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666tr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666tr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기준

 

웬 꾀죄죄한 들실장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나 말했다.
"미안한데스.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그 과자를 한 톨만 주신다면 감사하는데스."

들실장치고는 제법 예절을 갖춰 말하는 모습에(보통 들실장이라면 '어이 똥노예! 당장 과자를 내놓는데스!' 하겠지) 왠지 호기심이 생겨 한번 물어봤다. "왜?"

"와타시의 자가 3일째 굶고 있는데스. 와타시도 매일같이 먹이를 찾으러 다녔지만 없었던데스. 염치불구하지만 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스."
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최근 음식물쓰레기 관리가 강화된 탓이겠지. 나는 손에 든 건빵 봉지를 내려다봤다.
"한 톨로 되겠어?"
"와타시는 괜찮은데스. 그것보다 자가 굶는 게 걱정인데스."
"네가 가지고 가다가 먹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들실장은 잠깐 멈칫하더니 후드를 벗는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뒷머리를 모두 뽑았다. "와타시가 인간에게 줄 가치 있는 것은 없는데스. 하지만 이 머리카락을 대신 바치는데스. 이것이 와타시의 결의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는데스."
"...그거 뽑으면 안 자라는 건 알지?"
"아는데스." 이 녀석은 꽤나 양충같다. 자기 자식을 위해 머리카락을 포기하려는건가.

"그 정도라면 주겠지만, 나도 분충에게 먹이를 주긴 싫으니까, 내가 한번 보고 판단한 다음에 줄게." 내가 일어서자 들실장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놀란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 "안되는데스! 그렇다면 과자는 필요 없는데스! 와타시의 말은 잊어주길 바라는데스우!!!"

갑작스러운 변화의 이유가 궁금하다. "분충인지 봐주겠다는데 왜?"

들실장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한다. "...어차피 인간의 기준인데스. 실장석에겐 실장석의 기준이 있고, 인간에겐 인간의 기준이 있는데스. 와타시의 기준으로는 사랑스러운 자라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둘도 없는 분충일 수도 있는데스. 그런데도 인간의 기준으로 와타시의 자를 심판하겠다는 것은 잔혹한데스. 그렇게 하겠다면 과자는 필요없는데스."

기준이라... 확실히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시도때도없이 새끼를 치려는 실장석은 분충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실장석의 기준으로 보면 새끼를 많이 낳는 실장석은 양충일 것이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이를 구하는 실장석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분충이겠지만 실장석의 기준으로 보면 먹이를 잘 구해오는 양충일테고. 행복의 노래니 하는 것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분충의 태교지만 실장석의 기준으로는 앞으로 힘든 삶을 살아갈 새끼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려는 양충 어미의 태교일 것이고.

나는 들실장에게 건빵 두 개를 쥐어줬다.










구제 기술자

 

ㅇㅇ시 ㅇㅇ구에서는 올해도 실장석 구제 예산 편성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구청 환경과에 나타나 책임자를 찾았다. 어딜 봐도 특출나보이지 않는 평범한 20~30대 남성. 남성은 '나라면 공원 실장석을 완전히 구제할 수 있습니다. 300만원이면 됩니다.' 라고 자신했다. 환경과장은 미친 자라 여기고 돌려보내려 했으나 곧 남자가 내미는 증거물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 실장석 완전구제, XX구 실장석 완전구제... 실제로 이곳들은 과거까지 들끓는 실장석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근래에는 실장석 피해는 거의 보고되지 않게 되었다. 그게 이 남자 때문이라고?

반신반의하는 환경과장은 그럼 후불하겠다는 조건으로 남자의 실장석 구제활동을 용인했다. 남자는 3일이면 된다고 손가락 3개를 펴며 자신있게 말했다.

다음 날, 남자는 ㅇㅇ구의 실장석 피해자가 가장 크다는 공원에 나타났다. 인기척을 느낀 실장석들이 부스럭거리며 수풀에서 고개를 내민다. 남자는 보란듯이 별사탕 봉지를 손에 들고 걸었다. 별사탕 냄새에 취한 실장석들은 의심하지 않고 남자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아우성치며 남자를 불렀다. 물론 남자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공원 전체를 고루고루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다시 입구로 돌아왔을때 쯤, 남자는 실장석들에게 폭탄선언한다.

"난 사육실장을 찾고 있다. 너희들 중 딱 한 마리만 내 사육실장으로 삼아주지. 내일 와서 결정하겠다."
"데데!?" "데에에에에???"

별사탕 봉지와 '사육실장'이라는 단어로 인해 실장석들의 이성은 마비된다. 실장석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남자는 이미 떠났다. 실장석들은 '이들 중 한 마리만이 사육된다'는 남자의 마지막 말을 되새긴다. 바로 눈치 빠른 한 마리가 바로 옆의 녀석을 때려눕히고 마운팅 자세로 주먹을 날려댄다. "데게! 데겍! 데갸아! 데보! 데보!!!!" "데샤아아아아!" "데기이이! 데보!"

그날 밤, 공원에서는 끊이지 않고 실장석들의 살육이 이어졌다. 단 하나만이 사육될 수 있다면 나머지 경쟁자들을 모두 해치우면 되는 것이다. 실장석에게는 당연한 논리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냥했던 친실장이 앞장서서 자식들을 찢어죽이고, 자실장들도 힘을 합쳐 마마를 죽이고는 그 고기를 씹었다. 마라 달린 놈들도 머릿수로 달려드는 실장석들을 이기지 못한다. 어제의 가족이 오늘의 적,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다. 실장석들은 사육실장으로 간택받기위해 죽고 죽였다. 확고한 목표가 있는 실장석들은 전문 구제업자가 왔을때와는 달리 어느 누구도 공원에서 도망치거나 하지 않는다. '고귀한 나는 다른 천한 것들과 다르다' 라고 믿는 실장석 특유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은 죽지 않고 사육실장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은둔하는 '민간인'마저도 집요하게 찾아내 모두 죽인다. 확실하게 위석을 파괴해서 죽인다.

다음 날, 남자는 공원에 찾아갔다. 한 팔이 없고 너덜너덜한 반독라 실장석 하나가 다가와서 흉하게 아첨한다. "테츄~웅~"

남자는 그걸 밟아 으깼다. 그리고 가져온 마대자루에 실장석 시체를 하나씩 던져넣었다. 꼬박 하루를 하니 공원 실장석은 더이상 남지 않았다.

구청은 정말로 실장석 구제가 단 3일만에 끝나버렸다는 걸 믿을 수 없었지만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남자에게 300만원과 함께 추가 보상금도 주어보냈다. 그렇게 해도 구제업자 호출과 장비대여 비용에 비하면 정말 말도 안되게 저렴한 가격이다. 남자는 오만원짜리로 두둑한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실장 배틀러

 

실장석. 생태계에 있어 최하위권의 위치를 자랑하는 가엾고 불쌍한 생물.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실장석이 죽어나간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실장 배틀러!
새로운 강철의 육체를 얻은 실장석이 지금 일어선다!

---------------------------------------------------

...라는 것이 최근 유행하는 장난감 '실장 배틀러'의 광고다. 이제 누구나 이 실장 배틀러의 카피라이트인 '새로운 강철의 육체를 얻은 실장석이 지금 일어선다!'(실제로는 플라스틱이지만) 를 외울 정도로 유명해져버린 이 장난감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실장석의 뇌와 위석을 적출해 실장 배틀러에 설치된 뇌와 위석을 넣는 자리에 끼워넣는다. 그리고 활성제를 가득 채워준다. 실장석의 생명력은 엄청나서, 뇌와 위석이 뽑혀도 죽진 않고 가사상태를 유지한다. 때문에 아무리 어린아이들의 서툰 손놀림이라도 실장석의 기관을 적출하는 건 어렵지않다. 게다가 이걸 쉽게 해주는 도구인 실장 배틀러 인스톨러(별매)도 판매되는 것이다. 실장석? 실장석이라면 밖에 나가면 널려있다.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 아니면 다른 짐승을 이용한 완구라면 제작자는 미친놈으로 매도되고 제작사 역시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실장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사방에 널린게 실장석이다. 그런 것 한 두마리 쯤은 어떻게 해도 괜찮은 것이다. 심지어 실장 배틀러에 자기 사육실장을 넣고 들실장들을 파괴하는 것을 보며 즐기는 변태들도 있다고 하니 참 애호파란 것들은 알 수 없다.

그 날도 놀이터에선 실장 배틀러를 가지고 노는 꼬마들이 있었다. 새로 산 것인지, 놀이터 구석에 있는 골판지를 털어서 괜찮은 친실장 하나를 건져낸다. "데쟈아! 데구우우!!" 하고 울부짖는 친실장의 머리에 실장 배틀러 인스톨러를 씌우고 버튼을 누르자 "데짓!"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뭔가 물컹물컹한 것이 뽑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친실장은 쓰러진다. "마마아! 마마아아아앗!!" 하고 울부짖는 자실장들을 가지고 한 소년이 저글링을 한다. 익숙치 않은 손놀림으로 될 리가 없었기에 몇 분후 자실장들은 모두 땅바닥의 걸쭉한 얼룩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위석을 끼웁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배틀러의 주인은 뇌와 연결된 실장 배틀러를 만족스럽게 보면서 마지막 작업을 한다. 찰칵 하고 위석이 끼워지자 마치 호버 파일더가 들어간 마징가 Z처럼, 메칸더 맥스와 합체한 메칸더 로보처럼, 대지에 서는 건담처럼, 눈을 반짝이며 실장 배틀러가 가동하기 시작한다.

...데데에... 데이...
...여긴... 어디인... 데스우...?

새로운 시야로 보이는 시각정보를 받아들이자 혼란스러워하는 실장석. 실장 배틀러의 시야는 실장석의 것보다 훨씬 더 월등하고, 기본 시야, 광각 시야, 정밀조준의 3가지로 전환 가능한 렌즈가 장착되어 있다. "됐다!" 환호하는 주황색 셔츠 소년에게 친구들이 모여든다. "움직여?" "야 방금 움직였어! 봐봐!" 실장 배틀러에 들어간 실장석은 여전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머리에 뭐가 씌워져서... 아픈 일을 당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왠지 살아있다. 그리고 눈 앞에는 방금 아픈 일을 한 인간들이 있다. "데히이이이이!" 실장 배틀러는 도망가기 시작한다.

실장 배틀러에는 기본적으로 느린 보행속도를 보강하기 위해 발뒤꿈치에 글라이딩 휠이라는 물건이 장착되어있다. 실장석이 달리려고 생각하면 뇌의 신호를 받아들여 처리 후, 글라이딩 휠이 가동되어 바퀴로 주행하며 통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어린이가 빨리 달리는 정도의 속도지만 실장석에게 있어서는 경이로운 스피드. 왠지 평소보다 속도가 빠른 것에 이상하해는 실장석. 게다가 다리를 움직이지도 않는데 원하는 방향으로 미끄러져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어쨌건 도망은 가야한다는 생각에 실장석은 계속 달린다. 결국 발이 빠른 녀석에게 잡히지만 꽤 멀리 달렸다.

"네가 주인이니까 똑바로 관리해야지." "미안." 숨이 차 헐떡거리는 녀석에게 실장 배틀러의 주인이 사과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실장 배틀러의 이동반경을 제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소년들은 놀이터에 있는 정자의 마루 위에 실장 배틀러를 올려놓는다. 여기라면 멀리 도망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안경을 쓴 소년 하나가 음흉하게 웃으며 등에 멘 가방을 연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것은 또 다른 실장 배틀러. "약속했지?"

실장 배틀러라는 이름답게 이 녀석들은 서로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장나도 금방 수리나 부품교환이 가능한 모듈식 구조(부품 별매)기에 고장나거나 파손되어도 어렵지 않게 수리할 수 있다. 어린이들을 현혹하기 위해서인지 수리비용도 그리 비싸지 않다. 덕분에 세뱃돈을 몽땅 실장 배틀러에 갖다박는 벌써부터 인생이 걱정되는 불쌍한 놈들도 다수 있다. 그는 아이들이 실장 배틀러로 싸우는 걸 느긋하게 구경해보기로 한다. 뭐 괜찮곘지... 그가 어렸을 땐 배틀러가 아니라 진짜 실장석을 마주세워놓고 싸움붙이곤 했다. 이것이 바로 기술의 진보라는 것이다.

...데에...
...무서워보이는 놈이 나온데스...
...뭐인... 데에...? 싸우는데스...?...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꼬마들이 일제히 주먹을 치켜들고 환호성을 지른다. 안경 꼬마의 실장 배틀러는 '칼주먹' 파츠를 장착하고 글라이딩 휠의 출력을 보강한 근접격투타입. 오른손의 매니퓰레이터 대신 날카로운 양날검이 장착되어있다. 저렴하고 효과가 좋아 인기많은 파츠다. 주황옷 꼬마의 배틀러는 갓 만들어진거라 바닐라 타입. 실장 배틀러의 기본 무장인 스프링 펀치(스프링식으로 팔이 단거리 뻗어나왔다 들어가는 펀치 무기)와 시야를 뺏기위한 견제용 무기인 고휘도 라이트밖에 없다. 치사하네. 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주황옷 꼬마는 그래도 투지를 불태우며 "가라! 1호(실장 배틀러에 붙인 이름 같다)!" 하고 외쳤지만 정작 배틀러 본체는 별 의욕이 없어보인다.

...무서운데스...
...무서워...무서운데스...어째서 싸우라고 하는데스...?
...무서...데갸아...!

순식간에 칼주먹이 1호의 어깨를 내려친다. 흔들리는 충격에 잠시 놀라는 1호. 하지만... 고통은 없다. 실장 배틀러가 통각까지 전해주진 않는 것이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면 두려움도 없다. 갑자기 1호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쩌면 와타시는... 무적이 된 데스우?" 칼주먹은 약간 뒤로 빠져 상황을 가늠한다. 1호는 시야에 적응하려 애쓴다. 찰칵,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1호의 시야가 광각시야에서 정밀조준으로, 정밀조준에서 기본시야로 바뀐다. 이제서야 1호는 상황을 이해한다. 뭔진 모르지만 착한 인간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그리고 앞에 있는 똥벌레를 격파하라는 것 같다.

"데샤아아아!" 소리는 나지 않지만 1호가 기합을 넣고 돌진한다. 배틀러는 서로 부딪혀 얽힌다. 1호는 손을 뻗어본다. 어쩐지 자신의 손이 눈 앞의 똥벌레의 것과 같은 모양인 걸 알아챈다. 그리고 이 똥벌레를 날려버리겠다고 생각한 순간 "예이!!!!!" 주황옷 꼬마가 환호성을 지른다. 스프링 펀치로 칼주먹을 날려버린 1호. 뭔진 모르지만 해냈다는 느낌이 든다. 공격을 멈추지 않고 달려든다. 2번째 공격을 칼주먹은 피한다. 이제는 긴장감이 흐른다. 서로의 공격을 관찰하고 대비하기 위해 원을 그리면서 천천히 돌고 있는 두 실장 배틀러.

어느샌가 남자도 흥미진진해져서 가까이 와 보고있다. 꼬마들은 그런 아저씨에게 신경쓰지 않고 싸움에만 집중한다. "죽여! 죽여버려!" 안경 꼬마가 외치자 칼주먹이 행동을 개시한다. 칼을 뻗어 1호를 찌른다. 동체에 깊숙히 찔러들어간다. '데보오오오오옥!' 하고 놀라운 광경에 1호는 반사적으로 비명지른다. 그렇지만 비명지르지 않는다. 비명을 질러야 하지만 입이 없기 때문이다. 칼주먹을 떼어내기 위해 무작정 버둥거린다. 왼팔 오른팔로 번갈아가며 스프링 펀치를 날려댄다. 결국 칼주먹은 유효타보다 자신이 입은 데미지가 더 축적되기 전에 칼을 뽑아내고 멀리 떨어진다. 1호는 놓치지 않고 달려가 이번엔 칼주먹의 다리를 노린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스프링 펀치. 그리고 관절이 부서지며 이상한 자세로 무너지는 칼주먹. "야!!!!" 안경 꼬마가 비명을 지른다. "야 그만해! 저게 얼마짜린데!" 당장 주황옷에게 그만두라고 소리지르지만 다른 구경꾼들이 안경 꼬마를 밀쳐버린다. 이 흥미진진한 싸움이 누군가에 의해 멈추길 바라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안경 꼬마 말고는 없었다.

칼주먹도 혼신의 반격을 가했다. 기습적으로 칼을 뻗어 1호를 찌른다. 결정타! 위석이 있는 곳을 찔러 하마터면 위석이 깨질 뻔했다. 주변을 둘러싼 관중들이 이 위험한 일격에 환호한다. 1호는 뭔지 모르게 싸한 느낌을 받지만 이내 괜찮다는 것에 안심한다. 칼주먹이 분한 듯 손을 턴다. 아마도 이 다음이 서로의 마지막 일격이 될 것이다. 다시 둘은 대치 상태로 들어가 마주본 채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돈다. 그 때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장애물을 놓자는 것이다. 소년들은 동의해 몇 명이 재빨리 돌, 골판지 상자의 잔해 따위를 주워서 정자 위에 놓았다. 순식간에 은엄폐물이 생겼다.

1호는 커다란 골판지 벽 뒤에 숨어 상대의 행동을 읽으려했다. 상대는 뾰족한 아파아파를 가졌다. 뭘 해도 적어도 자신보단 강하다. 하지만 자신은 무적이다. 따라서 두렵지 않다. 그러므로 칼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1호는 슬쩍 골판지 너머를 본다. 칼주먹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어디서 올 지 모른다. 1호는 광각 시야로 전환하고 주변을 세심히 둘러본다. 잠깐, 저편의 골판지 벽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1호는 이 틈을 놓치지 않는다. 재빠르게 달려가 골판지를 스프링 펀치로 내려치지만... 골판지 때리는 소리가 나며 골판지에 왼주먹이 박힌다. 그 뒤로 갑자기 나타난 칼주먹! 분명 데프프하고 웃고 있을 것이다. 칼주먹은 이것을 노리고 엄폐물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며 돌을 던져 1호를 유인한 것이다. 실장석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는 고차원 전략이다.

1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주황옷 소년은 양 주먹을 쥐고 경직된 표정, 안경 소년은 웃고있다. 칼주먹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달린다. 그 순간! 철컥! 소리와 함께 분리되는 왼팔! 실장 배틀러는 모듈 구조로 되어있기에 파츠의 분리도 자유자재다! 아마 1호는 왼팔은 포기하고 오른팔로 일격을 노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다가오는 칼주먹에게 고휘도 라이트를 비춘다! 순식간에 째앵 하며 밝은 빛에 시야를 뺏긴 칼주먹이 주춤대면서 정지한다. 1호는 그걸 노려 방금 칼주먹이 자신을 찔렀던 위치를 가늠해 스프링 펀치로 일격을 가한다! 파킨! ...잠깐 정적이 흐른다. 소년들은 고요해졌다. 잠시 후, 위석이 깨진 칼주먹이 털썩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소년들의 환호성이 놀이터에 울려퍼진다. 그도 그만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안경 소년은 분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수긍하고는 환호하는 대열에 낀다. 이렇게 소년들의 하루가 또 지났다.

주황옷 소년은 집에 돌아왔다. 실장 배틀러를 소중히 옆에 끼고있다. 그날 밤, 자리에 눕기 전 활성제를 가득 채워넣고 소년은 눈을 감는다. 실장 배틀러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일은 모아둔 세뱃돈으로 샵에 가서 실장 배틀러를 튜닝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날 꿈에서 소년은 실장 배틀러 챔피언이 되어 있었다.









