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의지



두루마리 시민공원.
여느 공원들이 다 그러하듯 이 공원 또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아이들이 뛰놀던 분수대는 실장석들의 배설과 빨래로
인해 녹색물을 뿜어내고 있었고, 아름다운 꽃밭은 더 이상 꽃밭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이리저리 파헤쳐져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줌의 꽃들도 발정난 실장석의 손에 낚아채져 질척한 총구에 박혀 있었다. 관목과 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로는 보기 흉한 토굴과 골판지 하우스가 홍콩의 구룡섬을 연상케 할 만큼 마구잡이로 난립해 있었다.
부득이 하게 이곳을 지나치는 시민들은 피어오르는 악취에 코를 막으며 한마디씩 내뱉는다.

‘이거 원...실장석들 천국이구먼....’

확실히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 생태계 속에서 완전히 공원을 점령한 실장석 무리들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로 천국일까? 실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개개의 실장석들의 입장에서 이 공원은 끔찍했다.

분수대는 완전히 오염되어 그곳에서 아무리 씻어봐야 악취만 더 뿜어낼 뿐이다. 다만 하지 않는 것보단 낫기에 목욕과
빨래를 하고 있긴 하다. 식수는 화장실의 화변기에 고인 물을 핥아먹으며 연명을 하지만 이 공원의 모든 실장석들을
부양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였다. 화장실은 언제나 바글거렸으며 덕분에 화장실에서 자를 낳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식량문제는 더더욱 심했다. 요령을 터득한 실장석들이 쓰레기통을 매번 넘어뜨리는 통에 주변에
그물을 치거나 아예 벽 안쪽으로 쓰레기통을 집어넣었다가 수거쯤 돼서 내놓는 방책을 내놓았다. 덕분에 실장석들은
비교적 정기적이고 손쉬운 먹거리 대신 힘겹게 채집과 사냥을 해야만 했다.

‘데에......’

한숨을 푹 내쉬는 친실장. 이번 봄에 독립을 한 녀석이다. 골판지 틈으로 세어드는 한기에 자매들은 사정없이 떨고
또 떨었다. 등에 들러붙다 시피한 배는 한시도 쉬지 않고 꾸르륵거렸지만 먹을 것은 없었다. 친실장의 어미는 얼어
죽은 자들의 사체를 먹으며 버텼다. 이것이 잘못 됐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허기에 잠식당한 뇌는 침묵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임시방편. 자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어갔지만 겨울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 장녀였던
친실장은 거의 성체급으로 커져, 어미는 위험을 무릅쓰고 원정을 나갔지만 신통치 않았다.

여느 날과 같이 친실장의 어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곰팡이가 난 수건을 뒤집어쓰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친실장은
자신의 마마의 눈매에 이채를 눈치 챘다. 그것은 살기. 입을 벌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동시에 반응하였다. 기습의
이점을 빼앗긴 어미는 손쉽게 제압당했다. 친실장은 물었다.

대체 왜 그러냐고. 그러자 어미는 대답하였다. 살기위해선 어쩔 수 없다. 자는 또 낳을 수 있다. 죽어간 자들의 몫까지
행복해져야한다. 완연히 성체로 성장한 친실장 밑에 깔린 어미는 종국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꽥꽥 질러대며
자신이라도 살아남아 자신의 자들로 이 공원을 가득 채워야한다고 했다. 더 이상 들을 수 없던 친실장은 어미의 목을
물어뜯었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고기의 풍미. 바싹 마른입을 적시는 핏물. 너무나 감미로웠다. 우물거리는 입놀림은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친실장은 겨울을 견디어 내었다. 하지만 여태껏 따라준 운은 자신을 떠난 듯하다.

‘데스우.....’

손을 내려 보면 텅 빈 자신의 비닐봉지. 해는 저물고 있다. 더 이상 채집활동에 의미가 없다. 조금 있으면 집을 제대로
찾아가지도 못 할 것이다. 할 수 없이 귀가길을 서두르는 친실장.









‘데스우.....’
‘테츄? 테치테치이~!’
‘테츄우~♪ 테츄우우~♪’
‘렛츙~렛츙~♪’

위장도 방수도 신경 쓰지 않은 허름한 골판지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면 3마리의 자실장과 1마리의 엄지실장이
달려 나온다. 얼굴은 기대만발. 눈은 초롱초롱 코는 피식피식. 오늘은 마마가 맛있는 것을 들고 왔을 거라 확신을
하며 달콤한 목소리로 애교를 부려온다. 친실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는다.

