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살장 1~3 (완)

 


들실장의 일과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다른 들실장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혹여나 인간과 마주치면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거나 곧바로 죽음을 맞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있는 골판지에서 한 성체실장이 마침 집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 마마는 나갔다 오는데스. 자들은 싸우지 말고 집을 잘 보고 있는데스. "

" ...다녀오시는테치. "

자실장 네 마리와 엄지실장 한 마리, 골판지 안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새끼 실장석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밤에 꾸지람을 들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가장 큰 자실장 한 마리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등을 돌리고 골판지의 벽면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성체실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골판지 밖으로 나갔다. 


성체실장이 집을 나선 지 대략 10분이 지났다. 보통 친실장이 집을 나서면 남은 자들은 마음을 풀고 노는 경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들은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입을 굳게 다물고 골판지의 문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쥐죽은 듯한 적막을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자실장 하나가 가장 큰 자실장, 장녀에게 말을 걸었다.

" 오네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테치? 아직도 안 되는테치? "

" 아직인테치. 지금 나가면 안 되는테치. "

장녀가 눈짓으로 벽면에 놓인 거의 비어 있는 물병을 가리키자 말을 건 자실장도 입을 꾹 다물었다.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숨 막힐듯한 정적 속에서 시간은 흘러 다시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날 무렵에 닫혔던 문이 열렸다. 

" 마마가 서두르느라 물병을 깜빡한데스.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르겠는데스. 그래도 가능한 한 빨리 올 테니 걱정 마는데스. '

누구도 묻지 않았음에도 성체실장은 혼잣말을 하며 물병 앞으로 걸어갔다. 가벼운 물병을 번쩍 들어서 봉지 안에 넣은 성체실장은 몸을 돌려 다시 골판지를 나가려고 했다. 자들은 성체실장이 들어온 순간부터 아무 말 없이 성체실장의 행보를 눈으로 좇았다. 계속 따라다니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집을 다시 나가려는 성체실장은 잠시 움찔하며 멈췄다가 집 밖으로 나갔다.


' 텟테레~ '

친실장의 총구를 비집고 세상에 나왔다는 기쁨에 지른 환호성, 바깥세상에 대한 장녀의 첫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바닥에 고인 물의 차가움이 장녀의 몸에 전달되기도 전에 서둘러 장녀를 들어 올린 친실장은 장녀의 몸을 둘러싼 점막을 정성스럽게 핥아주었다. 간지러움에 키득거리던 장녀를 핥아주던 친실장의 손이 땅에 내려왔을 때, 그곳에는 어엿한 자실장 한 마리가 있었다. 
자신의 첫 번째 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친실장은 자신의 차례를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분대에서 빠져나오려는 태중의 자들의 움직임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자들의 출산에만 전념해야 했다. 장녀도 계속되는 통증에 정신이 혼미한 친실장을 도와 체내에서 나온 동생들의 점막을 핥아서 떼어주었다. 그날, 화장실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친실장의 뒤로 네 마리의 자실장과 세 마리의 엄지실장이 줄지어 따라갔다.

친실장은 풋내기 성체실장이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되어 성체실장으로 성장하자 마마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집을 떠난 장녀의 친실장은 여느 성체실장이 그렇듯이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무섭게 꽃을 꺾고는 자들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출산의 때가 되어 자를 갖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친실장에게 운도 따랐는지 지나가는 동족과 마주치거나 별다른 위험 상황 없이 자들을 집으로 무사히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독립하기 전까지 자신들의 안식처가 될 골판지의 내부를 정신없이 구경하는 엄지들의 뒤로 친실장이 다가왔다. 
대부분의 들실장들은 엄지를 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어 애지중지 기른 자실장조차도 독립시킬 수 있다고 확답할 수 없는 판국에 자실장보다도 연약하고 정서적으로 더 불안한 엄지실장을 기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대다수의 엄지는 곧바로 버려져 집을 구경도 못 하며, 집에 무사히 도착한다 한들 자신을 낳아준 친실장의 손에 독라가 되어 운치굴에서 저실장을 돌보는 노예가 된다. 그나마 자실장들과 같이 기르는 엄지실장조차도 자실장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 취급을 받다가 겨울처럼 식량이 귀중한 시기에 접어들면 지체하지 않고 보존식으로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엄지들에겐 다행히도 그들의 친실장은 저실장마저도 아끼는 성품이 고운 마마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엄지 셋을 한꺼번에 들어 올려 품에 껴안고 빤히 내려보던 친실장은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엄지들의 행동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머지 자신의 뺨에 엄지들을 격하게 부볐다.

자들의 첫 식사 시간에서 자신의 젖을 먹던 장녀와 차녀를 부드럽게 떼어놓은 친실장은 조금 더 젖을 먹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장녀와 차녀에게 다른 동생들도 젖을 먹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두 자매도 침을 흘리며 친실장의 가슴을 넋 놓고 보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더니 순순히 수긍했다. 
막내까지 젖을 다 먹자 친실장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수집해놓은 음식을 꺼내어 나누어주었다. 다디단 모유를 먹은 직후였기에 동생들의 점막을 아무 불평도 없이 핥아서 떼주었던 장녀조차도 거부감을 느낄 만큼 형편없는 맛이었지만, 기대 어린 눈으로 자신들을 보는 친실장을 실망하게 하기 싫었던 자들은 군말 없이 식사했다. 식사 후 친실장이 말해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린 자들은 친실장의 따스한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장녀와 자매들의 일상은 늘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자들에게 젖을 물리고 아침 식사 후 집을 나선 친실장이 해 질 녘이 되어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장녀와 자매들은 집 안에서 얌전히 친실장을 기다려야 했다. 자들은 친실장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했지만, 친실장은 같이 다녀도 될 만큼 충분히 자라면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하며 상심한 자들을 달래었다. 자신들을 조심스레 달래는 친실장의 태도에 자들도 욕심을 꺾고 수긍했다. 함께 지낼 자매들도 있으니 친실장이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자매들의 소망은 한결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성장하여 언젠가 친실장의 곁에서 넓은 세상을 함께 걷고 싶었다. 만약 그때까지 친실장이 자들의 교육을 부지런히 했다면, 친실장의 수집 활동을 돕겠다는 기특한 마음마저 품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실생에서 정해진 미래란 없었다. 풋내기 친실장과 자들도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들이 친실장의 몸에서 나와 땅에 두 발을 내디딘 지 대략 일주일이 지났다. 엊그제 야외에서 행한 첫 목욕에서 작은 돌멩이로 허술하게 눌러놓았던 막내 칠녀의 두건이 날아가 버리는 불상사가 있긴 했으나, 장녀와 자매들은 별 탈 없이 건강히 자라고 있었다. 엄지들까지도 이제 젖을 완전히 떼고 친실장이 주는 음식을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였다. 자매들끼리 놀며 시간을 보내며 놀던 그때, 골판지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엇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종일 수고한 친실장을 위해 다정한 인사말을 건네려던 자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친실장을 보고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악몽으로도 보기 두려운 상황을 목격하여 공황 상태에 빠진 자들은 친실장에 대한 걱정에 금방 제정신을 차렸다. 몇 발자국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달려 친실장에게 가던 자들은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덜컥 멈춰서더니 친실장의 주위를 맴돌며 코를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자들은 쓰러진 친실장이 너무 낯설었다. 쓰러져있는 친실장의 얼굴에서는 늘 익숙하던 냄새가 났지만, 몸으로만 내려가도 처음 맡는 냄새가 섞여 있었으며, 옷 밑으로 노출되는 하반신부터는 자들이 기억하는 친실장의 냄새가 아니었다.
이상한 건 냄새만이 아니었다. 친실장은 평소에 들실장에게 있어 단 한 벌뿐인 옷은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가르치며 자들에게 모범이라도 보여주듯이 옷을 늘 깔끔하게 유지하고 잡티 하나 없도록 잘 관리했다. 그러나 지금 친실장의 모습을 보면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이 곳곳이 살짝 찢어진 건 물론이며 치마도, 소매도 몸보다 짧아 보였다. 하지만 자실장의 머리 하나가 쏙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구멍이 크게 난 두건은 분명 친실장의 것이었다.

' 데...데에... 자..장녀, 어디있는데스. '

이건 마마의 목소리가 아니다. 자신을 부르는 성체실장의 말을 듣는 순간 장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이질적인 느낌의 연속됨에 장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성체실장이 정말 자신들의 마마가 맞는 걸까? 

' 마..마? 정말 마마가 맞는테치? '

' 마마가 맞는데스. 와타시가 장녀의 마마인 게 당연한데스. 왜 마마를 몰라보는데스? '

' 왜 이렇게 다친테치?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던테치? '

' 데히... 나쁜 분충이 집으로 돌아오는 와타시를 습격한데스. 힘겹게 싸워서 이겼지만 싸우는 동안에 상처를 제법 입은데스. ' 


' 그리고 목소리는 왜 그런테치? 마마의 목소리는 이렇게 이상하지 않았던테치. '



' 여기를 보는데스, 분충의 보검이 와타시의 목을 훑고 지나간데스. 공격이 조금만 더 깊었다면 쓰러진 건 와타시였던데스. '

손으로 자신의 목에 난 상처를 가리키는 성체실장을 보는 장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평소와는 너무나 달라 보이는 마마의 모습, 그렇지만 자신의 질문에 그럴듯한 답변을 거침없이 이어가는 성체실장의 모습은 아주 당당해 보였다. 단순히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까? 주위를 살피니 다른 동생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몇몇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고, 일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꼬르륵 -

성체실장과 자들은 일제히 육녀를 쳐다봤다. 두 팔로 배를 감싼 육녀는 지금의 상황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미안한데스. 마마가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자들이 배고프단 것도 잊었던데스. '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성체실장은 골판지의 입구로 걸어가 문을 닫고는 아까 쓰러질 때 떨어뜨렸던 봉투를 들었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봉투를 질질 끌고 와 바닥에 몸을 뉜 성체실장은 다시 장녀를 불렀다.  

' 장녀, 이리오는데스. 마마가 지금 다쳐서 자들에게 밥을 나눠주기도 힘드니 장녀가 마마 대신에 자들에게 밥을 나눠주는데스. '

' 테... 와타치가 해야 되는테치? '

' 마마의 일을 떠넘겨서 미안한데스. 그렇지만 오늘의 밥은 맛있는 고기니까 맛있게 먹고 마마를 쉬게 해주는데스. '

' 고.. 고기인테치? '

저녁이 고기라는 말을 듣고 술렁거리던 자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말로만 듣던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나타나자 너무나 기뻐서 춤추려던 자들은 뒤늦게야 성체실장이 다친 것을 기억해내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성체실장을 보았다. 그런 자들을 안심시키듯이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성체실장을 본 자들은 환호하며 장녀에게 달려갔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동생들의 모습에 움찔했던 장녀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동생들을 멈추게 했다. 자매들은 장녀의 통제 아래 차례대로 고기를 받고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 먹는 고기가 너무 맛있는지 귀를 파닥거리며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자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성체실장은 누군가가 자신의 옷을 당기는 것을 깨닫고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성체실장의 발치에서 품에 자신 몫의 고기를 껴안고 있는 육녀가 성체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 마마는 밥을 먹지 않는레치? '

' 괜찮은데스. 마마는 집에 오기 전에 너무 힘이 없어서 미리 식사하고 온데스. 마마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가서 밥을 먹는데스. '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을 덜어주는 성체실장의 말에 육녀도 자리에 앉아서 고기를 한 입 베어 물고는 귀를 파닥거렸다. 성체실장은 바닥에 누우니 피로가 몰려왔는지 눈을 반만 뜬 채 즐거이 식사하는 자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즐거운 분위기에 영향받지 않는 자가 딱 한 마리 있었다. 왠지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칠녀는 성체실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식사를 마치고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보다 훨씬 큰 두건을 아래로 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사흘이 지나자 성체실장은 상처를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이전의 목소리는 되찾지 못했지만, 처음에는 왠지 모를 낯섦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던 자들도 그동안 회복 중인 성체실장의 주위에 모여 다른 자매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상에 익숙해졌는지 더는 어색해하지 않고 성체실장에게 애정을 표했다.

완쾌를 축하하는 자들과 기쁘게 아침 식사를 마친 성체실장은 자들의 주의를 끌어모으고는 사실 자신은 들실장이 아닌 사육실장이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인간에게 길러지는 사육실장, 너무나 달콤한 그 말은 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친실장이 사육실장이라면 친실장의 자인 자신들 또한 사육실장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는 이전에 친실장이 자들에게 말해주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 친실장의 마마와 다른 자매들과 함께한 들실장으로 살아온 삶과는 상충하는 이야기였다. 이를 지적하며 연유를 묻는 자들에게 성체실장이 답하기를, 지금까지 들실장처럼 연기한 이유는 모두 자들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사육실장이 자를 갖는 것은 쉬이 허락받을 수 없는 일, 그렇지만 성체실장의 주인은 성체실장에게 자를 가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 대신 주인이 건 조건은 단 하나, 자를 기를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공원에서 들실장으로 살며 키운 자들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것이 사육실장임에도 인간의 집을 떠나 공원에 사는 이유였다. 이전에 자들에게 해준 과거 이야기는 단지 성체실장이 공원에 정착하는 걸 도와준 친절한 오바상과 자들의 이야기를 말한 것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슬프게도 모든 자가 조건 없이 사육실장으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공원에 사는 들실장들이 가망 없는 자들을 솎아내듯이, 자들 또한 사육실장에 걸맞은 자격을 갖췄는지 시험에 들게 된다고 했다. 만약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 자는 가족들과 헤어져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그 시험을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마마를 믿고 부지런히 훈련받는다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자들을 다독이는 성체실장이었다. 
그날 이후로 자들의 소망은 변모되었다. 마마를 슬프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매들과 다 같이 당당히 시험에 통과하여 사육실장이 되겠다는 꿈으로. 당시에 자들은 그렇게 다짐했었다.


" ... 네챠. 오네챠. "    

" 오네챠, 아직도 안 되는테치? "

자신을 부르는 동생들의 목소리에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장녀는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휘휘 둘러본 장녀는 바로 옆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차녀뿐만 아니라 다른 자매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난테치? "

" 처음 나갔을 때와 비슷한테치. "

차녀의 대답을 들은 장녀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 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장녀는 그리 넓지도 않은 골판지 안을 거듭하여 확인하는 작업이 지겹지도 않은지 꼼꼼히 확인해봤지만, 성체실장이 다시 챙기려고 돌아올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댄 장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따져도 성체실장이 굳이 집에 다시 들릴 이유는 없는 듯했다. 그에 따라 집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졌을 테니, 지금 즉시 돌아온다고 해도 시간이 꽤 필요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었다. 
몸을 도로 꼿꼿이 세운 장녀는 문을 등지고 서서 자매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주의를 끌어모으고는 입을 열었다.

" 다들 잘 듣는테치. 밖에 나가면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되는테치. 와타치타치를 지켜줄 마마가 없으니 다른 오바상들한테 발각되면 우린 전부 끝장인테치. "

" 오네챠, 어디로 갈지는 정한테치? " 

" 태어나서 집으로 오던 길이 기억나는테치? 그때, 마마는 와타치타치를 마마의 마마에게 소개해주려고 했던테치. 와타치타치는 마마의 마마를 찾아가야 하는테치. 그때는 만나지 못했지만, 마마의 마마라면 와타치타치를 도와줄지도 모르는테치. "

" 하지만 마마의 마마가 이번에도 집에 없다면 어떻하는테치? "

" 마마의 마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테치. "

" 그 방법은 너무 위험하지않은테치? 위험한 오바상들은 냄새를 잘 맡는다고 마마가 말했던테치. " 


" 어쩔 수 없는테치. 사녀도 알고 있지 않은테치? 이젠 시간이 더는 없는테치.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들에게 대답해주던 장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말은 쉽지만, 마마의 마마의 집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거라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마마의 마마가 자신들을 도우리라고도 확신할 수 없다. 혈연이니 뭐니해도 들실장들은 독립하면 기존의 가족과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였고, 마마의 마마라고 한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낯선 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들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선택지라곤 고작 이것뿐이었으니까.

" 그럼 이제 나가는테치! "

마음속에 피어나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고 당당함을 위장한 장녀는 힘차게 문을 밀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 테? "

친실장과 함께가 아니라면 집을 나간 적 없는 장녀와 자매들은 문의 한 번도 직접 열어 본 적이 없었기에 무게를 알지 못했다.  
마마는 그렇게나 가볍게 밀고 나가던 문이었는데... 늘 제자리에서 자신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던 문의 무게에 새삼스레 놀란 장녀는 정신을 다잡고 온 체중을 실어 문을 밀었지만, 장녀가 낑낑거리며 밀어도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쑥덕거리는 다른 자매들은 혹시나 집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동생들의 동요를 느낀 장녀가 이를 악물고 문을 밀었음에도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와타치도 돕는테치! "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달은 차녀가 장녀의 옆에 서서 문을 같이 밀기 시작했다. 두 자실장은 있는 힘을 몽땅 끌어내며 분투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두 자실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문을 밀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잠깐... 잠깐만 쉬는테치. "

장녀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기진맥진한 두 자매는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손에 땀을 쥐고 언니들을 응원하던 다른 자매들도 생각지 못했던 실패에 할 말을 잃었는지 망연자실해 했다. 골판지 안에는 지친 두 마리의 자실장이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만 맴돌았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는 장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생애 처음으로 한 도전에서 실패한 장녀는 절망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어린 자들에게 본심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그나마도 장녀를 제외한 다른 자매들은 성체실장에 대한 적의를 도무지 숨길 수 없어, 투정을 부리는 것마냥 성체실장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어린 자들이 자매들의 연이은 죽음에 큰 충격받았으리라고 짐작한 성체실장이 대충 넘어가서 그렇지, 조금이라도 수상히 여겼다면 대번에 속마음을 읽혀 또 몇 마리나 죽어 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 실패를 교훈 삼아 좀 더 철저히 준비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미 동생들은 물론 장녀까지도 정신이 한계까지 몰려 성체실장에게 발각되어 죽느냐 혹은 스트레스로 자괴해 죽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들은 아직 어린 자에 불과했다.

장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의 계획은 일반적인 자들이 으레 행하는 호기심을 가장한 단순한 방종이 아닌 자매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다. 이제는 없는 먼저 떠나간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보기 좋게 실패해버렸다.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계획을 세웠으면 실제로 실행이 가능한지 미리 시도해봤어야 했는데 성체실장에게 발각될까 봐 그렇지 못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일을 망쳤다는 죄책감이 위석을 자극하자, 장녀는 찌르는듯한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 오네챠! 이걸 보는테치! "

그때였다. 무얼 보고 흥분했는지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사녀의 재촉에 힘겹게 시선을 옮긴 장녀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벌떡 일으켜 문 앞으로 갔다. 멍한 표정을 지은 차녀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장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 빛조차 거의 들어오지 않게 잘 닫혀있던 그 문이 조금이나마 열려있었다. 성체실장이 문을 열고 집을 떠나가거나 집에 돌아올 때 잠시나마 볼 수 있었던 광경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장녀는 틈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넋 놓고 바깥의 풍경을 보던 장녀가 제정신을 차리고 벌어진 틈으로 두 손을 비집어 넣고는 안으로 당기자, 뒤에 서 있던 차녀도 장녀를 흉내 내 문 한쪽을 당기기 시작했다.

" 테챳! "   " 테벳! "

온 힘을 다해 문을 당기던 두 자실장은 자신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이좋게 뒤로 놔 뒹굴었다. 조금 전에 온 힘을 다하며 밀어도 문이 미동도 하지 않았던 일이 거짓이었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나 장녀는 기뻐하지 못했다. 쓰러진 몸을 일으킨 장녀의 두 눈에는 드넓은 바깥의 모습이 아니라, 문 앞에 떡하니 놓인 우중충한 회색의 물체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표면을 더듬고 코를 킁킁거리며 관찰한 결과, 장녀는 그 물체가 돌임을 깨달았다. 원래는 땅속에 있었는지 아직 축축한 흙내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자실장의 힘으로 움직이기에는 턱도 없이 무거워 보였다.

