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 (ㅇㅇ(222.112))



그 실장은 겨울의 생존 경쟁에서 도태된 산실장이었다.
독립 후 맞게 된 첫 겨울, 녀석의 보존식을 갈취하고 어렵게 마련한 고목 밑 보금자리를 빼앗은 것은 얄궂게도 그녀와 한 배에서 태어나 같은 시기에 독립한 자매였다.
누구를 원망할까. 실장생이란 대체로 이렇게 비극에 비극을 한 스푼 더 끼얹는 식이다.

이제 겨우 성체 티가 나는 앳된 실장은 겨울의 칼바람을 뚫고 하릴없이 산을 내려왔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여 움직인 것은 아니었고 그저 위로 오를 힘이 없어 자연스레 내리막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이 당시 이 실장에게 있어 유일한 활로였다. 녀석이 탈진하여 쓰러진 곳은 마음씨 좋은 노부부가 사는 어느 시골집의 현관이었으니…
실장이 눈을 떴을 때 녀석은 주인 없는 개집 안에서 낡은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담요 안에는 온기를 뿜는 핫팩까지 들어있었다. 실장은 그렇게 비루한 목숨을 건졌다.

“짓소야 밥 무라.”
항상 무심한 말투로 그릇 가득 김이 피어오르는 잔반을 담아 오는 노인을 보며 실장은 자신이 사육실장이 되었다는 사실과 짓소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 상황이 얼어붙은 메추리알 크기의 뇌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만들어낸 환각이 아님을 확신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의 일이긴 했다. 한기가 가시고 쌓였던 눈이 녹아 땅에 스며들 무렵.
“살아남은데스…”
그제서야 짓소는 울 수 있었다.

개나리가 피는 완연한 봄의 어느 날, 짓소의 두 눈은 녹색을 물들었다. 그녀의 친이 그랬듯 짓소도 곧 마마가 될 터였다. 겨울을 이겨낸 실장석의 특권이었다.
“짓소야 밥… 허허 이 놈 이거…”
항상 하던 식으로 집 앞에 잔반 그릇을 툭 놓고 가려던 주인은 짓소의 눈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가 쌀밥 한 주걱을 그릇에 더 얹어서 돌아왔다.

짓소가 보기에 그녀의 주인은 참 무뚝뚝한 닝겐이었다. 그녀와 놀아주는 일 따위는 전혀 없었고, 매일 같은 시간 밥그릇을 채워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집 앞에 제멋대로 쓰러진 자신을 겨우내 살려둘 정도로 따뜻한 닝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짓소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이 그녀를 키울 능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이었다. 매 끼니마다 부족함 없이 그릇 가득 성찬(처음에 짓소는 그것이 사람이 먹다 남긴 잔반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을 내줬고 짓소가 출산한 뒤로는 그 양을 더욱 늘렸다.
산 생활에서는 입에 대본 적도 없는 기름지고 달콤한 잔반 덕분에 짓소는 여덟 마리의 자를 부족함 없이 부양했다.

