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난다는 것 1~2 (공군실장, skandnlzl)


“영-차 영-차 데스!”



“힘내라 테치! 힘내라 테치이!”



친실장은 마지막 힘을 내어 무거운 돌을 하우스를 덮은 두꺼운 비닐의 귀퉁이에 올려놓았다. 너무 무거운 돌은 옮기기가 힘들고, 너무 가벼운 돌은 바람에 날아가 버리므로 적당한 크기의 돌을 네 개나 찾느라 오늘 하루가 다 가버렸지만, 이제 실장 일가의 집은 거센 겨울의 바람과 온 세상을 뒤덮는 눈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돌멩이들을 온종일 들어보고 옮기느라 체력이 바닥났지만, 영리한 친실장은 이럴 줄 알고 하우스를 덮는 비닐을 고정하는 작업을 월동 준비의 마지막 단계로 미뤄놓았던 것이다.



“다 끝난 데스! 오마에들이 열심히 도와준 덕분에 월동 준비가 와타시가 생각했던 것 보다 여섯 밤이나 일찍 끝난 데스!”



“와-아 테치! 와-아 테치! 마마 대단한 테치! 멋진 테치이!”



“내일부터는 낙엽씨와 도토리씨들을 하루 종일 안 주우러 다녀도 되는 데스. 하지만 오며 가며 기억이 날 때마다 조금씩 주워서 하우스로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마는 데스. 겨울씨는 오마에들의 생각보다 훨씬 잔혹하고 무서운 데스. 겨울씨가 오면 지금처럼 낙엽씨들이 많이 떨어져 있지도 않고, 있는 것도 전부 젖어서 쓸모가 없는 데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많이 모아놔야 하는 데스. 와타시의 생각엔 이미 충분하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는 데스. 이해한 데스우?”



“네 테치! 네 테치!”



“배고픈 테치이-”



“알겠는 테치! 꼭 기억하는 테츄!”



친실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여섯 마리의 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귀엽고 착한 자들이었다. 다른 일가의 자들이라면 고되고 힘든 산에서의 월동 준비에 한 두마리 정도는 필히 분충화가 되었겠지만, 친실장의 자들은 비록 불평불만은 할지언정 다들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모두 해냈던 것이다. 자들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친실장은 이제서야 먹이 수집을 마치고 보온재로 사용할 낙엽을 주우러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친실장의 월동 준비는 완벽했다. 내부 용적이 넉넉하고 벽면이 튼튼한 이삿짐 상자에 운 좋게 구한 두툼하고 질긴 비닐하우스용 비닐을 덮어 보온성과 내구도를 모두 챙길 수 있었다. 땅바닥에는 예전 하우스로 쓰던 골판지를 넓게 찢어 깔아놓고, 그 위에 낙엽을 여러 겹 깔아 이중으로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 이불로 사용할 수건과 베개로 사용할 다 쓴 핫팩을 구해 놓은 건 기본 중 기본이었다. 이런 모든 걸 구할 수 있었던 건 실장 일가가 사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생활폐기물 처리장이 있었던 덕분이다. 관리도 거의 되지 않았던 탓에 친실장이 처리장을 들락거리며 온갖 물건들을 주워 와도 이를 눈치채는 인간은 없었다.



친실장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실장 일가의 하우스 바로 옆에는 김치 및 수산물 등을 옮길 때 쓰는 스티로폼 상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스티로폼 상자의 뚜껑에는 안에서 닫기 위해 손잡이로 사용할 나뭇가지가 박혀있었고, 각 상자 안에는 친실장이 처리장에서 발견하자마자 즉시 집어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온 미사용 핫팩이 한 개씩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실장 일가의 비상 대피소로, 친실장은 기상 상황이 극도로 악화될 경우 자들을 세 마리씩 스티로폼 상자에 넣고 문을 닫은 뒤 자신은 하우스에 있는 모든 보온도구를 이용해서 버텨볼 심산이었다.



친실장은 혹한시 운치굴 대책도 마련해 두었다. 하우스 밖에 있는 깊게 파인 메인 운치굴 외에도, 하우스 구석에 작은 규모로 비상용 운치굴을 파 놓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비상용 운치굴에서 나는 악취는 골판지 두 조각으로 덮은 뒤 그 위에 물통을 눕혀 둘 예정이었다. 나중에 구더기가 생긴다면 여기서 양식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자들을 출산할 때 구더기가 태어나지 않은 까닭에 계획으로만 그쳤다.



