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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피스톤 관찰일지 1~2

 

내 이름은 도시악귀, 생물학 교수 쥬디 호수의 운치노예인 대학원생이다. 달콤한 콘페이토를 줄 것 같이 푸근한 인상이었던 교수님의 감언이설에 속아 운치굴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똥분충인 것이다. 덕분에 이렇게 교수님의 연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참피스톤 국립공원까지 들어와서 열심히 산을 타고 있다.

명색이 국립공원인데다 참피스톤엔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괴상한 희귀생물들이 잔뜩 살고 있기 때문에 출입 허가는 쉽게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내게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쥬디 호수 교수님은 참피스톤 국립공원의 설립에 직접 자문을 맡으셨을 정도로  실장학의 권위자였고 그 노예인 내게도 출입 허가는 쉽게 떨어졌다. 젠장!

밀렵 도구는 소지하고 있지 않은지 간단한 소지품 검사와 호신용 총(국립공원엔 악어와 곰,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괴물까지 살고 있으니 총은 필수다)의 등록까지 마친 뒤 나는 드디어 국립공원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실장석의 위석을 이용해 안티 카오스 에너지를 뿜어내는 방벽 기둥들 사이를 지나자 곧 사방에서 들려오는 실징석들의 울음소리.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느긋하게 강을 따라 가기로 결정했다. 강둑을 따라 자란 오래된 수령의 나무뿌리 밑엔 실장석들이 굴을 파고 살고 있을 것이다. 첫날부터 힘을 뺄 필요는 없겠지. 발견하고 관찰하기 쉬운 놈들부터 찾아가보기로 하자.


<데슷? 데스데스...>

<테프프, 마마가 바보같이 코를 벌름거리는 테치>

그 말에 눈을 부릅 뜬 친실장은 곧바로 자신을 비웃은 자실장의 머리를 가격한다.

<테벳!>

<깝치지 마는 데스 차녀! 마마를 비웃는 놈은 분충인 데스!>

테에엥 우는 차녀를 장녀에게 맡기고 친실장은 다시 한 번 코를 벌름거린다.

<희미하지만, 분명 닝겐상의 냄새인데스...>


도시악귀는 곧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깊이의 작은 개천이 흐르는 옆으로 빽빽하개 자라있는 덤불 사이사이 큼직한 나무가 자라 있었다. 척 봐도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개천의 침식작용으로 뿌리가 꽤나 드러나 있었지만 그 뿌리는 강변의 바위와 흙을 꽉 잡아 수십 번 반복되었을 물난리와 세월의 공격 속에서도 이 노령의 전사를 지탱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낌없이 나눠주는 나무라 했던가, 나무는 그런 자신의 자랑스러운 뿌리 사이로 실장석들이 굴을 파고 살림을 차린 것까지 묵묵이 용인해주고 있었다.

야생의 실장석들에겐 집으로 쓸 골판지 상자도, 굴을 팔 플라스틱 숟가락도 없으므로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이 훨씬 고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생실장들은 버려진 굴을 찾거나 바위 밑에 야트막한 굴을 파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오래 된 나무뿌리 밑도 훌륭한 집이 되주었다. 도시악귀가 찾아낸 실장석 일가도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무뿌리가 파고들어 헤집어놓은 땅은 실장석의 빈약한 나무막대로도 쉽게 파헤칠 수 있었다. 물론 대책없이 나무 밑을 파해쳐버리면 나무가 쓰러져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가는 뿌리를 지지대로 삼고 모든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굴 통로의 방향을 정한 것이 틀림없다.

도시악귀는 사진을 몇 장 찍고 관찰내용을 일지에 쓱쓱 써놓다가 문득 실장 일가의 집 앞 개울로 눈이 갔다. 절대 자연적으로 생길리 없는 구조물이 물가 가장자리에 만들어져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싸리빗자루처럼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기둥이 O자 형태로 촘촘히 박혀있었다. 도시악귀는 그것의 용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 살 때는 자기도 저런 것을 여럿 만들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건...

<닝겐상?>

도시악귀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평균적인 성체실장 크기의 실장석 하나가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야생실장답게 꼬질꼬질했지만 알굴과 손발은 묘하게 깨끗한 녀석이었다. 도시악귀는 실장석 잎에서 못난 모습을 보인 것 같이 괜히 요란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뭐냐?"

<닝겐상이 와타시의 집을 보고 있는 걸 발견한 데스. 혹시 와타시의 일가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데스?>

처음의 놀람이 가셨지만 이번엔 또다른 놀라움이 도시악귀를 강타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와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여기는 참피스톤 국립공원, 인간의 발걸음이 끊어진지 몇 년은 된 완전한 야생이다. 공원에 처음 들어오면서 도시악귀는 인간과의 의사소통 방식을 까먹고 완전히 야생짐승처럼 바뀐 실장석을 본다 한들 놀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실장석은 어디 인간의 왕래가 잦은 공원의 들실장석처럼 자연스럽게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실장석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갓도 우습지만 실장석의 말은 매우 '점잖았다'. 보통의 실장석이라면 당장 몰카충 똥닌겐, 와타시의 세레브 하우스에 대한 도촬을 그만두는 데스 따위의 말이 튀어나와도 어색하지 않겠지만, 이 실장석은 건조하다시피한 어투로 자신의 의문만 점잖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시악귀는 그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뭇하면서도 또한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실장석의 의문에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난 실장석 연구를 위해 숲에 들어온 연구원 도시악귀다. 너희 실장석들이 국립공원 안에서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관찰하고 기록하는 게 내 일이거든. 너희 일가가 마침 눈에 띄여서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스...닝겐상을 보는 건 엄청 오랜만이라 물어본 것인 데스. 그렇다면 닝겐상, 궁금한 건 없는 데스? 와타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답해 줄 수 있는 데스>

이게 지금 야생실장석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인가, 도시악귀는 순수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관찰의 대가로 뭘 약속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녀석은 순순히 인간인 도시악귀를 돕겠다고 자청하는 것이 아닌가. 뭐지 이건? 이것도 국립공원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나타난 새로운 아종인가? 거의 아종으로 구분해도 될 법한, 평범한 실장석과 동떨어진 행보를 보이는 야생실장을 보며 도시악귀는 자기도 모르게 개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개울에 울타리 처놓은 것, 네가 해놓은 건가?"