항상 주인의 곁에 바짝 붙어 있는 암컷 닝겐은 조금 거슬렸다. 그러나 짓소는 곧 경계를 풀었다. 잔반을 다 먹지 못해 지저분한 밥그릇을 씻어오거나 집 주변을 청소하는 등 잡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었다.
“이 눔아! 여기는 너희가 들어올 곳이 아니다!”
다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이 암컷이 건방지게도 주인의 곁을 홀로 독차지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짓소가 주인을 따라 마루에 오르려 하면 닝겐 암컷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빗자루로 그녀를 쳐냈다.
짓소는 그것이 추한 발버둥이라 여겼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몸이었으니 짓소처럼 매끈한 어린 여자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어차피 내 경쟁 상대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테… 저런 장난감도 있는 테치?”
봄을 지나 어느덧 여름의 초입. TV에 나온 사육실장 맞춤 전동차를 본 장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무렵 주인집 대청마루는 짓소일가의 차지였다. 9마리의 실장석들이 끊임없이 마루에 오르는 것을 늙은 암컷의 굼뜬 몸으로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여전히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모양이었지만, 짓소와 그녀의 자들이 마루에 모여 문간 너머로 TV를 보는 것은 내버려두었다.
안방의 주인이 보는 TV 프로는 대부분 실장석의 지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가끔 나오는 실장석 관련 예능은 어린 자실장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우리는 왜 저런 게 없는 테치?”
“장녀. 무례한 소리는 하면 곤란한데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짓소도 답이 궁금한 물음이었다. 단지 끼니를 해결해주는 것만으로 주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어린 자들에게는 밥만큼 중요한 것이 오직 이 시절에만 쌓을 수 있는 즐거운 추억일 것이다. 주인 사마는 왜 이렇게 무심하고 무책임한 것일까?
짓소의 불만은 더 있었다.
그녀는 마당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암컷 닝겐을 보며 생각했다. 왜 아직도 저 늙은 암컷이 안주인이란 말인가. 대체 언제까지 와타시와 자들을 밖에서 재울 셈인가. 지금까지는 저런 늙다리를 상대로 일일이 경쟁심을 불태우는 것도 참 못할 짓이라 생각하여 관대히 넘어갔지만, 이렇게 안주인 교체가 늦어지면 짓소로서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데후… 조금만 더 기다려 주는데스.”
푹 한숨을 쉰 짓소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것은 못 먹는 물건데스.”
그늘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덥고 습한 한여름. 짓소는 밥그릇에 담긴 쉰 잔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날이 더워지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거의 하루 걸러 한 번 꼴로 짓소 일가의 식단에는 불쾌한 냄새가 나는 상한 음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 몫까지 음식을 준비해서 따뜻할 때 함께 먹으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대관절 무슨 이유로! 굳이 주인 쪽에서 먼저 식사를 한 뒤에 남은 찌꺼기를 넘겨준단 말인가! 와타시타치를 얼마나 무시하길래…
“분명 못 먹는다고 말한데스! 입에도 대지 마는데스.”
짓소는 아무 생각없이 밥그릇으로 달려드는 자들을 밀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점마, 저 왜 안 먹노.”
잔반이 가득한 밥그릇을 신경질적으로 툭 차고는 개집으로 들어가는 실장 일가를 보며 박 노인이 혼잣말을 했다.
“더워서 입맛이 없나 보지예.”
마루에서 걸레질을 하던 부인이 답했다.
“내일이 벌써 말복이네예.”
그녀가 덧붙였다.

다음날, 끼니 때가 되어도 밥그릇은 비워지지 않았다. 짓소는 주인이 평소처럼 상한 음식을 버리고 새 잔반을 담아주리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해가 높아질수록 밥그릇에는 파리가 꼬이고 악취가 났다.
“마마… 냄새나는테치…”
“배도 고픈테치…”
개집 안에 모여 뜨거운 햇살을 피하던 자실장들이 불평을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는데스… 이럴 수는 없는 것인데스!”
썩어가는 잔반 앞에 선 짓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분명 선을 넘은 불합리한 처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짓소는 주인집 마루를 향해 달렸다.
“이 눔아 올라오지 마라.”
늙은 암컷이 방해했지만 짓소는 막무가내였다.
“주인 사마! 이건 너무한데스야!”
빗자루로 머리를 두드려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루로 오른 짓소는 안방문을 쿵쿵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 뭔 일이고.”
데스데스 시끄럽게 짖는 실장석의 울음에 낮잠에서 깬 박 노인이 안방에서 나오자 밖에는 숨을 헐떡거리는 부인과 그보다 더 가쁘게 씩씩대는 짓소가 있었다.
“할멈, 이기 와 여깄노?”
“아니 글쎄 이 녹돼지가 말을 안 듣네예.”
“데스아! 데스! 데샤아아악!!”
잔뜩 흥분한 짓소를 본 박 노인은 이 짐승이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예상이 갔다. 그러나 일단은 안방으로 들어가 구식 링갈을 귀에 끼우고 돌아왔다.
“그래, 뭐라는지 들어나 보자.”
오랜만에 링갈로 듣게 된 실장석의 호소는 박 노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주인 사마는 어찌 이렇게 와타시를 소홀히 하는데스?”
“… “
“여태껏 잘도 참아 온 데스! 같이 밥을 못 먹어도! 안방에서 함께 잠자리를 못해도! 불평하지 않은데스!”
“... 그라믄 앞으로도 계속 참아라.”
“말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우는데스아! 언제까지 저 늙은 암컷을 곁에 둘 생각인데스? 서, 설마 처음부터 와타시는 첩에 불과했던 것인데스? 미친데스까?”
“아이고야…”
박 노인은 급격하게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탄식했다.
“뭐라 합니까?”
부인이 물었다. 박 노인은 대답 대신 잠시 달력을 보다가 되물었다.
“오늘이 말복이라 했제?”
“야.”
“참 기가 찬다. 임마들이 요물은 요물인갑네… 우째 딱 말복만 되면 이 지랄을 싸노.”
“와요. 또 지가 정실이라예?”
“비슷하다. 마, 작년에도 그렇고 재작년도 그렇고 딱 요맘 때 발작하드만… 할멈 가서 물 좀 끓이라. 대춘이랑 영길이도 부르고. 아, 아이다. 갸들은 내가 부를게. 할멈은 물 올리고 새끼들 손질만 좀 해라이.”
“새끼는 굽는 게 낫겠지예?”
“그라자.”
박 노인이 귀에서 링갈을 빼며 끄덕였다.