난데없이 집 앞에 놓인 돌은 장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지만, 지금은 돌의 방해를 뚫고 밖으로 나가는 게 더 중요했다. 
자신의 키보다도 높은 돌을 올려보며 장녀는 생각에 잠겼다. 돌을 굳이 치우지 말고 위로 올라가서 통과해보면 어떨까? 그러나 돌의 거칠기 짝이 없는 표면을 손으로 훑은 장녀는 다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몸을 문대며 올라가다가는 상처를 입을지도 몰랐다. 동족들은 피 냄새에 아주 민감했기 때문에 돌을 타고 올라 탈출한다고 하더라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면 다른 위험한 어른 실장석들을 불러모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올라가다가 땅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아직 어려 연약한 자매들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친실장의 젖을 먹기 위해 매달리는 것 말고는 ' 올라간다 ' 는 행위를 해본 적이 없기에 자신 있게 시도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렇다면 역시 돌을 밀어내고 나가야 하나? 하지만 차녀와 둘이서 젖먹던 힘까지 끌어써도 조금만 밀어낼 수 있었던 돌을 정말로 밀어낼 수 있을까? 자신의 행동에 다른 동생들이 미래까지 걸려있음을 알기에 장녀가 머리를 팽팽히 돌리는 사이, 다른 자매들은 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오네챠, 전에도 이런 게 집 앞에 있던테치? "

" 테에.. 잘 모르겠는테치. 이모우토챠도 잘 알지 않는테치? 배웅을 제대로 한 건 장녀 오네챠 뿐인테치. 아마 없었던 것 같은테치. "

" 하지만 아까 그 분충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테치? 저렇게 큰 게 문을 막고 있으면 어떻게 들어오는테치? "

" 와타치도 모르는테치. "

" 혹시 다른 오바상이 가져다 놓은 것 아닌테치? 마마가 전에 남의 자를 잡아먹는 무서운 오바상은 조심하라고 했던테치. "

" 그건 아니라고 보는테치. 저만한 돌을 힘들게 드는 것보다 그냥 문을 여는 게 훨씬 쉬우니 그럴 이유가 없는테치. "

" 오네챠, 아타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큰 돌도 번쩍 들어올리는레치? " 

" 물론인테치. 귀여운 이모우토챠도 어른이 되면 마마만큼 힘이 세지는테치. "

" 아타치 얼른 어른이 돼서 오네챠를 지키는레치! 오네챠를 괴롭히는 나쁜 오바상도 힘센 어른이 된 아타치가 혼내주는레치! "

" 테프프, 와타치가 어른이 되는 게 더 빠른테치. 나중에도 먼저 어른이 된 와타치가 귀여운 이모우토챠를 지켜주는테치. " 

" 레츙♡ "

어린 자들이 집중력을 잃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 놓은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자들의 관심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어 담소를 주고받았다.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급했던 마음에 안정을 찾은 건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절박했던 이유마저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 그 분충의 짓이 분명한테치. "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자매들은 그들의 주의를 불러들인 장녀에게 시선을 모았다.

" 최근의 일을 잘 기억해보는테치. 분충은 물병이나 비닐봉투중 하나를 꼭 놓고 가서 중간에 다시 집에 돌아왔던테치. 와타치는 집에 들어온 분충이 재빠르게 눈으로 와타치타치를 훑는 걸 여러 번 본테치. "

" 틀림없는테치. 분충은 자신이 나간 사이에 와타치타치가 밖으로 나갈까 봐 두려워서 돌로 문 앞을 막아놓고 떠난 게 분명한테치. "

" 장녀 오네챠, 그러면 어떻하는테치? "

" 이모우토챠타치, 와타치를 도와주는테치. 이번에는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나가는테치. 반드시 마마의 마마를 찾아가는테치! "

결국 장녀는 사랑하는 동생들이 다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돌을 밀어내서 탈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한 번에 조금씩밖에 밀어낼 수 없다면 여러 번 반복해서 나갈 수 있을 만큼 공간을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돌에 양손을 갖다 댄 장녀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미 다른 동생들도 준비를 마치고 장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동생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다시 교환한 장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에 힘을 실었다.

예상대로 돌은 쉬이 치울 수 없었다. 자매들은 똘똘 뭉쳐 돌을 밀어내려고 애썼으나, 처음에는 그래도 조금씩 밀리는 느낌이라도 들던 돌은 어느 순간부터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매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을 밀자 다시 움직이는 듯 하였지만, 돌은 어린 자들을 약 올리듯이 살짝 밀어낸 만큼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앞서 작은 성공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자들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잠시 쉬던 장녀는 자신의 등 뒤에 맞닿은 작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을 느끼며 정신을 다잡았다. 일의 성패에 모든 자매의 운명이 걸려있음을 상기하며.

짧은 휴식을 마친 자실장 네 마리는 다시 땀을 비처럼 쏟으며 온 힘을 실어 돌을 밀었다. 엄지인 오녀도 별 도움은 되지 않지만 조막만 한 손으로 장녀의 등을 밀며 힘을 보탰다. 몇 번이나 낑낑대며 도로 원위치로 돌아오는 돌을 밀어냈을까, ' 툭 '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돌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균형을 잃은 자들은 비명을 지를 힘도 없어 조용히 앞으로 엎어졌다. 

지친 자들의 위로 밝은 빛이 내려쬐었다.   
따스한 햇볕으로 포근한 대기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어린 자들의 피로한 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스쳐 갔다. 정신을 차린 자매들은 멍한 눈으로 바깥 풍경을 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외부의 정경은 자매들이 상상으로 그리던 광경과 큰 차이가 없었다. 
쓰러진 언니들 위로 넘어져 가장 먼저 일어난 오녀는 외부의 풍경에 매혹되었는지 흥분하여 집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 해낸레치! 세상이 아타치를 기다리는레치! "

" 오녀! 밖에서는 큰 소리를 내면 안 되는... "

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가던 오녀는 집 밖으로 발을 딛기가 무섭게 커다란 손에 붙잡혀 머리가 공중에 떠올랐다. 주의를 주려던 장녀는 눈을 휘둥그레 떳다. 장녀와 다른 자매들은 숨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키더니 시선을 위로 향했다. 자매들의 시선이 도달한 그곳엔 집을 나갔던 성체실장이 한 손에 오녀의 머리를 살포시 움켜쥐고는 자매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 푸드드득 -


엉덩방아를 찌며 제자리에 주저앉은 네 마리의 자실장은 미리 약속이라도 했던 듯이 동시에 팬티에 운치를 쏟아내었다. 





' 텟테로게~! 텟테로게~! '

' 뎃데로게~ 뎃데로게~. 사녀, 무작정 큰 소리로 부른다고 해서 좋은 노래가 되지 않는데스. 목소리를 좀 더 곱게 다듬는데스. '

' 테텟! 테텟! 테에.. 테히이.. '

' 춤솜씨가 훌륭한데스 차녀. 그 정도라면 시험 통과는 낙승인데스! 다만 아직 체력이 부족하니 부지런히 몸을 단련하는데스. '

' 이.. 이렇게 하는 게 맞는테치? '

'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으고 부드럽게 허리를 숙이는데스. 너무 조금 숙여도, 너무 깊게 숙여도 안 되는데스. '

성체실장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다음 날부터 자들은 사육실장이 되기 위한 수업에 들어갔다.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자들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아침 식사를 마친 성체실장이 자들을 잠시 지도하고 밖으로 나가면, 성체실장이 귀가하는 저녁이 될 때까지 자들은 자발적으로 배운 내용을 연습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성체실장이 돌아오면 저녁 식사를 한 뒤 다시 한번 지도를 받고는 짧은 휴식을 취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사육실장에게 필요한 예법까지 배우는 과정은 지난하여 무료함을 느낄 틈은 없었다. 밥을 깔끔히 먹는 방법같이 사소한 부분부터 뜯어고쳐야 했기 때문에 성체실장이 부재중이더라도 전과는 달리 한가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밤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성체실장은 전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기보다는 진지하게 자들이 고쳐야 할 단점을 지적해주었다. 자들 또한 성체실장이 말한 이상향, 가족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사육실생을 그리며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열중하였다.
먼저 연습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장녀는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교육받고 있는 다른 동생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동생들 모두가 사육실장이 될 수 있을까? 비록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인간의 기준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연습에 열중하는 다른 자매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미소 짓는 성체실장을 보아하니 결과물이 썩 괜찮은 모양이다. 아마 이대로만 간다면 인간에게 가족 모두가 사육실장으로 길러지는 행복한 미래가 덧없는 꿈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듯하였다. 
물론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진 않았다. 


어느 순간, 자들을 훑어보던 성체실장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모습을 본 장녀는 성체실장의 시선을 쫓았다. 인상을 찌푸린 성체실장의 시선은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칠녀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장녀와 성체실장의 지긋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발장구를 치며 쉬던 칠녀는 주춤거리며 느릿느릿 일어나더니 춤추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칠녀는 건성이었다. 알아서 연습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도 않았고, 막내의 알 수 없는 일탈이 걱정된 장녀나 다른 자매들이 말로 살살 달래어 연습하게 하더라도 영 의욕이 없어 보였다. 

착한 아이였던 막내가 왜 이리 엇나가는 것일까, 춤추는 칠녀의 모습을 관찰하던 장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두건, 체구에 맞지 않는 커다란 두건이 문제였다. 자실장에게나 알맞을 크기의 두건을 작은 엄지실장의 머리에 씌어놨으니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두건이 얼굴을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시야가 수시로 가려지니 뭔 짓을 해도 제 몸을 못 가누고 엉성해질 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건을 잃고 망연자실한 칠녀에게 친실장이 자신의 두건을 찢어 새 두건을 만들어줬을 때부터 칠녀의 행동거지는 이전과 비교해 매우 얌전해졌다. 아마 칠녀가 건성으로 임하는 이유도 얼굴에 맞지 않는 두건으로 방해받아 형편없는 성취 탓에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일 테다. 한편 칠녀의 행동을 조용히 관찰하던 성체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칠녀에게 다가갔다.

' 두건이 너무 커서 방해가 되는데스. 잠시 마마가 맡아놓을 테니 이리 건네는데스. '

성체실장은 말을 꺼냄과 동시에 칠녀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레챠아아앗! '

제 딴에는 거칠게 쳐내려고 했는지 성체실장의 손을 자신의 작은 손으로 콕 찍고 뒤로 물러난 칠녀는 양손을 바닥에 붙이고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크게 소리 질렀다. 자신의 머리보다 훨씬 큰 두건을 쓴 엄지실장이 자신보다 수 배는 커다란 성체실장을 위협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눈에 깃든 강렬한 적의만큼은 진짜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두 놀라 하던 행동을 멈추고 칠녀를 보았다. 
성체실장을 위협하는 칠녀의 뜻밖의 행동에 놀란 장녀는 곧 이유를 깨닫고 속으로 탄식했다. 역시 이번에도 두건이 문제였다. 한번 뽑히면 두 번 다시 나지 않는 머리만큼은 아니더라도 실장석에게 옷은 아주 중요한 재산이었다. 하물며 이미 자신의 두건을 잃었던 경험이 있는 칠녀에게는 또다시 옷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성체실장은 단지 연습에 방해되기에 잠시 두건을 맡아두려는 의도로 보였지만, 당사자인 칠녀에게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자들처럼 칠녀의 위협에 잠시 당황했던 성체실장도 아까보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 두건이 연습에 방해되는 건 칠녀도 알지 않는데스? 연습이 끝나면 도로 돌려줄 테니 잠시만 마마한테 맡기는데스. '

' 레챠아앗! 레챠아아앗! '

그러나 성체실장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해도 칠녀는 이를 드러내며 자신의 두건을 벗기려는 성체실장에게 반항했다. 성체실장이 멈칫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두건을 벗기려고 시도하니, 나중에는 아예 발광하며 성체실장의 손을 물어뜯으려고 하였다. 
칠녀의 반항에 곤혹스러워하던 성체실장은 문을 살짝 열어 해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바깥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다른 성체실장들이 소리를 내며 걷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이제 나가봐야 할 시간이었다. 아직도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고 있는 칠녀를 내려다보고 작게 한숨을 쉰 성체실장은 자들에게 쉬어도 좋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성체실장과 칠녀 간의 실랑이를 보며 눈치를 보던 자들은 성체실장이 나가기 무섭게 칠녀에게 달려갔다.

' 칠녀 그러면 안 되는테치! 마마는 칠녀를 위해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째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테치!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를 혼내는 일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장녀가 총대를 메고 칠녀를 야단쳤다. 그렇지만 칠녀는 제자리에 쪼그려 앉고는 장녀의 질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자신의 무릎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불량한 태도에 화가 난 다른 자매들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씩 던지자, 평소에 자신을 귀여워하던 언니들이 질책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칠녀는 삐진 것처럼 고개를 수그리고는 두건을 푹 눌러쓸 따름이었다. 
안 그래도 수업받으며 체력을 소모한 일도 모자라 대꾸도 없는 칠녀를 야단치느라 진이 빠졌는지 자매들은 고개를 저으며 하나둘씩 칠녀에게서 멀어져 휴식을 취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칠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장녀도 결국 등을 돌렸다. 조금씩 칠녀에게서 멀어지는 장녀의 귀로 칠녀의 작은 중얼거림이 날아들었다.

' ... 오네챠타치는 바보레치. '


작은 실랑이가 있던 그 날 이후로 칠녀는 원치 않는 훈련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다. 성체실장은 반항하는 칠녀를 교정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는지 교육에 비협조적인 칠녀를 당분간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칠녀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다른 자매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다가 잠시 휘적거리며 대충 연습하는 시늉을 하더니 구석에 쪼그려 앉고 관심을 끊었다.
사실 애초부터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애초부터 기한이 정해진 일도 아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칠녀도 조금씩 성장해 언젠가는 자실장이 될 테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치면 되는 사소한 문제라고 성체실장은 생각했다. 

그랬다. 성체실장은 칠녀의 일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굳이 꺼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러나 자들의 생각은 성체실장과는 달랐다. 성체실장의 속마음을 모르는 자들은 칠녀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자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험에 통과한다면 성체실장과 함께 인간에게 길러지는 행복한 사육실장의 삶을 누릴 수 있지만, 만약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시험에서 떨어진 자는 자매들과 헤어져 공원에서 홀로 살아야 한다는 성체실장의 말을. 상황이 계속 이대로 흘러간다면 다른 자매들은 몰라도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는 칠녀는 시험에서 반드시 떨어질 것이다. 

이전에 친실장이 해준 말이 있었다. 마마를 잃은 자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공원에서의 삶은 험하다고. 칠녀는 작고 어린 엄지실장이었다. 자실장조차도 홀로 살기 힘든 마당에 어린 엄지밖에 안 되는 칠녀가 공원에서 홀로 살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했다. 
항상 칠녀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자들의 연습에도 제동이 걸렸다. 답답함을 참다못한 몇몇 자들은 막무가내로라도 칠녀를 연습시키려고 했지만, 살살 달래며 유도해도 소극적이던 칠녀가 그런 강압적인 방법에 따를 리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곰곰이 주시하던 성체실장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괜찮게 흘렀던 분위기가 단 한 마리의 자 때문에 엉망이 되고 있었다. 자신의 계획이 망가지는 불상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성체실장은 칠녀와 대화를 시도했다.

' 칠녀, 마마와 얘기 좀 하는데스. '

연습하는 다른 자매들을 멍하니 구경하던 칠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성체실장은 칠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앞에 털썩 앉더니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다. 연습하던 다른 자들도 연습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며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들실장의 힘든 삶과 비교되는 행복한 사육실장의 삶, 그 행복을 거머쥐기 위한 연습의 중요성 등등, 성체실장이 꺼내는 말 하나하나는 모두 정론이었지만. 자들은 유달리 반항적이었던 칠녀의 행동을 떠올리며 노심초사했다. 

놀랍게도 칠녀는 다른 자매들의 우려와는 달리 성체실장을 빤히 쳐다보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듯한 칠녀의 태도에 성체실장도 자신감을 얻었는지 단순한 훈계를 넘어 칠녀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 칠녀, 마마의 말을 잊은데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자는 마마와 다른 자매들과 함께 살 수 없는데스. 와타시는 다른 자들은 걱정하지 않지만 칠녀만은 걱정이 되는데스'

' 기억하는레치. '

' 칠녀는 아직 어려서 공원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데스. 이대로라면 칠녀만 시험에서 떨어져 다른 오네챠들과 헤어져 공원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스. 공원은 어린 자 혼자서 살아갈 만큼 만만한 장소가 아닌데스. '

' 아는레치. 전에 공원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마마가 말해준레치. '

' 혹시 칠녀는 닝겐들이 무서운데스? 그래서 다른 오네챠들과 함께 주인님의 집에서 사는 게 싫어서 망설이는데스? '  

' 닝겐이 무서운 건 사실인레치. 그렇지만 아타치도 오네챠타치와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은레치. '

'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인데스? 무엇 때문에 연습하지 않는데스? 언젠가는 칠녀가 마음을 다잡으리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뒀더니, 이젠 다른 자들마저 칠녀 걱정에 연습을 제대로 못하는데스. '

' ... '

곧이곧대로 대답하던 칠녀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던 성체실장은 답답해 소리 질렀다. 


' 마마는 칠녀 걱정에 가슴이 먹먹한데스. 이유라도 좀 말해보는데스! '



계속되는 성체실장의 독촉에도 칠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눈앞의 성체실장은 물론 둘의 대화를 훔쳐 듣는 다른 모두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칠녀는 이를 가볍게 뭉개며 침묵을 유지했다. 끝날 기미도 없는 정적 속에 자들은 물론이고 질문을 던진 성체실장도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마침내 칠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오네챠타치와 사육실장이 되는 것도, 닝겐의 집에서 사는 것도 다 좋은레치. 그런데 왜 오바상도 함께인레치? '


칠녀의 대답에 자들은 경악하여 눈이 등잔만 해졌다. 자신을 낳아준 친실장을 부정하는 말은 분충성이 폭발하여 천지 분간도 못 하고 날뛰는 정도가 되어야 할 말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분노한 친실장에게 목숨마저 잃을지 모를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자들은 하던 행동도 멈추고 성체실장의 눈치를 살피기 여념이 없었다. 
칠녀가 꺼낸 말에 충격받았는지 눈만 깜빡이던 성체실장은 돌연 웃음을 흘렸다.

' 데프픗. '

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성체실장은 화를 내긴커녕 도리어 씩 웃으며 칠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 내키지 않는 상대의 호감 표시에 인상을 구긴 칠녀는 성체실장의 손을 치우려고 했지만, 그 압도적인 중량을 칠녀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 데프픗. 그렇게 힘들었으면 진작 말했으면 좋지 않았던데스? 칠녀는 아직 어린 자이니, 좀 더 마마한테 응석 부려도 되는데스. '

' 무슨 개소리인레치! 이 손이나 치우는레치! '

칠녀의 작은 반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체실장은 꿋꿋이 칠녀의 머리를 문질렀다. 자신보다도 무거운 손길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려 정신이 혼미해진 칠녀를 뒤로 한 성체실장은 다른 자들에게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 자랑으로 들리겠지만, 마마는 훌륭한 사육실장이었던데스. 아직 사육실장이 아니었던 어린 자였을 때도 브리더상에게 칭찬받았을 만큼 뛰어났던데스. 하지만 오늘 일로 마마는 깨달은데스. 와타시는 아직 자를 기르는 데는 초보 마마에 불과한데스. '

' 마마가 이전에 자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데스? 그건 사실인데스. 자들이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기를 마마가 바라는 것처럼, 닝겐들도 자신에게 공손하고 애교를 부리는 귀엽고 착한 사육실장을 원하는데스. 그 기준에 미달이면 사육실장이 못 되는데스. 그래도 너무 조급해하지 마는데스. 아직 자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있는데스. 오늘 그 기준을 맞출 수 없다면, 좀 더 노력해서 다른 날에 다시 도전하면 되지 않는데스? 마마는 자들이 완전히 준비되기 전에 서두를 마음이 없는데스. ' 

' 자들은 와타시가 자들을 괴롭히려고 훈련을 시킨다고 생각하는데스? 아닌데스. 마마는 단지 마마가 누렸던 것들을 자들도 똑같이 누리게 해주고 싶을 뿐인데스. 자들이 포기하지 않는 한, 와타시도 포기하지 않는데스. 자들과 와타시는 가족인데스. 마마가 가족을 버릴 리 없지않은데스? 그러니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주저하지 말고 마마한테 기대는데스. '

들실장이라면 필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세상에 대한 환상이 하나둘씩 깨진다. 상상과는 다른 현실에 화를 내는 일도 한두 번이지 매사에 불만을 표출하며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당장 그 자의 친실장부터가 그런 불손한 태도를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독립하여 자신의 앞날을 책임질 때가 도래하면 완전히 순응했건 아니면 속으로 불만을 삭이고 있건 위험 없는 평안한 현실을 바라며 최소한도라도 노력하며 살아갈 수 있는 녀석들만이 남게 된다. 간혹 이런 마음가짐을 깨닫지도 않고 운 좋게 살아남은 녀석이 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여 도태될 뿐이었다.

