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명실장

 

그동안 후타바 공원에 실장석이 떼지어 살고 있었다지만 워낙 구제가 많아 일어나서 실장석들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살아 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다시 목격이 늘어나고 있는데 단순히 개체 수 증가에 따라 자주 보이는 것이 아닌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학대파가 공원 채 올리기라도 했는지 세레브를 입에 달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콘페이토를 달라 아마아마를 내놓으라 요구하며 투분까지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다.

애호파는 아니지만 공원에 갈 때마다 자주 보여 친해진 양충 친실장한테 물어 보니 몇 주 전에 어느 성체 실장이 나타난 뒤로 실장석들이 단체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실장과 이야기하며 이 사태의 원인을 들었다.

"그깟 이름이 뭐냐고 세레브해졌다고 닝겐들한테 해를 끼치는지 모르겠는데스우. 여기 더 있다간 자들까지 물들게 생겨서 와타시타치는 다른 공원으로 이주하려는데스우. 그동안 감사햇던데스우."

이름. 실장석이 세레브로 여기는 증표가 몇 개 있다. 대게 사육실장만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사육실장 옷(주로 핑크 옷), 호신용 스프레이랑 간식 콘페이토 같은 사람만 만들 수 있는 공산품, 그리고 이름이다. 근데 실장석들이 이름을 받았다고? 애호파가 실장권 운운하면서 이름을 지어준 것일까.

과연 공원에 잠깐 있으니 곳곳에서 서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사람끼리 부르는 게 아니라 실정석끼리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이름이 없으니 자는 낳은 순서에 따라 장녀 차녀 삼녀로 부르고 이웃은 이웃 보스는 보스 모르는 실장석이면 오마에라 부르지만 오마에를 빼면 서로 아는 사이라면 모두 이름을 부른다. 그것도 미도리 초록이 그린 같은 흔하디 흔한 이름이 아니라 모두 개성 넘치는 이름이었다. 물론 사람 이름과는 많이 다른 게 가나다라부터 시작해서 참치 꽁치 방어 어물전 시리즈도 있고 앙귀비 민들레 단풍처럼 꽃과 풀 이름도 있었으며 으아아 악어 자판 같은 무슨 뜻으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이름도 있었다.

"오마에! 거기서 와타치타치들을 왜 힐끗힐끗 보는데스! 와타시타치의 옥체는 오마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팔아도 10초도 보지 못하는 세레브함의 극치인데스! 하지만 와타시는 관대하니 특별히 콘페이토 한 봉지로 봐주는데스!"

딱 봐도 상분충 친실장 하나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문득 이 녀석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주머니에 있는 콘페이토를 하나를 꺼내 들자 친실장과 자실장들이 입에서 침을 질질 흐르며 내게 전력질주해왔다.

"야. 너희 이름이 뭐야. 이름을 말하는 녀석한테는 콘페이토를 하나씩 줄게."

평소에는 쳐다도 냄새도 못 맡는 콘페이토를 준다는 말에 녀석들은 제 이름을 공원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와타시는 그물인데스! 아타치는 귀걸이인테치! 아타치는 소화기인테치! 아타치는 씨앗인테치!

이름 한 번 누가 지었는지 개성넘치는구나. 약속대로 콘페이토를 하나씩 나눠주고 하나를 더 깨냈다.

" 그럼 이름은 누가 지어줬어? 알려 주는 녀석은 하나 더 준다."

"아타치! 아타치가 말하는테치! 저 뒤쪽에 사는...테벳!"
"똥차녀는 닥치는데스! 배은망덕하게 마마한테 방금 받은 콘페이토를 바쳐도 시원찮은데 저것도 뺏어먹으려는데스! 오마에는 저 콘페이토를 먹고 후식으로 먹어주는데스!"
"그래서 어디 있는데. 빨리 말 안 하면 안 준다."
"뎃...데... 말로 하기 어려운데스. 앞장설 테니 함께 가는데스. 대신 발품 판 대가는 비싸게 받아야하는데스! 콘페이토를 이 자리에서 두 개 주고 가서 두 개 더 주지 않으면 꼼짝않는데스! 세레브한 와타시가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특별히 자비를 베푸는데스!"