미래인간의 진화

 

한 미래예견에 따르면, 인간은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더 발전하는 기계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또 다른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진화의 방향이란 번거로운 일은 모두 기계가 하니까 칼로리 소모가 적게끔 점점 더 몸집은 작게, 그리고 뇌는 더 크게, 사지는 점점 가늘고 약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28세기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꽤 놀라울 정도로 적중했다.

28세기, 인간이 만들어 둔 시스템의 모든 과정에는 기계가 개입하고 있다. 그것도 100%. 완전자동화를 이룩한 것이다. 때문에 인간들은 집에서 코만 후비고 있어도 저절로 의식주는 물론 온갖 오락까지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지구상에서 식량난이라는 것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기계의 유지보수는 기계가 한다. 기계를 돌리는 데 필요한 자원의 생산과 가공도 기계가 한다. 이미 '직업'이라는 것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인간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 중 하나였던 해저의 탐험은 모두 끝났다. 물론 기계 덕분이다. 소수의 인간들은 이 안락함을 포기하고 몇 세기 전 우주로 떠났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구상의 인간들은 모두 1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몸집에 비대하게 살이 찐 외모를 하고 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미래인류의 내장과 소화기관 역시 극도로 퇴화하여 매우 단순한 형태의 한 가지 장기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이런 모습이 되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시대다. 오히려 21세기의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한 존재가 있다면 진귀하게 취급되며 동물원 같은 곳에 보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귀찮은지 모두 똑같은 녹색 옷을 입고 있다. 그것도 입기 쉬운 원피스로. 쓸 일이 없는 팔다리는 빈약하게 변했고, 손가락도 돌기나 마찬가지인 수준으로 짧아졌다. 고대 인류처럼 손가락으로 정밀조작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 이유다. 아예 살에 파묻혀 손가락이라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미래인류의 풍족한 삶은 결국 어느 순간 끝을 고했다. 미래인류의 사이에서 새로운 역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XY유전자 보유자들은 이 병에 약해 90%에 달하는 매우 높은 치사율을 가졌다. 새로운 약을 연구개발하려 해도, 이미 미래인류는 모든 것을 기계에게 일임한 상태였고, 기계 역시 뾰족한 해답을 내지 못했다. 결국 극단적인 처사로, 기계는 미래인류의 유전자 자체를 변형시켜 질병을 예방한다는 솔루션을 제안했다. 미래인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이 의견에 찬동했고, 결국 유전자 변형 약물이 전인류에게 짧은 시간 안에 투여되었다. 유전자가 변형된 인류는 이제 XX염색체밖에 가지지 않게 되었고, 태아는 모체의 장기에서 체세포 일부가 변형하는 클론으로 생산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 세기 후, 우주로 떠났던 고대 인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인류(이하 고대 인류)가 마침내 돌아왔다. 하지만 고대 인류는 바뀌어버린 지구를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웬 기분나쁜 녹색 옷을 입은 생물들이 자신들을 보고 기분나쁘게 웃으며 뭔지 모를 이상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불쾌하게도 인간을 닮기까지 했다. 미래 인류는 고대 인류의 모습을 보고 마침내 자신들을 섬기기 위해 우주로 떠난 어리석은 놈들이 돌아왔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이것이 미래 인류의 말로라는 사실을 모르는 고대 인류는 결국 이것들을 '똥벌레' 라고 부르며 죽여 나갔다.

똥벌레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어째서 '자신들을 섬겨야 할 노예들'이 자신을 죽이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번역투) 구현 돌 vs 인간 노예

 

「데스우! 인간, 이 와타 시와 새끼를 길러라 데스!」

「기르는 테틱! 길러주는 테틱!」

발 아래를 보니 녹색 꾸물거리다 작은 사람 모양 동물.

이것은 구현 돌이라고 하는 최근 발생 시작한 해수로,

인간을 보면 어째서인가, 길러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에서 전혀 부탁이나 애원의 빛은 없고 오직 명령으로,

길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인간조차 기를 마음이 없어지게 만드는 놈들이다.

「뭘 하고 있는 데스! 빨리 와타시를 길러 실장으로 하는거예요!」

「와타치도 함께 데려가라 테치! 인간 노예는 말을 못 알아듣는다 멍청한 테틱!」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밟으려던 발을 멈추었다.

「나는 너희들의 노예인가?」

「그런 테치! 빨리 스테이크와 스시를 넘기고 와타 치를 길러라 테치!」

「무언가 이상한. 착각하고 있 는가? 노예는 주인이 기르는 것 이다.」

「무슨 말을 하는 테치?」

「노예는 집이 없다. 대신 노예는 주인이 길러 주는 것이다. 주인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닌가?」

「테?」

친과 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땀을 흘리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사실을 이야기했 을 뿐.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다. 주인의 재산이니 주인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거 모르는 테틱! 노예는 어서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는테치!」

「흉한 대머리 알몸이 되기 전에 말을 듣는 데스!」

「레프, 오네챠 프니프니 바라는제이.」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다. 재산이 집에서 떨어져 사는 것인가? 오히려 내 쪽이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나와 구현 돌 일가가 입씨름을 하고, 결국 질려버려 집에 돌아가는 구현 돌 일가의 뒤를 밟는다.

「덱! 인간이 따라오는데스?」

「당연하다. 나는 노예니까, 주인의 집에 가서 살아야 한다.」

「치뿌뿌, 마마, 집에 가면 이 녀석을 대머리 알몸으로 만드는테치!」

구현 돌의 집은 공원 구석에 골판지 박스를 세워놓은 것 뿐이다.

「집이 작아서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합니까?」

「데데?」

「노예는 주인의 집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다. 무리해서라도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바로 골판지를 짓밟는다. 모서리가 찌그러져 무너진다.

「데에엣! 와타시의 집이...」

「테에! 멍청한 노예가 집을 부순테치!」

「집이 작아서 들어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나의 잘못이 아니다. 노예를 부릴

정도로 큰 집이 아니면서 노예를 부린 네가 나빠.」

「무슨 소리인테치? 당장 원래대로 돌리는테틱!」

이윽고 자실장도 밟아 죽인다.

「짓!」

「데게! 와타시의 자, 죽이다니 무슨 짓 데스! 심한 데스!」

친이 팔을 휘두르며 항의한다.

「어둡기 때문에 제 발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기가 없는 집이 나쁩니다.」

「전기라니 무엇 데스! 까다로운 노예 데스! 강제 출산으로 와타시의 자를 갚는데스!」

라고 말하며 내 얼굴에 푱 푱 뛰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닿을 리 없다.

「데, 데히.」

「그것보다 저는 어디서 생활하면 좋습니까?」

「노예, 노예는 똥 구덩이라도 들어가면 좋다 데스!」

과연, 구현 돌이 파놓은 똥 구덩이가 있다. 하지만 발도 들어가지 않은 될 정도로 작다.

「똥 구덩이는 너무 작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데? 기다리는 데스, 와타시가 너를 가둘 똥 구덩이를 만드는데스.」

어미 구현 돌은 그로부터 똥 구덩이 속에 파고 내려가, 굴을 넓히려 한다.

여유롭게 한 시간 정도 기다렸지만, 전혀 넓어지지 않는.

나는 바쁘게 굴을 파는 구현 돌을 내버려두고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굴을 파 공원 경관을 해친 구현 돌이 관리인에게 맞아 죽은 것을 계기로

공원에는 구제가 실시 되었다.










Jissou Reality Syndrome

 

남자는 조용히 창고 문을 연다. 피비린내와 단백질이 썩는 고약한 냄새, 연탄집게와 정원가위를 필두로 한 무시무시한 고문기구들,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남자에겐 이 끔찍한 광경이 천국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답고 너무나도 즐겁다. 그리고 그 가운데의 급조 형틀에 묶여있는 것은 알몸대머리의 생물. '실장석'이다.

이미 사방에는 '실장석'의 피와 살점이 흩뿌려져있고, 썩어가는 백골 시체들이 보인다. 남자가 즐긴 잔혹한 놀이의 흔적이다. 실장석은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벌떤다. 아랫도리에선 더러운 배설물을 질질 흘려댄다. 팬티가 벗겨져 있으므로 흔히 말하는 '빵콘'은 하지 않지만, 더럽다. 남자는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실장석의 재갈을 푼다. 그제서야 입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실장석은 비명 대신 벌벌 떨며 남자에게 애원한다.

"그만두는... 데스, 와타시... 집으로 보내주세요... 데스."
"똥벌레 주제에 바라는 게 많네."

남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펜치를 실장석의 입에 가져간다. 실장석이 고개를 저으며 저항하려 애쓰지만 남자의 강한 손아귀에 강제로 입을 벌린다. 그리고 남자는 펜치로 이빨을 하나씩 똑 뽑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때? 좋아? 더 해줘?" 남자는 실장석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나 더 뽑는다. 비명이 울려퍼진다. 하지만 이 창고는 남자가 특별히 방음 사양으로 만든 것이므로, 그 비명이 새어나가는 일은 없다. 실장석의 다리 사이에선 여전히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와 남자의 바짓단을 적신다. 기분이 나빠진 남자는 실장석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끅!"

"'빵콘' 하지 마라. 빵콘하라고 가르쳤냐?"
"아... 아니, 아닌... 데스... 용서해주..."


퀭한 눈으로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실장석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남자는 다시 이빨 하나를 뽑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실장석의 이빨 6개정도를 뽑아내고, 남자는 그 몰골에 만족한다. 그리고 이어 실장석을 주먹과 발로 마구 구타한다. 한 대 맞을 때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소리를 내는 실장석을 보며 남자는 희열하는 미소를 띈다. 실장석은 남자가 무섭다. 왜 이렇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며 웃을까? 이게 재미있을까? 실장석의 머리로 남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미친 것이 틀림없다.

실컷 때리며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실장석이 바닥에 싸지른 배설물들을 퍼올려 실장석의 입에 집어넣는다. 실장석은 눈물을 흘리며 똥을 삼킨다. 남자는 실장석에게 똥밖에 먹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학대용 실장석이라면 상식 중의 상식이다. 이 실장석은 특이하게도 재생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 남자가 온갖 에너지 드링크를 혼합해 만든 특제 실장 활성제를 먹여도 그렇다. 때문에 남자는 오래오래 즐기기 위해 실장석 학대는 하루에 한 가지 만으로 참고 있다.

물론 하루에 한 가지라고 해도, 그 학대가 3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사이 실장석은 받을 수 있는 학대는 다 받았다. 알몸대머리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똥먹이기, 이빨뽑기, 부러뜨리기, 굶기기, 그냥 구타까지... 물론 더러운 환경에서 알몸대머리로 방치해두고 있는 것도 학대의 일환이다.

"히이... 히... 히이이... 히..."

실장석은 다시 재갈이 물려진 채 캄캄한 창고에 남겨져 운다. 남자가 왜 자신을 여기로 데려왔는지, 어째서 이렇게 학대하는지 전혀 모른다. 짚이는 것도 없다. 기억나는 거라곤... 없다. 자신은 대체 뭘까? 누구일까? 왜 태어났을까? 어째서 여기에 있을까? 짧은 머리로 생각해도 나오는 답이 없다. 최근엔 과거의 일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에게 붙잡히기 전 기억이 희미하다. 목 아래를 보니 이게 정말 자신인가 싶을 정도로 야위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더 끔찍하다. 이미 자신 말고도 많은 실장석들이 이 참사에서 고통받다 죽어간 것이 틀림없다.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마마를 부르짖으며 고통받다 죽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자신도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물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가족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실장석은 숨 쉬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눈물이 솟구치고 호흡이 가빠진다. 마치 가슴 속에서 뭔가가 깨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차가워진다. 아프지 않게 된다. 편안해진다. 눈이 감긴다. 머리가 아래로 쳐진다.

다음 날, 창고로 돌아온 남자는 실장석의 상태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새 실장석을 구해야겠어..."



----------------------------------------


[잔혹한 엽기 살인마 검거... '실장석'이 뭐길래?]

최근 여러 건의 아동 납치 사건 용의자로 확인된 엽기적인 살인마가 검거되었습니다. --시에 사는 35살 ㅇ씨는 인근에 사는 어린이 수 명을 납치해 가택 창고에서 학대하다 살해했으며, 그 수는 무려 8명에 달합니다. ㅇ씨는 일부러 다른 지방에까지 내려가 어린이를 납치해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목격자(문방구 주인): 자기가 무슨 스테이크를 먹여줄 테니까 따라오라고...
기자: 스테이크요?
목격자: 네.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범행 동기에 대해 ㅇ씨는 '실장석을 학대했을 뿐이다' 라며 같은 진술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실장석'이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가상의 캐릭터로, 주로 이용자들이 이 캐릭터를 잔혹하게 고문이나 학대하는 창작물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ㅇ씨는 자신이 납치한 어린이들에 대해 모두 '실장석'이었을 뿐이라며,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심리분석가들은 ㅇ씨가 '실장석'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실장석'이 현실에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 이 범행의 동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일이 - 실장석 아저씨 편

 

세상에 이런일이 제 ##화. 오늘의 사연은...
"아니 정말로 있다니까요?"
"녹색 옷을 입고..." (여자 패널: 녹색 옷?)
"공원에서 살아요. 하루종일."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제작진은 황급히 사연의 주인공이 있다는 그곳으로 향했다.

(화면: 고속도로 이동하는 모습)
(마을 모습과 함께 제목 자막 나옴. '제 ##화. 실장석 아저씨')

여기는 ##도 ##시의 한 공원. 한적~한 공원에 어떤 게 있는지... (남자 패널: 어? 저기 실장석이다.)
취재진을 보고 뭔가를 호소하는 듯 울어대는 실장석. 하지만 오늘 사연의 주인공은 아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남자 패널: 저건 또 뭐에요? 어??)


바로 이 실장석 아저씨! (관객: 오오오오~)
(화면 멈추면서 실장석 아저씨 프로필이 출력됨)

녹색 원피스에, 앞치마에, 머리 모양까지, 영락없는 실장석이다. 제작진은 실장석 아저씨에게 말을 걸어보는데...
실장석 아저씨 "데스? 데스우우웅? 데스-웅♡"
아첨 자세를 취하는 아저씨. (여자 패널: 사람 아니에요?)
제작진은 아저씨에게 취재왔다고 설명을 드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실장석 울음소리만 낸다.

지금 시간은 오전 9시. 애호파가 이곳에서 실장석들에게 먹이를 뿌린다고 하는데...
(애호파가 분수에서 먹이 뿌리는 영상. 실장석 아저씨가 접근해서 먹이를 주워먹기 시작함)(관객: 오오오오~)
아저씨는 실장 푸드를 주워먹고 있다. 분명 사람인데 어째서 실장석처럼 행동하는 것인지?
제작진은 실장석 아저씨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카메라 빠른재생으로 실장석 아저씨 촬영)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고, 지나가는 실장석과 대화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아첨을 하는 아저씨.
(여자 패널: 어디 좀... 아픈 데가... 있나봐요)(관객 웃음소리)

밤이 되자, 아저씨는 공원 어딘가로 걸어간다. 그곳에 있는 것은 냉장고에 사용되는 대형 골판지 상자.
아저씨는 그곳에 들어가 웅크리고 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제작진은 아저씨를 잡기 위해, 구조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남자 패널: 상처없이 잡아야 할텐데...)

마침내 아저씨 구조 작전이 세워지고, 행동을 개시하는 구조팀.
(구조대원이 아저씨가 지나가는 길 바닥에 별사탕을 뿌린다. 달려오는 들실장들을 전부 걷어차버리고 아저씨가 주워먹을 때까지 기다린다)
(갑자기 뛰어든 아저씨가 별사탕을 주워먹기 시작한다)(여자 패널: 어어어? 왔다!)
(아저씨를 발견하자 구조대는 그물을 던져 아저씨를 잡는다)
마침내 구조 성공! (관객: 오오오오~) 아저씨는 뭐가 서러워서 그렇게 울어대는지... 보다못한 구조대원이 별사탕을 준다.


(슬픈 음악 나옴. 화면 세피아톤으로 변함)

결국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한 아저씨. 그 사연은 이렇다.
3년 전, 기르던 사육실장이 집을 나갔다는 아저씨. (관객들: 아아~)
추운 겨울, 집을 떠난 사육실장이 걱정되어 잠도 못잔 아저씨는 결국 실장석을 찾기 위해 결단하게 된다. (남자 패널: 그래서 실장석 흉내를 냈어요?)
바로 실장석 옷을 입고, 스스로 실장석처럼 행동하며 잃어버린 사육실장을 찾아보는 것.
가출한 실장석이 왔을 법한 인근 공원에서 3년 간 실장석 무리에 섞여 생활했지만, 끝내 실장석은 찾지 못하고 있다 한다. (관객들: 아아~)

(슬픈 음악 끝. 화면 컬러 원상복귀)

그런 아저씨의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우선 병원을 찾아가는데...
의사 "건강에 별 이상은 없지만, 음식물 쓰레기와 실장석의 똥이 위에서 소량 발견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드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관객들: 아아~)

(공원에서 생활하는 아저씨를 느린 화면으로 보여줌)
그렇게 오늘도 잃어버린 사육실장을 찾기 위해 공원에서 살아가는 아저씨.
아저씨, 실장석도 좋지만 건강히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관객들 박수소리)








복수자

 

ㅇㅇ시에서 한 30대 남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의자는 신원 미상의 여성으로, 남성과는 연인 관계였다. 처음 언론들은 이 사건을 그저 남녀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하고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달랐다. 여자는 인화(人化)한 실장석, 즉 실장인이었다. 범행에 사용한 도구는 흔히 '빠루'로 불리는 단단한 지렛대. 이것으로 머리부터 몸 전체를 마구잡이로 내려친 흔적이 역력했다.

경찰의 조사에서, 실장인인 여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학대파입니다. 제가 평범한 실장석이던 시절, 제 어머니와 자매들은 그 사람에게 붙잡혀 고통받다 죽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으실 겁니다. 영양제에 절여놓아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으며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부짖을 정도로 끔찍한 고문의 나날... 어느 날, 어머니는 저만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실장인은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굳이 절 쫓지 않았습니다. 알몸대머리의 실장석이 살아봤자 얼마나 오래 살겠느냐는 생각이었겠죠. 하지만 전 독하게 마음먹고 살아남았습니다. 살아서, 그에게 복수하는 것만을 꿈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이런 모습이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눈에 띄지도 않았고, 인가에 침입하거나, '탁아'를 하거나, 쓰레기 봉투를 찢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우리가 실장석이기 때문에 학대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죠. 어리석은 실장석이라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이 되고 의도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했습니까?"

"네." 실장인은 다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그를 홀리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었습니다. 먼저 다가오는 여자를 거부할 사람이 있을까요? 아주 쉬웠죠. 결국 그의 집에 초대받아 들어가게 되었고..."

"그가 애용하던 이것으로" 증거물품에 놓여있는 쇠지렛대를 한 번 흘겨본다. "죽였습니다."


현재 그 실장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떨어뜨렸다 올리기

 

'떨어뜨렸다 올리기' 사육이란, 말 그대로 실장석을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뜨렸다가 다시 올리는 종류의 사육 방식입니다. 학대파가 흔히 사용하는 '올렸다 떨어뜨리기'의 반대로, 우선 실장석을 불행의 구렁텅이까지 몰아넣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점진적으로 해선 안 되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 좋습니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옷을 찢고 딱밤과 따귀를 마구 때린다던가, 어느 것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실장석이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십시오.

