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척라면 (이런일이)

 

점심이 다가오자 출출해진 나는 주린 배를 붙잡고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두리번거리던 중 가판대에서 가장 화려하게 광고되고 있는 '척척라면'이 눈에 띄게 되는데...


'뭐지? 새로나온 실장라면인가?'


귀엽게 안경을 쓴 엄지가 그려진 광고판을 보니 '엄지짱이 라면 끓이는걸 척척 도와줘요!'라고 적혀있다.

세상에 이걸 먹지 않으면 분명 후회할거야!


[삐비빅! 5천5백원입니다!]


비싸다!

하지만 물릴 생각없이 단번에 계산완료!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일요일엔 내가 실장석 요리사~♪'

집에 도착하자마자 휘파람을 부르며 호쾌하게 봉투를 확찢!

제법 큰 봉투 안에는 라면 한봉지와 엄지가 들어있는 팩으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큼지막한 설명서가 있군!


'보자... 일단 엄지를 깨우기 위해 팩을 찢고 동봉된 활성제를 엄지 입안에 떨어뜨려 주세요..'


초록액이 담긴 플라스틱 스포이드를 잠들어 있는 엄지의 입안에 살짝 떨어뜨렸다.

녀석을 자세히 살펴보니 광고지에서 본 분홍빛 사육실장복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동물가방을 둘러맨 엄지와 판박이였다.

어.. 같이 끓여 먹는게 아닌가?


'테.. 텟테레... B-168번 부활한 레찌..'


눈을 비비며 일어난 녀석은 몽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에게 춍춍 다가와 90°인사를 했다.


'안녕하신 레찌? 아따찌 주인님의 아마아마한 라면식사를 도와드리기 위해 X심에서 수련 받은 '척척이'인 렛~쭈웅~♡'


자세히 보니 가슴에 X심 로고가 새겨져 있다..

멍하게 지켜보고 있자 빙글빙글 춤을 추며 라면광고도 해댄다.

새삼 이 작은 엄지실장에게서 대기업의 힘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심심하셨던 레찌이? 이제 고민은 그만! 척척이와 함께 하는 즐거운 척척라면! 자매품 실장푸라면도 있는 렛쭈웅~♪'

'너 아까 이름이 B 머시기라고 안그랬냐?'

'그건 개인이름인 레찌. 아따찌따찌들은 척척이인 레찌. 라면은 언제 끓이실 것인 레쮸?'

'어.. 지금할건데 물 받아오면 되냐?

'받아오시면 아따찌가 주인님을 위해 가장 맛있는 레시피로 라면을 요리해 드리는 렛쮸웅~♥'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나에게 윙크와 아첨을 하며 춤을 춰대는 녀석에게 물을 떠다줘 보자 냄비에 들어가 버리는 녀석.

이 녀석 깨끗한거겠지?


'레.. 아따찌의 어깨쯤 오게 다시 받아 오시는 레찌. 그리고 기호에 따라 파, 마늘 등을 넣으실거면 미리 썰어오시는게 좋은 렛찌!'


흠.. 설명서를 봐도 조리법은 엄지에게 맡겨라고 적혀있었다.

그냥 대충 끓이는 성격이라 조금 귀찮았지만 이왕 사온거 시키는대로 물을 다시 떠왔다.


'레찌찌! 물은 딱인 레찌! 이제 물을 끓이시면서 아따찌가 신호를 드리면 분말스프와 야채스프를 넣으시면 되는 렛찌!'


냄비 안에서 재잘거리는 녀석을 빼내 물을 끓이자 녀석은 또 라면광고를 해대며 몸을 씰룩거려 내 눈을 오염시켰다.

'너부리 한마리 몰고 가는 렛찌이이~! 여름엔 매~콤한 차비빔면도 좋은 렛쮸웅~♥'


왠지 별로 도움도 안되고 짜증만 나서 내 피같은 5천5백원이 아까워지기 시작할 때쯤 녀석은 점점 흥분하며 나에게 재잘재잘 명령을 내리는데...


'렛! 지금인 렛찌! 그리고 면을 준비시키시는 레찌! 곧.. 곧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 완성되는 레쮸쮸!'


내가 심드렁하게 시킨대로 면까지 넣자 동물가방을 열어 달콤한 냄새가 나는 가루를 라면에 솔솔 뿌려대는 녀석.


'척척이가 5가지 비밀레시피로 만든 마법의 가루인 렛쮸웅~ 주인님의 행복하고 건강한 식사를 위해 아따찌가 드리는 특별한 선물인 렛쮸웅~ 잠시 뒤 라면이 완성되면 맛있게 드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레~쮸웅~♬'


저게 아마 5천5백원의 이유겠지?

난 짜증이 나는걸 꾹꾹 참으며 라면이 익을 때쯤 달걀을 넣으려고 하자 척척이는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레? 안되는 레찌! 척척라면에는 달걀을 넣으면 안되는 레찌!'