<그런 데스. 와타시가 구더기를 기르는 축사인 데스>

"구더기라고? 물속에서 구더기를 기른다고?"

<그런 데스. 원하신다면 보여드리는 데스>

그러고는 척척 앞장 서서 걸어가는 실장석. 도시악귀도 귀신에 홀린 듯 그 뒤를 따라갔다. 물 속에 들어가기 전 실장석은 잠깐 자신의 집 뒷편에 마련된 운치굴로 향하더니 곧 넓적한 잎사귀에 운치를 담아가지고 나왔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고 개울에 세워둔 울타리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도시악귀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개울에 들어갔다. 시원한 물이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기분을 즐기면서 도시악귀는 실장석이 세워놓은 그 구조물 안을 들여다 보았다. 과연 실장석의 말처럼 구더기 열댓 마리가 울타리 안에서 바쁘게 헤엄치고 있었다.

<레훗, 레훗!>

놀란 도시악귀가 자세히 들여다 보자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놀랐는지 구더기들은 수면 아래로 후다닥 내려가버렸다. 하지만 도시악귀는 녀석들이 평범한 구더기가 아님을 일 수 있었다. 비늘처럼 몸에 딱 붙은 포대기, 지느러미처럼 납작하고 넓적하게 바뀐 꼬리, 퇴화한 돌기...실장석 구더기가 아니라 마치 올챙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닝겐상, 잠깐 실례하는 데스>

그 말에 도시악귀가 잠깐 뒤로 물러서자 실장석은 곧장 자신이 들고온 운치를 울타리 안에 쏟아부었다.

<밥시간 레후! 맛나맛나 레후!>

일제히 운치에 몰려드는 올챙이...아니 구더기들. 도시악귀는 옛날 어항에 키우던 구피가 떠올랐다.

"이런 구더기들은 어디서 찾은 거지? 네가 낳은 거냐?"

<아닌 데스. 이 구더기들은 따로 물 속에서 살게 적응한 자들인 데스. 이런 울타리를 설치해 운치를 뿌리면 구더기들이 몰려드는 데스. 그 때 입구를 막고 매일 운치를 줘서 키우는 데스>

확실했다. 이 실장석은 어살과 양식의 개념을 터득해 그것을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것이었다. 양식이야 원래부터 실장석이 운치굴에서 구더기를 키우는 행위로 행해졌다지만 이렇게 개천의 흐르는 물을 이용해 물고기(?)를 꾀어 가두는 방식은 실장석이 쉽게 생각해내지 못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도시악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올챙이 저실장들이었다. 불가사의한 생명체답게 실장석들은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이런 종 분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분명 숲 깊은 곳애 완전히 새롭게 진화한 실장석도 있을 지 모른다. 도시악귀는 자기도 머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질문은 하나씩.

"넌 대체 이런 지식을 어떻게 얻은 것이지?"

<...와타시는 원래 사육실장이었던 데스. 옛 주인상은 매일 와타시에게 테레비를 보여준 데스. 그엇을 모며 이런저런 지식을 습득해 아직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데스>

이건 정말 놀랄 노 자였다. 원 사육실장이, 이 험악한 대자연의 한가운데에서, 몇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이다. 국립공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엄격해진 사육실장 규제와 기타 너저분한 이유로 사육실장에 싫증을 느낀 사육주들은 공원에 실장석들을 버리고 가곤 했다. 물론 버려진 유기실장들은 주인을 찾아 공원을 벗어나려다 안티 카오스 방벽에 걸려 파킨사하거나 노련한 야생실장을 포함한 짐승들에게 순식간에 잡아먹혀 버렸다.  그런데 도시악귀의 눈 앞에 서있는 이 실장석은 그런 위험을 모두 견뎌내고 무려 몇 년씩 이 공원에서, 심지어 꽤나 호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보드카를 다섯 병씩 마시고 3대 500을 치는 120살 노인을 눈앞에서 본다한들 이것보다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도시악귀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어이, 실장석."

<데스?>

"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워 스톰프

 

날이 쌀쌀해지고 거리 바닥에 잔뜩 깔렸던 낙엽도 전부 사라질 무렵이 되면, 월동 준비가 순탄치 않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겨울을 나기 위해 인간에게 빌붙으려는 실장석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다. 꾀죄죄한 자실장 자매들이 줄지어 따라오는 가운데 그나마 자기 눈에 제일 귀여워 보이는 자를 껴안고 눈에 띄는 인간에게 접근하는 친실장들. 인간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곧장 껴안고 있던 자를 들어보이며 뎃데로게~탁아의 노래를 지껄인다. 평범한 사람들은 행여나 들실장들의 오물이라도 묻을까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운나쁘게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일가실각 확정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실장 가족들을 절대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추위에 벌벌 떠는 실장석들을 집으로 데려가 온기와 먹이를 제공해 주는 것을 겨울의  취미로 삼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 실장석이나 덥석덥석 집으로 들일 수는 없으니, 내게 키워줄 것을 요청하며 접근하는 실장석 가족들에게 조건을 하나 거는 편이다. 그것은 바로 겨울 동안 사육실장의 삶을 살게 해주는 대가로 가족 구성원 중 하나를 희생할 수 있겠냐는 것.

