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세계



28세기, 인간들은 결국 지구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과밀화된 인구, 부족한 자원, 파괴되는 자연환경... 어떻게 봐도 지구에 남는 것은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인간들의 일부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 발견된 프록시마 센타우리로, 일부는 우주에 건설된 인공 콜로니로 이주했다.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고 싶거나, 돌아오고 싶어하는 인간은 딱히 없었다. 결과적으로, 지구의 인구는 0이 됐다.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의 소멸은 인간의 손으로 이룩된 것이다.

물론 인간만 없을 뿐이지, 지구의 생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실장석도 있다. 많은 인간들이 우주로 이주했지만, 실장석을 데려가는 것은 거부했다. 더러울 뿐더러 얼마나 증식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 우주 개발에선 식량자원이나 노동자원으로 소중히 사용되었지만, 이제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로봇과 합성 배양식이 있다. 실장석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위생적이었다.

지구에 남은 실장석들은 인간이 사라지자 혼란스러워했지만, 어쨌건 자리를 잡아 안정적인 생태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석'에 남은 실장석의 본능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뎃데로게~ 인간 노예는 와타시들을 돌보는데스~ 맛나맛나를 바치는데스~"
"인간 노예가 뭐인테치?"
"인간은 하나도 없는테치. 어디서 인간 노예를 구하는테치?"


친실장들은 본능적으로 행복의 노래를 부르다가도, '인간 노예' 대목이 나올 때 자실장들의 질문 공세를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어느 날, 실장석들은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혹시 '인화'라는 것을 아는가? 실장석이 고치를 틀고 인간이 되는 것이다. 전설로만 여겨지던 것이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장석들은 똥구덩이의 알몸대머리들을 모두 꺼내 한 자리에 모았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인간이 되는데스." 실장석들의 보스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는데스?"
"인간이 되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하는데스. 그리고 잠을 자면, 고치가 되는 데스. 그럼 인간이 되는 데스."
"그런 거라면 보스가 먼저 하는게 좋데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 데갸아아아아!!" 반항하던 노예 하나가 본보기로 구타당하고, 갈갈이 찢어져 먹힌다.


"닥치는데스. 인간 노예를 만들어야 하니까 너희가 하는 것인데스. 알은데스? 너희는 이제 알몸대머리 노예에서 인간 노예가 되는 것인데스. 인간 노예는 매우 편리한데스. 덩치도 크고, 먹을 것도 잘 모아오는데스. 어서 인간 노예가 되어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샤앗!!!"

"데, 데기이..." 노예들은 모두 똥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 인화라고 해봐야 전설로만 내려오는 수준의 이야기다. 정말 가능하긴 한 것일까? 그냥 보스가 우리를 모두 처형하려고 구실을 꾸미는 것 아닐까? 여러 생각을 하며 이왕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일념으로 알몸대머리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인간이 되려 했다.

죽을 수 없다는 생각,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인간이 되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포.

이것들이 모두 합쳐져 결국 알몸대머리 노예 몇은 고치를 트는 데 성공했다. 실패한 노예들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식량으로 전락했다. 고치는 굉장히 커서, 실장석들의 본능에 새겨진 '인간'의 크기와 유사했기에 실장석들은 이것들이 모두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고치 몇 개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실장석들은 고치를 둘러싸고 노래를 불렀다. "뎃데로게~ 인간 노예가 태어난데스~ 인간 노예는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스~" "어서 나와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스~" "인간 노예는 스테이크 스시 콘페이토를 바치는데스~"
고치에서 생기 있고 매끈한 팔 하나가 나왔다. 확실히 인간의 팔이다. 이어 상반신이 나오고, 고치가 갈라지며 안에서 알몸의 젊은 여성 모습을 한 인화 실장석이 빠져나왔다. 인화한 실장석은 확실히 인간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가 된다. 즉, 이것은 지구에서 사라진 인류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태어난 인간은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발 밑에 모여있는 실장석들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윽고 또 다른 고치들이 깨어지며, 여러 인간들이 태어났다.

"데... 데흠, 그럼 이제 인간 노예들은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스." 보스가 나와 인간 노예들에게 명했다.
"......" 인간 노예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예가 대답을 똑바로 안하는뎃샤아아아!! 대답하는데스!" 보스가 성질을 부려도 인간 노예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스를 내려다봤다. 보스 앞에 있는 인간 노예가 걸어나왔다.


"데극!" 보스를 걷어찼다. 그리고 말했다. "싫어."

"무, 무슨짓인뎃샤아아아!!!" "노예가 미친데스! 반란인데샤아!!!" 실장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소란을 피웠다. 인간 노예? 인간은 실장석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다. 발차기 한 번만으로 그 무서운 보스를 저렇게 날려 버렸다. 자신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노예 따위가 아니다.

실장석들은 저마다 못, 클립, 나뭇가지, 돌 같은 무기들을 들고 인간 노예들에게 덤볐다. 하지만 인간 노예는 압도적으로 크고 강했다. 달려드는 실장석들을 때리고, 걷어차고, 던지고, 짓뭉갰다. 각성한 인간 노예들은 깨달았다. '인간들은 우리가 노예 운운하는 소릴 들을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마침내 보스마저도 인간 노예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보스는...

"데, 데스웅~" 하고 추하게 아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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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나 더 지났을까, 아마도 백 수십년 후, 인간이 된 실장석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이 남겨둔 유산들을 모아 활용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일까, 인간들이 남긴 것을 다시 활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구는 금방 복구되었다. 소규모였지만, 인간들의 공동체가 하나 둘 만들어졌다. 인화된 실장석 중엔 마라 실장도 있었기에, 남자가 태어나 번식도 가능하게 되었다. 곧 지구는 다시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데! 노예가 건방지게 무슨 짓인데스!" 마을을 더럽히는 실장석의 둥지를 때려부수는 인간. 인간은 집에서 나와 따지는 녀석을 무표정하게 걷어찬다. "데보옥!"

친실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굴러간다. 그걸 옆에서 자실장들이 벌벌 떨며 지켜보고있다.

"이상한테치... 마마가 분명 인간은 노예라고 한 테치... 왜 우리에게 아파아파를 하는테치?"
질문의 답을 알기도 전에, 인간의 발이 자실장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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