 말로만 들은 것이라 잘은 모르는데스. 하지만 그 무리가 닌겐과 함께 산 것은 틀림없는데스. 두 번째 무리가 떠난 다음 봄, 산 아래에서 길실장 하나가 올라온데스. 두 번째 무리를 따라 떠난 실장석이었던데스. 그 실장석은 자기 마을이 좋은 닌겐을 만나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한데스."
"닌겐이 좋은지 아닌지를 우리가 알 수 없는데스."
"물론인데스. 하지만 그 실장석은 말한데스. 자기 무리는 외딴 닌겐의 집에 자리잡아 닌겐을 돕고, 닌겐에게 도움 받고 살고 있다고 말한데스. 그 증거로 그 실장석은 닌겐이 가르쳐 주었다는 지혜를 알려 준데스."
장로는 마을 귀퉁이의 풀숲을 가리켰다. 풀숲에 우거진 덤불은 항상 무성한 열매를 맺어 든든한 먹이가 되어 주고 있었다.
"열매를 땅에 묻으면 자라나 다시 열매를 맺는다는 지혜인데스. 그 말대로 수많은 열매를 묻어봤고 거의 실패했지만, 저 덤불만은 성공해 지금까지도 여름마다 열매를 맺어주는데스. 닌겐은 위험하지만, 닌겐의 지혜는 이렇게 대단한데스. 그 때의 장로사마는 닌겐의 지혜를 계속 배울 것이냐, 아니면 아랫마을과의 연락을 끊고 위험의 싹을 없앨 것이냐의 고민 끝에 연락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데스.
그 이후로도 철마다 아랫마을에서 실장석이 올라와 이런저런 것들을 전해주었지만, 어째서인지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었고 금방 잊혀진데스. 여러 해가 지나며 아랫마을에서 길실장을 올려 보내는 일도 점점 뜸해졌고..."
"결국 연락이 끊어진 모양인데스."
"그런데스. 언젠가부터 봄이 지나고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도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은데스. 닌겐의 보호를 받는 마을라면 달리 망할 일이 없기에, 아랫마을은 다름 아닌 그 닌겐의 손에 실각되었다고 다들 생각한데스. 그 때의 장로사마는 닌겐에게 빌붙는 무리가 더 나오는 일을 막기 위해, 아랫마을은 처음부터 연락이 끊어졌던 것으로 정한데스. 와타시와 같은 장로들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데스."
“하지만 장로사마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스.”
“생각해 보는데스, 오마에.”
장로는 마스크를 내리고 몸을 기울여 독라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벌어진 입에서 썩은 내가 풍겼지만, 긴장감에 정신이 팔린 독라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랫마을은 분명 닌겐을 '돕고'있다고 말한데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실장석을 갑자기 닌겐이 대체 왜 죽이는데스까?"
"닌겐은 실장석이 이해할 수..."
"아니, 아닌데스. 닌겐은 겉모습만큼이나 우리와 닮았다고 있다고 와타시는 믿는데스. 변덕대로만 사는 실장석을 생각해보는데스. 보존식을 모았다가 하루아침에 몽땅 먹어버리는 실장석을 생각해 보는데스. 그런 실장석이 겨울을 나고 자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스까? 절대 아닌데스. 닌겐도 마찬가지인데스. 산을 깎고 강을 메우는 인간의 힘을 보는데스. 닌겐이 그렇게 멍청하다면, 닌겐은 그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스."
"..."
"닌겐은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 아닌데스. 단지 닌겐의 깊은 생각을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닌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넘겨짚는 것 뿐인데스. 그래서 와타시는 믿는데스. 아랫마을을 망친 것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닌겐이 한 일은 절대로 아닌데스."
"..."
"그래서 와타시는 오마에에게 임무를 주는데스. 아랫마을은 시냇물을 따라 하루하고 반나절을 내려가면 있었다고 들은데스. 그곳에 가서 아랫마을이 정말로 닌겐 때문에 망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아보는데스. 꼭 우리 마을에 알려 줄 필요는 없는데스. 다만 닌겐에게 보호받는 마을을 실각시킬 정도로 위험한 그 이유를 찾아 다른 마을에 반드시 전하는데스."
"...잘 알겠는데스.“
"길실장이 사라지고 어떤 실장석도 산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는데스. 어떤 위험이 있을 지 모르는데스. 몸조심하는데스."
"더 할 말은 없는데스까?"
"...행운을 비는 데스.“
독라는 길을 나서려다 문득 떠오른 듯 장로에게 말했다.
"장로사마."
"말해보는데스."
"와타시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는데스까?"
"오마에는... 더 이상 마을의 실장석이 아닌데스. 와타시도 이제는 오마에의 장로가 아닌데스. 길실장의 이름은 길실장 스스로 찾는 것인데스."
독라는 잠시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황금빛 여명을 등진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개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장로는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마을로 돌아갔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깨어나는 마을이 점점 부산스러워진다. 쳇바퀴 같은 실장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 기준으로 도랑에 불과한 개울은 사람 무릎에 닿는 독라 입장에서도 만만했다. 독라의 허벅지밖에 안 오는 잔잔한 개울. 산을 내려가는 길도 그만큼 편안했다.
개울은 숲으로 통했다. 멀리까지 먹이를 구하러 왔던 동료들의 흔적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고, 잎망울이 트기 시작한 나무는 개울을 걷는 독라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쥐고 흔들면, 바닥에 깔린 그림자 사이사이 수천 개의 빛점도 따라서 흔들린다.
따뜻한 봄. 서늘한 바람.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산새가 지저귀는 나뭇가지 사이로 손끝을 뻗고, 독라의 바로 옆에서 졸졸졸 흐르는 개울은 너무나 투명해 그 속의 송사리는 마치 허공에 떠서 헤엄치는 듯하다.
물고기를 잡아 보려던 독라는 연이은 실패 끝에 포기하고, 대신 나뭇가지에 벌레 몇 마리를 꿰어 뜯어먹으며 숲을 걸었다. 꿈틀대는 자벌레를 입에 밀어 넣고 우물대며 빈 나뭇가지를 개울에 던지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다가 다시 떠오르더니 물살에 실려 둥둥 떠내려간다.
인기척도, 포식자도 없다. 들려오는 것은 시냇물 소리와 간간히 들려오는 산새 소리, 그리고 솨-하고 잔가지를 헝클어뜨리는 바람 소리. 독라는 배낭을 머리에 받치고 그늘에 잠시 누워, 마스크를 내리고 얼굴을 간질이는 봄바람을 느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는데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 눈꺼풀이 기분 좋게 감기고, 가슴과 배에서 따뜻한 기분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독라는 저도 모르게 이곳에서 유유자적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나뭇가지를 얽어 세우고 나뭇잎을 붙여 지은 집. 보드라운 흙에 풀을 깔아 만든 침대와, 구덩이에 가득 들어찬 보존식.
하지만 이윽고 상상은 봄을 지나 여름, 가을, 겨울에 이르렀고, 쏟아지는 눈발과 추위, 굶주림, 포식자...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독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자리를 떨쳐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편안함에 빠져 죽는 게 행복일 리 없는데스."
산을 내려갈수록 개울물은 점점 불어났다. 해가 중천을 넘을 때쯤 되니, 허벅지에 닿던 물은 이제 허리까지 올 만큼 깊어져 조그만 계곡을 이루었다. 빨라진 물살이 하얗게 부서지며 돌 위로 떨어진다. 평생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만 보다가 처음 목격하는 광경에 독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기한데스..."
졸졸졸 떨어지는 물결에 손을 갖다 대니, 물살이 갈라지며 하얀 물방울이 이리저리 튄다. 문득 느껴지는 목마름에 몸을 앞으로 숙이자,
미끄덩, 풍덩.
"데에에엑!"
이끼가 덮인 채 촉촉히 젖은 바위는 대단히 미끄러웠다. 균형을 잃은 독라는 그대로 미끄러져 물살에 휩쓸려갔다.
"데벳! 덱! 데갹! 어푸! 어푸푸! 데푸! 데푸앗!"
허리밖에 오지 않는 물살은 독라를 떠내려 보낸다기보다는 계곡을 따라 굴려 보냈다. 여기저기 부딪혀 멍투성이가 되어 가며 데굴데굴 구르던 독라는 굵은 나뭇가지를 간신히 붙잡고 물가로 기어올랐다.
"데에에에..."
온몸이 욱신거린다. 배낭은 물을 흠뻑 머금었고, 장로가 챙겨 준 보존식도 젖어 버렸다. 마스크는 벗겨져 저 멀리 떠내려갔고, 나무창은 부러진 채 계곡 한가운데 바위틈에 끼어 있다. 마을에서 챙겨 온 물건들이 순식간에 몽땅 못 쓰게 되었다.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독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남은 것들을 갈무리했다. 물에 젖은 고기는 그 자리에서 꾸역꾸역 먹어버리고, 배낭은 꼭 짜낸 후 물기가 마르도록 잘 펼쳐놓았다. 안에 채워진 털들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눌러놓기 위해 자갈을 모으는 독라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아까 계곡에서 탈출할 때 붙잡았던 나뭇가지다.
다시 보니 그것은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색깔은 군데군데 붉게 얼룩진 보라색이었고 이상하게 매끈매끈했으며, 길이는 독라의 키 몇 배는 되면서 굴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 봤다면, 어느 철없는 사람이 산속에 쓰레기를 버려놨냐고 혀를 찼을 것이다. 좀 더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오래 전 누군가 등산이라도 했다가 지팡이를 버리고 내려갔나 보다, 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알 리 없는 독라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자연적인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물건이다. 인간의 집이, 두 번째 무리가 정착했던 곳이 가까이 있다.
불길한 기분이 엄습한다. 온몸의 피부가 오톨도톨해지고 속이 쓰려오기 시작한다. 심장이 오그라들어 목구멍으로 밀려 올라오는 듯하다.
"닌겐."
독라가 중얼거렸다.
음절 하나하나가 천근같이 무겁다.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온 몸을 조여 온다.
바람보다 빨리 달리고, 새보다도 높이 날고, 돌을 부수고, 땅을 가르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접근해야 한다. 인간의 집에 들어가야 한다.
온몸이 후들거리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오른손이 왠지 자꾸만 입가로 올라가려고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을로 도망치고 싶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독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주먹을 움켜쥔 채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며 머릿속으로 되뇌였다.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독라는 끊임없이 뇌까렸다. 모든 감각이 갑자기 희미해지더니 별안간 멈추고, 전부 어두운 의식 저 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 어느새 독라는 캄캄한 공간에 있었다.
한 점의 빛도 없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도 없고, 바닥도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끝없는 공간 가운데 혼자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독라는 한없이 편안하고 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고만 싶다. 독라는 한참을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딜 가도 빛 한 점 없이 투명한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독라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랫마을을 찾아야 하고, 다른 마을을 찾아야 하고, 무엇보다 독라는 행복을 찾아야만 했다. 결심을 굳힌 독라는 유혹을 떨쳐내고 눈을 떴다.
독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위석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식이 차단된 것이었지만, 독라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둘러보던 독라는 이윽고 펼쳐놓았던 배낭을 황급히 찾았지만, 푹신하던 터럭은 이미 전부 바람결에 날아가고 녹색 천 조각만 자갈에 눌려 나부끼고 있을 뿐이었다.
밤바람이 불어와 점점 으슬으슬해진다. 바람이 덜 닿는 바위틈에 몸을 바싹 붙이고 넝마를 덮자, 굳어가던 몸이 그나마 한결 따뜻해졌다.
"머리칼과 옷이 있었다면 몸이 마르지 않아 얼어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스."
독라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중얼대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에 절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독라의 눈꺼풀을 한낮의 태양이 쪼아댄다. 부스스 일어남과 동시에 허기와 변의를 동시에 느낀 독라는 널찍한 바위 위에 기어올라 엉덩이를 쭉 빼고 힘을 주었다.
뿌직뿌직뿌직...
뱃속을 비우고 녹색 똥더미 옆에 퍼질러 앉은 독라는 속에서 나온 것을 다시 속으로 되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아리고 떫은 그 맛은 평생을 먹어도 맛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익숙해지면 목구멍에 그럭저럭 쑤셔 넣을 정도는 되었다.
바닥과 손에 묻은 것까지 싹싹 핥아먹은 독라는 바위를 기어내려 냇물에 엉덩이를 씻고, 팬티 한 장과 넝마 한 장만 걸친 채 길을 나섰다.
산을 걸어 내려가기를 계속해 어느덧 다시 늦은 오후, 독라는 자신이 걷는 길이 어딘지 이상함을 눈치 챘다. 우거진 수풀 가운데, 독라가 딛는 땅만 풀 한포기 없이 다져진 흙바닥이었다. 누군가가 꾸준히 밟고 다녀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이 길을 독라는 저도 모르게 따라 걷고 있었다. 뭔가 부자연스럽다. 동물이 다닌 길 같지는 않다. 자연 속에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흔적을 남기는 존재라고는...
인간.
여지껏 애써 외면하던 두 글자가 다시 머릿속에 불타는 낙인처럼 떠올라 고동치기 시작했다. 독라는 문득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거리에 보였다.
인간의 집이.
직각과 네모로 이루어진 인간의 기괴한 집은 노을빛을 받고 소름끼치는 색깔로 빛났다. 그리고 그 너머, 먼 곳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다른 집들이 보였다. 인간의 마을이다.
거대한 암석 같은 인간의 집은 그 자체로 요새였다. 아무리 큰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불어도 미동도 하지 않을 압도적인 요새. 수십 년 간 파내려간 독라의 마을은 이에 비하면 거적때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자연을 넘어선 인간의 힘에, 독라는 다시금 공포로 전율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다리가 후들대고 시야가 뒤흔들린다. 그에 비해 인간의 집은 너무나 차분하게, 천년 묵은 바위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독라를 미치게 했다. 저 거대한 물체가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당장이라도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독라는 이미 느꼈기 때문이다.
저곳에서 풍겨오는 강렬한 냄새.
실장석의 냄새. 동족의 냄새를.
저곳에 동족이 살아 있다. 하지만 어째서? 아랫마을은 멸망한 것이 아니었나? 혹시 아랫마을이 아니라 다른 실장석인건가? 그렇다면 아랫마을은 어떻게 된 건가? 아니, 저 집이 아랫마을이 정착했다는 곳이 맞긴 맞는 건가?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저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대답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호기심이, 해답에 대한 갈망이 독라를 한 걸음 한 걸음, 지옥의 문처럼 붉게 빛나는 인간의 집을 향해 홀린 듯이 나아가게 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간의 집은 점점 커져만 갔고, 멀리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장애물이 독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담벼락이다.
야트막한 담장이었지만 실장석은 죽었다 깨어나도 넘을 수 없는 장벽. 독라는 들어갈 구멍을 찾으며 담벼락 주위를 빙빙 돌았고, 이윽고 대문을 발견했다. 운 좋게도 대문은 빼꼼 열려 있었지만, 성체 실장석이 지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문을 열 줄 모르는, 아니 문이 뭔지 모르는 독라는 좁은 틈바구니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이곳이 인간의 집인 건 확실하다. 이곳으로 인간이 드나드는 것도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실장석도 통과할 수 없는 좁은 틈을 인간이 어떻게 지나간단 말일까?
한참 동안 생각하던 독라는 문을 슬쩍 밀어 보았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양손을 대고 더 강하게 밀어 보았다. 여전히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독라는 숨을 들이쉰 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문을 힘껏 밀어보았다. 거대한 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스르륵 열린다. 조심스럽게 틈새를 통과하는 독라. 그 순간,
"컹컹컹컹! 컹컹컹컹컹!“
독라를 맞이한 것은 코앞에서 딱딱대며 부딪는 수십 개의 이빨이었다. 익숙한 녹색 천조각과 갈색 터럭이 끼어 있는 주둥이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달려들다가, 독라의 눈앞에서 별안간 탁 멈추었다. 정신이 멍멍하고 어질어질해진다. 독라는 저도 모르게 팬티를 부풀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머릿속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에 독라의 귓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팽팽한 목줄을 끊어낼 듯 땅을 미친 듯이 긁으며 날뛰는 맹견에게 압도된 독라는, 한 손에 막걸리 병을 들고 쿵쾅대며 뛰쳐나오는 집주인을 알아채지 못했다.
"딸꾹, 저눔의 개새끼가 미칬나, 와 갑자기 짖고 지랄이고?"
"컹컹컹! 컹컹컹컹!"
"잉? 이 참피 아이가? 야가 우째 기어나왔노?"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얼어붙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가락이 독라를 낚아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몸이 솟구쳐 아찔한 높이로 가볍게 올라간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 쌍의 거대한 눈이 독라의 적록색 안구와 마주쳤다.
시야를 가득 메운 얼굴
희번득이는 두 눈
구덩이 같은 입 속에서 꿈틀대는 혀
하얀 머리카락
시뻘건 피부
흉곽을 울리는 목소리
온몸을 휘감은 나무뿌리같은 손가락
독라는 인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데데데데데데데"
"야는 와 홀딱 벗고있노? 마, 니, 꺼윽, 즈 똥구딩이에 사는놈 아이가? 니 우째 기어나왔노?"
"데데데데"
"야가 자꾸 뭐라 씨부리쌋노? 댔다, 마. 니 기어나올 생각 말고 내일까지만 얌전히 있으라잉."
"데데데데데데"
남자는 독라의 넝마와 팬티를 휙 벗겨다 던졌다. 짖어대던 개가 넝마에 냉큼 달려들어 조각조각 물어뜯기 시작한다, 한 손으로 독라를 가볍게 들고, 상상도 못 할 속도로 인간은 어디론가 걸어갔다. 끼익 하는 마찰음이 들리고, 몸뚱이가 아래로 던져지는 것을 느끼며 독라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독라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사방이 캄캄하다. 잠시 후 달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자신이 깊고 넓은 구덩이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이 똥냄새로 진동하는 구덩이는 사람 가슴까지 오는 깊이었고, 안에서 수평으로 파 들어가 입구에 비해 널찍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수십 개의 적록색 구슬이 달빛에 반짝인다.
"여기가 어디인데스..."
독라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도로 주저앉았다. 구덩이로 떨어질 때 부러졌는지, 두 정강이가 시퍼렇게 퉁퉁 부어 있었다. 재생되려면 아침은 되어야 할 것이다.
할 수 없이 독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어쩌다 이곳에 있게 되었는가. 가만히 앉아 골똘히 생각하자 기억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족의 냄새를 쫓아 인간의 집에 들어왔고, 인간에게 잡혔다. 인간이 뭐라고 말을 했는데...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두려움에 떠느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독라는 입구를 향해 외쳤다.
"밖에 누구 없는데스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스까!"
밖에서 데샤앗 하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적록색 눈들이 재빠르게 사라진다.
"노예가 오밤중에 왜 시끄럽게 지랄인데샤! 운치나 처먹고 닥치는데스!"
입구를 통해 동그랗게 보이는 밤하늘 귀퉁이에서 주름지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이 보이더니, 지저분한 엉덩이가 쑥 내밀어져 독라의 얼굴을 향해 똥을 푸다닥 푸짐하게 쏟아냈다. 재빨리 옆으로 굴러 녹색 폭포를 피한 독라의 옆에 똥이 쏟아져 사방으로 튀었다.
"와타시의 고귀한 운치나 먹으라는데스! 데프프.“
온 사방이 이미 똥으로 범벅인지라, 바닥에서 구른 독라의 몸은 똥을 피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더러운 녹색으로 칠해졌다. 어둠 속에서 적록의 눈들이 다시 하나 둘 나타나더니, 갓 싸낸 뜨끈한 똥무더기를 향해 꾸물꾸물 몰려와 고개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삼키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쏟아지는 달빛에 비친 그것들의 모습은 모두 피둥피둥한 독라 실장석이었다. 경쟁에서 밀려나 울부짖는 녀석, 뭉툭한 양손에 똥을 듬뿍 묻히고는 꿀을 찍어먹는 곰돌이 푸처럼 쪽쪽 빨아먹는 녀석, 양 눈에 녹색 똥이 칠해져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입에 똥을 쓸어 넣는 녀석. 수많은 독라들이 벌레 떼처럼 모여들어, 갓 싸낸 똥덩이를 입에 넣으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먹으라고 준 운치니까 먹어도 되겠지. 독라는 손가락 끝으로 똥을 살짝 찍어 맛봤다. 잘 먹고 싼 똥인 듯 맛이 달짝지근하고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색깔도 연녹색인 것으로 보아 똥을 먹고 다시 싼 똥이 아니라 밥을 먹고 싼 첫 똥인 모양이다.
'들실장은 독라에게 운치를 던지고 노예로 삼으려고 하는데스.‘
독라는 장로의 말을 떠올렸다. 노예가 뭔지는 독라도 알았다. 독라의 마을에서는 가끔씩 일손이 모자랄 때 분충이 생기면, 죽이기 전에 노예로 만들었다. 살려두면 골칫거리가 될 수 있으므로 하루 종일 부려먹고 저녁이 되면 죽였다. 그런 일용직 소모품인 노예에게 이렇게 귀한 식량인 똥을 퍼 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저 위의 실장석들은 들실장이 아닌건가? 들실장이 아니라면 혹시 아랫마을이 망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하던 독라는 자신의 옆에 아귀처럼 모여든 살찐 독라들을 쳐다봤다. 방금 쏟아진 똥은 삽시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식사를 못 한 한 놈이 발광하여 뱃살을 흔들며, 다 삭아 없어진 이빨로 독라를 물어뜯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랫마을이라면 양손에 있어야 할 손가락은커녕 지성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 굴 밖에 있던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고귀한 어쩌고 하는 말투와 천박한 얼굴, 펑퍼짐한 엉덩이만 봐도 어지간한 분충임이 확실하다. 이런 열등한 무리가 아랫마을일 리 없다.
독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에게 뭉툭한 이빨을 박아 넣으려고 애쓰는 녀석의 머리를 따고 미끈거리는 뇌를 파먹기 시작했다. 꿈틀대는 시체의 코에서 피 섞인 초록색 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그 광경을 본 다른 독라들이 데샤아악 하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쌍의 눈이 있었다.
"오마에는 누구인데스까?"
나이 들어 보이는 실장석 하나가 달빛 속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피둥피둥했지만, 덩치는 훨씬 커서 독라와 맞먹을 정도다. 눈빛은 흐릿했지만 이성의 빛이 분명히 남아 있었고,
그리고 양손에는 다섯개의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독라는 우물대던 입을 멈추었다. 나이든 실장석도 독라의 손가락을 알아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마에... 혹시 윗마을에서 내려온 데스까...?"
"...그런데스.“
질문을 던진 실장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린 채 소리 없는 눈물만을 줄줄 흘렸다.
"와타시는 아랫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 내려온데스. 대답할 수 있는데스까?"
"..."
"오마에 말고 살아남은 실장석이 있는데스까? 아랫마을은 어떻게 된 데스까?"
"..."
나이 든 실장석은 대답이 없었다. 독라는 더 이상의 질문을 멈추고, 펑펑 울고 있는 실장석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실장석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오마에가 찾는 답은 와타시에게 있는데스. 와타시는 아랫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스. 왜냐하면..."
이어지는 말을 들은 독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랫마을은 바로 와타시가 세운 마을이기 때문인데스.“
실장석은 늙지 않는다. 세포의 재생력이 떨어지고 기능이 퇴화하는 것이 노화의 원인임을 생각하면, 재생력이 무한한 실장석의 수명 또한 무한함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충분한 먹이를 공급받는 사육실장의 얘기일 뿐. 실장석이 육체적, 심리적 손상을 받았을 때 이를 회복하기 위한 에너지가 부족하면, 실장석의 몸은 그만큼의 에너지를 위석에서 충당한다. 잉여 에너지를 보충 받지 못하면 위석은 점점 축나들고, 위석이 축난 만큼 실장석은 늙는다.
야생의 실장석에게 있어 매일매일 양껏 먹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장석의 대사량에 비해 섭취하는 에너지는 턱없이 부족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위석은 매일 에너지를 뽑힌다. 누적되는 손실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어 위석이 파괴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수 년. 크게 다쳐 재생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수명은 여기서 더 깎인다.
그런데 지금 독라의 눈앞에는 수 세대, 십 수 년을 살아왔다는 실장석이 서 있다.
"다시 한번 말해보는데스."
"...와타시가 아랫마을을 세운 길실장인데스. 아랫마을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장로. 아랫마을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것이 바로 와타시인데스."
"산 아래로 무리를 이끌고 떠난게 오마에라는 말인데스까?"
"와타시가 맞는데스."
"닌겐의 곁에 정착한 것도 오마에의 결정이었다는데스까?"
"와타시의 결정이었던데스."
"와타시의 마을로 길실장을 올려보낸 것도 오마에인데스까?"
"와타시의 장녀를 올려 보낸 것 또한 와타시인데스."
독라는 멈칫했다. 자식을 철저히 남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은 독라에게, '나의 장녀'라는 말의 어감은 어딘지 모를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아랫마을의 소식이 끊긴 건 무엇 때문이었던데스까?"
"그건..."
늙은 실장석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공허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독라의 마음을 긁는 이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누가 아랫마을을 망하게 한 데스까? 아랫마을이 실각한 이유가 무엇인데스까?"
독라의 재촉에 아랫마을 장로는 대답 없이 쓴웃음만을 지었다. 이질감은 계속 커져 의심이 되었고, 다급해진 독라는 재차 물었다.
"대답하란데스!"
"...와타시가 원인인 데스. 모두 와타시의 책임인데스."
독라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장로를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말 돌리지 마는데스! 아랫마을의 실장석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냐는 말인데샤!"
'미친 노예가 밤중에 시끄럽게 자꾸 뭐라고 쫑알대는데샤! 내일 아침에 자판기로 만들어버리는데스!'
천장 너머에서 광분한 실장석의 고함이 들려왔다. 장로는 땅에 누운 채 입을 헤 벌리고, 텅 빈 눈으로 천장만을 쳐다봤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끔찍한 기분이, 독라의 등골을 타고 기어올라 온몸에 퍼져나갔다.
"와타시의... 마을은... 사라진 것이 아닌데스..."
장로가 건조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여기 이곳... 그리고 저 땅 위... 오마에는 이미... 아랫마을에 와 있는데스."
장로의 어깨를 부여잡던 독라의 손이 탁 풀렸다. 맥이 풀리고 별안간 졸음이 밀려온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졸리다. 자고 싶다.
독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픽 쓰러져 잠들었다.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던 장로는 독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구석으로 끌고 가 눕혀 주었다.
악머구리같이 떠드는 실장석의 울음소리에 독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구덩이 안으로 흘러드는 밝은 햇빛에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곧 익숙해졌고, 이윽고 독라의 위치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보이는 입구와 그 주변을 빙 둘러싼 성난 실장석들, 그리고 그 아래에 서서 똥을 맞고 있는 장로의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 시끄럽게 떠든 노예를 당장 끌고 나오라는데샤!"
"감히 와타시의 단잠을 방해하다니 총구부터 아가리까지 찢어 죽여야 하는데샤! 방해하면 오마에부터 죽여버리는데스!"
"제발 진정하시는데스... 어제 날뛴 실장은 갑자기 정신이 나간 독라노예였던데스. 와타시가 저렇게 손을 봐줬으니 그만 노여움을 푸시는데스."
장로는 어제 독라가 잡아먹은 실장석의 시체를 가리키며 간청했지만, 성난 실장석들은 더욱 날뛸 뿐이었다.
"데샤앗! 감히 와타시의 노예를 오마에가 죽인데스!"
"독라를 죽이는건 와타시의 특권인데스! 오마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온데스? 목숨으로 사죄하는데샤!"
장로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와타시의 짧은 생각을 사과하는데스. 하지만 오늘은 닌겐들이 아나타상들을 모셔가는 기쁜 날 아닌데스까? 고귀한 아나타상들의 은혜로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라는데스."
시뻘겋게 물들었던 실장석들의 얼굴이 눈 녹듯 풀렸다.
"데프프, 그러고 보니 그런데스. 닌겐노예들이 와타시를 모시러 오는 날이 바로 오늘인데스."
"세레브한 실장생이 기다리는 와타시에 비해 저 독라는 너무나도 초라한데스. 데퍄퍄! 저런 건 죽일 가치도 없는데스.“
분충들이 떠나간 것을 확인하고 우두머리는 한숨을 내쉬며 독라에게 다가갔다.
독라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닌겐이 노예가 되어 저것들을 데려간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데스까?"
장로는 깊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저 자들은 닌겐의 상품인데스."
독라는 눈을 꿈뻑였다.
"상품이 뭐인데스까?"
"저 자들은 다른 닌겐에게 파는 실장석이라는 뜻인데스."
"...판다는 건 무슨 뜻인데스까?
우두머리는 거래와 시장의 개념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독라는 경제의 개념을 단박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저 실장석들이 인간에게 사육되고, 인간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독라의 마을에서 부렸던 노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남을 위해 존재하는 삶의 끝은 좋지 않은 법이다.
"오늘 저녁이 되면 닌겐이 와서 저 자들을 상자에 쓸어 담는데스. 상자에 담긴 실장석들은 저 멀리 어디론가 실려가는데스."
"실려 간 자들은 어떻게 되는데스까?"
"먹히는데스.“
장로는 간단하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세상 모든 동물은 먹고 먹힌다. 어젯밤 독라가 뜯어먹은 실장석의 잔해가 구석에서 냄새를 풍기며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강한 인간이 약한 실장석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독라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원인을 알아야 했다.
"아랫마을이 어쩌다 '상품'이 되었는지 차근차근 말해보는데스."
장로는 독라의 곁에 주저앉아 회한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와타시는 먼 마을에서 태어나 길실장으로 떠돌다 오마에의 마을에 정착했던데스우..."
젊은 시절, 장로는 급진적이고 야심찬 길실장이었다. 동족들은 인간을 불가해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장로는 오히려 인간을 기회의 발판으로 생각했다.
실장석끼리 백날을 교류하고 머리를 맞대도 얻는 이득은 지리멸렬할 뿐, 잘해 봐야 새로운 먹이터를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실장석이 인간과의 교류에 성공할 때마다, 이들은 하루 아침에 수백 년을 뛰어넘는 진보를 이루었다. 아무리 인간에게 쓸모없는 지식이라도 실장석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진전이었다.
수십만년 간 맨손으로 살아온 실장석이 도구를 손에 쥐게 되었다. 똥이나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던 실장석이 무기를 만들어 침입자를 물리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접근한 최초의 실장석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아직도 맨바닥에서 잠들고 새벽이슬에 얼어 죽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인간은 위험하지만 그 열매는 달다.
그래서 장로는 인간과 더 깊숙이 교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장로가 무작정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장로는 길을 떠돌던 중, 강변공원에서 실장석에게 먹이를 뿌리던 한 애호파를 만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애호파는 커다랗고 네모난 것을 두 손으로 들고 있어, 그것을 통해 장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최초로 출시된 PDA형 린갈이었다.
‘닌겐상은 어째서 우리들에게 음식을 주는데스까?’
"음...글쎄.. 재밌으니까? 귀엽잖아!"
‘귀엽다는 게 무슨 의미인데스까?’
"어... 귀여운 게 귀여운 거지! 테치테치 데스데스거리고, 꼬물거리면서 춤도 추고! 보고 있으면 즐겁거든."
즐거움이란 또 무엇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장로는 고개를 돌려 아귀도를 재현하고 있는 실장석들을 바라보았다. 비대한 몸을 흔들며 서로를 밀어내는 실장석. 자신의 노예가 되라며 인간을 위협하는 실장석. 어째서인지 인간은 저 꼴을 보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애호파가 악취미인건지, 린갈이 실장석의 악다구니를 엉뚱하게 번역하는 건지 구분할 길은 없었지만, 장로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 인간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실장석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으면 인간과도 교류할 수도 있다.
인간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어느 가을날, 장로는 이름 모를 산을 오르며 개천 건너편에 보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붉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골판지 상자 같은 인간의 집. 그 곁에는 인간의 땅에서 먹이를 훔치려다 머리가 터져나가는 들실장들과, 고함을 지르며 놈들을 쫓아 막대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장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단풍으로 물든 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족의 마을이 자리해 있다고 전해들은 산이었다.
1년 후, 윗마을에 정착했던 장로는 다섯 마리의 독라를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
"이후는 순조로웠던데스. 닌겐은 처음에는 우리를 의심했지만 곧 우리를 믿어주었고, 그 믿음이..."
장로는 건조하게 말했다.
"결국 우리를 병들게 한 데스."
장로의 무리는 인간의 집 옆 강가에 자리를 잡고, 텃밭에 접근하는 실장석을 착착 죽여 나갔다. 그 모습은 곧 집 주인의 눈에 띄었다. 긴가민가하던 인간은, 얼마 안 가 이 수수께끼의 독라 실장석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한 달 후, 인간은 린갈을 갖고 나타나 말을 걸었다.
"우리 마당에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
인간은 어색한 표준어로 말했다.
"밖은 위험하다. 동물들에게 잡아먹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갈 수도 있어. 마당 구석에 집을 마련해주마."
바라던 바였다. 인간의 지혜를 배우려면 인간과 밀접히 있어야 한다. 장로는 인간의 뻗은 손을 잡고 흔들며 미소 지었다. 그날부터 실장석들은 인간의 마당 귀퉁이에서 살며, 인간과 공생하게 되었다. 아랫마을의 탄생이었다.
들실장의 기승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산기슭 인간의 밭에 접근하면 덩치 큰 독라들의 손에 죽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얕보던 독라에게 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우두머리가 쳐들어온 일이 몇 번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다음날 어김없이 기괴한 조형물이 되어 나뭇가지에 내걸린 그들의 시체를 보고, 들실장들은 차라리 산 속이나 마을 쪽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들실장 문제가 해결되자 아랫마을은 인간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둘이서 지내고 있는 장년의 부부는 뙈기밭을 일구고 작은 축사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실장석들은 밭일을 배웠다. 여섯 마리가 모종삽을 들고 달라붙으면 사람 한두 명 몫은 거뜬히 해냈다. 부부가 가르쳐준 대로 고랑을 파고, 흙을 북돋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수확까지 끝내는 실장들이 맡은 밭은 멀칭도, 농기계도 필요 없었다.
"너희는 내 자식과도 같다." 부부는 실장석을 대단히 아꼈다. "아니, 자식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열심히 일하는 실장석들이 마음에 들어, 부부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베풀었다. 음식물 쓰레기와 똥을 먹는 모습이 불쌍해 잔반이나 돼지 사료를 주었고, 시내에 나가는 날에는 실장푸드와 콘페이토를 사갖고 오는 일도 있었다. 흙바닥에서 찬바람을 쐬며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이런저런 헝겊을 모아 잠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밭일을 마치고 흙 범벅이 되어 돌아오면 손수 씻겨 주었고, 날이 궂으면 집 안에 들여보내 주었다. 산에서 내려온 오소리가 밭일을 하던 독라를 물고 달아나자 끝까지 쫓아가 구해내고 치료해 살린 적도 있었다.
처음에 실장석들은 습관대로 눈비를 맞고 똥을 먹으며 살기를 고집했지만, 부부의 말에 끝내 그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내 자식이다. 자식이 힘들면 부모도 괴로운 법이야.“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 오랫동안 잊고 살아 온 그 따스함에 실장석들은 인간에게 마음을 열었고, 인간은 실장석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아랫마을은 인간의 삶에 점점 적응해 들어갔다.
이듬해 봄, 장로는 자신의 장녀를 윗마을로 올려 보냈다. 길실장의 전통대로 인간에게서 배운 농사의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윗마을의 장로는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아랫마을이 얻은 지식의 가치를 인정했다. 윗마을의 존재를 은폐한다는 다짐 외에는 별다른 간섭은 없었다.
무사히 돌아온 장녀를 맞이하며, 장로는 자신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을 목격했다. 인간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의 습득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눈을 가리고 비틀대며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불안했던 예전의 삶. 목적도 이유도 없이 숨이 턱에 닿도록 하루하루 노력해도, 매일 밤 잠들기 전 가슴에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의 노력은 땀 흘린 만큼 충분히 보상받았다. 무감각한 노동의 연속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하루하루가 보람차다.
안전한 집. 풍부한 음식과 물. 인간과 협력하는 삶. 이 모든 것은 정당한 노력에 의해 획득한 것이었고, 이들은 인간의 울타리 안에서 무궁한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의 그 울타리 안에서, 인간에게 보호받고 인정받는 삶 속에서, 위석을 타고 대대손손 전해 내려온 어떠한 욕망이 드디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비록 본인들은 이 기쁨을 노동의 보람이라고 착각할지라도, 마침내 장로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얼마 후 실장석들의 두 눈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수가 늘어난 실장석들은 밭일뿐만 아니라 돼지를 치는 일도 거들었다. 포대자루를 옮기고, 먹이를 뿌리고, 빈 축사를 청소하는 등의 잡일은 이제 실장석들의 몫이 되었다. 부부의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고, 독라인 1세대로부터 2세대, 3세대, 많은 자들이 계속해서 태어났다. 수십 수백 마리의 실장석을 마당에 수용할 도리가 없어, 이들은 이제 낡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살게 되었다. 1세대 실장석들은 은퇴해 부부의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자라나는 자손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랫마을은 더 이상 독라로 살지 않았다. 위생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손가락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뭉툭한 손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똥을 먹지도 않았다. 맛있는 음식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를 솎아내지도 않았다. 분충 때문에 무리가 망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를 많이 키워내 닌겐상을 도와야 하는데스." 허울 좋은 핑계였다. 태교는 ‘행복은 없다’에서 ‘행복은 있다’로, 끝내 ‘삶은 행복하다’로 변해 갔다.
“뎃데로게~ 뎃데로게~
삶은 행복한데스. 즐거운 일 가득인데스.
찰랑찰랑 머릿결과 보드라운 옷을 입고 태어나는데스~
달콤한 콘페이토, 고소한 실장푸드, 맛난 음식 가득인데스~
세레브한 와타시의 자들은 세레브한 삶을 누리는데스~.“
윗마을로 연락을 올려 보내는 일도 어느 날 결국 그만두었다. 들실장 따위와 더 이상 엮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생활을 하나씩 버려가며, 이들은 마침내 자신이 왜 여기 있게 되었는지조차도 잊게 되었다. 장로와 1세대 독라들마저도 마찬가지였다. 풍족한 생활이 계속될 것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손으로 일구어낸 것이었다. 땀과 피로 일구어낸 행복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게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우리들은 귀중한 존재라고 인간이 말하지 않았는가?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반면 노부부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날로 늘어만 갔다. 동고동락하며 일하던 실장석들의 모습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밭에 일을 보내도 하는 둥 마는 둥, 축사 일을 시켜도 사료만 훔쳐 먹고 농땡이 피우는 일이 부지기수다. 밥은 엄청나게 먹어대 등골이 휠 지경이었고, 비닐하우스에 들르면 피둥피둥한 실장석들이 외치는 욕설에 부부는 더 이상 링갈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
고향집에 들른 아들이 그 꼴을 보고 당장 육류업체에 팔아넘기려고 했지만, 부부는 아들을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사람이 어떻게 냉정하게 그럴 수가 있느냐. 짐승도 고마워할 줄 아는 법이다. 언젠가 참피들도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와 줄 것이다.
아들이 경멸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떠날 때, 장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부부가 한숨을 내쉴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인간은 우리들을 믿고, 우리들도 인간을 믿는다.
우리들은 인간의 자식과도 같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정당한 권리이다.
몇 달 후. 전국을 휩쓴 구제역은 수많은 양돈 농가를 초토화시켰고, 노부부의 작은 돼지농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의사가 찾아와 돼지들을 검사하더니, 얼마 후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트럭을 끌고 몰려와 삽시간에 축사를 말끔히 비워냈다. 보상금은 터무니없었고, 당장 막내딸의 학자금도 대기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부부는 밤이 늦도록 적막한 돼지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피들 묵을 건 줘야제" 눈물을 닦으며 아내가 말했다. "죙일 곯았을낀데."
물론 구제역이 뭔지, 그날 축사와 비닐하우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로는 보지 못했다.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한밤중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에 돌아온 여자와, 눈이 시뻘개져 자신들의 팔다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채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던 남자의 모습 뿐.
"니들은 가족이 아이다." 대롱거리는 독라들이 데덱대는 소리는 남자의 귀에 닿지 않았다. "니들은 첨부터 즘생이었다."
빈 돼지우리 사방에 합판을 두르고 실장석들과 독라들을 던져넣으며 남자가 씹어뱉듯 말했다.
"느이들은 이제 가축이다."
비좁은 우리 안에서 테챠데샤하며 항의하던 백여 마리의 실장석들은, 이윽고 본능대로 분노의 화살을 독라들에게 돌렸다.
'대체 왜?'
무수히 쏟아지는 자들의 손발에 토닥토닥 두들겨 맞으며 장로는 생각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대체 왜?'
