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 서바이벌 세트

 


"실장석의 자립심을 길러줍니다"

아무리 진성 애호파라고 하더라도 실장석을 키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많은 노력과 비용을 수반한다. 실장석의 삐뚫어져가는 성격은 둘째치더라도(물론 이게 가장 큰 이유지만), 사료나 간식 및 장난감의 비용, 대변 처리의 번거로움, 위생, 사회적 시선, 반려자의 취향 등 수많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실장식이 성체 사이즈로 커지거나 새끼라도 낳게 되면 키우기는 더더욱 어렵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실장석이 죽지 않는 한 대부분의 실장석은 주인과 이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정이 있다. 사육실장의 99.9997%가 버려진 후 일주일 내에 사망한다. (후생성 조사, '행락철에 버려지는 반려동물 실태조사' 1997년) 그것을 뻔히 아는데 버리는 것은 너무나 찜찜하다. 

바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노리고… 아니,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실장석의 자립심을 길러줍니다'라는 캐치 프라이즈를 건 상품이 나왔다. 로젠사의 '실장 서바이벌 세트'다. 실장석이 홀로 생존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아이템을 포함한 종합 생존도구를 한데 모은 이 상품은 출시 첫 달에 16만개, 그 다음 달에 73만개가 판매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실장 서바이벌 세트





"어디 보자"

남자는 박스를 열었다. 사과상자만한 큼지막한 골판지 상자는 그 자체가 실장석의 집이 될 수 있는, 방수 코팅 된 1호 박스 사이즈의 대형 골판지 상자였다. 박스의 각 끄트머리마다 좀 더 두터운 소재로 보강재가 덧대어져 있는 것이, 상당히 튼튼한 구조였다. 게다가 그 안쪽은 단열재로 뽁뽁이와 펠트지가 붙어있어 제법 방한 대책과 아늑함까지 추구하고 있었다.

"제법이네"

상자 안에 든 물건들도, 우선 성체용 실장사료 2주일 분과 자실장용 실장사료 2주일 분, 휴대용 간이 오리변기, 500ml 빈 생수병 2개, 타올 4장, 신문지 1부, 이쑤시개 10개, 못 1개, 실장 영양제 30알들이 한 통, 실장활성제 15ml, 원래의 실장옷과 같은 재질의 실장옷 2벌, 팬티 10벌, 콘페이토 30개들이 한 통 등 제법 충실한 생존장비, 메뉴얼이 갖춰져 있었다. 

고급형은 미니 실장 침대나 골판지 상자에 붙은, 커튼 장착형의 강화 플라스틱 창문 등 더 다양하고 좋은 아이템들이 들어있다고 하지만 3만엔이 넘는 돈까지 써가면서 고급형을 사기에는 남자의 돈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4천엔짜리 저가형을 사자니 부실할까 싶어 미도리 쨩이 걱정되었다. 1만엔짜리 보급형이 그가 낼 수 있는 한계였다. 

"이만하면 됐다"

마음 한 켠에는 아직도 주저하는 마음이 있지만, 미유키는 실장석을 보자마자 집에서 어떻게 저런 벌레를 키우냐며 정색을 했고, 이제 진지하게 만나기로 한 이상 이 자취방에도 자주 드나들텐데 그때마다 그녀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남자는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했다. 




"데스우…"

영리한 개체인 미도리는 알고 있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기에 의외로 버려졌음에도 그리 슬프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마마의 뱃속에 있을 때 들은 '공원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마저 있었다.

"데슷!"

콘페이토 병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과연 실장 상품의 명가 로젠사답게, 주인이 처음에 병을 따주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덮어놓는' 구조로 병을 쉽게 열고 닫을 수 있기에 실장석들도 그 내용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뭐,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실장 서바이벌 세트 속 실장석이, 메뉴얼조차 읽어보지 않고 그저 세트만 두고 가버린 닌겐상이 처음의 병조차 열어주지 않아 눈 앞에 먹을 것을 두고 굶어죽지만 말이다. 

