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그나마 더 따뜻한 남부 지방에선, 음력 1월 1일은 실장들에게도 분주한 시기다.
이 시기에 버려지는 것들로 한 몫을 챙겨야, 남은 겨울을 수월히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 먼저 갈게! 어머님 들어가세요!”
“그려, 조심혀서 가~”
“살펴가세요, 아주버님!”
그 말을 듣자마자, 선 잠을 자던 실장은 눈을 부릅떴다.
암호를 들은 간첩이라도 되는 마냥, 실장은 신속히 바닥을 기며 굴에서 기어나왔다. 얼어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 주변에 숨어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닌겐의 하우스를 빙 돌아 밭 근처까지 숨어들어간 실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퇴비 더미 위에 던져놓은, 버려진 명절 음식들. 쉰 전, 살점이 남은 갈비찜, 먹다 남긴 약밥, 오색찬란한 떡과 과일.
집까지 끌고 가야 할 양동이는 묵직했지만, 귀가하는 친실장의 걸음은 그래서 가벼웠다. 몹시 뿌듯했다. 올 해의 기운과 조상들의 은혜가 자신을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구해온 음식을, 자들이 한 입 먹고 뱉을 때 까지만.
[설 음식 싫은테치이-!]
[단거! 단거 내놓는테치-!]
[…편식하면 못 쓰는데스우! 이게 무슨 짓인데스-!]
겨울의 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란 말인가. 친실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저저 싸가지없는 것 보는데스. 떽! 나 때는 그렇게 하면, 바로 발가벗겨지고 쫓겨난데스!]
운치굴 속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실장의 마마의 목소리였다.
친실장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역시 자를 키워본 입장이니 공감해주는 것일까, 누군가 편을 들어주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비록, 사투 끝에 팔다리를 으깨어 운치굴에 쳐넣은 웬수같은 사이일지언정.
[마마…!]
[똥마마의 똥마마는 닥치는테치! ]
[어디서 그런 말버릇을 배운데스! 내 운치굴 속에 있어도, 엄연히 느그 마마의 마마인-]
[챠아아아-! 마마! 자판기가 반항하는테챠-!]
[세상에, 저 버릇 좀 보는데스.]
[세상에 추자도 아니고 동자를 낳은데스. 미친데스, 미친데스…]
[쉿, 듣지 않는데스. 요즘 세상에 그게 뭐가 흠인데스]
[말버릇은 누구에게 배웠겠는데스. 참 호마마밑에 견자 없다더니-]
이번엔 이중창이 들려왔다. 친실장의 마마와 나란히 운치굴 속에 갇힌 친실장의 자매들이, 들을테면 들으라는 듯 씹어대는 소리였다. 어처구니 없는 심정을 억누르면서, 친실장은 자신을 변호했다.
[…자판기가 셋인데스. 다 먹일 자신이 있으니까-]
[요즘 세상에 누가 자를 셋이나 낳는데스.]
[둘이나 하나 낳아서 잘 키우는게 최고데스.]
[프니프니 마려운 레후-]
[레에엥, 레에엥-]
[동자를 낳아도 마마는 이해하는데스.]
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마마는 자식이 무슨 잘못을 해도 다 감싸줄 수 있는데스.]
[아니, 무슨 자판기들이…]
[오네챠, 이 공 나 가져도 되는레치?]
[씨팔년-! 대가리를 깨버리는테치-! 마마악-! 공씨테챠! 공씨이이-!]
친실장의 자매들이 낳은 자들이, 운치굴 속으로 굴러 떨어진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졸지에 마마보다 아끼던 보물을 빼앗긴 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화답하듯, 친실장의 자매들이 윽박질렀다.
[거 공 구하는게 얼마나 어렵다고! 애기 주는데스!]
[그런데스. 다 컸으면 공 같은거 가지고 노는 거 아닌데스.]
[그게 무슨 개지랄인테치! 그게 무슨 공씨인지 알긴 하냐는테챠-!]
[데뎃,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어디서 어른들한테 망발인데스!]
[다 컸다고 했다가 애새끼라고 했다가 순 지들 맘대로인테챠-!]
[프니후-! 프니후-!]
친실장은 분노의 한숨을 내쉬며 두 눈두덩을 문질렀다. 대체 왜 온 식구가 이 시기만 되면...
[…마마, 장녀, 차녀, 거 부탁 하나만 하는데스. 거 구더기 좀 조용히 시키는-]
[애가 시끄러울 수도 있지, 거 왜 그렇게 예민한데스.]
[이것은 장녀가 맞는데스. 구더기 때 기 꺾어가며 키우면, 크게 되지 못하는 법인데스.]
[레후우! 레훼엥-! 배씨 꼬록꼬록 답답레후-!]
[우지챠 옷 안에 지린레후. 치워주는레후-]
친실장은 한번 더 천불같은 숨을 내뱉었다. 땅이 꺼지겠다는 마마의 잔소리는 한 귀로 흘리면서. 그러나,
[저어, 삼녀, 집은 구한데스?]
운치굴 속 자매의 목소리에 친실장은 눈을 껌벅였다.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여기가 집이라고 한다면, 차녀는 이죽댈 것이다. 이런 과일박스 구석을 아직도 집이라고 부르느냐고. 장녀는 조용히 시키는 척 하며 부추길 것이다. 마침내 마마가 조심스러운 투로, 모름지기 닌겐 집에 살아야 실장 사는 삶이라며 자매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급격히 피가 몰린 관자의 핏줄이 폭발했다. 친실장의 이성이 끊어졌다.
[… 이 시팔, 죄다 내 운치굴에 쳐박혀 살면서 그건 또 무슨-]
[저저저저 말버릇좀 보는데스. 다들 명절이라고 좀 들렀더니-]
정확히는, 머리통에 짱돌이 박힌 덕에, 명절 즈음에 잠깐 이성이 돌아오는 것 뿐이었지만.
[-실생 선배들에게 못하는 말이 없는데스.]
[마마가 말해도 그따위로 들을 것인데스? 위해주는 말인데 왜 그러는데스!]
[삵이 물어갈 년인데스. 마마는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데스. 이리와서 앉아보는데스.]
참을 길이 없었다. 살쾡이에게 들키든, 닌겐에게 들키든, 이젠 친실장이 알 바 아니었다.
친실장은 머리가죽을 쥐어 뜯으며 짜증을 토해냈다.
[데쟈아아아아-!]
“어, 씨, 깜짝이야. 뭐야?”
“저거 참피야.”
“와, 시골엔 아직도 실장이 살아요?”
고럼, 살지. 하며, 화장실에 가던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자, 큰아버지는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어렸을 때 봐서 아는데, 저러면 십중 팔구는 저들끼리 싸우는 소리인게야.”
아이들 몇이 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큰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멈칫했다.
“그런 생물이라서 크게 되지를 못하는게야. 설날 같이 기운이 좋은 때에, 도둑질만 하고 말이야, 이런 험난한 계절에 가족끼리 화목하지를 못하고 말이야.”
어쩌면 여느 생물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간섭하고 싶어하는 일과, 간섭을 괴로워하는 일 모두.
몇몇 단어에서부터 익숙한 위험을 감지한 아이들과 청년들은, 저마다의 변명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큰아버지의 더없이 온화한 눈길을 알아채자마자, 그들은 살쾡이와 마주친 쥐마냥 굳어버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지옥의 문처럼 열렸다.
“참, 이리 와서 앉아봐라. 성주부터. 대학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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