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꽃처럼



- 무얼 그리 빤히 보는거니?


남자는 뭇내 무시하지 못하고 자실장에게 물었다.


그저 공원 벤치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었을 뿐인데


왠 꾀죄죄한 자실장 하나가 멍하니 자기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니.




키워달라고 조르면 걷어차기나하고 먹을걸 달라고 조르면 담뱃재나 털어줄텐데


어째 그냥 입을 헤 하고 벌리고는 자신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건지 자실장은 그저 멍한 표정 그대로 단춧구멍 같은 눈을 떼지못하고 있었다.




- 거참.. 싱거운 녀석.




















조금 이르지만 남자는 재킷을 꺼내어입고 공원을 향했다.


아직 가을 초엽이지만 아침엔 입김이 나올 수준으로 서늘할 때가 있으니까.


평소대로 한바퀴 산책을 마친 뒤 다시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막 커피의 캔을 따려는데 어제의 그 자실장이 꾸물꾸물거리며 다가온다.




- .......




무언가 부탁을 하려는걸까.


손을 등뒤로 돌려쥐고 꾸물거리는 모습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 너구나. 요즘 자주 만나네.


- 테..


-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거니?





남자의 말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자실장이 뒷춤에 감추었던 꽃을 한송이 꺼내어 내민다.




- 받아주었으면 하는 테츄..




남자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커피를 한모금 달라고 한다던지, 날이 추우니 보살펴주었으면 한다던지 정도를 예상했지만



꽃을 내밀며 말을 걸 줄은 생각 못했다.







- 흠... 왜지?


- 닌겐상을 얼마전부터 지켜본 테츄.. 다른 사람들은 항상 밝게 웃고 우마우마한 것을 먹으며 걸어다니는데 닌겐상은 항상 아야아야한 뜨거운 막대불만 마시고 달콤씁쓸만 마시는 테츄.. 항상 어두운 얼굴 테츄..


- 그런데 꽃은?


- 와타치가 가장 좋아하는 꽃 테츄. 언제나 보면 기분 좋아지는 테츄. 닌겐상이 가졌으면 좋겠는 테츄. 와타치처럼 기분 좋아졌으면 하는 테츄.




남자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멍해졌다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자실장의 손에서 꽃을 빼어든다.




- 그래..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


- !!




자실장의 얼굴에도 화알짝 꽃이 피어오른다.


자신의 마마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 자신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감정으로 피어난 것.




- 그런데 이런 걸 받았으니 나도 무언가 돌려줘야겠구나. 무얼 갖고 싶니?




자실장의 미소가 곤란한 얼굴로 변한다. 무언가를 돌려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테츄. 그러면 와타치의 가슴이 이야한 테츄. 왜인지 아픈 테츄.




- ....닌겐상이 활짝 웃어주었으면 하는 테츄.


- 그래. 돌려줄 것이 있어서 기쁘구나.




남자가 조금 쓸쓸한 눈빛이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주자 자실장의 얼굴이 다시 미소로 피어난다.











그후로도 많은 날 남자는 아침마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캔커피를 마셨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옆에 자실장 하나가 앉아있다는 것.



- 그때 왜 나에게 꽃을 주고 싶었던걸까?


- 와타치도 잘 모르는 테츄. 여기가 두근두근 시키는 대로 한 테츄. 열심히 테츄.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길게 한숨을 내쉰 남자가 조금 안쓰럽게 웃었다.




- 니가 준 꽃의 이름은 민들레란다. 꽃의 높이는 너의 두배쯤 될까.


- 테.. 예쁜 이름 테츄.


- 줄기도 얇고 키는 높아서 너로썬 따기 힘들었을거야. 힘들게 힘들게 잡아당겨 꽃을 땃겠지.


- 그런 테츄. 힘낸 테츄.


- 보통은 말야.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일은 다들 하지 않는단다.





자실장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아직 작은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 오직 사랑에 빠진 사람만 그런 일을 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



자실장의 얼굴이 화악하고 달아오른다.


모르던 감정의 이름을 그것을 알게 해준 사람이 알려주었다.




- 난 알고 있단다. 한 때 나도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한 적이 있거든.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




자실장의 눈이 조금 슬퍼진다.