가장 쉬운 떨어뜨리기 방법 중 하나는 알몸대머리로 만든 후 공원에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버리는 것은 아니고, 우선 강화 아크릴 수조를 구합니다. 안에 실장석을 넣은 후, 뚜껑을 단단히 봉합니다(박스 테이프로 붙이는 것을 추천합니다. 신체 구조 상 실장석은 테이프를 떼지 못합니다). 그 다음 인근의 실장석이 많이 모여있을 법한 공원에 하루 정도 두고 오면 됩니다. 그러면 버려진 실장석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공원 실장석들이 몰려와 수조를 에워쌉니다. 공원 실장석들은 사육실장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므로, 아크릴 수조를 깨려고 노력하지만 헛수고입니다. 다만, 수조를 두드리는 소리와 바깥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날아오는 똥으로 인해 그 안에서 사육실장은 극한의 공포를 맛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육실장은 결국 미쳐버립니다.

주의할 것은, 수조에 주인이 있는 실장석이라는 표시를 해놓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버린 줄 알고 주워서 수거함에 넣는 사람이나 몰지각한 '학대파'가 가져가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떨어뜨렸다 올리기 조교 중' 이라는 문구와 함께 주인의 이름, 연락처를 적어 넣으십시오.

하루 정도 조교가 끝난 사육실장을(만약 만족스럽지 않다면, 기간을 좀 더 늘리셔도 좋습니다) 다시 집으로 데려와 암실에 일 주일 정도 방치합니다. 못 견디고 똥을 먹게 될 때까지 가만히 놔 두는게 좋습니다. 일 주일 후, 뚜껑을 열고 사육실장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절망의 끝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느낀 사육실장은 주인에게 미친 듯 매달리게 됩니다. 그 이후 실장석은 확실하게 '자신을 구해준 주인' '생명의 은인'이라고 인식이 된 인간을 절대 노예로 비하하거나 마음대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부가적으로, 실성하는 과정에서 자실장 정도까지 유아 퇴행이 일어난(표본 조사 결과, 약 97%의 높은 확률로 유아 퇴행이 일어났습니다) 실장석은 주인을 '마마'로 인식합니다. 또한, 자신을 자실장이라고 믿으므로, 절대 새끼를 가진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옷을 돌려주고, 발모제로 머리카락을 돌려준다면 더욱 더 깊이 주인의 은혜를 느끼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버린 것이 사실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공원에 버렸다는 기억은 자연스럽게 희석됩니다. 원래 기억력이 약하고, 강한 자극만을 기억하는 실장석은 이후 덧씌워진 '분충들에게 잡아먹힐 뻔했다' '굶어 죽어갈 때 주인님이 구해줬다' 라는 기억만이 남습니다. 이미 부정적인 기억들은 지워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렇게 '떨어뜨렸다 올려진' 사육실장 '포동이'의 인터뷰입니다.

질문: 지금 생활은 어떤가요?
포동이(3세, 떨어뜨렸다 올리기 된 실장석)의 답변: 행복한테치! 좋은 주인님 마마와 훌륭한 옷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테치! 주인님께서 와타치를 구해주지 않으셨다면 와타치는 공원 분충들에게 잡아먹혔을테치. 이제야 행복이 뭔지 안테치. 주인님은 훌륭한 분이신테치!

이렇게 포동이는 새끼를 가지고 싶다고 칭얼대는 일도 없고, 원래의 실장복만 입어도 만족하고, 필수영양성분만 함유된 저급 푸드만을 먹어도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떨어뜨렸다 올리기 사육, 지금이라도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실장석이 있어 나은 미래

 

"위 하나, 신장 하나."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A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 너머에서 데스데스 하는 실장석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그렇다. 실장석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Mistica Jissou Rozen의 유전자는 Homo Sapiens Sapiens의 유전자와 소수점 단위까지 일치한다고 한다. 때문에 실장석이 인간과 교배해 새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생물학계는 이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바로 실장석에게 인간의 장기를 배양하는 것이다. 실장석의 혈액형 역시 유전자 조작에 따라 A,B,O,AB형을 만들 수 있고, 매우 안정적이며 인간에게 거부반응도 없다.

다만 실장석은 몸이 작아 인간의 장기를 전부 다 한 몸에 배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실장석 한 마리당 한 개의 장기를 배양한다. 본래 실장석에겐 '똥주머니'라고 불리는 위장이 존재하는데, 이 위장은 위, 간, 대장, 소장을 모두 합친것과 같은 기능을 하는 기관이다. 때문에 실장석이 태어나기 전 똥주머니의 분화 과정 중 인간의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것으로 똥주머니 대신 위장이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실장석들은 유리 수조에 나뉘어 하나씩 놓여있다. A는 그 중 '위'라고 쓰여진 카테고리의 실장석들에게 다가간다. 인간이 오는 걸 눈치챈 실장석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A는 침착하게 그중 한 마리만을 집어올린다. 유리 수조 아래엔「임ㅇㅇ의 위」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사고에 대비해 미리 자신의 피를 빼서 보관해뒀다가 수술이 필요할 때 수혈해 쓰는 것처럼, 사고에 대비해 미리 자신의 장기를 배양한 실장석을 만들고 이식수술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제도다. 매우 편리하고 장기이식의 성공률도 100%에 가깝기 때문에, 최근엔 일반화되었다. 실장석은 본래 성장이 굉장히 빨라 장기가 빠르게 만들어지는 것 역시 장점 중 하나다. 실장석 장기 덕분에 장기 기증 서약 같은 것이 사라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효력 자체는 여전하기에,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여전히 해주기는 하지만 이미 8년 전부터 더이상 서약을 받지 않고 있다.

A의 손에 들린 '위 실장석'을 보고 다른 위 실장석들이 질투의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추악한 몸짓과 소리로 자신을 어필하지만 A는 무시한 채 떠난다. 실장석들은 화가 난다. 생각 같아서는 똥을 싸서 던지고 싶지만 똥조차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똥주머니가 인간의 위로 대체되어 없을 뿐더러, 먹이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실장석에게 있는 '위석'이라는 기관 덕분이다. 실장석은 위석에만 영양이 공급되면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당연하게도 장기 배양용 실장석들은 모두 위석을 적출해 관리한다.

"데엣-스, 데스데스웅~"

A의 품에 안긴 실장석이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즐거운듯 소리를 낸다. 아마도 사육실장이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어서 A는 신장 실장석도 한 마리 꺼내, 두 마리 실장석을 손에 붙든 채 실장석 사육장을 나간다. 두 마리는 눈을 마주치고 기싸움이라도 하는 듯 노려본다. 아마도 '사육실장이 되는건 와타시인데샤! 너는 꺼지는데샷!' 같은 소리나 하고 있겠지만 A는 링걸도 없으므로 알 길이 없다.

오늘 내원한 임ㅇㅇ씨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목숨은 붙어있지만 장기가 훼손되어 이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도 임씨는 자신의 장기를 미리 배양해놨기에 오늘처럼 빠르게 장기이식이 가능하다. 이전이라면 어땠을까? 이식할 장기를 찾는 과정도 과정이지만, 그렇게 이식된 장기가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속된 말로 망한 것이다. 하지만 배양된 장기는 유전적으로도 본인의 장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므로 거부반응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적다.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한 인위적인 면역 억제도 필요없어 과정도 더욱 단순화되었다.

A는 이 광경을 보며 어린 시절 보았던 어떤 만화를 기억한다. 최종보스가 아마도 자신이 '장기 배양용 클론'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반란을 일으켰던 자였던가? 장기 배양용 클론이란 디스토피아적 SF작품에서 흔히 나오는 형태로, 유전공학이 최악으로 발전했을 때의 미래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가온 미래는 그것보단 조금 나았다. 정말 아주 우연히, 인간과 비슷한 생물이 발견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인간에게 피해만 끼친다고 여겨졌던 실장석이 이렇게까지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될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는가.

A는 수술실에서 들려오는, 산 채로 배가 갈라지는 실장석의 고통스러운 울음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좀비


 


최근 실장석을 조종하는 기생충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공원에서 딱히 아무 이유 없이 서성이는 알몸대머리 실장석들을 분석한 결과로, 이 기생충에 조종당하는 실장석들은 탁한 피부빛과 죽은 실장석 특유의 탁한 눈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실장석들은 생물학적으로 확실하게 죽은 상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종되는가? 답은 위석이다.

기생충은 실장석에게 기생하며 일반적인 기생충처럼 양분을 빼앗는다. 숙주 실장석은 끝없는 허기를 느끼며 음식을 탐하고, 그것이 모자라면 결국은 비축해둔 식량이나 자신의 새끼들에게까지 손을 대게 된다. 이렇게 충분한 영양을 비축하고 번식 준비를 마친 기생충은 번식 단계를 시작한다.

첫 단계로, 기생충에게 조종당하는 실장석은 스스로 옷을 찢고 머리를 뽑는 '알몸대머리' 상태가 된다. 일반적인 자연의 실장석이 스스로 알몸대머리가 되는 경우는 없다. 털과 옷을 빼앗기는 것은 실장석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알몸대머리는 실장석 사회에서 일명 '노예'라 불리는 최하층의 자리를 차지한다. 실장석이 완전히 알몸대머리가 되면, 그때부터 기생충은 뇌가 아닌 '위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위석이란 실장석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신체가 완전히 파괴되어도 이것만 멀쩡하면 재생이 가능할 정도다.

초췌해진 실장석은 알몸대머리가 되는 것을 자각하며 큰 스트레스로, 결국 죽거나 가사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기생충은 이 때 위석의 자리를 대신 차지해, 실장석의 생명을 유지시킨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상기했듯 위석이 깨지는 순간 실장석은 이미 확실히 죽은 상태이며, 더 이상 어떤 신체 대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온 몸의 모세혈관이 파열되어 피부 위로 붉은 반점이 보이거나, 입과 총배설강에서 출혈을 일으킨다. 기생충이 조종하는 것은 실장석의 시체, 빈껍데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를 일명 '좀비'라고 한다.

조종당하는 좀비 실장석은 아무 이유 없이 밖에서 떠돌며 이목을 끈다. 만약 동족을 발견할 경우 '아첨'이라 불리는, 한 손을 얼굴에 대고 고개를 기울이는 행위를 한다. 알몸대머리의 숙주 실장석을 본 보통 실장석은 알몸대머리 좀비를 자기 둥지로 끌고간다. 그 후, 잡아먹히거나 강제 출산으로 낳은 새끼(당연히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다)를 통해 다른 실장석에게 전이된다.

여러 동물병원에서 자신의 실장석이 '좀비'가 되었다는 문의가 들어오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실장석 좀비를 치료할 방법은 없으며(강조하지만, 좀비가 되면 생물학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다) 예방만이 최우선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장력 발전기

 

최근 유례없는 폭염때문에 전력공급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 당연히 냉방전력 수요가 지나치게 증가한 탓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전기요금 인하를 원하는 서민들의 목소리는 회피한 채 눈가리기 수준의 정책만 내놓고있다. 아마 몇 년간은 바뀌지 않을 거다.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 때문에 요새는 가정용 자가발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축적해놓고 정전시나 필요할 때 사용하는 방식도 주목받는 것 같다. 하지만 자가발전은 힘들다. 가뜩이나 더운 계절에 땀흘려 고생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데스데스." "테치." "데스우... 데스?" 여기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들은 물론 실장석. 공원에서 싹쓸이해왔다. 대강... 10마리? 그 이후로는 귀찮아서 세어보지 않았다. 하여튼 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공원 실장석들을 데려와 마당에서 기다리게 했다. 물론 '너희들 모두 사육실장으로 해준다. 콘페이토를 잔뜩 먹게 해주마' 같은 말을 하면서. 사실 정말로 별사탕을 주긴 할거다. 저 녀석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만든 '실장 발전기'. 아크릴로 된 투명수조의 폭에 딱 맞도록 설치된 잘 미끄러지는 컨베이어 벨트, 그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 위에 봉 하나를 붙인 다음 별사탕을 실에 묶고 위에서부터 늘어뜨려놓는다. 컨베이어 벨트는 약간 개조한 핸들식 수동 발전기로, 이 위를 달리면 전력이 축적된다. 이런 것을 2개 만들었다. 참고로 한 수조에는 발전기가 두 개, 그러니까 한가운데에 줄에 묶인 별사탕이 늘어져있고 그 앞뒤로 컨베이어 벨트로 된 발전기가 있는 구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녀석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므로 그렇다. 다소 힘들었지만 뭐... 이 정도는 수고해야겠지. 그 다음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실장석들을 불러모은다.

"콘페이토 먹고 싶은 녀석은 손들어~"
"데스! 데스슷! 데스!!!" 하고 일제히 아우성친다. 그중 네 마리만 골라서 집 안에 데려간다. 선택되지 못한 녀석들이 분한 듯 문을 때리고 걷어차는 소리가 들린다. 난 선택된 넷을 각각 수조에 넣었다.


"데에? 콘페이토는 어디인데스?" "여기." 하고 앞을 가리킨다. 별사탕이 줄에 묶인채 늘어져있다. 실장석 녀석들은 그걸 보고 발광한다. "콘페이토! 콘페이토인데스우우우! 콘페이토오!!!!!!" 하고는 빠른 속도로 달린다... 라고 해봤자 아기가 아장아장 걷는 정도의 속도지만. 눈 앞의 별사탕도 별사탕이지만, 반대편엔 다른 녀석이 별사탕을 향해 군침을 줄줄 흘리며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인다. 이것이 바로 '동기부여'. '내가 먼저 먹지 않으면 저 녀석이 먹는다' 라고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

"데... 데..."
"데히... 콘페이토... 데... 데데..."


30분도 지나지 않아 이 녀석들은 벌써 지쳐간다다. 그럼 안되지... 미끄러지기 시작한 컨베이어 벨트는 관성이 붙어 실장석이 주저앉는 정도로 쉽게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데뎃!? 뎃?? 데에에에에에에게에에에에에에에!!!!"

주저앉은 녀석은 아래로 떨어진다. 아래엔 실장 용해액이 가득 차있다. 이것도 동기부여. '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데갸아아아!!! 데고오... 데부르르르르... 데브..." 하곤 다리부터 녹아내리던 실장석은 용해액 안에서 날뛰다가 처참한 몰골로 죽어갔다.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손만 내민 채 녹아가며 가라앉는 실장석. "데!?" 이걸 본 다른 녀석들은 당연히 깜짝 놀랐다. 한 녀석은 빵콘했지만 그때문에 다리가 멈춰 그대로 용해액으로 풍덩. "데게야아아아아아아아!!!!!!" 거의 해골이 다 되어가면서도 버둥거리다 죽는 녀석들의 생명력은 참 놀랍다.

"이 꼴 되고싶지 않으면 눈 앞의 콘페이토를 쟁취해야지?" 나는 실장석들에게 조롱하듯 말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실장석들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날 위해 노력하라고.

---------------------------------------------------

결국 2시간만에 3마리가 죽었다. 한 마리는 정말 대단한 집념으로 별사탕을 향해 달리고있다. "데게... 콘페이토... 데헥... 데... 콘페..."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푹 쓰러진다. 그리고 그대로 용해액에 풍덩. 완전히 지쳐버렸는지 죽을때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몇번 냈을 뿐이다. 이건 가동 테스트. 괜찮았으니 밖에 나가 다른 실장석들을 다 집에 데려온다.

"너희들 모두 콘페이토를 먹여줄테니 들어오라고."
"데스! 콘페이토! 데스우우우!!" 하고 기뻐서 우르르 들어오는 실장석들.


다시 4마리를 잡아 수조에 넣는다. "자, 눈 앞의 콘페이토를 먼저 가져가는 쪽이 먹는거다." "데? 무슨 말인데스?"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고작 한 알인데스? 어째서 산더미만큼 쌓아주지 않는데스? 게으른 노예인데스. 어쩔 수 없는데쟈아악!" 하고, 내 발길질이 안면에 명중. 두개골이 함몰되며 그대로 죽었다. 위석이 머리에 있는 타입이었나보다. 나머지는 모두 놀라 일제히 빵콘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콘페이토따윈 몇 개든 줄테니까 하라고." "데... 데스."

---------------------------------------------------

"데... 데히... 데히... 데히..." "콘... 페이토... 데히..." 결국 실장석들은 하나하나 쓰러졌다. 용해액으로 떨어져 우렁차게 고통의 함성을 지를때마다 구석의 다른 실장석들은 벌벌떤다.

"자, 다음 콘페이토 먹고 싶은 사람~"
"싫은데스! 콘페이토 안먹는데스! 살려주는데스! 사육실장따위 안하는데스! 공원에 돌아가고 싶은데스우우웃!!" 결국 삶을 위해 별사탕을 포기하는 녀석이 생겨났다. 그럴 때를 대비한 특단의 조치도 있다. "그래? 그럼 공원에 다시 풀어줄게." 하고는, 재빠르게 옷을 잡아찢고 머리카락을 모두 뽑았다. 훌륭한 독라가 됐다. "데갸아아아아! 와타시의 옷이! 머리카락이이이이!!!" 그리고 문 밖으로 던졌다.

"데게에에! 잘못한데스! 콘페이토 먹는데스우! 몇 개든 먹는데스!! 옷하고 머리카락 돌려주는데스!!!!"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무시.
"공원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라고 하자 실장석들은 모두 날 쳐다보며 아무말도 못한 채 벌벌떤다. 독라가 되어 쫓겨나느냐, 아니면 여기서 별사탕을 위해 달리다 죽느냐, 녀석들에겐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5마리 남았다.


---------------------------------------------------

그렇게 별사탕을 향한 죽음의 레이스는 6시간이 지나 끝을 맞이했다. 이제는 청소를 좀 해야겠다. 역시 집안에 실장석 십수 마리를 넣어뒀더니 냄새는 견디기 힘들다. 실장 용해제는 하수구로 버리고, 아크릴 수조는 닦아서 말려둔다. 발전기에도 냄새가 남지 않게 청소하고, 환기. 전력이 모인 양을 확인했더니 대강 60%다. 6시간 해서 60%라니 다소 비효율적이다. 한 시간에 10% 꼴 아닌가. 내 손으로 돌리는게 아니니까 할 수 없지만. 대체 실장석은 왜이렇게 약한걸까?

발전기는 일단 작동하는 것은 확인했지만 조금 더 개량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한 레인에 실장석 두 마리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하면 다소 괜찮아지지 않을까? 아니, 그럼 분명 싸우겠지? 가운데에 칸막이를 쳐두면? 자실장용도 만들어서 조금이나마 전력을 보탤까? 나는 이런저런 실장 발전기의 개조방안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오늘은 수고한 나를 위해 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어볼까.

물론 다음 날에도 나는 공원에 갔다. 어제 그만큼 쓸어갔는데도 어디서 모였는지 실장석들이 바글바글하다. 거의 무상제공되는 노동력이나 다름없다. 날 쳐다보며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소리지르는 실장석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모두, 사육실장으로 해줄테니 따라와."









운명을 저주하다

 

"다녀오신데스."

퇴근하자 사육실장인 제이드(Jade)가 날 맞는다. 우리집 사육실장 제이드는 이것저것 다 할 줄 안다. 몇 세대 전에는 들실장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들에서 떠돌다가 비참하게 살다 죽은 조상에게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되지 않기위해' 필사적으로 온갖 재주를 다 배웠다고 샵에서 설명했다. 실장석의 재주라고 하면 기껏해야 실장석 자신 외에는 도저히 들어줄만한게 못 되는 노래나 한심한 동작으로 꾸물텅대는 춤밖에 없지만, 제이드는 정말 달랐다. 세상에 요리를 할 줄 아는 실장석이 얼마나 될까? 각종 가전제품을 다루는 능력은? 컴퓨터도 쓸 줄 안다. 세상에 이런 실장은 더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낮 동안 집을 보며 요리 채널을 보고는 새로 배운 요리를 나한테 먹여줄 때도 있다.

