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날씨의 끝에 찾아온 것은 또다른 지독한 날씨였다. 해갈을 부르짖던 공원의 짐승들은 이내 마른 햇살을 그리워하며 울어댔다. 흘릴 눈물조차 메마르고 없던 폭염 속에서는 결코 알지 못했던 공포였다.
어쩌면 울 수라도 있는 것이 호재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무서운 일을 당한 것들은 울부짖을 수조차 없었다.
[자들! 자들-! 어, 어쩌면 좋은데스우-!]
친실장은 알 수 없었다. 지금 느끼는 싸늘한 한기가 억수같은 비 때문인지, 아니면 저 흙더미 속에서 꿈틀대는 자들 때문일지.
간 밤에 큰 비가 내렸지만 일가는 걱정하지 않았다. 스티로폼 하우스는 무거워 떠내려가지 않았다. 골판지처럼 젖어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러자 빗줄기는 비탈에서 흙을 쓸어왔다. 흙더미는 그대로 일가의 집을 덮쳤다. 친실장은 불길한 우르릉 소리를 듣자마자 집에서 도망쳤다. 집 안의 집기들을 손 닿는 대로 밖으로 내던지면서.
배수로 도랑으로 쓸려 떨어지는 집을 보며, 기겁하던 친실장은 한편으론 왠지 의기양양한 기분마저 느꼈었다. 훌륭히 자연에 맞서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역시 생존의 프로라는 혼잣말 따위를 지껄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귀청을 때리는 새된 소리가, 녀석이 무엇을 잊었는지 일깨워 주었다. 곤히 자다 날벼락을 맞은 자들의 절규였다.
멍하니 주저앉은 녀석은, 밤새 비에 오들오들 떨며 자들을 추억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동이 트고, 흙더미 속의 들썩임을 발견할 때까지.
고봉밥처럼 쌓인 흙이 배수로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 흙더미의 틈 사이로, 빼꼼히 드러난 하우스의 외벽이 보였다.
그것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밀어내고 있었다. 아직 여기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듯이.
[…마, 어디… 살려… ]
친실장은 기겁하며 그리로 내달렸다. 미끄러운 빗길에 넘어져 얼굴을 쳐박아가며.
매몰된 하우스를 앞에 두고 허둥대던 친실장은, 결국 맨손으로 진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버티는데스! 조금만 버티는데스! 마마가! 마마가 여기 있는데스우-!]
그러나 집은 너무 깊게 파묻혀 있었고, 밤새 젖어 차가워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탈진한 친실장은, 주저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파낼 도구가 주변에 있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뒤에서 신중히 급소를 노리던 습격자는, 그 움직임에 당황해 급히 무기를 내질렀다. 녹슨 못이 친실장의 모가지에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왔다. 습격자가 놓쳐버린 못대가리가 통통 튀어 배수로로 떨어졌다.
어설픈 곳을 찔린 덕에 친실장은 즉사를 면했다. 그러나 고통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친실장은 포효하며 온 힘을 다해 버르적거렸다. 발길질에 얻어맞은 독라 포식자는, 데에엑 소리지르며 상대의 몸뚱이를 깔아뭉갰다.
놈들의 몸은 얼어붙어 있었고, 비 덕분에 몹시 미끄럽기까지 했다. 붙잡으려는 손은 속절없이 빗나갔고 주먹은 미끄럼틀 위처럼 스칠 뿐이었다. 덕분에 빗 속의 악다구니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마침내 탈진과 실혈이 친실장을 죽일 때까지.
위석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독라는 쌕쌕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미동도 않는 상대의 옷가지를 벗겨냈다. 시체를 끌고 가려면, 마찰을 적게 만드는 것이 더 편하니까.
그리고 떠나기 전, 독라는 흙더미가 꿈틀거리는 곳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시체를 은신처로 옮기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쌓인 진흙더미가 수압에 쓸려 없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독라가 수저를 들고 배수로 앞에 돌아왔을 즈음, 배수로엔 활기찬 물살만이 흐르고 있었다.
고기. 내 것이었던, 다 잡아놓았던 여분의 고기. 독안에 든 쥐를 놓친 독라의 가슴이 슬픔으로 가득찼다. 독라는 괴성을 지르며 수저로 땅을 내리쳤다. 지친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수저가, 삽시간에 배수로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독라는 멍하니 배수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놈에겐 무기도 삽도 없었다.
정수리를 때리는 비가 몹시 차가웠다. 벌써 사흘째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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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대며 은신처로 돌아온 녀석은 그대로 쓰러졌다. 오전에 끌고 왔던 시체 옆에 나란히.
길가에 방치된 콘크리트 하수관이 놈의 집이었다. 추위를 막아보겠답시고 그 안에 이불을 쑤셔넣었지만, 곰팡이 핀 솜은 아늑하긴 커녕 젖어 싸늘했다. 껴입고 있던 몇 겹의 봉투도, 푹 젖은 탓에 보온재의 기능을 해내지 못했다.
따라서 눈이 점점 감기는 것은, 결코 아늑함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으려 애쓰며, 놈은 본능적으로 고기의 팔뚝을 왁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 살에선 냄새도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 앞은 자꾸만 깜깜해졌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녀석은 생각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녀석은 떠올렸다. 어렸을 적의 침대는 이렇지 않았다. 그땐 모든 것이 풍족했고, 무엇 하나 이런 꼴은 아니었다. 달디단 밥, 비와 햇살을 막아주는 지붕, 따뜻한 어미의 품.
왜 그 땐, 그런 호사에도 감사한 줄을 몰랐을까.
[움직이지 않는테치?]
[똥을 발라도 반항하지 않는테치? 자존심도 없는테치?]
[노예인테치. 좆밥새끼인테치. 죽여서 운치굴의 거름으로 만들어주는-]
밭일을 배우는 것은, 인내심 부족한 자실장들에겐 고된 일이었다. 놈들로선 노동의 필요를 이해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어리광보다 힘든 일은 무가치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밥이든 뭐든, 본래 어미에게 아양을 떨면 나오는 것인데.