‘테에에.....’

바닥에 떨어뜨린 텅 빈 비닐봉지는 나풀거리며 굴러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씩 들여다봤지만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혹시로 시작해서 역시로 끝나는 하루. 이것이 일가의 일상이 돼버렸다.

‘렛츙~♪렛츙~~♪’

텅 빈 비닐봉지가 뭘 뜻하는지 모르는 막내 엄지실장은 어미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공복을 호소한다.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친실장은 할 수 없다는 듯, 옷을 젖혀 올리고 엄지에게 젖을 물린다. 영양이 충분치 않아 젖은
흉하게 늘어져 있었다. 자신의 영양분을 빼내어 엄지에게 건네주는 그야말로 제살깍아먹기이다.

‘데스데스우.....’

콧김을 내뿜으며 두 볼을 빨갛게 만들며 젖을 빠는 엄지실장의 얼굴을 약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자실장들.
그런 자들에게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탓하며 친실장은 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텟츄~테치이~’

역으로 위로를 받아버렸다.

마마는 언제나 최고의 마마인 테치~엄지짱은 아가야라서 아직 많이 먹어야하는 텟츄~
와타시들은 언제나 튼튼 테칫! 언제나 믿고 맡기는 텟츄!

씩씩하게 대답을 하는 일동.

‘뎃승....뎃승......’
대견스러운 자들인 데스.....마마가 무능해서 미안한 데스....

훌쩍거리는 어미 곁으로, 자실장들은 달려가 꼭 안아준다. 그리고 같이 흐느낀다. 아무리 위로받아도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적록색 눈물을 흘리는 자매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엄지인 4녀는 트림을 시원하게 하고
낮잠을 청한다. 배가 고파 잠이 안 오는 자실장들을 위해, 친실장은 행복의 노래를 불러준다.





뎃데로게~♪ 애호파 닝겐은 와타시들의 주인님~♪ 세상에는 슬픈일도 많지만~♪ 행복과 행운도 있는 데스웅~♪
모두가 착한 자로 지내면 사육실장이 되는 데스~♪ 콘페이토! 푸드! 모두가 가득가득인 데스우~♪
예쁜 옷을 입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을 누리는 데스우우~♪


새벽.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 친실장은 조용히 일어난다. 낮에 비해 선선해진 공기를 음미하며 곰곰이 생각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정말 쾌적한 곳이었다. 동족과 천적은 드물었고, 모든 것이 풍부했다. 동족들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이젠 자들을 집에 두고 떠날 때마다 불안했다.

어떠하면 좋은 데스....마마.....

자신이 죽인 마마의 이름을 부르며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다시 일어섰을 때, 굳은 결심이 두 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친실장은 조심스럽게 자들을 깨운다. 아직 깜깜한 주변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들.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일찍 깨웠다. 일어났어도 여전히 잠이 깨지 않아 꾸벅거리는 자들에게 선언한다.

이 공원을 떠나는 데스.

그 말에 자실장들은 화들짝 놀라 눈을 끔뻑거린다. 이 공원을 떠난다니...그렇다면 어디로 간다는 것인가. 비록 살기
힘들지만, 이곳은 집이다. 집을 떠나 대체 어디로 간다는 것인가. 그리고 집을 떠나는 순간 죽음이라고 누누이 가르친
것은 마마 아니던가. 자실장들의 표정으로 생각을 읽은 친실장은 이어서 말한다.

다른 공원으로 이주를 할 것이라고. 자신의 마마와 함께 이 공원에 처음 올 때도 굉장히 살기 좋았었다. 따라서 다른
공원으로 이주를 하면 그곳은 굉장히 살기 좋은 곳일 것이다.

근거 없는 전제조건의 오류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실장들은 흥분에 겨워 테치테치 소란스러워진다.

콘페이토도 있는 테치? 달콤한 꿀도 듬뿍 있는 테치? 시원한 물도 있는 테치?
전부 있는 데스~착하게 마마를 따라오면 그곳은 분명 낙원인 데스~

‘테햐아아아....!’