하지만 자들은 망상을 접고 현실을 직시하기에는 턱없이 어렸다. 어느 정도 현실을 깨달은 들실장처럼 안온한 내일을 맞이하기를 소망하기보다는 아직 다른 자매들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관심이 쏠리는 시기였다. 이런 자들이 그나마 있는 자유시간마저 연습에 소비해야 하는 현재의 생활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물론 성체실장이 들려주는 사육실장의 삶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도착한 이래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벗어난 적이 없는 비좁은 집에만 머물 필요도 없이 드넓은 세상을 안전하고 자유롭게 누빌 수 있을 것이고, 그날의 운에 따라 복불복처럼 질이 갈리는 음식이 아니라 맛있다고 소문난 푸드를 언제나 먹을 수 있고, 운이 좋다면 고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스테이크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행복한 사육실장 생활에 대한 상상은 시험에 통과하겠다는 동기를 부여하여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 열정 이면에 숨은 진짜 원동력은 공포감이었다. 아직 독립하여 자신만의 가정을 꾸민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다른 자매들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당연한 일상을 보내다가 난데없이 시험에서 탈락한다면 버려진다는 통보는 자들로써는 쉬이 적응하기 어려웠다. 시험에 떨어져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자들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성체실장이 일정한 기준을 세워주기 전에는 미친 듯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더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을 혹사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성체실장의 따스한 말에 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는 홀로 버려진다는 불안감에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작은 물방울이 맺힌 자들의 눈에 성체실장은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두 팔을 활짝 벌린 모습이 크게 들어왔다. 아마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다 같이 성체실장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 지랄 마는레치! 마마도 아니면서 왜 자꾸 마마 행세를 하는레치! '

어수선한 분위기를 화목하게 되돌리기 위해 성체실장은 수없이 고심해야 했지만, 그 결과물을 망가뜨리는 대는 고작 한순간으로도 충분했다. 성체실장이 말로 다른 자들을 감화시키는 동안에 어지러움을 극복하고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욕설을 내뱉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칠녀는 성체실장의 앞에 서서는 허리춤에 양손을 갖다 대며 겁도 없이 성체실장을 노려보았다. 다른 자들은 지치지도 않고 성체실장을 자극하는 칠녀의 행동에 또다시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가 친실장을 부정함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본 친실장의 입장은 어떠할까? 
자신의 성향에 따라 들실장의 힘든 삶의 이유를 열악한 환경을 지적하던가 또는 본래부터 사악한 천성을 지녔기에 그렇다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시각은 배제하고 객관적인 모습만 관찰하면, 실장석의 삶이 타자를 배려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 챙기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는 건 분명 사실이었다. 사실 제 앞날도 챙기기 버거운 마당에 다른 동족들과 서로 도우며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환경에 따라서는 같은 어미 아래 자라는 아직 독립은 어림도 없는 어린 자매들조차도 생존 경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삶 속에서도 들실장들은 자신의 자만큼은 매우 소중히 여겼다. 다른 실장석과의 관계에서 이타적인 관계가 성립하는 유일한 경우가 바로 친실장과 자의 관계였다. 물론 이중에도 단순히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든지, 혹은 자신이 편애하는 자만 끔찍이 아끼고 나머지는 없느니만 못한 취급을 한다든지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친실장들은 자신이 정한 기준점을 범하지 않는 한 웬만하면 자가 잘못하더라도 좋게좋게 넘어가려 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라도 더 손에 쥐여주려는 이타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자들 또한 존경과 애정을 표현해 이런 친실장의 헌신에 정신적인 만족감으로 보답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를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뭐 하나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이 힘겨운 삶에서 유일하게 자신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 낳은 자뿐이었다. 자신에게 일일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보다 명백하게 아래인 존재, 그런 존재들이 떠받들어 생겨난 권위는 친실장에게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우월감을 부여해줬다. 평생 다른 동족이나 생물들의 눈치를 살피며 행동해야 했던 친실장에겐 이런 보잘것없는 작은 권력조차도 감히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것이니, 혈육을 죽인 원수를 대면하는 일보다도 자신의 권위에 자가 도전하는 상황이 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낳은 자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은 친실장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자를 매우 아끼는 듯 보였던 성체실장도 이런 생각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는지 표정을 굳히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칠녀, 아직도 불만이 있는데스? 자가 마마한테 욕설을 내뱉는 건 좋지 못한 일인데스. 그리고 말을 곱게 하는데스.'  

' 오바상은 병신인레치? 아타치는 오바상의 자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줘야 되는레치? 개소리 좀 작작 하는레치! '

' 칠녀, 아무리 화나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데스. 그런 나쁜 말은 분충이나 하는 말인데스. 마마가 슬퍼할 일을 만들지 마는데스. '

막내를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다른 자매들에겐 안타깝게도 성체실장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점잖게 타일러도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는 칠녀로 인한 화를 감내하기 힘들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성체실장은 애써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결국엔 칠녀와 다를 바 없이 돌이키기 어려운 말을 내뱉었다. 항상 다정했던 성체실장이 은연중에 솎아낼지 모른다는 경고를 하니 자들은 충격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칠녀는 이런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지 조금도 겁먹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 슬픈 건 오바상이 아니라 아타치인레치! 그런 걸 일일이 말해줘야 아는레치? 도대체 머리가... '

이러다가는 분노한 성체실장에 의해 사단이 일어날지 모른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 무섭게 번개같이 튀어 나간 장녀는 칠녀의 입을 틀어막고 품에 끌어당겨 벗어나려고 바동거리는 칠녀를 껴안았다. 이윽고 힘이 빠진 칠녀가 더는 저항하지 않고 숨만 씩씩거리자 칠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 대체 왜 이러는테치? 

' 오네챠야말로 바보인레치? 집을 나간 마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웬 이상한 오바상이 들어와 마마 행세를 하는데, 바보 같은 오네챠타치는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레치! 다들 돌아버린레치? 자는 사이에 머리가 어떻게 되버린레치? ' 

' 칠녀, 아무리 속상해도 마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테치! 이모우토챠는 아직도 마마를 의심하는테치? 물론 마마가 다쳐서 돌아왔을 때는 와타치도 마마가 너무 낯설었던테치. 하지만 아무리 낯설고 목소리가 달라졌어도 마마는 마마인테치. 이모우토챠는 마마가 얼마나 칠녀를 걱정하는지를 모르는테치? ' 

' 그게 아닌레치 바보 오네챠! 대체 왜 모르는레치! '

혹여나 작고 약한 동생이 괴로워할까 봐 느슨하게 껴안았던 장녀의 배려도 알지 못하고 칠녀는 매정하게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장녀를 흘겨보며 씩씩거리던 칠녀는 손을 위로하여 두건을 훌렁 벗더니 장녀의 손 위에 올렸다. 어떻게든 손을 밀어 올리려고 용쓰는 동생의 행동에 장녀는 무심결에 얼굴을 두건 위에 겹쳤다. 

' 아직도 모르는레치? 이래도 모르는레치? 저년은 가짜인레치!

엇나가는 칠녀의 행동에 다른 자매들이 괴로워했듯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만 앓던 칠녀도 괴로웠다. 인제야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칠녀의 가슴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으나, 어느새 얼굴을 들어 올린 장녀는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조급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한 칠녀가 답을 재촉하고자 다시 소리치려는 순간, 거대한 손이 칠녀의 몸을 움켜쥐었다. 장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칠녀는 졸지에 성체실장과 눈을 마주하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 이거 놓는레치 똥오바상! '

' 칠녀, 마지막 경고인데스. 두 번 다시 오바상이라는 말 꺼내지 마는데스. 그건 마마한테 해선 안 될 말인데스. '

' 거짓말쟁이 주제에 그렇게 겁주면 아타치가 못 할 줄 아는레치? 몇 번이고 말해주는레치! 오바상! 오바상! 오바... '

- 투둑 -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다. 성체실장은 빈손으로 칠녀의 작은 머리를 뒤로 밀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성체실장과 옥신각신하던 칠녀의 머리는 뒤로 젖혀진 채 힘없이 대롱거렸다. 
자매들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눈만 깜빡거렸다. 바로 전까지 분노를 표출하며 길길이 날뛰던 칠녀는 머리가 뒤로 젖혀진 후론 아무리 기다려도 침묵을 유지하며 젖혀진 머리를 들어 올리지 않고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는 자매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하지만 작은 두 눈은 급속도로 생기를 잃어 탁해지고 있었고, 평소보다 더 크게 벌어진 입에서 튀어나온 혀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누구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직접 경험해본 적도 없었지만,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 칠녀는 성체실장에게 살해당했다 -

뇌리를 스쳐 가는 충격적인 생각에 자매들의 눈이 커진 그 순간이었다.

' 데에엥! 데에엥! '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성체실장은 칠녀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통곡하였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좀 전에 칠녀의 목을 꺾어서 죽인 장본인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당황한 자들은 칠녀의 죽음도 잠시 잊고 성체실장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 마마 왜 우는레치? '  ' 마마 울지마는테치 '  

' 데에엥! 칠녀 대체 왜 그랬던데스!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그랬던데스! '

자신을 다독이는 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체실장은 칠녀의 시체를 품에서 놓지 않고 한참을 울었다. 자들도 달래기를 포기하고 난감하게 바라만 본 지도 한참이 지나서야 끅끅거리며 울음을 간신히 삼킨 성체실장은 자들을 보며 힘없이 말을 꺼냈다.

' 자들, 꼭 기억하는데스. 지식도, 시험에 통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육실장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복종인데스. 주인님은 자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안전도 제공해주시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싫어하시는데스. 거듭해서 마마에게 반항한 칠녀는 닝겐의 기준으로 보면 분충인데스. '

'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주인님을 마마라고 한번 생각해보는데스. 들실장들은 기르던 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면 다른 가족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분충이라고 솎아내는데스. 사육실장도 분충인 자가 생기면 다른 자들도 분충이 될 수 있는 건 똑같기에 반드시 솎아내야 하는데스. '

' 결국 모든 게 와타시의 잘못인데스. 가장 먼저 알려줘야 할 일을 무심코 넘겼던 게 너무 후회되는데스. '


말을 마친 성체실장은 다시 한번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번에는 자들도 성체실장이 해준 말을 곱씹느라 조용히 있었다. 잠시 후,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성체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장녀, 칠녀와 함께 묻어주고 싶은데스. 두건을 어서 마마에게 건내주는데스. '

성체실장은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장녀가 손에 쥔 칠녀의 두건을 강탈하듯이 낚아채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지켜보던 자들은 닫힌 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누군가가 훌쩍거리자 이내 슬픔을 참지 못하고 제각기 소리죽여 울었다. 용서받기 힘든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은커녕 더 반항하며 날뛰었기에 응당한 결과일지라도, 막내는 영원히 가족들을 떠나버렸다.

칠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슬퍼하는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장녀는 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어진 입도 다물지 않고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빈손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장녀는 무심코 손을 코에 갖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 두건에 짙게 밴 칠녀의 냄새, 이제 다시는 못 볼 막내의 흔적이 코를 맴돌았다. 그러나 두건에는 칠녀의 냄새 말고 다른 냄새도 남아있었다. 두건을 움켜쥐었던 자신의 냄새도, 두건 위를 투박한 손길로 쓰다듬던 성체실장의 냄새도 아니었다. 익숙했지만 누구였는지 생각나지 않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을 주는 냄새였다.


죽은 자의 시간은 멈춰도 산자의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러나 막내를 잃은 자매들은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별에 넋이 나간 자들의 상태를 본 성체실장은 당분간은 수업을 중지하기로 했다. 자매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한없이 자유를 만끽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전의 분위기는 되찾을 수 없었다. 

벽에 기대어 멍하니 있던 장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다른 동생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절로 우울해졌다. 전과 다른 건 동생이 하나 없다는 것뿐이었지만, 칠녀의 빈자리가 공기를 무겁게 하였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신에게 두건을 건네던 칠녀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말 칠녀의 말대로 성체실장은 자신들의 마마가 아닌 것일까?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생판 남인 자신들을 돌보고 있는 것일까? 만약에 정말로 마마가 아니라면, 자신들의 진짜 마마는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요 며칠간 장녀는 무료함 대신 혼란과 의문속에 빠져서 지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과부 하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있던 장녀는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을 감지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가 손을 대는 육녀의 행동에 깜짝 놀라 물었다.

' 육녀, 뭐하는테치? '

' 아타치는 집을 나가는레치. '

' 테엣? '

제각기 상념에 빠져있던 다른 자매들도 폭탄 발언에 깜짝 놀라 육녀를 보았다. 다른 자매들보다 앞서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이 일어난 장녀는 문을 밀려는 육녀의 손을 붙잡고 자신한테 끌어당겼다.

' 무슨 생각을 하는테치? 밖은 위험한테치!'

' 오네챠는 이상하다고 생각 안하는레치? 

' ... 무슨 소리인테치? '

' 모르면 관두는레치. 아무튼 아타치는 나가서 독립하는레치. '

'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테치! 자가 마마의 보호가 없이 혼자 돌아다니면 나쁜 오바상들이 잡아간다던 마마의 말을 잊은테치? 

' 그 말을 해준 게 마마가 맞는레치? 진짜 마마가 맞는다면, 왜 이모우토챠에게 슬픈 일을 한레치? 그건 가짜가 분명한레치. '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장녀의 손을 쳐낸 육녀는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장녀는 육녀보다 더 재빨리 움직여 등을 문에 기대어 막아버렸다. 심통이 나서 볼을 부풀린 육녀는 그대로 장녀를 밀고 지나가려 했지만 서서 버티는 장녀의 힘이 더 강했기에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도 육녀는 포기하지 않고 장녀를 계속 밀어붙였다. 두 자매가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고 보고만 있던 자매들도, 장녀를 노려보며 안간힘을 쓰던 육녀도, 육녀를 막느라 문을 등지고 있던 장녀도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앞에는 아침에 집을 떠난 성체실장이 서 있었다. 음식으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어깨에 멘 성체실장은 굳은 표정으로 장녀와 육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성체실장이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장녀는 둘 사이에 있었던 실랑이를 성체실장이 듣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육녀를 집 안으로 떠밀었다. 육녀도 제 잘못을 알기는 하는지 장녀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밀려났다. 그러나 장녀의 바람은 성체실장이 입을 연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 육녀, 솔직히 말해보는데스. 와타시도 집에 들어오기 전에 자들의 대화를 들은데스. 마마도 없이 어디를 가려고 했던데스? '

' ... '

혼자서라도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를 선택한 것을 보더라도 육녀는 기가 약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소 수배는 차이 나는 엄청난 덩치, 그리고 평상시의 자상함이라고는 일체 찾을 수 없는 정색한 표정을 보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압박하며 지긋이 바라보는 성체실장에 대한 반발이 겁을 억눌렀는지 작게나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성체실장은 일체의 고민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 그게 소원이라면 나가는데스. '

' 레? '

' 긴말이 필요없는데스. 마마를 마마로 여기지 않는 분충을 키워봤자 화근에 불과한데스. 소원대로 나가는데스. '

성체실장의 냉랭한 태도는 말뿐만이 아니었다. 아예 육녀가 나가기 좋게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멍한 표정으로 열린 문 앞까지 걸어간 육녀는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멈춰선 육녀는 다른 자매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혼자가 된다는 불안감이 발목을 잡은 듯하였다. 
어쩌면 자신과 동조하여 함께 집을 떠날 다른 자매가 있기를 바랐거나, 아니라면 무모한 짓을 벌이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붙잡아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제자리에 서서 말없이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육녀에게 성체실장이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 이것만 명심하는데스.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육녀는 와타시의 자가 아닌데스. 사육실장은 꿈에도 꾸지 마는데스. '

' 그딴 것 줘도 안갖는레치! '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던 육녀는 또 사육실장을 들먹이며 경고하는 성체실장에 대한 분노가 등을 떠밀었는지 잽싸게 뛰쳐나갔다. 작은 발을 부지런히 놀려 육녀의 모습이 자들의 신발보다도 작아 보일 때쯤, 육녀는 등을 돌리더니 성체실장을 노려보며 외쳤다.

' 오마에는 이제 큰일난레치! 마마의 마마한테 말해서 오마에를 혼쭐내주는레치! '


기세 좋게 외친 육녀는 잽싸게 뛰어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자신의 말을 듣고 분노한 성체실장이 추격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성체실장은 움직일 생각도 없이 문을 닫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육녀의 말을 되뇌고만 있었다.

' ...마마의 마마데스? '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성체실장의 분위기에 말린 자들이 동생의 가출에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침묵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저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 레챠아아아 '


고민에 빠졌던 성체실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노려보았다. 다른 자들은 비명을 지른 엄지가 육녀일리가 없다고 애써 정신승리를 하며 육녀의 안전을 기원했다. 그러나 잠시 뒤, 문을 툭툭 두드리는 작은 소리가 나더니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 도와줘레치! 나쁜 오바상이 아타치를 잡아 먹으려는레치! '

안타깝게도 비명을 지른 엄지는 육녀가 맞았다. 집을 떠난 동생이 봉착한 끔찍한 위기를 접한 자매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어 했으나, 성체실장의 냉정했던 태도를 떠올리며 눈치를 보느라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육녀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 살려주는레치! 아타치 죽기 싫은레치! 레? 저... 저리 가는레치! 저리 가는...찌아아아! ' 

' 육녀쨩! '

참다못해 위기에 처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 뛰쳐나가려는 장녀를 낚아챈 성체실장은 장녀를 품에 끌어안고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 밖은 위험한데스. 얌전히 있는데스. '

' 이럴 때가 아닌테치! 얼른 육녀를 구해야되는테치! '

' 장녀, 똑똑히 기억하는데스. 와타시의 자는 다섯인데스. '  

성체실장의 뜬금없는 말에 잠시 멍했던 장녀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기겁했다.