보존식 역시도 매 끼니를 진수성찬으로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매일 세 끼 정도는 적당히 먹을 수 있는 양을 구할 수 있었다. 이건 자들의 도움이 매우 컸다. 실장 일가는 매일 이런저런 곳에서 땅을 헤집으며 도토리와 은행을 비롯한 채진목, 산사나무, 꽃사과 등을 필사적으로 긁어모았다. 그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겨울잠을 위해 되는 대로 음식을 모으던 다람쥐와 청설모들에게 물리고 긁혀 사녀가 실명할 위기까지 가기도 했다. 어쨌든 실장 일가는 겨울 다음에 다가올 따뜻한 봄을 위해 몸이 다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열매를 주우러 다녔고, 결과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친실장이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실장 일가의 하우스 옆 땅에 박혀있는 간이 수도꼭지였다. 원래 등산로 초입 약수터로 설계되었다가 등산로 계획 자체가 취소된 실장 일가의 하우스 터에 있는 수도꼭지는 놀랍게도 물이 나오고 있었다. 도시계획과의 누군가가 언젠가는 부활할지도 모르는 등산로 계획을 위해 수도 시설을 폐기하지 않은 덕분에, 실장 일가는 여기에 정착한 올해 봄부터 늦가을인 현재까지 물을 풍족하게 펑펑 사용하며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친실장은 만일을 대비해 500ml 물병 두 개를 구해놓긴 했지만, 어쨌든 가족의 주 수원은 수도꼭지가 될 전망이었다. 이 덕분에 친실장은 하우스에서 500m나 떨어져 있는 작은 계곡까지 수도 없이 오가지 않을 수 있었다.



보람과 뿌듯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는 희망을 느낀 친실장은 도토리를 나눠 먹고 테치거리며 즐겁게 놀고 있던 자들을 한 번씩 안아준 뒤, 하우스의 문을 닫고 다 같이 행복한 잠에 빠져들었다.











친실장이 보통의 실장석과는 다르게 이토록 뼈저리게 준비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본인의 아픈 기억 때문이었다. 공원에 거주했던 들실장의 차녀였던 친실장은 태어났을 때부터 몹시 영리하여 고무공을 가지고 노는 장녀와 다른 자매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마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하고 습득했다. 친실장의 마마 역시 꽤나 영리한 편이었기 때문에, 하우스에 비닐을 덮어서 습기와 바람을 차단하는 것과 사용하지 않은 핫팩을 구별하는 것 등은 모두 친실장의 마마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친실장의 마마와 친실장은, 그 정도라면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몹시 참혹했다. 대한민국의 한파는 고작 하우스에 대충 덮은 비닐 한 겹과 한팩 두어개로 날 수 있는 수준이 전혀 아니었다. 뼈를 에는 강풍이 몰아치던 1월의 어느 날 밤 하우스를 덮고 있던 비닐이 날아가자, 그 즉시 영하의 온도로 떨어진 하우스 내부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가장 먼저 엄지가 죽었고, 그 다음은 오녀와 칠녀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친실장의 마마는, 비닐을 다시 찾아오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직감하고 친실장에게 온기가 조금이라도 남은 마지막 핫팩 하나를 맡긴 뒤 하우스를 나섰다. 발열이 끝나가는 미지근한 핫팩을 부둥켜안고 간신히 다음 날 아침까지 버틴 장녀와 친실장이 발견한 것은 마찬가지로 서로 부둥켜안았지만 핫팩이 없어 체온 유지에 실패에 얼어 죽은 삼녀와 사녀, 홀로 구석에서 죽은 육녀, 그리고 하우스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 있는 친실장의 마마였다.



장녀와 친실장은 그해 겨울 내내 이런저런 하우스를 전전하며 살아남았다. 보다 정확히는 이미 얼어 죽은 일가가 들어 있는 하우스를 전전하며 그들이 모아 놓은 보존식을 긁어 먹으며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장녀의 쇠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생명력을 제공할 수가 없었다. 늦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3월의 어느 날, 손이 다 뭉게지도록 땅을 판 후 장녀를 묻어 준 친실장은, 8자매 중 홀로 살아남았다는 씁쓸함을 가슴 속에 깊이 담아둔 채 피눈물을 흘리며 고대하던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당분간 친실장에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끊겨 황폐해진 공원은 이제 더 이상 불어난 실장석들에게 충분한 삶의 터전을 제공해 줄 수 없었다. 봄이 왔음에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질에 불평을 갖는 실장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쓰레기통은 채워지지 않았고, 인근 쓰레기장에는 무거운 철문이 설치되어 실장석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영리한 개체들은 하나둘씩 불안함을 느끼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가고 있었고, 남은 개체들은 상황의 심각함을 못 느낄 정도로 멍청하거나, 이주라는 무시무시한 과업을 감당할 수 없는 겁쟁이들밖에 없었다.