땀이 흐르는 고생에서 반항심이, 빡빡한 규칙에서 심술이 피어났다. 식물을 소중히 돌보라는 어미의 야단에, 사랑을 빼앗겼다고 질투를 느끼는 녀석도 있었다. 언뜻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작물들이 밉살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수발을 들어주는 것은 노예의 일인테챠-!]
[죽여! 죽여테챠-!]
어느 날 울화통이 터져버린 자실장들은, 저항하지 않는 상대에게 유감없이 잔혹성을 드러냈다. 속을 발라내 죽여 주겠다느니 하는 끔찍한 말을 일삼으며, 녀석들은 돌보던 여린 토마토 모종을 공격했다. 잎사귀와 열매를 잡히는 대로 잡아당기고 물어뜯으면서.
[데에엣-! 자들-! 무슨짓인데스우-!]
삼십여분 동안, 동안 여섯 마리 자실장이 온 힘을 다한 끝에, 덜 여문 줄기는 꺾여 쓰러졌다. 뒤늦게 온 어미가 놈들을 떼어놓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제 그들은 대자연의 정복자였다. 마마의 마마라는 실장이 와서 불같이 화를 낼 때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어미가 애걸할 때도, 녀석들은 복수의 쾌감에 취해 서로 키득거릴 뿐이었다.
며칠 뒤, 어른들이 녀석들을 철제 그물망 케이지에 가둘 때까지는.
[너희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데스.]
마마의 마마가 으르렁거렸지만, 녀석들은 딴청을 부리며 한 귀로 흘렸다. 그저 귀찮은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표정으로.
그러나 다음 말만은 참을 수 없었다.
[어른이 되고도 이런다면, 솎아지는데스. 오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배울것인데스.]
[늙은이가 뭐라는 것인테치.]
[너도 죽여버리는테챠-!]
솎아진다니. 감히 그런 끔찍하고 건방진 소리를. 녀석들은 의기양양하게 맞서서 을러댔다.
서로를 농사실장이라고 말하는, 농사에 미친 어른들. 농작물님이, 인간님이 밥을 준다며 절절 매는 아둔한 병신들.
그렇게 대단하다는 식물들은 스스로 방어조차 못하는 달마 병신이었다. 이미 그런 건방진 놈들 중 하나를 친히 죽여준 후로는, 성체들이 전부 바보 멍청이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저렇게 약해 빠진 것들을 받들어 모시다니. 이미 놈들의 눈에 어른들의 권위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기회는 있는데스. 벌을 받고 반성한다면 돌아올 수 있는데스.]
[이 몸의 똥이나 먹는테챠-!]
[병신, 병신-!]
[이번 비는 거셀 것 같은데스.]
조막만한 것들에게 있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지만, 늙은 실장의 표정은 평온했다.
자실장들은 더욱 신이 나 반박조차 못하는 늙은이를 놀려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마의 마마는 문득 손바닥을 폈다. 그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조금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보는데스.]
빗방울이 양철 천장을 때려부술 듯 내리 꽂혔다. 강풍이 놈들을 들어 사방으로 메쳤다. 굉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젖은 몸뚱이가 벽에 처박히는 순간, 자실장들은 비로소 후회를 배웠다.
[지이이-! 지이이이이-!]
몹시 춥고 온몸이 아려왔다. 어미를 부르려고 아가리를 열면, 그리로 된바람이 들어와 기도를 헤집었다. 숨도 쉬기 힘들었던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건,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어른과 또래들은 베란다의 유리창 너머로 놈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비웃는지 살필 틈은 없었다. 그들을 원망할 여유도 없었다.
처음 살갗으로 체감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몇 분 뒤 바람이 잦아들었다. 바닥에 엎어진 자실장들은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로 빗물을 맞고 있었다.
그러자 케이지에 매인 밧줄이 당겨졌다. 천천히 집 앞까지 끌려온 자들을, 달려나온 어미가 황급히 꺼내어 실내로 옮겼다.
어른들이 한참을 껴안아준 덕에 체온이 돌아온 자들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따뜻한 품에 파고들었다. 갓 난 구더기가 물에 빠진 듯 처절한 움직임이었다.
[어디 다음에도 그렇게 해 보는데스. 다음엔 너흴 붙잡아줄 케이지가 없는데스.]
마침내 자실장들에게 흐느낄 만큼의 기운이 돌아오고 나자, 마마의 마마가 입을 열었다. 안타까움이 가득 배인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만은 빗물만큼이나 차갑고 무서웠다.
[우리는 한없이 약한데스. 내일을 대비하지 않으면 죽고, 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데스.
작물씨를 가꿀 기회조차 없는 삶은, 방금 그것보다 더 가혹한데스. 다행히 너희는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데스. 어른이 되기 전에 깨닫길 바라는데스. 그렇지 않으면,]
반쯤 혼이 나가버린 자실장들은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비와 바람이 분충들을 솎아줄 것인데스. 마마의 마마때도, 그 마마의 때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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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바람이 놈을 깨웠다. 얼굴에 냉기가 훅 몰아치는 순간, 놈은 기겁하며 머리를 감싸쥐고 엎드렸다.
아닌데스. 나는 솎아지지 않는데스. 착하게 살아온데스. 제발.
[제발-! 데쟈악-!]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땀과 비에 젖은 머리통에서 물방울이 톡톡 떨어질 뿐.
조금 뒤, 독라는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켰다. 공포와 분노와 설움에 아직도 심장이 콩닥거렸다.
지옥 같은 며칠이었다. 사실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걷기도 힘들 만큼 쏟아진 비가, 밤낮의 개념을 지우고 온 세상을 얼려버렸다. 독라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동족의 시신을 끌어안고 이불 속에서 버티는 것뿐이었다. 냉기 때문에 기절하고, 깨어나면 자각도 없이 시체의 살을 뜯어먹고, 또 견디다 못해 눈이 감기는 나날.