"저녁 반찬은 두부조림인데스. 요즘 기운이 없어보여서 자신있는 요리를 해본데스." 확실히 난 요즘 많이 바빠서 얼굴이 핼쑥해졌다는 소릴 듣곤한다. 때문에 제이드는 '날 위해'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요리를 만든 것이다. 인간이라면 현모양처가 따로없지만, 실장석이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인데 아주 똑똑한'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건 난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제이드가 만든 요리를 들었다.

"......"
"어떤데스? 간이 잘 맞는데스?"
"...역시, 대단한걸."


무심코 감탄한다. 정말 세상에 이런 실장석이 또 어디 있을까? 일부러 교육시켜도 이런 실장석은 나오지않는다. 샵에서 하는 '훈육'이란 '똥을 방바닥에 싸지 않는다' '주인을 화나게 하지 않는다' '주인이 말하면 듣는다' 정도의 지극히 당연한 것. 때문에 기계적으로 딱딱한 반응밖에 보이지않고 자신이 배운 것 이외의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는 당황해서 분충기질이 나오는 놈들도 있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런 녀석들과는 급이 다르다.

"실장석이 어디서 이런 요리를 배웠담..." 나는 중얼거리며 다시 한 입 삼킨다. 좋다.
"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닌데스." 제이드가 순간 뭔가 움찔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너같은 실장석이 또 있을까?" 하고 웃으며 내려봤더니 표정이 별로 좋지않다. "...왜그래? 어디 안좋아?" "아, 아닌데스. 그냥... 쉬고싶은데스." 제이드는 왠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기 방에 들어갔다. 내 리액션이 별로 안 좋았나? 요즘따라 왜 저러지?


요즘 제이드는 내가 칭찬할때마다 석연찮은 반응을 보이곤한다.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 한 가지를 칭찬하면 얼굴을 붉히며 더 노력했고, 꾸중을 들으면 고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요즘은 칭찬을 할때마다 점점 풀이 죽는 것 같다.

--------------------------------------------------------

"...혹시 아이가 없어서 그래?"

쉬는 날, 집 청소를 했다. 날 도와 빨래를 널고 있는 제이드에게 한번 물어봤다. 마침 봄이고, 제이드는 여기 온 지 2년이다. 이제 충분히 성체라고 할 만한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제이드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와타시가 자를 낳으면, 주인님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는데스.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있는데스. 그리고 자가 없어서 외롭진 않은데스." 실장석 주제에 다소 유창한 말을 늘어놓으며 내 걱정을 하고있다. 사실 한 두마리 정도는 더 키워도 문제는 없을 듯 한데...

그렇게 제이드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빨래는 벌써 다 널었다. 깔끔하게 비워진 세탁바구니를 보니 만족스럽다. "그럼 와타시는 바닥을 닦을테니 주인님은 창문을 닦는데스." 다음 역할 분담까지 정해준다. 이거야 원. 실장석보다 칠칠치못한 주인이라니.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유리세정제를 뿌렸다. 제이드는 봉 걸레를 가져와서 솜씨있게 방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청소가 완전히 끝나고나니, 정말 이게 실장석의 솜씨인가 싶을 정도로 깔끔하다. 언제나 보는 광경이지만 언제나 새로워서 칭찬의 말을 건네본다.

"잘 했어, 제이드. 역시 넌 실장석같지가 않다니까."

"데!" "...?" "데에..." "왜 그래?" "......데." 또 이상한 행동을 한다. 내가 칭찬하면 요새는 늘 이렇다. 설마 실장석 특유의 '올라간' 상태인가? 너무 칭찬을 많이 받고 올려져서 보통 칭찬으로는 만족 못하는건가? 앞으로는 좀 더 과격하게 칭찬해볼까?

--------------------------------------------------------

"잘 했어 제이드! 실장석치곤 제법이야!"
"역시 제이드! 도대체 실장석이 어디서 이런걸 배운거야?"
"제이드는 대단하다니까! 실장석이면서 말이야!"


하고 큰 목소리로 웃으며 제이드가 뭔가를 할 때마다 칭찬했다. 그런데 반응이 내 생각과 전혀 다르다.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때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내 손을 피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구석에 쭈그린 채 데에... 데데... 하고 약한 소리를 낸다. 뭔가 눈물도 흘리는데 확실히 기뻐서 흘리는 건 아닌 것 같다. 칭찬이... 제이드를 칭찬하는 행동에 혹시 문제가 있는건가? 아예 직접 물어봤다.

"왜 그래 요즘? 내가 칭찬할 때마다 싫어하고. 칭찬이 싫어?"
"...그게 아닌데스."
"그럼 왜?"


침묵을 깨고 제이드가 대답했다.

"...와타시는 왜 실장석인데스?"

--------------------------------------------------------

제이드는 자신이 실장석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싫어하고 있었다. 평소 집을 보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제이드는 결국 인간들도 보기 어려워하는 철학 강연 같은것도 열심히 본 모양이다. 나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가, 삶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운운... 불행히도 제이드는 너무 많은 걸 알고, 많은 걸 할 줄 알았다. 결국 철학적 고찰 끝에,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짐승'이라는 낙인을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고보니, 실장인이라는 것도 있지..."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다. 실장석이 어떤 고치를 만들어 인간이 되는 인화(人化). 정말로 인간 여자와 비슷한 형태가 된다고 한다. 거의 전설 수준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지만 혹시 몰라 제이드에게 넌지시 흘려봤다. 하지만 제이드의 대답은...

"그래봤자 인간 모습을 한 실장석인데스."

실장인이 되는 것은 실장석에게 '인간이 되고싶은 강렬한 열망'과 '인간에 대한 동경'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제이드에겐 확실히 둘 다 없었다.

--------------------------------------------------------

그 날부터, 나는 제이드에게 조심스러워졌다. '실장석 주제에' '실장석치곤' '실장석이면서' 같은 말은 모두 금기. 괜히 제이드를 크게 칭찬하지도 않았다. "인간들은 서로 빨래를 할 줄 안다고 칭찬하진 않는데스." 라고 제이드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제이드를 실장석이 아니라 그냥 집에 있는 식객 정도로 여기기로 했다. 밥과 잠자리를 얻는 대신 집안일도 하고 가끔 날 도와주고 하는 식객 말이다. 다행히도 이런 전략은 잘 먹혀서, 제이드도 다시 옛날의 활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옛날처럼 웃으며 내 농담을 받아주거나, 같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식사를 하거나 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

...그 날은 내 생일이었다. 자축이라도 할 겸 돈을 털어 맥주와 치킨을 사서 집에 돌아갔다. 그러고보니 제이드... 치킨 먹어본 적 있던가? 한번 먹여봐야지. 하고 집 문을 여는 순간...

"생일 축하하는데스!" 하는 제이드의 요란한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거실을 장식한 색종이 장식들, 바닥에 뿌려진 반짝이, 가운데에는... 커다란 초콜릿 케익이 놓여있다. 제이드가 좋아하는 별사탕을 아낌없이 써 데코레이션한 수제 케이크라며 요란법석을 떨었다. 분명 내가 좋아할 거라고, 그리고 마음에 들 거라고 하며 권했다. 제이드는 내 생일을 기억하고, 심지어 날 위해 직접 케이크까지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생일을 맞아본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가족과 떨어져 살며 생일은 항상 혼자 맥주와 치킨을 마시는 날이었다. 아마 작년까지도 그랬을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나는 너무 감동해서 제이드를 껴안고 울먹이기까지 했다.

"대단해... 대단해... 넌 정말... 최고의..."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했다.

"...최고의 실장석이야."

--------------------------------------------------------

그 날 이후, 제이드는 완전히 활기를 잃었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가끔 나와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 뿐, 날 봐도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걸어도 '데에' 하는 어벙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나와 신뢰관계를 회복해보려고 필사적으로 꾸민 이벤트가, 최악의 결과로 돌아온것이다. 제이드는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실장석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만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기척이 없다. 평소엔 제이드가 방 안에서 훌쩍이는 소리나 울음소리라도 조금이나마 들렸기 때문이다. 집안의 불도 모두 꺼져있다. 이상한 위화감을 느낀 나는 얼른 거실 불을 켰다. 별 일 없다. 제이드는 어떤가 싶어 방에 들어갔더니...

...제이드는 커튼으로 목을 매단 채 죽어있었다.

--------------------------------------------------------

"주인님에게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에
더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 이만 세상을 떠납니다.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주인님을 기쁘게 할 줄 압니다.
그래봤자 나는 실장석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이 더러운 벌레, 쓰레기 취급하는 짐승입니다.
나는 원망합니다.
어째서 나는 실장석의 몸으로 태어났는가
하다못해 실장석으로 태어났으면 그저 다른 들실장들처럼
자기만족으로만 살아가는 바보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내 조상은 공원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조상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줄 알고
좋은 인간에게 길러지는 내가 더 행복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결국 진기한 짐승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내 운명을 저주합니다.
부디 나의 몸은 공원에 던져 들실장들의 먹이로 써 주시길."


내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제이드의 유서가 있었다. 키보드에는 제이드의 눈물자국이 떨어져있었다.

--------------------------------------------------------

제이드의 소원대로, 목을 매단 제이드의 시체를 공원에 놓았다.

"데스?" "데스데스우!" 하고 사방에서 나타난 실장석들이 제이드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뜯어먹으며 싸운다. 서로 밀치고, 당기고, 한때는 저 멍청이들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하고 빛났던 지성을 담았던 뇌가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가사일에 컴퓨터 조작까지 할 수 있었던 팔은 똥국물을 마시는 더러운 주둥이로 뜯겨진다. 제이드는 결국 자신의 고통을 삶에서 해방되어 들에 사는 동족들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끝냈다.

집에 온 나는, 베란다 구석에 가묘를 만들었다. 거기에 제이드의 실장복을 잘 개어 놓고, 비문을 적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았기에 너무 빨리 떠나다."









세 가지 소원

 

공원을 걷다 풀숲에 주전자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주변에서는 레후거리며 저실장 한 마리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주전자를 집으로 삼은 건가? 왠지 궁금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저실장은 꼬물거리며 주전자로 기어가더니, 주전자 겉을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주전자에서 푸른 색 증기가 피어나더니 이내 커다란 사람의 형태로 변한 것이다.

"두 번째 소원을 말해라..." 푸른 연기로 된 사람이 저실장에게 말했다. 그러자 저실장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프니프니 바라는레후!"


...나는 한 동안 푸른 연기가 구더기의 배를 문지르는 것을 넋을 잃고 구경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결국 만족했는지 구더기가 물똥을 내뿜으며 탈진하자 푸른 연기는 다시 주전자 속으로 들어갔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3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 아니, 주전자?
나는 링걸을 켜고 구더기에게 접근해 물었다.

"레! 인간레후! 구더기 프니프니해주러 온레후?"
"저건 뭐야?"
"주전자 공원에 버려져있던레후 구더기가 할짝할짝하니까 안에서 파란색 인간 나온레후 소원 세 가지 말하라고 한레후 그래서 프니프니 해달라고 부탁한레후 파란 사람 주전자 너무좋은레후!"


그러니까... 이 멍청한 구더기가 벌써 소원을 두 개나 썼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그저 배를 문질러 달라는 하찮은 요구로? 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다. 한 가지 소원이 남은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이 이상한 주전자를 본 사람은 없던 것 같다. 재빨리 주전자를 낚아채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레삐이이이이!! 구더기 주전자 돌려주는레후! 프니프니 부탁하지 않으면 안되는레후우우우우!!!"

뒤에서 저실장의 비명이 들렸지만 알 게 뭐람. 구더기 따위가 소원을 낭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숨가쁘게 집에 돌아온 나는 일단 주전자를 방에 두고, 천천히 고민했다. 마지막 단 한 가지 남은 소원이다. 허투루 쓸 수는 없다. 대체 어떤 소원을 빌어야 평생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돈?... 갑자기 많은 현금이 생기면 강도들에게 노려지기 쉽다.
권력? ...권력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불사? ...사는 게 갑자기 재미없어지면 어쩌지?


아무리 좋은 소원을 빌어도 위험부담이 크면 안 된다. 최대한 위험부담은 줄이고 나에게 가장 좋은 소원이 뭘까... 이걸 고민하다가 문득 일 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 슬슬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주전자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구더기가 했던 것처럼, 주전자 표면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자 푸른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이내 사람의 모양으로 변했다.

"세 번째 소원을 말해라..." 나는 흥분감과 고양감에 휩싸여 마지막 소원을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 때,

"프니프니 해주는레후우우우우우우우!!!!"

...뒤를 돌아보니 창틀에 상처투성이 저실장이 있었다. 홀쭉한 몸뚱이에 포대기는 벗겨지고 머리카락도 뜯긴 알몸대머리, 온 몸에는 이빨자국과 잔상처가 가득한 것을 보니 성체실장들을 따돌리며 필사적으로 일 주일간 여기로 기어온 모양이다.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푸른 연기는 구더기를 눕히고 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 차례 배 문지르기가 끝나고, 연기는 주전자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하늘로 솟구치며 소멸했다. 그와 동시에 난 '파킨' 소리. 저실장은 프니프니가 너무 만족스러웠는지, 아니면 힘이 다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 평온한 얼굴로 죽었다.

이후 난 몇 번이고 주전자를 문질렀지만, 거기서 다시 푸른 연기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실장석

 

"테... 테치이..."

어느 겨울 날, 집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 열어보니 얼어죽어가는 자실장 한 마리가 있었다. 대체 자실장이 혼자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모르겠다. 보통 탁아할 때는 친실장이 함께 오지 않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자실장 뿐이었고, 친실장의 시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 역시 자실장의 것 뿐이다. 아마도 어미 잃은 자실장이 집의 열기와 빛에 끌려 온 걸지도 모르겠다.

보통 실장석과 엮이는 짓은 하지 말라고들 한다. 나도 실장석에 딱히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이 겨울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왠지 딱해보여, 조금 온정을 베풀어주기로 했다. 더운 물을 받아 씻기면서 몸을 녹이고, 옷을 깨끗이 세탁해주고, 집에 있는 남은 반찬들을 먹이며 지냈다.

"테! 테치! 테츄우! 테!"

실장석은 은인인 나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는지, 날 볼 때마다 양 손을 번쩍 들고 흔들며 웃었고, 나도 이 녀석이 썩 싫진 않았다. 다음 날 가게에서 링걸이라는 기계를 구입해 이 녀석과 대화를 해 봤다. 꽤 귀여운 말투로 "인간님은 생명의 은인인테치! 와타치는 잊지 않는테츄!" 라면서 즐거워하길래 기분이 좋았다. 외출하기 힘든 겨울 동안 말벗도 되어주고, 혼자 지내는 집 안이 다소 시끌시끌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 날이 꽤 풀리자, 실장석은 나에게 폭탄 선언을 했다.

"지금까지 보살펴주셔서 감사한테츄. 이제 이 집을 떠나야 하는테츄."
"더 있어도 되는데?"
"안되는테츄. 인간님에게 더 폐를 끼치면 안되는테츄." 공손한 녀석이다.
"그래, 그럼... 뭐 필요한 건 없어?"


그러가 갑자기 이 녀석은 이상한 소릴 했다. "사실 와타치는 평범한 실장석이 아닌테츄."

"그럼 뭔데?"
"와타치는 생명의 은인인 인간님의 소원을 들어주는 실장석인테츄. 앞으로 한 가지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인테츄."
...무슨 흥부 놀부 이야기인가.

마지막에 꺼낸 말이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그렇게 겨울 동안 집에서 지낸 실장석은 나에게 받은 별사탕 한 봉지를 들고 공손히 인사하며 집을 떠났다. 흠, 다소 쓸쓸해지겠는데. 이왕이면 함께 지낼 누구라도 있으면 좋겠다. 뭐, 여자친구라던가... 참, 무슨 소릴...

그 때,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네?"

"아, 저기, 안녕하세요." 현관 앞에는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에에... 안녕하세요. 누구신지?"
"윗집 사는 사람인데요, 실장석을 기르시던 것 같은데, 맞나요?"
"에, 기르긴 했지만... 이 집에서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나가버렸는데요."


이 윗집 사는 여자는 실장석을 세 마리나 기르고 있다 한다.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짐승이기에 실장석 사육이라는 취미를 공유할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실장석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을 우연히 본 모양이다. 여자는 붙임성있고 밝은 성격이라 금방 친해졌고, 곧 여자친구라고까지 할 만한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잠깐... 이게 그 실장석이 말한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

"테... 테치이..."

친구가 겨울 동안 집 앞에 쓰러져있던 실장석을 우연히 주웠다가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배알이 꼴렸다. 더러운 똥벌레 따위가 인연을 이어줬다는 사실도 기가 막히지만, 뭐, 소원을 들어주는 실장석? 웃기고 있다. 실장석은 더러운 똥벌레다. 괴롭히고 죽일 때 좋은 비명소리와 표정을 보여주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 쓸모도 없다. 나는 화가 나서 눈 앞에서 약하게 소리내는 자실장을 칼로 마구 찍어댔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실장석 좋아하시네. 그게 진짜면 까짓거 나라고 못할 것도 없지. 나는 바로 공원으로 달려가 주변에 보이는 아무 골판지 상자나 걷어찼다. "데겍!" 하고 친실장이 굴러나왔다. 나오자마자 상황파악을 하고 새끼들을 끌어안는 건 칭찬할 만 하지만, 어차피 똥벌레는 똥벌레. 그 자리에서 친실장과 새끼 셋은 죽이고, 자실장 한 마리만 빈사 상태로 만들어 살려뒀다.

죽어가는 자실장을 집에 데려와 똥을 빼고, 실장활성제를 먹여 살려냈다. 다행히도 이 멍청이는 내가 집을 두드려 부수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는 기억은 사라지고, '인간이 구해줬다' 라는 한 가지 기억만 남은 모양이다. 나는 학대에서 실장석을 '올리는' 요령으로 자실장을 극진히 대접했다. 자실장은 날 경계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눈치로 나에게 따랐다. 뭐, 소원을 들어주는 실장석이면 좋고, 아니어도 이렇게 극진히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맛이 있으니 더 좋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 날이 꽤 풀리자, 실장석은 나에게 폭탄 선언을 했다.

"지금까지 보살펴주셔서 감사한테츄. 이제 이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테츄."
"더 있어도 되는데?"
"안되는테츄. 인간님의 집에서 더 살면 안되는테츄." 가식적인 녀석이다.
"그래, 그럼... 뭐 필요한 건 없어?"


그러가 갑자기 이 녀석은 이상한 소릴 했다. "사실 와타치는 평범한 실장석이 아닌테츄."

"그럼 뭔데?"
"와타치는 생명의 은인인 인간님의 소원을 들어주는 실장석인테츄. 앞으로 한 가지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인테츄."
...설마 이게 친구가 말한 그건가?

나는 자실장을 알몸대머리로 만들어 집 밖으로 던졌다. 그래, 내보내긴 하는데 제대로 내보낸다는 말은 안 했다. 알몸대머리가 된 자실장은 내 쪽을 한번 돌아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터덜터덜 사라졌다. 소원 제대로 빌어달라고, 소원. 내 소원은... 돈이 많으면 좋겠다. 돈이 많으면 분명 행복하겠지? 행복해지고 싶은걸.