맹렬히 돌아가는 행복회로 속에서 마음껏 만찬을 즐기는 자실장들의 입에는 어느새 침이 고여 뚝뚝 흘러내린다.
친실장은 그런 자들을 재촉하며 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짐이라 해봐야 아직도 잠들어있는 엄지를 등에 업고, 조그마한
물병과 수건이 전부다. 힘이 없어 제대로 놀지도 못하던 자실장들이었지만, 낙원을 약속받아 들뜬 마음에 기운이 펄펄
솟는다. 그곳에 가면 뭘 할지에 대해 재잘거리는 자실장들은 부모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앞서 나간다.

‘데스우.....’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돌아본다. 자신이 자실장이던 시절부터 살아온 집. 여기저기 헤어지고 쓰러져가는 갈색
쓰레기더미에 가까웠지만 그간 피난처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조용히 안녕이라 중얼거리고 친실장은 저만치 가는
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른다.







‘데에....데에에.....데에.....’
‘치이.....’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 기온은 점점 올라가 일가의 체온을 덥히고 있었다. 등에 업힌 막내는 깨어나 울다 지쳐
도로 잠드는 것을 몇 번씩 반복하고 있었고, 자실장들은 기운을 잃고 말없이 땅만 바라보고 걷고 있었다.

‘데스데스우’

휴식을 선언한 어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닥에 주저앉는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달궈진 콘크리트바닥은 연약한
자실장들의 피부에 약한 화상을 입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자실장들은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는다. 열기가 거슬린
막내는 도로 깨어나 칭얼거렸고, 친실장은 그런 막내를 품에 안고 가볍게 흔들어주고 있었다.

‘데에에.....’

이대로는 곤란하다. 목표를 잡은 것도 아니고, 방향을 아는 것도 아니고, 이정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막연히 걷고 있지만 이대로는 도착하기도 전에 탈진해 죽을 것이다.

‘데스우’

조금만 마시는 데스....

어미가 내민 물병에 입을 대고 허겁지겁 마시는 자매. A자 입과 자실장들 체구에 비해 큰 병 입구 때문에 바닥에
아까운 물이 흘러내린다. 텅 빈 페트병을 내던지고 다시 휴식을 취하는 자실장들. 친실장은 별 수 없이 자들이 흘린
물을 할짝거린다.

[끼익-! 쾅!]

갑작스럽게 들려온 굉음. 일가가 모두 움찔한다. 아이들에게 꼼짝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선다. 소리의 근원지에는 천천히 걸어 나가는 인간.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막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희미하게 열리는 문이었다.

인간들의 집들은 언제나 굳게 닫혀있었다. 게다가 위험을 감수하고 접근한다 해도 불쑥 튀어나와 고함을 지르며 발을
휘두르는 인간에 의해 죽어나간 실장석들은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지금 상황이 달랐다. 문이 열려있다. 그리고
인간은 집을 나섰다. 인간의 집이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는 것이다.

섣불리 들어갔다가 인간이 들어온다면? 안에 작은 인간들이 있다면?

아무리 문이 열려있다 하여도 위험요소는 너무나 많았다. 늘 인간을 경계하라 교육받았고, 실제로 그러해야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친실장은 지금껏 인간과 관계되는 것을 적극 피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신념이
흔들린다. 뒤를 돌아보면, 힘없이 늘어져 있는 자실장들. 몸과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있고 숨만 조그맣게 내쉬고
있었다. 불확실한 죽음과 확실한 죽음. 친실장은 불확실한 죽음 쪽에 판돈을 건다.

‘데스데스....데스....’

인간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고하자, 새끼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다. 인간은 무서운 것. 다가가면
죽음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인간이 잠시 나간 데스. 조금이라도 그곳에서 쉬고 가는 데스. 기운을 회복하면 얼른 떠나는 데스....





시원한 인간의 집을 상상하며 자실장들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인다. 좌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집안에 들어선다. 기압 차이로 인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일가는 약간의 기운을 회복한다. 혼적을 남기지 않고
몰래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계획도 무색하게, 더러운 발자국과 똥줄기를 흘리며 일가는 집안에 들어선다.

‘데에에에...!’
‘테츄우....’

