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가 있는 장소 (Huii)

 


세상은 기본적으로 부조리와 불공평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공평한 것은 탄생과 죽음 뿐이랬던가. 그것은 비단 인간 뿐만 아니라 실장석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인간마저도 혀를 내두를 악의와 허영과 욕망으로 무장한 불합리의 끝판왕격 존재들이니 세상의 순리를 따라 죽어 마땅하다 하는 이들도 있지만, 때로는 정말 본성까지 거슬러가며 열심히 살아남고 견뎌왔던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비참하고도 초라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원사육실장 미도리도 그런 케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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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의 친실장 미코는 세레브, 그 중에서도 최고급 세레브만을 출산하는 출산석이었다. 9대에 이어져내려오는 최고급 출산석의 혈통을 지닌 미코는 대를 거슬러 살아남아온 것도 모자라 9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총 9번의 출산을 허락받고 총 47마리의 자를 무사히 상품출하하는 것까지 마쳤을 정도로 유능한 고참 출산석. 그런 출산석의 밑에서 태어난 만큼 미도리는 영민했다. 영민하기로는 자신과 함께 태어난 4마리의 자매들은 물론 그 전에 태어났던 언니들을 포함해도, 아니 그 브리더가 지금껏 출품시켰던 세레브 양충들을 포함해서라도 영민하기가 하늘을 찔렀고, 그 탓인지 날 때부터 행복회로는 탁 틀어막힌 채로 영영 기동하지 않는 신세였다. 

행복회로가 봉인되자마자 자동적으로 풀가동한 건 어떻게 하면 생존에 유리하게 살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이성과 지성. 그 두 개의 쌍창을 무기로 삼아 미도리는 막 태어난 시점부터 저의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마마, 낳아주셔서 감사한테치. 처음 뵙겠습니다, 브리더상. 안녕하신테치? 마마가 와타시타치를 낳는 걸 허락해주셔서 감사한테치.」

세레브 출산석 전용 출산실에나 자리하는 핑크빛의 대접 안에 가득 담긴 라벤더수 안에서 막 탄생의 기쁨을 가득 담아 '텟테레' 하는 본능의 노래를 부르는 자실장들. 그러나 남들이 대접 위의 얕게 깔린 라벤더 향기를 가득 느끼며 열심히 팔을 파닥거리고 놀고 웃는 사이, 홀로 노래하지 않고 바로 저를 낳으며 숨을 몰아쉬는 어미와 그런 어미를 옆에서 빤히 지켜보는 브리더에게 인사를 날리는 자실장 한 마리. 

태어나서부터 감사인사를 하며 예의를 차리는 자실장이라? 여태 많은 출하용 자실장을 출산한 전문 출산석 미코의 눈에도, 그런 미코보다도 더 많은 세레브 출산석과 세레브용으로 팔려나갈 자실장들을 봐온 브리더의 눈에도 그런 자실장은 매우 낯선 존재였다. 비단 실장석 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종, 심지어 지적으로는 가장 우월하다 평가받는 인간조차도 날 때부터 자신을 낳아준 자들에 대해, 자신의 탄생을 허락해준 자를 생각하며 대뜸 감사인사부터 날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실장석을 포함한 기본적인 동물들은 태어나는건 뭐 태어나는거지 하며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받아넘기고, 인간마저도 실제로는 그렇다. 

인간마저도 학습의 효과로 겨우 머릿속에 박아넣는 '탄생에 대한 감사' 를 날 때부터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실장이란, 이미 이건 생명의 영역을 초월한 무언가가 아닌가 하고 연구자료로도 쓸 법 하겠으나 브리더는 브리더, 그런 복잡한 것까지 생각이 닿지는 않는다. 그냥 그 브리더는 이렇게 생각했다. 

'야, 이놈은 천만 마리 중 한 마리에게서 나올까말까한 전설의 물건이야. 미코, 진짜 수고했다. 훈련만 잘 견디고 넘어간다면 이놈은 평소 팔던 놈들보다 5배는 더 되는 가격에 팔아치울 수 있겠어'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종 자체가 날 때부터 극악한 수준의 이기심과 허영으로 똘똘 뭉쳐 빚어진 영혼을 지닌데다가 특유의 멍청함과 재멋대로라는 습성까지 합쳐져 훈련 하나는 겁나 어려운 것이 실장석이다. 제아무리 그놈들보다 더 똑똑한 세레브라고 해도 왠만해선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라도 다른 것들보다 더 우위에 놓는 버릇을 못 견디기에 자제심 훈련에서 일찌감치 탈락 먹고 후보생 시절에서 나가리 행인 놈들이나, 겨우겨우 통과하고 나서도 더러운 본성을 못 버려 실장생 아웃을 당하는 녀석들은 썩어넘친다. 

하지만 이 자실장이라면 다르다. 날 때부터 외부 존재와 저의 우열관계를 빠르게 파악하고 굽히기부터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녀석에게 적절한 훈련까지 더해지거든, 최소한 자기 잘못으로 주인댁에서 나가리 행을 당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터였다. 15년째 브리더 생활을 해온 노련한 남자의 감은 이 녀석이 그 누구보다도 빨리 훈련을 통과해 가장 높은 값에 팔려나갈 놈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꾸물거릴 필요 없지. 

"자, 훈련 시작이다. 넌 더 영민한 녀석이니 빨리 진행해도 되겠지." 

그렇게 영민한 자실장, 아니 '미도리' 는 막 태어나서 감사인사를 하자마자 브리더의 손에 들려져 어미와 해어졌다. 대접 위에 드러누운 어미 옆에 들러붙어서 애교를 떨거나 어미의 젖가슴을 찾아 꼬물꼬물 움직이는 자매들의 곁에 내심 있고 싶었지만, 이성이 지나치게 발달한 미도리의 본능은 브리더의 말에 반항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렇기에, 미도리는 브리더가 좀 냉혹한 처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자실장들처럼 울고불고 하거나 부모가 보고싶다 때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브리더의 손바닥 위에 조용히 쭈그려앉고 다음 상황을 기다릴 뿐이었다. 눈물이 조금 흘러나오긴 했지만, 브리더가 볼까봐 미도리는 그냥 그걸 훔쳐버렸다. 

저 자는 과연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장 좋고 똑똑한 자이니 반드시 살아남았으면……하고 간절히 기원하는 친실장 미코의 시선은, 자기에게 들러붙어있는 다른 녀석들이 아닌 브리더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미도리에게로 향해있다. 브리더가 미도리를 데리고 들어가는 검은 문 안으로 들어가 돌아온 자들은 전혀 없다. 저 아이도 부디 브리더가 말하던 것처럼 무사히 '출하' 되어서 무사히 좋은 주인을 만나기를 하고 미코는 그저 빌 뿐이다. 앞으로 일어날 가혹할지 아닐지 모를, 불안하게 물 위에서 흔들리는 부평초와도 같은 자식의 미래. 