독라는 바깥에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비가 거의 그쳐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빗소리가 사라진 적막이 몹시 낯설었다. 눈을 꿈벅거리던 독라는, 은신처 깊은 곳에서 먹다 남은 시체를 꺼내어 입구로 끌고 왔다. 남은 부분이 얼마 없는 시체는 한결 가벼웠다. 독라는 동족의 잔여물을 끌어안은 채 시멘트 입구에 걸터앉았다.
그 후 삼십 분 동안, 독라는 지독한 폭우를 함께 견딘 벗을 마저 뜯어먹었다. 천천히, 조용히. 마침내 따뜻함과 평안을 되찾은 세상을 감상하면서.
당장 먹을 것이 떨어졌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그쳤으니 기운을 차리고 활동해도 늦지 않는다. 그 날 내내, 독라는 천천히 기운을 되찾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으로는, 꿈 속의 따뜻함을 잊으려고 애썼다. 기억하려 해선 안된다.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이상 버틸 수 없어질 테니까.
추위가 한결 가셨지만, 여전히 젖은 잠자리는 싸늘하고 눅눅했다. 비를 피해 찾아온 톡토기와 모기가 몸 위를 지나다녔다. 독라는 제 살을 쥐어뜯어가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부터 비가 다시 내렸다.
장대처럼 퍼붓는 비는 아니었지만, 녀석을 주춤거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이정도 비면 맞을 만 하다고 나섰다간, 언제 또 큰 비로 변해 녀석의 명줄을 위협할 지 몰랐다. 며칠 전의 사냥 때 그랬듯이.
더욱이 그 날 무기를 잃어버린 탓에, 사냥은 더욱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려 애쓰며 독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윽고 독라는, 모든 계산을 던져버리고 빗 속으로 달려나갔다.
주린 배의 독촉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미친듯이 퍼붓던 비가 잦아들라 치면, 들실장들은 하나 둘 그늘에서 빠져나와 길을 헤멘다. 대부분 집과 가산을, 높은 확률로 무기까지 잃어버린 채로.
그들 중 대부분은 가산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바람에 몸을 싣고 도망치는 봉투씨를 뒤쫓고, 제멋대로 흩어진 자들의 엉덩이를 때려 혼내고, 떠내려가는 집에 발을 구르느라. 제 몸을 돌볼 여유는 없다. 부를 누릴 여력이 없는 들실장들에게, 손에 한 줌 남은 것이 몹시 소중할 밖에.
어느 친실장은, 그 와중에도 한발 앞서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들의 만류에도 급류에 다가가, 물통으로 물을 받으려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때 물을 받아 놓아야 하는데스-!]
[위험한테챠-! 비, 빗물을 먹으면 되는테치!]
[그러려면 비를 맞아야 하는데스. 하지만 비가 오는동안 나가면 안되는데스!]
방수포 씌운 골판지에 숨어 장마를 견디는 동안, 일가는 갈증으로 말라 죽을 뻔했다. 이토록 축축한 날씨였으니, 물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빗줄기가 거세지기 전에 물을 확보해야 했다. 친실장은 이를 악물고 물통을 강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즉시 물통을 놓쳤다. 같은 실수 대신 저지른 새로운 실수였다. 강물은 거셌고, 억지로 물통을 단단히 잡으려던 친실장은 팔뚝이 부러질 뻔했다.
멍하니 눈으로 물통을 쫓던 친실장은,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동족에게 뺏기기 전에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휘말려 빠져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건만.
물가의 돌에 접질린 친실장은, 빗물에 연거푸 미끄러졌다. 지켜보는 자들의 절규를 들으며 친실장은 강에 몸을 담갔다.
독라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친실장을 향해 비명을 지르던 자들의 옆에서.
[-마-!, 누가 살려주-]
[마마, 마마-! -위험한-]
[마, 마마는 괜찮은데스! 곧 나가는데스-!]
멀리서 띄엄띄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에 반쯤 하반신을 걸친 친실장은, 안간힘을 다해 갈대를 붙잡고 버텼다. 손 가죽이 찢어질 것 같았다.
목숨이 동아줄 위에 걸린 형편이었지만, 그 와중에 친은 한편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주는 자들의 목소리라니. 다들 투정만 부릴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철이 든 모양이었다.
[-애미, 당장- -발년-!]
[-이몸이 - 한데, 거기서 무슨 염병을-]
아닐지도 몰랐다. 미간을 찡그린 친실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노려보았다. 빗물 때문에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다음에야 친실장은 볼 수 있었다.
독라가 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일가를 지켜보던 독라는, 친실장이 물가로 물통을 들고가는 순간 풀숲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친이 물에 빠지는 순간 독라는 행동을 개시했다.
곧바로 잡아먹지는 않았다. 놈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면, 얻을 수 있는 건 입에 들어가는 한 두 마리 뿐이다. 대신 독라는 서둘러 자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부러지고 망가져 도망치지 못하게 된 자들이 땅을 나뒹굴었다.
[지이익-!]
[챠아아! 누구인테챠-!]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된 친실장은, 안간힘을 다해 갈대를 쥐어뜯으며 빠져나오려 했다.
새끼들을 한 마리 씩 입에 쑤셔 넣으며, 독라는 상대의 전력을 가늠했다.
몹시 건강해 보였다. 강에서 빠져나오느라 지친 다음이라도 싸움을 걸긴 껄끄러웠다. 독라는 재빨리 가장 통통한 자들을 봉투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친실장이 빠져나오기 전에 도망쳤다.
[데쟈악-! 쟈아아아-! 이 씨발년-!]
[잘못한테치-! 잘못한테챠-!]
등 뒤의 저주도, 봉투 속의 애원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의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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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한테치…]
이걸 성공이라고 쳐줘야 하나. 마마의 마마는 한참을 생각했다.
[제발, 제발 봐주시는테츄…]
농사실장 무리의 모든 일가는, 자를 낳음과 동시에 토마토 모종을 받았다. 자실장들이 자라서도 가족으로 남으려면, 그 토마토 화분에서 튼실한 꽃과 열매가 맺혀야 했다. 농사실장 무리의 규칙이었다.
