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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누워서


[…그러나 큰 고양이는 듣지 않 다. 고양이가 어흥 하고 큰 소리. 무서움. 자실장 초록 은 무서움 울다 도망침.]

날이 춥다. 대신 달빛이 밝아 길을 환히 비춘다. 
이른 한파에 옷깃을 싸맨 채,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달마저 집으로 돌아가라 부추기는 사람잡는 날씨에, 나는 달랑 점퍼 한 벌 걸치고 슬리퍼 신은 채 생태공원 옆 길가에 쪼그려 앉아있다. 우연히 친구나 이웃이 이 길을 지나다 날 알아보는 일이 없길 바라며. 그리고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부디 이유를 묻지 않고 지나쳐주길 바라며.

[그 다음, 자실장 달콤한 많은 곳 가다. 인간 있는 거래 나누다 큰 집 이다. 자실장은 큰 소리. 몽땅 내놓는다 노예. 하지만 큰 인간 듣지 않 다. 큰 인간은 빗자루를 휘둘러 다. 몸 에 작은 상처. 자실장은 따끔함 울면서 도망. 자실장은 도망 멈추다 검은 길 만남. 큰 단단한 둥근 발 짐승 달린다 빠르다. 부딪힘 바람 아프다. 자실장은 울음 하면서 불러. 마마. 마마.]

나는 어느 골판지 상자 안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 있다.
사연을 듣는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어이없어할 것이 분명하다. 무슨 연애라도 하는 줄 알았다고, 이 한밤중에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대충 동의한다. 나도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번역기 앱이 맛이 갔나. 말을 제대로 옮기질 못한다. 스마트폰을 꺼내 켜보니, 역시나 배터리가 없었다. 이 미친놈의 폰은 날이 좀 춥다 싶으면 어김없이 주인을 배신한다. 이런 일이 있을까봐 미리 사놓았던 군옥수수에 스마트폰의 뒤통수를 지진다.

[그러나 마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마마는 나타날리가 없다. 자실장은 알고 있었다.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춥고 외로워서, 마마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누구든 그랬을 거야.]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까보단 낫군.
슬리퍼 신고 나온 양 발은 후회라도 하듯 연신 비벼대고, 군고구마의 온기를 간택받지 못한 다른 손엔 연신 입김을 분다. 누군가 내 꼴을 보고있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생각했다.
지랄, 가지가지 한다.

이 날씨에 집에 들어가 몸 누이는 대신, 나는 아닌 밤중에 공원 길에서 구연동화나 듣고 앉아있다. 내 스스로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무서워. 그래서 어떻게 끝나?]

[그 때, 마마가 나타났다. 그렇게 자실장과 마마는 다시 만났다. 자실장을 정말 열심히 찾아다닌 노력 덕분에. 뒷머리 다 뽑히고, 온몸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행복했다. 마마의 자실장이 살아있어서. 아직 안아줄 수 있어서.]

꼴값한다.

[미안. 나의 잘못. 마마…]

[괜찮다. 어서 잠 자자. 어둡다. 해님 뜨기 전에 잘 자야 큰 실장이 될 수 있어.]

[잠이 오지 않아.]

[하지만 더 해줄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다.]

[궁금한 게 있어. 주인 버린 이유 무엇이야 마마?]

그래, 뭐냐. 어느 막돼먹은 놈이 그러더냐.
남의 삶에 멋대로 비집고 들어와놓고는, 또 맘대로 나가도 되는거라고.

[내가 주인을 ‘버린’게 아니다. ‘버린다’는 것은 한때 가졌다는 뜻이야. 
나는 가진 적이 없다. 세상 무엇도 그저 무엇일 뿐 내 것인 적은 없었다.]

[그럴리 없다. 그럼 어째서 주인 옆에 살았어.]

[주인이 머무르게 허락해 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포기하고 떠난 것이다. 
나는 너를 우연히 가졌다. 그래선 안된다고 들어 슬펐지만, 동시에 선물 받은 것처럼 기뻤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너를 낳으면, 주인은 더 이상 나를 길러 할 수 없었다. 너도 가족이고, 주인도 가족이었다. 주인도 좋았지만…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었다.]

돌려말하려고 아주 애를 쓰는구만. 
나는 분명히 말했다. 새끼 까면 까는 족족 죽여버린다고. 인터넷에선 그렇게 해야 몇십 마리로 불어날 엄두를 못 낸다고 했었다. 
하지만 빨래를 널게 하지 말란 말은 없었다. 베란다에서 바람 좀 맞았다고, 바로 내 눈앞에서 눈깔이 녹색이 되는게 어디 있는가. 송화가루 날리는 봄도 아니고, 무슨 가을에...

[하지만 나 귀여움 같이 길러 실장 해 줄지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주인이 너를 사랑할지는 모른다. 인간에겐 인간만의 사연이 있다. 우리에겐 우리만의 사연이 있다. 인간은 우리처럼 살지 않는다. 고양이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고양이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는 방법이 다르다.
길러지는 기준은, 인간이 정한다. 인간은 걷다가 넘어진 자리에 작고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그걸 주워 길러 할 수도, 먹어 삼킬수도 있다. 우리는 먹기만 하는데 이상해. 잘은 모르지만, 그것과 같다. 너는 길러지지 못할지도 몰랐다. 네가 나쁜게 아니야.]

[이해 잘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우리가 사는 집, 이 집은 어디서 왔을까? 누가 버리고 간 골판지일까? 인간이 종종 가져가곤 하는데, 그 다음엔 어디로 갈까?]

“테에….” [모르겠다. 몰라.]
[그래, 몰라. 하지만 받아들여야 해. 그래야 살 수 있다.]

몸이 으실하게 떨린다. 못 견디겠다.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인 옥수수를 꺼낸다. 아직 따뜻하다. 이제 이 동네에는 길에서 옥수수를 파는 사람도 몇 없다. 어찌 보면 귀한 옥수수인 셈이다. 한입 베어 무니 견딜 만 하다. 낱알에서부터 뱃속까지 훈훈한 기운이 밀려든다.
이 계절에 구운 밤과 옥수수는 좀 태워도 맛있다. 옛날 생각처럼 훈곤한 향기가 난다.

[추워.]
[이리 와. 꼭 안으면 춥지 않아.]
[정말이었다.]
[이제 덜 추워?]
[덜 추워. 하지만 큰일 났다.]
[뭐가 문제야?]
[마마는 크다. 마마를 꼭 안아줄 수가 없어.]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옥수수를 구워주시곤 했다. 젓가락에 꽂아서, 그대로 가스불에 구워주셨다. 내가 길거리 옥수수에 사족을 못 쓰는건 어쩌면 습관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일러 없는 집은 몹시 추웠었다. 초겨울 밤에 온몸을 이불로 둘러싸고 코를 훌쩍이면, 어머니가 군옥수수를 물려주시곤 하셨지. 전기장판도 솜이불도 살 형편이 안되었던 그때는, 우리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으로 겨울을 났었다….

[왜 나를 버리지 않았어?]

어안이 벙벙하다. 왠지, 세상이 더 춥고 외롭게 느껴진다...
아니지, 아니야. 실장의 인지개념은 인간과 다르다고 했던가. 
나는 실장석을 잘 모른다. 아마 실장석 기준에서 저 정도 말은 막말 축에도 끼지 않는지도 모른다. 
태어난 지 일주일 된 녀석이, 어미에게 저런 말을 해도 이상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말했었다.]

[밖은 춥다. 하지만 인간 집은 따뜻하다고 마마가 말했었다. 이상해. 마마는 나를 낳은게 기쁘고 행복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마는 아프고 힘든 일 뿐이야.]

괜히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달빛을 돌려준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고 되묻듯이.

[나를 버리면 계속 길러지는 - ]
[마마는 원래 들실장이야. 길러지는 것은 선물이었다. 우연히 인간이 주웠다.
복잡한 것은 잘 몰라. 하지만 이건 안다. 선물 때문에 가족을 포기하면 나쁘다.]

[가족이 죽으면 끝이다. 대화할 수 없다. 하지만 다 같이 살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들실장으로 사는 것도 살 만 하다. 맞다. 좋은 일 있었어.
얼마 전에, 이 곳에서 핏줄을 만났다. 장녀. 죽었을 줄만 알았는데,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반가웠다. 살아있었다. 그런데, 눈물이 나왔다.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와서, 멈추어지질 않더라…]

사람과 다르지. 허나 똑같이 내던져져 사는 생끼리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이 험한 세상에 마음 놓고 부둥켜안을 수 있는 것이 가족 말고 얼마나 있던가. 그 눈물이 우리의 것과 얼마나 다를까.

내가 어떻게 알아, 씨발.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달과 눈싸움을 했다.

[그러니 미리 말해둔다. 살다보면 알게 될 것이 – 지직 -  
가족은, 한 명이라도 더 살아있는 편이 좋은데스. 그래서, 주인님도 다치지 않고, 너도 다치지 않도록, 집을 나온데스…]

산통이 다 깨지는 기분이다. 휴대폰이 온도를 되찾자 어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모양이다. 말꼬리에 울음소리를 붙이기 시작했다. 왠지 원래 그랬어야만 하는 것을 되찾은 것 마냥 편안하다. 동시에 징그러워서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말꼬리만 바뀌었는데도, 참으로 마성의 말투다.

[데프픗. 어느새 잠든데스… 맘 편히 자는데스. 자는 걱정할 필요 없는데스.
…주인님도 고민할 필요 없는데스. 나 하나면 되는데스.
나 하나만, 발에 치이도록 흔한 실장석 하나만 조금 더 힘들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스...]

대체 왜 시중에 이 따위 사족을 안 붙이는 어플이 없는거야? 말꼬리 없이도 방금까지 멀쩡하게 번역하고 있었잖아! 말꼬리 붙이는거, 솔직히 징그럽기만 하지 않나? 대체 무슨 집착이란 말인가. 일반 대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서다.
쓸데없는 주제에 필사적으로 신경쓰며 나는 온 힘을 다해 하늘을 노려본다.

마음 한 켠에서 누군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실장석 따위의 감성팔이에 눈물 맺힌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싫으냐고.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싫은 걸 어떡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무분별한 팩트에 반대한다. 내 머리속에서 꺼져.

나는 코를 훌쩍였다. 추워서 그런 것 뿐이라고 믿으려 애쓰며. 


[나… 하나…] – 도로로롱. 도로롱.

스스로 다짐하듯 되뇌인다.
개마냥 말을 잘 들어먹지도 않는다. 햄스터마냥 먹이만 줘도 되는 동물도 아니다. 실장석은 애초에 동물인지도 의심스러운 무언가다. 애초에 제 멋대로 가출한 것은 놈이 아니었나. 젠장, 내 집에서 먹이고 재워준들, 놈들은 은혜를 알아주긴 커녕 내 멘탈만 비참하게 박살낼 것이다…

앞으로 맞닥트릴 수많은 갈등이 머릿속을 스친다.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눈 앞에 선하다. 
그러나 불어닥친 찬 바람 한번에 그 모든 설득이 바람에 날아갔다.
바람이 묻는다. 춥잖아. 그냥 냅둘거야?

고로롱. - [ - 힘든 - 마마, 주인님 - ] - 고로롱.

담 너머에서 팔자 좋게 코를 고는 가출 애완동물.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길 저편에서 아직도 옥수수 냄새가 났다.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더 꺼냈다. 이번엔 내가 먹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 - 보고 싶은 - ]

먹일 입이 하나 줄어서 좋아했었다. 그랬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둘이 늘 것 같다. 자꾸 혹덩이가 들러붙는다.

골판지가 출렁여도 놈은 대가리를 벅벅 긁으며 뒤척일 뿐, 도통 깨어나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꼬박 한 달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녀석의 잠꼬대를 들으며, 골판지를 안아들고 나는 밤거리를 걸었다.

이토록 추운 날인데도, 달빛에 길은 참 밝다. 
집에 돌아가는 이들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산에서 공원으로 걷기


[버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데스우-!]
[알겠는데스. 그래서 돌 씨는 어디에 있는데스?]

강짜를 부리던 사육실장은, 입을 앙다물었다가 떼더니 폭언을 쏟아냈다. 야만적인 새끼,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날 먹이로 삼을 셈이지, 주인님이 보여주신 다큐멘터리처럼. 자신은 현명해서 그런 것쯤 다 꿰뚫어 본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사육실장은, 그러나 서서히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자신은 막을 무력이 없었다.
쇠못을 쥐고 천천히 다가오는 들실장에게 사육실장은 똥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인님을 부르짖어 부르는 소리는 공허했다. 무기라곤 변 밖에 없는 박스에서의 공성전은 초라했다. 덧없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버려진 사육실장은 외쳤다.
[와타시의 소중한 돌씨는 주인님께 있는뎃스-! 그러니 절대로, 쉽게 죽어주지 않는데샤-!]

변을 던지는 손아귀를, 금세 다가온 들실장은 덥석 집었다. 사육실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을 꿰뚫을 못 끄트머리를 예감한 몸뚱이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오른손을 누군가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 뿐.
어정쩡하게 움츠러들었던 사육실장은 당황하며 실눈을 떴다. 그리고 간질간질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들실장은 사육실장의 손을 털어주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운치를 던져대다 묻은 녹색 찌꺼기를.

사육실장이 황망하게 서있는 가운데, 들실장은 대충 깨끗해졌다고 생각했는지 하던 짓을 멈추었다. 그리고 사육실장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직 진한 냄새가 밴 손을 꽉 잡은 채로.

사육실장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다른 때라면 겁에 질려 발버둥쳤을지도 모른다. 혹은 비천하고 더러운 손 놓으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상대의 기묘한 태도가 자꾸만 할 말을 지워버렸다.

들실장은 물기 없는 푸석한 눈으로 사육실장을 돌아보았다. 고개조차 까딱하지 않았건만, 사육실장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사육실장은 순순히 들실장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천하고 더러운 손이라.
더러운 것은 비어 있던 들실장의 손인가. 운치로 젖은 자신의 손인가.

한때는 목욕할 따뜻한 물도 없는 거지들이라며 공원 실장들을 욕했었다. 지금은 빵콘을 가득 매달고 있는 자신의 악취가 더 심했다. 사육실장은 속으로 피식 미소를 지었다. 병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해가 건물 숲 너머로 기울기 시작했다. 옆으로 누운 상자 하우스의 입구로 누런 빛이 파고들었다. 침묵 끝에 버려진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은 없었다. 들실장을 추궁하는 대신 사육실장은 노을을 보았다. 일생 처음으로, 유리 너머가 아닌 맨 눈으로 보는 노을이었다. 아름다웠다.
대체 얼마만인가. 노을을 멀거니 볼 여유가 있었던 날이.

하루의 끝자락이 자아내는 빛무리를, 두 실장석은 나란히 앉아 입을 벌린 채 감상했다. 들실장이 대답한 것은, 풍경에 넋을 잃은 사육실장이 질문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고 있었을 때였다.

[위석이 주인에게 있다고 하지 않은데스?]
[맞는데스.]
[그래서인데스.]

조금 뒤에서야 버려진 실장은 깨달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잡은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낀 들실장은, 그 손을 더 꽉 잡아주었다. 그러나 그 떨림까지 멈추게 해줄 순 없었다.
들실장은 마주 잡은 팔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물에 빠진 자의 힘이 더 센 법이니까. 반대편 팔에 쥐고 있던 쇠못마저 놓은 들실장은, 슬그머니 양 손으로 사육실장의 팔을 붙잡았다.
사육실장은 남는 손으로 가슴을 쥐고 버거운 숨을 쉬려 애썼다. 코와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당황한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머리 속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한 구석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왜 그러냐는 듯.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냐는 듯이.

옆을 보았다. 공원 실장은 그저 태연히 노을을 보고 있었다.
다만,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사육실장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들실장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무기로 찌르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속여서 먹게 한 적은 없다. 아마도, 그저 나란히 앉아 한 두 마디 나눈 것이 전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같이 봐 주면서.

울컥 하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사육실장은 들실장을 다시 흘깃 돌아보았다. 들실장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티가 많이 나지 않을 만큼 조금. 악문 채 떨리는 턱을, 굳이 사육실장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그런 세심한 배려까지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사육실장은 무언가 결심했다.
[어이.]
[듣고있는데스.]
[저기 뒤편에 있는 상자에, 주인님이 주신 푸드 있는데스. 가져가는데스.]

들실장은 고개를 떨구었다. 사육실장은 말을 이었다.

[콘페이토도 있는데, 먹지 마는데스. 독인데스. 모두 호신용인데스. 주인님이 주신-]
사육실장은 비명으로 말을 맺었다. 순간 팔을 놓친 들실장은 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사육실장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눈에서도 흘러나오는 핏물이 마치 죄 지은 영혼 같았다.
엎드려 덜덜 떠는 것 만으론 격통을 이길 수가 없었다. 자세가 무너진 몸뚱이가 통제를 잃고 요동쳤다. 그 와중에도 두 팔은 열심히 허공을 흝었다. 갑자기 놓쳐버린 상대의 손을 찾아서. 제발, 날 버리지 말아달라는 듯이.
예고도 없이 빛이 사라졌다. 사육실장은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대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안았다.
[괜찮은데스, 괜찮은데스.]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들실장의 목소리였다. 혹은 친구의 목소리였다.

벌벌거리는 두 팔로 사육실장은 들실장의 어께를 쥐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가까이 하려 했다. 들실장은 속삭였다.
[이미 말하지 않은데스, 듣고 있는데스.]

안심한 듯 사육실장은 헤 웃었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마마는 왜 못 만났는지, 샵에서 팔린 뒤로는 어떻게 살았는지.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쌕쌕거리며, 혹시나 기억이 흩날려 사라질까 필사적으로 메모하듯이.
[그랬던데스?]

그 한 마디에 사육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육체의 고통 때문이 아닌, 다른 종류의 눈물이 울걱 하고 쏟아져 나왔다. 호흡마저 힘들어진 사육실장은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기대며 말했다.

[있잖은데스, 와타시 열심히 노력한데스. 샵에서도, 닌겐 하우스에서도…]
[아는데스.]
[친구들은 모두 솎아지고, 파킨해 죽어버리고, 와타시만 남았더라는데스.]
[아.]
[그러고도, 사육이 되려면 운이 좋아야 했던데스. 와타시를 주인님이 데려가고 얼마지 않아서, 샵이 없어진데스. 와타시보다 예뻤던 아이들도, 예의발랐던 아이들도, 전부 폐기됐다고 들은데스…]

미처 뱉어내지 못한 피를 씹으며 사육실장은 필사적으로 말을 토해냈다. 마지막 기회를 예감한 듯이.

[운, 운이었던데스. 아는데스. 누구보다 잘 아는데스. 그래서 더 노력한데스. 감사한 주인님께 어떻게든 보답하려고 한 데스 – 아니, 운이 아니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기도 한데스… 음식 안 흘리려고 한데스. 빵콘 안 하려고 한데스. 그런데,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수 없이 보아온 눈빛에 들실장은 침묵했다. 현실과 부딪혀 번민하는 저 눈. 누가 자신을 죽이고 있는지 받아들이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생이별한 가족처럼 사랑하는 누군가, 또는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만족시키려고 했던 누군가. 자신의 배를 가르고 생명을 받아가도록 할 만큼 믿었던 그 누군가. 그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실장석에게는.
그래, 결코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모자란 몸과 마음으로는.
[아는데스.]

들실장은 상대의 몸뚱이를 가만히 붙잡아주고 있었다. 마침내 떨림이 멈출때까지.

몸에 튄 피칠갑을 물휴지로 대충 씻어내며, 들실장은 하우스에서 나왔다. 어느새 노을빛이 시들해져 있었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산 중턱으로 돌아온 들실장은 골판지 집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고여서 꿉꿉해진 공기가 황급히 뛰쳐나왔다. 묵은 냄새가 빠지길 기다리며 들실장은 기지개를 폈다. 조금씩 폐가 시려오는 신선한 공기가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도.

들실장은 산 아래의 공원을 굽어보았다. 저녁의 어스름을 틈타 꿈틀거리는 실루엣이 보였다.
사람의 까만 그림자는 시멘트 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큼지막한 그 무언가가 요동치더니 뎃뎃하는 소음이 울렸다. 주인이 황급히 무언가 읖조리자, 억양없는 어색한 목소리가 말을 옮겼다.
<조용히 하십시오 것이 좋은 아이 데스. 곧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데스->
아마도 종이박스로 보이는 것 안에서 뎃뎃하며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실루엣은 황급히 어딘가로 사라졌다. 쫓기는 들실장처럼, 혹은,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굳게 믿는 자실장처럼, 어색하게 움츠러든 도둑의 자세로.

들실장은 막연히 생각했다. 저 자는 돌아가면 어떻게 할까. 
자비롭게 위석을 단번에 깨버릴까, 아니면 죽이는 일은 날씨에 맡긴 채 위석병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아니면 병의 내용물을 얼어붙은 길에 던져버릴지도. 아마 오늘 오후의 그 버려진 사육실장이 당했을 일처럼.

들실장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하루에 짊어지고 싶은 감정적인 부담은 이미 한도를 넘었다.
하지만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들실장은 나쁜 머리로 깊게 생각하느니 발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멀어져가는 실루엣을 향해 침을 탁 뱉으며. 들실장은 산 아래의 공원으로 향했다.

