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초록이 (청십자실장)

 

초록아, 이제 그만하고 방에서 나와. 밥 먹어야지.

테에...생각없는 테치. 와타치는 됐으니 닝겐상 먼저 밥 드시는 테치.

초록이를 향해 건네지는 철수의 목소리에는 옅은 한숨이 어려있었다. 
초록이가 밥을 먹지 않은지 벌써 5일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록이라고 생각 없이 이름이나 붙여줬으면서, 사이는 정말 좋았었구나...

철수의 동생, 철우는 정이 많은 녀석이었다. 퇴근 길에 우연히 눈에 띈 엄지 실장 한 마리조차 그냥 넘기지 못할 만큼.
폭우가 쏟아지던 날 흠뻑 젖은 채로 작은 엄지실장 한 마리를 껴안고 왔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나도 나름 초록이를 신경써줬다고 생각했는데, 초록이에게는 주인은 철우 한 명인 뿐인가보구나.

그렇지만 초록아...철우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고.




철우가 사고로 죽은지는 벌써 일주일 째였다. 
사인은 교통사고. 야근을 끝내고 새벽에 졸면서 횡단보도를 걷던 철우를 운전자가 미처 보지 못하고 치어버린 사고였다.
철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는 자신조차 어안이 벙벙했으니까.
형제라고 해도 보통은 데면데면한 사이다. 그렇지만 혈육의 죽음에는 눈물이 나왔다. 
출근하기 싫다며 잠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던 녀석의 얼굴에 베개를 던졌던게 바로 어제 일인데.

빈소에서 상주 노릇을 하던 철수가 이틀밤을 새고 돌아온 푸석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을 때,
초록이가 테치-,테치-, 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주인님은 언제 돌아오는 테치? 요즘은 통 보이지 않으시는 테치이...또 출장인 테츄카?
라고 말했을 때 저도 모르게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철우는 이미 죽었는데.



철수의 심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평소에는 철수에게 잘 다가오지도 않던 초록이는 콘페이토를 얻어낼 때나 보여주던
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철수에게 말을 걸었다.
닝겐상 너무 심각한테치. 와타치가 뭔가 잘못한 테치? 
주인님이 언제나 바쁜건 알고 있는 테츄우...그래도 언제 돌아오시는지 소식정도는 알고 싶은 테치. 
닝겐상은 알고 계시지 않은 테치? 주인님은 언제 돌아오는 테치?


...와..

테츄우?

...돌아와.

닝겐상? 잘 안 들리는 테치.

철우 죽었어. 이제 안 돌아와.

테텟...닝겐상 농담도 심한 테치. 평소에 많이 싸우더라도 그런 말은 하는게 아닌 테치.

네 주인.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고.

....


초록이가 철우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이틀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그 사실을 왜곡한다고 하던가. 실장석에게는 흔히 행복회로라고 불리는 녀석이다.
이틀 정도는 오히려 평소보다 식욕도 왕성해서 실장석이란 녀석은 원래 은혜도 모르는 녀석이구나. 하고 저도 모르게 체념했을 정도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철우가 없는 빈 방을 쳐다보던 초록이는 어느 순간 밥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그 때 깨달았다. 

아, 드디어 초록이가 철우가 죽은 걸 알았구나.
철우가, 정말 죽었구나.


자신조차 철우의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초록이에게는 같은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약간의 동질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 초록이의 안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 하나. 그 구멍의 이름은 철우였다.








초록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까지의 엄지 시절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있었다.
상냥한 마마는 언제부터인가 돌아오지 않았다. 장녀 오네차는 마마를 찾겠다며 나가버렸다.
병약한 차녀 오네차는 어느 날 아침 차갑게 식어있었다. 
삼녀 오네차는 갑자기 사라져 공원 한 가운데서 찢겨진 고깃덩어리로 발견됐다.
우지챠는 며칠 밥을 먹지 못하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늘 북적이던 골판지 상자가 텅 비어버리기 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행복은 언제나 포만감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그것은 초록이, 아니 초록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의 작은 엄지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엄지 실장이 골판지 집을 나서기로 마음 먹은건 차녀 오네차가 죽어버린 후 딱 삼 일이 지난 이후였다.
마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장녀 오네차도, 차녀 오네차도, 와타시의 자매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하늘이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들이 마치 엄지 실장의 마음을 대변해 주듯이 토독, 토독하며 적막이 가득한 골판지 집 귀퉁이를 쓸어내렸다. 친실장이 돌보지 않은 골판지집은 어느새 군데군데 바람과 빗물이 새어, 사실상 바깥에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밖에라도 나가보는 거다. 엄지 실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철우, 그러니까 지금의 주인님을 만난건 굉장한 우연에 가까웠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는 자실장은 물론 성체실장에게도 꽤나 큰 체력소모를 요구한다. 
인간에게도 세찬 빗속을 걸어가는 건 힘든 일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며칠을 굶고 굶어 체력조차 떨어진 엄지실장이라면 어떨까.