미코는 그런 미래의 불길함을 상상하며 한숨을 쉰다. 데즈으으…하는 조용한 한숨소리와 함께 절로 적록의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 떨어져내려 볼을 적신다. 그저 애정과 걱정만을 잔뜩 담아, 친실장은 남은 자들도, 먼저 간 그 아이도 무사하기를 하고 다시 기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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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문을 건너가면 나오는 '훈련실' 안의 브리더는 아까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건조한 회색과 흰색으로만 된 반질반질한 타일 투성이의 훈련실은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 그 방이, 지금 미도리와 수십 마리의 다른 자실장들이 놓인 딱딱하고 반질반질하고 넓은 금속 탁자가 뿜어내는 냉기처럼 브리더도 일순 차갑게 변했다. 자기를 보고 싱글벙을 웃던 상냥한 인상이 사라지고, 브리더의 얼굴 위에 깔린 건 남극점 위에 깔린 가장 차가운 빙판이 되었다. 빙판같이 냉엄하고 눈보라처럼 살을 찢는 살기를 뿌리는 브리더의 눈은 어느새 야차의 눈처럼 희번뜩한 빛을 뿌린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데려와준 상냥한 브리더상은 어디갔냐, 마마는 어디있냐, 여긴 왜 이리 춥냐 하면서 테치테치 테챠테챠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자실장들. 그런 자실장들을 놔둔 탁자 사이로, 시키멓고 기다란 물건이 휘릭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휘둘려진다. 짝 하는 소리의 뒤에 따라오는 흔들거리는 탁자 바닥의 진동. 이제 막 태어나 겨우 5cm밖에 안 되는데다 먹은 것도 없어 가볍기 그지없는 자실장들이라면 수십 마리가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있는힘껏 바닥을 딛은 발에 힘을 준다 해도 버티지 못하고 나자빠질 수준의 강력한 진동이다. 물론, 그런 일말의 대비조차 할 겨를이 없는 자실장들은 삼삼오오, 혹은 홀로 서 있다가 불시의 기습을 당해 모두 자세를 뭉개고 넘어지거나 뻗거나 머리를 찧거나 하는 등 몰골이 말이 아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뒤에 따라오는 것은 자실장들의 작은 몸과 영혼을 덮치는 불안. 설명 안 되는 상황 속의 위협과 갑작스레 일변한 브리더의 태도, 의지할 존재인 마마의 부재 등에 겁에 질린 자실장들은 기어히 훌쩍이기 시작한다. 원래부터가 비호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새끼로써의 본능을 타고난데다가, 성체가 되어서도 독립적이지 못하고 그저 다른 생물에게 기대서 살 생각만 할 정도로 의존성이 넘치는 나약한 실장석으로 태어났으니 이런 상황에서 겁에 안 질리는건 오히려 이상할거다. 

처음에는 몇몇만이 테엥, 테에엥 하고 모기만한 울음소리를 내며 본능적으로 어미를 찾아 훌쩍였을 뿐이다. 하지만 울음과 불안은 전염병처럼 쉽게 전염된다. 옆에 있던 놈이 우니 안 울고 눈치만 살피던 녀석들도 결국 슬쩍 울기 시작한다. 함께 테에에에엥 하고 목소리를 높여 우니 나만 불안한게 아니구나 하는 동질감에서 오는 안심과 함께 다음 번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가증된다. 덕분에 훌쩍거리는 선은 이미 한참 넘어버리고 이제는 아주 목 놓아 울면서 훈련실을 시끄럽게 만드는 자실장들. 

허나, 이 와중에도 군계일학급의 모습을 보여주는 녀석은 꼭 있는 법이었다. 세레브의 피를 받았으나 출하까지는 한참 먼 철부지들 사이에서도 눈물을 조금 찔금거릴 뿐, 울지 않고 홀로 가만히 있는 자실장 하나. 미코의 아이, 태어나서부터 감사인사를 말할 줄 아는 유일한 자실장 미도리. 수십 마리의 세레브 혈통 자실장들 중에서도 가장 영민하고 가장 이성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강하기까지 하다. 부러 자실장들을 놀래키고 이들이 임기응변을 어찌 하는지 한 번 보려 했던 브리더는 늘 일상적인 녀석들의 반응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반응 ─ 그것도 완전히 좋은 의미에서 다른 반응을 보이는 미도리를 보고 감탄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저놈은 정말로 물건이었다. 

"자, 조용히 해라, 조용히 해!!! 계속 울었다간 새로운 주인님을 만나는 일 따윈 없어!! 우는 놈은 내가 당장 탁자 아래로 떨궈서 죽여버리겠다!!" 

마마의 태교에 있는 '죽는다' 는 말. 브리더상이나 다른 닝겐상의 말씀을 안 듣게 되거든 행복이고 세레브고 뭐고 없다는 마마의 태교 속 가사가 의미하는 '죽는다' 라는 것의 진정한 실체. 

그 말을 듣고도 용캐 임신 중 태실장일 적에 지레 겁먹어 파킨사를 하지 않고 살아남은 개체들이 바로 이 탁자 위에 올려진 개체들. 그런 녀석들인만큼 미도리 급엔 미치지 못해도 그들은 똑똑하다. 인간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완전히 마라되는 것, 혹은 그 이상의 꼴을 당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순식간에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서로 누가 더 시끄럽게 우는지 성량 대결이라도 할 것 같았던 자실장들이 눈물을 닦고, 입을 다물고, 바로 일어서서 자세를 잡는다. 그 사이에 끼어있었던 미도리도 눈물을 훔치고 말끔해진 볼을 한 채로 자세를 잡는다. 이 다음에 무슨 심한 일이 있더라도, 그녀들은 절대로 브리더에게 반항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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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실에서의 훈련은 엄격하고도 혹독했다.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에 해당하는 갓 태어난 자실장들 ─ 심지어 속에 뭐 하나 든 것도 없이, 마마의 밀크를 먹지도 못하고 마마와 일찌감치 떨어진 굶주린 신생아 자실장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혹독했다. 

동족의 비명이나 인간의 온갖 욕설이 들려오는 암실에 들어가서도 절대로 울거나 신음소리조차 내면 안 되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더라도 무조건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이 눈 앞에서 파리채나 실장채, 파이프, 자, 각목 등을 휘두르고 진짜로 때려도 그녀들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거나 여력이 남아있으면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만 했다. 멍투성이에 통증이 절절한 깊이로 몸을 울려도 인간이 일어서라고 하면 무조건 일어서야만 했다. 

한참 그렇게 혹사당하고 나자 먹이가 주어졌는데, 그마져도 그냥 막 먹으면 안 되었다. 생각 없이 손을 뻗는 녀석들은 브리더에 의해 검은 봉다리로 안이 채워진 쓰레기통에 들어가 나오지 못했다. 먹음직스러운 실장 푸드가 담긴 접시를 보고도 손 하나 안 뻗고 버틴 녀석들에겐 '벨이 칠 때까지 서로 못 뛰어나가게 붙들고 있어라' 라는 더 어이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는 혼자서만 잘 나가면 안 되고 타 개체에게도 극한의 이타심을 보여야 하는 세레브로써의 덕목을 기르기 위한 훈련. 욕심 많은 실장석의 본질에서 벗어나 나의 욕구와 남의 욕구를 모두 참으며 위험한 상황이 터지는 걸 막게 한다는, 인간 아이들 중에서도 좀 머리 큰 애들에게 시켜야 될법한 훈련을 받는 신생아 자실장들. 

당연히 1차 탈락이 이어진 후 남은 50마리 중에서도 기어이 탈락자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배고픈데 그딴게 알게뭐냐는 태도로 뛰쳐나갔다가 전의 녀석들이 갔던 쓰레기통에 다시금 직행하게 된 녀석이 4마리, 먼저 뛰쳐나가는 녀석들을 막으러 뛰어가거나 옆에 있던 다른 녀석의 손이라도 꽉 누르지 못하고 '내가 안 갔으니 괜찮겠지 뭐' 하고 솔플을 지향하다가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녀석들이 4마리. 총 8마리가 버림받았지만 미도리를 포함한 42마리는 살아남았다. 현명하기 그지없는 미도리는, 그렇게 동기들이 쓰레기통 행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양 손에 힘을 주고 옆에 있는 다른 두 녀석의 손을 꽉 누르면서 열심히 버티고 있었다. 

가장 강도 높은 두 개의 훈련이 지나가자 나온 것은 배변 훈련과 옷 정리 훈련, 청소 훈련, 이불 개기 훈련, 주인이 음식 위치를 가르쳐줬을 때 이를 찾되 주인이 허락할 때까지 먹지 않고 버티는 훈련, 모델 워킹 훈련, 도움 없이 옷 입기 훈련, 서로 충분히 싸움붙을 상황에서도 싸움붙지 않는 훈련, 성체나 엄지, 구더기, 중실장이 자기 앞에서 빡치는 행위나 위협적인 행위를 해도 공격하지 않고 버티는 훈련, 그리고 가장 가혹하기 그지없는 '자에 대한 욕구 참기 훈련'. 