내리막을 걷는 걸음에 조금씩 힘이 실렸다. 
손 잡아주는 이조차 없는 죽음은 얼마나 적적할 것인가.

그 해 마지막 귀뚜라미 소리가 풍경을 적셨다.








하늘에 매달린 것은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실장은 나무둥치에 기대 앉아 있었다.
나무그늘은 그 얼굴에 드리운 수심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나뭇잎이 얼굴로 떨어지자, 실장은 그것을 떨쳐내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면, 다른 실장들이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하늘에서 흔들거리는.
모두들 새끼줄, 고무줄, 케이블타이 따위에 목이 매여있었다. 마치 농번기에 알차게 열린 열매들 같다.

며칠 전엔, 나무에 실장석 대신 진짜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실장들은 단내에 이끌려 모였고, 며칠동안 나무 밑에서 열매에 닿을 방법을 찾으려고 아우성쳤다. 
헛짓이었다. 놈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근처에 사는 행인과 마주칠 때까지.
싸움이 벌어졌다. 선을 먼저 넘은 것은 실장석들 쪽이었다. 굶주림에 총기를 잃은 그들은, 똥인간 모가지따위 단번에 꺾어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날의 유일한 생존자는, 오늘 그 장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퀭한 눈으로 매달린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치테치 떠드는 소리에 실장은 고개를 내렸다.
나무그늘 근처에, 독라 자실장 무리가 나타났다. 실장의 기척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실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메마른 입술을 떨었다. 위험한 곳인 줄도 모르는 어린 것들.

자실장들은 주저앉은 채, 모가지가 꺾일 기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침을 흘려대는 것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투였다.
[테, 장녀챠, 정말로 밥이 생기는테치?]
[그런테치. 오늘은 서로 먹지 않아도 좋은테치.]
[슬픈 일은 이제 싫은테치…]

아마도 자매들인 듯 했다.
초췌한 실장의 눈가가 경련했다. 묻어두려 했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 놈에게도 자매는 있었다. 사랑하는 자매. 며칠 전 농부의 손에 잃어버렸다.
그 둘은 일가에 남은 마지막 생존자들이었다. 각박한 생활 속에서 선택권은 적었다. 
그 둘은 집 찾기도, 먹이 구하기도 같이 했다. 감나무 앞에서도 놈들은 같이 있었다.
이젠 놈 하나 뿐이었다.

이윽고 밧줄 하나에서 시체가 떨어졌다. 말라붙었다가 비를 맞은 시체는, 머리와 목이 분리되며 허물어졌다. 홍시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고깃덩이가 터졌다.
자실장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체에 달려들었다.
[고기! 고기테치!]
[비키는 테치이 - !]
[테히! 삼일만의 먹을거인 테치!]
[챱챱 - 과연 오네챠인 테치! 대단한 테치!]
[다들 천천히 먹는테치.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테치.]
파리새끼들마냥 시체에 달려든 자매들과 달리, 자실장 하나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며.
[적당히 먹고, 오늘은 다들 물러나는테치. 분명, 내일이나 모레에도 떨어질 것인 테치.]
그러나 자실장은, 어두운 나무그늘 안쪽은 살피지 못했다.
[무서운 닌겐상이 왔다 갔으니, 찾아올 닌겐도 실장도 며칠간은 없는 테치.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 ]

[늦은데스.]
자실장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늦었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먹고, 황급히 싸고, 또 쳐먹던 자실장들이 비로소 너무 조용함을 깨달은 것은,
그래서 뒤를 돌아본 것은, 이미 첫째가 발끝까지 먹히고 나서의 일이었다.

도망은 무의미했다. 며칠을 굶고서 과식한 자실장들은 몸도 가누기 힘들었다. 추격전은 길지도 격렬하지도 않았다. 고요 속에서 위석이 깨지는 소리가 몇 번 더 울렸다.

입 안에서 푹푹 터지는 살코기를, 실장석은 씹는 둥 마는 둥 하며 황급히 삼켰다.
열심히 자실장 고기를 입에 욱여넣던 실장석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데스. 차녀. 도망치기 쉽게 조금 떨어져 있는데스.’
그 날 자매가 남긴 마지막 말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데스? 일단 닌겐에게 감을 따라고 시키면 - ’

‘잠자코 듣는데스. 꼭 기억해둬야 할 말인데스.
만약 오늘 와타시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리고 식량을 구할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면…’

[부디 다시 나무 밑으로 와보라던. 그 말을…]

가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오열하는 실장의 옆으로, 또 한번 몸뚱아리가 떨어졌다.
굶주린 실장이 거부하기 힘들 만큼 진한 냄새를 풍기며. 

[이젠… 알겠는데스…]








얼어붙은 피혁



들실장은 다른 생물보다 서로에게 가혹한 편이다. 물론 굳이 서로에 대해서만 흉악하게 군다기보다는,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는 세상에 태어난지라 반반이나마 승률을 가져갈 수 있는 상대가 동족 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적어도 유튜브에서 전문가라는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름이 끼친다며 빗발치는 민원에 공원을 이잡듯이 뒤지던 중, 마침내 괴소문의 주인공을 만났을 때. 나는 과연 이 녀석들에게 동족에 대한 무서운 악감정이 정말로 없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동족을 기워입은 녀석은 무엇이 문제냐는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잘 찢어지는 실장복만으로는 소용이 없는데스. 가죽이 훨씬 나은데스.]

"가죽이어야만 하냐고 물은 건, 그걸 보고 징그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야."

[지난번 겨울엔 이렇게 살아남았던데스. 닌겐상들이 이것을 불편해하는데스?]

대단히 당황한 목소리는 일견 뻔뻔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애써 나름대로의 어설픈 바느질을 이어가던 녀석은 손을 찔려 데각 소리를 내고 뒹굴었다.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바늘은 이제보니 작은 낚시바늘을 물고 굽혀서 만든 것이었다. 덕분에 입가와 뭉툭한 손엔 희미한 흉터가 가득했다. 녀석은 내 호기심어린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즉사를 면했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하는 듯했다.

[닌겐상들은 실장을 싫어하니, 몇 놈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스. 이녀석들은 닌겐상들 구역에서 쓰레기를 헤집고 봉투를 찢어놓는 위험한 녀석들이었던데스.]

분충이라는 표현은 실장석의 사회에서 어미가 정해주는 규칙과 연관된다. 다 큰 실장이 다른 성체에게 인간의 것을 뒤지니 분충이라 했다면, 그것은 보스의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녀석은 분충이라 표현하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했다. 인간의 것을 건드리다 구제의 손길을 불러오면, 본인에게마저 불똥이 튄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력구제를 하겠다는 발상까지 가기는 쉽지 않다. 실장 대 실장이라면 승률이 아무리 높아본들 절반 언저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저들이 불러올 슬픈 일을 당해 죽는 것보다는 나은데스. 그리고 죽이면 위험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가죽이 남는데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걸 입고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네게 좋을 거야."


[ 밤에만 다니는데스? 아니면 산에 숨어사는데스?]

나는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사실 녀석은 충분히 주의했을 것이다. 민원사항에 적혀있는 대로라면, 녀석이 주로 목격된 장소는 으슥한 골목이나 등산로였고, 주 출몰 시간대는 해가 지고 나서 새벽까지였으니.

그러나 그런 곳에서 마주친다면 공포감은 배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람의 영역이 아닌 곳은 도시에 없다. 보물인 바늘을 놈이 어디서 얻었을지 생각해보면, 발길 하나 닿지 않는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놈은 떠돌다 다시 행인을 마주칠테고, '시청은 흉물이 돌아다니는데 무엇을 하느냐'는 고성이 민원센터에서부터 시작되어 주무관을 거치고 맨 밑바닥에 있는 나같은 사회복무요원 동지들에게까지 전달될 것이다.

나는 대신 녀석에게 문구점에서 솜과 마분지를 한움큼 사서 건넸다. 놈은 이런 기적같은 날이 다 있느냐는 듯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가죽 무더기를 수거해가겠다고 말하자, 녀석은 바들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실장이 변명을 주워섬기는 것을 듣고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산만한 단어들을 조합해보니 슬슬 이해가 닿기는 했다.

아마도 그 실장가죽 코트는 생존주의자의 서러움과 역경이 함축된 삶의 자존심같은 것인 듯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어째서인지 선뜻 빼앗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부터 웬만하면 그 흉물을 숨겨 놓으라는 조언에, 동족 가죽 수집가는 굴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않겠다며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재로서든 비상식으로든 쓸모가 있긴 할 것이다.



그리고 며칠 있지 않아 나의 미봉책은 구더기 똥자국만큼도 소용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냥은 다시 시작되었고 민원에는 불이 붙었다. 사태의 원인을 깨달은 것은 어느 초등학교 앞을 지나던 와중이었는데, 하수도 구멍 안에 엉망으로 밟히고 찢긴 마분지 코트가 떨어져 있었다. 어설픈 낚싯줄 바느질로 마감된 것이 누구의 솜씨인지 알 만도 했다.

목격담에 의하면 정수리에 멍이 새겨지고 한쪽 눈이 사시가 되어버렸다 했다. 아이들에게 호된 일을 당한 모양인 실장은, 이제 더 표독하게 시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전에 비하면 뒷처리마저도 엉망이었다. 아마도 피와 고기와 뼈까지 깔끔하게 소비했을 과거와는 다르게, 잃어버린 방한재를 어떻게든 확보하겠다는 일념에 휩싸였을 녀석은 길거리에 물어뜯기거나 머리가 으깨진 동족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다. 가죽이 벗겨진 채 버려진 실장석들을 보고 나 또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녀석을 찾아냈다. 그러나 녀석이 가죽을 벗기는 장면을 목격하고 형용하기 힘든 기분에 젖었다.

어미에게 먼 길 너머에 별사탕이 있다고 속여, 지쳐 돌아왔을때를 노려 잡아먹는 자실장들도 보았다. 우연히 맛본 송사리에 군침을 질질 흘리며 자로 어설픈 낚시를 시도하는 어미도 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유별났다. 비웃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녀석은 슬퍼하고 있었다. 폐목재 더미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강판의 못을, 동족 가죽과 근육 틈에 끼워넣고 들추어 벗기면서.

녀석은 죽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삶에 비애를 느끼는 듯했다. 그렇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자신을 원망하는 듯했다. 저토록 온힘을 다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싫어하면서도, 기민하게 동족을 해체하는 동작은 멈추질 않는다. 

[살아야 하니까 말인데스.]

"그러니?"

[나는 요령이 좋은 것 뿐인데스.]

석유난방 이전까지 월동은 사람에게도 가혹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재주가 있은들 들실장이 온전한 상태로 내년 봄을 맞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싸워라도 볼 기회를 이런 식으로 박탈당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성정을 배반해서라도 생존을 꿈꾸고 있었기에 더욱 더.

[너희는 살기 위해 무엇을 하는데스. 나를 치우는 것이 사는데 필요한 일인데스? 내가 죽어야만 너희는 안전한 겨울을 날 수 있는데스?]

"...그런 건 아니지. 우린 네 가죽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살육의 업을 처벌받는 것이라면 차라리 납득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기가 싫다는 이유로, 오직 아름다운 것만 공원에 남겨두고 싶다는 이유로 이승에서 퇴거조치를 당한다면. 

[그럼 역겨운 것은 너희가 아닌데스.]

들실장의 입에서 사람을 비꼬는 말이 나오면 반사적으로 울화통이 흔들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방금의 것은 이상하게도 한숨만이 나올 뿐 몽둥이 든 손이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것은 생존주의자가 문명인에게 건네는 순수한 의문이었으니까. 나는 놈의 말에 어느 정도의 일리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누리는 것보다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동시에 없던 일인 셈치고 녀석의 일을 넘어가줄 수도 없었다.

들실장 수십마리분의 죽음은 녀석의 삶을 지켜주지 못했다. 문제의 가죽 코트가 수거봉지에 담기자, 풀숲에 숨어 오들거리며 바라보던 다른 실장들이 아쉬운듯 돌아선다. 사냥꾼의 모피가 탐이 났던 모양이다.

무용하게 휘청이는 봉투와 따라서 흔들리는 저들의 시선 속 욕망. 목적잃고 탁아당한 죽음들을 손에 든 채로 나는 소각장으로 향했다. 사람에게서 온기를 얻으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동족에게서 방한재를 구하려 했던 녀석은, 이제 현대과학이 낳은 궁극의 방한재인 두꺼운 비닐에 감싸여 더없이 따뜻한 화석연료의 불구덩이로 향하고 있다.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아이러니 덕분에 이런 상황이 더 싫어진다. 

재난 문자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린다. 오늘 밤부터 영하로 떨어질테니 농사를 짓든 뭘 하든 대비하라는 예보다.

봄과 만나길 고대하던 녀석이 만나지 못한 한겨울이었다.






태풍의 끝 (상,하) (다두(180.226))




지독한 날씨의 끝에 찾아온 것은 또다른 지독한 날씨였다. 해갈을 부르짖던 공원의 짐승들은 이내 마른 햇살을 그리워하며 울어댔다. 흘릴 눈물조차 메마르고 없던 폭염 속에서는 결코 알지 못했던 공포였다.
어쩌면 울 수라도 있는 것이 호재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무서운 일을 당한 것들은 울부짖을 수조차 없었다.

[자들! 자들-! 어, 어쩌면 좋은데스우-!]

친실장은 알 수 없었다. 지금 느끼는 싸늘한 한기가 억수같은 비 때문인지, 아니면 저 흙더미 속에서 꿈틀대는 자들 때문일지.
간 밤에 큰 비가 내렸지만 일가는 걱정하지 않았다. 스티로폼 하우스는 무거워 떠내려가지 않았다. 골판지처럼 젖어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러자 빗줄기는 비탈에서 흙을 쓸어왔다. 흙더미는 그대로 일가의 집을 덮쳤다. 친실장은 불길한 우르릉 소리를 듣자마자 집에서 도망쳤다. 집 안의 집기들을 손 닿는 대로 밖으로 내던지면서.
배수로 도랑으로 쓸려 떨어지는 집을 보며, 기겁하던 친실장은 한편으론 왠지 의기양양한 기분마저 느꼈었다. 훌륭히 자연에 맞서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역시 생존의 프로라는 혼잣말 따위를 지껄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귀청을 때리는 새된 소리가, 녀석이 무엇을 잊었는지 일깨워 주었다. 곤히 자다 날벼락을 맞은 자들의 절규였다.
멍하니 주저앉은 녀석은, 밤새 비에 오들오들 떨며 자들을 추억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동이 트고, 흙더미 속의 들썩임을 발견할 때까지.

고봉밥처럼 쌓인 흙이 배수로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 흙더미의 틈 사이로, 빼꼼히 드러난 하우스의 외벽이 보였다.
그것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밀어내고 있었다. 아직 여기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듯이.

[…마, 어디… 살려… ]

친실장은 기겁하며 그리로 내달렸다. 미끄러운 빗길에 넘어져 얼굴을 쳐박아가며.

매몰된 하우스를 앞에 두고 허둥대던 친실장은, 결국 맨손으로 진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버티는데스! 조금만 버티는데스! 마마가! 마마가 여기 있는데스우-!]
그러나 집은 너무 깊게 파묻혀 있었고, 밤새 젖어 차가워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탈진한 친실장은, 주저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파낼 도구가 주변에 있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뒤에서 신중히 급소를 노리던 습격자는, 그 움직임에 당황해 급히 무기를 내질렀다. 녹슨 못이 친실장의 모가지에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왔다. 습격자가 놓쳐버린 못대가리가 통통 튀어 배수로로 떨어졌다.
어설픈 곳을 찔린 덕에 친실장은 즉사를 면했다. 그러나 고통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친실장은 포효하며 온 힘을 다해 버르적거렸다. 발길질에 얻어맞은 독라 포식자는, 데에엑 소리지르며 상대의 몸뚱이를 깔아뭉갰다.

놈들의 몸은 얼어붙어 있었고, 비 덕분에 몹시 미끄럽기까지 했다. 붙잡으려는 손은 속절없이 빗나갔고 주먹은 미끄럼틀 위처럼 스칠 뿐이었다. 덕분에 빗 속의 악다구니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마침내 탈진과 실혈이 친실장을 죽일 때까지.
위석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독라는 쌕쌕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미동도 않는 상대의 옷가지를 벗겨냈다. 시체를 끌고 가려면, 마찰을 적게 만드는 것이 더 편하니까.
그리고 떠나기 전, 독라는 흙더미가 꿈틀거리는 곳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시체를 은신처로 옮기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쌓인 진흙더미가 수압에 쓸려 없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독라가 수저를 들고 배수로 앞에 돌아왔을 즈음, 배수로엔 활기찬 물살만이 흐르고 있었다.
고기. 내 것이었던, 다 잡아놓았던 여분의 고기. 독안에 든 쥐를 놓친 독라의 가슴이 슬픔으로 가득찼다. 독라는 괴성을 지르며 수저로 땅을 내리쳤다. 지친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수저가, 삽시간에 배수로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독라는 멍하니 배수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놈에겐 무기도 삽도 없었다.

정수리를 때리는 비가 몹시 차가웠다. 벌써 사흘째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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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대며 은신처로 돌아온 녀석은 그대로 쓰러졌다. 오전에 끌고 왔던 시체 옆에 나란히.
길가에 방치된 콘크리트 하수관이 놈의 집이었다. 추위를 막아보겠답시고 그 안에 이불을 쑤셔넣었지만, 곰팡이 핀 솜은 아늑하긴 커녕 젖어 싸늘했다. 껴입고 있던 몇 겹의 봉투도, 푹 젖은 탓에 보온재의 기능을 해내지 못했다.
따라서 눈이 점점 감기는 것은, 결코 아늑함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으려 애쓰며, 놈은 본능적으로 고기의 팔뚝을 왁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 살에선 냄새도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 앞은 자꾸만 깜깜해졌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녀석은 생각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녀석은 떠올렸다. 어렸을 적의 침대는 이렇지 않았다. 그땐 모든 것이 풍족했고, 무엇 하나 이런 꼴은 아니었다. 달디단 밥, 비와 햇살을 막아주는 지붕, 따뜻한 어미의 품.
왜 그 땐, 그런 호사에도 감사한 줄을 몰랐을까.



[움직이지 않는테치?]
[똥을 발라도 반항하지 않는테치? 자존심도 없는테치?]
[노예인테치. 좆밥새끼인테치. 죽여서 운치굴의 거름으로 만들어주는-]

밭일을 배우는 것은, 인내심 부족한 자실장들에겐 고된 일이었다. 놈들로선 노동의 필요를 이해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어리광보다 힘든 일은 무가치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밥이든 뭐든, 본래 어미에게 아양을 떨면 나오는 것인데.

땀이 흐르는 고생에서 반항심이, 빡빡한 규칙에서 심술이 피어났다. 식물을 소중히 돌보라는 어미의 야단에, 사랑을 빼앗겼다고 질투를 느끼는 녀석도 있었다. 언뜻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작물들이 밉살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수발을 들어주는 것은 노예의 일인테챠-!]
[죽여! 죽여테챠-!]

어느 날 울화통이 터져버린 자실장들은, 저항하지 않는 상대에게 유감없이 잔혹성을 드러냈다. 속을 발라내 죽여 주겠다느니 하는 끔찍한 말을 일삼으며, 녀석들은 돌보던 여린 토마토 모종을 공격했다. 잎사귀와 열매를 잡히는 대로 잡아당기고 물어뜯으면서.

[데에엣-! 자들-! 무슨짓인데스우-!]

삼십여분 동안, 동안 여섯 마리 자실장이 온 힘을 다한 끝에, 덜 여문 줄기는 꺾여 쓰러졌다. 뒤늦게 온 어미가 놈들을 떼어놓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제 그들은 대자연의 정복자였다. 마마의 마마라는 실장이 와서 불같이 화를 낼 때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어미가 애걸할 때도, 녀석들은 복수의 쾌감에 취해 서로 키득거릴 뿐이었다.
며칠 뒤, 어른들이 녀석들을 철제 그물망 케이지에 가둘 때까지는.

[너희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데스.]
마마의 마마가 으르렁거렸지만, 녀석들은 딴청을 부리며 한 귀로 흘렸다. 그저 귀찮은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표정으로.
그러나 다음 말만은 참을 수 없었다.
[어른이 되고도 이런다면, 솎아지는데스. 오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배울것인데스.]

[늙은이가 뭐라는 것인테치.]
[너도 죽여버리는테챠-!]
솎아진다니. 감히 그런 끔찍하고 건방진 소리를. 녀석들은 의기양양하게 맞서서 을러댔다.
서로를 농사실장이라고 말하는, 농사에 미친 어른들. 농작물님이, 인간님이 밥을 준다며 절절 매는 아둔한 병신들.
그렇게 대단하다는 식물들은 스스로 방어조차 못하는 달마 병신이었다. 이미 그런 건방진 놈들 중 하나를 친히 죽여준 후로는, 성체들이 전부 바보 멍청이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저렇게 약해 빠진 것들을 받들어 모시다니. 이미 놈들의 눈에 어른들의 권위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기회는 있는데스. 벌을 받고 반성한다면 돌아올 수 있는데스.]
[이 몸의 똥이나 먹는테챠-!]
[병신, 병신-!]