"내가 너흴 겨울 동안 키워줄테니, 대신 너희 가족 중 아무나 내가 학대하다 죽이게 해주겠니?"

1. 

[데프픗, 자들은 바로 이럴 때를 위해 키워둔데스! 어이, 똥닝겐! 여기 장녀를 가져가 학대하는데스! 이 못된 년은 고귀한 마마가 매일 먹을 것을 몸소 구해오는데도 양이 부족하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늘 시끄러웠던데스! 이년을 찢어죽이고 고귀한 와타시에겐 스테이크와 스시를 산더미같이 진상하는데샤앗!]

[테챠앗! 똥마마가 결국 와타치를 죽이는테치! 똥닝겐! 게을러터져서 먹이도 제대로 안 구해오더니 기껏 생각해낸 게 탁아인 똥마마를 대신 죽이는테치! 그리고 와타치에겐 이렇게 된 이상 아마아마한 콘페이토를 바치는테치!]

눈 앞에 이득이 조금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득달같이 제 가족마저 팔아먹는 더러운 분충들. 이런 놈들을 집에 들여 겨울 내내 먹이고 재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로 짓밟아 거리의 납작한 오물로 만들어버리자. 하는 김에 댄스파가 되기 위한 텝댄스 연습도 잊지 않았다.

2. 

[데뎃, 말도 안되는데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가족을 희생하겠냐는데스! 닝겐상, 이 대화는 없던 것으로 하는데스! 그만 돌아가보겠는데스.]

[텟, 마마! 안되는테치! 학대파가 집과 월동식량을 다 털어버린 이상 아타치들에게 희망은 없는테치! ...닝겐상! 아타치가 희생하겠는테치! 아타치를....학대하는 대신 아타치의 마마를 잘 보살펴주길 바라는테치!]

[뎃, 안되는데샤앗! 어떤 어미가 자식을 팔아넘겨 이익을 취하는데스! 장녀가 희생해 마마가 그 핏값을 취한들 행복할 것 같냐는데스!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마는데스!]

[마마! 테에엥...]

[오로롱...]

참으로 눈물나는 모녀지간이다. 들실장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어지간한 세레브 실장석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숭고한 가족애.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흘리며 두 모녀 위로 빠르게 발을 놀려 두 실장석을 거리의 납작한 오물로 만들어버렸다. 고통도 추위도 없는 저세상 실장락원에서 행복하렴... 신발에 묻은 잔해를 털어내는 김에 문워크 연습도 빼먹지 않았다. 

3.  

[데엣, 알겠는데스... 닝겐상이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는데스. 여기 막내 구더기를 희생하는데스.]

[테엣, 마마! 구더기는 안되는테치!]

[장녀, 마마도 구더기를 희생하는 것은 슬프지만 원래 들생활에서 구더기는 언제든 희생할 수 있는 비상식량일 뿐인데스. 오히려 구더기 하나로 겨울 내내 닝겐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인데스. 겨울 동안 닝겐의 하우스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비축하면 봄이 왔을 때 다른 이웃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봄을 맞이할 수 있는데스!]

[테치...알겠는테치 마마.]

상당히 영리한 들실장이다. 가족을 아끼면서도 잘라내야 할 때를 잘 알고, 인간의 힘을 잘 알고 두려워하면서도 그 힘을 이용해먹을 계획을 짜낼 수 있다면 가히 들실장 중에서도 탑급의 지성이다. 자실장도 마마의 설명을 듣고 바로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을 볼 때 역시 모전녀전이란 말이 어울린다. 이런 영악한 들실장이 겨울을 버티고 살아남아 봄에 공원으로 돌아간다면 자연의 엄준한 솎아내기로 깨끗해진 공원이 다시 실장석들로 가득 차는 것은 시간문제다. 공동체 사회의 의식 있는 일원으로서 그런 짓을 방조하고 도와줄 순 없다. 얼른 발을 들어 영리한 실장가족을 거리의 납작한 오물로 환원시켜주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해 점점 추워지는 것 같아 실장석이었던 것 위에서 추는 열정적인 코사크 댄스로 추위를 떨쳐내었다.

4. 

[데샷, 닝겐인데샤아! 자들은 모두 마마를 따라 도망치는데수!]

날 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는 것을 볼 때 탁아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외출한 실장석인 것 같다. 게다가 인간의 무서움을 확실히 알고 있는 듯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필사적으로 가족 전체가 도망친다. 하지만...

"사람이 말을 하는데 무시하는 분충은 용서치 않아요!"

예의를 중요시하지 않는 분충들을 모조리 거리의 납작한 오물로 환원시켜주었다. 이런 예의없고 부도덕한 실장석들의 근절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실장석들의 잔해 위에서 고대 악신을 섬기는 광신도의 춤을 따라하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아무래도 올해 겨울에도 키워줄 실장석을 찾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협상의 달인

 

[제발 키워주시는데수우! 이번 겨울만이라도 키워주는데스! 일가가 모두 실각하게 생긴데에엥!]

"귀찮게시리..."

갑자기 튀어나와 넙죽 엎드리곤 사정사정을 하는 실장석 일가. 하도 절박하게 비는 모습에 그냥 짓밟고 지나가는 것도 꺼려진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찬 기운이 엉덩이로 올라오는 것을 느낀 남자는 잠깐 몸을 떨었다. 겨울에 돌입한지도 벌써 한달 가까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게다가 일기예보에 따르면 몇 밤만 지나면 혹독한 시베리아산 한파가 반도를 강타할 예정이다. 그러니 이 실장석도 필사적으로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이겠지. 남자가 벤치에 앉자 친실장의 눈에도 희망의 기운이 돈다. 무시하고 떠나거나 일가를 짓밟아버리지 않고 친실장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일종의 제스쳐. 친실장은 얼른 머리를 굴려 어떻게 해야 자신과 자신의 자들의 불쌍함을 극대화하여 동정을 살 수 있을지 열심히 궁리하기 시작했지만, 친실장이 사연팔이를 시작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친실장."