실장화에 찬 물이 차박차박 소리를 내며 피부를 때리고, 바닥에 튕겨져가 작은 물궤적을 그렸다. 
머리카락은 이미 물에 젖은 걸레꼴이 되어 옷에 달라붙은 지 오래였다. 
보온을 해야 할 옷은 빗물에 푹 절여져 오히려 체온을 뺏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갈 곳은 없었다. 그저 걸어갈 뿐. 엄지 실장은 닝겐도, 실장석도 없는 공원을 걷고 또 걸었다.
그저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걷고 걸으면 도착할 장소라도 있는 것 마냥. 마마와 함께 했던 산책로도, 
자매들과 몰래 빠져나와서 놀았던 장소도, 마마가 와타치타치를 낳았다고 들은 곳들도. 빗물과 함께 차박차박 걸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빨갛고 네모난 상자가 엄지 실장에 눈에 띄었다.
저 곳은 예전에 마마가 아마아마가 나온다고 한 상자였다. 
닝겐상들은 저기에 아마아마를 저장해두고 동그라미와 아마아마를 교환해 간다고 들었다.
곧 죽을 실생이라면, 최소한 마지막엔 아마아마를 먹고 싶었다. 엄지 실장은 홀린듯 비척거리며 빨갛고 네모난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공원에 설치된 자판기에는 빛바랜 차광막이 드리워져있었다. 옆에는 관리가 되다만 나무 벤치 하나.
방치되다시피한 자판기에는 부주의한 사람들이 던져놓고 간 음료캔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동그랗고 기다란 아마아마. 엄지실장은 두건에 맺힌 빗물을 토독하고 털어내고 음료캔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그만 손을 들어 음료캔을 들어보려 해도, 어차피 엄지실장. 캔을 기울일 힘은 커녕 끌어당길 힘조차 모자랐다.
엄지실장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천장을 올려다봤다. 차광막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마치 엄지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마마도, 오네챠들도 모두 갔단다. 이제 엄지 네 차례야. 엄지실장은 웃었다. 웃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왁, 씨발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소리에 엄지실장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엄지실장의 앞에는, 엄지실장처럼 빗속을 지나왔는지 흠뻑 물에 젖는 커다란 닝겐상이 서 있었다.
마마가 닝겐상은 위험하다고 했는 테치. 그렇지만 이제 걸어갈 힘도, 도망갈 힘도 없는 테치. 체념한 엄지실장의 앞에
의아한 닝겐상의 시선이 다다랐다. 

뭐야, 이 빗속에도 참피가 다 다니네? 얜 뭐야? 되게 쪼그맣네...앞주머니에도 들어가겠다.

죽이건 살리건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와타치는 여기서 끝이니까. 포기하다 못해 흙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린 엄지 실장의 목덜미를
닝겐상이 휙 들어올려 시선을 마주친다. 엄지실장은 눈을 감을 힘도 없이 닝겐상과 시선을 마주한다.
그 시선에 이상하게 장난기가 어려있는 것을. 엄지실장은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뭐라도 좀 마실까. 

닝겐상은 주머니에서 동그랗고 반짝반짝한 것을 꺼내어 네모난 상자안에 넣었다. 
뭔가를 누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쾅. 하는 작은 벼락소리와 함께
닝겐상이 네모난 상자안에서 길고 동그란것을 꺼냈다. 저것이 닝겐상들의 아마아마.
엄지 실장의 시선은 자연스레 갈망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와타치도 저 아마아마를 먹고 싶었는데.
엄지 실장의 시선을 눈치챘을까. 닝겐상은 길고 동그란것을 바라보다 엄지실장에게 내밀었다.

아..어, 너도 마실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엄지실장은 테에...? 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와타치에게 아마아마를 주는 테치?