마마의 마마는 일부러 몇몇 일가에 약한 모종을 주었다. 지극정성으로 돌보지 않으면, 혹여 심통을 부려 가지를 해치기라도 하면, 반드시 열매 맺지 못하고 말라 죽을 놈으로. 무리에 본보기를 보이려는 심산이었다. 가장 먼저 사건이 터진 일가의 자실장들을 빗속에 던진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잔인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어리석고 약했다. 가르침과 본보기 없이 날 때부터 성실한 자들은 손에 꼽았다.
그러나 죽든 말든 이익이라는 심산으로 보냈던 폭우 속에서, 이 일가의 자실장들은 교훈을 얻은 모양이었다. 자실장들은 제 손으로 해친 작물을 극진히 보살폈다. 부목을 대어 줄기를 살려보려 하고, 진딧물을 열심히 털어내고, 이도 저도 안된다 싶으면 껴안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 노력에 감동했는지 토마토 모종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나름 튼실하게 자라났다. 영 어설픈 모양이었지만 열매를 맺기까지 했다. 합격이라고 쳐주기엔 조금 애매했지만.
물론 자실장들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죽은 풀을 살릴 수는 없었다. 모종이 살아난 것은 식물의 재생력과 운이 겹쳐 생긴 요행일 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놈들이 힘을 합쳐 노력했다는 것이다. 또 다시 모종에 쓸데없는 짓을 했다면, 결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모종도, 놈들도.
마마의 마마는 자실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레짐작하고 오들거리던 자실장의 떨림이 그제서야 멎었다. 아직도 손에 흙이 묻은, 자매들 중 가장 열심인 아이였다.
[합격데스.]
자실장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 마리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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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실장은 한 마리 뿐이었다.
어제 포획한 자실장들을, 독라는 일부러 비 내리는 바깥에 방치했다. 봉투 속에 돌돌 말아 가둔 채로. 일부러 괴롭히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차게 식어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으니까.
아침의 공복을 달래기 위해, 독라는 봉투를 열고 바닥에 털었다. 그리고 조금 당황했다. 전부 얼어 죽었을 줄만 알았는데, 아직 꿈틀대는 녀석이 있었다.
봉투에서 기어나온 녀석은 눈이 멀었는지 초점이 흐릿했다. 무언가 연신 지껄였지만 혓바닥마저 얼었는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조금 뒤에야, 독라는 녀석이 자신을 마마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디가셨었느냐고, 몹시 추웠다고 중얼거리던 녀석은, 이내 따뜻한 독라의 다릿살에 파고들려 했다. 그러나 젖은 손엔 살을 붙잡을 힘이 모자랐다. 자실장의 애원은 독라의 가죽 위를 처절하게 미끄러졌다.
자실장의 몸부림은 곧 멎었다. 위석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허무한 살껍데기가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눈을 꿈벅거리던 독라는, 조금 뒤 자실장을 달래듯 천천히 안아올렸다. 마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그리고 머리부터 한 입 크게 씹었다.
집을 잃고 모습을 드러낸 동족들은 수없이 많았다. 빗발은 어제보다 거셌고, 독라의 사냥은 어제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데스우-! 데즈아아-!]
어제 강변에서 그랬듯, 독라는 친실장이 한눈파는 사이 자들을 노리려 했다. 그러나 이번 친실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금세 낌새를 눈치챈 친은, 데엑 소리지르고 위협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테프픗, 마마가 온테츄! 이제 너 큰일난테치-!]
[이거 놓는테치, 좆병신 독라 개간년. 어차피 용서치 않겠지만, 어디 엎드려 빌어보는-]
독라는 들고 있던 자실장을 한 입 물어버리고 강으로 던졌다. 상대방 성체가, 혹시 어제 물통을 쫓던 바보처럼 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하지만 소중한 자의 시체가 떠내려가도, 친실장은 강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부아에서 걸죽하게 욕을 뽑아내며 땅에서 돌을 주워들 뿐.
[데, 데, 데에엑-!]
[미친 똥벌레, 대가리를 부숴 빗물에 파묻어주는데샤-!]
독라는 침과 신음을 흘리며 도망쳤다. 그 돌덩이가 제 머리통을 박살내기 전에.
보통의 친실장이었으면 추격을 포기했을 것이다. 어지간히 싸움에 자신 있지 않고서야, 다치지 않고 끝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러나 독라는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울리는 둔중한 소리는, 어지간히 크고 강한 실장의 것이었다.
보폭이 훨씬 컸던 친실장은, 금세 독라를 따라잡았다. 대가리를 움켜쥐려는 손아귀에 독라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런 덩치가 싸움에는 유리할 지 몰라도, 비 속의 추격전에서는 아니었다.
손아귀가 대머리 위로 미끄러진 친실장은, 중심을 잃고 빗길에 죽 넘어졌다. 욱신거리는 연골을 부여잡고 친실장은 비명을 질렀다. 그런 상대방을 뒤로하고, 독라는 죽어라 내달렸다.
그리고 똑같이 넘어졌다. 몸이 좀 더 가벼워도, 실장석인 것은 둘 다 매한가지였다.
아스팔트에 코를 박고 현기증에 빠졌던 독라는,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기겁하며 일어서 도망쳤다.
무게중심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두 실장은, 제 연골을 있는대로 혹사하며 빗길을 내달렸다.
연거푸 코를 박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릎이 상한 뒤에야, 놈들은 비로소 걸음을 늦췄다. 추격전은 좀 더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급히 발디뎠다가 넘어지는 고통이 학습된 탓에, 두 실장은 발을 디딜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절뚝이들의 추격전은 한참을 이어졌다. 독라의 집이 있는 빈 농구장에서.
당장이라도 옆에 보이는 콘크리트관 은신처로 향하고 싶었지만, 독라는 눈물을 삼키며 꾹 참았다. 제 은신처가 상대에게 노출되면 정말 갈 곳이 없어진다. 달리 떠오르는 대책이 없었다. 달리고 또 달려서, 상대가 포기해 주길 바랄 밖에.
