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그리고 앨리스 1~2 (완)

 

<그와 두 자매>와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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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시들은 어디로 가는..테?
-몸이 살금살금 흔들리는 텟치.
-가고 또 가는 테치. 몸이 흔들리는 테치.
-이곳은 어두운 텟치.
-어둡지만 따뜻하고 어쩐지 포근한 느낌 테치.
-우리의 주인님이 저분인 텟치이?
-부디 좋은 주인님이었으면 텟치..
-졸린 테치.
-기대서 자도 좋은 테치..
-..



흔들흔들 부드러운 기분에 휩싸여 두 마리는 잠을 청한다.
아쉽게도 밖은 볼 수 없다. 새로운 주인님은 밖을 볼 수 없는 케이지에 우리들을 넣어 주셨다.
하지만 함께 넣어준 이불이 따뜻하고 보드라워..
두 마리는 한데 뭉쳐 잠을 청한다. 새 주인님이 걸어갈 때마다 몸이 둥실둥실 흔들흔들.
아주 어렸을 적 마마쨩이 이렇게 안고 흔들어준 기억이 날 듯도 말 듯도.


“쾅!!!!”


세계가 찢어내릴듯한, 거대한 파열음이 들려온다.
다시금 쿵.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한데 모여 잠을 자고 있는 자매의 몸에도 소름끼치는 충격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장녀는 잠에서 덜 깬 멍한 머리를 흔들며 주변을 둘러 본다. 케이지가 부서져 있다. 열린 뚜껑의 하늘에서는 아침의 파랗고 청명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쌀쌀한 바람이 스친다.
무슨 일이 생긴걸까, 단순히 생각한 장녀는 눈을 감고 있는 차녀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그녀의 몸을 흔들어대다가,
자신의 한쪽 팔이 사라진 것을 보고,
차녀의 하얀 볼에 자신의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지는것을 보고,
다시 까무라쳐 정신을 잃었다.



히카루는 멍하니 자신의 빌라에 앉아 자매의 지워진 흔적을 바라보다가, 머리가 깨어질듯 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침에 걸려오는 전화는 불길하다.
모른척 하려 했으나 몇 번이나 끈질기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흘끗 돌려 발신자를 바라본다. 총매니저이다...
히카루는 짧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차갑게 전화를 받았다.

“네.여보세요.”
“아..저 혹시 지금 핸드폰 주인분하고 아시는 사이이신가요?”
“네?”

“교통사고가 났는데 핸드폰 주인분께서준 크게 다치셨는데요, 신원을 확인할수 있는 물품이 하나도 없어서요.
핸드폰을 간신히 찾아 제일 최근 전화를 건 곳으로 전화해 보는겁니다.
이 핸드폰 주인 지인분 되시나요?“


히카루는 전화기를 들고 뛰었다. 구급대원이 이야기해 준 인상착의는 유즈루가 확실해 보였다.
자신의 빌라 근처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다 뺑소니차에 치인 것으로 보인다고 구급대원은 이야기했다.
가족 하나 없는 총매니저의 생각에 히카루는 급하게 옷과 지갑만 챙겨들고 뛰다가, 그와 함께 있었던 두 마리 자매 실장석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아..젠장!!!!”

자신이 사육실장이니 자매니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었다. 히카루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것 같았다.
매니저가 자신의 집에 온 후 뺑소니를 당해 중상인것도, 두 마리 자매도 같은 꼴일지..
혹은 이미 차에 깔려 죽었을지 모르는 상황인것도.

히카루는 괜히 택시의 시트를 주먹으로 쳐 대며 자신의 모자람을 원망했다.





<<어느날 눈을 뜨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착한 인간님과 하얗고 따뜻한 집에서 살던 두자매는 착한 인간님의 사정으로 멀리 떠나야만 했어요.
그렇지만 두 자매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답니다.
착한 아이가 되면 다시 예전의 인간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작고 좁은 상자에 담겨 둥실둥실 흔들흔들, 먼 길을 떠났는데.

세상에, 큰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어요!
쾅!쿵!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자매의 작은 방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답니다.
큰언니는 팔이 아팠어요.머리도 아팠지요. 작은언니를 깨우려고 애썼지만 아무래도 힘들었어요.
큰 언니는 작은언니의 누운 몸 위로 조용히 쓰러졌습니다.
잠이 덜깨서 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상처를 입은 큰 언니는 조용히 작은언니의 몸 위에 누워 작은언니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답니다.

착한 자매가 다시 잠을 깬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서였어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자매들도 알 수 없을정도로 오랜 시간이 흐른후 자매들은 얼굴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큰 언니는 눈을 반짝 떴어요. 이제 머리와 팔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어요.
하얗고 깨끗한 천이 자신의 팔에 칭칭 감겨져 있는게 아니겠어요?

큰 언니는 눈을 동그할게 뜨고 놀라워 하다가 코를 간질이는 좋은 음식냄새를 맡았답니다.

작은 코를 킁킁, 벌름대니 큰언니의 콧속으로 온갖 향기가 전해져왔어요,

빨갛게 불이붙은 나뭇가지가 온기를 뿜어내며 타고있는 기분좋은 연기의 냄새,
인간님이 빨래를 널면 느껴졌던 하얀색 이불의 향기로운 햇살내음.
공원에서 마마가 자신들을 포근하게 안아줄때 맡을 수 있었던 마마의 메마른 머리카락냄새와 정겨운 땀내음..,.

그리고 또 자매가 있는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매들의 빈 뱃속을 어루만져주는 군침흐르는 음식냄새가 풍겨왔습니다.

큰언니는 이게 무슨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이제 일어났니? 정말 너희들 오랫동안 자더구나-”

인간님의 목소리였어요. 착한 인간님도 아니고 새 주인님도 아닌 다른 인간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머리를 길게 기른 예쁜 여자인간님이었어요.

여자인간님은 자매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띄었답니다.
큰언니는 조심스레 이불 안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기었어요.
무서운 인간님은 아닐것 같았지만 마마는 항상 인간을 조심하라 이야기해주셨거든요.

“이녀석, 그렇게 숨지 않아도 괜찮아...너희들은 사육실장이지?”
큰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기는 구급의료센터야..아무래도 너희와 함께 온 주인은 지금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아.
생각보다 사고가 심각해서 수술을 여러번 해야 했거든...그때까지 여기 잠시 있어야 할것 같은데, 괜찮겠니?“

큰언니는 인간님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구급이나 수술같은건 그녀가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주인님이 많이 다치신 것을 알고, 그녀는 빨강과 초록의 눈물을 양쪽 눈에서 펑펑 흘려댔습니다.
긴머리 여자인간님은 “착한 아이로구나”이야기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작은언니도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큰언니에게 이제까지의 일을 이야기들었습니다.

주인님이 아프시다는 말에 작은언니도 놀랐지만 큰 사고에서 모두가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시 예전의 착한 인간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상태는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만..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을것 같습니다.
여기 보이시지요?
후십자인대 파열,열린상처 없는 뇌진탕,어깨,허벅뼈 골절,폐도 문제가 생겼구요..
몇 번 수술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가족분이신가요?“

“아뇨. 이분은 가족은 없으십니다. 저는 회사 동료..직원인데요.수술이 언제쯤 끝날까요?“

“글쎄나..그건 수술 들어가봐야 알것 같은데 한 다섯시간 이상 걸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류작성좀 부탁드립니다.”


유즈루는 처참한 상태로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온몸이 붉은 피에 젖어 아쉬운대로 지혈용 붕대를 감고 있었다.
방금전에는 호흡기의 상태가 안좋다 하여 삽관을 해 기도도 확보했다. 사지에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목격자들의 말로는 트럭의 뺑소니라고 이야기하는것 같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사실 의미도 없다. 트럭이든 오토바이든 우선 사람 생명을 살린 뒤에 찾을 일이었다.

환자의 소지품이라고 건내어진 휴대폰은 락도 걸려있지 않은 상태였다.
누구라도 전화를 좀 해둘까 싶어 핸드폰의 연락처를 뒤적여 보았다.

니지클럽,리틀벅스,니지클럽,리틀벅스,수의사,미키,니지클럽,리틀벅스...
하루에 전화는 한두번 사용할까 말까싶은 정도로 유즈루의 핸드폰은 깨끗했다.
연락처에는 회사와 직원들 몇 명 뿐이었다. 도합 10명도 안되는 적은 인원이 유즈루가 가진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이 사람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돈을 벌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한 것일까.

