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빠져나간다. 물이 들어온다. 가끔 먹을 것이 쏟아진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세상 속, 어딜 가도 둥근 길, 둥근 길, 그리고 둥근 길.
어느 실장석이 아는 세계는 그것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살아온 실장석은 낳아 준 마마의 얼굴도 모른다. 옷과 머리카락이 썩어 씻겨내려간 자신의 흉한 몰골도, 빛이 존재하는 세상이 어떤 색으로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저 살기 위해 살았다. 하루 종일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을 삼키고 게워냈다. 하루 종일 차가운 통로 속을 기어다니며, 먹을 것 같은 냄새가 난다면 무엇이든 삼킨다. 추우면 웅크리고, 졸리면 잠들고, 배고프면 먹었다. 그리고 배에 새끼가 들어차면, 낳았다. 그 뿐이었다.
쉽게 번식하는 생물이라고 했던가, 꽃 한송이 없이도 실장은 종종 새끼를 깠다. 오늘도 실장은 길게 누운 채 불편한 자세로 자를 낳는다. 영양이 충분할 리 없는 환경, 뱃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겨우 두어 마리 뿐이다. 자들의 울음소리에 실장은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부주의하게 바닥을 헤집던 손이 자를 뭉개버리자 비명과 함께 파킨 소리가 울린다. 실장의 눈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피눈물이 흐른다. 손길이 조심스러워진다. 눈먼 손은, 다행히 늦기 전에 나머지 자 하나를 찾아낸다.
정성껏 햝자 부실한 팔다리가 돋았다. 엄지였다. 점막을 떨쳐내자마자, 엄지는 배고프다고 울부짖는다. 실장은 젖을 물렸다. 그러나 부실한 몸뚱아리에서 나오는 것은 겨우 한 두 방울이 전부다. 엄지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사지를 휘두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냄새나는 곳은 필요 없다고, 먹을 것을 내놓으라 말하며. 그러나, 실장은 화내는 대신 자를 꼭 안아준다.
처음 낳았을 땐 화를 냈었다. 감히 어미를 욕하고 해치려 드는 자를 분노 속에 솎아버리고 나서야 실장은 깨달았다. 죽으면 대화할 수 없었다. 차갑고 비좁은 공간 속에, 체온을 나눌 상대 없이 또다시 홀로 남겨져야 했다. 어둠과 외로움은 실장에게 인내심을 가르쳤다. 실장은 절대 처음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고독을 달래고 싶어서였을까, 그저 본능 때문이었을까. 친실장은 엄지에게 말을 건다. 발버둥치고 물어뜯는 엄지를 꼭 안고, 본능적으로 자에게 아는 것을 가르친다. 살기 위해선, 통로를 열심히 돌아다녀야 된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니 수평으로만 다녀야 한다.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통로 중 따뜻한 곳은, 종종 아무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니 그곳에서 잠들어선 안된다…
자그마한 머리를 분노로 가득 채운 엄지는, 친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엄지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하나 뿐이다. 이 곳을 빠져나가, 더 세레브한 세상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말에 엄지는 귀를 쫑긋거린다.
엄지는 보이지 않는 어미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을러댄다. 친실장은 엄지를 머리위에 올린 채 한참을 기어갔다. 그곳엔, 친실장이 나갈 수 없을 만큼 비좁은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곳 너머에서, 무언가 눈에 비치며 일렁였다. 태어난 이래 처음 목격한 시각적 정보, 빛.
엄지는 본능적으로 그것에 이끌린다.
엄지는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친실장은 다시금 어둠 속에서 기어나온 고독이 몸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친실장은 엄지를 붙잡지 않는다.
친실장은 전해준다. 차가운 세상 속,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 자신의 희망을.
[가는데스. 낙원에만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스.
그리고 부디…
엄지가 목격한 것은, 하수관을 비추는 빛이였다.
점점 선명해지는 빛, 엄지는 무언가에 씌인 듯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
마침내, 마침내 빛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진 순간… 엄지는 깨달았다. 발 밑에 허공이 있음을.
엄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차디차고 단단한 감촉. 이곳은 아직도 통로 안이란 말인가?
