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아아 -
하늘에서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든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구멍이 난 듯이 이미 며칠이나 비가 내리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수분을 흡수한 땅이 도로 뱉어내는 빗물들이 모여서 생성된 작은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져 퐁퐁 소리를 내었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손길은 무력했다. 아스팔트로 포장되지 않은 길은 이미 계속되는 비로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폭우가 괴롭히는 대상은 비단 인간의 작품만은 아니었다. 흙길의 양옆을 따라서 빼곡히 들어찬 수풀과 그 사이에 있는 꽃들도 며칠 동안의 시달림에 지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인간들의 발길도 잠시 끊긴 이 장소에는 어떤 동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길가의 옆에는 성인의 무릎 높이 정도 되는 얕은 흙 언덕이 있었다. 그 낮은 언덕의 하단부에는 수풀에 가려진 큰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에서 한 생물이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색이 다른 양 눈, 의식하지 않으면 다물어지지 않는 세모입, 인간을 엉성하게 닮은 그 이족보행 생물의 정체는 바로 실장석이었다.
구멍의 입구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계속 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친실장의 얼굴엔 근심이 가시질 않았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줄 비가 내린다며 좋아한 것도 잠시, 며칠째 계속되는 비에 친실장은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늘만을 볼 뿐이었다. 작열하는 햇빛에 달궈진 뜨거웠던 대기는 수분을 듬뿍 머금어 고작 며칠 만에 으슬으슬한 한기로 가득 찼다.
기온의 변화는 곧 문제가 되었다. 성체실장인 친실장은 급변한 온도에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으나, 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방금까지 집 안에서 작은 공을 가지고 뛰놀던 장녀와 차녀는 공도 내팽개치고 양팔로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는 조용히 앉아있었다.
땀을 흘리며 논 게 오히려 독이 되었는지 몸을 달달 떨며 이를 딱딱거리는 두 자실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몸을 따듯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한여름, 그리고 사육실장도 아닌 고작 들실장의 집에 그런 물건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한기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두 자실장은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나누었으나 혼자일 때보다 조금 나을 뿐이지 큰 차이는 없었다.
추위에 벌벌 떠는 자들을 본 친실장은 안쓰러웠으나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자들 스스로가 이겨내기를 응원했다.
마치 자신이 어릴 때 겨울철의 추위에 벌벌 떨던 것처럼 추위에 시달리는 자들의 모습에 이전에 인간이 버린 천 조각을 주웠다고 자랑하던 동생의 모습이 친실장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추위 속에서도 그 천 조각을 이용해 따스하게 지낼 동생의 자들을 생각하면 자신도 인간의 물건에 슬며시 욕심이 났지만 안 될 일이었다. 동생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인간들은 필요 없는 물건조차도 자신들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친실장은 과거의 경험으로 그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독립이란 것은 무엇일까. 친실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자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게 되는 자격을 갖춘 시발점일 것이다.
마마에게서 당당히 독립하여 자신만의 삶을 산다는 흥분감, 마마의 자로서 배워왔던 지식을 한층 넘어 살아가면서 마주칠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분신, 자신의 모든 사랑을 베풀 자를 낳아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게 된다는 기대감.
순탄하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기 전까지의 이 시기야말로 실장석의 일생에서 가장 의욕이 넘치고 빛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친실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마의 배웅을 받으며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선 친실장은 곧 동생과도 헤어져 정처 없이 떠돌았다.
자를 낳는 일도 잠시 미뤄두고 여태껏 가보지 못했던 장소들을 돌아다니기에 여념이 없는 친실장의 모습은 자를 가지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를 낳겠다는 마음이 강했기에 그러했다.
자신이 낳을 자들에게 좋은 것만을 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보다도 더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방황 끝에 마마의 집과 꼭 닮은 집을 찾은 후에도 친실장은 오로지 이후에 가질 자들을 생각하며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이곳저곳 배회하던 친실장은 인간의 집 근처 땅바닥에 놔 뒹구는 새거나 다름없는 비닐봉지를 찾았다.
양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당겨도 팽팽한 봉투의 상태를 본 친실장의 입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정도의 자제력도 없었다면 이미 자실장이었을 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봉투를 오른팔에 걸고 날듯한 기분으로 다시 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날은 정말로 행복했었다.
들뜬 마음으로 걷던 친실장은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근처의 수풀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인 친실장이 포착한 소리는 인간의 고성과 어떤 성체실장의 비명이었다.
본래라면 냉정하게 관심을 끊고 피해가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친실장은 오히려 귀를 기울이며 소리의 근원으로 다가갔다.
비명을 지르는 성체실장의 그 목소리는 친실장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착각이기를 바라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친실장은 도중에 성체실장의 비명이 끊기자 반쯤 정신을 놓고 달렸다.
끊긴 비명 대신에 피와 운치 냄새를 쫓아서 친실장이 도착한 그곳에는 한 독라 성체실장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울긋불긋한 몸과 거칠게 뽑혀 한 두올만 남아 있어 더욱더 흉하게 보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독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뜯긴 다리 한쪽과 그곳에서 독라가 쓰러진 장소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피와 운치로 채색된 길.
어찌나 필사적으로 땅을 짚으며 도망쳤는지 독라의 양손은 피투성이였다.
독라의 처참한 모습을 본 친실장은 망연자실하여 독라의 앞에서 주저앉았다. 땅에 쓰러진 독라는 바로 친실장의 어미였다.
터져 나오려는 비통한 울음은 애써 참았지만, 주위를 경계하는 일도 잊은 채 친실장은 멍하니 마마를 볼 뿐이었다.
동생과 함께 독립할 때 자신들보다도 더 기뻐하며 배웅하던 마마였다, 이후 가끔 옛집을 찾아가면 새로 낳은 자들을 기르느라 바쁘면서도 자를 낳지 않고 방황하는 친실장을 걱정해주던 마마였다. 그렇게나 자상하던 마마가 어째서 독라가 되어 쓰러진 것일까.
넋이 나간 친실장이 작게 마마라고 중얼거린 그 순간, 닫힌 눈을 파르르 떨며 죽은 줄 알았던 마마가 힘겹게 눈을 떴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친실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렇게나 두려웠던 것일까, 공포감에 사로잡혀 부르르 떨며 사방으로 눈을 굴리는 마마의 모습은 친실장에게 너무나 낯설었다.