돈을 벌어도 쓸 곳도 없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도 선물을 사줄 여자친구조차 한명 없었다.

아마 인기가 없었던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즈루는 히카루가 본 사람들 중 외적으로 제일 아름다웠던 사람이었고 성격에는 위트와 센스가 넘쳤다. 실장석에 대한 과한 관심과 애정,소유욕이 지나칠 정도였지만 그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벽을 쌓고 자신의 잔인하고 음침한 성에 갇혀 적록의 눈을 가진 생물체만을 바라보고 있는 유즈루.

히카루는 이제껏 매니저가 실장석 이야기 외에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는것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예를 들면 오늘 점심 식사나 회식의 장소따위.

이사람은 밥은 먹기나 할까?
사실 유즈루와 함께 식사를 한적도,회식을 한적도 단한번도 없었다. 매니저실에 가면 항상 커피나 차 따위를 홀짝이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과 수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이제껏 행복하게 지내왔었다.
본가에 가면 엉덩이를 두들겨주는 엄마가 있고 나를 자랑스러워 해주는 아버지가 계신다. 동생들은 대학을 다니는데, 핸드폰으로 하루 몇십분이나 통화를 할 정도로 서로간의 우애는 끈끈했다.

친구들..
여자친구도 몇 명이나 있었고 울적할 때 맥주한잔 할수 있는 친한 친구들도 적지 않다 생각했다. 직장 동료,선배,후배,지인,....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삶속에서, 오직 실장석만을 바라본다는것은 어떤 기분인 것일까.

히카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텅빈 유즈루의 핸드폰 연락처에서 그래도 몇 번 전화를 건 흔적이 있는 미키 매니저님의 이름을 찾아낸다.

“.....미친거 아냐? ..이런 아침시간에 왜 전화하고 난리야..”

수화기 너머로 무뚝뚝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목소리 뒤편으로 리틀벅스의 매장음악이 들려왔다.

“매니저님, 저 히카루입니다..”
“야!!지금 몇신데 아직도 안와? 무슨일 있어?
연락도 안되고..이런일이 거의 없어서 엄청 걱정했잖아. 잤어?술먹었어?어디 아파?무슨일이야?“

“총매니저님께서 많이 다치셨어요.뺑소니를 당하셔서..”

미키는 오늘은 리틀벅스의 문을 닫고 병원으로 달려온다 하였다. 니지클럽 쪽에는 병원으로 오며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다.
병원과 히카루의 빌라, 그리고 도심지에 있는 리틀벅스는 서로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미키는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유즈루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침대아래로 떨어진 하얀 손은 식어서 굳어져 버린 피가 닦여지지도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얄궂게도, 어릴적 무릎을 다쳐 울면서 집으로 왔을때 엄마가 따뜻한 물에 거즈를 적혀 정성스레 닦아주었던 기억이 났다. 따뜻한 거즈가 닿자 신기하게도 아픔은 사라지고 엄마의 걱정스런 얼굴만이 눈에 들어왔던 어린 시절의 기억.

쓸쓸한 손가락이 의료진들이 침대를 밀 때마다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말라가 부서져 버릴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예쁜 긴 머리 여자인간님은 자매를 상냥하게 보살펴 주었답니다.
매일매일 따뜻한 물에 거즈를 적셔 자매들의 온 몸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고 하얀색 거품을 내어 머리카락을 살살 씻어내려주었어요.

아프고 다친 자매들은 여자인간님의 정성스런 손길에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졌답니다.

여자인간님은 매일 매일 인사를 잘 하는 자매를 보고 자신도 이렇게 착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고 말해 주었어요.

자매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자매들의 소원은 딱 하나였습니다.
예전의 착한 인간님을 다시 만나는 것 이었어요!

자매들은 여자인간님의 방에서 책상을 닦기도 하고 쓰레기를 줍기도 하였어요.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바퀴벌레를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여자인간님은 무척 좋아해 주었어요. 자매들도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는것이 무척 행복했습니다.

어느날, 여자인간님은 자매들에게 선물을 하나 가지고 왔어요.

창밖에는 눈발이 날리고, 방 안은 자매들의 눈빛처럼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꾸며져 있던..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들려오던 날이었어요.

여자 인간님은 자매들에게 붉고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얘들아, 메리 크리스마스!!”

자매들은 여자인간님을 향해 고개를 꾸벅, 하며 공손히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매들은 태어나서 선물을 받아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자매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어요.
고개를 갸웃 하며 자매들은 초록색의 리본을 잡아당겨 상자를 열었어요.

와아.
상자 속에는 자매들의 예쁜 옷이 두 벌이나 담겨져 있었습니다.
겨울용인듯 소맷단과 치맛단에는 보기좋게 털이 장식되어 있었구요, 천의 감촉은 정말이지 보드랍고 따스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매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것은 그 예쁜 옷이 자매들이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이었다는 점이었어요.

자매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분홍색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분홍색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지요. 자매들은 그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초록색과 흰색으로 장식된 평범한 옷을 한 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턱받이의 리본이 분홍색이었던 지라,자매들은 그 리본을 애지중지하며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옷 전체가 분홍색인, 눈부시게 아름답고 따뜻한 옷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자매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인간님에게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여자인간님은 방긋 웃어주었어요.
여자인간님의 미소는 자매들이 그리워했던 착한 인간님의 미소와 똑같았답니다.
자매들은 지금 너무 행복했지만, 다시 착한 인간님이 보고싶은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데려다 주실까요?
착한 아이가 된다면 다시 사랑하는 인간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자매들은 매일저녁 손을 모아 기도를 했습니다.
예전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요. 착한 인간님을 위해 바퀴벌레를 잡아줄 그 날을 기대하며 말이예요.>>




***

유즈루는 며칠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릴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히카루와 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의 거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던 유즈루가 이 꼴이 되자, 니지클럽의 일도 차질이 적지 않게 생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리틀벅스에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는 이상 수의사의 일은 없었기 때문에 히카루가 유즈루의 보호자로써 병원에 머무르게 되었다.
히카루는 병상에 누운 유즈루를 바라본다.

거대한 붕대의 산.
몸의 반이 석고 기브스에 갇혀져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치 하얀색의 무덤으로 보였다.
일정한 소리가 병실 안을 조용히 채운다. 바이탈 사인 정상.아직 살아 있음..

간호사는 히카루를 부른다.

“아무래도 집에서 환자가 필요한걸 챙겨오심이 좋을것 같네요. 여기 병실용 물품이요..”
종이에는 오래 입원이 필요한 중환자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빼곡이 적혀 있다. 친절한 병원이다. 아니면 vip실이라고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일까,

히카루는 종이를 본다.
가습기,여벌속옷,실내화,여분의 담요,쥬스등등...
히카루는 펜을 꺼내 동그라미를 치면서 의식불명의 유즈루에게 필요한 물품이 무엇인가 세세하게 정리해 본다.
주변에서 사도 좋은 물품들이지만 어차피 히카루 자신도 집에 다녀와야 하니 가는길에 유즈루의 집에 들리는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매니저는 아마 원하던 사육실장을 찾아 기쁜 마음에 아마 집 문도 열어놓고 나왔을런지 모르겠다. 히카루는 유즈루의 소지품에서 집 열쇠도 찾아 주머니속에 넣었다.

그때, 히카루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 하나 있었다.

“아...그 녀석들..!!”

유즈루의 사고 소식과 수술에 놀란 나머지 유즈루가 자신의 집에 왔던 이유를 깜빡하고 있던 것이다.
그녀석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설마 죽지는 않았을런지.

히카루는 병원의 로비로 뛰어나가 담당 간호사를 부른다.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하고는 초조한 마음이 되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며칠이라도 길거리에 있다가는 금세 죽어버릴 것이 분명한 나약하고 여린 생명체들.


“있다는데요?”
“네?”
“사육실장 두 마리. 구급센터에서 잘 돌봄받고 있다 합니다. 어떻게..가져가시겠어요?상황이 되시나요?”
“그게..”