[이번 비는 거셀 것 같은데스.]
조막만한 것들에게 있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지만, 늙은 실장의 표정은 평온했다.
자실장들은 더욱 신이 나 반박조차 못하는 늙은이를 놀려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마의 마마는 문득 손바닥을 폈다. 그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조금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보는데스.]





빗방울이 양철 천장을 때려부술 듯 내리 꽂혔다. 강풍이 놈들을 들어 사방으로 메쳤다. 굉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젖은 몸뚱이가 벽에 처박히는 순간, 자실장들은 비로소 후회를 배웠다.
[지이이-! 지이이이이-!]

몹시 춥고 온몸이 아려왔다. 어미를 부르려고 아가리를 열면, 그리로 된바람이 들어와 기도를 헤집었다. 숨도 쉬기 힘들었던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건,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어른과 또래들은 베란다의 유리창 너머로 놈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비웃는지 살필 틈은 없었다. 그들을 원망할 여유도 없었다.
처음 살갗으로 체감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몇 분 뒤 바람이 잦아들었다. 바닥에 엎어진 자실장들은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로 빗물을 맞고 있었다.
그러자 케이지에 매인 밧줄이 당겨졌다. 천천히 집 앞까지 끌려온 자들을, 달려나온 어미가 황급히 꺼내어 실내로 옮겼다.

어른들이 한참을 껴안아준 덕에 체온이 돌아온 자들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따뜻한 품에 파고들었다. 갓 난 구더기가 물에 빠진 듯 처절한 움직임이었다.

[어디 다음에도 그렇게 해 보는데스. 다음엔 너흴 붙잡아줄 케이지가 없는데스.]
마침내 자실장들에게 흐느낄 만큼의 기운이 돌아오고 나자, 마마의 마마가 입을 열었다. 안타까움이 가득 배인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만은 빗물만큼이나 차갑고 무서웠다.

[우리는 한없이 약한데스. 내일을 대비하지 않으면 죽고, 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데스.
작물씨를 가꿀 기회조차 없는 삶은, 방금 그것보다 더 가혹한데스. 다행히 너희는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데스. 어른이 되기 전에 깨닫길 바라는데스. 그렇지 않으면,]

반쯤 혼이 나가버린 자실장들은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비와 바람이 분충들을 솎아줄 것인데스. 마마의 마마때도, 그 마마의 때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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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바람이 놈을 깨웠다. 얼굴에 냉기가 훅 몰아치는 순간, 놈은 기겁하며 머리를 감싸쥐고 엎드렸다.
아닌데스. 나는 솎아지지 않는데스. 착하게 살아온데스. 제발.
[제발-! 데쟈악-!]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땀과 비에 젖은 머리통에서 물방울이 톡톡 떨어질 뿐.
조금 뒤, 독라는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켰다. 공포와 분노와 설움에 아직도 심장이 콩닥거렸다.

지옥 같은 며칠이었다. 사실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걷기도 힘들 만큼 쏟아진 비가, 밤낮의 개념을 지우고 온 세상을 얼려버렸다. 독라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동족의 시신을 끌어안고 이불 속에서 버티는 것뿐이었다. 냉기 때문에 기절하고, 깨어나면 자각도 없이 시체의 살을 뜯어먹고, 또 견디다 못해 눈이 감기는 나날.

독라는 바깥에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비가 거의 그쳐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빗소리가 사라진 적막이 몹시 낯설었다. 눈을 꿈벅거리던 독라는, 은신처 깊은 곳에서 먹다 남은 시체를 꺼내어 입구로 끌고 왔다. 남은 부분이 얼마 없는 시체는 한결 가벼웠다. 독라는 동족의 잔여물을 끌어안은 채 시멘트 입구에 걸터앉았다.
그 후 삼십 분 동안, 독라는 지독한 폭우를 함께 견딘 벗을 마저 뜯어먹었다. 천천히, 조용히. 마침내 따뜻함과 평안을 되찾은 세상을 감상하면서.  

당장 먹을 것이 떨어졌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그쳤으니 기운을 차리고 활동해도 늦지 않는다. 그 날 내내, 독라는 천천히 기운을 되찾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으로는, 꿈 속의 따뜻함을 잊으려고 애썼다. 기억하려 해선 안된다.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이상 버틸 수 없어질 테니까.
추위가 한결 가셨지만, 여전히 젖은 잠자리는 싸늘하고 눅눅했다. 비를 피해 찾아온 톡토기와 모기가 몸 위를 지나다녔다. 독라는 제 살을 쥐어뜯어가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부터 비가 다시 내렸다.
장대처럼 퍼붓는 비는 아니었지만, 녀석을 주춤거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이정도 비면 맞을 만 하다고 나섰다간, 언제 또 큰 비로 변해 녀석의 명줄을 위협할 지 몰랐다. 며칠 전의 사냥 때 그랬듯이.
더욱이 그 날 무기를 잃어버린 탓에, 사냥은 더욱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려 애쓰며 독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윽고 독라는, 모든 계산을 던져버리고 빗 속으로 달려나갔다.
주린 배의 독촉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미친듯이 퍼붓던 비가 잦아들라 치면, 들실장들은 하나 둘 그늘에서 빠져나와 길을 헤멘다. 대부분 집과 가산을, 높은 확률로 무기까지 잃어버린 채로.
그들 중 대부분은 가산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바람에 몸을 싣고 도망치는 봉투씨를 뒤쫓고, 제멋대로 흩어진 자들의 엉덩이를 때려 혼내고, 떠내려가는 집에 발을 구르느라. 제 몸을 돌볼 여유는 없다. 부를 누릴 여력이 없는 들실장들에게, 손에 한 줌 남은 것이 몹시 소중할 밖에.

어느 친실장은, 그 와중에도 한발 앞서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들의 만류에도 급류에 다가가, 물통으로 물을 받으려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때 물을 받아 놓아야 하는데스-!]
[위험한테챠-! 비, 빗물을 먹으면 되는테치!]
[그러려면 비를 맞아야 하는데스. 하지만 비가 오는동안 나가면 안되는데스!]

방수포 씌운 골판지에 숨어 장마를 견디는 동안, 일가는 갈증으로 말라 죽을 뻔했다. 이토록 축축한 날씨였으니, 물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빗줄기가 거세지기 전에 물을 확보해야 했다. 친실장은 이를 악물고 물통을 강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즉시 물통을 놓쳤다. 같은 실수 대신 저지른 새로운 실수였다. 강물은 거셌고, 억지로 물통을 단단히 잡으려던 친실장은 팔뚝이 부러질 뻔했다.

멍하니 눈으로 물통을 쫓던 친실장은,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동족에게 뺏기기 전에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휘말려 빠져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건만.
물가의 돌에 접질린 친실장은, 빗물에 연거푸 미끄러졌다. 지켜보는 자들의 절규를 들으며 친실장은 강에 몸을 담갔다.

독라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친실장을 향해 비명을 지르던 자들의 옆에서.

[-마-!, 누가 살려주-]
[마마, 마마-! -위험한-]
[마, 마마는 괜찮은데스! 곧 나가는데스-!]
멀리서 띄엄띄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에 반쯤 하반신을 걸친 친실장은, 안간힘을 다해 갈대를 붙잡고 버텼다. 손 가죽이 찢어질 것 같았다.
목숨이 동아줄 위에 걸린 형편이었지만, 그 와중에 친은 한편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주는 자들의 목소리라니. 다들 투정만 부릴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철이 든 모양이었다.

[-애미, 당장- -발년-!]
[-이몸이 - 한데, 거기서 무슨 염병을-]
아닐지도 몰랐다. 미간을 찡그린 친실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노려보았다. 빗물 때문에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다음에야 친실장은 볼 수 있었다.
독라가 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일가를 지켜보던 독라는, 친실장이 물가로 물통을 들고가는 순간 풀숲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친이 물에 빠지는 순간 독라는 행동을 개시했다.
곧바로 잡아먹지는 않았다. 놈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면, 얻을 수 있는 건 입에 들어가는 한 두 마리 뿐이다. 대신 독라는 서둘러 자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부러지고 망가져 도망치지 못하게 된 자들이 땅을 나뒹굴었다.
[지이익-!]
[챠아아! 누구인테챠-!]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된 친실장은, 안간힘을 다해 갈대를 쥐어뜯으며 빠져나오려 했다.
새끼들을 한 마리 씩 입에 쑤셔 넣으며, 독라는 상대의 전력을 가늠했다.
몹시 건강해 보였다. 강에서 빠져나오느라 지친 다음이라도 싸움을 걸긴 껄끄러웠다. 독라는 재빨리 가장 통통한 자들을 봉투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친실장이 빠져나오기 전에 도망쳤다.

[데쟈악-! 쟈아아아-! 이 씨발년-!]
[잘못한테치-! 잘못한테챠-!]
등 뒤의 저주도, 봉투 속의 애원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의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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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한테치…]
이걸 성공이라고 쳐줘야 하나. 마마의 마마는 한참을 생각했다.
[제발, 제발 봐주시는테츄…]

농사실장 무리의 모든 일가는, 자를 낳음과 동시에 토마토 모종을 받았다. 자실장들이 자라서도 가족으로 남으려면, 그 토마토 화분에서 튼실한 꽃과 열매가 맺혀야 했다. 농사실장 무리의 규칙이었다.

마마의 마마는 일부러 몇몇 일가에 약한 모종을 주었다. 지극정성으로 돌보지 않으면, 혹여 심통을 부려 가지를 해치기라도 하면, 반드시 열매 맺지 못하고 말라 죽을 놈으로. 무리에 본보기를 보이려는 심산이었다. 가장 먼저 사건이 터진 일가의 자실장들을 빗속에 던진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잔인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어리석고 약했다. 가르침과 본보기 없이 날 때부터 성실한 자들은 손에 꼽았다.

그러나 죽든 말든 이익이라는 심산으로 보냈던 폭우 속에서, 이 일가의 자실장들은 교훈을 얻은 모양이었다. 자실장들은 제 손으로 해친 작물을 극진히 보살폈다. 부목을 대어 줄기를 살려보려 하고, 진딧물을 열심히 털어내고, 이도 저도 안된다 싶으면 껴안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 노력에 감동했는지 토마토 모종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나름 튼실하게 자라났다. 영 어설픈 모양이었지만 열매를 맺기까지 했다. 합격이라고 쳐주기엔 조금 애매했지만.

물론 자실장들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죽은 풀을 살릴 수는 없었다. 모종이 살아난 것은 식물의 재생력과 운이 겹쳐 생긴 요행일 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놈들이 힘을 합쳐 노력했다는 것이다. 또 다시 모종에 쓸데없는 짓을 했다면, 결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모종도, 놈들도.

마마의 마마는 자실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레짐작하고 오들거리던 자실장의 떨림이 그제서야 멎었다. 아직도 손에 흙이 묻은, 자매들 중 가장 열심인 아이였다.

[합격데스.]

자실장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 마리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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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실장은 한 마리 뿐이었다.
어제 포획한 자실장들을, 독라는 일부러 비 내리는 바깥에 방치했다. 봉투 속에 돌돌 말아 가둔 채로. 일부러 괴롭히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차게 식어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으니까.
아침의 공복을 달래기 위해, 독라는 봉투를 열고 바닥에 털었다. 그리고 조금 당황했다. 전부 얼어 죽었을 줄만 알았는데, 아직 꿈틀대는 녀석이 있었다.

봉투에서 기어나온 녀석은 눈이 멀었는지 초점이 흐릿했다. 무언가 연신 지껄였지만 혓바닥마저 얼었는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조금 뒤에야, 독라는 녀석이 자신을 마마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디가셨었느냐고, 몹시 추웠다고 중얼거리던 녀석은, 이내 따뜻한 독라의 다릿살에 파고들려 했다. 그러나 젖은 손엔 살을 붙잡을 힘이 모자랐다. 자실장의 애원은 독라의 가죽 위를 처절하게 미끄러졌다.
자실장의 몸부림은 곧 멎었다. 위석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허무한 살껍데기가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눈을 꿈벅거리던 독라는, 조금 뒤 자실장을 달래듯 천천히 안아올렸다. 마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그리고 머리부터 한 입 크게 씹었다.




집을 잃고 모습을 드러낸 동족들은 수없이 많았다. 빗발은 어제보다 거셌고, 독라의 사냥은 어제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데스우-! 데즈아아-!]
어제 강변에서 그랬듯, 독라는 친실장이 한눈파는 사이 자들을 노리려 했다. 그러나 이번 친실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금세 낌새를 눈치챈 친은, 데엑 소리지르고 위협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테프픗, 마마가 온테츄! 이제 너 큰일난테치-!]
[이거 놓는테치, 좆병신 독라 개간년. 어차피 용서치 않겠지만, 어디 엎드려 빌어보는-]

독라는 들고 있던 자실장을 한 입 물어버리고 강으로 던졌다. 상대방 성체가, 혹시 어제 물통을 쫓던 바보처럼 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하지만 소중한 자의 시체가 떠내려가도, 친실장은 강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부아에서 걸죽하게 욕을 뽑아내며 땅에서 돌을 주워들 뿐.
[데, 데, 데에엑-!]
[미친 똥벌레, 대가리를 부숴 빗물에 파묻어주는데샤-!]

독라는 침과 신음을 흘리며 도망쳤다. 그 돌덩이가 제 머리통을 박살내기 전에.

보통의 친실장이었으면 추격을 포기했을 것이다. 어지간히 싸움에 자신 있지 않고서야, 다치지 않고 끝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러나 독라는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울리는 둔중한 소리는, 어지간히 크고 강한 실장의 것이었다.

보폭이 훨씬 컸던 친실장은, 금세 독라를 따라잡았다. 대가리를 움켜쥐려는 손아귀에 독라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런 덩치가 싸움에는 유리할 지 몰라도, 비 속의 추격전에서는 아니었다.
손아귀가 대머리 위로 미끄러진 친실장은, 중심을 잃고 빗길에 죽 넘어졌다. 욱신거리는 연골을 부여잡고 친실장은 비명을 질렀다. 그런 상대방을 뒤로하고, 독라는 죽어라 내달렸다.
그리고 똑같이 넘어졌다. 몸이 좀 더 가벼워도, 실장석인 것은 둘 다 매한가지였다.
아스팔트에 코를 박고 현기증에 빠졌던 독라는,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기겁하며 일어서 도망쳤다.

무게중심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두 실장은, 제 연골을 있는대로 혹사하며 빗길을 내달렸다.
연거푸 코를 박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릎이 상한 뒤에야, 놈들은 비로소 걸음을 늦췄다. 추격전은 좀 더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급히 발디뎠다가 넘어지는 고통이 학습된 탓에, 두 실장은 발을 디딜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절뚝이들의 추격전은 한참을 이어졌다. 독라의 집이 있는 빈 농구장에서.
당장이라도 옆에 보이는 콘크리트관 은신처로 향하고 싶었지만, 독라는 눈물을 삼키며 꾹 참았다. 제 은신처가 상대에게 노출되면 정말 갈 곳이 없어진다. 달리 떠오르는 대책이 없었다. 달리고 또 달려서, 상대가 포기해 주길 바랄 밖에.

다행히도, 먼저 탈진한 것은 추격자였다. 독라의 등 뒤에서 둔중한 몸뚱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친실장 쪽이 불리한 추격전이었다. 몸이 큰 만큼 오래 달리기 힘들었고, 넘어지는 충격도 더 컸다. 옷도 문제였다. 독라가 입고 있던 비닐과 달리, 실장의 멀쩡한 옷은 물을 잔뜩 머금어 무거웠다.

독라는 혼절한 놈의 두개골을 돌로 부수었다. 그리곤 끌고가기 위해 옷을 벗겨내려다, 이내 포기했다. 젖은 옷소매가 자꾸만 들러붙어 쉽지 않았다. 추위가 자꾸만 살에 파고들자, 결국 녀석은 옷을 입힌 채로 끌고가기로 했다. 다행히 농구장 바닥은 마찰이 적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마침내 독라는 덩치를 집에 밀어 넣었다.
또 한번 무시무시한 하루가 끝났다.

지쳐버린 독라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콘크리트 지붕이 몹시 반가웠다. 머리 위에 빗물이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 행복을 다 가진 듯했다.

[드르렁-]
콘크리트 관 안쪽 깊은 곳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 까지는.
[퓨휴휴휴. 데픗. 데프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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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할 은신처마저 침범당했다. 스트레스가 노도처럼 밀려와 위석을 찔렀다.
고통과 피로를 애써 밀쳐내고, 풀려 있던 신경줄을 거세게 붙잡으며, 독라는 피 묻은 돌덩이를 최대한 높이 치켜들었다. 무언가 달려들면, 바로 대가리를 까부술 수 있도록.

슬슬 팔이 아파질 즈음이 되었지만, 상대는 미동이 없었다. 드르릉거리는 소음만 들려올 뿐. 독라는 입구에서 조금 비켜났다. 바깥의 빛이 관 안쪽을 비추도록.
은신처 깊은 곳에, 또다른 실장이 푸지게 드러누워 있었다. 태평히 코를 골면서. 자는 척이라고 생각하기엔, 코 끝에 맺힌 콧물 방울이 너무 생생했다.

화가 치민 독라는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케틀벨을 휘두르듯 돌을 내질렀다. 코뼈가 부러지는 화끈한 느낌과 함께, 상대는 잠에서 깨어났다.
[뎃, 여기는 와타시가 먼저 들어온데스우. 다른 집을 찾아보는-]
헛소리를 일삼던 침입자의 눈이, 만화처럼 제 코로 향했다. 피가 줄줄 새는 코를 발견한 침입자는, 두 손을 방어적으로 휘저으며 데아악 비명을 질렀다.

파들거리는 손아귀에 따귀를 맞은 독라는, 돌멩이를 휘둘러 놈의 턱에 꽂아 넣었다. 공평한 교환은 아니었다. 이빨이 깨져나간 실장은 엉엉 울며 주저앉았다.

한 번 더 돌을 쳐박으려던 독라는 이내 우뚝 멈추었다. 상대는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도,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실장은, 피를 닦아내며 독라에게 물었다.
[오, 오녀? 오녀인데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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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실장은 자매였다. 몇 번째 자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때 자신과 자매들이 텃밭에서 살 수 없다고 알려줬던 건, 분명히 눈앞의 이 자매였다.

[우선 순위라는게 있다는데스.]
어르신들의 말을 엿들었다던 자매는, 심통 난 투로 그렇게 말했다.

시험에서 통과했다고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농사 실장의 일생은 노동의 연속이었다. 어른들은 곧장 그들을 밭으로 보냈다. 자매들 모두 어른이 될 때까지 수없이 농토 위에서 굴렀다. 굽은 등, 다부진 몸, 모래색이 밴 굳은 살이 그 증거였다.

[우린 분명히 여기서 살 수 없는데스.]
[거짓말 마는데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자매들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농사실장으로 살 자격을 얻었다고 인정받았는데. 가을이 깊어진 오늘날까지 쉼없이 달려왔는데. 솎아진다니 그게 무슨 망발인가.


그러나 이어진 설명은 거짓말이라기엔 너무 자세했다.

농장에 필요한 실장의 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말인즉, 개체 수가 점점 늘어나면, 그 중 일부는 쫓겨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이번 해에 태어난 새 일꾼은 서른 마리쯤 되었다. 그리고 올해 늙어 죽은 어른은 일곱 마리 뿐이었다.

농장 주인은 실장의 인원 수를 적당히 쳐낼 생각인 듯했다. 심히 늙은 실장들, 농사에 질려버렸다고 툴툴대는 녀석들, 그리고 올해 선발에 합격한 녀석들 중, 평가가 가장 좋지 않았던 실장들까지.
듣기로는 그들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자실장일 적, 식물에 대고 본성을 드러낸 전적이 있는 그들 또한.

이제 자매들은 믿게 되었다. 연장자들이 그들을 솎아내려 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말도 없이. 어렸을 적 겪은 비바람의 무서움이 머리 속을 스쳤다.

충격에 휩싸인 자매들은 며칠간 침묵하고 있었다. 놈들이 정신을 차리고 살 길을 궁리하기도 전에, 이웃집의 자매들이 놈들을 밀치고 지나가려 했다. 놈들은 그 해 태어난 자실장 중,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던 녀석들이었다.
놈들은 아마 농기구를 옮기고 있었던 것 같다. 농땡이를 피우지 말라고 불평을 했던 것도 같다. 그 말이 그들을 분노케 했었는지, 혹은 불안하게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말 때문에 그리 급하게 저질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고발자 자매가 이웃집 실장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인원 제한에 관해 열심히 제 이론을 펼쳤다. 우수한 앞줄이 떨어져 나가면, 밀려났던 뒷줄이 선택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대단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어리둥절하던 이웃집 자매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돌을 치켜들었다.
그건 아마 자신이었던 것 같다.

돌쩌귀가 적들의 뼈를 파고들어 깨부쉈다. 이웃들은 끝까지 폭력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심한 말이었냐고 절규하다 절명했다. 자매들은 그런 단말마에도, 동족을 죽인 제 피투성이 몰골에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숫자를 세었다. 무섭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시체의 숫자를 세었다.
자매들은 다섯이었다. 시체는 여섯이었다.