다행히도, 먼저 탈진한 것은 추격자였다. 독라의 등 뒤에서 둔중한 몸뚱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친실장 쪽이 불리한 추격전이었다. 몸이 큰 만큼 오래 달리기 힘들었고, 넘어지는 충격도 더 컸다. 옷도 문제였다. 독라가 입고 있던 비닐과 달리, 실장의 멀쩡한 옷은 물을 잔뜩 머금어 무거웠다.
독라는 혼절한 놈의 두개골을 돌로 부수었다. 그리곤 끌고가기 위해 옷을 벗겨내려다, 이내 포기했다. 젖은 옷소매가 자꾸만 들러붙어 쉽지 않았다. 추위가 자꾸만 살에 파고들자, 결국 녀석은 옷을 입힌 채로 끌고가기로 했다. 다행히 농구장 바닥은 마찰이 적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마침내 독라는 덩치를 집에 밀어 넣었다.
또 한번 무시무시한 하루가 끝났다.
지쳐버린 독라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콘크리트 지붕이 몹시 반가웠다. 머리 위에 빗물이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 행복을 다 가진 듯했다.
[드르렁-]
콘크리트 관 안쪽 깊은 곳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 까지는.
[퓨휴휴휴. 데픗. 데프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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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할 은신처마저 침범당했다. 스트레스가 노도처럼 밀려와 위석을 찔렀다.
고통과 피로를 애써 밀쳐내고, 풀려 있던 신경줄을 거세게 붙잡으며, 독라는 피 묻은 돌덩이를 최대한 높이 치켜들었다. 무언가 달려들면, 바로 대가리를 까부술 수 있도록.
슬슬 팔이 아파질 즈음이 되었지만, 상대는 미동이 없었다. 드르릉거리는 소음만 들려올 뿐. 독라는 입구에서 조금 비켜났다. 바깥의 빛이 관 안쪽을 비추도록.
은신처 깊은 곳에, 또다른 실장이 푸지게 드러누워 있었다. 태평히 코를 골면서. 자는 척이라고 생각하기엔, 코 끝에 맺힌 콧물 방울이 너무 생생했다.
화가 치민 독라는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케틀벨을 휘두르듯 돌을 내질렀다. 코뼈가 부러지는 화끈한 느낌과 함께, 상대는 잠에서 깨어났다.
[뎃, 여기는 와타시가 먼저 들어온데스우. 다른 집을 찾아보는-]
헛소리를 일삼던 침입자의 눈이, 만화처럼 제 코로 향했다. 피가 줄줄 새는 코를 발견한 침입자는, 두 손을 방어적으로 휘저으며 데아악 비명을 질렀다.
파들거리는 손아귀에 따귀를 맞은 독라는, 돌멩이를 휘둘러 놈의 턱에 꽂아 넣었다. 공평한 교환은 아니었다. 이빨이 깨져나간 실장은 엉엉 울며 주저앉았다.
한 번 더 돌을 쳐박으려던 독라는 이내 우뚝 멈추었다. 상대는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도,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실장은, 피를 닦아내며 독라에게 물었다.
[오, 오녀? 오녀인데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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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실장은 자매였다. 몇 번째 자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때 자신과 자매들이 텃밭에서 살 수 없다고 알려줬던 건, 분명히 눈앞의 이 자매였다.
[우선 순위라는게 있다는데스.]
어르신들의 말을 엿들었다던 자매는, 심통 난 투로 그렇게 말했다.
시험에서 통과했다고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농사 실장의 일생은 노동의 연속이었다. 어른들은 곧장 그들을 밭으로 보냈다. 자매들 모두 어른이 될 때까지 수없이 농토 위에서 굴렀다. 굽은 등, 다부진 몸, 모래색이 밴 굳은 살이 그 증거였다.
[우린 분명히 여기서 살 수 없는데스.]
[거짓말 마는데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자매들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농사실장으로 살 자격을 얻었다고 인정받았는데. 가을이 깊어진 오늘날까지 쉼없이 달려왔는데. 솎아진다니 그게 무슨 망발인가.
그러나 이어진 설명은 거짓말이라기엔 너무 자세했다.
농장에 필요한 실장의 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말인즉, 개체 수가 점점 늘어나면, 그 중 일부는 쫓겨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이번 해에 태어난 새 일꾼은 서른 마리쯤 되었다. 그리고 올해 늙어 죽은 어른은 일곱 마리 뿐이었다.
농장 주인은 실장의 인원 수를 적당히 쳐낼 생각인 듯했다. 심히 늙은 실장들, 농사에 질려버렸다고 툴툴대는 녀석들, 그리고 올해 선발에 합격한 녀석들 중, 평가가 가장 좋지 않았던 실장들까지.
듣기로는 그들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자실장일 적, 식물에 대고 본성을 드러낸 전적이 있는 그들 또한.
이제 자매들은 믿게 되었다. 연장자들이 그들을 솎아내려 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말도 없이. 어렸을 적 겪은 비바람의 무서움이 머리 속을 스쳤다.
충격에 휩싸인 자매들은 며칠간 침묵하고 있었다. 놈들이 정신을 차리고 살 길을 궁리하기도 전에, 이웃집의 자매들이 놈들을 밀치고 지나가려 했다. 놈들은 그 해 태어난 자실장 중,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던 녀석들이었다.
놈들은 아마 농기구를 옮기고 있었던 것 같다. 농땡이를 피우지 말라고 불평을 했던 것도 같다. 그 말이 그들을 분노케 했었는지, 혹은 불안하게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말 때문에 그리 급하게 저질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고발자 자매가 이웃집 실장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인원 제한에 관해 열심히 제 이론을 펼쳤다. 우수한 앞줄이 떨어져 나가면, 밀려났던 뒷줄이 선택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대단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어리둥절하던 이웃집 자매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돌을 치켜들었다.
그건 아마 자신이었던 것 같다.
돌쩌귀가 적들의 뼈를 파고들어 깨부쉈다. 이웃들은 끝까지 폭력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심한 말이었냐고 절규하다 절명했다. 자매들은 그런 단말마에도, 동족을 죽인 제 피투성이 몰골에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숫자를 세었다. 무섭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시체의 숫자를 세었다.