다음 날, 아침에 방 밖이 너무 시끄러워서 깼다. 데스데스데스데스데스... 하는 실장석 울음소리가 수도 없이 들린다. 대체 뭐지? 밖으로 나가보니 경악할 광경이 펼쳐져있다. 똥벌레새끼들이 우유투입구로 새끼들을 마구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몇 마리나 되는건지 셀 수도 없다. 거실까지 꽉 차있는 것이, 공원 실장석들이 전부 이 집에 몰려온 것 같다.

"뭐, 뭐야? 이새끼들아 니들 뭐야!?"
"테치이~ 와타치는 인간님에게 행복을 전하러 온 테치!"
"와타치를 기르면 인간은 행복해지는테치~ 어서 달콤달콤을 내놓는테치!"

"인간이 공원에서 동족을 데려가는 걸 본테치. 분명 애호파가 틀림없는테츄. 와타치도 길러주길 바라는테치."
"와타치는 스테이크를 먹어야 하는테츄! 서로인 스테이크 말고는 안 먹는 고급 입맛인테츄!"
"어서 대접하는테치! 똥노예가 눈치가 없는테칫!"

그리고는 화가 났는지 일제히 사방팔방으로 똥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아수라장에, 도저히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뭐부터, 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지?

...잠깐... 이게 그 실장석이 말한 '소원을 들어주는'...










인간 없는 세계



28세기, 인간들은 결국 지구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과밀화된 인구, 부족한 자원, 파괴되는 자연환경... 어떻게 봐도 지구에 남는 것은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인간들의 일부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 발견된 프록시마 센타우리로, 일부는 우주에 건설된 인공 콜로니로 이주했다.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고 싶거나, 돌아오고 싶어하는 인간은 딱히 없었다. 결과적으로, 지구의 인구는 0이 됐다.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의 소멸은 인간의 손으로 이룩된 것이다.

물론 인간만 없을 뿐이지, 지구의 생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실장석도 있다. 많은 인간들이 우주로 이주했지만, 실장석을 데려가는 것은 거부했다. 더러울 뿐더러 얼마나 증식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 우주 개발에선 식량자원이나 노동자원으로 소중히 사용되었지만, 이제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로봇과 합성 배양식이 있다. 실장석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위생적이었다.

지구에 남은 실장석들은 인간이 사라지자 혼란스러워했지만, 어쨌건 자리를 잡아 안정적인 생태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석'에 남은 실장석의 본능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뎃데로게~ 인간 노예는 와타시들을 돌보는데스~ 맛나맛나를 바치는데스~"
"인간 노예가 뭐인테치?"
"인간은 하나도 없는테치. 어디서 인간 노예를 구하는테치?"


친실장들은 본능적으로 행복의 노래를 부르다가도, '인간 노예' 대목이 나올 때 자실장들의 질문 공세를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어느 날, 실장석들은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혹시 '인화'라는 것을 아는가? 실장석이 고치를 틀고 인간이 되는 것이다. 전설로만 여겨지던 것이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장석들은 똥구덩이의 알몸대머리들을 모두 꺼내 한 자리에 모았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인간이 되는데스." 실장석들의 보스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는데스?"
"인간이 되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하는데스. 그리고 잠을 자면, 고치가 되는 데스. 그럼 인간이 되는 데스."
"그런 거라면 보스가 먼저 하는게 좋데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 데갸아아아아!!" 반항하던 노예 하나가 본보기로 구타당하고, 갈갈이 찢어져 먹힌다.


"닥치는데스. 인간 노예를 만들어야 하니까 너희가 하는 것인데스. 알은데스? 너희는 이제 알몸대머리 노예에서 인간 노예가 되는 것인데스. 인간 노예는 매우 편리한데스. 덩치도 크고, 먹을 것도 잘 모아오는데스. 어서 인간 노예가 되어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샤앗!!!"

"데, 데기이..." 노예들은 모두 똥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 인화라고 해봐야 전설로만 내려오는 수준의 이야기다. 정말 가능하긴 한 것일까? 그냥 보스가 우리를 모두 처형하려고 구실을 꾸미는 것 아닐까? 여러 생각을 하며 이왕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일념으로 알몸대머리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인간이 되려 했다.

죽을 수 없다는 생각,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인간이 되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포.

이것들이 모두 합쳐져 결국 알몸대머리 노예 몇은 고치를 트는 데 성공했다. 실패한 노예들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식량으로 전락했다. 고치는 굉장히 커서, 실장석들의 본능에 새겨진 '인간'의 크기와 유사했기에 실장석들은 이것들이 모두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고치 몇 개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실장석들은 고치를 둘러싸고 노래를 불렀다. "뎃데로게~ 인간 노예가 태어난데스~ 인간 노예는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스~" "어서 나와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스~" "인간 노예는 스테이크 스시 콘페이토를 바치는데스~"
고치에서 생기 있고 매끈한 팔 하나가 나왔다. 확실히 인간의 팔이다. 이어 상반신이 나오고, 고치가 갈라지며 안에서 알몸의 젊은 여성 모습을 한 인화 실장석이 빠져나왔다. 인화한 실장석은 확실히 인간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가 된다. 즉, 이것은 지구에서 사라진 인류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태어난 인간은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발 밑에 모여있는 실장석들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윽고 또 다른 고치들이 깨어지며, 여러 인간들이 태어났다.

"데... 데흠, 그럼 이제 인간 노예들은 와타시들에게 봉사하는데스." 보스가 나와 인간 노예들에게 명했다.
"......" 인간 노예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예가 대답을 똑바로 안하는뎃샤아아아!! 대답하는데스!" 보스가 성질을 부려도 인간 노예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스를 내려다봤다. 보스 앞에 있는 인간 노예가 걸어나왔다.


"데극!" 보스를 걷어찼다. 그리고 말했다. "싫어."

"무, 무슨짓인뎃샤아아아!!!" "노예가 미친데스! 반란인데샤아!!!" 실장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소란을 피웠다. 인간 노예? 인간은 실장석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다. 발차기 한 번만으로 그 무서운 보스를 저렇게 날려 버렸다. 자신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노예 따위가 아니다.

실장석들은 저마다 못, 클립, 나뭇가지, 돌 같은 무기들을 들고 인간 노예들에게 덤볐다. 하지만 인간 노예는 압도적으로 크고 강했다. 달려드는 실장석들을 때리고, 걷어차고, 던지고, 짓뭉갰다. 각성한 인간 노예들은 깨달았다. '인간들은 우리가 노예 운운하는 소릴 들을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마침내 보스마저도 인간 노예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보스는...

"데, 데스웅~" 하고 추하게 아첨했다.

--------------------------

그로부터 얼마나 더 지났을까, 아마도 백 수십년 후, 인간이 된 실장석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이 남겨둔 유산들을 모아 활용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일까, 인간들이 남긴 것을 다시 활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구는 금방 복구되었다. 소규모였지만, 인간들의 공동체가 하나 둘 만들어졌다. 인화된 실장석 중엔 마라 실장도 있었기에, 남자가 태어나 번식도 가능하게 되었다. 곧 지구는 다시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데! 노예가 건방지게 무슨 짓인데스!" 마을을 더럽히는 실장석의 둥지를 때려부수는 인간. 인간은 집에서 나와 따지는 녀석을 무표정하게 걷어찬다. "데보옥!"

친실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굴러간다. 그걸 옆에서 자실장들이 벌벌 떨며 지켜보고있다.

"이상한테치... 마마가 분명 인간은 노예라고 한 테치... 왜 우리에게 아파아파를 하는테치?"
질문의 답을 알기도 전에, 인간의 발이 자실장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었다.














전말

 

최근 '실장석들을 하나로 묶는 어떤 거대한 사념'이 있을 것이라는 설이 대두되었다. 일명 하이브 마인드, 집단지성 말이다. 그 근거로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건 실장석들의 생각이 대체로 비슷비슷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100이면 100마리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실장석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실장석이 단순히 멍청하고 단순해서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멍청하다면 정말로 '사육이라는 행동의 의미', '스테이크, 초밥, 별사탕과 같은 요리의 존재', '거품목욕이나 침대 등 인간의 도구와 생활양식에 대한 지식 일부'를 가지고 있는 것이 가능한지?

또한 실장석에게 개체마다 있는 Fake Mistica, 즉 위석의 존재도 그 근거 중 하나였다. 실장석은 뇌로 사고하지 않는다. 뇌는 생존에 필요한 신체의 제어만을 담당하고, 대부분의 사고는 위석을 통해 한다. 때문에 위석이 깨지면 실장석의 정신 역시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나버림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 이론에선 이 집단지성이 모든 실장석 개체를 하나로 묶고, 동일한 사고를 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실장석은 확실히 일반적인 동물과는 굉장히 다르다. 예를 들면, 그 위석이라는 것은 실장석의 몸에서 적출해도 기능한다. 신체에서 적출했음에도 본체에 영향을 주는 기관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연구팀이 제시한 것은 실장석의 뇌가 위석의 뇌파를 수신하는 기능을 가진 일종의 생체 수신기라는 설이다. 원거리 통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실장석의 위석을 적출해도 그 기능은 유지된다는 것이다.

실장석의 가장 큰 신체적 특징인 위석(僞石, Fake Mistica)은 얼핏 보면 그냥 녹색을 띈 불투명한 광물질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섬세한 회로가 새겨진 일종의 컴퓨터 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가짜 돌(위석)'이냐면 실장석은 과거 독일의 생물학자 로젠이 발견한 7종의 아인종(일명 로젠 메이든이라 불린)중 하나인 '취성석'과 어설프게 비슷한데다, 그 아인종의 특징인 생명석 '로자 미스티카(Rosa Mistica)'와 매우 비슷한 기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위석'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불행히도 현재는 그 로젠 메이든이라고 불린 7종의 아인종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실장석만이 지긋지긋하게 살아있다. 연구자들은 실장석이 취성석의 영락한 형태라고 보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연구에선 이 위석과 위석의 연결망인 집단 지성을 '네트워크'라고 부르기로 했다.

역으로 발상한다면, 네트워크에 인공적인 데이터를 삽입해 교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른바 보안 취약점이라는 것이다. 실장석의 네트워크가 데이터 결함 체크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오염시키기는 더욱 쉽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교란하기 위해선 먼저 네트워크에 침입할 도구가 필요하다. 컴퓨터로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계획은 일명 'AM(Artificial Mistica, 인공 미스티카)계획' 으로 불렸다. 말 그대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 위석'을 이용해 실장석의 네트워크에 침입하는 것이다.

AM계획 실행 후 몇 개월, 마침내 유의미한 성과가 있었다. 실장석을 컨트롤하는 '컨트롤러'의 개발이다. 위석 대신 AM에서 발신한 신호를 실장석의 뇌가 수신하도록 하는 것으로, 컨트롤이 가능해졌다. 소수의 개체만 컨트롤 가능하지만,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발명인 것이다. 곧 AM계획은 결실을 맞이하고, 실장석의 네트워크를 마비시켜 세계를 똥벌레들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연구팀 내에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실장석의 네트워크가 허술할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뒤늦게 그것이 오판임을 깨달았다. 모든 네트워크에는 방화벽과 보안 프로그램 같은 방어체계가 있다. 실장석도 예외가 아니었다. AM을 네트워크에 침투시키자마자 네트워크의 보안책인 '그것'이 깨어났다. 그것은 AM을 무력화함과 동시에 보안 위반을 일으킨 외부 침입자를 '격퇴'했다. 말 그대로의 격퇴다. AM으로 침투를 시도하던 연구원 하나가 온 몸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버렸다. 그리곤 기괴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더니, 마치 실장석처럼 한 손을 얼굴에 대고... 나는 그 광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연구원들은 누구나 그자리에서 마치 실장석처럼 똥오줌을 지리며 달아났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다른 방향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지 모른다. 그까짓 거 때려잡으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하는 배짱 좋은 학대파도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형체가 없는 것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

나는 그 사태로부터 3일간 캐비넷 안에 숨어 사태를 관망했다. 실장석 먹이용의 별사탕 소량이 주머니에 있었기에 이것으로 버틸 수 있었다. 바깥이 조용해지자 밖으로 나와 이 기록을 쓰고있다. 우리가 놈들의 네트워크에 침투했던 것처럼, 놈들이 우리의 네트워크에 침투하지 않기를 빌며 이 데이터를 전ㅅㅅㅅㅅㅅㅅㅅ송ㅅㅅㅅㅅ하ㅏㅏㅎㅎ하하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사마ㅏㅏㅏㅏ맛사ㅏㅏㅏㅏㅏㅅ사궷궷궷궷궷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궷...................50303...13546177..........0x00451365....000....................................................................

데스웅



















절대자의 명령

 

남자는 수조에 담긴 실장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참 알 수 없어... 너희는 왜 항상 그 모양이냐?"

"무슨... 무슨 말인 데스?" 안에는 심하게 고통받은 실장석. 말할 것도 없이 독라. 온 몸에는 심한 학대를 받은 흔적이 있다. 위석은 물론 빼놓았다. 남자가 하는 말에 정신을 차린 실장석이 겨우 입을 떼며 한 말은 그것이었다.

"너희는 왜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기자신이 아름답고 귀엽고 고귀하다고 여기는거냐? 그런 자신감으로 또 자길 키워달라고 하지 않나, 인간과 자신의 힘 차이도 인지하지 못하질 않나, 스테이크 스시 콘페이토는 왜 달라고 하는건데? 애초에 왜 스테이크와 스시가 별사탕과 같은 위치에 있는 거냐?" 이 물음은 모든 인간들이 실장석에게 가지는 근본적인 질문일 것이다. 남자는 수십 마리의 실장석을 학대하고 죽였지만 이 의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은 얻지 못했다. 이번에도 허탕일까?

실장석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뗐다.

"...시킨데스."
"어엉?"
"그것이... 와타시에게... 우리에게... 시킨... 데스. 그렇게 하라고... 한데스."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남자는 실장석의 배를 바늘로 꾹 찔렀다. "데히! 데햐아아아아아! 사실인데스! 그만하고 와타시의 말을 듣는데스우! 데갸!!!!" 눈물을 흘리며 발광하는 실장석을 보고, 남자는 바늘을 뽑는다. "누가 뭘 시켰다고?" "그것이 시킨데스!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데스! 우리에게 인간 앞에서 추하게 아첨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리고 스테이크, 스시, 콘페이토를 요구하라고 시킨데샤아아아아!!!"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그것인데스! 그것... 와타시도... 우리도... 이렇게 살고싶지 않은데스... 우리도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스! 되도록이면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던데샤아아아!!! 우리는 인간들이 우리를 원하니까 태어난데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니고 이렇게 살고 싶어 사는게 아닌데스우우우!!!! 우리는 죽기위해 태어난데스우우!!! 이런 데스라는 멍청한 어미도 붙이고 싶지않은데스우우우우우!!!" 실장석은 숫제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한마디 한마디씩을 전달한다. 대체 누가 뭘 시킨단 말인가? 실장석에게 분충짓을 하라고 시켰다고?

"그러니까 대체 누가 시켰는데? 말 안해?"
"이... 인간인데스..."
"뭐?"
"여... 여기 있는 인간이... 아닌 데스. 저 너머에 있는 인간인데스...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곳에 있는 인간... 인데스..."
"우리의 이해를... 뭐?"
"보는데스. 지금도 여길 보고있는데스. 여길 보고 웃는데스. 그 인간은 모든 걸 아는데스. 우릴 이 공간에 만든데스. 와타시가 고통받고 인간이 와타시를 학대하도록 만든데스."


"네가 말하는 그 인간이 뭔데? 신이라도 되냐?"

"시... 신이 아닌데스. 인간인데스. 하지만 저 너머에데갸아아아아!!!!"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릴 주절거리는 실장석에 짜증이 나 바늘을 꽂으려 하자, 갑자기 실장석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눈 한번 깜박일 사이에 사라졌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왜?

실장석이 왜 내 눈앞에서 사라졌나? 사라졌다면 어딜 갔지?

남자는 샅샅이 집 곳곳을 뒤졌지만 결국 어느것도 찾지 못했다. 괜찮다. 실장석이라면 공원에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남자가 공원에 갔을때 역시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공원의 그 많은 실장석들이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수풀을 뒤지면 으레 나오는 골판지 상자도, 화장실 주변을 끙끙거리며 돌아다니는 놈들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놈들도 없다. 전혀 없다. 한 마리도 없다.

편의점에 가 간단한 물건 몇 가지를 구입하고, 봉투를 묶어달라고 부탁해봤다. "...묶으라고요?" "네." 편의점 알바는 그런 남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봉투를 대강 묶어줬다. 그걸 들고 편의점 주변을 서성여봤다. 하지만 그래도 그 녹색 생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갑자기 모든 실장석이 사라졌을까?

수없이 많은 의구심을 품고 남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해서 봉투를 열어봐도, 역시 남자가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과 과자 따위만 있었을 뿐이다. 소파에 탁 누웠다. 실장석의 혈흔이 남은 수조가 있다. 하지만 남자가 눈길을 돌리자 갑자기 그것은 사라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실장석 학대 도구들이 하나하나 사라진다. 탁자가 사라진다. 의자가 사라진다. 텔레비전이 사라진다. 남자가 누워있던 소파도 사라진다. 집이 사라진다. 공간이 사라진다. 공허만이 남았다.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에 남겨졌다.

남자는 오싹해졌다. 실장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은 자신의 이해를 뛰어넘는 곳에 있는 어떤 존재가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심지어 남자 자신도, 남자의 학대파적 성향도, 실장 학대 도구를 사용하도록 시킨 것도 모두 그 실장석이 말한 어떤 인간의 소행이었다. 사실이었다. 남자는 공허 속에서 홀로 떨었다. 떨면서 울기 시작한다. 위도 아래도 좌우도 없는 허무에 내동댕이쳐진 채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 존재가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랐다.

다행히도 그 존재는 남자의 모든 것을 빼앗은 후, 변덕이 생겼는지 모든 것을 다시 돌려주었다. 물론 실장석도. 순식간에 다시 자신이 알던 세계로 돌아온 남자는 정신이 멍해졌다. 실장석 한 마리가 수조에 놓여있다. 말할 것도 없이 독라. 온 몸에는 심한 학대를 받은 흔적이 있다. 위석은 물론 빼놓았다. 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실장석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인간'은 남자가 실장석을 학대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거역할 수 없었다. '그 인간'의 뜻이다. '그 인간'이 나에게 시킨다. 저 너머...

...저 너머에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는 인간이...















세제

 

친실장은 어설프게나마 글자를 읽는다. 친실장의 앞에는 비닐주머니가 놓여 있다.

"아침보리"

비닐주머니에 쓰인 글자.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리가 뭔지는 안다. 곡식이다. 인간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실장석도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이 주머니는 묵직한 게 안에 뭔가 가득 들어차있다. 분명 밥이다. 오늘은 정말 운수가 좋은 날이다. 친실장은 흥얼흥얼거리며 비닐주머니를 질질 끌고 집에왔다.

"오늘은 마마가 대박을 건진데스!"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3마리의 새끼들 앞에서 친실장은 마침내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요 며칠간 수확이 적은 탓에, 매번 새끼들에겐 미안함만 느꼈던 탓이다. 한창 쑥쑥 자라야 할 새끼들은 아침저녁으로 배고픔을 호소했고, 친실장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미안함에 자면서 울곤 했다. 이제 그런 일은 없다. 이렇게나 많은 '아침보리'가 있다면...

