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False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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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선택된 이유라는 게…”
“그렇네. 어찌보면 자네가 이번 일에서는 최고 적임자일 수도 있겠지.”

무거운 공기가 두 사람을 짖눌렀다. 소파에 앉아있는 한 남자는 깍지를 낀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댄 채 분노를 억눌렀다. 마주 앉아있는 노인은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앞주머니를 눌러보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노인이 바지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찾지 못한 노인은 깍지 낀 남자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남자는 진작에 눈치챘지만 아까부터 거슬리는 말을 지껄이는 노인에게 원하는 것을 가져다 바칠 이유는 없었다. 결국 쓴웃음을 지은 노인은 입에 문 담배를 고이 담배곽에 넣었다.

“거 참, 야박한 친구군.”
“불러서 하는 말이 그따위인 친구는 애초에 둔 적이 없소만.”
"애초에 친구가 없는 게 아니고?"

남자와 노인은 다시 서로를 노려본다. 침묵이 둘을 감싼다. 침묵을 깬 것은 노인의 웃음이었다. 왼쪽 입꼬리만 올라간 웃음. 사람들은 이것을 비웃음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울컥했지만 여기서 노인을 때릴 수는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간신히 가라앉힌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오른손을 내민다. 하지만 남자는 그 손을 받지 않는다. 머쓱해진 노인은 문으로 나가려고 한다. 문고리를 잡은 노인은 남자를 보며 말한다.

“우리에게 자네는 꼭 필요한 인재일세. 세상에는 모두가 하나쯤을 쓸모가 있다고 하지 않나.”
“......”
“시간을 많이는 줄 수 없네. 현명한 결정을 기대하도록 하지.”

노인은 그래도 문을 열고 나간다. 덜컹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잠시 울리는 소리는 듣던 남자는 탁자를 후려친다. 그래도 남자의 화는 풀리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방은 남자가 뱉는 욕지거리로 넘치기 시작한다.

“씨발… 씨발!!!”

몇번을 외쳐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노인에게 모욕당한 자신이, 그럼에도 반박할 수 없는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에 강한 욕망을 느낀다. 남자, 철웅은 깨달았다. 여기 오기 전부터 자신은 이 일을 해야만한다고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철웅은 좀 전 노인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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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 이 일로 몇번이나 여기에 오시는거에요. 아저씨!”
“...실장석은 유해조수 아니오? 처리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이오.”
“그렇게 때려잡는 게 문제죠!”

한 남자가 파출소에서 경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김철웅이었다. 그는 이 파출소의 단골손님이었다. 그 이유는 실장석 때문이었다. 철웅의 말처럼 실장석은 유해조수였다. 잡아도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철웅이 잡는 방식은 너무나 잔인했다. 한번에 때려잡는 것이 아닌 거칠지만 한번에 죽지 않게, 최대한 고통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 잔인한 모습에 공원을 다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고를 당했다. 파출소에서도 익숙하다는 듯이 키보드를 두들긴다. 딱히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신고가 들어온 이상 신고를 처리해야한다. 앞에 앉은 경찰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모습을 철웅은 멍하게 바라본다.

문득 파출소의 문이 열린다. 파출소의 모든 시선이 들어오는 사람에게 쏠린다. 노인과 검은 정장의 남자가 들어온다. 노인은 철웅의 모습을 보더니 검은 정장의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검은 정장은 파출소장에게 다가가 신분증을 내밀며 뭐라 말한다. 파출소장은 벌떡 일어난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철웅을 제외한 파출소의 모두는 긴장한다. 철웅은 느긋하게 상황을 구경중이었다. 그런 철웅에게 노인이 다가온다. 

“안녕하신가. 김철웅군.”
“...당신은 누구요?”
“자네에게 제안을 하러 온 남자지.”

제안이라니. 철웅은 호기심과 경계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 사이 파출소장은 철웅의 앞에 있던 경찰에게 뭐라 말을 건넨 후 철웅에게 말한다.

“가셔도 됩니다.”
“...음.”

철웅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다. 노인은 그런 철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파출소의 문을 나선다. 철웅이 따라 나가자 검은색 리무진이 파출소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의 남자가 문을 연다. 노인은 당연하다는듯이 탄다. 검은 정장의 남자는 철웅에게 말한다.

“타시지요.”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목소리. 철웅은 살짝 긴장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리무진에 탄다. 문이 닫치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철웅은 시트에 몸을 묻는다. 자신이 타봤던 차 중에 제일 푹신한 시트였다. 눈을 감는다. 노인도 그런 철웅을 딱히 제지하지 않는다. 

차가 서고 문이 열린다. 철웅은 졸린 눈으로 밖으로 나간다.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노인이 성큼 앞장선다. 철웅은 그런 노인을 따라 들어간다.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 전부 노인에게 인사를 한다. 노인은 인사를 받는둥마는둥하며 자신의 갈길을 갈 뿐이었다. 이윽고 노인은 어느 방문을 열고 그 방으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간 철웅은 방문을 닫았다. 큰 방이었다. 한 벽을 차지하는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고 저쪽에는 커다란 책상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커다란 소파 두 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노인은 한 소파에 털썩 앉아 철웅에게 반대편을 가리킨다. 철웅은 얌전히 반대편 소파에 앉는다.

“김철웅군. 자세는 훌륭한 학대파로군?”
“잘 모르겠소만, 개인적으로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오.”