"우마우마한데슷"

남자에게 키워질 때도 콘페이토는 일주일에 한두번 먹어보는 것이 고작이었던만큼, 스스로 콘페이토를 꺼내어 먹을 수 있다는 기쁨에 미도리는 기뻤다. 앞으로의 '자립적 삶'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다. 게다가 깨끗한 실장옷도 여러 벌이 있다. 정작 사육실장 시절에는 써보지도 못한 오리 변기까지 있다…. 

가장 큰 기대는 자에 대한 기쁨이었다. 주인님에게 길러질 때는 자식의 꿈은 꿀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원한다면 자를 갖고, 키우고 마마가 될 수 있다. 주인님이 담아둔 물도 두 병 가득 있다. 마구 마셔대서야 안되겠지만 당분간은 걱정이 없다. 

'어쩌면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인지도 모르는데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도리는 평소답지 않게 데슷데슷! 하고 크게 소리까지 쳤다. 그리고 그것이 재앙을 불러왔다. 



애호파의 실장푸드 급식을 받으러 몰려갔던 한 무리의 실장석들이 한 알의 실장푸드도 얻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던 중이었다. '기쁨에 넘친 행복의 목소리'로 너무나 건강하게 울어제낀 실장석의 존재에 순식간에 주변의 그 많은 실장석은 귀가 쫑긋해졌다. 

모두가 불행하고 지치고 힘이 든 공원의 들실장 생활. 그런 녀석들에게 있어 '행복의 소리'란 잘해야 콘페이토를 주웠다거나 다른 쓸만한 먹거리를 구했을 때 정도 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은 빼앗아 마땅한 것이었다. 굶주린 실장석들은 일제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로 옆, 긴 풀들이 자란 곳 안쪽에 골판지 하우스 한 채가 놓여진 것을 발견했다.

"대단한 집인 데스…"

우격다짐으로 달려든 들실장들조차 일시적으로 깜짝 놀란, 척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는 골판지 하우스였다. 대다수의 골판지 하우스는 그냥 표면이 누런, 물에 쉽게 젖어버리는 흔한 상품포장용의 싸구려 골판지. 하지만 저런 종류의 골판지는 닌겐들이 애지중지하는 생활 가전제품들에나 쓰이는 방수코팅이 되는 골판지였다. 물론 실장석들이 '방수 코팅'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리 없었지만 어쨌거나 '번들번들하는 골판지 하우스는 물에도 쉽게 젖지 않는 마법의 골판지 하우스'라는 것 정도는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두려운데스"

보통 그런 고급 골판지 하우스는 마라 실장이나 한 실장석 무리의 우두머리 실장석이 갖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만큼 괜히 다가갔다가 마라실장에게 죽임을 당하고 싶지는 않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미도리는 그 안에서 또 한번의 기쁨을 울부짖음을 했다.

"데슷, 데슷!♪"

완전히 행복에 취한 채로, 행복회로까지 풀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육실장인데스"

들실장 중의 하나가 중얼거렸다. 마라 실장, 혹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하면서도 튼튼한 대장급 성체실장의 목소리는 결코 이렇게 기름지고 간드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버려진 사육실장의 것이다… 그것도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갓 버려진 사육실장….

누가 먼저릴 것도 없었다. 주변에 있던 10마리 가까운 들실장들은 일제히 실장 하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무른 이빨과 발을 사용해서 골판지 하우스를 두드리고 깨물었다.



"데스읏!"

갑작스럽게 골판지 하우스를 무섭게 두드리는 수십개의 손발과 질투와 증오에 배고픔에 가득찬 실장들의 울부짖음에 미도리는 곧바로 행복회로에서 깨 현실로 돌아왔다. 