장로는 인간의 돌변과 자들의 하극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얻어맞았다. 무엇보다 믿기 힘든 것은 자들이 외치는 욕설들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들이, 그토록 열심히 일해 귀하게 키워낸 자식들이 이제는 혐오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욕한다. 가슴 언저리가 찌르는 듯 아프다. 쩌적 하는 소리가 뼈를 타고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독라들 역시 충격에 빠져 맞기만 하다가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편안한 삶에 올려졌던 실장석들의 위석은 거짓말처럼 쉽게 부서졌다.
자신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독라들 중에는 장녀의 모습도 보였다. 윗마을에 정착해 처음으로 낳았던 장녀. 자신과 함께 산을 내려와 아랫마을을 세웠던 장녀. 길실장의 임무를 완수하고 당당히 돌아왔던 장녀. 하지만 가장 예뻐하던 손녀의 손에 똥을 먹히던 장녀는 ‘데... 데...’하며 중얼대더니, 파킨 소리와 함께 두 눈을 회색으로 물들였다.
그 순간 장로는 자신에게 날아들던 주먹을 뽑아내어 옆구리를 물어뜯던 자실장의 얼굴에 박아넣었다. 살찌고 둔해졌어도 한때 길실장이었던 장로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비만한 실장석을 가볍게 피한 다음 뱃가죽을 양 옆으로 당기자 살이 북 찢어지고 내장이 쏟아진다. 흘러나오는 창자를 허겁지겁 쓸어 담는 분충을 걷어찬 장로는 옆에서 움찔하는 녀석의 머리를 재빨리 쪼개냈다. 얼굴에 분수처럼 튀는 핏방울을 느끼며 장로의 정신은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피칠갑을 한 채 눈을 뜬 장로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살점과 내장이 튀어 있고, 살아남은 분충들이 멀찍이 떨어져 공포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의 기억이 아득히 떠올랐다. 싸우던 중 피가 눈에 들어갔는지, 가랑이 밑에는 점막에 싸인 엄지와 구더기의 시체가 수북하다.
"마..마레후...프니..프..."
마지막 남은 구더기도 간신히 고개를 들고, 장로를 향해 쌀알만 한 돌기를 바르르 뻗더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이윽고 주인집 아들이 들어와 싸늘한 얼굴로 그 광경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케이지를 든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나 헛구역질을 해 가며 살아남은 분충들을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너도나도 팔을 뻗던 실장석들은 데프픗 하고 장로를 흘겨보며 케이지 안으로 넣어졌다.
"아, 그놈은 넣지 마세요. 늙어서 냄새가 배어 못 먹을 겁니다."
장로에게 손을 뻗으려던 사람에게 주인 아들이 말했다.
너댓 마리의 분충만 남기고 케이지를 가득 채운 두 사람은 트럭에 실장석들을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겨진 분충들은 고함을 지르다 빵콘한 채 기절했고, 황량한 축사 안에는 묵묵히 담뱃불을 붙이는 주인집 아들과 간신히 고개만 들고 있는 장로만이 남았다.
"자들을 어디로 데려간데스까..."
장로가 힘없이 물었다.
심드렁하게 린갈을 읽은 남자는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빨더니 꽁초를 탁 던지고 발로 비비며 말했다.
"저놈들은 상품이다. 참피는 분충일수록 맛있으니까, 저런 놈들도 다 수요가 있거든."
"상품이 무슨 말인데스까."
남자는 거래와 시장의 개념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저 자들은 어디로 가는데스까."
"가공 공장으로 간다. 저놈들은 사람들에게 먹히는 거야."
먹는다니 무슨 말이지? 인간을 그토록 성실히 도왔던 우리를? 장로는 경악의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너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참피는 원래 그런 생물이니까. 단지 한때나마, 너희는 다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내 부모님이 안쓰러울 뿐이야."
"대체 무슨 소리인데샤!"
"모르는 거야? 너희가 그동안 어떻게 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고. 어제 너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잘못이라면 닌겐을 위해 죽어라고 일한 잘못밖에 없는-"
불현듯 깨달은 장로는 말을 삼켰다.
밭에 운치를 싸고 작물을 갉아먹던 자들의 모습. 훔친 돼지 사료를 옷 속에 불룩하게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모습. 그리고 어젯밤 비틀대며 돌아온 안주인의 옷에 잔뜩 묻어있던 녹색 얼룩.
모든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잔인할 정도로 명료하게 이해되었다. 단지 그 동안 외면해 왔을 뿐, 장로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사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랫마을은 분충의 소굴이었다. 그리고 그 분충들을 교육하지 않고 솎아내지 않은 것은, 아랫마을을 망하게 한 것은, 바로 현실의 안락함에 빠졌던 장로 자신이었다.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고, 인간과 맞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로의 오만이 독라들과 장녀를 죽게 만들었다.
남자는 멍하게 앉아 있는 장로를 냉랭하게 바라보다 축사를 나가며 말했다.
"이제 이 축사는 돼지우리가 아니라 참피우리다. 너희는 앞으로 가축으로 사는 거야. 동물이면 동물답게 인간을 위해 살다가 인간을 위해 죽으라고. 열심히 자를 낳아서 온 축사를 분충들로 가득 채워주길 바래. 잘 있어라, 똥벌레."
남자가 떠나고도 장로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던데스."
두 눈에서 적록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던데스."
파리가 뒤덮인 머리가 회색 눈으로 장로를 응시했다.
“닌겐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데스."
그려놓은 듯 적막한 축사의 안에는 햇살을 받은 먼지가 부유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던데스. 왜냐하면..."
눈물을 삼키느라 장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쩌적대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길실장의 삶이, 산실장의 삶의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루하루 힘겹고 위태롭게만 느껴지던 그 삶이...
그리고 이 결말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장로는 분명히 알았다.
장로는 벌떡 일어나 맨손으로 흙바닥을 마구 파기 시작했다.
"와타시는 더 이상 길실장이 아닌데스."
손끝이 헐어 피가 흘렀다. 두 눈에서는 새까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와타시는 장로가 아닌데스. 와타시는..."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구멍은 키보다도 깊어졌지만 멈추지 않고 파내려가며 장로는 쉬지 않고 되뇌었다.
"이제 와타시는 운치굴의 독라노예인데스."
"그 후 가끔 경쟁에서 밀려난 실장석들이 독라가 되어, 땅 위에서 이곳으로 쫓겨온데스. 그 후손이 바로 위의 실장석들과 이 독라들인데스. 아랫마을은 그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끝난데스."
이야기가 끝났지만, 독라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가만히 앉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땅 위에서 들려오는 소란이었다.
'노예가 늦은데스! 미친데샤!'
'사죄의 도게자와 스테이크를 바치는데스!'
"닌겐이 온 모양인데스. 상품으로 쓸 분충을 데려가고 있는데스."
장로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독라는 미동도 않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잘 알겠는데스."
장로의 옛이야기에 대한 대답인지, 인간이 왔다는 말에 대한 대답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독라는 말없이 운치굴 입구 아래로 걸어가더니, 전날 잡아먹은 실장석의 뼛조각을 양손에 피켈처럼 쥐고 흙벽에 박아넣었다.
독라의 의도를 눈치챈 장로가 만류했다.
"와타시의 말을 잊은데스까? 지금 나가면 다메데스, 닌겐에게 잡아먹히는데스! 포기하는데스. 포기하고 오마에는 윗마을로 돌아가 사는데스. 닌겐과 얽히는 실장석은 불행해지는데스."
독라는 등을 돌린 채 흙벽 이곳저곳을 찔러보며 대답했다.
"그것이 오마에가 얻은 답인데스까. 하지만 와타시는 와타시의 답을 얻고 싶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데스."
장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적당한 위치를 잡고 기어오르려던 독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장로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오마에."
장로는 독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길을 떠돌며, 닌겐의 곁에서 살며, 오마에가 찾고 싶었던 행복이란 무엇이었던데스까."
장로는 대답 없이 천천히 그늘 안으로 뒷걸음질 쳐 들어갔다. 적록으로 빛나는 눈만을 남긴 채 장로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고, 이윽고 그 두 눈도 수많은 눈들 가운데 섞여 들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벽을 팍팍 기어오르는 독라의 등 뒤로 장로의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복은...."
지상의 소란에 묻혀 그 뒤는 들을 수 없었다.
축사의 모습은 아수라장이었다. 인부들은 실장석을 케이지에 잡아넣을 필요도 없었다. 입구를 열고 땅에 놓기만 하면 수많은 실장석들이 제 발로 앞 다투어 밀려들어갔다. 인부들은 꽉 찬 케이지를 트럭으로 운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있었다. 독라는 기회를 엿보다가 열린 케이지 안으로 몸을 던졌고, 곧 트럭 짐칸으로 옮겨졌다.
요란한 소리와 진동과 함께 인간의 집은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낮의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뒷산과 붉은 골판지 상자 같은 인간의 집. 그 풍경이 점으로 변하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독라는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과의 협력을 통해 영원한 번영을 보장받을 것만 같았던 아랫마을. 그 아랫마을을 멸망시킨 원인은 바로 인간도, 자연도 아니라 다름 아닌...
투실한 실장석의 얼굴이 독라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똥벌레가 미쳐버린데스야. 세레브한 와타시가 있는 곳에 어딜 감히 독라노예가 숨어든데샤?"
케이지를 꽉 메운 실장석들이 독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독라는 실장석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마에는 행복을 찾은데스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데샤? 사육실장이 되어 닌겐노예가 매일 스테이크를 바치고 거품목욕을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인데스? 삶은 행복으로 가득한데스. 데프픗, 물론 오마에처럼 천한 독라에게는 예외인데스."
케이지 안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런데스까."
독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장석의 머리에 손을 대고 힘주어 돌려 밀었다. 오도도독 하는 소리와 함께, 나사못을 조여 넣듯이 머리가 돌아가며 몸통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팬티를 산더미처럼 부풀린 채 경련하는 몸뚱이를 휙 던지고, 주위를 슥 훑어보며 독라가 말했다.
"다음."
탈출은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실장석을 운송한 케이지는 독한 배설물에 절어 삭을 대로 삭아 있었다. 철망은 이미 녹슬어 실오라기처럼 약해져 있었고, 군데군데가 끊어져 트럭의 흔들림에 따라 바르르 진동했다. 한참 동안 시체를 철망에 패대기친 끝에, 독라는 철망을 뜯고 트럭 짐칸으로 뛰쳐나올수 있었다.
트럭은 이미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실장육 가공공장이 들어선 한 위성도시였다. 바람결이 독라의 매끈한 머리를 스치고, 수많은 나무들과 인간들, 하늘에 닿을 듯한 네모난 바위들이 휙휙 지나친다. 신호에 걸린 트럭이 정차했을 때, 짐칸 너머의 광경이 독라의 눈에 들어왔다. 무수한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곳 - 장로가 말한 공원이었다. 수많은 인간과 실장석이 모여든다는 유일한 장소. 저 곳에 간다면 들실장의 삶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랫마을 장로가 만났다는 ‘애호파’를 직접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운명이 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림을 독라는 직감했다.
독라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짐칸을 기어 넘어 인도에 착지한 뒤 공원으로 재빨리 걸어 들어갔다. 그 옆으로 두 개의 표지판과, 코팅된 채 고정되어 바람결에 떨리는 종이 한 장이 보였지만 글자를 모르는 독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두루마리 공원>
<실장석은 유해조수입니다. 먹이를 주지 마세요.>
<공고. 4월 12일부터 14일까지 두루마리 공원의 실장석 구제가 있을 예정이니 유의바랍니다. 후타바시 환경관리과.>
D-3
인적이 끊기고 실장석만으로 바글대는 공원은 난장판이었다. 온 사방은 초록색 얼룩으로 가득했고, 데스데스 테치테치하는 울음소리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봄을 맞아 만발했을 풀꽃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성체고 자고 죄다 양 눈이 초록색이 되어 팽팽한 배를 문지르며 꽥꽥 태교의 소리를 지르고 있다.
화장실은 붐비다 못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입구에 개미떼처럼 모여든 실장석들은 서로를 끌어내고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었다. 영문도 모른 채 휘말린 녀석, 약해진 놈을 린치하려고 뛰어드는 녀석, 혼란을 틈타 줄을 앞지르려다 붙잡혀 얻어맞는 녀석... 대단한 광경이다. 꺼지지 않는 모닥불처럼 싸움은 수백 수천의 실장석을 연료삼아 밤낮없이 불타올랐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화장실 내부 또한 못지않은 지옥이었다.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들어찬 실장석들은 조금이라도 더 변기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 서로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변기 안에 앉아 하나씩 점막을 핥아준다는 일은 상상조차 못할 일. 간신히 변기에 도착한 친실장들은 너도나도 가장자리에서 엉덩이를 쭉 빼고 화변기 안으로 새끼를 뿌직뿌직 싸댄다.
레후레치테치거리며 꾸물대는 새끼로 가득한 변기는 실장석으로 이루어진 초록색 바다와 같고, 그 살아있는 바다에 떨어진 새끼는 몇 초면 더미 밑으로 밀려들어가 압사했다. 눌려 죽은 새끼에게서 나온 피와 똥이 변기 밖으로 줄줄 흘러넘친다.
새끼를 다 낳은 실장석은 팬티를 올리고 변기를 돌아보지만, 수백 수천마리 새끼가 꿈틀대는 구덩이에서 자기 자식을 고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백 개의 눈알이 일제히 바라보며 '마마테치! 할짝할짝해주는레치! 프니프니레후!' 하고 떠들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할 수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새끼 몇 마리를 집어들고, 자기 자식이라고 믿으며 대강 핥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는 실장석들. 하지만 그 중에 진짜 자기 새끼가 있을 확률은 0%다. 힘들여 낳아봤자 자기 피를 이은 새끼를 기르는 건 불가능했지만, 행복회로를 돌리며 자기 자식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실장석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남의 새끼를 소중히 껴안고 달려 나가는 친실장의 뒤로, 쏴 하는 물소리와 함께 수백 마리 새끼의 절규가 들린다. 몸싸움을 벌이던 실장석들이 화변기 레버로 넘어지며 물을 내려버린 것이다. 빼곡한 새끼들이 가녀린 비명소리와 함께 물살에 휩쓸리고 부서지며 변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장관이다. 하지만 말끔히 비워진 변기가 다시 새끼로 가득 메워지는 데에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화장실 맨 끝 칸의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성체의 머리가 빠끔히 나와 주위를 살핀다. 경쟁이 덜한 청소도구함에서 출산한 영리한 개체다.
물이 없는 곳에서 출산하면 점막이 급격히 마르지만, 부지런히 핥아준다면 불가능하지만도 않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집에서 출산하는 것이 낫겠지만, '출산은 화장실에서.'라고 각인되어버린 실장석들에게 그 정도의 지능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동태를 살피던 친실장이 황급히 '데스데스'라고 외치며 뛰어나간다. 열 마리는 되어 보이는 자실장들이 쪼르르, 그리고 그만큼의 엄지들이 저마다 구더기를 품에 안고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 나온다. 하지만 북적대는 실장석 사이를 뚫고 나오는 건 성체에게도 힘든 일. 여기저기서 덮쳐오는 다리와 무릎을 뚫고 화장실 입구까지 도착한 새끼는 자실장 넷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어미가 안고 있지 않던 두 놈은 팔다리가 무참히 찢기고 배가 터진 상태다. 잘린 단면에서 줄줄 흐르는 피와, 주름진 레이스처럼 배 밖으로 늘어져 땅에 줄줄 끌리는 창자를 멍하게 바라보던 자실장의 얼굴이 서서히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다.
"테쨔아아아악!" "테찌이이이이이!"
친실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명을 지르는 두 자실장을 들어, 북적이는 화장실 안으로 다시 던져 넣었다. 자실장의 모습은 순식간에 감춰지고, 북적대는 소리 너머로 테찍 테벡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재빠른 결단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본 어미는 데덱 하며 얼어붙었다. 화장실 앞에서 치고받던 수십 마리 실장석들이 그 자세 그대로 멈춘 채, 방금 나온 친실장과 두 자실장을 질투의 눈으로 일제히 쳐다보고 있었다.
1초, 2초, 3초.
"데샤아아악!"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실장석 무리를 피해 친실장은 자들을 팽개치고 도망치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따라잡히고 만다. 와글대는 소리에 묻혀 비명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찢긴 귀, 눈알, 내장이 위로 휙휙 튀어나간다.
그 사이, 재빠른 한 놈은 자실장 하나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테에엥 하는 입을 틀어막고 집으로 데려가더니, 돌로 머리를 때려 흐르는 피를 눈에 묻힌다. 출산노예가 된 자실장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본능적으로 팬티를 벗고 자세를 잡는다. 주르륵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점막에 싸인 구더기가 잇따라 태어났다.
“오늘 밥은 말랑말랑한 구더기인데스. 맛있게 먹는데스요~”
“테츙~”
친실장은 노예가 낳은 구더기를 자식에게 준다. 마마레후 하는 구더기를 꼬리부터 갉아먹던 자실장이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듯, 배를 보이며 프니프니를 조르던 구더기의 꼬리를 잡고 바닥에 탁 내리친다.
"프니프뺙-"
두 눈구멍에서 눈알이 퐁 하고 튀어나오고, 입에서는 내장이 치약처럼 쭉 짜내어져 위로 솟구친다. 구더기를 계속 쏟아내며 비쩍 말라가는 출산노예가 애원의 눈길을 보내지만, 자실장은 본 척도 않고 구더기를 계속 죽인다. 기특한 자식의 모습에, 친실장의 입꼬리에 흐뭇한 미소가 감돈다.
그러나 자실장이 본격적으로 노예의 머리를 뽑고 옷을 찢기 시작하고, 노예가 “머리카락은 안 되는테치! 옷 찢지 마는테치!” 하고 소리 지르자 친실장의 안색이 변한다. 두려운 듯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독라가 된 노예를 급히 죽여 운치굴에 던져버리고 자를 숨죽여 꾸중하는 친실장. 하지만 자실장은 오히려 큰 소리로 뭐라 뭐라 대들고, 친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하얗게 질린다. 친실장은 서둘러 자의 입을 틀어막고 눈알을 이리저리 미친 듯이 굴리며,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린다.
얼마 후,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집 전체가 쾅쾅 흔들리기 시작한다. 비명을 지르는 친실장과 덩달아 비명 지르는 자실장. 곧이어 허술한 문짝이 뜯어지더니, 덩치 좋은 세 마리 실장석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 순간 친실장은 자실장을 팽개치고 혼비백산하며 튀어나가지만,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뒷머리가 부여 잡히고 말았다.
버둥대는 친과 자를 든 채 세 실장석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웃 실장석들은 떨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데? 하고 서로를 쳐다보더니 다시 싸우기 시작한다.
"활발한 공원인데스."
발치에 굴러가는 실장석 머리뼈를 툭 차날리며 독라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째 닌겐은 보이지 않고 실장석뿐인데스.“
공원은 분명 인간과 실장석이 모이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공원에서 인간을 만나보겠다는 독라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었다.
“게다가...”
독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모자식끼리도 잡아먹는 아비규환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비를 걸어오는 개체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다들 독라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 같았다. 분명 들실장은 독라 실장석에게 덤빈다고 장로가 말했는데...
"이런 곳에서 살다 보니 상대를 가릴 줄 알게 된 모양인데스."
나름대로 해답을 내린 독라는 눈앞에 보이는 골판지 집으로 다가갔다. 실장석 둘이 입구 앞에 포진해 있었다.
"당장 나오는데스! 야들야들한 새끼를 숨기고 있는 걸 다 알고 있는데스!"
"순순히 문을 연다면 자들만 잡아먹고 오마에는 자판기로 만드는 선에서 끝내주는데스!"
"꺼지는테샤!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온다면 갈가리 찢어 운치에 절여주는테스!" 집 안의 중실장이 사납게 응수했다.
"데프픗, 중실장 주제에 입만 살은데스. 아가리가 찢어지고도 그렇게 나불댈 수 있는지 두고 보는..."
집 안을 향해 을러대는 실장석을 톡톡 건드리며 독라가 말했다.
"거기 뭐 좀 물어보겠는데스."
"오마에는 또 뭐인...데...데갸악!" "데, 데에에엑!"
독라를 본 두 실장석은 기겁을 하며 팬티를 부풀리더니 혼비백산해서 어기적어기적 도망갔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독라는 골판지집 안을 향해 외쳤다.
"오마에, 안에 있는 것 아는데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두 녀석은 가버린데스. 뭣 좀 물어보는데스."
쥐죽은 듯 조용했다.
"해치지 않는데스. 문은 열지 않아도 좋으니 대답 좀 해 보는데스."
"허, 헛수작 부리지 마는테스! 당장 꺼지지 않으면 죽여버리는테샤!"
독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을 힘주어 밀었다. 빠직빠직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골판지집 문이 벌컥 열렸다.
"말장난 할 시간 없는데스.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테에에에에에에!"
중실장은 독라를 보고 하늘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더니 뒤로 쓰러졌다. 레벡, 레삑, 하는 소리와 함께 기절한 중실장 밑에서 핏물이 번져 나왔다.
독라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벌컥
"오마에, 뭐 좀 물어보는데스."
"데샤아아아악!"
- 벌컥
"반가운데스. 얘기 좀..."
"테에엑!" "테챠아아!" "레치이이!" ‘파킨’ ‘파킨’ ‘파킨’
- 벌컥
"저기..."
"데데뎃데뎃! 뎃데로게~ 뎃데로~ 데픗프~"
"미치는데스..."
자신을 보자마자 반쯤 미쳐 밖으로 달려 나간 실장석의 집에서, 독라는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한숨 자고 내일 생각해보는데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독라는 집 안에 있던 저장식을 대충 챙겨먹고 문을 닫은 뒤 자리에 누웠다.
"뎃데로? 데엑! 데갸아아! 데갸갸갸로고부바~"
집 주인의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밖에서 들리더니 잠잠해졌고, 독라는 잠에 빠져들었다.
D-2
독라가 잠든 사이, 공원의 다른 어딘가,
"데갹!"
"테칫!"
끌려와 내팽개쳐진 친실장과 자실장은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휘황한 달빛 덕택에 주위를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엄청나게 큰 골판지 상자 안이었고, 바닥에는 귀한 수건이 꼼꼼히 깔려 있었다. 양 옆에는 덩치 큰 실장석 여럿이 미동도 없이 나란히 도열해 있고, 자신을 끌고 온 세 마리도 어느새 줄 끝에 가서 서 있다.
하나, 둘, 셋, 넷... 넷보다 둘이 더 많은 만큼이 왼쪽 벽에 서 있고, 오른쪽 벽에도 그만큼이 서 있으니까... 연산력의 한계에 부딪힌 친실장은 어지러워졌다. 탁, 하고 골판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자실장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오들오들 떨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친실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앞쪽을 보았다. 코앞, 그림자로 완전히 감춰진 어둠 속에서 커다란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우두머리임을 직감하며 친실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오마에가 다른 실장석을 독라로 만든데스까?"
자실장을 향하고 있는 실루엣에서 심연처럼 낮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친실장은 펄쩍 뛰어 뒤로 나동그라지더니 고개를 처박고 횡설수설 내뱉기 시작했다.
"하, 하, 한번만 용서해 주시는데스! 자가 철이 없어서 그런데스! 와타시만이라도 살려주는데스! 두번 다시 그러지 않도록..."
"5녀."
도열한 실장석 사이에서 5녀라고 불린 실장석이 앞으로 나오더니, 친실장의 머리를 잡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퍽 퍽
"덱! 데힉! 헤햑!"
왼쪽, 정면, 오른쪽. 세 번의 주먹질로 친실장의 이빨을 모두 부러뜨리고, 5녀는 뒤로 한 걸음을 내딛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고는 다시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섰다.
"한 번만 더 와타시의 허락 없이 숨소리라도 낸다면 이빨로 끝나지 않는데스야."
우두머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친실장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실장에게 다시 한 번 묻는데스. 오마에가 다른 실장을 독라로 만든데스?"
"그, 그, 그런테치."
"어째서인데스?"
자실장은 떨면서도 당당히 말했다.
"그, 그건 당연한테치! 독라는 천한테치! 천한 똥벌레는 독라로 만드는 것이 옳은테치! 고귀한 와타시가 몸소 독라로..."
"데프프프"
그림자 속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실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삼켰다.
"데프프프프"
적막한 골판지집 안에 조용한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좌우에 도열한 실장석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친실장은 미칠 듯한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을 덩달아 흘렸다.
"헤, 헤, 헤햐햐-ㅂ"
붕 소리와 함께 친실장의 머리가 웃는 얼굴 그대로 뚝 떨어졌다. 쭉 뻗어 나온 우두머리의 팔이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손끝에 쥔 은빛 막대가 반짝 하고 빛난다.
그림자 속의 우두머리가 친실장의 시체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와타시의 마음을 도려내는 분충은 용서하지 않는데스."
우두머리는 덜덜 떨고 있는 자실장을 향해 말했다.
"가까이 오는데스."
"테... 테에..."
자실장이 주춤대며 앞으로 다가가자, 어둠 속에서 두 팔이 휙 뻗어오더니 커다란 열 손가락으로 자실장의 양 빰을 감싸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와타시를 보는데스."
우두머리는 자실장을 바라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림자에서 벗어나 달빛에 비친 모습은 매끈한 독라였다.
"오마에의 눈에는 와타시도 천해 보이는데스까?"
우두머리는 자실장의 눈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테츙~"
불길한 공포감에 후들후들 떨던 자실장은 오른손을 입가에 올리고 고개를 기울여 아첨했다.
우두머리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손가락으로 자실장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돌연 자실장의 두 눈에 엄지손가락을 푹 박아 넣고 들어올렸다.
"테챠아악! 테치익! 테쨔아아! 테츄아아!"
허공에서 자실장의 팔다리가 버둥거린다. 우두머리는 손가락을 눈구멍에 더욱 깊숙이 밀어 넣고 힘을 주었다.
"텍-"
자실장의 움직임이 멎고, 초록색 똥이 다리를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우두머리가 손가락을 펼치자 머리가 부서진 자실장의 시체가 철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머리에 핏줄을 세우고 숨을 몰아쉬던 우두머리가 호흡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가 보는데스."
열두 마리 실장석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문을 열고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잠시 후, 평범한 실장석 두 마리가 겁먹은 표정으로 조심조심 다가와 시체를 치우고 바닥에 수건을 새로 깔았다.
우두머리는 어둠 속의 자리에 돌아가 누웠다. 손가락을 펼쳐 자신의 매끈한 뒤통수를 만져보던 우두머리는,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는 노예들을 보고 만족스럽게 씩 미소지었다.
새벽녘.
'테헤...테츄웅..."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실장의 잠꼬대 소리에 독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둑한 골판지집 안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다른 실장석은 보이지 않았다.
"꿈이라도 꾼 모양인데스..."
독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골판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슴푸레 동이 터오는 하늘은 깊은 남색이었고, 차가운 새벽바람이 문을 넘어 들이닥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추위에 독라가 부르르 몸을 떠는 동시에,
"츄우...테치잉..."
자실장이 칭얼대는 소리가 구석에서 다시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운치 구덩이 속에서 나는 소리엿다. 구덩이를 들여다보자 조그만 자실장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찬바람에 잠에서 깬 자실장이 기척을 느끼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적녹의 구슬이 반짝 빛난다.
"테치? 테츄웅~"
자실장은 고개를 갸웃대며 독라를 바라보더니 한손을 입가에 올리고 귀엽게 운다. 손을 내밀어 구덩이에서 꺼내주자 신이 나 재잘거린다.
독라는 바깥으로 자실장을 데리고 나가 여명에 대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온몸과 입가에 덕지덕지 똥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시간 운치굴 속에서 생활한 듯하다. 아랫마을에서 보았던 운치노예가 틀림없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들실장은 반드시 노예의 옷과 머리카락을 빼앗아 독라로 만든다는데, 이 자실장은 머리와 옷 모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신기한테치! 넓은테치~ 그런데 조금 추운테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바깥 세상에 감탄하는 자실장에게 독라가 물었다.
"오마에는 어쩌다 저 속에 있게 된데스까?"
"테? 모르는테치. 와타시는 처음부터 깜깜한 집에서 살아온테치. 맛난 밥이 매일 하늘에서 떨어진테츄~."
'갓 태어난 자실장을 납치해 온 모양인데스.'
독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줌마는 머리도 옷도 없는테치? 치프프, 아주 흉한테치."
자실장은 독라를 빤히 쳐다보다가 조소하며 말했다.
"흉한 아줌마는 와타시의 노예가 되는테치! 귀여운 와타시를 특별히 아줌마의 자로 삼도록 해주는테츄~"
"자 대신 아침밥으로 삼아주는데스."
"츄아아?"
자실장의 머리카락을 치실삼아 이빨을 쑤시며, 독라는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계속해서 공원을 걸었다.
T 도(道) 최대의 공원인 두루마리 공원. 지금은 거의 버려졌지만, 베드타운인 후타바 시의 한때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이 공원은 대단히 넓어, 실장석의 걸음으로는 아무리 걸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실장석의 흔적으로 난장판인 길을 걸으며, 독라는 전날처럼 먼발치에서 자신을 보고 슬금슬금 피하는 실장석들을 보았다. 집 앞에서 놀던 자실장이 자신을 보고 비웃으려고 하자,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친실장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독라는 가까운 골판지 집으로 쳐들어가, 비명을 지르는 성체와 프니프니를 요구하는 구더기를 걷어차고 운치굴 속을 살펴보았다. 초췌한 몰골을 한 중실장 하나가, 잠든 엄지를 품에 안고 독라를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앞머리, 뒷머리, 옷, 두건, 앞치마, 리본, 팬티, 신발. 빠진 것 하나 없이 완전한 복장이었다.
없다.
없다.
없다.
여러 채의 골판지 집을 뒤졌지만, 어딜 찾아봐도 독라 실장석은 없었다. 심지어 달마가 된 출산노예조차 머리와 옷은 갖고 있었다.
독라를 보고 비명을 지르던 실장석들. 옷과 머리를 모두 간직하고 있는 노예들. 이 공원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독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실장석들이 독라를 두려워했던 까닭은 독라의 덩치 때문이 아닌 듯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들은 '독라' 자체를 매우 꺼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들이 ‘독라‘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 위석에 새겨진 본능보다 강력한 이유. 독라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공원의 실장석들은 독라를 보면 뭘 물어볼 틈도 없이 도망쳐 버린다.
독라는 아랫마을 장로의 말을 떠올렸다.
'닌겐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닌겐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하는데스.'
상대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베풀어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 닿자 독라는 무언가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느 구석진 곳에서 독라는 원하던 광경을 발견했다.
"똥벌레가 건방지게 머리에 뭘 달고있는데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데스! 용납할 수 없는데스!"
"당장 와타시에게 넘기는데스!"
여러 실장석이 한 마리를 둘러싸고 짓밟고 있었다. 얻어맞던 실장석이 목을 짜내어 외쳤다.
"절, 절대로 안되는데스! 누가 좀 도와주는데스! 주인님! 살려주시는데스으!"
"데프픗, 자기가 버려진 것도 모르는 멍청한 분충인데스. 이 분충에게 똥 목도리를 둘러주는데스."
"몸 구석구석까지 노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는데스!"
머리에 뭘 달아? 주인님? 버려져?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독라는 실장석들에게 다가갔다.
"그만 하는데스."
린치에 열중한 실장석들은 독라의 말을 듣지 못했다.. 독라는 한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쯤 해 두고 여기 좀 보는데스."
실장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라의 손을 쳐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데샤악! 한창 재밌는데 방해하지 마는데샤!"
"보기 싫다면 와타시가 보게 해 주는데스."
독라의 손에 실장석의 머리가 반 바퀴 우두둑 돌아갔다. 허우적대는 몸뚱이가 털썩 쓰러지자, 그제야 실장석들은 독라를 보고는 꽁무니가 빠지도록 달아났다.
에워싼 실장석들이 사라지자, 쓰러져 있는 실장석이 보였다. 해진 분홍색 옷을 입고, 손에는 노란색 넝마를 꽉 쥐고 있다. 원사육실장이었다. 하지만 독라는 그저 '특이한 옷을 입은 녀석인데스' 정도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장석을 집에서 기를 정도의 애호파는 이제는 상당히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독라도 '사육실장이라는 것이 있다더라.' 정도만 장로에게서 전해 들었지 그 이상의 정보는 아는 바가 없었다.
쓰러진 실장석의 옷이 초록색이 아니라 분홍색인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독라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독라는 그 분홍색 옷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빨려들 듯 화사한 그 색깔에는 실장석을 유혹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마치... 위석에서 속삭여 오는 듯한... 뭔가 본능적인....
독라는 고개를 홱홱 젓고, 쓰러진 실장석에게 다가갔다. 분홍색 옷의 실장석은 웅크린 채 엎드려 무어라 중얼대고 있었다. 발로 툭 밀어 뒤집자, 멍과 피투성이가 된 채로 눈을 까뒤집고 침을 줄줄 흘리며 헤실대는 얼굴이 보였다.
"데퍄퍄 스테이크 우마우마데스 콘페이토 아마아마데스우 주인님 감사한데스"
"정신 차려 보는데스."
"데스웅 와타시의 귀여운 자들인데스우"
"대체 무슨 소리인데스?"
"주인님께 행복을 전해드릴 사랑스러운 자들인데스 귀여워 해 주시는데승"
그 실장석이 행복회로의 첫 단계에 접어드는 상태였다는 걸 독라가 알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행복을 모르는 독라는 행복회로가 무엇인지 또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친 모양인데스.'
독라는 한숨을 쉬며 원사육실장의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려 탈탈 흔들었다.
"정신차리는데스!"
"데? 데데덱! 지진인데샤! 주인님, 살려주시는데스! 데쟈보게에에!"
"눈을 뜨는데샤!"
"데엑! 데에에! 데...데이..데스우?"
원사육실장은 입을 쩝쩝대더니, 눈을 끔뻑이며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테이크..스시... 모두 어디로 간 데스...주인님과 자들은 모두 어디 간..."
원사육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에엑! 또 꿈이었던데샤!"
독라가 손을 놓자, 팔다리를 휘적대던 원사육실장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풀썩 주저앉자 부푼 팬티에서 똥이 철벅 하고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오로로옹! 너무 생생했던데스! 스테이크는 너무나 기름지고 콘페이토는 달콤했던데스! 주인님이 따뜻한 거품목욕을 시켜주려는 참이었던데스!"
악을 쓰는 원사육실장의 입에서 침이 분수처럼 튀어 독라의 몸을 뒤덮는다.
"여기는 지옥인데스! 깨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던데스!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데스우우! 오로롱!“
"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다는 뜻으로 생각하겠는데스."
침으로 뒤덮인 배에 손가락을 대었다 떼어보며 독라가 말했다. 끈적이는 점액의 실이 찌익 늘어났다 끊어졌다.
독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이 꺾여 쓰러진 채 아직도 파들거리는 실장석의 머리에서 두건을 벗겨내 몸을 닦았다. 뒤로 꺾인 목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가며 회복되고 있었다. 쓰러진 녀석은 원망 섞인 눈으로 독라를 올려다보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오물거렸다.
침으로 범벅된 두건을 뻐끔대는 얼굴에 던져 덮고, 독라는 실장석의 머리를 힘주어 밟았다. 으지직 소리와 함께 두건 밑으로 적록의 피가 넘쳐흐르고 조각난 머리가 흩어진다. 부글거리는 피거품 소리와 함께 실장석의 몸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데갸아악!"
그 광경을 본 원사육실장이, 비로소 독라의 존재를 눈치 채고 비명을 질렀다. 독라는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원사육실장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 골치 아파지기 전에 죽이는 것인데스. 오마에는 죽이지 않을 테니 안심하는데스."
"도,도,독라... 살,살려주는데스!"
"살려줄 테니 진정하는데스."
"살려주는데스! 살려주시는데스!"
원사육실장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를 땅에 찧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피가 배어나와 바닥을 적신다.
독라는 도게자하는 원사육실장을 답답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붙들어 일으켜 세우고 뺨을 철썩 때렸다.
짝
"데벡!"
"그만 좀 하는데샤! 살려준다고 말하지 않는데스까!"
"저, 정말인데스까?"
"아니라면 왜 굳이 구해줬겠는데스까? 오마에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데스?"
"그건 그런데스. 하지만...와타시를 왜 구해준데스까? 와타시에게 바라는 것이라도 있는데스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실장석이다. 독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있는데스. 그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면 되는데스."
도움을 먼저 준다는 독라의 계획은 먹혀들었다. 게다가 이 실장석은, 어쩐지 공원의 다른 덜떨어진 녀석들보다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본 원사육실장은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와타시가 아는 것이라면 최대한 대답하겠는데스."
"오마에는 방금 와타시가 독라인 걸 보고 무서워 한 데스. 오마에를 때리던 녀석들도, 공원의 다른 실장석도 마찬가지였던데스. 왜 그런지..."
"데엣!"
원사육실장이 또다시 내지른 짧은 비명이 독라의 말을 끊었다. 굳어진 얼굴에는 의심의 빛이 돌아왔다.
"와, 와타시는 그런거 모르는데스! 와타시를 내버려두는데스! 알면서 물어보는데스까, 몰라서인데스까? 무슨 속셈인데스까? 정체가 뭐인데스!"
허겁지겁 말하는 원사육실장을 진정시키며 독라는 적당히 말을 지어냈다.
"와타시는... 다른 공원에서 이사 온 실장석인데스. 오는 길에 옷도 잃고 머리도 잃어버린데스. 이 공원에 와서 독라노예로 끌려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길래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스."
원사육실장은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오마에의 말이 사실이라 쳐도, 와타시가 믿는다고 쳐도...그건 대답할 수 없는데스. 무서운 일을 당하는데스. 차라리 다른 걸 물어보는데스."
사실 독라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서 곧바로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사육실장의 말에서 얻은 실마리는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무서운 일을 당하는데스.'
실장석이 당할 수 있는 무서운 일이란 이루 셀 수가 없다. 자연, 동물...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아니, 자기 자신마저도 실장석의 적이다.
하지만 가뭄이 와서 말라죽는다던지, 고양이가 자들을 물어간다던지 하는 재앙은 실장석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일들을 발생시키고 안배하는 요소는 볼 수도 없게 거대한 톱니바퀴와 같아, 실장석의 수준에서 그 인과관계가 좌우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장석의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무서운 일'은 보다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실장석의 삶과 밀접한 단계에서 벌어진다. 그러면서도 실장석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
이를테면 인간이라던가 - 하지만 이 공원에서는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다른 실장석이라던가.
그것도 온 공원의 실장석을 이런 강박증에 걸리게 할 만큼 흉포한 실장석... 그렇다면 이 공원의 우두머리? 하지만 우두머리가 뭘 어쨌길래?
아직 알 수 없는 점이 많지만, 독라는 뭔가 기분 나쁜 예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와타시에게 보답해야겠는데스."
정적을 깨고 독라가 입을 열었다. 원사육실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오마에의 집에서 며칠 지내겠는데스."
"와, 와타시의 집에서, 오, 오마에가 말인데스까?"
"그럼 누구일 거라고 생각한 데스까?"
"그건 안되는데스!"
원사육실장은 소리를 빽 지르더니 황급히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스, 슬픈 일을 당하게 되는데스."
"대체 누구에게 슬픈 일을 당한단 말인데스까."
"말할 수 없는데스."
"저런 슬픈 일이라면 와타시도 일가견이 있는데 말인데스."
독라는 머리가 으깨져 죽은 실장석의 시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원사육실장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하... 하지만..."
"만일 슬픈 일을 당하게 된다면 와타시가 책임지겠는데스."
"하지만 집에는 먹을 것도 없고..."
"여기 있잖은데스까." 독라는 실장석의 시체를 다시 가리켰다.
"잠자리도 비좁..."
"정 좁다면 잠은 밖에서 자겠는데스."
더 이상 핑계거리를 찾지 못한 원사육실장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을 대로 하는데스."
집으로 돌아가며 독라는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원사육실장은 체념한 듯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 실장석은 뱃속에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온 고급 사육실장이었다.
"마마 뱃속에서 들은 태교의 노래가 지금도 생생한데스. 태어나서부터는 조금만 실수해도 심한 일을 당해버린데스. 인간상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하는지 오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인데스. 많은 오네챠들과 친구들 중에서 살아남은 건 와타시 뿐이었던데스.“
기억을 되새기며 원사육실장은 어깨를 떨었다.
고급 사육실장으로 거듭난 원사육실장은 어느 졸부의 눈에 띄어 미도리라는 이름을 받고 팔려가게 되었다.
사육실장의 생활을 물어보자 미도리는 갑자기 신난 듯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테이크는 얼마나 쫄깃하고, 콘페이토는 달콤하고, 초밥은 입에 착착 감기고, 집은 화려하며 으리으리하고, 목욕은 따뜻하고, 사육실장복은 깨끗하고 보드랍고 보송보송하며...
이상하게도, 독라는 미도리의 묘사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 위석 부근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스시, 스테이크, 콘페이토...모두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왠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먹어본 적 없는 실장푸드의 맛도 어째선지 생생히 그려지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은 것 같은...