노인은 자기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철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철웅은 대답했다. 철웅의 대답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렇다. 자신은 훌륭했다. 데스넷에서도 자신의 학대 영상이 베스트 영상으로 올라간다. 철웅의 학대를 보는 학대파 모두는 철웅을 찬양했다. 철웅은 자신의 학대에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자부심을 슬쩍 넘기며 질문을 던졌다.

“딱히 직업이 있거나 하진 않군?”
“...그렇소.”
“그렇다면 적임이군.”

서류철을 덮으며 노인은 철웅을 바라본다.

“일을 해줬으면 하네만.”
“거절하오.”

철웅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노인의 흰 눈썹이 꿈틀댔다.

“일의 내용도 듣지 않고 거절하는 것인가?”
“관심없소. 이만 집에 가도 되오?”
“자네에게는 부양해야하는 홀어머니가 있지 않나? 보수는 섭섭치 않게 줄 생각이네만.”
“그건 노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오.”

철웅은 냉정하게 잘랐다. 노인은 철웅의 아픈 부분을 찔렀지만 철웅은 내색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철웅이 일을 안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내몰리게 되었다. 결국 완전히 내몰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에 빈대처럼 붙어살며 실장석을 학살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철웅의 내력은 노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노인은 철웅을 비웃는다.

“크크크… 그럼 자네와 참피가 다를 게 뭔가?”
“하?”

철웅의 눈썹이 꿈틀한다. 이 미친 노인네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거지? 철웅은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비웃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을, 순간 머리에 피가 확 몰리는 느낌이었다. 철웅은 고함을 지르려고 했지만 노인이 말을 잇는다.

“자네는 무능력하지. 지금 나이에 변변찮은 직업도 없어. 홀어머니가 간신히 자네를 먹여살리는데,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지.”
“이… 이…!”
“보다못한 자네의 어머니가 일자리를 구해주어도 자네는 하루면 때려치지. 그러고서 하는 일이 겨우 실장석을 때려잡는건가? 푸흐흡… 차라리 구제업체라도 들어가지 그랬나?”
“......”
“아, 아니지. 들어갔었지. 다만 거기서도 습관적으로 학대를 하다가 능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짤렸지. 취미와 일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건가? 응?”

노인의 말은 철웅은 잔인하게 후벼댔다. 움켜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철웅은 앞의 노인이 두려웠다. 자신을 어디까지 조사한거지? 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친다. 철웅의 이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계속 지껄인다.

“자네가 이제까지 살았던 것만 보면 말일세. 자네는 참피보다 못한 인간일세. 공원에 사는 성체참피도 자기 먹을 거는 노력해서 찾는데, 자네는 자네 어머니 밥이나 쳐먹으며 살지 않는가? 응?”
“...나한테 원하는 것이 뭐요!”
“참피를 잡는 것일세.”

노인의 뜬금없는 말에 철웅은 어이가 나간다. 이제까지 자신을 모욕하던 사람이 기껏 자신에게 원한다는 게 고작 실장석을 잡는 것이라니. 넋이 나간 철웅에게 노인은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해준다.

“그냥 참피를 잡는 일이라면 자네를 찾지도 않았어.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닐세.”
“...그럼?” 
“참피의 행복회로라는 것을 알고 있나?”
“...참피놈들이 현실을 도피하는 거 말하는 거잖소.”
“맞네. 그럼 어디까지 도피할 수 있는 것일까?”
“아?”

철웅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다. 노인은 일어나 창문으로 향한다. 건물 옆에 있는 큰 공원이 보인다. 멀리서 햇살이 내려쬐는 푸른 공원을 보는 것은 언제나 눈을 즐겁게 한다. 노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철웅에게 말한다. 

“우리는 말일세. 참피를 연구하고 있네.”
“참피 연구라니. 연구할 거리가 아직도 남아있었소?”

철웅은 노인의 진지한 말에 비웃음을 터트렸다. 철웅이 아는 한 실장석은 너무나 단순한 생명체였다. 벌써 DNA 분석까지 끝났다고 했던가. 소화기 구조도 단순하고, 행동도 단순하다. 그런 실장석을 아직 붙잡고 있다니. 철웅이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는 노인의 연구는 충분히 비웃을만 했다. 하지만 노인은 진지했다.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위석이라네.”
“위석?”
“자네는 위석이 무엇인지 아는가?”
“...참피들의 생명력 그 자체요.”
“맞네. 그 불가사의한 생명력은 위석에서 오지. 위석을 활성제에 담그면 몸을 반으로 갈라도 죽지 않아. 그럼, 그 위석은 대체 무엇으로 구성된 것일까?”
“......”
“성분은 이미 분석이 끝났네. 다이아몬드와 같은 탄소결정체야. 그렇지만 위석을 다이아몬드로 대체할 수는 없네. 위석에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어!”

노인은 열정적으로 외친다. 갑자기 20년은 젊어진듯한 패기가 느껴진다. 노인의 패기에 움츠러드는 자신을 철웅은 발견했다. 철웅은 억지로 어깨를 펴고 노인에 맞서 소리쳤다.

“카오스 파워 아니오! 그건 누구나 아는...”
“그렇다면 그 카오스 파워를 분석해야지! 카오스 파워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러고 끝을 낼까! 그건 과학이 아니야! 과학자로서 그런 패배는 용납할 수 없네!”