자매들은 몹시 기뻐했다. 어쩌면 선택받은 자들의 요람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책보다 중요한 것은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돌이켜보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곧 녀석들은 노끈에 묶인 채 마마들 앞으로 끌려갔다.

살해는 순식간이었지만, 후안무치한 살해를 어설프게 숨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배신은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이다.

살해자로 지목된 자매는 넷이었다. 다섯이 아니라.
그 날,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자매 하나는 놈들의 곁을 떠나 도망쳤다. 엿들은 어른들의 말을 전해줬던 그 자매였다.
헐레벌떡 축사로 달려간 자매는, 연장자들에게 싸움이 일어났노라고 일러바쳤다. 멀리서도 언뜻 들렸던 비명이, 급히 옮기고 닦아내다 미처 숨기지 못한 흔적이 증거가 되어주었다.

정신없이 눈콧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그들에게, 마마의 마마는 냉엄하게 선고했다. 축사로 돌아가서 근신하라고. 따로 벌은 주지 않겠노라고.
한결 표정이 밝아진 그들에게, 다음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어차피 며칠 남지 않은데스. 태풍이 오고 있는데스.]

태풍이 분충들을 솎아낼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못에 박히게 들어온 말.
그들만의 처형법이었다. 누구도 동족의 피로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충분이 약하고 비참하니까. 서로의 피를 묻히는 아픔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 서로를 대자연의 손에 맡긴다. 살아갈 자격을 잃은 죄인들을, 놈들은 폭풍이 올 때까지 가둬두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바람 속으로 떠밀었다. 흔적조차 남지 않는, 잔인하고 깨끗한 바람 속으로.


[너희는 맨 우선 순위였던데스.]

목줄이 매인 네 마리 자매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자들을 배웅하던 어미의 목소리였다. 북받침을 참지 못하고, 어미는 쏟아내듯 소리를 질렀다.

[너흰 여기서 살 것이었다는 말인데스. 애초에 순번에서 밀려도, 다른 농장에서 풀씨를 돌볼 뿐인데스-!]
어미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도 거세졌다.
[열심히 일만 하면 누구도 솎아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은데스! 도대체 왜, 왜 그랬던데스!]

참지 못한 녀석들은 결국 서로를 얼싸안았다. 마마의 마마도, 내려다보던 주인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마침내 울기를 멈춘 그들이 서로를 놓고, 창 밖으로 걸어나가서, 된바람이 광야에 몰아칠 때에도 마마는 소리를 질렀다. 목과 몸뚱이를 묶은 끈에 숨통이 조여 경련하고, 마침내 자매들이 하나씩 하늘로 사라질 때까지도, 마마는 울며불며 무언가를 열심히 외쳤다.
시야가 부옇고 귓가는 웅웅거려, 제대로 들었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뭐라고 했더라. 꼭 데리러 가겠다고 했던가. 꿋꿋하게 버티라고 했던가. 농장에 자리가 나면 너희에게 알려주러 올 테니, 그때가 되면 같이 살자고 했던가.

어쩌면 단순히 그렇게 말했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 때의 대화가 상상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맹포한 바람의 아귀에서 병신 몸뚱이로나마 살아남고, 지옥이나 다름없는 매일을 꿋꿋하게 살면서, 놈은 그 기억에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마마가 돌아올거야. 나를 농장으로 다시 데려갈거야.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삶은 너무나 끔찍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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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는 며칠 전에 뒈진데스. 병, 에취, 신년.]

그 때의 밀고자가 말했다. 놈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었다.

[깐깐한 마마의 마마한테 잘 보이려는 간신배였던데스. 잔악한 인간의 손발 같은 앞잡이 새끼였던데스. 조금 쉬려고 하면 일러바치고, 그깟 밭 좀 안 나갔다고 찾아다니고. 자의 앞길을 못 막아 염병이었던데스. 킁, 컥, 엣취. 이거 더 없는데스?]

재채기 때문에 밀고자의 입에서 청포도 사탕이 빠져나왔다.
자신의 은신처에 있던 물건이지만, 독라가 그것을 꺼내 권한 적은 없었다. 독라는 애초에 그것이 녹색 사탕인줄도 모르고 있었다. 포장 속에선 냄새가 나지 않으니까. 그저 마마의 눈을 닮아서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것을 밀고자는 다시 입에 넣더니, 한껏 탐욕스럽게 빨아먹었다.

[자꾸 이걸 해라, 저걸 하지 말아라 지껄이던데스. 알곡 좀 주웠다고 훔쳐먹는다고 지랄을 했던데스. 안먹었던데스! 그냥 만져본 것인데스! 애초에, 와타시가 키웠는데 그게 와타시 거지 왜 닌겐 것인데스, 그런 심약한 바보들은 다 솎아버려야 하는데스. 그래야 실장들의 세상이 열리는데스.]

바보는 솎아야 한다. 실장이 제일이다. 놈이 어렸을 때부터 하던 말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장녀는 철학이 확고했다. 우리가 왜 일해야 하느냐. 왜 식물을 모셔야 햐느냐. 어렸을 적 토마토 줄기를 상하게 했을 때도 그랬다. 어른들은 병신인테치. 약해빠진 풀씨에게 절을 하는테치. 나를 따라와 저 잡것을 찢어버리는테치. 무서운테치? 병신들. 겁쟁이들.
그 땐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웃 자매들을 세상에서 없애버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만큼이나.  

기억났다. 눈 앞의 밀고자가 몇 번째 자매였는지.
[홧병이랍시고 앓아 눕는 걸 핑계로, 마마의 마마랑 결탁해 수근거리기까지 한데스. 결국 이 몸을 내쫓은데스. 이유야 분명한데스. 이 몸의 우수함을 질시한 것이 틀림없는-]
[장녀였던데스.]
[데?]
[장녀였던데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장녀는 질겁했다.
[…그런데스. 나 장녀인데스. 혹시 뭐 잘못된데스?]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독라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허공 한 구석을 쳐다보고 있을 뿐.

장녀는 심히 떨떠름하게 독라를 흘겨보았다. 아직 아무 음모도 꾸미지 않았는데, 설마 생각도 전에 들켰을 리는 없다. 장녀는 차분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말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목소리였다. 못 본 사이, 막내의 목소리는 쇠 긁는 소음처럼 변해 있었다. 그간 심히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몰골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모로 봐도 들짐승이나 마찬가지인 행색. 장녀는 비웃음을 삼켰다.
하긴, 그런 바람에 쓸려가고, 들에서 일 년을 보냈는데 몸과 정신이 멀쩡할리가. 원인을 제공한 건 물론 자신이었다. 그러나 장녀는 죄책감을 느끼기보단, 놈을 어떻게 이용할 지 생각했다.

장녀는 기만에 능했다.
어렸을 적, 제 자매들을 선동해 밉살맞은 토마토를 살해한 순간 녀석은 깨달았다. 어느 실장이든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모두 제 결정에 달렸노라고. 손 하나 까딱 않고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살면서 만난 누구도 자신의 거짓말을 간파할 만큼 똑똑하지 않았다. 비록 마마의 마마에게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면을 들켜서가 아니다. 그 병신 늙은이가 자신을 질투해 내쫓은 것뿐이다. 아무튼 그랬다. 그렇지 않고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 불운 속에서도, 장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제 말이면 누구든 죽이던 멍청이 자매 노예가, 더 아둔해진 채로 손 안에 굴러 떨어졌으니.

장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간단하게, 사탕을 하나 더 내놓으라고 명령할 참이었다.

돌덩이가 아갈창을 부수며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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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가 죽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이제 끝이었다. 소중히 간직해오던 약속은, 이제 진실이든 무엇이든 무의미해졌다.
매를 견디지 못한 장녀는 누명을 씌운 것을 고백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녀석이 내쫓긴 것은 순전히 장녀가 배식을 더 얻어먹고 싶어서였다. 다음 날부터 5인분이 아니라 1인분을 받을 것임을 장녀는 몰랐다.

엉망으로 멍든 머리를 감싸쥐려 애쓰며, 장녀는 사랑하는 가족이 아니냐고 지껄여댔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자매들 중 가장 중요한 장녀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자매인 장녀. 일은 왠지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러나 독라는 그것을 모두 들으면서, 동시에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독라의 정신은 생존 이상의 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다. 사랑, 상실, 음모, 무엇이든 전부 무기질적인 주석에 불과했다. 귀에 들어온 그 모든 개념을, 독라는 한 단어로 배설해냈다.

[고기.]

실장의 생존에는 깊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 운에 맡기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될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껏 살아남은 녀석의 몸뚱이가 그 보증이었다.
비는 끔찍했다. 이어지는 추위와 굶주림도. 혹독한 환경은 당장의 이성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를 견딜 적에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었다.
더 많은 열량이었다.

낡은 시멘트 관 속에서 비명이 울려나왔다. 언뜻 도움이라도 구하는 투였지만,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활기찬 빗소리가 그것을 잡아채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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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종일 이어질 것 같던 작업은, 또 다시 찾아온 폭우에 중단되어버렸다. 논밭의 배수로를 치우던 실장들은 황급히 축사로 대피했다.

창 안에서 보는 비는 장관이었다. 유리에 묻은 굵은 빗방울은 마치 추락하는 순간을 잠시나마 잡아 가둔 듯했다. 실장들은 굳어버린 허리를 펴며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조차도.

오늘은 맑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장마전선이 지났다는 예보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깨끗해진 하늘에 한번 더 고인 구름은 장맛비의 것이 아니었다.
흉포한 바람이 바다에서 내던진 것이었다. 며칠 뒤 찾아올 자신을 예고하기 위해.

바람이 창문을 거세게 때렸다. 빗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움츠러드는 자들을 감싸안으며 친실장들은 속삭였다. 위로가 아니라 경고를.
폭풍이 부는 날에 비하면, 이런 바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실장석의 몸뚱이가 확 떠올라, 저 높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그런 날에 비하면.
그런 바람이, 너흴 솎아낼지도 모르는데스.



올해는 다행히 아무도 솎아지지 않았다. 한 마리를 빼면.
한여름, 태풍이 불기로 예고된 날 쫓겨났던, 다 큰 분충.
빗 속으로 떨며 쫓겨난 그 분충은, 몇 시간 뒤 쨍쨍한 뙤약볕 속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마마의 마마는 맥 빠진 목소리로, 태풍이 흩어져 사라졌다고 말했다.
어쨌든 쫓겨난 분충은, 마마의 마마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떠났다. 세상을 자로 가득 채우고, 무기를 들려서 농사꾼들의 멱을 따러 온댔던가.

친실장들이 보기엔 어떤 면에선 다행이었다. 바람이 실장을 솎는 무서운 광경을, 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으니. 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악몽을 꾸게 만들 것 또한 뻔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왔다. 비바람 속으로 내쫓기자마자 지레 겁먹고 죽는 어린 실장들을. 태풍에 솎아질 날 만을 기다리며 떠는 다 큰 동료들을.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하염없이 용서해달라고 울부짖다가, 바람에 휙 떠올라 어디론가 사라지는 동족들이었다.

아무리 본보기라도, 그런 걸 보여주는 일은 껄끄러웠다. 이번 년도의 자들은 훌륭해, 아직 아무도 솎아지지 않았으니만큼.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다. 성실함은 평생동안 필요하지만 추락은 한 순간이었다.

[살아가는데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스.]
[테…]
[하루하루 살아갈 자격을 잃으면, 기다리는 것은 바람 뿐인데스. 우리를 싣고 사라질 바람.]

우비를 입은 농장주가 창문 밖을 서성이다, 바깥의 철판 문을 당겨 창문을 가렸다. 올해엔 창문이 깨질 위험을 무릅쓰고 보여줄 것이 없었다.

어둑해진 축사 속의 실장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먼저 바람에 실려간 자들이, 오래 괴로워하지 않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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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독라에겐 그럴 기운이 없었다. 폐는 이미 터져버린 듯 했고, 관절은 당장이라도 뼈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독라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닿기엔 장녀는 너무 멀었다.
장녀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고 있었다. 피를 얼리고 살을 찢는 매서운 비바람 속으로.

독라는 말리고 싶었다. 그 휘청이는 몸뚱이를 붙잡아 끌고 오고 싶었다.
가족애 때문은 아니었다.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잘, 못, 살려주는데스. 마마. 이 지옥에서 나를 잡아 꺼내는데스.]

쫓을 수만 있다면, 잡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무언가 중얼거리며 걷는 장녀의 걸음은 아무래도 온전하지 않았으니까. 장녀의 머리통에 대못이 꽂힌 탓이었다. 장녀 자신의 물건이었다.
어제 저녁, 돌에 쥐어맞아 반죽음을 당했던 장녀는, 엉엉 울며 그것을 제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팔다리가 으깨지고서야 몸을 지켜보려던 것인지, 귀중한 도구를 바칠테니 봐 달라는 것이었는지, 독라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독라에게 중요한 것은, 도망치는 고기를 쫓는 일이었다. 마무리가 어설펐던 탓에, 다음날 아침 살아서 도망치려는 고기.

[듣고 있지, 죄송, 않은데스? 버섯을 먹인, 반성, 것은 내 잘못인데스. 한번만 봐주시는데스. 잘못. 반성. 내 잘못 – 결코 - 씨발년-! 그러니 앓아누워서 잔소리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샤-! 이리 나오는데스! 아픈데스! 머리가 아프단 말인데스! 널 또 죽여버리는데스우-!]

그러나 독라는, 도저히 나가서 쫓을 수 없었다. 입구에 간신히 버티고 선 채, 애타게 손만 뻗을 뿐.
차마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맞바람은 거셌다. 마침내 한계에 달한 관절이 접혀 내려앉자, 독라는 목청이 터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비와 바람의 소리 외엔.


더 이상 장녀가 무어라고 외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눈알이 돌아가버린 장녀는 무언가를 윽박질러댔다. 어디를 보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온 세상에 대고 외치는 듯도 했다.

세상은 대답 대신 장녀를 들어올렸다. 공중에 잠시 떠오른 장녀는, 잠시 놀라워하다 이윽고 해맑게 웃었다.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침내 세상에게 떠받들린 장녀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장녀는 순식간에 빨려올라가듯 사라졌다.
독라의 눈이 분노로 크게 뜨였다. 그러나 곧 도로 감길 수밖에 없었다. 안구가 뽑혀나갈 것만 같았다.
독라는 절룩거리며 콘크리트 관 안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기압이 뒷걸음질 치는 놈의 등을 떠밀었다.

‘마마. 마마.’
독라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마저도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묵직한 질량감이 느껴졌다. 독라는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윽고 보이지 않는 주먹이 놈을 땅에서 퍼 올렸다. 천장에 눕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언제나 천장의 감촉이 궁금하던 차였다. 등과 두개골로 느껴본 결과, 독라는 결론지었다. 천장의 촉감은, 바닥보다 훨씬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조차 태풍 앞에선 안전하지 않았다. 은신처를 헤집어놓는 돌개바람 속에서 독라는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했다.

‘이런 세상이라면 왜 나를 낳으신데스.‘


---------

'마마, 장녀가 보고싶었던데스?'


태풍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생물은 없다. 허나 태풍 또한 모든 생을 뿌리 뽑을 힘이 없다. 된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서도 생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어쩌면 살아남은 것을 이겼다고 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애초에 체급부터 불공평한 싸움에서 살아남았으니.
그러나 진흙 속에서 고개를 든 그것은, 승리자의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바람은 녀석을 죽이지 못했다. 녀석의 숨통을 앗아가기 전에 지쳐 멎어버렸다.
그럼에도 녀석은 스스로의 강함에 찬사를 보낼 수 없었다.

온 몸이 아팠다. 몹시. 다져지고 반죽된 근육은 죽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도 모를 뼈대가 비명을 질렀다.

'왜 와타시는 보고싶어하지 않는데스?'

다행히도 고통으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신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허리 아래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두 손으로 말라가는 진창을 기어나온 실장은, 엎어진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내리던 비가 잦아들고 햇살이 즐거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듯이.
장녀를 잡아먹은 폭풍은 적잖이 만족한 모양이었다. 지상에 독라를 남겨둔 채로 등 돌려 사라지고 있었으니.

실낱 같이 남은 자아 한 켠에서, 실장은 비명을 질렀다. 가지 말라고.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나를 두고 떠나지 말라고.

목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더이상 모가지를 꺾어 들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독라는 진흙에 얼굴을 묻었다. 등 뒤로 싸늘한 빗물이 톡톡 떨어졌다.
오한이 일어났다. 독라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느끼는 이 싸늘한 한기가 빗방울이 체온을 앗아간 탓인지, 아니면 또다시 매일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마.]
그래. 또 살아남았다. 어째선지 또 다시 폭풍이 지나고도 명줄이 붙어있었다. 이걸 살아있는 것이라고 쳐줄 수 있다면.
독라는 과연 내일도 자신이 살아남아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글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보다 마마가 보고 싶었다. 혹시 마마가 데리러 와 주지 않을까. 날 이 지옥에서 꺼내어 집으로 데려가주지 않을까.
[마... 마...]

비는 끔찍했다. 이어지는 추위와 굶주림도. 그 이후에 찾아올 다른 고난들만큼이나.
세상에 아무 보호 없이 내던져진 삶. 생각할 마지막 힘까지 앗아가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녀석은 잘 알고 있었다. 길에 나앉은 이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으니.
그럼에도 스칠 수 밖에 없는 생각이 있었다. 과연 그것이 산다는 문제보다 더 끔찍한 것인지.
저 하늘 위로 떠나버린 장녀가, 과연 자신만큼 고통스러울지.

세 시간 뒤, 산 자는 일어났다.
그리곤 다리를 절며 진창을 떠났다. 죽어 사라진 것들을 부러워하며.






설(舌)날



겨울이 그나마 더 따뜻한 남부 지방에선, 음력 1월 1일은 실장들에게도 분주한 시기다.
이 시기에 버려지는 것들로 한 몫을 챙겨야, 남은 겨울을 수월히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 먼저 갈게! 어머님 들어가세요!”
“그려, 조심혀서 가~”
“살펴가세요, 아주버님!”

그 말을 듣자마자, 선 잠을 자던 실장은 눈을 부릅떴다.
암호를 들은 간첩이라도 되는 마냥, 실장은 신속히 바닥을 기며 굴에서 기어나왔다. 얼어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 주변에 숨어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닌겐의 하우스를 빙 돌아 밭 근처까지 숨어들어간 실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퇴비 더미 위에 던져놓은, 버려진 명절 음식들. 쉰 전, 살점이 남은 갈비찜, 먹다 남긴 약밥, 오색찬란한 떡과 과일.
집까지 끌고 가야 할 양동이는 묵직했지만, 귀가하는 친실장의 걸음은 그래서 가벼웠다. 몹시 뿌듯했다. 올 해의 기운과 조상들의 은혜가 자신을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구해온 음식을, 자들이 한 입 먹고 뱉을 때 까지만.

[설 음식 싫은테치이-!]
[단거! 단거 내놓는테치-!]
[…편식하면 못 쓰는데스우! 이게 무슨 짓인데스-!]

겨울의 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란 말인가. 친실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저저 싸가지없는 것 보는데스. 떽! 나 때는 그렇게 하면, 바로 발가벗겨지고 쫓겨난데스!]
운치굴 속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실장의 마마의 목소리였다.
친실장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역시 자를 키워본 입장이니 공감해주는 것일까, 누군가 편을 들어주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비록, 사투 끝에 팔다리를 으깨어 운치굴에 쳐넣은 웬수같은 사이일지언정.
[마마…!]

[똥마마의 똥마마는 닥치는테치! ]
[어디서 그런 말버릇을 배운데스! 내 운치굴 속에 있어도, 엄연히 느그 마마의 마마인-]
[챠아아아-! 마마! 자판기가 반항하는테챠-!]

[세상에, 저 버릇 좀 보는데스.]
[세상에 추자도 아니고 동자를 낳은데스. 미친데스, 미친데스…]
[쉿, 듣지 않는데스. 요즘 세상에 그게 뭐가 흠인데스]
[말버릇은 누구에게 배웠겠는데스. 참 호마마밑에 견자 없다더니-]

이번엔 이중창이 들려왔다. 친실장의 마마와 나란히 운치굴 속에 갇힌 친실장의 자매들이, 들을테면 들으라는 듯 씹어대는 소리였다. 어처구니 없는 심정을 억누르면서, 친실장은 자신을 변호했다.

[…자판기가 셋인데스. 다 먹일 자신이 있으니까-]
[요즘 세상에 누가 자를 셋이나 낳는데스.]
[둘이나 하나 낳아서 잘 키우는게 최고데스.]
[프니프니 마려운 레후-]
[레에엥, 레에엥-]

[동자를 낳아도 마마는 이해하는데스.]
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마마는 자식이 무슨 잘못을 해도 다 감싸줄 수 있는데스.]
[아니, 무슨 자판기들이…]

[오네챠, 이 공 나 가져도 되는레치?]
[씨팔년-! 대가리를 깨버리는테치-! 마마악-! 공씨테챠! 공씨이이-!]
친실장의 자매들이 낳은 자들이, 운치굴 속으로 굴러 떨어진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졸지에 마마보다 아끼던 보물을 빼앗긴 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화답하듯, 친실장의 자매들이 윽박질렀다.
[거 공 구하는게 얼마나 어렵다고! 애기 주는데스!]
[그런데스. 다 컸으면 공 같은거 가지고 노는 거 아닌데스.]
[그게 무슨 개지랄인테치! 그게 무슨 공씨인지 알긴 하냐는테챠-!]
[데뎃,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어디서 어른들한테 망발인데스!]
[다 컸다고 했다가 애새끼라고 했다가 순 지들 맘대로인테챠-!]

