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바 주말농원 1

 


후타바시의 한켠에 위치한 후타바 주말농원.
 오륙년 전인가, 당시의 시장이 친환경농업을 육성하고, 도시와 농가의 자연스러운 연계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시(市)에서 대대적인 예산을 투입해 만들어낸 곳이다. 당시 주변에서 매입한 땅만 육천평이고, 원래 시에서 소유한 국유지와 주인없는 아카기(赤城)산자락 부분은 또 따로 쳤으니 그야말로 왠만한 촌락 몇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 규모의 주말농원이 생긴 것이다.

 개장 당시에는 '가족이 먹을 것은 우리 손으로', '당신도 농촌의 정취를 맛보시지 않으렵니까?' 하는 사회분위기와 맞물려들어 그 넓은 밭이 사람으로 가득 차고, 한발 늦은 가족들은 대기표를 받을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그러나 첫 수확이 끝나자 신청자는 처음의 1/2로 줄어들었고, 두번째 수확이 끝나자 추가 계약자는 다시 또 거기서 1/2로 줄어들었다. 시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대책을 세우려했지만, 미처 입안이 되기도 전에 주말농원은 황폐화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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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관치행정의 실패사례로 인용될만큼 실패한 후타바 주말농원. 이제는 인건비가 아깝다고 몇안되는 경비원마저도 철수시켜버려 농원에 남아있는 것은 턱밑까지 웃자란 잡초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인적이 모두 사라진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 땅 어름에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데에~ 굉장한데스우! 이곳저곳 먹을게 잔뜩인데스!"

 "그것보다 여길보는데스. 물이 흐르는데스. 닌겐들이 파놓은 깊은 강이 이곳저곳으로 흐르는데수."

 "여기 흙은 산의 흙보다 훨씬 부드러운데스. 폭신폭신하고 곱슬곱슬해서 분명 뭐든지 잘 자랄것인뎃승~"

 "데이.. 그것보다도 닌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스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스."

 "데에에에... 하지만 와타시는 조금 불안한데스우... 이렇게 좋은 곳이 아무런 임자도 없다니 어딘지 이상데스..."

 "하지만 와타시타치들이 오랫동안 지켜봤지않은 데스우? 햇님이 열번 떠오르는 동안 닌겐은 물론이고 무서운 괴수도 전혀 나타나지 않은데스."

 "데....... 데에에........"

 "오네챠는 너무 걱정이 많은데스. 이곳은 분명 우리들을 위해 만들어진 낙원데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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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말하길 산실장은 신비의 존재다.
 좋은쪽으로나 나쁜쪽으로나 실장석으로 유명한 후타바시에서조차 산실장은 규격 외의 무언가로 치부되고 있으니, 다른 지방은 말할 것도 없다.
 지방에따라서는 거의 츠치노코와 비슷한 대접을 받기까지 하고, 한쪽에서는 '숲속의 요정'이란 어울리지 않는 이명까지 받을 지경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실장이 눈에 뜨이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간혹 지방방송국에서 산실장을 찾아냈다고 제법 떠들썩하게 호들갑떨기도 하지만, 그런 것의 구할구푼 이상이 들실장 출신으로 산야를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된 놈들이다.

 진짜 산실장. 그러니까 최소한 산에서 삼대(三代) 이상 뿌리내리고 산 산실장은 전문사냥꾼이 아니고서야 흔적조차 잡기 힘들다. 아무리 멍청한 실장석이라고해도 삼대쯤 살아가게 되면 거의 야생동물과 비슷한 수준으로 산에 적응해버리기 때문이다. 머리가 나쁘고, 행실이 저질스러운 놈들이라면 삼대는커녕 단 한 해도 버텨내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똑똑한 혈통에 실장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적응력과 노력이 더해지고, 거기다 운까지 따라주는 개체라면 요행히 터전을 내릴 수 있다. 문제는 여기까지 다다르는 개체가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요행히 산(山)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졌다고해도 산실장의 생활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운좋게 산신의 허락으로 산자락 한켠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해도, 실장석이라는 저주스러운 몸뚱이는 개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먹이사슬에서는 사실상 곤충 다음에 랭크된, 사실상 자연공인의 최약체가 바로 실장석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제법 좋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절망스러운 신체밸런스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나름대로 돌과 나무를 엮어 원시적인 무기를 만들고, 조직을 꾸려 철저히 경비를 서봐도 너구리 두어마리만 나타나도 일대는 초토화 된다. 다람쥐나 토끼 정도면 어떻게 해볼 요량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대신 이들은 터무니없이 빠르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모으는 것도, 실장석이 서너개를 겨우 주워담을때 다람쥐는 이미 한자루가 넘는 도토리를 쓸어간다. 짧은 팔다리로 뒤뚱뒤뚱거리며 쫓아내보려하지만 절반도 다가가기 전에 다람쥐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사라져있다.

 그나마 다람쥐가 아닌 청설모라도 만나는 날엔 도토리는 고사하고 목숨까지 위험하다.
 청설모 정도만 되도 성체실장 두엇쯤은 단숨에 할퀴고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놓기에 충분한 것이다.