철웅은 발작적으로 말을 내뱉었지만 노인의 패기에 묻혀버렸다. 철웅은 노인이 싫었다. 첫 인상도 별로였고, 아까 노인이 자신을 비웃던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철웅은 만난 지 얼마 안된 이 노인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노인은 자신과 다르다. 열정이 있고,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위석의 비밀이라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노인은 힘을 다 쏟아낸듯 아까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며 철웅을 바라본다. 차분해진 노인의 눈이 철웅을 바라본다. 철웅은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철웅을 원한다.

“이야기가 길어졌군. 이제부터 본론일세. 외부에서 접근하는 건 이미 다 해봤네. 이제 남은 건 내부에서 침입하는거야.”
“내부…?”
“실장석의 행복회로. 우리는 그것을 타고 위석의 내부로 들어갈걸세.”

철웅은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철웅이 지금 당장 이해하기를 노인도 바라지는 않는다. 노인은 앞에 놓여진 물을 마셔 목을 축신 후 다음 이야기를 꺼낸다.

“실장석을 극한까지 몰아버린 다음에 실장석이 행복회로로 빠질 때 인간의 꿈으로 납치한다. 그런 다음에 인간의 꿈에서 다시 실장석을 극한으로 몰아넣을걸세. 거기서부터는 실장석의 행복회로를 타고 넘어가는거지. 행복회로를 타고 넘어갈때마다 계속 쫒아가는걸세. 그렇게 쫒고 쫒다보면 행복회로의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을걸세. 거기에 위석이 비밀이 있을 것이야. 나의 가설은 이렇네.”
“...하하, 너무 거창해서 할말이 없소만.”
“그렇겠지. 누가 들어도 처음 들으면 다 그 반응일걸세. 하지만 그렇기에 자네가 필요하지.”

노인은 고개를 젖치고 실소를 머금었다. 철웅은 그런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다. 

“...그러니까 내가 선택된 이유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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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결정했네.”

노인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노인의 손을 맞잡는다. 가볍게 흔든 노인은 철웅에게 손짓을 했다. 작은 방에 들어간다. 방 한가운데는 한 미니어처가 놓여져 있었다. 그 미니어처를 처음 본 철웅이지만 왠지 낮익은 장소였다. 노인은 미니어처를 뚫어지게 보는 철웅을 보며 슬쩍 웃는다.

“어디서 많이 본 공원이지?”
“...이건 설마?”

“자네도 익히 알고 있는 그 공원일세.”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준다. 그 공원이었다.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공원. 자신이 빠루를 들고 으례 향하는 그 곳. 하지만 왜 이 공원의 미니어처가 여기에 놓여져 있는가? 철웅은 답을 재촉하는 눈길을 노인에게 쏘아보낸다. 노인은 웃으며 그 눈빛을 흘린다.

“자네가 이제부터 할 일은, 이 공원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일세.”
“재현…”
“꿈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설계가 필요하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익숙한 곳을 만드는 것이지.”

노인에 말에 철웅은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이 공원을 완벽하게 외우라는 것이오?”
“그렇지. 쓰레기통 하나까지 전부.”

노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철웅도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노인은 웃으며 다시 손짓한다. 좀 말로 하면 안되나? 철웅은 살짝 불만이 올라왔지만 그러려니 하며 노인을 따라간다. 구석의 책상에는 몇가지 도구들이 올려져 있다. 콘페이토와…

“이건?”
“자네거지? 우리가 가져왔네만.”

철웅은 빠루를 든다. 익숙한 감촉이 느껴진다. 손잡이 부분에 감아놓은 밴드도, 이 무게감도 자신의 빠루라는 확신을 준다. 빠루를 휘둘러본다. 바람을 가르는 빠루의 소리에 기분이 좋다. 철웅은 빠루를 놓고 옆의 물건을 바라본다. 이건 좀 괴상하다.

“VR기기 같이 생겼소만.”
“그렇지?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익숙한 게 나아서 그렇게 만들었네.”

노인은 그 물건을 들었다. 눈과 머리 전체를 덮는 기기이다. 노인은 철웅에게 그것을 씌워준다. 컴컴한 화면만이 보인다. 철웅은 노인에게 묻는다.

“이 기기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이오?”
“그건 작동하는 게 아니네.”

노인의 말에 황당한 듯 기기를 벗는 철웅이었다. 노인은 껄껄 웃는다. 철웅은 노인을 황망하게 바라본다. 작동하지 않는 기기를 왜 주는가?

“이건 꿈에서만 작동하는 것일세.”
“꿈에서만?”
“상상하면 되지 않는가? 꿈에서는 뭐든 할 수 있지.”

노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왠지 무책임해보이는 노인의 반응에 철웅의 황당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철웅에게 노인은 숙제를 준다.

“자네는 이것도 다 기억해야하네. 자네 빠루의 무게부터 생김새, 느낌, 그리고 저 기기의 느낌도. 물론 꿈속에서 어떻게 작동시켜야하는지는 충분히 교육시켜주지. 꿈에서 상상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리고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게 훈련도 받을 것일세.”
“...언제까지 하면되오?”
“자네가 할 수 있게 되면 바로 시작할걸세. 그 동안은 이 건물에서 지내면 되네.”

노인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철웅은 자세를 바로잡는다. 노인은 철웅의 어깨를 두드리며 묻는다.

“할 수 있겠는가?”
“...해보겠소. 이게 내 유일한 쓸모랬잖소?”