엄지실장을 바라보던 닝겐상은 엄지실장의 몸을 들어 동그랗고 긴 아마아마를 엄지실장에게 안겨주었다. 
순간, 차가운 비와 다른 따뜻함이 엄지의 몸에 확 퍼진다. 
이게 뭐인 테치? 따뜻한 테치이...뭔가 안심 되는 테치.
엄지의 풀어진 표정을 봤는지, 닝겐상은 아마아마를 뺏어 엄지의 입에 갖다댄다.
꿀꺽하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아마아마. 그것은 엄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극상의 단맛이었다.
한참을 아마아마에 취해 음료캔을 반쯤 비운 엄지가 문득 시선을 들어 닝겐과 얼굴을 마주했다.

왜 와타치에게 잘 해주는 테츄카? 엄지실장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한 것을 보자
닝겐상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엄지는 아직도 그 웃음을, 빗속의 그 시간을 잊지 못했다. 



너, 우리 집 안 올래?









상냥한 주인님, 와타치를 구해주신 주인님.
이제 초록이는 주인님께 필요없게 된 테치?
초록이는 언제나 착한 아이로 있었던 테츄. 이제 떼쓰지 않는 테치. 같이 놀아주지 않아도 되는 테치.
초록이에게 있어 철우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런 세계를 한 순간에 잃어버린 초록이에게, 
철수가 말하는 잔혹한 현실 따위는 초록이에게 닿지 않고 있었다. 사실은 초록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예전의 마마처럼, 장녀 오네차처럼, 차녀 오네차처럼....삼녀 오네차처럼....우지챠처럼...
주인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주인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수 많은 친지의 죽음을 본 엄지 실장으로서는 피부에 와닿게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이는 믿고 싶었다. 차라리 와타시가 나쁜 아이라서 주인님이 오지 않는 거라고.
그렇다면 주인님은 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있는 셈이니까. 초록이는 생각했다.

별님, 달님.
와타치의 소원을 들어주는 테치.
이 공은 와타치가 제일 아끼는 공인 테치. 보물을 받고 주인님을 돌려주는 테치.
와타치의 푸드도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먹는 테치. 혹시 와타치의 머리카락을 원한다면 눈물이 찔끔 나더라도 참을 수 있는 테치.
아야아야한 일을 하더라도 참을 수 있는 테치. 그러니까 제발, 제발 주인님을 돌려주는 테챠아!!

초록이는 지금은 주인이 사라진 텅 빈 방안에서 소리없이 절규했다.




철수가 초록이에게 갖는 감정은 가벼운 책임감 같은 것이었다. 애완동물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실장석.
그것도 죽은 동생의 유품이었다.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죽지 않게 관리는 해주고 있지만, 본인보다는 마음이 덜 가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는 애정. 그 정도가 철수가 초록이에게 느끼는 마음이었다.

초록이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한창 먹어야 할 성장기의 엄지 실장이었다. 거기에 본디 식탐도 많은 녀석이었다.
어쩌다 철우가 출장을 나가게 되어 자신이 먹이를 챙겨줘야 했을 때, 
한 번 먹이를 잊은 적이 있을 땐 대성통곡을 하며 온 집안을 시끄럽게 했던 초록이다.
예전 들실장 때 심하게 굶은 탓인지 먹이에 대해서는 다른 실장석보다 큰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이나 굶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 번을 억지로 먹여볼까 했는데도 금새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는 초록이 덕에 이제 될 대로 되라며, 방치한게 5일째였다. 
먹는 녀석이 의욕이 있어야 할텐데. 입을 뜯고 억지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초록이가 좋아하는 콘페이토를 흔드는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콘페이토에 ㅋ만 들어도 달려와서 다리를 토닥토닥 두드렸을 텐데.
오늘도 초록이에게 밥 먹이기를 실패한 철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초록이에게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도 일이 있고, 일상생활이 있는데. 자신의 애완동물도 아닌 녀석에게 계속해서 휴가를 쓸 수도 없으니까.





초록아, 나 나간다. 오늘은 제발 밥 좀 먹고. 

다녀오시는 테치.

초록이는 앉아있을 기운도 없는지 벽에 기대어 앉은 채 고개만 까딱여 기운없는 인사소리를 냈다. 
차라리 내가 보지 않을 때 뭐라도 훔쳐먹었으면 좋겠는데. 
출근철에 몸을 끼워넣은 철수는 이윽고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초록이의 기억을 흘려냈다.