독라는 고개를 홱홱 저었다. 미도리의 말은 달콤하게 들렸지만, 그것은 화려한 독버섯과 같앗다. 편안하고 안락한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머릿속에 그리던 상상을 떨쳐내고, 독라는 미도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마에는 어쩌다 그런 삶을 잃고 이곳에서 살게 된 데스까?"
"데이..."
미도리는 곧바로 침울해졌다.
뭐, 사람 입장에서는 누구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다. 사육실장이 비싼 대접을 받으며 기고만장해지다 결국 자를 갖겠다고 조른다. 아니면 자의건 타의건 자를 이미 갖게 되었거나. 그리고선 자를 낳겠다고 계속 뻗대다가 버림받는다.
미도리는 자기 발로 나간 거라고 우겼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도 않고, 별 차이도 없다. 고생 고생해 가며 공원에서 자를 낳았지만 모두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원사육실장은 돌아갈 곳 없이 공원에서 살게 된다. 끝.
미도리는 그렇게 공원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제 두 번째 봄을 맞았다고 한다. 경쟁이 치열해지기 전에 일찍 자를 낳아서, 벌써 집에는 자식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저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 자식들은 무사히 키워낼 생각이다.
사실, 원사육실장이 이런 혹독한 공원에서 일 년을 버텼다는 것 자체가 미도리의 능력과 지능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을 '닌겐상'이라고, 주인을 '주인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과연 상상도 못 할 만큼 혹독한 훈육을 통과한 영리한 실장석이었다. 단지 자를 키우는 행복, 그 본능을 이기지 못해 고급 사육실장이었던 미도리는 그만 이렇게 추락하고 만 것이다.
"이 노란 리본은 옛날에 주인님이 선물해 준 것인데스. 이 리본을 갖고 있으면 어느 날 반드시 주인님이 알아보고 와타시와 자들을 다시 데려가 줄 것인데스."
...착각하는 꼴을 보면 그냥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일 지도.
금세 침울해진 미도리는 더 이상의 말을 아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가를 벗어나 풀숲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우거진 관목 덤불이 보였다.
"다 온데스."
부자연스럽게 늘어진 풀과 나뭇가지를 들추자, 덤불의 그늘 아래 숨겨진 큼직한 골판지 상자가 보였다. 감쪽같은 위장이었다.
상자는 절반이 덤불 속에 파묻혀 있을 정도로 깊숙이 자리해 있었고, 두꺼운 비닐 여러 겹이 칭칭 감겨 압정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표면의 비닐은 닳고 해져 있지만, 그 아래 여러 겹의 비닐은 건재해 물 샐 틈 없이 집을 보호하고 있었다.
"오마에가 만든 집인데스까?"
"주인님이 마지막 선물이라고 만들어 준 집인데스."
주인은 어지간한 애호파였던 모양이다.
집은 쥐죽은 듯 조용했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자실장의 희미한 냄새와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미도리는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일정한 패턴으로 문을 두드렸다.
콩 콩콩콩 콩콩 콩
집 안에서 즐겁게 테치칫 하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를 치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문이 빠꼼히 열리더니 자실장 셋의 얼굴이 쏙 나왔다.
"마마 오늘은 일찍 오신테...에에!"
"테챠아악!"
"츄아아!"
기쁜 얼굴로 어미를 맞이하던 자실장들은 그 뒤의 무시무시하게 생긴 독라를 보고 일제히 울부짖었다.
"마마아! 테츄아압-!"
미도리는 자실장들의 입을 틀어막으며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한창 먹이를 구할 시간인지라 다른 실장석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하는데슷! 저 아줌마는 오늘 만난 마마의 친구인데스. 다른 공원에서 이사해 왔다고 하는데스."
"하지만 가족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마마가 말했던테치. 게다가 독라..."
'독라'라고 말하며 자실장들은 일제히 겁먹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아줌마는 예외인데스. 아줌마가 밥을 구해준데스. 앞으로 우리 집에서 살기로 한 데스."
독라는 들쳐 메고 온 머리 없는 시체를 말없이 흔들어 보여주었다. 자실장들의 표정이 일제히 밝아졌다.
"고기! 고기인테치!" "엄청나게 커다란테치! 믿을 수 없는테챠!" "아줌마 좋은테츙~"
"빨리 썩는 내장부터 먹는데스."
"하이테츄~"
얌전히 앉아 기다리는 자실장 앞에서, 미도리는 뾰족한 돌조각으로 고기를 손질하려고 낑낑댔다. 보다 못한 독라가 맨손으로 시체를 해체했다. 터진 배에서 쏟아진 창자에 자실장들이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입가에 피 칠갑을 하며 순대를 갉는 자실장들을 보며 독라가 말했다.
"똑똑한 자들인데스."
"여러 번 솎아내서 고른 자들인데스."
미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 구석의 운치 구덩이를 가리켰다. 솎아내진 엄지와 자실장이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훌륭한데스. 자를 아끼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데스."
독라의 말에 미도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수긍하는 듯 했다.
남은 고기를 갈무리한 뒤, 미도리는 공원의 생활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었다. 화장실 청소도구함에서 아이를 낳는 법, 골판지 집을 보수하는 법, 페트병에 물을 받는 법, 수건과 신문지와 비닐봉투의 중요성, 먹이를 구하는 장소...
말을 계속하던 미도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마에가 살던 공원은 어떻기에 이런 것도 모르는데스까?"
"어... 뭐.. 딱히 특별한 건 없었던데스."
미도리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산에서 온게 아닌데스까?"
구르며 놀던 자실장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테치? 산실장테치?" "아줌마 산실장이었던테츄? 정말인테치이?"
독라는 흠칫했지만 이내 태연히 되물었다.
"와타시가 산실장이란데스?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스까?"
"산실장은 공원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고 들은데스. 또 커다란 덩치와 괴물 같은 힘을 가졌다고도 들은데스. 아무래도 오마에가 그런 것 같은데이.."
미도리는 독라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독라는 무서운 낯빛으로 신중하게 물었다.
"와타시처럼 머리도 옷도 없고, 손가락이 달린 산실장도 있다고 들은데스?"
"아..아닌데스. 오마에는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독라가 되었다고 하지 않은데스까?"
'다른 마을들이 들통난 건 아닌 모양인데스.'
황급히 말을 돌리는 미도리를 보고 독라는 안심하며 말했다.
"뭐, 산실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데스."
"데에!" "테에에!" "테챠아!" "테치이!"
네 마리 실장석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진다.
"왜 그렇게 놀라는데스까?"
"산실장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테치!"
"마마가 매일 밤마다 용감한 산실장 이야기를 해준테치! 산실장은 돌도 부수고 하늘도 나는테치!"
"나쁜 까악이도 야옹이도 산실장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테츄! 와타시도 그렇게 강해졌으면 좋겠는테치."
자실장들은 눈을 반짝이며 독라 주위로 몰려들었다. 미도리는 난처한 듯 독라의 눈치를 살폈지만, 독라는 냉정하게 말했다.
"오마에의 마마가 한참 잘못 안 데스."
"테?" "마마가 거짓말한테치?" "테에..그럴 리가 없는테츄..."
"오마에타치의 마마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닌데스. 그냥 몰랐을 뿐인데스. 산실장이라고 해서 특별하지는 않은데스. 산에서의 삶은..."
마을에 대해 자세히 떠벌였다가는 인간의 귀에 들어갈 염려가 있다. 독라는 산에서의 삶을 적당히만 말해 주었다.
정해진 곳에 먹이가 생기는 공원과는 달리,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사방팔방을 뒤져야 하는 먹이 구하기. 손끝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땅굴 파기. 무서운 천적들. 살을 째는 듯 한 겨울의 추위와 꽝꽝 얼어붙는 강물...
독라의 말을 들은 자실장들은 적잖이 실망한 표정이다.
"산실장도 무적은 아니었던테치.." "산에서의 삶도 힘들 것 같은테치이..."
그러더니 자실장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눈을 빛내며 뭉툭한 손을 불끈 쥐고 외쳤다.
"하지만 그래도 와타시는 산실장이 되고 싶은테치!"
"그런테츄! 오히려 아줌마의 말을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는테치!"
"힘들겠지만 그 정도라면 와타시도 자신있는테츄!"
독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산실장이 되고 싶다는데스? 산에서의 삶에 행복은 없는데스."
첫번째 자실장이 눈을 빛내며 외쳤다.
"닌겐상들은 산실장을 좋아하는테치! 와타시는 산실장이 되어서 사육실장이 되어 가족 모두와 행복하게 사는테치."
"사육실장은커녕 상품이나 안 되면 다행인데스.."
트럭에 실려 가던 아랫마을 실장석들을 떠올리며 독라는 대답했다.
"상품이 뭐인테치?"
"상품은,,, 아니, 아닌데스. 몰라도 되는데스."
두번째 자실장이 눈을 빛내며 외쳤다.
"산에서는 모두가 친구인테치! 안심하고 가득가득 자를 낳아 기를 수 있는테치!"
"산에서는 이웃이 문제가 아니라 자들이 더 문제인데스. 짐승보다도, 겨울보다도 무서운 것이 분충인데스."
태어나자마자 솎아내진 자매들을 떠올리며 독라는 고개를 저었다.
"와타시의 자들이 분충일 리 없는테치! 와타시가 열심히 가르치면 되는테츄!"
독라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턱짓으로 다음 자실장에게 신호했다.
세번째 자실장이 눈을 빛내며 외쳤다.
"산실장은 그래도 아주아주 강한테츄! 와타시는 아줌마처럼 강해지고 싶은테치!"
"그렇게 강해져서 뭘 하려는데스?"
"마마를 괴롭힌 나쁜 아줌마들을 혼내주는테치!"
독라는 갸우뚱하며 말했다.
"공원의 분충들 정도라면, 오마에들 셋이 어른이 되어 힘을 합치기만 해도 거뜬한데스."
"평범한 아줌마들이 아닌테치. 힘세고 커다란 아줌마들이 쳐들어왔던테치. 마마가 모은 수건을 전부 가져간테츄아!"
자실장은 분하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독라는 몸을 기울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아줌마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데스."
"와타시는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테치... 어느 날, 누군가 집을 마구 두드리고 흔든테치. 마마는 우리를 구석에 숨기고 문을 열어준테치. 커다란 아줌마 셋이 문 앞에 서 있었던테치. 아줌마는 무섭게 소리지르더니 집으로 들어와 수건을 모두 가져가 버린테치. 마마가 부탁했지만 나쁜 아줌마들은 마마를 때리고 가버린테에엥...테끅, 테끅...."
자실장은 분에 못이겨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들실장 셋이 협동해서 약탈하고 다니는 것이라면, 자실장과 친실장을 살려두고 수건만 가져갔을 리 없다. 보존식에도 손대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음식 또한 풍족한 녀석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셋은 아마 이 공원의 지배 계층일 것이다. 우두머리의 부하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 넓은 공원을 벌벌 떨게 하며 부하까지 거느린 것으로 보아, 우두머리는 상당히 포악한 실장석인 모양이다.
"더 아는 것은 없는데스?"
"테이...잘은 모르는테츄. 마마 말을 안 듣거나, 가족이나 친구를 괴롭히거나, 머리와 옷을 뺏으면 무서운 아줌마들이 잡아간다는 말을 마마가..."
"이제 된데스!"
미도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잘 시간인데스. 빨리 이불에 가서 눕는데스."
"벌써 자는테츄?" "아직 달님이 뜨지도 않은테츄." "아줌마 얘기가 더 듣고싶은테치..."
"벌써 해님이 진 데스. 아줌마도 먼 데서 와서 피곤할 것인데스. 착한 아이는 일찍 잠드는데스."
"알겠는테치." "안녕히 주무시는테치!" "아줌마, 내일도 재밌는 이야기 해주시는테치~"
배불리 먹고 실컷 논 덕인지, 자실장들은 이내 새근새근 잠들었다.
잠든 새끼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도리가 힘없이 독라에게 말했다.
"약속대로 나가 주는데스."
독라는 들은 둥 만 둥 고개만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실장석들의 행동과 자실장의 말은 충분한 실마리가 되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 공원의 우두머리는 '독라‘의 존재를 매우 싫어하는 모양이다. 남을 독라로 만든 실장석, 심지어는 독라 근처에 있기만 해도 모두 죽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옷과 머리가 그대로인 노예들과, 독라를 슬슬 피하던 실장석들,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된...다?
"나가주길 바라는데스. 내일 아침에 보는데스."
"곧 나갈테니 걱정 말고 눈이나 붙이는데스."
미도리가 재촉했지만 독라는 계속 머리를 굴렸다.
독라를 두려워하던 실장석들. 독라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미도리. 뭔가가 여전히 석연찮았다.
독라와 얽혔다가 우두머리에게 죽는 것이 무섭다면, 독라를 쫓아버리거나 몰래 없애버리면 되는 노릇이다. 게다가 독라에게 '살려 달라'고 말했던 것은, 거꾸로 다른 어떤 독라였다면 미도리를 죽였을 것이란 뜻인데...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의문이 독라를 괴롭힌다.
미도리는 자리에 누웠지만 아직 눈은 감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밤하늘에는 달이 슬며시 떠올랐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려는 독라의 눈에, 달빛에 비친 미도리의 꼬질꼬질한 노란색 리본이 문득 들어왔다.
독라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볼 게 있는데스."
미도리는 독라를 흘겨보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는데스. 자들이 깨는데스.”
"오마에는 자를 낳고 행복을 찾기 위해 사육실장의 삶을 포기하고 공원으로 왔다고 말한데스."
"그런데스."
"그렇다면 오마에는 지금 행복한데스까?"
미도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내뱉으려 했지만, 이윽고 슬픈 눈빛을 하며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에 눈길을 돌렸다. 들이쉰 숨은 한숨이 되어 세모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사육실장의 생활은 정말 너무나도 행복했던데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자를 가져버리고 만 데스. 와타시는 자를 낳을 생각이 없었던데스. 선생님에게 그렇게 배웠던데스. 하지만 뱃속에서 꼬물대는 자들을 느꼈을 때, 와타시는 도저히 자를 버릴 수 없었던데스. 주인님은 자를 버리거나 공원으로 떠나라고 말하신데스. 그래서 와타시는 집을 나온데스. 귀여운 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견딜 수 있었던데스. 자들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한데스.
주인님은 좋으신 분이였던데스. 와타시가 공원에서 살도록 이것저것을 도와주신데스. 이 집을 지어주고 떠나는 주인님의 뒷모습을 보며, 스시 스테이크 콘페이토를 영영 먹지 못할 걸 와타시는 알았던데스. 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던데스. 자들을 죽이고 편히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데스까?"
독라는 말없이 미도리의 말을 들었다.
"죽을 고생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자를 낳은데스. 텟테레 하는 자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 와타시는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데스. 사육실장의 삶을 버린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았던데스. 하지만 아이를 다 낳고 변기를 돌아봤을 때, 와타시의 자들은 이미 없었던데스. 수많은 아이들이 와타시를 마마라고 부르며 팔을 뻗은데스. 하지만 그 중 아무도 와타시의 자가 아닌 걸 와타시는 바로 알 수 있었던데스.
할 수 없이, 와타시는 변기에 가득한 아이들을 최대한 많이 데리고 빠져나온데스. 와타시가 낳은 아이들은 이미 죽었을 지, 누군가 데려갔을 지 알 수 없었던데스. 대신 변기에서 건져 올린 아이들을 와타시의 자라고 믿고 키우기로 결심한데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아이들 모두 결국..."
"다른 실장석에게 죽은데스까."
"...와타시의 손에 죽은데스."
미도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스. 아이들은 모두 분충이었던데스. 사육실장이 되기 전, 선생님의 집에서 배웠던데스. 분충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처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배웠던데스. 그래서 와타시의 손으로 죽인데스. 아이들이 보존식을 전부 먹어버리고, 밥을 구하지 못한지 며칠 째가 되던 날, 와타시는 아이들을 잡아먹은데스."
독라는 조용히 계속 들었다.
"며칠이 지나고, 와타시는 다시 임신한데스. 이번에는 변기 없는 빈 곳에서 자들을 낳고, 최대한 지켜가며 집으로 데려온데스. 하지만 와타시가 직접 낳은 그 자들도 분충이었던데스.
몰랐던데스. 와타시의 자는 모두 착하고 귀여울 줄 알았던데스. 하지만 아니었던데스. 그 해 와타시가 낳은 자들은 모두 분충이었던데스.
다행히 올해 낳은 아이들 중에는 착한 아이들도 있었던데스. 여러 번 임신하고, 많고 많은 자를 죽이거나 운치굴에 집어넣은데스. 결국 이 셋만을 간신히 기를 수 있게 된데스."
미도리는 잠든 자실장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세 아이는 정말 착한 아이인데스. 와타시를 너무나 잘 따라주는데스. 와타시처럼 행복한 친실장은 공원에 없을 것인데스. 하지만 와타시는 와타시의 손으로 자들을 죽인데스, 팔다리를 뽑고 운치굴에 던져 넣어 버린데스.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아이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데스.
와타시가 공원으로 나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데스. 그러지 않았더라면 뱃속의 자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인데스. 지금의 장녀, 차녀, 삼녀도 만날 수 없을 것인데스. 하지만 와타시는 공원으로 나온 것을 후회하는데스. 와타시는 자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며 공원에 나왔던데스. 하지만 결국 와타시의 자를 와타시의 손으로 죽이고, 먹고, 노예로 만든데스. 와타시가 사육실장의 삶을 포기하고 얻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데스까?"
미도리의 목소리가 커지자 자실장들이 몸을 뒤척였다. 미도리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실장들을 다시 토닥여 재웠다.
독라는 미도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오마에가 첫 자를 임신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싶은데스?"
미도리는 탄식했다.
"모르는데스... 어쩌면 와타시가 죽을 때 까지도 모를 것인데스. 그저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갈 뿐인데스."
말없이 집에서 나오려는 독라는, 미도리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아랫마을 장로에게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사육실장의 삶과 공원의 삶에서 오마에가 찾고 싶었던 행복이란 무엇이었던데스까."
자실장을 토닥이던 미도리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자세 그대로 덜컥 멈췄다. 초점 없는 눈과 억양 하나 없는 어조로 미도리가 기계처럼 중얼거렸다.
"사육실장의 행복은 욕심 없이 주인님께 충성하며 주인님의 기쁨만을 위해 사는 삶인데스."
독라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뭐라고 한 데스까?"
미도리는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반사적으로 되풀이했다.
"사육실장의 행복은 욕심 없이 주인님께 충성하며 주인님의 기쁨만을 위해 사는 삶인데스."
독라는 뜨악한 표정으로 미도리를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나갔다.
동상처럼 굳어있던 미도리는 움찔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서글픈 표정으로 자리에 누웠다.
한 손은 곤히 자는 아이들 곁에 두르고, 한 손으로는 노란 리본을 꼭 쥔 채로 미도리는 잠들 때까지 소리없는 눈물만을 흘렸다.
D-1
"마마, 다녀오시는테치!" "오늘도 빨리 오시는테츄!"
든든하게 배를 채운 미도리는, 역시 배가 통통해진 자식들의 배웅을 받으며 골판지 문을 나섰다. 곤히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개운하다. 피로가 싹 가시도록 오래 자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음식 걱정 없이 아침부터 배를 실컷 채운 건 또 얼마만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미도리의 눈시울이 아려왔다.
독라는 벌써 일어나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딜 가는데스까?"
"오늘은 함께 물을 구하러 가는데스."
빈 2L 페트병 두 개를 보여주며 미도리가 말했다.
은밀성으로는 만점인 자리에 위치해 있는 미도리의 집도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수돗가가 멀다는 것이었다. 미도리의 전 주인이 집을 만들어줄 때 한 가지 간과한 점은 실장석은 음수대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30cm에 겨우 닿는 실장석이 음수대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으로 치면 3층 건물 옥상에 수도꼭지가 달린 격. 분노한 실장석들이 똥을 던지지만, 그 똥마저도 닿지 못하는 것이 음수대의 높이이다.
그렇다면 공원의 실장석들은 어디서 물을 공급받는가?
답은 중수도 수도꼭지다.
가뭄 날 화단에 물을 주기 위해서, 더운 여름날 공원을 식히기 위해서, 맨발로 돌아다니던 어린이들의 발을 씻기 위해서 등등의 연유로, 공원에는 사람 정강이쯤 오는 높이의 수도꼭지가 드문드문 설치되어 있었다. 식수용은 아니지만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사는 실장석들에게 그 정도가 대수일까. 분수가 멎은 지 오래인 두루마리 공원의 실장석들에게는 그 수도꼭지가 유일한 수원이었다.
물론 아무리 낮다 한들 실장석의 손이 닿기에는 다소 높았지만, 경이롭게도 두루마리 공원의 실장석들은 돌멩이를 쌓아 발판을 만들어서 이 문제를 극복했다. 탈수로 인해 단체로 죽어가던 와중 위기 앞에서 발현된 기적적인 집단 지성의 결실이다.
아무리 수라도인 두루마리 공원이라도 물을 받을 때만큼은 질서를 지켰다. 수도꼭지 앞에 와서는 최대한 귀엽게 아첨하고 물을 튼다. 물을 다 받고 나서는 반드시 수도꼭지를 잠갔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실장석은 곧바로 붙들려 두드려 맞았다. 이들은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귀여운 자신의 아첨과 똑똑한 자신의 행동에 매료된 수도꼭지가 물을 헌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가당찮은 믿음이 언제부터 전해져 왔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썩 괜찮은 습관이다. 이미 반쯤 버려진 공원, 물이 낭비되는 조짐이 보인다면 언제 단수가 이루어져도 이상할 것 없기 때문이다.
미도리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꼭지까지는 실장석의 걸음으로 걸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다. 그것도 맨몸으로 가는 것만 그 정도지, 몸집만한 크기에 물이 꽉 찬 페트병을 밀고 끌고 굴리며 오려면 반나절은 꼴깍 지나가고 온몸은 녹초가 된다. 체력이 고갈된 사이에 다른 실장석이 습격한다면 꼼짝없이 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 단지 물 한 병을 뜨기 위해서도 실장석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집에 있는 페트병은 넉넉하게도 2L짜리 총 3개였다. 하나를 꽉 채우면 일주일은 넘게 쓸 수 있다. 한병 반 정도의 물이 남아 있어 평소라면 물을 뜨러 가지는 않았겠지만, 독라가 있는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평소라면 한 병밖에 떠오지 못할 물도 오늘은 두 병이나 떠 올 수 있다. 일부러 반 병 남은 물까지 자들과 실컷 나눠 마시고 세수마저 한 다음, 빈 병 두개를 갖고 나왔다. 세 병 가득 물을 담아 놓고, 중간 중간 봄비가 올 때마다 빗물을 채워 넣으면 이번 봄은 더 이상 물을 뜨지 않고도 보낼 수 있다. 여름에는 비가 자주 오니까 역시 물 걱정은 없다. 물을 뜰 시간에 최대한 보존식을 마련해 놓으면 여름도 풍족하게, 가을도 풍족하게, 마침내 큰 고비인 겨울마저 문제없이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자꾸자꾸 생각을 뻗어 나가며 공원을 자신의 자로 뒤덮을 망상에 빠진 미도리의 입이 귀에 걸린다.
독라는 독라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다. 어제부터 머릿속 한편에 켕기는 공원 우두머리의 정체. 우두머리가 '독라'를 싫어하는 이유. 실장석들이 '독라'를 두려워하는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갈피가 잡히지 않지만, 불길한 기분은 가시지를 않는다.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동시에 모르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말없이 한참을 걷자 어느덧 수돗가에 와글와글 모인 실장석들이 보였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벌써 수십 마리나 모인 모양이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물을 받던 수돗가인데, 오늘은 바글바글한 실장석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질서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다들 수도꼭지 주변에 우글우글하게 모여들어 뭐라 뭐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더욱 가까이 다가가니 실장석들의 처참한 모습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꼭지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아첨하고 있는 녀석,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녀석, 네 발로 엎드려 위협하는 녀석, 고함을 지르며 투분하는 녀석, 철제 수도꼭지를 토닥토닥 때리다가 부어오른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녀석...
"데스웅~ 데스웅~ 와타시의 아름다움은 초목을 감동시키는데승~ 수도꼭지는 항복하고 물을 줄 수밖에 없는 데스웅~"
"데샤악! 때려눕히기 전에 물을 내놓는데스! 매운 맛을 보여주는데샤!"
"와타시의 운치를 맞았으니 수도꼭지는 와타시의 노예인데슷! 노예는 고분고분히 물을 내놓는데샷!"
"이거나, 먹는데샤! 한대 더, 헥, 맞는데샤! 와타시의, 헥, 헥, 주먹맛이, 헥..."
실장석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접근하자, 미도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까운 한 마리를 붙잡고 미도리는 다급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스까?"
"보면 모르는데샤! 물이, 물이 어제부터 안 나오는데스!"
"물이 안 나온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데샤!"
"직접 가서 보란데스! 우린 다 끝난데스! 집에는 물 한 방울도 남지 않았는데, 이제 어떡하라는데스! 오로롱!"
공황 상태에 빠진 실장석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두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애가 타는 건 미도리도 마찬가지다. 아침까지만 해도 속 편히 물을 들이켜고 왔는데 삽시간에 날벼락을 맞았다. 집에 남은 물 한 병은 아무리 아껴 써도 2주일이면 동난다. 그 안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아니, 당장 내일부터라도 물을 먹지 못해 포악해진 실장석들 때문에 집 밖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미도리는 페트병도 내던지고 울음을 터뜨리며 수도꼭지로 달려갔다. 몰려든 실장석들을 뚫고 수도꼭지를 돌려보지만 끼릭끼릭 헛도는 소리만 들릴 뿐. 늘 들려오는 촤악 하고 물 쏟아지는 소리는 감감무소식이다.
"데, 데 데스웅~ 데승데스우웅~ 데숭~"
넋이 나간 미도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귀엽게 아첨해 보지만 수도꼭지는 묵묵부답이다. 더, 더, 더 귀엽게 아첨해야 한다.
“테츙~ 테츙테칭테츄웅~“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자실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 아첨하는 미도리였지만 물은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레츙~ 레츙~ 렛훙! 수도꼭지상, 프니프니해주는데훙~"
주변의 실장석들은 이미 자실장을 지나 엄지, 구더기의 흉내까지 내면서 수도꼭지에게 간청하고 있다. 마치 PT 8번을 하듯 누운 채 다리를 치켜들고 좌우로 뻣뻣하게 흔들며 조르는 그 모습은 인간이 봤다면 배꼽을 잡고 웃을 모양이다.
"테츙테...데샤아아! 당장 물을 내놓아라데스! 주인님을 불러 달마로 만들어버리겠다데스!"
마침내 광분해 수도꼭지를 부여잡고 흔드는 미도리의 머릿속에 묘안이 스친다.
'다른 곳에서는 분명히 물이 나올 것인데스!'
다른 수도꼭지가 공원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미도리지만, 그런 염려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됐다. 집어던졌던 페트병을 주워들고 아무데로나 달려 나가려는 미도리. 하지만..,
"데에, 데엑...혹시 여기는, 데엑, 물이 나오는데스까?"
미도리의 소망은 깔끔하게 날아갔다. 페트병을 든 몇 마리의 실장석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초췌한 몰골로 나타나 미도리에게 말을 걸었다.
"무, 무슨 소리인데스? 이곳만 물이 안 나오는게 아닌데스까?"
"어제부터 온 공원을...돌아다닌데스. 한 군데도... 물이... 나오는 곳이... 없는데, 데에..."
실장석은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풀썩 쓰러져 기절했다.
"데, 데, 데에엥! 데에에엥!"
미도리는 페트병을 투둑 떨어뜨리고 풀썩 주저앉아 아이처럼 통곡했다.
"데에엥! 데에엥!"
"분명 잘 찾아보면 물을 구할 수 있을것인데스."
미도리는 위로하는 독라에게 달려들어 헐떡대며 울부짖었다.
"뭐라도 해보는데스! 오마에는 산실장이잖은데스까! 산실장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히 알 것인데스!"
"와타시는 저 수도꼭지라는 것도 오늘 처음 본데스."
"와타시는 모르는데스! 몰라몰라데스! 책임지고 뭐라도 해보는데스! 데갸아아!"
독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도꼭지를 향해 실장석 무리를 헤치며 다가갔다. 넋두리를 늘어놓던 실장석들이, 수도꼭지로 다가가는 독라를 보고 헉 하고 숨을 멈춘다. 눈에는 공포의 빛이 잠깐 어리지만, 저 독라가 뭔가 해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공포감을 몰아냈다.
웅성웅성하며 길을 터주는 무리들 사이에서 기대에 찬 목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보스가 나선데스!" "보스가 뭔가를 해 보려는 것 같은데스!"
"와타시는 보스가 아닌..."
수도꼭지에 손을 올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독라는 우뚝 멈췄다.
아하. 그런 거였군.
멍하니 서있는 독라에게 수십 마리 실장석의 이목이 일제히 집중된다. 독라는 정신을 차리고 수도꼭지를 돌려 보지만, 아무리 돌려 보아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내려오는 독라의 모습에 실장석들은 다시 엉엉 울며 발버둥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라는 황급히 미도리에게 되돌아갔다. 벌써 행복회로에 빠진 미도리는 양손에 든 가상의 콘페이토를 날름날름 핥으며 기뻐하고 있다.
철썩
"데베게엑!"
따귀를 얻어맞고 소리를 지르는 미도리를 부여잡고 독라가 외쳤다.
"보스! 보스는 어디있는데스까!"
"데에?"
"공원의 우두머리 말인데스! 와타시를 빨리 우두머리에게 안내하는데스!"
미도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 데데데...“
겁먹은 미도리는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데에엣!"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도리의 눈은 초점을 잃은 게 아니라, 독라의 어깨 너머 뒤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3녀가 말한 세 녀석들! 바로 저 놈들인데스!"
미도리가 치켜든 팔 끝을 따라 독라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랗고 투실한 실장석 세 마리다. 녹색 옷과 갈색 머리는 매일 공들여 씻은 듯 깨끗하고 보송보송했다.
"거기 독라, 보스가 오마에를 보고 싶어하는데스."
가운데의 실장석이 입을 열었다. 미도리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중얼거렸다.
"다 끝난데스...“
"아직 멀은데스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 입 한번 무거운데스."
싱글거리며 말하는 독라의 옆구리에 주먹이 꽂힌다. 들실장 치고는 손맛이 꽤 맵다. 독라는 얻어맞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주위를 계속 살폈다.
걸어도 걸어도 공원은 끝이 없었다. 우두머리의 부하 한 마리는 독라를 붙들고, 두 마리는 기절한 미도리를 들쳐 메고 걷고 있다. 멀리 뒤쪽에서 호기심 많은 실장석 몇몇이 조심스럽게 뒤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몇 십 분 전,
"와타시는 아무 상관 없는데스! 수돗가에서 처음 만난 사이일 뿐인데스우!"
"독라와 노란 리본의 핑크색 원사육실장이 같이 다니는걸 본 실장석이 수두룩한데, 자꾸 헛소리하면 한 대 맞을 거 두 대 맞는데스."
"오, 오로롱! 왜 와타시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스!"
발버둥을 치며 난동부리던 미도리는 안면에 몇 차례 주먹이 꽂히자 축 늘어져 움찔거렸다.
"저 독라는 어떻게 하는데스?" "도망가면 골치아픈데스." "귀찮으니 저놈도 기절시키는데스."
셋이서 작당하는 모습을 보고 독라가 능글맞게 말했다.
"와타시는 꽤 무거울 텐데, 셋이서 어른 둘을 옮길 수 있겠는데스까?"
"쓸데없이 입 놀리면 좋은 꼴 못 보는데스." 왼쪽의 실장석이 험악하게 말했다.
"좋은 말 놔두고 왜 이렇게 무섭게 구는데스까? 와타시도 마침 오마에들 보스를 찾던 참이었던데스. 도망칠 생각 없으니 서로 힘 빼지 말고 좋게 좋게 가는데스."
세 마리 실장석은 말없이 독라를 노려보았다.
"수작 부리려 들면 가만 두지 않는데스."
독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붙들어 매고 어서 출발하는데스."
네 마리와 기절한 한 마리 실장석은 길을 벗어나 공원 중심부, 울창한 숲 속으로 진입했다. 계속 걸어 들어간 끝에, 이들은 마침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우두머리의 집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나무 옆에 붙어 있는 거대한 파란색 박스집이다. 어찌나 큰지 인간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물이 샐 만한 틈이란 틈은 비닐로 꼼꼼히 틀어 막혀 있고, 외벽은 수많은 장신구와 잡동사니로 난잡스럽게 치장되어 있다. 저 많은 물자를 어떻게 이곳까지 옮겼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서 들어가는데스."
독라를 붙들고 가던 실장석이 재촉했다.
"가기 전 잠깐 하나만 묻는데스."
"안 되는데스."
"와타시는 어떻게 되는데스까?"
"독라는 죽는데스."
"와, 와타시는 어떻게 되는데스까!" 어느새 깨어난 미도리의 목소리다.
"물론 오마에도 죽는데스."
"오로로옹!"
"오마에의 보스도 혹시 와타시와 같은 독라 아닌데스까? 그러면서 독라를 이렇게 미워하는 이유가 오마에는 궁금하지 않은데스까?“
독라가 외쳤다.
"저 나불대는 아가리를 부숴놓지 않으면 안되겠는데스."
독라를 붙들고 있던 실장석이 짱돌을 집어들고 독라에게 다가갔다. 독라의 목덜미를 옴켜쥐고 입가에 내리찍으려는 순간, 독라는 자신의 손가락을 쫙 펴서 실장석의 눈앞에 내밀어 보였다.
"와타시의 손을 보는데스. 보스의 손도 이렇게 생기지 않은데스까?"
돌을 치켜들던 실장석이 움찔한다.
"와타시는 고향에서 언니를 찾아 온 보스의 자매인데스! 손가락이 닮지 않은데스까!"
독라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애절하게 호소했다. 실장석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돌을 든 손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정말인데스까?"
"아니. 구라인데스."
독라의 주먹 쥔 손이 그대로 전진해 실장석의 인중에 꽂혔다.
기세 좋게 문을 박차고 들어간 독라의 눈에 우두머리의 집 내부의 전경이 들어왔다.
반짝반짝하고 형형색색의 온갖 잡동사니, 해진 옷 장식, 깨진 장신구 나부랭이가 너저분히 장식되어 있다. 수건이 빼곡히 덮인 바닥은 알록달록하고, 갖가지 나무열매와 고기조각, 실장푸드, 그리고 여타 처음 보는 음식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골판지집의 끝 쪽, 그러니까 독라가 들어온 문 맞은편 벽에는 인간의 거대한 외투가 양 팔을 활짝 벌린 채 펼쳐져 있었다. 옷자락에 덮인 바닥 위에는 버려진 메모리폼 베게가 왕좌처럼 놓여 있었고, 화려한 천조각이 그 자루를 덮고 있다.
독라를 연행했던 셋과 비슷한 몸집의 실장석 둘이 왕좌의 양 옆에 서 있고, 베개 위에 반쯤 눕듯이 앉아 있는 건 그보다도 비대한 대머리 알몸 실장석. 공원의 우두머리였다.
정말로 비대한 실장석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비대했다. 팔뚝 살은 물을 담은 가죽부대처럼 출렁이고, 뱃살은 늘어지다 못해 흘러내려 하체를 덮을 지경이었다. 볼 살의 무게로 얼굴 가죽 전체가 밑으로 축 처졌고, 목살은 둥글게 퍼져 지방질의 목도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저런 상태로도 걸을 수 있다면, 그건 웬만한 실장석의 허리보다 두툼한 허벅지가 그 무게를 간신히 지탱하기 때문일 것이다.
침이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수북한 실장푸드를 집어먹던 우두머리는 독라를 보고 우물대던 입을 멈추었다.
"무슨-"
"이런 곳에서 길실장을 보게 될 줄은 몰랐던데스."
우두머리의 말을 끊고 독라가 쾌활하게 말했다.
"공원을 지배할 정도로 강한 독라라면 역시 길실장일수 밖에 없는데스요. 물론 길실장이 그런, 어, 풍만한 모습일줄은 더더욱 몰랐던데스. 하여튼!"
독라는 손가락을 쫙 펼치고 인사하듯 과장되게 흔들었다.
"와타시도 길실장인데스. 서로 반가운데 말이라도 좀 나누는 게 어떤데스까?"
"와타시의 자들은 어디 가고 오마에 혼자 기어들어온데샤!"
"그 셋이 오마에의 자들이었던데스까? 어째 덩치가 좀 있는 게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데스."
혀를 빼문 세 개의 머리통이 독라의 손에서 던져져 우두머리의 발치로 데굴데굴 굴렀다. 우두머리가 새된 고함을 질렀다.
"데엑! 7녀! 10녀! 11녀!"
독라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정당방위였던데스."
"장녀! 차녀! 저 분충을 붙잡는데샤!"
우두머리는 빽 소리 지르며 넓적한 은빛 막대기를 쥐고, 양옆의 실장석과 함께 달려들었다.
"거 성질도 급한데스야."
독라는 중얼거리며, 왼쪽에서 달려오던 놈을 붙잡아 우두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데갸아아악!" "데에엑!"
묵직하게 날아간 녀석은 우두머리가 겨누고 있던 막대기에 보기 좋게 박혔다. 균형을 잃은 우두머리가 나동그라지는 것을 확인하는 사이, 오른쪽에서 달려온 실장석의 주먹이 독라의 얼굴에 전력으로 꽂혔다.
퍽!
"데겍!"
악! 이건 정말로 아프다! 실장석의 주먹치고는 이상하게 단단하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손에는 웬 압정이 박혀 있었다. 독라를 때린 반동으로 압정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줄줄 흘렀다.
'저러면 맞은쪽보다 때린 쪽이 더 아플 텐데, 미친놈인데스.'
다시금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 독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발을 걸어 놈을 넘어뜨리고 압정을 뽑아낸 독라는, 주먹을 움켜쥐고는 압정의 바늘 부분을 쥐어 잡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걸 뭐 하러 그렇게 고생하는데스까."
비틀대며 일어나는 실장석에게 헤드락을 걸고, 가슴에 강철 펀치를 먹이며 독라가 비웃듯 말했다.
퍽 퍽 퍽 퍽
"데벡! 덱! 데켁!"
한 대 두 대 주먹이 꽂힐 때마다 신음을 토하는 실장석의 가슴은 순식간에 빈 깡통처럼 우그러져 들어갔다. 우드득 우둑 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조각난 뼈가 살과 옷을 찢고 튀어나온다. 허파가 찢어졌는지, 피가 왈칵왈칵 쏟아지는 세모꼴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몇 대 더 때리자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실장석의 흉곽이 완전히 박살났다. 가슴 속으로 쑥 들어간 주먹을 빼내자, 흉강에 고여 있던 피가 뭉개진 허파 조각과 함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반쯤 파열된 심장이 굵은 핏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가슴에 난 구멍 밖으로 쏙 빠져나와 흔들렸다. 힘차게 맥동해야 할 심장은 이미 청색으로 굳어가며 파르르 떨기만 하고 있다.
구멍으로 철철 흘러나오는 피를 타고 녹색 돌조각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헤..커허..."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위석을 향해 애처롭게 뻗으며, 실장석은 애원하듯 목소리를 짜내지만, 독라는 무방비하게 노출된 위석을 망설임 없이 밟아 부쉈다.
파킹
"장녀어어어!"
위에 엎어진 차녀를 치우고, 뚱뚱한 몸을 버둥버둥 간신히 일으키던 우두머리가 그 광경을 보고 절규했다. 우두머리의 무기에 배가 뚫린 차녀는 동맥이 심하게 손상되었는지 대량의 피를 흘리며 창백하게 헐떡이고 있다. 독라는 득달같이 달려가서 우두머리를 걷어차 다시 쓰러뜨리고, 엎드린 채 기어 달아나던 차녀의 상반신을 짓밟았다.
"데...케에엑!"
한발로 상체를 누르며 양 다리를 잡아 뒤로 당기자, 한계에 달한 척추가 뿌드득거리며 부서진다.
"데갸아아아아!"
떨어뜨린 무기를 줍고 몸을 다시 일으킨 우두머리가 본 것은, 양손에 각각 차녀의 상하체를 들고 탈탈 터는 독라의 모습이었다. 양 반신이 흔들릴 때마다 두 몸뚱이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창자가 고무줄처럼 흔들린다. 이윽고 독라가 찾던 것이 떨어져 나왔다. 탁하게 변한 차녀의 위석이 이미 조각나 있는 것을 확인한 독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녀의 몸뚱이를 휙휙 내던졌다.
"차, 차녀어어어어!"
"오마에는 왜 이렇게 자에 집착하는데스까?"
"죽여버리는데샤!"
"그보다는 이제 1대1로 공평해졌으니 잠깐 멈추고 얘기 좀 나누는데스."
"곧 죽을 분충한테 할 얘기 없는데스!"