 결국 이런 산실장 부락에 돌아가는 것이라고는 다른 동물들은 거들떠도 안보는 벌레껍데기나 개미, 다른 동물들의 똥, 눈치를 보며 겨우 그러모은 도토리와 개암, 야생호두 따위의 열매 몇어름이 전부였다. 배가고플때는 흙까지 파먹는 일이 다반사였고, 너무 굶주려 흙을 정신없이 퍼먹다가 숨이 막혀 죽는 것 또한 일상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산실장들은 항상 새 터전을 찾아 헤맨다. 하루에 제대로 된 밥 한끼 먹는 것도 벅찬 산실장의 삶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탐험대를 꾸려 이곳저곳으로 보냈다. 그녀들의 임무는 지금보다 더 나은 정착지를 찾는 것. 마음껏 집을 짓고 활보할 수 있는 넉넉한 땅, 풍족한 먹이, 깨끗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수원지... 등 많은 조건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야생동물과 인간의 눈에 띄지 않고, 하루라도 마음 편히 자볼 수 있다면.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녀들은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낙원같은 정착지를 찾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제아무리 가려뽑힌 탐험대라고 하더라도 실장석이 둘러볼 수 있는 반경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리고 한낱 실장석이 돌아다니기에는 아카기 산은 너무도 넓은 것이었다.


 아주 가끔 요구조건에 얼추 부합하는 빼어난 부지를 찾기도 했지만, 그런 곳은 하나같이 선객이 있었다. 족제비, 여우, 너구리, 노루 정도는 차라리 괜찮은 축이었고, 운이 나쁠때는 멧돼지나 불곰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하긴 당연한 것이 실장석 따위의 눈에 띌만한 곳이라면 다른 동물들이 먼저 차지하지 않을리가 없다. 좋은 자리는 힘센 동물이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이치였고, 또 실제로도 그러했다. 게다가 적어도 이 산에서 실장석들에게 돌아갈만한 땅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런 얼치기 산실장들이 오랫동안 후타바시 외곽을 떠돌다 이 자연농원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이 점지해준 천운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많을 정도의 행운. 
 오래전 그녀들의 선조가 아카기 산에 둥지를 만든지 일곱 세대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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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실장들은 열심히 일했다.
 흔히 실장석이라하면 게으름을 미덕으로 삼고, 더러움을 벗삼는 형편없는 생물이라고 매도하지만, 산실장들. 적어도 후타바 자연농원을 새 보금자리로 삼은 이 산실장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들은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자연농원을 깨끗이 치우고, 풀뿌리와 열매들을 열심히 긁어모았다. 밥먹을 시간이 아까워 선 채로 우적우적 날감자와 잡초를 씹어먹었고, 그나마도 먹자마자 다시 일을 하러 달려 들었다. 자실장들도 설익은 토마토를 어적어적 씹어대며 조금도 쉬지 않으면서 작물을 나르고, 살 집을 손봤다. 그렇게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하다가 더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해지면 아무데나 누워 눈을 붙이는게 곧 잠이었고, 세수나 몸단장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친실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어린 자실장들도 입에 단내가 나도록 열심히 일했다.
 몸집이 제법 웃자라 테스테스 소리를 내는 중실장들은 아예 어른과 같이 움직이며 일을 도왔으며, 아직 힘이 약한 조그만 자실장도 그 나름의 방법으로 일을 거들었다. 손재주가 잽싼 아이들은 친실장들이 뽑아놓은 풀뿌리의 흙을 털어내고, 인근 도랑에서 말끔하게 씻은 다음 비상식량으로 쓸 수 있게 들풀로 단단히 묶어 건초더미처럼 만들었다. 체구가 작은 아이들은 농업용수가 흐르는 수로로 기어들어가 물의 흐름을 막고 있는 자갈이나 쓰레기를 줍고, 흙덩이를 부수는 일을 했다. 어떤 아이들은 밭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쓰레기를 주워모았다. 몸이 날랜 아이들끼리 조를 짜서 메뚜기나 방아깨비같은 풀벌레를 잡아 식량에 보태기도 했고, 이도저도 못하는 아이들 ~주로 엄지~은 구더기들을 돌보는 일이라도 하며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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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실장들이 미친듯이 일을 한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 동안 산실장들은 자신들이 살 집을 만들었고, 변소나 공동저수지, 식량저장고와 같은 공동 시설도 만들었으며 밭도 일부나마 깨끗이 정리해냈다. 말이 쉬워 정리이지, 밭 전체를 뒤덮고 있는 잡초를 일일히 손으로 정리하고, 깊게 뿌리내린 관목은 중간에 밧줄을 감아 열마리 스무마리가 힘을 합쳐 뽑아내고, 땅속 깊숙히 박혀버린 생활쓰레기를 일일히 전부 골라내는 일은 거대한 역사에 맞먹을 정도로 험난했다.

 실제로 한 달 동안 일하면서 도합 세마리의 성체실장과 열두마리의 자실장들을 사고로 잃었으니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도 꼬박 며칠은 걸릴만한 일을 아직 작달만한 실장석들이 해냈다는 것은 실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그러나 그런 희생이 담보된 덕분에 실장석들은 예전보다 몇단계나 편안해진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석양이 산중턱에 매달려있는 저녁 무렵. 실장석들은 새 부락의 중심지인 돌배나무 앞에 둥글게 모여 즐겁게 음식을 먹으며 데스데스 테치테치하고 떠든다.