주변을 한참을 살핀 후에 위험을 찾지 못하자 그제야 안정을 되찾은 마마는 늘 보던 자상한 눈빛으로 친실장을 보았다.
옆으로 손을 뻗은 마마는 친실장이 쓰러진 마마에 정신이 팔려 미처 보지 못했던 낡은 그릇을 집어 자신의 자식에게 보였다.
마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애처롭게 그릇을 건네며 집에 남아있는 자에게 갖다 달라며 부탁하였다.
마마와의 이별을 예감한 친실장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릇을 받았다.
언제나 착한 아이였던 널 사랑한다고 작게 속삭이며 머리를 한두 번 쓰다듬던 마마의 손은 이내 힘없이 땅에 툭 떨어졌다.
친실장은 손에 쥔 색도 희미해지고 먼지가 쌓인 그릇을 보았다. 낯이 익은 그릇의 주인을 친실장은 알고 있었다.
여기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인간의 집, 늘 파란색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집에 살던 큰 개가 밥그릇으로 쓰던 그릇이었다.
대문이 열려있기 때문에 지나가다 몇 번이고 시선이 마주쳤지만, 나이가 든 늙은 개는 자신들에게 별 흥미가 없었는지 집 근처로 다가갈 때만 낮게 으르렁거리며 경고할 뿐이었다.
그것도 친실장이 독립하기 전 과거의 일이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찾아왔을 때 그 집에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마가 무엇 때문에 그릇을 들고 도망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필요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썼을 것이다.
더욱이 주인도 없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그릇이었기에 마마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주인도 없이 방치된 고물,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고작 이따위 낡은 그릇 때문에 사랑하는 마마가 목숨을 잃어야 했는가.
제 맘대로 목놓아 울지도 못하는 친실장은 조금씩 차가워지는 마마의 시신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다.
어느덧 지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직은 차가운 저녁 바람이 비통에 잠긴 친실장의 정신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슬프더라도 산자는 살아야 했다. 서둘러 길 근처에 얕은 구덩이를 판 친실장은 마마의 시신을 묻어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 영 떨어지려 하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 마마의 집으로 향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친실장이 집 안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무엇인가 날아와 친실장의 몸에 부딪혔다.
발치에 뒹구는 그 물건은 조개껍질이었다. 친실장이 굽혔던 허리를 펴기도 전에 집 안쪽에서 다시 한번 조개껍질이 날아왔다.
친실장이 말없이 어두운 집 안을 응시하니 안에서 제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자실장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마마의 새 장녀, 한때는 막내 오녀였으며 다른 자들에게 악영향을 주기에 마마가 솎아내려고 했던 분충.
그러나 솎아내기 위해 깨끗하게 씻겨주겠다고 거짓말로 꾀어 분충과 함께 떠났던 여정에서 헥헥거리면서도 불평 한번 내뱉지 않고 따라오는 분충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던 마마는 자신이 더 잘 교육하면 될 거라고 다짐하며 도로 집에 데려오고야 말았다.
안타깝게도 그날 하필이면 나머지 자들이 흔적도 없이 실종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결국 자들을 찾지 못한 마마는 하나 남은 자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사라진 자들에 대한 사랑까지 독차지한 분충의 행실이 더 나빠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왜 마마가 아니라 언니가 왔냐는 분충의 말에 마마는 이제 돌아오지 못한다고 전하는 친실장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마마의 숨겨진 마지막 소망, 분충을 대신 길러 달라는 그 소망은 아무리 마마가 간절히 바라더라도 친실장이 들어줄 수 없었다,
미워도 혈육은 혈육이었다. 홀로 남겨진 분충 자실장의 너무나 뻔한 미래를 알면서도 담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분충이 그러면 마마 대신 목욕을 시켜달라고 말하는 순간에야 친실장은 일의 전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이 분충의 욕심이 문제였다. 진작에 솎아냈어야 했던 분충의 욕심이 마침내 제 어미조차 잡아먹었다.
이를 악물며 화를 억누른 친실장은 한껏 차가워진 말투로 마마는 이제 돌아오지 못하니 목욕도 당연히 할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 통보를 들은 자실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땅바닥을 뒹굴며 마마 대신해달라고 떼를 쓰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떼를 써도 친실장이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자, 분충은 오지 않는 마마를 모욕하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친실장은 어서 아와아와를 내놓으라고 헛소리를 내뱉던 분충의 얼굴에 그릇을 세차게 집어 던졌다.
친실장은 얼굴을 부여잡은 분충을 무시하고 이제 알아서 살라며 일방적인 통보를 한 뒤 뒤돌아 빠져나가려고 했다.
사실 그 순간까지도 친실장은 한줄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걸으며 분충이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고 되묻기를 바라고 있었다.
직접 길러줄 마음은 없었으니 위선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마마의 자가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싶었다.
마마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줄 용의가 기꺼이 있었다.
마침내 친실장의 다리를 분충이 붙잡았다.
그러나 기대감에 찬 친실장을 보며 분충이 한 말은 언니가 마마 대신에 고귀한 자신을 부양하라며 바락바락 악을 쓸 뿐이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운 분충의 말에 한줄기의 정마저 식어버린 친실장은 분충을 냉정하게 걷어차고 집 밖으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걷는 친실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작 저딴 분충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마마, 자신이 사랑했던 마마의 희생은 그렇게 무의미한 일이었다.
마마의 집을 빠져나온 친실장은 그 뒤 두 번 다시는 마마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가슴 아픈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인간의 물건에 손을 대서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인간의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고 인간이 잘 다니지 않는 장소에 버려진 물건만을 찾아다니는 친실장이었다.
이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쓰레기들을 하나씩 모으며 착실히 살림을 마련한 친실장은 이윽고 자를 가졌다.
자들에게 좋은 것만을 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깼지만 친실장은 후회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다음 날부터 찾아든 추위에 떠는 자들의 모습을 봤을 때만 해도 친실장의 마음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대신에 친실장은 자들에게 밥을 더 먹이고 맘껏 뛰놀게 했다. 더 많은 밥으로 뛰놀 힘을, 뛰놀며 추위를 이길 열기를 발산하길 바랬다.
애초에 늦은 출산으로 친실장과 같이 돌아다니기엔 아직 체력이 모자란 자들이 힘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평소보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해도 열정적으로 놀던 자들은 금세 피곤함을 느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친실장은 자들이 성장기라는 걸 고려하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영양공급만 충분하다면 쑥쑥 자랄 시기였다. 자들이 먹을 것에 욕심을 부리진 않았지만, 밥을 먹으며 마음껏 뛰놀수록 자들의 몸은 성장을 위해 더 많은 양분을 요구했다.
