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을 이끌던 빅마마가 죽었다. 산실장으로선 드물게도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였다. 몇년간 지혜롭게 부락을 이끌던 빅마마답게 부락의 모든 실장석들이 그의 죽음에 슬퍼했다. 죽은 이의 살점을 모두가 나눠먹고 머리뼈를 강물에 띄어보내는 장례식이 끝난 후, 부락은 둘로 갈라졌다. 빅마마의 후계자 후보로 빅마마 생전에도 치열하게 경쟁하던 빅마마의 장녀와 차녀가 그 분열의 선봉이었다.
장녀는 이제 빅마마도 없으니 부락을 숲속 더 깊숙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부락은 인간의 집에 너무 가까워 노출될 위험이 많고 빅마마의 부재를 틈타 부락 외부의 실장석들이 인간을 자극할 위험도 있으니 미리 부락을 옮겨 인간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차녀는 오히려 빅마마의 규제가 없어진 지금 인간과의 접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집에서 얻을 수 있는 음식물은 귀중한 가치가 있고, 외부 실장석들이 인간에게 다가가기 전에 부락이 먼저 좋은 인상을 남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차녀 주장의 핵심이었다. 둘 다 분충스러운 행복회로 없이 어느 정도 합당한 근거에 기반한 주장이었으므로, 부락의 일원들 역시 어느 한 편을 들지 못하고 둘로 갈라졌다. 빅마마의 죽음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부락은 서로의 논리를 반박하고 주장을 내세우는 실장석들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부락이 위치한 산 밑에 사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이 부락에 큰 분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산과 관련없는 일로 먹고사는 남자에게 집 뒷편에 있는 산은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봤을 때 흡족한 풍광을 제공하는 존재일 뿐이었고, 거기에 더해 음식물쓰레기를 짬처리할 곳일 뿐이었다. 어느날 티비를 보다가 알게된 야생동물 먹이터를 모티프삼아 남자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잔반을 뒷산 언저리에 대충 버리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곡물이나 과일 같은 고급스러운 것들은 아니었기에 남자의 먹이터를 찾아오는 것은 들고양이 같은 너저분한 것들 뿐이었지만, 남자는 그것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산에 멧돼지같이 위험한 동물은 없고, 자신의 집 뒷마당은 험상궂은 개 두 마리가 활보하며 지키고 있으니 야생동물의 침입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집주인의 마인드였다.
아무튼 남자의 이런 무책임한 태도에 산실장들이 크게 덕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는 산실장에게 귀중한 염분을 듬뿍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매일 원정대를 남자의 "먹이터"로 보내 챙겨온 잔반을 부락 구성원들에게 고루 분배하는 것이 빅마마의 일과이자 권위였다. 그러니 그 먹이터에서 멀리 떨어지자는 장녀의 주장은 그만큼 파격적인 것이었다. 차녀가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도 이 부분이었다.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의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부락을 옮길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차녀는 한 발 더 나가서 아직 가시화되지도 않은 위험에 인간의 혜택을 포기하려는 장녀는 겁쟁이라고, 부락을 이끌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공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적지 않은 실장석들이 차녀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험난한 산생활에 결연히 맞서야 하는 부락의 지도자에게 겁쟁이라는 오명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빅마마 생전 원정대의 리더였던 차녀에게는 자신이야말로 그 크나큰 위험이라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실장석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용맹함을 얼마든지 뽐낼 수 있었다. 원정대의 실장석들 역시 차녀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매일 인간의 집까지 내려갔다 와야하며 가끔 먹이터에서 마주치는 들고양이 같은 위협에 맞서느라 강인해진 원정대원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빅마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음식을 가지러 원정을 떠나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권위 - 그리고 수집 과정에서 빅마마 몰래 알음알음 빼먹는 잔반의 맛 -은 쉽사리 포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장녀는 염분 섭취는 인간의 음식이 아니더라도 산에서 수집하는 동물성 먹이와 이따금씩 잡아올리는 구덩이 분충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며, 인간의 위험은 가시화된 순간 이미 늦은 것이니 현명한 지도자라면 그런 부락 전멸의 위험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방어했다. 