[프니후-! 프니후-!]
친실장은 분노의 한숨을 내쉬며 두 눈두덩을 문질렀다. 대체 왜 온 식구가 이 시기만 되면...
[…마마, 장녀, 차녀, 거 부탁 하나만 하는데스. 거 구더기 좀 조용히 시키는-]
[애가 시끄러울 수도 있지, 거 왜 그렇게 예민한데스.]
[이것은 장녀가 맞는데스. 구더기 때 기 꺾어가며 키우면, 크게 되지 못하는 법인데스.]
[레후우! 레훼엥-! 배씨 꼬록꼬록 답답레후-!]
[우지챠 옷 안에 지린레후. 치워주는레후-]

친실장은 한번 더 천불같은 숨을 내뱉었다. 땅이 꺼지겠다는 마마의 잔소리는 한 귀로 흘리면서. 그러나,

[저어, 삼녀, 집은 구한데스?]
운치굴 속 자매의 목소리에 친실장은 눈을 껌벅였다.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여기가 집이라고 한다면, 차녀는 이죽댈 것이다. 이런 과일박스 구석을 아직도 집이라고 부르느냐고. 장녀는 조용히 시키는 척 하며 부추길 것이다. 마침내 마마가 조심스러운 투로, 모름지기 닌겐 집에 살아야 실장 사는 삶이라며 자매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급격히 피가 몰린 관자의 핏줄이 폭발했다. 친실장의 이성이 끊어졌다.
[… 이 시팔, 죄다 내 운치굴에 쳐박혀 살면서 그건 또 무슨-]

[저저저저 말버릇좀 보는데스. 다들 명절이라고 좀 들렀더니-]
정확히는, 머리통에 짱돌이 박힌 덕에, 명절 즈음에 잠깐 이성이 돌아오는 것 뿐이었지만.
[-실생 선배들에게 못하는 말이 없는데스.]
[마마가 말해도 그따위로 들을 것인데스? 위해주는 말인데 왜 그러는데스!]
[삵이 물어갈 년인데스. 마마는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데스. 이리와서 앉아보는데스.]

참을 길이 없었다. 살쾡이에게 들키든, 닌겐에게 들키든, 이젠 친실장이 알 바 아니었다.
친실장은 머리가죽을 쥐어 뜯으며 짜증을 토해냈다.

[데쟈아아아아-!]





“어, 씨, 깜짝이야. 뭐야?”
“저거 참피야.”
“와, 시골엔 아직도 실장이 살아요?”

고럼, 살지. 하며, 화장실에 가던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자, 큰아버지는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어렸을 때 봐서 아는데, 저러면 십중 팔구는 저들끼리 싸우는 소리인게야.”
아이들 몇이 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큰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멈칫했다.
“그런 생물이라서 크게 되지를 못하는게야. 설날 같이 기운이 좋은 때에, 도둑질만 하고 말이야, 이런 험난한 계절에 가족끼리 화목하지를 못하고 말이야.”

어쩌면 여느 생물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간섭하고 싶어하는 일과, 간섭을 괴로워하는 일 모두.
몇몇 단어에서부터 익숙한 위험을 감지한 아이들과 청년들은, 저마다의 변명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큰아버지의 더없이 온화한 눈길을 알아채자마자, 그들은 살쾡이와 마주친 쥐마냥 굳어버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지옥의 문처럼 열렸다.

“참, 이리 와서 앉아봐라. 성주부터. 대학은 어떻게-”





삼두육비 (상,하)



들끓는 실장석으로 몸살을 앓는 도시가 있었다. 
시 당국은 제대로 된 구제에도, 관광 상품화에도 실패했다. 시장은 물러났지만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실장은 결국 불편한 이웃으로 시민들의 일상 속에 녹아들었다. 도시 곳곳에서 전에 없었던 짜증과 울화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누군가의 불행은, 누군가에겐 기회라고 했던가.




“...자, 봐라! 이러면 나뭇가지들은 부러지지 않는다.
알겠느냐? 이 나뭇가지들처럼, 나약한 너희도 한데 뭉치면 더욱 - ”

[운치같은 헛소리 집어 치우고 무술이나 알려주는데샤!]
[머리씨는 잡지 마는데스 - !]
[와타시가! 와타시가 배울 것인데스!]
[독라는 꺼지는데스! 비급은 세레브한 와타시의 것인데스!]

마당 한복판에 네 마리 실장이 뒤엉켜 있었다. 놈들은 서로를 토닥이고 깨물며 다투고 있다. 
정녕 저 작달막한 대가리 속에 나눔의 미덕이라곤 없는 것일까.
하긴, 같이 배울 생각이 있을 리 없다. 돌아가서 보스 노릇을 독점하고 싶을 테니.
도복을 입은 무도가는 고개를 저었다. 지켜보고 있기 힘들었다. 
신성한 배움의 시간이거늘, 탐욕에 눈이 먼 꼴이라니.

“ 갈 ! ”
귓구멍에 꽂히는 벼락에 실장들은 나동그라졌다.
[데교옥! 귀씨가! 귀씨가!]
[아픈데스! 무서운데스! 이것이 내공이라는 것인데스?]

확성기를 재빨리 등 뒤로 숨기며, 무도가는 무협영화 풍으로 놈들을 꾸짖었다.
“떽! 네 이놈들!”
[뎃…]
“사사로이 싸우고 헐뜯는 분충은 권법을 배울 수 없어요!”

[죄… 죄송한데스! 스승사마!]
[저 분충이 먼저 시작한데스. 고귀한 와타시는 잘못하지 않은데스.]
[독라는 닥치는데스!
“어허! 이놈들이 그래도!”

구둣주걱이 번개처럼 날았다. 선사의 죽비에 얻어맞은 악동들처럼, 실장들은 움푹 내려앉는 정수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데갸앗스!]
[데에엑! 또 맞은데스! 머리씨 뭉개지는데스!]

그중 한 놈은 벌떡 일어나려다, 제 운치를 밟고 미끄러졌다. 속옷이 터져 온몸에 변이 묻은 놈은 울상을 지었다. 똥범벅이 된 녀석을 나머지 세 놈이 열정적으로 비웃었다.
인내심의 한계가 온 운치범벅이 고함을 빽 질렀다.
[무술은 개뿔인데스! 순 약쟁이인데샤!
때려치는데스! 키워줄 닌겐이나 찾으러 갈 것인데스!]

“사문을 모욕하는 분충은.”
괜히 집기를 걷어차며 문으로 향하려던 놈은, 등 뒤에서 들린 나지막한 목소리에 우뚝 멈췄다.
“용서하지 않아요!”
불길한 예감에 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기어검 - !”

동그래진 눈깔 사이에 구둣주걱이 박혔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목이 기역자로 꺾였다.
청명한 파킨 소리와 함께 놈은 무릎을 꿇었다.

[어느 틈에데스…!]
[데… 단 일격이었던데스…!]

경악한 실장들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무도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무도가 또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런… 큰일이 났군.”
[데?]
“불행히도 하나가 죽어버렸어. 본래 너희에게 전수하려던 무술은 사천왕의 합공이었다.
반드시 넷이어야만 배울 수 있는데… 안타깝구나, 너희에게 무공을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실장들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오직 떠도는 풍문만을 믿고 이 먼 길을 온 실장들이었다. 무시무시한 차도, 삼엄한 닌겐들의 경계. 
공원에서 출발할 땐 수십 마리였던 무술가 후보 실장들은, 이제 셋 밖에 남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무공을 배울 수 없다니.

[거짓말데스. 셋으로 충분한데스. 어떻게든 가르치는데스.]
“아니, 반드시 넷이어야 한다. 셋 뿐이면 배우는 도중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아.”
[…방법은 없는데스?]
“방법은 있다. 돌아가서 동료를 하나 더 구해오너라.”
실장들은 천천히 지나온 길의 악몽같은 기억을 되새겼다.
정적 속에 위석에 실금이 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침내 한 놈이 눈을 까뒤집고 강을 건너려던 순간,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셋이어도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있다.”
뒤집혔던 동공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급히 이승으로 되돌아오며 들실장은 피를 토했다.
[그런 건 쳐 빨리 말하는데샤 - !]





[이게 무엇인데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삼두육비의 술법이다. 너희는 이제 세 배로 강해졌다.”

[…]
[…지랄마는데스! 등이 붙은 것 뿐인데스!]
“뭐지? 사부에게 반항하는 것인가?”
[아…아닌데스! 반항하지 않은데스! 오마에, 입닥치는데샤!]
[오마에나 닥치는데스! 사실을 말한 것 뿐인데스!]
[미친 분충년 데스우. 와타시타치까지 닌겐에게 죽게 만들 셈인데스?]

1분도 되지 않아 놈들은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를 그토록 혐오하는 놈들이 몸까지 맞댔으니.
그러나 등이 붙어버린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저 체조하듯 서로의 옆구리를 때리거나, 서로의 다리만 걷어찰 수 있을 따름이었다. 애매한 타격전이 끝나자 셋 모두 제풀에 지쳤다.

[히… 힘든데스…]
[더운데스. 답답한데스. 제발 풀어주는데스...]

“너희 소원대로 강해졌는데, 되돌려 놓으라고?
아직 잘 모르나본데, 너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느끼게 해주마.
내게 감사하게 될 것이야.”

무도가는 놈들을 공원에 내려놓았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놈들은 곧바로 고꾸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의 등이 붙어있는 한, 셋 중 어느 누구도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차라리 둘이었다면, 좀 더 힘센 쪽이 억지로 끌고 다닐 수라도 있었을텐데,

“솥발의 형세로다.”
[개짓거리 그만두고 좀 풀어주는데샤 - !]
[징그러운데스! 혐오스러운데스! 독라의 살이 움직이는게 옷 위로 느껴지는데스 - !]
[…풀려나면 오마에 눈알을 후벼버릴것인데스! 감히 - ]

[우마우마한 냄새 데스우.]

섬뜩한 소리가 놈들의 입을 막았다. 
별안간 나타난 동족식 독라가, 피냄새를 풍기며 세 실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마리의 빵콘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무도가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뎃샤아앗 - !]
큼직한 동족식 독라실장이 침을 튀기며 육박했다. 

떠돌이 독라, 옷만 남은 반독라, 그리고 원사육실장.
몸상태도, 배경도 달랐지만, 이젠 뗄레야 뗄 수도 없는 사이다.
비록 원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대의식이 생기지는 않았다.
한 줌 의리조차 없는 세 들실장은, 비명을 지르며 제 몸만 도망치려 했다.

물론 접착된 등이 저절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서로의 몸뚱이에 붙잡힌 바보들은 결국 흉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동족식 실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놈은 세 마리 중 독라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포동하게 드러난 살이 식욕을 자극한 탓이었다.

하지만 독라도 녹록하진 않았다. 인간의 집에 이를 때까지 살아남은 다른 두 마리와 마찬가지로, 독라 또한 경험 많은 들실장이었다. 독라는 손을 필사적으로 휘적거렸다.
[순순히 당해주지 않는데스 - !]

파리를 쫓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나름 효과적인 타격이었다.
들개마냥 면상부터 들이밀었던 동족식 개체는, 연거푸 따귀를 얻어맞고 빽 비명을 질렀다. 눈을 얻어맞고 혓바닥을 씹은 동족식 개체는, 이윽고 질질 짜면서 똑같이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흡사 중풍걸린 고양이들의 싸움 같았다. 먼저 힘이 빠진 것은 독라 쪽이었다. 전날의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등이 묶인 엉거주춤한 자세는 체력 싸움에 불리했다. 금세 독라의 얼굴은 따귀로 엉망이 되었다.
[데지잇 - ]

“어허, 어찌 잡배 따위에게 얻어맞고만 있느냐!”
등을 맞댄 동지가 맞아죽건 말건, 그저 겁에 질려 발버둥치던 나머지 두 실장은, 무도가의 목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스! 닌겐이 있는데스! 똥스승! 이 핀치에서 와타시를 구하는뎃샤!]
[분명 집에 들어갔던데스-! 사육실장데스-! 모른 척은 똥닝겐이나 하는 직무유기데스!]

“떽! 이 못난 놈들!”
[…데?]
“어찌 삼두육비의 묘리를 배우고도 쓰질 못하느냐! 정녕 내가 너희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대체 무엇을 가르친 – 뭐하는데스?]

그새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독라는, 마지막 동아줄처럼 무언가를 꼭 틀어쥐고 있었다. 
그것은 동족식 실장의 몇 올 안 남은 앞머리였다. 조금 전까지 상대를 비웃던 동족식 실장은, 이제 눈물만 질질 흘리며 얼어 있었다. 

동족식 실장의 손이 애타게 독라의 머리통을 흝었다. 마주 붙잡을 것을 애타게 찾는 모양이었지만, 허사였다. 마지막 몇 올에 얽매여 살던 동족식 실장과는 달리, 독라에겐 포기할 수 없는 한 두 가닥조차 없었다. 혼절하기 직전인 독라의 면상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스쳤다.

[놓는… 놓는데스. 일단 놓고 천천히 대화해보는데스 - ]
[데…지이… 지프픗…]
[데, 데, 데쟈아 - ! 한 가닥이라도 뽑히면, 반드시 죽이 - ]


뿌부북.


화사한 느낌이 동족식 실장의 이마를 스쳤다. 묵은 때가 씻겨나가는 듯 상쾌했다.
[데]

무도가는 붙어있는 실장들을 집어올렸다. 독라도, 손아귀에 잡힌 머리카락도 함께 떠올랐다 내려왔다. 동족식 실장의 몇 안 남은 모근은 그 힘을 버티지 못했다.

무도가는 세 마리 실장을 살짝 돌려 내려놓았다. 독라 대신, 그 옆의 반독라가 동족식 실장을 마주보도록. 덕분에 영문도 모른 채, 반독라는 면상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동족식 개체를 대면해야 했다.

동족식 실장은 눈을 까뒤집고 고함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반독라도 마주 비명을 질렀다.

[데쟈아아앗 - !]
[데갸아아아 - !]




절규의 이중창 속에, 냄새나는 침세례를 뒤집어쓰며, 반독라도 독라처럼 필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또다시 격렬한 난타전이 벌어졌다.
반독라 또한 금세 지쳐 헥헥대기 시작했지만, 연이은 싸움에 지치기는 동족식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무도가는, 반독라가 까무러치기 전에 세 마리를 한번 더 돌렸다.

마지막의 원사육실장은 덕분에 지쳐버린 동족식 실장을 상대할 수 있었다.
[데! 데! 데지이잇 - !]
[구더기 밥인데스. 어떻게 이딴 병신에게 얻어맞은데스?]
원사육실장은 의기양양하게 놈을 구타했다. 어디서 본 건지, 여유있게 동료들의 어께를 짚고 드랍킥을 시도하기도 했다.

[뎃 – 아픈데스 – 뎃… 지이잇! 고기가 건방진데스웃 - !]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상황의 무서움에 찔끔 눈물이 나왔지만, 동족식 실장은 아직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와타시는 세레브고! 오마에들은 스테이끼인 데샤앗 - !]


놈은 별안간 기합을 내지르며 원사육실장을 들어올렸다. 데뎃거리며 당황하는 찰나, 세 마리 실장은 속절없이 뒤집어졌다. 혼절 직전인 두 실장이 아래에 깔렸다. 뒤집힌 거북이 꼴이 된 원사육실장은, 사지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데? 하늘씨가 보이는데스? 어디로 사라진데스!
도망친데스? 그러나 올바른 선택인데스. 뒈지기 싫으면 썩 꺼지는데스!]

헥헥거리며 동족식 실장은 세 마리에게 다가갔다.
괘씸한 놈들. 하지만 이제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갑자기 나타난 듯한 닌겐에 동족식 실장은 놀랐다. 싸우느라 바빴던 놈은, 지금껏 무도가의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무도가는 담담히 손을 뻗었다. 쓰다듬으려는 듯 천천히.
동족식 실장은 저도 모르게 반달 눈으로 데프픗 웃었다.
착각이었다.

폭 –

[데?]

어렴풋한 감각이 느껴졌다.
인간은 오므린 손끝을 놈의 앞에 내밀었다가 펼쳤다.
그 안엔, 터럭 한 올이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동족식 개체의 머리 위로, 다시 손이 얹혔다.
인간의 엄지가 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 아무런 저항이 없는.
동족식 개체는 천천히 깨달았다.
방금 인간이 보여준 그것은, 마지막 한 올이었다.

위석이 고동쳤다.

천천히, 떨리는 눈으로, 동족식 개체는 인간의 얼굴을 보았다.
그 따뜻한 쓰다듬음에 어렴풋이 희망을 걸어보며.

[독라인 편이… 좋은데스?]

마치 아이를 달래듯, 무도가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

[데?]

“병신 빡빡이새끼...”






                       파킨



무도가는 세마리 실장을 다시 정자세로 돌려놓았다.
놈들이 정신을 차리고 놈의 시체를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십분 뒤의 일이었다.

놈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서로 껴안을 수만 있다면 껴안을 태세였다.

[닌겐의 집에 다녀가면 강해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던데스?]
[무섭기로 유명한 놈을 해치운데스. 와타시는 보스가 되는데스!]
[무슨소리데스. 와타시가 잡은데스! 오마에 대머리들은 저런 똥구더기한테 털린데스?]

“보았느냐?”
나지막했지만 위엄있는 목소리.
세 실장은 저도 모르게 무도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삼두육비의 힘이다. 이제 너희 등을 붙인 이유를 알겠느냐?
…서로의 뒤를 지켜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데에…]
[뭔 개똥철학 데스…]

“아직 모르겠느냐?
혼자가 아니라, 함께 싸웠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
본래대로면, 옷도, 머리도, 태생도 다른 너희들 사이에,
우정이나 협동심 따위가 피어날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힘을 합쳐보니 어떻더냐?
감히 이기지 못할 것만 같던 상대도 꺾지 않았느냐?”

[데… 그런데스. 분명 무섭기로 악명 높은 분충이었던데스…]
[와타시들이 승리했지만, 확실히 큰 놈이었던데스...]
[그깟거 한방데스. 쌉소리데스.]

“나는 안타까웠다. 너희 들실장들은, 힘을 합칠 줄은 모르고,
서로 헐뜯고 싸워대기만 하지 않았느냐.

서로 도울 줄 아는 너희는, 이제 이 공원 최강의 실장들이다.
자, 보아라. 서로 도우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세 마리 실장은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서 들실장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울고, 웃고, 환호하면서.

[정말… 죽은데스? 무서운 분충이, 죽은데스?]
[그 녀석은 걸핏하면 세간살이와 자를 뺏어가는 못된 놈이었던데스우!]
[대신 복수해줘서 고마운데스! 자들의 원수였던 데슷 - !]
[뎃데로게~ 공원 수호자 탄생데스우 - !]

성체들 사이에서 자실장 하나가 걸어나왔다.
용감히 세 실장 앞에 선 자실장은, 한송이 꽃을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병신 마마는 필요없는테치. 세레브한 삼두 마마가 좋은테치.
와타시의… 마마가 되어주는테치?]

일순간 정적이 일더니, 이윽고 주변에서 환호성과 휘파람이 터져나왔다.
[오이오이! 잘 어울리는데스!]
[오마에! 그런 양자가 있다니 제법인데스! 제법 귀엽고 말인데스!]
[데프픗, 우리 자가 농담도 잘하는데스! 집으로 돌아오면 슬픈 일이나 각오하는데스!]

주위의 등쌀에 떠밀린 원사육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자실장을 집어 번쩍 들어올렸다.
환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무도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좆같… 훈훈하구나.”


[…고마운데스.]
[처음 등이 붙었을땐 막막했던데스… 하지만,]
[결국 깊은 뜻이 있었던데스.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는데스...]

“그래, 그거면 됐다. 제자들아.”
무도가는 뒤로 돌며 말했다.
“삼두육비로, 강하게 살아가렴.”

[오로롱… 스승사마…]

무도가는 사라졌다. 석양 속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세 마리 실장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무도가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테프픗. 메로메로 성공테츄웃!
마마들, 마마들. 귀여운 와타시는,
그래도 독라 마마 품보단 그 옆의 마마들이 더 조은 - ]
[똥닌겐 간데스?]
[똥닌겐 간데스.]
[똥마마들은 아타치에 집중하지 않고 뭐라 지껄이는 - ]

무도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독라는, 자실장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철퍽.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자실장은 얼룩이 되었다.

[차녀어어어 - !]
[데? 데?]
[무, 무슨짓인데스, 오마에!]

[똥닝겐 말 들은데스? 함께하면 센 데스.]
[뎃스. 분명 와타시타치가 가장 강하다고 한데스.]
[와타시도 들은데스. 말인즉,]

놈들은 발을 맞춰 한바퀴 돌았다.
일사불란한 방향전환. 흡사 거미의 동작 같았다.
불길한 예감에 몇몇 놈들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와타시타치를 막을 분충은 아무도 없는데샤앗 - !]