결국 그동안 비축해놨던 식량 대부분이 고작 며칠 사이에 크게 줄어들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들실장의 삶에서 보존식이 없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나가 식량을 구해야 하지 않냐는 충동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 비가 잔뜩 내리면 인간들도 잘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너무나 위험했다.
만약 자신이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직 어린 자들은 결국 굶어 죽을 것이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결국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자들을 응석쟁이로 자라지 않게 하려고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 이번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한숨을 내쉰 친실장은 추위에 달달 떨고 있는 자들을 향해 말했다.
" 자들은 이리 오는데스. 마마가 꼭 안아서 따뜻하게 해주는데스. "
바닥에 앉아 서로를 껴안고 추위에 벌벌 떨던 두 자실장은 냉큼 달려와 친실장의 품에 안겼다.
꿉꿉하고 차디찬 몸. 친실장조차 깜짝 놀랄 만큼 자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무 불평도 없이 자들은 묵묵히 추위를 참고 있던 것이다. 친실장은 자들의 인내심이 대견스러워 손으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자신들을 감싼 친실장의 체온에 몸이 녹는 것을 느끼며 두 자실장은 좀 더 친실장에게 몸을 기대왔다.
친실장과 자들은 서로를 껴안고 온기를 나누었다. 고요해진 집에는 오로지 작은 숨소리와 밖에 내리는 빗소리만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자들의 심장 박동을 듣고 있던 친실장은 지긋한 시선을 느끼고 눈을 떠 자들을 내려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친실장의 품이 주는 따스함에 푹 빠진 차녀와는 달리, 장녀는 시선을 위로하여 조용히 친실장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장녀의 두 눈엔 어떠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 장녀. 마마에게 바라는 게 있는데스 ? "
" 따뜻하니까 졸린테치. 마마가 자장가를 불러줬으면 좋은테치. "
장녀의 요구는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졸린 자들이 꿈나라에 한 다리를 걸쳤을 때 자장가를 불러주는 일은 늘 해왔던 일이었다.
친실장은 조심스럽게 몸을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마마가 바닷가에~ 밥 찾으러 가면~ 자들이 집에 남아 기다리다가~ "
" 큰 물씨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자들은 스르르르 잠이 드는데스~ "
간단하고 짧은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던 친실장은 이쯤이면 되었거니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졸려 하던 장녀는 오히려 잠이 달아난 듯이 아주 쌩쌩해 보였다.
" 마마, 그런 노래는 어디서 배운테치? "
난감해하는 친실장을 호기심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보는 장녀는 언젠가 꼭 물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드디어 꺼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친실장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장녀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 예전에 닝겐의 사육실장이었던 한 마마가 자들에게 가르친 노래인데스.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낳을 자들에게 가르쳐 주는데스. "
" 테에? 사육실장인테치? "
인간에게 길러지는 것.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그 소망은 어찌 보면 저주와도 같이 실장석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총명했던 장녀도 노래를 가르쳐주라는 당부는 모조리 잊고 사육실장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이 몽롱해졌다.
그것은 친실장이 절대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 안 되는데스! 사육실장 따위는 꿈도 꾸지 마는데스! "
" 테에에? " " 테챠아앗? "
상상 속에서 사육실장이 되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던 장녀는 갑작스러운 마마의 호통에 크게 당황했다.
이미 졸고 있던 차녀는 친실장의 호통에 깜짝 놀라 비명까지 질렀다. 하반신에서 쉭쉭 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까 볼일을 보지 않았다면 분명히 운치를 팬티에 지렸을 것이다.
" 닝겐들은 악마인데스! 그 노래를 자들에게 가르쳐준 마마가 어떻게 된지 아는데스? 절대로 닝겐의 근처에도 가면 안 되는데스! "
이토록 불같이 화내는 친실장의 모습을 본 적 없는 자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 것도 한순간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에 자들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 그 마마가 누구인테치? 마마의 마마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고 마마가 알려주지 않았던테치? "
" 와타치도 궁금한테치.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면 그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던 건 마마 아니었던테치? "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던 친실장은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자들의 반응에 정신을 차리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 아직 자들에겐 이른 이야기인데스. 자들이 더 자라면 그때 이야기해주는데스. "
" 그래도 알고싶은테치! " " 말해주는테치! "
두 자매는 평상시에도 호기심이 많아 친실장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바빴다.
사육실장에 대한 호기심에 강하게 사로잡힌 자매들은 좀처럼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골몰하는 친실장의 몸에 얼굴을 문대었다.
팔짱을 끼고 엄한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다가 자들의 애교에 껌뻑 넘어가 버려 얼굴이 풀어진 친실장은 결국 자들의 새로운 궁금증을 채워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일이었으니 미리 가르친다고 나쁠 일은 없었다.
"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스. 마마의 마마의 마마의 마마의... 이곳에 사는 모든 동족의 마마인 세레브 마마가 있던데스."