[뎃, 무슨 일이신데스, 닝겐상?]

"난 너희들이 맨날천날 말하는 분홍색 드레스라던가, 세레브 실장 하우스 같은 건 사 줄 수도 없고 사 줄 생각도 없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납작 엎드려 있던 엄지가 발끈하며 일어서지만, 친실장이 그 낌새를 먼저 눈치채고 얼른 엄지의 대갈통을 쥐어박아 도로 땅에 쓰러트린다. 여기서 남자의 말에 항의해봤자 손해는 오롯이 실장석의 몫. 게다가 겨울을 날 수만 있다면 그딴 사치품은 없어도 된다.

[뎃, 그런 건 필요없는데스! 요구하지도 않는데스! 겨울 동안 거둬주시기만 하면 되는데스!]

"음,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스시나 스테이크 같은 것도 못 주는데 괜찮겠어? 아니, 사람이 먹는 음식은 아예 줄 생각 없어."

그 말에 이번엔 삼녀가 발끈하며 이를 드러낸다. [ 스&스를 못 내주는 똥닝ㄱ...] 친실장은 재빨리 삼녀를 걷어차 저만치 뒤로 굴려보낸다. 일가의 생가가 걸려있는데 저런 눈치없는 분충이 닝겐의 심사를 건드려선 좋을 게 없다. 일단 여기선 무조건 닝겐의 요구조건에 맞춰줘야 힌다.

[데뎃, 상관없는데스! 와타시타치는 실장석데스! 닝겐상의 음식을 넘보지 않는데스! 실장푸드만 줘도 충분한데스! 주시는 것에 항상 감사하며 먹는데스!]

"오, 대단한데. 훌륭한 태도야. 근데 난 2개월 남짓 거둬줄 실장석을 위해 실장푸드를 살 생각은 없어. 요새는 일반 실장푸드는 무조건 대용량으로만 나와서 말이야. 너희들이 두세 달 동안 먹어도 반은 남을텐데 그건 낭비지."

그 말에 명석한 차녀가 나선다.

[닝겐상, 그러면 봄에 와타시타치가 공원으로 나갈 때 남은 푸드도 싸주시면 되는테치! 아니, 푸드를 다 먹을 때까지 쭉 키워주셔도 괜찮은테치!]

"오...갑자기 요구 사항이 늘어나는데? 방금 전까진 겨울 동안만 키워달라는게 요구 아니었나?"

[데데뎃, 아닌데스! 차녀는 닥치는데샤아!]

건방지게 남자에게 추가 요구를 하는 차녀의 모습에 남자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친실장은 황급히 차녀의 입을 다물리면서 뒤로 쫓아보냈다. 겨울의 생존요건은 어디까지나 난방과 영양 수급. 그 중에서도 난방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닝겐의 집에서 보온의 혜택을 받을 수만 있다면 밥이야 음식물쓰레기를 먹든 구더기를 씹어먹든 크게 중요치 않다. 제딴엔 멋진 아이디어를 내놨는데 예상 외로 남자와 친실장 둘 다에게 빠꾸를 먹은 차녀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고개를 숙인다. 남자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친실장은 얼른 외친다.

[데데데뎃, 푸드 안먹는데스! 실장푸드 필요없는데스! 와타시타치의 먹이 수급은 와타시가 알아서 하겠는데스! 집 안에서 키워만 주시는데스!]

"흠, 그 정도면...아니, 아니다. 집 안에선 못 키우겠다. 너희들 냄새가 장난 아니야. 게다가 저 녀석은 빵콘까지 했네."

남자가 가르킨 것은 장녀. 사실 들실장의 기준에선 빵콘한 것도 아니다. 추위에 오래 노출된 탓에 괴로워진 장녀의 신체가 탈분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살짝 팬티만 운치로 적신 정도. 하지만 '안에서 키워질' 실장석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데데데데뎃, 닝겐상 죄송한데스! 와타시가 책임지고  빵콘하지 않도록 교육하겠는데스! 용서하시는데스!]

"아니, 그런 말하는 너도 지금 빵콘했잖아...역시 실내에서는 못 키우겠다. 대신 우리집 마당에서는 키워줄 수 있어. 어쩔래?"

친실장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닝겐의 집만큼은 아니겠지만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 정도면 찬바람도 대부분 막을 수 있고 무엇보다 다른 들실장이나 길고양이 같은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닝겐의 보호' 아래 살 수 있다는 이점은 여전하다. 일가족의 빵콘으로 점수가 왕창 깎인 기분이 드는 친실장으로서는 남자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기 전에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기선 공격수를 둔다. 남자가 꼬치꼬치 따지기 전, 본인이 먼저 제안한다. 훌륭하고 자립적이며 닝겐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고귀하고 당당하고 우아한 들실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데데데데데뎃, 아무 상관없는데스! 마당에서 길러주셔도 와타시는 괜찮은데스! 집을 지어주실 필요도 없는데스! 들에서 살아온 와타시는 골판지로 집을 지을 수 있는데스! 골판지를 주실 필요도 없는데스! 와타시가 쓰레기장에서 알아서 충당하겠는데스! 보온재도 마찬가지인데스! 먹이도 와타시가 알아서 찾는데스! 음식물쓰레기를 일부러 주실 필요도 없는데스! 와타시가 골목골목을 뒤지고 월동 중인 벌레를 찾는데스! 전부 와타시만의 노하우가 있는데스!  운치 냄새가 걱정인 데스야?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만 운치 싸겠는데스! 아니, 닝겐상에게 폐가 되지 않게 매일 공원으로 나와서 공원의 운치굴에 싸겠는데스! 아니아니, 현관문을 열어줘야하나 같은 걱정은 안해도 되는데스! 그럴 줄 알고 와타시타치가 문밖에서 살면 되는 플랜을 준비한데스! 닝겐상은 와타시타치가 있다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할 것인데스! 자 어떤데스야앗!]