다른 훈련들도 모두 죽을 맛이었지만 푸드 대신 지급받은 녹색 물감과 꽃가루로 스스로의 눈이나 총구를 자극해 엄지와 구더기를 배고, 이제 막 모성애를 익힌 신생아로 하여금 제가 방금 낳은 그것들을 스스로 쳐죽이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는 훈련은 태어난 지 겨우 5시간밖에 안 된 신생아 자실장들에겐 너무 가혹했다. 눈물을 흘리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며 맛이 가버린 녀석, 본성을 드러내고 그런 똥마마따윈 될 수 없다며 인간을 저주하던 녀석, 차마 자를 죽이지 못해 제 품에 허겁지겁 감추려들다 브리더에게 딱 걸린 녀석, 네 발로 서서 위협하거나 자를 지키기 위해 무서운 인간에게 투분 시도까지 하려드는 녀석, 빠르게 포기하고 다음 자를 몰래 가지려는 녀석 등등……

다른 훈련들에서도 애써 가려졌던 본성을 기어이 튀어나오게 하는 자에 관해선 바보가 되어버리는 친실장의 본성만큼은 또 거역 못한 놈들이 다시 쓰레기통 행이 되고 난 후, 남은 건 미도리를 비롯해 8마리 뿐이다. 그제서야 브리더는 끝도 없을 것만 같은 학대를 멈췄다. 피와 운치와 살점의 냄새로 지독해진, 악몽의 흔적이 선연히 남아 적록과 갈변한 암적으로 물든 훈련실 안에서 브리더는 살아남은 여덟 자실장에게 이리 말했다. 

"축하한다. 이제 너희들은 출하 준비 완료다."

그 말과 함께 한 마리씩 목덜미를 잡히고, 쿡 하는 소리와 함께 적색 눈이 있던 자리에 홍미빛의 의안이 박힌다.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있는 의안은 중실장 단계가 되면 크기가 안 맞아 갈아줘야 되겠지만 자실장 시기가 끝나지 않는 한 주구장창 쓸 수 있다. 

애초에 의안을 미리 박아놓는 이유는 앞으로 성체가 되었을때 영영 당할 '석녀(피임)행' 에 조금 더 익숙해지게 하기 위한 조치. 그런 조치에 저항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다. 미도리 역시, 브리더의 두터운 손이 자신의 여린 목덜미를 콱 잡아채고 플라스틱 안구의 날카로운 뒤쪽 단면이 제 눈동자를 짓뭉개며 들어오는 이물감과 통증을 느낄 때도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슬픔과 그간의 고통이 끝났다는 안도, 마지막까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출하과정에 대한 고통 등이 복잡하게 섞인 적록의 피눈물은, 작은 자실장의 엉망이 된 피투성이 뺨을 적시고 한동안 줄줄 떨어져내렸다. 

그 눈물을 흘리던 날의 훈련실은, 분명 고통이 끝났음에도 왜 그리 차가웠는지. 다른 자실장들은 잘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도리는 느낄 수 있었다. 어디까지고 감이지만, 짧은 시간동안만 살아본 인생 하룻강아지 이하의 자실장의 감이지만, 이 감은 절대로 틀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앞으로도 이 추위는 몇 번이고 그녀의 실장생에 찾아오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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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는 세레브 실장석 중에서도 최상급인 양충인 만큼 샵에서 어마어마한 가격을 제시하고 팔아도 금방 팔려나갔다. 처음의 주인은 당연히 모든 실장석들이 꿈에 그려 마지않아하는 부잣집 주인. 그것도 아득하게 잘 사는 부잣집의 주인이었다. 그렇지만 그 부잣집 주인은 타고난데다 갈고닦아진 양충 미도리의 태도를 '부자연스럽다' 라는 이유로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트집잡고 나쁘게 대한다거나 실장석의 본성을 드러내라며 양충이 본투비분충이 될 때까지 학대질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나……좌우지간 미도리를 오래 냅둘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다. 

타케하시, 라고 했나. 이제는 미도리의 머릿속에선 잘 기억나지 않는 첫 번째 주인은 착하지만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는 미도리를 파양하지도 않고, 미도리를 학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미도리가 열심히 해낸 만큼 받아낼법한 애정도 주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당당하면서도 인간 심기를 덜 거스른다는 특이점의 영역에 속한 실장석을 좋아하는 이상한 취미의 주인에게 ─ 돈 좀 쓴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흔한' 세레브 양충 따윈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삶 속에서, 넓기만 하지 차갑기 그지 없는 부잣집 속에서 미도리는 애써 살아갔다. 

미움 살 짓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단지 타케하시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쳐지는데는 겨우 6일이 걸렸다. 별다른 애착관계도 신뢰관계도 쌓이지 않고,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서로 실망하고 걱정하는 선에서만 그친 그들의 관계는 담담함을 품에 안은 겨울의 호수와도 같은 관계. 꽝꽝 얼어버린 얼음 위로 주인의 미도리를 향한 온기가 흘러 그들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넌 착한 아이였지만 그래도 나에겐 안 맞는 것 같아, 아무튼 잘 살아라."

언뜻 들리는 무책임한 말 뒤에, 사용인들 보고 얘한테 좋은 주인 좀 찾아줄 수 있어? 하는 나름 책임감 있어보이는 대사를 던지는 주인. 그것이 미도리가 기억하는 첫 번째 차가움의 마지막. 그런 인간에게, 미도리도 큰 감흥을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감사하다고 여겼다. 마음에 안 들면 죽이기까지 하는 주인도 있다고 브리더에게 열심히 배운 미도리 입장에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안 죽이는 주인은 오히려 천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새로운 사실도 배울 수 있지 않았는가. 마음이 안 가는 상대는 아무리 그 상대가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싫다는 것을. 다음번에도 그런 사람을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럴 때도, 미도리는 그냥 얌전히 배운 대로만 행하면 된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며 열심히 일을 하면 된다. 주인이 아무리 좋지 못한 것을 먹으라 줘도 그냥 받아먹어도 그만. 주인이 아무리 좋지 못한 일을 당하게 해도 그냥 당하면 그만. 주인이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면 부자들의 인형이 되어야 한다는 세레브의 본질에 걸맞게 가만히 있으면 그만. 그냥 그렇게 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어간지 6일만에 내쫓긴 그 집에서의 상황은 미도리의 다음 실장생을 위한 훌륭한 제 2의 훈련소라고 봐도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실장들이라면 버려진다는걸 지각하는 그 순간부터 세상 떠나가라 울고불고 난리를 치거나 행복회로를 돌리며 주인 보고 미쳤다는 폭언을 일삼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미도리. 그녀의 희소함은 그런 순간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하여튼 늘 이성과 지성의 판단을 중시하며 남에게 거스를 짓 안 했던 미도리의 태도 덕이었을까? 원사육실장들에겐 보통 찾아오지도 않는 강력한 강운이 미도리에게 찾아왔다. 미도리를 떠넘겨받은 사용인들 중 한 여자가 기꺼이 미도리를 임보하며 새 주인을 찾아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분충은 싫어하나 양충, 그 중에서도 예의바른 사육양충은 좋아하는 선택적 애호파. 애호받을만한 짓을 다 하고도 제 주인의 이상한 취향 때문에 애호받지 못한 미도리를 기르고픈 의향도 있지만 현재 그녀가 사는 곳이 애완동물 금지라는 규율을 단 곳이었기에 자기 대신 잘 길러줄 사람을 스스로 찾아주기로 한 것. 

다행스럽게도 원가가 비싼데다 예의까지 바르고 여차하면 가사노동석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세레브를 '공짜' 로 받아낼 수 있다는 사실은 미도리의 재입양에 순풍을 달아주었다. 여자가 미도리를 임보하며 자기 집 방 구석 안에서 몰래 숨겨둔지 무려 이틀만에, 여자의 같은 학과 친구들 중 하나라던 어떤 남자가 미도리를 입양해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이 나중의 불행이 될지는 둘째다치고 ─ 여하튼 그 때만큼은 미도리에게 운수가 다시금 따라줬다. 