다 쓰러져가는 골판지 하우스에게 살던 일가에게 인간의 집은 그야말로 궁전이었다. 높은 천장, 튼튼한 벽, 쾌적한
공기, 은은하게 흩날리는 방향제. 용도를 전혀 모르겠는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선 벽....모든 것이 새로웠다. 낯선
환경에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마치 서울에 상경한 시골촌놈마냥 두리번거리는 추레한 실장석 일가.

‘쿤...쿤쿤...쿤....’

열린 문으로 흘러가는 바람 사이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섞여있었다. 주변을 구경하는 것을 멈추고 코를 벌름
거린다. 어미의 뒤로는 3마리의 자들이 피로도 잊고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었다.

‘데에에엣...!’

친실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탁자 위에 놓인 과자들. 마치 그녀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인 듯 떡하니 거실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탁자의 높이 또한 별로 높지 않아 충분히 손이 닿는 높이였다.

‘테치이잇! 테치테치이잇!’

아이들은 대흥분.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탁자로 달려가 다리를 톡톡 친다. 아무리 점프를 해도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곤 황급히 어미에게 과자를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어미의 얼굴에는 당혹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것은 인간의 음식. 자신들은 인간의 집에 몰래 들어온 상태다. 잠시 기운을 회복하고 인간이 눈치 채지 못 하게 바로
떠날 것인데, 음식을 훔쳐 먹으면 어떻겠는가? 자신이라도 쫓아갈 것이다. 귀한 음식을 되찾고 도둑을 응징하기 위해.

‘데스우...데스데스....’

이것은 인간의 것인 데스....안타깝지만 먹을 수 없는 데스...‘

어미의 설명에 자실장들은 할말을 잃은 채 입을 뻐끔거리고,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진다. 낙원에 대한
희망이 무너지며 그녀들을 지탱하고 있던 힘이 빠진 것이다. 가장 굳세었던 장녀를 시작으로 울음이 전염되었다.

‘테에에엥...! 테에에엥....테에에엥...!’

배고픈 테치....불행한 테치...힘든 테치.....왜 인간들은 모든 것을 가지는 테치이이.....이제 싫은 테치이.....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았던 기특한 자들이었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가 찾아왔다. 먹을 것을 코앞에
두고도 먹지 못 하는 상황.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상황. 아직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엄지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여기에 머무르면 어떠는 테치? 닝겐상을 메로메로 시켜서 애호파로 만들면 되지 않는 테치?

아이다운 발상. 하지만 친실장은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도 들었던 태교노래에는 언제나 애호파와 그에 받아들여진
사육실장생활에 대한 희망과 찬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친실장은 성체였다. 그런 터무니없는 것은 희망하지
않는 쪽이 살아가는데 이롭다. 어렸을 때는 몰라도, 가족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그런 무책임한 도박을 또 다시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굶주린 이 자들만큼은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불쌍한 데스....와타시의 자로 태어나 한 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는 데스.....

친실장의 마음은 조금씩 움직인다. 어차피 몰래 들어왔다. 인간은 전혀 눈치 채지 못 할 것이다. 이렇게나 많다면
조금만 없어진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 할 것이다. 자들이 너무나 굶주리고 있다. 어차피 길을 떠나기 위해선
어떻게든 배를 채워야한다. 인간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제멋대로인 생각으로 합리화를 마친 친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조금...아주 조금뿐인 데스....조금만 먹는 다면 닝겐은 눈치 채지 못 할 것인 데스.....

축 쳐진 아기들의 귀가 발딱 일어선다. 친실장은 가까이에 있던 감자칩에 손을 뻗는다.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통에서 약간 쏟아낸다. 바닥에 입을 대고 쏟아진 과자부스러기들을 입에 넣는 자실장들. 짭짤한 소금과
바삭한 감자맛, 그리고 새콤달콤한 바비큐 양념.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맛에 자실장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이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자신의 실장생이 원망스러워 질 정도로 극치의 맛이었다.

평소였다면 어미에게 먼저 권했을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굶주렸고 너무나 맛있는 과자의 맛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먹기 바빴다. 마지막으로 떨어져 있던 부스러기를 차녀가 날름 집어먹은 것으로 끝으로 자실장들은 감질 나는 식사를
마쳤다. 허나 공북에 먹은 약간의 과자들은 오히려 허기를 부추길 뿐이었다.