" 세레브 마마는 닝겐에게 선택받기 위한 실장석들이 모여있는 ' 실장샵 ' 이란 곳에서 살았던데스. 그런데 같이 닝겐에게 교육받던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씩 닝겐에게 선택받아 떠났는데도, 세레브 마마는 늘 선택받지 못해서 남아야 했던데스. "
" 어느새 세레브 마마는 어른이 되버린데스. 어른이 되면 사육실장이 되기 힘들다고 세레브 마마를 가르치던 닝겐이 말했던데스. 그래서 세레브 마마는 필사적으로 선택받기 위해 애썼지만, 선택받는 것은 세레브 마마를 비웃으며 떠나는 어린 자들이었던데스. "
" 그러던 어느 날, 한 닝겐이 찾아온데스. 그 닝겐은 세레브 마마를 보더니 사육실장으로 길러주겠다고 세레브 마마를 선택한데스. 닝겐은 집으로 돌아간다며 배라고 하는 물씨 위를 달리는 아주 큰 물건으로 세레브 마마를 데려간데스. 집에 도착할 떄까지 조용히 있으라는 닝겐주인의 말에 세레브 마마는 조용히 닝겐주인의 품에 안겨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던데스. "
" 그 행복한 상상은 닝겐주인의 집에 도착한 뒤 박살난데스. 닝겐주인은 도착하자마자 세레브 마마의 옷을 찢어버리고 목에 파란색 비닐로 된 줄을 채우더니 기둥에 줄을 묶고 좁은 집에 가둔데스. "
" 테에에? "x2
세레브 마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던 장녀와 차녀는 갑작스럽게 비참한 신세로 몰락한 세레브 마마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입고 있는 실장복을 내려보며 옷이 무사한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 그리고 그 닝겐주인, 아니 똥닌겐이 무슨 수작을 벌였는지 자고 일어난 세레브 마마는 자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던데스. 좁은 곳에 방치되어 똥닌겐에게 어떤 관심도 받지 못했지만 세레브 마마는 자를 가진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떳던데스. "
" 시간이 지나고 세레브 마마는 자를 낳은데스. 머리카락도 없고 헐벗은 세레브 마마를 보고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는 아주 착한 자들이었던데스. 세레브한 집도, 가지고 놀 장난감도, 주인의 사랑도 없었지만 자와 함께 있는 것으로도 세레브 마마는 행복했던데스. "
" 비극은 얼마 후에 일어났던데스. 세레브 마마가 낳은 자를 본 똥닌겐은 자들이 필요하다며 세레브 마마한테서 자들을 전부 데려 간데스. 세레브 마마는 불안했지만 착하고 귀여운 자들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들을 똥닌겐에게 넘긴데스. "
" 자들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데스. 해 씨가 모습을 감추고 달님이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던데스. 세레브 마마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마침내 똥닌겐이 나타난데스. 자들은 어떻게 됐냐고 묻는 세레브 마마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똥닌겐은 밥이나 먹으라며 세레브 마마의 말을 무시하더니 그릇에 음식을 붓고 들어가버린데스. "
" 자들이 돌아오면 함께 먹겠다고 생각한 세레브 마마였지만 밥에서 풍기는 냄새는 참기가 힘들었던데스. 꼬르륵거리는 배씨를 붙잡고 견디던 세레브 마마는 결국 한 입만 먹겠다며 그릇에 손을 가져간데스."
" 똥닌겐이 그릇에 두고 간 것은 고기였던데스. 입가에 흐르는 침을 삼키며 고기를 먹으려던 세레브 마마는 고개를 갸웃거린데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지가 않았던데스. 고기가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달빛에 고기를 비춘 세레브 마마는 비명을 지른데스. "
" 그 고기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녀의 머리였던데스. 똥닌겐이 밥이라고 한 것은 세레브 마마가 낳은 자들의 머리였던데스. "
친실장은 마마에게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슬쩍 자들을 살폈다.
다행히도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을 위한 이야기에 자를 잃는다면 정말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
자들이 무사한 것에 안도한 친실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 다음날에 밥을 주려고 다시 온 똥닌겐에게 자들을 살려내라며 화를 내는 세레브 마마에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던데스. 세레브 마마는 그릇에 담겨있던 자들의 머리를 쓰레기봉투에 넣는 똥닌겐을 보며 정신을 잃은데스. "
" 저녁이 되어서야 간신히 눈뜬 세레브 마마는 아픈 몸을 살피다가 자신의 배가 불러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데스. 혼란에 빠져서 잠시 멍하니 있던 세레브 마마는 뱃속의 자들에게 태교를 하면서 다시는 똥닌겐에게 자를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데스. "
" 두 번째 자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똥닌겐이 다시 찾아온데스. 이번에는 자들을 넘기지 않겠다며 격렬히 저항한 세레브 마마였지만 똥닌겐에게 심하게 맞고 자들을 강제로 뺏긴데스. 정신을 차렸을 때 자들은 다 사라지고 또 배가 불러있던데스. "
" 그때서야 세레브 마마도 깨달을 수 있었던데스. 자신은 사육실장으로 닝겐에게 선택받은 게 아니었던데스. 똥닌겐의 집은 지옥이었던데스. "
" 똥닌겐은 갈수록 악독해진데스. 언젠가부터는 아예 세레브 마마의 앞에서 자들을 독라로 만들고 끌고 가더니, 더 나중에는 두들겨 맞아 움직이지도 못하는 세레브 마마의 앞에서 대놓고 자들을 산채로 요리해서 잡아먹은데스. "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레브 마마는 먼저 간 자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자를 뺏긴 뒤 다시 눈뜨면 이미 뱃속에서 꿈틀대는 또 다른 자들이 있어서 피눈물을 흘리며 참아야 했던데스. 그 대신 세레브 마마는 몰래 주은 돌멩이로 자신을 묶고 있는 줄을 조금씩 잘라서 탈출을 시도한데스. "
" 불행히도 세레브 마마는 다음번 출산까지 탈출하지 못 한데스. 자를 내놓으라며 손을 뻗는 똥닌겐에게 체념하며 자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데스. 눈앞에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먹히는 자들을 애써 외면하는 세레브 마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데스. "
" 웬일인지 똥닌겐은 자들을 잡아먹고는 그대로 집에 들어가버린데스. 자들을 낳아 지쳐 있었지만, 자가 배 속에 있을 때보다는 몸이 더 가볍고 힘이 나는 것을 세레브 마마는 알고 있던데스. 똥닌겐이 방심한 틈을 타 세레브 마마는 기어코 줄을 끊고 탈출한데스. "
" 똥닌겐의 집에서 탈출했지만 세레브 마마의 삶은 고달팠던데스. 밖에서 사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세레브 마마는 밥을 구하는 방법도 몰랐고, 자를 기르는데 필요한 지식도 부족해서 자를 가지고도 빈번히 자를 잃어야 했던데스. "
" 그래도 세레브 마마는 포기하지 않은데스. 힘들다고 포기한다면 똥닌겐에게 속아서 목숨을 잃었던 자들에게 할 말이 없었던데스. 그런 세레브 마마의 노력이 마침내 빛을 봐서 다섯이나 되는 자들 모두를 독립시킬 수 있었던데스. "
" 그 세레브 마마의 독립한 자들이 다시 자를 낳고 그 자의 자들이 또 자를 낳고... 그리고 와타시가 자를 낳아서 장녀와 차녀가 나온데스. 옛날이야기는 잘 들은데스? "
" 그래서 세레브 마마는 어떻게된테치? 그 뒤로도 자를 낳으며 행복하게 산테치? "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장녀의 말에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친실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색이 어두워진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친실장은 마지못해 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 ... 세레브 마마는 자들을 독립시키고 새로 낳은 귀여운 자들과 살다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똥닌겐에게 끌려간데스. 그리고 세레브 마마의 자들 중 누구도 다시는 세레브 마마를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지는데스. "
모든 친실장이 자신의 자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실장석 특유의 나약한 정신력 때문에 보통은 자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밑도 끝도 없는 망상의 연속이 대부분이며, 현명한 친실장들이 교훈을 주기 위해 하는 이야기도 고난 끝에는 행복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들려준 과거의 잔혹한 이야기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행복조차 곧바로 들이닥친 비극으로 끝나버린 낯선 구조였다.
