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우지챠 깨달은레후.]
똥굴에 보검을 넣어 구더기들을 뒤집어보던 친실장은, 같잖다는 듯 흘겨보곤 덮개를 당겼다. 평소 같았다면 그저 굴 덮개를 닫고 잊었을 것이다. 구더기의 말을 곱씹을 이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평소와 같았다면.
[마마는 똥마마인레후.]
실장석은 하극상을 참지 못한다. 닫히던 덮개가 도로 열렸다. 구더기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벌레가 뭐라고 지껄인데스우.]
단박에 대가리를 부술 생각으로 친실장은 보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뜻밖의 풍경에 멈칫했다.
구더기들이 작정이라도 한 듯, 불손한 말을 지껄인 놈 곁으로 기어 모이고 있었다. 몸으로 막아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멀쩡한 팔다리조차 없는 구더기 따위, 몇 마리가 있어도 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홉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구더기들에게서 친실장은 알 수 없는 위협을 느꼈다.
서로 힘이 되어주긴 힘든 몸뚱이들이지만, 구더기들은 모이는 것만으로 용기가 솟은 모양이었다. 녀석들은 이윽고 한 놈씩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햝짝해주지 않은레후. 일부러 우지챠로 만든레후. 분명 자인데 밥이라고 하는레후. 어째서레후?]
[그것은 우지챠도 마찬가지인 레후. 분명, 차녀로 태어났었단 말인레후.]
[…가을씨가 코앞인데 키워봐야, 밥 축내는 분충밖에-]
[뻔뻔한 똥마마 레후. 밥이 더 소중하다고 하는레후.]
[결국 비상식 신세레후. 죽어서도 저주하는레후-!]
[뱃 속에 있을땐, 뻔뻔하게도 세레브한 삶을 약속하지 않은레후?]
[그걸 믿은 건, 오마에들의 잘못-]
[운치가 답답한레후. 프니는 하루에 한 번도 없는레후. 괴로운레후.]
[배씨가 답답하단 말인레후. 병신으로 만들었으면, 최소한의 도리는-]
[데쟈아-! 닥치는데스! 지껄인다고 뭐가 바뀔 줄 아는데스? 천한 비상식들 주제에, 세상을 보여준 은혜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입으로 방귀를 뀌고 있는데샤!]
[심한레후-]
[본 것은, 냄새나는 굴 밖에 없는레후-]
[심할 것도 없는데스! 오마에들은 사육이 되어도 구더기고 총구시중을 들어줘도 구더기인데스! 안 썩는 고기 따위가, 무언가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데샤-!]
[그게 문제인레후. 마마.]
[그런레후. 그래서 우지챠는 생각해본 레후.]
구더기들이 점잖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울리지 않다 못해 기형적인 장면이었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인레후. 나가는 레후.]
[나가는레후-]
구더기들이 기쁜 듯 복창했다.
생애동안 들어본 것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었다. 친실장은 맘껏 비웃을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구더기들의 눈을 본 친은 치미는 웃음을 도로 삼켰다. 놈들의 눈에서 친실장은 또렷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읽었다. 그것은 분명한 지성의 흔적이었다.
본래는 자가 되었어야 했을 억지 구더기들. 쓸데없이 유창한 말을 하는. 멍청해서 참고 잊는 대신,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표출할 줄 아는.
친실장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구더기가 중얼거렸다.
[돌씨는 듣는레후. 우지챠는 파킨하는레후.]
친실장의 심장이 덜걱 내려앉았다.
치명적인 한 수였다.
친은 등골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공멸을 꿈꾸는 구더기라니, 어느 친이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된다. 지금 구더기가 죽는다면, 겨울까지 충분히 살찐 구더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직접 다시 만드는 것도 이제 힘에 부친다. 오래 사용해온 분대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저들이 죽는다면, 자판기의 지위를 걸고 동족과 생사결을 벌이는 수 밖에 없다. 아마 다 늙어가는 자신보다 훨씬 건강할, 가을의 초입에 갓 독립한 성체들과.
자판기를 만들려다 역습당해, 배때지에 송곳이 꽂힌 채로 도망쳤던 작년의 공포가 떠올랐다. 모가지 앞까지 아사의 칼끝을 들이밀었던 그 해의 겨울이 머리를 스쳤다. 친은 다급히 외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우지챠도레후. 파킨레후! 파킨레후-!]
[이승은 덧없는레후. 우지챠는 가고싶은 레후.]
[세레브의 삶은 어느 악독한 똥마마가 물거품으로 만든레후.]