옛 하우스 터에 다시 집을 짓고 춘자 다섯 마리를 낳아 생애 첫 육아를 하고 있던 친실장은, 떠나는 동족들을 보며 조바심이 났으나 자신의 자들이 이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어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먹이를 구하러 나갔으나 큰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밤, 친실장은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양복을 입은 두 인간이 공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모습을 우연찮게 마주쳤다. 이들을 보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렬한 급박함과 위기감이 온몸을 감싼 친실장은, 다음 날 아침 공원을 둘러싼 흰색의 아크릴 벽이 완성되기 세 시간 전에 불안에 떠는 자들을 비닐 봉투에 담고 험난한 이주길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 이주는 실장 일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얼마 있지도 않았던 보존식은 비닐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동안 배가 고팠던 자들이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길 건너기를 하다가 순식간에 장녀가 차에 깔려 납작해졌다. 인간들의 발에 채이지 않기 위해 인도에서 내려와 차도로 걷다가 오녀가 하수구에 빠져서 죽었다. 호기심이 많던 차녀는 친실장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크기가 작은 인간에게 다가갔다가 독라가 되어버린 후 놀이터 모래밭에 머리만 내놓은 채 묻혀버렸다. 동네 야산 인근에 다다를 무렵엔 삼녀가 잔혹한 강행군을 이기지 못하고 위석이 깨져 죽어버렸고, 적당한 집터를 찾기 위해 산을 오르다가 스트레스가 한계에 다다른 사녀는 똥마마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고 사라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삶의 터전과 자들을 모두 잃어버린 친실장은, 그럼에도 언젠가는 행복해지기 위해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하우스의 재료가 될 만한 골판지들을 찾기 시작했다.











월동 준비를 끝마친 후 얼마 있지 않아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지기 시작했다. 아침 이슬은 서리로 변했고 선선한 바람은 칼날 같은 돌풍으로 바뀌었다. 아직까지는 바깥 활동에 여유가 있던 실장 일가는, 이 틈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비상 상황 대비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하우스가 무너지는 데스! 모두 하얀색 하우스로 가는 데스우!!”



“빨리 테치! 나가는 테치!”



“이모우토챠들 느린 테치! 빨리 빨리 뛰는 테치!”



“테에에에에- 추운 테치이-!”



“삼녀, 오녀는 와타치한테 오는 테치! 사녀, 육녀는 차녀챠를 따라가는 테치이!”



자실장들은 바깥의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미리 지정된 비상 하우스로 들어간 뒤 뚜껑을 닫는 절차까지 모두 완료할 수 있었다. 친실장은 추위에 떨면서도 각 비상 하우스의 문의 밀폐 정도를 확인한 후, 스티로폼 뚜껑을 탕탕 치며 훈련의 종료를 알렸다.



“모두 잘한 데스! 이젠 나와도 좋은 데스!”



“테에...시큼한 냄새가 옷에 밴 테츄...”



“어쩔 수 없는 테치. 폴짝폴짝 뛰면 빠지니 그렇게 해보는 테치.”



“와타시가 수도 없이 말했지만, 하얀색 하우스 안에 들어 있는 따뜻따뜻씨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을 위한 도구인 데스. 오늘보다 열 배도 더 추운 날에도 하얀색 하우스 안에 들어갈 수는 있되 마마의 명령이 없으면 따뜻따뜻씨를 감싸고 있는 비닐씨는 뜯으면 안 되는 데스우. 모두 잘 알아들은 데스?”



“네 테치! 명심하는 테치!”



“오늘보다 열배는 더 추운 게 상상이 안 되는 테치이...”



“백 배도 더 추워지는 데스. 겨울씨는 무서운 것인 데스. 오마에들도 와타시와 함께 한 월동 준비를 잘 돌이켜 보고 독립한 후 밑거름으로써 삼는 데스. 알겠는 데스우?”