그래 그래 줄게. 콘페이토 두 알을 주자 그 자리에서 해치워버린다. 그래 실컷 먹어둬. 너희는 제거 1순위니까. 친실장은 뒤뚱거리며 공원 안 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지어준 게 아닌가 보다. 그럼 실장석이 지어줬나. 그럴 리가 없다. 제 이름도 못 붙이는 실장석이 어떻게 다른 실장석한테 이름을 지어주겠는가.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눈앞에는 티비 진기명기에도 나오지 않는 기이한 실장석이 있었다. 집인 듯한 골판지 상자 앞에 성체 실장 하나가 양반 다리 자세를 하고 앉아 있다. 눈에는 안경을 끼고 있는데...안경이라고? 자세히 보니 철사를 안경 모양으로 만들었다. 귀에는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성체 실장 앞에는 넓적한 돌이 있었고 위에 문고본 크기 국어사전이 있었다. 굉장히 오래 됐는지 종이는 누렇고 여기 저거 찢어졌는데 용케 쓰고 있구나.

"오마에는 그물이 아닌데스. 와타시가 분명 닝겐을 데려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된데스!"
"데프프 시끄러운데스. 콘페이토를 준다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스? 똥닝겐! 약속한대로 콘페이토 두 봉지를 주는데스! 건빵에 담긴 싸구려 콘페이토로 준다면 오마에를 건빵 부스러기처럼 갈아버리는데스!"

어느새 두 알이 두 봉지가 되었다. 이제 필요 없어진 친실장을 뻥 차버리고 박사라 불린 성체 실장한테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네가 쟤네 이름 지어줬어? 사전도 있는데 한글 읽을 줄 알아?"
"물론인데스. 글도 못 읽는데 어찌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데스."

말투가 은근 고풍스럽다. 원사육실장인가? 시험 삼아 아무 장이나 펼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읽어 봐. 박사실장은 안경 기능도 없는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뚫어져라 보더니 장독대라 읽었다. 정답이다. 몇 개 더 가리켜봤는데 시간은 좀 걸렸지만 모두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너 진짜 읽을 줄 아는구나."
"당연한데스. 주인사마가 글을 가르쳐준데스. 모두 주인사마의 은덕인데스."
"주인? 주인이 있었어? 쫓겨났어?"

박사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주인사마는 노환으로 88세 때 돌아가신데스. 주위 닝겐들은 호상이라고 한데스. 주인사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호상인데스! 주인사마의 자들은 와타시를 싫어한데스. 자들한테 가봤자 천대받다가 죽을 운명이 보여 장례가 끝나고 여기로 온데스. 주인사마와 살 때랑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름을 지어주고 식량을 받으니 제법 넉넉한 삶인데스. 자판기도 있고 운치 노예로 셋이나 있는데스. 겨울 준비도 이미 끝난데스."
"그렇구나. 대단하네. 원사육실장이 이렇게 살아남기 쉽지 않는데. 그런데 밀아야."

박사 뒤에 있는 골판지 집을 발로 툭 찼다. 물 한 방울 묻은 곳 없던 골판지 상자는 가운데가 찌그러져 집으로 쓸 수 없게 되었다. 박사는 5초 동안 뒤를 돌아보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데챠아아아아악!!! 똥닝겐 이게 무슨 짓인데스! 와타시의 궁궐을 부숴버린데스! 제정신인데스! 와타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러는데스! 학대파인데스!"
"학대파는 아니야.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했다는 말은 이해 못하겠는데. 너 때문에 공원이 난리난 거 알아?"
"뎃? 그게 무슨 말인데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공원 끝자락 아무도 안 오는 깊숙한 데 사니까 모를 수도 있겠다. 말을 들어 보니 식량 수집도 잘 안 나가는 듯하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겠지.