세 마리 실장은 다족류마냥 다리를 놀리며 들실장 무리로 달려들었다.
일견 징그럽기까지 한 세마리 실장의 돌진에. 들실장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데쟈아아 - !]





그리고 얼마 뒤.
“…생지옥이구나.”
무도가는 공원에 다시 찾아왔다. 세기말의 풍경이 이런 모습일까.
사방에 연기가 피어올랐고, 혼란과 아우성이 가득했다.
연기는 창궐하는 학대파 때문이고, 혼란은 원래 그랬던 것 같지만…

불과 헤어진지 며칠. 그동안 놈들은 공원의 악몽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생리적 공포감에 압도당한 들실장들은, 지레 겁먹고 놈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다.
들실장들에게 있어서, 세 실장은 이전에 죽은 약탈자와 한 점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스. 공원 망한데스. 뭐 어쩔것인데스?]
[데프픗, 어리석은 닌겐데스. 애초에 이것을 위해 무공을 배우려 한 것인데스...]
[혹시, 꼬우신데스? 꼬우면… 아시는데스?]

길 한가운데 당당히 퍼질러 앉은 세마리 분충들은, 방약무인한 태도로 무도가를 맞이했다.
삥 뜯은 구더기를 간식처럼 씹고, 기분 내키는대로 운치를 뿜어대며.
배출하면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묻으니, 서로 성질을 내야 마땅했다.
그러나 놈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일 뿐이었다.
별 수 없으니 체념한 걸까. 아니면, 이젠 서로를 한 몸처럼 여겨 용서하게 된 것일까.

하기사, 생활이 만족스럽다면 조금 더러워도 입을 다물 만도 했다.
서로가 있는 덕분에, 공원 한 구역의 모든 부를 독점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무도가는 중얼거렸다. 
“내 실수를 바로잡아야겠다.”

[데프픗, 정의의 사도 놀이라니, 건방진데스.]
[며칠간 와타시들의 협공에 파킨한 분충이 몇인지 아는데스?]
[이미 우리 셋은 한몸인데스. 똥닝겐 혼자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강해진데슷 -!] 
[데프픗, 머리를 죄다 뽑고 도게자하면 지금이라도 용서해주는 - ]

놈들은 침을 튀기며 팔다리를 휘둘렀다. 무도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렸다.”

[데?]

“우선, 나는 벌을 주려고 온 게 아니야.”

한순간, 무도가의 그림자가 셋으로 늘어난 듯 보였다.
그림자들은 무도가의 옆으로 도열했다가, 별안간 다시 무도가의 등 뒤로 숨었다.

“그리고 혼자 온 것도 아니다.
삼두육비는 일자전승의 무공이다.
가르치는 쪽, 배우는 쪽. 반드시 둘 중 한 쪽은 죽어야 하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놈들은 당황했다.
문득 도망쳐야 한다는 예감에, 독라는 슬금슬금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 놈이 굳은 탓에, 그저 허공에 다리를 저을 뿐이었다…





“너희들이 함부로 무공을 휘두르고 다닌 이상,
정파 무인인 내겐 결투를 멈출 명분이 없다…!”

[그게 무슨 - ]

인영 셋이 동시에 기마자세를 잡았다. 서로 등을 맞댄 채로.
후일, 놈들은 회상했다.

“준비됐나?” “준비됐나?” “준비됐나?”

닌겐이 자세를 잡기 전에, 도망쳤어야 했다고…

[데갸 - ]



[일두차! 일어나는데스! 일어나는데샷! 
오마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와타시도 움직일 수가 없는데스 - !]
[하무… 라…]

[이두챠! 무엇을 하고 있는데스! 와타시타치는 최강의 삼두육비인데스!
제발! 제발 대답이라도 해보는데샤!
[훼벳훼벳. 헤베베베베 -]

[자아, 보는데스. 무척이나 세레브한 트리플 자판기인데스!]
[마마 말대로 붙어있는 테치! 한 몸 테치?]
[테에! 구더기가 세배로 나오는 노예인테치!]
[장녀는 역시 똑똑한데스. 이 노예는, 얼마 전 하늘씨가 바친 공물인데스.
덕분에 자들에게 매일매일 맛있는 구더기를 먹일 수 있는데스♡]
[테츙♡]
[마마, 사랑하는 테치이!]


[최강인 와타시가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데샤 - !]




[실장TV : 세대가리 실장 완결편 - 3:3 와사털기! 결과는?]

허공으로 치솟으며 오열하는, 덩어리같은 세 실장석.
그리고 족구 자세를 잡은 세 남자의 이미지.
베스트 댓글 : '이 썸넬 보고 어떻게 안들어와 미친놈들아'.
모 동영상 사이트에서 좋아요 2만회, 조회수 100만회 달성. 

성원 감사영상 촬영을 마무리하며, 무도가는 그림판으로 그린 놈들의 영정 앞에 큰 절을 올렸다.
세 줄기 향불 앞엔 제사음식 대신, 
한 접시에 치킨 목 셋, 닭날개 여섯이 놓여 있었다.

화환에는 그의 컨텐츠를 시청하는 사람들에겐 낯익을 문구가 쓰여있다.

니새끼들이 이웃을 / 조금만 더 사랑했더라면, 이라고.







그 용도를 이해하기에 슬픈 지성에 관하여



녀석은 눈에 띄게 영민했다. 
그리고 녀석은 문지르기가 필요없다고 했다. 그 말 때문에 나는 담배를 물었다.

저실장에게 있어서 배를 문지르는 것은 단순한 교감이 아니다. 
휴식과 운동, 소화와 배설, 성욕과 건강, 1차적 욕구와 궁극적 자기확인. 
그 밖에 몇 달 남짓한 생애에 있어서의 모든 목표들. 그 모든 것이 함축된 행위.
그것들에게 문지름은 욕망이며 곧 삶과 같다. 

제 어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그 대가로 평생 프니프니를 받지 않겠노라고 말하기로 결심하기까지,
그 작달막한 머리로 얼마나 많이 번민해야 했을까.

그리고 어미에게 짧지만 한 많은 평생동안 가축으로 길러진 것이, 
그 원망을 어미에 대한 사랑으로 안아 덮기로 마음먹을 때까지.
 그 작디 작은 생에 있어 얼마나 큰 각오가 필요했을까.

그 깊은 고민과 모진 결심이 기특했다. 
그리고 애처로웠다. 안쓰러운 것. 
녀석은 이해하고 있을까.
낳아준 어미의 가축인 세상, 분변을 먹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 고되고 굳센 포기와 외침이 아무 짝에 소용이 없는 소음에 불과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비단 구더기에게만 어울리는 번민은 아니다.
나는 세상이라는 광장에 내던져진 생의 한계에 관해 생각했다. 마침내 두 개비가 다 탈때까지.

근래 들어 처음 씁쓸했던 담배를 털었다.
재가 처연히 바스러지며 재떨이에 젖어든다.
동류 구더기들처럼 어리석지 못해 더 애잔한,
우지(愚智)가 아니어서 더 슬픈 우지의 가여운 삶처럼.

“레삐아아악! 우지챠는 재떨이가 아닌…”





장생 2 - 받아들일 줄 모르기에 슬픈 지성에 관하여

 

장생은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주인이었다.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주인을 위해 번식 또한 포기했다. 그 대가로 실장석이 살아서 바랄 수 없는 안온한 삶을 받았다.
그러나 장생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행복의 끝이 찾아 올 것임을.
썩 좋은 삶이었다. 칼날이 배를 파고들기 전에 장생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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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럽게 자신이 학대파라 말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화가 났다. 본인의 사명을 깨달은 마흔 살 이후로 오늘만큼 허망한 날이 없었다.
그 편안히 잠든 얼굴, 약 올리는 듯한 얼굴…

놈의 배를 깠었다. 선연히 빛나는 그것을 집으려는 순간, 위석이 부스러졌다.
손이 닿지 않을 지평선처럼.
뭘 해볼 틈도 없었건만 똥벌레놈은 허락도 없이 절명했다. 합의 없이 슈킹하고 도망간 윤락녀처럼.

그 시체에 분풀이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남자는, 악을 쓰며 책상을 걷어찼다. 정강이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악악대며 신음하던 남자는, 이내 일어나 자기 몸을 해치는 대신 선풍기를 집어 던졌다. 노란 땀을 질질 흘리며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 더위 속에 선풍기를 박살냈다는 것을 깨닫자, 천천히 진정이 되었다. 그제서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선생님, 안에 계십니까. 00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남자는 이를 갈았다. 잡것들이 왜 제집인 양 문을 두드려 대는지,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금수들의 하인을 자처하는 저급 인간들!

남자는 으르렁거렸다. 
물론, 혹여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고 작은 소리로.

[그놈의 실장 삼권…]



장생은 처음엔 재떨이였다. 주제를 배웠다.
좀 더 자라서는 밥벌레였다. 예의와 검약, 대가 없는 친절의 가치를 배웠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청소부였다. 노동과 청결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배웠다.
그 후엔 아파트 텃밭을 지키는 경비였다. 그 때서야 알 수 있었다.
세상엔 자살하는 종(種)도 존재할 수 있음을, 실장석은 이미 도태되었음을.
장생은 종적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실패가 뻔한 생물에게도 기회를 준 주인의 은혜에 감사했다.


경찰이 604호의 문을 두드린 것은 실장석의 권리 때문이 아니었다.
음침한 이웃의 집에서 들려온 비명에 겁에 질린 주민들의 신고 때문이었다.
한참을 두드려도 답이 없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이 경위는 조금 열린 문을 확 젖히려 했지만 실패했다. 손 끝에 느껴진 저항감의 정체는 현관문에 걸린 구식 걸쇠였다. 이경위의 눈가가 꿈틀했다. 도어락을 쓰지 않는 집이라.
문틈 너머엔 희번덕한 눈만 내민 남자가 있었다. 독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술, 양파, 어쩌면 분변의 내음. 수상하기로는 짝이 없었다.
이 경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계셨네요. 열라고 말씀 드렸는데 안 여세요?]

[내 아무것도 모르오. 아무것도 없소.]

[왜 안 열어요. 안에 뭐있어요?]
[아무것도 없다뇨. 이웃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는데. 이 문 여시라구요.]

경찰서 막내가 을러대는 사이, 이 경장은 무력시위처럼 문 틈을 거세게 열어젖히는 시늉을 했다.
집주인이 다급히 문고리를 쥐었다. 집 안에 있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 처럼.
경장은 보았다. 그 손에 묻은 피를. 경장의 미간이 경련했다.

[…선배님., 저거…]
[선생님, 이 문 안 열어요? 공무집행 방해에요.]

[무시하지 마라, 내 집이라고 말했다. 안된다 했다.]

[집행방해라고 다 고지했어. 부숴.
문에서 나와계세요 선생님.]


피투성이 방, 사방에 흩어진 적녹색 내장. 형편없이 해체된 고기덩이들.
시체를 다룬 방식에는 울분이 가득 담겨있었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 경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행한 막내가 헛구역질을 했지만,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도 토하고 싶었으니까.

이 경장은 겁 먹어선 안된다고 되새겼다.
사람의 시체가 아니다. 눈 앞의 사람은 영화 속 개싸이코가 아니라, 소형동물 학대범일 뿐이다.
태연한 척의 일환으로, 이 경장은 일부러 훈계조로 말했다.
[아저씨,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봅시다. 위 아래에 이웃집 있잖아요. 이러시면 안되는거죠. 이웃들 겁먹잖아요.]

쬐죄죄한 남자는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바지라도 벗고 있는 양, 혹은 자위를 하다 들킨 사람처럼.

그 때, 구경하던 주민들을 물러나게 하던 막내가 그를 불렀다. 탁상 위의 살점 같은것을 가리키며.
[경장님, 이거 보십쇼.]
[왜?]
[뒷목에... 사육실장 바코드 같은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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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가 되는 과정은 복잡했다.
주인은 장생이 ‘엄밀히 합법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장생은 지금까지처럼 같이 지내기만 하면 안되느냐 물었지만, 주인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만 했었다.
그 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입주민 회의에서 열변을 토한 주인 덕에 텃밭 경비로 채용되고 나서,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동족을 수도 없이 상대해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동족들은 손에 넣은 것을 너무 쉽게 잃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어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토록 약함에도 잔인하고 오만하고 포악했다.

주체성이 없는 것들은 길러지기만 바라며 면전에서 인간에게 투분했다.
주체성 넘치는 것들은 용감하게 인간의 샌들에 이쑤시개를 쑤셔넣었다.
두 부류의 본질은 그 최후만큼이나 닮아있었다. 배울 줄 모르고, 받아들일 줄도 모르는, 스스로를 무지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오만함과 아집.
동족들은 공생이 가능한 생물이 아니었다. 인간은 물론, 동족들끼리도.
스스로가 곧 한계인, 무엇을 해도 안될 비천하고 멍청한 생명들.

장생은 텃밭을 지켜냈다. 목숨을 걸고 미친 독라들의 머리를 수도 없이 부쉈고, 숨어든 도둑들의 실장취를 추적해 경비에게 알렸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썼지만, 주인은 ‘아직 네 존재가 불만인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장생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죽 시달렸으면 그렇겠는가, 하고.

주인은 가끔 장생을 관찰하다가 보온재에 보검을 휘두르거나, 빛나는 골판지를 두드렸다.
주인은 그것이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주인은 글을 쓰고 또 썼다.
장생의 눈엔 쓸모 있는 일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주인의 생각은 달랐다.
주인은 종종 글은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생이 실장석이기 때문에 주거에 거주해선 안된다는 조례를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무척 힘들고, 가능성도 적지만, 항상 시도해볼 가치는 있는 법이라고.

그 말이 장생의 심장을 울렸다. 그래서 장생은 그것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아아니 말이 심하십니다. 왜 짐승들이 똑똑하고 착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말을 해도 속은 다 분충입니다!
그렇게 선하고 좋은 새끼면, 벌써 실장인으로 우화라도 했겠지!]

분충은 무엇이고 실장인은 무엇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경장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짜증을 냈다.
[아,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합시다, 아저씨.]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네임벨에 적힌 연락처의 주인은 한 시간만에 경찰서로 왔다. 그리고 이 경위는 낯설지 않은 얼굴에 놀랐다. 실장석의 주인은 유명 작가라고 했다. 그리고 죽은 실장석은 다름아닌 ‘개정 애완동물조례 1호’ 실장석, 장생이었다.

[와, 저분이 ‘들실장놈’ 쓰신 분이에요?]
[막내야, 들리겠다. 다물자.]

작가는 말했다. 애초에 도리가 없었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었다고. 비를 맞아도 멍드는 몸뚱아리 때문에 천수를 누리기 힘든 슬픈 생물.
그 싹싹함에 정이 들어 키우기로 작정한 날부터, 본인도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그 결말이 이런 식이라니.



벌금형밖에 방법이 없다는 말에, 살해당한 실장석의 주인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러나 실장석을 죽인 남자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부당하다고 길길히 날뛰었다. 아무도 맞지 않을 주먹을 휘두르며.

[참피는 박멸을 해야 해! 지능이 있는 생물이 사람에 맞서면 얼마나 위험한 지 알아?
역사적으로 근본 잡힌 사람이 이래서 필요한 거야! 훈련을 받은 실장석은…]

그는 한참동안 떠들다가, 한국 말로는 논리적으로 말하기 힘들었는지 이내 외국어로 또 한참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골이 아파오기 시작한 이 경장은 한쪽 귀를 막고, 막내에게 물었다.
[뭐라는거야?]
[변호사 불러달랍니다.]

작가는 그 난동을 담담히 들어 넘겼다. 그리고 자칭 ‘학대파’가 지쳐 입을 다물었을 때, 비로소 조용히 말했다. 
형사님이 안쓰러운 사람이라고 설득하셨지만, 안되겠다고.
정해진 직업이 없다고 해서 합의를 해줄 순 없다고.

이 경장은 가슴이 답답했다. 
글러먹은 사람은 없다고 믿던 순진했던 시절처럼, 학대파라는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사람도 아닌 것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 그런 법률이 생겼다면, 필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버려진 구더기는 성체가 되었다. 재떨이는 식솔로 거듭났다.
처음엔 살아남기 위해, 그 다음엔 인정받기 위해, 주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지배나 번식과 같은 모든 생육의 본능을 거부했다. 스스로의 결단으로 한 눈을 뽑아버린 날, 주인은 정말 많이 놀라워했다.
정녕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장생의 업인 것 같다고 말하며.

남자가 가르쳐준 ‘글’은 장생을 진정 자유롭게 했다. 그로 인해 겸허를 깨달았다.
소통의 아름다움과 도덕의 아이러니, 그리고 하늘 너머의 무한한 세상의 경이를 배웠다.
장생은 종종 자신이 종의 한계를 넘을 가능성을 목격한 것 같다는 황홀함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이 메스를 멈추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칼날이 위석을 도려내기 직전까지, 장생은 다른 생각을 했다. 자신이 진정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허파는 정직하게 비명을 토했지만 머리 속으로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숫자 30씨는 2씨로도 3씨로도 5씨로도 만들 수 있다. 그것을 줄여서 2x3x5라고 쓴다.
우주는 넓다. 지구를 온 세상 실장석의 수만큼 담아도 인간의 입 속 빗물만큼도 안된다고 했다.
그것이 어쩌면 행복회로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순간, 장생에게 그것은 진실이 되었다.

장생은 감격했다. 일생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궁극적인 현실도피를, 마침내 위석이 허락했다. 
어느 실장석도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로. 마치, 불가능에 대한 기나긴 도전에 대한 보상처럼…
가르침을 받을 때의 숭고한 경이. 검은 공간 속에서, 장생은 그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장생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악의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이 순간, 위석이 지금 안락사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장생은 깨달음의 감정속에서 떠날 수 있게 해준 위석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직전, 장생은 담담히 생각했다.
그를 심판하겠다고 하던 자에 관하여.
손에 동족의 피와 똥이 묻은 사람, 동족의 냄새가 배어있던 사람, 어쩐지 동족과 닮은 사람.
자기혐오를 남에게 떠넘겨야 비로소 견딜 수 있는, 받아들임 없는 슬픈 지성에 관하여.








인어가 되는레후

 

… 요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장석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은 액운을 부르는 행위였다. 때문에 집안에 실장석이 멋대로 눌러앉으면, 설득해 내쫓거나 키우는 수 밖엔 없었다. 이에 관해 일본의 나가사키 지방에선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진다.

어느 어촌의 주민들은 매일매일의 삶이 고역이었다. 영주 가문이 키우는 실장석 가족의 횡포 때문이었다. 탐욕스러운 영물들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하기 위해 영주는 주민들을 가혹하게 부렸다. 

이에 그 곳을 지나던 상인이 꾀를 내었다. 서역 상인들에게 들었던 동화를 토대로, 상인은 실장을 퇴치하는 노래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부르게 했다. 간절함이 담긴 주민들의 노래를 들은 영주의 실장들은, 욕망에 코를 벌름거리다 마침내 혹해버렸다. 그들은 아름다운 인어가 되기 위해 바다에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설화로만 여겨졌으나, 실제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많은 실장석들이 수장당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2000년대 초입에 들어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최근엔 생물학적 증거까지 등장했다. 일본 서부 연안에서 발견된 이 기묘한 종은…

[실장석의 생태 2권 p158, 아종 - 수생실장석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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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후?]
바뀐 물결의 흐름에 구더기는 깨어났다.

아니, 이 경우엔 올챙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꼬리엔 갯강구 같은 섬모가, 돌기가 있어야 할 자리엔 앙증맞은 지느러미가 달려있다. 목 뒤엔 그럴듯한 아가미까지 달렸다.

옷도 머리칼도 날 적부터 물살에 씻겨 간지 오래지만, 구더기는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조막만한 머리로는 당장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구태여 기억할 이유도 없다. 지상의 여느 구더기들처럼, 바다속의 이 구더기도 별 것 없는 일상을 살고있다.
먹고 싸는 것이 전부인 삶이, 마시고 싸는 정도로 바뀌었을 뿐.

[레후! 오늘도 물씨 맛난 레후!]
밑바닥이 아닌 물살 한가운데에 있지만, 헤엄친다기보단 떠밀려다니는 듯한 모습이다. 
구더기의 체력으론 물길을 거스를 수 없다. 따라서 놈들은 해초처럼 떠다니는 모습으로 바다에 적응했다. 
머리를 위로, 꼬리를 아래로 향한다. 잔잔한 해류에 뱃살이 돛처럼 펼쳐진다. 해류의 압박을 장을 비우는 용도로, 그리고 돛을 미는 바람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리곤 저절로 입으로 들어오는 플랑크톤과 찌꺼기를 섭취한다. 
구더기는 모른다. 특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폭풍속에서 키를 잡은 해적처럼 위석이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동 프니프니 신비한레후! 프니후! 프니후!]
그러나 고뇌와 고행은 구더기의 몫이 아니다. 구더기는 그저 세상 행복한 얼굴로 뻐끔거린다. 물속에서 말해봐야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은, 구더기에겐 중요하지 않다. 단순함과 망각이야말로 구더기의 미덕이다.