엄지는 어렴풋이 어미의 말을 떠올린다. 내려가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다. 뭉개진 다리를 안고 울부짖던 엄지는 절망에 몸을 떤다. 목놓아 마마에게 도와달라 외쳤지만 마마는 나타나지 않는다. 외롭고 무섭고 아팠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위석이 장렬히 박살나려던 그 순간…
길게 빼문 혓바닥에 느껴지는 강렬한 감각.
바닥에 무언가 말라붙어 있었다. 우연히 바닥에 닿은 혀를 타고 오른 맛. 그것에 엄지는 이성을 잃었다. 엄지는 미친듯이 바닥을 햝았다. 달다. 짜다. 매콤하다. 입안에서 온갖 감각이 춤을 추었다.엄지는 감격했다. 지독한 냄새가 나던 어미의 체액 따위보다 훨씬 맛있었다.
말라붙은 음식을 먹던 엄지는 무언가 깨달았다.
마마와 함께 있던 곳은 축축했다. 이곳은 축축하지 않았다. 이곳은 마마가 말한 낙원이 분명했다.
지고의 쾌감 속에 피눈물을 흘리며 엄지는 그것을 햝아먹는다. 어미가 남긴 마지막 말을 비웃으며.
[아마아마한레치! 모르고 살 뻔한 레치!
무능한 똥마마따윈 평생 그곳에 머무는레치! 낙원에는 와타시만이 살 것인레치잇!]
그 순간, 빛이 있었다.
정신없이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엄지는, 머리 위에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탈분했다. 엄지는 넋을 잃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희미했던 그것은, 사실 밝게 빛나는 것이었다.
더없이, 비할 데 없이 찬란한 색으로…
엄마! 어떡해!
왜, 왜?
아, 씨! 싱크대 밑에 또 실장석 있어!
어디?
아 여기, 냄비 바닥에!
어우, 세상에, 냄비 이거 냄새 배서 어쩌면 좋아? 대체 어디서 이렇게 나오는거야?
아 엄마, 맨 꼭대기층에서 실장석 키운다는데 하수도에 막 버리는거 아니야?
누나, 개소리 하지마. 걘 중성화수술해서 똥 밖에 안나와.
넌 누나한테 개소리가 뭐야, 요놈 시끼!
엄마, 근데 이건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하니, 변기에다 갖다 버려!
엄지는 아름다움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렀다.
어둠 속에서 났던 엄지의 망막은 격하게 쏟아진 빛을 견디지 못했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엄지는 충격속에 비명을 지른다. 무슨 일이냐고, 무슨 짓이냐고 울부짖었지만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순간, 무언가 거대한 힘이 자신을 잡아챘다. 공포에 이성을 잃은 엄지는 변을 흩뿌리며 자신을 둘러싼 무언가를 차고 물어뜯었다.
그것은 말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마마와는 달랐지만, 어쩐지 안심되는 감각. 흥분해서 난동을 부리던 엄지는, 천천히 그것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파고들며 엄지는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생각했다.
바깥은 힘들었다. 외로웠다. 빛을 보여주고 도로 빼앗아갔다. 어째서.
마마가 무엇이라고 했더라. 낙원에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했었지.
왠지 마마가 보고싶었다. 엄지는 따뜻하게 안아주던 마마를 생각했다.
그러나 엄지는 마마를 본 적이 없었다.
머리속에 어미의 얼굴을 그릴 수 없음을 엄지가 깨달은 순간,
엄지는 내던져졌다.
잡아주던 힘이 사라졌다. 포근한 온기가 사라졌다. 공기의 마찰이 느껴졌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겪었던, 무시무시한 추락의 감각.
허공에 내던져진 엄지는, 눈을 덮은 암흑 속에서 이길 수 없는 절망을 보았다.
이윽고 차갑고 축축한 것이 온 몸을 휘감았다. 질식해 버둥거리다 엄지는 잠들었다.
살아남은들 다시 빛을 보지 못할것이다.
백열등 불빛, 덜 닦인 냄비와 말라붙은 라면 스프. 그리고 변기물.
엄지의 생에 밝고 따뜻한 세상은 그렇게 끝났다.
.
…부디, 마마도 낙원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데스.]
차가운 벽, 물이 빠져나간다. 물이 들어온다. 가끔 먹을 것이 쏟아진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세상 속, 어느 실장석이 아는 세계는 그것 뿐이었다.