히카루는 자신의 상황을 생각했다. 아마도 지금 당장은 잘 보살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석들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병원에 내내 묶여 있어야 하는 지금당장은...
그녀석들에게 오히려 피해를 입힐것이 분명했다. 유즈루의 상황에 따라 병원에서 몇날 며칠을 지내야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저....혹시..저도 지금 그 녀석들을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며칠이라도 좋으니 구급센터에서 맡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번 물어볼께요.”


간호사는 구급센터쪽으로 콜을 돌린다.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더니만 히카루를 향해 빙긋 웃어보인다.

“괜찮다는데요? 구급센터 여직원이 자기는 그 사육실장들 며칠이라도 더 데리고 있을 수 있다고..
자신에게 주어도 좋다는데요.다행이시겠어요.”
“네.감사합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사람의 손을 쓸데없이 타지도 않았고 분충도 아니었으며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곁을 지키며 마음에 위안이 되 주는 녀석들.
아무래도 서로를 더 필요로 했던건 나였던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히카루는 간호사에게 고개숙여 인사한 후 병원을 나섰다.





<<실장석들의 하루는 인간보다 짧답니다.
거대한 범고래는 만고의 세월을 바다를 유영하며 살아가지요. 작디작은 다람쥐나, 토끼나, 실장석들은 인간만큼 오래 살지 못한답니다.

하지만 그만큼 짧은 하루하루를 작은발로 재빠르게 뛰어다니며 살아가고 있어요.

인간님에게는 그저 일주일 뿐일지라도 실장석들에게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될 수도 있는거거든요.

자매는 여자인간님과 함께 바쁘고, 시끄럽고, 어지러운 구급센터의 한 켠에서 조용히 자신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답니다.

자매들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어요.언젠가 착한 인간님이 우리를 데려가러 와 주실까.
책상위에 버려진 쇳조각을 이용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꾸미기도 하고, 인간님이 선물해주신 포장지의 리본들을 이용해 큰언니의 머리를 다시 솜씨좋게 땋아주기도 했어요.
여자인간님이 주시는 과자들은 달콤하기 그지 없었고 도시락에서 항상 골라다 주는 계란과 주먹밥들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천국의 맛이었답니다.


구급센터가 조금 더 바쁘고 시끄러웠던 어느날,
자매들에게 새로운 친구가 찾아왔어요.

새로운 친구는 자매들보다 몸집이 더 컸고, 온통 하얀색 털북숭이에 새파란,하늘같은 예쁜 눈을 하고 있었답니다. 한번씩 꼬리를 내밀고 몸을 쭉 늘이며 “야오옹~”하고 울어 댔어요.

자매들은 새로운 친구가 신기하고 반가워 손을 내밀고 친구의 몸을 쓰다듬어보려 했어요.

“샤아악!”

손을 내민 큰언니의 하얀 손등에 피가 맺혔어요.
어쩌지요?아무래도 새로운 친구는 자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것 같아요.

친구는 오직 여자인간님에게만 친절했고, 여자인간님이 몸을 쓰다듬어 줄때만 허리를 낮추고 작은 목소리로 사랑스럽게 갸르릉댔어요.

여자인간님은 자매들도 여전히 귀여워했는데,
친구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자인간님이 자매와 놀아주고 있을 때면 먼 발치서 자매를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며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로 위협을 했어요.

자매들은 새로운 친구가 무서웠답니다.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자매들과 친구 모두 지금 당장은 갈 곳이 없었거든요.




인간님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어느 추운 한밤중,
친구는 발끝을 조심조심 세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자매들의 상자로 다가왔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작은 언니가 잠에서 깨어나고, 친구가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는것을 보았습니다.

앗 하는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친구는 작은언니의 몸을 친구의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었어요. 뾰족한 발톱으로 상처를 내었어요.

작은언니의 몸에서는 긁은듯한 커다란 상처가 친구의 손짓 한번에 계속계속 생겨났고, 작은언니는 피투성이가 되었어요. 인간님이 사주신 분홍색 예쁜 옷이 빨갛게 피에 물들어갔습니다.

친구는 이빨을 세워 작은언니의 머리를 물었어요.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부서진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작은 언니를 물어뜯던 친구는 둔탁한 무엇인가에 머리를 맞고 작은언니를 상처입히는것을 멈추었습니다.

큰언니도 소란에 잠에서 깨어나 작은언니가 공격당하는것을 보게 되었고, 작은 실장석의 힘이나마 끝까지 짜내어 주변에 있던 열쇠뭉치를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친구의 하얀색 털이 피로 물들어갑니다. 큰 상처는 아니었겠지만 무언가 뾰족한 물건이 친구의 머리를 찔렀나 봐요.

그러나 친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아요. 화가 더 난듯 작은언니의 목덜미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댑니다. 작은 팔다리가 작게 떨어가요 시든 풀마냥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큰언니는 책상에서 뛰어내렸어요. 동생을 이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큰언니는 젖먹는 힘까지 짜내어 동생을 친구에게서 떼어냅니다. 친구의 눈이 무서웠지만 큰언니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작은 손으로 친구의 눈을 찔렀습니다.

캬아아아앙!하는 큰 소리와 함께 드디어 친구는 작은언니의 몸을 놓아주었어요.


큰 언니는 작은언니를 꼭 껴안고, 열려진 문 틈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바깥바람이 시린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자매들은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처입은 작은 언니도 두 발을 재게 놀렸습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저곳에 계속 있다가는 친구가 자신들을 물어뜯어 죽여 버릴것 같았습니다.


두 자매는 눈발이 날리는 바깥세상으로 멀리멀리 뛰어갔습니다.
눈송이가 하나, 자매의 목덜미를 파고들었어요.
여자인간님께 인사를 하지 못한게 내내 걸렸지만
자매들은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뛰고 또 뛰어요.

작은 자매들은 흰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달려갔습니다.>>





***

히카루는 유즈루의 집에 도착했다.

니지클럽쪽에 연락을 하여 유즈루가 키우던 실장석들은 이미 클럽쪽으로 옮겨두었다고 했다.


방 안을 본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가 텅빈 방 안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텔레비전도 없다. 흔한 쇼파나 가구조차도 없었다.
방은 먼지 한점 없이 깨끗하기 그지없었으나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얀색 대리석으로 깔린 바닥, 그보다 더 값진 타일이 붙여진 벽면.
샹들리에,조명,벽면의 그림.모두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사람이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히카루는 모델하우스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건조하고 차갑고 메마른 공기가 커다란 집 안에 가득했다.
유즈루의 집에서 유즈루라는 인간과 실장석을 제외하고 나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필요한 것은 몽땅 다 사야 하나ㅡ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우선은 남아있는 것이라도 확인을 하여 챙겨가기로 했다. 의미는 없을듯 했지만.

방 네 개중 세 개는 실장석들의 차지였던듯 텅 비어 있었다. 히카루는 나머지 하나,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잠자고 생활했던 흔적이 아주 조금은 보이는 방이었다.

커다란 침대가 보인다. 하얗고 깨끗한,주름하나 없이 정결한 하얀 시트가 곱게 깔려있다.
책이 빼곡하게 꽂혀진 책장과 컴퓨터가 연결된 갈색 원목의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 위에는 유즈루가 좋아하는 서류와 보고서들로 가득했다. 이번달의 예산내역,새로운 프로젝트, 다음달의 이벤트 등등...
무언가 유즈루에게 필요한 것이 없을까 하고 책장 안을 뒤적이다가 히카루는 작은 파일을 발견했다. 평범한 보고서려니 생각하고 다시 넣어두려는 찰나, 파일의 묶음 안에서 작은 종이가 한두 장 떨어져 내렸다.


히카루는 종이를 주워 들었다.
사진이었다.
오래된 사진.

어린 유즈루가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카메라를 보며 웃고있는것이 찍힌 사진.
사진속의 유즈루는 천진하기 그지 없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모습의 유즈루.

사진속의 어머니는 유즈루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머리에 새까만 눈썹, 굳이 말하자면 고혹적이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인이었지만 옆에서 웃고 있는 유즈루와는 닮은 구석이 없다.
사진속의 유즈루는 연갈색 머리카락에 색소가 엷은 눈빛과 투명할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볼은 장밋빛이었고 여자라고 착각할만큼 가녀리고 예쁜 얼굴을 하고 있다.
어머니와 유즈루를 놓고 비교를 해 본다면, 마치 인종이 다른 두사람을 놓고 사진을 찍은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둘을 본다면 입양이라고 한걸까 의심할 정도로 같은 구석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었다.
구석에 작게 쓰여있는 “엄마와 유즈루쨩”이라는 글씨만이 둘의 친자관계를 증명할 뿐이었다.