우두머리는 은빛 막대를 휘두르며 독라에게 쿵쾅쿵쾅 달려들었다.
느리다. 너무 느리다. 게다가 찌르라고 있는 뾰족이를 저렇게 느릿하게 휘두르다니, 우두머리는 기본조차 안 되어 있었다. 독라는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우두머리가 휘두르는 창을 공중에서 붙잡았다.
그러자 독라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데?"
잘려나가 피를 펑펑 뿜는 왼손을 보며 어리둥절하는 독라의 머리 위로 우두머리의 무기가 바람을 가르며 떨어진다. 황급히 몸을 옆으로 날린 독라의 귀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맨숭해진 귓가를 더듬자 손에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한 입 크기로 썰어주는데샤!"
우두머리의 무기는 창이 아니라 처음 보는 무기, 커터칼이었다.
널찍한 골판지집 안을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독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듣도 보도 못한 무기였다. 창이었다면 어떻게든 피하며 파고들면 되겠지만, 저렇게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떨어지는 무기를 휘두른다면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다.
몸통을 노리고 날아드는 칼날을 간신히 피하자, 팔뚝에 깊숙한 자국이 생기며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우두머리는 의기양양해서 커터칼을 마구 휘둘렀다.
언제까지나 도망 다닐 수는 없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생각하자. 생각, 생각, 생각...
바닥에 깔린 수건이 독라의 눈에 들어왔다. 독라는 엉겁결에 한 팔로 수건을 집어 들고 휘둘렀지만, 우두머리의 질량이 실린 커터칼은 얇은 손수건을 손쉽게 갈랐다.
이 천은 너무 얇다. 이걸로는 저 무기를 막을 수 없다.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하며 옆걸음질 치던 독라의 발치에 우두머리가 깔고 앉던 왕좌, 메모리폼 베개가 닿았다.
"이제 도망갈 곳은 없는데스! 죽는데샤!"
망나니의 도끼처럼 번쩍 들렸다 떨어지는 칼날을 향해, 독라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자기 몸뚱이만한 베개를 들고 갖다 댔다.
성공이었다.
칼날은 베개를 찢으며 독라를 향해 나아갔지만, 실장석의 힘으로는 두툼한 스펀지를 완전히 가르지 못하고 커터칼은 베개 중간에 푹 박혀버렸다.
그대로 베개를 옆으로 던지자, 칼날은 베개에 딸려 챙그랑 날아가며 우두머리의 손에서 벗어났다.
"데에엑!"
당황한 우두머리가 황급히 칼을 주우러 달렸지만 명치께에 날아든 독라의 무릎이 더 빨랐다. 배를 움켜쥐고 헐떡이며 쓰러진 우두머리를 몇 번 더 발로 찍고 숨을 고른 뒤, 독라는 베개에서 커터칼을 뽑아내 그대로 우두머리의 다리를 슬근슬근 썰기 시작했다.
"데히이익! 데갸아아악!"
워낙 투실한 다리이다 보니 자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베고 나서 작두를 밟듯이 칼등을 콱콱 밟아대자, 나뭇가지가 꺾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리뼈가 잘려나갔다. 피가 쏟아지는 단면으로 희멀겋고 누리끼리한 비계가 걸쭉하게 흘러나온다.
양 다리를 잘라내고 왼팔에 칼날을 갖다 대자, 눈물을 줄줄 흘리던 우두머리가 황급히 외쳤다.
"그, 그만! 살려주는데스! 제발 살려주는데스!"
독라는 우두머리를 흘낏 보더니 말없이 왼팔을 잘라냈다.
"데에에에엑!"
물컹한 팔뚝을 휙 던지며 독라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와타시를 죽이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살려달란 건 또 뭐인데스까."
"오해인데스! 다 오해인데스! 제발 살려주는데스!"
"와타시를 설득해 보는데스."
"와타시는 오마에가 그냥 평범한 독라인 줄 알았던데스! 길실장인줄 알았으면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인데스! 그런데 오마에가 먼저 와타시의 자들을 죽이지 않은데스까!"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데스? 목숨 구걸치고는 건방진데스야."
"와, 와타시는 오마에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데스! 와타시의 부하, 집, 전부 주겠는데스! 목숨만 살려주면 오마에의 부하가 되겠는데스!"
"집이고 뭐고 오마에를 죽이고 가지면 되는 것 아닌데스까?"
비굴하게 간청하던 우두머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독라를 올려다보았다. 독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좋은데스. 와타시가 원하는 건 대답 몇 개 뿐인데스.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살려주겠는데스."
"약속하는데스까?"
"약속하는데스."
한숨 돌린 우두머리의 만면에 희색이 가득 찼다. 독라는 너덜거리는 베개를 끌고 와 앉은 다음 질문을 시작했다.
"먼저, 오마에는 길실장이 맞는데스까?"
"물론 맞는데스." 우두머리는 한 짝 남은 오른팔을 들고 손가락을 펴 보였다.
"길실장이 없어진지 한참이 지난데스. 그런데 오마에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데스? 오마에도 인간의 곁에서 살아온 것인데스까?"
독라의 질문에, 우두머리는 혀를 쯧쯧 차더니 말했다.
"말하는 걸 보니 오마에도 다른 마을들이 다시 길실장을 만들도록 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에 넘어가 이 고생을 하는 모양인데스."
독라는 가슴이 철렁했다. 마을을 떠날 때 장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고 있지 않은가.
우두머리는 눈을 둥그렇게 뜬 독라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와타시의 장로도 똑같은 말을 했던데스. 와타시도 오마에처럼 길실장이 사라진 다음에야 마을을 나왔다는 말인데스요. 오마에, 세상은 넓고 우리 같은 실장석의 마을은 많은데스. 길실장이 사라지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정말 다른 마을들은 놀고 있기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스까?“
"그렇다면... 와타시와 같은 임무를 띠고 길을 나선 실장이 훨씬 더 있다는 말인데스?"
"'임무'라...참 거창한 말인데스. 아직도 그런 걸 믿는 걸 보니 와타시도 옛날 생각나고 좋은데스야."
우두머리는 킬킬대며 말을 이었다.
"뭐, 아주 많지는 않을 것인데스. 와타시의 마을에서도 길실장이 끊긴 후 마을을 나선 건 와타시가 처음이었던데스. 하지만 그런 실장석이 세상에 우리 둘뿐인 건 절대 아닌데스."
"그렇다면 그 길실장들은 모두 어떻게 된데스? 왜 와타시의 마을에는 그런 실장석들이 찾아오지 않았던데스까?"
우두머리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와타시가 어떻게 아는데스까? 굶어 죽었거나, 얼어 죽었거나, 닌겐에게 죽었거나, 짐승에게 죽었거나, 아무튼 정처 없이 헤매다 죽은 게 뻔한데스. 오마에 말고 다른 길실장을 옛날에 딱 한번 봤는데, 이미 팔뚝만 남은 시체였던데스. 손끝에 손가락이 간신히 붙어 달랑거리기에 겨우 알아본데스."
우두머리는 낄낄대며 말했지만 낯빛은 어두웠다.
"거 운수 나쁜 친구가 분명한데스... 아니면 혹시 모르는데스까? 진작 어느 길실장이 기어이 다른 마을에 닿아서, 지금도 어느 마을들은 매년 길실장을 내보내고 있을지? 다른 마을들은 이미 길실장을 통해 연락하는데, 어쩌다 보니 오마에와 와타시의 마을만 외톨이인 걸지도 모르는데스. 우리가 알 수는 없는데스."
혼란스러워 하는 독라를 위로하듯이 우두머리는 말을 계속했다.
"뭐,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지 확실하다는 건 아닌데스야. 궁금하면 오마에가 직접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는데스까? 그래도 확실한 건, 우리 말고도 많은 길실장이 지금도 세상에 많이 있을 거라는데스. 운이 좋다면 금방 죽을테고, 아니면..."
우두머리는 심상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와타시처럼 깨닫게 될지도 모르는데스.“
"깨닫는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데스!"
혼란에 빠진 독라가 날카롭게 묻자, 우두머리는 찌푸린 얼굴로 반문했다.
"오마에는 왜 길실장이 된 데스? 정말로 오마에는 장로의 말만 믿고 마을을 떠난데스까?“
"..."
물론 아니었다. 우두머리는 독라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듯 했다.
"물론 아니었을 것인데스. 오마에와 와타시가 길실장이 된 이유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인데스."
독라의 대답에 우두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라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오마에는 행복의 의미를 찾은데스까?"
"물론인데스. 하지만 지금의 오마에라면 절대 그걸 이해할 수 없는데스."
우두머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다느니, 지식을 얻어 모두에게 전해준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으면 절대 행복을 찾을 수 없는데스야."
"하지만 배우고 달라져야만 행복을..."
"헛소리!"
우두머리가 별안간 빽 소리질렀다.
"언제까지 순진하게 그런 헛소리를 믿을 것인데스까! 앞으로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셀 수 없이 많은 실장석이 그 거짓말에 속아 발버둥 치며 죽어도 소용 없는데스. 우리는 영영 행복해질 수 없는데스!"
"하지만..."
"저 밖의 약하고 멍청한 들실장들을 보는데스. 들실장은 맛있는 음식에 욕심 부리고, 가득한 자들에 욕심 부리고, 예쁜 옷과 머리에 욕심 부리고, 편안한한 집에 욕심 부리는데스. 그래서 들실장들은 음식을 먹을 때, 자를 안을 때, 독라를 보고 비웃을 때, 따뜻한 잠자리에 누울 때 행복을 느끼는데스. 우리가 모르는 그 '행복'데스!“
"하지만 편안함은 실장석을 불행하게 하는데스!"
"불행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는 것인데샤! 우리 모습을 보는데스. 행복을 위해 옷도 버리고, 머리도 버리고, 온갖 즐거움을, 끝내는 자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버린데스. 그렇게 악착스럽게 버려 온 우리에게 결국 뭐가 남은데스까? 아무것도 없는데스! 행복을 찾으며 닥치는 대로 버려온 우리는 행복 자체마저 버리게 된데스. 행복을 이미 버려놓고 무슨 행복을 찾겠다는 말인데샤!"
우두머리는 절절하게 소리쳤다.
독라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들실장은 매일 매일 괴롭게 죽는데스! 편한 것만 찾다가 비참하게 죽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란 말인데스까! 오마에가 말하는 건 고작해야 실장석의 행복인데샤! 실장석이 집착하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데스!"
우두머리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함쳤다.
"오마에, 착각하지 마는데스. 옷을 벗고 머리를 뽑았다고 해서, 오마에가 닝겐이라도 된 것 같은데스까?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는 결국 실장석인데스! 실장석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데스!"
쉬어 버린 성대로 쇳소리를 내며, 우두머리는 온 힘을 다해 절규했다.
"실장석으로 태어났으면, 주제를 알고 실장석답게 살라는데스!“
말을 마친 우두머리는 콜록대며 기침을 토하더니 숨을 골랐다. 독라는 벌어진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우두머리였다. 우두머리는 재차 한숨을 쉬고는, 침으로 목을 축이고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을 나올 때만 해,도 와타시는 오마에와 같았던데스.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다보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데스. 하지만 세상을 돌아다니고 다른 많은 실장석들을 만나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 버린데스. 오히려 어리석고 한심한 들실장이 우리가 알지 못한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데스."
미간을 찌푸리고 힘겹게 침을 삼키고 우두머리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와타시가 몰랐던 정말 많은 행복이 있었던데스. 코로리를 핥던 들실장은 피를 토하며 죽었지만, 단 맛을 느끼던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얼굴이었던데스. 먹이를 구하고 돌아다 닝겐에게 잡혀 독라가 된 실장석은 까만 눈물을 흘렸지만, 그날 아침 머리와 옷을 씻을 때는 행복하게 노래했던데스. 집을 비운 사이에 자들이 잡아먹힌 친실장은 울다 지쳐 죽어버렸지만, 전날 밤에 자들을 안고 잠들 땐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던데스."
독라는 자들을 위해 사육실장의 삶을 버렸다는 미도리의 모습을 잠깐 생각했다. 우두머리는 말을 이었다.
"들실장이 짓던 그 표정. 와타시는 마을에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도, 지어본 적도 없었던데스. 하지만 들실장의 그 얼굴을 봤을 때, 그것이 바로 행복의 표정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던데스. 그 표정을 짓는 잠시나마, 들실장은 분명 행복을 맛보고 있었던데스."
독라는 태어나서 처음 봤던 마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들을 찌푸린 얼굴로 흘겨보다 자매들을 모조리 솎아내던 어미의 표정에는 과연 한 점의 즐거움도 보이지 않았었다.
우두머리는 계속 말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된 데스. 와타시는 어느 공원에 자리잡고, 들실장을 잡아먹고 옷을 빼앗으며 겨울을 견딘 데스. 하지만 그 해의 겨울은 특히 길었고, 결국 월동식이 모두 떨어져 버린데스. 굶어죽기 직전 다행히 날이 풀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와타시는 이상한 것을 본 데스. 처음에는 나무토막인 줄 알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손가락이 달린 팔이었던데스. 뜯긴 지 얼마 안 된 길실장의 팔이었던데스.
피 묻은 돌멩이가 옆에 놓여 있었던데스. 다른 실장석에게 죽임당한 것이 분명했던데스. 와타시는 그 팔을 집어든데스. 와타시의 것과 똑같이 생긴 팔이었던데스. 둘 다 잘라 놓으면 누구 것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똑같이 생겼던데스."
오른팔을 들고 우두머리는 계속 말했다.
"살기 위해서 와타시는 그걸 먹은데스. 먹으면서 와타시는 죽은 길실장이 어떤 실장석이었을지 상상해 본데스. 와타시와 똑같이 어느 봄에 길을 떠나, 행복을 찾으며 고생고생해서 살아남았지만, 결국 들실장에게 습격당해 잡아먹힌데스. 그리고 한 조각 남은 팔뚝은 같은 길실장의 뱃속에 들어간데스. 와타시도 언젠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데스."
자신의 오른팔을 새삼스럽다는 듯 들여다보며 우두머리는 말을 이었다.
"피 묻은 돌멩이를 집어 들고 와타시는 일어난데스, 방울방울 이어지는 핏자국을 따라가자 나무뿌리 사이의 동굴이 보인데스. 겨울을 버텨낸 들실장과 자들이 볼록해진 배를 문지르며 서로 껴안고 행복하게 잠들어 있었던데스.
그날, 들실장 가족의 시체를 깔고 앉아 생각한 끝에 와타시는 알게 된데스. 길실장의 길에는 행복이 없는데스, 행복이란 그저 배고플 때 먹고, 싸고플 때 싸고, 자고플 때 자면서 모심받는 삶에 있는데스. 그래서 와타시는 새롭게 깨달은 행복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데스.
주변의 들실장을 때리고 죽이고 잡아다 노예로 부린데스. 와타시가 행복의 의미를 찾은 그 나무 옆에 노예들을 시켜다 으리으리한 이 집도 짓고, 산더미 같은 음식도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진상받은데스. 자들도 가득가득 낳아 와타시에게 대드는 분충은 전부 솎아내고, 영리하고 고분고분한 자들만 키워낸데스."
그 자들 중 벌써 다섯을 죽인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잊은 듯, 우두머리는 어느 새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말했다.
"와타시에게 복종하는, 와타시를 닮아 강하고 똑똑한 열둘의 자들은 공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분충들을 무릎 꿇리고 고귀한 와타시의 위엄을 널리 떨친데스. 공원의 분충들은 어느새 와타시의 모습만 보여도 운치를 질질 흘리게 된 데스. 와타시는 공원의 보스가 된데스! 귀찮은 일들일랑 잊어버리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노예들의 시중을 받으며 세레브한 삶을 즐기는 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면 뭐인데스까!"
우두머리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팔다리를 파닥거렸다.
독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세레브한 삶이 그렇게도 좋다면 왜 사육실장이 되려 하지 않는데스?"
우두머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공원 보스의 삶으로도 충분한데, 고작 닌겐의 시중 따위를 받아 보겠다고 목숨을 버릴 이유가 어딨는데스까?"
독라는 눈가를 긁으며 말했다.
"공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 공원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 난리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스까?"
우두머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이 안 나오다니 무슨말인데스?"
"동그란 것을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들실장들이 난리치고 있는데스."
우두머리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 수도꼭지 말인데스까? 너무 옛날에 써 봤던 거라 와타시도 가물가물한데스. 그게 뭐 어쨌단 말인데스까? 노예들이 목말라 죽는 거야 자기들이 해결할 문제인데스."
"그렇지만 오마에가 마실 물은 어떻게 구한다는데스?"
우두머리는 귀찮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건 노예들이 해결할 문제인데스. 한두 마리 본보기로 족치면 그런 것이야 어떻게든 구해오는 걸로 정해져 있는데스."
독라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뭐, 좋을 대로 하는데스. 마지막 질문인데스. 왜 공원에는 독라가 없는데스까? 실장석들이 와타시를 무서워한 건 왜인데스? 와타시를 오마에로 착각해서인데스?"
"간단한데스."
우두머리는 검지를 치켜세우고 말했다.
"편안한 집, 세레브한 장식, 맛난 음식, 귀여운 자들. 와타시는 들실장이 바라는 것을 모조리 손에 넣은데스. 하지만 잃어버린 머리카락과 옷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던데스. 노예의 옷을 빼앗으려 해도 너무 작아 입을 수가 없고, 머리카락은 아무리 해도 다시 나지 않은데스."
우두머리는 매끈한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분충들은 앞에서는 와타시를 두려워 하지만, 뒤에서는 와타시가 독라라고 비웃는 것이 뻔했던데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데스. 그래서 와타시는 생각한 끝애 답을 내린데스. 와타시는 독라를 벗어날 수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닌데스. 오히려 와타시는 독라이기에 행복한 것인데스!"
갸우뚱하는 독라에게 우두머리는 신나게 떠벌였다.
"우리가 독라가 된 이유가 무엇인데스까? 독라가 더 우월하기 때문인데스! 냄새나고 지저분한 머리와 옷을 휘감고 다니는 분충들은 얼마나 우스운데스까? 이렇게 매끈하고 홀가분한 독라의 모습을 보는데스! 분충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스. 독라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우아한데스. 와타시의 세레브함은 와타시가 독라이기에 더욱 빛나는데스!"
우두머리는 득의양양하게 미소지었다. 육중했던 뱃살은 팔다리를 재생하느라 지방을 급격히 소모해, 물컹한 가죽만 남아 바닥에 옷자락처럼 질펀하게 늘어져 있었다. 흉측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공원의 독라를 모조리 죽인데스. 감히 노예 주제에 와타시와 맞먹는 세레브함을 가지겠다니, 말이나 되는데스까? 다른 실장석을 독라로 만든 분충 역시 죽여버린데스. 독라와 같이 있기만 했던 분충도 마찬가지인데스. 와타시의 손에 죽을 독라라도, 독라는 독라인데스야. 천한 분충들이 우월한 독라와 눈을 마주치고 말을 섞다니, 죽어 마땅한 죄가 아닌데스까? 와타시는 공원 곳곳에 자들을 보내서, 버르장머리 없는 실장석을 찾아내 전부 죽여버린스. 반대로 이웃을 신고한 실장석에겐 큰 상을 내려준데스. 결국 그 계절이 끝나기도 전에 공원의 독라는 모두 사라지고 세레브한 와타시만이 남은데스!"
기가 차는 논리였다. 한심하게 우두머리를 바라보던 독라는 불쑥 물었다.
"그래서 와타시를 죽이려고 한 데스까?"
"그야 당연한..."
우두머리는 신나게 지껄이다 아차 하고 입을 딱 벌렸다.
독라는 피식 웃으며 칼을 치켜들었다.
"아까는 죽일 생각 없다더니, 말이 왜 다른데스까? 이거 몹쓸 분충인데스."
"아니, 아니, 아닌데스! 이야데스! 다메데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오마에를 살렸다가는 와타시를 죽일 게 뻔한데스야."
"절대 아닌데스! 와타시를 믿어주는데스! 와타시가 이 공원을 떠나겠는데스! 목숨만 살려주는데스!"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도리도리 저으며 우두머리가 울부짖었다. 커터칼을 이리저리 놀리듯 흔들 때마다 우두머리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낄낄 웃으며 칼을 내린 독라는 웃음기를 거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두머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독라를 쳐다보았다.
생각에 빠졌던 독라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묻겠는데스. 길실장의 삶과 우두머리의 삶에서 오마에가 찾은 행복이란 무엇인데스까?"
"그..그건 지금까지 와타시가 열심히 말하지 않은데스까?"
"맛있는 음식, 따뜻한 집, 이런 것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일 지는 몰라도, 행복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스. 오마에의 생각은 어떤데스까?"
적녹색 피딱지로 뒤덮인 소름끼치는 칼날이 우두머리의 눈동자에 비쳤다.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우두머리의 눈에 들어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눈물과 섞여 연한 적색으로 변한 땀은 다시 눈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톡 떨어졌다.
침을 꿀꺽 삼키고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틀린데스. 배불리 먹고 편안히 잠드는 삶이 진정한 행복인데스.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 그 자체가 바로 행복인 것인데스."
"그런데스까."
독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골판지 집의 문이 벌컥 열리고 다섯 마리의 실장석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보스사마! 밖에 분충들이 우글우글하게 몰려 있는.."
쓰러진 우두머리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독라의 모습을 보고 실장석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잘 온데스! 3녀! 4녀! 6녀! 8녀! 12녀! 빨리 이 분충을 죽이는데스!"
우두머리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3녀와 4녀와 6녀와 8녀와 12녀는 서로 쭈뼛대며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우두머리는 다급하게 재촉했다.
"뭘 하는데스! 마마가 핀치데스! 어서 마마를 구하는데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데샤앗! 당장 이 분충을-"
"오마에들의 마마는 와타시에게 실각한데스."
독라가 우두머리의 말을 끊고 말했다.
"하지만 와타시는 보스가 될 생각이 없으니, 오마에 중 가장 강한 자가 새 보스가 되는데스.“
어물어물하던 실장석들은 독라의 말을 듣자마자 서로 데샤악 하고 달려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데스! 당장 마마를 구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똥애미는 닥치는데스!"
서로 쥐어뜯으며 싸우던 실장석들이 저마다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 오마에한테 얻어맞으며 노예처럼 사는 삶도 끝인데스!"
"추한 독라 주제에 그 꼴이 되고도 어디다 대고 명령질인데스! 새 보스는 와타시로 정해져 있는데스!"
"지금까지 오마에를 고문하고 죽일 날만을 상상하며 살아 온 데스! 와타시가 보스가 되면 달마, 자판기, 다양하게 손봐 줄 테니 닥치고 기다리는데스, 똥노예!"
"데, 데뎃, 데에에에?"
경악하는 우두머리와 콩가루가 나는 가족의 모습을 독라는 낄낄대며 구경했다.
후들후들 떨며, 우두머리는 자신의 자들을 바라보았다. 귀신들린 듯 싸우는 자들은 간간히 고개를 돌려 증오서린 눈으로 우두머리를 쳐다보고는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우두머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시를..여..는..데스."
"뭐라고 한 데스까?"
"와타시를 죽여주는데스!"
눈물을 흘리며 우두머리가 독라에게 매달려 간청했다.
"아까는 살려달라 하지 않은데스까?"
"제발 부탁하는데스. 독라노예로 사는 삶은 다메데스! 와타시를 제발 죽여주는데스!"
독라는 우두머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칼날을 들어올렸다.
숨을 몰아쉬는 우두머리의 얼굴에 뾰족한 칼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두머리는 피눈물이 펑펑 흐르는 눈을 질끈 감고 목을 쭉 뺐다.
"자꾸 꼼지락대지 마는데스. 한 방에 못 죽으면 오마에 손해인데스."
높게 올라간 칼날이 호를 그리며 떨어지는 순간, 우두머리는 눈을 번쩍 뜨고 피를 토하듯 외쳤다.
"죽기 싫-"
저녁놀을 받아 붉게 빛나는 골판지상자의 문이 열렸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수십 마리 실장석의 이목이 독라에게 일제히 집중되었다.
발치에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내던지며 독라가 말했다.
"보스는 죽은데스."
웅성대는 소리는 멈칫하더니, 환성 소리가 주위를 메웠다.
"보스가 죽은데스!" "보스는 무슨! 독라분충이 드디어 죽은데스! 데퍄퍄-!" "분충이 죽은데스! 만세데스!"
실장석들의 작은 함성이 공터에 작게 울려퍼졌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미도리가 독라의 손을 꼭 붙잡고 외쳤다.
"오로로옹! 고마운데스! 드디어 보스가 죽은데스! 이제 공원의 실장석들은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데스!"
"독라노예를 부리는 행복말인데스까."
비꼬는 줄도 모르고 미도리는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말했다.
"물, 물론 오마에는 예외인데스. 오마에는 우리들의 친구인데스. 아무도 오마에를 노예로 생각하지 않을 것인데스."
하지만 미도리의 말이 무색하게, 몇몇 실장석들은 벌써 독라를 곁눈질하며 저들끼리 수군수군 뭔가를 작당하고 있었다. 독라는 한숨을 쉬고는 뭉툭하게 재생된 왼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째어 다시 손가락을 만들어야겠지만 너무 피곤했다.
"와타시는 내일 아침 공원을 떠나겠는데스."
"뎃? 벌써 가는데스까?“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스. 와타시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데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공원에서 나가는 길이나 알려주는데스."
우두머리의 커터칼을 들쳐 매고,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끌며 독라는 실장석들을 뒤로 하고 앞서 걸었다. 미도리의 조그만 그림자가 서둘러 그 뒤를 따른다.
D-0
"빠따 잘 챙겨. 발로 하나씩 밟다가는 날 다 샌다."
"압니다 형님, 알아요."
"아크릴판 옮기면서 잡담하지 마! 그거 떨어뜨리면 발톱 나간다!"
"마대자루랑 방역복 모자란데, 더 없어요?"
"창고 어디에 있을 텐데. 기다려봐."
동 트기 직전 이른 새벽. 두런두런 잡담하며 반장의 지시 하에 준비를 마친 한 무리의 장정들이 일제히 칠 떨어진 봉고차에 몸을 싣는다.
"으흐, 조온나 춥네 씨이벌..." "4월인데 날씨가 무슨 아휴..." "여 히타 좀 틀어주이소! 디지게 춥다카이!"
얼음장 같은 시트에 엉덩이가 닿자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나온다.
"시동을 걸어야 히터를 켜지."
조수석에 앉은 나이 든 반장은 그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종이쪽에 뭐라 뭐라 끼적일 뿐이다.
잠시 후, 한참을 뒤진 끝에 차 열쇠를 찾아낸 대머리의 남자가 운전석에 뛰어오른다.
"아이고마 이제 출발하겠심더."
멋쩍게 웃으며 시동을 켜니 낡은 봉고차가 푸다닥 펑펑 기침하며 매연을 토해냈다. 뜨뜻한 공기가 차 안을 채우자,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오들오들 떨던 사람들의 얼굴도 점차 풀어진다.
하늘은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해 바다색으로 물들고 있다. 사람과 장비를 가득 실은 두 대의 봉고가 털털거리며 길가로 빠져나간다. 차체에 붙은 스티커에 그려진, 엄지를 척 치켜든 실장석의 그림이 어슴푸레 보인다.
"파킨 구제. 실장석 전문 구제대행. 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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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골판지 벽을 뚫고 스며드는 오슬오슬한 추위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이리저리 뒤척이던 독라는 결국 선잠에서 깨어났다. 우두머리의 집에 쌓여있던 손수건이라도 가져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머리칼도 옷도 없는 독라의 몸은 더위에는 편하지만 추위에는 취약하다. 삼한사온이라 했던가. 전날 저녁, 날씨가 추워지는 것을 눈치채고 막무가내로 골판지집에 몸을 밀어넣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다가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성체 둘과 자실장 셋이 들어가니 골판지 상자는 미어터질 지경이다. 세상모른 채 잠든 미도리의 품속에서 엄지손가락을 쭙쭙대며 옹기종기 뭉쳐 있는 자실장들이, 독라의 기척에 얼굴을 찌푸리며 서로의 품속으로 머리를 깊게 파묻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
엄습하는 한기에 다시금 몸을 움츠리며, 독라는 꿈틀꿈틀 움직여 운치굴 속에 한 팔을 밀어 넣었다. 깊숙이 손을 집어넣자 매끈한 살덩이들이 꼬물대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우두머리가 죽어 걱정이 없어진 미도리가 전날 돌아와 운치노예들을 모조리 독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데프픗 치프픗 하며 사정없이 움직이는 미도리와 자들의 손아귀에 마지막 남은 보물마저 빼앗긴 노예들은 테에엥 치에엥 하며 울다가 선명한 눈물 자국을 얼굴에 그린 채 서로 부둥켜안고 잠들었다.
말캉한 살덩이들 사이에 손을 집어넣자, 잠결에 전해진 온기에 행복회로를 발동한 노예들이 꿈틀꿈틀 몰려들며 잠꼬대를 중얼댄다.
"마마...테츄우...상냥한 마마로 돌아와줄 줄 알았던테치.."
"마마의 젖 맛나맛나레치...행복한츄우.."
팔 끝에 몰려든 새끼들의 온기가 전해지자 굳어진 몸이 조금 따뜻해진다. 망상에 빠진 운치굴 노예들의 잠꼬대를 들으며, 독라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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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는 금세 떠오르고, 시간은 어느덧 출근 때가 되어 도로는 차량으로 꽉꽉 채워졌지만 후타바 시를 빠져나가는 차들이 대부분. 베드타운인 후타바 시 중심부로 향하는 파킨 구제의 봉고차는 찬 공기를 가르며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점차 활기를 되찾는 도시와는 다르게, 침침한 봉고차 안의 남자들은 저마다 소보로빵이니 삼각김밥이니 아침거리를 입에 밀어넣고는 말없이 우물거린다. 히터 바람을 쐬니 못 다한 새벽잠이 다시 밀려드는지, 저마다 뻑뻑한 눈을 꿈쩍거리며 비벼댄다. 이미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도 있다.
"니미럴, 참피새끼 구제용역은 정말 싫었는데..."
해진 바람막이를 입은 장년의 남자가 빵가루를 입에 털어 넣은 뒤, 비닐포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가를 훔치고, 코밑까지 지퍼를 채워 올리며 중얼거렸다.
"일감이 없는데 뭐 어떡해. 날이 갑자기 이래 추우면 공구리가 갈라진다고. 칼바람 맞으면서 타설하고 양생하느니..."
"아, 형님, 누가 몰라서 그래요? 보수가 적으니 그렇지, 보수가."
까끌하게 수염이 난 남자가 빙글대며 달래지만, 바람막이를 입은 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불평한다.
"보수만 적었으면 내가 말을 안 해. 구제 한번 뛰고 나면 온몸에 옷에 피 냄새며 똥냄새며 아휴... 게다가 동물 죽이는 것도 마음 아픈데, 사람처럼 생긴 것들이 울며불며 비명 지르고 애원하는데 그걸 어떻게 맨 정신으로 죽입니까?"
"아, 누구는 좋아서 하나?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이왕 하는 일인데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해서야 좋을 것 없잖아. 저기 저 학생처럼 마음이라도 가볍게 먹자고."
두 쌍의 눈이 봉고차 구석으로 향했다.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실쭉이고 있었다. 바람막이는 더욱 굳어진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형님, 보면 모릅니까? 저 녀석 학대파요. 곱상하고 젊은 친구가 뭐가 좋다고 용역 일을 한답니까? 힘없는 짐승이나 죽이는 걸 즐기는 몹쓸..."
"쉿. 듣겠어, 이 사람아."
둘의 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학대파 남자는 입이 귀에 걸린 채 핸드폰 화면만을 연신 스크롤해 내린다.
두 대의 봉고는 이윽고 두루마리 공원의 남쪽 입구 앞 갓길에 멈춰섰다. 두 개의 표지판과, 코팅된 채 고정되어 바람결에 떨리는 종이 한 장이 보인다.
<두루마리 공원>
<실장석은 유해조수입니다. 먹이를 주지 마세요.>
<공고. 4월 12일부터 14일까지 두루마리 공원의 실장석 구제가 있을 예정이니 유의바랍니다. 후타바시 환경관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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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음에 숨이 턱턱 막힌다. 미도리는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났다. 콧속으로 훅 엄습하는 악취에 눈을 뜨자 땟국물에 절은 자실장의 정수리가 코앞에 보인다. 수건에 덮인 세 마리 자실장은 뭉쳐 놓은 양말처럼 이리저리 구겨진 채 한데 모여, 미도리의 품에서 새근새근 숨을 내쉬고 있다. 볼록한 몸통 세 개가 저마다 오르락내리락 할 때 마다, 벌어진 입에서는 마치 풀무가 바람을 토하듯 역한 숨결이 흘러나와 미도리의 얼굴에 유황 증기처럼 엄습한다. 하지만 악취의 근원이 자기 새끼들임을 깨달은 미도리에게는 마치 향긋한 꽃 냄새처럼 느껴질 뿐이다.
누가 사랑스러운 이 아이들을 이렇게 비좁은 상태로 자게 하는가. 미도리는 고개를 뒤로 돌려,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독라를 째려봤다.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상체를 일으킨 미도리는 팔을 쭉 뻗어 골판지집 문을 지탱하고 있던 나뭇가지를 밀어 쓰러뜨렸다. 문이 빠끔히 열리며 찬바람이 스며들자 자실장들이 잠결에 치이치이 거리며 몸을 움츠린다. 미도리가 자신이 덮던 수건을 그 위에 한 꺼풀 더 덮어주자, 자실장들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손가락을 빨며 다시 선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해가 떠올라 세상은 이미 꽤 밝아졌다. 벌어진 문틈으로 햇빛에 밝게 비쳐든다. 집안이 밝아지자 한 팔을 운치구덩이 속에 처박고 엎드린 채 곯아떨어진 독라의 모습이 보였다. 미도리가 못마땅한 듯 독라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치자, 독라는 부스스 일어나 하품하며 등을 긁더니 커터칼을 챙겨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그 통에 잠에서 깨어난 운치노예들은 따스한 팔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영문을 모른 채 눈을 끔뻑인다. 이윽고 독라가 된 서로를 가리키며 치프픗 비웃지만, 상대도 자신을 보고 비웃는 걸 보며 '츄아아?' 놀라 머리와 몸을 더듬으면 느껴지는 건 매끈한 피부뿐. 전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독라가 된 자신들의 처치를 재확인하며 테에엥 치에엥 하고 자기들끼리 꼬물꼬물 모여들어 오들오들 떤다.
독라를 쫓아낸 후, 문을 콩알만큼 남기고 닫은 미도리는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보물, 노란색 리본을 찾았다. 꼭 쥔 채 잠들었던 리본은 잠결에 놓쳐 바닥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닳고, 해지고, 바래고, 누더기가 된 리본은 벨크로도 다 떨어지고 매듭도 풀려 이제는 그저 길쭉하고 꼬질꼬질한 천조각이 되었다. 그래도 미도리는 리본을 소중히 집어 들어 먼지를 후후 불어내고 머리에 달았다. 두건과 머리통 사이에 우겨넣고 살짝 삐져나와 보이게만 한 그 모습은 달았다기보다는 끼웠다고 해야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단장을 마친 미도리는 부드럽게 자실장들을 깨웠다.
"와타시의 귀여운 자들, 이제 일어나는데스우. 잠꾸러기 실장석은 행복한 사육실장이 될 수 없는데스요~"
눈을 비비며 일어난 자실장들은 저마다 배고프다 목마르다며 보챈다.
목이 마르다는 자실장의 말에 미도리의 얼굴에 다시금 수심이 내려앉았다. 집에 남은 물은 페트병 하나. 아껴 쓰면 한동안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이후에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큰일이다.
"뭐, 어떻게든 다 수가 생길 것인데스."
조금이라도 더 현명했다면 물이 왜 나오지 않는지, 물이 고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궁리했겠지만, 실장석 특유의 낙천성으로 골치 아픈 문제는 간단히 넘겨 버리고 미도리는 병뚜껑에 물을 따랐다. 어쩌면 '보스가 죽었으니 이제는 다 잘 될거다.'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한몫 했을 지도 모른다.
"다들 잘 듣는데스요. 어째서인지 지금 물을 구할 수 없는데스. 그러니 물이 다시 나오거나, 비가 내릴 때까지는 최대한 아껴야 하는데스.“
“”“하이테츄~”“”
딴에는 영리한 원사육실장이라고 양을 줄여 급수하는 미도리.
아침을 먹고 나가기 전, 미도리는 마지막으로 입을 쩝쩝대며 칼칼한 목에서 가래침을 모아 자들의 얼굴을 깨끗이 핥아 주었다. 평소라면 물을 묻힌 후 핥아 주었겠지만 오늘은 물이 부족하니 침만으로 핥아줄 수밖에 없다. 아궁이를 기어 다닌 듯 시커먼 자실장들의 얼굴은 미도리의 혓바닥이 훑고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깨끗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깨끗해진다기보다는 기름때를 문지르듯이 얇게 펴 바르는 것뿐이겠지만, 실장석의 입장에서는 뭐 아무래도 좋다. 혀를 한번 날름거릴 때마다 시커먼 때와 기름, 짭짜름한 땀과 눈곱이 혓바닥에 새까맣게 묻어 미도리의 목구멍 속으로 꿀떡꿀떡 넘어간다. 기분 좋은 듯 테치칫 웃는 자실장의 얼굴과 미도리의 혓바닥 사이에 진득한 침이 찌익 늘어났다가 끊어진다. 평생 양치라고는 모르고 사는 실장석. 게다가 물도 부족해 자고 일어나 입가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실장석의 끈끈한 타액. 자실장의 얼굴이 '깨끗해'짐과 비례하여 악취는 점점 더 끔찍해지지만 미도리의 눈에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일 뿐이다.
"마마, 간지러운테츄후~"
"깨끗하지 않은 자는 사육실장이 될 수 없는데스요."
사육실장의 삶에서부터 도망쳐 나온 미도리지만, 자식들을 사육실장으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도 부단히도 노력하는 이런 아이러니는 실장석의 한계일까.
"와타시도, 와타시도 어서 할짝할짝 해주는테치!"
"와타시도 잊으면 안 되는 테치!"
보채는 자실장들의 꼬질꼬질한 얼굴을 누런 가래침으로 꼼꼼히 뒤덮고 나서 미도리는 자들을 꼭 안아주었다.
"절대로 다른 아줌마에게 문을 열어주면 안 되는데스!"
"물론인테치!" "걱정말고 다녀오시는테츄~"
누굴 닮았는지 정말로 영특하고 똑똑한 아이들이다. 재잘재잘 다짐하는 자실장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미도리는 문을 나섰다.
문 밖에서는 독라가 쭈그리고 앉아 미도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가는데스."
공원의 아침은 유달리 한산했다. 아마 다들 물이 다시 나올 때까지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집에 틀어박혀 버티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하지만 단수가 계속된다면 이런 평화도 폭풍전야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미도리의 조그만 두뇌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을 남겨놓을 만큼 현명한 일부와는 달리, 대부분의 들실장은 물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슬슬 물을 받을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목이 말라 포악해진 실장석들이 벌써 공원을 배회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시금 엄습하는 불안감을 떨치며 미도리는 공원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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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댓 명의 장정은 봉고에서 주섬주섬 내려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반장은 현장에 나와 있던 공무원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며 서류에 연신 이것저것을 끼적인다. 운전석에서 내린 조수는 인부 한 명과 함께 가슴께까지 오는 묵직한 아크릴판을 끙끙대며 끌어내려 공원 입구를 틀어막는다. 한때 새하얬을 아크릴 벽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잇었다. 특히 지면부터 무릎 높이까지에 빼곡한 흠집과 희미하게 침착된 녹색 얼룩은 벽에 가로막혀 돌과 똥을 던지며 절망 속에 죽어갔을 수많은 실장석들의 아우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바람막이의 남자는 입고 있던 낡은 바람막이를 벗어 돌돌 말아 봉고차 좌석에 올려놓고 -그래도 편의상 계속 바람막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꾀죄죄한 방역복을 팡팡 털어 뒤집어썼다. 하얀 방역복은 아크릴판과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적록색 얼룩이 묻어 있다. 어차피 옷에 오물이 튀는 것만 막아주면 장땡인 구제복인지라, 공들여 얼룩을 지우고 관리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앞면에 길게 난 지퍼를 잡아 내린 뒤 다리를 집어넣고, 두 팔도 집어넣은 뒤 지퍼를 올린다. 허리 부분에 달린 벨트를 조이고, 스키 장화처럼 단단한 장화와 두툼한 고무질 장갑을 착용하고, 후드를 뒤집어쓴 뒤 마지막으로 마스크와 고글까지 쓰면 끝이다. 마스크를 쓴다 한들 어지러우리만치 지독한 똥냄새와 피비린내를 완전히 막아주지는 않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온 몸과 옷, 머리카락에 냄새가 흠뻑 배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구제 장비는 쓰레기 줍기 봉사활동을 하는 초등학생들과 큰 차이가 없다. 집게, 마대자루, 그리고 야구배트와 이어폰형 린갈. 별사탕으로 꾀어낸다거나, 약물을 뿌린다거나 하는 방식은 비싸고 번거로워서 쓰지 않는다. 도심의 실장석들은 굴 같은걸 파지도 못하기 때문에 삽도 필요하지 않다. 린갈이 필요한 이유는 혹시 숨겨둔 새끼들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지만, 사실 실장석이 숨길만 한 장소란 거기서 거기인지라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도망치고 애원하는 실장석을 죽이고, 집어서, 자루에 넣는 단조로운 작업의 반복 뿐.