[죽는레후! 마마가 보는 앞에서 죽는것인 레후!]
[똥마마의 계획대로는, 절대로 놀아나지 않는레후! 우지챠는 멍청이가 아닌레후! 어서레후-!]
구더기들이 저마다 발악하듯 외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구더기로 태어난 것들 중 심약한 놈들은, 그 내용을 어렵사리 이해하자마자 숨이 끊어졌다. 먼저 탈출에 성공한 자매들을 본 구더기들은 더욱 열띠게 외쳤다. 파킨, 파킨, 파킨. 어서!
세상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친실장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현기증에 눈을 꼭 감으며 친실장은 차라리 이것이 꿈이기를 기도했다.
[안되는데스. 안되는데스. 꿈씨는 깨어주는데스. 그 때를 또 겪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데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기대하던 구슬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친은 귀를 당기던 손아귀를 풀었다. 귓가에 들려온 것은, 숨차고 기운 빠진 우지챠들의 악 소리 뿐이었다. 친실장은 여유를 되찾고 운치굴을 내려다보았다.
[파아... 파... 파레후! 아니, 파킨레후-!]
[어서 파킨하라는레후! 어서레후! 똥마마가 비웃고있다는 말인레후우-!]
고개를 숙이고 달달 떠는 구더기들이 보였다. 멀쩡히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중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친실장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패닉에 빠진 구더기들은, 얼굴의 구멍들에서 체액을 줄줄 흘리며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어째서인레후 어째서 파킨하지 않는레후]
생물학의 법칙은 냉엄하다. 흙의 갑갑함을 참지 못하는 지렁이는 자손을 남기지 못한다. 동지를 위헤 제 몸을 희생하는 개미들만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를 만든다.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다. 자각이 없는 수많은 생물들은 제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른다. 그저 기계처럼 작동할 뿐. 누대에 걸쳐 쌓인 프로그램대로.
운치 식단은 위석과 구더기의 신경 사이의 연결을 무디게 한다. 모든 구더기가 한두번의 욕에 절명한다면, 또는 제멋대로 이승을 떠날 수 있다면, 구더기 농사나 말린우지 생꼬치같은 독특한 생존법이 존재할 수 없다. 유전자에 새겨진 요구는 분명했다. 사지가 없다면 자라서 사지를 얻어라. 또는, 최선을 다해 사지 있는 놈들의 양분이 되어라.
운치굴로 내려오는 묵직한 걸음이 들렸다. 구더기의 떨림이 심해졌다.
새삼 마마가 무서울 것은 없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지 오래였다. 미련을 두기엔 너무나 비루한 삶이었고.
다만 딱 하나 두려운 것이 있다면,
[레후-! 손대지 말라는 레후우-!]
그 비루한 삶의 최후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불효인데스. 어딜 마마 품을 맘대로 떠나려고 하는데스.]
집어올려진 우지챠의 귓가에 마마가 숨을 훅 불었다.
[‘세레브’ 해지기 전까진, 오마에들은 쭉, 마마 품에 있어야 하는데스-]
이빨이 귓볼을 한입 가득 파고들자, 구더기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퍼덕였다. 그러나 잘려나가는 귓볼을 지킬 순 없었다. 땅에 내팽개쳐진 구더기는 잘려나간 귀때기를 목에 비비려 애쓰며 버르적거렸다.
[레히에에엥-!]
구더기는 마마처럼 귀를 손으로 막을 수 없다. 싫은 소리가 들린다면, 귀를 접고 몸을 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다. 앞니 자국이 선명한, 밑동만 남은 귀로는 그러나 그 마저도 할 수 없다.
때문에 친실장의 다음 말은, 무방비한 우지챠의 고막을 뚫고 심장에 그대로 꽂혔다.
[죽지도 못하는 병신으로 태어난 자신을, 죽을 때까지 원망해 보란-]
지금 이 순간 거둔 작은 승리에, 도취감이 친의 머리 끝까지 차오르려는 찰나였다.
끔찍한 굉음이 울렸다. 충혈된 눈으로 이를 악물며 울던 구더기들은, 갑자기 마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당황했다. 언뜻 하얀 섬광이 눈에 스친 듯 했지만, 정말 그랬는지 확신하기엔 구더기의 주의력이 너무 협소했다.
[레후?]
[레후우-! 무슨 소리인레후-! 파킨할뻔한 레후-!]