“음?”

이질감에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히카루의 눈에 다른 것들이 들어왔다. 유즈루와 어머니 사이에는 실장석 한 마리가 멍한 표정으로 함께 있었다.
성체실장 중에서도 꽤 커다란 사이즈로 보이는 녀석으로 어머니와 유즈루의 사육실장인지 흔하게 보이는 핑크빛 옷과 예쁜 분홍 리본을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유즈루의 실장석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을까. 이때의 실장석은 해수로 취급되어 지금보다도 더 박한 대우를 받았었는데. 여하튼 취향도 특이한 사람이었다.
사진을 돌려놓으려는 히카루의 손 아래로 비슷한 종류의 사진이 두세장 더 떨어졌다.
히카루는 몸을 굽혀 사진을 보았다.

모두 다 엄마나 유즈루, 실장석. 혹은 실장석과 유즈루의 사진이었다.
엄마를 찍은것도 있고 유즈루를 찍은것도 있었으나 멍한 표정의 커다란 실장석은 항상 사진속에 있었다.

유즈루가 나이가 좀 더 들어보이는 어떤 사진은 실장석이 바뀌어 등장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귀엽고 깜찍한 자실장이나 엄지실장은 없고 모두 다 덩치 큰 성체실장 뿐이었다.
이것도 괴벽이라면 괴벽이다. 멍한표정의, 혹은 분충스러운 표정의 성체 사육실장. 프릴과 리본이 가득한 핑크빛의 혐오스러운 드레스.

일견 행복한 가족사진으로 보일 수 있는 사진들에서 등장하는 실장석은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찌보면 실장석이 주인공인 사진에 유즈루와 어머니가 서브로 존재하는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왜 그랬을까.

라는 사람의 호기심은 항상 일을 낳는다. 사건을 만든다.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의 연결고리를 자신도 모르게 탐구하게 된다.

히카루는 작은 파일을 열어보았다.
작은 파일의 안에는 유즈루와 어머니,그리고 실장석의 기념사진이 끝도없이 들어 있었다. 보통은 어머니가 사진을 찍은 듯 유즈루와 실장석 둘의 사진이 더 많아 보였다.

어릴적의 유즈루는 실장석을 사랑스러운듯, 가족으로 인식한듯 꼭 껴안고 있었다. 얼굴을 부비며 카메라를 향해 브이자를 그리고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조금 더 나이가 든..말하자면 중학생 이상으로 보이는 사진에서는 그렇게 친밀함을 느낄수 없었다. 사춘기라도 온 것인지 실장석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었고 얼굴에 미소도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유즈루와 실장석을 꼭 껴안고 있었다.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미소.. 아마도 실장석을 키운것은 어머니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도 이런 애호파가 존재했다니. 특이한 취향이었다.

사진의 뒤편으로 또다른 서류묶음이 발견되었다.
유즈루는 정신병원과 심리치료센터에서 일종의 치료를 받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처방받은 약과 테스트 결과, 혹은 설문의 진단지가 날짜별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그래. 병은 병이지. 본인도 알고 있긴 했구나 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진단지와 테스트결과는 모두 다 한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트라우마.

더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무언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그를 덮치고, 그것으로 인해 꽤나 오랜 시간동안 힘들어하고 고통받은듯 해보였다.
방긋방긋 미소를 짓는 유즈루의 마음의 한구석에는 무언가 끔찍한 일로 고통받은 어린 소년이 존재했다.
그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나와있지는 않았으나 몇 년이 넘는 치료와 상담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계속 극단을 치닫고 있었다. 점점 더 좋아지지 않는 치료상황과 심리상태가 고스란히 몇 개의 종잇장에 드러나 있었다.

한번도 본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총매니저.

그러나 그도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친구를 만들고,여자친구를 만든다던가 가족을 이루는 일에 ‘인간이라면’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계속 그를 가로막고 그것이 발전하여 꽃피우는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유즈루는 계속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스스로가 쳐놓은 고치에 틀어박혀 나가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벽은 너무 강하고 단단해서 유즈루 안의 어린 소년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히카루는 마음 한구석의 찌릿함을 느꼈다. 괜히 자신이 미안해진 느낌이었다.


한번이라도 그에게 식사를 하러가자고 말한 적이 있던가?
끝나고 맥주라도 한잔 하자 권유한 적이 있던가?
그에 대해 개인적인 궁금함을 가진 적이 있던가.
쉬는 날에 무엇을 하냐고. 인사치레라도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히카루는 무거운 마음으로 유즈루의 집을 나섰다. 그가 그곳에서 가져올 만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의 짐과 죄책감이 새로이 생겨났다.
만약에 유즈루가 깨어나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꼭 식사라도 한번 같이 하자고. 일이 끝난 다음에 회식자리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라도 붙여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두 자매는 작은 다리로 걷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상처난 발에서 적록색 핏방울이 맺혀 바닥에 스쳤습니다.
온몸이 쓰리고 아팠지만 걷는 것 말고 두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그렇게 인적을 피해 쉬고 걷기를 반나절, 한나절.
두 자매는 몸을 숨길 곳을 찾았습니다.

인간님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지하는 눈도, 비도, 바람도 피할 수 있고 예상보다 따뜻해서 자매들이 지내기 좋았답니다.

상처 입은 작은 언니를 위해, 큰언니는 골판지 상자를 들고 옵니다.

큰언니는 품속에서 작은 천조각을 꺼내었어요.

그것은 바로 착한 인간님이 선물해주시고 작은 언니가 서툴게 만들어낸 큰언니의 옷이었습니다. 낡고 바래 무늬는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따스하고 부드러웠어요.

자매는 착한 인간님이 그리웠습니다. 손수건 옷을 보자 양 눈에서 또르륵,하고 적록의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큰언니는 소중한 옷을 이빨로 물어뜯고 잘라내어 조각을 냅니다.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은 소중한 옷을요.
작은언니는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갸웃거리며 큰언니를 말리지만 큰언니는 옷을 조각내는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무 낡아 약한 실장석의 이빨로도 쉽게 옷은 찢어져 갔습니다.

큰언니는 끈이 된 옷의 조각을 작은언니의 상처난 몸에 칭칭 감아주었어요. 어느때인가 여자인간님이 아픈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 주어 상처를 고쳐주던 기억이 났습니다.

작은언니의 드러난 속살과 피부에 소중한 옷을 둘러감아주었어요.
작은언니는 큰언니가 고마워 다시금 눈물을 흘립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니겠어요?
작은 천조각이 상처를 감싸자 아픔은 사라지고 따스함이 몰려왔습니다.
작은언니와 큰언니는 서로의 몸을 보듬고 잠이 들었습니다. 비록 피투성이에 온몸은 찢기우고 할퀴어졌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서로가 함께였으니까요. 그렇게 둘은 온기를 나누며 작은 골판지 상자 안에서 잠이 들었답니다.>>




***


“네?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죄..죄송합니다. 엊그제 들어온 고양이 한 마리가 아무래도 사육실장들에게 해꼬지를 한 모양이예요...워낙 사람을 잘 따르는 녀석이라 안심하고 풀어주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줄은 몰랐어요.정말 죄송합니다..어쩌면 좋아요.“

여성구급대원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주인인 히카루에게 사죄를 하였다.
히카루가 죄송스런 마음이 들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며 진심으로 자매를 걱정한다.


아마도 ‘얼마든 사육실장들을 맡아줄 수 있고, 자신이 길러도 좋다’라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그 하얀 고양이는 천연덕스럽게 온몸에 피를 묻히고 그루밍을 해 대고 있었다.
히카루는 입술을 깨문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저 고양이가 무슨 죄겠는가. 고양이의 눈에 자매는 그저 작고 사냥하기 좋은 여린 생명체이자 놀잇감일 뿐이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늦겨울이다. 밖은 시린 바람이 불고 종종 눈도 많이 내린다. 기온은 차갑
기 그지없고 모든 것은 얼어붙어있었다.


히카루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선다.
아마 멀리는 못갔을 듯 해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자매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주머니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미키 매니저였다.