바퀴벌레마냥 증식하는 실장석의 특성상 구제용역의 수요는 많지만, 워낙 단순한 일이다보니 보수는 적은 반면 심리적 부담감은 상당하다. 때문에 실장석 구제는 전문화, 체계화되기보다는 영세한 규모의 자영업체가 하청을 받은 후 인력소개소에서 사람을 모아다 뛰는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준비가 끝나자 반장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타자를 치더니 용역들에게 전했다.
"다른 데는 아직 준비 안 됐다니까 기다리지."
방역복의 남자들은 인도 한 편에 주섬주섬 자리를 잡아 앉고, 반장은 종이쪽 한 장을 꺼내 "구제작업중. 출입금지."라고 적어 아크릴판에 붙인다.
바람막이도 퍼질러 앉아 후드와 마스크를 벗고 손에서 장갑을 빼냈다.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잠깐 쓰고 있었을 뿐인데 벌써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놈의 구제작업, 쓸데없이 힘들기만 해갖고 말이야. 두 번 다시 내가 하나봐라."
"그래도 이번에는 며칠 전부터 단수를 해놨으니까, 그나마 좀 나을 거예요."
낯선 목소리가 끼어든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아까 봉고차에 타고 있던 학대파 청년이다. 바람막이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단수라니, 무슨 소리야?"
"저번 달부터 조례가 바뀌어서요. 이제 구제작업 들어가기 며칠 전부터 일대의 공공수도를 끊어놓거든요. 참피들이 맥을 못 춰서 잡기 편하라고 말이죠."
"조례도 다 찾아보고, 학생은 그런 데 관심이 참 많나봐?"
"예, 그럼요. 구제 용역 한두 번 해본 게 아닌데요."
바람막이가 비꼬았지만 학대파 청년은 천진하게 벙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야 원. 바람막이는 혀를 쯧 차며 물었다.
"그러면 경험 많은 학생 생각에 여기 구제는 어떨 것 같애? 3일 동안이나 하는 구제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음... 편하다고 할 수는 없겠죠. 두루마리 공원은 넓이도 넓이지만, 한동안 버려지다시피 하다가 최근에 시장이 바뀌면서 공약에 따라 구제하기로 한 거거든요. 그동안 참피들 바글바글해졌을 걸 생각하면... 하지만 뭐 단수도 했겠다, 입구마다 한 팀씩 사람들도 많겠다, 하니까 다른 구제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 같은데요?"
"아니, 근데 단수를 할 거라면 뭐 하러 구제를 따로 하나? 입구 막아버리고 몽땅 죽을 때까지 물 끊어버리면 안 돼?"
학대파 청년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간 난리 나요. 실장석이라는게 바퀴벌레 같아서, 아무리 막아놔도 절박해지면 어떻게든 비집고 나오거든요. 살아남은 녀석들이 공원을 탈출하면 어디로 가겠어요? 주택가로 죄다 흩어지죠. 주택가 피해도 피해거니와 그렇게 사방팔방 퍼지면 처리하기도 힘들어요. 차라리 이렇게 한바탕 구제하고, 물도 다시 틀어주고 해서 살만하게끔 만든 다음 다시 또 구제하고, 그렇게 해서 공원 안에서 죽게끔 하는 게 낫죠."
"그건 그렇네."
바람막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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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마를세라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으며 독라와 미도리는 한동안 길을 걸었다. 공원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수돗가에 몰려 있던 실장석들도 다들 포기하고 철수했는지, 탈진해 쓰러진 시체 한두 구를 제외하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밤낮없이 싸움판이 펼쳐지던 공중화장실 앞도 무수한 핏자국과 시체만 남긴 채 텅텅 비어 있었다. 운 나쁘게 출산이 임박한 실장석 한두 마리가 진한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출산할 변기를 찾아 헤매지만, 이미 실장석들이 몽땅 마셔버려 물 한 방울 없는 화변기에는 바짝 마른 구더기의 잔해만 굴러다닐 뿐이다.
붉어진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한걸음 한걸음을 간신히 내딛던 친실장 한 마리가 끝내 총구에 힘이 풀려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쫙 벌어진 총배설구에서 왈칵왈칵하며 똥과 피와 점액이 걸쭉하게 흘러 나온다. 새끼들은 뱃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던 터라 이미 흐물흐물하게 소화되어 죽어버렸다. 걸쭉해진 옷과 머리, 피부, 눈알이 배설물에 군데군데 섞여 흘러나온다. 순식간에 수분을 잃은 친실장은 충격과 스트레스가 겹쳐 그대로 부르르 떨더니 픽 쓰러져 죽어버렸다. 죽은 어미의 가랑이에서 간신히 기어 나온 구더기 한 마리가 반쯤 녹고 바짝 마른 얼굴을 간신히 들고 레후 하고 힘없이 울더니 역시 툭 쓰러져 죽었다.
물을 조금이라도 비축해 놓았던 실장석은 집에 틀어박혀 문을 닫아걸었고, 그렇지 못한 실장석은 남의 골판지집에 대고 애원하며 을러대다가 탈진해 죽음을 맞이했다. 빠른 신진대사에 걸맞게 빠르게 소모되는 수분. 건조한 봄 날씨. 모든 조건이 치명적이었다. 물이 끊긴 지 단 이틀. 공원의 실장석들은 벌써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초토화되고 있었다.
걷는 내내 찌푸린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키던 독라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침을 탁 뱉고 눈앞에 보이는 골판지 집으로 다가갔다.
문에 얼굴을 대고 귀를 기울여 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골판지집을 툭툭 차 보아도 아무 반응이 없다. 슬쩍 밀어보니 문은 손쉽게 열려 안의 참상을 보여주었다. 텅 빈 채 나뒹구는 페트병. 걸레 짜듯 마지막 물기 한 방울마저 꾸득꾸득 짜내어져 꽈배기마냥 배배 뒤틀린 자실장, 엄지, 그리고 구더기의 시체. 그리고 그 한 가운데, 고체처럼 걸쭉한 거품을 입가에 묻히고 목을 부여잡은 채 눈을 까뒤집고 죽어있는 성체가 있었다. 이 집은 꽝이다.
혀를 차며 다시 길을 걷던 독라는, 이윽고 마주친 또 다른 골판지집에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았다. 추잡스럽게 쩝쩝대는 소리와 헐떡대며 간청하는 엄지실장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네...챠...제발...와타시...맛나맛나...아닌...레...레에..."
이윽고 들려오는 파킨 소리. 아무래도 어미가 물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다. 이 집도 아니다.
독라는 세 번째로 마주친 골판지집에 살금살금 다가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테에엥, 마마! 우지챠가 쪼글쪼글해진테치... 와타치는 마시지 않아도 좋으니 우지챠에게 물을 조금만 주세요테치..."
"레...후... 구더기 목구멍씨... 바짝바짝레후... 그러니까 프니...프..."
그리고 숨죽여 꾸짖는 친실장의 목소리.
"안되는데스! 언제 물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구더기에게 줄 물은 한 방울도 없는데스! 구더기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하는데스. 죽은 자들의 몫까지 공원을 자들로 가득가득 메워야 하는데스."
드디어 찾았다. 독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발을 들어 굳게 닫힌 골판지문을 걷어찼다.
쾅, 쾅, 쾅.
"데샤아아악!" "테챠아아!" "레히이..."
독라의 발길질에 집이 뒤흔들릴 때마다 안에서 가련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찌그러진 골판지문을 홱 열어젖히자 독라의 얼굴에 무엇인가가 날아와 툭툭 부딪혔다. 구더기를 가로막고 선 자실장의 힘없는 투분이다. 팬티에 딱딱하게 말라붙었던 똥은 독라의 얼굴에 맞고 튕겨 나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이놈테치! 이놈테치! 아무도 구더기짱을 건드릴 수 없는테치!"
덜덜 떨며 저항하는 자실장을 무시한 채, 독라는 커터칼을 고쳐잡고 친실장에게 다가갔다.
"다, 다, 다가오지 마는데스! 다가오지 마는데스! 데샥-"
네 발로 서서 간신히 위협하는 친실장의 목덜미를 커터칼의 궤적이 가르자, 못생긴 머리통이 툭 떨어져 자실장에게로 굴러갔다.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진 자실장의 엉덩방아에, 힘겨운 숨을 내쉬던 구더기가 ‘지벳’ 하고 깔려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라는 벙글벙글 웃으며 친실장이 소중히 보관해놓은 페트병의 뚜껑을 열었다. 페트병의 안에는 깨끗한 물이 찰랑찰랑하다. 그대로 병뚜껑에 물을 부어 여러 컵 벌컥벌컥 들이켠 독라는 입가를 훔치며 미도리에게 병뚜껑을 내밀었다.
"오마에도 한 모금 하는데스."
얼떨떨해하며 물잔을 받아 드는 미도리.
구더기의 시체를 깔고 앉은 채 어쩔 줄 몰라 그저 테에엥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자실장을 뒤로 하고, 독라와 미도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렴풋이 땅을 울리는 진동과 휙휙 지나가는 소음이 멀리서 들려온다. 독라가 아랫마을에서 이곳으로 올 때 느꼈던 자동차의 진동이었다. 공원 입구가 머지않았다.
“다 온 데스. 저기가 공원 입구인데스. 이제 혼자 가는-"
수풀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하던 미도리가 갑자기 숨을 훅 들이마셨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따라 내민 독라의 눈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며칠 전 들어왔던 입구를 틀어막은 하얀색 벽.
거대한 벽에 군데군데 묻어 있는 불길한 얼룩.
그리고 그 너머로 빠끔히 보이는 것은, 왔다 갔다 하는 하얀 인간들의 머리통.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한 광경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공포가, 공포가 독라의 마음에 엄습한다. 그것은 아랫마을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공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보다 깊숙한, 보다 본능적인, 독약처럼 은밀하고 훨씬 끔찍한...
마음 한 구석이 차갑고 파랗게 변하는 느낌이다. 이 느낌. 이 느낌. 이 느낌! 미도리의 분홍색 실장복을 보았을 때 따뜻하게 북받쳐 올랐던 마음 한 구석의 바로 그곳이, 지금은 하얗게 질린 채 쪼그라들어 온몸에 섬뜩한 금속질의 냉기를 뿜어낸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하늘이 빙빙 돈다. 세상에. 잔인하리만치 깨끗한 저 흰색. 저 흰색. 저 흰색!
경악에 찬 채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던 독라는 미도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을 둥그렇게 뜬 미도리는 얼굴만 창백하고 가볍게 떨고만 있을 뿐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 떨림은 진동이 되었고, 진동은 요동이 되었고, 요동은 태풍이, 지진이 되어 미도리를 집어삼켰다. 상하좌우로 미친 듯이 떠는 미도리의 턱이, 마치 떨림으로 인해 걸쇠가 풀린 듯이 떡 벌어지고, 압력밥솥에서 증기가 나오듯 빠른 음절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하, 하얀, 하, 하, 하얀, 하얀"
처음 듣지만 익숙한 말. 철판이 갈리는 것처럼 듣기 괴로운 소리다.
"하하하야안아, 아, 아, 악"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하얀 악마인데스!"
찢어지는 듯한 미도리의 비명은 독라의 유전자 깊숙히 각인되어 있던 생존 본능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렸다. 두 실장석은 그대로 잠깐 얼어붙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돌아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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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갸아아아!"
"어 뭐야. 수풀 속에 두 마리 있었네. 저 녀석들 튀는데요? 한 놈은 원사육실장 같은데, 다른 놈은 벌거벗었네."
"원사육이건 나발이건 공원 안에서 뛰어 봐야 벼룩이지. 내버려 두고 다른 팀 연락 올 때까지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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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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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시방 뒤뚱뒤뚱하믄서도 잘도 달아난디야."
"참피놈들 하루이틀 보나. 그만 구경하고 여 앉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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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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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래 기다릴 줄 알았으면 담배라도 태우고 올 걸 그랬네."
"하이고오, 얼매나 더 있으야 시작하능교?"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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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도망치는데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피 냄새가 올라오는 목에서는 그렁그렁 소리가 난다. 허파가 타는 것 같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댄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다리가 끊어질 듯 하다. 하지만 혈액으로 가득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은 미도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다리를 맹렬히 움직였다.
독라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목숨부터 건져야 한다. 아이들부터 구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골판지집 사이사이를 달려나가며, 미도리는 쥐어짜내듯 외쳤다.
"하얀 악마인데스! 하얀 악마가 온 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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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반장의 핸드폰에서 띠링 하는 메신저 소리가 울렸다. 심드렁하게 화면을 확인한 반장은 조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들 하십시다."
반장과 조수가 아크릴판을 밀어 옮기는 사이, 인부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장비를 다시 입었다. 채비를 갖춘 구제반이 공원 안으로 슬렁슬렁 걸어 들어갔다.
북받치는 희열에 숨을 몰아쉬며, 학대파 남자는 방금 본 독라 실장석을 계속 생각했다. 큰 덩치. 군살 없는 체형. 그리고 오른손에 분명히 붙어 있던 다섯 개의 손가락. 틀림없다. 긴 세월 끝에 드디어 다시 찾아낸 것이다. 부디 살아남아라, 의문의 독라야. 남의 손에 죽지 말고 부디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네 가치를 증명해서 꼭 내 손에 잡혀다오.
흥분감에 몸을 부르르 떨며, 학대파는 미소 가득한 입을 마스크로 덮고 성큼성큼 걸어나섰다.
후타바 시 두루마리 공원의 구제가 시작되었다.
친실장은 푸석푸석한 골판지집 안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마마... 물...물...”
다 죽어가는 자실장이 간신히 목을 쥐어짜내지만 친실장은 성가신 듯 홱 하고 돌아누웠다. 친실장이 물을 구하러 나간 사이, 먹이 저장고로 쓰던 작은 플라스틱 상자를 기어이 열어낸 자실장이 보존식을 모조리 먹어버린 것이다. 하루 종일 절박하게 쏘다니다가 결국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친실장을 마중한 것은 텅 빈 저장고와, 목을 부여잡고 캑캑대며 데굴데굴 구르는 자실장. 아직 봄인지라 보존식이 많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말린 구더기, 비스킷, 사탕 조각 등 물기라고는 없는 것들을 그 조그만 체구로 몽땅 처먹었으니 물이 급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없는 물을 무슨 수로 내어주랴. 보채는 자실장을 쥐어박을 기운도 없는 친실장은 그대로 풀썩 드러누워 꾀죄죄한 골판지벽만 바라볼 뿐이다.
“똥애미...와타시를 낳았..으면... 책임을...”
섬망증을 보이기 시작한 자실장이 중얼대는 소리도 정신이 몽롱한 친실장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물이 나오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자를 낳으면 행복해진다고만 배웠지, 이런 경우는 마마한테 들어 본 적도 없다. 왜 하필 세상의 보배인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가. 왜, 왜, 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친실장은 힘없이 누워 그저 자문자답할 뿐이다. 봄철마다 기승을 부리는 황사가 다물어지지 않는 A자형 입으로 사정없이 솔솔 들어와 목구멍에 달라붙는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삼켜지지 않는 침을 삼키려 노력하는 친실장의 귀에, 숨 가쁜 외침이 멀리서 들려온다.
“가...데스! ...치는...”
대체 누가 물 아까운 줄 모르고 저렇게 고함을 지르지?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온다.
“하얀....온 데스! 모두...망..치는...”
하얀? 뭐가 왔다고? 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다.
소리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친실장의 집 앞을 지나치고는 다시 멀어져 간다.
“하얀 악마가 온 데스! 모두 도망치는데스!”
미도리의 외침은 이번에야말로 친실장의 어지러운 머릿속까지 확실히 전달되었다.
하지만 친실장은 의외로 차분했다. 탈수로 저하된 뇌 기능 덕택에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얀 악마? 하얀 악마가 뭐지? 아, 그래. 하얀 악마. 그렇다면 어서 도망쳐야지. 암, 하얀 악마가 왔다면 어서 도망쳐야 하고말고.
하지만 탈진한 친실장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것이다.
하얀 악마. 무서운데스. 하지만 왜 무서운데스? 어쨌든 무서운데스. 도망쳐야 하는데스. 왜 도망쳐야 하는 데스? 모르겠는데스. 하지만 도망쳐야 하는데스. 하지만 하얀 악마가 뭐인 데스?
꼬리를 물던 질문은 이제 하얀 악마로 그 주제를 바꾸어, 친실장은 골판지집 뚜껑이 벌컥 열릴 때까지 자문자답만을 계속하며 누워만 있었다.
천장이 갑자기 사라지고 집 안이 별안간 밝아졌다. 별안간 나타난 뿌연 하늘. 그 하늘을 메운 인간의 형상은 역광으로 인해 하얀색이 아니라 검은색으로 보였다. 인간데스. 와타시를 어서 사육실장으로 삼으면 행복해지는데스. 친실장은 중얼거렸다. 인간은 동그랗고 길쭉하고 반짝거리는 것을 들어올렸다. 동그랗고 길쭉하고 반짝거린다니, 나 저거 본 적 있어. 저것은 틀림없이 물병이다! 친실장은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여름철 공원 밖에서 인간들이 들고 다니던 물병도 분명 저렇게 동그랗고 길쭉하고 반짝였었다. 인간은 커다란 물병을 누워 있는 자의 품에 안겨 주었다. 물병을 선물받은 자가 흘리는 빨갛고 초록의 기쁨의 눈물이 물병 밑에서 퍼져 나온다. 인간은 물병을 들어 올려 이번에는 내게 선물한다. 내게 물병을-
그리고 친실장은 더 이상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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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막이는 골판지집 안에 드러누워 있던 친실장과 자실장을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끝으로 짓눌러 죽이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집게로 시체를 집어 마대자루 안에 넣었다. 린갈에 연결된 이어폰은 죽기 직전까지 행복회로를 돌리며 웃던 친실장의 독백을 끝으로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 않고 있다.
‘적어도 죽을 땐 행복하게 죽었으니 그나마 좀 낫겠지.’
골판지집을 대강 밟아 부수고 운치 구덩이 안을 확인한 다음, 바람막이는 어느 새 묵직해진 마대자루를 비우러 공원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학대파 청년의 말마따나, 며칠간의 단수 덕에 공원의 실장석들은 과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길바닥에는 게거품을 문 실장석의 시체가 드문드문 놓여 있고, 골판지집 속의 실장석들도 탈진한 채 꼼짝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구제반이 할 일이라고는 그저 쓰레기를 줍듯이 단조롭게실장석을 수확하는 것 뿐이었다. 예전의 구제작업 때처럼 팔을 번쩍 들고 꽥꽥 소리 지르며 사방팔방 도망 다니는 실장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 편, 공원 입구를 막은 아크릴판 밑에는 어떻게든 기운을 쥐어짜내 여기까지 닿은 실장석 서너 마리가 우왕좌왕거리고 있었다. 그 너머의 반장은 담배를 문 채 아크릴판 위에 팔을 괴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크릴판을 힘없이 토닥토닥 때리는 실장석, 머리와 옷을 개어놓고 도게자하는 실장석,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삿대질하는 실장석을 무표정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실장석이 예닐곱 마리쯤 모이자, 반장은 새 마대자루를 꺼내 자루의 입구를 벌려 내려놓고 외쳤다.
“너희를 사육실장으로 받아주겠다.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환성을 지르며 몰려든 실장석들로 북적대는 자루를 반장은 영차 하고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시청에서 파견한 실장석 분쇄차로 가져갔다. 공익이 자루를 받아들고 분쇄차의 투입구에 탈탈 털자, 굴러 떨어지며 저마다 오른손을 입가에 올리고 뎃스웅 아첨하던 실장석들은 꽥 하는 단말마와 함께 순식간에 다져졌다.
공원 입구에 도착한 바람막이는 반장에게 마대자루를 건네고, 고글과 마스크를 벗고 잠깐 땀을 식혔다. 그 사이 반장은 분쇄차로 자루를 가져가 집게로 시체를 하나씩 꺼내서 투입구에 던져 넣고는, “큰 놈 여섯 마리, 새끼 열 마리.”라고 중얼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파일에 숫자를 끼적였다. 입구를 막아 둔 아크릴판을 조금 밀어 밖으로 나온 바람막이는 봉고차 안으로 몸을 기울여, 자기 자리에 놓아두었던 수건과 물병을 집었다. 이마를 훔치고 물을 한 모금 마시니 그나마 살 것 같은 기분이다.. 한숨을 휴 내쉬고 허리를 우두둑 우둑 돌리며, 빈 마대자루를 받아든 바람막이는 다시 공원 안쪽으로 부지런히 향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바람막이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야구방망이로 골판지집을 리듬감 있게 콱콱 찍어 누르고 있는 아까의 학대파 청년과 마주친 것이다. 린갈의 가청 범위 안으로 다가가자 이어폰이 지직거리더니 기계음으로 번역된 실장석의 절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만하는데스! 그만해주시는데스! 팔! 와타시의 팔! 와타시의 다리! 와타시의 섬섬옥수가! 그냥 빨리 죽여주는데스으!”
절박한 내용에 어울리지 않게 억양 없는 기계음으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기괴했다. 보다 못해 한 마디 하려던 바람막이는 잠시 멈추더니 진저리치며 가청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어차피 이래 죽이나 저래 죽이나 죽이는 건 똑같겠지.’ 바람막이는 생각했다. ‘할당량 못 채워서 보수 적게 받으면 자기 손해니까.’
히죽이며 실장석을 천천히 으깨는 학대파를 뒤로 하고, 바람막이는 알루미늄 배트를 달랑달랑 흔들며 다른 실장석을 찾아 공원 안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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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달렸지? 모른다. 여기는 어디쯤이지? 모른다. 나는 왜 달리고 있지? 모른다.
공포에 사로잡힌 채 독라는 그저 달렸다. 골판지 집과 나무들이 휙휙 지나간다.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어느 쪽으로 달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도리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목숨부터 구해야 한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독라는 어느새 주위의 풍경이 익숙함을 느꼈다. 울창한 숲 속의 공터, 커다란 나무와 그 옆에 놓인 커다란 파란색 상자가 저만치 보였다. 저도 모르게 눈에 익은 길을 따라간 끝에, 전날 갔던 길을 따라 우두머리의 집 쪽으로 향한 것이다. 독라는 을씨년스러운 골판지 상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우두머리의 집은 그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집을 덮었던 비닐, 장신구, 집 안에 즐비했던 수건과 음식들은 흔적도 없이 약탈당해 있고, 살점과 사체만이 안팎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우두머리의 자식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전부 죽어버린 다음, 들실장들이 몰려들어 물자를 털어간 것이 분명했다. 사방팔방 천장에까지 남김없이 튀어 있는 핏자국이 전날의 치열한 싸움을 짐작케 했다. 우두머리의 커다랗고 머리 없는 시체는 구석에 처박혀 나뒹굴고, 우두머리의 자식 아홉 마리의 –5녀와 9녀는 독라가 떠난 다음에야 나타나 싸움판에 뛰어든 모양이다- 시체가 탁한 눈을 벌린 채 이곳저곳에 엎어져 있다. 그리고 그보다는 조그만 성체들의 즐비한 시체는, 약탈품을 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은 들실장들이 틀림없다. 린치당한 시체는 하나같이 머리와 옷이 벗겨져 있고, 죽은 어미의 가랑이 사이에서 하반신만 빠져나온 채 죽어 있는 자실장, 반쯤 씹혀먹힌 채 버려진 무수한 구더기 등등 눈을 돌릴 때마다 다양한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관광객마냥 한가롭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우두머리의 집을 다시 나와 숨을 고르며 독라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다. 숨어야 한다. 우두머리의 집은 안 된다. 이렇게 커다란 집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변변한 덤불도 없는 숲 속에서, 달리 숨을 곳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를 기어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리다. 나무 기둥 뒤에 숨는다면 안전할까? 하지만 어느 쪽에서 인간이 올지 모르는 노릇이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붙잡고 그림자를 흔들 때마다 독라는 까무러칠 듯 놀라 납작 엎드렸다. 동족의 비명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아니, 실제로 들려오고 있었다. 다시금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독라는 사방을 초조하게 둘러보았다. 숨을 곳은 없다. 도망갈 곳도 없다. 저기 저 그림자는 혹시 인간은 아니겠지? 마을에 있었다면 안전한 굴 속에 숨었을 텐데...
그 순간, 공원 우두머리가 했던 말이 독라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나무 옆에 노예들을 시켜다 으리으리한 이 집도 짓고...’
독라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리나케 우두머리의 집 주변을 살폈다. 우두머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두머리의 이야기에 나왔던 그 땅굴이 나무뿌리 사이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흙과 돌멩이 뿐, 동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절박하게 부엽토를 헤쳐 보지만 그 아래는 단단한 모래흙뿐이다. 한낮의 태양이 독라의 머리 위로 쨍 하고 빛난다. 금방이라도 하얀 악마가 몽둥이를 들고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정신이 아득해진 독라는 눈 앞 나무뿌리 사이에 놓인 넓적한 돌 위에 휘청 주저앉았다.
그러자 묵직한 돌멩이가 움찔,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독라는 벌떡 일어나 돌멩이 밑을 살펴보았다. 돌과 나무뿌리 사이에 좁고 까만 틈이 보였다. 커터칼을 틈 사이로 밀어 넣어 보니, 납작한 칼날은 넓은 공간 속으로 거침없이 쑥 들어갔다. 틀림없는 땅굴이다. 허영심 많은 우두머리가, 자신에게 있어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이 동굴을 돌로 막아버렸던 것이다.
독라는 부리나케 틈새에 손을 밀어 넣으려 해 보았지만, 좁은 틈 사이로는 손가락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흙을 파 보려 해도 주위가 나무뿌리라서 입구를 넓힐 수가 없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발만 동동 구르던 독라의 귀에 빠직 하고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담이 서늘해져 등 뒤를 돌아본 독라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고작해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하얀 악마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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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니미럴.”
까끌하게 수염이 난 남자는 고글 너머로 보이는 참상에 나지막이 내뱉었다.
“니미 씨부럴.”
마스크를 뚫고 풍겨오는 비릿하고 지독한 냄새에 올라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삼키며, 남자는 다시 중얼거렸다.
실장석 시체 정도야 구제작업을 하면서 질리도록 보아 왔지만, 남자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제껏 상상치도 못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의 광경은 도축업자가 아니고서야 절대 익숙할 수가 없다.
나무 아래 놓인 자재용 플라스틱 골판지 박스의 안팎은 말라붙은 빨간색 피와 초록색 똥으로 도배하다시피 되어 있었고, 온갖 다채로운 방식으로 죽어 있는 실장석의 시체가 종합선물세트마냥 가득 들어차 있었다. 콩밥 위의 콩처럼 파리가 다닥다닥 앉은 뼈와 살과 창자가 마치 폭죽을 터뜨린 것처럼 사방에 널려 있고, 바닥은 썩어가는 피로 진흙탕이 되어 있다. 반쯤 열린 박스 안에서는 아직도 반쯤 응고된 핏물이 흘러나온다. 정신 나간 살인마가 시체로 장식해놓은 악마 숭배의 제단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난장판을 그나마 가장 순화해서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실장석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한 자리에 모여 이런 피의 향연을 벌인 것인지 의문을 품을 경황조차 없었다. 바람결에 훅 끼쳐오는 악취에 남자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몇 시간 전 봉고 안에서 바람막이에게 속 편한 소리를 할 때만 해도, 이런 고생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면 진작 차에서 뛰어 내렸겠지.
고개를 휙휙 흔들고 저벅저벅 걸어 나가 시체 조각을 하나씩 수거하는 남자는, 자신의 왼쪽, 십여 미터쯤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얼어붙어 있는 독라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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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악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척척 걸어 나가 들실장의 시체를 모으기 시작했다. 분명히 고기를 모으고 있는 것이라고 독라는 확신했다. 눈앞의 고기에 정신이 팔린 하얀 악마는 다행히 독라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독라는 미친 듯이 돌 틈을 넓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단단한 나무뿌리와 더 단단한 돌로 둘러싸인 틈새는 요지부동이었다. 하얀 악마의 자루는 벌써 보기에도 묵직해지고 있었다. 정신이 팔린 이 틈을 타서 어서 숨지 않으면 다음은 독라의 차례가 될 것이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는 독라의 눈은 저도 모르게 하얀 악마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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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었던 마대자루는 벌써 제법 묵직해졌다. 이 난장판을 다 치우려면 마대자루 한 두 분량으로는 안 될 것이다. 옮길 수 있을 만큼만 자루를 채우고,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서 아직도 실장석의 시체로 가득한 공터를 찍었다. 지도를 켜서 현재 위치를 캡처한 남자는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소장님. 여기 참피 시체가 무지하게 널려 있는데, 한두 명 갖고는 못 치울 것 같네요. 사람 좀 더 보내 주십쇼. 예, 어디인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예, 예.”
캡처한 사진을 메신저로 보낸 남자는 휴 하고 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공원 입구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기 전, 남자는 커다란 골판지 상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남자는 힘이라면 자신 있었다. 어차피 치워야 할 것 미리 좀 정리해 놓아도 나쁠 것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남자는 양 손으로 힘껏 상자를 들어 보았다. 하지만 허리까지 오는 박스 안에 실장석 시체가 도대체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 상자는 도통 움직이지를 않았다. 요것 봐라. 오기가 생긴 남자는 더욱 힘껏 들어 보았지만, 잡을 만한 구석 없이 매끈한 상자는 좀처럼 엎어지지가 않았다.
“힘만으로 하려 들지 말고 머리를 써야지.”
중얼거리며 남자는 들고 있던 알루미늄 배트를 거꾸로 꼬나잡았다. 손잡이 부분으로 질척한 흙을 파헤쳐 땅과 상자 사이에 배트를 비집어 넣고, 남자는 단단한 장화를 신은 발등을 받침대 삼아 배트를 지렛대처럼 힘껏 눌렀다. 눅눅한 골판지가 우그러지며 상자가 살짝 들리자, 남자는 놓칠세라 그 밑에 발을 끼워 넣었다. 그 자세 그대로 쭈그려 앉은 남자는 상자 밑에 양손을 밀어 넣고, 영차 기합을 주며 커다란 상자를 스쿼트 하듯이 번쩍 들어 올렸다. 수십 킬로그램이 넘는 박스가 손쉽게 기울어지더니 무수한 실장석 시체가 밖으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가벼워진 상자를 납작하게 누른 다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공원 입구 쪽으로 향했다.
나무 기둥 뒤에 숨은 적록의 눈이 처음부터 그 광경을 보고 있었음을 남자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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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사라지자 독라는 자신이 본 광경을 즉시 따라했다. 하얀 악마의 동료들이 오기 전에 어서 행동해야 한다.
가지고 있던 커터 칼날을 틈 사이에 끼워 넣고, 독라는 지표에 돌출된 나무뿌리를 받침대 삼아 칼날을 지렛대처럼 힘껏 눌렀다. 그러자 천근같던 돌이 움찔움찔 하더니 과연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틈이 벌어진 순간, 팽팽하게 휘어진 칼날이 탁 부러졌지만 독라는 늦지 않게 돌을 받쳐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돌멩이는 독라의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온 힘을 다 내어 양손으로 들어 보아도, 틈새는 더 벌어지기는커녕 독라의 손가락을 내리누르며 서서히 다시 좁아졌다.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독라는 있는 힘껏 기합을 지르며 간신히 돌을 들어 올리고는, 급하게 굴 속으로 몸을 날렸다.
텁 하고 돌이 다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땅굴에 들어온 독라가 느낀 것은 오른팔에 엄습하는 통증이었다. 들어 올렸던 돌은 마지막 순간 독라가 한 쪽으로 밀어낸 덕에 비스듬히 떨어져서, 독라의 몸뚱이가 드나들 정도의 틈새는 다행히 확보되었다. 하지만 독라의 오른팔은 어깻죽지부터 돌 틈에 끼어 바깥에 내놓아진 상태다.
단단히 끼인 오른팔은 아무리 당겨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독라는 한 팔을 밖에 내놓은 채 고통을 견디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피가 통하지 않은 오른팔은 뻣뻣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두런대는 소리와 저벅대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오기 시작했다. 하얀 악마의 동료들이 도착했다.
“으으, 씨발. 좆같네.” “어휴,,,”
투덜대며 시체를 치우는 방역반의 목소리가 들리자 독라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돌 밑에서 삐죽 튀어나온 실장석의 팔. 누가 보아도 이상한 모습일 것이다. 운 나쁘게 눈에 띈다면 그 때야말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절박해진 독라는 자유로운 왼손을 이리저리 더듬어 보았다. 손끝에 차갑고 단단하고 납작한 무엇인가가 닿았다. 조금 전 부러져 굴 속으로 떨어진 커터칼 조각이다. 독라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뭉툭한 왼손으로 칼날을 잡은 독라는 눈을 질끈 감고 오른쪽 어깨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피딱지로 뒤덮힌 칼날은 하루 새 몰라보게 무디어져 있었고, 뭉툭한 왼손 하나로는 악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독라는 멈추지 않았다. 이리저리 요동치는 칼날을 고쳐 잡아가며, 독라는 이를 악물고 어깨를 조금씩 썰어냈다.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깨를 잡아당기자 끝내 오른팔이 몸통에서 뽑혀 나갔다. 독라는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끝까지 끌어 모아, 돌 틈에 아직 끼어 있는 잘린 팔을 밖으로 간신히 밀어냈다. 독라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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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 속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미도리는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미도리의 얼굴에 문을 연 자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장녀, 차녀, 삼녀 모두 안전히 있는 것을 확인한 미도리는 그대로 풀썩 무릎 꿇고 자들을 끌어안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마, 무슨 일인테츄?” “왜 이렇게 급하게 오신테치?” “마마 왜그러는테치... 무서운테치...”
하얀 악마가 온 데스. 우리는 모두 죽는데스.
무심코 말하려다 미도리는 입을 다물었다. 방울 같은 세 쌍의 눈이 미도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애써 미소 지으며 미도리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야 와타시의 귀여운 자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급하게 온 데스요~ 오늘은 마마와 하루종일 놀도록 하는데스!”
아무렇지 않은 척 거짓말해 보지만, 영특한 자들은 벌써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마마, 오늘따라 이상한테치.” “마마, 무슨 일이 있는...”
“아무것도 아닌데스! 자, 오늘은 숨바꼭질을 하고 노는데스~ 다들 꼭꼭 숨는데스. 집에서 가장 숨기 좋은 곳이 어디라고 했는지 다들 기억하고 있는데스까?”
서툰 연기가 무색하게 미도리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이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착하디착한 세 마리 자실장은 무언가 낌새를 느낀 듯, 겁먹은 표정이지만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치 구덩이 속으로 폴짝 폴짝 폴짝 뛰어내렸다. 본의 아니게 쿠션이 되어 준 독라 분충들이 지벳 지벳 하고 외치는 단말마가 구덩이 속에서 들려온다.
“침착해야 하는데스. 와타시는 마마데스. 와타시는 마마인데스. 마마인데스...”
본 적도 없는 자신의 어미의 얼굴을 상상해 그리며, 미도리는 비틀대며 일어나 집 밖으로 떨리는 걸음을 내디뎠다. 시간이 많지 않다. 주변의 흔적을 지우고, 덤불을 드리워 집을 가리고, 잎사귀를 모아 집 위에 덮어야 한다. 미치광이처럼 중얼대며 나뭇잎을 모으던 미도리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하얀 악마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할 때쯤이 되어서야 간신히 위장을 끝내고 문을 걸어 잠글 수 있었다.
문이 닫힌 집 안은 고요하다. 미도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둔중한 걸음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퍽퍽 때리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오고, 데갸악 프갹 하는 비명 소리가 간헐적으로 메아리치다 끊긴다. 집 밖, 덤불 너머에서 하얀 악마가 동족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있다.
캄캄한 집 안에서 미도리의 가족은 납작 엎드려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운치 구덩이 안에서는 자실장이며 독라노예들이며 다 같이 얼싸안은 채, 동족의 단말마가 들릴 때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소리를 두 손으로 간신히 틀어막고 있다. 미도리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구석에 웅크려 노란 넝마 리본을 손에 쥐고 눈을 꼭 감은 채 덜덜 떨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는 비명 소리를 동반하며, 느리지만 분명하게 가까워 왔다. 이제 멈추나 싶으면 다시 다가오고, 더 다가올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발소리는 점점 커지고 가까워녔다. 한없이 가까워지던 발소리는 골판지집 앞에서 착 멈추었다. 집 바로 앞,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하얀 악마가 서 있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미도리는 리본을 뭉쳐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운치굴 속에서는 공포를 억누르지 못 하고 ‘찌이이...’하는 비명 소리가 실낱같이 새어 나온다. 제발 저 소리를 듣지 못 했기를, 제발 눈치 채지 못 했기를, 미도리는 노란 리본을 악물고 빌었다.
‘주인님이 반드시 와 주실 것인데스. 주인님이 반드시 와서 구해 주실 것인데스...’
조용한 가운데 들려오는 자신의 맥박 소리만을 느끼며, 미도리는 마음속으로 사육주를 연거푸 부르짖는다. 주인의 듬직한 팔. 자상한 손길. 친절한 미소. 주인님, 어디 계신데스? 미도리는 여기데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푹신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서 자실장 미도리는 눈을 뜬다. 매일 아침 주인이 고급 실장푸드를 듬뿍 넣어 주면, 자실장 미도리는 침대에서 폴짝 내려와 귀엽게 울며 꾸벅 인사한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출근하는 주인의 뒷모습을 향해 미도리는 ‘다녀오시는테츄-’ 힘차게 손을 흔든다. 텅 빈 집에서 보내는 영겁 같던 하루. 하지만 어김없이 저녁놀을 받으며 돌아온 주인을 맞아 현관에서 테츙 인사하는 미도리. 고소하게 살살 녹는 스테이크에, 후식으로는 달콤한 별사탕을 먹은 뒤, TV를 보는 주인의 발치에서 공놀이를 한다.
뉴스에서는 자를 가졌다가 버려진 사육실장이 공원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미도리를 걱정스럽게 힐끔 바라보는 주인. 하지만 영리한 사육실장 미도리는 방긋 웃으며 선수 쳐서 말한다.
“걱정 마세요테치. 미도리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아요테츄!”
따라서 빙긋 웃으며 주인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아, 주인의 손가락은 너무나도 따뜻하다. 너무나 정겹고 너무나 행복하다. 이런 행복을 잃게 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주인의 바짓단에 얼굴을 부비며, 미도리는 다짐하듯 중얼거린다. ‘절대로 아이 따위 낳지 않을게요테치. 절대로 낳지 않는테치. 절대로, 절대로 낳지 않는데스. 주인님... 데엥... 데스우...’
저벅, 저벅, 저벅.
“절대로...낳지 않는....절대로...”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미도리는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마치 놀리듯 발소리는 멀어져 간다. 미도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2년간 살아온 꾀죄죄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저 발소리, 미련이 남은 듯 천천히 멀어지는 발소리, 그리고 익숙한 이 상황!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흐려진다. 2년 전 그 때와 같다.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공원에서 살겠다고 말한 다음날, 집을 만들어 주고 멀어져 가던 주인의 발소리와 같다. 그때와 똑같은 이 덤불 속, 똑같은 집 안, 똑같이 느리게 멀어져 가는 발소리. 자상한 주인은 미도리가 마음을 돌리고 쫓아오기를 바라며, 일부러 저렇게 천천히 느릿느릿 돌아갔던 것이다. 그 때와 똑같은 이 상황, 멀어져 가는 주인님의 발자국 소리! 안 돼, 안 돼, 두 번 다시는 안 돼.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날 버리지 말아요! 주인님! 미도리는 입에서 리본을 빼고 황급히 소리쳤다.
“데스우우우우!”
우렁차게 외쳐 놓고, 미도리는 스스로가 저지른 짓에 어안이 벙벙해 넋을 잃었다. 짧은 찰나, 미도리는 하얀 악마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 했기를 기도했지만, 불행히도 미도리의 외침과 동시에 발자국은 그 자리에서 딱 멈췄다. 1초, 2초, 3초...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얀 악마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미도리가 품기 시작한 찰나.
발소리는 네 발로 뛰듯 맹렬하게 쿵쾅쿵쾅 되돌아왔다.
“데에에에!” “챠아아아!” “찌이이이!”