자매들은 다섯이었다. 시체는 여섯이었다.
자매들은 몹시 기뻐했다. 어쩌면 선택받은 자들의 요람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책보다 중요한 것은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돌이켜보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곧 녀석들은 노끈에 묶인 채 마마들 앞으로 끌려갔다.
살해는 순식간이었지만, 후안무치한 살해를 어설프게 숨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배신은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이다.
살해자로 지목된 자매는 넷이었다. 다섯이 아니라.
그 날,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자매 하나는 놈들의 곁을 떠나 도망쳤다. 엿들은 어른들의 말을 전해줬던 그 자매였다.
헐레벌떡 축사로 달려간 자매는, 연장자들에게 싸움이 일어났노라고 일러바쳤다. 멀리서도 언뜻 들렸던 비명이, 급히 옮기고 닦아내다 미처 숨기지 못한 흔적이 증거가 되어주었다.
정신없이 눈콧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그들에게, 마마의 마마는 냉엄하게 선고했다. 축사로 돌아가서 근신하라고. 따로 벌은 주지 않겠노라고.
한결 표정이 밝아진 그들에게, 다음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어차피 며칠 남지 않은데스. 태풍이 오고 있는데스.]
태풍이 분충들을 솎아낼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못에 박히게 들어온 말.
그들만의 처형법이었다. 누구도 동족의 피로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충분이 약하고 비참하니까. 서로의 피를 묻히는 아픔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 서로를 대자연의 손에 맡긴다. 살아갈 자격을 잃은 죄인들을, 놈들은 폭풍이 올 때까지 가둬두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바람 속으로 떠밀었다. 흔적조차 남지 않는, 잔인하고 깨끗한 바람 속으로.
[너희는 맨 우선 순위였던데스.]
목줄이 매인 네 마리 자매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자들을 배웅하던 어미의 목소리였다. 북받침을 참지 못하고, 어미는 쏟아내듯 소리를 질렀다.
[너흰 여기서 살 것이었다는 말인데스. 애초에 순번에서 밀려도, 다른 농장에서 풀씨를 돌볼 뿐인데스-!]
어미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도 거세졌다.
[열심히 일만 하면 누구도 솎아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은데스! 도대체 왜, 왜 그랬던데스!]
참지 못한 녀석들은 결국 서로를 얼싸안았다. 마마의 마마도, 내려다보던 주인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마침내 울기를 멈춘 그들이 서로를 놓고, 창 밖으로 걸어나가서, 된바람이 광야에 몰아칠 때에도 마마는 소리를 질렀다. 목과 몸뚱이를 묶은 끈에 숨통이 조여 경련하고, 마침내 자매들이 하나씩 하늘로 사라질 때까지도, 마마는 울며불며 무언가를 열심히 외쳤다.
시야가 부옇고 귓가는 웅웅거려, 제대로 들었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뭐라고 했더라. 꼭 데리러 가겠다고 했던가. 꿋꿋하게 버티라고 했던가. 농장에 자리가 나면 너희에게 알려주러 올 테니, 그때가 되면 같이 살자고 했던가.
어쩌면 단순히 그렇게 말했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 때의 대화가 상상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맹포한 바람의 아귀에서 병신 몸뚱이로나마 살아남고, 지옥이나 다름없는 매일을 꿋꿋하게 살면서, 놈은 그 기억에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마마가 돌아올거야. 나를 농장으로 다시 데려갈거야.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삶은 너무나 끔찍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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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는 며칠 전에 뒈진데스. 병, 에취, 신년.]
그 때의 밀고자가 말했다. 놈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었다.
[깐깐한 마마의 마마한테 잘 보이려는 간신배였던데스. 잔악한 인간의 손발 같은 앞잡이 새끼였던데스. 조금 쉬려고 하면 일러바치고, 그깟 밭 좀 안 나갔다고 찾아다니고. 자의 앞길을 못 막아 염병이었던데스. 킁, 컥, 엣취. 이거 더 없는데스?]
재채기 때문에 밀고자의 입에서 청포도 사탕이 빠져나왔다.
자신의 은신처에 있던 물건이지만, 독라가 그것을 꺼내 권한 적은 없었다. 독라는 애초에 그것이 녹색 사탕인줄도 모르고 있었다. 포장 속에선 냄새가 나지 않으니까. 그저 마마의 눈을 닮아서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것을 밀고자는 다시 입에 넣더니, 한껏 탐욕스럽게 빨아먹었다.
[자꾸 이걸 해라, 저걸 하지 말아라 지껄이던데스. 알곡 좀 주웠다고 훔쳐먹는다고 지랄을 했던데스. 안먹었던데스! 그냥 만져본 것인데스! 애초에, 와타시가 키웠는데 그게 와타시 거지 왜 닌겐 것인데스, 그런 심약한 바보들은 다 솎아버려야 하는데스. 그래야 실장들의 세상이 열리는데스.]
바보는 솎아야 한다. 실장이 제일이다. 놈이 어렸을 때부터 하던 말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장녀는 철학이 확고했다. 우리가 왜 일해야 하느냐. 왜 식물을 모셔야 햐느냐. 어렸을 적 토마토 줄기를 상하게 했을 때도 그랬다. 어른들은 병신인테치. 약해빠진 풀씨에게 절을 하는테치. 나를 따라와 저 잡것을 찢어버리는테치. 무서운테치? 병신들. 겁쟁이들.
그 땐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웃 자매들을 세상에서 없애버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만큼이나.
기억났다. 눈 앞의 밀고자가 몇 번째 자매였는지.
[홧병이랍시고 앓아 눕는 걸 핑계로, 마마의 마마랑 결탁해 수근거리기까지 한데스. 결국 이 몸을 내쫓은데스. 이유야 분명한데스. 이 몸의 우수함을 질시한 것이 틀림없는-]
[장녀였던데스.]
[데?]
[장녀였던데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장녀는 질겁했다.
[…그런데스. 나 장녀인데스. 혹시 뭐 잘못된데스?]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독라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허공 한 구석을 쳐다보고 있을 뿐.