“네 테츄...”



자실장들은 앞으로 백 배는 더 추워진다는 말에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자신들의 실장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하우스의 풍경과 하얀색 하우스, 집 구석에 수건에 둘러쌓여 있는 물병들, 미리 깊이 파둔 운치굴, 그리고 낙엽과 보존식. 실장석의 세계는 약육강식보다는 적자생존이었다. 강하지만 멍청한 놈들은 겨울에 솎아내지고, 약하지만 똑똑한 놈들만이 겨울을 지나 자들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과연 친실장의 노하우를 여섯 마리의 자들이 얼마나 받아들였을지는, 하늘이 정해줄 일이었다.



11월이 가고 12월이 오자 기온은 더더욱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온이 영하에서 머무는 날들이 늘어나자 실장 일가도 대부분의 시간을 하우스 내부에서 보내게 되었다. 하우스를 전체적으로 감싼 비닐 덕분에 채광창을 작게나마 낼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바깥에 나갈 일이 없이 온난한 하우스에서 뛰어놀려니 체취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친실장은 다른 들실장들은 꿈도 못 꿀 겨울철 목욕을 자들에게 시켜주기로 마음먹었다.



“자들은 잠깐 기다리는 데스. 깜짝 선물이 있는 데스!”



친실장은 하우스 옆에 있는 커다란 개밥그릇을 들어 하우스 안으로 가져온 뒤 중앙에 떡하니 놓았다. 이 개밥그릇은 늦봄에는 친실장의 수영장이었고, 여름에는 다름 아닌 지금의 자들을 낳은 곳이었으며, 가을에는 열심히 일한 실장 일가를 위한 물통이었다. 겨울에 자들을 씻겨준 목욕탕으로서의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일반 물병에 있던 물을 전부 쏟아서 개밥그릇을 채운 친실장은, 환호하는 자들을 한 마리씩 들어서 물에 살며시 놓아주었다.



“오늘은 전에 배웠던 빨래를 혼자서 해 보는 데스. 옷을 먼저 충분히 적신 다음 벽면에 물질러 때를 빼는 데스.”



“생각보다 힘든 테치이...”



“테! 와타치의 앞치마가 다시 하얀색이 된 테츄!”



“테에...와타치도 저렇게 만드는 테치!”



“테치! 테치이!”



친실장은 어느새 빨래터가 아닌 물놀이장으로 변해버린 개밥그릇을 뒤로하고, 아까 다 쓴 물을 보충하기 위해 하우스에서 나왔다. 물이 집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철 실장석의 사망 원인 2위가 바로 탈수로 인한 사망이었다. 공원의 화장실은 모두 폐쇄되고, 분수는 작동하지 않는다. 연못과 개울들은 모두 얼어붙는다. 하우스 안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500ml의 물은 500g의 얼음으로 변하기 일쑤다. 눈의 공급은 불안정했고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실장석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밖에 내린 눈을 퍼먹던지, 혀를 마비시키며 얼음을 서서히 녹여 먹던지, 서서히 말라가며 죽어가던지의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아무리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자 친실장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수도꼭지에서는 단 한 방울의 물도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참으며 금속제 수도꼭지 손잡이를 왼쪽으로도 돌리고, 오른쪽으로도 돌리고, 손으로 툭툭 쳐보기도 하고, 수도꼭지 기둥을 온 힘을 다해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뼈저린 추위와 손발에서 느껴지는 아픔뿐이었다. 물리적인 협상이 통하지 않자 수도꼭지한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네 발로 엎드려 위협을 가해보기도 하고, 비장의 수법인 애교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수도꼭지는 일말의 자비도 친실장에게 보이지 않은 채 그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마...마마아...”



“추-추운 테-테치이....”



“테...테테...테에에...테...”



추위와 바람에 녹초가 된 친실장이 멍하니 하우스로 돌아오니 눈에 들어온 것은 온몸이 젖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여섯 마리의 자들이었다. 하우스 안 온기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친실장이 나가버리니 개밥그릇에 담긴 물은 금세 얼음장처럼 변해버렸고, 차가운 물에서 나온 자실장들은 추위가 느껴지니 본능적으로 물에 푹 젖은 자신들의 옷을 그대로 입어버린 모양이었다. 떨고 있는 자신의 자들이 눈에 들어온 친실장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도로 옷을 벗긴 뒤 이불로 사용하는 수건에 자들을 눕게 해서 몸을 닦아 주었지만, 이미 늦은 모양인지 원래부터 몸이 좀 약했던 오녀의 안색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마마...오-온 몸이 떠-떨리는 테치이...”