' 안 되는테치! 이모우토챠를 버리면 안 되는테치! '

장녀는 성체실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걸하며 매달렸지만 성체실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장녀가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에 비명을 지르던 육녀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더니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장녀의 마음에 절망감이 차올랐을 무렵,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 오마에,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는데스. 밖으로 나오는데스. '

육녀를 해친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낯선 목소리에 자들은 덜컥 겁을 먹었다. 갸날픈 육녀의 생명을 집어삼킨 재액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희생자를 물색해 온 것이다. 다른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공포감에 젖어 덜덜 떨던 장녀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묵직한 손길에 시선을 옮겼을 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성체실장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성체실장이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걸어 나간 뒤, 닫힌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

' 오마에가 그 엄지놈의 친인데스? 데프픗. 오마에의 자는 제법 우마우마한데스. 다른 자들도 공물로 바치면 특별히 오마에의 자가 와타시에게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 지금 뭐하는데스? 데갸아아악! '

방문자의 입을 틀어막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동안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계속되던 비명이 멎고 그리 오래지 않아 작은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를 땅바닥에 질질 끄는 소리가 집에서 점차 멀어지더니 이윽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자들이 초조해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집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후 성체실장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초록색 헝겊으로 손을 감싸고 문지르던 성체실장은 옷에 튄 피를 보고 굳은 자들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 자들도 오늘 일에서 교훈을 얻는데스. 마마의 보호 없이 자는 절대로 혼자서 공원에서 살 수 없는데스. 바보짓은 하지 마는데스. ' 


3주 남짓한 시간, 객관적으로 따진다면 그다지 길지 않은 세월이었으나 자매들에게 그 기간은 한평생이었다. 그동안 한 친실장의 몸에서 나온 자매들은 같은 집에 머물며 같이 뛰놀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이 뒹굴다가 같은 꿈을 꾸며 잠들곤 했다. 그들이 태어난 이후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줄곧 함께였듯이, 앞으로도 늘 함께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함께하고자 했던 자들의 소망은 운명의 장난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그 짧은 평생의 절반이 조금 지나자 막내는 불복종을 이유로 성체실장의 손에 직접 처단당했고, 막내의 죽음에 반발하여 제 발로 뛰쳐나간 육녀는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험에 처해 간절히 도움을 청하였으나 성체실장의 매정한 외면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자매들은 성체실장을 더는 마마로 여기지 않았다. 입을 열 때마다 늘 자신들을 위해서라고 떠벌리는 성체실장이었지만, 아무리 행복을 말한다고 한들 소중한 자매들을 잃은 비통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성체실장이 혈육을 잃은 슬픔에 잠긴 자들을 구슬리고자 행복한 사육실생을 강조하며 지껄일수록 자들의 불신감은 더욱더 짙어졌다. 
물론 성체실장이라고 가만히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자들의 불량한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어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으며, 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디선가 또다시 고기를 잔뜩 구해와 먹였다. 그러나 성체실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처 입은 자들은 끝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환경이 좋고 행복하다고 한들 자매들을 죽게한 원흉인 성체실장과 같이 산다는 일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자들은 사육실장의 꿈따윈 포기해버렸다. 그들은 저 정신 나간 성체실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마마의 마마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마마의 마마가 죽은 자매들의 복수까지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집에서 탈출을 꿈꾸던 자들은 조용히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오랜 인내 끝에 마침내 실행에 옮기는 바로 그 순간, 가장 만나선 안 될 존재와 마주치고야 만 것이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신들이 배설한 운치의 고약한 냄새도 맡지 못한 자실장들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서 성체실장으로부터 멀어지려고 기를 썼지만, 이미 팬티를 가득 채운 운치가 방해돼서 제자리에서 발만 휘젓는 꼴이었다.

" 뭐인레치? 앞이 깜깜한레치! 왠지 걷는 느낌도 이상한레치! "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오녀는 공중에서 발버둥 치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는 오녀를 잠시 보던 성체실장은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성체실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오녀의 가벼운 몸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골판지의 벽면에 충돌했다.  

" 레챠앗! "

벽에 부딪힌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기절한 오녀를 잠시 보던 성체실장의 시선이 빵콘한 네 마리의 자실장에게 향했다. 핏기가 돌지 않아 새하얗게 질린 자실장들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하던 성체실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이상한데스. 와타시는 분명히 나가면 안 된다고 전에 몇 번이고 말했던데스. 그런데, 자들은 뭘 하고 있던데스? "

대답할 입은 넷이나 되었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침만 꼴깍 삼킬 따름이었다.

" 마마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나쁜 아이인데스. 한 번만 더 묻는데스. 자들은 뭘 하려고 했던데스? "

평소라면 다른 동생들을 대신해 성체실장에게 대답하던 장녀조차도 지금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들의 자매를 무참히 죽여버린 저 가증스러운 성체실장이 도리어 자신들을 추궁하는 태도에 분노가 치솟았으나, 평소에 부드러운 눈빛과는 달리 동생들에게 슬픈일을 할 때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심한 눈빛을 마주하니 입이 얼어붙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장녀의 시선이 성체실장의 팔에 걸린 비닐봉지를 닿았다. 평상시라면 음식으로 가득 차 있을 비닐봉지에는 물병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집에서 나가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녀는 음식물을 구하려고 나갔던 성체실장이 사실 집에서 멀리 벗어난 적이 없었음을 직감했다. 성체실장은 자매들이 문을 막은 돌멩이를 밀어 바깥으로 나가려고 시도하는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 빤히 관찰하고 있던 것이다.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 하는 자실장들을 보고 한숨을 쉰 성체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위험한 짓은 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왜 와타시의 말을 듣지 않는데스? 아무래도 오늘 자들은 마마한테 혼나야겠는데스. "

말을 마친 성체실장은 집 안으로 발을 들이며 자실장들에게 다가갔다. 성체실장이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자실장들은 공포로 심장이 옥죄어오는 느낌에 발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물러나려 했으나 허사였다. 자실장들이 애처롭게 발을 놀릴수록 팬티에서 새어 나온 운치가 골판지의 바닥을 더럽혔다.


" 거짓말인레치! "

겁에 질린 가엾은 자실장들의 심혼을 조이며 다가오던 성체실장은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를 쫓아 눈을 돌렸다. 제자리에서 공포에 질려 발버동치던 자실장들도 정신을 차렸다. 
성체실장의 주의를 끌어 자매들을 공포에서 벗어나게 한 존재는 성체실장이 벽에 내던진 오녀였다. 적당히 힘을 조절해 던졌기 때문에 별다른 부상은 없었으나, 약한 엄지실장에겐 땅을 굴러 벽면에 부딪힌 충격조차도 상당했는지 볼록해진 팬티에는 자신들의 언니 못지않게 양의 운치가 쌓여 있었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던 오녀는 다리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서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 오마에는 마마가 아닌레치! "

" ...또 그소리인데스? "

이전에 몇 번이나 들었던 소리였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들을 때마다 화가 솟구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성체실장의 눈에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애써 표정 관리에 나선 성체실장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이마에 도드라진 힘줄은 감출 수는 없었다. 

" 잘 듣는데스. 이모우토챠가 죽어서 슬퍼하는 건 알고있는데스. 하지만 사육실장이 되려면 이 마마가 해준 말을 기억해야... " 

" 그 더러운 입으로 아타치를 부르지 마는레치! "

" ... "

" 오마에.. 오마에가 무슨 마마인레챠앗! 거짓말도 작작 치는레치! 아타치의 마마는 오마에처럼 미치지 않았던레치! 그까짓 사육실장이 뭐가 그리 중요한레치? 아타치타치는 원래부터 행복했던레치. 함께라면 사육실장 따위 될 필요도 없던레치. 그런데.. 그런데... " 

" 다 오마에 때문인레치! 오마에가 오고 모든 게 엉망이 된레치! 마마가 돌아오지 않는레치! 이모우토챠들도 오마에가 멋대로 슬픈일을 해버린레치! 그렇게 사육실장이 좋은레치? 이모우토챠들을 버리면서까지 좋은레치? 그딴 사육실장은 오마에나 실컷 하는레치! "

발을 구르며 씩씩대던 오녀는 제 분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눈물을 흘렸다.

" 오마에 따위는 필요 없는레치! 진짜 마마를 돌려줘레치! "

운치로 가득 찬 팬티를 질질 끌며 성체실장에게 달려간 엄지는 울면서 작은 두 손으로 성체실장의 신발을 톡톡 두드렸다. 물론 전력투구해도 자실장에게조차 타격을 주기 힘든 엄지실장의 미약한 힘으로 성체실장에게 피해를 주는 건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녀는 이렇게 하면 사라진 친실장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 나쁜 오바상! 오바상이 저지른 일을 와타치타치가 모르는 줄 아는테치? 이제 그 죗값을 곧 치르는테치! '

" 이모우토챠의 말이 맞는테치! 사육실장이 그렇게 좋으면 오마에 혼자서나 하는테치! 닥치고 우리 집에서 꺼지는테치! "

" 마마의 마마가 오마에를 혼쭐내주는테치! 울면서 빌어도 이제 늦은테치! "

" 오마에같은 분충이 사육실장이었던 건 말이 안되는테치! 와타치타치를 속인것처럼 닝겐주인을 속였던 게 분명한테치! "

숨죽이고 가만히 있던 다른 자실장들도 가장 어린 막내의 행동에 울컥했는지 성체실장을 욕했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담긴 욕설을 뱉으면서 그동안 억눌러야 했던 슬픔도 같이 터졌는지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욕하며 울고 있는 자들을 말없이 보던 성체실장은 아직도 자신의 신발을 때리는 오녀를 발로 툭 밀었다.

" 레벳! "

뒤로 벌렁 넘어진 오녀는 튀어 오르듯이 몸을 일으켰으나 성체실장의 발에 밀려 다시 쓰러졌다. 넘어진 오녀가 일어나려고 시도할 때마다 성체실장은 마치 희롱하듯이 발로 오녀의 몸을 툭툭 건드려 도로 넘어뜨렸다. 오녀는 성체실장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성체실장도 오녀 못지않게 끈질겼다.
마침내 체력을 모두 소진한 오녀는 성체실장을 노려보기만 할 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들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을 내려보던 성체실장은 지금까지 오녀를 괴롭히던 발을 위로 들어 올렸다. 자신의 머리보다도 거대한 신발이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광경이 오녀의 눈에 비쳤다.

" 지잇! "

어렵지 않게 오녀의 머리를 밟아서 터뜨린 성체실장은 머리를 잃은 오녀의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전번과는 달리 작심하고 힘을 실어 찬 발차기에 맞은 오녀의 시체는 공중을 날아 골판지의 벽면과 충돌하는 순간 적록의 얼룩으로 변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넋이 나간 자매들의 귀에 성체실장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이해할 수 없는데스. 오마에타치는 자인데스.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는 무능력한 실장인데스. 밖의 고아 놈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처음 보는 어른한테 자로 길러 달라고 달라붙는데, 왜 오마에타치는 와타시를 거부하는데스? "

자실장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성체실장이 다시 그들을 향해 다가옴에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너무나 차가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어붙은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와타시도 지친데스. 사랑으로 가르쳤는데도 오마에타치는 번번이 와타시를 실망시킨데스. 오마에타치가 와타시의 자가 아니라고 한데스? 그렇다면 고아인 오마에타치가 왜 와타시의 보호를 받으면서 밥을 축내는데스? 왜 와타시의 노력을 이용하는데스? "

" 관대한 와타시의 마지막 가르침을 몸에 새기는데스. 건방진 고아 놈들에게 자비는 없는데스. 분충은 솎아내는데스. "

자들에게 다가온 성체실장은 제자리에서 운치로 팬티를 가득 채운 채로 벌벌 떠는 자실장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자매들은 서로를 껴안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 테챠아아아! " x4 "





" 데휴... 또 실패인데스? 이번에는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헛수고였던데스. "

성체실장은 조용해진 골판지에서 나와 길을 걷고 있었다. 풀이 죽었는지 귀를 접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안에 모아놨던 보존식들과 살림 도구들로 꽉꽉 채운 비닐봉지를 양팔에 메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체실장의 발걸음은 유달리 무거워 보였다. 
실의에 잠긴 성체실장의 외양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몸이 비해 작아 보이던 옷을 억지로 입은듯한 기존과는 달리, 약간 낡아 보이긴 해도 몸에 딱 맞고 깨끗한 분홍색의 사육실장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슴 오른편에 박혀있는 알록달록한 꽃문양이 수 놓인 이름표에는 금색 실로 멋들어지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성체실장은 말없이 이름표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듯이,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할 만큼 얌전한 녀석이 아닌 이상 실장석이라면 들실장이건 사육실장이건 가리지 않고 다른 실장석과는 다른 특별함을 가지기를 원했다. 해피라는 이름을 지닌 이 사육실장도 다른 실장석과는 대비되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었다.
해피는 평범한 저가 사육실장이 아닌 고급 사육실장이었다. 고급 사육실장으로 훈육된 해피는 그에 걸맞은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영특하고 주인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애교를 부릴 수 있으며, 집안의 간단한 가사 활동도 도울 수 있고,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해 어떤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기에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특별한 사육실장 해피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피를 이은 자를 갖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육실장이라면 자신의 파멸과 맞바꿔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고급 사육실장인 해피는 원천적으로 기회가 봉쇄당했다. 
고급 사육실장의 훈련과정은 보급형 중저가 사육실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상품으로 출하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갈렸다. 

애호 단체에서 잔인하다며 학을 떼는 마지막 단계는 바로 멀쩡한 한쪽 눈을 들어내고 임신 방지용 의안으로 교체하는 수술이었다. 특수한 장치가 된 의안을 억지로 제거하려 시도할 경우, 의안을 살에 고정하기 위해 설치된 작은 칼날들이 동작을 감지하고 작동하여 머릿속을 휘저어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생명줄을 꼼짝없이 내줘야 하는 이 잔혹한 시험도 엄연히 사육실장이 되기 위한 시험인지라, 합격점에 미달한 불량품이어도 등급을 낮춰서 사육실장이 될 기회를 얻는 저가형 실장석과는 달리, 고급사육실장으로 훈련받던 후보석이 이를 거부하여 통과하지 못한 경우 잘해봐야 신체의 자유를 결박당한 하급 출산석이 될 뿐이었다. 
매대에 올라 사육실장으로 팔렸다는 것은 이미 시술을 마쳐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이니, 해피가 자를 잉태하는 일은 어떻게 하더라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해피는 불만 없이 주인의 사랑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해피의 운명을 바꾼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혼자서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또 다른 고급 사육실장 친구 베티를 보고 해피는 반갑게 인사하려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처럼 홀몸이어야 할 베티는 밝은 노랑색 사육실장복을 입은 자실장의 조막만 한 손을 쥔 채로 해피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할 말을 잃었던 해피는 베티와 사소한 일상의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 그런데 베티상, 그 아이는 누구인데스? '

' 아, 해피상을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워서 소개를 깜빡한데스. 리사쨩, 인사하는데스. 마마의 친구 해피상인데스. '


' 해피상 안녕하신테치! 와타치는 리사인테치! 마마의 자인테치! '

' 데에.. 양녀인데스? 귀엽고 씩씩한 자인데스. 좋은 자를 고른데스. '

사육실장의 대를 이은 번식은 사육실장에게는 바라지마다 않는 일이었지만 사육실장을 판매하는 처지에서도, 사육실장을 기르는 주인으로서도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수많은 사육실장 중에서 제대로 자를 훈육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이는 오직 극소수였다. 사육실장이 자를 낳고 직접 훈육한다고 해봤자 그 자식들은 좋은 환경에 눈만 높아진 덜떨어진 들실장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정말로 자들이 들실장의 자들보다 못함을 의미하진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보다도 모실장에 기반한 유전에 의한 능력 차이는 컸다. 그렇기에 고급 사육실장으로 훈련받는 예비 사육실장들이 대부분 동급 출산석의 자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능력의 차이보다는 태도의 차이였다. 그들의 친실장은 살아남기 위해서 사육실장에게 필요한 지식을 필사적으로 습득해야 했고,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하더라도 팔리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선택받기 위해서는 같은 처지의 경쟁자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사육실장으로 팔린 이후에도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생존경쟁에서 승리하여 인간에게 길러지는 사육실장이 되어 들실장이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사육실장용품들도 손에 넣었지만, 사육실장 자신도 인간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망각한다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이전의 실패자들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친실장들은 매사에 조심하고 주인의 기분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하지만 친실장에겐 당연한 일이 자들에게 당연하지 않았다. 그들의 친실장과는 달리, 사육실장의 자들에겐 절실함이 없었다. 
실장석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사육실장의 지위? 그들은 이미 태어나자마자 어미가 사육실장이었다. 이미 가진 것을 목표로 노력하여 쟁취하려는 바보가 있겠는가? 제약을 걸지 않고 자를 낳게 해 줬다는 사실부터가 사육주가 그리 엄하지 않다는 소리니, 엄연히 따지자면 훈련받는 후보석만도 못한 그들조차도 사육실장의 대접을 받았고, 그들도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사육실장이 자를 딱 한 번만 낳고 만족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체로 성장한 사육실장의 자가 자신도 새끼를 낳고 싶다고 요구한다면? 이런 복합적인 이유가 대를 이어가는 최고급 세레브 사육실장의 혈통이 깜짝 놀랄 만큼 비싼 이유였으며, 브리더가 후보석들에게 자를 낳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이유였다.

한발 양보해 자를 낳도록 허락하고, 태어난 자에게 시술하여 석녀로 만드는 방법도 그리 좋은 해답이 아니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사육실장이라고 한들 이미 사육실장의 금기를 이미 어기고 자를 낳고 싶다고 떼쓰던 순간 주인의 명령보다 우선시하는 가치가 생겨난 것이니, 멀쩡한 자의 눈을 파내고 의안으로 대체하는 수술에 친실장이 동의할 리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이건 동물이건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있는 것을 뺏어간다면 반발하기 마련이다.  
드물게 친실장이 수술을 동의했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자가 얼마나 훌륭하게 교육받으며 성장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인간에게 직접 훈육 받은 친실장조차 결국 억누르지 못한 욕심을 친실장보다 대체로 풀어진 자가 억누를 수 있을 리 없다. 

' 마마는 자를 가질 수 있는데 왜 나는 안 되느냐'와 같은 단순한 불만이 쌓인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괴하여 삶을 마친다든지, 심한 경우 자신이 하지 못할 일을 해낸 친실장을 질투하여 ' 마마는 자를 낳을 수 있었는데 자신은 하지 못한다 → 마마가 자를 낳았을 때, 집 안의 실장석은 마마 하나였다 → 그러니 마마와 다른 자매들을 없애고 혼자가 된다면 주인님도 자를 가지게 허락한다,' 와 같은 기적적인 사고를 거쳐서 주인으로선 끔찍하기 짝이 없는 골육상쟁의 참극을 낳기도 했다. 그렇다고 똑같이 불임수술을 받은 실장석을 양녀로 받아들인다고 한들, 그 양녀가 자라 성체가 된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한 분석이었다. 고급 사육실장이라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실장석의 지식으론 단순히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  ' 사육실장이 자를 가졌다 = 입양한 양녀다 ' 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해피의 추리는 곧바로 부정되었다.

' 데프프, 아닌데스 해피상. 이 아이는 와타시가 직접 낳은 자인데스. '

' 데엣? 말도 안되는데스!  베티상도 시험에 통과하지 않은데스! 시험에 통과한 사육실장은 자를 낳을 수 없는데스! '

' 맞는 말인데스. 와타시타치는 자를 낳을 수 없는데스. 하지만 주인님의 사랑으로 와타시는 자를 가질 수 있게 된데스. ' 

'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데스..? '

' 해피상, 와타시의 눈을 보는데스. '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배티의 얼굴을 얼떨결에 훑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해피는 충격받았다. 고급 사육실장이라는 그들의 자격을 증명하는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원한 족쇄인 의안, 그 빛을 잃은 눈이 위치한 장소에 생기가 돌아온 멀쩡한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부정하며 다른 곳으로 애써 시선을 돌릴 때마다, 그 생기 가득한 눈은 해피의 시선을 따라 같이 움직였다. 상상도 못 한 일에 충격받은 해피는 넋 놓고 친구를 보았다. 