역시 아직은 자들에게 가르치기엔 일렀을까. 친실장은 겁에 질린 자들을 꼭 껴안으며 달랬다.
" 집에 있으면 자들은 안전한데스. 그리고 닝겐이면 모를까 닝겐의 자 정도는 마마한테 상대도 안 되는데스! 마마는 무적인데스! "
근거 없는 망상은 아니었다. 걷다가 지쳐 업어달라고 칭얼거리는 자를 달래다가 마주친 소녀를 위협해서 쫓아냈다고 동생이 자랑스럽게 말했으니 자신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친실장이었다.
물론 소녀가 단지 자실장의 울음소리에 궁금해서 다가왔다가 친실장의 동생이 던진 운치에 맞을까 봐 그냥 발걸음을 돌린 사실을 친실장의 동생도, 친실장도 알 턱이 없었다.
친실장은 각각의 팔에 자들을 끼고는 위로 들어 올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그 단순한 동작이 사뭇 재밌는지 자들은 웃으며 즐거워했다. 즐거워하는 자들의 모습에 힘이 난 친실장은 몇 번이고 자들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친실장은 자를 재우려던 일도 까맣게 잊고는 온 힘을 다해 놀아주었다.
친실장 일가의 집은 곧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물론 아무리 즐거워도 한계는 있었다. 신나게 놀던 자들은 체력이 고갈되어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자들에게 다시 한번 자장가를 불러 확실히 잠재운 친실장은 두 자매를 각각 한쪽 팔로 끌어안고 자신도 바닥에 몸을 뉘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디찬 기운에 즐거운 기분에서 깨어 마음 한편에 미뤄둔 현실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잠든 자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헤쳐나가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내일은 꼭 비가 그치길 간절히 바라며 친실장은 조용히 눈을 붙였다.
- 쏴아아 -
모두가 잠든 시각에도 비는 기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 그럼, 다녀오는데스. "
친실장의 소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다음날 친실장이 눈을 떴을 때는 지긋지긋한 비가 그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보존식을 쪼개어 아침을 먹은 친실장은 자장가를 불러주어 다시 곤히 잠든 자들을 뒤로하고 집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태양은 친실장의 손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아침인데도 제법 뜨거운 열기가 공기 중에 맴돌았다.
더욱이 비를 퍼붓던 먹구름이 남기고 간 수분까지 합쳐져 가만히 있음에도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은 날이었다. 입구에 걸터앉았던 친실장은 조심스럽게 발을 아래로 내디뎠다.
- 철퍽 -
" 데에... "
밑으로 쑥 가라앉던 발을 빼서 걸음을 옮기는 친실장의 신발이 금세 진흙으로 더럽혀졌다.
질척거리는 땅바닥은 걷기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신발 안에 진흙이 조금씩 들어가 기분까지 나쁘게 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큰비가 내린 다음엔 기회도 같이 찾아왔다.
파도가 거세게 친 다음 날이면 바닷가에 평소보다 많은 식량은 물론이고 쓸모 있는 물건도 같이 떠내려오곤 했다.
오늘도 인간과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친실장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어느덧 중천에 걸린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지만, 공기는 여전히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체온을 유지하는 방법이 원시적인 실장석들에게 며칠이나 계속 내리던 비도 제법 위협적이었지만 정말 위험한 것은 더위였다.
기승을 부리며 비를 퍼붓던 장마전선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뜨거운 공기는 대기를 떠도는 수분을 순식간에 달아오르게 했다
집 안에 있어 직접적인 햇빛에 닿지는 않았지만 바람을 타고 찾아오는 꿉꿉하고 더운 공기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바다의 비린내와 여름 공기의 뜨거움이 결합한 불쾌한 공기에 잠에서 깬 장녀는 졸린 눈을 손으로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마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테치? '
자리에서 일어나 집의 입구까지 걸어간 장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친실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한여름의 후끈한 바람이 다시 한번 장녀의 몸을 희롱하듯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불쾌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린 장녀는 손을 살짝 뻗어 온도를 가늠하고자 하였다.
아직 어린 자실장에게 여름의 햇빛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손에 깜짝 놀란 장녀는 급하게 손을 뺐다.
화끈거리는 뜨거운 손을 식힐 방법을 찾지 못한 장녀가 입으로 호호 불며 달아오른 손을 식히고 있을 때, 누군가가 콕콕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 더위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차녀가 고무공을 들고 장녀의 뒤에 있었다.
" 오네챠 심심한테치. 와타치랑 공놀이 하는테치. "
공놀이라는 말에 순간 혹한 장녀였으나, 비어가던 보존식을 떠올리고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차녀를 나무랐다.
" 안 되는테치! 잡에 보존식이 이제 얼마 없으니 이모우토챠도 쓸데없이 힘 뺴지 말고 다시 자는테치! "
완강하게 거절하며 도로 몸을 뉘이는 장녀에게 실망해 귀가 축 늘어진 차녀는 작은 공을 벽에 던지며 혼자서 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공놀이를 하는 차녀의 행태를 장녀도 알고 있었지만 내버려 두었다. 심심한 건 장녀도 마찬가지였다.
한날한시에 간발의 차이로 먼저 태어나 윗사람의 행세를 하는 것은 제법 우스운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갓 태어났을 무렵에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친실장의 지속적인 교육과 맏이로서 책임감은 장녀 스스로의 사고를 더 성숙하게 했다.
철이 든 장녀는 차녀에게 우월감을 느끼거나 업신여기지는 않았다. 차녀도 얼른 철이 들어 마마의 고생을 이해하길 바랄 뿐이었다.
눈을 감고 몸을 뒤척이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장녀와 혼자서 외로이 공놀이하다가 흥미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은 차녀.
두 자매는 여느 때와 같이 친실장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친실장의 집 앞을 통과하는 길 위를 두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 샌들로 복장을 통일한 두 소년은 외모 또한 비슷했다.