- 너만한 자실장이 혼자 꽃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었을테고 그 줄기를 타는 일도 굉장히 힘들었을거야. 넌 굉장히 헌신적이고 솔직한 마음을 가진 좋은 아이라고 생각이 드네.





남자의 칭찬에 자실장의 슬펐던 눈에 조금 기운이 돌아온다.

좀더 커피를 마신 뒤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자실장이 의외의 말을 꺼낸다.




- 지금 와타치처럼 닝겐상이 슬픈 얼굴을 했던 이유는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테츄?




생각치도 못했던 풍부한 감정의 언어에 남자가 놀란다.




- 글쎄. 사랑을 잃어서 슬픈 얼굴을 한건 아니란다. 다만 생각이 많아서야. 공원을 아침마다 걷는 이유도 슬픈 얼굴을 한 이유도.


- 어려운 테츄..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자실장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후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한번 빨아들인다.




- 그렇다면 하는 테츄! 와타치와 사랑하는 테츄! 닌겐상 항상 웃게 해주는 테츄!




순수함.

여느 미사여구나 현혹의 말을 단 하나도 곁들이지 않은,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말.




남자 자신도 한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 자실장의 마음을 거절해야할 말을 하기 난처해진다.


담배 연기 한줄을 길게 뽑아낸 뒤에 남자는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다.




- 사랑은 그렇게 냉큼 내밀어 이루어지는게 아니란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을 때 고백은 대답을 얻어 말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 닌겐상은 와타치가 싫은 테츄...?


- 싫지 않아. 싫다면 이렇게 나란히 앉아 너와 이야기할 이유도 없겠지. 넌 아주 좋은 아이야.


- 테... 슬픈 테츄.. 와타치 슬픈 테...




남자는 울고 있는 자실장의 옆에 앉아 한참을 침묵을 지키다 이야기를 꺼낸다.




- 옛날에 말이야, 마을을 지키는 용맹한 기사가 있었단다. 모두가 믿고 따랐고 누구나 동경하는 사람이었지.



마마에게서나 듣던 옛날 이야기.

옛날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자실장은 눈물을 닦으면서 귀를 쫑긋 세운다.




- 그런 용맹한 기사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것은 그 마을 성주님의 딸이었어. 성을 감싸고 있는 장미덩굴의 장미만큼 아름답고, 그 가시만큼 아픈 사람이었지.

나날히 커져가는 마음을 남자는 참고 참다, 결국 어느날 밤 그녀가 나와있는 창가 앞에 무릎꿇고 앉아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어.



- 테... 그래서 어떻게 된 테츄?



- 그녀는 거절했어. 그녀의 눈에 그 남자가 용맹한 기사임은 중요치 않았던거야.

정확히는 눈에 차지도 않았던거지. 그렇지만 기사는 포기하지 않았단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겠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던거야.

건넛산 들끓는 화염의 강 성난 용의 목을 베어다 드리면 내 마음을 받아주겠소,

혹은 아랫산의 어두운 굴, 난쟁이들의 보화를 얻어오면 내 마음을 받아주겠소,

그것도 부족하다면 제일 가는 높은 산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바치면 내 마음을 받아주겠소.

하고 말이야.




자실장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 하지만 그녀는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지. 진귀한 공물이나 보화보다는 마음을 증명하라고 말이야.자신의 창가 앞에 앉아 꼼짝도 않고 100일을 버틴다면 그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한거지.

기사는 우직하게도 그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어. 비가 오면 젖고, 눈이 오면 잠자코 얼어붙으며 광풍이 불어도 바위처럼 꿈쩍도 않았지. 심지어 독충과 벌레가 자신의 갑주 안을 기어도 말이야.

그렇게 99일째가 되고 아침이 밝기전, 기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단다.



- 테?!? 어째서 테츄!??! 왜 일어나는 테츄아!??!



- 글쎄.. 잘 생각해보렴.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실장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돌아섰다.



이제 더 이상은 마음이 아파 보고 싶지 않은 뒷모습.



결국 자실장은 말도 안되는 일을, 오직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을 꺼낸다.