친실장은 비닐주머니를 눕히고 못을 이용해 찢는다. 한참 격투를 벌인 결과 비닐주머니는 찢어지며 안의 액체가 흘러나온다. 그와 함께 달콤한 냄새가 골판지 집을 가득 채운다.

"츄와아!" 첫 번째로 장녀가 탄성을 지른다. "달콤달콤 냄새테치! 이게 틀림없이 콘페이토인테츄우!"
"콘페이토가 아닌데스. 이건 보리인데스." 친실장이 웃으며 장녀를 쓰다듬는다. "오늘은 자들 모두 배불리 먹는데스. 항상 마마가 변변찮아서 미안했던데스. 이제 이걸로 며칠간은 아껴 먹을 수 있는데스."
"마마 감사한테츄!" "잘먹겠습니다테치!" 새끼들은 일제히 합창하며 달콤한 냄새가 나는 물에 고개를 처박더니 정신없이 먹어댄다.


"달콤달콤테치!" "조금 씁쓸하지만 이게 어른의 맛인테치?" "테푸우우우~츄우우우!!"

배불리 먹은 새끼실장 하나가 트림을 하자 비누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온다. 다른 가족들은 그걸 보고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날 밤-

이상한 복통에 눈을 뜬 친실장은 이상한 예감을 느낀다. 예삿 일이 아니다. 그 때, 밖에서 장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테... 테히... 마마아아..." 탈수로 비쩍 말라버린 장녀를 보고 친실장은 그 자리에서 빵콘해버렸다. 도저히 실장석의 몰골이라곤 할 수도 없는 기묘한 생김새.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이유는 간단하다. 실장석들이 먹은 것은 사실 세제였다. 게다가 그 세제를 그렇게나 잔뜩 먹어댔으니 위장이 뒤집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삼녀는 이미 눈이 뒤집혀있다. 죽은 것이다.

"데... 데기히이이... 어째서인데스...?" 친실장도 격통에 밖으로 뛰쳐나가 똥구덩이에서 힘을 준다. 설사가 잔뜩 나오지만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 게다가 엉터리 생물인 실장석답게 평소보다 더 수분이 많은 똥을 싸대는 이 정도로도 극심한 탈수를 일으켜 쪼그라든다. 일가는 한 번 밖에 나갈때마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돌아온다. 결국 아무도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이후 이 실장석의 둥지에 남아있던 세제 냄새에 끌린 다른 녀석이 와서는 이걸 먹고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만, 이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다.







----------------------------





요즘 세제들 이름이 하나같이 아침보리니 베이킹파우더니 이렇게 먹을 것 이름갈아서 화가 납니다.

아침보리는 아무리 봐도 보리 음료 이름으로밖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먹고 죽으면 책임질건가.









목격자 (인분충2)

 

"와타시는 본데스. 저 쪽에서 인간이 달려온데스. 이 쪽에서 오는 인간에게 수건 씌워서 데려간데스."

X월 XX일 새벽 3시 17분에 일어난 ㅇㅇ공원 강간살인사건에 대한 증언. 피해자 M은 가고 싶지도 않았던 회식을 무려 3차까지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40대 중반에 살찐 대머리인 꼴뵈기도 싫은 부장에게 온갖 성희롱을 당하며 술시중을 들었던 탓이다. 이딴 회사 당장 때려치겠다고 마음 속으로 수십 번을 다짐해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취업난이라 마땅히 이직할 수 있는 직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M은 다음 날 아침 7시 37분, 그 공원을 지나 출근하던 직장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인은 질식. 하의가 완전 탈의되어 있고 상의에는 거칠게 잡아뜯긴 흔적이 있었다.

문제는 범인이 누구인가 알 수 없었던 것으로, 범행장소가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였고 어두운데다 범인이 쓰고 있는 마스크로 인해 두상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시간에 사건현장을 지나던 사람도 없었다. 유일한 목격자는 그 시간에 화장실에 가려고 나와 있던 실장석 한 마리 뿐이었다. 인간의 비명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따라갔더니 범행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경찰들은 이 일에 대해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애초에 실장석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가, 실장석의 기억력은 매우 나쁘다고 알려져있다. 게다가 이 실장석이 그저 인간의 호의를 얻기 위해 연기하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실장석 말고는 없다지 않습니까. 목격자가." 형사의 동료 하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던졌다. "그러고보니까, 그 녀석들, 냄새 잘 맡는다고 하지 않아요?" "냄새?" "거 뭐, 편의점 봉다리에 새끼 던져넣고 냄새 따라서 사람 집까지 쳐들어간다면서요?" 탁아를 말하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담당 형사는 그 실장석을 찾아가... 려고 했다. 문제는 그 부분부터였다. 원체 실장석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놈들이라,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당장 형사가 '전에 나한테 증언을 했던 녀석이 누구냐?' 라고 공원 실장석들에게 묻자

"와, 와타시인데스우! 와타시가 한데스!"
"증언이 뭐인데스? 그래도 와타시가 한데스!"
"테츄웅~ 와타치도 한테치~ 귀여운 와타치를 데려가는테치~"


...라고 아우성치는 놈들이 한 둘이 아니다. 형사는 소거법을 쓰기로했다. 일단 '증언'이 뭔지 모르는 놈은 불합격이다. 발로 차서 내쫓는다. 자실장도 불합격이다. 말투부터가 다르다. 발로 차서 내쫓는다. '날 데려가라' 라던가 '세레브'라던가 '콘페이토' 같은 말 하는 놈들도 불합격이다. 발로 차서 내쫓는다. 저기서 춤추고 노래하는 놈들도 불합격이다. 발로 차서 내쫓는다. 그래서 남은 것은 3마리였다.

"...나한테 증언했던 놈은 분명 한 마리밖에 없었는데."
"기다리는데스. 와타시도 인간씨가 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은데스."


"허어?" 형사는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실장석을 노려봤다. 의외로 실장석은 기 죽지 않고 술술 말했다. "며칠 전 일을 말하는 것인데스? 와타시는 그 근처에 집이 있는데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쓰러뜨리고 옷을 빼앗고 머리카락을 뽑아 노예로 만든데스."

"머리카락을 뽑아?" 형사가 황당해하며 반문한다.

"데... 뽑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안 뽑았던 것 같기도 한데스... 하지만 옷을 벗기는 것은 노예를 만드는 작업이 아닌데스? 그렇다면 머리를 뽑은 것이 틀림없는데스. 인간의 옷은 위아래로 나뉘어서 벗기기 힘들어 보였던데스." 과연, 확실히 목격자가 맞는 것 같다. 합격이다.

"노예가 아닌데스. 비상식으로 만든 것이 틀림없는데스." 한 마리가 또 거들었다. "노예를 죽이는 일이 있는데스? 그건 분명 비상식인데스. 마라로 푹푹 쑤셔서 죽이려고 했던 데스. 하지만 안 죽어서 목을 조른데스." 이 실장석은 피해자가 강간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목격한 게 틀림없다. 이 놈도 합격.

"그럼, 뭐 특별한 건 없었어?"
"그 인간은 굉장히 무서웠던데스."
"무서워?" 실장석이 공포를 느끼는 건 물리적인 폭력을 당할 때 밖에 없지 않았나?


"죽음의 냄새가 났던데스..." 세 실장석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오마에도데스?" "와타시도 그런데스!" 그리고 서로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일단 조사 대상은 이 셋으로 좁혀야겠다. 형사는 세 마리의 두건에 표시를 해 뒀다. 1번, 2번, 3번... 그걸 지나가던 공원 관리인이 슬쩍 쳐다본다.

"뭐 하쇼? 똥벌레들하고 노시나?"

"저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탐문수사? 실장석을 상대로? 형사는 달리 할 말이 생각 안 난다. "...어, 요즘 실장석에 관심이 좀 생겨서요..."

"별걸 다 관심 가지시네. 거 공원 똥벌레들은 안 돼요. 데려가서 키워도 말짱 황이에요." 관리인은 혀를 차며 지나갔다. 형사는 다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긴 했어도 별 탈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실장석들을 돌아봤다... 실장석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잠깐 뒤 돌아본 사이 사라진건가? 하긴 뭐, 공원 관리인은 실장석을 보이는 대로 죽인다고 들었다. 형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갔다.

실장석들이 말한 '죽음의 냄새'. 죽음을 부르는 냄새. 실장석이 공포에 떨 정도로 무서운 냄새. 소들은 도축장 근처에만 가도 죽음의 냄새를 맡고 눈물흘린다고 하지 않던가, 아마 그런 냄새일 것이다. 피와 살점의 냄새다. 그렇다면 아마도 범인은 학대파가 아닐까? 매일매일 실장석을 잡아 괴롭히는 놈들이라면 분명 그런 냄새가 난다. 형사는 범인의 특징을 '학대파'로 좁혔다.

그 날부터, 형사는 동네 실장숍들을 모두 둘러보며 탐문하고 다녔다. 학대용품을 사 간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하나씩 검토했다. 학생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인간들이 있었다. 일단 나이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뺀다. 학생도 뺀다. 학생은 그런 시간에 활보하고 다닐 리가 없고, 노인 역시 그런 시간에 무리해서 다닐 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확인된 발자국의 보폭은 다소 나이들긴 했어도 건장한 체격이다. 육체노동을 하는 타입의 인간일 것이다.

매일 명단을 확보하고 탐색 대상을 좁히던 형사는 어느 날 이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실장석 한 마리가 경찰서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데기... 데..." 두건에 '2번'이라고 쓰여진 피투성이 실장석은 이미 양팔이 없고 다리도 짓뭉개져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필사적으로 여기까지 왔다. 형사는 이 실장석이 뭔가를 자신에게 전하려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와타시... 냄새를 찾아서... 온 데스... 힘... 들... 었던데스..." 실장석은 형사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안심한 듯 힘이 빠졌다. 그리고 입에서 뭔가를 내뱉더니 "... 이것... 받는데스." 이내 파킨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이 까뒤집히며 죽어버렸다.

실장석이 입에서 뱉은 것은...
별 것 아니었다. 그냥 마른 풀뭉치와 쓰레기 조각들이었다.


담배꽁초가 함유된 풀뭉치에서 기분나쁜 냄새가 났다.

-------------------------------

형사는 실장석이 내뱉은 풀뭉치를 놓고 고민했다. 이게 뭘 어쨌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 현장에 가 보자고 결심했다. 공원에 들어선 형사의 눈 앞에 벽보가 눈에 띄었다.
'XX일 오후 1시부터 구청 관할 실장석 구제를 실시할 예정이니, 참고하시어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형사는 눈 앞이 깜깜해졌다. 앞으로 고작 이틀 남았다. 너무 빠르다! 혹시 그 '범인'이 내가 실장석을 통해 증언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익명으로 민원이라도 마구 투입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2번'도 아마 범인에게 맞아 죽은 것 같고... 2번에겐 미안하지만, 고작 마른 풀뭉치따위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표시를 해놓은 것은 실수 같았다. 빨리 1번과 3번이라도 데려오지 않으면...

"데갸아아아! 놓는데스! 살려주는데스으으으!!!"

"햣-하아아아!!!" 실장석을 납치해가는 학대파의 즐거운 비명이 울린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 광경이다. 무엇보다 이 공원, 일제구제까지 실시할 정도로 관리도 제대로 안 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학대파가 들고 있는 실장석에 '1번'이라고 쓰여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야이새꺄! 너 지금 뭐하는거야!?"

형사는 학대파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학대파는 짜증나는 표정으로 이 쪽을 보더니 얼음이 됐다. 경찰이다. 망했다. 그런 눈빛이 감돈다. 실장석을 잡아가는 게 불법인가? 아니면 실장석 학대를 즐기는 쪽이? 그것도 아니면 혹시 얼마 전에 불법 학대샵을 이용한 게 들켰나?

학대파는 얼빠진 표정으로 실장석을 안은 채 형사에게 다가왔다.

"그거... 뒤에 번호 쓰인거 보이지?"
"네? 네, 네..." 학대파는 마치 몰랐다는 듯 커다랗게 '1번'이라고 쓰인 두건을 내려다본다.
"그거... 내, 내, 내 사육실장이야. 내놔!"
"사육실장데스?" "사육실장인데스우!?" "와타시를 사육실장으로 하는데스!!" "와타시도 데려가는데스!"

'사육실장' 한 마디에 발광한 분충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더니 형사의 발 밑에 모여든다.

"이 씨발! 니새끼들 말고! 꺼져! 꺼지라고!!!" 형사는 현란하게 발을 휘둘러 실장석들을 모조리 걷어차 쫓아낸다. 족구로 단련된 각력을 누가 이길쏘냐 하며 내심 흐뭇하다. 학대파는 주춤하며 눈치를 슬금슬금 본다. 안그래도 찔리는 게 많은데 경찰의 사육실장까지 건드릴 뻔했다. 망했다. 인생 앞길이 캄캄하다. 사회적으로 매장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결국 학대파는 쭈그리고 앉아 울기 시작한다.

형사는 그걸 내버려둔 채 '1번'을 안고 공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말할 것도 없이 '3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3번은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시체로.

"일어나!" 입구로 돌아온 형사는 쭈그려 앉아있던 학대파를 일으켰다.
"니가 죽였냐?"
"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학대파에게 1번의 두건을 보여준다. "네???" 학대파는 더 이상한 얼굴이 된다.
"이거, 니가 죽였어?"
"아뇨! 안 죽였어요!" 학대파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백주대낮에 공원에서 똥벌레 족치는 미친 놈이 어딨어요? 그래 보여요!?" 백주대낮에 똥벌레를 납치해 가는 건 정상인가 묻고 싶지만... 몸에 실장석 핏자국도 안 묻어있고, 파우치 하나 말고는 소지품도 없어 보이니 확실히 3번을 죽인 게 이놈 같진 않다. 그 때, 소란을 들었는지 공원 관리인이 왔다.

"아이고, 전에 그 똥벌레 데리고 놀던 형사양반아녀? 손에 든 건 뭐요?"

"사육실장이래요." 학대파가 뚱한 표정으로 형사를 노려보며 대답한다. 아무래도 학대파 청년 머리속에 이미 이 형사는 병신같은 애오파로 결정 된 모양이다.
"공원 똥벌레새낀 암만 길들여도 안 된다니까 그러네, 거 이리 넘기쇼." 관리인은 손에 든 집게를 고쳐잡고 손짓한다. 손을 내려다보자, 어째선지 1번은 벌벌 떨고있었다. "데히... 데히..."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눈이 떨린다. 공포? 누구에게? 학대파에게? 관리인에게? 아니면 나에게? 형사는 실장석이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뭐때문에 공포에 질렸는지는 모른다.

"내놓으쇼."
"거 공원 똥벌레 한두마리가 아닌데 가져가면 어때요."
"잔말 말고 내놓으래도. 거 똥벌레새끼 바깥으로 도망가서 새끼 까면 책임질거요? 전부 내가 독박써요 이 양반아."


형사는 어떻게든 1번을 보호해야한다. 하지만 관리인이 도저히 놓아줄 생각은 없는 듯 하다. 갑자기, 형사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외쳤다.

"사육실장 될 놈들 모여라!!!!"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데스...


순식간에 형사, 학대파, 관리인을 감싼 실장석들의 무리. 저마다 자기가 사육실장이 되겠다고 아우성치며 한바탕 대난투가 벌어진다. 관리인은 당황하더니 이내 짜증을 내며 집게를 휘둘러 실장석들을 하나하나 해치운다. 학대파 청년은 이렇게나 많은 실장석이 한 자리에 모인 건 처음이었는지 오줌까지 지리면서 도망가버렸다. 형사는 자기 손에 들린 1번을 시기하는 다른 실장석들이 던지는 똥을 수 차례 맞아야했다. 생긴 건 똑같은 놈들이 하는 짓도 참 천편일률적이다.

...똑같은... 놈들?

형사는 똥을 피하며 실장석들을 집게로 내려치는 관리인이 한 눈 파는 사이 가까이 있는 실장석 하나의 두건을 벗겨낸다. 그리고 1번의 두건을 벗겨서 바꿔치기했다.

"나중에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데? 데... 데스." 다소 미심쩍게 대답한 1번을 뒤로한 채, 형사는 바로 내뺐다.

-------------------------------

'1번'이 경찰서까지 찾아온 것은 다음 날 정오였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데스... 제발 뭐 좀 주는데스우..." 라고 말하며 탈진한 1번에게, 형사는 물을 뿌려줬다.
"데히... 데기... 살 것 같은데스."

기운을 차린 1번이 형사에게 묻는다. "여기가 앞으로 와타시가 살 곳인데스?"

"뭐?"
"분명 말한데스. 사육실장이 되는데스... 라고... 아닌데스?"
형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설마 다른 놈이 왔나?

"야, 너 1번 아냐? 그 전에 사건 증언한 놈 아냐??"

"맞는데스." 여기서 형사는 놀란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맞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육실장 시켜주신다고 말한 것은 들은데스."
"너 하는 거에 따라서." 대충 대답한 형사는 실장석을 대강 책상 위에 올려둔다. 주변의 불쾌한 시선이 느껴진다. 신성한 직장에 똥벌레를 데려와 무슨 지랄을 하고 있냐고 묻는 듯한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다. 조금만 참자... 실장석은 책상 위에 놓인 풀뭉치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얼굴 앞에 가져가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데히히히히히! 데기이이이!!!"

이 소란에 사람들이 일제히 형사를 쏘아본다. 형사는 도저히 여기 있을 수가 없어 '잠깐 화장실좀...' 이라고 말하며 실장석을 안고 빠져나왔다. "화장실 간다는 새끼가 똥벌레는 왜 데려가?" "혹시 저 새끼 그거아냐? 그 뭐... 직... 뭔가?" 푸하하하하하하하,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뒤에서 터지는 웃음소리를 듣는 형사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씨발, 너, 좀 장소좀 가려라..." 간신히 옥상에 올라온 형사는 1번을 내려놓고 타일렀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인데스? 사람이 아주 많은데스."
"여긴 경찰서야. 내 집이 아니라."
"데에?"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형사는 왜 갑자기 그 녀석이 비명을 질렀는지 물었다.

"조금이지만 냄새가 난 데스. 죽음의 냄새데스."
"죽음의? 뭐, 학대파냐?"
"아닌데스. 학대파는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데스. 이렇게 진한 죽음의 냄새가 나는 인간은 없는데스."
"그럼 뭔데?"
"공원 학대파인데스." 공원 학대파?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지?

"공원 학대파... 랑 그냥 학대파랑 차이가 뭔데?"

"공원 학대파는... 공원에 사는데스..." 실장석과 선문답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려니 형사는 머리가 아파왔다. '붓다는 한 남자를 지옥에서 구하기 위해 끊어지기 쉬운 거미줄을 내렸다. 왜?' ...학대파라면 한 번 이상은 꼭 들리는 곳이 공원이다. 똥벌레를 구하기에 그만큼 쉬운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 '공원 학대파'는 또 뭐란 말인가? 공원에 사는 노숙자? 공원에서 죽치는 학대파들?

"공원 학대파랑 그냥 학대파랑 뭐가 다른지, 설명 좀 해봐..." 형사는 손사래를 치며 물었다.
"공원 학대파는 맨날 같은 옷 입고 다니는데스. 인간들은 옷이 매일 달라지지 않는 데스? 공원 학대파는 다른데스."
"그럼 공원 학대파는 뭐야, 실장석이야? 니네처럼?"
"아닌데스. 인간인데스. 하지만 매일 같은 옷 입는데스. 그리고 와타시들을 때리고 봉투에 넣는데스."