[차라리 파킨하고싶은레후…]
[큰일인레후-! 이대로라면, 마마의 밥이 되고마는-]
하늘에서 탁탁 소리가 나더니, 운치굴로 거대한 살덩이가 떨어졌다. 구더기들은 화들짝 놀라 구석으로 옹기종기 피신했다. 그러나 살덩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뒤, 용감한 구더기 몇이 다가와 그 몸뚱이를 살폈다.
[…마마의 냄새가 나는레후?]
불과 10여초 사이 기묘한 상승과 낙하를 겪은 그것은, 누가 보아도 살아있다고 보기 힘든 몰골이었다. 납작해진 대가리에 신발자국이 선명했다. 이윽고 구더기들은 시체에 몰려들었다.
그 정체를 알아챈 녀석들은, 곧 욕설을 토하거나, 분노한 채 돌기로 그 시체를 탁탁 때리기 시작했다. 두터운 살가죽을, 약한 이가 부러지도록 무리해서 물어뜯는 녀석들도 있었다.
[응보레후-! 거들먹거리더니, 꼴좋은레후!]
[기쁜날 레후-! 악마 똥마마가 죽은레후-!]
[살아남은레후-! 역시 우지챠는 밥이 아닌레후-!]
[다들 그만하는레후.]
[닥치는레후! 우지챠는 분노할 권리가 있는레후!]
[그만하라고 한 레후. 다들 위를 보는레후-]
이미 죽은 몸뚱이를 괴롭히려 애쓰던 구더기들 몇이 머리 위를 보았다. 이윽고 구더기들 모두가 머리 위를 보았다.
골판지 안에서 나고 자란 구더기들에게, 검은 천장 없는 하늘은 낯선 것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운치굴의 묵은내를 씻어냈다. 구더기들은 이윽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돌기를 움직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저 아름다운 하늘에 가까이.
본인도 모르게 이승을 먼저 졸업한 친의 몸뚱이는, 마침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자세로 떨어져 있었다. 죽은 마마의 궁둥이를 계단 삼아 구더기들은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깥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바깥은 굉장했다. 그 무엇도 구더기들이 상상한 것과 같지 않았다.
직접 받는 햇빛은 운치굴에 감질나게 들어오는 볕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둠에 익숙한 눈을 구더기들은 연거푸 껌뻑이고 아파하면서도, 구더기들은 눈꺼풀을 부릅떠 풍경을 눈에 담아두려 애썼다.
해가 무척 밝았다. 덕분에 모든 것이 선명했다. 연두색 풀과 갈색 흙, 눈부시게 검은 바닥과 잔잔한 회색인 바닥. 그 위를 가로지르는 적록색 선과 얼룩들이 태양빛에 선연히 반짝였다. 깡깡거리고 쨍그랑거리는 경쾌한 리듬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왔다.
이곳 저곳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오고, 녹색 덩어리와 하얀 기둥들이 바삐 움직였다. 근시의 눈을 껌뻑이며 구더기들은 그 속에 담긴 활기에 환호했다. 아름답다. 자신도 저 풍경의 일부가 되고싶다. 신선하면서도 구수하고 비릿한 바람이 스쳤다. 구더기들의 귓가를, 코끝을, 멍든 마음 속을.
[밝은레후! 아름다운레후-!]
[이것이, 바깥인레후?]
바깥. 이 한없는 자유로움. 자로 태어났다면 진작에 누리고 있었을 특권.
제 발로 바깥으로 나온 원자실장 구더기들은, 이미 공포를 잊은 지 오래였다.
[이제 어쩔것인 레후?]
[…가는레후. 우지챠는 가는레후.]
[그런레후. 이제 그것밖엔 없는레후.]
[저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는 레후-!]
의욕없이 운치로 향할 때처럼 돌기만 굼실거리는 대신, 구더기들은 열심히 꼬리로 땅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각자만의 방향으로, 넓은 세상을 향해서.
[세상씨! 프니프니 해주는 레후-!]
[여러번 꺾일 뻔 했던레후-! 하지만 우지챠는 절대 포기하지 않은레후-! 우지챠는, 이제 그 상을 받는레후-!]
끔찍하게 고요한 굴을 떠나, 저 새로운 소란 속으로.
영원할 것만 같은 행복의 예감 속으로.
[세상을! 우지챠의 노랫소리씨로 가득 채우는 레후-!]
해가 무척 밝았다. 덕분에 모든 것이 선명했다. 망가진 하우스의 전경도, 뭉개진 채 썩어가는 운치굴의 시체도,
생전의 친실장이 요새의 해자(垓字)로 삼았던, 공원 구석의 하우스를 둘러싼 배수로 격자도.
다음 날 공원 그 어디에서도 구더기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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