장녀는 심히 떨떠름하게 독라를 흘겨보았다. 아직 아무 음모도 꾸미지 않았는데, 설마 생각도 전에 들켰을 리는 없다. 장녀는 차분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말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목소리였다. 못 본 사이, 막내의 목소리는 쇠 긁는 소음처럼 변해 있었다. 그간 심히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몰골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모로 봐도 들짐승이나 마찬가지인 행색. 장녀는 비웃음을 삼켰다.
하긴, 그런 바람에 쓸려가고, 들에서 일 년을 보냈는데 몸과 정신이 멀쩡할리가. 원인을 제공한 건 물론 자신이었다. 그러나 장녀는 죄책감을 느끼기보단, 놈을 어떻게 이용할 지 생각했다.
장녀는 기만에 능했다.
어렸을 적, 제 자매들을 선동해 밉살맞은 토마토를 살해한 순간 녀석은 깨달았다. 어느 실장이든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모두 제 결정에 달렸노라고. 손 하나 까딱 않고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살면서 만난 누구도 자신의 거짓말을 간파할 만큼 똑똑하지 않았다. 비록 마마의 마마에게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면을 들켜서가 아니다. 그 병신 늙은이가 자신을 질투해 내쫓은 것뿐이다. 아무튼 그랬다. 그렇지 않고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 불운 속에서도, 장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제 말이면 누구든 죽이던 멍청이 자매 노예가, 더 아둔해진 채로 손 안에 굴러 떨어졌으니.
장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간단하게, 사탕을 하나 더 내놓으라고 명령할 참이었다.
돌덩이가 아갈창을 부수며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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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가 죽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이제 끝이었다. 소중히 간직해오던 약속은, 이제 진실이든 무엇이든 무의미해졌다.
매를 견디지 못한 장녀는 누명을 씌운 것을 고백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녀석이 내쫓긴 것은 순전히 장녀가 배식을 더 얻어먹고 싶어서였다. 다음 날부터 5인분이 아니라 1인분을 받을 것임을 장녀는 몰랐다.
엉망으로 멍든 머리를 감싸쥐려 애쓰며, 장녀는 사랑하는 가족이 아니냐고 지껄여댔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자매들 중 가장 중요한 장녀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자매인 장녀. 일은 왠지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러나 독라는 그것을 모두 들으면서, 동시에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독라의 정신은 생존 이상의 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다. 사랑, 상실, 음모, 무엇이든 전부 무기질적인 주석에 불과했다. 귀에 들어온 그 모든 개념을, 독라는 한 단어로 배설해냈다.
[고기.]
실장의 생존에는 깊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 운에 맡기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될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껏 살아남은 녀석의 몸뚱이가 그 보증이었다.
비는 끔찍했다. 이어지는 추위와 굶주림도. 혹독한 환경은 당장의 이성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를 견딜 적에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었다.
더 많은 열량이었다.
낡은 시멘트 관 속에서 비명이 울려나왔다. 언뜻 도움이라도 구하는 투였지만,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활기찬 빗소리가 그것을 잡아채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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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종일 이어질 것 같던 작업은, 또 다시 찾아온 폭우에 중단되어버렸다. 논밭의 배수로를 치우던 실장들은 황급히 축사로 대피했다.
창 안에서 보는 비는 장관이었다. 유리에 묻은 굵은 빗방울은 마치 추락하는 순간을 잠시나마 잡아 가둔 듯했다. 실장들은 굳어버린 허리를 펴며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조차도.
오늘은 맑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장마전선이 지났다는 예보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깨끗해진 하늘에 한번 더 고인 구름은 장맛비의 것이 아니었다.
흉포한 바람이 바다에서 내던진 것이었다. 며칠 뒤 찾아올 자신을 예고하기 위해.
바람이 창문을 거세게 때렸다. 빗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움츠러드는 자들을 감싸안으며 친실장들은 속삭였다. 위로가 아니라 경고를.
폭풍이 부는 날에 비하면, 이런 바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실장석의 몸뚱이가 확 떠올라, 저 높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그런 날에 비하면.
그런 바람이, 너흴 솎아낼지도 모르는데스.
올해는 다행히 아무도 솎아지지 않았다. 한 마리를 빼면.
한여름, 태풍이 불기로 예고된 날 쫓겨났던, 다 큰 분충.
빗 속으로 떨며 쫓겨난 그 분충은, 몇 시간 뒤 쨍쨍한 뙤약볕 속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마마의 마마는 맥 빠진 목소리로, 태풍이 흩어져 사라졌다고 말했다.
어쨌든 쫓겨난 분충은, 마마의 마마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떠났다. 세상을 자로 가득 채우고, 무기를 들려서 농사꾼들의 멱을 따러 온댔던가.
친실장들이 보기엔 어떤 면에선 다행이었다. 바람이 실장을 솎는 무서운 광경을, 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으니. 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악몽을 꾸게 만들 것 또한 뻔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왔다. 비바람 속으로 내쫓기자마자 지레 겁먹고 죽는 어린 실장들을. 태풍에 솎아질 날 만을 기다리며 떠는 다 큰 동료들을.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하염없이 용서해달라고 울부짖다가, 바람에 휙 떠올라 어디론가 사라지는 동족들이었다.
아무리 본보기라도, 그런 걸 보여주는 일은 껄끄러웠다. 이번 년도의 자들은 훌륭해, 아직 아무도 솎아지지 않았으니만큼.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다. 성실함은 평생동안 필요하지만 추락은 한 순간이었다.
[살아가는데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스.]
[테…]
[하루하루 살아갈 자격을 잃으면, 기다리는 것은 바람 뿐인데스. 우리를 싣고 사라질 바람.]
우비를 입은 농장주가 창문 밖을 서성이다, 바깥의 철판 문을 당겨 창문을 가렸다. 올해엔 창문이 깨질 위험을 무릅쓰고 보여줄 것이 없었다.