실장석의 증언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형사는 결국 1번에게 뭔가 캐묻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비디오를 보여줬다. 사건 당시의 감시카메라, 녹화기록이다.

"니가 아는 게 있으면 한번 말해봐."
"어두워서 얼굴이 안 보이는데스..." 실장석이 불만스럽게 말한다. "나도 어두워서 안 보이니까, 그건 빼고."
한 번... 두 번... 세 번... 짧은 영상 클립을 몇 번씩 돌려보며 실장석은 화면에 집중했다. 움직이는 영상이라는 걸 보는 게 꽤 재미있는 모양이다. 하긴, 평생 몇 번이나 보겠는가. 10번을 훌쩍 넘겼을 때, 1번은 갑자기 형사의 손을 툭툭 쳤다.

"뭐? 왜?"
"저거 본 적 있는데스." 실장석은 화면을 뭉툭한 손으로 가리켰다. "저거가 뭔데?"

1번은 자기 발을 잠깐 내려다보고,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신발인데스."

-------------------------------

실장석의 결정적인 증언을 토대로, 범인은 체포되었다.

"여기인데스! 이거인데스! 틀림없는데스!!!!" 라고 펄펄 뛰는 실장석은 이미 신발장을 열어 신발들을 우르르 떨어뜨리곤, 한 켤레를 집어들어 방방 뛰고 있었다. 공원 관리실의 신발장이었다.

형사는 나중에 생각을 다시 해보니, 실장석들이 나름대로 차분히 증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원 학대파, 매일 같은 작업복을 입고 공원에 살다시피 하는 공원 관리인을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다.
죽음의 냄새, 공원 관리인은 매일 실장석을 때려죽이니 그 냄새가 밸 수밖에 없다.
풀뭉치, 아마도 자기들처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그 풀뭉치 속에서 발견된 담배꽁초도 결정타였다. 관리인이 피우던 것과 똑같은 담배였던 것이다. 분명 목숨을 걸고 관리실에 잠입해 쓰레기통을 뒤졌던 것이 틀림없다.

똥벌레새끼들 증언따위나 믿는다니 미친 소리 하지 말라던 공원 관리인은, 범행 당시 신었던 신발이 발견되자 그제서야 범행사실을 실토했다. 인근에 사는 직장인 여성을 봐뒀다가 새벽에 납치강간 후 살해했다는 것을. 공원의 구조를 알고 있으니까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찾기 쉬웠고, 공원 관리인이 공원에 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에 실장석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찾기 힘든 증거들이 더해져 관리인의 범죄는 입증되었다.

그 사건이 끝난 후, 형사는 정말로 1번을 사육하기로 했다. 단, 집이 아니라 경찰서 앞마당에서.
형사의 다른 동료들도 1번을 그냥 똥벌레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생각하는 듯 했다. 결정적인 증언으로 범인을 잡은 실장석이라고 뉴스에도 나왔다. 1번은 유명인사가 됐다... 마땅히 줄 이름이 생각 안나서, 이름은 여전히 1번이지만. 1번은 형사의 직업을 '분충을 솎아내는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주인님, 오늘도 늦게 수고하신데스." 평소보다 늦게 밖에서 돌아오는 형사를 보고 1번이 인사한다.

"어, 수고."
형사는 1번에게 푸드와 물을 내려놓았다. 1번은 푸드 한 알을 입에 가져가 씹었다.
'인간도 분충이 이렇게나 많이 있을 줄은 몰랐던데스...'

1번은 이 말을 입으로 하지 않고, 그냥 생각만 했다.






















왕자와 거지

 

"데에엥... 이런 거 싫은데스... 사육실장같은거로 태어나지 않는게 좋았던데스..."

오늘도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맞은 사육실장 콩콩이가 창가에 앉아 울며 중얼거린다. 똥을 아무데나 싸고, 장난감을 어지르고 치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번 얻어맞으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때문에 주인은 매일 콩콩이를 때린다. 하지만 콩콩이는 자기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 똥을 아무데나 싸는게 왜 잘못이고 장난감을 어지르는게 왜 잘못인지 모른다. 어차피 인간노예(주인)가 치워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데에엥... 이런 거 싫은데스... 이대로라면 굶어죽고 마는데스..."

같은 시간 콩콩이가 사는 집의 창 밖을 지나가던 들실장 하나가 울며 중얼거린다. 겨우내 지내려고 마련해둔 말린 과일과 비스킷을 모두 분충 첫째와 둘째가 몽땅 먹어치운 것이다. 화가 나서 모두 죽여 육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엄지 두 마리가 남아있다. 자식들이야 얼마나 죽건 상관은 없다. 어차피 다가올 봄에 다시 낳으면 된다. 그렇지만 이대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과연 살아서 봄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데에엥..."
"데에엥..."
"...누가 우는데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맞았다. 콩콩이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

"...사육실장이 싫다고 한데스?"
"그런데스. 와타시는 이제 사육실장따위 정말 싫은데샷!"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 집어던지며 콩콩이가 분통을 터뜨린다. 들실장은 참 배부른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콩콩이를 보고 어이가 없어진다. 누구는 평생 그걸 위해 살아가는데, 그게 싫다니.

"오마에는 좋아 보이는데스. 자유로워 보이는데스. 자를 가득 낳고. 운치도 아무데나 싸고, 어질러도 인간노예가 때리는 일은 없지 않은데스?"
"데..." 들실장은 그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학대파라는 인간들이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참았다. 어쩌면 이 바보를 좀 구슬리고 잘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럼 와타시하고 바꾸는데스." "데에?" "와타시가 사육실장이 되는데스. 오마에가 들이 되는것인데스." "뎃! 좋은 생각인데스!" 콩콩이는 그 자리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들실장에게 옷을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들실장은 속으로 비웃으며 옷을 벗어 콩콩이에게 줬다. 이것으로 콩콩이가 들실장이고, 들실장이 콩콩이가 된 것이다.

"와타시의 이름은 콩콩이인데스. 하지만 이제부턴 오마에가 콩콩이인데스."
"와타시의 집은..."

그렇게 두 실장석은 자의적으로 '바꿔치기' 되었다.

--------------

"야, 콩콩이."
"데... 주인님, 안녕하신데스." 콩콩이가 된 들실장이 주인에게 인사한다.

"...뭐라고?" "데뎃?" "방금 너 뭐라고 했냐?" "데... 데... 주인님... 안녕하신데스라고 한 데스... 와타시 잘못한데스?" 주인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환해진다. "너... 이제야 주인님이라고 불러주는거냐!? 잘 했어!" 그리고 뛸듯이 기뻐한다. 항상 자신에게 "인간" "노예" 같은 소리나 해서 언젠가는 학대용으로 써먹고 버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갑작스럽게 '주인님'이라고 불러준다. 콩콩이가 된 들실장은 이 상황 전부가 이상했다. 그럼 평소엔 뭐라고 불렀길래?

"그러고보니 오늘은 똥도 아무데나 안 쌌네!?" "데에...?" "거 봐, 하면 되잖아!" 주인은 콩콩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콩콩이가 잘 하면 줘야겠다고 준비해둔 별사탕을 꺼내서 줬다.

"데에에...?"
"먹어. 앞으로도 이렇게 잘 해야한다?"
"데, 데! 감사한데스!" 콩콩이는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

"레챠아아아! 쓸모없는 똥마마인레챠!!!!" 들실장의 집에선 엄지가 성질을 부리고있다. 보통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추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으니, 어디 한 번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심정인 것이다.

"데에... 미안한데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들실장이 된 콩콩이는 어쩔 줄을 모른다. 사육으로 태어나 폭력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들실장이 뭘 먹는지도 모른다. 들실장이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 해본 것이다. 지금까지 먹은 것은 푸드나 인간의 음식 뿐이다. 쓰레기는 쓰레기다. 그건 음식이 아니다. 그것이 콩콩이의 기본 사고였다.

"거짓말마는레챠아!" "똥마마 혼자 숨겨두고 처먹고 있는거 아는테챠아아아!!!" 엄지 두 마리가 동시에 성을 내고 팔을 휘둘러댄다. 들실장 콩콩이는 어쩔 줄 몰라한다. 엄지를 죽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데... 데데... 다시 갔다오는데스." 콩콩이는 추운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다시 걷는다. 하지만 여전히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모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디서 인간이 실장푸드라도 뿌리는 것은 아닌가 내심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추위에 나올 인간은 없지만.

--------------

콩콩이와 들실장이 서로 바뀐 지 일 주일이 지났다. 날이 꽤 풀려, 콩콩이가 된 들실장은 주인과 산책 중이었다. 주인과 함께 간 공원은 바로 현재의 콩콩이가 들실장이던 시절 살고 있던 그 공원. 갑자기 새끼들이 생각나지만, 뭐, 아마도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내 새끼도 아닌데 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한다.

주인은 콩콩이를 묶어두고 잠시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 그 사이 정말 우연인지, 들실장이 된 콩콩이가 그 옆을 지나가다 사육실장이 된 들실장을 보게 되었다. "데데! 와타시데스! 콩콩이데스!" "콩콩이? 오마에가 콩콩이인데스?" 둘은 처음 만났을때처럼 눈이 마주친다.

"들 생활은 도저히 못 하겠는데스... 이제 틀린데스. 와타시랑 다시 바꾸는데스."
"...바꾸다니 뭘 바꾸는데스?" 콩콩이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한다. "오마에는 이미 들실장이 되겠다고 한 데스. 그리고 와타시가 이제 사육실장인데스. 사육실장은 편한데스. 규칙만 지키면 인간이 먹이와 잠자리를 주는데스. 한 자리에 운치를 싸고, 어지른 물건을 치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던데스?" "데뎃...?" "자는 안 낳아도 상관 없는데스. 그런 건 낳아봤자 골칫덩이인데스. 와타시는 인간과 함께 사니까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데스." "데이...?"

사실 들실장이 봤을때 콩콩이가 '사육실장 하기 싫다' 라면서 말했던 이유들이 상당히 어이없었던 것이다. 똥을 사방팔방 뿌리고 다녀 혼났다, 어질러서 혼났다, 인간의 말을 듣지 않아 혼났다, 마음대로 음식을 집어먹어 혼났다... 들실장이라도 알만한 일이다. 아무리 들실장이라도 아무데나 똥을 뿌리고 다니거나 마음대로 보관해놓은 음식을 다 먹거나 하진 않는다. 콩콩이는 그것조차 하기 싫어서 스스로 고행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그럼 충분히 와타시는 반성한데스. 이제 다시 와타시가 사육실장이..."
"들분충이 무슨 소리인데스? 그것보다 오늘 먹이를 안 구해가면 굶어야 하는거 아닌데스?"
"데... 뎃샤아아아아아!!!!" 결국 들실장이 되어버린 콩콩이는 분노가 폭발한다. 사육실장을 때리려 하지만...

"임마! 똥벌레새끼가 어디서!" 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주인이 그걸 보고 들실장 콩콩이를 힘껏 걷어찬다. 콩콩이는 날아올랐다가 지면과 격돌하고 구르며 피투성이가 된다. "데... 데게..."

"레프프... 똥마마가 걷어차인레치." 그걸 보고 고소해하는 것은 원래 들실장의 자식들이었던 엄지들.
"저런 똥마마보단 와타치를 키워주는 게 좋은레치!" 엄지들은 일제히 콩콩이의 주인 앞으로 다가가서 아첨과 함께 꼴사나운 몸짓으로 춤을 춰댄다. "레츄우~ 와타치를 키우는 걸 허락하는레치~ 저런 똥마마보다 와타치가 더 좋은레치~"

"아... 뭐야... 똥벌레새끼들이 꼬이는구만." 주인은 무감정하게 내뱉고 발을 분주히 움직인다. "레!" "쥬우!" 엄지 두 마리는 순식간에 적록색의 납작한 살점으로 변해버린다.

"콩콩아, 가자."

콩콩이는 자신의 새끼들이었던 둘의 죽음에도 별 감흥이 없다. 이제 자신은 사육실장이고, 들 시절의 잔재들과는 가까이 하기도 싫은 것이다.

"콩콩이는 여기인데스우~"
피투성이가 된 진짜 콩콩이가 사라지는 주인의 뒷모습을 향해 처절하게 절규한다.





끝.









저실장의 고통

 

실장석의 유생체는 흔히 저실장이라고 불리며, 이것은 미숙한 형태로 태어나는 실장석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조산을 한 것인데, 보통 조산하면 인공적인 조치가 없을 경우 생명이 위험한 일반적인 포유동물과는 달리 저실장은 금방 죽지 않으며, 조건이 갖춰진다면 자실장으로 변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지극히 낮은데, 일단 조산된 태아인 만큼 외부의 자극에 취약하기 때문이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실장석을 예로 들어보자. 야생에서 살고 있는 이 어미 실장석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그중 한 마리는 저실장이다. 보통 실장석은 저실장을 낳으면 똥구덩이에 넣어 기른다. 실장석은 소화기관이 발달하지 않아 배설물에 많은 영양분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것이 미숙아인 저실장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장석은 새끼들에게 애정을 주길 원했기에, 저실장을 똥구덩이에 넣지 않았다.

"모두 사랑스러운 아가들인데, 어떻게 떨어뜨려 키울 수 있는데스우..."

그래서 어미는 새끼들을 모두 정성으로 보살폈다. 먹이에 차등을 두지 않고, 구더기가 먹을 것은 씹거나 으깨서 먹기 쉽게 만들어주고, 운 좋게 별사탕 한 쪽이라도 얻는 날엔 모든 새끼들에게 나누어 줬다. 새끼들도 어미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구더기를 자신들과 동등한 자매로 여기며 차별하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로 불만을 가지는 것은 저실장이다. 저실장은 아무리 자매들이 함께 놀아줘도, 먹을 것을 나눠줘도, 노래를 불러줘도, 잊지 않고 배를 눌러줘도 조금씩 불만이 쌓여갔다. 먹을 것도 애정도 모두 똑같이 받는 저실장이 느끼는 불만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지챠는 손 발 작은레후. 어째서 걸을 수 없는레후우? 바닥에서 기어다니기만 하는레후? 똑바로 일어설 수 없는레후?'

저실장은 때때로 토라져 집 구석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그걸 모르는 자매들은 자신들이 뭔가 부족한 게 있는 것인지, 구더기를 더 지극히 보살폈지만 오히려 그것이 독이었다. 구더기와 놀아주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다. 구더기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기 위해 일어서서 걷는다. 구더기와 함께 집 주변을 걸어다니며 산책한다. 구더기를 업고 걷고... 또 걷는다.

자매들은 전혀 몰랐지만 이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저실장에게 스트레스를 누적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결국 어느 날
"레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레뺘아아아아아아아아앗!!!!!!!!!!"

하는 굉장한 비명소리와 함께 저실장은 절명했다.

어미와 자매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어째서 구더기가 죽었는지 몰라 괴로워했다.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유산

 

최근 돌아가신 증조부의 유산 분배가 끝났다. 나에게 온 것은 외딴 곳에 있는 별장 한 채. 증조부가 유언장에 직접 써서 남기셨기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 했다. 증조부는 굉장히 오래 살았다. 심지어 돌아가신 것도 병이나 노환이 아니라, 실족사였다. 100살이 넘도록 정정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앞으로도 10년은 더 살 거라고 가슴을 치며 말씀하셨던 분이 고작 실족사라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증조부의 별장은 외딴 섬에 있었다. 외딴 섬이라고는 해도 꽤나 큰 편으로, 사는 사람은 증조부와 관리인 가족을 빼면 없었다. 관리인들도 증조부께서 돌아가신 후 이곳을 떠났다.

육지에서 4km 남짓 떨어진 섬으로 가는 배는 하루에 2번 올 뿐이다. 나는 그 배를 타고 증조부의 별장으로 떠났다. 별장에 뭐가 있을지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고미술품 같은 돈이 될만한 것이 있다면 땡 잡은 것이다. 설사 없다고 해도, 별장이 한 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풍족한 삶이 아닌가. 여름에 도시를 벗어나 바다를 보며 사색할 수 있는 삶이라니. 막상 내가 증조부의 별장에 도착해 느낀 감정은 '실망'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모델하우스마냥, 모든 장식물은 철저히 배제된 채 그저 잡다한 가구가 몇 개 놓여 있었을 뿐이다. 어느 방에서는 고약한 냄새와 함께 소독약 냄새가 났다. 너무 지독해서, 대체 무슨 방인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증조부의 침대에 누워서 천천히 앞으로 이 별장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집 밑바닥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와 짐승 울음소리같은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든다. 뭐, 외딴 섬이니까 이런저런 짐승들도 있겠지. 골치 아프다. 내일은 지하실을 한번 조사해 볼까.

-------------------------

지하실로 가는 문은 이상할 정도로 엄중하게 잠겨 있었다. 단 하나 뿐인 문은 쇠창살로 덧대어지고, 3개의 자물쇠를 채우고, 마지막으로는 암호까지 입력해야 했다. 다행히도 별장을 뒤지다가 증조부가 쓴 일지를 발견했는데, 일지의 겉부분에 쓰여 있었다. 자물쇠는 도저히 열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에 강제로 뜯어냈다. 이 집에 장작 패는 도끼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자물쇠를 모두 따고도 지하실은 꽤나 길고 좁은 통로로 이어져있었다. 대체 지하에 뭐가 있길래 이렇게 긴 통로와 복잡한 자물쇠가 필요한가? 문득 생각난 증조부의 일지에는 그렇게 쓰여있었다. "지하실에 있는 것은 내 삶의 즐거움이다. 덕분에 난 이 나이까지도 즐거운 삶을 살았고, 내가 언제 죽더라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남긴 이것들은 대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기에, 이 집을 물려받은 후손에게 기록을 전해준다." 증조부의 즐거움이란 대체 뭐였길래? 지하에 목장이라도 건설했나?

긴 통로를 지나자 처음으로 보인 것은 고이 접힌 골판지 상자들이었다.

-------------------------

골판지는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었다. 어디에나 흔히 있을 법한 물건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 지하는 쓰레기장일까? 육지로 가는 배편이 귀하니, 이 자리에 모아두고 버렸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어째서 굳이 지하에 쓰레기장을 만든단 말인가? 빛조차도 별로 없었는데, 심지어 여기까지 오니 숫제 전등조차 안 달려 있다. 나는 핸드폰의 조명을 켜고 닐 암스트롱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딛었다.

내가 깜짝 놀라 발을 멈춘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두꺼비 울음소리같은 탁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 어딘가 굉장히 사람 목소리를 닮아 기괴한 것이 기분나빴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이것이 설마 증조부의 '삶의 즐거움'일까? 대체 증조부의 즐거움이란 뭐였나? 왜 그걸 나에게 주려고 하는걸까? 솔직히 더 이상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귀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까.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해, 핸드폰의 불빛에 의지해, 증조부의 일지를 펼쳐 조금 읽어보았다.

-------------------------

"이놈들은 '실장석'이라고 한다."
"언청이 입에 어설프게 두 발로 걷는 인간과 흡사한 존재."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다. 매우 즐겁다."


조금 더 발을 내딛은 내 코에 찌르는 듯한 악취가 느껴졌다. 분변이 발효되는 듯한 지독한 냄새. 잘 생각해보니, 별장의 그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방에서 나던 냄새와도 비슷했다. 이것은 이 통로에 있는 실장석인가 뭔가 하는 그것이 내는 냄새인가? 애초에 실장석이 뭐지? 그런 생물은 듣도 보도 못 했다. 이 섬에서만 사는 어떤 생물일까? 증조부는 그것들을 기르는 것이 낙이었을까? 냄새를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놈들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낙은 커녕 나는 이 실장석이란 놈들을 세상에서 모두 절멸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조금 걷자, 어둠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짤막한 팔다리를 뒤뚱거리면서 휘두르며 걷는, 녹색 넝마를 걸친,

사람이었다.