장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늙은 원로실장들의 지지를 끌어내었다. 겁쟁이는 부락의 지도자가 될 수 없지만, 조심성없이 설쳐대는 분충 또한 지도자로서는 낙제감이었다. 구덩이 분충들을 관리하는 실장석들 또한 장녀의 지지세력이었다. 구덩이 관리실장들은 늘상 부락의 관심을 독점하던 원정대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소외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원정대의 존재 자체를 없애고 구덩이의 중요성이 더 높아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니, 관리실장들이 장녀를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차녀가 명백히 우위에 있었다. 부락 구성원의 대다수가 인간은 구경도 못해본 상황에서 인간의 위험성이 쉽사리 체감될 리 없었고, 그에 비해 차녀의 원정대가 가져오는 인간의 음식은 너무나 감미로웠다. 채집조가 잡아오는 벌레 유충 같은 밋밋한 것들로는 채울 수 없는 만족감을 인간의 음식은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인간 음식의 양을 헤아려 구성원들에게 고르게 분배하던 빅마마의 권위가 그대로 차녀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장녀를 내심 지지하는 실장석도 행여나 차녀의 음식 공급이 중단될까봐 공개적으로 장녀를 지지하지는 못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맞서 장녀의 지지세력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가끔 가다 나오는 구덩이에서 키우는 분충들에게서 나오는 부산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구덩이 분충이 고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매일 도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옷이나 신발이 필요한 실장석이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둘 다 역시 인간 음식의 강렬한 마력에는 미치지 못하기에 썩 만족스러운 대항 무기는 아니었다. 세력의 열세를 서로간의 단결로 극복하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장녀의 지지세력은 하나 둘씩 장녀의 거처 근처로 자신의 집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녀는 부락 외곽 분충 구덩이 근처에 집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장녀파는 자연히 그곳에 모여살게 되었다. 그에 맞서기라도 하듯 차녀파는 차녀의 집, 인간의 집으로 내려가는 방향의 입구쪽에 모여살게 되었다. 하나의 부락이 둘로 갈라진 셈이었다.
시작은 차녀의 선공이었다. 인간이 내놓는 잔반의 양이 줄었으니 분배를 순차적으로 하겠다면서, 명백히 장녀파만 쏙 빼놓고 음식을 분배한 것이다. 장녀는 이를 따지기 위해 차녀를 찾았으나, 인간을 그렇게 경계하는 장녀가 어째서 인간의 음식에 그렇게 탐을 내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장녀는 분노했으나 안타깝게도 장녀에게는 차녀를 상대로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다독이기 위해 아직 독라도 되지 않은 구덩이 분충을 잡아 그 고기를 나눴으나,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인간의 음식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쥔 차녀의 지지세력은 굳건했고, 장녀의 지지세력만으로는 이주를 감행할 수 없었다. 장녀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어느날 밤 나무구렁네가 습격을 받았다. 나무구렁네 차녀는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나무구렁네 친실장이 울부짖으며 차녀를 찾는 가운데, 부락의 실장석들은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외부의 습격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나무구렁네가 부락 한복판에 위치한 가족이었던 것이다. 장녀파와 차녀파가 각자 부락 반대편에 끼리끼리 모여살게 된 이후로 오히려 부락의 중심부에 치안의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부락의 중심에 느슨하게 모여 살던, 장녀와 차녀 어느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실장석들의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느닷없이 장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이 자기가 걱정하던 인간의 습격이라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물론 냉정히 생각해볼 때 이제껏 어떤 접촉도 없던 인간이 마을 한복판에 들어와 나무구렁네 차녀만 잡아갔을리가 없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역시 주변을 배회하던 들고양이일 것이다. 