철웅은 씩 웃는다. 노인도 마주 웃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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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다 끝났나.”
“음. 아무래도 어색하오.”
“하하, 다 그런 거지.”

노인은 철웅의 어깨를 톡톡친다. 철웅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지난 1개월동안의 훈련은 참으로 고되었다. 원래 좋지 않은 머리였던 철웅은 자신이 해야될 것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뇌가 빠개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다 해냈다. 그렇기에 자신은 이 자리에 왔다.

가벼운 병원복으로 갈아입은 철웅은 실험실을 둘러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한가운데 있는 침대가 보인다. 자신이 누워야할 곳이다. 철웅은 한숨을 쉬며 몸을 푼다. 그런 철웅을 노인이 바라본다.

“한 가지 사과할 게 있네.”
“무엇이오?”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들. 미안하네.”
“하,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셨소?”

철웅은 씩 웃었다. 노인도 그런 철웅을 바라보며 씩 웃는다. 웃음을 거둔 철웅은 노인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내가 잘못된다면... 약속은 꼭 지키리라 믿소.”
“나만 믿게나. 반드시 지키도록 하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철웅도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눕는다. 사람들이 몰려와 철웅의 몸에 여러가지 전극을 붙이기 시작한다. 바이탈 사인이 뜬다. 정상. 정상. 정상. 모두 다 정상이다. 수석 연구원이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네. 접속 1분전.”
“접속 1분전.”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몸에 온갖 전극을 덕지덕지 붙이고 누워있는 철웅은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온몸에 전극을 붙이고 침상에 묶여있는 실장석들에게 실장채로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실장석들의 절규가 실험실 안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철웅조차도.

<데갸아아아아아아!!!>
<똥닌겐!!! 죽여버리는데샤아아아아!!!>
<살려주는데스! 제발 살려주는데스!!!>
“접속 20초전. 철웅군. 집중하게.”

노인의 말이 철웅을 현실로 꺼내온다. 머리를 바로하고 눈을 감는다. 자신만의 세계를 머리 속에서 그리기 시작한다. 

“카운트 다운 시작합니다.”

10 “철웅군. 
9 성공하길 
8 바라네.”
7
6
5 “...
4 알겠소”
3
2
1
.
.
.
.

“...여긴?”

눈을 뜬 철웅은 주위를 둘러본다. 익숙한 곳이다. 저 벤치도, 저 놀이기구도, 이 산책로도. 모두가 익숙한 곳이다.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자신의 애병, 빠루가 들려있었다. 철웅은 재빨리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을 뒤져본다. 콘페이토와 꿈 링크 도구가 있었다. 철웅은 가방을 부여잡고 주저 앉는다.

“다행이오… 다행이오…”

가방을 부여잡고 중얼거리던 철웅은 벌떡 일어난다. 꿈 설계만으로는 1단계가 완료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가상의 공원에 실장석이 없으면 이 실험은 실패인 것이다. 철웅은 공원을 미친듯이 돌아다녔다. 철웅의 가상공원 모델이 된 실제 공원은 실장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매년 구제를 해도 되돌아오는 실장석들때문에 구청에서는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가상공원에서는 실장석의 운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철웅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데...데스? 여긴 어딘데스?>
“...찾았다!”

철웅은 손을 번쩍 들어 실장석을 맞이했다. 철웅을 보고 놀란 실장석은 이내 데프프프 웃는다. 철웅은 계획대로 확인 질문을 던진다.

“실장채로 맞고 있던 거 너인가?”
<그런데스! 그런데 눈 앞이 새하얘지더니 여기로 온데스! 와타시에게는 초능력이 있는데스! 데프프프프. 똥닌겐은 알아서 와타시를 모시는데스!>

한달 전의 철웅이었으면 이런 건방진 말을 하는 분충의 머리는 진작 박살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철웅은 가방에서 콘페이토를 꺼내 실장석에게 던져준다. 철웅이 준 콘페이토를 허겁지겁 먹는 실장석이었다. 실장석의 눈이 확장된다.

<아마아마한데스! 이게 콘페이토인데스! 대단한데스!>

실장석이 콘페이토를 먹는 사이 철웅은 냉정하게 준비를 마친다. 기어를 머리에 얹고 선을 정리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게 준비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철웅의 손에는 빠루가 쥐어져있다. 이제 노인이 기대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시간이다. 철웅은 빠루를 높이 들어 콘페이토를 먹고 있는 실장석을 내려친다.

<데갸아아아아!!! 아픈데스!>

철웅의 빠루 한 방에 팔이 이그러진다. 실장석은 마구 비명을 지르지만 철웅은 냉정하게 빠루로 발을 노린다. 발이 부숴진다. 실장석은 절규한다.

<갸아아아아아!!! 아픈데스! 아픈데스! 닌겐상은 와타시에게 메로메로되는데스! 더 이상 아프게 하면 안되는데스!>

이제 단 한 번이다. 빠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으로 근육이 굳었지만 그건 팔 한번 휘두르면 풀리는 것이다. 실수하면 안된다. 실수하지 않는다! 

-빠아악!
<가야아아아아아!!! 아픈...데에에에에…>

노인이 눈여겨 본 철웅의 능력은 실장석을 단시간에 행복회로를 돌리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평소 학대를 즐기던 철웅은 실장석의 행복회로를 이용해서 올렸다 떨어뜨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실장석의 행복회로를 돌릴 것. 노인에게 있어서 피실험자가 아지고 있어야 할 가장 최고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철웅은 가지고 있었다.