“네.여보세요..”
“유즈루가 깨어난것 같아. 근처면 좀 와줄래?”
“네!”

히카루는 한걸음에 유즈루의 병실을 향해 달려갔다. 물어볼것이 많았다. 해주고싶은 말도 많았다.

만약에 그가 정상적인 삶을 되찾는다면. 히카루는 유즈루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의 나이도 알지 못했다.



히카루는 한걸음에 유즈루의 방에 도착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미키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쓸쓸함이 방안을 채운다. 친구하나 가족하나 그를 보러 와주지 않았다.
유즈루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팔다리를 움직이는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손가락의 까닥거림. 작은 웅얼거리는 목소리, 눈의 깜빡임 등으로 그가 의식을 되찾은것을 알렸다.

회사에서는 그토록 잔인하고, 거대하고, 크게보였던 유즈루가 각종 기계와 하얀 붕대에 묶여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정심.

히카루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감정이 아마도 ‘동정’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의 뿌리가 무엇이든 간에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할 뿐. 근원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유즈루는 지친 눈으로 둘을 바라본다.
미키를 한번 보았다가,히카루에게 눈길을 돌린다. 메말라 피딱지가 맺힌 입술을 움직여 무엇인가 말을 하려 했다.

“....미안”
“네?지금은 아무 얘기 안하셔도 괜찮아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가...준...사육실장..잃어버렸어...”
“그런건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 몸을 좀 회복하세요.”

간호사가 오고 유즈루의 링겔을 통해 안정제와 진통제를 주입한다. 유즈루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금세 잠에 빠져 들었다.

의사는 금방 유즈루의 병실에 도착했다. 누가 뭐래도 유즈루는 부자이고, 그가 쓰는 방은 그 병원에서 가장 비싼 vvip룸이었다. 케어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유즈루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뇌진탕과 폐의 수술은 그래도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하였다. 뼈의 골절도 완전히 조각난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부러졌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두어달 깁스를 하고 병원에서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 후유증은 좀 있을지 몰라도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듯 해 보였다.

경찰도 와서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cctv가 없는 완전한 사각지대이고,목격자역시 ‘트럭’이라는 단서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아 수사에는 차질이 많을 것이라 하였다.


“이제 한숨 돌렸네.”
“그러게요..”


미키 매니저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의 안심의 표현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키는 유즈루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
지낸 세월도 적지 않다. 좋아하는 인간유형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지만 부딪히고 싸워가며 나름대로 미운정이 든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빈 병실안이 미키도 신경쓰이기 그지 없었다. 일이야 아랫사람들이 잘 해낼것이라 생각하고 미키가 히카루와 교대를 하듯이 병실을 지켰다.

벌써 사고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희한하게도 니지클럽과 리틀벅스는 그럭저럭 잘 돌아갔다. 신년의 특별세일 이벤트도 어떻게든 종업원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유즈루의 손 안에서 돌아갔을 때와, 사실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 앉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행하고 있었다.
히카루는 미키에게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저기..미키매니저님.”
“응?”
“아무래도 하루정도만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그래.힘들지? 히카루도 거의 못 쉬고 집도 잘 못들어가고 여기저기 심부름만 잔뜩 했으니까...오늘은 별일 없을 듯 하네.들어가서 좀 쉬어. 총매니저의 상태도 많이 회복되었고.”

“그도 그렇지만...어쨌든 오늘 반나절정도만 부탁드려요. 해야할 일이 있어서요.”
“걱정말고 다녀와.”



히카루는 길을 나선다.

구급센터부터 1키로미터 안쪽으로 자매가 갈 수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상처입고 지친 자실장 두 마리가 오래 걸을수는 없을 것이다.
겨울이라는것은 추위에 공격을 당하기는 하지만 역으로 다른 생물들이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녀들에게 상처를 입힐 들고양이나, 공원의 실장이나 쥐 따위는 추운 이 지역의 등쌀에 떠밀려 많은 수가 이미 죽고 없었다.


자매들이 따뜻하고, 먹이를 잘 구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만 한다면 생존이 가능할런지도 몰랐다.
지능이 낮은 멍청한 들실장이라면 결코 할수 없는 일이겠지만, 히카루는 자매들의 영특함을 믿었다.
장녀의 생명력과 차녀의 영리함에 한가닥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작디작은 자매 둘이 아파트의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바깥보다는 따뜻했지만 여전히 춥기 그지 없었고 먹을것도 부족했습니다.

큰언니는 매일매일 작은언니와 자신을 위해 벌레들을 잡아 대었지만 찬 겨울에는 벌레들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매는 매일 배가 고팠어요.그리고 추웠지요.
여느 날처럼 먹을것을 구하러 간 날, 자매들은 용기를 내어 아파트 뒤편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조심조심 살금살금.

엄마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인간들은 거의 다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요.
이제껏 좋은 인간들만 만났지만 그것은 자매가 운이 좋아서 그런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작은 언니는 잘 알고 있었어요.
큰언니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인간들에게 발걸음을 가까이 할 때마다 작은언니는 큰언니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우리는 인간님들에게 사냥당할 수도 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슬픈 눈으로 큰언니를 바라보면, 큰언니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언니의 뜻을 따랐습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아파트 뒤편으로 향해 보아요.

어디선가 이상하기도 하고 향긋하기도 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음식의 향기가 찬 바람을 타고 솔솔, 불어왔어요.
불이 꺼진 밤에,달도 뜨지 않은 밤에 자매들은 소리도 없이 바닥을 기는 거미가 되어 음식냄새를 쫓아 갑니다. 조심조심 또 살금살금.

와아.

자매들은 커다란 초록색의 상자 안에서 숨을 멈추었어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먹을 것 같아 보이지만 먹을것이 아닌’물건들이 초록 상자를 가득가득 채우고 비어져 나와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작은언니는 언젠가 자매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적에, 엄마가 자매들의 보금자리로 가지고 오신 음식들이 생각났습니다.

사과껍질조각, 반쯤 물러있는 고기, 보랏빛으로 변한 밥알...
모두가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은 매일매일의 식사에 엄마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며 배를 채워 갔습니다. 맛이 있을 때도,맛이 없을때도 있었지만 그 모두는 자매의 배를 가득가득 채우게 해 주고, 내일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영양이 되었답니다.

큰언니가 이것은 무엇일까 멍 해 있는 동안에, 작은언니는 빠른 손놀림으로 바닥에 떨어진 음식들 중 먹기 쉬워 보이는 음식들을 골라 냅니다.

상한것 같아 보이는 짜디짠 단무지, 말라 비틀어진 귤껍질,이상한 냄새가 나는 생선의 꼬리, 언젠가 먹었던것 같은 보랏빛 밥알 뭉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작고 고운 두 손에 가득가득 담아 올립니다.

두 자매는 골판지 상자로 향했습니다. 며칠만에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을것 같아요.
음식의 맛이나 모양,냄새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답니다.

배고픔이 사라진다는것은 그녀들의 작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요.
배가 부른 것 만으로도 추위가 가시고 금세 행복해진 기분이 들어 큰언니는 땋은 머리를 휘날리며 기쁘게 춤을 추고 작은 언니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엄마가 항상 불러주신,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사랑의 노래를요.
그날만큼은 두 자매 모두 행복했습니다. 기쁨에 겨워 잠을 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답니다.>>



***

히카루는 공원 안쪽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곳은 근처의 근린공원이었다.

그러나 히카루가 공원에 발을 디디자 마자 발견한것은, 겨울맞이 일제구제작전이 실행되어 코로리 등에 목숨을 잃거나 학대파의 쇠지렛대에 맞아 머리가 터진 실장석의 시체들 뿐이었다.

찬 겨울날에도 죽지 않은 들고양이들이 실장석의 시체를 음미하고 있다.
 붉은 피와 하얀 살점이 히카루의 발길에도 도망을 가지 않은 대담한 고양이의,입속으로 들어간다. 뼈가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의 고양이가 원흉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고양이에게 화풀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애꿎은 들고양이에게 화를 낸다 해도 자매들이 돌아올리는 없었다.

그저 어딘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구석구석 공원을 뒤질 뿐이었다.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10분 남짓의 작은 공원엔.
살아있는 실장석의 흔적따위는 없었다. 살점이 끌린 자국, 뇌수가 비어져 나온 자국,마른 나무기둥에 점점이 튄 피, 조각조각난 초록색 실장옷의 흔적,동족을 반쯤 먹다가 인간에게 머리를 맞아 급사한 실장석의 시체, 혹은 산채로 뜯어먹히다 결국엔 절명사 한 자실장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남은 머릿부분.