‘이게 무슨 일인데스! 대체 무슨 일인데스!’
짓소는 펄펄 끓는 물에 삶겨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벌써 수십번을 반복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샤아아아…”
반쯤 익은 성대에서는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리는 뒷덜미가 꼬챙이에 꿰어져 솥 밖에 걸쳐 있었는데 덕분에 짓소는 죽지도 못하고 산 채로 몸만 익어가는 상태였다.
대화 도중 갑자기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뒷마당으로 간 주인의 손놀림은 번개처럼 날랬다. 위석을 제거하고, 옷과 머리털을 맨손으로 뜯고, 칼로 배를 갈라 분대를 꺼낸 뒤 바가지로 물을 퍼서 피를 씻어 내더니 그대로 끓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이 어찌나 빨랐는지 솥에 빠지기 전까지 짓소는 시원하게 비명 한 번 못 질렀다.
처음에는 고통에 겨워 끓는 물 속에서 발버둥쳤지만 몇 분 전부터 목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샤아아아아…”
그러나 그 무감각이 어쩐지 더 무서웠던 짓소는 말을 듣지 않는 성대로 열심히 새된 소리를 냈다.
“마마… 너무 아파레치…”
문득 막내 엄지의 목소리가 들려 피눈물 흐르는 눈을 겨우 옆으로 돌리니 그곳에는 쟁반 위에 줄줄이 꼬치가 된 자들이 보였다. 독라 꼴로 한 마리씩 꼬챙이에 팔다리가 꿰인 자들은 짓소를 원망하는 눈초리로 보기도 하고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짓소처럼 배가 갈라져 있었고 그 안에는 매운 양념을 바르거나 소금을 쳐서 간을 했다. 덕분에 속살부터 절여지는 자들의 고통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짓소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속이 쓰린레챠…”
막내가 짧은 신음을 하더니 그대로 위석이 부서지며 절명했다. 연이어 다른 자들도 하나씩 숨을 거뒀다.
“샤아아…”
물론 짓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전혀.

“박씨, 요새 저래 요리하믄 동물학대라 안카나?”
박 노인의 초대를 받아 술자리에 온 이웃이 솥에 걸친 짓소를 보고 물었다.
“지랄도… 짓소탕을 저래 끓여야지 뭐 어쩌라고. 시내만 나가도 다 저렇게 한다 아이가?”
혀를 끌끌 차며 답한 박 노인은 말을 이었다.
“겨울이면 산에서 녹돼지 한 마리씩 내려와 딱 말복 즈음 해가 알아서 죽을 짓을 해주니 그거 참 희한한 일이다.”
“머라 하드노.”
“묻지 마라. 골 아프다.”
답을 피한 박 노인은 잔에 술을 따랐다.
“약주나 한 잔 하고 있자. 점마 국물 다 뽑을라믄 아직 멀었으니까네.”

기울이는 술잔과 함께 시골의 밤은 깊어가고, 짓소탕의 국물 맛도 깊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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