- 와... 와타치도!! 와타치도 이 자리에서 100일을 버티는 테츄!! 반드시 테츄!!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뒤돌았다가 더 이상은 웃을 수 없게되었다.

여느 실장석들처럼 값싼 허풍이거나 가치없는 언어를 가진 사람들처럼 가벼운 말이 아니었음을 자실장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 진심이로구나.



- 그런 테츄!!



- ...어떤 일이 있어도?



- 그런 테츄!!



- 내가 너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반드시 해낼 테츄!!






남자는 그대로 등을 돌려 공원을 빠져나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입을 꾹 닫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는 자실장을 뒤로 하고.





그렇게 어둑어둑해지려던 공원에 남자는 다시 나타났다.


모든 실장석들이 초가을의 저녁 추위에 오금을 떨며 박스에 꽁꽁 숨은 것과는 달리


가로수 아래에서 희미한 조명을 받으며 조그마한 몸뚱아리를 바들바들 떨며 자실장은 아직도 서있었다.




- 정말 100일이나 서있을 샘이니. 그건 미련한 짓 이야.




턱이 떨려 한마디 대답조차 하기 힘들어보이는 갸냘픈 모습.


남자는 한참 달을 올려다보다 말을 꺼냈다.





- 너는 그 이야기의 기사처럼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


하지만 깨지지 않는 마음이 있으니 괜찮은 테츄


- 너는 그 이야기의 기사처럼 비와 눈, 바람을 견딜 수 없어.


비님도 눈님도 바람님도 피해주실 테츄.


- 독충이나 벌레에 물려도 괜찮은거야?


괜찮은 테츄. 당신을 위해서라면 괜찮은 테츄.








남자는 커다란 상자를 하나 꺼내어 자실장의 앞에 내려놓았다.



- 하루.



남자의 알 수 없는 말에 자실장이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어올린다.



- 이 상자에 들어가 하루를 땅 속에 묻혀 버틴다면, 그 고독과 두려움을 겪은 뒤에도 여전히 나를 미워할 수 없다면.. 그 마음의 절반을 받아줄게.



- 저...절...반...테...츄....?



- 사랑을 받아주지는 못할테지만..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을 말이야.






남자가 무모한 짓은 그만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절반의 대답에 자실장은 얼어붙은 볼을 눈물로 서서히 녹이며 남자의 손에 스러지듯 기댄다.


말도 안되는 짓,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남자는 자신의 자실장에게 해주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 너처럼 조그마한 몸으로 여기 서있다간 내일 한나절이나 버틸까.





남자는 자실장을 소중히 상자에 넣어 공원의 가장 따듯한 목의 땅을 파 집어넣었다.


한나절 동안 자실장으로썬 견디기 힘들었을 모진 풍파 때문이었는지 자실장의 잠든 숨소리가 상자 밖으로 세어나온다.


남자는 그에 응답하듯 상자의 뚜껑을 톡톡 노크했다.





- 활짝 피어나렴. 처음 보여줬던 미소처럼 말이야.














얼었던 몸이 녹으며 따스하게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자실장은 꿈을 꾸고 있었다.


기사가 사랑했던 장미처럼 아름답고 가시처럼 아팠던 그녀처럼,


자신도 소중한 마음을 품고 흙 속에서 싹을 틔워 아름답게 피어나는 꿈을.





보드랍고 따듯한 흙에 쌓여 막 묻히기 전


누군가가 뚜껑을 톡톡톡하고 두드려 자상한 목소리로 해주었던 말처럼



피어나리라.



100일을 아파할 것에 마음이 쓰여 돌아와


증명의 고통을 따듯한 잠자리로 바꾸어준 그 사람의 상냥함을 위해서.


꼬옥 피어날 것 임을.


흡사, 아니 아마도 기도와도 같은 말을 주문처럼 읊조리며.
















































한편 남자는 군대에 갔다.


~完









댓글 2개:

  1. 어휘력이나 필력이나... 말이 참피물이지 동화 한편 읽는 것 같았음. 꽤 옛날에 한번 봤었는데, 계속 다시 찾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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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99일 기사 이야기네 결말이 이번 작품만큼 좋으니 찾아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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