“괜찮은 데스. 마마가 여기에 있는 데스. 마마가 꼬옥 안아 주면 금세 따뜻해지는 데스. 그리고 오마에들은 일단 몸을 다 말린 후 옷이 다 마를 때까지 이불 속에서 기다리는 데스. 알겠는 데스?”



“아...알겠는 테치이...”



“졸린 테치. 잠이 오는 테츄우...”



아직도 몸이 차가운 오녀를 품에 안은 친실장은 개밥그릇에 담긴 물을 살펴보았다. 친실장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개밥그릇에 담긴 목욕물은 가을 내내 몸과 옷에 쌓인 먼지와 때로 인해 상당히 오염되어 있었다. 설령 물이 깨끗하다고 했더라도 실장석의 손과 힘으로는 개밥그릇에 담긴 물을 도로 페트병에 안 흘리고 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자들을 보고 놀란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된 친실장은, 이제 그들의 일가를 위협하게 된 예상치 못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빠른 시간 안에 찾아내야만 했다.



체력을 많이 소진했는지 곧바로 잠에 빠진 자들을 수건 두 겹으로 잘 덮어 준 뒤, 친실장은 자신의 품에서 칭얼대는 오녀를 꺼내 자실장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고 다시금 밖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친실장이 빈 물병을 손에 들고 하우스 밖으로 나왔을 무렵 오녀가 희미한 목소리를 냈지만, 식수 문제에 정신이 팔려 오래전에 가봤던 계울의 위치를 기억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던 친실장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쯤인 데스. 데...아닌 데스. 좀 더 아래였던 데스. 데? 없는 데스? 조금 더 아래로 가보는 데스.”



친실장은 빈 물병을 옆구리에 끼고 산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마지막 남은 기력을 소진해 가며 예전에 봤던 개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녹초가 된 데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산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음 편하게 산을 쏘다니며 지형지물을 관찰했던 예전과는 달리, 추위와 시간의 압박이 극심해진 지금은 지형을 하나하나 관찰하기에는 친실장에게 마음의 여유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결국 두 시간도 더 지나 온몸이 추위로 빳빳해진 친실장은 어두워진 산에서 개울 찾는 걸 포기하고 처절한 마음으로 하우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하우스에 들어온 친실장은 그제야 자신이 몹시도 목이 마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연스럽게 하우스 구석에 있는 남은 한 개의 식수용 물병의 뚜껑을 열었지만, 그 순간 곤히 자고 있는 여섯 마리의 자들이 눈에 들어오자 한숨을 푹 내쉬며 뚜껑을 도로 닫았다. 하우스 안에 남은 물이 담긴 페트병은 세 병, 그중 두 병은 최고 단계의 혹한이 몰아치는 시기를 대비한 비상용이었다. 친실장의 일가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반병 정도를 식수로 사용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기간은 6일에 불과했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 마신다고 해도 2주가 지나기 전에 전부 동날 것이 분명했다. 지금 있는 깨끗한 물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이 든 친실장은 구석에 밀어두었던 개밥그릇에 담긴 더러운 목욕물로 목을 축인 뒤, 자들 옆에 누워 내일을 위한 잠을 청했다.



“마마! 마마! 큰일난 테치! 일어나 보는 테치이!”



전날 밤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던 친실장은 자신을 깨우는 장녀의 목소리에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채광창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이미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정신을 차린 친실장은, 장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오녀가 일어나지 않는 테치! 머리씨가 아주아주 뜨거운 테치! 어떻게 된 일인 테치이!”



“오네챠 일어나 보는 테치! 일어나는 테치! 같이 노는 테치!”



“테에엥- 테에엥- 일어나는 테치이!”



정신이 번쩍 든 친실장은 걱정하고 있는 자실장들을 옆으로 보내고 오녀를 품에 안았다. 과연 장녀 말대로 오녀의 머리는 펄펄 끓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목욕을 한 뒤 너무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되어 몸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한숨을 쉰 친실장은 오녀의 몸을 수건 두 겹으로 돌돌 감싼 뒤 페트병 한 개의 뚜껑을 열고 물을 오녀의 입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오녀가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기기 시작하자 안심한 친실장은 오녀를 집에서 가장 따뜻한 정중앙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와타치도 목이 마른 테치.”