실장석이 완전히 행복회로에 빠지려면 아직 약간의 타임-랙이 있었다. 그 타임-랙을 놓치지 않아야한다. 철웅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기어에 연결된 선을 실장석에게 꽂는다. 학대로 단련된 손은 꽂아야 하는 부위에 정확히 꽂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선을 다 꽂은 철웅은 기어를 내렸다. 잠시 후 기어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단어들이 나열된다. 그 단어들이 하나하나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모든 단어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이제 빛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빛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철웅은 눈을 감는다.


“바이탈 확인. 동공 체크. 이상 없습니다.”
“접속한 실장석 확인. 나머지는 전부 사망했습니다.”
“접속된 실장석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전부 폐기하도록.”

“과연… 대단한 능력이군.”

노인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반신반의했다. 과연 저 무뢰배같은 남자가 해낼 수 있을 지 의문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부하들은 저런 능력이 없었으니까. 

자신의 부하들은 사회적으로 우수한 자들이었다. 성적도 뛰어나고 육체적인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실험에 번번히 실패했다. 아무리 해도 단시간에 실장석의 행복회로를 일깨우지 못한 것이다. 물론 실험실에서 죽어라도 쳐대면 힘없는 노인조차도 행복회로를 돌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노인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시간에 행복회로를 돌려 그 안에 진입하는 것. 그것만이 노인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도중 흥미로운 영상을 보았다. 학대파들의 사이트인 데스넷에 올라온 영상이었디. 영상의 만듦새가 조악한 것을 보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은듯한 이 영상이 노인을 사로잡은 것이다. 한 남자가 실장석을 후려친다. 하나, 둘, 셋, 단 세 방만에 실장석은 맛이 간 표정을 짓는다. 행복회로를 돌릴 때의 표정이었다. 이윽고 남자는 바로 실장석을 행복회로에서 깨워서 학대했지만 그 뒷부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 세 번의 휘두름으로 실장석의 행복회로를 돌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했다.

뒷조사의 결과는 가관이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변변찮은 직업도 없었다. 학력도 중졸에 불과했고, 주위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공원에서의 학대로 경찰서를 자기 집마냥 다니는 것도 문제였다. 연구소에서는 격렬한 회의가 오고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능력은 우리가 갖출 수 없다. 아니다, 저 남자를 불러서 노하우만 전수를 받자. 온갖 토론이 오가던 중 노인은 결단을 내렸다. 저 남자를 스카웃 하겠다고.

지금도 자신의 그 결정에 확신은 없었다. 다만 철웅의 그 능력만을 믿었을뿐. 그리고 철웅은 멋지게 성공했다. 긴장했던 노인의 몸에서 힘이 풀린다. 준비된 의자에 넘어지듯 앉았다. 주위 사람들이 노인에게 달려들었지만 노인은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자… 철웅군. 달려보게나. 끝까지.”

#

<데갸아아아아아!!!>

실장석은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본다. 어딘가 낮익은 곳이었다. 골판지 하우스가 보인다. 실장석은 뒤뚱뒤뚱 조심스럽게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다. 낮익은 하우스 안. 낮익은 도구들이 보인다. 

<이...이건 와타시의 하우스인데스! 돌아온데스?!>

자신이 영문도 모르고 잡혀오기 전 자기가 살던 곳이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자신이 돌아온 것은 확실했다. 실장석은 자기도 모르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흰 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맞고, 어떤 남자에게 빠루로 맞았던 것은 다 꿈이었나보다. 돌아온 자기의 집에서 기쁨의 댄스를 추고 있을 때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데스? 뭐인데스?>

실장석은 춤추던 것을 멈추고 집 안에 조용히 숨을 죽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지만 실장석은 그저 벌벌 떨며 있을 뿐. 이윽고 소리가 바로 옆에서 멈춘다. 그리고 엄청난 힘이 골판지 하우스째로 실장석을 들어올린다. 실장석은 밖으로 튕겨나갔다. 충격에 정신이 잠시 나간 실장석에게 쿡쿡 찌르는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시선이 따라간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데...데!! 아까 그 학대파인데샤!!!!>

얼굴 윗부분을 이상한 것으로 덮은 아까 그 학대파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학대파는 손에 든 빠루를 높이 든다. 

<아...안되는데샤!!! 와타시는 살아야하는데샤!!!>

실장석은 눈을 감는다.


<...장녀! 장녀! 정신차리는데스!>
<데...데에??>

실장석은 눈을 뜬다. 자신의 눈 앞에 한 실장석이 자신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누구인지 생각하던 실장석의 눈이 점점 커진다.

<마...마마?!>
<그런데스! 장녀가 오늘 좀 이상한데스!>

자신의 마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장석은 눈물이 터지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마마, 자신을 사랑으로 길러준 그 마마가 자신의 눈 앞에 있었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마마는 놀라 눈물을 닦아준다.

<왜 우는데스?>
<마마...마마…>
<독립이 두려운 건 알고 있는데스… 마마도 그랬던데스… 그래도 장녀는 잘 해낼거라 믿는데스.>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던 마마가 환하게 웃는다. 그래, 이 미소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미소였다. 실장석은 눈물을 삼키며 마마를 마주본다. 그리고 실장석이 본 것은 마마의 머리를 우그러트리는 빠루였다. 