 실장석들의 앞에 놓인 것은 감자, 당근, 무, 우엉, 양파, 토마토... 모두 나뭇잎으로 만든 접시 위에 그득그득 담겨있다. 옛날 산에 살던 때처럼 보잘것없는 양을 배급해주는 일 따위는 없다. 그저 먹을만큼 중앙에서 집어와 먹으면 된다. 많이 먹든 맛있어 보이는 것만 골라먹든 딱히 뭐라고 하는 이도 없다. 먹이가 풍족하니 자연히 친실장들의 마음도 푸근해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밭에 흩어져있던 것을 주워모은 것이다.
 주말농원이 흐지부지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밭에 발길을 끊었지만, 키우던 농작물과 나무들은 그대로 남았다.  해를 넘기면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해 죽어버린 것도 상당수였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작물과 나무가 살아있었기에 실장석들이 먹을 정도는 충분했다.

 만평 정도는 우습게 넘기는 것이 후타바 자연농원의 부지였기에 지금보다 백배, 아니 천배나 더 많은 실장석이 와도 그들 모두 충분히 배불리 먹일 양이다.

 실장석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 아이들의 그런 행동도 싫지 않게 보였다.
 지금만해도 대부분의 자실장들은 달콤하고 육즙이 많은 토마토에만 죄 달려들고 있다. 평소라면 골고루 먹지 않는다고 혼쭐이 날 상황이지만, 누구도 뭐라하는 이는 없다.

 친실장들은 토마토도 좋아하지만 양파도 그에 못지 않게 좋아한다.
 껍질을 벗기는게 조금 귀찮지만, 수고를 감수하고 예쁘게 벗겨낸 하아얀 양파를 덥썩 깨물면 달콤한 맛이 입에 퍼진다. 옛날 산에 살던 시절 맛본 돌사과와 비슷한 맛이다.

 그러나 양파는 달콤하지만 끝맛이 매워 아직 어린 자실장들은 싫어한다.
 어미를 보며 용기내어 한입 베어물지만 이내 더운 콧김을 훗! 뿜어내며 도리질친다.


 "데푸푸푸~ 아직도 어린아이인데스~"

 "테챠아아!! 매운테치! 입안이 이타이한테챠아아!!"

 "데이~ 여기 물을 마시는데스우~ 데에... 자 여기있는데스."

 "꿀꺽꿀꺽... 꿀꺽... 테히! ...테! 이건 무서운 열매인테챠!"

 "데프프프픗.. 오마에는 아직 아기라서 그런데스우~♬"

 "테에에에... 퓃! 퓃! 괴로운테치이...."

 "테풋! 오마에도 어른이 되면 이 오묘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스. 데푸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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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살기 좋은 곳이 된 데스~"

 "땅도 좋고 물도 많아 이제 먹을것 걱정은 없는데수... 이곳은 천국인데수."

 "무서운 닌겐도, 두려운 괴수들도 없는게 가장 좋은데슷."

 "와타시는 아이들이 배곯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데스."

 "그런데스. 먹을게 너무도 많은데스. 가도가도 먹이나무가 끝없던데스우."

 "그렇지만 마구잡이로 먹어선 안되는데수. 겨울도 대비해야되는데스. 슬슬 음식을 저장해두는게 좋을 것인데수."

 "오두막은 조금 더 손을 봐서 든든하게 만드는데스. 안쪽으로 땅을 파내려가면 모두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인데스."

 "그런것보다 오두막을 구더기 사육장으로 만들고 우리들은 굴을 파서 사는게 어떤데수?"

 "그것보단....."


 친실장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어떻게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지 데스데스하며 토론한다.






 밥을 먹었으면 이제 잘 시간이다.
 남은 음식은 식량창고에 밀어넣고, 음식찌꺼기는 잎이 넓은 나뭇잎에 싸서 미리 준비해둔 구덩이에 파묻는다. 음식냄새로 다른 동물을 불러들이지 않도록 산실장시절부터 익숙해진 일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다 되자, 가족끼리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일과 밥은 모두가 함께 하지만, 잠은 가족 단위로 지어진 집에서 잔다. 산에 살던 시절에는 커다란 토굴에 몇십마리씩 포개져가며 겹쳐져가며 구겨져서 잤지만, 이젠 각 가족마다 집이 하나씩 생긴 것이다.

 집이라고 해봤자 땅을 깊숙히 파고, 근처 토마토밭에서 뽑아온 막대기를 그럴듯하게 엮어 골조를 세운 것이다. 지붕이라고 해봤자 근처에서 베어온 잡풀과 억센 갈대를 층층이 쌓아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실장석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푸근한 집이다. 물론, 실장석의 손재주로는 집을 무작정 키울 수 없기때문에 대부분의 집들이 친실장 하나와 아이 대여섯만 들어가도 꽉 차는 것이었지만, 아직 꽤나 쌀쌀한 새벽기온을 생각하면 이렇게 꼭 달라붙어 자는 것도 퍽 나쁘지 않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잠을 잘 수 있다는 기쁨에 불만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테~ 마마 안아주는테치..."

 "데이~ 아직 아기인데스."

 "텟-챠! 아기아닌테치이..."

 "어쩔 수 없는데스. 자 이리오는데스우~"

 "테~♥ 마마의 품속 따끈따끈테츄~ 마마냄새가 나는텟틀~☆"

 "데이데이 어서 자는데스."