숨도 안쉬고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낸 친실장은 숨을 고르며 남자의 눈치를 본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친실장의 파격적인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진듯 남자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역시, 와타시의 공격적인 협상이 닝겐의 마음을 공략한 모양 데스네...하며 친실장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남자가, 어느새 의기양양해 하며 가슴을 쫙 피고 자 어떤데스, 하고 서있는 친실장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그 정도면 굳이 내가 안 키워줘도 되는 거 아냐?"


[뎃?]







참피 vs wild - Divide & Conquer

 

부락을 이끌던 빅마마가 죽었다. 산실장으로선 드물게도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였다. 몇년간 지혜롭게 부락을 이끌던 빅마마답게 부락의 모든 실장석들이 그의 죽음에 슬퍼했다. 죽은 이의 살점을 모두가 나눠먹고 머리뼈를 강물에 띄어보내는 장례식이 끝난 후, 부락은 둘로 갈라졌다. 빅마마의 후계자 후보로 빅마마 생전에도 치열하게 경쟁하던 빅마마의 장녀와 차녀가 그 분열의 선봉이었다.

장녀는 이제 빅마마도 없으니 부락을 숲속 더 깊숙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부락은 인간의 집에 너무 가까워 노출될 위험이 많고 빅마마의 부재를 틈타 부락 외부의 실장석들이 인간을 자극할 위험도 있으니 미리 부락을 옮겨 인간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차녀는 오히려 빅마마의 규제가 없어진 지금 인간과의 접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집에서 얻을 수 있는 음식물은 귀중한 가치가 있고, 외부 실장석들이 인간에게 다가가기 전에 부락이 먼저 좋은 인상을 남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차녀 주장의 핵심이었다. 둘 다 분충스러운 행복회로 없이 어느 정도 합당한 근거에 기반한 주장이었으므로, 부락의 일원들 역시 어느 한 편을 들지 못하고 둘로 갈라졌다. 빅마마의 죽음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부락은 서로의 논리를 반박하고 주장을 내세우는 실장석들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부락이 위치한 산 밑에 사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이 부락에 큰 분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산과 관련없는 일로 먹고사는 남자에게 집 뒷편에 있는 산은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봤을 때 흡족한 풍광을 제공하는 존재일 뿐이었고, 거기에 더해 음식물쓰레기를 짬처리할 곳일 뿐이었다. 어느날 티비를 보다가 알게된 야생동물 먹이터를 모티프삼아 남자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잔반을 뒷산 언저리에 대충 버리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곡물이나 과일 같은 고급스러운 것들은 아니었기에 남자의 먹이터를 찾아오는 것은 들고양이 같은 너저분한 것들 뿐이었지만, 남자는 그것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산에 멧돼지같이 위험한 동물은 없고, 자신의 집 뒷마당은 험상궂은 개 두 마리가 활보하며 지키고 있으니 야생동물의 침입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집주인의 마인드였다.

아무튼 남자의 이런 무책임한 태도에 산실장들이 크게 덕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는 산실장에게 귀중한 염분을 듬뿍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매일 원정대를 남자의 "먹이터"로 보내 챙겨온 잔반을 부락 구성원들에게 고루 분배하는 것이 빅마마의 일과이자 권위였다. 그러니 그 먹이터에서 멀리 떨어지자는 장녀의 주장은 그만큼 파격적인 것이었다. 차녀가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도 이 부분이었다.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의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부락을 옮길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차녀는 한 발 더 나가서 아직 가시화되지도 않은 위험에 인간의 혜택을 포기하려는 장녀는 겁쟁이라고, 부락을 이끌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공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적지 않은 실장석들이 차녀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험난한 산생활에 결연히 맞서야 하는 부락의 지도자에게 겁쟁이라는 오명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빅마마 생전 원정대의 리더였던 차녀에게는 자신이야말로 그 크나큰 위험이라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실장석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용맹함을 얼마든지 뽐낼 수 있었다. 원정대의 실장석들 역시 차녀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매일 인간의 집까지 내려갔다 와야하며 가끔 먹이터에서 마주치는 들고양이 같은 위협에 맞서느라 강인해진 원정대원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빅마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음식을 가지러 원정을 떠나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권위 - 그리고 수집 과정에서 빅마마 몰래 알음알음 빼먹는 잔반의 맛 -은 쉽사리 포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장녀는 염분 섭취는 인간의 음식이 아니더라도 산에서 수집하는 동물성 먹이와 이따금씩 잡아올리는 구덩이 분충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며, 인간의 위험은 가시화된 순간 이미 늦은 것이니 현명한 지도자라면 그런 부락 전멸의 위험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방어했다. 장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늙은 원로실장들의 지지를 끌어내었다. 겁쟁이는 부락의 지도자가 될 수 없지만, 조심성없이 설쳐대는 분충 또한 지도자로서는 낙제감이었다. 구덩이 분충들을 관리하는 실장석들 또한 장녀의 지지세력이었다. 구덩이 관리실장들은 늘상 부락의 관심을 독점하던 원정대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소외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원정대의 존재 자체를 없애고 구덩이의 중요성이 더 높아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니, 관리실장들이 장녀를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차녀가 명백히 우위에 있었다. 부락 구성원의 대다수가 인간은 구경도 못해본 상황에서 인간의 위험성이 쉽사리 체감될 리 없었고, 그에 비해 차녀의 원정대가 가져오는 인간의 음식은 너무나 감미로웠다. 채집조가 잡아오는 벌레 유충 같은 밋밋한 것들로는 채울 수 없는 만족감을 인간의 음식은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인간 음식의 양을 헤아려 구성원들에게 고르게 분배하던 빅마마의 권위가 그대로 차녀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장녀를 내심 지지하는 실장석도 행여나 차녀의 음식 공급이 중단될까봐 공개적으로 장녀를 지지하지는 못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맞서 장녀의 지지세력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가끔 가다 나오는 구덩이에서 키우는 분충들에게서 나오는 부산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구덩이 분충이 고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매일 도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옷이나 신발이 필요한 실장석이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둘 다 역시 인간 음식의 강렬한 마력에는 미치지 못하기에 썩 만족스러운 대항 무기는 아니었다. 세력의 열세를 서로간의 단결로 극복하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장녀의 지지세력은 하나 둘씩 장녀의 거처 근처로 자신의 집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녀는 부락 외곽 분충 구덩이 근처에 집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장녀파는 자연히 그곳에 모여살게 되었다. 그에 맞서기라도 하듯 차녀파는 차녀의 집, 인간의 집으로 내려가는 방향의 입구쪽에 모여살게 되었다. 하나의 부락이 둘로 갈라진 셈이었다.