엄지를 떠나 보낸 실장은 울고 있었다. 말라붙은 눈물샘에서 눈물 대신 혈액을 짜내며. 외롭고 추웠다. 그러나 꾹 참고 엄지를 보냈다.
어째서 보냈을까? 이렇게 또 다시 외롭고 추운데? 불쌍히 여기는 이도, 왜 그랬느냐고 묻는 이도 없다. 실장은 스스로를 동정하며 묻고 답한다. 고독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이곳에서 고독해야 될 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전망.
색 바래진 눈에서 공포에 질린 피눈물이 터져나온다. 통로에는 단 하나의 규칙이 있었다. 내려가면, 올라올 수 없다. 언제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실장은, 절대로 물기 낀 통로를 거슬러 올라갈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그저 물에 쓸려내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뿐.
예전엔 동료들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나마 서로 이야기 나누고, 만지고, 의지할 수 있었던 친구들. 그러나 그들은 자신처럼 몸이 커지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어떤 친구들은 힘이 없다고 말하곤 물살에 떠내려가 사라졌다. 또 어떤 친구들은 자신은 먹는게 아니라고 비명지르다 조용해졌다. 자신이 아직까지 저 너머 깊은 곳으로 떠내려가지 않은 것은 그저 우연이리라.
그리고 누군가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사라졌다. ‘이젠 질린테치.’ 라면서. 밑으로, 그저 밑으로.
자신도 그랬다. 떨어지다 보면, 어쩌면 끝이 있을까.
그렇게 내려오다 빛을, 그리고 빛이 나오는 통로를 발견했을 땐,
그것을 본 순간 실장은 깨달았다. '바깥'의 존재를.
희망을 주는 한 줄기 광채. 그 너머로 가려던 실장은 이내 알아차렸다. 자신은 그곳을 지날 수 없을만큼 커져버렸음을.
더없는 절망 속에, 실장은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더 내려가다보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돌아선 순간, 또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음을.
어둠에 익숙해져 다 멀어버린 눈,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것조차 처음으로 안 그 눈. 그 안에 담겼던 그 희미한 빛줄기가, 내려갈 용기마저 빼앗아 갔음을.
'내려가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데, 빛이 이곳밖에 없다면 어떻게 되지?
밖으로 통하는 통로가 이곳 뿐이라면?'
그러나 얼마나 걸릴까. 더이상 빛에서 가망을 느끼지 못하게 되기까지. 삶의 의지를 잃은 동료들처럼, 예전의 자신처럼 되기까지. 저 너머, 아래로, 그저 아래로, 이 고통스러운 삶에 끝이 있길 바라며 계속 내려가기로 할 때까지...
어둠만큼 짙은 절망 속에서 친실장은 메아리치는 비명을 질렀다. 닳을대로 닳아버린 위석이 점점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데쟈아! 지이잇! 데에에! 나가는데스! 나가고싶은데스!
차라리 죽여주는데스! 차라리 죽여주는…]
그러나 그 때였다.
[…뎃데로게. 뎃? 뎃데로게?]
어느 수채구멍에서부터 쏟아진 것일까. 눈 먼 실장은 알 길이 없다. 더 이상 제대로 냄새를 맡지도 못하는 실장은, 눈에 묻은 그것이 지독한 운치인 줄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새 노래는 흘러나오고 있었다. 몸부림치던 실장은 배를 감싸쥐었다. 위석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었다.
이 밖에는, 차가운 길 밖에는 따뜻한 빛이 있는데스.
위에는 없었던데스. 이 곳에만 있었던데스. 힘들게 내려온, 이 곳에만 있었던데스.
그러니 그 빛 너머는, 반드시 낙원인데스. 차가움은 없고 따뜻함만 있는 낙원이 우리를 기다리는데스.
자들은 나가는데스. 그리고 부디 마마를 찾는데스.
나를 여기서 꺼내주는데스.
눈먼 실장석은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
그리고 이내 기운이 다해, 비좁은 도관에 머리를 기댄 채 다시 잠에 든다.
희미한 볕이 드는 출구 밖을 꿈꾸며.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반드시 이곳보단 행복할 낙원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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