 "테.... 마마.... 와타치... 행복한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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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실장의 일과는 꽤 이른 시간에 시작된다.
 산에서 생활하던 습성이 남아있는 탓인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4시 무렵인데도 하나둘 눈을 뜨고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자아~ 일어나는데스우~"


 친실장은 아이들을 깨운다.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녘이라 앞이 잘 안보이지만, 그래도 손끝으로 더듬어 아이들에게 두건을 씌우고, 신발을 신긴다. 풀더미를 쿠션삼아 베고 자느라 몸에 잔뜩 붙은 부스러기도 꼼꼼히 닦아낸다.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면서 

 "테이... 졸린테츄우..."

 "좀 더 자고싶은테치."

 "마음대로 말하는것은 안되는데스우. 얼른 서두르지 않으면 밥못먹는데스."


 친실장은 아이들을 재촉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도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쓰고 나온다.
 밖에는 먼저 나온 이웃들이 하나둘 보인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천천히 걸어 마을 중앙에 있는 돌배나무 앞으로 모인다.

 광장에는 밥당번들이 나와 밥을 준비하고 있다.
 실장석들은 모두 함께 모여 밥을 먹었는데, 이것은 공동생산 후 공동분배라는 산실장 커뮤니티의 이념에 따라 아주 오래전 산실장 시절부터 행해져온 것이다.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모든 실장석은 한데 모여 음식을 나눠먹는다. 음식을 빼돌리거나 숨기는 것은 엄히 금지된다. 만약 그것이 발각된다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친실장과 아이들에게까지 엄청난 린치가 가해진다.특히, 자실장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살아남기 어렵다. 공동체의 입장에서 이기적인 분충은 그 하나만이 위험에 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으니까. 대개의 경우 자실장이 이런 짓을 저지르면 최대한 고통을 주어 잔인하고 처참하게 죽인다. 이는 단순히 처벌의 목적만이 아니라 다른 자실장에게 교보재로 쓰이기 위함이다. 분충짓을 저지른 자실장의 어미 역시 무사할 수 없다. 자식교육을 잘못시킨 죄로 적어도 팔이나 다리 한짝쯤은 내주어야 한다. 자매들이 있다면 그 자매들도 혹 분충이아닌지 의심가득한 시선을 받아야 한다. 

 오늘의 아침밥은 밭에서 수확한 당근과 근처의 산자락에서 캐온 알뿌리이다. 알뿌리는 아카기산 전역에서 자라는 일종의 들풀이다. 길쭉길쭉한 줄기부분은 억세고 날카로워 도무지 먹을 수 없지만, 땅에서 뽑아낸 뿌리 부분은 완두콩만큼 동글동글하고 맛도 어쩐지 쌉싸름해서 산실장은 산에 살던 시절부터 즐겨먹은 것이었다. 

 당근은 단맛이 나고, 향긋한 향때문에 과일을 제외하고는 실장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당근은 찾기가 힘들기에 급식량이 제한되는 품목이기도 하다. 오늘은 성체실장 하나당 한개, 자실장 하나당 반의 반개가 주어졌다. 그러나 알뿌리는 나뭇잎 접시에 그득하게 쌓여있어 원하는만큼 가져다 먹을 수 있었다.


 "오늘밥은 당근인테에치이~☆"

 "당근은 달콤달콤 사각사각해서 너무 좋은테츄"

 "자, 자, 그만 떠들고 음식을 나르는데스~ 어서 오마에도 오네챠를 돕는데스우"

 "네, 테치."

 "테! 당근테치! 당근 우마우마테츙♡ 우마우마테츙♥"

 "이녀석! 다함께 인사를 하고 먹어야하는데스!"


 밥먹을때는 조용히 같은 규칙은 없는터라 친실장들은 친실장끼리, 자실장들은 자실장끼리 테치테치 데스데스하며 왁자지껄 떠들어댄다. 이것 역시 산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것 중 하나다. 산에 살때는 어떤 경우라도 큰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적막한 산에서 소리를 냈다가는 그 즉시 상위 포식자의 주목을 끌게 만들 수 있다. 더구나 이쪽은 실장석. 위에 있는 생물의 수를 세느니 자신보다 못한 생물들을 세어보는게 더 빠른 한심한 놈들이다. 들고양이 한마리만 나타나도 육십여마리의 커뮤니티가 박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산에서 밥을 먹을때는 조를 짜서, 한쪽이 망을 보는 사이에 다른 한쪽이 재빨리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대화나 장난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맛도 느끼지 못한채 입에다 우겨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사람과 교대를 해줘야 한다. 거기다 빈곤한 산실장 생활에서 누가 먹이를 더먹거나 덜먹는 일은 심각한 감정싸움으로도 곧잘 번지는 것이어서 식사시간은 마치 조용한 전쟁터와 같은 섬뜩한 예기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풍족하기 때문인지 싸움은커녕 웃음꽃이 왁자하게 피어나오고 있었다. 급식량 제한이 가해질만큼 귀한 당근도 서로 먹으라고 양보하는, 산실장 시절에는 상상도 못한 훈훈한 광경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차피 먹고 싶으면 오늘 구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깟 당근 못먹어도 다른 알뿌리는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아무래도 됐다는 생각도 끼어있다. 집이 풍족해야 평화가 찾아온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지금의 실장석들이 꼭 그런 형국이었다.





