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달인

 

[제발 키워주시는데수우! 이번 겨울만이라도 키워주는데스! 일가가 모두 실각하게 생긴데에엥!]

"귀찮게시리..."

갑자기 튀어나와 넙죽 엎드리곤 사정사정을 하는 실장석 일가. 하도 절박하게 비는 모습에 그냥 짓밟고 지나가는 것도 꺼려진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찬 기운이 엉덩이로 올라오는 것을 느낀 남자는 잠깐 몸을 떨었다. 겨울에 돌입한지도 벌써 한달 가까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게다가 일기예보에 따르면 몇 밤만 지나면 혹독한 시베리아산 한파가 반도를 강타할 예정이다. 그러니 이 실장석도 필사적으로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이겠지. 남자가 벤치에 앉자 친실장의 눈에도 희망의 기운이 돈다. 무시하고 떠나거나 일가를 짓밟아버리지 않고 친실장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일종의 제스쳐. 친실장은 얼른 머리를 굴려 어떻게 해야 자신과 자신의 자들의 불쌍함을 극대화하여 동정을 살 수 있을지 열심히 궁리하기 시작했지만, 친실장이 사연팔이를 시작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친실장."

[뎃, 무슨 일이신데스, 닝겐상?]

"난 너희들이 맨날천날 말하는 분홍색 드레스라던가, 세레브 실장 하우스 같은 건 사 줄 수도 없고 사 줄 생각도 없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납작 엎드려 있던 엄지가 발끈하며 일어서지만, 친실장이 그 낌새를 먼저 눈치채고 얼른 엄지의 대갈통을 쥐어박아 도로 땅에 쓰러트린다. 여기서 남자의 말에 항의해봤자 손해는 오롯이 실장석의 몫. 게다가 겨울을 날 수만 있다면 그딴 사치품은 없어도 된다.

[뎃, 그런 건 필요없는데스! 요구하지도 않는데스! 겨울 동안 거둬주시기만 하면 되는데스!]

"음,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스시나 스테이크 같은 것도 못 주는데 괜찮겠어? 아니, 사람이 먹는 음식은 아예 줄 생각 없어."

그 말에 이번엔 삼녀가 발끈하며 이를 드러낸다. [ 스&스를 못 내주는 똥닝ㄱ...] 친실장은 재빨리 삼녀를 걷어차 저만치 뒤로 굴려보낸다. 일가의 생가가 걸려있는데 저런 눈치없는 분충이 닝겐의 심사를 건드려선 좋을 게 없다. 일단 여기선 무조건 닝겐의 요구조건에 맞춰줘야 힌다.

[데뎃, 상관없는데스! 와타시타치는 실장석데스! 닝겐상의 음식을 넘보지 않는데스! 실장푸드만 줘도 충분한데스! 주시는 것에 항상 감사하며 먹는데스!]

"오, 대단한데. 훌륭한 태도야. 근데 난 2개월 남짓 거둬줄 실장석을 위해 실장푸드를 살 생각은 없어. 요새는 일반 실장푸드는 무조건 대용량으로만 나와서 말이야. 너희들이 두세 달 동안 먹어도 반은 남을텐데 그건 낭비지."

그 말에 명석한 차녀가 나선다.

[닝겐상, 그러면 봄에 와타시타치가 공원으로 나갈 때 남은 푸드도 싸주시면 되는테치! 아니, 푸드를 다 먹을 때까지 쭉 키워주셔도 괜찮은테치!]

"오...갑자기 요구 사항이 늘어나는데? 방금 전까진 겨울 동안만 키워달라는게 요구 아니었나?"

[데데뎃, 아닌데스! 차녀는 닥치는데샤아!]

건방지게 남자에게 추가 요구를 하는 차녀의 모습에 남자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친실장은 황급히 차녀의 입을 다물리면서 뒤로 쫓아보냈다. 겨울의 생존요건은 어디까지나 난방과 영양 수급. 그 중에서도 난방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닝겐의 집에서 보온의 혜택을 받을 수만 있다면 밥이야 음식물쓰레기를 먹든 구더기를 씹어먹든 크게 중요치 않다. 제딴엔 멋진 아이디어를 내놨는데 예상 외로 남자와 친실장 둘 다에게 빠꾸를 먹은 차녀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고개를 숙인다. 남자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친실장은 얼른 외친다.

[데데데뎃, 푸드 안먹는데스! 실장푸드 필요없는데스! 와타시타치의 먹이 수급은 와타시가 알아서 하겠는데스! 집 안에서 키워만 주시는데스!]

"흠, 그 정도면...아니, 아니다. 집 안에선 못 키우겠다. 너희들 냄새가 장난 아니야. 게다가 저 녀석은 빵콘까지 했네."

남자가 가르킨 것은 장녀. 사실 들실장의 기준에선 빵콘한 것도 아니다. 추위에 오래 노출된 탓에 괴로워진 장녀의 신체가 탈분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살짝 팬티만 운치로 적신 정도. 하지만 '안에서 키워질' 실장석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데데데데뎃, 닝겐상 죄송한데스! 와타시가 책임지고  빵콘하지 않도록 교육하겠는데스! 용서하시는데스!]

"아니, 그런 말하는 너도 지금 빵콘했잖아...역시 실내에서는 못 키우겠다. 대신 우리집 마당에서는 키워줄 수 있어. 어쩔래?"

친실장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닝겐의 집만큼은 아니겠지만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 정도면 찬바람도 대부분 막을 수 있고 무엇보다 다른 들실장이나 길고양이 같은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닝겐의 보호' 아래 살 수 있다는 이점은 여전하다. 일가족의 빵콘으로 점수가 왕창 깎인 기분이 드는 친실장으로서는 남자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기 전에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기선 공격수를 둔다. 남자가 꼬치꼬치 따지기 전, 본인이 먼저 제안한다. 훌륭하고 자립적이며 닝겐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고귀하고 당당하고 우아한 들실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데데데데데뎃, 아무 상관없는데스! 마당에서 길러주셔도 와타시는 괜찮은데스! 집을 지어주실 필요도 없는데스! 들에서 살아온 와타시는 골판지로 집을 지을 수 있는데스! 골판지를 주실 필요도 없는데스! 와타시가 쓰레기장에서 알아서 충당하겠는데스! 보온재도 마찬가지인데스! 먹이도 와타시가 알아서 찾는데스! 음식물쓰레기를 일부러 주실 필요도 없는데스! 와타시가 골목골목을 뒤지고 월동 중인 벌레를 찾는데스! 전부 와타시만의 노하우가 있는데스!  운치 냄새가 걱정인 데스야?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만 운치 싸겠는데스! 아니, 닝겐상에게 폐가 되지 않게 매일 공원으로 나와서 공원의 운치굴에 싸겠는데스! 아니아니, 현관문을 열어줘야하나 같은 걱정은 안해도 되는데스! 그럴 줄 알고 와타시타치가 문밖에서 살면 되는 플랜을 준비한데스! 닝겐상은 와타시타치가 있다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할 것인데스! 자 어떤데스야앗!]

숨도 안쉬고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낸 친실장은 숨을 고르며 남자의 눈치를 본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친실장의 파격적인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진듯 남자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역시, 와타시의 공격적인 협상이 닝겐의 마음을 공략한 모양 데스네...하며 친실장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남자가, 어느새 의기양양해 하며 가슴을 쫙 피고 자 어떤데스, 하고 서있는 친실장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그 정도면 굳이 내가 안 키워줘도 되는 거 아냐?"


[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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