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매섭게 부는 12월의 밤
캄캄한 밤하늘에선 어느새 하얀 눈송이가 나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겨울의 첫눈입니다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리는 눈송이가 밤하늘을 수놓은 모습은 제법 낭만적인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친 들판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에겐 그런 낭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소복소복 싸여가는 눈은 야생동물들에게 고난의 계절이 시작됨을 알리는 경종과도 같은 것입니다.
도시의 골칫덩어리 들실장들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같은 시각 가까운 어느 공원
"데에에에..."
잠결에 화장실로 향하던 들실장,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걸음이 멈추어 섭니다.
들실장은 자신의 납작한 콧잔등 위에 떨어진 하얀 것을 벙어리 손으로 훔쳐 슬쩍 맛을 봅니다.
도시의 콤콤한 먼지냄새가 섞인 차가운 물기가 혀끝에 맴돕니다.
"결국 올 것이 온 데스야..."
그제서야 들실장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밤하늘에서는 굵은 함박눈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며칠전 이 들실장이 물그릇으로 쓰는 통조림 캔 속 물 위로 살얼음이 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들실장은 제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막상 눈이 쏟아지는 것을 보자 가슴 한 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뎃데로게 뎃데로게~ 세레브한 와타시타치를 위해 가을씨는 오래오래오래 가는데스우~
겨울씨는 다메다메, 멀리멀리 가버리는데스우~
이 순간에도 들실장의 위석 속 행복회로는 달콤한 헛소리와 함께 생생한 가을 들판의 환각을 보여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휘이이이잉~
데극, 데에에엣츄웃!
하지만 곧 휘몰아치는 눈발 섞인 찬바람이 들실장의 망상을 날려버립니다.
들실장은 크게 재채기를 하며 몸을 크게 부르르 떱니다.
행복회로 속 망상과는 달리 겨울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모든 들실장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그 시련의 계절이 말입니다.
이 들실장은 지금까지 3번이나 겨울을 넘긴, 들실장 치고는 매우 노련한 축에 속하는 개체입니다.
말라붙은 논바닥처럼 갈라진 눈가의 주름, 군데군데 보이는 희끗희끗한 새치와 닳고 닳아 맨들맨들해진 암녹색 실장복이 녀석의 짧지만 짧지 않은 이력을 보여줍니다.
야생에서 들실장의 목숨은 파리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천적과 동족의 습격, 인간들의 구제 그리고 다른 불운한 죽음의 위기까지
숱한 위기 끝에 겨울을 넘기고 살아남아 다음 해 봄을 맞이하는 개체는 극소수입니다.
이 녀석은 그야말로 실장석 답지 않게 '행운'이 따라다니는 개체라 할만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운이 이번 겨울 역시 무사히 넘기리라 보장해주진 않습니다
빈약한 신체 능력과 아둔한 지능, 부족한 주의력으로 먹이사슬 피라미드 최하층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이 들실장들입니다.
겨울을 넘기기 위해서는 빈약한 능력들을 짜내고 또 짜내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렇게까지 해도 월동의 성공률은 극히 희박한 것입니다.
이 노(老)실장의 작은 머릿속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고 있는 것일까요?
잠시 동안 눈발이 날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노실장은 이내 어기적어기적 제 둥지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한가롭게 있을 때가 아닌데스, 겨울씨가... 온데스우."
들실장의 월동이 지금 막 시작되었습니다.
노실장의 둥지는 비닐과 낙엽에 덮여 감춰진 골판지 상자 아래로 완만하게 굴을 파 내려간 구조입니다.
굴 바닥에는 보온을 위해 깔아둔 낙엽과 신문지, 각종 비닐 조각 등이 수북하게 쌓여있습니다.
실장석에게는 개구리, 뱀 등 일부 변온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동면능력이 없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가사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만 들에서 그렇게 되었다간 바로 천적들이나 동족의 먹잇감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운 좋게 천적들의 눈을 피한다고 할지라도 외부의 구호 조치가 없다면 그대로 완전히 탈진해 위석이 자괴되어 죽게 됩니다.
대부분의 들실장들은 한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영원히 싸늘하게 식어버립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체온을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먹고 또 먹어가며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겨울을 넘길 줄 아는 현명하고 노련한 개체들을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들실장의 월동 방법은 간단합니다.
추워지기 전까지 땅딸막한 몸을 최대한 살찌운 뒤 겨울이 시작되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둥지 속에 틀어박혀 비축해둔 먹이를 갉아 먹으며 봄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전부입니다.
좁은 둥지 속에 몸을 욱여넣은 채로 먹이를 깨작깨작 갉아먹으며 버티는 그 모습은 '월동'이라기 보다는 동장군에 맞서는 '농성'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지만 이 정도의 계획을 짜는 것도 들실장들의 머리로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들실장들이 당장 눈앞에 먹을 것이 풍족한 가을에 도취하여 식욕이 동하는 데로 먹이를 먹어치우는데 급급한 나머지 먹이를 비축하는 것을 게을리하기 일쑤 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대책 없이 많은 수의 새끼까지 낳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들실장들은 최후는 하나같이 일가실각으로 끝납니다, 개중에는 최후의 발악으로 인간들에게 뒤늦은 탁아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대규모 구제조치를 자초하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데스우, 뎃스우..."