 밥을 먹고 잠시 숨을 돌리고 나면 이제 일을 할 시간이다.
 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제 했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한다.
 대부분의 친실장들은 각자의 도구를 들고 밭일을 하러간다. 남은 몇몇 친실장들 중 절반은 자실장들을 인솔하고 감독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남은 절반은 각자의 임무 ~풀숲 사이에 숨어 위험한것이 오는지 감시하는 경계석, 점심상을 준비하는 당번석, 아프거나 다친 일족을 보살피는 의무석, 각자의 집과 인근을 순찰하며 식량을 빼돌리진 않았는지 등을 탐문하는 감찰석~ 위치로 달려간다. 



 자실장들은 다른 성체실장 한둘의 지시에 따라 각자 하는 일로 흩어진다.

 가장 많은 아이들이 가는 곳은 역시 잡초베기다. 
 늘말랭이, 분꽃, 노초롱이, 황우재라비, ... 쐐기풀처럼 날카롭거나 애우재비처럼 너무 억세지 않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따서 비닐봉투에 담는다. 간혹 꽃망울이 잡혀있는 것은 조심스럽게 다룬다. 행여나 꽃봉오리의 수술에 닿았다가는 자칫 임신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창 손바쁠때 임신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는 아직 어린 자실장들이 임신했다가는 일손이 놀게되는 것은 둘째치고,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무사히 아이를 낳아봤자 자실장의 몸에서 나온 것이니 잘해야 엄지실장이고, 대부분이 구더기인 미숙아만 나온다. 이런 것들은 숨이 붙어있어봤자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어 양식으로도 쓰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꽃이 돋아난 풀은 반드시 감독하는 성체실장이 따도록 되어있었다. 혹여 꽃이 예쁘다고 몰래 숨겨두거나 따모으거나했다가는 이 역시 제재대상으로 분류되어 엄한 처벌을 받는다.

 잡초를 베는 이유는 다른 농작물의 생장을 돕기 위해서라는 기본적인 목적외에도 식량공급이라는 부수적인 목적이 있었다. 잡초는 맛이 없지만 어쨌든 배는 불려준다. 물론 영양가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잡초만 먹었다가는 영양실조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산실장들은 밭에 나는 농작물로 영양분을 보급하고, 비어있는 배에는 잡초를 우겨넣어 포만감을 주게한다- 는 묘안을 짜내서 실행하고 있었다. 마치 반찬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과 같이 당근같은 야채와 함께 잡초를 우물우물 씹는 실장석들은 어딘지 인간과 닮아있었다. 분명 자연농원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먹거리를 품고 있었으나, 실장석의 짧은 지성과 경험으로는 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혹여나 식량이 바닥나는 최후의 사태를 대비해서 이렇듯 잡초를 베어 비상식량으로 모아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해서 항상 잡초를 먹는 것은 아니다.
 출산일이라든가 성인식이 있는 날, 수명이 다 된 구더기쨩들이 '졸업'하는 날은 조금 특별한 음식을 먹는다. 이런 날은 일 년에도 몇번없는 귀한 날이므로 창고에 소중히 모아둔 음식들을 아낌없이 꺼내는 것이다.

 단맛이 나서 특별히 아껴뒀던 당근과 고소한 맛이 나는 고구마, 들큼한 맛이 일품인 돌배, 어쩐지 전설의 '콘페이토우' 같은 맛이 나는 감, 자실장들이 모아온 말린 메뚜기로 한상 가득 채운다. 거기다 우두머리 실장석의 허락이 있으면 '구더기 스테이크'도 한입쯤은 맛볼 수 있다.

 그러기위해서는 평소에 열심히 일을 해야한다.
 "'축제'라는 달콤하고도 행복한 시간을 위해서는 평소의 시간을 소중히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한다." 라고 우두머리 실장석은 입버릇처럼 자실장들에게 말해왔다.


 "오네챠~ 이 풀뽑기 도와주는테치. 이녀석 꽤나 질긴테츄"

 "와타치가 도와주는테치"

 "테~ 오네챠 고마운테치이☆ 와타치가 앞쪽을 잡는테츄"


 자실장들은 테치테치 몰려다니면서 열심히 잡초를 뽑는다.
 이곳에서는 같은 어미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이도 모두 오네챠이면서 또 이모우토챠이다.
 산실장은 원래 공동출산, 공동육아를 하는 관습이 있어서 미숙아인 구더기 저실장을 제외하고는 다같은 한가족으로 본다. 이렇게하면 출산과 육아에 대단히 편리할 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줘서 쓸데없는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런 육아의 효과는 지금 이순간에도 발휘되어 작달만한 자실장들이 하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속도로 일이 진행되었다.


 "테치테치테치테치 모두 힘내는테츄"

 "테치테치테치테치테치테치 힘내는테치"

 "텟챠텟챠텟챠텟챠텟챠텟챠텟챠 이쪽은 끝낸테치"

 "테치테치테치테치테치테치테치테치 이쪽도 끝낸테치"


 자실장들은 짧은 구령까지 붙여가며 열심히 팔다리를 놀리고 있었다.
 이 채마밭에만 근 서른마리에 가까운 자실장들이 일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잔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자는 없다. 마치 기계처럼 잰듯이 테치테치테치하며 재빨리 손을 놀리고, 눈앞의 일이 얼추 끝나면 잽싸게 다른 친구, 언니, 동생들이 일하는 곳으로 달려가 일을 거든다. 둘이서 못하는 일은 재빨리 신호를 보내 도움을 청한다. 누구 하나 잡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지도 않는다. 도시의 들실장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당황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이지만, 이들이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본다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은 일곱 세대에 이르는 지고한 시간 동안 고르고 골라진 우수한 개체들이기 때문이다. 