그런 구더기지만, 나름 원대한 목표가 있다. 매일 눈을 감을때마다 구더기의 귓가엔 희미한 노래가 맴돈다.
‘세레브한 인어가 되는데스. 인어는 아름다운데스, 자유로운데스. 행복한데스.‘
‘꼭 인어가 되는데스.’
[그런레후! 우지챠는 인어가 되는레후!]
매일 힘찬 외침과 함께 구더기는 기상한다. 
어떻게 해야 인어가 되는지, 인어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어로 향하는 여정의 전망은 나쁘지 않아보인다. 매일매일 몸이 크고 무거워지고 있으니까.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구더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구더기는 레후레후 콧노래를 부르며 입 안의 찌꺼기를 씹는다.

[우지챠도 인어가 되는 레후! 분명 - ]
소리도 없이 어떻게 알아들은건진 몰라도, 바로 옆을 지나는 동료가 빙긋 웃으며 뻐끔거린다.
그러나 녀석은 거들던 말을 맺지 못한다.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놈이 있던 곳을 스윽 지나친다. 동료 구더기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 처럼 사라졌다. 구더기들처럼 그루퍼도 입안에 무엇이 들어오건 가리지 않는다. 

구더기는 그것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그렇게 될 뻔 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구더기에겐 좁은 시야 또한 장수의 비결이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위석이 약한 구더기로선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많다. 

오늘도 알아채지도 못한 위기 속에서 하루를 버텨낸 구더기는, 몇 주 뒤 심히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무거워진 몸이 저절로 땅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다. 

당황해 사지를 흔들어보지만 모래가 조금 날릴 뿐이다. 
바닥에 깔린 모래의 감촉은 낯설지만 포근했고, 내리누르는 물은 무거웠다. 별안간 코에서 실이 뿜어져 나오며 온 몸을 감았다. 구더기는 당황 속에 눈을 끔벅이며 잠에 빠졌다…


그리고, 또 며칠 뒤.

[뎃스우?]
고치의 흔적을 이불처럼 밀어내며 놈은 눈을 떴다. 목살 사이의 아가미를 제외하면, 완연한 성체실장의 모습이다.
졸린 눈을 무심코 부비던 실장은, 몇 분 뒤 화들짝 놀란다. 눈을 부비는 팔의 존재를 그제서야 깨달은 탓이다. 실장은 제 팔다리를 휘적여 모랫바닥에 천사 모양을 만든다. 잔뜩 즐거워하던 실장은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데뎃! 팔씨 다리씨 생긴데스! 인어가 된 데스! 노래씨는 사실이었던데스!]

구더기일 적엔 막연히 인어가 되는 꿈만을 꾸었다. 더 커진 머리 속에서, 그 꿈은 이제 온갖 창의적인 망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온 바다가 복종하는뎃스! 온갖 맛있는 것들이 가득 생기는데스! 닌겐노예가… 닌겐이 무엇인데스? …하여튼, 아주아주 좋은일만 가득할 것인데스!]
사실 별로 창의적이진 않다. 실장석이 그렇지 뭐.

희희낙락하며 놈은 일어서려 했다.
그리고 도로 주저앉았다. 영문도 모른채 몇 번 더 허우적거리던 놈은, 마침내 어렴풋이 깨달았다.
팔다리가 생겼지만, 운신의 자유는 생기지 않았다. 놈은 여전히 수압과 해류를 이겨낼 수 없었다.
[데… 데…]

실장은 바닥을 기면서 움직이는 법을 간신히 배웠다. 피눈물을 흘리며 실장은 한걸음씩 팔다리를 모래 밑에 묻었다. 그러나 고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전처럼 입만 벌리고 있어선 어째 배가 부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닷물로 물배가 가득 찼지만, 어쩐지 허기가 채워지질 않았다. 실장은 필사적으로 물고기 시체나 해초 따위를 찾아다녔다. 찾지 못하면 고통에 떨며 단단한 산호초나 말미잘이라도 씹어야 했다.
구더기 시절처럼 뱃가죽이 펄럭인다고 날아오르는 일도 없었다. 땅바닥 생활의 구속감은 실장을 비참하게 했다. 심술궂은 작은 게들이 코와 혀를 꼬집을때면 더욱 그랬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해류는 종종 놈을 모래에서 뽑아 던져버렸다. 그렇게 떨어져 돌부리에 부딪히면 몹시 아팠다. 해류를 피하려 동굴 속에 숨으면 어김없이 원 주인들에게 물리며 도망쳐야 했다. 맛이 영 별로인 것이 실장이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실장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인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울다 지쳐 잠드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리고 또 며칠 뒤.

[데?]
팔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피눈물을 흘리며 애써봐도 소용없었다. 팔다리가 그동안 먹은 산호초 따위의 석회물질로 변해버린 탓이었다. 움직일 수 없다면 먹이를 구할수도, 물살을 피할 곳을 찾을 수도 없었다. 절규하려던 실장은 코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실이었다.

[데… 어쩌면, 이번에 변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실장은 분명히 기억했다. 지난번에 실이 나왔을 땐 팔다리가 생겼다. 그 때 자신은 인어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몸이 변했을 뿐이었다…

[뎃데로게, 인어가 되는데스. 반드시 되는데스. 자고 일어나면 인어가 되어 있는데스.
길고 긴 팔다리, 세레브한 목소리, 아름다운 머릿결.
물 속을 마음껏 헤엄치는 인어가 되는데스.
인어가 되면, 세레브하고 행복한 일만 있을 것인데스. 뎃데로게, 뎃데로게…]
잊은 꿈을 되새기며 놈은 다시 한번 잠이 들었다.


그러나 깨어난 실장을 맞이한 것은 가혹한 현실이었다.
‘데갸아아앗 - !’

코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분명 실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고치실은 아니었다. 그것의 기능과 형태는, 양서류의 기다란 알집과 닮아있었다. 구더기들이 담겨 잔뜩 부풀어오른 실은, 비강을 터트려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구더기들이 부화하며 알집이 터졌다. 물살에 찢어진 점막은, 씻겨 사라지는 대신 친실장의 피부에 들러붙었다. 피부에 스며든 점막은 독처럼 몸을 마비시켰다. 온몸이 팔다리처럼 뻣뻣해졌다.
저항을 막는 일종의 마비독이었다. 이제 친실장은 꿈틀거릴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레후? 우지챠 탄생레후?]
[마마는 어디인 레후?]
[레? 발 밑에서 맛있는 냄새 레후?]
[레후! 참을 수 없는 레후! 우지챠 먹는레후!]

갓 태어난 구더기들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자신이 태어난 산호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마인줄도 모른 채. 
실장의 비명은 마비독과 해수에 묻혀 물거품으로 흩어졌다. 
자를 안아보지 못하는 미련, 구더기에게 먹히는 회한, 인어가 되지 못한 분노, 고기가 되는 공포. 온갖 감정이 실장의 온몸에 역류했다. 
구더기들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씹을수록 맛있어지는 무언가에 감탄할 뿐.

‘데쟈아아아아 - !’

그리고 며칠 뒤, 마침내 성체의 해골만 남았을 때쯤, 많은 구더기들에게 어엿한 지느러미가 생겼다.
[레?]
[레후? 떠오르는 레후?]
[자동 프니프니레후! 신비한레후! 프니후! 프니후웃!]

늘어난 뱃살과 지느러미가 저절로 펼쳐졌다. 해류를 타고 구더기들은 둥실 날아올랐다. 마침내 먹이에서 눈을 뗀 구더기들은 보았다. 햇살이 일렁이는 수면 아래, 넓고 아름다운 물 속의 오색 풍경을.

[넓은 레후?]
[레히이! 대단한 레후!]

구더기들의 머리 속에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쩐지 그립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불러준 태고의 노래.
‘인어가 되는데스.’
물속에서 전달될 수 없는 목소리가 아닌, 위석에서 위석으로 전달된 간절한 바램이다.
앞으로 수 개월간 파킨사를 방지해줄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레후!]
[인어 되는레후!]
[하는레후! 우지챠 절대절대 인어하는 레후!]
[물씨는 우지챠를 높이높이 보내주는 레후! 인어가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레후!]
날아오르는 구더기들은 하나같이 레후레후 웃음짓는다. 
자신들이 무엇을 저질렀는지도,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선조들이 무엇에 홀려 이곳에 왔는지 놈들은 모른다.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루었는지도 당연히 알 길이 없다.

물 속에선 말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에겐 다리의 댓가로 내놓을 목소리가 없다.
구더기들은 모른다. 이 여정의 끝에서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것임을. 오로지 쓸모도 없는 다리의 대금을 치르기 위해서. 그들의 마마가, 또 마마의 마마가 그랬듯이. 

왜곡된 동화에 홀려 바다로 흘러 들어온 선조들처럼, 구더기들은 제멋대로의 전망에 웃음지으며 해류에 몸을 맡겼다.
각자의 마음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멋진 노래를 부르며.
[인어 해서, 마음껏 긴긴씨 돼서, 바다를 자유롭게 여행할것인 레후 - !]







졸업요건

 

[마마, 우지챠 깨달은레후.]
똥굴에 보검을 넣어 구더기들을 뒤집어보던 친실장은, 같잖다는 듯 흘겨보곤 덮개를 당겼다. 평소 같았다면 그저 굴 덮개를 닫고 잊었을 것이다. 구더기의 말을 곱씹을 이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평소와 같았다면.
[마마는 똥마마인레후.]

실장석은 하극상을 참지 못한다. 닫히던 덮개가 도로 열렸다. 구더기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벌레가 뭐라고 지껄인데스우.]
단박에 대가리를 부술 생각으로 친실장은 보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뜻밖의 풍경에 멈칫했다.
구더기들이 작정이라도 한 듯, 불손한 말을 지껄인 놈 곁으로 기어 모이고 있었다. 몸으로 막아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멀쩡한 팔다리조차 없는 구더기 따위, 몇 마리가 있어도 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홉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구더기들에게서 친실장은 알 수 없는 위협을 느꼈다.

서로 힘이 되어주긴 힘든 몸뚱이들이지만, 구더기들은 모이는 것만으로 용기가 솟은 모양이었다. 녀석들은 이윽고 한 놈씩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햝짝해주지 않은레후. 일부러 우지챠로 만든레후. 분명 자인데 밥이라고 하는레후. 어째서레후?]
[그것은 우지챠도 마찬가지인 레후. 분명, 차녀로 태어났었단 말인레후.]

[…가을씨가 코앞인데 키워봐야, 밥 축내는 분충밖에-]

[뻔뻔한 똥마마 레후. 밥이 더 소중하다고 하는레후.]
[결국 비상식 신세레후. 죽어서도 저주하는레후-!]
[뱃 속에 있을땐, 뻔뻔하게도 세레브한 삶을 약속하지 않은레후?]

[그걸 믿은 건, 오마에들의 잘못-]

[운치가 답답한레후. 프니는 하루에 한 번도 없는레후. 괴로운레후.]
[배씨가 답답하단 말인레후. 병신으로 만들었으면, 최소한의 도리는-]

[데쟈아-! 닥치는데스! 지껄인다고 뭐가 바뀔 줄 아는데스? 천한 비상식들 주제에, 세상을 보여준 은혜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입으로 방귀를 뀌고 있는데샤!]
[심한레후-]
[본 것은, 냄새나는 굴 밖에 없는레후-]
[심할 것도 없는데스! 오마에들은 사육이 되어도 구더기고 총구시중을 들어줘도 구더기인데스! 안 썩는 고기 따위가, 무언가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데샤-!]

[그게 문제인레후. 마마.] 
[그런레후. 그래서 우지챠는 생각해본 레후.]
구더기들이 점잖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울리지 않다 못해 기형적인 장면이었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인레후. 나가는 레후.]
[나가는레후-]
구더기들이 기쁜 듯 복창했다. 

생애동안 들어본 것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었다. 친실장은 맘껏 비웃을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구더기들의 눈을 본 친은 치미는 웃음을 도로 삼켰다. 놈들의 눈에서 친실장은 또렷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읽었다. 그것은 분명한 지성의 흔적이었다.
본래는 자가 되었어야 했을 억지 구더기들. 쓸데없이 유창한 말을 하는. 멍청해서 참고 잊는 대신,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표출할 줄 아는.
친실장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구더기가 중얼거렸다.
[돌씨는 듣는레후. 우지챠는 파킨하는레후.]
친실장의 심장이 덜걱 내려앉았다.

치명적인 한 수였다. 
친은 등골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공멸을 꿈꾸는 구더기라니, 어느 친이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된다. 지금 구더기가 죽는다면, 겨울까지 충분히 살찐 구더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직접 다시 만드는 것도 이제 힘에 부친다. 오래 사용해온 분대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저들이 죽는다면, 자판기의 지위를 걸고 동족과 생사결을 벌이는 수 밖에 없다. 아마 다 늙어가는 자신보다 훨씬 건강할, 가을의 초입에 갓 독립한 성체들과.
자판기를 만들려다 역습당해, 배때지에 송곳이 꽂힌 채로 도망쳤던 작년의 공포가 떠올랐다. 모가지 앞까지 아사의 칼끝을 들이밀었던 그 해의 겨울이 머리를 스쳤다. 친은 다급히 외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우지챠도레후. 파킨레후! 파킨레후-!]
[이승은 덧없는레후. 우지챠는 가고싶은 레후.]
[세레브의 삶은 어느 악독한 똥마마가 물거품으로 만든레후.]
[죽는레후! 마마가 보는 앞에서 죽는것인 레후!]
[똥마마의 계획대로는, 절대로 놀아나지 않는레후! 우지챠는 멍청이가 아닌레후! 어서레후-!]

구더기들이 저마다 발악하듯 외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구더기로 태어난 것들 중 심약한 놈들은, 그 내용을 어렵사리 이해하자마자 숨이 끊어졌다. 먼저 탈출에 성공한 자매들을 본 구더기들은 더욱 열띠게 외쳤다. 파킨, 파킨, 파킨. 어서!

세상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친실장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현기증에 눈을 꼭 감으며 친실장은 차라리 이것이 꿈이기를 기도했다.
[안되는데스. 안되는데스. 꿈씨는 깨어주는데스. 그 때를 또 겪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데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기대하던 구슬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친은 귀를 당기던 손아귀를 풀었다. 귓가에 들려온 것은, 숨차고 기운 빠진 우지챠들의 악 소리 뿐이었다. 친실장은 여유를 되찾고 운치굴을 내려다보았다.
[파아... 파... 파레후! 아니, 파킨레후-!]
[어서 파킨하라는레후! 어서레후! 똥마마가 비웃고있다는 말인레후우-!]

고개를 숙이고 달달 떠는 구더기들이 보였다. 멀쩡히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중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친실장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패닉에 빠진 구더기들은, 얼굴의 구멍들에서 체액을 줄줄 흘리며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어째서인레후 어째서 파킨하지 않는레후]

생물학의 법칙은 냉엄하다. 흙의 갑갑함을 참지 못하는 지렁이는 자손을 남기지 못한다. 동지를 위헤 제 몸을 희생하는 개미들만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를 만든다.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다. 자각이 없는 수많은 생물들은 제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른다. 그저 기계처럼 작동할 뿐. 누대에 걸쳐 쌓인 프로그램대로.

운치 식단은 위석과 구더기의 신경 사이의 연결을 무디게 한다. 모든 구더기가 한두번의 욕에 절명한다면, 또는 제멋대로 이승을 떠날 수 있다면, 구더기 농사나 말린우지 생꼬치같은 독특한 생존법이 존재할 수 없다. 유전자에 새겨진 요구는 분명했다. 사지가 없다면 자라서 사지를 얻어라. 또는, 최선을 다해 사지 있는 놈들의 양분이 되어라.

운치굴로 내려오는 묵직한 걸음이 들렸다. 구더기의 떨림이 심해졌다. 
새삼 마마가 무서울 것은 없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지 오래였다. 미련을 두기엔 너무나 비루한 삶이었고. 
다만 딱 하나 두려운 것이 있다면,
[레후-! 손대지 말라는 레후우-!]
그 비루한 삶의 최후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불효인데스. 어딜 마마 품을 맘대로 떠나려고 하는데스.]
집어올려진 우지챠의 귓가에 마마가 숨을 훅 불었다.
[‘세레브’ 해지기 전까진, 오마에들은 쭉, 마마 품에 있어야 하는데스-]

이빨이 귓볼을 한입 가득 파고들자, 구더기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퍼덕였다. 그러나 잘려나가는 귓볼을 지킬 순 없었다. 땅에 내팽개쳐진 구더기는 잘려나간 귀때기를 목에 비비려 애쓰며 버르적거렸다.
[레히에에엥-!]

구더기는 마마처럼 귀를 손으로 막을 수 없다. 싫은 소리가 들린다면, 귀를 접고 몸을 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다. 앞니 자국이 선명한, 밑동만 남은 귀로는 그러나 그 마저도 할 수 없다.
때문에 친실장의 다음 말은, 무방비한 우지챠의 고막을 뚫고 심장에 그대로 꽂혔다.
[죽지도 못하는 병신으로 태어난 자신을, 죽을 때까지 원망해 보란-]

지금 이 순간 거둔 작은 승리에, 도취감이 친의 머리 끝까지 차오르려는 찰나였다.
끔찍한 굉음이 울렸다. 충혈된 눈으로 이를 악물며 울던 구더기들은, 갑자기 마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당황했다. 언뜻 하얀 섬광이 눈에 스친 듯 했지만, 정말 그랬는지 확신하기엔 구더기의 주의력이 너무 협소했다.
[레후?]
[레후우-! 무슨 소리인레후-! 파킨할뻔한 레후-!]
[차라리 파킨하고싶은레후…]
[큰일인레후-! 이대로라면, 마마의 밥이 되고마는-]

하늘에서 탁탁 소리가 나더니, 운치굴로 거대한 살덩이가 떨어졌다. 구더기들은 화들짝 놀라 구석으로 옹기종기 피신했다. 그러나 살덩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뒤, 용감한 구더기 몇이 다가와 그 몸뚱이를 살폈다.
[…마마의 냄새가 나는레후?]

불과 10여초 사이 기묘한 상승과 낙하를 겪은 그것은, 누가 보아도 살아있다고 보기 힘든 몰골이었다. 납작해진 대가리에 신발자국이 선명했다. 이윽고 구더기들은 시체에 몰려들었다.
그 정체를 알아챈 녀석들은, 곧 욕설을 토하거나, 분노한 채 돌기로 그 시체를 탁탁 때리기 시작했다. 두터운 살가죽을, 약한 이가 부러지도록 무리해서 물어뜯는 녀석들도 있었다.
[응보레후-! 거들먹거리더니, 꼴좋은레후!]
[기쁜날 레후-! 악마 똥마마가 죽은레후-!] 
[살아남은레후-! 역시 우지챠는 밥이 아닌레후-!]

[다들 그만하는레후.]
[닥치는레후! 우지챠는 분노할 권리가 있는레후!]
[그만하라고 한 레후. 다들 위를 보는레후-]

이미 죽은 몸뚱이를 괴롭히려 애쓰던 구더기들 몇이 머리 위를 보았다. 이윽고 구더기들 모두가 머리 위를 보았다. 
골판지 안에서 나고 자란 구더기들에게, 검은 천장 없는 하늘은 낯선 것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운치굴의 묵은내를 씻어냈다. 구더기들은 이윽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돌기를 움직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저 아름다운 하늘에 가까이.
본인도 모르게 이승을 먼저 졸업한 친의 몸뚱이는, 마침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자세로 떨어져 있었다. 죽은 마마의 궁둥이를 계단 삼아 구더기들은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깥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바깥은 굉장했다. 그 무엇도 구더기들이 상상한 것과 같지 않았다. 
직접 받는 햇빛은 운치굴에 감질나게 들어오는 볕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둠에 익숙한 눈을 구더기들은 연거푸 껌뻑이고 아파하면서도, 구더기들은 눈꺼풀을 부릅떠 풍경을 눈에 담아두려 애썼다.
해가 무척 밝았다. 덕분에 모든 것이 선명했다. 연두색 풀과 갈색 흙, 눈부시게 검은 바닥과 잔잔한 회색인 바닥. 그 위를 가로지르는 적록색 선과 얼룩들이 태양빛에 선연히 반짝였다. 깡깡거리고 쨍그랑거리는 경쾌한 리듬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왔다.
이곳 저곳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오고, 녹색 덩어리와 하얀 기둥들이 바삐 움직였다. 근시의 눈을 껌뻑이며 구더기들은 그 속에 담긴 활기에 환호했다. 아름답다. 자신도 저 풍경의 일부가 되고싶다. 신선하면서도 구수하고 비릿한 바람이 스쳤다. 구더기들의 귓가를, 코끝을, 멍든 마음 속을.

[밝은레후! 아름다운레후-!]
[이것이, 바깥인레후?]
바깥. 이 한없는 자유로움. 자로 태어났다면 진작에 누리고 있었을 특권.
제 발로 바깥으로 나온 원자실장 구더기들은, 이미 공포를 잊은 지 오래였다.

[이제 어쩔것인 레후?]
[…가는레후. 우지챠는 가는레후.]
[그런레후. 이제 그것밖엔 없는레후.]
[저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는 레후-!]

의욕없이 운치로 향할 때처럼 돌기만 굼실거리는 대신, 구더기들은 열심히 꼬리로 땅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각자만의 방향으로, 넓은 세상을 향해서.