시작은 차녀의 선공이었다. 인간이 내놓는 잔반의 양이 줄었으니 분배를 순차적으로 하겠다면서, 명백히 장녀파만 쏙 빼놓고 음식을 분배한 것이다. 장녀는 이를 따지기 위해 차녀를 찾았으나, 인간을 그렇게 경계하는 장녀가 어째서 인간의 음식에 그렇게 탐을 내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장녀는 분노했으나 안타깝게도 장녀에게는 차녀를 상대로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다독이기 위해 아직 독라도 되지 않은 구덩이 분충을 잡아 그 고기를 나눴으나,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인간의 음식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쥔 차녀의 지지세력은 굳건했고, 장녀의 지지세력만으로는 이주를 감행할 수 없었다. 장녀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어느날 밤 나무구렁네가 습격을 받았다. 나무구렁네 차녀는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나무구렁네 친실장이 울부짖으며 차녀를 찾는 가운데, 부락의 실장석들은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외부의 습격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나무구렁네가 부락 한복판에 위치한 가족이었던 것이다. 장녀파와 차녀파가 각자 부락 반대편에 끼리끼리 모여살게 된 이후로 오히려 부락의 중심부에 치안의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부락의 중심에 느슨하게 모여 살던, 장녀와 차녀 어느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실장석들의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느닷없이 장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이 자기가 걱정하던 인간의 습격이라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물론 냉정히 생각해볼 때 이제껏 어떤 접촉도 없던 인간이 마을 한복판에 들어와 나무구렁네 차녀만 잡아갔을리가 없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역시 주변을 배회하던 들고양이일 것이다. 하지만 한밤중의 습격으로 뒤숭숭해진 실장석들의 단순한 사고는 장녀의 주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장녀 역시 필사적이었다. 불리한 자신의 입지를 단번에 역전시켜줄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실장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닝겐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학대파인 것인가? 정말 인간이 우리를 죽이러 온 것인가? 해답 없는 의문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곧 공포로 탈바꿈해서 실장석들의 허약한 위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이 마을을 버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난처한 처지에 빠진 것은 차녀였다. 먼 발치에서나마 인간을 보고 겪어온 차녀는 이게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포에 빠져 목소리를 높이는 실장석들을 상대로 차녀 혼자 이것이 인간의 습격이 아니라고 주장해봐야 쉽사리 먹혀들지 않았다. 원로들이라면 이것이 인간의 습격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차녀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지만, 원로들은 장녀의 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원로들이 침묵을 지키며 암묵적으로 장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가운데, 인간의 흉악함을 성토하던 장녀는 마침내 칼끝을 차녀에게로 돌렸다. 인간이 부락의 존재를 알아채고 습격하게 된 것은 전부 겁도 없이 인간의 영역에서 설치던 차녀 때문이라고. 대번에 군중들의 원망 어린, 공포에 질린 눈총이 차녀에게 쏟아졌다. 차녀는 당황을 넘어 공포까지 엿보이는 표정으로 성난 군중들의 시선을 차마 받아내지 못했다. 빅마마만큼의 권위와 연륜이 아직 없는 차녀로서는 버티기 힘든 부담이었다. 차녀가 장녀의 주장에 반박을 못하고 얼어붙어있자 실장석들의 노도와 같은 분노가 차녀를 향해 터져나왔다. 네년이 우리 마을에 재앙을 가져왔다, 죽어서 인간에게 사죄하고 우리를 지켜라 등등. 당장이라도 차녀와 그 지지자들의 팔다리를 찢어놓을 것처럼 살기등등해진 실장석들의 분노섞인 공황을 뒤에서 보며 장녀는 승리의 미소를 살짝 지었다. 혀라도 깨물 것처럼 이빨을 딱딱거리던 차녀의 입에서 선언이 터져나온 것은 그 때였다. 그렇다면 자신과 원정대가 인간의 집으로 가보겠다고. 자기들이 인간과 직접 대면해 인간을 처리하겠다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연설인지 변명인지 헷갈리는 말을 한참 뇌까리던 차녀는 자신의 원정대를 소집했다. 원정대 역시 공황에 빠진 마을 주민들에게 린치를 당하기 일보직전이었던 터라 순순히 차녀를 따라나섰다. 입으로는 인간을 토벌하러 간다고 주절거렸지만, 실상 주민들의 린치를 피해 도망치는 꼴이었다. 장녀나 다른 실장석들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각자 나뭇가지 창을 든 원정대 일단이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사라져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곤란해진 것은 장녀였다. 기실 차녀만 없다면 튼튼하고 싸움 경험이 풍부한 원정대원들은 이주 과정에 꼭 필요한 호위 병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인간을 "토벌"하러 간 것이다. 장녀와 원로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인간을 심판하니 뭐니하는 것은 상분충들이나 할 개소리이고, 현실은 실장석 따위의 도발에 분노한 인간이 차녀 일당을 모조리 도륙한 뒤 부락까지 올라와 나머지 실장석마저 전부 죽여버릴 미래가 예지력을 가진 카오스실장라도 된 것마냥 선명하게 보였다. 장녀는 다급하게 원로들을 소집했다. 차녀가 인간을 기어이 자극하러 떠나버렸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이주 준비를 하라고, 분노한 인간이 부락을 덮치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한다고 장녀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질렀다. 각자 주민들을 독려하고 지도하러 원로들이 떠나자, 장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자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산 속의 어둠을 돌아보았다. 충분한 대비없이 실행될 이주는 장녀의 본래 계획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낳게 되리라.