 자실장들이 열심히 일하는 채마밭을 빠져나와 약간 걷다보면 커다란 움집이 하나 나온다. 보통 가족들이 사는 움집 서너개를 합한 것만한 이곳이 바로 이 산실장 부족의 자랑거리인 '구더기 목장'이다.

 구더기 목장은 다른 어느곳보다도 시끌시끌하다.
 항상 주절거리며 떠들어대는 저실장도 저실장이지만, 그만큼이나 작은 엄지실장들이 저실장들을 돌보느라 내는 소음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저실장들은 덜떨어진 두뇌에 걸맞게 제멋대로 행동하기때문에 제아무리 엄격한 교육을 받은 엄지실장으로서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때가 많았다.


 "레, 레레레레,,, 자자 이제 낮잠시간인레치. 모두 낮잠자는렛~~챠아~~"

 "그런것보다 어서 프니프니해주는레후~"

 "레~~ 와타치도 프니프니! 프니후! 프니후~~"

 "레치! 우지챠는 이미 프니프니 받았던레치! 오네쨔를 속이려드는 나쁜 구더기는 밥빼기하는레칫!"

 "레뺘! 밥빼기 싫은레후~ 밥빼기 싫은레훗! 그런것보다 어서 프니프니해주는레후~"

 "안된다고한레칫~!! 고집부리는 구더기챠는 나쁜 구더기--챠레치!"


 정오의 낮잠시간을 맞아 작달만한 엄지들은 투덜투덜대는 구더기 저실장들을 재우려고 허둥거린다.





 엄지들은 체구가 너무 작아 잡초를 뽑는 것도 자갈을 골라내는 것도 하지 못했지만,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구더기 목장에서 저실장을 돌보는 것이다.

 보통 들실장들은 '구더기는 돌볼 필요도 없는데스.'하며 그저 똥이나 먹이면서 방치해두다 때가 되면 잡아먹는 비상식량 정도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구더기 예닐곱마리당 엄지실장 하나가 배정되어 세심하게 돌보도록했고, 먹이도 가급적이면 영양가있는 것을 주려고 애썼다. 물론 대부분의 끼니는 실장석의 녹푸른 똥이었지만, 그래도 운이 좋은 날에는 먹다 남은 야채찌꺼기라도 입에 대볼 수 있었다.

 구더기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프니프니다. 소화기관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구더기는 프니프니를 통해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고, 나아가 배변활동까지 이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분변의 쾌감과 육체에 각인된 쾌락이 더해져 구더기에게 지고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만약 구더기에게 프니프니를 소홀히하면 배변활동에 장애가 생겨 자칫하면 똥이 막혀 죽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거기에 프니프니는 상당한 스트레스 효과도 있어서 처우가 각박하기 그지없는 구더기들의 위석이 깨지지 않게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렛~~훈~ 프니프니 기분좋은렛푸~~웅♡"

 "레치? 우리 구더기챠도 기분좋은레치?"

 "렛햐! 좋은레프! 레삐~ 구더기 똥 지릴것같은... 레... 똥싸버린레후~"

 "레퍄퍗! 레퍗! 오네챠의 프니프니 조금 격렬한렛훈~"


 프니프니를 잘 받은 구더기는 그렇지 않은 구더기보다 훨씬 크고 건강하게 자란다.
 프니프니만 제때 잘 해주면 중간에 죽는 일도 거의 없고, 옷이 찢겨나가거나 몸을 다쳤을때의 회복력도 빠르다. 오랜 경험속에서 이것을 깨달은 산실장 그룹은 구더기를 돌보는 엄지실장들에게 구더기 하나당 적어도 하루에 세번은 프니프니를 해주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잘 자란 구더기는 일차적으로 옷감을 만드는 용도로 쓰인다.
 다 자란 구더기를 잡아 포대기를 어느 정도 찢으면 구더기는 렛훙렛훙 울면서 피부에서 서서히 녹색 섬유질을 재생성해내어 찢겨져 나간 부위를 메워낸다. 그렇게 자신의 포대기를 다 만들어내면 또 다시 복구할 수 있을만큼 포대기를 찢어 챙긴다. 이렇게 얻은 포대기는 다시 엄지실장들의 세심한 가공을 거쳐 한묶음의 녹색 옷감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 천은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천을 몇개씩 이어낸 다음, 실장석의 갈비뼈를 바늘로, 억센 나무줄기를 실로 사용해 누덕누덕 꿰맨다. 그러면 보기에는 볼품없지만, 대단히 따뜻한 이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이불 두개를 겹치고 그 사이에 낙엽조각을 듬뿍 채워 더 두꺼운 이불을 만들기도 했다. 그외에도 적당한 분량으로 잘라낸 천을 수건으로 사용하거나, 찢어진 옷 부위에 덧대 기우는 역할도 한다. 구더기의 포대기는 실장옷과 거의 비슷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 그 보온성과 쾌적함이 낙엽이나 다른 천조각에 비할게 못된다. 보통 이런 구더기 포대기는 들실장들 사이에서 보물 정도로 취급받는 것인데,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실장석들이 구더기 포대기로 만들어진 이불을 덮고, 구더기 포대기로 만든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이것도 다 구더기 목장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전전대의 우두머리 실장석 덕분이었다.