미도리는 그런 사실에 자만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를 챙겨준 여자 사용인에게, 원사육실장이 되어 미래가 없던 자신을 기꺼이 데려가주기로 한 남자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그녀는 인간 없이는 자기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살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지각했기에 인간들에게 더할나위없는 감사를 느끼며 그걸 그대로 보여줘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탄생의 순간 마마와 브리더에게, 자신을 맡고 팔아준 펫숍 주인에게, 처음 만난 주인에게, 자신을 돌봐주던 큰 집의 독라 시종들과 사용인들에게 늘 감사해온 것처럼 그녀는 임보자와 새 입양자에게도 감사를 잊지 않고, 

「볼 것 없는 와타치에게도 이렇게 신경을 쏟아주셔서 정말 감사한테치」


하고 공손히 인사하며 임보자와 이별하고 새 입양자와 만났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미도리를 떠나보내던 임보자는 이리 생각했다. 정말 처음 볼 때부터 끝까지 실장석같지도 않은 녀석이라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저 녀석은 뭔가 정신적으로 초월적인 영역에 다다른 누군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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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의 두 번째 주인은 중산층의 남성이었다. 직장도 있거니와 직장과 집과의 거리도 멀어, 하루종일 집을 비우는 일이 잦은 그가 바라던 건 자기 대신 집정리를 해주고 살풍경할 집구석의 그런 느낌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유능한 애완동물. 다른 동물들은 불가능하나 세레브 중에서도 최상타 세레브라면 가능하다. 반쯤은 그런 것을 욕심내고 미도리를 입양해간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애호파인 그의 나머지 반절분은 어쨌든 까일 이유가 없는데 주인의 선호도 불일치라는 부조리 하나로 파양당한 미도리를 안쓰러워했기에 입양을 한 것도 있다. 그런 주인에게 미도리는 거스르지 않았다. 

모든 가사처리는 독라 시종이나 주인님 손을 안 빌리고도 스스로 할 수 있게 고강도의 훈련을 받은 최상급 세레브 실장석인 만큼 미도리는 부잣집 애완동물에서 중산층의 가사노동석으로 굴러떨어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일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새 주인님이 살 곳을, 밥을, 옷을, 물을 보장한다는 것에 감사하며 맡은 바를 늘 철저히 했다. 쓰레기가 있으면 바로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고, 조막한 손으로 걸레를 들어 보이는 모든 먼지는 닦았다. 물로 닦여지지 않는 얼룩은 주인이 시킨 대로 주인이 알려준 낮은 선반 안에 들어가있는 아세톤이나 알코올 같은 걸로 지우는 시도도 했고 그것도 안 먹힐 적에야 주인에게 알렸다. 

늘 미도리 자신의 옷은 스스로 빨고 개고 말리고 정리했고, 미도리가 들어가서 정리할 수 있는 얕은 대야에 넣어진 주인의 소품들도 늘 깨끗이 닦았다. 중실장이 된 이후엔 주인이 준 애완동물용 계단을 개량한 물건과 의자를 이용해 세면대 정리도 할 수 있었다. 스폰지로 뽀득뽀득 비누거품을 내고 묻혀서 세면대를 싹 정리하고, 베이킹소다를 치덕치덕 바르고 씻어내면서 비누로 안 닦이는 얼룩들을 정리했다. 비누가 떨어지거든 낮은 선반대로 가서 비누를 새로 교체하는 것까지 배웠다. 

주인이 대충 말리고 바닥에 던져놓은 옷들을 미도리는 늘 낑낑거리면서도 군말 없이 주인이 오기 전에 다 개어놨다. 분무기에 물이 없으면 채워두는 법도 알아냈다. 주인이 어질러놓은 물건들 중 미도리가 옮길 수 있는 것이라면 꼭 낮은 선반이나 TV를 받치는 선반용 서랍장 아래에 차곡차곡 정리해두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런 미도리의 필사적인 노력이 담긴 노동 끝에, 남자의 집은 언제나 새 것처럼 깨끗하고 깔끔하되,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미도리 덕에 살풍경함이 한층 줄어들었다. 

애완동물은 돈 쓰는게 아니라는 주인은 미도리에게 그다지 고급 푸드를 주지 않았다. 대신 늘 일을 잘 했다는 의미에서 콘페이토를 하루에 한 알씩 줄 뿐이었지만…그래도 꼭 '잘 했다' 는 칭찬이 따라왔다. 아무리 열심히 예쁨받고 눈총사지 않으려 애써도 관심조차 던져주지 않은 차가운 첫 번째 주인에 비하면야, 두 번째 주인이 얼핏 던지는 싸구려 호의는 미도리에게 있어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축복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이 존속할만한 가치를 느낄 수 없어서 불안에 떨어야했던, 히터바람을 맞아도 차갑기만 하던 그 집에서의 일상과 달리 이곳의 일상은 따스했다. 정말 적은 싸구려 애정 한 푼이 담긴 콘페이토와 일상적으로 던져지는 '잘 했다' 라는 말이 미도리로 하여금 여기에 존속해도 되는 가치를 늘 입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큰 안도를 주었다. 물론 지성이 살아있는 미도리는 언제 첫 주인처럼 두 번째 주인의 심기도 변화할지 몰라 늘상 눈치를 살폈으나……문제는 주인이 아닌 주인이 데리고 온 다른 사람으로부터 찾아왔다. 

두 번째 차가움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차가움 따윈 차라리 잠시 내렸다 그치는 봄날의 여우비가 살짝 남기고 떠나는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차갑고, 두렵고, 무서운, 그런 것이 지금 미도리를 덥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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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주인과 2년 정도 지낸 어느 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일상 속으로 불현듯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두 번째 주인이 '약혼녀' 랍시고 여자를 데려온 것이다. 미도리의 머릿속에 있어서 인간은 '닝겐사마' , 즉 무조건 복종하고 절대로 미워해서는 안 될 존재.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설령 눈 앞에서 자기를 향해 싫은 표정을 짓고 걷어차고픈 욕구를 꾹꾹 눌러담은 시선을 보내거나 욕설을 내뱉고 손찌검을 해도 무조건 얌전히 복종해야 마땅한 존재. 그렇기에 미도리는 현관문 앞에서 그 둘에게 허리가 부러져라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둘이 지나가라고 살짝 자리를 비키기 직전의 자신을 보던, 그 약혼녀의 눈빛을 보고서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더러운 것' 을 보던 여자의 눈빛. 가끔 사용인들이 저의 첫번째 주인의 뒷담을 깔 때 보였던 그 눈빛에서 경멸을 백 스푼 정도 더 집어넣고 응축한 그런 차가운 눈빛. 절대로 그 더러운 것이 자기의 마음에 기어들어와 편견을 깨부수는 짓을 하는 것을 용납치 않을 눈빛. 그냥 싫은 건 당장 치워버리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 안달난 인간의 눈빛. 그 눈빛을 보여준대로, 여자는 실장석을 싫어했다. 학대도 하지 않지만 애호도 하지 않는다. 

예전엔 조금 좋아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전 남친의 실장석이 짐승에 불과한 자신을 '남편님의 아내인데 닝겐똥노예인 너 따위가 왜 옆에 붙어있는 거냐' 라고 질투하고 투분을 해대던 것도 모자라 기어이 남친의 씨를 몰래 훔쳐 흑발을 보여주고 저와 전 남친 앞에서 난리를 치는 광경을 본 이후로부터 여자의 마음 속 실장석은 어떤 형상과 성격을 품었던 간에 모조리 혐오하고 경멸하며 박멸해야할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않았다. 특히 짐승들 중에서도 아득히 하타를 치는데 인간과 동격, 혹은 인간보다 더 위에 서려 드는 그 폼새가 영 같잖았다. 전남친이 그 멍청한 실장석을 버리지 못하고 쩔쩔매던 물러터진 모습을 본 이후로 실장석을 기르는 남자에 대해서도 학을 땠다. 

지금의 남자친구 겸 약혼자는 그런게 없어보였기에 좀 믿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때리다니. 그 점은 싫다. 하지만 실장석에 대한 혐오로도 억누를 수 없는 지금의 약혼자를 놓치고 싶지 않은 호감에 대해 여자는 갈등했다. 