느릿느릿 한참을 기어 제 둥지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한 노실장은 수북하게 쌓여있는 낙엽 더미를 이리저리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곧 낙엽 더미 속에 감춰져였던, 노실장이 가을 내내 비축한 먹이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싹 마른 잡목 열매들과 도토리, 솔방울, 곤충 사체와 우화되다 만 번데기, 들쥐의 사체 따위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 몇 개가 눈에 띄는군요.
"레... 레에.... 레...."
"치이이...."
그리고 나뭇가지에 배가 활짝 열린 채로 꿰어져 첩첩이 쌓여있는 벌거숭이 저실장, 엄지실장, 자실장들이 보입니다.
이렇게 내장을 발라내 건조한 동족의 고기는 들실장들의 주된 월동 보존식입니다.
보존식은 주로 납치하거나 직접 출산해 조달하기 쉬운 다 자라지 않은 실장석들로 만들어집니다.
위석만 남겨두면 장기보존이 쉽고 먹었을 때 소화 효율도 높아 들실장들이 으뜸으로 여기는 보존식입니다.
몇 마리는 저런 몰골이 되고도 아직 의식이 붙어있는 모양입니다.
노실장의 얼굴을 보자 눈물샘에 남아있던 피눈물을 짜내며 나지막이 소리 내 울고 있군요.
"레에... 레에에에..."
"테에에..."
"치에에..."
보존식들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굴 전체에 울려퍼집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기운이 남아있는지 제 몸을 꿰고 있는 나뭇가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꿈틀거립니다
"치에에... ㅁ... 마... 마아..."
그 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자실장 한마리가 눈에 띕니다, 거의 말라버린 목청을 쥐어짜 내며 노실장을 부르는군요.
이 녀석은 바로 노실장이 직접 낳아 둥지를 보수하는데 부려먹다 보존식으로 만들어버린 추자들 중 한 마리입니다.
노실장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추자를 잠시 지긋이 바라보더니
"......"
곧 녀석의 몸을 꿰뚫고 있던 나뭇가지를 뽑아냅니다.
"마, 마마~ 마아~ 마~"
오랜만에 어미의 손길이 닿자 감격한 추자는 더욱 목청을 쥐어짜네 애달픈 목소리로 어미를 부릅니다.
마침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눈은 초승달 눈이 되었고 말라비틀어져 가는 얼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갑니다.
하지만
"데스우우우..."
녀석과 마찬가지로 초승달 눈이 된 노실장의 입에서는 기대와는 전혀 반대되는 말이 나옵니다.
"겨울이니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는데스우, 그러니 오늘 특식은 오마에인데스우. 데프프프픗!"
"치..치에에에엣-!"
노실장의 말에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추자의 처절한 절규와 함께 눈에 남아있던 피눈물이 왈칵 뿜어져나옵니다.
하지만 노실장은 전혀 아랑곳 않고 버둥거리는 추자를 그자리에서 머리통부터 질겅질겅 씹기 시작합니다.
"챱챱챱! 아직 싱싱해서 그런지 육즙이 쥬시한데스웅~ 역시 와타시가 직접 낳은 가을 분충인데스! 지고의 일미인데스우! 챱챱챱챱!"
"찌이...찌이이이..."
파킨-!
노실장의 입질에 머리를 통째로 먹혀버린 추자는 짧게 경련하더니 결국 위석이 깨져버리고 맙니다.
노실장은 추자의 고기가 어지간히 입에 맞는지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자신이 배아파 낳은 고깃덩어리를 꼭꼭 씹어 삼킵니다.
잠시 후
"끄어어어억-! 빵빵데스우!"
앉은 자리에서 추자 한 마리를 남김없이 먹어치운 노실장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거하게 트림을 터트립니다.
꾸르르르륵~
"데뎃?"
그러기가 무섭게 노실장의 뱃속 분대가 바로 소화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자신이 직접 낳은 추자의 고기라 소화가 더 빠른 모양입니다.
노실장은 구르릉거리는 배를 어루만지며 슬금슬금 자리를 옮깁니다.
그리곤 둥지 한구석에 비닐봉지 한 장을 넓게 펼치곤 그 앞에서 속옷을 벗어 던집니다.
"데, 데스으으으우웅~♡"
뿌오오옹~
브리리리리릿-!!
자세를 잡기 무섭게 노실장의 총구가 벌어지고 실장석 특유의 비음 섞인 교성과 함께 비닐봉지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운치가 촤르륵 쏟아져내립니다.
실장석의 배설은 중요한 생리작용임과 동시에 총구의 성감대를 만족시켜주는 탁월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겨울에는 그 중요성이 한층 더 배가 됩니다.
"데스우우..."
노실장은 방금 전 자신이 쏟아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운치더미를 잠시 바라봅니다.