' 어른이 된 와타시는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외로워서 곁에 있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데스. 하지만 해피상도 알다시피 그건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던데스. 그런데 주인님은 자를 가질 수 없어 풀죽은 와타시에게 수술을 받아 눈을 회복하면 자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해주신데스. 수술을 마치고 잠에서 깨어난 와타시는 이제 멀쩡히 보이는 시야에 감격한데스. 주인님이 허락하여 이렇게 귀여운 자도 낳을 수 있었던데스. '  

' 주인님도 와타시가 어릴 때는 자를 낳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하셨던데스. 그런데 왜 마음을 돌리셨는지 알겠는데스? 바로 와타시가 주인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인데스! 와타시의 말을 믿는데스. 해피상의 주인님이 정말로 해피상을 좋아한다면 해피상도 자를 가질 수 있도록 수술을 해주지 않을 리 없는데스! '

그 이후로도 제 딴에는 선의로 이것저것 조언해주는 베티였으나, 이미 정신이 혼미한 해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기쁨에 그칠 줄 모르고 수다를 떨던 베티는 허리춤에 걸친 작은 시계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말을 끊었다. 막 공원에 도착한 해피와는 달리 베티와 리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해피상 다음에 또 보는데스. "    " 오바상 바이바이테치! "

해피는 제자리에 서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가는 모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저녁, 그날 있었던 일을 떠벌이며 눈을 반짝이는 해피의 말을 들은 주인은 혀를 찼다. 멀쩡한 고급 사육실장 하나가 주인을 잘못 만나서 분충이 된 이야기는 사육주의 입장에서는 영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들실장들 보다도 협소한 관계 속에서 평생을 사는 사육실장의 삶에서, 분충이 되었다고는 해도 베티는 해피의 몇 없는 친구였다. 다신 그 친구와 놀지 말라고 명령하는 주인의 마음도 편하진 않았다. 다만 주인은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자신의 명령에 상처받을 해피를 안타까워하기 이전에, 자신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동안 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해피는 결국 자를 갖고 싶다며 눈을 고쳐달라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자신을 쏙 빼닮은 자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도 베티의 말처럼 자신에 대한 주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친구를 깔보지는 않았지만 해피는 자신이 베티보다 못한 점은 없다고 생각했다. 베티가 자격이 된다면 자신이 못할 리 없었다.
해피에겐 애석하게도 금기는 지키라고 있지 범하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멀쩡한 사육실장도 파멸로 몰아갈 실마리가 될 행위를 주인이 허락할 리 없었다. 재고할 가치도 없어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주인의 모습에 충격받은 해피는 자신에 대한 주인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를 가지는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해피의 소망을 냉정히 쳐내기는 했지만, 주인은 해피를 애완동물로 귀여워하고 아꼈다. 매번 자를 갖고 싶다고 했다가 자신이 거절할 때마다 상처받는 해피의 모습을 보다 못해 그것이 권장되지 않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다른 자실장이나 엄지실장을 입양하여 기르는 걸 해피에게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피가 단호하게 주인의 배려를 거절했다. 베티의 말대로 의안을 제거하고 눈을 치료하여 자신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면 되는 간단한 일을 번번이 거절하는 주인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니, 해피와 주인의 사이는 점차 벌어져 메꿀 수 없는 골이 생겼다. 
결국, 해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던 주인은 사육실장 용품이 꽉꽉 들어찬 실장 하우스에 잠든 해피를 넣고 공원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깨어난 해피가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해피의 주인은 뒤돌아보지 않고 공원을 떠났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사육실장, 그리고 들실장이라면 이성을 잃고 눈이 돌아갈 만한 실장하우스, 그 조합은 들실장들의 관심을 끌기에 제격이었다. 목놓아 울며 사라진 주인을 부르던 해피는 순식간에 들실장의 무리에게 포위당했다.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해피와 실장하우스를 훑은 들실장들은 서서히 해피에게 접근했다.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간만에 나타난 복덩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도주로를 차단하며 압박해오는 들실장들의 행동에 해피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것이 사육실장 해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데헥... 데헥... "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숨을 고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낸 해피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려진 사육실장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몰락뿐이었지만, 다행히도 해피에게는 운명을 거부할 힘이 있었다. 평상시 같이 산책할 시간이 별로 없어 못내 미안했던 주인은 어설픈 호신용품에 소중한 애완동물의 목숨을 맡기기보다는 비싼 돈을 들여서 호신술을 가르쳤었기 때문이다. 비록 주인의 애정은 파국으로 끝났으나, 그 결과물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해피를 지켜주었다. 좀 전의 당황도 단지 성체실장 여러 마리를 동시에 상대했던 경험이 없어서였을 뿐, 평범하게 분충 하나가 자들과 같이 일가가 통째로 덤빈 일에 불과했다면 해피는 콧방귀도 끼지 않고 그들을 쓰러뜨렸을 것이다.

어찌되었던간 긴장했던 해피에게 말 그대로 죽도록 얻어맞은 들실장들은 원래의 용모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푼 얼굴을 부여잡고 쓰러져있었다. 탐욕에 사로잡혀 희번덕거리던 눈은 모두 생기를 잃고 차가운 검은 눈물을 흘렸다. 
숨을 고르던 해피는 자신을 습격한 분충들의 체액이 옷에 잔뜩 묻은 걸 발견하고는 울상을 지었다. 이대로 놔두면 소중한 사육실장복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새겨질 판국이었다.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실장하우스를 눈에 띄지 않는 풀숲에 숨긴 해피는 길을 나섰다.

' ...? '

길을 걷던 해피는 이상한 위화감이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다. 수돗가로 출발한 이래 묘한 위화감이 몇 번이고 해피의 신경을 긁었다. 이대로는 계속 갈 수 없다고 생각한 해피는 자리에 멈춰서서 주위를 들러보았다.
대학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공원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성체실장 혼자서 돌아다니건, 친실장이 자와 함께 돌아다니건, 공원의 들실장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분주히 발을 놀렸다. 별다른 이상한 점을 못 찾은 해피가 계속 길을 걸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자신을 보고 기겁하며 자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경계하는 친실장을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본 해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동 거리도 못됐던 들실장들의 습격에서 사실 자신이 큰 상처를 입었던 것인가? 그래서 아까부터 묘한 기분이 들었던 걸까? 해피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상처를 찾아보려 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몇몇 친실장은 자신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지나갔다. 
아니, 자를 데리고 있는 친실장뿐만이 아니었다. 위화감의 원인을 찾느라 미처 몰랐지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모든 들실장들도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해피의 생각으로 들실장들이 자신을 경계하는 이유는 옷에 잔뜩 묻은 들실장들의 체액 말고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해피가 공원으로 산책을 한두 번 왔겠는가? 홀로 길을 거니는 사육실장을 들실장들이 얌전히 보내줄 리 없었다. 비록 상처를 입은 적은 없으나 싸우다 보면 이번처럼 체액이 묻은 적도 있고, 재수 없으면 운치가 튀어 그날 분위기를 잡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눈앞에서 들실장을 패 죽인 걸 목격해도 다른 들실장들이 자신을 경계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동족의 최후를 무시하고 덤비는 녀석은 없었지만, 소 닭 보듯 지나가는 들실장들의 눈에서 감지해낸 감정은 질투에 불과했다. ' 내가 너의 자리에 있었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다면 너보다도 더 세레브한 사육실장이 될 수 있었다는 어두운 감정. 

제자리에 서서 곰곰이 생각하던 해피는 불현듯 자신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그래, 사육실장을 두려워하는 들실장은 없다. 하지만 대상이 사육실장이 아니라면? 오늘 해피가 눈을 뜬 장소는 주인의 집이 아닌 공원에 버려진 자신의 하우스였다. 비록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녀석들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들실장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가슴을 움켜쥐고 힘없이 걸음을 옮기면서 해피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사육실장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수돗가에 도착한 해피는 실장복을 물로 빤 뒤 알몸으로 옷이 마르길 기다렸다. 헐벗은 채로 생각에 잠긴 해피를 보고는 노예로 삼겠다며 손에 운치를 묻히고 다가온 건방진 자실장을 단매에 때려죽이고, 자를 부추겨 노예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려다가 졸지에 하나뿐인 자를 잃어 격분해 덤비는 친실장을 두들겨 패 죽인 뒤, 그 친실장을 깔개 삼아 걸터앉은 뒤에도 팔짱을 끼고 장고를 거듭했다. 이미 옷은 한참 전에 입어도 될 만큼 충분히 건조됐지만, 해피는 좀처럼 수돗가를 떠나지 않았다. 

눈 뜬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지는 진실이었지만, 자신은 버려졌다. 현실을 외면하고 행복회로나 돌릴 만큼 해피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지만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는데 왜 공원에 자신을 버린 걸까? 
북받치는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하나 짐작 가는 게 있다. 수술로 눈을 회복 시켜 자를 낳게 해달라고 졸랐던 게 원인임이 틀림없다. 그때부터 주인과 자신의 사이가 벌어졌고, 끝끝내 주인은 자신을 공원에 버리고는 사라졌다.
친구 베티의 조언이 거짓이었을까? 분명히 같은 사육실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착하고 친절하진 않다. 일부러 다른 사육실장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부추겨 희생자가 파멸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고약한 녀석도 있었다. 그러나 베티는 그런 저열한 분충이 아닌 고급 사육실장이고, 누구보다도 믿을만한 친구였다. 자신의 소중한 돌에 맹세코 베티에게 어떤 악의도 없었음을 장담할 수 있다. 

차라리 위석을 자괴했더라면, 해피만은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을지 몰라도 다른 들실장들이나 해피의 주인은 행복했을 것이다. 아니,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해피에게도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 모른다. 오랜 장고 끝에 마침내 해답을 낸 해피는 옷을 걸쳐 입으며 이후의 목표에 대해 생각했다. 해피가 주인에게 버림받은 이유, 자를 가지고 싶다고 주인을 졸랐던 일이 단순히 자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자신의 소망이 평범함 사육실장의 무책임한 욕망과는 다름을 알려야 했다, 자신은 단지 주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어떻게 주인에게 알려야 할까? 답은 하나였다. 자를 훌륭히 키워 주인에게 선보여서 증명하면 된다. 꼭 자신의 혈육이 아니어도 괜찮다. 자를 낳을 수 없는 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데 꼭 친혈육이 필요하진 않았다. 오히려 피가 한 방울도 이어지지 않은 남을 성공적으로 훈육하는 게 더 값질 것이다. 앞으로의 목표를 정한 해피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귀여운 자를 잘 길러서 주인님에게 보여주면 주인님도 와타시의 잘못을 용서하고 도로 사육실장으로 받아주시는데스. '

오랜 시간 고심한 해피가 내놓은 답, 그것은 고작 저가형 사육실장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해피가 눈독 들인 대상은 고아실장이었다. 어떤 이유든 자신을 보호하고 부양할 친실장을 잃고 공포와 주림에 떨면서 비참한 삶을 연명하다가 허망하게 스러지는 생명. 상처받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어준다면 친혈육보다도 끈끈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자의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자신이 그만큼 노력하면 된다는 게 해피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는 완벽한 판단 착오였다. 정해진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하면 자를 감싸고 도는 친실장조차도 포기하고 내쫓은 결함투성이 분충, 대다수 고아실장의 실체는 해피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를 구하기보단 저주를 퍼붓는 그릇된 품성의 아이들이었으니 해피가 아무리 훈육에 힘써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방법을 달리하며 훈육해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 불량아들 , 잔혹한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팔리기 위해 출산석에게서 뽑아내 훈육을 전혀 하지 않고 매대에 오르는 싸구려 실장석 수준의 자를 데려가봤자 주인이 절대 납득할 리 없었다. 처음에는 말도 잘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고아에게 쩔쩔매면서도 간신히 어르고 달래며 교육을 하다가 정 안 될 경우 부득이하게 처분하였지만, 얼른 주인에게 돌아가고파 조급한 해피조차도 고아분충에게 가망이 전혀 없음을 자각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물게 분충 친실장에게 억울하게 버림받은 개념의 고아를 거둔 적도 있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구사일생한 고아는 자신을 절망의 수렁에서 구원한 해피에게 강하게 집착하며 잠시라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사육실장에게 최고의 덕목은 주인에 대한 복종, 바로 해피가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다가 잠시 눈이 멀어서 어겼던 금기였다. 사육실장의 입장에선 아무리 부당한 명령일지라도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사육실장의 자격이 없었다. 성품도 괜찮고, 능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고아들은 이런 면에서는 낙제점이었다. 생존을 위한 식량 수집을 위해 불가피한 외출에도 기겁하며 매달렸다. 자신을 혼자 두지 말라고 떼를 썼으며, 심하면 발광하기까지 했다. 
해피도 이성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친실장에게 버림받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고아에게는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필요함을. 상처를 치료하고 나면 고아는 누구와 비교해도 착하고 훌륭한 자로 성장하여 주인에게 당당히 보일 수 있음을. 
그러나 해피는 그렇지 않았다.

' 테에에엥! '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해피는 집을 나섰다. 해피의 손아귀에 귀를 붙잡힌 자실장 한 마리가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해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자실장은 귀에서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 혹여나 귀가 찢어질까 봐 짦은 팔과 다리를 뻡어 해피의 팔에 어떻게든 달라붙었다. 다른 동족이나 짐승을 불러들일까하는 두려움에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도 해피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한참을 걷던 해피가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실장이 달라붙은 팔을 가볍게 터니, 자실장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 테챠아앗! '

땅바닥에 떨어진 자실장이 떨어져 나갈듯한 귀를 손으로 비비며 통증을 줄이려고 잠시 애쓰는 동안, 말없이 자신에게 등 돌리고 떠나가는 해피를 목격한 자실장은 기겁하여 외쳤다.  

' 와타치가 잘못한테치! 앞으로 마마의 말을 잘 듣는테치! '

자실장의 진심이 전해졌던 것일까, 굳이 외딴 장소까지 찾아와 자실장을 버리는 수고를 감내했던 해피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해피는 자실장이 다시 말을 걸기도 전에 차갑게 말했다. 

' 쓸모없는 년인데스. ' 

' 테... '

' 머저리, 병신, 겁쟁이, 밥만 축내는 쓰레기 년. ' 

' 아닌테치... 아닌테치... 와타치는 나쁜 아이가 아닌테치... '

' 오마에같은 분충에게 투자한 노력이 아까운데스. 오마에 따위에게 뭘 기대한 와타시가 병신인데스. '

' 듣기 싫은테치... 마마, 그만두는테치.. '

' 와타시는 오마에의 마마가 아닌데스. 누가 마마에게 버림받은 병신 고아가 아니랄까봐 아둔하기 짝이 없는데스. '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친실장에게 버림받은 고아였던 자실장의 가슴을 괴롭게 하는 차가운 말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죽음만을 앞둔 자실장에게 한때 빛이 되어줬던 자상했던 구원자는 지금 자신을 버린 친실장보다도 신랄하게 자신을 매도하고 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고통에 무릎 꿇고 괴로워하는 자실장을 뒤로한 채 해피는 왔던 길을 되돌아 사라졌다.
' 마마...... '

이유 없이 엄지들을 괴롭히는 다른 동생들을 말리다가 친실장에게 병신 소리를 들으며 버려진 자실장, 홀로 남겨진 공원은 지옥이었다. 친절함을 가장하고 접근하건 혹은 대놓고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건, 공원의 어른들에게 자신은 손쉬운 사냥감에 불과했다. 
어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처럼 버림받은 처지의 아이 중에는 성미가 고약한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원의 최하위 신분인 그들이 생존하고자 한다면 역시 가장 손쉬운 상대는 같은 처지의 고아였다. 이런 틈바구니에 치이며 살아갈 의지를 조금씩 상실했던 괴로운 시간, 결국 궁지에 몰린 자신을 구한 성체실장은 자신을 사육실장이 되게 해주겠다고 마마라고 부르게 했다.
모든 걸 포기한 순간에 나타난 희망, 구원의 동아줄을 놓기 싫었다. 본 적도 없는 사육실장은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새마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새마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기뻐하였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새마마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오직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알고 있었다. 새마마의 외출은 음식을 구하기 위함이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이 나가야 했음을. 하지만 자실장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신없이 쫓기던 처지였다. 탈출할 공간 없이 막힌 장소에 홀로 남아야 함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새마마는 집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혼자서 살아가던 때, 안전하다고 생각한 장소에서 잠들고 눈을 떠보니 손을 뻗어 자신을 움켜쥐려고 시도하는 다른 성체실장과 눈이 마주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안 좋은 경험이 있으니 혼자 남겨지는 걸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몸이 바들바들 떨려와 차라리 새마마와 함께 다니기를 원했지만, 음식을 구하는 일은 사육실장의 일이 아니라며 거절당하기만 했다.

결국에 자신은 버려졌다.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응석을 부릴 때마다 새마마의 얼굴이 점차 굳어짐을 간과해서는 안 됐었다. 
이제 더는 희망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버려진 자를 길러줄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뿌옇게 습기가 찬 눈에서 새마마가 더는 보이지 않자, 자실장은 작은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 치이이.... '

그것이 자실장이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마마에게 쓸모없는 분충이라고 매도 받고 또다시 버림받은 개념의 고아는 그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버림받았던 아이는 최후마저도 고통스러웠지만, 집에 돌아와서 바닥에 등을 뉘며 투덜대는 해피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고아를 기르는 일에 희망이 보이지 않자, 다음에 노린 대상은 갓 태어난 자였다. 들실장들이 으레 행하듯이 출산 중인 친실장을 습격하여 백치로 만들고는, 태어난 자들을 탈취하여 자신을 그 자들의 마마인 척 행새하여 훈육을 시도했다. 그러나 해피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이 방법도 역부족이었다.

일반적으로 출산석 태생의 예비사육실장들은 태어나자마자 친실장과 헤어진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성장을 제한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인간에게 훈육 받는 기간에는 친실장의 모유를 섭취하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영양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성장 촉진성분이 포함된 푸드를 식사로 제공한다. 
들실장의 경우는 더 여유가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를 아끼는 친실장의 자로 태어나는 일은 좀처럼 잡기 힘든 행운이다. 대다수의 경우는 자신의 마음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잣대를 기준으로 자들을 기르는 친실장의 아래 살아가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만약 자가 친실장의 신경을 거스르면 친실장은 그 자에게 베풀던 애정과 관심을 고대로 다른 자에게 돌릴 테니, 이후의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만약에 아직 젖을 떼지 못했었다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데, 감정이 상한 친실장이 모유를 수유할 리 없으니 지능과 신체발달이 다른 자매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어 결국 성체로 성장하기 이전에 자연스럽게 도태되어버린다. 자가 죽는다고 해봤자 이미 관심을 거둔 자가 죽건 말건 친실장에겐 무슨 상관이겠는가? 도리어 노예나 보존식으로 만들지 않은 자신의 자비에 감사하라며 콧방귀를 낄 것이다. 괜히 들실장의 자들이 다른 자매들을 음해하거나 해치기까지 하며 자신의 서열과 친실장의 총애에 목을 매는 게 아니다. 

해피는 한 눈을 의안으로 교체하여 임신할 수 없는 몸, 따라서 신생아들의 성장에 필수 불가결한 모유를 제공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만회할 성장촉진 푸드를 구할 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판기가 낳은 자들의 성장은 평균적인 들실장의 자보다 더디었고, 지능 또한 평균조차 미치지 못하였다. 모유를 제공받지 못한 자들은 어찌 보면 일평생 장애를 안고 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해피는 조급했다. 시간만 준다면 훌륭한 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개념 고아들조차도 가차 없이 버릴 만큼 인내심이 없었다. 모자란 자들을 기른다는 계획은 금세 폐기되었다. 

- 저벅저벅 -

서로 장난치며 놀던 자들은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했다. 발소리가 다시 멀어지지 않고 집으로 다가오니,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자들은 눈을 반짝였다. 

' 마마인테치? '  ' 마마가 분명한테치! '

눈을 마주 보며 의견을 교환하던 자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목을 빼고 문을 주시하는 자들의 귀도 요란하게 파닥거렸다. 문이 열리며 성체실장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자들은 성체실장에게 몸을 날렸다. 

' 마마!x5 ' 

앞다투어 달려 나간 자들은 해피의 몸에 얼굴을 부볐다.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는 자들을 보며 미소를 짓는 해피였지만, 만약에 자들이 해피의 얼굴을 봤다면 입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들을 부드럽게 밀어낸 해피는 수집해온 음식물을 보존식 상자에 부은 뒤 자들을 불렀다.

' 자들은 이리 모이는데스. 마마가 자들과 함께 놀아주는데스. '

' 테? 노는테치? 오늘은 밥 먼저 안먹는테치? '

' 괜찮은데스. 오늘은 먼저 논 다음에 저녁을 먹는데스. '

해피의 말을 들은 자들은 환호하기는커녕 영 떨떠름해 보였다, 한 자실장은 볼을 부풀리며 대놓고 볼멘소리를 내었다.

' 늘 하는 놀이는 재미가 없는테치. 다른 놀이를 하면 안되는테치? '

정상적으로 수유를 마친 자들과는 달리, 모유를 먹지 못한 자들은 아무래도 능력이 좀 떨어졌다. 걸핏하면 집중력을 잃고 놀고 싶다고 조르기만 했다. 만약에 해피가 처음으로 양육을 시도한 대상이 이 신생아들이었다면, 해피는 분명히 이런 자들의 행태를 견디지 못하고 혈압이 올라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해피는 이전에 고아실장들을 길렀던 경험이 있었다. 비록 떠올리기 싫은 실패이긴 했지만, 고아들을 훈육하면서 얻었던 인내심과 경험을 바탕으로 머리를 굴려서 사육실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놀이라고 지칭하여 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역시 자들의 능력 문제도 있고, 실제로 노는 것보다는 재미가 없어서 흥미를 쉽게 잃어버리니 진전이 있을법해도 번번이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 아닌데스. 오늘은 마마가 자들을 위해 새로운 놀이를 가르쳐주는데스. '

해피는 아직 어깨에 멘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나뭇가지를 꺼냈다. 자연 그대로의 날것이 아니라 대체로 매끈해 보이는 나뭇가지는 끝부분도 뭉툭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해피는 자들에게 나뭇가지를 하나씩 나눠주고 자신도 자들의 것보다 몇 배는 커다란 나뭇가지를 손에 쥐었다.  