그런 두 소년을 구별하는 것은 키와 분위기였다. 느긋한 표정으로 뒷목에 깍지를 끼고 앞장서 걷는 큰 소년과는 달리 손에 투명한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있는 작은 소년은 얼굴에 떠오른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이마를 빈손으로 훑어 땀을 닦아낸 작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 형, 또 여기야? "
" 응, 굳이 멀리 갈 필요 있겠어? "
" 그래도 아빠랑 다른 아저씨들이 한 곳에서만 가져오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아빠가 알면 혼날 거야. "
"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빠도 지난번에 잘 잡아왔다고 칭찬했잖아. 혹시 들켜서 혼나면 이 형이 책임질게! "
말을 두런두런 나누며 걷던 두 형제의 시야에 얕은 흙더미가 들어왔다. 친실장의 집이 위치한 바로 그 흙더미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두 소년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접근했다. 집으로부터 불과 한두 발자국 거리까지 접근한 두 형제는 걸음을 멈췄다. 작은 소년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고는 팔을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 자, 그럼 시작해볼까? "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은 큰 소년은 입을 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멍하니 집안을 뒹굴던 장녀와 차녀는 갑자기 들리는 노랫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친실장이 그토록 피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간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니...닝겐인테치? "
" 어떻게 하는테치 오네챠? 어떻게 하는테치! "
당황한 차녀는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는 공도 던져버리고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장녀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친실장이 가르쳐준 지식은 밖에서 돌아다니면 위험한 인간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했지 집에 인간이 찾아온다고 말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작은 머리를 굴린 장녀는 친실장이 부재 시에 위험이 닥쳤을 때의 행동요령을 간신히 떠올렸다.
" 조.. 조용히 있는테치. 조용히 있으면 닝겐들도 와타치타치를 찾기 못하고 가버리는테치. "
" 아..알겠...읍!"
무심코 대답하려는 차녀의 입을 손으로 급히 막은 장녀는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공포에 질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차녀는 입에서 느껴지는 장녀의 체온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자실장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 집 안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흙으로 된 벽에 등을 기댄 두 자실장은 서로를 껴안고 얼른 인간들이 사라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자매들의 바람과는 달리 집 밖의 인간들은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
"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깥을 경계하던 장녀의 귀에 소년들이 부르는 노래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금세라도 들이닥칠 것 같던 인간이 가만히 노래만 부르자 털끝까지 곤두섰던 장녀의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다.
장녀는 인간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왠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은 것 같았다.
그래 마치...
' 마마의 노래랑 비슷한테치. '
인간이 부르는 노래는 친실장이 자들을 재우기 위해 부르던 그 자장가와 흡사했다. 그리고 그 익숙한 안락함이 장녀에게 서서히 졸음을 불러오고 있었다.
' 아.. 안 되는테치! 자면 안 되는테치! '
소스라치게 놀란 장녀는 고개를 좌우로 털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썼으나,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경계가 풀어진 상태에서 졸음을 뿌리치긴 쉽지 않았다.
이미 차녀가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것을 장녀도 뒤늦게 깨달았지만, 동생을 깨우기엔 자기 일도 버거웠다.
반쯤 졸면서 잠에서 깨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녀.
자고 싶다는 신호를 억지로 계속 무시하여 뇌에 부하가 걸려오자 장녀의 뇌는 상황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친 장녀의 뇌는 저항하기보다는 편안히 잠을 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 무의식의 영향을 받은 장녀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발견되면 끝장이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집은 안전한 장소다. 자신은 집 안에 있다...
' 집안이니까 괜찮은테치. 자고 일어나면 마마한테 닝겐들이 찾아왔다고 말하는테치. '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수면욕에 굴복해버린 장녀는 결국 스르르 잠에 빠졌다.
한편, 집 밖에서는 두 소년이 교대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큰 소년의 차례가 돌아오자 노래를 멈추고 교대한 작은 소년은 흙더미에 올라 귀를 지면에 가깝게 하고 집중했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하고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 시간이 흘러 작은 소년은 마침내 자실장들이 작게 코를 고는 소리를 잡아냈다.
작은 소년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큰 소년은 노래를 멈췄다.
한걸음에 흙더미에 올라간 큰 소년이 손을 뻗자 작은 소년은 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에서 작은 모종삽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흙더미의 상부를 삽으로 이곳저곳 쑤시던 큰 소년은 삽의 끝에 닿는 이질감을 포착하자 그 주위를 몇 번 찔러보더니 그곳을 중심으로 흙을 양옆으로 거둬내기 시작했다. 그 능숙한 손길에 오래지 않아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흙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큰 소년이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히 뚜껑을 들어 올리자 서로 껴안고 잠들어 있는 자실장 두 마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을 안으로 넣은 작은 소년은 잠들어 있는 자실장 자매를 꺼내어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자신들이 인간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두 자매는 입맛을 다시며 꿈나라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안에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뚜껑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큰 소년은 흩어놨던 흙들을 도로 관 위에 덮었다.
마무리도 흙을 발로 밟아서 땅을 다진 큰 소년은 손에 삽을 들고 흙더미에서 내려와 걸어왔던 길을 도로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작은 소년도 바구니를 챙겨서 서둘러 큰 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낯선 방문자들은 그렇게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 데샤아아앗! "
" 응? " " 아, 이런... "
두 소년이 돌아본 뒤에는 땅에 내팽개쳐진 미역이 가득 찬 봉투와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한 성체실장이 있었다.
친실장은 평소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위를 먹은 것도 아닌데도 오늘따라 이유도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에 아쉬움을 접고 이른 귀가를 결정했다.
서둘러 귀가한 친실장은 집을 얼마 앞두고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몸을 잔뜩 낮춘 친실장의 앞에 인간의 발이 나타났다. 두 소년은 친실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흥얼거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두 소년의 등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친실장은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익숙한 냄새가 두 소년에게서 나고 있었다.
두 소년이 걸어오던 방향에 자신의 집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친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힘겹게 두 소년의 보폭을 쫓아가던 친실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두 소년 중 작은 소년, 그 소년이 들고 있는 투명한 바구니 안에 두 마리의 자실장이 잠들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소중한 자들, 장녀와 차녀의 냄새가 바로 그 통에서 나고 있었다.
다급한 친실장은 어깨에 멘 봉투도 내팽개치고 고함을 지르며 두 소년에게 뛰어갔다.