 그러나 구더기라고해서 무한정 옷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략 평균적으로 잘자란 구더기 한마리가 옷을 수복하는 횟수는 다섯번에서 일곱번. 그 이상은 구더기의 신체가 버텨내지 못한다. 몇몇 개체는 더 만들기도 하지만, 겨우 만들어봤자 재질이 좋지 않아 대부분 버려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더 이상 옷을 재생하지 못하는 구더기는 목장에서 '추방' 된다. 보통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나흘에 한번씩은 꼭 목장에서 '추방'되는 구더기가 생긴다. 더이상 몸에서 실고치를 만들어내지 못해 헥헥거리며 바르르 떠는 벌거벗은 구더기를 나뭇잎에다 담아 엄지실장 둘이서 레치레치하며 목장 옆의 토굴로 옮긴다.

 엄지실장의 걸음으로 채 삼분이 걸리지 않는 그 토굴은 친실장 중에서도 가장 경험이 많고, 엄격한 두 마리가 맡고 있었다. 이른바 도살장이다. 

 "오네챠-!! 구더기 추운레후! 레풋!레풋!" 

 구더기가 벌거벗은 몸뚱이를 돌돌말며 추위를 호소하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다.

 "레? 오네챠? 구더기 말을 왜 들어주지 않는레후? 구더기 춥고추운렛푸!"

 통통하게 살찐 몸을 접었다폈다하며, 콧김을 쓩쓩 내뱉으며 호통을 치지만 언니들은 요지부동이다.
 항상 울음소리만 나면 달려와 돌봐주던 친절한 언니들이 어쩐지 오늘은 이상하다.
 평소에는 반만 벗겨가는 구더기쨩의 포대기도 오늘은 왠일인지 모두 벗겨가버렸다.
 흔들흔들한 이 침대에 실려 구더기챠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뭇잎에 실려가는 구더기의 작은 뇌로는 평소 일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온 레치."

 나뭇잎을 앞뒤로 마주잡고 걷던 엄지들이 토굴 앞에서 멈췄다.
 흙을 깊게 파내려간 토굴은 새까맣게 어두워서 여기서는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엄지 하나가 조심스럽게 토굴 근처로 다가가서 담당 실장석을 부른다.

 "레... 오바상.... 오바상... 저기... 오바상!!"

 "데스. 지금 나가는 데스."

 깊숙한 곳에서 울림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체실장 하나가 토굴에서 쑥 나온다.
 보통 성체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 군살이라곤 전혀없이 탄탄한 몸에는 녹색과 빨강색의 무언가가 질척질척하게 묻어있다. 늘 입고다니는 실장복이 아니라 팬츠 하나만 입고 한손에는 커다란 돌칼을 들고있는 그 친실장은 구더기목장에서 일하는 엄지실장에게 있어선 공포의 대명사로 통하는 존재였다.

 "오늘은 이게 전부인데스까?"

 "레.. 레레... 그, ㄱ,,그런레치."

 "흠. 알겠는데스우. 수고한데스. 이제부턴 와타시가 옮길테니 너희들은 돌아가도 좋은데스우."

 "레,,,레레레,,,알겠는레치 오바상..."

 엄지실장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몇몇은 친실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쳤지만, 몇몇 엄지는 차마 구더기를 놓고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듯 애잔하게 쳐다보며 머뭇거린다.


 "레이? 오네챠 어디가는레후? 구더기쨩 혼자두고가면 다메레후~"

 "오네챠~ 오네챠~ 구더기챠 추운레프~ 안아줬으면하는레후~"


 구더기는 구더기대로 지금까지 자신들을 돌봐준 엄지와 헤어지기 싫어한다.
 어떤 놈은 구더기답지 않게 피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엉엉우는 것도 있다.
 엄지실장의 눈에도 빨갛고 초록색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때,


 "눈물을 보이는 분충은 누구데스까?!!"


 친실장의 노도와 같은 목소리가 떨어울린다.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엄지실장들은 황급히 뒤돌아 목장쪽으로 달려나간다.
 구더기쨩과 헤어지는 것은 정말 슬픈일이지만, 그것보다 아줌마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엉엉 울던 엄지들도 주변에 떠밀려 할 수 없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한심한 녀석들인데스우."


 도살장 실장석은 허리에 두손을 짚은채 훙! 하고 콧김을 내뱉는다.


 "저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곤란한데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구더기를 토굴쪽으로 옮기던 실장석에게 어느 구더기가 방긋 웃는다.


 "레에! 아주 큰 레후! 오네챠들보다 아주아주 큰 레후! 혹시 마마인레후? 마마가 구더기챠의 마마인레후?!"


 그 말을 듣고 구더기를 옮기던 실장석의 발이 멈칫한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말에 반응했다는 것을 알아챈 구더기는 신이나서 떠들어댄다.