어둑해진 축사 속의 실장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먼저 바람에 실려간 자들이, 오래 괴로워하지 않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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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독라에겐 그럴 기운이 없었다. 폐는 이미 터져버린 듯 했고, 관절은 당장이라도 뼈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독라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닿기엔 장녀는 너무 멀었다.
장녀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고 있었다. 피를 얼리고 살을 찢는 매서운 비바람 속으로.
독라는 말리고 싶었다. 그 휘청이는 몸뚱이를 붙잡아 끌고 오고 싶었다.
가족애 때문은 아니었다.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잘, 못, 살려주는데스. 마마. 이 지옥에서 나를 잡아 꺼내는데스.]
쫓을 수만 있다면, 잡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무언가 중얼거리며 걷는 장녀의 걸음은 아무래도 온전하지 않았으니까. 장녀의 머리통에 대못이 꽂힌 탓이었다. 장녀 자신의 물건이었다.
어제 저녁, 돌에 쥐어맞아 반죽음을 당했던 장녀는, 엉엉 울며 그것을 제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팔다리가 으깨지고서야 몸을 지켜보려던 것인지, 귀중한 도구를 바칠테니 봐 달라는 것이었는지, 독라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독라에게 중요한 것은, 도망치는 고기를 쫓는 일이었다. 마무리가 어설펐던 탓에, 다음날 아침 살아서 도망치려는 고기.
[듣고 있지, 죄송, 않은데스? 버섯을 먹인, 반성, 것은 내 잘못인데스. 한번만 봐주시는데스. 잘못. 반성. 내 잘못 – 결코 - 씨발년-! 그러니 앓아누워서 잔소리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샤-! 이리 나오는데스! 아픈데스! 머리가 아프단 말인데스! 널 또 죽여버리는데스우-!]
그러나 독라는, 도저히 나가서 쫓을 수 없었다. 입구에 간신히 버티고 선 채, 애타게 손만 뻗을 뿐.
차마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맞바람은 거셌다. 마침내 한계에 달한 관절이 접혀 내려앉자, 독라는 목청이 터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비와 바람의 소리 외엔.
더 이상 장녀가 무어라고 외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눈알이 돌아가버린 장녀는 무언가를 윽박질러댔다. 어디를 보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온 세상에 대고 외치는 듯도 했다.
세상은 대답 대신 장녀를 들어올렸다. 공중에 잠시 떠오른 장녀는, 잠시 놀라워하다 이윽고 해맑게 웃었다.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침내 세상에게 떠받들린 장녀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장녀는 순식간에 빨려올라가듯 사라졌다.
독라의 눈이 분노로 크게 뜨였다. 그러나 곧 도로 감길 수밖에 없었다. 안구가 뽑혀나갈 것만 같았다.
독라는 절룩거리며 콘크리트 관 안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기압이 뒷걸음질 치는 놈의 등을 떠밀었다.
‘마마. 마마.’
독라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마저도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묵직한 질량감이 느껴졌다. 독라는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윽고 보이지 않는 주먹이 놈을 땅에서 퍼 올렸다. 천장에 눕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언제나 천장의 감촉이 궁금하던 차였다. 등과 두개골로 느껴본 결과, 독라는 결론지었다. 천장의 촉감은, 바닥보다 훨씬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조차 태풍 앞에선 안전하지 않았다. 은신처를 헤집어놓는 돌개바람 속에서 독라는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했다.
‘이런 세상이라면 왜 나를 낳으신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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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장녀가 보고싶었던데스?'
태풍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생물은 없다. 허나 태풍 또한 모든 생을 뿌리 뽑을 힘이 없다. 된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서도 생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어쩌면 살아남은 것을 이겼다고 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애초에 체급부터 불공평한 싸움에서 살아남았으니.
그러나 진흙 속에서 고개를 든 그것은, 승리자의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바람은 녀석을 죽이지 못했다. 녀석의 숨통을 앗아가기 전에 지쳐 멎어버렸다.
그럼에도 녀석은 스스로의 강함에 찬사를 보낼 수 없었다.
온 몸이 아팠다. 몹시. 다져지고 반죽된 근육은 죽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도 모를 뼈대가 비명을 질렀다.
'왜 와타시는 보고싶어하지 않는데스?'
다행히도 고통으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신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허리 아래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두 손으로 말라가는 진창을 기어나온 실장은, 엎어진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내리던 비가 잦아들고 햇살이 즐거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듯이.
장녀를 잡아먹은 폭풍은 적잖이 만족한 모양이었다. 지상에 독라를 남겨둔 채로 등 돌려 사라지고 있었으니.
실낱 같이 남은 자아 한 켠에서, 실장은 비명을 질렀다. 가지 말라고.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나를 두고 떠나지 말라고.
목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더이상 모가지를 꺾어 들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독라는 진흙에 얼굴을 묻었다. 등 뒤로 싸늘한 빗물이 톡톡 떨어졌다.
오한이 일어났다. 독라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느끼는 이 싸늘한 한기가 빗방울이 체온을 앗아간 탓인지, 아니면 또다시 매일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마.]
그래. 또 살아남았다. 어째선지 또 다시 폭풍이 지나고도 명줄이 붙어있었다. 이걸 살아있는 것이라고 쳐줄 수 있다면.
독라는 과연 내일도 자신이 살아남아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글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보다 마마가 보고 싶었다. 혹시 마마가 데리러 와 주지 않을까. 날 이 지옥에서 꺼내어 집으로 데려가주지 않을까.
[마... 마...]
비는 끔찍했다. 이어지는 추위와 굶주림도. 그 이후에 찾아올 다른 고난들만큼이나.
세상에 아무 보호 없이 내던져진 삶. 생각할 마지막 힘까지 앗아가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녀석은 잘 알고 있었다. 길에 나앉은 이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으니.
그럼에도 스칠 수 밖에 없는 생각이 있었다. 과연 그것이 산다는 문제보다 더 끔찍한 것인지.
저 하늘 위로 떠나버린 장녀가, 과연 자신만큼 고통스러울지.
세 시간 뒤, 산 자는 일어났다.
그리곤 다리를 절며 진창을 떠났다. 죽어 사라진 것들을 부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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