티를 냈다가 해어질 거리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집에서 보여준 실장석, 미도리의 태도 때문에 제 인식이 바뀐다는 것도 두려웠다. 이전에 만났던 처음부터 끝까지 상분충과 달리 미도리는 너무나도 예의바르고 착하고 얌전한 녀석이었다. 약혼자가 석녀니 흑발 타령을 할 이유도 없다고 안심을 시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번 실장석에게 데여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은 겨우 이런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자신을 마음 속에서 물러나게 만드는걸 허용치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혐오감이 편견과 뭉치고, 여자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스스로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들었으면 맞추려들었지, 자신을 세상에 맞추고자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좌우지간 사소한 것에서도 지거나 물러서기 싫어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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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부터 여자는 나이에 안 맞는 싸구려 경쟁질을 애도 아니고 실장석을 상대로 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미도리에게 시선으로 괜히 눈치를 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남자가 안 보는 틈을 타 미도리가 청소하거나 하는 걸 은연중에 방해하기도 했다. 세련되지 못하다는 짓임은 스스로 알고는 있었지만 여자의 눈에는 이 거슬리는 생물을 어떻게든 엿먹이는게 중요했다. 

한 가지 상념과 감정에 사로잡히면 남자건 여자건 애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사람은 미쳐돌아가고 거기에 몰입된다. 좌우지간 그게 헛짓 오브 헛짓에 허망한 결과만을 낳는다고 해도 끝장을 봐야 직성을 풀리는 길에 빠진다. 여자도 훌륭히 그런 몰입에 빠졌다. 거슬리는 느낌은 보면 볼수록 미움으로, 혐오로, 증오로 치환되어간다. 아무리 착하게 굴어도 인간 남자를 가지고 남편님이라 주장하며 인간 여자는 노예라 낮잡아보던 건방진 똥벌레와 결국 동일선상에 선 존재. 찾다보면 빈틈은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 빈틈을 찾아 파해치고 미도리를 쫓아내고픈 마음이 이제 여자의 마음을 지배한다. 여자는 그렇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넘어갈 일에, 스스로 문제거리를 만들고 판을 벌리고자 하는 비합리적 생각의 함정에 뛰어들었다. 아무렴 어때. 이제부턴 직성이 풀리고 좋든 나쁘든 결말이란 물건이 그녀의 눈앞에 보여야 끝날 일이다. 


미도리는 영민한 실장석이다. 저의 주인댁에 방문하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는 여자의 여러 반응을 보면서 그녀는 깨달았다. 저 여자는 자신을 죽어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 어떻게든 자신이 못난 꼴을 보여 사라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하지만 못난 꼴을 보이면 주인님께 폐가 된다. 여자의 심기를 거스르고픈 마음도 없었지만 그런다고 주인에게 폐가 되기도 싫었다.

그러니 미도리는 그냥 일을 열심히 하기로 했다. 이미 한 번 버림받아봤고 다음 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으로 가게 될 길의 통로로 이어지든 간에 그녀는 실장석이다. 인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결국 인간에게 들러붙을 수밖에 없는 한심한 생물체. 그런 한심한 것을 완벽하게 극복해낼 수 없기에 체념하고 살아야 함을 미도리는 잘 안다. 그래서 미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과 자신만 있을 때도 고자질 따윈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약혼녀가 별로 터치할 것도 없는 미도리에 대해 유독 트집잡는 말을 많이 해서 신경쓰였던 주인이 약혼녀에게 무슨 말 들었냐 해도 미도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말로 여자를 감싸지도 않았지만 자신은 나쁘지 않다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얌전히 다음 번의 지시를 기다리며 대기했다. 실장석보다 월등히 지성이 발달한 인간마저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일단 속으로 꿈틀한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면 화를 내고, 이유 없는 악의를 저에게 던지면서도 자기는 아무 잘못 없다는듯 넘어가려는 자를 혐오한다. 하물며 머리 짧은 실장석이 그런 걸 견딜리가……싶은데도 미도리는 견뎠다. 생존을 위해 그녀는 견디고 있는 선을 넘어섰다. 

어떤 결말을 당하든 자신의 실장생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안 체념 속에서 미도리는 견디고 있었다. 늘 하던대로 일을 열심히 했다. 그 와중에 남자는 여자와 계속 싸웠다. 하지만 남자도 결국 인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실장석을 싫어하는 것만을 제외하면 별로 문제도 없고 외모도 좋고 직장도 좋고 장인장모도 친가도 튼튼한 ─ 자신이 잡는데 성공하지 않았다면 진즉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가버렸을 여자를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녀와 실장석 건으로 싸우고 싸운 끝에 찢어지는 걸 택하는건 더더욱 싫었다. 여자의 사정도 이해하고 미도리의 앞날도 가여이 여긴 남자였으나 결국 더 포기하기 쉬운 것을 남자는 택했다. 

어짜피 공짜로 받아온 녀석. 준 거라고는 2년간 의례적으로 준 싸구려 애정 뿐. 그러니 2년동안의 기른 정이라 해도 생각보다 얄팍했고, 버리기는 쉬웠다. 그간 받아먹은 노동의 값은 있으니 들에 버리는 처우를 안 하는 자신의 자비로움에 속으로 약간 자화자찬하며 남자는 미도리를 안락사나 살처분이 금지된 보건소에 맡겼다. 여기라면 주인이 생길 때까지 무기한 임보 처리가 되는데다 내는 돈은 겨우 만 원 정도이므로 최후의 양심에 별로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보건소로 가는 날, 미도리는 남자에게 짤막한 통보를 들었다. 너는 정말 왠만한 애완동물보다도 더 쓸모있었는데 일이 이리 되어 미안하다는 싸구려 사과를 날리는 남자가 꺼내든 이동장. 여자의 눈빛과 행동에서 느껴지던 차가움이 이제는 남자의 말 속에 담긴 차가움으로 옮겨져있었다. 검은 이동장 안에 스스로 몸을 담은 성체실장 미도리는 서기도 힘든 이동장 안에 몸을 우그려 주저앉았다. 그 후, 그녀는 그저 주인을 향해「모자란 저를 그동안 이 집에 머물게 해주셔서, 굶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했던데스」 라고 조용히 작별인사를 해줬다. 

다른 실장석들이라면 이동장에 들어가게 되는 진상을 이해하자마자 죽어라 들어가지 않겠다고 발악하며 똥을 지리거나 울부짖거나 바닥에 엎드려 발버둥치거나 인간을 마구 욕할법한 상황에서도 전혀 그런 것이 없는 미도리. 그런 미도리를 보며 남자는 조금은 슬프고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사람이었다면, 하다못해 실장석이 아닌 다른 동물이라면 그 사람도 널 그리 싫어하지 않았을지는 모르지. 너 같은 녀석은 하는 짓만 보면 진짜 성격 더러운 일부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호감살법한 녀석이잖아." 

착하고, 겸손하고, 이성적이고, 생물같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상태 변화에 대해 적응이 빠르고, 타인에게 한없이 허용적이고, 예의바른 태도를 잊지 않고,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장석을 비롯해 다른 아종, 심지어 우화라는 극 레어한 변태과정을 거치는데 성공해 인간에 훨씬 더 가까워진 실장인이나 실장석의 압도적 상위호환 돌연변이인 실취석에게서조차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다. 제아무리 이성이 실장석보다 살아있다는 그것들도 기본은 생물종과 실장석 특유의 이기심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진 못했기에 상황이 나빠지면 절망하고 원망하며 증오할 거리부터 찾기 바쁘다. 아니, 인간이라도 그럴 것이다. 인간 역시 이런 상황에선 마냥 담담하지 못한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감정과 태세를 변환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렇게까지 완벽한 선의와 배려의 극치에 다다른 행동만 보일 수 있는 존재는 인간들 중에서도 극소수다. 상황이 따라주면 성인군자, 상황이 안 따르는 경우엔 호구가 될 뿐이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향적으로는 심지가 비틀린 극소수를 제외하곤 비인간성을 느낄지언정 미워할 수는 없는 그런 존재. 미도리는 그런 존재였다. 