쿵 쿵 쿵 하고 집이 통째로 흔들린다. 성벽 같이 튼튼했던 상자는 순식간에 우그러져 들어가고 이곳저곳이 찢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미도리와 자실장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주먹이 천장을 부수자,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찢어진 틈새로 새어 들어왔다. 끔찍하게 굵은 손가락들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2년 동안 굳건히 버텨 왔던 집을 간단히 두 조각 내 버렸다.
“안녕, 분충들!”
미도리의 코앞까지 고개를 들이민 하얀 악마. 투명한 고글 너머로 징그럽게 희번덕이는 눈알이 선명히 보인다.
“정말이지, 너희 원사육실장은 항상 똑같다니까.”
“찌아아아아아!”
운치굴 너머로 고개를 내민 차녀의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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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그리고 밤.
공원을 휩쓸었던 오늘의 구제도 끝나고, 매일처럼 찾아온 공원의 밤은 전날보다 훨씬 조용했다.
독라는 고개를 빠끔 내밀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제는 둘 다 뭉툭해진 양손으로 구멍 가장자리를 잡고 굴에서 빠져나왔다. 굴 바깥에 있어야 할 잘린 팔은 하얀 악마가 수거해 갔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었다는 것을 실감한 독라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우두머리의 집이 있던 자리는 실장석 터럭 하나도, 골판지 조각 하나도 보이지 않게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남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에는 하얀 달이 휘영청 걸려 있고, 스산한 공원에는 구슬피 우는 풀벌레 소리만이 무거운 적막을 깨뜨린다. 서늘한 밤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독라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길을 따라 왔던 방향으로 더듬어 돌아갔다.
한참을 헤맨 끝에 아침에 왔던 공원 입구로 돌아갔지만, 입구는 여전히 높다랗고 하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아우성치던 실장석의 흔적이 얼룩진 벽 앞에 가득했다. 아무리 힘껏 밀어 보아도 튼튼한 흰색 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독라는 벽에 풀썩 기대어 앉았다. 이대로 밤이 지나고, 새벽을 깨치고 아침이 찾아오면 하얀 악마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오늘 숨었던 땅굴로 다시 숨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하얀 악마는 언제쯤 사라지는 것일까? 탈수와 배고픔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불확실했다. 독라는 비참한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어느 덧 익숙해진 길을 따라 미도리의 집으로 향했다. 이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원에서 살아온 미도리의 도움이 조금이라도 더 필요하다. 독라는 미도리를 찾아 길을 나섰다.
구제반이 쓸고 지나간 풍경은 아침과는 딴판이었지만, 여러 번 길을 잃으면서도 독라는 간신히 미도리의 집이 있던 덤불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성했던 덤불은 이리저리 헤집어져 있었고, 그 안에 자리해 있던 미도리의 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당했구나, 생각하며 독라는 미도리의 집터로 힘없이 다가갔다. 골판지집이 사라진 매끈한 흙바닥에는 덩그러니 파여 있는 운치구덩이를 제외하고는 실장석이 살았다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폐한 풍경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덤불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독라상...?”
미도리의 목소리였다.
미도리는 뛰어와 독라를 부둥켜 안았다.
“오로롱! 살아있었던데스! 다행인데스! 이제 와타시는 살은데스!”
“오마에는 어떻게 살아있었는데스까?”
“그건... 그러니까... 와타시는 덤불 안에 숨어있었던데스. 하얀악마는 빈 집인 줄 알고 집만 부수고 가 버린데스!”
충격이 컸는지, 미도리는 말을 더듬었다.
“자들은 어떻게 된 데스까?”
“자들은 운치굴 안에 숨어서 살아남은데스. 지금은 굴 안에서 자고 있는데스.”
미도리의 말을 증명하듯, 운치굴 안에서 코오 하고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독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벌건 대낮에 운치굴 속에 숨은 자실장을 하얀 악마가 못 보고 지나치다니? 하지만 부주의하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독라는 말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한데스. 하얀 악마가 내일도 못 보고 넘어가리라는 보장이 없는데스. 와타시가 안전한 곳을 찾았으니 자들을 깨워 그리로 가는데스.”
“그, 그런...”
이상하게도, 희색이 감돌아야 할 미도리의 표정은 어쩐지 곤란해 보였다.
“자들이 오늘 많이 놀라서 좀 더 자게 하고싶은데스. 멀지 않은 곳이라면 조금만 이따 출발해도 되는데스까?”
눈앞에서 하얀 악마가 집을 부수어 갔다면 과연 충격이 컸을 것이다. 독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앉았다. 미도리는 많이 힘들었는지, 독라의 옆에 앉아 하얀 악마가 집을 부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독라상이 살아 있어서 다행인데스. 덕분에 와타시는 살은데스.”
“이제 살았다니, 너무 기대하지는 마는데스. 와타시는 하얀 악마에게서 오마에를 지켜줄 수는 없는데스.”
“그, 그건 알고 있는데스. 와타시의 말은, 그러니까, 그게, 그래도 오마에와 함께라면 좀 더 안전하지 않겠는데스까?”
미도리는 말까지 다 더듬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는데스.”
독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은 느리지만 꾸준히 지나, 어느 새 달은 하늘 귀퉁이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머지않아 동이 틀 것이다. 독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미도리에게 말했다.
“이제 충분히 기다린데스. 자들을 깨우는데스.”
“벌, 벌써 그렇게 된 데스까?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되는데스?”
“속 편한 소리 그만 하는데스. 하얀 악마가 언제 올 지도 모르는데 더 이상 시간 낭비할 수 없는데스.”
“하지만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데스까? 자들이 죽는 것보다 자들이 잠을 더 자는 게 중요하단 말인데스? 오마에, 이상한데스.”
미도리는 독라의 얼굴을 보면서도, 침을 꿀꺽 삼키며 어깨 너머 어딘가를 자꾸 흘낏흘낏 바라보았다. 독라는 말을 멈추고 미도리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지만, 어두운 그림자 속에는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독라는 불안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눈을 피하는 미도리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미도리의 얼굴이 어딘지 다르게 보였다. 분명 미도리인 건 맞았지만, 아침에 보았던 얼굴과는 어딘지 차이가...
뭔가를 알아챈 독라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말하는데스.”
“무, 무슨말인데스까?”
“지랄 말고 뭘 숨기고 있는지 말하는데스.”
“숨기다니 무, 무슨말인데스?”
“오마에, 리본은 어디다 팔아먹고 지금 와타시 앞에서 수작 부리는데스?”
“리, 리, 리본은...”
미도리가 항상 지니고 있던 노란색 리본이 없었던 것이다.
“리, 리본은 하얀 악마에게서 도망칠 때 잃어버린데스.”
“사육실장의 증표라고 늘 지니던 리본을 잃어버렸다니, 와타시가 호구로 보이는데스?”
두 눈을 시퍼렇게 부릅뜬 독라는 뒷걸음질 치는 미도리를 향해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엉거주춤 뒤로 기어가는 미도리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요놈 요놈 이 분충봐라. 감히 들실장이 사육실장에게 손을 대려고 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굵직한 목소리에 독라는 얼어붙었다. 간신히 뒤를 돌아보자, 위아래로 시커먼 평상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어느 새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림자 속에 있어서 접근하는 줄 몰랐구나, 후회하며 독라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마을을 떠나고 산전수전을 다 겪어 온 독라는, 더 이상 아랫마을에서처럼 인간을 보자마자 공포에 빠지던 서투른 길실장이 아니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독라는 인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미도리를 향해 말했다.
“미도리, 와타시의 말을 잘 듣는데스. 저 닌겐은 네모난 것을 갖고 있지 않아 우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스. 와타시는 오른쪽으로 달릴 테니, 오마에는...”
“왼쪽으로 달리라고?”
재차 들려오는 굵직한 목소리에 독라의 입이 쩍 벌어지는 동시에, 옆구리에 가볍게 날아든 남자의 발길질에 독라는 저만치 나동그라졌다. 빙그레 웃고 있는 인간을 향해 독라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와, 와타시의 말을...”
“잘 듣고 있지. 아주 선명하게 잘 들려.”
“하지만 커다란 네모를 갖고 있지도 않은 닌겐이...”
“커다란 네모? 너 설마 PDA형 린갈을 말하는 거냐?”
남자는 자신의 입을 톡톡, 그리고는 이어폰을 낀 귀를 톡톡 두드렸다.
“벌써 몇 년 전에 단종된 PDA형 린갈을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긴, 너 같이 멍청한 실장석 따위가 뭘 알겠냐마는.”
남자는 껄껄대며 말했다.
“이 멍청하고 순진한 녀석아, 같이 도망치긴 뭘 도망쳐. 저 녀석은 이미 널 팔아 넘겼는데.”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도리가 쪼르르 달려 나와 인간의 바짓단에 볼을 부벼댔다.
“데승~ 닝겐상~”
“오냐, 오냐. 이 기특한 녀석. 으하하!”
남자는 쪼그려 앉아 미도리의 더러운 머리를 맨손으로 토닥였다.
“약속대로 와타시를 사육실장으로 삼아 주시는데스까?”
“물론이지! 너와 네 새끼 모두 내 사육실장이다.”
“데스우우우우!”
환성을 지르는 미도리를 보며 독라는 허탈감에 고개를 툭 떨궜다.
몇 시간 전.
“안녕, 분충들!”
미도리의 코앞까지 고개를 들이민 하얀 악마. 투명한 고글 너머로 징그럽게 희번득이는 눈알이 선명히 보인다.
“정말이지, 너희 원사육실장은 항상 똑같다니까. 인간이 멀어져 간다는 그 상황을 견디지를 못하지.”
“데, 데, 데스웅~”
넋이 나간 미도리가 제일 처음 한 것은 고작 리본을 꼭 쥔 오른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아첨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어라? 그러고 보니 너...”
남자는 미도리의 손에 들린 노란 리본을 보고 휘파람을 휙 불었다. 미도리가 알 리 없지만, 다행히도 눈앞의 사람은 아침에 공원 입구의 하얀 악마 사이에 섞여 있던 학대파였던 것이다. 학대파 입장에서도 운 좋게도, 눈앞의 실장석은 구제 작업이 시작되기 전 공원 입구에서 독라와 함께 달아나던 바로 그 원사육실장이었다.
‘요놈을 이용해 그 독라를 찾을 수 있겠군.’
빙긋 웃는 학대파의 얼굴을 보며 미도리는 반신반의했다. 실장숍에서 최고의 금기 중 하나였던 아첨. 모든 인간은 아첨을 싫어한다고 배웠는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아첨이 효과를 보리라고는 기대하지 못 했다. 혹시 저 사람은 애호파가 아닐까?
“닌겐상, 혹시 와타시의 애교가...”
“아, 그래, 그럼그럼.”
남자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넌 애교가 참 귀여운 실장석이구나. 내 사육실장으로 삼고 싶을 정도야.”
“데, 데에에에?”
혹시 자신이 행복회로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모두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집을 부수던 하얀 악마가 이제는 자신을 사육실장으로 삼아 주겠다니, 믿을 수 없지만 믿는 것 말고는 달리 무슨 길이 있을까? 운치굴 안의 자실장들도 이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가, 감사한데스! 와타시는 훈련받은 고급 사육실장인데스! 와타시의 가치를 알아봐 준 닌겐상은 분명 후회하지 않는-”
“아, 그래, 그래. 그런데 그 전에.”
남자는 쉿, 하고 미도리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나는 귀여운 사육실장도 좋지만 똑똑한 사육실장을 갖고 싶어. 내 말을 이해하고 내 부탁을 들어 줄만큼 영특한 사육실장을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미도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살려주는 것도 모자라 사육실장까지 시켜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무슨 일이던지 말씀만 하시는데스!”
“그래, 좋은 자세구나.”
남자는 미도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 너는 공원 입구에서 하얀 악마들을 보고 도망쳤어. 그리고 그 옆에는 손가락이 달린 커다란 독라가 있었다. 내 말이 맞니?”
“마, 맞는데스.”
“그래, 그렇다면 그 실장석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구나. 말해줄 수 있니?”
“그, 그건... 그건 와타시도 모르는데스. 죄송하지만 와타시는 정말로...”
“아니, 아니야. 죄송할 것까지야. 당연히 모를 수도 있지.”
인자한 얼굴로 푸근한 말을 건네는 남자의 모습에 미도리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렇게 자상하고 푸근한 사람이 나의 새 주인님이라니. 바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친절했던 이전 주인의 기억, 눈앞의 저 사람이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다른 실장석을 학살했던 기억, 모든 기억은 물에 씻은 듯 미도리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장밋빛 미래의 상상만이 미도리의 자그마한 가슴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그렇다면 대신 내 부탁을 하나 들어 주어야겠다.”
“물론인데스. 말씀만 하시는데스!”
“오늘 아침 너와 함께 있던 독라를 찾아라. 어떻게든 찾아서 이곳으로 데려오도록 해. 동 트기 전 여기로 돌아오겠다. 만일 네가 그 때까지 독라를 여기 붙잡아 두고 있다면, 너와 네 새끼들은 모두 사육실장이 되는거야.”
“뎃... 하지만 하얀 악마들이...”
“아, 걱정하지 마. 이 근방은 구제를 끝냈다고 말해둘 테니까. 아마 폐허가 된 네 집터를 구태여 뒤져 볼 하얀 악마는 없을 거다.”
“알, 알겠는데스, 닌겐상. 그런데...”
“응? 또 궁금한 게 있어?”
“그런데 그 독라는 왜 찾으시는데스까?”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의 미간에 생긴 주름을 보고 미도리는 곧바로 후회했다.
“건방지구나. 언제부터 고급 사육실장이라는 게 인간의 말에 토를 달기 시작했지?”
미도리는 납작 엎드려 머리를 찧으며 도게자하기 시작했다.
“죄송한데스! 죄송한데스! 와타시가 그만 주제넘어 버린데스! 제발 용서해 주시는데스!”
눈물을 흘리며 주섬주섬 옷을 벗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남자는 미도리의 정수리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그래, 반성한 것 같으니 용서해 주마. 하지만 두 번 다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감사한데스! 감사한데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는데스!”
남자는 대답 없이 손을 흔들며, 미도리의 집이었던 박스를 수거하고 멀어져 갔다. 몇 분 만에 뼛속까지 학대파의 충견이 된 미도리는, 남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짝 엎드려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인간이 하라면 한다. 인간이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다. 자를 솎아내라면 자를 솎아내고, 독라를 잡아오라면 독라를 잡아온다. 절대적인 인간의 말에 복종하도록 설계된 사육실장의 본능이 다시 작동을 시작하고, 미도리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한 산실장이 구제중인 공원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는 없다. 독라는 나를 필요로 하고, 살아 있다면 분명히 이곳을 다시 찾아올 것이니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 뿐이다. 미도리는 꼭 움켜쥐고 있던 리본을 운치 구덩이에 집어던지며 씩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된 거야.”
“그렇게 된 것인데스!”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미도리와 학대파는 벌써부터 죽이 척척 맞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와타시를 어떻게 할 생각인데스까.”
“건방진데스! 주인님의 말에 토를 다는 죗값은 죽음인데스!”
힘없이 묻는 독라의 말에 미도리가 얼른 앙칼지게 외쳤다.
“하하, 그래. 너를 어쩌면 좋을까? 응? 이 독라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나의 사육실장아? 저 녀석도 사육실장으로 삼아 줄까?”
“영리한 와타시와 자들이 있는데 못생긴 독라마저 사육실장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스.”
“그래, 그래. 넌 참 영특한 녀석이야. 집에 데려가서 잔뜩 귀여워 해 줘야겠구나.”
기대감에 콧구멍을 벌름대는 미도리를 쓰다듬으며 학대파는 놀리듯 말했다.
“그러면 너를 어쩌면 좋을까, 독라야? 네가 한번 대답해 보지 그래?”
“...모르는데스.”
“그건 너무 싱거운 대답 아니니?”
“답은 이미 닌겐의 마음속에서 결정된데스. 강한 닌겐은 약한 실장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스. 와타시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는데스.”
“으하하하!”
학대파는 목구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지금 내 비위를 맞추려는 거라면, 아주 천재적이었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면, 그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래, 맞아. 네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지. 바로 나한테 알뜰하게 학대당하다가 고통스럽게 죽는거다. 나는 학대파거든. 너도 같이 집으로 데려가 실컷 귀여워 해 줄게.”
학대파의 말은 독라보다는 오히려 미도리에게 청천벽력이었다.
“데에? 주인님, 학대파라니 농담도 잘 하시는데스~”
“응? 농담이라니? 난 진지해. 학대를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넘는다고.”
“그, 그런데스까. 하지만 와타시는 여전히 주인님의 사랑스러운 사육실장인데스, 아닌데스까?”
“그럼! 내 사육실장 중 내 사랑을 받지 못한 실장석은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까 그 사랑이라는게... 와타시가 생각하는 그 사랑이 맞는데스까?”
울상이 된 미도리의 면전에 대고 학대파는 낄낄대며 말했다.
“학대파가 베푸는 사랑이란 게 뭐겠니? 이 가엾고 멍청한 녀석아. 너와 네 자식은 저 독라와 똑같은 사랑을 내게 받게 될 거야.”
“데... 데... 데에...”
“기대해도 좋아. 너희는 이제껏 질러보지 못한 예쁜 비명을 지르게 될 거니까.”
“데갸아아앗!”
미도리는 펄쩍 뛰어, 자들이 있는 운치굴과 학대파 사이에 네 팔로 선 뒤 위협하기 시작했다.
“데샤앗! 와타시와 자들에게는 손 끝 하나 댈 수 없는데스!”
“하하, 이 녀석 보게! 고급 사육실장이라는 녀석이 지금 뭘 하는 거야? 너 실장숍에서 이렇게 배웠니?”
“오마에같은 닌겐이 똥닌겐이라는 것 정도는 배웠던데샤!”
학대파는 입가의 웃음을 거두고는 쪼그렸던 무릎을 펴 일어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그 거대한 형체를 마주한 미도리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미도리는 꺾이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그래, 마음껏 위협해라. 어차피 내 목적은 저 독라뿐이였으니까.”
“그러면 독, 독라만 가져가고 와타시와 자들은 내버려 두는데스!”
“넌 네가 특별한 사육실장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세상에 너 정도의 훈육을 받은 실장석은 이젠 기껏해야 학대용으로나 팔린다는 건 모르나 보군.”
“와타시의 말이 들리지 않는데스? 당장 꺼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는데샤!”
“너 같은 걸 공들여 학대할 시간 따위 없다. 그러니 마지막 자비로 너에게는 빠른 죽음을, 네 새끼들에게는 알량한 목숨을 공원에서 조금 더 부지할 기회를 선사하지.”
미도리가 대꾸하기도 전에, 학대파의 신발이 미도리의 머리에 덮쳐 내렸다. 발에 가해지는 압력이 강해짐에 비례해, 엎어진 채 땅과 밑창 사이에 끼인 미도리의 머리는 점점 납작해지고, 팔다리의 버둥거림 역시 점점 심해지고, 팬티는 점점 녹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몇 초간의 짧은 고통이 지나고,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미도리의 머리가 깨져나갔다. 힘없는 몸뚱이가 잠시 경련하다 멈추고, 원사육실장 미도리는 숨이 끊어졌다.
신발 바닥에 묻은 얼룩을 바닥에 쓱쓱 문지른 학대파는 준비해 온 케이지의 문을 열고 바닥에 놓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학대파가 독라에게 말했다. “들어가라.”
독라는 학대파를 노려보며 천천히 일어나, 케이지 안으로 걸어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케이지에 자물쇠를 건 학대파는 영차, 하며 번쩍 일어나 공원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란 통에 어느새 깨어난 자실장들이 미도리를 찾는 소리가 운치굴 안에서 가녀리게 흘러 나왔지만, 학대파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공원을 빠져 나왔다.
어느 새 태양이 지평선을 넘어 기어오르고, 세상은 서서히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철망 사이로 점차 멀어지는 두루마리 공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독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래 전,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너 같이 특이한 실장석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어.”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학대파는 형틀에 독라의 팔다리를 묶으며 혼자 지껄였다. 녹슬고 적록으로 얼룩진 지저분한 형틀은 독라가 맞이할 운명을 말해 주고 있었다.
“꼭 너처럼 큰 덩치에 독라였고, 반항적인 눈빛에 양 팔 끝에는 손가락이 달려 있었지. 그런데 그러고 보니 네 양손에는 손가락이 없네. 어제 아침에만 해도 한 쪽에는 있던데, 어떻게 된 거니?”
독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대답하기 싫겠지.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난리 통에 잘렸다가 재생하느라 없어진 것 같은데. 맞아, 아니야?”
독라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딱-
대답하지 않는 독라의 미간에 딱밤이 날아들었다.
“요 녀석, 쓸데없이 입만 무겁구나. 뭐, 좋아. 그 정도는 실험으로 알아낼 수 있으니까. 어디 보자, 실험체: ‘이상한 독라’. 그리고 가설: ‘신체적 특이점은 후천적임.”
종이쪽에 몇 마디를 끼적이고 펜을 탁 내려놓고는, 학대파는 기대된다는 듯 두 손을 비비며 입술을 핥았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맞아, 시골에서 너 같은 실장석을 만났다고 했지. 지금 생각하면 참 아까워. 그 때는 린갈이 없어서, 그 녀석이 학대받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 녀석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실장석 중 최고의 재료였다고.”
학대파는 독라의 두툼한 어깨를 쿡쿡 찔러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두부같은 참피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 쫄깃함. 때릴수록 착착 감겨드는 손맛에, 아무리 괴롭혀도 나가떨어지지 않는 체력! 그 때는 내가 많이 미숙해 그만 이것저것 해 보지도 못하고 죽여 버렸지. 참 안타까운 일이야. 그 이후로 너 같은 실장석을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었으니까.”
독라의 매끈한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학대파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생각지도 않았는데 네가 내 눈 앞에 딱 나타난 게 아니겠어? 그 때 내가 느낀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니? 정말 고맙다, 내 앞에 그렇게 나타나 주어서. 이제 나는 예전의 그 어리숙한 꼬마애가 아니니, 약속할게. 이 기회를 절대로 허투루 낭비하지 않겠다고.”
‘미친놈인데스.’
독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지금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다 알아 이놈아.”
학대파는 킬킬대며 커터칼 칼날을 드르륵 꺼내더니 무방비하게 노출된 독라의 가슴팍을 깊게 갈랐다.
“데에엑!”
독라는 꽉 깨문 이빨 너머로 간신히 신음을 흘렸다. 갈비뼈가 또각또각 부러져 꺼내지고, 허파와 심장을 헤집는 핀셋의 냉기에 온 몸이 시려온다. 질척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오더니 학대파는 무언가를 접시에 땡그랑 떨구어 독라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처음 보지? 인사해, 너의 위석이야.”
고통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독라도 눈앞의 녹색 육각형 돌이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위석, 실장석의 생명, 실장석의 본질.
학대파는 작은 유리병에 투명한 녹색의 용액을 넣고 그 안에 위석을 퐁당 담갔다. 그러자 부글대는 소리와 함께 녹색의 용액은 순식간에 노란색으로 바뀌고, 흐릿하던 위석은 즉각 반짝임을 되찾았다. 고통이 금세 사라지는 것을 느낀 독라는 찢겨졌던 가슴팍을 경악의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잘린 갈비뼈가 마치 가교가 생기듯이 빠득빠득 소리를 내며 자라나 연결되고, 그 위를 근육과 피부가 꾸물대며 증식해 덮어 메웠다. 실험실 표본처럼 산 채로 해부되었던 독라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손상되기 직전의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익숙해지라고. 네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광경이니까.”
샛노랗게 변한 활성액을 따라 버리고, 새 용액을 채워 넣으며 학대파가 말했다.
온몸을 드라이아이스로 얼린 다음 깨뜨리기,
눈꺼풀을 도려내고 안구에 드라이기 열풍 쏘이기,
혈관에 락스 주사하기,
전신을 사포로 벗겨내고 염촛물 뿌리기.
남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학대하다가 죽기 일보 직전에 교묘하게 멈추고 활성제로 되살리는 학대파의 솜씨는 과연 전문적이었다. 다진 고깃덩이처럼 되어 경련하는 독라의 몸뚱이는 활성제의 힘으로 몇 분 만에 거짓말처럼 깨끗이 재생되었고, 식음도 전폐하다시피 하며 학대에 매진하는 남자는 날이면 날마다 다양한 고문을 독라에게 가했다.
하지만 꿈결 같던 나날도 잠시뿐,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지루해.”
의자에 깊숙이 앉으며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틀에 박힌 독라의 반응은 금세 지루해졌다. 평범한 실장석에게는 효과 만점이었던 학대법들이 독라에게는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꼼꼼히 세웠던 학대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독라가 남자의 집에 온 지 사흘째 저녁, 남자는 여느 때처럼 모진 학대를 끝내고는 백열램프가 켜진 텅 빈 수조에 독라를 처넣었다. 독라는 꼼짝도 못한 채 혀를 쭉 빼물고 구석에 늘어져 숨을 헐떡였다.
사흘째 독라에게는 물 한 방울, 쌀알 한 톨도 허용되지 않았다. 활성제의 효과로 어느 새 말끔히 재생된 몸은 겉보기로는 멀쩡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피땀과 눈물을 철철 흘리고, 무더운 수조 언에서 바싹바싹 익어 가는 독라의 배고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입으로 먹은 것이 없으니 변조차도 나오지 않고, 쪼르륵 소리를 쉴 새 없이 울리는 배에서는 마른 방귀만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슬슬 때가 되었군.’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한 남자는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고, 전기불판과 식기를 챙겨 독라가 갇힌 방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불판을 달구고, 고기를 올리자 금세 지글거리는 소리와 고소한 향기가 방 안에 진동했다.
“어때? 배고파? 먹고 싶어?”
소금을 살짝 찍은 고기를 집어 독라의 눈앞에서 대롱대롱 흔들며 남자가 말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사이다는 거품을 뽀글뽀글 올려 보내며 유리컵에 하얗게 김을 서리고 있었다. 남자는 보란 듯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입가를 훔쳤다.
“크, 시원하다! 너 사이다라고 들어봤어? 먹어본 적은 있니? 나한테 재롱 좀 떨어 보면 한 모금 쯤 못 줄 것도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독라는 남자가 쫑알대건 말건, 이글대는 백열전구 아래에 눌어붙은 듯 누워 그저 남자를 멍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기분이 상한 남자는 수조 안에 고깃점을 던졌다.
“짜식, 쥐뿔도 없는 놈이 비싸게 굴기는. 그래, 옜다, 하나 먹어라. 고기 맛을 보면 태도가 좀 변하겠지. 먹어. 먹으라고.”
잘 익은 고기조각이 수조 안으로 철썩 떨어지며, 기름과 육즙과 정신이 아찔한 향기를 사방에 퍼트렸다. 남자는 고기를 툭툭 밀어 독라의 앞으로 놓으며 재촉했지만 독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새끼가...”
남자는 인상을 쓰며, 독라의 벌어진 입에 억지로 고기를 쑤셔 넣었다.
“주면 처먹어, 이 새끼야, 처먹으라고.”
독라는 목구멍에 밀려들어오는 고기를 허덕거리며 간신히 삼켰다. 남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독라를 구석에 도로 던졌다.
“어때, 맛있지? 더 먹고 싶지? 그럼 뭐라도 해 봐. 춤, 노래, 뭐라고 노력을 해 보면 내가 줄 지도 모르지.”
독라는 입맛을 다시더니,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쭉 빼고 힘을 주었다. 투실한 엉덩이에서 수조 바닥으로 걸쭉한 변이 조금 쏟아졌다. 남자는 당황했다. 바닥에 퍼질러 앉은 독라는 보란 듯이 운치를 데챱데챱 핥아먹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어 하던 남자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야!”
남자의 고함에 독라는 화들짝 놀라 위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핏발이 선 남자가 독라를 험악하게 움켜잡았다.
“이 씹새끼가 지금 나한테 반항하냐? 재미없는 새끼네 이거. 너 씨발 오늘 한번 좆돼보자, 응?”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남자는 독라를 움켜잡고는 붉은 염료를 얼굴에 퍼부었다.
“데데에엑!”
곧바로 독라의 배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고, 가랑이 사이로 엄지실장과 구더기들이 점막에 싸인 채 꿀덩꿀덩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텟테레- 레뺫!”
“텟테레- 레챳!”
“텟테레- 지벳!”
남자의 손에 높다랗게 들린 독라의 배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그대로 까마득한 거리를 가로질러 수조 바닥과 장렬하게 격돌하고 조그만 얼룩이 되었다. 남자는 독라의 배를 꾹꾹 쥐어짜냈다. 분대에서 계속 생겨나는 새끼들은 절반은 뱃속에서 으깨져 줄줄 쏟아지고, 나머지는 독라의 가랑이에서 쏘아지듯 빠져나가 바닥에 눌어붙었다.
“레뺘앗!” 철썩. “레히이!” 철썩. “츄아악!” 철썩.
위석을 담은 활성액이 점점 노랗게 물들었다. 남자는 그대로 독라를 쥔 손을 펼쳤다. 키의 몇 배나 되는 아찔한 높이에서 떨어진 독라는 그대로 다리부터 바닥에 격돌했다. 두 다리는 이상한 각도로 꺾여 몸으로 말려 들어가고, 반쯤 터진 내장은 마치 물 밖으로 나온 심해어의 부레처럼 세모꼴 입으로 불룩 밀려나왔다.
“텟테레~” “텟테레~” “텟테레~”
으깨진 하반신과 독라의 입, 양쪽으로 새끼들이 끊임없이 태어났다. 목구멍이 징그럽게 꿀꺽 부풀어 오르더니, 녹색 민달팽이처럼 점막에 싸인 새끼들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온 내장 틈새로 마구 흘러나온다.
“레치레치레츄~ (마마 안녕레치~)”
“레치레츄웅! (끈적끈적 할짝할짝해주는레치!)”
“프니프니레후우! (프니프니 해 주는레후!)”
수조가 바글바글해지고 나서야 독라의 출산은 겨우 멎었다. 남자는 독라의 위석을 새 활성액에 담갔다. 독라의 부러진 다리가 으지직 거리며 펴지고, 터져 나온 내장이 삐직삐직 싫은 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도로 밀려들어간다. 남자는 젓가락으로 새끼를 하나 집어 들었다. 신이 나 재잘대던 새끼들은 점막이 점차 말라가자 불안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마마레치 치에엥! (닌겐에게 잡힌레치! 살려줘 마마!)”
“레츄아 레치레챠앗! (할짝할짝 안 해주면 구더기가 되어버리는레챠!)”
“프니프니 레뺘앗? (프니프니 왜 안 해주는레후웃?)”
“네 새끼들이 구더기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나한테 애원한다면 점막을 씻어주는 건 물론,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밖에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지.”
독라는 대답 대신 벽을 바라보며 돌아누웠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달아오른 불판 위에 새끼를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츄아아아!” “레뵤오오옥!” “휴우우웃!”
조그맣고 연약한 몸뚱이는 불판의 열기에 순식간에 오그라들었다. 새끼들은 새우처럼 허리를 접으며 공중으로 몇 센티미터 탁탁 튀다가, 몇 초 만에 계란 흰자처럼 반투명하게 익어든 점막 속에서 눈을 허옇게 뜨고 혀를 빼문 채 죽어버렸다. 남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새끼들을 집어 수조 안에 쏟으며 말했다.
“먹어. 죽기 싫으면.”
독라는 먹었다.
온갖 추함과 지저분함을 한 데 뭉쳐 놓은 듯한 존재가 바로 실장석이었지만, 그런 실장석에게도 한 가지 칭찬할 구석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경이로운 모성 본능일 것이다. 20여 년의 학대 경력 동안 남자는 단 하나의 예외도 보지 못했다. 제 아무리 날뛰고 바락바락 대들던 실장석도 새끼의 비명을 들으면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능이란 것이 있을까 의심스러운 구더기조차도, 일단 눈을 붉게 물들여 주면 “우지챠는 꼭 사는레후! 우지챠들을 잔뜩 낳아서 행복하게 해 주는레후!”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다.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쫄깃하게 구워진 새끼를 우물거리며 주워 먹는 독라를 보고 남자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지독한 녀석...”
굶주림도, 새끼 학대도, 이런 저런 방법도 통하지 않으니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신체적 학대뿐이었다. 매일 뼈가 부서지고 살가죽이 찢어졌다. 독라는 비명을 질렀다. 고통은 과연 정직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독라는 남자에게 한 마디 말을 하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똑같은 신음과 비명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미치광이가 되어 목석을 붙들고 난리를 치는 것과 다른 구석이 없다. 어느 새 남자는 재미를 위해 학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학대를 위해 학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라의 그 비명마저도, 머지않아 남자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독라의 비명이 갑자기 멎은 것은 학대를 시작한 지 꼭 열흘 째 되는 날이었다. 한적한 오후, 남자는 선풍기에 끈을 매달아 형틀에 묶인 독라를 자동으로 채찍질하며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신나게 몰입해 한 권을 다 읽고 덮은 다음에야, 남자는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한 방 안에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채찍이 살갗에 타다닥 부딪히는 소리 뿐이었다.
“기절했나?”
평소에는 훨씬 더한 고통에도 멀쩡하던 녀석이 이 정도만으로 뻗어 버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죽었나 싶어 위석을 확인해 보았지만 위석은 완벽한 녹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꾀병 부리지 말고 일어나라, 이 녀석아.”
남자는 찬물을 받아 피투성이가 된 독라의 몸에 부었지만, 독라는 움찔하는 기색도 없었다.
“어라? 요놈 봐라.”
남자는 짚이는 바가 있었는지 독라의 눈꺼풀을 까뒤집어 보았다. 기절했다면 뒤로 넘어가 있어야 할 눈동자가, 마치 무언가를 좇는 듯 이리저리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옳아, 행복회로에 빠졌구나.”
남자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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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이 몸에 감겨들 때마다 살점이 뭉텅이씩 떨어져 나간다. 형틀에 매달린 채 수 시간 째 얻어맞던 독라는 마침내 한계에 달했음을 느꼈다. 남자는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독라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견딜 수 있어도 그 끔찍한 고통만큼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았다. 단지 고통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낮밤 없이 망가진 뒤 재생하고, 부서진 뒤 고쳐지는 일상의 연속에서, 독라의 정신 또한 조금씩 깎여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일 초에도 몇 번씩 등짝에 둔탁하게 감겨드는 채찍의 손길에, 비명을 지를 힘도 남아있지 않은 독라는 그저 바람 빠지는 소리만을 토해 내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문득 눈꺼풀을 짓누른다. 남자가 책장을 넘기는 모습.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채찍이 등가죽에 부딪치는 감촉. 모든 감각이 갑자기 희미해지더니 별안간 멈추고, 전부 어두운 의식 저 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독라의 눈이 감겨들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 어느새 독라는 어두운 공간에 있었다.
한 점의 빛도 없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도 없고, 바닥도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끝없는 공간 가운데 혼자밖에 없었지만 독라는 편안함과, 동시에 익숙함을 느꼈다. 독라는 분명 이전에 똑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마을을 나온 직후, 아랫마을로 향하던 길목에서였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위석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신이 차단된 이런 상태를, 인간의 말로는 ‘행복회로’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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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회로에 깊이 빠져든 실장석을 깨우는 건 나름의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외부의 고통으로부터 실장석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만큼, 단순히 더한 고통을 가하는 것만으로는 회로를 깨트리기는커녕 더욱 견고히 할 뿐이기 때문이다. 행복회로를 교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밝혀져 있지만, 남자는 가장 어렵다고 알려진 방법을 선호했다.
남자의 방법은 단순했다. 실장석이 꿈꾸고 있는 행복을 정확히 간파한 뒤, 그것을 실현시켜 준다. 그리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그것을 박탈하면, 행복회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많은 초보 학대파가 그 방법을 터득하지 못해 학대의 길을 접지만, 이 남자에게는 닳고 닳도록 해 온 손쉬운 일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을 꿈꾸고 있는 실장석이 있다면, 남자는 실장석을 불판에 올려 굽는다. 군침 도는 냄새에 입맛을 다시며 깨어난 실장석은 고기에 손을 뻗지만, 구워진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실장석은 구워지고 있던 건 자신의 몸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귀여운 아이를 낳는 행복을 꿈꾸고 있는 실장석이 있다면, 남자는 정말로 실장석의 눈을 붉게 점안한 다음 희석한 도로리를 관장으로 주입한다. 출산의 기미를 느끼며 깨어난 실장석은 새끼를 낳고 점막을 핥아준다. 하지만 새끼는 핥으면 핥을수록 작아지고, 열심히 핥아주던 새끼가 이미 질퍽하게 녹아 없어졌음을 깨닫는다.
간단하게 들리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녹록치 않다. 실장석이 원하는 것을 그 순간 정확히 알아내 현실에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장석이 원하는 행복은 이루 셀 수 없이 다양한데다가, 그 무한한 욕심에 걸맞게 매 순간마다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원한다.
바로 그래서, 숙련된 학대파인 남자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행복회로에 빠진 실장석의 잠꼬대, 몸짓,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실장석이 보고 있는 환상을 정확히 간파하는 것은 오랜 경력의 학대파인 남자가 자랑하는 능력이었다. 최후의 보루인 행복회로마저 무너졌을 때, 실장석이 느끼는 끝없는 절망과 그 까만 눈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다.
“소원을 말해봐~ 네 마음 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봐~”
콧노래를 부르며, 남자는 독라의 결박을 풀고 린갈의 감도를 올렸다.
“네 행복이 부서졌을 때, 과연 어떤 멋진 표정을 짓는지 보여 달라고.”
기대에 부푼 남자는 청진기를 귀에 꽂듯 이어폰을 꽂고는, 독라를 진찰하듯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의 얼굴에서는 기대감 대신 당혹감이 자리잡았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독라는 마치 죽은 것 마냥 아무런 반응도 신호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꿈도 꾸지 않고, 아무 행복도 바라고 있지 않은 듯한 독라의 모습.
남자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까지 있던 일들의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상정을 파악한 남자는 이어폰을 벗어던졌다.
“너, 행복이 뭔지를 모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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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공간, 독라의 마음속은 이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이 완전히 칠흑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독라는 주위를 둘러싼 어둠에 희미한 명암이 어려 있음을 눈치 챘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광원을 찾아 터덜터덜 걸어간 독라는 이윽고 어둠 속에서 점점이 타오르는 불꽃들을 발견했다. 불꽃은 마치 심장처럼 박동하며, 독라의 어두운 마음속에 가녀린 빛의 맥박을 퍼트리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불꽃으로 다가가자, 불꽃은 별안간 환해지더니 따스한 빛과 함께 어떤 형상을 보여 주었다. 귀여운 자식들에 둘러싸인 독라가 아이들을 재우며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독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불꽃을 지나쳐 갔다. 버림받은 불꽃은 순식간에 잦아들더니 꺼져 버렸다.
또 다른 불꽃에게로 다가가자, 불꽃은 또 다른 형상을 보여 주었다. 곱슬곱슬하게 머리카락을 꾸민 자신이 분홍색 비단옷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독라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구경하다 역시 고개를 저으며 불꽃을 지나쳐 갔다.
여러 불꽃에 다가갈 때마다, 불꽃들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광경들을 독라에게 보여 주었다. 산더미 같은 음식을 배불리 먹는 독라의 모습, 따뜻한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하는 모습, 다른 실장석을 노예로 부리며 떵떵거리는 모습, 좋은 인간 주인을 만나 귀여움을 받으며 사는 모습...
하지만 독라는 유혹하듯 타오르는 불꽃을 하나씩 애써 외면하며 지나쳐 갔고, 그럴 때마다 불꽃은 하나 둘 사그라졌다. 마침내 모든 불꽃이 꺼지고, 다시 칠흑처럼 어두워진 공간 안에는 독라 혼자만이 남았다. 독라는 조용히 무릎을 가슴팍에 붙이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문득 정신을 차린 독라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간은 어느 새 캄캄한 밤이었다. 독라는 여전히 수조 안에 있었지만, 학대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독라는 차가운 수조의 바닥에 누워 잠들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 남자는 독라를 집요하게 학대했다. 하지만 남자가 연장을 들고 방에 들어오면, 독라는 그저 눈을 감고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독라의 정신은 어느 새 깊은 어둠 안으로 빠져 들었고, 비명도 신음도 흘리지 않는 독라를 아무리 학대해도 남자는 더 이상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학대파가 독라를 데려온 지 보름이 되던 날, 잠든 듯 미동도 않던 독라를 히스테릭하게 찌르고 자르던 남자는 결국 포기했다.
“됐어, 관둘래.” 남자나 드라이버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네가 이겼다.”
슬며시 눈을 뜬 독라가 본 것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남자는 독라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축하한다. 넌 자유야.”
독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음날 새벽, 남자의 우악스런 손길에 독라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채 정신도 차리기 전에, 남자는 독라를 케이지에 처박았다. 사방이 막혀 캄캄한 케이지 안에서 독라는 불안스럽게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케이지는 잠시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디론가 옮겨졌다. 어딘가에 실리고,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르릉 하는 기계음이 귓전을 때렸다.