“텟. 와타치도 일어나서 물을 안 마신 테치.”



“마마, 물 주는 테치이.”



오녀가 물을 마시는 걸 본 다른 자들이 물을 달라고 칭얼댔다. 친실장은 순간 고민에 빠졌지만, 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친실장은 사실대로 말했을 때 벌어지게 될 패닉과 당황, 그리고 자신을 향하게 될 불만이 두려웠다. 눈치도 없이 물을 네 뚜껑 분량이나 벌컥벌컥 삼키는 삼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친실장은, 오늘은 기필코 수도꼭지를 고치든지 개울을 찾든지 둘 중 하나는 해내고야 말 거라는 의지를 다지며 빈 페트병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집 밖으로 나서기 위해 일어섰다.



“오늘도 마마랑 같이 노는 테치?”



“데...아닌 데스우...마마는 오늘 바쁘게 할 일이 있는 데스! 오늘은 아쉽지만 오마에들끼리 즐겁게 노는 데스.”



“테에에...”



“텟? 월동 준비는 다 끝난 게 아닌 테치이?”



영리한 차녀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날렸다.



“데...그런 데스. 하지만...계속 일을 해야 문제 없이 겨울을 날 수 있는 데스우...”



뭔가 핀트가 어긋난 대답이었지만 차녀는 수긍한 듯 했다.



“알겠는 테치. 어쩔 수 없는 테츄...”



“장한 데스. 그럼 집을 잘 보고 있는 데스.”



집 밖으로 나온 친실장은 다시 한번 수도꼭지를 돌려 보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실망한 얼굴로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서 개울가를 찾아 나섰다. 확실히 해가 중천까지 뜨니 길을 찾기가 훨씬 수월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친실장은 두어 시간 정도 헤맨 끝에 간신히 500m나 떨어진 작은 개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실장 일가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아직 개울은 완전히 얼어붙지 않고 물이 흐르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손이 떨어질 것만 같은 차가움을 느끼며 겨우 페트병을 다 채운 친실장은, 십년 감수했다는 듯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 그간의 걱정이 다 없어졌다는 듯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도로 하우스로 돌아가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물병의 무게로 인해 훨씬 체력 소모가 심했지만, 그럼에도 친실장의 마음은 가벼웠다. 비록 예전보다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물을 구하러 가는 거리가 늘어났지만, 오늘 한번 해보니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있긴 했지만, 지금은 수도꼭지도 잠시 쉬는 것이고, 며칠만 더 고생하면 수도꼭지에서 다시 물이 나오리라 멋대로 생각한 친실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물병을 옆구리에 힘차게 끌어안고 하우스로 들어가 자신을 반기는 자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그날 이후로 친실장의 물을 구하기 위한 세 시간짜리 왕복 여정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그마저도 원래는 네 시간이었는데 노하우가 생긴 친실장이 최적 경로를 찾음으로써 줄어든 것이다. 비록 몹시도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을 생각하면 절로 힘이 난 친실장은 매일 산을 넘으며 500g의 물을 하우스로 수송하고 있었다. 친실장이 얼마나 고생을 하건 매일 세 번씩 물을 많이도 마셔대는 자들이 때로는 조금 원망스럽고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자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로 마음먹은 친실장은 자신이 더 희생하자고 마음먹었다.



친실장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오녀가 되었다. 수도가 막힌 다음 날부터 앓아누운 뒤로 오녀의 병세에는 차도가 전혀 없었다. 원래 실장석은 병에 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친실장이든 친실장의 마마든 제대로 대답해 줄 수 있는 실장은 흔하지 않았다. 친실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번 오녀의 머리에 축축한 솜을 갖다 대어 열을 낮추는 것과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제발 진전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녀가 통째로 가져가서 독차지한 이불은 원래는 날이 추워지면 자들에게 두 겹으로 덮어주기 위한 이불 중 하나였다. 친실장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덮어야 하는 이불 두 장 중 한 장을 자들에게 주고, 자신은 나뭇잎을 꼭 껴안고 덜덜 떨며 잠자리에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2월 중순도 모두 가고 동지를 지나 겨울의 심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친살장의 생각과는 다르게 수도꼭지는 여전히 입을 앙다문 채 단 한 방울의 물도 실장 일가에게 제공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얼마간 살짝 눈이 온 덕분에 친실장의 숨통도 조금 트일 수 있었다. 주변에 쌓인 눈을 모으고 물병에 담은 뒤 조금 기다려 보면 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실장석 특유의 손 생김새 상 차가운 눈을 페트병에 완전히 담으려면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지만, 영하를 넘나드는 추위 속에서 세 시간을 걸어서 왕복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친실장은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기나긴 겨울의 삼 분의 일을 한 마리의 자도 잃지 않고 보내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해 묘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친실장의 작은 행복은 이번에도 오래 가지 못했다.