'다른 실장들을 조심해야 해'

주인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못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골판지 하우스를 두드려대고 괴성을 질러대는 들실장들의 습격에 공포에 질린 미도리는 다시 못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자실장 시절 이후 처음으로 빵콘까지 했다.



"데, 데스"

거의 10분 가까이 미친듯이 골판지 하우스를 두드리던 들실장들이었지만, 이 실장 서바이벌 세트의 골판지 박스는 기본적으로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대형가전의 포장에 쓰이는, 매우 두꺼운 골판지다. 적어도 '1만엔'이라는 터무니 없는 폭리를 취함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상도덕은 필요한 법이라 로젠사에서도 신경을 쓴 것이다. 접합부나 골판지 모서리에는 보강재까지 붙인 튼튼한 구조다. 

그런만큼 실장석이 그저 막연히 두드리고 깨문다고 망가질 정도의 내구성이 아니다. 가뜩이나 지치고 배고픈 들실장의 체력으로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포기하는데스…"
"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스"

몇 마리의 들실장이 포기하고 자신의 하우스로 떠났다. 질투와 분노에 빠진 집착의 들실장 몇 마리가 더 그 앞을 지켰지만, 곧 녀석들도 하릴 없이 포기하고 집으로 향했다. 


밤이 깊었다. 미도리는 다른 들실장들이 떠나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 안에서 숨을 죽였다. 잔뜩 움츠린 자세로 그렇게 잠까지 들었다가 깨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하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실장푸드를 꺼내 먹었다.

"우마우…"

허기가 채워지자 자기도 모르게 또 소리를 지를 뻔한 미도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그런 자신을 자책하며 빵콘한 팬티도 갈아입었다. 똥이 투두둑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것은 신문지 조각으로 적당히 문대어 닦았다. 물론 그저 녹색이 똥이 바닥에 번질 뿐이지만 실장석에게 있어서는 '똥을 치우는 시늉을 한다'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생관념이었다. 이는 남자의 훈육이 제대로 먹혀들었고, 그리고 미도리의 지능 또한 흔한 실장샵의 싸구려 개체치고는 기적에 가까울만큼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외로운데스"

제법 넓찍한 골판지 상자라고 해도 그래봐야 좁은 상자 안. 성체 실장이 언제까지고 지내기에는 답답하고 좁은 곳이다. 게다가 이 안에서 얼마나 더 생활할 수 있을까. 사료와 물이 떨어지면 언젠가는 밖으로 나가서 직접 먹을거리를 구해야 한다. 사방에서 골판지를 두드리던 들실장들의 난동을 떠올리자 미도리는 겁이 덜컥 났지만, 또 한 편으로는 밖에서 풀꽃을 구하면 자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나가는데스"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면, 차라리 허탕을 치더라도 이 안에 먹을 것이 있어서 괜찮은 지금이 좋은데스, 라는 것이 미도리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주인님이 주신 무기도 있는 상황… 미도리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때였다.



"냐오오오옹"

여름 밤, 가을 밤이면 창가에서 들려오던 공포의 괴음. 그것이 지금 상자의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미도리는 상자 밖으로 나가려던 생각을 곧바로 접고 못을 놓친 채 바닥에 웅크려 벌벌떨기 시작했다. 미도리 딴에는 들실장 때처럼, 그렇게 시간을 벌면 언젠가 이 괴음의 주인공도 사라질 것이라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지려버린 빵콘이 문제였다.




새벽 사냥을 나온 고양이. 쿠로네코. 버려진지 반 년차에 접어드는 이 흑묘는 그러나 공원의 쥐들과 실장석 사냥 덕분에 현재까지도 생존해 올 수 있었다. 오늘도 하루종일 썩어가는 나무 뿌리 옆에서 아늑하게 잠을 자던 녀석은 슬슬 허기를 느끼고 본능을 쫒아 새벽 사냥에 나선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언제나의 사냥 코스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은 골판지 상자. 호기심에 그 상자벽도 벅벅 긁어보고 냐옹냐옹하고 말도 걸어봤지만 반응이 없어 돌아서려던 차, 익숙한 구린 냄새가 그 안에서 풍기기 시작했다.