소음과 진동은 중간 중간 멈추면서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진동과 소음, 밀폐된 트렁크에 쌓이는 열기와 희박한 산소에 독라는 점점 몽롱해졌다. 녹색 위액을 몇 번씩이나 게워내며 토사물 범벅이 된 채 가사 상태에 빠질 지경이 된 찰나, 진동이 멈추더니 덜컹 소리와 함께 시원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남자는 케이지를 손에 들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벽에 대고 귀를 기울이자 자박자박 들려오는 흙 밟는 소리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이윽고 케이지가 벌컥 열리고,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찡그린 독라는 학대파의 손길에 잡혀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른 새벽에서 쨍쨍한 아침이 될 때까지 달려 도착한 곳은 멀리 떨어진 어느 숲 속이었다. 케이지에서 독라를 꺼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남자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독라를 뒤로 하고 저만치 사라졌다. 독라는 힘겹게 보름 만에 보는 바깥세상을 둘러보았다. 날은 어느새 5월에 접어들어, 사방은 완전히 녹음에 뒤덮이고 기온도 훨씬 훈훈해져 있었다.
수풀을 헤치며 멀어지던 학대파의 모습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완전히 풀어준 것인지, 아니면 남자의 또 다른 계략인지 독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은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린 독라는, 몇 걸음을 간신히 내딛고는 휘청하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푸성귀가 빼곡히 돋아난 부드러운 흙에 얼굴을 묻자, 그리웠던 새벽 이슬과 땅의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마을을 떠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독라의 기억 속에서는 벌써 영겁의 시간이 지난 듯하다. 어느 새 독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맺혀 얼굴을 타고 내려와 흙을 적시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산에서의 삶이 차라리 행복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독라는 문득 생각했다. 행복을 찾아 마을을 나섰지만, 여러 시련을 겪고 여러 실장석을 만나며 독라의 마음에 쌓인 것은 오히려 의문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독라는 살아남았고, 그 외의 다른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독라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다.
“이상하게 생긴 친구인데스.” “살아 있는 게 맞는데스까?” “잘 모르겠는데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가운데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독라는 잠에서 살짝 깨어났다.
“방금 움찔 하는걸 본 데스? 살아있는데스!” “어떻게 하는데스? 좋은 친구인지 나쁜 친구인지 어떻게 아는데스?” “일단 깨워 보는데스.”
말소리가 소란스럽게 이어지고, 난데없이 가슴팍을 무엇인가가 쿡쿡 찔러왔다. 겹쳐오는 학대의 기억에 독라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네 발로 경계 자세를 취했다. 한낮의 햇살에 비쳐 보이는 것은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뜬 세 마리의 실장석이었다.
산실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옷도 살결도 고생의 흔적 없이 맨질맨질했다. 그렇다고 들실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깔끔했고,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선량해 보였다.
‘바깥의 실장석들은 독라를 노예로 부리는데스.’ 장로의 말을 떠올리며 독라는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몇 초간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두 가지 소리였다. 먼저, 나뭇가지를 들고 있던 대장격의 덩치 큰 실장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마에는 누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의 나뭇가지에서 푸드득 하는 날갯짓 소리가 덮쳐 내렸다. 독라는 반사적으로 우거진 덤불을 향해 몸을 던졌지만, 불행히도 세 마리 실장석은 그만큼 날렵하지 못했다.
“데에엣!” “데갸갸!” “프갸갸갹!”
세 마리 실장석은 공포에 빠져 팔을 번쩍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저마다 다리가 꼬여 우당탕 넘어졌다. 나동그라져 있는 실장석 중 제일 작은 한 녀석의 위로 까마귀의 그림자가 덮쳐 내렸다.
“데샤아아앗!”
“데에엑! 4녀 이모토챠가 잡혀가는데스!”
“데, 데스웅~ 데스~웅~ 까악님은 오네챠를 놓아 주는데스웅~”
까마귀는 실장석을 움켜쥐고 날아가려 했지만, 붙잡힌 실장석이 필사적으로 버둥대는 바람에 제대로 잡지 못 하고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자매를 구할 몇 초간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두 마리는 발만 동동 구르고 아첨할 뿐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까마귀가 실장석의 팔다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날아가려는 찰나, 보다 못한 독라가 까마귀에게 달려들었다. 실장석이 떨어뜨린 나뭇가지를 주워든 독라는 푸드덕대며 이륙하려는 까마귀를 향해 가지를 힘껏 휘둘렀다.
“데갸-앗!”
“까악-!”
나뭇가지는 까마귀의 날갯죽지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분명히 치명타였어야 했지만, 독라의 뭉툭해진 손끝으로 나뭇가지를 제대로 쥘 수가 없었다. 가격과 동시에 나뭇가지는 손에서 미끄러져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균형을 잃은 까마귀는 바닥에 떨어져 실장석을 놓쳤지만, 이윽고 성난 울음을 토하며 독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면도날 같은 발톱, 송곳 같은 부리가 사정없이 덮쳐든다. 독라는 팔다리를 휘두르며 무력하게 저항했지만, 까마귀가 마구 베고 쪼아 먹을 때마다 독라의 몸뚱이는 짜개지고 쪼개지며 점점 작아져 갔다.
배도 채우고 화풀이도 끝낸 까마귀가 멀어져 가자, 웅크려 덜덜 떨던 세 마리는 난자당한 독라의 잔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사지는 뿌리째 뜯어 먹히고, 머리통은 절반이 없어졌다. 팔뚝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온 몸에 숭숭 뚫려 선지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도저히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죽은데스?”
“그런 것 같은데스.”
“처음 만났지만 용감한 친구였던데스... 와타시를 구하고 그만... 오로롱...”
“이제 어떻게 하는데스?”
“4녀챠를 구해준 고마운 친구인데스. 마을로 데리고 가서 묻어 주어야 하는데스.”
“하지만 이 친구는 너무 커서 우리가 옮길 수 없을 것 같은데스. 마을로 돌아가 4녀챠의 상처도 치료하고, 다른 친구들을 불러오는데스.”
“오로롱... 오로롱...”
세 마리는 저마다 눈물과 탄식을 흘리고는 다친 실장석을 부축하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데, 세 마리의 등 뒤에서 뿌드득 뿌득 하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독라의 시체를 본 세 마리의 비명이 풀숲에 작게 메아리쳤다.
정신을 차린 독라가 마주한 것은, 멀찍이 떨어져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경악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세 쌍의 적록색 눈빛이었다. 어리둥절한 채 두리번거리는 독라에게 세 마리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된 일인 데스까?” “정체가 무엇인데스까?”
“무슨 말을 하는 것인데스?”
반문하는 독라에게 세 마리가 숨 가쁘게 말했다.
“오마에는 분명 죽었었던데스!” “그런데 갑자기 뿌득뿌득하면서 되살아난데스!” “팔다리가 쑥쑥 돋아나고, 머리통이 자라나고, 상처도 순식간에 없어진데스!”
사정을 눈치 챈 독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몸은 자유로울지 몰라도, 위석에 담긴 독라의 목숨만은 여전히 학대파에게 저당 잡혀 있었다.
“와타시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게 아닌데스.“
독라의 혼잣말에 세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인데스까?” “살았는데 어떻게 산 게 아닌데스?” “잘 모르겠지만 멋있는 말 같은데스.”
“자세히 알 필요 없는데스. 그건 그렇고,” 독라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와타시는 독라인데, 왜 와타시를 노예로 만들려 하지 않는데스?”
“노예가 뭐인데스?” 세 마리는 오히려 눈을 꿈뻑이며 되물었다.
“구덩이에 가두고 똥만 먹이면서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고, 새끼를 낳게 해서 잡아먹는 것 말인데스.”
“데, 데데? 데에에?” 세 마리 실장석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하는데스?” “대체 그런 무서운 말은 어디서 들은데스까? 농담이래도 심한데스.”
놀라기는 독라도 마찬가지였다.
“와타시처럼 머리카락도 옷도 없는 실장석도 친구란 말인데스까?”
“당연한 말을 하는데스!” “머리카락과 옷은 장식일 뿐인데스. 모두가 가족이고 친구인데스.” “우리 마을을 처음 세운 것도 오마에처럼 발가벗은 친구였다고 마마에게 들은데스.”
세 마리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머리도 옷도 없는 실장석이 마을을 세웠다면, 아무래도 그 마을 역시 길실장이 세운 마을일 것이라고 독라는 짐작했다. 다만 이 실장석들은 옷과 머리가 그대로고 손가락도 없는 것으로 보아, 예전의 삶을 버리고 평범한 실장석 마을로 돌아간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산실장에게서도, 들실장에게서도,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
가족, 친구. 단어 자체야 늘 들어왔던 평범한 말들이지만 독라는 새삼스레 그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이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말들이 새로운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혹시 이 실장석들은 행복을 알고 있는 것일까? 독라는 기대감을 품으며 말했다.
“오마에들의 마을에 와타시가 가 보아도 되겠는데스까?”
세 마리는 활짝 웃었다.
“물론인데스! 마을은 여기서 멀지 않은데스.” “오마에는 우리의 친구인데스!” “게다가 오마에는 와타시를 구해주었잖은데스까! 오마에라면 언제든지 환영인데스요.”
세 마리 실장석과 독라는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로 향했다. 셋은 매일처럼 먹이를 구하러 마을을 나서던 길이었다고 한다.
”오마에들은 자매인데스까?“
나뭇가지를 든 실장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와타시는 차녀인데스. 까악이에게 물려갈 뻔한 건 4녀고, 4녀를 부축해 주고 있는 건 5녀인데스. 5녀챠, 힘들지 않은데스까?”
“와타시는 괜찮은데스.” 4녀를 부축하던 실장석이 대답했다.
“차녀챠, 5녀차, 미안한데스...”
“괜찮은데스요. 까악이를 조심하지 않은 모두의 잘못인데스.” 4녀의 자책을 5녀가 위로했다.
“오마에들 셋이 차녀, 4녀, 5녀라면 다른 자매들은 어디있는데스까?”
독라의 물음에 4녀와 5녀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이모토챠들은..” “그게...”
“장녀 오네챠와 다른 이모토챠들은 나쁜 아이였던데스.”
차녀가 딱 잘라 말했다.
“나쁜 아이라서 산신령님이 가르쳐 주려고 데려가신데스. 우리 모두 착한 아이가 되면 나중에 다시 만나는데스.”
“그런데스. 산신령님이 데려가신데스.” 4녀와 5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신령이라는게 뭐인데스까?”
“산신령님을 모르는데스까?” 5녀가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산신령님은 우리를 돌봐 주시는 신님인데스. 나쁜 아이는 착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산신령님이 먼저 데려가는데스요. 슬픈 일을 당해 죽어도 산신령님 곁으로 가는데스.”
“그리고 착한 아이로 자라서 마마가 되면 우리도 산신령님의 곁으로 가게 되는데스.” 4녀가 거들었다.
독라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이었지만, 차녀의 환성에 더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마을에 도착한데스!”
시냇가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빼곡한 토굴 속에 살았던 독라의 마을과는 달리,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지은 움막 5개로 구성된 단출한 모습이다.
집 밖에서 걱정스럽게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나이 든 실장석 하나가, 독라 일행을 보더니 쏜살같이 달려오며 외쳤다.
“차녀! 4녀! 5녀! 오늘은 빨리 온 모양인데스~”
“마마!” 세 마리 실장석도 반갑게 달려 나가 아이처럼 얼싸안았다.
“4녀짱! 어떻게 된 일인데스? 만신창이가 된데스!”
“까악이가 4녀짱을 잡아가려 한데스!” “하마터면 죽을 뻔한데스!” “저 커다란 친구가 오네챠를 구해 준데스!”
“정말인데스까? 와타시의 자를 살려 주어서 고마운데스요!”
독라에게 눈길을 돌린 친실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했다.
“강변집 오네챠들이 돌아온테스!” “뎃? 처음 보는 친구도 함께인데스.” “무지하게 큰 아줌마인테츄!”
움막에서 실장석들이 하나 둘 고개를 쏙쏙 내밀더니, 어느 새 주위에 왁자지껄하게 모여들었다. 독라와 함께 온 세 마리가 마을 실장석들을 소개했다.
“친구상들, 이 커다란 친구는 4녀차를 구해준 친구인데스. 커다란 친구상, 마을의 친구들을 소개하겠는데스. 먼저 우리는 강가의 집에 사는 강변집인데스.”
“그리고 저쪽은 나무 밑에 사는 나무집이고, 저쪽은 가장 위쪽에 있는 집에 사는 윗집인데스.”
“이 중실장 친구는 뾰족한 집에 사는 뾰족집인데스. 마지막으로, 뱃속에 아가쨩이 있는 이 친구는 바위 옆에 사는 바윗집인데스!”
실장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몇 번을 다시 듣고서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움막 한 채마다 친실장과 자식들이 살고, 다섯 움막과 거기 사는 가족은 각각 강변집, 나무집, 윗집, 뾰족집, 바윗집이라고 불린다는 뜻이렷다. 독라와 함께 마을로 온 세 실장석은 강변집의 자식들로, 성체가 되어 곧 독립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소개받은 실장석들은 저마다 독라에게 인사를 건네며,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재잘재잘 말을 걸었다. 열렬한 환대에 정신을 못 차리던 독라가 말을 꺼냈다.
“이 마을에 와타시가 살 자리도 있겠는데스까?”
실장석들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물론인데스!”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데스!” “새로운 이웃은 언제나 환영인데스!”
“그렇다면 새로 온 커다란 친구상은 뭐라고 부르면 되는데스까?” 강변집 마마가 말했다.
“와타시는 이름이 없는데스. 오마에들, 아니, 친구상들이 편한 대로 불러주면 좋은데스.” 독라가 대답했다.
실장석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얼마간 쑥덕였지만, 별다른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냥 독라 친구상이라고 부르는 건 어떤데스까?” 나무집이라고 불린 실장석이 제안했다.
“좋을 대로 하는데스.” 독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친구상은 지금부터 독라 친구상인테스!” 뾰족집 실장석이 폴짝폴짝 뛰며 외쳤다.
“그럼, 늦기 전에 모두들 독라 친구상의 집을 만들어주는데스.” “다들 모여서 돕는테스!”
마을 실장석들과 독라는 곧바로 집짓기에 착수했다. 땅바닥에 얕은 구덩이를 판 다음 나뭇가지를 꼿꼿이 빙 둘러 꽂고, 그 위에 원뿔 모양으로 뚜껑을 씌우듯이 나뭇가지를 얹는 단순한 방법이었다. 마을 한 구석에는 집수리를 위해 모두가 마련한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실장석들은 독라에게 흔쾌히 자재를 내어 주었다. 자실장들은 기특하게도 저마다 나뭇잎이며 진흙을 쪼르르 모아와 집터 옆에 쌓아놓았고, 성체들은 낑낑대며 나뭇가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역시 덩칫값을 하는 친구인데스.”
남들은 낑낑대며 하나씩 옮기는 나뭇가지를 번쩍번쩍 집어 드는 독라를 보고, 강변집 5녀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독라는 빙긋 웃으며 과시하듯 나뭇가지 두 개를 더 얹고는 집터로 향했다.. 촘촘한 나무 뼈대 사이사이에 진흙을 바르고 안팎에 나뭇잎을 붙이자 금세 번듯한 집 한 채가 완성되었다.
공사가 끝나자 시간은 어느 새 오후가 훌쩍 지나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실장석들은 저마다 움막에서 먹을 것을 꺼내 오더니 마을 중앙에 빙 둘러앉아 잔치를 열었다.
“많이 먹는데스, 독라 친구상.” “어차피 빨리 먹어야 하는 음식들이니 사양 말고 먹는데스.”
독라에게 나무열매, 곤충의 애벌레 따위를 자꾸자꾸 권하며 실장석들이 말했다. 볼이 미어지도록 입에 가득 집어넣은 음식을 우걱우걱 씹으며 독라는 마을의 실장석들을 눈여겨 관찰했다.
한 집에 네 마리나 되는 성체가 사는 집은 강변집 하나밖에 없었다. 나무집은 성체 하나와 자실장 한 마리, 윗집은 성체 하나와 엄지 하나와 구더기 둘, 뾰족집은 중실장 하나, 그리고 바윗집은 임신한 성체 하나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출산이 머지않은 바윗집은 무리 한 구석에서 배를 쓰다듬으며 태교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뎃데로게~ 뎃데로게~
삶은 행복한데스. 좋은 친구들이 가득인데스.
친구들과 함께라면 아무 것도 힘들지도 무섭지도 않은데스.
엄지라도 좋은데스, 구더기라도 좋은데스. 자들은 건강하게만 태어나는데스.
착한 자 나쁜 자 모두 좋은데스. 착한 자는 마마와 함께 살고 나쁜 자는 산신령님이 데려가 길러주스.
언젠가는 산신령님 곁에서 다시 만나 모두모두 행복하게 사는데스~“
“뾰족집의 마마는 봄에 그만 비탈에서 미끄러진데스.”
어느 새 독라의 곁에 다가와 앉은 강변집 4녀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별로 높지도 않은 비탈이었는데, 데굴데굴 구르다 그만 나뭇가지에 찔려 소중한 돌이 깨져 버린데스. 그래도 자실장이었던 뾰족집 3녀챠가 저렇게 훌쩍 커서 다행인데스. 뾰족집 마마도 산신령님 곁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것인데스.”
“대체 산신령님이 누구길래 다들 산신령 산신령 하는 것인데스? 친구상은 산신령님을 본 적이 있는데스까?” 독라가 불쑥 물었다.
“산신령님은 잠을 끌고 다니는데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나무집 마마였다. “산신령님이 오시는 밤에 잠들지 않는 실장석은 없는데스.”
“나무집 마마는 멋있는 말을 많이 하는데스.” 강변집 4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무집 마마의 말이 맞는데스. 산신령님은 우리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데스.”
“하지만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데에에!”
독라의 말은 째지는 외침에 끊어졌다. 비명의 근원은 바윗집이었다. 불룩 솟아오른 배가 요란하게 꿈틀거리고, 녹색이었던 두 눈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와타시의 자들이 태어나려는데스!”
저마다 먹던 음식을 팽개치고 급히 일어난 실장석들은, 바윗집을 부축해 강가에 마련한 출산소로 향했다 돌로 둥글게 쌓은 출산소에 이르자, 바윗집은 부축을 사양하고 혼자 걸어 들어갔다.
실장석들은 등을 돌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저마다 걱정스럽게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양 팔에 구더기를 안아든 윗집 엄지가 호기심이 동했는지 슬며시 다가갔지만, 어미가 타이르자 조그만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집 안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짧은 비명 소리와 텟테레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더니 멎었다. 실장석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출산소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출산을 마친 바윗집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핥아주고 있었다.
“테치?” “테츄~” “레츄웅~” “프니후~”
태어난 새끼는 자실장 여덟에 엄지 다섯, 구더기 여섯의 평균적인 숫자였다. 장녀부터 19녀까지 번호를 부여받은 새끼들은 처음 보는 세상이 신기한지 저마다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질렀다. 자실장들은 야트막한 물가에서 물놀이를 시작하고, 엄지들은 물 밖에서 어느 새 구더기들을 열심히 프니프니 해주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저 기쁜 구더기들은 첫 프니프니의 쾌감에 레후-하고 기쁘게 울며 물똥을 지렸다.
실장석들은 둥글게 모여서 갓 태어난 실장석들을 눈여겨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엄지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열심히 프니프니하고, 마음껏 프니프니 받는 구더기들은 앙증맞은 혀를 쏙 빼물고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만 한다. 반면 태어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자실장들은 서서히 저마다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이좋게 물놀이를 즐기던 자실장들은 벌써부터 편을 갈라 으르렁대더니 서로 토닥토닥 때리며 쥐어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만만한 자매에게 덤벼들어 똥을 묻히고는 머리를 물속에 처박는 녀석들도 보이고, 한 마리를 둘러싸고 린치하면서 머리를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녀석들도 보였다. 단 한 마리의 자실장만이 어미와 이웃들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머릿수가 모자란 엄지들을 도와 구더기의 배를 문질러주고 있었다.
이웃들과 슬픈 눈길을 주고받은 바윗집은, 분충 자실장들이 엄지와 구더기에게 마수를 뻗치려는 것을 제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이제 집으로 가서 맘마를 먹는데스.”
“맘마테치!” “와타시가 제일 많이 먹을 것인테치!” “아닌테치! 세레브한 와타치가 더 먹는 것이 당연한테츄!” “테프프픗, 마마는 와타시에게 벌서 메로메로테치. 오마에 같은 똥벌레들은 와타시의 똥이나 먹는테챠!”
자실장들은 서로를 을러대며 어미의 뒤를 따라 집으로 총총총 뛰어 들어갔다. 양 팔에 구더기를 가득 안은 착한 자실장은 엄지들과 발을 맞추며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새끼들의 행렬을 지켜보는 독라에게 윗집 친실장이 나직이 말했다.
“어느 자가 마을에서 살고, 어느 자가 산신령님께 가는지 친구상도 짐작이 갈 것인데스.”
“하지만 산신령님이 저 자들을 어떻게 데려가는데스까? 마을에 와서 직접 데려가는데스?”
윗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산신령님과 우리가 약속한 장소가 있는데스. 며칠 안에 저 자들을 떠나보낼 거니까 친구상도 그 때 같이 가는데스.”
왁자지껄하던 하루가 끝나고, 작은 마을에 밤이 찾아왔다. 독라는 캄캄한 집 안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마을의 실장석들은 독라의 고향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태만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오히려 독라가 본 그 어떤 실장석보다도 풍족한 모습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을 이 실장석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다. 어쩌면 가족과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 그 비결인 걸까? 이들의 곁에서 이들을 따라서 살면 독라도 행복이 뭔지 깨달을 수 있을까?
독라의 상념을 깬 것은 문 밖에서 들려오는 강변집 차녀의 목소리였다.
“독라 친구상, 자는데스까?”
“아직인데스.”
“내일 와타시와 함께 밥을 구하러 가는 게 어떤데스까? 오늘 못 구한 만큼 내일 더 구해야 하는데, 4녀는 다쳤고 5녀는 4녀를 돌봐야 해서 곤란한데스.”
독라는 선뜻 대답했다.
“좋은데스.”
“고마운데스요. 잘 자는데스.”
“잘 자는데스.”
멀어져 가는 차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독라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동이 트기가 무섭게 독라와 강변집 차녀는 마을을 나섰다. 양 손에는 보따리로 쓸 두건이 여러 개 들려 있다. 마을의 실장석들이 벗어 준 두건이었다. 조용한 숲 속에 두 실장석의 발걸음이 자박자박 울린다.
몸을 납작 숙이고 사방을 경계하는 독라에게, 그늘에서 용변을 보고 온 차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렇게까지 조심할 필요는 없는데스. 까악이가 땅에서 솟아나지는 않는데스요.”
“모르는 소리 마는데스. 까악이 말고 다른 무서운 동물이 덮치면 큰일나는데스.”
“까악이 말고 다른 동물도 있는데스까?” 차녀는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 부엉이를 말하는데스? 물론 부엉이도 무섭지만, 지금은 해님이 떴으니 걱정할 필요 없는데스.”
“그러다 길쭉한 놈이나 야옹이가 나오면 어떡하는데스까?”
“야옹이는 또 뭐인데스까? 그리고, 길쭉한 놈이라면 그 기어 다니면서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녀석 말인데스까? 그 조그만 녀석들이 뭐가 무섭다는 말인데스?”
나무 둥치에 돋아난 버섯의 냄새를 킁킁 맡더니 두건에 집어넣으며, 차녀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데스. 아무래도 여기는 와타시가 살던 곳과 많이 다른 모양인데스.” 차녀를 따라 버섯을 모으며 독라가 말했다.
숲에는 먹을 것이 풍족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먹이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무성한 덤불에는 제철을 맞은 산딸기가 소담히 열려 있고, 나무 밑에는 오디가 떨어져 바닥을 까맣게 물들였다. 시냇물에는 다슬기며 송사리가 오글오글 모여 있었다. 차녀는 두건으로 물고기를 사냥하는 법을 독라에게 알려주었다. 두건 안에 먹이를 조금 넣어 물속에 담근 다음, 물고기가 몰려들면 재빨리 건져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차녀의 말마따나, 생쥐나 도마뱀 정도 말고는 다른 동물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숲은 마치 실장석을 위해 마련된 낙원인 것처럼, 풍요로운 자원을 오로지 실장석들에게만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었다. 양 손에 주렁주렁 쥔 두건들이 어느 새 불룩해졌을 때쯤이 되어서야 독라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가 끝인데스.” 별안간 차녀가 멈춰서며 말했다. “음식도 충분히 모았으니 이제 마을로 돌아가는데스.”
차녀의 앞에는 이상하게 생긴 넝쿨이 자라나 있었다. 인간보다도 높은 붉은 줄기는 자벌레처럼 얇으면서도 엄청나게 거칠고 단단했다. 넝쿨은 서로 매우 일정하고 성긴 마름모꼴로 얽혀 있어, 건너편이 훤히 내다보였다. 주렁주렁 달린 이파리는 자세히 보니 이상한 넝쿨의 것이 아니라 그 위를 덮어 자라난 다른 식물의 잎사귀였다. 덩굴의 줄기를 손으로 잡고 흔들자 차캉차캉 하고 쇳소리가 메아리쳤다. 독라는 이 이상한 넝쿨을 본 적이 있었다. 아랫마을에서 인간들이 실장석을 옮기는 데 썼던 상자도 꼭 이렇게 되었었다. 그것이 식물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물건이라는 것을 독라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물론 인간의 말로, 그것을 ‘철조망’이라고 부른다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이 너머로는 갈 수도 없고,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는데스.” 오래된 철조망을 툭툭 건드리며 차녀가 말했다.
“다른 방향도 이렇게 막혀있는데스까?”
“마을에서 어느 방향으로도 계속 가다 보면 이런 벽이 있는데스.”
철조망은 낡았지만 여전히 튼튼했다. 독라는 강변집 차녀가 왜 야옹이도, 길쭉한 녀석도 몰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온 사방이 이렇게 꼼꼼히 막혀 있다면 어지간한 동물은 드나들 수 없을 것이다.
독라는 철조망 건너편을 내다보았다. 철조망 안은 과실수가 자라나 있었지만 바깥은 온통 소나무 밭이었다. 5월을 맞아 피어난 소나무 꽃이 마을 쪽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노란 꽃가루를 날렸다. 독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 말했다.
“그렇다면 슬슬 마을로-.”
독라는 말을 멈추고 차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동안은 차녀의 뒤만을 따라가느라 미처 보지 못했었다.
“왜 그러는데스까? 와타시 얼굴에 뭐라도 묻은데스?”
차녀가 녹색의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철조망 너머 소나무 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차녀의 앞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트렸다.
강변집 차녀가 마마가 되어 돌아오자 마을에는 경사가 났다. 이웃들 중 가장 기뻐한 것은 단연 강변집 친실장이였다.
“뎃데로게~ 차녀가 마마가 된 데스. 와타시는 할머니가 된 데스~“
하지만 춤추고 노래하는 친실장과 달리, 강변집 세 자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친실장은 춤사위를 멈추고, 웃으며 자식들을 타일렀다.
“모두들 슬퍼하지 마는데스. 셋이나 되는 가득가득한 아이들이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주어 와타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데스. 거기에 이제 차녀가 마마가 되었으니 마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실장석인데스~“
세 자매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어미에게 매달렸다.
“마마, 가지 마는데스!” “마마와 함께 쭉 쭉 살고싶은데스! 계속 우리와 함께 있는데스, 마마!”
친실장은 세 자식을 다독이며 말했다.
“봄이 오고 꽃이 피려면 낙엽이 떨어져야 하는데스. 게다가 마마는 산신령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가는 것이잖은데스까? 언젠가 모두 다시 만나 언제나 함께 있을 텐데 슬퍼할 이유 없는데스.”
세 자매는 어미의 품에서 눈물을 훔치며 연신 히끅거렸다. 영문을 모른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독라에게 강변집 친실장이 지그시 웃으며 말해 주었다.
“차녀가 마마가 되었으니, 이제 와타시는 마을을 떠나야 한는데스. 어른이 되어 마마가 된 실장석은, 그 자식이 마마가 되면 마을을 떠나서 산신령님 곁으로 가는데스. 와타시의 마마도, 마마의 마마도 그렇게 산신령님의 마을로 간데스. 와타시는 이제 산신령님이 데려간 다른 자들과 와타시의 오네챠 이모토챠들, 그리고 마마를 만나러 가는데스.”
그 동안의 삶을 돌이키며, 강변집 친실장은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꿈결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오바상, 그 동안 수고한테스.” “나중에 다시 만나는데스!” “구더기짱도 어서 인사하는레치!” “레후~”
저녁놀을 받으며, 모든 이웃들의 배웅과 함께 강변집 친실장은 마을을 나섰다.
“와타시의 세 자들, 건강히 잘 지내는데스!”
강변집 친실장은 환히 웃으며 자식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어미의 작별 인사에 강변집 세 자매도 웃는 얼굴로 어미를 환송해 주었다.
“마마도 행복하게 지내는데스!” “태어날 자들에게 마마의 이야기를 해 주겠는데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찾아오면 또 만나는데스, 마마!”
한 점의 슬픈 기색 없이 활짝 웃으며 팔을 흔들고는 강변집 친실장은 마을을 등졌다. 그 뒤를 바윗집 친실장이 7마리 자실장들을 데리고 따라나섰다.
“오마에들은 산신령님의 간택을 받은 자들인데스. 강변집 오바상과 함께 산신령의 나라로 가는데스.” 바윗집이 자실장들을 살살 꼬드겼다.
“산신령을 메로메로시켜서 와타시를 섬기게 만드는테치!” “매일매일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테치!” “치프프, 세레브한 삶이 시작되는테츄! 저런 너절한 마을과는 안~녕테치!”
키득대는 자실장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윗집이 독라를 향해 말했다.
“가는데스. 산신령님과의 약속의 장소를 보여 주겠는데스.”
약속의 장소는 멀지 않았다. 숲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의 밑에 놓인 낡은 금고가 그곳이었다.
“이 나무가 산신령님이 사는 나무인데스. 나무 밑의 이 단단한 상자 안에 들어가 기다리면 밤새 산신령님이 데려가시는데스.”
강변집 친실장과 힘을 합쳐 뻑뻑한 손잡이를 돌리며, 바윗집이 독라에게 말해 주었다. 손잡이에 체중을 실어 누른 채 영차 하고 당기자 녹슨 경접이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서서히 열렸다. 안은 그다지 널찍하지 않았지만 성체 하나와 자실장 일곱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자, 자들은 강변집 아줌마상과 함께 들어가는데스. 까불지 말고 착한 아이로 있어야 산신령님이 데려가 주는데스요.”
“치프프, 그 정도는 알고 있는테치.” “세레브한 와타치의 몸가짐을 보면 산신령님도 단번에 메로메로테치.” “와타시는 이제 산신령님의 사육실장테치! 지저분한 마마는 흥~인테치!”
마음대로 지껄이며 자실장들은 금고 안으로 폴짝폴짝 뛰어 들어갔다. 강변집 친실장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럼 와타시는 가 보겠는데스.”
“와타시 걱정은 말고 바윗집도 잘 지내는데스. 조만간 다시 만나는데스요. 그리고 독라 친구상,” 강변집 친실장이 독라를 향해 말했다. “와타시의 자들을 잘 부탁하는데스.”
독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윗집과 함께 금고의 문을 천천히 닫았다. 끼리릭 쾅 소리를 끝으로 여덟 마리 실장석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테치!” “테에엥! 깜깜한테치!“ ”무서운테치!“
”자, 아줌마가 있으니 무섭지 않은데스요. 산신령님이 오실 때까지 아줌마가 옛날 이야기를 해 주겠는데스. 옛날 옛날에...“
자실장들과 강변집 친실장의 목소리가 금고 안에서 웅얼웅얼 들려왔다. 바윗집은 큰 짐을 덜었다는 듯 휴, 하고 한숨을 쉬고 독라에게 말했다.
“이제 밤이 되면 모든 실장석이 잠에 빠지고, 산신령님이 나무에서 나오셔서 떠나는 실장석을 데려가는데스. 우리는 이만 마을로 돌아가는데스요.”
고개를 끄덕이고 바윗집을 따라가려는 순간, 산신령 나무의 우듬지 부근에서 반짝 하는 눈빛을 본 것 같은 기분에 독라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잎사귀뿐이었다.
“독라 친구상, 뭐 하는데스까? 빨리 오는데스요!”
바윗집의 재촉에 독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을로 향했다.
‘어쩌면 정말로 산신령님이었을지도 모르는데스.’
걸음을 재촉해 바윗집을 따라잡으며, 독라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날 아침, 해가 중천에 걸리고서야 독라는 벌떡 일어났다. 독라는 뭉툭한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전날 밤의 일을 생각했다. 어쩐지 머리가 띵하고 견딜 수 없이 졸리더니 자리에 눕자마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잤는지 잠자리가 땀으로 흥건했지만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가뿐했다. 눈을 비비며 집 밖으로 나가자 역시 방금 일어나 주섬주섬 강가로 향하는 다른 실장석들이 보였다.
“와타시가 말했잖은데스까.” 자실장과 함께 하품을 하며 지나가던 나무집이 독라에게 말했다. “산신령님은 잠을 끌고 다니는데스.”
독라는 실장석들을 따라 강가로 향했다. 야트막한 물가에서 실장석들은 목욕과 빨래를 한 다음 자실장을 씻겨 주고, 자실장은 엄지를 씻겨 주고, 엄지는 구더기를 씻겨 주고, 구더기는 “깨끗깨끗레후-하고 재잘대며 물속에 똥을 지렸다. 양지바른 곳에 누워 다 같이 몸을 말리는 와중에 윗집 친실장이 독라에게 말했다.
“이따 와타시와 함께 산신령님의 나무로 가는데스. 산신령님이 선물을 남겨주셨을 것인데스.”
끼리릭 소리와 함께 열린 금고 속에는 강변집 친실장과 바윗집 자실장들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고, 대신 웬 초록색의 원통형 덩어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데에에~ 이 정도면 온 마을이 며칠은 배부를 수 있겠는데스.”
실장석들이 벗어 준 두건에 덩어리들을 담으며, 입이 귀에 걸린 윗집이 말했다.
“이게 대체 뭐인데스까?”
“산신령님의 선물인데스.” 독라의 물음에 윗집이 대답했다. “산신령님이 실장석을 데려가시면 항상 다음날 이 맛있는 음식을 선물해 주시는데스. 먹지 마는데슷!”
덩어리를 입에 가져가려던 독라의 팔을 가볍게 찰싹 때리며 윗집이 말했다.
“마을에 가져가서 다같이 나누어 먹는데스.”
독라와 윗집이 마을에 돌아오자 실장석들이 주섬주섬 마을 한복판에 둘러앉았다. 목욕을 하고 나니 노곤해졌는지 자실장들은 찢어지게 하품을 했고, 엄지들은 고개를 꾸벅대면서도 잠든 구더기의 배를 쉴새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산신령님께 떠난 오바상과 자들을 기억하고, 산신령님께 감사하며 다 같이 먹는데스.”
나무집 친실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실장석들은 저마다 덩어리를 볼이 빵빵하도록 아가리에 처넣고 오물오물 삼키기 시작했다. 맛이 어지간히 좋은 모앙인지, 다시 잠에 빠져들던 자실장도 덩어리 하나를 입에 쏙 넣어주자 ‘츄아아!’하며 눈을 번쩍 뜨고 기쁨에 부르르 떨었다. 엄지들은 덩어리를 꼭꼭 씹어 구더기에게 먹여주고, 구더기들은 엄지가 뱉어준 반죽을 날름날름 핥으며 ‘우마우마레후- 더 주는 레후-“하고 보챘다.
“독라 친구상도 빨리 먹는테스. 안 그러면 와타시가 다 먹어버리는테스.”
뾰족집 중실장이 웃으며 독라의 입에 덩어리를 쏙 넣어 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맛이었다. 고소하면서도 입에 착착 감겨드는 감칠맛이며, 쫀득쫀득 부드럽게 감겨드는 식감, 삼키고 나서도 입 안을 진하게 메우는 이 풍미!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엄청나게 맛있었다. 독라는 고개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덩어리를 부지런히 입에 채워 넣었다.
“데겍! 데갹! 켁!”
모두가 말을 아끼며 식사에 열중하던 가운데, 맛있게 잘 먹던 윗집 친실장이 별안간 기침을 하더니 무언가를 뱉어냈다.
“데엑, 음식에 돌이 들어있던데스! 깜짝 놀란데스야!”
“데퍄퍄! 욕심쟁이처럼 급하게 먹으니까 벌을 받은것인데스.” “산신령님이 주신 음식에 투정 부리는 분충데스!”
실장석들은 저마다 놀리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독라는 윗집 친실장이 뱉어낸 조각을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탁한 검은색이 군데군데 얼룩진 녹색 부스러기이었다. 독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조각을 등 뒤로 집어 던지고, 이웃들과 함께 웃으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날은 점점 무더워지더니 다시 시원해져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엄지챠, 거기 서는테치~”
“느린레치, 오네- 짓!”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뾰족집의 엄지가 집을 나서던 독라와 부딪쳤다.
“레에엥! 아픈레치! 아야아야레치!”
“조심하는테치, 엄지쨩! 아줌마, 죄송한테치. 엄지짱도 빨리 사과하는테치!”
독라는 빙긋 웃으며 엄지와 자실장을 쓰다듬어 주고는 마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독라가 정착하고 몇 달 사이, 마을에는 많은 실장석이 태어나고 떠나갔다.
강변집 세 자매는 새로 집을 지어 따로 살게 되었다. 강변집 마마라는 이름은 전에 살던 집에 그대로 머무는 차녀가 물려받았다. 차녀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4녀와 5녀도 임신했지만, 불행히도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분충이었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산신령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뾰족집의 중실장은 성체가 되기 전에 임신했다. 다 자라지 않은 몸에서 난 아이는 자실장 하나와 엄지 하나 뿐이었지만, 다행히도 두 마리 모두 착한 아이로 자라나 어미와 함께 살고 있다.
나무집의 자실장은 어미를 닮아 똑똑한 중실장으로 자라나서 지금은 마을 자실장들의 큰언니 노릇을 하고 있다.
윗집의 엄지는 자실장으로 자라났지만 구더기 둘은 그만 죽고 말았다. 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두 마리 모두 고치까지 틀었지만 행복하게 꿈꾸는 얼굴 그대로 끝내 영영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위석의 힘이 원래부터 약한 구더기에게는 드물지 않게 있는 일이다. 자실장이 된 엄지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맨손으로 흙을 파고 죽은 두 구더기를 꼭꼭 묻어 주었다.
바윗집의 아이들은 자실장으로 태어난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엄지 다섯 마리는 날이 갈수록 식탐만 늘고 구더기는 돌보지 않더니, 끝내 모두 분충이 되어 버려 역시 산신령의 곁으로 보내졌다. 엄지들을 걱정한 자실장이 잘못을 계속 숨겨 준 것이 화근이었다. 충분한 프니프니를 받기는커녕 엄지들의 샌드백 신세로 지내오던 구더기들은 여섯 마리 모두 눈을 허옇게 뜨고 뻣뻣한 혀를 쭉 내민 상태로 발견되었다. 괴로운 얼굴에 적록의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던 구더기들의 시신은 윗집의 구더기들이 묻힌 무덤 옆에 묻혔다.
독라가 회상에 잠긴 사이, 뾰족집 엄지와 자실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를 쫓고 쫓으며 마을 저편으로 즐겁게 달려나갔다. 화사한 햇살에 비친 두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흔들리는 치맛자락과 하늘하늘한 머리카락. 엄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앙증맞은 입... 흐뭇하게 웃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던 독라는 전율을 느꼈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누군가는 선하고, 누군가는 악하다.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계절이 번갈아 스쳐가듯이 세상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순환하며 스스로의 궤도를 따라 나아간다.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매 순간 순간을 사랑하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이 변하는 삶 속에서 지금 독라는 조화를 발견했고, 덕분에 독라는 이제 삶의 모든 면모를 사랑할 수 있었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갈구하고 고통 받으며 흘러가는 삶. 그러나 흐르는 냇물 사이에 우뚝 솟아 천 년을 버티는 바윗돌처럼, 그러한 삶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웃의 땀, 이웃의 눈물. 친구들의 웃음과 울음. 소중한 벗들의 노래 소리. 매일매일 걸음마다 스쳐 지나가던 덧없는 것들. 하지만 덧없기에 그만큼 소중하다. 독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새벽을 깨치는 햇살의 광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며 사라지는 아침 이슬 속에. 긴 밤이 찾아오면 떨어질 듯 아득한 밤하늘 너머로 하나 둘 춤추며 쏟아지는 가녀린 별빛 사이에. 천만 장의 나뭇잎을 헤집으며 지평선 너머 먼 곳으로 쉼 없이 달음질치는 돌개바람의 푸른 웃음소리에. 조심스레 꽃줄기를 엮어 엄지의 머리에 씌워 주고는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자실장의 작은 손 끝에. 행복은 독라가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훔치며 마을 어귀로 향한 독라는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즐겁게 일하는 이웃들의 얼굴, 떠들며 까부는 아이들의 모습, 그림 같은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든 순간을 마음속에 꼭꼭 눌러 담듯 바라보며 독라는 미소를 띠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찌아아아!”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독라는 벌떡 일어났다.