 "틀림없는레프! 틀림없는레프! 오네챠들이 말한레후! 구더기챠는 어마어마하게 큰 마마에게서 태어났다고한렛훈~ 언젠가 때가되면 마마가 구더기챠를 오네챠처럼 만들어준다고한레프! 오늘이 그날인레프?! 오늘인레... 레뺘아아악!!!!"


 구더기는 말조차 끝맺지 못하고 비명만 남긴채, 머리가 바스라졌다.
 도살장 실장석의 굳센 주먹이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은채, 그대로 내려꽂혔던 것이다.
 그나마 고통조차 못 느낄 만큼 빨랐다는게 유일한 위안일까.
 단매에 구더기를 때려죽인 실장석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듯 후우후우 거친 숨을 내쉬며 구더기 시체를 내려다본다.


 "데... 와타시도 아직 멀었는데스. 여기서 죽이면 육즙이 흐르는데스... 이딴 똥구더기가 와타시를 마마라고 불러 잠깐 정신을 잃었던데스. 언니에게 또 혼이 나버리는데스우..."


 그때 토굴 안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뭐하는데스?! 구더기가 떨어진지 언제인데 왜 안 옮기는데스까!!"

 "히, 히이! 오, 오네상 지,,지,,지금 가는데슷!"





 피비린내가 짙게 풍겨나오는 도살장 토굴을 지나 약간 걸어가다보면 우묵하게 지면이 꺼진 곳이 나온다. 여기서 멀리보이는 커다란 백양나무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꺾으면 실장석들의 옷과 이불, 속옷따위를 빠는 빨래터가 나온다.

 빨래터는 주변의 밭에 물을 공급하는 농수로 한켠을 넓게 파내려가서 단단히 터를 다진 다음, 위에는 채마밭에서 주워온 자갈을 깔아 진흙으로 질척거리지 않게 했다. 덕분에 농수로 바로 앞에서 쪼그려만 앉아도 물에 손이 닿는다. 이 덕에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빨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친실장들 대여섯 마리가 빨래터에 주저앉아 북적북적거리며 녹색 실장의와 누런 팬티를 빨아대고 있다. 기본적으로 본인의 세탁은 본인이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도저히 그럴 여유가 생기지 않는 고된 일에 투입되는 실장석들은 이렇게 세탁반이 대신해서 빨래를 해준다. 주로 적용되는 이들은 항상 부락 주변 상황과 새로운 수원지, 새로운 먹이나무, 새로운 지형을 정찰해오는 탐험반과 가장 더럽고 힘든 일로 손꼽히는 급수파이프 청소반, 도살반과 일을 하다 다치거나 앓아누운 실장석 등이 해당되었다. 그리고 전날 밤샘 경계를 서는 경비업무를 본 이들도 빨래 1회 제공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탁반이 하루에 처리해야할 빨래는 적게 잡아도 이삼십벌은 족히 넘는다. 인간의 입장에선 별 것 아니지만, 실장석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중노동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세제나 비누같은 도구도 없으니 맨손으로 때워야하기에 더 그렇다. 그래도 제법 꾀를 내서 넓적한 자갈을 빨래판 형식으로 밑에 깔고, 위에서 모난 돌맹이로 열심히 두드려대고 있었다. 제법 효과는 있는 것인지 빨랫감에선 연신 누런물과 기분나쁜 녹색찌꺼기가 배여나온다.


 "데스데스데스... 오늘도 빨랫감이 잔뜩인데스"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그런데스우. 그래도 이불은 없어서 다행데스"

 "와타시의 집도 언제한번 이불을 빨아야하는데스..."

 "그럼 며칠 춥게 지내야하는데스. 그래서 곤란한데스우."

 "짚더미로 버티는데스. 와타시는 어제 빤 데스."


 북적북적북적 능숙한 솜씨로 빨랫감을 주무르면서 서로 잡담을 나눈다.
 떠드는 이야기라고는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 주변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잡담따위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겁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산에서 살던 그때에는 이렇게 잡담을 나누며 시시덕거린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곤충사냥을 다니고 나무열매 채집을 할때는 말할 것도 없고, 집인 토굴로 돌아와서도 누가 나타날까봐 목소리는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어떤 때에는 일주일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지내서 옆사람의 목소리가 어떤지 잊어먹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안그래도 잔뜩 짧아진 가을해때문에 수북히 쌓인 빨랫감을 저녁식사시간 전에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은 되지만, 이렇게 데스데스 즐겁게 떠들며 일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욱이 빨래업무는 성체실장들로만 구성되기때문에 자실장이 일하는 곳과는 다르게 감시하는 실장석이 없다. 때문에 일만 제때마친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아 좀 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겨울도 한껏 다가온데스우."

 "그런데스. 어제 탐험 나갔던 오네상말로는 산의 나무가 빨간잎으로 된 옷도 거의 다벗었다고 한데스."

 "데... 나무님이 빨간옷을 벗었으면 이제 정말 겨울인데스네."

 "그래서인지 산족장 마마가 일을 더 많이 시키시는데스우."

 "그래도 올 겨울은 아주 풍족할 것인데스. 식량창고가 다 차서 하나를 더 만든다고 하지 않은데스."

 "데데, 기쁜데스. 행복한데스우. 역시 이주를 한 것이 정답이었던데스."


 누군가의 말에 다른 실장석들도 빨래를 하던 손을 놓고 데스데스하며 고개를 끄덕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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