하지만 한밤중의 습격으로 뒤숭숭해진 실장석들의 단순한 사고는 장녀의 주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장녀 역시 필사적이었다. 불리한 자신의 입지를 단번에 역전시켜줄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실장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닝겐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학대파인 것인가? 정말 인간이 우리를 죽이러 온 것인가? 해답 없는 의문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곧 공포로 탈바꿈해서 실장석들의 허약한 위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이 마을을 버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난처한 처지에 빠진 것은 차녀였다. 먼 발치에서나마 인간을 보고 겪어온 차녀는 이게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포에 빠져 목소리를 높이는 실장석들을 상대로 차녀 혼자 이것이 인간의 습격이 아니라고 주장해봐야 쉽사리 먹혀들지 않았다. 원로들이라면 이것이 인간의 습격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차녀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지만, 원로들은 장녀의 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원로들이 침묵을 지키며 암묵적으로 장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가운데, 인간의 흉악함을 성토하던 장녀는 마침내 칼끝을 차녀에게로 돌렸다. 인간이 부락의 존재를 알아채고 습격하게 된 것은 전부 겁도 없이 인간의 영역에서 설치던 차녀 때문이라고. 대번에 군중들의 원망 어린, 공포에 질린 눈총이 차녀에게 쏟아졌다. 차녀는 당황을 넘어 공포까지 엿보이는 표정으로 성난 군중들의 시선을 차마 받아내지 못했다. 빅마마만큼의 권위와 연륜이 아직 없는 차녀로서는 버티기 힘든 부담이었다. 차녀가 장녀의 주장에 반박을 못하고 얼어붙어있자 실장석들의 노도와 같은 분노가 차녀를 향해 터져나왔다. 네년이 우리 마을에 재앙을 가져왔다, 죽어서 인간에게 사죄하고 우리를 지켜라 등등. 당장이라도 차녀와 그 지지자들의 팔다리를 찢어놓을 것처럼 살기등등해진 실장석들의 분노섞인 공황을 뒤에서 보며 장녀는 승리의 미소를 살짝 지었다. 혀라도 깨물 것처럼 이빨을 딱딱거리던 차녀의 입에서 선언이 터져나온 것은 그 때였다. 그렇다면 자신과 원정대가 인간의 집으로 가보겠다고. 자기들이 인간과 직접 대면해 인간을 처리하겠다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연설인지 변명인지 헷갈리는 말을 한참 뇌까리던 차녀는 자신의 원정대를 소집했다. 원정대 역시 공황에 빠진 마을 주민들에게 린치를 당하기 일보직전이었던 터라 순순히 차녀를 따라나섰다. 입으로는 인간을 토벌하러 간다고 주절거렸지만, 실상 주민들의 린치를 피해 도망치는 꼴이었다. 장녀나 다른 실장석들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각자 나뭇가지 창을 든 원정대 일단이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사라져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곤란해진 것은 장녀였다. 기실 차녀만 없다면 튼튼하고 싸움 경험이 풍부한 원정대원들은 이주 과정에 꼭 필요한 호위 병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인간을 "토벌"하러 간 것이다. 장녀와 원로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인간을 심판하니 뭐니하는 것은 상분충들이나 할 개소리이고, 현실은 실장석 따위의 도발에 분노한 인간이 차녀 일당을 모조리 도륙한 뒤 부락까지 올라와 나머지 실장석마저 전부 죽여버릴 미래가 예지력을 가진 카오스실장라도 된 것마냥 선명하게 보였다. 장녀는 다급하게 원로들을 소집했다. 차녀가 인간을 기어이 자극하러 떠나버렸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이주 준비를 하라고, 분노한 인간이 부락을 덮치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한다고 장녀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질렀다. 각자 주민들을 독려하고 지도하러 원로들이 떠나자, 장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자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산 속의 어둠을 돌아보았다. 충분한 대비없이 실행될 이주는 장녀의 본래 계획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낳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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