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님, 실례하는데스."
연휴 첫 날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꾀죄죄한 실장석 하나가 서있었다. 첫 날부터 재수없게... 실장석을 걷어차려고 발을 들었더니 갑자기 녀석이 정색한다. "뎃! 기다리는데스! 구걸이 아닌데스! 탁아도 물론 아닌데스!! 와타시의 말을 먼저 들어보는데스우우!!!"
"...뭐야." 나는 발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실장석을 쳐다봤다. 실장석은 옷을 들어올리더니 속에서 꾸깃꾸깃한 메모지 한 장을 꺼낸다. 메모지에는 조잡한 그림과 신문에서 찢어 붙인 글자들이 붙어 있었다. 실장석이 글도 읽을 줄 아는건가...
"이게 뭔데?"
"보물지도인데스."
"보물?"
뭐니뭐니해도 실장석은 탐욕의 화신으로 악명높다. 먹을 것이 생기면 남에게 베풀지 않고, 겉으로는 화목한 가족을 연기하지만 부모자식간에도 불리하다면 서로 언제든지 배신하고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인간에게 보물 지도를? 무슨 생각으로?
"이 지도를 따라 가면 보물이 나오는데스. 와타시의 마마의 마마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장녀에게만 전해 내려오던 비보인데스. 하지만 와타시는 힘도 없고 멍청한 실장석인데스. 인간님은 다른데스. 인간님은 와타시보다 더 강하고 똑똑하지 않은데스?" 스스로를 낮춰 부를줄도 아는건가. 정말로 꽤 의외다. 보통 실장석하면 항상 자신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똑똑하고 강하고 귀엽다고(심지어 인간보다도) 믿는 것들인데.
"그래서 나더러 보물을 파 달라?"
"아닌데스. 찾으면 보물은 인간님이 가져도 좋은 데스. 어차피 와타시가 가지고 있어도 쓸모없는 물건인데스."
"...수상한데."
"데! 전혀 수상하지 않은데스! 싫다면 다른 인간에게 부탁하는데스." 실장석이 종이를 다시 옷 속에 넣고 떠나려 하는 것을 붙잡았다. 대체 실장석이 숨겨둔 보물이라는 게 뭔지 슬그머니 궁금해지던 차였기 때문이다.
"보물을 찾기로 한 데스?"
"정말로 내가 찾아서 다 가져도 되는거지? 딴 말 없다?"
"당연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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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석의 보물지도에 그려진 그림은 조잡하지만 공원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가운데의 크고 네모난 것이 광장이고, 주변으로 관리실, 화장실을 묘사해 놓은 사각형... 그리고 연못... 어린아이 낙서 같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보면 대강 알아먹을 수는 있는 정도다.
아래의 신문지 스크랩으로 만든 문장은 이렇다.
'자가 탄생하는 네모 옆의 물이 뿜어져 머리 쪽으로 숲 속 따가운 나무 아래'
'자가 탄생하는 네모'라면 분명 화장실을 뜻하는 말이렷다... 이 공원 시설은 다소 노후화되어 아직도 화변기가 있기에 실장석이 새끼를 까는 덴 제격이다. 몇 번이나 변기 교체 민원이 있었음에도 구청은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고 알고 있다. 그 옆의 '물이 뿜어져'란 아마도 인공 연못. 분수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머리 쪽'은 위쪽? '따가운 나무'란 따가운 밤송이가 떨어지는 밤나무겠지.
실장석치곤 꽤 머리를 굴렸다만 인간이 보기엔 너무나도 간단하게 내용을 추론할 수 있는 쉬운 트릭이다.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자고, 내일 아침 한번 여길 방문해 봐야겠다.
다음 날, 나는 모종삽 한 자루를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실장석이 묻어둔 거라면 아마 그렇게 깊게 묻어둔 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실장석의 힘이다. 광장을 지나 화장실 쪽을 힐끔 보니 역시나 화변기의 물을 떠가려는 놈들과 새끼를 낳으려는 놈들이 줄을 서 있다. 놈들을 뻥뻥 걷어차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연못의 밤나무로 향했다.
밤나무 밑에 슬쩍 삽을 찔러보니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걸린다. 역시 그다지 깊이 묻어두지 않았겠지. 나는 모종삽으로 흙을 퍼올리며 내용물을 살핀다. 금색이 입혀진 나무 상자 같다. 꽤나 고급스러워 보인다. 실장석의 기준이라지만 나름대로 보물이라는 분위기는 있네.
간단한 작업 끝에, 겨우 상자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손으로 들어올리자 나름 묵직하다. 대체 뭐가 들었길래 실장석이 '보물'이라고 하는걸까? 상자를 열자...
"♪텟테레"
...순간적인 광경에 잠시 정신줄을 놓았다. 상자 안에 있던 것은 자실장 4마리였다. 빛이 들어오고 내 모습이 보이자 바로 테치테츄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그리고 어제 봤던 그 녀석이 어느샌가 나타나 내 앞에 선다.
"축하한데스. 보물을 찾아내신데스. 보물은 와타시의 보물과도 같은 자들인데스. 찾아내신 이 자들을 키우는데스. 사양하지 말고 가지..."
녀석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내 발길질이 먼저 날아갔다. 씨발! 연휴 중의 보물같은 하루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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