<데에에에에에에에에에?!>

실장석은 놀라 빵콘해버린다. 마마가 쓰러진다. 그리고 그 뒤로 거대한 무엇인가가 나타난다. 실장석의 시선이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실장석의 눈이 커진다. 

또 그 닌겐이었다. 얼굴 윗부분을 이상한 것으로 덮은 닌겐. 실장석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목이 막혔는지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닌겐은 빠루를 높이 든다. 실장석은 또 눈을 감는다.


<테에에에에에엥!!!!>

실장석은 벌떡 일어났다. 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기어를 낀 남자는 자신을 계속 쫒아오고 있었다. 어디까지 쫒아오는거지? 공포로 정신이 물들어가는 실장석의 이마가 차가운 무언가가 닫는다.  

<장녀? 괜찮은데스?>
<텟?! 마마인테찌? 테찌?>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몸도 무언가 이상하다. 실장석은 자신의 팔다리를 살펴본다. 짧아보인다. 마마를 바라본다. 마마가 엄청나게 커보인다. 서서 봐도 거대해보이는 마마다. 하우스 구석에 있는 거울로 달려가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귀엽다. 아니아니, 작다. 자신은 지금 성체가 아니라 자실장인 것이다.

<마...말도 안되는테찌…>
<장녀? 뭔가 이상한데스…>
<오네챠? 괜찮은테찌?>

뒤를 돌아본다.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마마가 있다. 그 옆에는 자실장이 서 있었다. 자신의 동생, 차녀였다. 분명 차녀는 학대파에게 걸려서 죽었었는데… 장녀는 터덜터덜 차녀에게 걸어간다. 차녀를 더듬어본다. 차녀가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 차녀를 덥썩 안는다. 당황한 차녀. 그리고 흐믓한 눈의 마마가 있다. 실장석은 고개를 번쩍 든다.

<이럴때가 아닌테찌! 도망가야하는테찌!>
<그게 무슨 말인데스?>
<학대파… 학대파가 와타시를 쫒아오는테찌! 가야하는테찌!>
<...장녀가 악몽을 꾼데스.>
<악몽이 너무 실감났는테찌?>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답답한 실장석이었다. 하지만 곧 주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과 차녀를 껴안았다.

<조용… 조용히 하면 지나가는데스.>
<아닌테찌! 도망가야하는테찌!>

실장석은 버둥거렸지만 마마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이윽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몇 번 주위를 살펴보는 거 같았지만 이내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마마는 그제서야 안심한듯 자신과 차녀를 풀어주었다.

<마마의 말이 맞는데스- 조용히 하면->
-꽈지직
<데샤아아아아아!!!>
<테칫!>

그 순간 골판지 하우스에 큰 충격이 닥쳤다. 안에 있던 실장석 모두가 밖으로 튕겨나왔다. 실장석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 닌겐이었다. 실장석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외쳤다.

<도망가는테찌!!!!!!!!!!!!!!>

하지만 닌겐은 재빨랐다. 일어나려는 차녀를 발로 뭉갠다. 차녀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마마의 머리를 빠루로 으깬다. 순식간에 자신의 가족들이 몰살된 실장석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왜… 왜 와타시를 쫒아오는테찌! 이제 그만 쫒아오는테찌!>
“......”

닌겐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닌겐의 빠루에서는 적록의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마의 뭉개진 머리에도 같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장석의 팬티에 운치가 넘쳐 다리에 흘러 내렸다. 닌겐은 빠루를 높이 들었다. 실장석은 햇빛을 가린 그 빠루를 지켜본다. 제발 이번에는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테챠아아아아아아!!!>

#

찾고, 찾아내고, 또 찾아낸다. 벌써 몇번째인지도 모를 숨바꼭질의 연속. 철웅은 자신의 정신이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철웅의 몸은 그 녀석을 찾고 또 찾는다. 그리고 학대하고, 학대하고, 또 학대한다. 행복회로로 들어가려는 녀석을 잡아 또 그녀석의 행복회로와 연결하는 지루하고 익숙한 작업을 반복한다.

행복회로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실장석이 점점 어려지는 것을 본다. 처음에는 성체실장이었던 녀석이 지금은 자실장이었다. 행복회로 속 녀석은 들실장이었으니 엄지나 저실장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행복회로 속 세상이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철웅은 쫒아가고 또 쫒아간다. 어디까지 쫒아야하는가. 저 실장석은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런 철학적인 질문 따위는 철웅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학대하고 또 학대하며 실장석을 쫒아갈 뿐이었다.

화장실이 보인다. 서쳐의 불이 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철웅은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주변에는 수많은 실장석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태교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중요하지 않다. 철웅은 그런 실장석들을 발로 툭툭 쳐내며 안으로 들어간다. 화장실 안에서는 실장석들의 비명이 울려댔다. 하나, 둘, 여기다. 철웅은 세번째 칸의 문을 연다. 막 출산을 한 성체실장이 당황하며 철웅을 올려본다. 변기 안에는 지금 막 나온 저실장이 있었다. 철웅은 손을 뻗어 저실장을 든다. 대충 점막을 벗겨낸다. 

손과 발이 나와야 할 저실장이었다. 하지만 저실장은 철웅은 바라볼 뿐이었다. 철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분명 서쳐는 이 녀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저실장은 철웅에게 말을 걸었다. 링갈은 필요없었다. 