구제작업을 시행 한 후 공원위생팀이 오지 않았는지 공원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한가지 불행중 다행인것은, 그 시체들 안에 자매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구급센터 여직원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자매들에게 분홍색니트로 짜여지고 소맷단과 치마에 하얀색 털이 붙은 예쁜 드레스를 선물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런 사육실장다운 옷을 입은 실장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칙칙한 공원안에 빛나는 핑크색의 옷은 금세 눈에 뜨이기 마련이었다.

“여기는 아닌가..”

히카루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도 갈곳은 적지 않았다.
역 앞,쇼핑센터의 뒤편,아파트 상가라던가 혹시 병원에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병원에 있다면 분명히 위생문제로 인해 금방 구제당해 버리고 만다-!

히카루는 곧바로 뛴다.

조심스레 기댄 자매들의 머리에서 히카루의 어깨로 전해졌던 온기가 지금은 불에 덴듯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기 전에는 그것이 소중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잃어버렸을 때에서야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나의 삶에 있어 주는 무게가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게 된다.
비통함에 가슴을 치고 애닳음에 눈물을 흘려도 떠난 것을 붙잡기는 결코 쉽지 않다.
만약 그것이 죽어버렸다면 평생 자신의 어리석음과 상실감에 빈 가슴을 치며 살게 된다.

슬프게도 히카루 역시 그런것을 파악할 만큼 현명한 인간은 아니었으리라.

달리는 발걸음을 더욱 더 빠르게 내닫는다.

자매들의 차디찬 시체를 안아올리지 않았음에 만족하며, 실낱같은 확률에 스스로를 걸어 본다. 미키에게는 반나절.이라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이미 미친 사람처럼 하루종일 꼬박 자매들을 찾고 있었다.







<<다행이었어요.
자매들이 음식물 상자를 찾게 되어서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님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몇 번이나 음식들을 안고 종종거린 자매들의 몸과 옷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약한 냄새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음식물을 옮기면 옮길수록 음식물의 고약한 냄새가 자매들의 옷에 스며들었답니다.
자매들은 울상이 되었어요.

이대로라면 착한인간님이 자신들을 발견해도 몸에서 나는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요.
자매들은 그날은 하루종일 물을 찾았답니다.추위도 관계없었어요. 착한 인간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들은 살아있어야 했는데, 이런 모습이라면 착한 인간님도 자신들을 좋아하지 않을것이 분명했어요.

자매들은 아파트의 지하를 걸어 봅니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깜깜하고 넓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손으로 더듬고 발로 디디어 가며 길을 찾습니다.
큰언니는 이곳 어딘가에 물이 흐르는 곳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바깥과 다르게 아파트의 지하는 축축하고 습기가 항상 가득했거든요.

벽을 만져 보면 살짝 물기가 묻어 나와요.
그것은 자매들의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했지만 옷을 세탁하거나 몸을 씻기에는 적은 양이었어요.

물이 있을 법한 곳을 따라 종종거리며 걸어요

걷고 걷고 또 걷고를 반복한 끝에,
결국 자매들은 작은 웅덩이를 발견했습니다!

단단한 파이프의 틈새를 따라 똑똑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흘러내린 물은 웅덩이가 되어 자매들이 세수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답니다.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가 봐요. 앗 차가워-
찬 물에 발끝이 시려요. 찌르르 하는 느낌이 발끝을 타고 머리로 전해 졌습니다.

하지만 큰언니는 망설이지 않고 옷을 벗고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뛰어 듭니다. 한쪽뿐인 다갈색 땋은 머리를 풀어, 체온을 뺏기는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문질러 비벼 내려갔습니다.

큰언니가 그러는 이유는 하나뿐이었어요. 착한 인간님을 너무 사랑했거든요!
착한 인간님이 자신을 다시 만났을 때, 예쁜 아이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워져 버림받고 싶지 않았어요. 찬 물은 큰언니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언니도 용기를 내어 물속에 몸을 담가봐요.
온몸이 짜릿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더러운 몸을 씻어 내려가는 물의 감촉이 정말로 기분 좋았어요. 얼마나 목욕을 못했던지, 물은 금세 뿌옇게 흐려졌답니다.

자매는 옷도 작디작은 두 손을 이용해 토닥토닥 세탁을 했습니다.
조물조물 토닥토닥,어릴적 엄마가 해 주었던 빨래가 기억이 났어요.
시린물에 옷을 빨아 항상 빨갛게 손 끝이 얼어있던 자매들의 엄마.
엄마가 빨아주어 깨끗해진 옷을 입으면 항상 기분이 좋았어요.

자매들은 차가워진 옷을 갈아입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어둡고 추운 길을 따라
발걸음마다 까만 물방울 점들을 찍어가며 다시 그녀들의 보금자리로 향했습니다.



자매들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어느날 이었어요.
아파트 지하에 예기치 못했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 이었어요. 시끌시끌하고 활발한 다섯명의 아이들. 아이들은 아파트 지하의 공터에서 축구공을 차고 놀고 간식을 먹었습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의 아지트였던 모양이예요.

계단식으로 된 벽에 걸터앉아 엄마가 싸주신 쥬스나 요구르트, 빵 따위를 꺼내서 수다를 떨며 놀았습니다.

큰언니는 군침만 삼킬 뿐이었어요. 가까이 가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나는 어린 친구들 이었어요. 아이들은 축구공을 빵빵 차대어 그녀들의 골판지를 위협해요! 던져대는 축구공에 골판지가 부서져 버릴것만 같았어요.

큰언니는 작은언니를 꼭 껴안았습니다.
숨을 삼키고 조용히 기다리면 괜찮을까, 싶었는데.
그녀들의 골판지 상자가 통째로 들어올려지는게 아니겠어요?

바닥을 뚫은 골판지 상자가 열리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두 자매의 모습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눈에 드러났어요. 아이들은 놀라워하며, 신기해하며 자매를 들어올렸습니다.

그저 서로를 더 꼭 껴안을 수밖에, 자매들이 할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어요.

아이들은 자매를 껴안고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요. 자신들을 향해 웃는 것인가 하고 고개를 들며 바깥을 보는 큰언니의 머리를,
아이들은 손가락을 세워 때려 대었습니다.

딱밤 한번에 세상이 돌고,
딱밤 두 번에 귀에서 피가 흘러나와요.
피가 흐르는 것을 본 아이들은 더욱더 소리높여 웃으며 팔을 잡아당깁니다.

큰언니는 자신의 팔이 잡아당겨져 팔의 관절에 피가맺혀 뜯어질 지경에도 나머지 한쪽 손으로 작은언니를 껴안습니다. 큰언니의 분홍빛 깨끗한 옷에 피가 튀어요. 짜아악, 하고 손 끝이 몸에서 떨어졌습니다.

큰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지만 아이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어요. 아이들은 이번에는 작은언니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붙잡고 뜯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불쌍한 생명은 괴롭히는것이 아니다.”

인간 어른의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

아이들은 자매들을 바닥으로 던져요.
철퍼덕. 얼굴부터 부딪힌 큰언니의 머리에 큰 혹이 생겨요. 금세 보라색으로 피멍이 들어 갔습니다.
작은언니는 두 다리가 몽땅 부러졌습니다. 다리는 아팠지만 무서움에 울 수조차 없었어요. 몸을 작게 구부리고 덜덜 떨었습니다.

“경비아저씨다!!도망쳐!!”

아이들은 다시 깔깔깔 웃어대며 먼곳으로 도망쳤습니다. 아이들에게 사육실장 두 마리의 목숨따위는 크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른 새로운 놀잇감을 또 찾으면 되는 거거든요!

경비아저씨라 불리운 인간님은 자매를 자세히 살펴 보다가, 쯧쯧 혀를 차고. 그녀들을 손에 집어든 뒤 경비아저씨의 작은 방으로 향했습니다.>>



***

병원에서도 아무것도 건진 것은 없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사육실장 두 마리의 흔적은 적어도 병원 내에서는 존재치 않았다.
구급대 여직원은 이미 여러 방면으로 병원 안에서 자매들의 행방을 찾았던 것이다.
아무도 사육실장을 보지 못하였다 말했다.
이미 병원 내에서는 분실물 방송도 여러 번 나왔다 하였다. 하지만 작은 정보조차 존재치 않았다.