[세상씨! 프니프니 해주는 레후-!]
[여러번 꺾일 뻔 했던레후-! 하지만 우지챠는 절대 포기하지 않은레후-! 우지챠는, 이제 그 상을 받는레후-!]
끔찍하게 고요한 굴을 떠나, 저 새로운 소란 속으로.
영원할 것만 같은 행복의 예감 속으로.
[세상을! 우지챠의 노랫소리씨로 가득 채우는 레후-!]

해가 무척 밝았다. 덕분에 모든 것이 선명했다. 망가진 하우스의 전경도, 뭉개진 채 썩어가는 운치굴의 시체도,
생전의 친실장이 요새의 해자(垓字)로 삼았던, 공원 구석의 하우스를 둘러싼 배수로 격자도.

다음 날 공원 그 어디에서도 구더기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부디 전부 죽여주는데스. 봄이 되기 전에.]

어미의 말 치고 모질기 짝이 없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들은 말이기에 더욱 그랬다.
겨울 막바지에 찾아온 뒤끝같은 추위.

그런 날에 온 힘을 다해서 인간의 집 앞에 새끼들을 데려와놓고는,
제 새끼를 살려두지 말라고 애걸하는 친실장.

집주인은 탄식하며 이유를 물었다.
동상에 머리가 물러터져 죽어가던 친실장은, 생각을 정리하기가 몹시 힘든 듯 했다.
두서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맞는데스. 내 자들을 죽여달라는 것이 맞는데스.]

[아픈, 추운, 아픈데스.]

[원래는 행복을 몰라야 하는데스. 하지만 너같은 닌겐 만나면 어쩔 수 없는데스. 반드시 그 무서운 것을 배워버리는데스.]

[배신당하는데스. 반드시 배신당하는데스.]

[...낙원?]




낙원. 녀석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마도 이 계절, 이 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을 그곳.

녀석들의 고향인 일본의 서식지에서 찾아보기 힘든, 감히 맨 살로 길에 나선 자들의 세포를 얼리고 터트려버리는 겨울의 한파. 달팽이에 비견될만한 재생력도 친실장을 구해주지 못했다.

그렇게 친은 유언의 정돈을 낯선 인간에게 떠넘긴 채 떠나버렸다.




친실장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 인간의 보호 속 행복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믿는 듯 했다.

집주인도 동의했다. 실장이, 특히 들실장이 사람과 공존하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감당하기 어려운 모험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유로.

하지만, 죽여달라니.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일테니까.

간혹 모기나 바퀴벌레를 잡아달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어도, 모기나 바퀴벌레에게 제 새끼를 죽여달라는 간곡한 청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 리가 있는가. 사람에겐 실장의 새끼가 잡벌레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어미에게 있어서는 달라야 하지 않나.



막막한 심정으로 박스 안을 보았다.

어설프게 뭉쳐놓은 낙엽과 정체모를 천쪼가리들 사이의 꿈틀거림.
어미가 살해를 청부한, 옹기종기 붙어 간신히 숨 쉬는 작은 목숨들.

집주인은 차마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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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감사했던테스!]
[주인사마- 아니, 닌겐상. 잊지 않는데스. 결코 잊지 않는데스.]



실장공원까지 앞으로 2km.
케이지에 담겨 뒷좌석에 실린 녀석들이, 감격속에 종알종알 떠든다.

여덟 마리중, 동상을 이기고 살아남은 것은 셋. 문이 열릴 때까지 몸으로 찬 기운을 막아냈던 어미의 희생 덕분이다. 녀석들을 죽여달라고 했던 그 친실장.

운전을 하던 집주인은 입 속이 씁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애써서 살리려 했다면, 대체 왜.

아마 절망이 깊었으리라. 집주인은 결국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렇게 모진 부탁을 했을지언정, 아마 살릴 수 있었다면, 방법이 있었다면 포기했을 리 없다.

그 친이 다하지 못한 도리를, 집주인은 결국 끝까지 대신해냈다.
집주인은 그 사실이 돌아올 수 없는 녀석의 한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기를 바랬다.




끝까지 책임질 수는 없었다.
의지나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육은 시의 조례로 금지되어 있다.

실장석을 기르는 일은 이웃에 많은 양해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어려운 사육에 도전하는 이들 중에는, 평균보다 얼굴이 두꺼운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필연적으로 그 양해의 필요성을 무시할 만큼.

담벼락에 녹색을 덧칠하는 자원봉사 화가들이 거리를 누볐다. 합법인지 아닌지도 모호한 실장 자동차가 많은 이들의 발가락을 부수며 거침없이 내달렸다. 짐승의 부모들은 쏟아지는 비난에 되려 악을 쓰고 맞섰다. 항의하는 이들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기라도 할 기세로.

피로가 누적된 공동체는 더이상의 관용을 거부했다.

이제 키우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그게 사회적 합의다.
따라서 집주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마당에 숨어 사는 녀석들을 조금씩 도우며 묵인하는 것.
그리고 실장 생태공원에 놓아주는 것 뿐이었다.





“...여기서부턴 너희들의 힘만으로 해내야 해.”

[각오한데스. 이제 다 직접 해야 하는데스.]
[...봄의 풍경은 멋진데스. 마당에선 보지 못한 것인데스...]
[마마. 해낸데스우. 닌겐상 덕이지만, 어쨌든 봄을 보게 된 데스.
봄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던 것, 기억하는데스? 왜 같이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데스...]

설움과 기쁨. 실장들은 급기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놈들이다. 법이 없었다면 계속 마당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은 사육으로 살 수 없다는 설명을 비교적 수월하게 납득했다. 여태 살아남은 것이 오롯이 제 덕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일도 잘 기억한다. 아무리 뛰어나봐야 개보다는 못하다고들 하지만, 분명히 영리함의 증거였다.

물론 듣기론 실장 생태공원도 결코 녹록한 땅이 아니라 했다. 실장이 살기 좋게 조성되어있을 뿐, 실장의 보호가 아니라 격리에 초점을 맞춘 공간이니까.

하지만 이 정도의 자기 객관화가 가능하다면, 녀석들은 이 야생에서도 제법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팔이 뒤틀려 있는 둘째가 조금 걱정되지만, 그 정도의 신체적 문제는 들실장들 사이에서 흔하다고 들었다. 아마 총명함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떠나는 집주인을 향해, 녀석들은 직접 만든 도구를 힘차게 치켜들었다. 이빨과 못으로 나무조각을 물고 파내, 어설프게 깎아 만든 삽날과 곡괭이. 삶의 의지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집주인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이곤, 지레 민망하여 재빨리 그 자리를 떴다.




시동을 건지 몇 초나 되었을까. 막 공원을 나가는 도로에 진입하려던 집주인은, 별안간 차를 멈추고 후진했다. 그리고 정차하자마자 득달같이 뛰쳐 나왔다.

돈 주고 산 녀석도 아니다. 소유주도 아니다. 한 번 놓아준 실장의 일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 무시하고 넘어가도 될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옭아매기에 정은 무서운 것이다.

집주인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피범벅이 되어 들실장들에게 깔린 채, 손을 뻗어 살려달라 외치는 세 실장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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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듣기로, 마당을 나온 실장들은 집주인이 떠난 즉시 습격당했다고 했다.

매복해있던 강도들은 인간이 떠난 즉시 튀어나왔다. 놈들은 인간이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지으려 했다. 방법이 다소 거칠더라도.

한 들실장은 첫째의 팔뚝을 한가득 베어 물고 머리를 불독처럼 흔들고 있었다. 첫째는 이미 한 팔이 뜯겨나가고 없었다.

집주인은 놈의 머리가죽을 잡아당겼지만, 흥분에 취한 습격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주인은 들실장을 힘껏 떼어냈다. 놈의 입에 물린 첫째의 팔뚝과 함께. 첫째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습격자가 사력을 다해 놓지 않으려 했던 탓에, 자세가 불안했던 집주인도 지레 뒤로 몸이 쏠려버렸다. 나무에 묶여 흔들대던 표지판이 집주인의 뒤통수를 때렸다.

발랄한 필체로 돋을새김된 문구가 놀이기구처럼 요동쳤다.
‘들실장에게 간섭하지 말아요. 눈으로만 보아주세요’

후두부를 감싸쥐고 눈물을 글썽이던 집주인은, 첫째가 남은 팔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동... 생...]

“야! 안돼, 그만!”



열이 올라 씩씩대던 들실장들은 흠칫 멈추었다. 녀석들에게 인간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는 전조였다. 둘째를 질질 끌고가던 독라 몇은, 분을 억누르는 표정으로 인간의 눈치를 살폈다. 옷이 있는 부분을 악의적으로 공격당한 몸뚱이는 엉망이었다. 도저히 살아있기를 기대할 수 없을 만큼. 평소 팔에 문제가 있었던 녀석인만큼, 아마 반항조차 못하고 순식간에 당했을 것이다.

절명한 쪽은 차라리 사정이 나았다. 셋째는 죽지도 못한 채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집주인으로선 들실장들이 어떻게 줄톱을 구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집주인은 욕지기를 참아가며 그것을 몸통에서 빼냈다. 셋째가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그 사이, 들실장들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놈들을 돌아보았다. 독라들은 여전히 둘째의 시체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떻게 해야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사태를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은 아니다. 들실장들이 세 실장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경우도 생각해본 적 있었다. 세 녀석들을 지킨다고 들실장을 해치는 것은 아마 어리석은 선택일 것이다. 다 같은 실장이니 도의적 차원에서도 어불성설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세 실장들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니까.

따라서 집주인은 품 속에 고칼로리 에너지바를 몇 개 챙겨왔다. 여의치 않을 경우 협상하기 위해.

하지만 한 마디라도 꺼내는 순간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키울 수 없으니까 이게 최선이라고? 정말로?’




참혹하기 짝이 없는 집주인의 표정을 살피던 독라실장들은, 마침내 체념하고 둘째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집주인은 그것을 주워들려 접근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독라들이 데우우 하며 물러나자, 집주인은 생각을 바꾸었다, 서로 더는 상처 입길 바라지 않는 양자는 곧 합의점에 이르렀다.

그들은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치며 서로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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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실장에게 간섭하지 말아요. 눈으로만 보아주세요’

공원의 규칙은 하나. 끼어들지 말 것.

법적 효력은 없었다. 그런 문구가 매일 공원에서 걷어차여 죽는 들실장들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그저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도록 두라는 경고였다.

비로소 집주인은 그것이 실장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한 문구임을 이해했다.
어리석은 것은 실장만이 아니다. 착각하고 실수하고 또 후회하는 것도.




[키워, 키워데스-! 살려달란 말인데샤-!]

셋째가 입은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셋째는 결국 방어기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온갖 협박과 으름장은 채 세 시간을 가지 못했다. 영양액을 어떻게든 입에 넣어보려 했지만, 복원약조차 뱉어낸 셋째는 약이 필요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 순간 첫째의 눈동자 속에서도 무언가 사라져버렸다.

독립의 순간, 감격에 젖은 생기는 이제 없었다. 첫째의 그것은 이제 저 밖의 들실장들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알고 있었다. 실장은 같은 실장에게 쉽게 이빨을 드러낸다는 것도, 야생에선 일 년 넘게 살아남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눈앞에서 난도질당하며 적응에 실패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준비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살아남으려면 생존이 아니라 살육전을 준비했어야 했다.

들추어선 안될 것을 들추어 너무 가까이에서 본 괴로움. 집주인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실장에 가까워진 자 불행해진다 했다. 누구의 말이었던가.
실로 그랬다. 심지어 같은 실장조차도.





언젠가 물게 될지도 모를 벌금을 무릅쓰고, 집주인은 남은 첫째를 끝까지 키우기로 했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다행이라 해야할지, 이웃에서 민원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살아남은 첫째는 밖을 싫어했고, 적게 먹고 적게 배설했다. 그리고 지독하리만치 조용했다.





[아마도 그간 행복했던데스. 이제 괜찮은데스.
마마, 이제,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스.
봄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겠는데스.]

화초와 다름없이 살던 첫째는, 불현듯 그렇게 말했다.
어느 날, 장마의 습기가 짙게 깔리기 시작한 창 밖을 보며.

[이 세상에 우리 설 자리 없는데스.]




그것이 끝이였다. 앉은 채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인 녀석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집주인은 녀석을 마당에, 그리고 마음에 묻으며 다짐했다.
다시는 실장에 엮이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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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실장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운은 더 이상 친실장을 구해줄 수 없으니 아마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친실장은 남길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부탁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키워달라고 하면, 인간은 아마 모두를 간단히 으깨어 치워버릴 것이다. 내보내달라고 해도 죽는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자들을 거두어 안락 속에 키운대도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자신처럼 언젠가 내쫓길 뿐이다. 이러기 싫지만, 원래 규칙이 그렇다며.

달콤함을 맛보고 속은 자는 더 아프게 추락한다.
봄이 영원할줄만 알았던 자에게 겨울의 존재가 한없는 폭력이듯이.

야생에 내몰린 첫 날, 들실장 동족들에게 내장을 물어뜯겼던 것을 생생히 기억했다.
자신이 겪은 참혹함을 똑같이 겪게 할 순 없었다.

열병에 죽어가던 친실장은 그래서 부탁했다. 자신처럼 살게 두지 말라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그리고 보낼 땐 부디 편하게 해달라고.
봄이 되기 전에, 아직 봄의 안온함과 찬란함을 모를 때.
그것이 조막만한 머리로 짜낸, 가장 나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으로는, 간절히 소망했다.

부디 인간이 자신의 부탁을 무시하기를.
그래서 살아남아 무럭무럭 자라난 자들이 언젠가 찾아내기를.
자신이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안식과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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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마 삼 일에 걸친 공복 끝에 찾아낸 이 에너지바가 아닐까. 누군가의 소매에서 오래 전 떨어진 듯한 에너지바는, 포장을 더럽고 냄새는 쿰쿰할지언정 내용물은 온전히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다.

독라는 그것을 충만한 기분 속에 천천히 씹었다. 단백질의 향기가 퍼지자 독라는 편안한 한숨을 쉬었다. 이 에너지바 하나를 모두 씹어먹으면, 아마도 앞으로 이틀, 넉넉잡아 사흘을 움직일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꿈에서나 즐길 수 있는 사치였다. 등 뒤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독라는 애써 몽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에너지바를 걷어차고 밟았다.

[상하지 않은데스. 하지만 주제에 맛있는데스! 건방진데스!]

어설픈 봉투 신발로 감싼 발이 몹시 아렸지만, 어쨌든 목적을 이루는덴 성공했다.

에너지바는 길거리 출신의 맹렬한 발길질을 견디지 못했다. 패배를 인정한 에너지바는 먹기 좋게 쪼개지며 복종했다.

독라는 강적 에너지바의 시신을 집어들어, 등 뒤의 다른 독라들에게 건넸다.
모두에게 웃음꽃이 번졌다. 첫 날의 흉포한 첫 인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자아, 와타시 둘째의 선물인데스-]















‘살아야하는데스. 그러니 가만히 있는데스.’

그 날, 그 끔찍한 습격이 있었던 첫 날.
둘째를 그늘로 끌고 간 독라들은 그렇게 말했다.

첫째와 셋째는 옷이 있는 패거리에게 공격당했지만, 둘째만은 아니었다.
독라는 대개 정말로 잃을 것이 없는 부류다. 옷이 있는 패거리는 그런 독라들 여럿과 맞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독라들이 잡아챈 둘째는 무시하고 나머지를 노렸다.

난동을 부리려는 둘째의 입을 휴지로 틀어막고 몸으로 깔아뭉갠 다음,
독라들은 재빨리 녀석에게 덕지덕지 무언가 진득하게 흐르는 것들을 묻혔다.
끔찍한 냄새에 둘째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조차 두려웠다.

‘이럴 때를 위해 조금씩 모아놓는데스. 자, 죽은 척 완성인데스.’



영락없이 공격당한 꼴이 되자, 적어도 살아있다는 의심은 피할 수 있었다.
방금 살해당한 시체처럼 보이던 둘째는, 오물이 굳으면서 곧 썩어가는 시체처럼 보이게 되었다.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살아있는 채로 손을 잡고 은신처로 데려갈 순 없었다. 독라의 무리는 보육원이 아니니까. 우습게 보일 빌미를 차단하는 것이 곧 안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잃을 게 없어 흉폭한 독라들 수중의, 푹 썩은 고기는,
동족은 물론 고양이조차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게 독라들은 둘째를 안전히 옮길 수 있었다.



거무튀튀한 몰골로 멍하니 있던 둘째는, 이제 안전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오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닌겐상이 다시 주워갔다지만 첫째도 셋째도 부상이 심각해보였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공원은... 공원은 원래 이런데스?]




달래는데 애를 먹던 독라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화장실의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멀쩡한 녀석이 없었다. 다리가 망가진 녀석, 눈이 보이지 않는 녀석. 어떤 이유에선지 하반신이 아직 구더기인,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타고난 녀석.

녀석들 모두가 독라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스. 아니기를 매일 바라지만, 세상은 잔인한데스.
우리를 보는데스. 대부분 친에게 직접 옷을 뜯기고 쫓겨난데스.
친이 아니더라도 동족이, 또 세상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데스.]

비정상이라는 이유로, 매도당하고 버려지고 집단에서 추방당한 자들이었다.

신입 세 녀석이 공격당한 순간, 녀석들은 빠르게 판단했다. 독라들이 그렇듯 몸이 온전하지 않은, 팔이 어릴 적의 추위로 뒤틀린 둘째를 구하자고.

아마도 혼자서 녀석들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가장 힘들테니까.

[...다친 녀석이 있으면, 같이 돕기로 약속한데스.
우리 모두 돌아갈 곳 없고 남은건 서로 뿐이라, 독기로 뭉친 녀석들인데스.]

어쩐지 낭패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독라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너와 다르게 말인데스. 그래서 미안한데스.]

[어째서...?]

[우리들 꼴이 흉하기 때문에, 아니면 죽은 척 꾸며 지켜주려고 피뭉치를 묻혀서,
너를 닌겐이 도로 주워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는데스-]




둘째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유리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세상, 최선을 다했다는 점은 서로 다를 바 없었다.




둘째는 녀석들에게 공원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옷 입은 것들의 세력 구도와 알력 관계에 대해서. 공원 근처 쓰레기 불법 투기장은 어디고, 또 고양이 피하기 좋은 비밀 은신처는 어디인지.

독라들이 둘째에게 배운 것들도 많았다. 집주인과 살 때 둘째는 많은 기술을 스스로 터득했다. 어설프게나마 이슬을 모아 식수를 보충하는 법, 개미를 꾀어내 먹는 법 등등.
뒤틀린 몸으로 사는 삶이 순탄할 리 없을지언정, 독라들의 삶은 전보다 훨신 윤택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독라들은 경악했다.
어느새 가족이 된 둘째가 뜬금없이 독라가 되어 돌아온 탓이었다.
독라들은 분노했다. 둘째를 건드린게 누군지는 몰라도, 둘째가 누군지 알 만한 놈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우리 패거리의 일원을 누가 건드렸다는 말인가.

한쪽에 두 개 달린 팔을 휘두르며, 한 독라가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어느 놈인데스! 너마저 독라로 만든 놈, 가만 안두는데스! 반드시 복수하는-]

[아, 우연히도 바람이 불어서 다 쓸어간데스! 머리씨는 운석에 맞아서 빠지고, 옷씨는 땅이 꺼져서 사라진데스.]

[...그게 무슨-]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더니, 맞는 말인 모양인데스. 그보다 개미씨 주워왔는데, 먹을 녀석 있는데스?]



충격에 젖어있는 동료들에게, 둘째는 푸념하듯 말했다. 마치 길 가다 누군가와 어깨라도 부딪혔다는 투로.
그 날 밤만은, 더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모아온 개미를 씹을 뿐.

공기중에 퍼진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이따금 눈물을 훔치며.








독라는 그 모든 것을 기억했다. 아무래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독라는 기억력이 좋은 편인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 참혹한 겨울에 태어난 것도. 소스라치게 떠는 친과 함께 인간의 집으로 향한 것도. 마당에서 셋이 보낸 그 안온한 나날도. 모두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이 둘째라는 것을 기억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살아있는 한 언제까지고.



참혹했던 봄이 지났다. 봄은 녹색이라 했으니, 녹색을 바래게 하는 이 비가 그것을 증명했다.
독라들은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이 비가 끝나면 아마 가을이라는 것이 올지도 모른다고.

가을엔 무엇이 둘째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은 아픔일까, 아니면 또다른 만남일까.
삶이 유머를 안다면, 그것은 혹시 또 다른 에너지바일지도 모른다.

둘째는 기대감에 일렁이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무에 걸린 경고문 목판이 비바람 속에 신음하며 기우뚱거렸다.
문자의 개념조차 모르는 둘째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그늘에 앉아 그것을 관찰하는 일은 좋아했다.

‘먹이 금지. 접촉 금지.
들실장에게 간섭하지 말아요. 눈으로만 보아주세요’

을씨년스럽게 흔들리던 앞면의 문구.
이윽고 바람에 떠밀린 목판은 뒷면을 조금씩 드러냈다.
오도카니 앉아있던 둘째가 몹시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큰 의미 없는 기다림이었지만, 둘째는 웃었다.
그저 소박하게, 그리 되길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홱 젖혀진 뒷면에 쓰인 말은 이러했다.

‘행복을 언젠가 스스로 찾아내도록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