본디 실장석의 똥은 진화과정에서 천적들을 쫒기 위해 지독한 냄새를 풍기게 진화된 것. 그래서 위기를 느끼면 실장석들이 빵콘을 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똥냄새를 견디기 힘든 인간들은 실장푸드 안에 그 냄새 중화제 성분을 섞기 시작했고 덕분에 미도리의 똥냄새 역시 그렇게 심한 구린내는 나지 않았다.

내츄럴 본 들실장들과 달리 적당한 냄새의 똥냄새는 오히려 사냥꾼의 본능만을 더욱 강하게 자극할 뿐이고, 절망적으로 굶주린 때가 아니면 실장석을 잘 사냥하지 않는 이 검은 고양이 '쿠로네코'조차 '이번만큼은' 하며 골판지 상자 위에 올라탔다.



보통의 골판지 상자라면, 정방향으로 놓여있다고 쳤을 때 설령 그것이 튼튼한 내구성을 지닌 골판지 상자라도 그 상자가 테이프로 포장이라도 되어있지 않은 이상은 위에서 내리 누르는 힘에 열리기 마련이다. 고양이 정도의 무게라면.

그러나 이 상자는 다르다. 외벽처럼 안쪽에도 몰딩과 상자의 날개를 받아주는 지지대가 있어서, 안에서 걸쇠를 풀지 않는 이상 위에서 적당히 누르는 힘으로는 상자의 뚜껑이 확 안으로 쏟아지지 않는 것이다. 과연 '1만엔'에 대한 가치의 납득을 위한 로젠사의 노력이다.



"데슷!"

이번에는 위다. 미도리는 공포에 질린 채로 못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살짝 빠끔하니 열린 틈 사이로 털복숭이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뾰족한 이빨과 거대한 발톱도 보였다. 미도리에게 있어서 고양이는 태어난 이래 처음보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괴물이었다. 게다가 "냐오오오오" 하는 괴성을 지르며 상자 입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상자의 내구도는 제법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 이 상자는 기본적으로 '들실장의 공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을 목표라 하고 있는 내구성이다. 길고양이나 들개의 공격을 막기 위한 내구도와 장치(상자 윗면에서 시트러스 향이 풍기는 향기 코팅 등)는 3만엔의 고급형에서나 기대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발톱을 세운 고양이의 집중적이고도 적극적인 공격에는 그다지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뻐끔뻐끔 천장이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괴물의 모습. 미도리는 "오로로롱, 오로로롱" 하고 울면서도 저항을 준비했다. 상자 입구가 조금씩 구겨지고 찢기면서 천장의 벌어지는 틈도 넓어져갔기 때문이다. 이윽고 발톱 하나가 천장에서 슥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미도리는 공포에 질려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지만 너무나 생생한 공포에 행복회로조차 전개되지 않았다. 미도리는 자기도 모르게 못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냐오오오오오오오!"

한줄기 피와 괴성이 울려퍼졌다.




쿠로네코는 저 밑의 '퍼런 쥐'가 슬금슬금 보이기 시작하자 더욱 상자 긁기의 즐거움에 박차를 가했다. 골판지를 긁음으로서 발톱의 가려움도 해결하고 식사 시간도 가까워진다. 그런 기쁨에 더욱 긁기를 바삐하던 찰나, 귀여운 앞발의 젤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냐오오오오오오오오!"