' 오늘 할 놀이는 야구라는 놀이인데스. 자들에게 나눠준 나뭇가지롤 맞대어 힘을 겨루다가 이긴 쪽이 진 쪽을 위로 높이높이 날려주는 놀이인데스. '

' 높이높이인테치? '  ' 되게 재밌어보이는테치! '  ' 와타치, 와타치가 제일 먼저인테챠앗! '

' 다들 진정하는데스. 기회는 모든 자들에게 공정히 돌아가는데스. 그럼 마마와 함께 야구를 즐겨보는데스 . '

손에 힘을 불끈 쥐며 나뭇가지를 움켜쥔 해피는 씨익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비록 훈육에 애를 먹여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한 10으로 친다면 놀이로 얻은 기쁨은 1~2에 불과했지만, 모자란 자들을 처분하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고아도, 신생아도 답이 아니었다. 결국 해피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화장실 근처에 머물면서 출산을 마치고 돌아가는 친실장일가의 뒤를 쫓아 몰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다가, 젖을 뗄 시기가 오면 자들의 친실장을 죽이고 자신이 친실장인마냥 위장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전의 두 방법보다는 제법 긍정적인 성과를 얻긴 했지만, 몇 가지 사소한 실패들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했다.

처음엔 곧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어느덧 초겨울이 한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진척 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슬슬 답답해하던 해피는 문득 공기가 서늘함을 느끼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아직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자실장 시절, 생애 처음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며 신기해 방방 뛰었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을 하얗게 물든 눈을 보며 산책을 가보고 싶다고 주인을 조르니, 잠시 고민하던 주인은 미리 사두었던 사육자실장용 패딩을 해피가 입는 동안 자신의 낡은 목도리의 끝부분을 오려내 손에 씌워주었다. 비록 어른이 되니 치수가 맞지 않아 결국 버려야 했지만, 주인에게 처음으로 받은 여벌 옷이자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만 있지는 않았다. 추위에도 끄덕없는 패딩을 입고 산책 나간 공원에서 눈을 만지며 놀다가 손에 딱딱한 촉감을 느끼고 주인에게 부탁하여 파헤쳐보니 눈 때문에 얼어 죽은 성체실장의 시체가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딱딱해지고 차갑게 식은 성체실장의 시신에서 유일하게 부드러웠던 눈, 누굴 향한 지 모르는 원망과 증오가 느껴지는 그 눈이 잊혀지지 않아 며칠 밤을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주인에게 버림받아 집 안에서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 수 없는 처지가 된 자신에게 얼어 죽은 성체실장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크게 놀란 해피는 그 뒤로 자를 물색하는 일도 그만두고 겨울나기를 준비하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실장일가들을 파멸시키며 약탈에 나섰지만, 시간이 모자라 결국에는 온전히 대비하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홀로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해피가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반드시 주인에게 돌아가겠다는 집념 덕분이었다. 이를 악물고 긴 겨울을 버텨낸 해피는 봄이 되기가 무섭게 집에서 뛰쳐나와 희생양을 물색했다. 길을 거닐다가 막 독립한 풋내기 성체실장이 분주히 집을 꾸미는 것을 발견한 해피는 그 풋내기를 목표로 삼고 한동안 몰래 관찰하다가, 자들이 젖을 떼자마자 그 친실장을 죽이고 대신 집으로 기어들어 가 친실장의 행세를 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자신의 비원을 달성하지 못했다. 

" 데휴... 정말 병신들인데스. 사육실장이 되게 해 주려고 분충도 손수 솎아내주는데 왜 지들이 더 난리인데스? 그 어린년은 대체 자들에게 뭘 가르친데스? 아니, 어찌 보면 잘된 일 인데스. 저런 머저리들이라면 결국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게 뻔한데스. "


늘 그렇듯이 해피는 실패의 원인을 자신이 기르던 자들에게 돌리며 욕했다. 그러나 해피는 혈육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여겼다.  
들실장들이 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피를 나눈 혈육을 적대시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경우가 흔함을 부정할 수 없다. 독립을 기점으로 자신과 함께 자라난 자매들은 물론 자신을 길러온 친실장까지 남남으로 여길 만큼 감정이 옅어지는 게 들실장들의 특색이었다.
하지만 같은 어미의 밑에서 자라는 자의 시절은 물론이고, 독립한 성체실장이 된다 해도 혈육은 특별한 관계였다. 순수한 도움을 바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이득을 보길 바라는 문제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곤경에 처하게 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대상이 함께 자란 혈육이었다. 들실장이라고 전부 바보여서 혈육에게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니다. 그나마 혈육이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닫지 않아서 생기는 부차적인 문제였을 뿐, 피도 이어지지 않은 다른 실장석이 접근해 온다면 바보가 아닌이상 누구라도 경계하고 배척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사육실장에게 혈육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애완동물로 팔린 이후에 자를 낳아 대가 이어지는 경우면 모를까, 같은 출산석에서 태어났다고 한들 그 가치는 훈육 받는 동안에 완전히 잊히게 된다. 고급 실장석을 브리딩하는 방법에는 태어난 자들을 친실장과 갈라놓지 않고 같이 생활하며 훈육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는 정말 세레브급을 노리는 최상급 출산석의 자식이나 경험해볼 만한 사치였다. 게다가 친실장과 같이 머문다고 한들, 고작해야 성장에 도움이 되는 젖을 떼기까지의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그 이상의 기간을 허용해봤자 친실장과의 유대가 깊어진 자들이 어미와의 이별을 거부하며 떼를 쓰기에 훈육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이마저도 평범한 출산석의 자로 태어나자마자 친실장의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헤어진 뒤, 같은 처지의 자들과 함께 받는 훈육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만으로 고급 사육실장이 된 해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위석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설령 대를 뛰어넘어서라도 유전될 만큼 강렬하다. 비록 사육실장이 헤어진 혈육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해도, 위석만큼은 친실장의 체내에 머무는 태실장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접점이 적은 다른 태실장은 물론, 자신을 품고 있던 친실장의 아늑한 품을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잊지 않는 것이다.
사육실장들은 자를 원하는 이유를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외로움을 느껴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를 나눈 자매들, 그리고 자신을 따스하게 품어주던 어미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외로움에 가려진 진짜 이유였다. 비록 사육실장 자신은 이를 알 리가 없지만, 본능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는 영영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를 낳고 도리어 자신이 품어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영원히 메꿔지지 않을 빈자리를 채우려는 것이었다. 베티의 조언을 듣는 순간 깨어난 본능이 추구하던 그리움을 단지 주인에게 받고 싶은 사랑으로 착각하고 아직도 이에 매달리는 해피가 이 사실을 깨달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사육 자실장으로 팔려 와 버려지기 전까지 살던 주인의 집. 들실장으로서의 삶이 길어짐에 따라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그곳의 풍경이 점차 희미해졌다. 생각과는 달리 영 진전이 없는 상황에 해피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자신은 그 어렵다는 고급훈련을 통과하고 주인의 품에 인도된 당당한 사육실장이었다. 더욱이 공원의 삶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음에도 자신만의 능력으로 온갖 어려움을 넘기며 살아가고 있다.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
머리를 흔들어 부정적인 생각들을 털어낸 해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괜찮은데스. 힘내는데스! 자는 또 찾으면 되는데스! "

아직 중천에 높게 떠 있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해피는 미소지었다. 곳곳에 적록의 얼룩이 묻어 있고 음산해 보이는 과거의 실패를 뒤로하며, 해피는 힘차게 걸어갔다.


이제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골판지. 그곳은 한때 풋내기 성체실장이 자를 갖는다는 꿈에 부풀어 올라 정성스럽게 태교의 노래를 부르던 장소였으며, 하루라도 빨리 성장하여 친실장을 따라 세상을 거니는 미래를 소망하던 어린 자들의 요람이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생명체라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이치였다. 주인을 잃은 골판지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테지만, 먼 길을 떠난 버려진 골판지의 옛 거주자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들실장에게 골판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 언젠가 버려진 골판지가 다른 들실장에게 발견된다면 버려진 빈집은 또 다른 주인을 맞이하거나, 방문자의 손에 본래의 형태를 잃고 해체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한 실장일가가 맞이한 비극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에게 걸맞은 자를 길러 주인에게 돌아가리라고 믿기에 해피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져선 안 될 소망을 바라고 떼쓰다가 버려진 과거의 행적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다른 들실장들을 해치는 그 행동은 사육실장으로서는 절대 용납받을 수 없는 분충의 품성이었으나, 해피 자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해피는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자신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을 주인과의 재회를 위해서 해피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혼자만의 터무니없는 망상일지라도.
어떤 좌절도 해피의 행보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실패를 겪어왔고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실패가 해피를 기다리고 있지만, 해피는 자신의 실패를 분석하고 경험으로 치환하여 계속해서 도전하리라. 그 욕망으로 점철된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공원의 모든 친실장들을 죽일 때까지, 합격점에 미달하는 자들을 전부 처분하고 홀로 남을 때까지도.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법, 공원에서의 삶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깨달은 해피가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지금까지처럼,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만의 자를 찾기 위해 다른 공원으로 이주해 같은 여정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해피가 지나가는 행적을 따라 무수한 피와 눈물이 흐르는 절규의 역사가 다시 반복될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들실장의 한계에 실망하여 사육실장에게 눈을 돌릴지 모른다. 고급 출산석을 통해 고급 사육실장으로 훈련받을 자들을 선별하듯이, 사육실장의 자들이라면 틀림없이 들실장의 자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공원에 산책 온 사육실장을 습격하여 자판기로 만들어 버리고, 태어난 자들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속셈일 거다. 
어쩌면 이는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좋을 미래일지도 모른다. 보복할 능력이 전무한 들실장들은 해피에게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했지만, 사육주의 분노 앞에선 해피도 자신에게 희생당한 들실장보다도 무력할 테니, 그리 머지않아 삶의 끝을 마주할 것이다.
하지만 졸지에 귀여워하던 애완동물을 잃어버린 사육주들의 상실감, 그리고 정상적으로 태어났다면 마땅히 누렸을 사육실장의 지위와 행복한 삶을 영문도 모르고 박탈당한 채 들실장의 자로 살아가다 끝내 처분당할 자들의 실생은 누구도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태연하게 다른 이의 행복을 짓밟는 해피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손에 쥘 수 없던 행복에 집착하는 분충이 된 해피에게 구원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섬집 아이

 


- 쏴아아아 -

하늘에서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든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구멍이 난 듯이 이미 며칠이나 비가 내리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수분을 흡수한 땅이 도로 뱉어내는 빗물들이 모여서 생성된 작은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져 퐁퐁 소리를 내었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손길은 무력했다. 아스팔트로 포장되지 않은 길은 이미 계속되는 비로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폭우가 괴롭히는 대상은 비단 인간의 작품만은 아니었다. 흙길의 양옆을 따라서 빼곡히 들어찬 수풀과 그 사이에 있는 꽃들도 며칠 동안의 시달림에 지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인간들의 발길도 잠시 끊긴 이 장소에는 어떤 동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길가의 옆에는 성인의 무릎 높이 정도 되는 얕은 흙 언덕이 있었다. 그 낮은 언덕의 하단부에는 수풀에 가려진 큰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에서 한 생물이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색이 다른 양 눈, 의식하지 않으면 다물어지지 않는 세모입, 인간을 엉성하게 닮은 그 이족보행 생물의 정체는 바로 실장석이었다.


구멍의 입구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계속 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친실장의 얼굴엔 근심이 가시질 않았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줄 비가 내린다며 좋아한 것도 잠시, 며칠째 계속되는 비에 친실장은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늘만을 볼 뿐이었다. 작열하는 햇빛에 달궈진 뜨거웠던 대기는 수분을 듬뿍 머금어 고작 며칠 만에 으슬으슬한 한기로 가득 찼다.

기온의 변화는 곧 문제가 되었다. 성체실장인 친실장은 급변한 온도에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으나, 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방금까지 집 안에서 작은 공을 가지고 뛰놀던 장녀와 차녀는 공도 내팽개치고 양팔로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는 조용히 앉아있었다.
땀을 흘리며 논 게 오히려 독이 되었는지 몸을 달달 떨며 이를 딱딱거리는 두 자실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몸을 따듯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한여름, 그리고 사육실장도 아닌 고작 들실장의 집에 그런 물건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한기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두 자실장은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나누었으나 혼자일 때보다 조금 나을 뿐이지 큰 차이는 없었다.

추위에 벌벌 떠는 자들을 본 친실장은 안쓰러웠으나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자들 스스로가 이겨내기를 응원했다. 
마치 자신이 어릴 때 겨울철의 추위에 벌벌 떨던 것처럼 추위에 시달리는 자들의 모습에 이전에 인간이 버린 천 조각을 주웠다고 자랑하던 동생의 모습이 친실장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추위 속에서도 그 천 조각을 이용해 따스하게 지낼 동생의 자들을 생각하면 자신도 인간의 물건에 슬며시 욕심이 났지만 안 될 일이었다. 동생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인간들은 필요 없는 물건조차도 자신들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친실장은 과거의 경험으로 그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독립이란 것은 무엇일까. 친실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자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게 되는 자격을 갖춘 시발점일 것이다.
마마에게서 당당히 독립하여 자신만의 삶을 산다는 흥분감, 마마의 자로서 배워왔던 지식을 한층 넘어 살아가면서 마주칠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분신, 자신의 모든 사랑을 베풀 자를 낳아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게 된다는 기대감.
순탄하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기 전까지의 이 시기야말로 실장석의 일생에서 가장 의욕이 넘치고 빛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친실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마의 배웅을 받으며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선 친실장은 곧 동생과도 헤어져 정처 없이 떠돌았다.
자를 낳는 일도 잠시 미뤄두고 여태껏 가보지 못했던 장소들을 돌아다니기에 여념이 없는 친실장의 모습은 자를 가지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를 낳겠다는 마음이 강했기에 그러했다. 
자신이 낳을 자들에게 좋은 것만을 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보다도 더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방황 끝에 마마의 집과 꼭 닮은 집을 찾은 후에도 친실장은 오로지 이후에 가질 자들을 생각하며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이곳저곳 배회하던 친실장은 인간의 집 근처 땅바닥에 놔 뒹구는 새거나 다름없는 비닐봉지를 찾았다. 
양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당겨도 팽팽한 봉투의 상태를 본 친실장의 입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정도의 자제력도 없었다면 이미 자실장이었을 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봉투를 오른팔에 걸고 날듯한 기분으로 다시 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날은 정말로 행복했었다.

들뜬 마음으로 걷던 친실장은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근처의 수풀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인 친실장이 포착한 소리는 인간의 고성과 어떤 성체실장의 비명이었다.
본래라면 냉정하게 관심을 끊고 피해가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친실장은 오히려 귀를 기울이며 소리의 근원으로 다가갔다. 
비명을 지르는 성체실장의 그 목소리는 친실장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착각이기를 바라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친실장은 도중에 성체실장의 비명이 끊기자 반쯤 정신을 놓고 달렸다.
끊긴 비명 대신에 피와 운치 냄새를 쫓아서 친실장이 도착한 그곳에는 한 독라 성체실장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울긋불긋한 몸과 거칠게 뽑혀 한 두올만 남아 있어 더욱더 흉하게 보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독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뜯긴 다리 한쪽과 그곳에서 독라가 쓰러진 장소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피와 운치로 채색된 길. 
어찌나 필사적으로 땅을 짚으며 도망쳤는지 독라의 양손은 피투성이였다.

독라의 처참한 모습을 본 친실장은 망연자실하여 독라의 앞에서 주저앉았다. 땅에 쓰러진 독라는 바로 친실장의 어미였다.
터져 나오려는 비통한 울음은 애써 참았지만, 주위를 경계하는 일도 잊은 채 친실장은 멍하니 마마를 볼 뿐이었다.
동생과 함께 독립할 때 자신들보다도 더 기뻐하며 배웅하던 마마였다, 이후 가끔 옛집을 찾아가면 새로 낳은 자들을 기르느라 바쁘면서도 자를 낳지 않고 방황하는 친실장을 걱정해주던 마마였다. 그렇게나 자상하던 마마가 어째서 독라가 되어 쓰러진 것일까.
넋이 나간 친실장이 작게 마마라고 중얼거린 그 순간, 닫힌 눈을 파르르 떨며 죽은 줄 알았던 마마가 힘겹게 눈을 떴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친실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렇게나 두려웠던 것일까, 공포감에 사로잡혀 부르르 떨며 사방으로 눈을 굴리는 마마의 모습은 친실장에게 너무나 낯설었다.
주변을 한참을 살핀 후에 위험을 찾지 못하자 그제야 안정을 되찾은 마마는 늘 보던 자상한 눈빛으로 친실장을 보았다.

옆으로 손을 뻗은 마마는 친실장이 쓰러진 마마에 정신이 팔려 미처 보지 못했던 낡은 그릇을 집어 자신의 자식에게 보였다.
마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애처롭게 그릇을 건네며 집에 남아있는 자에게 갖다 달라며 부탁하였다. 
마마와의 이별을 예감한 친실장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릇을 받았다. 
언제나 착한 아이였던 널 사랑한다고 작게 속삭이며 머리를 한두 번 쓰다듬던 마마의 손은 이내 힘없이 땅에 툭 떨어졌다. 


친실장은 손에 쥔 색도 희미해지고 먼지가 쌓인 그릇을 보았다. 낯이 익은 그릇의 주인을 친실장은 알고 있었다.
여기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인간의 집, 늘 파란색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집에 살던 큰 개가 밥그릇으로 쓰던 그릇이었다. 
대문이 열려있기 때문에 지나가다 몇 번이고 시선이 마주쳤지만, 나이가 든 늙은 개는 자신들에게 별 흥미가 없었는지 집 근처로 다가갈 때만 낮게 으르렁거리며 경고할 뿐이었다.
그것도 친실장이 독립하기 전 과거의 일이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찾아왔을 때 그 집에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마가 무엇 때문에 그릇을 들고 도망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필요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썼을 것이다. 
더욱이 주인도 없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그릇이었기에 마마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주인도 없이 방치된 고물,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고작 이따위 낡은 그릇 때문에 사랑하는 마마가 목숨을 잃어야 했는가.
제 맘대로 목놓아 울지도 못하는 친실장은 조금씩 차가워지는 마마의 시신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다.


어느덧 지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직은 차가운 저녁 바람이 비통에 잠긴 친실장의 정신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슬프더라도 산자는 살아야 했다. 서둘러 길 근처에 얕은 구덩이를 판 친실장은 마마의 시신을 묻어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 영 떨어지려 하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 마마의 집으로 향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친실장이 집 안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무엇인가 날아와 친실장의 몸에 부딪혔다. 
발치에 뒹구는 그 물건은 조개껍질이었다. 친실장이 굽혔던 허리를 펴기도 전에 집 안쪽에서 다시 한번 조개껍질이 날아왔다.
친실장이 말없이 어두운 집 안을 응시하니 안에서 제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자실장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마마의 새 장녀, 한때는 막내 오녀였으며 다른 자들에게 악영향을 주기에 마마가 솎아내려고 했던 분충.
그러나 솎아내기 위해 깨끗하게 씻겨주겠다고 거짓말로 꾀어 분충과 함께 떠났던 여정에서 헥헥거리면서도 불평 한번 내뱉지 않고 따라오는 분충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던 마마는 자신이 더 잘 교육하면 될 거라고 다짐하며 도로 집에 데려오고야 말았다.
안타깝게도 그날 하필이면 나머지 자들이 흔적도 없이 실종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결국 자들을 찾지 못한 마마는 하나 남은 자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사라진 자들에 대한 사랑까지 독차지한 분충의 행실이 더 나빠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왜 마마가 아니라 언니가 왔냐는 분충의 말에 마마는 이제 돌아오지 못한다고 전하는 친실장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마마의 숨겨진 마지막 소망, 분충을 대신 길러 달라는 그 소망은 아무리 마마가 간절히 바라더라도 친실장이 들어줄 수 없었다, 
미워도 혈육은 혈육이었다. 홀로 남겨진 분충 자실장의 너무나 뻔한 미래를 알면서도 담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분충이 그러면 마마 대신 목욕을 시켜달라고 말하는 순간에야 친실장은 일의 전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이 분충의 욕심이 문제였다. 진작에 솎아냈어야 했던 분충의 욕심이 마침내 제 어미조차 잡아먹었다. 
이를 악물며 화를 억누른 친실장은 한껏 차가워진 말투로 마마는 이제 돌아오지 못하니 목욕도 당연히 할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 통보를 들은 자실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땅바닥을 뒹굴며 마마 대신해달라고 떼를 쓰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떼를 써도 친실장이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자, 분충은 오지 않는 마마를 모욕하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친실장은 어서 아와아와를 내놓으라고 헛소리를 내뱉던 분충의 얼굴에 그릇을 세차게 집어 던졌다.