“각오는 된레후?”
“...각오?”
“여기서부터는 인간이 들어가서는 안되는레후.”
“여기에 들어온 거 자체가 인간이 들어오면 안되는 거 아닌가.”
“레프프프프. 하긴, 그런레후.”

저실장은 철웅의 손바닥 안에서 몸을 쭉 편다. 그리고 철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웅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오무렸다. 따뜻한 저실장의 감촉이 느껴졌다. 철웅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힘을 주었다. 자신의 주먹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온다. 철웅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만다.

#

“심박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에피네프린! 에피네프린 없어?!”
“깨워야 합니다!”

철웅의 심박수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연구진은 철웅을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한다. 한 연구원은 철웅을 깨워야한다고 노인에게 외친다. 하지만 노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강심제는 서둘러 주사하게. 하지만 깨우지는 말게.”
“하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지네. 걱정말고 계속 진행해!”

노인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깨우는 것을 제안했던 연구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다른 연구원이 심장에 주사를 가져간다. 약물이 순식간에 심장으로 빨려들어가지만 심박은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노인에게 모여있지만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노인이 쥔 의자 손잡이가 땀으로 흥건해져간다. 노인은 30분 전 철웅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뭐라고?”
“내가 깨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했소.”

철웅은 노인을 보며 말했다. 노인은 소리쳤다.

“말도 안되네. 자네의 생명이 위험하다면 당연히 깨워야지!”
“모든 건 위험을 감수해야한다고 말한 건 노인이오만.”
“그건 내 목숨을 걸었을 때 이야기야! 남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진 않아!”
“그러니까 노인에게 미리 말해두는거요. 내 목숨을 내가 건다는 걸을 말이오.”

철웅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노인은 왠지 철웅이 낮설게 느껴졌다. 한달 전의 그 무례했던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인가?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모든 것을 각오한 남자였다. 노인은 철웅의 팔을 움켜쥐었다. 단단해진 팔뚝이 느껴졌다. 철웅은 씩 웃었다.

“물론 나는 꼭 살아 돌아올 것이오. 노인에게 약속한 돈도 받을 것이고.”
“그래야지. 이 사람아!”
“그래도, 만약 내가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조금은 위험을 감수할 것이오. 설령 그것이 내 목숨을 갉아먹는다면 그것도 감수해야할 것이오.”
“......”
“노인은 나를 필요로 해주었소. 물론 그 필요가 별 거 아니라고 해도 말이오.”

철웅은 노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보겠소. 그리고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어머니에게 잘 전해주시오.”

회상을 끝낸 노인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철웅과 자신은 약속을 했다. 철웅의 의지를, 자신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저 노인은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철웅군… 무사히 돌아오게!’

#

철웅은 눈을 떴다. 새하얀 공간이 있었다. 이윽고 새하얀 빛이 걷히더니 아까 그 실험실의 모습이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자신이 누워있는 모습을 자신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철웅은 발을 땅에 댄 후 누워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허. 말로만 듣던 그 유체이탈인가 뭔가 하는 느낌인가?”

철웅은 누워있는 철웅의 손을 살짝 만진다. 그 순간 방안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철웅은 긴장하지만 그 순간 철웅은 엄청난 광경을 본다. 모든 사람의 등 뒤로 그 사람이 쭉 나열되는 것이다. 그 나열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철웅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의 기록 전부였다. 

철웅은 다시 자신을 내려다본다.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 밑으로 자신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였다 마신다. 자신이 가야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만 각오를 굳히기 위한 숨쉬기였을 뿐이다. 자신들이 나열된 그 곳으로 철웅은 뛰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정말 쓰레기였소.”

철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방바닥에 누워 티비나 보는 자신이 있었다. 어머니는 밖에서 일을 하고 계시겠지.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이제서야 자신이 어떤 불효를 했는지를 깨달은 기분이다. 아니, 사실 알고는 있었다. 그것을 마주보지 못했을 뿐이지. 철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뛰어들었다.


“...철웅군, 어머니가 얼마나 자네를 부탁했는 줄 아나?”
“그걸 내가 알 바요? 힘들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 일 따위 할까보나.”

“...멍청한 놈이었군. 나는.”


“밖에서 그렇게 실장석만 때려잡지 말고 다른 걸 하면 안되겠니…?”
“...흥.”


“내가 왜 당신같은 사람에게 번호를 줘야하죠?”
“저… 그게…”
“별 거지같은 게…”


“이 병신같은 게!”
-퍽
“으... 아…”
“꺼져 좀. 더러우니까.”

...

“아이고… 철웅아빠… 아이고…”
“엄마… 아빠가 왜 저기 있어? 응?”
“아이고… 이 어린 것을 두고 어떻게 먼저가요… 아이고…”


스쳐지나가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철웅은 울고 화내고 슬퍼하고 웃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힘든 인생이었지만, 그 힘든 인생을 비참하게 했던 것은 그 힘듦을 핑계대고 도망갔던 자신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날아가던 철웅은 문득 멈춰선다.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네를 미는 남자. 그네에 앉은 아이는 신나서 즐겁게 웃고 있었다. 철웅은 그 남자에게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남자는 철웅을 눈치챈 듯 뒤를 돌아본다.

“...철웅이냐?”
“네, 아버지.”

남자는 웃으며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철웅은 머뭇거리다가 그 옆에 앉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말없이 앉아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가 말을 건넸다.