퇴근길, 왠지 기운이 없어 평소와는 다른 루트로 퇴근길을 정했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북적거리는 상점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상념도 날아가 버리길 바라며 
걷던 철수의 눈에 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 해피 실장병원


철수는 홀린듯 간판에 그려진 웃고있는 실장석 그림을 보더니, 결심한 듯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시간은 꽤 늦은 저녁이라, 건물 안에 있는 건 접수처의 여성과 자신 혼자. 
그것도 사람이 없어 조금 졸던 참인지 잠기운이 어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성의 얼굴에 철수는 어설픈 미소를 건넸다.

아....어서오세요. 실장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 저 제가 여기 처음이라.

어머, 그런데 실장석은 데려오지 않으신건가요?

아...그게 사실 사정이 있어서.


머뭇거리던 철수는 이윽고 철우와 초록이의 이야기를 접수처의 여성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기에 진솔하게 이야기가 나오는지 몰랐다.
네네,하며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철수의 이야기를 듣던 여성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철수에게 이야기했다.

주인에 대한 애정이 깊은 개체네요. 실장석 중에서는 드문데 아예 없지는 않아요.

아. 그럼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나요? 역시 억지로 먹여야하나요?

원래 이런건 원장님이 잘 아시는데. 지금 원장님도 퇴근하셔셔요.
뭔가 먹이긴 해야되는데 억지로 먹이는 건 좋지 않아요. 억지로 먹이다가 음식물이 목구멍을 막아 질식하는 경우도 있어서.
왜, 사람도 못 먹으면 링거액 같은걸 달잖아요? 실장도 같아요. 밥을 못 먹으면 영양제라도 주는게 좋죠.


여성은 철수에게 이런저런 상품 설명을 늘어놓았다. 철수는 대강 여성이 이게 괜찮아요. 라고 권해준 것을 적당히 골라 구입했다.
여성은 감수성이 풍부한지, 생판 남일 초록이의 걱정을 하며, 혹 식욕이 생긴다면 이것도 먹여보세요 라며. 샘플용 작은 콘페이토도 한 봉지 넣어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시간 되시면 꼭 초록이도 데려오시구요!  

초록색 봉투에 그려진 실장석의 얼굴이 좌우로 흔들린다. 사람이 빠진 거리를 걷는 철수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영양제라, 철우 녀석이라면 초록이가 한끼만 굶어도 당장에 초록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갈 녀석이었지.
둘은 이상하게 웃기는 부분에서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 
가끔은 둘이 실장석&인간 콤비의 개그 프로그램이 있다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그렇게 둘의 시시덕거리는 장난에 웃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옛날엔 정말 그랬었는데.



걸음에 따라 켜지는 센서등에 깊은 침묵이 철수의 등을 떠밀었다.
이상하게 집으로 걸음을 옮길 수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뚜벅,뚜벅하는 발걸음 소리가 차디찬 돌바닥에 울려퍼지고. 
그에 비례해 철수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아냐, 설마. 오늘 아침도 기운이 없긴 했지만 아직까진 괜찮겠지.
삐빅 하는 도어락의 오픈 소리에, 철수는 문을 열고 싶은 마음과 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같이 잡아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철컥. 삐비빅. 


집 안은 적막했다. 싱크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와, 거실에 걸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철수의 신경을 긁어냈다.
마치 살을 파내고 뼈를 긁어내는 듯한 기분나쁜 소음이었다. 철수는 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구두만 대충 벗어낸 뒤 
거실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아침에 초록이가 기대 있었던게 저쪽 쯔음 이었는데. 자리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또 철우 방에 가서 누워있을 수도 있으니까. 철수는 짐짓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려 애쓰며 철우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록아? 


주인 없는 방의 불은 꺼져있었다. 초록이도 어두운 방안에서 웅크려 앉아있곤 했기에, 나갈 때도 딱히 불은 켜두지 않은 채였다.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자 침대위에 웅크려 누운 초록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언가를 껴안은듯 뒤돌아 누운 초록이의 모습.
괜히 걱정한 걸까. 어쨌거나 영양제는 놔줘야 하니까. 조심스레 초록이의 어깨를 건드리던 철수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초록이를 뒤집어 눕혔다. 떨리는 손으로 초록이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댄 철수는 이윽고 어깨를 떨어트리며 무릎을 꿇었다.
손에 쥔 실장 병원의 봉투가 아무렇게나 나뒹굴며 노랑빛 영양제가 바닥에 흩어졌다.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은 초록이의 얼굴은, 웃고 있는 자실장 그림처럼 너무나 해맑았다.
안고 있는 사진의 철우의 웃는 얼굴을 닮은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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