“데...데데데....데데....데데데”



“테...테테테테....테에에...”



“추추추추추운 테테테테치이이이이...”



12월 말이 되자마자 한반도 특유의 초강력 한파가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한낮에도 온도는 영하로 떨어졌고, 밤이 되자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뚝 떨어졌다. 친실장 일가는 친실장이 필사적으로 하우스를 보수한 덕분에 온 가족이 서로 끌어안고서라도 버티며 매일 밤을 넘길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들실장들은 이미 40% 이상이 동사하고도 남는 기온이었다. 이렇게 되자 다시 식수 문제가 실장 일가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물을 도저히 구하러 갈 수가 없어 비상용 물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반병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물을 아껴 마시기 시작하자 오녀의 몸 상태가 문제가 되었다. 병마와 싸우느라 몸이 수분을 빠르게 끌어가는 탓인지 오녀는 지속적인 수분 보충이 필요했다.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절박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첫 인간 동사자가 나온 날, 결국 자실장들의 불만이 터지고 말았다.



“마마, 왜 아직도 물이 없는 테치?”



“불공평한 테치. 오녀챠는 메일 세 뚜껑씩 마시는데, 와타치는 고작 한 뚜껑씩인 테치.”



“그건 오녀가 아파서 그런 데스. 삼녀챠도 이해-”



“마마가 물을 수도꼭지에서 받아오면 되는 것이 아닌 테치?”



“데...”



“맞는 테치. 목이 마른 테치. 마마는 왜 예전처럼 물을 구해오지 않는 테치?”



“목마른 테챠! 배고픈 테챠! 물! 물을 주는 테챠아-!”



“아-알겠는 데스. 오마에들의 말이 모두 맞는 데스. 내일! 내일 따뜻한 낮에 마마가 물을 구해와 실컷 마시게 해주는 데스우!”



“안 돼 테치! 안 돼 테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테치이!”



“빙글빙글씨는 바로 앞에 있는 테치! 이 정도도 못해주냐는 테치이!”



그 순간 친실장은 아주 진작에 자들에게 현재 처한 상황을 설명해야 했었음을 알아차렸다. 고작 마마로서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가족의 생존과 직결되는 수도꼭지가 고장 났다는 걸 숨긴 건 몹시도 미련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실장들이 겁을 먹고 소동을 피운다면 적당히 타이르고 주변의 눈을 구해오라고 하는 등 협조를 구했으면 되는 문제였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물이 부족하다는 걸 인지한 자실장들이 물을 자발적으로 아껴 마시거나 해서 지금 처한 상황을 뒤로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도저도 못하게 된 친실장은 결국 이제 와서야 진실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이미 때는 지나버린 시점이었다.



“데...미안한 데스우...사실은 밖에 있는 빙글빙글씨가...”



“물! 물 테챠! 알바 아닌 테챠아-!”



“맞는 테치! 바로 앞에 있는 테치이이-!”



“데...데...”



친실장은 지금껏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자실장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겨우 3시간 전만 해도 마마에게 안기며 응석을 부리던 자들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친실장은 굴러다니던 빈 페트병을 주워들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하우스 입구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이빨을 드러내며 화내던 삼녀가 집어던진 페트병 뚜껑에 머리를 맞고 하우스 밖으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친실장이 하늘을 보았을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개울에 물을 뜨러 갔다간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우스 근처에 떨어진 눈은 이미 모두 녹은 뒤 얼어붙었거나 친실장이 수집한 뒤였기 때문에 눈을 모으려면 산자락을 뒤지며 이미 한참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급한 마음에 황금 같은 마지막 남은 햇빛을 낭비하며 정처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친실장은, 소중한 자들이 있는 하우스를 한번 흘끗 보고는 색눈물을 흘리며 개울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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