히카루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유즈루의 병실에 들어섰다. 유즈루의 잘못일까 히카루의 잘못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차라리 자매들이 죽는것이 리틀벅스의 지하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은것일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병실로 들어서자, 인기척에 유즈루의 침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아..”
“죄송해요, 제가 와서 깨셨군요..”
“...괜찮은데.”

얼굴에 혈색이 많이 돌아온 듯 보였다. 머리의 반은 붕대로 칭칭 감아져 있었지만 표정을 보기에는 충분하였다.
어색한 침묵이 방 안을 감싼다.
히카루는 허공에 말을 던진다.

“저, 매니저님.”
“응?”
“만약에..이번에 회복이 잘 되시면, 식사라도 한끼 하실래요?”
“,,응?”
“아니면 회사 끝내고 야근 하루 쉬시고, 맥주나 마시러 가시던가요. 치킨에 맥주가 그렇게 맛있는데..드셔보셨어요?”
“,,응?”
“그것도 별로시면 다음달에 리틀벅스에서 크게 회식이 있는데. 오시겠어요?리틀벅스는 회식 분위기 되게 좋아요...사람들도 다 좋고. 험한일을 같이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인지,조금씩 다들 감싸주게 되더라구요.”
“..밥?”
“언제 같이 먹어요. 밥. 물론 돈은 매니저님이 훨씬 더 많이 버니까,매니저님이 사주세요.”

유즈루는 생뚱맞은 표정으로 히카루를 바라보았다.
몸 여기저기 링겔을 매단 히카루의 어깨가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며칠이나 식사를 못했기에 살도 빠졌겠지만 지금 유즈루의 모습은 꼭 쥐면 바스러져 날아가 버릴듯한 드라이플라워처럼 보였다.

“왜 갑자기..밥?”
“그냥 먹고 싶어서요. 매니저님이랑은 몇 년이나 일을 했는데도 한번도 같이 식사한 적 없으니까요. 상사로써 한번은 사주세요. 그리고 참석도 하시구요.”

유즈루는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갸웃 한다.

“잊어먹지 마세요. 약속한 거예요.저랑 친하게 지내요,매니저님.”

히카루는 병실의 문을 열었다. 이제 유즈루에게서 보이는 무서운 잔인함의 무게는 더 이상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나약하고 작고 가련한 사람일 뿐이었다.

또 다시 병실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히카루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려,어떻게든 말을 다시 건낸다.

“매니저님 집에 있는 실장석 다 옮겼는데..걱정은 안하셔도 되구요.”
“응,.”
“그리고 저..뭐, 여기 간호사실에서 가져오라는 물품이 많아서 생활하시던 방을 좀 뒤져보았어요,어쩔 수 없는 거니까 저한테 너무 뭐라고 하진 마세요.
그런데 나 매니저님 어릴때 사진 봤는데?뭐..그리고 서류들 조금이랑요.“


바스락,

유즈루는 거의 몸의 반을 창문곁에 기대어 선 히카루를 향해 있었다.

묘한 표정이었다. 놀람,약간의 분노. 그리고 그 뒤편으로 비치는 일말의 ‘안도감’이라고 불려도 좋을 법한 허탈함이 유즈루의 얼굴에 떠올랐다.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저는 그냥..그저..그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혼자서 너무..모두 다 이겨내려고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풀리는 것도 있고...가족분께 말해서 도움이 되는것도 있지 않겠어요?”
“어머니 아름다우시더라구요. 그런데 매니저님이랑은 안닮았던데..아빠랑 매니저님 많이 닮으셨나요?”
“필요하시다면 저한테 기대셔도 괜찮으시구요.제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유즈루의 입에서 허, 하는 빈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카루는 유즈루를 바라본다. 어딘지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제껏 유즈루의 표정에서 호기심과 즐거움 외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면 지금은 그의 짧은 웃음속에 이제껏 히카루가 경험한 적 없는 풍부하고 끝을 모를 거대한 감정이,

히카루의 마음을 꿰뚫고 가슴속에 파고 들었다.
순간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 바뀔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히카루는 소름이 끼쳤다.

저 표정은 실장석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학대하며 호기심을 풀어가는 즐거운 미소도 아니었고 이야기를 할때 항상 입가를 떠나지 않는 의미없는 웃음도 아니었다.

마치 작은 악마가 유즈루의 가슴속에서 튀어나온 듯 해 보였다. 그 악마는 그림자를 이루어 작게 미소짓는 유즈루의 뒤편을 장식하고 서 있다.


“꿈을 꾸었어.”
“..네?”
“옛날 꿈을 꾸었어.”
“아....네.”
“너 내 이야기 들어 볼래?”




<<경비아저씨라 불린 남자인간님은, 무뚝뚝하였지만 자매들에게 매우 친절했어요.

경비 아저씨는 자매들을 위하여 작고 튼튼한 골판지 상자를 구해왔어요.
안에 하얗고 따스한 타올로 온기를 더해, 자매들의 잠자리에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었답니다.

아저씨는 상처에 인간님들의 약을 발라 주고 하얀색 천으로 상처를 덮어 주었답니다. 피와 오물로 더럽혀진 옷을 손수 빨아서 자매들에게 건내어 주었어요.

상처가 낫고 깨끗해진 자매들은 이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자매는 다시한번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아저씨는 어험, 하며 작게 헛기침하였지만 아저씨 역시 만족스런 기색을 감출 수 없었어요.

자매들이 아저씨의 방 안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자매는 아저씨의 방 안에서 바퀴벌레를 잡고,잡고 또 잡았습니다.
바퀴벌레를 잡아 올 때마다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쳐 주셨습니다.
인간님들은 자매들이 바퀴벌레를 잡는것을 참으로 좋아했어요,.
자매가 그리워하던 착한 인간님도 바퀴벌레를 무서워했지요. 알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인간님들이 왜 작고 맛있는 바퀴벌레를 무서워 하는것일까요?


자매들은 아저씨의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지냈답니다. 아저씨는 식사때마다 항상 자매들의 식사를 작은 접시에 듬뿍 옮겨담아 주었어요.자매들이 다 먹을수도 없을만큼 많은 양을요.

며칠에 한번씩 따뜻한 물을 대야에 옮겨담아 와 자매들을 꼼꼼하게 씻어 주었기도 하셨답니다.

자매들이 옷을 빨았을때를 대비해 손수건을 두장이나 주었는데, 그것은 자매들이 겨울을 나기에 무척 좋았어요.

자매는 손수건 옷을 입지 않을 때는 그것을 덮고 잠을 청했는데, 그럴때면 잠든 자매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아저씨의 손길을 느꼈어요. 자매는 매일매일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어느날, 아저씨는 물어 보았어요.

“너희 나와 같이 집으로 갈래?”

자매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도리질을 하였어요. 자매들이 그리던 사람은 오직 착한 인간님 한사람 뿐이었거든요.

“너희들 이미 주인이 있는거냐? 어디서 길러졌던 아이들이지?”

자매들은 아저씨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어요.아저씨도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띄며 자매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아저씨와의 나날들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아저씨는 ‘주인이 올때까지’라고 말해 주시고 자매들을 예전과 똑같이,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어요. 자매들은 그런 아저씨에게 감사하며 주변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들을 잡아 주었어요.

자매는 여러 인간님과 살면서 이것저것 쓸모있는 재주들을 배웠답니다.
자매들은 이제 물티슈를 뽑아내어 더러워진 책상을 닦을 수도 있어요!
작은 컵을 이용해 화분에 물을 줄 수도 있답니다. 요전번에는 다른 인간님의 집에 방문해 커다란 바퀴벌레 가족을 잡아 다른 인간님과 아저씨에게 크게 칭찬도 들었어요.

그날 아저씨는 계란을 몇 알이나 자매를 위해 삶아 주었어요.자매들은 계란을 세상에서 제일좋아했답니다.