" 데샤아아앗! "
" 오마에타치는 뭐인데스! 왜 와타시의 자들을 데려가는데스! "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두 소년의 앞에 도착한 친실장은 팔을 붕붕 흔들며 화를 냈다.
그러나 두 소년은 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친실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형, 쟤는 뭐라는 걸까? "
" 음, 내가 맞춰볼까? 똥닌겐은 고귀한 와타시에게 우마우마한것을 바치는데스! 감히 와타시의 소중한 자를 납치한 죄는 용서하기 힘들지만, 먹을걸 바치면 특별히 오마에타치에게 와타시의 자를 기를 영광을 주는데스! "
" 이야, 진짜야? 되게 나쁜 녀석이네. 먹을 걸 받고 자식을 파는 거야? 완전 엄마 실격이잖아? "
킥킥거리는 두 소년의 대화를 듣는 친실장은 어이도 없고 울분이 치솟을 뿐이었다.
" 무슨 미친소리를 하는데샷! 세상에 자들과 먹을 것을 비교하는 마마가 어디있는데스! 당장 와타시의 자들을 풀어주는데스! "
" 뭐라는지는 모르겠는데 안 들리거든요~ 그리고 맛있는 거 안 줄 거거든요~ "
자신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계속 빈정대는 큰 소년의 태도에 친실장은 점차 초조해졌다.
자신에게 별로 우호적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자들. 혹여나 저들이 해코지한다면 자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자신이 지른 소리에 인간들이 든 통 안에서 잠들어있던 자들이 깨어나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망설이던 친실장은 제자리에 머리를 박고 두 소년에게 엎드려 절했다.
" 와타시가 잘못한일이 있다면 사과하는데스. 부디 자들을 돌려주는데스. "
" 형, 쟤가 절하는데? 저건 무슨 의미야? "
두 소년이 성체실장이 나간 틈을 타 자실장들을 잡아갔던 일은 여러 번이었지만 성체실장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들실장이 살기 좋은 공원이 있는 도시라면 모를까 섬이라는 환경에서 작은 소년이 성체실장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큰 소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자신보다는 더 많이 알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 작은 소년은 궁금함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동생의 질문에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하던 큰 소년은 입을 열었다.
" 몇 달 전에 전학 온 영수 알지? 걔가 전에 도시에 살 때 실장석을 애완동물로 길렀다고 하더라고. 영수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말이야, 실장석이란 녀석들은 저렇게 자신에게 불리하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리면서 엎드린다고 하더라. "
" 그런데 속지 말랬어. 이것들은 행동은 그럴싸하게 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속으로는 딴생각 중이거든. 아마 속으로는 새끼들을 잡아가는 우리를 욕하고 있을걸? 새끼 때문이 아니라 왜 자신에게 먹을걸 안주냐고 말이지. 자기만 생각하는게 실장석이란 녀석들이랬어. 저 녀석도 가만히 있으면 눈치를 보기 위해 고개를 슬쩍 들어서 ' 흘끔 '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일걸? 안 속지, 안 속아. "
대놓고 자신을 모욕하는 큰 소년의 말에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참아야만 했다.
열불이 치밀어 올랐지만, 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이를 악물어 간신히 화를 참은 친실장은 여전히 엎드린 채로 소년들에게 빌 뿐이었다.
" 부탁인데스. 와타시는 지금까지 자들을 너무 많이 잃은데스. 그 자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데스. 제발 돌려주는데스. "
그러나 친실장의 거듭된 간청에도 하품하며 흘려듣던 큰 소년은 심드렁한 눈으로 친실장을 보며 말했다.
" 음, 미안한데 분충씨? 우리가 좀 바빠서 말이야. 맛있는 건 지나가는 친절한 사람한테 받으라고. 알았지? 그럼 안녕~ "
큰 소년은 그렇게 말을 마치곤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절하는 친실장을 흥미롭게 보던 작은 소년도 그 뒤를 따라갔다.
자신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떠나가는 두 소년의 모습에 억누르고 있던 친실장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 데샤아앗! "
포효를 지르며 달려간 친실장은 큰 소년의 발에 주먹을 날렸다.
친실장의 크게 휘두른 팔이 샌들 밖으로 노출되는 소년의 맨발을 정확히 강타했다.
그러나 친실장의 온 힘을 다한 주먹질에 맞은 소년도, 그 옆의 작은 소년도 피식 웃기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친실장의 자들은 친실장의 공격이 아무 피해를 줄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소년의 발에 눈을 고정하고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두르며 소년을 때려눕히려 애쓰는 친실장만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두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소년의 발을 두드리던 친실장은 거친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나 소년과 거리를 벌렸다.
헥헥거리며 숨을 고르면서도 친실장의 눈은 소년의 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큰 소년은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띠며 일부러 발을 찔끔찔끔 움직여 마치 발이 너무 아파 움찔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당연히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친실장은 몸에 힘이 솟는 것을 느끼며 온 힘을 담아서 주먹을 휘둘렀다.
" 마무리인데샷! "
자신에게 달려오는 친실장을 보며 하품하던 큰 소년은 다리를 접어 무릎 높이로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눈앞에서 갑자기 발이 사라지자 당황하여 멍하니 서 있는 친실장의 몸을 발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 데? "
잠시 공중을 비행하다가 땅바닥에 떨어지고도 친실장은 왜 자신이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 너무나도 멍청한 모습에 키득거리는 두 소년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친실장은 몸을 일으켜 큰 소년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도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 데? "
다시 일어나서 달리려던 친실장은 또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땅에 엎어졌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땅에 고꾸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깜빡이던 친실장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친실장은 그제야 한 다리에서 뼈가 튀어나오고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에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이 친실장을 덮쳐왔다.
" 데갸아악! "
" 마마! x2 "
친실장이 꺾인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땅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사이에 이미 흥미를 잃은 소년들은 몸을 돌려서 떠나가고 있었다.
얼굴에 황망함이 떠오른 친실장에게 소년들은 손을 흔들며 밝게 인사했다.
" 매번 고마워~ 이번에도 실례할게! "
" 다음에는 좀 더 많이 준비해주면 좋겠어! 동생이 운동을 시작해서 전보다 많이 먹거든! "
소년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소중한 자들을 마치 물건처럼 여기며 앗아가는 그 말. 그 말속에 담긴 소년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차가운 비수로 변해 친실장의 가슴에 박혔다. 친실장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 데.... "
친실장은 전부터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음식을 모으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들을 찾아 온갖 장소를 헤매다가 목숨을 잃을 뻔하기를 여러 번, 계속되는 자들의 실종에 가슴 아파하던 친실장은 자들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밖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결론을 지었었다.