참피 vs wild -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참들이 구덩이로 떨어져내린다. 그 크기는 각양각색, 며칠만 지나면 성체로 자랄 것 같은 중실장부터 아직 점막도 다 못 벗긴 구더기까지 다양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앞머리가 뜯겨나가고 없다는 것. 그것이 구덩이에 떨어지게 된 놈들의 표식이다. 험난한 삶 속에서 뒷머리는 자주 뜯겨나간다. 나뭇가지에 걸려서, 다람쥐 같은 소동물과의 사투 와중에 뜯겨서,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는 고된 노동 끝에 머리칼이 삭아서 등등. 때문에 이 마을에서 뒷머리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으로 취급받아, 머리카락 없이 돌아다니는 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앞머리는, 안 그래도 짧은데다 땀과 떼를 흡수해 이마에 착 붙은 앞머리는 일부러 뜯어내려고 하지 않는 이상 뜯겨나갈 일이 거의 없다. 때문에 실장석들은 구덩이에 새로운 멤버를 투하하기 이전에 놈의 앞머리를 뜯어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구덩이 분충의 증표이기에.

구덩이로 떨어지게 되는 이유는 다양한다. 마마의 교육도 소용없는 분충이 솎아내기를 당했거나, 마을의 규칙에 따라 제한을 건 숫자 이상으로 자를 낳은 친실장이 초과해서 낳은 자들을 넘기거나, 자신이 배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사고를 쳤거나, 아무튼 마을에 해를 끼치거나 끼칠 위험이 있는 놈들은 대부분 구덩이에 떨어진다. 흙먼지와 운치로 범벅이 된 구덩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떨어진 다음에야 이 분충들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다. 마마의 뱃속에 있을 때 들은 태교의 노래에서부터 들어온 구덩이, 이제 자신이 그 노래 속 분충이 된 것이다.

앞머리를 빼앗기고 구덩이로 던져진 분충들은 크게 두가지 양상을 보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멍을 때리거나, 구덩이 분충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애써 부정하며 발악을 하거나. 어느쪽이든 구덩이 안에서 대기하던 관리실장들의 손을 벗어나진 못한다. 다부진 체격에 이런 일에는 이미 이골이 난 전문가답게 관리실장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신참들의 목에 하나씩 밧줄을 감는다. 밧줄 한쪽 끄트머리부터 한 놈씩 묶어, 마치 굴비를 묶듯 한 밧줄에 여러 마리를 묶어놓으면 관리실장들의 일이 끝난다. 옷을 찢어버린다거나, 머리카락을 뜯어버린다거나하는 일은 없다. 마을의 규칙은 관리실장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구덩이 분충들을 괴롭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구덩이속 불결한 환경에 행여 옷이 상할까봐 벗어놓고 내려온 관리실장과, 앞머리를 제외하면 옷도 머리도 멀쩡한 구덩이 분충들의 모습을 비교하자면 오히려 주종이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구덩이 분충들도 이 사실을 깨닫고 머리카락도 옷도 없는 관리실장을 비웃곤 한다. 더럽고 비루한 구덩이 생활에서 스트레스 해소라곤 눈앞의 독라를 비웃고 욕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웃음의 강도는 강해져 거의 악을 쓰듯 관리실장들에게 욕을 퍼붓곤 하지만 관리실장은 아무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야생에서 목소리가 큰 놈은 언제나 약자다. 울부짖고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써봤자,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숨기려는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관리실장은 이 점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목이 밧줄에 묶여 다른 구덩이 분충들과 행동을 같이하게 된 분충들은, 의외로 불편없는 삶을 살게 된다. 먹이는 운치를 절반씩 섞어주긴 하지만 어쨌든 마을의 실장들이 먹는 음식을 주고, 관리실장들도 분충들이 무엇을 하든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관리실장들이 관여하는 경우는 두 가지, 분충들이 서로 잡아먹으려 들거나 목에 묶인 밧줄에 손을 가져다대는 경우다. 후자의 경우 특히 관리실장들은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 구덩이 분충들은 아예 목 위로 손을 올릴 수조차 없다. 음식도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입으로만 먹어야 하며, 머리가 간지럽다던가하는 이유로 손을 머리에 올리고 싶은 분충들은 흠씬 두들겨 맞을 각오를 먼저 해야 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규칙만 지킨다면 관리실장의 괴롭힘도, 구덩이로 떨어지기 전 감내해야 했던 짜증나는 교육이라던지 노동도 없기 때문에, 구덩이로 떨어진 직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난동을 부리던 분충들도 곧 이 생활에 적응하여 오히려 구덩이 밖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실장석들을 비웃으며 피둥피둥 살을 찌워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을의 실장석들이 바보 멍청이들이라서 분충들을 구덩이에 몰아놓고 호의호식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천상 호구라서 머리도 옷도 빼앗지 않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여 키우는 것도 아니다. 이 실장 마을은 인간과의 접점은 거의 없지만, 인간에게 매우 친숙한 개념은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축이다.