아래의 '퍼런 큰 쥐'가 무언가 날카로운 물건으로 자신의 발바닥을 찌른 것이다. 게다가 마침 상자를 긁던 중이라 상처가 길게 생겼다. 쿠로네코는 더욱 분노해서 상자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상자는 금방 피범벅이 되었지만 이 서바이벌 상자의 윗면, 즉, 미도리의 천정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미도리에게도 '괴물'의 머리가 반쯤 보이기 시작했다. 노란 눈알에 마름모 꼴의 눈동자를 보자 미도리는 더욱 큰 공포를 느꼈다. 세상에 저런 어마어마한 괴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아니, 실장샵에 있을 때 '네코'인지 '네로'인지 하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그게 저거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미도리는 연속해서 빵콘을 하며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른 팬티의 무거움을 느낀 채로 하늘을 향해 본격적인 찌르기를 반복했다. 한번 당하고 나자 쿠로네코 역시 고양이의 반사신경으로 녀석의 공격을 피했지만, 문제는 피였다.



살짝 열린 틈으로 고양이 앞발의 피가 후두둑 후두두둑 떨어지며 상자 안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미도리 역시 고양이의 피를 뒤집어 쓰느라 반쯤 귀신 같은 모습이 되었다. 상자 안의 모든 물건에 다 고양이의 피가 뿌려졌다. 



"냐오오오오옹!"

쿠로네코는 드디어 포기했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옹' 하고. 피를 흘리며, 잔뜩 부은 앞발을 잘 디디지도 못하며 결국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실장 서바이벌 키트의 입구는 1/4쯤 벌어진 채로, 그 위에 잔뜩 흐른 고양이의 피가 아직도 안으로 흘러내리며 미도리를 빨갛게 물들여갔다.

미도리는 그 '괴물'이 큰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자 그제서야 안도감을 느끼며 피로와 팬티 무게에 지쳐 쓰러졌다. 




일주일이 지났다. 



미도리는 그 날 이후로 차마 도저히 상자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번 그 '괴물'을 조우할까 두려워 나갈 생각을 못한 것이다. 

2주분의 식량은 반 이상 줄었지만 그래도 절대 다수의 '실장 서바이벌 키트'로 버려진 실장석들이 2주분의 식량을 3일 내에 소진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미도리는 나름 초실장적인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도리 나름대로의 '만약'을 대비한 인내였다. 

게다가 미도리에게는 천운이었던 것이, 불과 하룻밤사이 그 상자 주변에 흩뿌려진 쿠로네코의 피와 털 덕분에, 다른 실장석들이 고양이의 기척을 느끼고는 두려워서 감히 그 주변에 다가서지 못한 것이다. 



천운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개년"

남자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으며 공원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여자친구 미유키가 실장석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큰 돈 들여 실장석 서바이벌 키트까지 사서 잘 키우던 실장석을 버리기까지 했는데… 

알고보니 그 년이 실장석을 싫어한 이유는 전 남친이 실장석을 키우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던데다, 결정적으로 오늘 다시 그 남자랑 만나기로 했다면서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미친 년, 진짜 내가 얼척이 없어서…어어!"

남자는 어디에 두었는지 헷깔려서 한참을 헤메이던 통에, 결국 포기하기 직전 미도리의 상자를 발견했다.

"뭐야"

그러나 상자에는 시뻘건 피가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실장석의 피는 녹색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던 남자였지만, 상자의 입구를 강제로 열어제끼자 그 안에는 미도리가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래! 그래! 와! 이 녀석 진짜!"
"데에?"

잠에서 깨어 살포시 눈을 뜬 미도리. 미도리의 눈 앞에는 꿈에도 그리던, 분명 버려진 첫 날에는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괴물'의 습격을 받은 이래로 매일 미친듯이 보고 싶었던 주인님의 모습이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미도리의 양 눈에서는 적록의 피눈물이 펑펑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다짐했다. 앞으로 다시는 미도리와 이별하지 않겠노라고. 자기가 미친 짓을 했을 뿐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일주일 사이, 살짝 열린 상자의 박스 입구 사이로 날아든 꽃가루에 의해 미도리가 딱히 원치도 않았던 임신을 했고, 그 덕분에 분충 새끼 네 마리를 낳아버리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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