친실장은 얼굴을 부여잡은 분충을 무시하고 이제 알아서 살라며 일방적인 통보를 한 뒤 뒤돌아 빠져나가려고 했다.
사실 그 순간까지도 친실장은 한줄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걸으며 분충이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고 되묻기를 바라고 있었다. 
직접 길러줄 마음은 없었으니 위선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마마의 자가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싶었다.
마마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줄 용의가 기꺼이 있었다.

마침내 친실장의 다리를 분충이 붙잡았다. 
그러나 기대감에 찬 친실장을 보며 분충이 한 말은 언니가 마마 대신에 고귀한 자신을 부양하라며 바락바락 악을 쓸 뿐이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운 분충의 말에 한줄기의 정마저 식어버린 친실장은 분충을 냉정하게 걷어차고 집 밖으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걷는 친실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작 저딴 분충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마마, 자신이 사랑했던 마마의 희생은 그렇게 무의미한 일이었다. 
마마의 집을 빠져나온 친실장은 그 뒤 두 번 다시는 마마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가슴 아픈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인간의 물건에 손을 대서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인간의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고 인간이 잘 다니지 않는 장소에 버려진 물건만을 찾아다니는 친실장이었다.
이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쓰레기들을 하나씩 모으며 착실히 살림을 마련한 친실장은 이윽고 자를 가졌다.

자들에게 좋은 것만을 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깼지만 친실장은 후회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다음 날부터 찾아든 추위에 떠는 자들의 모습을 봤을 때만 해도 친실장의 마음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대신에 친실장은 자들에게 밥을 더 먹이고 맘껏 뛰놀게 했다. 더 많은 밥으로 뛰놀 힘을, 뛰놀며 추위를 이길 열기를 발산하길 바랬다.
애초에 늦은 출산으로 친실장과 같이 돌아다니기엔 아직 체력이 모자란 자들이 힘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평소보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해도 열정적으로 놀던 자들은 금세 피곤함을 느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친실장은 자들이 성장기라는 걸 고려하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영양공급만 충분하다면 쑥쑥 자랄 시기였다. 자들이 먹을 것에 욕심을 부리진 않았지만, 밥을 먹으며 마음껏 뛰놀수록 자들의 몸은 성장을 위해 더 많은 양분을 요구했다.
결국 그동안 비축해놨던 식량 대부분이 고작 며칠 사이에 크게 줄어들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들실장의 삶에서 보존식이 없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나가 식량을 구해야 하지 않냐는 충동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 비가 잔뜩 내리면 인간들도 잘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너무나 위험했다.
만약 자신이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직 어린 자들은 결국 굶어 죽을 것이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결국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자들을 응석쟁이로 자라지 않게 하려고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 이번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한숨을 내쉰 친실장은 추위에 달달 떨고 있는 자들을 향해 말했다.

" 자들은 이리 오는데스. 마마가 꼭 안아서 따뜻하게 해주는데스. "

바닥에 앉아 서로를 껴안고 추위에 벌벌 떨던 두 자실장은 냉큼 달려와 친실장의 품에 안겼다.
꿉꿉하고 차디찬 몸. 친실장조차 깜짝 놀랄 만큼 자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무 불평도 없이 자들은 묵묵히 추위를 참고 있던 것이다. 친실장은 자들의 인내심이 대견스러워 손으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자신들을 감싼 친실장의 체온에 몸이 녹는 것을 느끼며 두 자실장은 좀 더 친실장에게 몸을 기대왔다. 
친실장과 자들은 서로를 껴안고 온기를 나누었다. 고요해진 집에는 오로지 작은 숨소리와 밖에 내리는 빗소리만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자들의 심장 박동을 듣고 있던 친실장은 지긋한 시선을 느끼고 눈을 떠 자들을 내려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친실장의 품이 주는 따스함에 푹 빠진 차녀와는 달리, 장녀는 시선을 위로하여 조용히 친실장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장녀의 두 눈엔 어떠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 장녀. 마마에게 바라는 게 있는데스 ? "

" 따뜻하니까 졸린테치. 마마가 자장가를 불러줬으면 좋은테치. "

장녀의 요구는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졸린 자들이 꿈나라에 한 다리를 걸쳤을 때 자장가를 불러주는 일은 늘 해왔던 일이었다. 
친실장은 조심스럽게 몸을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마마가 바닷가에~ 밥 찾으러 가면~ 자들이 집에 남아 기다리다가~ "

" 큰 물씨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자들은 스르르르 잠이 드는데스~ "

간단하고 짧은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던 친실장은 이쯤이면 되었거니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졸려 하던 장녀는 오히려 잠이 달아난 듯이 아주 쌩쌩해 보였다.

" 마마, 그런 노래는 어디서 배운테치? "


난감해하는 친실장을 호기심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보는 장녀는 언젠가 꼭 물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드디어 꺼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친실장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장녀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 예전에 닝겐의 사육실장이었던 한 마마가 자들에게 가르친 노래인데스.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낳을 자들에게 가르쳐 주는데스. "

" 테에? 사육실장인테치? "

인간에게 길러지는 것.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그 소망은 어찌 보면 저주와도 같이 실장석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총명했던 장녀도 노래를 가르쳐주라는 당부는 모조리 잊고 사육실장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이 몽롱해졌다.
그것은 친실장이 절대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 안 되는데스! 사육실장 따위는 꿈도 꾸지 마는데스! "

" 테에에? "  " 테챠아앗? " 

상상 속에서 사육실장이 되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던 장녀는 갑작스러운 마마의 호통에 크게 당황했다. 
이미 졸고 있던 차녀는 친실장의 호통에 깜짝 놀라 비명까지 질렀다. 하반신에서 쉭쉭 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까 볼일을 보지 않았다면 분명히 운치를 팬티에 지렸을 것이다.

" 닝겐들은 악마인데스! 그 노래를 자들에게 가르쳐준 마마가 어떻게 된지 아는데스? 절대로 닝겐의 근처에도 가면 안 되는데스! " 

이토록 불같이 화내는 친실장의 모습을 본 적 없는 자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 것도 한순간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에 자들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 그 마마가 누구인테치? 마마의 마마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고 마마가 알려주지 않았던테치? "

" 와타치도 궁금한테치.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면 그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던 건 마마 아니었던테치? "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던 친실장은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자들의 반응에 정신을 차리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 아직 자들에겐 이른 이야기인데스. 자들이 더 자라면 그때 이야기해주는데스. "

" 그래도 알고싶은테치! "  " 말해주는테치! "

두 자매는 평상시에도 호기심이 많아 친실장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바빴다.
사육실장에 대한 호기심에 강하게 사로잡힌 자매들은 좀처럼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골몰하는 친실장의 몸에 얼굴을 문대었다.
팔짱을 끼고 엄한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다가 자들의 애교에 껌뻑 넘어가 버려 얼굴이 풀어진 친실장은 결국 자들의 새로운 궁금증을 채워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일이었으니 미리 가르친다고 나쁠 일은 없었다.

"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스. 마마의 마마의 마마의 마마의... 이곳에 사는 모든 동족의 마마인 세레브 마마가 있던데스."

" 세레브 마마는 닝겐에게 선택받기 위한 실장석들이 모여있는 ' 실장샵 ' 이란 곳에서 살았던데스. 그런데 같이 닝겐에게 교육받던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씩 닝겐에게 선택받아 떠났는데도, 세레브 마마는 늘 선택받지 못해서 남아야 했던데스. "

" 어느새 세레브 마마는 어른이 되버린데스. 어른이 되면 사육실장이 되기 힘들다고 세레브 마마를 가르치던 닝겐이 말했던데스. 그래서 세레브 마마는 필사적으로 선택받기 위해 애썼지만, 선택받는 것은 세레브 마마를 비웃으며 떠나는 어린 자들이었던데스. "

" 그러던 어느 날, 한 닝겐이 찾아온데스. 그 닝겐은 세레브 마마를 보더니 사육실장으로 길러주겠다고 세레브 마마를 선택한데스. 닝겐은 집으로 돌아간다며 배라고 하는 물씨 위를 달리는 아주 큰 물건으로 세레브 마마를 데려간데스. 집에 도착할 떄까지 조용히 있으라는 닝겐주인의 말에 세레브 마마는 조용히 닝겐주인의 품에 안겨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던데스. "

" 그 행복한 상상은 닝겐주인의 집에 도착한 뒤 박살난데스. 닝겐주인은 도착하자마자  세레브 마마의 옷을 찢어버리고 목에 파란색 비닐로 된 줄을 채우더니 기둥에 줄을 묶고 좁은 집에 가둔데스. "

" 테에에? "x2

세레브 마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던 장녀와 차녀는 갑작스럽게 비참한 신세로 몰락한 세레브 마마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입고 있는 실장복을 내려보며 옷이 무사한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 그리고 그 닝겐주인, 아니 똥닌겐이 무슨 수작을 벌였는지 자고 일어난 세레브 마마는 자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던데스. 좁은 곳에 방치되어 똥닌겐에게 어떤 관심도 받지 못했지만 세레브 마마는 자를 가진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떳던데스. "

" 시간이 지나고 세레브 마마는 자를 낳은데스. 머리카락도 없고 헐벗은 세레브 마마를 보고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는 아주 착한 자들이었던데스. 세레브한 집도, 가지고 놀 장난감도, 주인의 사랑도 없었지만 자와 함께 있는 것으로도 세레브 마마는 행복했던데스. "

" 비극은 얼마 후에 일어났던데스. 세레브 마마가 낳은 자를 본 똥닌겐은 자들이 필요하다며 세레브 마마한테서 자들을 전부 데려 간데스. 세레브 마마는 불안했지만 착하고 귀여운 자들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들을 똥닌겐에게 넘긴데스. "  

" 자들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데스. 해 씨가 모습을 감추고 달님이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던데스. 세레브 마마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마침내 똥닌겐이 나타난데스. 자들은 어떻게 됐냐고 묻는 세레브 마마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똥닌겐은 밥이나 먹으라며 세레브 마마의 말을 무시하더니 그릇에 음식을 붓고 들어가버린데스. "

" 자들이 돌아오면 함께 먹겠다고 생각한 세레브 마마였지만 밥에서 풍기는 냄새는 참기가 힘들었던데스. 꼬르륵거리는 배씨를 붙잡고 견디던 세레브 마마는 결국 한 입만 먹겠다며 그릇에 손을 가져간데스."

" 똥닌겐이 그릇에 두고 간 것은 고기였던데스. 입가에 흐르는 침을 삼키며 고기를 먹으려던 세레브 마마는 고개를 갸웃거린데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지가 않았던데스. 고기가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달빛에 고기를 비춘 세레브 마마는 비명을 지른데스. " 

" 그 고기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녀의 머리였던데스. 똥닌겐이 밥이라고 한 것은 세레브 마마가 낳은 자들의 머리였던데스. "

친실장은 마마에게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슬쩍 자들을 살폈다. 
다행히도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을 위한 이야기에 자를 잃는다면 정말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 
자들이 무사한 것에 안도한 친실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 다음날에 밥을 주려고 다시 온 똥닌겐에게 자들을 살려내라며 화를 내는 세레브 마마에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던데스. 세레브 마마는 그릇에 담겨있던 자들의 머리를 쓰레기봉투에 넣는 똥닌겐을 보며 정신을 잃은데스. "

" 저녁이 되어서야 간신히 눈뜬 세레브 마마는 아픈 몸을 살피다가 자신의 배가 불러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데스. 혼란에 빠져서 잠시 멍하니 있던 세레브 마마는 뱃속의 자들에게 태교를 하면서 다시는 똥닌겐에게 자를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데스. "

" 두 번째 자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똥닌겐이 다시 찾아온데스. 이번에는 자들을 넘기지 않겠다며 격렬히 저항한 세레브 마마였지만 똥닌겐에게 심하게 맞고 자들을 강제로 뺏긴데스. 정신을 차렸을 때 자들은 다 사라지고 또 배가 불러있던데스. "

" 그때서야 세레브 마마도 깨달을 수 있었던데스. 자신은 사육실장으로 닝겐에게 선택받은 게 아니었던데스. 똥닌겐의 집은 지옥이었던데스. "

" 똥닌겐은 갈수록 악독해진데스. 언젠가부터는 아예 세레브 마마의 앞에서 자들을 독라로 만들고 끌고 가더니, 더 나중에는 두들겨 맞아 움직이지도 못하는 세레브 마마의 앞에서 대놓고 자들을 산채로 요리해서 잡아먹은데스. "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레브 마마는 먼저 간 자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자를 뺏긴 뒤 다시 눈뜨면 이미 뱃속에서 꿈틀대는 또 다른 자들이 있어서 피눈물을 흘리며 참아야 했던데스. 그 대신 세레브 마마는 몰래 주은 돌멩이로 자신을 묶고 있는 줄을 조금씩 잘라서 탈출을 시도한데스. "

" 불행히도 세레브 마마는 다음번 출산까지 탈출하지 못 한데스. 자를 내놓으라며 손을 뻗는 똥닌겐에게 체념하며 자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데스. 눈앞에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먹히는 자들을 애써 외면하는 세레브 마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데스. "

" 웬일인지 똥닌겐은 자들을 잡아먹고는 그대로 집에 들어가버린데스. 자들을 낳아 지쳐 있었지만, 자가 배 속에 있을 때보다는 몸이 더 가볍고 힘이 나는 것을 세레브 마마는 알고 있던데스. 똥닌겐이 방심한 틈을 타 세레브 마마는 기어코 줄을 끊고 탈출한데스. "

" 똥닌겐의 집에서 탈출했지만 세레브 마마의 삶은 고달팠던데스. 밖에서 사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세레브 마마는 밥을 구하는 방법도 몰랐고, 자를 기르는데 필요한 지식도 부족해서 자를 가지고도 빈번히 자를 잃어야 했던데스. "

" 그래도 세레브 마마는 포기하지 않은데스. 힘들다고 포기한다면 똥닌겐에게 속아서 목숨을 잃었던 자들에게 할 말이 없었던데스. 그런 세레브 마마의 노력이 마침내 빛을 봐서 다섯이나 되는 자들 모두를 독립시킬 수 있었던데스. "

" 그 세레브 마마의 독립한 자들이 다시 자를 낳고 그 자의 자들이 또 자를 낳고... 그리고 와타시가 자를 낳아서 장녀와 차녀가 나온데스. 옛날이야기는 잘 들은데스? " 

" 그래서 세레브 마마는 어떻게된테치? 그 뒤로도 자를 낳으며 행복하게 산테치? "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장녀의 말에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친실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색이 어두워진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친실장은 마지못해 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 ... 세레브 마마는 자들을 독립시키고 새로 낳은 귀여운 자들과 살다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똥닌겐에게 끌려간데스. 그리고 세레브 마마의 자들 중 누구도 다시는 세레브 마마를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지는데스. " 

모든 친실장이 자신의 자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실장석 특유의 나약한 정신력 때문에 보통은 자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밑도 끝도 없는 망상의 연속이 대부분이며, 현명한 친실장들이 교훈을 주기 위해 하는 이야기도 고난 끝에는 행복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들려준 과거의 잔혹한 이야기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행복조차 곧바로 들이닥친 비극으로 끝나버린 낯선 구조였다. 
역시 아직은 자들에게 가르치기엔 일렀을까. 친실장은 겁에 질린 자들을 꼭 껴안으며 달랬다. 

" 집에 있으면 자들은 안전한데스. 그리고 닝겐이면 모를까 닝겐의 자 정도는 마마한테 상대도 안 되는데스! 마마는 무적인데스! "

근거 없는 망상은 아니었다. 걷다가 지쳐 업어달라고 칭얼거리는 자를 달래다가 마주친 소녀를 위협해서 쫓아냈다고 동생이 자랑스럽게 말했으니 자신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친실장이었다.
물론 소녀가 단지 자실장의 울음소리에 궁금해서 다가왔다가 친실장의 동생이 던진 운치에 맞을까 봐 그냥 발걸음을 돌린 사실을 친실장의 동생도, 친실장도 알 턱이 없었다.

친실장은 각각의 팔에 자들을 끼고는 위로 들어 올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그 단순한 동작이 사뭇 재밌는지 자들은 웃으며 즐거워했다. 즐거워하는 자들의 모습에 힘이 난 친실장은 몇 번이고 자들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친실장은 자를 재우려던 일도 까맣게 잊고는 온 힘을 다해 놀아주었다. 
친실장 일가의 집은 곧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물론 아무리 즐거워도 한계는 있었다. 신나게 놀던 자들은 체력이 고갈되어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자들에게 다시 한번 자장가를 불러 확실히 잠재운 친실장은 두 자매를 각각 한쪽 팔로 끌어안고 자신도 바닥에 몸을 뉘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디찬 기운에 즐거운 기분에서 깨어 마음 한편에 미뤄둔 현실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잠든 자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헤쳐나가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내일은 꼭 비가 그치길 간절히 바라며 친실장은 조용히 눈을 붙였다.

- 쏴아아 -


모두가 잠든 시각에도 비는 기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 그럼, 다녀오는데스. "

친실장의 소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다음날 친실장이 눈을 떴을 때는 지긋지긋한 비가 그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보존식을 쪼개어 아침을 먹은 친실장은 자장가를 불러주어 다시 곤히 잠든 자들을 뒤로하고 집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태양은 친실장의 손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아침인데도 제법 뜨거운 열기가 공기 중에 맴돌았다. 
더욱이 비를 퍼붓던 먹구름이 남기고 간 수분까지 합쳐져 가만히 있음에도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은 날이었다. 입구에 걸터앉았던 친실장은 조심스럽게 발을 아래로 내디뎠다.

- 철퍽 -

" 데에... "

밑으로 쑥 가라앉던 발을 빼서 걸음을 옮기는 친실장의 신발이 금세 진흙으로 더럽혀졌다.
질척거리는 땅바닥은 걷기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신발 안에 진흙이 조금씩 들어가 기분까지 나쁘게 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큰비가 내린 다음엔 기회도 같이 찾아왔다. 
파도가 거세게 친 다음 날이면 바닷가에 평소보다 많은 식량은 물론이고 쓸모 있는 물건도 같이 떠내려오곤 했다.
오늘도 인간과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친실장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어느덧 중천에 걸린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지만, 공기는 여전히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체온을 유지하는 방법이 원시적인 실장석들에게 며칠이나 계속 내리던 비도 제법 위협적이었지만 정말 위험한 것은 더위였다.
기승을 부리며 비를 퍼붓던 장마전선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뜨거운 공기는 대기를 떠도는 수분을 순식간에 달아오르게 했다
집 안에 있어 직접적인 햇빛에 닿지는 않았지만 바람을 타고 찾아오는 꿉꿉하고 더운 공기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바다의 비린내와 여름 공기의 뜨거움이 결합한 불쾌한 공기에 잠에서 깬 장녀는 졸린 눈을 손으로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마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테치? '

자리에서 일어나 집의 입구까지 걸어간 장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친실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한여름의 후끈한 바람이 다시 한번 장녀의 몸을 희롱하듯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불쾌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린 장녀는 손을 살짝 뻗어 온도를 가늠하고자 하였다.
아직 어린 자실장에게 여름의 햇빛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손에 깜짝 놀란 장녀는 급하게 손을 뺐다.
화끈거리는 뜨거운 손을 식힐 방법을 찾지 못한 장녀가 입으로 호호 불며 달아오른 손을 식히고 있을 때, 누군가가 콕콕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 더위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차녀가 고무공을 들고 장녀의 뒤에 있었다.