“레챠-악! 오네챠! 오네챠아악! 괴물이 오네챠를 두 개로 만든레치!”
“뾰족집 차녀짱, 위험한데스! 빨리 이리로 오는데, 데, 데뵤오옥! 아픈데스! 이거 놓는데스!”
“테챠아악! 마마가 죽는테치! 도와주는테치!”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처참한 광경에 독라는 두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눈 앞에 보이느 것은 변하지 않았다. 독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언가를 입에 물고 마구 찢어발기는 주황색 털뭉치 괴물. 그리고 괴물의 입에 물린 것은 독라가 잘 알던 실장석, 한때는 강변집 차녀라고 불렸고, 최근까지만 해도 강변집 마마라고 불리던 실장석의 시체였다. 세 자매 중 듬직한 맏이였던 차녀, 언제나 맨 앞에 서서 이웃을 위하던 차녀, 자식들에게는 다정하고 현명한 어미였던 차녀는 이제는 미지근한 고기가 되어 갈기갈기 조각나고 있다. 무참히 반으로 찢겨진 뾰족집 자실장의 잔해가 주위에 흩뿌려져 끔찍한 광경에 잔혹함을 더하고 있다.
주황색 괴물은 물어뜯던 시체를 집어던지고 큰 소리로 포효했다.
“야오옹!”
반사적으로 마을을 향해 달려가려던 독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처음 듣지만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 울음소리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야옹이와 혼자 싸우지 마는데스.’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가르침이다. 사실 독라의 고향 마을은 고양이의 습격을 받은 적이 없지만, 수천 년간 끈질기게 이어온 고양이와의 악연은 모든 실장석의 위석 속에 본능으로 새겨져 있었다. 날렵하고 교활하며 잔혹하기까지 한 야옹이. 그 무섭다는 멍멍이보다도 무서운 적인 야옹이. 독라가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영리한 실장석이라 한들 고양이 앞에서는 맹수 앞의 하룻강아지, 호랑이 앞의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독라가 망설이는 사이에도 마을의 이웃들은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었다. 독라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 준 소중한 이웃들이 허무하게 죽는다. 살해당한다. 목숨을 잃는다. 벌써 고양이는 강변집의 움막을 간단히 무너뜨리고 안에 숨어 있던 새끼들을 도륙하는 중이다. 온 삶을 바쳐 헤맨 끝에 간신히 얻은 행복이 너무나 허무하게 조각나고 있다. 독라는 땀방울을 비 오듯 떨구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유혹하듯이 등 뒤로 펼쳐진 오솔길이, 마치 이 길로 도망가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손짓하는 듯 했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가도 온 사방이 철조망으로 막혀 있는데 고양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맞서 싸우기에는 고양이는 너무나 강하고 독라는 너무나 무력했다. 이도저도 할 수 없다. 하늘이 빙빙 돌고, 심장이 터질 듯 두근대고,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목으로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독라는 눈을 감고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친 숨소리는 풀무처럼 독라의 귓가를 때렸다. 독라는 침을 삼키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일정해지고, 미친 듯 뛰던 심장 박동 또한 차츰 느려졌다. 마음을 굳힌 독라는 비장한 각오를 세운 채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고양이는 벌써 강변집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다음 나무집에 앞발을 쑤셔 넣고 휘젓는 중이었다. 독라는 강변집 차녀의 시체에 다가갔다. 최후의 순간까지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차녀의 손에는 마지막까지 휘두르던 피 묻은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다.
“와타시가 잠시 빌리겠는데스.”
독라는 속삭이며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기합을 지르며 고양이를 향해 달려갔다.
“데에에엣!”
때로는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만, 때로는 도망쳐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불행히도 독라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기세 좋게 내리찍은 나뭇가지는 고양이의 두꺼운 피부에 닿자마자 이쑤시개처럼 부러졌다. 나무집을 부수던 고양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독라를 향해 홱 돌아섰다. 으르렁 거리는 입과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을 마주했다고 생각한 순간, 고양이가 갑자기 옆으로 자빠졌다.
다시 보니 자빠진 것은 고양이만이 아니었다. 하늘, 땅, 나무, 온 세상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옆으로 누운 땅에서 상반신을 잃은 독라의 하체가 옆으로 누운 채 시야 귀퉁이에서 몇 걸음을 내딛다가 풀썩 쓰러졌다.
고양이는 두 동강이 난 독라에게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마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웃들의 비명, 애원, 절규, 그리고 피 비린내. 독라는 고양이를 향해 두 팔을 무력하게 뻗었다.
토막난 몸은 재생되기는커녕 선혈을 쏟아내며 점차 차갑고 뻣뻣하게 굳어갔다.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앞으로 쭉 뻗은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며 독라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정신이 좀 드니?”
천사처럼 고운 음색이 귀에 감겨들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희뿌연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쳐 보였다.
“와타시는 죽은... 혹시 산신령님...데스까?”
“산신령님이라고?”
목소리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산신령은 아니라고 생각해. 넌 죽지 않았어. 여기는 내 집이고.”
눈을 몇 차례 깜빡이자 시야가 차즘 또렷해지면서 주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상처가 말끔히 재생된 독라는 화려한 그릇 안에서 허리까지 오는 활성제 안에 잠겨 있었고, 눈앞에서 말을 걸어오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처음 보는 인간 여자였다. 여자는 활성제를 독라가 잠긴 그릇에 탈탈 털어 더 쏟아 붓고는 빈 병을 책장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낮에 등산을 하고 있었는데, 철조망 너머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리길래 가 보니까 네가 쓰러져 있었어.”
마을... 고양이... 비명... 희뿌연 머릿속 너머에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독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와타시의 친구들은 어떻게 된 데스까?”
독라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네 이웃들은...”
여자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갔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때였어. 다른 실장석들은 모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독라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궜다. 볼을 타고 흐른 적록의 눈물이 투명한 녹색 활성액에 뚝뚝 떨어져 물감처럼 퍼져나갔다. 흔들거리는 수면 위에 독라의 모습이 일렁이고, 그 위에 이는 동심원의 파문, 파문, 파문... 독라는 휘청하더니 활성제에 얼굴을 처박고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난 독라는 활성액이 아니라 푹신푹신한 사육실장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독라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비틀비틀 내려왔다. 쇠창살 울타리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온통 분홍빛의 먹이그릇과 물그릇, 잡다한 장난감 등이 여기저기 비치되어 있었다. 때마침 여자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방에 들어왔다.
“아, 일어났구나.” 여자는 손에 든 것을 먹이그릇에 담으며 반갑게 말했다. “많이 먹어. 빨리 회복해야지.”
여자가 내려놓은 먹이그릇에 담긴 것은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형형색색의 알갱이였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그것은 콘페이토, 혹은 코로리, 혹은 도돈파? 독라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인간도 독라를 환대해 주지 않았다. 아랫마을의 남자, 공원을 휩쓴 하얀 악마, 자신을 고문한 학대파. 이 여자라고 다르리란 법이 있을까? 독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을을 떠날 때만 해도 부풀었던 희망은 이제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빈 껍데기가 되었다. 길실장, 행복, 이웃 친구,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만 느껴졌다. 차라리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죽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독라는 생각했다.
독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물그릇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너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야. 아무리 실장석이더라도 이대로는 무리라고. 물에 영양제랑 활성제랑 이것저것을 좀 탔어. 맛은 이상해도 도움이 될 거야.”
독라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허공을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여자는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 미안해. 아직 충격이 크겠지. 여기 놓고 갈 테니 꼭 먹어야 해. 이따가 다시 올게.”
여자는 살며시 문을 닫으며 방을 나갔다. 딸깍 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텅 빈 방 안에서 혼자가 된 독라는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째깍대는 시계 소리만을 들으며 못 박힌 듯 앉아 있는 독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독라는 먹이그릇에 손을 뻗고 있었다. 하지만 콘페이토를 입에 가져가려던 독라는 잠시 멈추더니 천천히 도로 내려놓고는 밥그릇과 물그릇을 울타리 너머로 내던졌다. 땡그랑 소리를 내며 엎어진 그릇에서 콘페이토와 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독라는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여자가 살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엎어진 먹이그릇과 물그릇을 본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릇에 먹이와 물을 다시 담아 독라의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독라와 여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다. 독라는 살기를 계속 거부했고, 여자는 그럴 때마다 몇 번이고 묵묵히 그릇에 콘페이토와 물을 담아 독라에게 내밀었다. 날이 갈수록 독라는 눈에 띄게 여위고 바싹 말라갔다.
닷새째 되던 날, 독라는 더 이상 그릇을 엎지 않았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고, 탈수와 기아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독라에게는 그릇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사태를 파악하고는 한숨을 쉬더니 독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왜 먹지를 않는거니... 아무리 불행해도 살아야 언젠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건데...”
행복이라. 독라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너 혹시... 학대파에게 잡혔던 경험이 있는 거니?”
느닷없는 여자의 말에 독라는 고개를 들고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를 구출했을 때, 치료를 위해 위석을 적출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네 몸 어디에도, 잘린 하반신에도 위석이 없더라고.”
여자는 슬픈 얼굴로 독라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끔찍한 기억이었겠구나. 미안해... 같은 인간으로써 사과할게.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잔인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괜찮다면...” 여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내 사육실장이 되어 주지 않을래?”
내색하지 않았지만 독라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는 독라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 사육실장 하나가 있었어. 지금 네가 자고 있는 침대, 네 앞의 이 그릇도 다 그 실장석의 것이었지. 실장숍에서 싼 값에 우연히 사 온 아이였지만 정말 착하고 영리한 실장석이었어. 하지만 그 아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는 다른 어떤 실장석도 도저히 키울 생각이 들지 않았단다. 하지만 너는... 너는 다른 것 같아. 너를 볼 때마다 왠지 그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 얼굴, 그 몸짓, 그 말투...”
어느 새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를 이해해. 학대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더는 사람을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내가 네게 힘이 되어 주고, 네가 내게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여자는 콘페이토가 담긴 그릇을 독라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단다. 나는 너를 믿어. 내가 너를 믿는 만큼 너도 나를... 믿어 주겠니?”
독라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뭉툭한 손을 천천히 뻗어 콘페이토를 집었다. 반짝이는 분홍색 표면. 우툴두툴한 돌기. 천천히, 천천히, 독라는 콘페이토를 입에 넣고 오도독 깨물었다. 혀가 저릿한 단맛이 순식간에 입 안에 퍼져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여자는 말없이 흐느끼며 독라를 끌어안았다.
예전의 독라라면 여자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라는 지쳤다. 고향 마을을 떠난 뒤 흐른 반년의 시간이 마치 백 년처럼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꺾여 버린 독라는 이제 너무 지쳐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했잖아?
여자는 대단히 부자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꿈도 꾸지 못할 호화로운 사치가 독라에게 제공되었다. 독라는 옷과 머리를 받았고 그린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생활이었지만 독라는, 아니, 그린은 여자가 보내준 무한한 사랑과 신뢰 덕분에 새로운 삶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린은 언제나 여자가 가르친 것 이상을 깨우쳤고 기대한 것 이상을 보여 주었다. 여자의 집에 들어온 지 몇 달 만에 그린은 콘테스트에 내보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특급 사육실장으로 성장했다. 그린은 사육실장 이전의 삶을 영영 기억 저편에 묻어 두기로 했다. 주인 여자도 그린의 과거를 굳이 묻지 않았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린은 행복한 사육실장으로 살게 되리라.
“그린? 그린?”
아침을 먹던 그린은 주인의 목소리에 냉큼 계단으로 향했다.
“그린? 거기 있니, 그린?”
“지금 가는데스, 주인님!”
계단을 능숙하게 기어오르며 그린이 외쳤다. 주인의 방문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그린은 정중히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부르신데스까, 주인님?”
“오늘 날씨가 어떤지 일기예보 좀 봐 주겠니?”
“하이데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린은 낑낑대며 계단을 기어 내려가 현관으로 향했다. 신문 투입구 앞에서 오늘자 신문을 집어 들고 거실로 향한 그린은 능숙히 페이지를 넘겨 일기예보 란을 찾았다.
“오늘은... 5월... 강수 확률은...”
중얼중얼 글자를 읽은 그린은 신문을 접어 내려놓고 숨 가쁘게 위층으로 향했다.
“오후 3시쯤에 비가 온다고 하는데스, 주인님. 낮에는 황사가 분다니 마스크도 꼭 챙기시는데스.”
“그래, 고마워.”
부엌으로 돌아와 아침을 마저 먹고 있자니 화장을 마친 주인이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린, 오늘은 일이 있어서 밖에 좀 나갔다 올게. 저녁때는 되어야 돌아올 테니까 집 좀 잘 봐줘. 돌아와서 고기 구워먹자!”
“다녀오시는데스, 주인님.”
현관까지 따라 나온 그린은 여자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고양이에게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주고 치료해 준 주인님. 벌거벗었던 자신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고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심어 준 주인님. 이름 없이 독라라고만 불리던 자신에게 그린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 준 주인님. 새 삶을 선물해 준 고마운 주인님에게는 아무리 봉사해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그린은 으리으리한 거실로 향했다. 대형 TV와 호화로운 가구로 치장된 거실 구석에 깔린 값비싼 양탄자, 그 위에 그린의 집이 있었다. 실장석 크기에 맞춘 침대, 계단, 창문과 커튼까지 딸린 1미터 높이의 실장석용 3층집. 1층은 엄지와 구더기, 2층은 자실장, 3층은 그린이 자는 집이었다. 바닥부터 지붕까지 최고급 마호가니 원목으로 지어진 초고가의 집은 어지간한 세레브 실장이라도 기절할 만큼 화려했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그린은 커튼을 열어젖히며 부드럽게 외쳤다.
“아침인데스. 햇님이 쨍쨍한데스. 다들 일어나는데스~”
몇 차례 외치자 즐비한 침대 위의 이불 뭉치가 꼬물거리더니 엄지들이 조그만 얼굴을 쏙쏙 내밀었다.
“레츄...” “마마 안녕히 주무신레치...”
눈을 비비며 일어난 엄지들은 저마다 하품을 하며 이불 밖으로 나오더니 구석에 놓인 바구니로 향했다. 천으로 덮인 바구니 안에서는 ‘레후웅’ ‘레휴’하고 색색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을 들추자, 바구니 안에 깔린 쿠션 위에 옹기종기 모여 코를 고는 구더기들이 보인다.
“구더기쨩 일어나는레치.” “밥 먹으러 가는레치.”
“레후... 구더기 졸린레후.” “더 자고싶은레후... 하지만 맘마도 먹고싶은레후...”
엄지들이 잠꼬대하는 구더기를 달래는 사이 2층에서는 우당탕쿵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실장들이 야단스럽게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마마 안녕히 주무신테치!” “뛰지 마는테치! 구더기짱들이 놀라는테챠!” “그러는 오네챠도 뛰고 있는테치!”
저마다 법석을 떨며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자실장들의 소란에 구더기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저마다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꼭 감은 채 이빨 없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레훼에에엥...’ 울음을 터뜨리지만, 엄지들이 급히 바구니 주위로 모여들어 하나씩 프니프니를 시작하자 언제 울었냐는 듯 꼬리를 흔들며 기쁘게 레후 하고 운다.
엄지들이 하나씩 구더기를 안고 나간 뒤, 바구니 안의 쿠션을 들고 그린도 잡을 나왔다. 구더기들이 밤새 자며 똥을 지린 쿠션은 매일 아침 빨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 거실에는 이미 자실장들과 엄지, 구더기들이 나란히 집합해 있다.
“주인님은 일이 있어서 나가신데스. 주인님이 보고 계시지 않더라도 착한 자로 행동해야 하는데스!”
그린이 말하지만 새끼들은 들은 척 만 척 딴 짓만 할 뿐이었다. 하나, 둘, 셋... 자실장 넷과 엄지 다섯, 구더기 다섯이 빠짐없이 모인 걸 확인한 그린은 행렬의 선두에 서서 화장실로 향했다.
1층의 화장실 하나는 아예 통째로 실장석 전용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넓은 화장실에는 핑크색 도자기로 된 실장석용 세면대, 변기, 욕조.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실장석용 미니 세탁기가 있었다. 아침에 이미 세수를 끝낸 그린은 간밤에 세탁이 끝난 실장복을 세탁기에서 꺼내 널어놓은 다음 구더기들이 자던 쿠션을 집어넣고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그 사이, 자실장들은 줄지어 세수를 마치고는 구더기를 안고 있느라 양 팔이 부자유한 엄지의 얼굴을 씻겨 주었다. 엄지의 세수까지 끝나면 다음은 구더기의 차례다. 온 몸이 똥딱지로 범벅인 구더기는 세수가 아니라 목욕을 시켜 주어야 한다. 슬슬 팔 힘이 빠져가는 엄지를 대신해 구더기를 받아든 자실장들이 미리 더운 물을 받아 놓은 욕조에 구더기들을 담근다. 따뜻한 물에 몸이 잠겨들자 흥분한 구더기들이 콧김을 훙훙 내뿜으며 물에 마구 똥을 지린다.
“테챠아! 구더기쨩 제발 운치좀 그만 지리는테치...”
“레후? 무리인레후~ 구더기는 마음껏 운치할 권리가 있는레후.” “운치 뷰릿뷰릿 나오는레후~ 멈출 수 없는렛~훙 렛~후훙~”
물이 더러워지자 기다리던 엄지들은 냉큼 욕조의 물을 내리고 새로 물을 받는다. 구더기의 뱃속이 다 비워지고 포대기에 배어든 똥까지 다 빠지고 나서야 세수는 끝이 난다. 자실장과 엄지들은 힘을 합쳐 구더기의 부드러운 몸을 극세사 수건으로 닦아주고, 새 포대기를 꼼지락대며 입혀 준 다음 진이 빠진 모습으로 그린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에 도착하자 지친 아이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자실장과 엄지는 음정도 박자도 엉망진창인 노래를 제멋대로 합창하고, 구더기도 귀를 파닥이며 불협화흠에 가세한다.
“맘~마 맘~마테치 맛있는 맘마테치~” “아마아마 우마우마 맘마레치~” “레후레후훙 레후우레후~”
일행은 일제히 주인의 식탁 옆에 마련된 사육실장 식탁에 둘러앉는다. 구더기는 커다란 전용 요람에 가지런히 눕혔다. 욕조에서 똥을 잔뜩 싸고 배가 텅 빈 구더기들이 볼을 부풀리며 밥을 보챈다. 그린은 봉지에서 최고급 실장푸드를 꺼내 각자의 접시에 담아 준 다음, 새끼 새처럼 짝짝 벌려대는 구더기들의 입 안에 치약같이 생긴 페이스트형 이유식을 짜 넣어 주었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짭쪼름하고 쫄깃쫄깃하고 한 입 깨물면 안에 갇혀 있던 육즙이 툭 하고 터져 나오는 최고급 실장푸드. 지금 그린의 가족이 먹고 있는 분량이 중산층 4인 가족의 일주일치 식비보다 비싸다는걸 이들은 알까? 자실장과 엄지들은 ‘테츄웅~’ 환성을 지르며 고개를 처박은 채 정신없이 먹어대고, 구더기는 입에 밥이 들어가기가 무섭게 꿀꺽 삼키고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더 달라고 보챈다.
게걸스러운 식사는 금세 끝났다. 자실장이며 엄지며 구더기 모두 입가에 침이며 부스러기를 지저분하게 묻힌 채 숨을 훅훅 내쉬며 발라당 드러누웠다. 터질 듯 빵빵한 배가 꼭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모조리 토해낼 기세다.
새끼들이 부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동안, 그린은 난장판인 주위를 행주로 훔치고 그릇을 싱크대로 옮겼다. 계단을 딛고 싱크대에 올라간 그린은 옷을 벗어 개켜놓은 다음 지저분해진 먹이그릇을 들고 개수대 안에 들어갔다. 안에는 주인과 그린이 아침을 먹은 식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린은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는 솜씨 좋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마친 그릇을 시렁에 얹어 놓은 그린은 물기를 닦고 옷을 입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자실장들은 벌써 배가 다 꺼져서 놀러 갔는지, 거실에서 왁자지껄 장난치는 소리만 들려온다. 구더기들은 요람에서 코휴코휴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고, 엄지들은 자실장을 따라 거실로 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더기를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었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그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더기쨩들은 마마가 맡을 테니 가서 오네챠들과 노는데스.”
엄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성을 지르며 거실로 달려가고, 구더기들을 요람채로 들어 올린 그린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린의 모습이 보이자 장난감을 갖고 놀던 자실장들이 쪼르르 달려와 보챘다.
“마마! 마막!” “티비테치! 티비테치!” “테치카! 테치카 틀어주는테치!”
“조금만 기다리는데스.”
그린은 엉겨붙는 자실장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들어가, 바구니에 쿠션을 새로 깔고 구더기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눕혔다. 자실장들이 따라 들어와 눈을 빛내며 그린을 쳐다본다. 구더기들이 깨지 않도록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친 뒤, 그린은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자실장과 엄지들이 흥분에 겨워 방방 뛰며 주위를 돌았다.
“테치카! 테치카!” “테치카테치! 테치카 보는테치!”
그린은 서랍을 열고는 빼곡한 DVD 중 하나를 꺼냈다. <마법실장 매지컬☆테치카! ~기적을 부르는 전설의 콘페이토, 주인님을 구해줘!~> 복잡한 제목이다. 그린은 능숙하게 리모콘을 조작해 DVD를 재생했다. 하늘에서 빛나던 별이 거대한 콘페이토가 되어 지구로 내려오고, 그 안에서 우주가 선택한 마법실장 매지컬☆테치카가 깨어나는 시리즈 전통의 오프닝이 재생된다. 자실장과 엄지들은 반 광란 상태가 되어 소리 질렀다.
“테에에에!” “테치카! 테치카아아!” “츄우우우!”
텔레비전 앞에 바짝 붙어 화면을 응시하는 자식들을 뒤로 하고, 그린은 집안일을 마저 시작했다. 주로 실장복을 빨래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화분에 물을 주는 일 정도다.
드넓은 이층집을 매일같이 청소하는건 고된 일이지만, 사랑하는 자식들이 깨끗한 집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주인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것 자체가 그린에게는 기쁨이었다.
2층에 있는 이런저런 방과 주인의 방, 복도를 말끔히 걸레질한 그린은 더러워진 걸레를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인간의 크기에 맞춰진 계단은 성체인 그린에게도 통행하기 불편하다. 하지만 언젠가 자식들이 자라면, 함께 손을 잡고 이 계단을 올라 주인님의 방을 청소할 날이 올 것이다. 가득한 자식들이 어른이 되고, 그 자들이 손주를 낳고... 그린의 상상 속에서 가족은 자꾸자꾸 불어만 간다. 그 때가 되면 주인님께 집을 한 채 더 사 달라고 말해야지. 즐거운 상상에 빠진 채 계단을 계속 내려가던 그린은 어느 새 굳게 닫힌 문이 눈앞에 다가오자 흠칫 멈추었다. 딴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1층을 지나 지하실 앞에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린은 이 단단히 잠긴 철문이 열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안 쓰는 물건들을 보관해 놓은 창고야.” 주인은 말했었다. “워낙 어질러져 있어서 다칠 지도 모르니까 절대 들어가면 안 돼!”
굳이 주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싸늘한 지하실에서 풍겨오는 으스스한 느낌을 그린은 항상 싫어했다. 진저리를 치며 그린은 계단을 다시 올라 1층으로 향했다.
1층 청소는 어제 끝냈고, 화장실 청소까지 마치면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되리라고 짐작하며 그린은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새 아이들이 똥을 누고 갔는지 엄지실장용 도자기 변기 안에는 녹색 변이 가득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화장실을 잘 가리는 엄지들을 기특해하며 그린은 변기를 비우고 청소를 시작했다.
한창 청소를 하던 도중, 불길한 소리가 거실 방향에서 들려왔다.
“테체아아아!”
사육실장 이전의 기억이 거의 희미해진 그린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자실장의 비명 소리만큼은 그린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거실로 달려가자 자식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울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엄지 하나가 피를 토하며 헐떡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데스!”
“테에엥, 마마!” “테, 테, 테, 테에엥! 테에에엥!” “레에에엥!”
숨넘어갈 듯 매달리는 자식들의 말을 들어보니, 테치카 놀이를 하던 중 엄지 하나가 자실장에게 강하게 밟힌 모양이다. 갈비뼈가 부러져 내장을 헤집었는지, 엄지는 입에서 선지피를 뭉텅이로 흘리며 금방이라도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려고 했다. 엄지를 밟은 자실장은 창백한 얼굴로 귀를 막은 채 구석에 웅크려 떨고만 있었다.
“마, 마마, 마마... 마마 어디...있는레치...? 추운... 추운레치... 앞이 보이지 않는 레...치...”
“테에엥! 9녀짱, 정신 차리는테치!” “마마, 9녀짱이 이상한테치!” “뾰, 뾰로롱~ 뾰롱~ 테치카의 마법으로 9녀짱은 건, 건강해지는테치!”
아무리 평소에 영양 공급이 잘 되었더라도 이 정도면 연약한 엄지에게는 치명상이었다. 매 초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9녀의 얼굴에 드리우고, 자매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한 안간힘을 쓰며 9녀를 살리려고 하고 있었다.
“마, 마마... 안아줘...레..치...”
죽어가는 엄지실장의 모습은 그린이 오래 전 기억 너머에 묻어두었던 어떤 이미지와 겹쳐가고 있었다. 그린은 소리를 꽥 지르고는 다급하게 위층으로 달려갔다. 주인의 방에 도착한 그린은 황망히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 동안 아무도 다친 적이 없어 활성제를 쓸 일이 없었지만, 그린이 여자의 집에 오던 날부터 주인 방 책장에 활성제 병이 놓여있던 것을 그린은 기억했던 것이다. 과연 주인의 책장 위쪽 칸,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에 ‘활성제’라고 쓰인 갈색 병이 있었다. 하지만 책장의 높이는 그린의 손이 닿기에는 너무 높았다. 팔을 쭉 뻗고 동동 발을 굴러보던 그린은 절박하게 머리를 굴리더니,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우르르 쏟아내고 발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뭉툭한 손으로 몇 번이고 책을 떨어뜨리면서도 불안정하게 쌓은 책 더미는 얼마 안 가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머리부터 꼴사납게 자빠진 그린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린은 9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체 없이 다시 책을 쌓아 올렸다. 몇 차례의 실패 끝에 밑단을 윗단보다 넓게 쌓는 요령을 터득하고서야 그린은 간신히 발판다운 발판을 만들 수 있었다. 여전히 활성제에 손이 닿지는 않을 높이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린은 발판 꼭대기에서 있는 힘껏 뛰어 올라 활성제가 놓인 칸에 간신히 팔을 걸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린의 몸은 사육실장 1년 사이에 몰라보게 둔해져 있었다. 발버둥을 치며 기어 올라가려 해 보아도 그린의 몸은 자꾸자꾸 미끄러져 내렸다. 손을 쭉 뻗어 보아도 활성제는 야속하게도 닿을 듯 말 듯 하며 손에 닿지 않는다. 결국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그린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활성제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키보다도 높은 높이에서 마룻바닥으로 속절없이 떨어진 그린은 뒤통수부터 격돌했다.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그린은 신음과 함께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품에 소중히 안고 떨어진 활성제 병은 다행히 안전했다. 어서 9녀에게 활성제를 먹여야 한다. 만신창이가 된 그린은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으며 비틀비틀 1층으로 향했다. 기다시피 절룩거리며 복도를 가로지를수록 바닥에는 피 묻은 발자국과 손자국이 힘겹게 찍혀든다. 피 거품을 부글부글 내뱉으며 그린은 간신히 복도를 횡단했지만, 또 다른 장애물이 그린과 9녀 사이에 버티고 서 있었다. 머리를 다쳐 눈앞이 빙빙 도는 그린에게, 평소에도 버겁게 통행하던 계단은 천 길 낭떠러지처럼 까마득했다.
그린은 이를 악물고는, 활성제 병을 품 안에 단단히 껴안고 계단으로 몸을 굴렸다.
콩 쾅 쿵쿵쿵쿵...
가속도가 붙으며 굴러 내려갈 때마다 그린의 몸은 점점 부서져 간다. 층계참에 닿았을 때 이미 그린의 팔다리며 몸통은 구석구석이 골절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통에 줄줄 탈분하면서도 그린은 구더기처럼 기며 층계참을 가로질렀다. 또 다른 계단이 그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음을 굳게 먹은 그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9녀를 위해 다시 계단에서 몸을 굴렸다.
그린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9녀의 상태는 시시각각 악화되어 이젠 죽음의 문턱에 완연히 발을 걸치고 있었다. 가사 상태에 빠져든 몸은 잠깐은 불덩이같이 열이 나더니 이제는 보랏빛으로 변하며 차갑게 뻣뻣하게 굳어들고 있었다. 혀는 벌써 징그럽게 입 밖으로 툭 불거져 나오고, 가느다란 숨은 점차 뜸해지며 잦아든다.
“테에엥! 마마는 어디 간 테치!” 차녀가 울부짖었다.
“9녀가 죽는데 닝겐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테챠!” 4녀가 분통을 터뜨렸다.
9녀를 밟은 장본인인 3녀는 그저 하얗게 질려서 다른 엄지들과 함께 덜덜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와타시가 마마를 찾으러 가는데스.” 장녀가 나섰다. “차녀쨩, 와타시와 같이 위층으로 가는데스.”
“하지만 마마가 2층은 주인님의 방이라고...”
“지금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어디 있는테챠! 닝겐의 방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9녀를 죽게 할 작정인테치?” 차녀의 말에 장녀가 호통을 쳤다.
“아, 아닌테치. 같이 가는테치...”
다행히도 두 자실장은 계단을 기어올라 위층으로 여정을 떠날 필요까지는 없었다. 활성제 병을 꼭 끌어안은 그린이 계단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마! 마마!” 장녀와 차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린에게 달려들었다.
“마마는 괜찮은데스. 마마같은 어른은 이 정도는 금방 낫는데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린이 입술을 달싹대며 말했다. “약.. 마마 품의 약을 9녀에게 먹이는데스.”
그린은 소중히 안고 있던 활성제 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장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성제 병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두 팔로 병을 감싸 안고 거실로 달려가려던 장녀는 멈칫하더니 활성제 병을 흔들어 보았다. 절망이 가득한 가득한 얼굴로 그린을 돌아보며 장녀가 말했다.
“마마, 병이 비어 있는테치.”
“그게 무슨...소리인데스!”
장녀는 말없이 내민 병을 그린은 찬찬히 살펴보았다. 금 가지도 깨지지도 않은 갈색 병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빈 병이었던 것이다. 그린은 눈을 몇 차례 끔벅이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도로 쓰러졌다. 거실에서는 4녀의 찢어지는 외침이 들려왔다.
“오네챠! 9녀짱이 숨을 안 쉬는테치!”
장녀와 차녀는 무력하게 발만 동동 구르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테에엥!” “테에에엥” “테에에에엥!” “테에엥!”
“이게 무슨 소란이야?”
장녀와 차녀는 울음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 주, 주인님, 주인님! 테에에엥!”
“닝겐! 9녀가 죽어가는테치! 빨리 9녀를 살리는테챠!”
울음을 다시 터뜨리는 차녀를 대신해 장녀가 재빨리 말했다. 여자의 낯빛이 변했다. 그린의 발치에 있는 빈 활성제 병을 보고 사정을 파악한 여자는 짐을 내던지고는 재빨리 계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여자가 향한 곳은 위층dl 아니라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계단 아래로 여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열쇠 소리가 들리더니 지하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활성제 병을 들고 나타난 여자는 다급히 거실로 향했다. 여자가 곁을 지나가는 짧은 순간, 그린은 병에 쓰인 글자 몇 개를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취급 주의. 고농축. 전문가용.
여자는 꼼짝없이 누워 있는 9녀의 눈꺼풀을 열어 보았다. 적록의 동공이 형광등 빛을 받자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 9녀는 심장이 멎어 있었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한 여자는 9녀의 세모골 입 안에 활성제를 마구 퍼부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비명과 함께 9녀가 눈을 떴다.
“챠아아아! 뱃속이 뜨거운레치! 아픈레치이!”
여자는 재빨리 9녀를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 9녀의 입을 수도꼭지에 갖다 대고 물을 틀었다. 괴로움에 발버둥 치던 9녀의 움직임이 멈추고, 뱃속을 지나 총구로 쏟아져 나오는 물이 초록색에서 투명하게 변하고서야 여자는 물을 잠그고는 수건으로 9녀의 몸을 닦았다. 새파랬던 9녀의 몸에는 어느 새 발그레한 혈색이 돌아왔고,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얼굴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침대에 데리고 가서 눕혀줘. 한 시간 쯤 있으면 깨어날 거야.”
“아, 알겠는테치.”
장녀에게 9녀를 맡기고서, 여자는 활성제를 물로 희석해 여전히 계단 앞에 쓰러져 있는 그린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빠드득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통증이 가시고 그린의 몸은 금세 회복되었다.
“괜찮아, 그린?”
“주인님 덕분에... 괜찮아진데스. 감사한데스, 주인님.”
“고맙긴 뭘...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지.”
여자는 그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일어나서 거실로 가자. 9녀가 좀 어떤지 봐야지.”
여자는 일어나서 거실로 향했다. 몸을 일으켜다말고 그린은 계단 아래를 슬그머니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미처 닫지 않은 지하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은 깜깜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인의 말과는 달리 의외로 어질러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 해, 안 오고?”
“아, 아무것도 아닌데스. 지금 가는데스.”
“아차, 내 정신 좀 봐.”
돌아온 여자는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 문을 닫고는 그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자, 어서 거실로 가야지. 난 아까 사 온 고기 좀 냉장고에 넣어야겠다.”
거실로 향하려던 그린은 묵직한 느낌에 가랑이를 내려다보았다. 계단에서 구르느라 온 몸은 피투성이에 탈분으로 똥까지 묻어 있었다. 아이들이 눈치 채지 않았을까 창피해하며 그린은 욕실로 들어갔다.
“바닥에 피 묻은 건 내버려둬! 내가 이따가 치울게!”
주방에서 주인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욕조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린은 거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운 9녀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창문으로 들여다보였다. 장난감이 어지럽혀진 채 텅 빈 거실에는 DVD 메인 화면으로 돌아온 TV만이 을씨년스럽게 켜져 있었다. TV를 끄고 그린은 집 안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9녀의 침대를 둘러싸고 걱정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9녀의 상태는 많이 좋아진 듯 했다.
구석에 놓여진 바구니에서 ‘레히...’하는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싶어서 천을 들춰보니, 다섯 마리 구더기들이 창백하게 질린 채 저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구더기 버려버려 당한레후...? 아무도 구더기 사랑하지 않는레후? 구더기 이제 맛나맛나 되는레후?’하고 중얼거리며 울고 있었다. 소란에 잠을 깨어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자 절망에 빠져 파킨하기 직전이 된 것이다. 그린은 소리를 죽여 외쳤다.
“9녀는 쉬어야 하는데스. 다들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는데스. 엄지쨩들은 빨리 구더기를 안아주는데스!”
헐레벌떡 구더기를 안아든 엄지들과 자실장들이 살금살금 집 밖으로 나갔다.
“오네쨩 믿었던레후! 믿었던레후!”
“씩씩하게 버틴 구더기는 프니프니 받을 자격이 충분한레후?”
“마음껏 프니프니 해 줄 테니 제발 시끄럽게 굴지 마는레치, 구더기쨩...”
엄지들이 모두 빠져나갔지만 포대기에는 구더기 한 마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9녀가 도맡아 데리고 다니던 구더기였다.
“구더기는 역시 버림받은레후! 무서운렛후! 구더기는 이제 쭉~ 쭉~ 혼자레후...”
그린은 부드럽게 구더기를 안아들고 살며시 흔들어 주었다.
“오네챠인레후? 오네챠, 언제부터 이렇게 커진레후? 렛! 마마레후! 오늘은 마마가 프니프니 해 주는레후? 구더기 대흥분레후! 특별 대접 받는레후!”
구더기는 눈물 묻은 얼굴에 웃음을 지어 보이며 혀를 쏙 빼물고 몸을 꿈틀댔다. 그린은 구더기를 안은 채 살며시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온 엄지들은 프니프니를 하면서도 집 안을 계속 힐끔대며 바라보았다. 자실장들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듯 하더니 아무래도 걱정되는지 집 주위를 서성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더기를 안은 엄지와 자실장들은 일제히 집을 둘러싸고 창문을 통해 9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자매를 아끼는 아이들이 또 있을까? 이토록 현명하고 착한 아이들이라면 틀림없이 훌륭한 사육실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린은 아이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9녀를 지켜보았다.
한 시간이 더디게 지나가고, 지친 아이들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9녀를 덮은 이불이 움찔거리더니, 말끔해진 9녀가 ‘텟테레~’하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9녀쨩!” “9녀챠가 건강해진레치!” “다행인테츄, 9녀챠!”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드는 자매들을 보자 9녀는 방긋 웃으며 달려 나왔다.
“오네챠들 숨바꼭질하는레치? 와타시도 끼워주는레츄~”
그린의 가족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았다. 부엌에서는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구워졌어, 얘들아. 어서 와서 먹자!”
“테츄우~” “레츙~”
환호성을 지르며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9녀와 아이들. 그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늦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실장석들도 주인도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가 되었다.
“잘 자, 얘들아. 잘 자, 그린. 자실장들도, 엄지들도, 구더기도 모두 잘 자렴.”
주인은 열다섯 마리 실장석에게 일일이 눈을 맞춰가며 인사하고는 2층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행렬에서 갑자기 자실장 하나가 뛰쳐나왔다. 정면으로 대든 적은 없었지만 항상 주인을 어딘지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장녀였다.
“닌, 닌겐!...상!”
“응? 장녀구나? 무슨 일이니?”
“9, 9녀를 살려줘서 고마...감사합니다테치!”
붉어진 얼굴로 빽 소리 지른 장녀는 부끄럽다는 듯 허둥지둥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기쁘게 웃으며 주인은 장녀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나 말고 9녀에게 고마워해! 끝까지 버텨준 건 9녀니까!”
그린은 얼굴이 새빨개져 집으로 뛰어 들어온 장녀를 꼭 안아 주었다.
“잘한데스. 앞으로도 주인님과 그렇게 자주 이야기하는데스.”
“이, 이야기가 아닌테치! 그냥, 그냥 고맙다고만 말한테치!”
“테츄~ 장녀오네챠는 부끄럼쟁이인테치.” “오네챠도 사실은 주인님을 좋아한다는 것 와타시는 아는테치!”
“아, 아, 아닌테챠!”
자매들의 놀림에 장녀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 그린은 웃으며 자식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와타시는 행복한데스.’ 그린은 중얼거렸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그린은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나왔다. 컴컴한 거실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린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뭐하니, 그린?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뎃, 주인님. 그냥 마음이 뒤숭숭해서 잠이 안 오는데스.”
“그렇겠지. 엄마의 마음이란 게 그런 법인가 봐. 뭐, 나야 모르지만.”
주인은 소파에 앉아 그린을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둘이 앉는 것도 오랜만이네. 어쩐지 어색하다, 그치?”
그린은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린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주인사마.”
“응, 왜?”
“지하실...에는 무엇이 있는 데스까?”
“별 거 없다니까? 그냥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나 처박아 놓은 창고야.”
무슨 잡동사니...라고 물으려다 그린은 입을 다물었다.
“왜, 들어가 보고 싶어?”
“아, 아닌데스.”
여자는 미소 지으며 그린을 쓰다듬다가 불쑥 말했다.
“그린, 기억나? 작년 이맘때 쯤 네가 우리 집에 왔었지. 그 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니?”
물론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린은 잠자코 주인의 말을 기다렸다. 어두운 거실에는 째깍째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렸다.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었어. 어때,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는데스.”
그린은 눈가를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어때, 그린? 너는 지금... 행복하니?”
그린은 목이 메어왔다. 어떻게 그걸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린이 느끼는 행복과 고마움은 그린이 묘사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울음을 삼키며 그린은 더듬더듬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무 행복한데스. 와타시는 너무... 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너무 행복...한 데스...”
“그래, 잘됐네.”
여자는 씩 웃으며 지금껏 감추고 있던 것을 그린의 코앞에 꺼내 들었다.
“무슨...”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칙 하고 뿜어져 나온 차가운 분무가 그린의 얼굴을 뒤덮었다. 머리가 띵하고 견딜 수 없이 졸리다. 그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지막에 여자가 그린 일가 다 죽이는 결말은 어이없어서 안 올리신건가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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