그리곤 행여 누가 볼세라 두리번거리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굴 속을 이러저리 살피더니
"데챱데챱데챱데챱!"
곧 벙어리손으로 자신이 방금 전 싼 운치를 세모입에 열심히 퍼넣기 시작합니다.
"데챱데챱데챱! 데헥,데흑!! 떫은 데스우! 쓴 데스우! 구린데샤아아앗-!! 왜! 왜 세레브한 와타시가 이런꼴을... 오로롱~ 오로롱~ 데챱데챱데챱!"
운치를 먹는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서러운 모양인지 노실장은 적녹색 눈물까지 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은 부지런히 운치를 입에 퍼 넣고 있습니다.
식분 행위, 청결과 담을 쌓고 사는 들실장들 조차 극도로 꺼리는 행위입니다.
실장석의 본능상 식분을 한다는 것은 곧 노예로의 추락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울 생존에 이런 알량한 자존심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거북하기 짝이 없지만, 식분은 월동에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죠.
소화 효율이 낮은 내장 구조를 가진 실장석의 배설물에는 상당량의 영양소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수분 함량도 매우 높습니다.
식분을 통해 영양소를 최대한 섭취하고 잃었던 수분을 보충하는 것은 긴 겨울을 버티는데 매우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물론 노실장의 식분이 이런 구체적인 사고를 통해 얻은 결과물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저 위석 속 본능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중 우연히 얻은 경험이 어우러진 결과물일 것입니다.
이렇게 먹고 싸고 싼 것을 다시 먹고
다시 먹고 싸고 싼 것을 다시 먹는...
둥지 속에 틀어박혀 봄이 올 때까지 이 거북한 행위를 우직하게 반복하는 것, 그것이 이 노실장이 3번의 겨울을 넘길 수 있게 만들어 준 생존 전략입니다.
이런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은 오직 생존과 번식을 향한 열망 그리고 위석 속 행복회로가 보여주는 환상들 뿐입니다.
행복회로 속, 노실장은 따뜻한 햇볕 아래 콘페이토가 산처럼 쌓인 넓은 들판에서 자신을 닮은 자들과 함께 세상을 녹색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망상이 절정에 달했는지 노실장은 입을 헤 벌린 채 눈은 완전한 초승달 모양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운치 범벅이 된 손으로 귀뚜라미 시체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루지 못할 행복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저 좁디 좁은 굴속에서 자신의 똥을 퍼먹고 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이 모습이야말로 가장 실장석 다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삼 개월여의 시간이 더 흘렀습니다.
부쩍 따뜻해진 햇볕에 쌓여있던 눈이 녹아내리고 봄의 기운이 완연해진 3월의 이른 아침
"데에에에..."
겨우내 인기 척이 없던 골판지 상자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나옵니다.
월동을 위해 둥지 속에 틀어박혀 있던 노실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행운의 여신은 올해도 노실장을 버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기껏해야 2M 깊이도 채 되지 않는 굴속에서 시베리아 동장군이 몰고 오는 엄동설한의 추위를 견디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핼쑥해진 볼과 움푹 들어간 두 눈덩이, 동상으로 여기저기 터진 살과 입가에 덕지덕지 말라붙어있는 운치 찌꺼기
부쩍 초췌해진 몰골은 노실장의 이번 월동이 얼마나 혹독했었는지를 짐작게 해줍니다
추위는 물러갔지만 노실장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탈진 직전입니다.
지금 당장 영양 보충이 절실합니다.
이 시기 공원에는 먹을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실장은 경험을 통해 어디로 가야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노실장은 둥지에서 대못을 챙깁니다 그리곤 무언가를 찾아 연신 두리번거리며 인기척 없는 공원을 터벅터벅 가로질러 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실장이 도착한 곳은 공원 화단의 잔디밭입니다.
"킁킁킁킁.. 데슨?데슨! 킁킁킁킁!"
잔디밭에 도착한 노실장
들창코를 잔디밭에 푹 박은 채 쉴새없이 킁킁 거리며 무언가의 냄새를 좇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데뎃! 겟츄! 겟츄데스우!!"
한참 동안 코를 박고 있던 노실장이 반색하며 다급하게 대못으로 무언가를 땅에서 캐냅니다.
노실장 땅에서 캐낸 것은 바로 겨울 동안 흙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던 냉이 나물의 뿌리였습니다.
냉이를 캐낸 노실장의 적녹 두 눈엔 마치 보물선을 찾아낸 선원처럼 물기가 어립니다.
노실장은 냉이에 붙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는 냉이를 통째로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기 시작합니다.
곧 젖은 흙내음과 함께 쌉싸름하고 향긋한 냉이의 향이 노실장의 입안에서 맴돌기 시작합니다.
"우마우마한데스우! 우마우마한데스우!!"
지난 석달간 보존식와 운치로 밑도 끝도없이 내려가있는 노실장의 입맛에 생생한 냉이의 맛과 향은 실로 감미로운, 봄의 맛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힘겹게 겨울을 넘기고 살아남은 자만이 맛볼수 있는, 노실장이 찾은 작은 행복의 맛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FIN
해병-참피 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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