인간계에서도 동물계에서도 만나기 매우 힘든 녀석 겸 좋은 가사노동석을 떠나보내기를 아쉬워하던 남자는, 보건소로 미도리를 인수인계하기 전에 슈퍼에 들렀다. 미도리와 주인이 함께 방문하기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슈퍼 방문. 보건소 인근 슈퍼에서 두 번째 주인이 잔뜩 사준 콘페이토 10봉지와 젤리뽀 30개들이 2봉지. 2년간 열심히 집에서 일하면서도 콘페이토 봉지 두 개 정도의 값에 맞먹는 저급 푸드만 먹어오던 미도리에겐 처음이자 마지막 특식이다. 미도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욕심부리지 않았다. 이동장으로 가득 넣어지던 콘페이토와 젤리뽀 봉지도 그녀는 거절했다. 어째서냐 묻는 남자에게 그녀는 이리 담담하게 대답했다. 

「맛있는 것에 많이 입을 데어버리면 분명 미도리는 맛있는 것만 원해버리게 되는데스. 배고픔이나 우마우마한 것을 먹고 싶다는 욕구를 못참아 보건소 분들에게 때를 쓰게 될지도 모르고, 만날 수 없게 될 주인님을 원망하는 민폐를 저지를지도 모르는데스. 미도리는 콘페이토 한 알과 젤리뽀 한 개만으로도 충분히 과분한 이별 선물을 받은데스요. 남은 우마우마들은 주인님이랑 주인님의 약혼자분이 함께 맛나게 나눠먹으면 좋겠는데스. 이 우마우마들은 달콤한 맛의 우마우마들이니 주인님과 약혼자분을 분명 금방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인데스요」


"하아, 네가 그리 말한다면야……이런 것밖에 해주지 못해 미안한데 넌 더 나를 미안하게 만들어버리네. 젠장, 동물이랑 해어지면서 날 울게 만든건 니가 최초다, 최초." 

「미도리가 주인님을 울리고 만데스카?? 잘못했는데스, 정말로 죄송한데스, 오로롱, 오로롱, 오로롱…」

"아니, 니가 그런데서 죄송해할 필요는 없잖아……"

첫 번째 주인보다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저를 내쫓게 된 두 번째 주인이지만, 이 주인은 첫번째 주인보다는 분명히 따뜻한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착한 사람에게 걱정을 받게 되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해도 실장생에 있어서는 감사할 일이다. 그리고 그런 따뜻함을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한 직감 때문에 미도리의 눈에서 문득 눈물이 차오른다. 그날, 미도리는 처음으로 울었다. 그래도 오로롱이라는 대사를 딱 세 번만 친 후 입을 다물고, 콘페이토를 먹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렇게 미도리는 ─ 한 때 자신이 미도리를 보건소에 맡긴다는 것을 자화자찬격 선택으로 생각한 것을 반성하는 남자의 손에 덜렁덜렁 들려있는 이동장 속에서 몸을 쭈그리고 콘페이토와 젤리뽀를 조금씩 조금씩 소중히 아껴먹으며, 마지막 이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이별의 길이 끝나는 지점인 보건소에서 미도리를 맡긴 뒤 발길을 뒤로해 집으로 돌아간 남자가, 약혼녀에게 콘페이토와 젤리뽀 봉지들에 대한 사연을 털어놓으며 미도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도, 약혼녀는 어디까지고 가증스러운 실장석이 가식을 부리며 자기 남자를 홀려놨다고밖에 생각을 못하며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듣고 벌컥 화나 내고 '나야 그 똥벌레야' 를 시전하고야 말 것이 나름 남자에겐 통탄할 미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결국 그의 선택에 따를 결과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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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를 모토로 삼는 보건소에서도 싫어하는 실장석이었지만, 미도리는 왠만한 애완동물은 가뿐히 뛰어넘는 지능과 선량함과 얌전함과 겸손함의 소유자였으므로 보건소 사람들도 자연히 미도리를 예뻐라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지에 같힌 다른 녀석들과 달리 미도리는 임보기간 동안은 보건소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다시금 가사노동석으로 일하며 돌아다닐 자유를 얻었다. 잘 때는 다른 실장석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눕히거나 허리를 굽힌 채로 앉아서만 지낼 수 있는 좁은 케이지 안에 있어야 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풀려다녀서 청소를 명목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다. 

착하고 겸손하고 조용하며 사고 한 번 안 치는 미도리는 청소 또한 잘 하고 정리도 잘 했다. 머리도 좋아서 사무실 비품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올바른 위치에 정리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지도 몇 시간만에 익혔다. 여태 들어온 실장석들은 물론 왠만한 아종이나 인간에 더 근접해졌다고 실상은 훨씬 더 건방져진 실장인들보다도 낫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전 주인들에게보다도 더 많은 쓰다듬과 사랑을 받으며 미도리는 삶의 실감을 느꼈고, 좀 더 행복해했다. 그러면서도 더욱 감사하고 겸손히 분수를 찾는 삶을 잊지 않았다.  


그런 다정한 나날을 미도리에게 '선의로' 제공해준 보건소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미도리를 입양보낼 때만큼은 부주의했다. 그들이 미도리를 넘겨줌으로써 미도리의 세 번째 주인이 된 남자는……겉으로는 애호 실장석 컨탠츠 영상까지 만들고 실장샵 관련 제품 만드는 곳에서 근무한다고 널리 알려져있으나 실상은 애호파로 철저하게 위장한 초강력 학대파. 그것도 비단 실장석 뿐만이 아니라 온갖 주류와 비주류 애완동물 학대 섭렵을 목표로 하는 초강력 막장 학대파였다. 그런 인간이 보여주는 겉면만 보고 괜찮은 사람이 걸렸다며 보건소 사람들은 미도리를 그에게 보내버렸다. 순진하게도, 이루어지지 않을 미도리의 행복한 장미빛 미래만을 기원하면서 ─ 

덕분에, 그들의 부주의한 선의는 앞으로 마주하게 될 거대한 악의에 저항할 수 없는 미도리를 산제물로 내어줘버린 꼴이 되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차갑고 고통스러운, 영원한 동토에서 빚어진 세 번째 차가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두 번째 차가움은 후덥지근한 여름날의 온도를 겨우 몇 도 정도만 낮춰주고 다시 쪄죽을듯한 다음 날의 열기를 남기며 떠날 여름 장마에 불과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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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주인은 처음부터 미도리를 마뜩찮아했다. 새로 분양받을 유기 원사육실장들 중 적당한 놈들을 몰색하며 보건소를 들락날락거리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미도리, 그렇게 일하며 예쁨받는 와중에도 기세등등해하기는 커녕 초연하고 겸손한 태도로 일하기만을 지속하는 미도리의 태도는 유기당했다는 상황을 깨닫자마자 무너져내리는 세레브나 머리 좋은 아종들이나 실장인 따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 끝에 있는 것이야 뭐 어짜피 날고 기어도 못 버리는 실장석 특유의 추하기 그지 없는 본성이 있을 터다. 

남자는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미도리를 끝까지 학대로 파해치고 파해친 끝에 나올 '끝' 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인간조차도 부조리에 노출되면 분노하고 날뛰다가 상황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실감하면 절망하는데, 이 녀석은 과연 얼마나 버틸까. 가사노동석으로 일할 정도의 지능과 태도를 갖춘 놈이라 함은 분명 원세레브 출신이거나 진퉁 가사노동석 출신일 가능성이 높고 출하 전의 선별과정에서 온갖 못 볼 꼴을 다 겪고 온 개체인 것이다. 눈을 확인해보니 의안을 박아 철저하게 피임처리까지 되어있는데 그걸 버티면서 성체가 되서 여태 살아남아 그런 태도로 살아왔다 친다면 놈의 정신력은 왠만한 인간들도 혀를 내두를 수준의 것. 

"그럼 뭐해? 어짜피 너까짓 것은 그냥 실장석일 뿐이야. 철저하게 네 본성을 보여보라고. 언제 굴러떨어져서 울지 기대되니까!!! 그 때쯤 가면 살덩어리밖에 안 남은 돼지새끼가 되어서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고 나자빠졌겠지!! 빨리 듣고 싶다고, 착한 척 가증스럽게 구는 너 따위의 입에서 돼지 멱따는 데스데스 소리로 상상 속의 남편님이랑 흑발의 자를 찾아 망상의 나래로 도망가는 대사가 나오는걸!!" 

