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무제 때의 일이다.
변방의 요새에 도시야라는 무관이 살았다.
도시야는 활쏘기에 능했고, 한번 사냥감을 찾으면 천리를 벗어나도 쫓아갈 수 있을 정도로
추적술의 달인이었다.
이에 장건이 한무제의 명을 받아 서역 원정에 나설 때
도시야는 길잡이로 장건의 일행과 함께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건이 흉노족에게 붙잡히면서 도시야 역시 함께 억류되었고,
흉노족은 한족들을 같이 둔다면 의기투합하며 탈출하거나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장건의 일행을 곳곳으로 떨어트려, 도시야는 한 흉노 부락의 노예가 되었다.
흉노족은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도시야를 굴복시키려 온갖 수를 다 썼는데,
도시야는 장장 일 년이 넘는 시간동안 흉노족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나
결국 고문과 모멸을 견디다 못해 노예의 처지를 자각하고 복종하게 되었다.
이에 흉노족은 도시야를 모욕하기 위해 실장석 하나를 얻어다 도시야의 부인으로 삼게 하였는데,
그 실장석의 이름이 녹우희다.
도시야는 자신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아내로 삼아진 녹우희를 경멸하였으나
녹우희는 한족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한 것이 감격스러워 도시야를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도시야 역시 차마 자신에게 지극정성으로 아내의 본분을 다하는 녹우희를 내칠 수만은 없어
녹우희를 부인이라 부르고, 마치 한족의 아내를 맞이한 듯이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를 노리던 도시야에게 탈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것은 흉노족이 서역으로 원정을 가기 위해 군대를 소집한 까닭이다.
이에 도시야가 한 밤중에 녹우희를 불러놓고 말하길,
"내가 본래 천자의 명을 받고 장건을 따라 서역으로 가는 길을 떠났으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흉노족에게 붙잡혀 억류되어 있소."
"부인은 흉노족이 억류되는 동안 장장 일 년에 걸쳐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나를 모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아내로 삼아진 것이오."
"내 비록 나의 의사로 부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부인의 지극정성에 감복하였소."
"따라서 부인을 중원으로 데려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동안의 정이 있어 떠남을 알리고자 하오."
그러자 녹우희가 구슬피 울며 말하길,
"사내가 천명을 받아 행하는 대업을 어찌 아녀자가 막을 수 있는데스우?"
"원치 않는 혼인으로 맺어진 연을 어찌 붙잡을 수 있는데스우?"
"다만 지금까지 와타시를 아내와 같이 대해주시고, 부부의 의를 다해주셨으니, 와타시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 데스."
"그러니 서방님은 어서 가시는데스, 하루빨리 떠나시는데스."
이에 도시야는 채비를 갖추고 떠나려 하나, 이상하게도 녹우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야는 설마 녹우희가 앙심을 품고 흉노족에게 자신이 도망친다고 고해바치러 간 것이 아닐까 하였으나,
한시라도 급한 상황에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도시야가 도망친지 얼마나 지났을까, 남아있던 흉노족들이 도시야의 도주 사실을 알아내고
그를 붙잡기 위해 추격해오기 시작한다.
도시야는 필시 녹우희가 흉노족에게 이를 고해바친 것이라 여기며 그녀를 저주하였는데,
이상하게도 흉노족의 고함소리만 들리고 막상 흉노족이 쫓아오지는 않는 것이었다.
도시야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뒤를 돌아보니, 도시야를 쫓아오는 흉노족들은
풀밭에 다리가 걸려 나뒹굴며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야가 기이하게 여겨 주변을 살펴보니, 녹우희가 풀가에 앉아 풀을 엮고 있는 것이었다.
흉노족은 녹우희가 엮은 풀에 발이 걸려 넘어져 도시야를 쫓아오지 못하고 있었고,
도시야는 이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탄하며 도망친다.
후일 도시야가 중원에 무사히 도착하였을 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도시야에게 혹여 녹우희를 향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느냐고 묻곤 했다.
그러한 질문이 나올때면, 도시야는 언제나 노발대발하며 맹세코 녹우희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하지만
이따금씩 도시야는 흉노족의 초원이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
작은 꿀과자를 몇개 두고 제사를 지내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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