시간이 흐르고 차가운 바람이 멎어 갑니다.
주변에 따뜻한 햇살의 향기가 느껴져요.
푸릇푸릇한 여린 잔디의 싹도 단단한 땅을 뚫고 얼굴을 내밀어 조금 더 온화해진 바람을 느낍니다. 주변에서 마치 합창을 하는 것 같았어요. 어디를 보든 초록색이 한가득, 분홍색 흰색의 작은 꽃망울들이 한가득이 아니겠어요?


봄이
왔습니다.

하지만 자매의 마음은 여전히 한구석의 겨울이 지나가지 않았어요.

자매를 사랑해주셨던, 자매가 사랑하던 착한 인간님은 도대체 어디 계실까요?
자매를 찾으러 와주시긴 할까요?
여기 있는것을 알고 계실까요?
자매는 처음으로, 소리높여 먼곳을 향해 오로롱,하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울면 착한 인간님이 듣고 달려와 주시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예요.>>




***

히카루는 그뒤 몇주간 이나 유즈루를 정성스레 간호하고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벌써 한달이다. 큰 수술의 경과는 이미 다 보았고, 남은것은 골절상 뿐이었다.

유즈루에게 여러 가지 말을 건낸다.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과 같은 태도였지만 히카루로써는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심이 있으면 언젠가 통하리라, 라는 생각으로 히카루는 유즈루를 대했다.
어찌되었든 유즈루가 다 낫게 된다면 히카루는 적어도 밥 한번은 그와 함께 할 생각이었다.

작은 책임감이 히카루의 마음 한구석을 채웠다.
마음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감정’은 그것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이 상처입고 불쌍한 사람을 조금이나마 우리들이 사는 세계에 편입시켜 주고 싶었다. 천성적으로 마음이 선한 히카루는 그의 말을 듣고서 그를 모른척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히카루의 마음 한구석에서 자매들의 존재가 쓸쓸히 지워져 갔다.
히카루는 유즈루를 간호하는 것을 택한 대신, 자매들의 생존을 마음속에서 버렸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시리고 추웠다,아마 도망친 그 직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꺼라고 생각하며 또다른 죄책감을 마음속에서 지워가려고 노력하였다.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가시고 따사로운 봄의 볕이 느껴졌다.

유즈루의 빈 병실 안에도 병실 밖으로 보이는 병원의 잔디밭에도 푸릇한 봄이 막 찾아오고 있었다. 병실 안에서 코로 스치는 냄새가 이전과 다르다. 부드러운 꽃냄새가 어디선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이것봐, 히카루.이제 걸을 수 있다? 아하하..”

유즈루는 아주 조금 더 밝아졌다. 목발을 짚고 방 안 이곳 저곳을 걸어다니고 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실장석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니지클럽도 리틀벅스도 실무자들에게 일을 맡긴 지 오래였다. 유즈루가 손을 떼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조금은 분해 했지만 어느정도 그 스스로가 실장석들에게서 마음을 뗀 듯도 해보였다.

“다행이네요..아프진 않으세요?”

“당연히 아프지. 하지만 이대로 병실에 계속 있을 순 없잖아. 이미 설날 세일도 놓친지 오래인데..손이 근질근질 하다. 어서 빨리 자리로 돌아가서 일을 좀 하고 싶은데 말이야.”

“아이고..좀 더 쉬도록 하세요. 매니저님이 없어도 일은 정말 잘 돌아가고 있다구요-”

“알아.그런데 히카루도 좀 쉬던가, 아니면 집에 가서 씻고 오던가 하지 그래?지금 꼴이 엉망이야. 나보다 더 엉망인것 같은데?”


히카루는 새삼스레 거울을 바라본다.

며칠,아니 몇주 간이나 제대로 목욕이든 샤워든 하지 못해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겨울 속에 서 있다. 피부는 거칠어져 보였다.머리도 자르러 가지 못한지 오래라 구렛나룻과 뒷머리가 삐죽이 길어져 보기 싫었다.

“하아..아무래도 가긴 좀 가야겠네요. 이제 거동은 괜찮으시지요?”

“응.완전 괜찮지. 내 걱정은 말고 다녀오도록 해. 정 뭔가 힘들면 미키를 부르면 되니까.”

“리틀벅스 매니저님은 그냥 놔두시고- 간호사나 불러서 필요한것을 요청하세요.”

“하하하하.”


히카루는 집으로 향한다. 올때는 택시를 타고 왔지만,집에서 병원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병원에서 잘 걷지 못해 다리의 근육이 빠진듯도 해 보인다. 리틀벅스에 들어간 뒤로는 히카루의 자랑인 근육도 보기 흉하게 쪼그라들어 버린지 오래였다.


히카루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요전번에 자매들을 찾았던 공원이 있다.

실장석이란 불가사의하기 그지없다. 겨울내내 한 마리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공원에는 히카루의 모습을 보고 달려와 콘페이토를 구걸하는 자실장이 한두마리 눈에 뜨였다.
히카루는 자실장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핀다. 자매와 닮은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맘 한구석이 저린다. 결국 그 아이들은 내가 죽인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사라지고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아주 흔한 교훈은 누구에게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되돌릴 수 없는 일은 되돌릴 수 없을 뿐이었다.



따사로운 초봄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산책하듯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기간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고지서나 우편물들도 밀릴지 오래일 것이다. 히카루는 각종 고지서의 단골 연체자였다.

히카루는 경비 초소의 문을 똑똑,두들겼다.
마음씨 좋은 경비 아저씨는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는 히카루를 위해 분실의 위험이 없도록 항상 우편물들을 모아 놓으셨다.
찾으러 갈때마다 약간의 과자나 음료수를 들고 경비 초소를 방문했다. 아저씨와 히카루 사이에는 무언의 신뢰감이 존재한다.


“계세요?”
“아..예, 누구세요?”
“310호의 히카루입니다만...”
“아.네 제가 나갈께요-잠시만요. 우편물 때문에 오셨지요?”


문을 사이에 두고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안에서 뭔가 하는 듯 한참을 부스럭 부스럭,투닥투닥거리다가 아저씨는 사람좋은 미소를 하며 초소 밖으로 나온다.

“오래걸렸지요? 하도 온 우편물들이 많아서...챙기느라 좀 늦었어요. 아이고 또 뭐 이런걸 사왔대...고마워요. 음료수.잘마실께요...”
“네.항상 감사합니다...어?아저씨 실장석 키우세요?”

“아이고..참..이런거 들키면 안되는데, 누가 키웠던것 같은데 버려진것 같기도 하고 집을 잃어버린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이런거 다른데 말하고 그러면 안돼..알겠지요?”


순간이 얼어버린 듯 히카루를 스쳐 지나간다.


텟찌 하며 작게 얼굴을 내민 자실장의 땋은 머리가 흔들렸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 그녀의 뒤로 테에-라며 동생 자실장이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는 듯 땋은 머리 자실장의 옷을 붙잡고 뒤로 늘어졌다.


셋의 눈은 한순간 마주쳤다.


“테에테에..테찌이?”
“테테테테!테찌!테찌!!”

“너..너희들..??”
“테찌이이!!테에에에에엥..테에에에에엥..”
“테텟!!치에에에에엥..치에에에에엥..”


히카루가 그토록 찾아 헤매이던 자실장 두 마리는, 바로 히카루 아파트의 경비실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실장들은 히카루의 발에 매달리며.히카루의 옷자락을 붙잡고 무언가를 외치며 눈물을 흘려댔다.


“아, 히카루씨 사육실장들이었구나..어쩐지 녀석들이 착하더니만, 수의사는 다르긴 다르네요.
집주인에게는 비밀로 해줄게. 사실 여기에 애완견이나 사육실장 키우는 사람 많아요.
걱정마세요. 나만 입다물면 되니까.“


히카루는 자매들을 얼른 껴안았다. 자매들은 테치거리며 히카루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무언가를 열심히 외쳐대고 있었다.
히카루는 되는대로 적당한 링갈앱을 휴대폰에서 실행시켰다.
녀석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한데,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인간님이 계란만큼 좋아요.
나는 인간님이 새옷만큼 좋아요.
나는 인간님이 초밥만큼 좋아요.
나는 인간님이 이불만큼 좋아요.
우리들을 데리고 가 주시겠어요?
우리들과 함께 살아주시면 안되나요?
우리는 매일매일 주인님 생각만 했어요.
너무 좋아해요.
너무 사랑해요.
보고 싶었어요.
착한 아이가 될 테니 두고 가지 말아 주세요.
사랑해요,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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