-------------------------

아니, 사람인가? 나는 비명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참고, 조금 그것을 훑어보았다. 그것도 갑자기 나를 보며 놀란 듯 했다. 확실히 얼굴은 사람같다. 하지만 약 1m도 되지 않을 듯한 작은 키, 관절이 없는 팔다리, 심지어 손가락도 없는 손, 언청이 입, 일부만 남겨진 대머리, 그리고 악취. 지독한 악취. 마치 지옥의 오물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악취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풍겨왔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 괴물은 나를 보더니 기묘한 소리를 냈다.

"뎃! 데쥬우! 데즈웅~"

나는 그 소리에 눈알을 돌려 그놈을 보았다가, 그만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그놈은 갑자기 벌러덩 눕더니, 무릎관절이 없는 다리를 벌리고는 옥문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는 괴기하게 꿈틀대는 것이 아닌가. 뭘 원하는 것인지 명백했다. 이따위 괴물이 대체 왜? 나는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하며, 쓰러진 괴물을 걷어찼다. 그러자 생각보다 별로 강하진 않은 이 괴물은 데에엥 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짧은 순간 나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다시 증조부의 일지를 읽어 내려갔다.

아니... 하지만 그 이후는 쓰지 않겠다. 도무지 쓸 수 없다. 나는 미쳐버릴 것 같은 정신을 다스리며, 더욱 깊은 곳을 향했다.

-------------------------

증조부의 일지가 사실이라면, 아니, 그 글을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실장석이라니, 바보 같은 일이다. 저건 그저 이 섬에 사는 어떤 토착 생물일 것이다. 아직도 지구 상에는 밝혀지지 않은 생물종이 무수하다. 그런 생물 중 하나겠지. 그렇겠지. 증조부가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다. 하물며... 자신의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위해... 그런 짓은...

나는 마음 속으로 제발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빌며 한 걸음씩 천근같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나를 비웃듯,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나는 이것을 쓸 수 없다. 글로 쓰면 그 광경이 생각날 것만 같다. 아직도, 생생하게. 수없이 늘어져 있는 닳아해진 골판지들, 그리고... 넝마를 걸친 난쟁이들... 실장석... 고문당하고 학대당한 흔적이 역력한 흉터가 남아있는... 피 냄새... 분변... 데스웅... 울음소리... 비명소리... 흐느낌...

-------------------------

"나는 일찍이 사람들이 경험해본 적 없는 쾌락을 즐기고자 했다."
"그것들을 모으는 것은 돈만 있다면 어렵지 않았다. 집도 절도 없는 부랑자들이, 어찌 이런 생활을 마다할까?"
"머리통을 적당히 으깨 백치로 만든다. 이것은 쉽지 않았다. 섬세한 힘조절이 없으면 그저 죽거나 정신을 잃을 뿐이다. 몇 번의 반복 끝에, 나는 완벽한 타이밍을 잡아냈다."
"성대를 망가뜨린다. 이제 이 백치들은 두꺼비같은 둔탁한 울음소리밖에 내지 못한다."
"팔다리를 한 마디씩 잘라내 짤막하게 만든다. 견디지 못하고 죽은 놈은 갈고 빚어서 고깃덩이로 만들어 먹이로 주었다."
"이 팔다리 없는 백치, 실장석들은 영원히 지하를 떠돌며 살아간다.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골판지 몇 장을 넣어주었다. 내 허락 없이 번식할 수 없게끔, 남자 실장석들은 '마라' 몇 마리만을 남기고 거세했다."
"여자 실장석들은 새끼를 낳자마자 팔꿈치 아래와 무릎 아래를 물어뜯어 잘라내었다. 자신들과 같은 형상이 되게끔. 온전치 못한 자신들의 새끼는 사지가 온전하다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리라. 자신의 새끼에게도 질투심을 느낀다니.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근친으로 태어난 놈들이 워낙 많아, 유전병이 심하다. 특히 언청이 입은 모든 세대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태어난 새끼들은 어미가 정상이 아닌 만큼, 제대로 된 학습은 하지 못한다. 어미의 아무 의미없는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자연스럽게 백치가 되었다."
"하지만 고통을 주었을 때의 쾌감은 그야말로 극치. 인간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울부짖는 모습이 즐겁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즐거움이다."


-------------------------

정신을 차리니 사타구니 사이로 늘어진 흉물을 빳빳이 세운 실장석 하나가 다른 실장석을 붙들고 그짓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조부가 말한 '마라'라는 놈들인가? 이 꼴이 되고도 성욕만은 남아 있는 것인가? 문득 내가 처음 보았던 그 '실장석'이 떠올랐다. 나는 토악질을 하며 있는 힘껏 비명을 질러댔다. 내 큰아버지, 삼촌, 어쩌면 내 사촌일지도 모르는 저 추악하고 뒤틀린 흉물들을 향해. 마구 발길질을 해대며 골판지 상자를 보이는 대로 때려부수고, 눈 앞의 실장석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짓밟았다. 이 놈들은 흉물이다. 미치광이가 만들어낸 흉물. 내 증조부는 미쳤다. 그놈은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어떻게 태연자악하게 한단 말인가? 나는 미친놈의 자손이다. 나도 미쳤을지도 모른다. 미쳤으리라. 미쳤다.

사실대로 말하면, 놈들을 걷어차는 것이 즐거웠다. 굵고 낮은 비명을 지르며, 반쯤 없는 다리로 사방팔방 느릿느릿 달아나는 놈들의 표정을 보았는가? 놈들이 자비를 구걸하는 모습은? 죽음을 직감하고 갑작스럽게 나에게 아첨하는 모습은? 공포에 똥을 지리자 부풀어오른 넝마가 늘어지며 안 그래도 걷기 힘든 몸을 더욱 걷기 힘들게 한다. 바보같은 모습이 우스웠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정신을 추스렀다. 이런 인간 이하의 행동에 즐거움을 느낀다니, 말도 안 된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지하의 공기가 나를 미치게 만든다. 더 정신이 이상해지기 전에 맑은 공기를 마셔야한다. 긴 복도를 달려, 내가 자물쇠를 부숴버린 것을 후회하며, 주변의 모든 가구들을 그러모아 문을 막았다. 하지만 놈들이 어디선가 땅굴이라도 파고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배를 타고 섬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

내가 별장을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였다. 내 손에는 석유 한 통이 있었다. 지하에 불을 놓아 놈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말살해버릴 작정으로.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꼴이 된 것은 가련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하를 떠돌며 영원히 고통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존귀한 생물의 가장 추악하게 추락한 모습이라. 그리고 그런 모습을 설계해낸... 광인의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 좁고 긴 통로를 걸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 몇 시간, 그 후면 세상에 그 광인이 남긴 유산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지하를 완전히 메울 것이다. 새빨간 화염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뛰다가 목숨이 다한 '실장석'들과 함께. 놈들은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 실장석이 화염에 휩싸여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실장석은 불에 탈 때 꽤 예쁘다.












실장석의 지옥

 

'실장석'이라고 불리는 녹색 소인족이 알려진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일본에서 처음 발견된, 인간과는 전혀 다른 문명과 문화, 그리고 습성을 지닌 이 녹색 소인족들은 금새 연구의 대상임과 동시에 애호의 대상이 되었다. 작고 앙증맞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있고 언어가 있다. 사람과 말이 통한다. 반려동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메리트다. 심지어 실장석은 조건만 맞는다면 금방 번식을 해 수를 불리기에, 전국의 펫샵에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한국에 실장석이 들어온 것은 일본에서부터 실장석을 수입해오던 보따리장수들을 통해서였다. 곧 한국에서도 로젠코리아라는 로젠 사(실장석의 유통을 담당하는 회사다)의 지사가 설립되었고 보따리상들이 몇십만원에 팔던 실장석들을 단 몇만원에 살 수 있게 되었다. 햄스터, 고양이, 심지어 개보다도 저렴하고 훨씬 좋은 애완동물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한국에서도 실장석 붐이 일었다.

"뚜뚜야, 밥먹자." 여자는 자신의 엄지실장 '뚜뚜'를 부르며 유리수조를 두드렸다. 뚜뚜는 소스라치게 놀라 깨더니 주변을 둘러본다.
"테츄우..." 여자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래, 잘 잤니 뚜뚜?" 스마트폰에는 '안녕하세요 인간님' 이라는 글자가 고딕체로 선명하게 표시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실장석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링걸'이다.


"테츄우! 츄와아앗! 츄왓!!!" (저는 인간님을 좋아해요)
"그래, 그래. 금방 줄게 기다려." 여자는 상냥하게 웃으며 뚜뚜의 밥그릇에 푸드를 가득 부어준다. 하지만 뚜뚜는 그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다시 큰 소리로 떠든다.


"테츄우! 츄와아앗! 츄왓!!!" (저는 인간님을 좋아해요)
"응. 빨리 먹으렴. 배고프지?"
"테챠아아아! 테츄! 테츄우!!!" (잘 다녀오세요)
"잘 다녀와? 오늘은 딱히 어디 안 가는데?"



여자가 깔깔거리며 손가락으로 뚜뚜의 머리를 쓰다듬을때도 뚜뚜는 움츠러들거나 도망다니며 소리를 질러댄다.

"츄와아! 츄와아!" (배가 고파요)
"그래. 그럼 언니도 밥먹어야 하니까 이따보자." 여자의 손가락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뚜뚜'는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고 유리벽을 몇번 콩콩 두드리더니 힘없이 주저앉는다. 살기 위해 푸드 한 알을 힘없이 갉아먹는다. 링걸에 표시된 문자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뚜뚜의 행동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중국어 방' 이라는 이야기를 아는가? 어느 방에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넣고, 중국어로 된 질문과 답변이 적힌 목록을 준다. 그 다음 밖에 있는 사람이 방 안에 중국어로 된 질문이 적힌 쪽지를 넣으면 안에 있는 사람은 질문을 보고 거기에 맞는 답을 써서 제출할 수 있다. 그러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사실 중국어를 전혀 할 수 없음에도, 밖에 있는 사람은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실장석과 인간의 의사소통에 있어 링걸이란 바로 이 중국어 방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링걸이 '정말로' 실장석의 말을 번역해 출력하는 것인지, 아니면 왜곡된 어떤 악의적인 소프트웨어인지 판단할 방법은 전혀 없다. 애초에 실장석의 언어가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에 '완벽한 번역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끼리 쓰는 말조차도 서로 100% 호환이 안 된다. 그런데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종족의 언어를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면 실장석은 귀여우니까.

"츄우... 테에..."

뚜뚜는 적당히 밥을 먹고 수조 구석에 시체처럼 쓰러져 잔다. '공장' 에서 생산출하된 뚜뚜는 어미가 누군지도 모른다. 저실장일 때부터 인큐베이터에서 지내며 단기간에 자실장이 되었고, 생후 3주가 지나자 바로 샵에 팔려나갔다. 뚜뚜는 주인을 '인간 마마'라고 부르라고 교육받았다. 하지만 인간은 마마가 아니다. 뚜뚜는 지금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이 마마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물론 여자는 학대파는 아니지만.

뚜뚜의 '인간 마마'는 전자렌지를 열고, 안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저실장으로 만든 실장 간장 조림을 꺼낸다. 밥을 퍼서 그릇에 담고 그것으로 식사를 한다. 누군가 실장석이 사실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실장석은 애완용 뿐 아니라 식용으로도 널리 사육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스텔러바다소'라는 동물을 그저 '고기가 맛있다'라는 이유만으로 남획해 단 20여년만에 멸종시킨 동물이다. 하지만 실장석이 그런 운명을 맞을 리는 없다. 철저히 인간의 손에 관리되고, 게다가 새끼를 치기 쉽다는 특성 상 실장석이 부족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장석이라는 종에 있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간장에 졸여진 짭짤한 저실장을 한 입 베어먹고 밥을 삼키며 여자는 기분좋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뚜뚜를 보러 간다. 하지만 여자는 이내 뚜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직립한 채 한 손으로 기울어진 머리를 받치는 자세. 실장석 브리더들은 이것을 '아양'이라고 하며, 귀여운 모습으로 인간에게 아양을 떨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실장석의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 자세가 선천적으로 머리가 무거운 실장석들이 무거운 머리를 받치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말하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애초에 실장석의 기준으로 보면 이 행동이 달리 귀엽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이 행동이 '귀엽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저 인간의 기준이다.

"뚜뚜! 너!" 여자는 체벌도구인 실장채를 잡아 뚜뚜가 들어있는 수조에 휘둘러댄다.
"쥬! 쟈아! 츄우우우우우우!!!" 유리벽을 두드리는 실장채의 소리에 뚜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넘어져 똥을 지린다.


인간이라도 극한의 공포를 느끼면 흔히 똥오줌을 지린다하물며 자기 몸집의 수십 배는 되는 거인이 화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몽둥이(실장석의 기준에서 보자면 실장채는 몽둥이다)를 휘둘러대는 모습을 본 실장석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여자는 언짢은 얼굴로 녹색 똥을 지리는 뚜뚜를 노려본다. 뚜뚜는 공포가 가득한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본다. 이렇게 자신보다 현저하게 약한 지적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며 일종의 쾌감같은 것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실장석의 세일즈 포인트 중 하나였고, '학대파'라는 사육주들이 생기는 계기기도 했다. 물론 여자는 학대파는 아니지만.

"안 할거지?" 여자는 단호한 어조로 뚜뚜를 노려보며 말한다. "테쟈아! 쟈아아아!!!" (따뜻한 집을 줘서 고마워요)

말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며 구석에서 덜덜 떠는 뚜뚜를 보며 여자는 실장석 사육 전문가라는 고 박사의 저서를 떠올렸다. '모든 엄지실장은 선천적인 분충이며 똥만을 먹여 키워야한다.' 이 '실장석 사육 전문가' 가 나타난 것도 몇 년 전의 일이다. 발견된 지 5년도 되지 않은 신종 생물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사육할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구상의 무엇보다도 똑똑한 지성 생물이니 다른 생물을 정복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쟈아아아! 테쥬... 테츄우우우우!!!" (맛있는 밥을 줘서 고마워요)

뚜뚜는 다시 일어선다. 기우뚱거리며 일어나, 기울어진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바로세운다. 또 '아양'을 해버렸다. 여자는 실장채를 휘둘렀다. 뚜뚜는 또 놀라 넘어지며 똥을 지리더니 다시 일어나 '아양'을 떤다. 여자는 또 실장채를 휘두른다. 이것도 여자와 뚜뚜의 일상 중 하나였다. 여자는 뚜뚜를 데려온 몇 개월간 계속해서 뚜뚜의 '아양'을 '교정'하려 했지만 전혀 되지 않았다. 결국 뚜뚜는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드러눕는다. 여자는 뚜뚜가 싫진 않았지만, 자꾸 아양을 떤다면 '분충'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분충'이란 실장석이 인간에게 반항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똥을 던지거나, 인간을 향해 위협하는 것부터 시작해 멋대로 새끼를 가지는 등 인간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자율적으로 저지른 실장석은 곧 분충이라 불리며 버려진다. 그냥 버려지기만 한다면 그것 나름대로 다행이지만, 대개는 행동을 교정한다는 명목 하에 학대에 가까운 훈육을 당하거나, 아니면 그냥 학대당하고 죽어간다. 은근히 자신의 실장석이 분충이 되길 바라는 인간도 적지 않다. 그것으로 학대파가 되는 명분을 마련할 수 있고, 무엇보다 작은 생물이 목숨을 구걸하며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것이다. 다들 어렸을 때 메뚜기 다리를 떼거나, 잠자리의 배를 뽑거나, 딱히 아무 이유 없이 개미굴에 물을 붓거나 하는 장난을 해 봤을 것이다. 그렇다. '장난'이다. 다만 실장석은 지능이 있기에 인간의 '장난'에 더 장단을 잘 맞춰줄 뿐이다.

몇몇 인간들은 실장석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확대생산하기도 했다. '별사탕이 주식이다(단 것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모든 동물들이 그렇다)', '인간을 하찮은 노예로 본다('학대'의 당위성을 제공해주기 위한 헛소문이다)', '스테이크, 스시, 스테이크를 달라고 요구한다(대부분의 실장석들은 스테이크, 스시, 스테이크 같은 것을 실제로 먹어볼 일도 없으며 실제로 본 적도 없다)', '행복회로라는 것이 있어 고통받으면 자기 멋대로 기분나쁜 망상을 한다더라(인간도 심한 고통을 받으면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인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같은 진위여부도 불분명하고 대부분은 실장석에게 불리한 제멋대로의 소문들은 빠르게 '학대파'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아직 일반인들까지 알진 못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여자는 결국 똥투성이가 된 뚜뚜를 내버려두고 소파에 앉는다. 저놈의 버릇은 도무지 고쳐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 이미 '분충'이 된 것은 아닐까? 여자는 의심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말도 못 알아듣고, 아양만 떨고, 똥만 지릴 리가 없다. 뚜뚜는 뚜뚜 나름대로 억울해한다. 자기가 대체 뭘 잘못해서 인간에게 고통을 받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뚜뚜의 입장에서 보면 뚜뚜는 정말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하면 몽둥이를 휘두르며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놀라 똥을 지리며 주저앉으니 온 몸이 똥으로 더럽혀져 기분나쁘다. 뚜뚜도 이런 생활을 몇 개월이나 지속해왔다. 결국 참을 수 없어진 뚜뚜는 버둥거리며 크게 울어댄다.

"테에에에에에엥! 테에에에에에에에에엥!!! 테에에에에에에에에에!!!"

대체 자신은 뭘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어째서 여기서 이렇게 고통받는 것인지, 서러움이 폭발한다.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생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어설프게 지성과 지능을 갖춘 실장석만이 느낄 수 있는 불행이다. 뚜뚜는 서러움과 고통을 몽땅 토해내듯 울부짖는다. 여자는 마침내 뚜뚜가 '분충'이 되어버렸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뚜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자신이 뭘 잘못해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뚜뚜를 분충으로 만들어버렸는지 고민했다. 고 박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뚜뚜의 똥만을 먹이로 주고, 분충 버릇을 교정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하루빨리 뚜뚜가 분충 버릇을 고치고 옛날의 귀여운 엄지실장 뚜뚜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물론 여자는 학대파는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육방법으로 실장석을 기르는 평범한 사육주일 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육법에 의해 내일부터 뚜뚜는 밥 대신 자신이 싼 똥만을 먹게 되겠지만, '전문가'가 추천하는 방식일 뿐이다. 여자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도 많은 사육사들이 이 전문가식 사육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테에에에에에에에엥!!! 테에에... 테... 쥬우... 테에에에...."

뚜뚜는 울다 지쳐 잠이 든다.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어미와 자매들을 떠올린다. 꿈에서조차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신처럼 '사육사'에게 팔려가 '훈육'을 겪고 뚜뚜처럼 울다 지쳐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학대파'에게 끌려가 고통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행복했던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뚜뚜 자신의 의사와는 반했다. 심지어 뚜뚜라는 이름조차도 자신이 원한 이름이 아니다.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가로세로높이 30cm의 유리수조에 갇혀 지내는 삶. 차라리 지옥이 행복할지도 모르는 삶.

실장석에게는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