'에.. 엥?! 기호에 맞게 넣어 먹으라며? 달걀은 왜 안되냐?'

'가장 마지막에 달걀은 절대 넣지 말고 주인님께 설명서 가장 밑단을 읽도록 권하라고 배운 레쮸! 설명서 읽어주시는 렛쮸우!'


라면이 왜이리 귀찮아?

난 다시는 척척라면을 먹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굵고 빨갛게 인쇄된 [척척이의 비밀]을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비밀을 읽어내려 갈수록 내 입꼬리도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크킄... 크크크크...'

'레쮸웅~♥'


날 따라 웃어대는 녀석을 손바닥에 올려두자 마음의 준비가 된듯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는 척척이.

난 녀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금까지 정말 수고했어. 라면이 정말 맛있다면 우리 척척이를 사육실장으로 삼아주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해낸 레찌! 척척이가 평생을 갈고 닦은 라면이 맛 없을리 없는 레쮸!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사육실장이 된 레찌! 신나는 사육생 시작인 렛쮸웅~♥'


내 말이 끝나자마자 퉁퉁한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거리며 기뻐하는 녀석의 치맛단을 살짝 뜯어냈다.

그러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따지는 척척이에게 뜯어낸 치맛단을 재빨리 먹여줬는데...


'렛! 아따찌의 척척실장복은 척척이 졸업시험을 통과한 엄지들에게만 허락되는 영광의 징표인 레찌! 고급실장복을 입히고 싶으시더라도 훼손하지 말고 소중히 보관해 주셨으면.. 레.. 렛챱.. 렛챱... 레에에에?! 아따찌의 척척실장복이 맛있는 레찌!'


놀란 녀석은 자신의 머리, 신발, 팬티, 가방, 안경까지 핥아봤다.


'아.. 아따치의 머리는 짭조름한 건어물인 레찌! 신발과 옷은 유부... 사랑스런 빤츠도 어묵인 레찌.. 가방은 김... 심지어 안경은 설탕으로 만들어진... 대체...'

'설명서에 적혀있더라? 라면이 완성될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좀 도와줄래?'

'레.. 아.. 아따찌가 할 일은 다한 레찌..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특별한 라면인 레찌.. 반박할 수 없는 레찌... 어.. 어서 드시고 아따찌를 사육실장으로.. 레쨔아아아앗!'


중얼거리는 녀석을 순식간에 잡아채 라면에 풍덩 던져 넣었다.

손을 위아래로 미친듯이 파닥거리며 나에게 애원하는 모습이 식욕을 자극했다.


'레쮸와아아앗! 아따찌는 이렇게 갈 수 없는 레쨔아앗! 마마와 헤어지고 지금까지 척척이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시험을 수도없이 치뤄온 레쨔아아아! 척척이가 되면 행복해진다고 한 레쨔아앗! 척척이가 되면 분명 사육실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렛뿟! 렛뿌뿌앗!'

[첨벙! 첨벙!]


입고 있던 재료들이 녹아가면서 점점 독라가 되어가는 녀석을 젓가락으로 바닥 깊숙히 찔러넣었다.

잠시 후 떠오른 녀석은 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부푼 배를 매만지며 나에게 살려달라 빌었다.


'주인니이임! 아따찌 아가를 가진 레쨔악! 제발 뱃속의 아가들을 위해서라도 아따찌를 구해주시는 레쨔아악! 최고의 라면을 요리할 줄 아는 아따찌를 이대로 죽게 만든다면 요식업계의 큰별이 지는 것인 레쮸와아악-!!'

'무슨 소리야? 그게 니 임무라고.'


난 설명서를 가져와 녀석이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따박따박 외쳐줬다.


'척척이는 사실 기본적인 레시피만 익힌 평범한 엄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특출난 요리실력을 가진 요리사로 착각하고 있어요~ 고객님께 특별한 척척라면을 대접하고 나면 사육실장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척척이를 마지막으로 투입해주시면 모든 조리과정이 끝납니다~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오~'

'아.. 아니야 레찌.. 아냐...'

'소중히 여기는 실장복은 모두 식재료로 만들어졌으니 안심하고 드세요오오오~'

'레... 파-킨!'


난 파킨사한 척척이를 젓가락으로 밀치고 면발을 가득 들어 후루룩 삼켰다


'후! 후하! 뜨거워! 자 그럼 척척이를 맛볼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척척이를 집어들자 뱃속에서 미성숙한 우지챠들이 떨어지며 라면에 풍미를 더했다.


'텟테ㄹ.... 텟뺘아아악! 파-킨!'

'텟테레ㅎ... 마.. 마ㅁ....! 파-킨!'


그대로 머리를 크게 한입 베어 물고 우지챠와 함께 뜨거운 국물을 마시자 입안 가득 퍼지는 기름진 감칠맛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말 달걀을 넣었으면 너무 기름졌을거 같군.

순식간에 한그릇 뚝딱 해치운 나는 거실 쇼파에 누워 다음 척척이를 상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다음 녀석은 어떻게 골려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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