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을날 공원길을 걷고 있을때의 일이다.
가을이 오면 으례 그렇듯 바닥에 낙엽이 한무더기 떨어지기 마련이다. 잘 마른 낙엽은 밟을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가을 소리가 들려 나는 가을엔 이 소리를 들어야지만 성이 풀린다.
그날도 낙입이 스치고 바스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테치테치, 하는 작고 얇은 소리가 발 아래에서 들렸다. 고갤 숙여보니 왠 초록색 덩어리가 발 아래에서 쫑쫑거리더라.
이놈이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엄지다. 갈색 침엽수 잎처럼 빼빼 마른 꼴 보아하니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긴 갈색 뒷머리는 어디에다 놓고 왔는지. 그래도 옷은 흙먼지 조금 낙엽 부스러기 조금 묻은걸 빼면 새것마냥 깔끔하더라. 움푹 꺼진 살과 녹색 옷이 서로 맞질 않아 펄럭거리는게 꼭 아이가 제 아비 옷을 입은 것 같다.
나는 예먼 호기심이 들어 그 자리에 쭈그려앉아 그 작은 엄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가 보는줄도 모르고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 다니면서 품에 뭘 자꾸 품는다.
아, 자세히 보니 낙엽이다. 초록빛이 감도는 부채꼴 은행잎이나 빨갛게 물든 다섯 갈래 단풍잎을 품 안에 차곡차곡 쌓는다. 몽땅연필처럼 짧은 팔로 낙엽뭉치 쏟아지지 않도록 양 옆을 꽉 눌러 야무지게도 쌓는다.
어디 그뿐만인가. 낙엽을 고를때도 한 장 허투로 고르는 것이 없다. 잘 영근 낙엽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고 손으로 만져도 보고 그러다 냄새 한번 맡고 요건 아니라는듯 세침하게 고갤 휙 돌려버린다. 뾰족한 침엽수 잎은 뱀 만난 개구리처럼 슬금슬금 피하고 이 낙엽 저 낙엽 보는게 공원의 모든 낙엽들을 검사해볼 기세다.
그러다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떨어진, 풋내나는 초록 은행잎 한 장을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간다. 눈이며 손이며 코며 다 써가며 결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살펴본다. 나도 덩달아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잠시 은행잎을 보던 엄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낙엽 위에 폭 엎어진다. 무슨 일인가. 지친건가. 아님 은행 냄새를 맡고 싶었나. 자세히 보니 품에 있던 낙엽을 그 은행잎 위에 올리고 잎 아래에 손을 넣어 잡는다. 꼬물꼬물 팔을 움직여 잎을 안는데 성공하고 다음엔 다리를 이리 휙 저리 휙 상모돌리듯 돌린다.
그 반동으로 스프링처럼 엄지의 몸이 돌아가 녀석은 땅을 배고 누웠다. 품 안에는 아직도 싱싱한 은행잎이 안겨 있다. 녀석은 그제서야 날 발견한듯 적록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럼히 올려다본다. 나도 그 시선을 받아 물끄럼히 내려다본다. 유리 구슬같은 눈이다.
엄지는 잠시 날 보더니 별 신경 쓰지 않고 이내 자기 할 일을 계속 한다. 허리와 다리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그 모습이 땅 위로 낚여 올라돈 힘 좋은 빙어처럼 힘차더라. 그러다 반동을 받아 곡예를 부리듯 척, 두 다리로 선다. 세상 다시 볼 수 없는 삐에로 엄지의 재주 구경에 나는 절로 박수가 나올 뻔 했다.
머리가 큰 녀석이라 일어나기 힘들 줄 알았는데. 이리 잘 일어나는걸 보면 낙엽 줍는 일도 한번 두번 한 것이 아니구나. 저 낙엽들 한 장 한 장 모두 이렇게 모은 것일까. 낙엽이 깔린 공원길에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엄지를 생각하니 슬며시 미소가 올라갔다.
누가 알까. 우리가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이 지나치는 이 길바닥의 낙엽들 사이에서, 이 작은 엄지가 세상 다시 보기 힘든 재주를 보여주고 있다는걸. 이리 힘들게 낙엽을 모으는건 제 나름대로 가을을 즐기는 방법인가.
엄지는 모은 낙엽들을 안고 어디론가 쫑쫑쫑 걸어간다. 나는 이 재주꾼이 어디로 가나 싶었지만 녀석은 흙길과 철망의 사이에 있는 관목 사이로 사라져 자취를 숨기고 말았다. 갑작스레 끝나버린 공연에 나는 괜스레 아쉬웠다.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작은 재주를 보이고 사라지는 엄지는 마치 요정같았다. 녹색 옷에 긴 갈색 머리를 가진 요정말이다. 낙엽을 모으는건 제 나름대로 가을을 즐기는 방식인걸까.
나는 엄지가 만졌던 낙엽 중 유독 빛이 잘 든 빨간 단풍을 한 잎 주웠다. 거목의 뿌리처럼 시원스레 뻗어진 다섯 줄기나 기막히게 색이 잘 든 모양이 책깔피로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 나는 고 낙엽 한 잎을 주워 수첩 사이에 끼웠다. 이제부터 나도 낙엽 모으는 취미를 가져볼까, 그런 생각도 드는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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