집으로 오자마자 저를 삭막한 수조 속에 가둬놓고 그런 대사를 치는 주인. 그런 주인의 말과 눈빛과 표정과 자태에서 우러나오는 불길한 감각. 이 모든 것을 느낀 미도리는 생전 처음으로 뭔가 잘못 걸렸다는 불길한 감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성은 그녀의 주변을 감싼 것이 성체의 키에 정확히 부합하는 50cm 정도 되는 높이의 유리벽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어딘가를 기어올라가 뛰어넘는 것따위는 불가능한 실장석의 성체 구조상 이런 장소에서의 도망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 전에 미도리는 인간에게 거역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음을 더 빨리 지각했다. 날고 기어도 실장석. 무슨 일을 당하던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일이라면 실장석이 거절할 권한은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얌전하게 대기타는 미도리의 태도는 오히려 세 번째 주인의 심리에 불을 질렀다. 꼴에 그렇게 건방떤다 이거냐? 하면서 세 번째 주인은 미도리의 옷을 잡아찢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목을 꽉 누르고 미도리를 수조 위에 눕게 한다. 그제서야 나온 본능의 발버둥과 시작된 호흡곤란에 숨이 막혀 컥컥대는 미도리. 미약한 생물체의 발버둥 속에서 점점 위석이 견디지 못하고 물들기 전에, 남자는 빠르고도 정확한 손놀림으로 매스를 그어 미도리의 옷과 상체를 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장기를 차가운 날붙이의 날로 마구 휘젓고 찌르며 가른다. 물렁물렁 쉽게 갈라지고 터져나가는 장기들 속에서 딱 소리와 함께 부딪힐 것을 찾는 남자. 

"분명 이쯤에 있을텐데, 어디어디── 좀 빨리……옳지, 여기 잇네. 심장보다 조금 아래여서 찾기 힘들었나?"

하고 말하며 학대파가 꺼내드는데 성공한 것은 미도리의 위석. 주구장창 진행될 학대를 위해서라면 위석을 적출한 후 이것만 따로 활성액에 보관하는 사전작업은 그야말로 필수이다. 일반 활성액이라면 생사가 오가는 수위의 학대 20여번 만에 위석을 골로 보내버리겠지만 이번에 쓴 활성액은 분충이든 양충이든 쓸데없어 정신적으로 고강한 놈들을 위해 준비한 특수 활성액. 일반적인 학대 수준보다 5배는 더 가혹한 학대를 60여번 반복한다고 해도 다음 날까지 실장석을 버티게 만들어줄 괴물같은 물건 속에 담겨진 미도리의 위석은 이제 싫든 좋든 그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반짝반짝한 녹색으로 빛날 것이고 ─ 차라리 빨리 달아지는게 나을 것인 미도리의 생명 시계도 쓸데없이 길어질 것이 뻔했다. 


남자의 집은 늘 미도리에게 있어서 차가움 뿐이었다. 그곳의 냉기는 지독했다. 피부로는 확연히 차갑다 느끼기는 커녕 오히려 살이 데인다는 감각이 확실히 와닿는 라이터불이나 토치의 고문까지도 존재했지만, 화상으로 몇 번이고 피부가 홀랑 날아갔다가 되살아났다가 하는 일을 겪었는데도 미도리의 마음은 언제나 남자의 집을 춥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신생아 시절 막 날라진 채 힘든 일을 당하던 훈련실에서의 냉기와, 첫 주인이 저를 볼 때마다 늘 보내던 시선 속의 냉기, 두 번째 주인의 약혼녀의 시선 속 냉기, 두 번째 주인이 저를 이동장으로 넣을 때의 냉기와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더욱 지독하고 살벌하고 차갑고 한도 끝도 없는 그런 것. 

마땅한 원인이라던가 목적이라던가가 명확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도리를 현재 학대중인 세 번째 주인이라는 남자의 비틀린 본성이 뿜어내는 차가움. 그 어떠한 생명체도 자신의 흥미나 성질을 자극할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로 보지 않는데서 오는 차가움, 그런 성정 탓에 그 누구와도 어울릴 수도 없는 비틀린 인간이 품어내는 고독이 어긋난 방향으로 승화되어 학대로 진행될 때마다 느껴지는 차가움, 그 끝에 결국 정말 시덥잖은 이유로 생명을 떨구고 괴롭히고를 반복하는 남자의 손과 그 손 끝의 매스에서 오는 차가움. 늘 차가움 천국이었다. 

미도리의 삶 중 그 시절만큼 가장 차가운 시절도 없었다. 언제나 고통으로 신음할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여주지 않는 미도리가 자기의 성질을 긁는다고 생각해 드러내는 남자의 증오와 경멸과 분노도, 그런 남자가 제 몸을 해집어놓을 때마다 튀기는 저의 피의 온기도 분명 뜨겁거늘, 늘 미도리는 그것들마저도 차갑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래도 비명을 지르지 않냐면서 남자가 성체가 겨우 들어갈만한 젓갈통 속에 미도리를 쳐박고 그 안에 뜨거운 물을 연신 부어대느라 미도리의 살이 익어가는 와중에도, 미도리는 여전히 춥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며 아무것도 이해할 생각 없는 채로, 그저 딱 자신이 정해놓은 어떤 기대만을 충족할 반응만을 고대하는 것 말고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는 남자의 세계 때문에 그녀는 추웠던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휘말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고된 일을 당하는 미도리와 같은 신세에 있던 다른 실장석들을 비롯한 그 남자네 집의 모든 동물들이 함께 추위에 떨며 다음 번의 고통과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늘상 목격해야 한다는게 미도리는 슬펐다. 

다른 놈들은 모두 남자에 의해 벌어지는 광란의 학대 파티 끝에 다가올 죽음에 지레 겁먹고 떠느라 여념이 없는 반면, 미도리는 겨우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리가 잘리는 와중에도, 손이 입에 쑤셔넣어진 상태에서 의안이 들려내지고 그 안에 살을 갉아먹을 구더기들이 투입되는 와중에도, 분대 안에 도롱뇽이 박혀서 버둥거리느라 분대가 찢어질락말락하는 와중에도, 굶주리고 다친 쥐때들의 철창 속에 미도리가 투입되어 그들에게 사지가 잔뜩 뜯겨나가는 와중에도, 팔다리가 꺾이고 고통 내성을 한계치까지 올리는 약물을 투여받은 상태에서 저실장들에게 다시 내장을 먹히고 척추가 남자에 의해 밖으로 들려나갈 때도, 몸이 딱 으깨져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남자에게 발로 걷어채이고, 남자가 가둬뒀던 개들에게 머리와 상반신 일부만 남기도 다 뜯어먹히다가 겨우 구사일생했을 때도, 미도리는 그냥 그것을 슬퍼할 뿐이었다. 

독한 건지 초월적인 경지에 이른 건지는 몰라도, 미도리는 그 남자의 집에 있던 최후의 순간까지 원망의 말도 늘어놓지 않았다. 행복회로에서 나오는 헛된 발상도 지껄이지 않았다. 본능적인 두려움과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가장 끔찍한 부조리와 참극의 극치 속에서, 그녀는 그저 그곳이 춥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집에서 꺼내지기 일보 직전, 의식을 잃기 직전에 딱 그 생각을 했다. 

