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챠 대지에 발딱 서다

 

"레후! 레후우우~ 레훗!"


이놈 또 울어제끼네. 이 녀석은 내가 얼마 전 주워온 저실장이다. 장난꾸러기 초등학생들의 유희거리로 놀다 버려졌는지, 육교 난간에서 상처투성이인 채 바들바들 떨며 웅크려 있던 것을 불쌍히 여겨 데려온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사육 환경은 만들어주었고 프니프니도 제때 해 주고 있긴 하지만, 딱히 애정이랄 건 없다. 애초에 내 주변에는 학대파 뿐인지라, 충동적으로 구조해 온 녀석을 보낼 곳이 없어 데리고 사는 것 뿐이다.


"닌겐상 놀아주는 레후! 프니프니해주는 레후!"

"고놈 참 시끄럽네. 야, 아까 밥 주고 프니프니도 해줬잖아."


그러자 저실장은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불만을 온몸으로 표시했다. 허헛 녀석. 그거 2D 미소녀가 해야 귀엽거든? 우리집 저실장은 이상하리만큼 애정을 갈구했다. 보통의 저실장이라면 밥과 프니프니만 있으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마냥 굴 텐데, 이놈은 애정결핍이라도 걸렸는지 자기를 봐 주지 않으면 이렇게 난리다.

지금은 승급전이라 집중해야 되니까 제발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구만. 나는 저실장의 말을 무시하려 노력하며 컴퓨터 모니터에 온 관심을 쏟았다.


"레삐이이이이!"


녀석이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탓에 리 신을 밴할 것을 마우스가 미끄러져 르블랑을 밴하고야 말았다. 아니 르블랑도 짜증나는 챔피언이긴 한데... 난 리 신을 밴하고 싶었거든?! 순간 짜증이 폭발한 나는 저실장이 담긴 수조를 이리저리 거칠게 흔들고 옆에 있던 무릎담요로 덮어버렸다.


"레뺘앗?! 어두운 레후! 갑자기 어두운거 싫은 레후! 미안한 레후! 다시 밝게 해주는 레훼에엥...!"


저실장이 울어제끼든 말든 나는 게임에 집중했다. 연승을 거두고 무사히 승급을 하고서야 저실장이 생각났다. 수조가 조용했다. 혹시 어둡게 하니 닭새끼마냥 멍청해가지고 밤인 줄 알고 자나, 생각하며 무릎담요를 치우자 공포에 물똥을 지리며 기절한 저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




"닌겐상 보는 레후! 구더기 대단한 레후!"


또 귀찮게 구네. 저번에 기절까지 하게 만든 일이 내심 미안해서 예전보다 잘 대해주고 있긴 하다. 그치만 역시 시도때도 없이 불러대는 건 귀찮다. 정말 귀찮다고! 확 내 친구 학대파한테 넘겨버ㄹ...


"또 뭐냐...오...오우와아앗 완전 쩔어어엇!"


성가셔하며 수조 안의 저실장을 들여다본 나는 눈이 빠질 듯 놀랐다. 완전 쩔어! 저실장은 꼬리로 몸을 지탱하고 빳빳하게 서 있었다! 벽면에 돌기 같은 앞발을 대고 일어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로지 꼬리와 자기의 힘에만 의존해서 꼿꼿이 일어선 것이다! 이게 바로 관심 종자의 최종 진화인가! 나는 얼른 핸드폰을 들어 그 모습을 찰칵찰칵 찍어댔다. 이건 인터넷에 올려야 한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은 나는 몇 장을 추려낸 후, 제일 먼저 여자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전송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녀도 신기하고 귀엽다고 난리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잘 먹히겠지.


인터넷에 사진을 올린지 얼마 되지 않아 덧글들이 우수수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반응이 좋잖아!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너! 장하다 구더기! 나는 저실장에게 커다란 콘페이토를 선물로 주었다. 저실장은 원하던 관심과 선물을 한꺼번에 받아서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활짝 웃으며 자기 얼굴만한 콘페이토를 꼭 안고 핥아대는 녀석을 보니 나도 간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




그 후에도 저실장은 발딱 서기 재주를 시도때도없이 선보였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걸 기억하는 것이리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저실장을 집 곳곳에 놓고 발딱 일어서게 한 다음, 사진을 찍어 실장석 사이트에 업로드했다. 반응은 늘 폭발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저실장이 꼬리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선 것 뿐인데, 반응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닌가? 자실장 두 마리가 합동 춤을 추는 영상도 내 발딱 선 저실장 사진 한 장보다 조회수가 적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건가? 어...어쩌면 이런 사진이 대히트를 치는 것만큼이나 저실장이 덧없고 무쓸모한 존재라는 뜻일수도... 으음, 이건 좀 씁쓸하군.


여자친구도 인터넷 유명인사가 된 저실장을 보러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다. 요즘 나보다는 저실장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그녀가 때로는 야속하기도 했다. 지금도 저실장을 바닥에 두고 엎드려서 같이 놀고 있다. 뭐, 그치만 결국 녀석 덕분에 그녀를 더 자주 보게 되는 셈이니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잠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남자친구 집에 왔잖아. 30분씩이나 남자친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실장만 보는 건 뭐냐고. 너무하잖아.


나는 비장의 수를 쓰기로 했다.


"자기야! 나도 발딱 잘 서는거 있어!"


저실장과 함께 싱글벙글 미소짓다가 순식간에 정색한 그녀가 내 뺨을 후려쳤다.




*




비극과 희극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니라.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이다. 우리 엄마였던가...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나? 어쨌든 이러니저러니해도 간밤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 여자친구와 나는 지친 채 기분좋게 잠들어있었다.


"어머... 아침부터 건강하다니깐."


아직도 반쯤 잠들어있는 내 귓가로 그녀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네. 나 아직 안 섰... 응? 잠깐. 어제 저실장을 수조에 놔뒀던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어젯밤 깜박 잊고 나는 저실장을 수조로 돌려두지 않았다. 좁은 수조에서 벗어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즐거웠던 저실장은 방 안에서 실컷 논 후 어딘가에 처박혀 자다가 새벽 추위를 맞았다. 온기를 찾아 헤메던 저실장은 하필 내 하반신으로 기어들어왔고, 여자친구의 부드러운 손가락에 반응해서 버릇처럼 벌떡...


"꺄악!"


깜짝 놀란 여자친구가 반사적으로 내지른 매서운 손바닥이 저실장과 내 주니어에 한꺼번에 명중했다. 느닷없이 상처입은 우리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아침부터 고통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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