“...네 어머니는 잘 지내냐?”
“아니오… 고생만 하십니다…”
“저런…”
“저때문에… 못난 저때문에…”

철웅의 두 손이 철웅의 얼굴을 덮는다. 손 밑으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철웅은 그저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그런 철웅을 남자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지나 감정을 추스린 철웅이 고개를 든다.

“저는 다시 가야합니다.”
“알고 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을 보고 싶은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끝을 봐야지요.”

철웅과 남자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어느덧 자기보다 커진 철웅을 올려다본다. 철웅의 어깨에 손을 뻗어 토닥여준다. 철웅은 말없이 남자의 행동을 지켜본다. 남자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철웅을 바라본다. 

“나가게 되면 어머니한테 효도 좀 해라. 그리고 내 말도 전해다오. 당신을 두고가서 미안하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버지.”

철웅은 꾸벅 고개를 숙인다.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철웅은 그네를 타고 있는 자신에게로 다시 달려가 뛰어든다.


철웅은 병원에 있었다. 문을 열고 수술실에 들어간다. 자신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수술실 안에는 어떤 여성이 한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한 숭고한 고통. 철웅은 그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이윽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의사가 아이를 안아 여자에게 보여준다. 울음이 터져나온 여자는 아이를 안고 울먹인다. 철웅은 다가가 아이를 받아든다.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철웅을 올려다본다.

“...여기까지 온거야?”
“...그렇소.”
“대단하네.”

아이는 방긋 웃었다. 철웅도 따라 웃었다.

“각오는 했어?”
“그건 여기 올 때부터 했었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을 보겠다고 말이오.”
“그래. 그럼 끝을 보자. 거기에 네가 원하는 것이 있기를 바랄게.”
“내가 원하는 걸 보고싶은게 아니오. 거기에 있는 것 그 자체를 보고 싶을뿐.”

철웅의 말에 아이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네. 그럼 끝에 있는 걸 잘 보기 바랄게.”
“...고맙소.”

철웅은 아이를 들어 자신의 이마를 아이의 이마에 가져다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폭발하는 빛이 모든 것을 감쌌다. 

#

: 너는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자신을 묻는 목소리에 철웅은 눈을 떴다.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흰 공간과 자신뿐. 철웅은 그래도 그 질문에 대답하기로 한다.

“나는 철웅이라고 하오.”
: 여긴 왜 왔어? (왜 왔어? 왜 왔어? 왜 왔어? 왜 왔어? 왜 왔어?...)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오.”

철웅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는 그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건… 너의 궁금함이 아니었잖아? (었잖아? 었잖아? 었잖아? 었잖아?...)
“그렇소.”
:그렇다면 왜 네가 온 거야? (온 거야? 온 거야? 온 거야? 온 거야? 온 거야?...)
“나만이 올 수 있었기 때문이오.”

철웅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는 그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제는 알 거 같아? (알 거 같아? 알 거 같아? 알 거 같아? 알 거 같아?...)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소.”

철웅의 쓰게 웃는다.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여기에 온 인간엔 네가 처음일거야. (일거야. 일거야. 일거야. 일거야. 일거야….)
:그러니까 (니까 니까 니까 니까 니까 니까 니까…)
:나들이 도와줄게 (줄게 줄게 줄게 줄게 줄게 줄게…)
:네가 궁금해 하던 그 답을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좋소. 각오하고 있던 바요.”

철웅은 웃는다. 언제 지었는지도 모를 푸근한 미소.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준비한다. 꽉 쥔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될 정도였다. 각오를 다진 철웅은 외쳤다.

“자 오시오!”

철웅의 외침과 동시에 공간에 있던 모든 빛이 철웅에게 달려든다. 철웅의 모든 곳에 빛이 쑤셔들어간다. 머리도,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손도, 발도, 다리도, 팔도, 몸도. 부위를 가리지 않고 빛이 쑤셔들어간다. 철웅은 크나큰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만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앙다문 입에서 피가 튄다.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흐른다. 하지만 철웅은 참는다.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 있는지를…! 이제 알 수 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철웅은 고통을 잊기 위해 다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

“심박수 200! 아니 250!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동공이 미친듯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깨워야 합니다! 이러다가 죽습니다!”

누워있는 철웅이 미친듯이 떨기 시작한다. 연구원들의 절규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노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가장 철웅의 생환을 바라는 그였지만 철웅이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그 의지가 노인의 입을 막는다. 손잡이를 쥔 손이 저리다. 오랫동안 너무 세게 잡고 있던 나머지 피가 통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저린 손에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제발… 제발 철웅군!’

노인은 간절히 기도했다. 그 순간이었다. 철웅이 딱 멈추었다. 모든 바이탈 사인들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방 안에 있던 모두도 멈춰섰다. 지금 방 안에서 들리는 것은 기계들이 내는 소리뿐이었다. 노인은 벌떡 일어나 철웅에게 향한다. 누워있는 철웅을 바라보더니 손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은 점점 커졌다.

“일어나게… 일어나!!”

노인이 절규한다. 그런 노인을 말리기 위해 연구원들이 다가온다. 그런데 그 순간, 철웅의 눈이 열렸다. 동공이 수축되는 것이 보인다. 노인과 연구원들을 할 말을 잃는다. 철웅의 시선이 노인에게로 향한다. 노인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철웅에게 말을 건다.

“철웅군… 내 말이 들리는가…?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주게…!”








“...레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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