「조금은, 조금은 더 따뜻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스……」

늘 삶이 차갑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없는 세 번의 강력한 추위를 끝으로 추운 곳에서 죽는 것만큼은 왜인지 싫었다. 다른 모든 것은 필요 없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 차가움을 느꼈던 시절보다는 조금만 더 따뜻한 곳에서 목숨이 끊어진다면 정말 감사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미도리. 그런 그녀는 더 이상 기력이 없다. 학대를 해도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옅은 신음소리 외에는 이제 학대파 주인에게 뭘 돌려줄 건덕지도 없다는 것. 하는 수 없이 학대파 주인은 '시발놈의 독종 분충새끼가' 하는 욕지기를 마지막으로 미도리에게 관심을 떼버렸다. 대신 관심을 들였던 건 늘 옆집 담벼락 위를 유유자적 돌아다니며 마뜩찮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던 옆집의 하얀 고양이 한 마리. 다음 번엔 그 놈이 더 재미있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주인은 방 안에서 죽어가는 동물들을 뒤로한채로 집을 나섰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훔쳐오는데 성공했다. 미도리가 갇혀 다른 동물들 ─ 여태 그가 좋은 목적으로 입양해왔다고 속이고 학대에 써먹었던 수많은 유기동물들과 함께 죽어가는 그 방으로 그 못마땅했던 흰 고양이를 데려와 실컷 괴롭혀주는데 성공했다. 고양이는 본능대로 움직이는 생물, 기존에 괴롭혔던 미도리보다도 더욱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시끄럽고 비참하게 구는 꼬라지가 학대파에겐 만족감을 주었다. 

그 만족감도 잠시, 그 만족감을 누리기 위한 행각이 결국 고양이를 잃은 옆집 가족과 경찰과 동물보호단체로 하여금 남자의 덜미를 잡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


실장종 특유의 질기디 질긴 생명과 그 와중에도 활성액 통 안에 무사보관된 위석의 덕이었을까? 미도리 본인은 별로 살고 싶다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미도리는 생존했다. 미도리를 비롯해 아직 살아있던 다른 몇몇의 동물들도 구출되었다. 숫자가 숫자인지라 미도리를 비롯해 동물 5마리 정도만 후타바 보호소로 가고, 같은 방을 썼던 자실장 한 마리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은 니지우라 시 보호소로 갔다. 

후타바 보호소는 동물복지로 유명한 보호소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실장석만큼은 살처분을 하는 곳. 미도리 역시 10일의 공고기한이 끝나면 곧 살처분을 당할 운명이다. 보호소의 동물복지 지침상 보호소 직원들이 심한 학대를 당한 미도리에게 기초치료를 해주긴 했지만 그 이상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미도리 역시 그건 알고 있었다. 그저 조금은 안전한 곳에서 죽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춥다. 추운 건 싫다.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목숨이라면 그래도 조금은 따스한 곳에서 결말을 맞이하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다. 

그러나 미도리는 영민한 실장석. 쓸데없이 인간에게 요구를 해봤자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는건 감으로 깨닫고 있었다. 또 학대파에게 실컷 시달린 후 몰골이 흉칙해져 겨우 목숨붙이나 하고 있는 다 큰 성체실장을 기꺼이 데려가려는 인간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추워도 안전한 성체실장 전용 우리 401호칸에서 죽는 건 자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도리는 누웠다. 바로 지척에서 직원이 저가 있는 칸의 문을 열고 먹이를 담는 소리가 들렸으나 미도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심하게 다친 몸은 조금 치유가 되었음에도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물만 조금 넘겨도 목이 타들어가다가 절개되는 듯이 아파 무언가를 삼킬 수도 없다. 직원들이 간간히 박아주는 영양액(박카스)주사만이 그나마 기력 회복에 미미하게 도움이 되는 수준이었다. 

「기껏 밥을 주셨는데도 못 먹을 것 같아 죄송한데스……다른 칸에 더 배고파하는 동족들이 있으니 괜찮다면 그 동족들에게라도 밥을 주실 수 있는데스카……?」

직원이 문을 닫기 전, 겨우 뒤돌아서서 중얼거리는 미도리. 터무니없는 고통을 터무니없는 이유로 당하고 온 성체실장의 사연을 어느 정도 주워들은 바 있는 여직원은 아무 말 없이 미도리의 말을 들어주기로 한다. 여직원 ─ 시오기는 과거 흑발실장과 그 친실장 유기사건 이후로 실장석이라면 학을 떼게 되었지만 정말 순수하게 착하고 예의바른 미도리만큼은 예외로 두며 나름 안쓰러워하던 터라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따윈 없었다. 대신, 착한 놈은 밥도 못 먹고 저 꼴 나는데 멍청한 딴 놈들만 어부지리행이군 하고 생각하며 미도리의 밥을 밥 달라 꽥꽥대던 옆 칸의 (자를 6마리 정도 싸질러놓은) 친실장에게 다 줘버리고는 성체실장 우리를 떠났다. 

공고기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미도리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좌우지간 남은 건 살처분 뿐이다. 보호소 직원 한 명이 이를 위해 미도리를 끄집어내는 순간, 미도리의 위석도 마침 견디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씩 금이 가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금이 가 모든 것이 끊어지기 전 미도리는 하고픈 말을 떠올렸다. 감히 인간님에게 먼저 말을 걸면 안 된다고 세레브의 덕목을 매사 지침하고 살았지만 여기서 어겨버리다니, 브리더님께 괜시리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도리는 기어이 하고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닝겐상, 앞으로 가게 될 곳은 추운데스카? 춥다면, 춥다면……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더 따뜻한 곳으로 보내주실 수 있는데스카………죄송한데스, 닝겐상에게 먼저 원하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건 알지만, 전에 있던 곳은 너무 추워서……조금만 더 따뜻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하고 그곳에서 늘 빌던게 생각나버렸는데스. 듣지 않은 걸로 하셔도 좋은데스요. 그냥, 그냥………」

죽기 전 말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은데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도리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고 눈을 뜰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녀의 귀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돌이 깨지는 청명한 파열음 한 자락이 들렸을 뿐이다. 암흑, 온도를 느낄 수도 없는 암흑으로 들어가버린 그녀의 영혼. 남겨진 육체를 안아든 시오기는 아무 말 없었다. 


*****


미도리의 사체 처분까지 앞으로 30분. 시오기는 그 틈을 타서 보호소 주변의 문방구점으로 갔다. 때는 마침 추웠는지라 문방구점에는 흔들거나 똑딱이를 켜서 온도를 높이는 싸구려 손난로들이 카운터에서부터 즐비하게 늘어져있었다. 뭐 사러 왔수? 하고 묻는 문방구점 할머니 앞에서, 시오기는 흔들어 파는 봉지형의 손난로 하나를 가리킨다. 

"춥다고 하는 녀석이 있어서, 저거 주려구요" 


미도리의 사체가 다른 실장석들의 사체들과 함께 소각되기 2분 전, 시오기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사온 손난로 봉지를 힘껏 흔들었다. 대여섯 번 흔들리자 일회용 치고는 제법 따뜻한 온기를 뿜어내는 손난로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 손난로를 쥔 시오기의 손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 미도리의 품으로 옮겨간다. 한 손으로 미도리의 한 팔을 들어올리고, 다른 손은 그 팔과 이어진 겨드랑이 부분에 손난로를 끼운다. 어짜피 소각하면서 이보다 더 고온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 

"이렇게 하면, 그 녀석도 좀 더 덜 추울지도 모르지" 

생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실장석의 죽음 이후에 대한 기대를 걸어보며, 시오기는 생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한 원사육실장에 대해 동정을 배풀었다. 그 동정이 담긴 손난로를 한쪽 겨드랑이 안에 집어넣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늘어진 한 원사육실장의 사체는 그 날 죽은 실장석의 사체들과 죽을 예정인 산 실장석 25마리와 함께 소각로로 던져진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후르르르 하고 불이 피어오르며 이내 뜨거운 열기를 담은 불꽃이 빠금빠끔 터져나온다.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는 불 속에서, 미도리와 손난로도 어느새 형체를 감춘다. 

모든 소각이 끝난 후,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사체들이 뒤섞인 잿더미 속에선 왜인지 옅은 옥색을 띈 투명한 작은 돌 여러개가 튀어나왔다. 재들과 함께 영영 땅에 묻힐 위석이 아닌 무언가.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사리라고 부를 지도 모를 그것은 ─ 저의 원본이었던 어떤 실장석의 사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옆구리에 끼고 있었던 손난로만큼 따뜻한 온기를 품은 채, 다른 재들이 식어가는 와중에도 쭉 식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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