" 오네챠 심심한테치. 와타치랑 공놀이 하는테치. "

공놀이라는 말에 순간 혹한 장녀였으나, 비어가던 보존식을 떠올리고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차녀를 나무랐다.

" 안 되는테치! 잡에 보존식이 이제 얼마 없으니 이모우토챠도 쓸데없이 힘 뺴지 말고 다시 자는테치! "

완강하게 거절하며 도로 몸을 뉘이는 장녀에게 실망해 귀가 축 늘어진 차녀는 작은 공을 벽에 던지며 혼자서 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공놀이를 하는 차녀의 행태를 장녀도 알고 있었지만 내버려 두었다. 심심한 건 장녀도 마찬가지였다.  
한날한시에 간발의 차이로 먼저 태어나 윗사람의 행세를 하는 것은 제법 우스운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갓 태어났을 무렵에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친실장의 지속적인 교육과 맏이로서 책임감은 장녀 스스로의 사고를 더 성숙하게 했다.
철이 든 장녀는 차녀에게 우월감을 느끼거나 업신여기지는 않았다. 차녀도 얼른 철이 들어 마마의 고생을 이해하길 바랄 뿐이었다.
눈을 감고 몸을 뒤척이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장녀와 혼자서 외로이 공놀이하다가 흥미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은 차녀.
두 자매는 여느 때와 같이 친실장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친실장의 집 앞을 통과하는 길 위를 두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 샌들로 복장을 통일한 두 소년은 외모 또한 비슷했다. 
그런 두 소년을 구별하는 것은 키와 분위기였다. 느긋한 표정으로 뒷목에 깍지를 끼고 앞장서 걷는 큰 소년과는 달리 손에 투명한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있는 작은 소년은 얼굴에 떠오른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이마를 빈손으로 훑어 땀을 닦아낸 작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 형, 또 여기야? "

" 응, 굳이 멀리 갈 필요 있겠어? "

" 그래도 아빠랑 다른 아저씨들이 한 곳에서만 가져오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아빠가 알면 혼날 거야. "

"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빠도 지난번에 잘 잡아왔다고 칭찬했잖아. 혹시 들켜서 혼나면 이 형이 책임질게! " 

말을 두런두런 나누며 걷던 두 형제의 시야에 얕은 흙더미가 들어왔다. 친실장의 집이 위치한 바로 그 흙더미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두 소년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접근했다. 집으로부터 불과 한두 발자국 거리까지 접근한 두 형제는 걸음을 멈췄다. 작은 소년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고는 팔을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 자, 그럼 시작해볼까? "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은 큰 소년은 입을 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멍하니 집안을 뒹굴던 장녀와 차녀는 갑자기 들리는 노랫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친실장이 그토록 피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간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니...닝겐인테치? "

" 어떻게 하는테치 오네챠? 어떻게 하는테치! "

당황한 차녀는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는 공도 던져버리고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장녀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친실장이 가르쳐준 지식은 밖에서 돌아다니면 위험한 인간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했지 집에 인간이 찾아온다고 말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작은 머리를 굴린 장녀는 친실장이 부재 시에 위험이 닥쳤을 때의 행동요령을 간신히 떠올렸다.

" 조.. 조용히 있는테치. 조용히 있으면 닝겐들도 와타치타치를 찾기 못하고 가버리는테치.  "

" 아..알겠...읍!"

무심코 대답하려는 차녀의 입을 손으로 급히 막은 장녀는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공포에 질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차녀는 입에서 느껴지는 장녀의 체온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자실장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 집 안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흙으로 된 벽에 등을 기댄 두 자실장은 서로를 껴안고 얼른 인간들이 사라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자매들의 바람과는 달리 집 밖의 인간들은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

"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깥을 경계하던 장녀의 귀에 소년들이 부르는 노래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금세라도 들이닥칠 것 같던 인간이 가만히 노래만 부르자 털끝까지 곤두섰던 장녀의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다.
장녀는 인간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왠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은 것 같았다.
그래 마치...

' 마마의 노래랑 비슷한테치. '

인간이 부르는 노래는 친실장이 자들을 재우기 위해 부르던 그 자장가와 흡사했다. 그리고 그 익숙한 안락함이 장녀에게 서서히 졸음을 불러오고 있었다.

' 아.. 안 되는테치! 자면 안 되는테치! '

소스라치게 놀란 장녀는 고개를 좌우로 털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썼으나,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경계가 풀어진 상태에서 졸음을 뿌리치긴 쉽지 않았다.
이미 차녀가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것을 장녀도 뒤늦게 깨달았지만, 동생을 깨우기엔 자기 일도 버거웠다.

반쯤 졸면서 잠에서 깨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녀. 
자고 싶다는 신호를 억지로 계속 무시하여 뇌에 부하가 걸려오자 장녀의 뇌는 상황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친 장녀의 뇌는 저항하기보다는 편안히 잠을 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 무의식의 영향을 받은 장녀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발견되면 끝장이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집은 안전한 장소다. 자신은 집 안에 있다...

' 집안이니까 괜찮은테치. 자고 일어나면 마마한테 닝겐들이 찾아왔다고 말하는테치. '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수면욕에 굴복해버린 장녀는 결국 스르르 잠에 빠졌다.


한편, 집 밖에서는 두 소년이 교대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큰 소년의 차례가 돌아오자 노래를 멈추고 교대한 작은 소년은 흙더미에 올라 귀를 지면에 가깝게 하고 집중했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하고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 시간이 흘러 작은 소년은 마침내 자실장들이 작게 코를 고는 소리를 잡아냈다.
작은 소년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큰 소년은 노래를 멈췄다.

한걸음에 흙더미에 올라간 큰 소년이 손을 뻗자 작은 소년은 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에서 작은 모종삽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흙더미의 상부를 삽으로 이곳저곳 쑤시던 큰 소년은 삽의 끝에 닿는 이질감을 포착하자 그 주위를 몇 번 찔러보더니 그곳을 중심으로 흙을 양옆으로 거둬내기 시작했다. 그 능숙한 손길에 오래지 않아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흙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큰 소년이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히 뚜껑을 들어 올리자 서로 껴안고 잠들어 있는 자실장 두 마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을 안으로 넣은 작은 소년은 잠들어 있는 자실장 자매를 꺼내어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자신들이 인간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두 자매는 입맛을 다시며 꿈나라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안에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뚜껑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큰 소년은 흩어놨던 흙들을 도로 관 위에 덮었다.
마무리도 흙을 발로 밟아서 땅을 다진 큰 소년은 손에 삽을 들고 흙더미에서 내려와 걸어왔던 길을 도로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작은 소년도 바구니를 챙겨서 서둘러 큰 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낯선 방문자들은 그렇게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 데샤아아앗! "

" 응? "   " 아, 이런... "

두 소년이 돌아본 뒤에는 땅에 내팽개쳐진 미역이 가득 찬 봉투와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한 성체실장이 있었다. 


친실장은 평소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위를 먹은 것도 아닌데도 오늘따라 이유도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에 아쉬움을 접고 이른 귀가를 결정했다.
서둘러 귀가한 친실장은 집을 얼마 앞두고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몸을 잔뜩 낮춘 친실장의 앞에 인간의 발이 나타났다. 두 소년은 친실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흥얼거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두 소년의 등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친실장은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익숙한 냄새가 두 소년에게서 나고 있었다.
두 소년이 걸어오던 방향에 자신의 집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친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힘겹게 두 소년의 보폭을 쫓아가던 친실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두 소년 중 작은 소년, 그 소년이 들고 있는 투명한 바구니 안에 두 마리의 자실장이 잠들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소중한 자들, 장녀와 차녀의 냄새가 바로 그 통에서 나고 있었다.
다급한 친실장은 어깨에 멘 봉투도 내팽개치고 고함을 지르며 두 소년에게 뛰어갔다.

" 데샤아아앗! "



" 오마에타치는 뭐인데스! 왜 와타시의 자들을 데려가는데스! "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두 소년의 앞에 도착한 친실장은 팔을 붕붕 흔들며 화를 냈다. 
그러나 두 소년은 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친실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형, 쟤는 뭐라는 걸까? "

" 음, 내가 맞춰볼까? 똥닌겐은 고귀한 와타시에게 우마우마한것을 바치는데스! 감히 와타시의 소중한 자를 납치한 죄는 용서하기 힘들지만, 먹을걸 바치면 특별히 오마에타치에게 와타시의 자를 기를 영광을 주는데스! "

" 이야, 진짜야? 되게 나쁜 녀석이네. 먹을 걸 받고 자식을 파는 거야? 완전 엄마 실격이잖아? "

킥킥거리는 두 소년의 대화를 듣는 친실장은 어이도 없고 울분이 치솟을 뿐이었다.

" 무슨 미친소리를 하는데샷! 세상에 자들과 먹을 것을 비교하는 마마가 어디있는데스! 당장 와타시의 자들을 풀어주는데스! "

" 뭐라는지는 모르겠는데 안 들리거든요~ 그리고 맛있는 거 안 줄 거거든요~ "

자신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계속 빈정대는 큰 소년의 태도에 친실장은 점차 초조해졌다.
자신에게 별로 우호적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자들. 혹여나 저들이 해코지한다면 자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자신이 지른 소리에 인간들이 든 통 안에서 잠들어있던 자들이 깨어나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망설이던 친실장은 제자리에 머리를 박고 두 소년에게 엎드려 절했다.

" 와타시가 잘못한일이 있다면 사과하는데스. 부디 자들을 돌려주는데스. "

" 형, 쟤가 절하는데? 저건 무슨 의미야? "

두 소년이 성체실장이 나간 틈을 타 자실장들을 잡아갔던 일은 여러 번이었지만 성체실장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들실장이 살기 좋은 공원이 있는 도시라면 모를까 섬이라는 환경에서 작은 소년이 성체실장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큰 소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자신보다는 더 많이 알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 작은 소년은 궁금함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동생의 질문에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하던 큰 소년은 입을 열었다.

" 몇 달 전에 전학 온 영수 알지? 걔가 전에 도시에 살 때 실장석을 애완동물로 길렀다고 하더라고. 영수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말이야, 실장석이란 녀석들은 저렇게 자신에게 불리하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리면서 엎드린다고 하더라. " 

" 그런데 속지 말랬어. 이것들은 행동은 그럴싸하게 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속으로는 딴생각 중이거든. 아마 속으로는 새끼들을 잡아가는 우리를 욕하고 있을걸? 새끼 때문이 아니라 왜 자신에게 먹을걸 안주냐고 말이지. 자기만 생각하는게 실장석이란 녀석들이랬어. 저 녀석도 가만히 있으면 눈치를 보기 위해 고개를 슬쩍 들어서 ' 흘끔 '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일걸? 안 속지, 안 속아. " 


대놓고 자신을 모욕하는 큰 소년의 말에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참아야만 했다. 
열불이 치밀어 올랐지만, 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이를 악물어 간신히 화를 참은 친실장은 여전히 엎드린 채로 소년들에게 빌 뿐이었다.

" 부탁인데스. 와타시는 지금까지 자들을 너무 많이 잃은데스. 그 자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데스. 제발 돌려주는데스. "

그러나 친실장의 거듭된 간청에도 하품하며 흘려듣던 큰 소년은 심드렁한 눈으로 친실장을 보며 말했다.

" 음, 미안한데 분충씨? 우리가 좀 바빠서 말이야. 맛있는 건 지나가는 친절한 사람한테 받으라고. 알았지? 그럼 안녕~ "


큰 소년은 그렇게 말을 마치곤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절하는 친실장을 흥미롭게 보던 작은 소년도 그 뒤를 따라갔다.
자신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떠나가는 두 소년의 모습에 억누르고 있던 친실장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 데샤아앗! "

포효를 지르며 달려간 친실장은 큰 소년의 발에 주먹을 날렸다.
친실장의 크게 휘두른 팔이 샌들 밖으로 노출되는 소년의 맨발을 정확히 강타했다. 
그러나 친실장의 온 힘을 다한 주먹질에 맞은 소년도, 그 옆의 작은 소년도 피식 웃기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친실장의 자들은 친실장의 공격이 아무 피해를 줄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소년의 발에 눈을 고정하고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두르며 소년을 때려눕히려 애쓰는 친실장만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두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소년의 발을 두드리던 친실장은 거친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나 소년과 거리를 벌렸다.
헥헥거리며 숨을 고르면서도 친실장의 눈은 소년의 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큰 소년은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띠며 일부러 발을 찔끔찔끔 움직여 마치 발이 너무 아파 움찔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당연히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친실장은 몸에 힘이 솟는 것을 느끼며 온 힘을 담아서 주먹을 휘둘렀다.

" 마무리인데샷! "

자신에게 달려오는 친실장을 보며 하품하던 큰 소년은 다리를 접어 무릎 높이로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눈앞에서 갑자기 발이 사라지자 당황하여 멍하니 서 있는 친실장의 몸을 발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 데? "


잠시 공중을 비행하다가 땅바닥에 떨어지고도 친실장은 왜 자신이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 너무나도 멍청한 모습에 키득거리는 두 소년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친실장은 몸을 일으켜 큰 소년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도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 데? "

다시 일어나서 달리려던 친실장은 또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땅에 엎어졌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땅에 고꾸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깜빡이던 친실장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친실장은 그제야 한 다리에서 뼈가 튀어나오고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에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이 친실장을 덮쳐왔다.

" 데갸아악! "


" 마마! x2 "

친실장이 꺾인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땅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사이에 이미 흥미를 잃은 소년들은 몸을 돌려서 떠나가고 있었다.
얼굴에 황망함이 떠오른 친실장에게 소년들은 손을 흔들며 밝게 인사했다.

" 매번 고마워~ 이번에도 실례할게! "

" 다음에는 좀 더 많이 준비해주면 좋겠어! 동생이 운동을 시작해서 전보다 많이 먹거든! "

소년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소중한 자들을 마치 물건처럼 여기며 앗아가는 그 말. 그 말속에 담긴 소년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차가운 비수로 변해 친실장의 가슴에 박혔다. 친실장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 데.... "

친실장은 전부터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음식을 모으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들을 찾아 온갖 장소를 헤매다가 목숨을 잃을 뻔하기를 여러 번, 계속되는 자들의 실종에 가슴 아파하던 친실장은 자들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밖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결론을 지었었다.

마마라면 자를 기르고 독립시켜야 했다. 단순히 밥을 주고 머물 공간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마마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반복되는 실종사건에 친실장이 도출한 해답은 더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이전보다 더 빨리 집에 귀가하여 자들과 떨어지는 시간을 줄이고, 자들을 더 열심히 가르치고 자들과의 교감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전보다 몸은 더 피로해졌지만 착한 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면 그런 피로감이 싹 날아가곤 했다. 
오로지 자들을 위해서 인간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도 깨고 집에 몰래 침입해 자들이 가지고 놀 공도 챙겨왔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작은 인간들의 말을 듣는 순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은 다 인간의 짓이었음을.
비록 괴롭게 살아가더라도 어딘가에서 살아있기를 바랐던 자들은 이미 잔인한 인간들에게 잡아먹혀 끔찍하게 살해당했음을.
상심한 자신이 또 다른 자들을 잉태하여 태교하고 있을 무렵에, 잡혀갔던 자들은 구하러 오지 않는 마마를 원망하며 죽어갔음을.

' 어째서인데스... 와타시는 닝겐들에게 피해를 준 적 없던데스.  자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데스. 그런데 어째서... '

친실장은 알지 못했다. 소년들이 친실장의 집만을 들렸던 이유는 단지 귀찮아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왔을 뿐인 것을.
남들보다 노력하며 애지중지하며 키운 그 극진한 사랑의 결과물, 다른 동족들이 기르는 또래의 자들보다 더 크고 통통하게 살이 올랐던 자들의 발육상태가 오히려 두 소년의 눈길을 끌 게 되었다는 것을.

점차 흐려져 가는 친실장의 두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더욱 짙어졌다.
구해달라며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자들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친실장은 움직이지 않고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감히 인간을 이길 수 있다고 망상했던 적은 없다. 그래도 인간의 자라면 자신이 사력을 다한다면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것이었다. 자신은 인간의 자에게조차 상대되지 못했다.
인간을 꺼리며, 인간을 두려워하며 피했던 것. 그에 자연스럽게 생긴 인간에 대한 무지가 이런 치명적인 오판을 낳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몸도 엉망이 되고 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만약에 작은 인간들을 몰래 따라갔다면 있었을지도 모를 기회, 자들을 구할 실낱같은 기회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친실장은 깨닫고야 말았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오늘의 발견은 어디까지나 우연. 지금까지 몰래 자들을 데려갔던 인간들이니 다음번부터는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을 쉬운 먹잇감으로 보고 덤비는 많은 동물처럼, 인간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무자비한 인간들에게 자를 지킬 힘이 없다. 무력하게 자를 뺏기고, 인간들을 원망하며 울기만 할 것이다.
즉,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자를 독립시킨다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은 마마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었다.

' 자들.... 마마는... 더는... '

땅을 짚고 있던 친실장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친실장의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땅에 얼굴을 처박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 파킨 -



" 어? 형! 저녀석 쓰러졌는데? "

" 뭐? "

다급히 친실장에게 달려온 두 소년은 엎어진 친실장을 뒤집었다. 
빛을 잃고 회색으로 변한 친실장의 눈동자에서는 검은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혓바닥은 입 밖으로 나와서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자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평상시 힘을 꽉 주던 친실장의 총구는 힘없이 풀어져 운치가 그 안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 갇혀 있던 장녀와 차녀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고스란히 보았다.

" 마.. 마마! "

" 거짓말인테치! 마마는 무적이라고 했던테치! 마마 일어나는테치! 마마! "

눈물을 흘리며 바구니를 손으로 두드리며 아우성치는 두 자실장처럼 두 소년도 안절부절못했다. 

" ... 이거 어쩌지? 아빠가 알면 분명히 혼날 텐데... "

" 그래서 내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잖아! 형! 이제 우리 어떡해? "

발을 동동 구르는 동생 옆에서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큰 소년은 한 손으로 친실장을 집어 들었다.

" 다른 곳에 숨겨도 금방 들키지 않을까? 지난번에 친구네 형도 거짓말로 때우려다가 들통 나서 엄청나게 혼났다고 했어. "

" 아니, 아빠한테 가서 사실대로 말할 거야. 이미 저지른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전부 이 형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말할 테니까 너는 혼나지 않을 거야. 알았어? "

" 으... 응! "

" 대신에 이 녀석이나 챙겨가자. 어차피 남겨놓아 봤자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집어갈 테니까. 아빠도 조금이라도 화가 풀릴지 몰라. "

" ... 근데 어떻게 가져갈 거야? 이 녀석 계속 똥을 싸고 있어. "

한 손으로 코를 쥐고 코맹맹이 소리로 묻는 동생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던 큰 소년의 눈에 뭔가가 띄었다.

" 그거야... 이렇게 하면 되지! "

허리를 숙여 길가의 작은 돌멩이를 집은 큰 소년은 그것을 친실장의 총구에 우악스럽게 쑤셔 넣었다. 그리고 총구에서 나오는 운치의 양이 줄어든 것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친실장의 머리를 바구니에 거칠게 넣고 바구니의 뚜껑을 닫았다. 

그렇게 잠시 헤어졌던 친실장의 가족은 바구니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눈앞에 갑자기 떨어진 마마의 죽은 얼굴을 본 자실장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 테챠아앗! "  " 테갸아악! " 

" 똥이 안 묻으려면 바구니를 좀 낮게 들고 가야 하는데 땅에는 닿으면 안 돼. 땅에 닿으면 몸이 찢겨 나갈 수 있으니까, 알았지? "

" 응! "

두 형제는 사이좋게 바구니의 손잡이를 들고는 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친실장의 얼굴을 붙들고 울고 불며 난리를 치는 자실장들은 두 소년의 안중에도 없었다.


"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 테에엥! 테에엥! "   " 테에엥! 테에엥! "

두 소년은 주고받듯이 노래를 한 소절씩 번갈아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도 모르고 친실장의 죽음에 주저앉아 구슬피 우는 자실장 두 마리의 울음소리, 그리고 이미 숨이 끊어진 친실장의 몸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운치가 그 노랫소리를 뒤따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