마마라면 자를 기르고 독립시켜야 했다. 단순히 밥을 주고 머물 공간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마마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반복되는 실종사건에 친실장이 도출한 해답은 더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이전보다 더 빨리 집에 귀가하여 자들과 떨어지는 시간을 줄이고, 자들을 더 열심히 가르치고 자들과의 교감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전보다 몸은 더 피로해졌지만 착한 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면 그런 피로감이 싹 날아가곤 했다.
오로지 자들을 위해서 인간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도 깨고 집에 몰래 침입해 자들이 가지고 놀 공도 챙겨왔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작은 인간들의 말을 듣는 순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은 다 인간의 짓이었음을.
비록 괴롭게 살아가더라도 어딘가에서 살아있기를 바랐던 자들은 이미 잔인한 인간들에게 잡아먹혀 끔찍하게 살해당했음을.
상심한 자신이 또 다른 자들을 잉태하여 태교하고 있을 무렵에, 잡혀갔던 자들은 구하러 오지 않는 마마를 원망하며 죽어갔음을.
' 어째서인데스... 와타시는 닝겐들에게 피해를 준 적 없던데스. 자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데스. 그런데 어째서... '
친실장은 알지 못했다. 소년들이 친실장의 집만을 들렸던 이유는 단지 귀찮아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왔을 뿐인 것을.
남들보다 노력하며 애지중지하며 키운 그 극진한 사랑의 결과물, 다른 동족들이 기르는 또래의 자들보다 더 크고 통통하게 살이 올랐던 자들의 발육상태가 오히려 두 소년의 눈길을 끌 게 되었다는 것을.
점차 흐려져 가는 친실장의 두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더욱 짙어졌다.
구해달라며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자들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친실장은 움직이지 않고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감히 인간을 이길 수 있다고 망상했던 적은 없다. 그래도 인간의 자라면 자신이 사력을 다한다면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것이었다. 자신은 인간의 자에게조차 상대되지 못했다.
인간을 꺼리며, 인간을 두려워하며 피했던 것. 그에 자연스럽게 생긴 인간에 대한 무지가 이런 치명적인 오판을 낳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몸도 엉망이 되고 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만약에 작은 인간들을 몰래 따라갔다면 있었을지도 모를 기회, 자들을 구할 실낱같은 기회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친실장은 깨닫고야 말았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오늘의 발견은 어디까지나 우연. 지금까지 몰래 자들을 데려갔던 인간들이니 다음번부터는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을 쉬운 먹잇감으로 보고 덤비는 많은 동물처럼, 인간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무자비한 인간들에게 자를 지킬 힘이 없다. 무력하게 자를 뺏기고, 인간들을 원망하며 울기만 할 것이다.
즉,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자를 독립시킨다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은 마마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었다.
' 자들.... 마마는... 더는... '
땅을 짚고 있던 친실장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친실장의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땅에 얼굴을 처박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 파킨 -
" 어? 형! 저녀석 쓰러졌는데? "
" 뭐? "
다급히 친실장에게 달려온 두 소년은 엎어진 친실장을 뒤집었다.
빛을 잃고 회색으로 변한 친실장의 눈동자에서는 검은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혓바닥은 입 밖으로 나와서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자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평상시 힘을 꽉 주던 친실장의 총구는 힘없이 풀어져 운치가 그 안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 갇혀 있던 장녀와 차녀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고스란히 보았다.
" 마.. 마마! "
" 거짓말인테치! 마마는 무적이라고 했던테치! 마마 일어나는테치! 마마! "
눈물을 흘리며 바구니를 손으로 두드리며 아우성치는 두 자실장처럼 두 소년도 안절부절못했다.
" ... 이거 어쩌지? 아빠가 알면 분명히 혼날 텐데... "
" 그래서 내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잖아! 형! 이제 우리 어떡해? "
발을 동동 구르는 동생 옆에서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큰 소년은 한 손으로 친실장을 집어 들었다.
" 다른 곳에 숨겨도 금방 들키지 않을까? 지난번에 친구네 형도 거짓말로 때우려다가 들통 나서 엄청나게 혼났다고 했어. "
" 아니, 아빠한테 가서 사실대로 말할 거야. 이미 저지른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전부 이 형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말할 테니까 너는 혼나지 않을 거야. 알았어? "
" 으... 응! "
" 대신에 이 녀석이나 챙겨가자. 어차피 남겨놓아 봤자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집어갈 테니까. 아빠도 조금이라도 화가 풀릴지 몰라. "
" ... 근데 어떻게 가져갈 거야? 이 녀석 계속 똥을 싸고 있어. "
한 손으로 코를 쥐고 코맹맹이 소리로 묻는 동생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던 큰 소년의 눈에 뭔가가 띄었다.
" 그거야... 이렇게 하면 되지! "
허리를 숙여 길가의 작은 돌멩이를 집은 큰 소년은 그것을 친실장의 총구에 우악스럽게 쑤셔 넣었다. 그리고 총구에서 나오는 운치의 양이 줄어든 것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친실장의 머리를 바구니에 거칠게 넣고 바구니의 뚜껑을 닫았다.
그렇게 잠시 헤어졌던 친실장의 가족은 바구니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눈앞에 갑자기 떨어진 마마의 죽은 얼굴을 본 자실장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 테챠아앗! " " 테갸아악! "
" 똥이 안 묻으려면 바구니를 좀 낮게 들고 가야 하는데 땅에는 닿으면 안 돼. 땅에 닿으면 몸이 찢겨 나갈 수 있으니까, 알았지? "
" 응! "
두 형제는 사이좋게 바구니의 손잡이를 들고는 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친실장의 얼굴을 붙들고 울고 불며 난리를 치는 자실장들은 두 소년의 안중에도 없었다.
"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 테에엥! 테에엥! " " 테에엥! 테에엥! "
두 소년은 주고받듯이 노래를 한 소절씩 번갈아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도 모르고 친실장의 죽음에 주저앉아 구슬피 우는 자실장 두 마리의 울음소리, 그리고 이미 숨이 끊어진 친실장의 몸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운치가 그 노랫소리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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