나무구렁네 차녀가 어미를 도와 보존식을 모으다가 산비탈에서 굴렀다. 다행히 큰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그 와중에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험한 산지를 오고가야하는 실장석에게 신발은 매우 귀중한 자산이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목놓아 울부짖는 차녀를 달래며 친실장은 구덩이로 간다. 사정을 들은 관리실장은 곧 차녀의 남은 신발 한 짝을 들고 구덩이로 내려간다. 방금 밥을 먹어치우고 제멋대로 드러누워 빈둥거리는 구덩이 분충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관리실장은 차녀의 신발을 분충들의 신발에 일일히 대본다. 이윽고 사이즈가 맞는 신발을 발견한다. 신발의 주인은 자신의 친실장이 애써 모은 보존식을 몰래 훔쳐먹다 걸려 구덩이로 떨어진 자실장. 구덩이에 떨어질 때만 하더라도 거의 엄지 수준의 작은 분충이었던 녀석은 살만한 구덩이 환경에서 피둥피둥 살을 지워 거의 두 배 가까이 커졌다. 달리 말하자면, 나무구렁네 차녀만큼 커졌다. 관리실장은 곧 녀석의 신발 한 짝을 벗겨낸다. 난데없이 자신의 신발을 빼앗아가는 관리실장의 모습에 깜짝 놀라 분충이 달려들지만, 곧 관리실장의 몽둥이를 맞고 나가떨어진다. 다른 쪽 실발은 남겨놓는다.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구덩이를 올라온 관리실장은 차녀의 원래 신발 한짝과 분충에게서 뺏어온 신발 한짝, 온전한 한 켤레의 신발을 차녀에게 내민다. 울음을 그치고 신발을 조심스럽게 신어본 차녀는 신발이 발에 맞음을 깨닫고는 언제 울었냐는듯 웃는다. 고맙다고 거푸 인사를 하는 차녀와 오늘 주워온 나무열매로 사례를 하는 친실장, 그리고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라며 멋쩍게 웃는 관리실장, 매우 훈훈한 관경이다. 구덩이 밑에서 울부짖는 분충의 모습만 뺀다면.

구덩이로 떨어진 순간부터, 구덩이 분충의 모든 것,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은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귀속된다. 때문에 관리실장이 분충들에게 손을 함부로 대지 않는 것이다. 머리카락도, 신발도, 옷도 모두 쓸모가 있다. 옷과 신발은 나무구렁네 차녀의 경우처럼 옷이나 신발을 잃은 실장석을 위해서, 머리카락은 보온재로 쓰거나 지금 분충의 목에 묶여있는 바로 그 밧줄을 꼬기 위해서.  하지만 구덩이로 떨어트리는 즉시 바로바로 벗겨버리면 적당한 사이즈의 물건을 얻기가 어렵다. 때문에 그것들은 온전하게 분충의 몸에 남겨놓는다. 그것이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분충과 같이 커지도록. 그리고 그때그때 필요한 사이즈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분충에게서 그것을 하나씩 빼앗아간다. 처음엔 신발 한짝, 다음엔 옷, 그 다음엔 머리카락, 또 그 다음엔 좀 더 커진 나머지 신발 한짝, 하나씩 빼앗겨 어느새 독라가 될 때까지. 빼앗겨가는 순서는 구덩이 바깥의 사정에 따라 무작위지만 결말은 언제나 독라의 신세다. 그리고 독라가 되면, 더이상 빼앗을 수 있는 게 없다. 딱 하나, 몸뚱이를 제외하면 말이다. 가진 것을 빼앗긴 끝에 독라가 된 분충이 나오면, 그날은 실장마을의 잔치날이다. 놈을 구덩이 밖으로 끌어내 손질하여 마을의 일원들이 골고루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린 자실장들은 구덩이에서 피둥피둥하게 살찐 분충의 맛있는 고기를 뜯으며 친실장에게 저런 분충은 되지 말라는 설교를 듣게 된다. 물론 지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친실장들의 말을 경청하는 자실장들 중에서도 분명 구덩이로 떨어지는 놈이 나올 것이다. 

구덩이 한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분충들이 또 싸우나 싶어 달려간 관리실장들의 눈에 성체로 자라나 데스데스 울음소리를 내는 분충이 들어온다. 놀랍게도 놈은 머리카락, 옷, 신발 어느 것 하나 빼앗기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필요할 때는 다른 분충이 먼저 잡혀서, 옷이나 신발이 필요할 때는 그 때마다 절묘하게 사이즈가 안 맞아서 용케 아무것도 빼앗기는 일 없이 성체까지 성장한 것이다. 구덩이를 관리하다보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관리실장은 잠깐 서로를 쳐다보다가 곧 성체 분충에게 다가간다. 머리카락과 옷 모두 성하게 성체까지 자랐으니 이제 자신은 구덩이 밖의 세레브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며 짖어대는 분충의 머리통을 관리실장이 단번에 깨부순다. 성체로 자라난 이상, 머리카락도 옷도 신발도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계속 밥을 먹이며 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분충의 소유물은 곧장 벗겨내 마을의 공동 창고로 향하고, 머리통이 부숴진 채 쓰러진 몸뚱이는 또 한 번 마을의 모든 실장석들의 입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구덩이로 내려가는 건 쉽지만, 올라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참피 vs wild - 우지꼬리방울뱀




우지꼬리방울뱀은 저실장처럼 발달한 꼬리 끝의 특수한 비늘을 부딪혀 저실장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서 동족식을 하는 실장석을 유인해 잡아먹는다. 이 얼마나 위대한 대자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