"네가 이름을 지어주는 바람에 다른 실장석들이 서로 세레브하다며 사람한테 온갖 해를 끼치고 있어. 실장석한테 이름은 세레브함의 상징인 거 알지. 함부로 지어주면 올리기 밖에 안 된다는 걸 알았을 텐데 왜 그랬지? 밥 빌어먹고 살려고 그러지는 않았겠지. 너처럼 똑똑한 살정석이 고작 식량 구하기 좀 힘들다고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박사는 찌그러진 골판지 상자를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와타시는 닝겐과 어울려 산데스. 닝겐타치는 갓난아기라도 이름을 가진데스. 이름을 서로 불러주면서 서로를 존중하는데스. 이름은 그 닝겐만이 가진 고유의 것이니까 스스로를 세레브한 존재로 만드는데스. 반면 와타시타치는 이름도 없이 살다 가는 데스. 이름도 없이 오마에 오마에라고만 불리며 죽으면 이름도 없이 길거리에 나뒹구는데스. 자가 친을 그리워하며 친이 자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데스. 이게 다 이름이 없기 때문인데스. 서로가 대단한 존재가 아닌데 존중이 어딨겠는데스. 와타시는 모두가 이름을 가지면 서로가 이름을 부르며 존중하는 세상이 찾아오리라 믿은데스. 그래서 이름을 지어준데스. 스스로를 세레브하다 여기고 남도 세레브하다 여기면 와타시타치도 언젠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닝겐타치처럼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생각하는데스."

박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실장석이었다. 평화로운 사회를 꿈꾼다니. 각박한 현실에서 사람조차 이런 생각을 하기 힘들다. 하물며 이웃조차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실장석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내가 학대파가 아니기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대파였다면 너는 인간 사회에 해악이다라며 바로 빠루로 머리를 날려버렸겠지.

"네 말이 뭔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네가 바라는 세상이 오려면 다른 실장석들도 너처럼 생각해야해. 하지만 다른 실장석들은 이름을 가졌으니 자신이 더욱 세레브하다 여기며 사람을 아예 운치굴 똥노예로 보고 있어. 이상한 뜻으로 이름을 지어준 게 아니란 건 알겠지만 이름은 이제 그만 지어줘. 그리고 다른 공원으로 가고. 사태가 너무 심각해서 구제 얘기까지 나오고 있으니까."
"안되는데스. 와타시가 죽을지언정 이름짓기는 멈추지 않는데스. 누군가 한 실장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언젠가 세상은 달라지는데스."
"그때가 올 때까지 사람이 기다려줄지 모르겠네. 어쨌든 난 경고했어. 아 난 구제업자가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 여기서 널 만난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돌아가려다 분충을 꼬실 때 쓰려고 가져온 남은 콘페이토를 모두 꺼내 놓았다. 집값이다. 문득 멀리서 돌아 보니 박사는 사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색 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나 이상적인 실장석. 이름이 박사인 걸 보니 아무래도 주인은 교수나 박사가 아니었을까. 실장석한테 왜 이런 걸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주인의 이상은 박사한테 이어졌고 박사는 나름대로 실장석에 맞춰 바꾸어 이상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도 이룩하지 못한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실장석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일렀다.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실장석을 만났고 서른 마리가 넘는 실장석이 나를 똥닝겐이라 불렀고 마주치는 실정석마다 나한테 아마아마를 내놓으라 했으며 일곱 마리는 자를 내밀며 사육실장으로 삼아달라고 했고 세 마리는 나한테 투분을 했다. 모든 실장석이 제 이름을 외치며 와타시는 이름도 가진 세레브한 실장석인데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데스라며 화를 냈다. 이 녀석들은 끝까지 자신만 세레브한 줄 알 것이다.

며칠 뒤 구청에서 후타바 공원 구제가 결정났고 2주 뒤 전문 구제업자를 공원을 이잡듯 뒤지며 실장석의 95%를 구제했다. 구제가 끝나고 난 박사가 살던 곳으로 갔으나 거기에는 골판지 상자도 박사도 없었고 다만 사전만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다. 하필 펼쳐져 있는 장에 '포기'가 적혀 있던 건 우연일까.

그 뒤로 이름을 가진 실장석은 원사육실장을 빼면 공원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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