배고픈 테치...더 고파진 테치이....너무 적은 테치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애원하는 자들의 모습에 친실장의 마음은 약해졌다. 그래 조금만이다 조금만 더.

어쩔 수 없는 데스...조금...조금만 더 인 데스....

친실장은 아까보단 많은 양을 쏟아낸다. 고소하면서도 톡 쏘는 향기가 친실장의 코를 간지럽힌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 자들의 모습에 조금 호기심이 동한다. 대체 어떻기에.....호기심을 이기지 못 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눈앞에 별이 보일 정도로 아찔한 맛이었다. 너무나 맛있다. 쓰디쓴 잡초와 시큼한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온
친실장의 세상은 새로운 색으로 물든다. 자신 또한 한 번도 먹어보지 못 한 맛이었다. 콘페이토가 있다면 아마
이런 맛일까? 아니다 이것보다 맛있을 리가 없을 터.

우마우마 데스! 우마우마 데스우!

친실장은 통 안에 있는 과자를 모조리 쏟아내고 자들과 경쟁적으로 입에 쑤셔 넣는다. 사방에 침과 부스러기들을
튀기며 달려드는 일가.

‘레에...레츄우우....’

잠결에 들려오는 아삭거리는 소리. 그리고 맛있는 냄새가 막내를 깨웠다. 이내 녀석이 한 일은 울며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것. 친실장은 부드럽게 막내를 내려놓는다.

‘레햐아아아....!’

[조금만]이라는 당부는 더 이상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은 일가. 입 주변에 잔뜩 기름과 양념을 묻히고 입을 놀린다.
행여나 자신의 몫을 빼앗길까봐 눈을 디룩디룩 굴리며 다음 과자조각을 탐색하고, 입안을 가득 메운 음식물을 채
넘기기도 전에 다음 조각을 쑤셔 넣는다.






우마우마한 테츄!
살아있어서 다행인 테치잇!

찍찍거리는 탄성을 내뱉는다. 두 눈에는 기쁨의 눈물, 가랑이에는 새롭게 들어온 음식물의 향이 스며있는 똥이 쏟아
진다. 온 신경과 두 손을 놀리는 언니들 사이로 엄지 또한 뛰어들어 신기하게 생긴 조각을 입에 넣는다.

‘레츄우우웃!!’

수도 없이 물똥이 스며들었다 말랐다를 반복해 딱딱해진 녀석의 팬티는 순식간에 촉촉해졌다. 너무나 맛있다 이것은.
왜 이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는가. 인간의 먹을 것이니 조금만 먹어야 한다는 친실장의 당부를 전혀 듣지 않고
맹렬한 기세로 입에 쑤셔 넣는다.

‘레엑...! 레엣!’

이리저리 부서져 끝이 뾰족하게 된 과자조각에 입술과 입안이 베인다. 상처 사이로는 양념이 스며들어 고통을 준다.
응석받이에다 아주 작은 고통이라도 과민반응하는 막내 엄지였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고통을 참는다 라는, 들실장
치곤 드믄 행동을 보이며 꾸역꾸역 입을 놀린다.

‘테치잇!! 테치테치이잇!!’

더! 더 주는 테치~! 너무 맛있는 테치! 환상의 맛인 테치!!

남아있는 부스러기가 아까워, 바닥에 붙은 조각과 양념을 핥는 막내 뒤로는 자실장 언니들이 폴짝폴짝 뛰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감미로운 맛에 친실장 또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가없었고, 탁자위에 있던 과자들을
모조리 바닥에 쓸어내린다.

‘텟..! 테에에엣!! 테치잇! 테치테치이잇!’

우마우마 테치! 우마우마 테치!

얼마동안을 굶었는가. 얼마동안 헤매었는가. 그 각고의 노력을 보상받아내려는 듯 치열하게 먹는 가족들. 식사에
열중한 이들은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전혀 듣지 못 했다. 문을 닫는 요란한 굉음이 들려서야 오직 친실장
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데에.....’

그곳엔 인간이 서 있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비닐봉지를 들고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내지르는 고함.

‘어....? 어어어!’
‘데샤앗! 데스데스우우웃!!’

잊고 있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자신의 부주의함과 방만함을 자책하며, 자들을 안아 올린다. 하지만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 한 자들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친실장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과자 더미에 입을 파묻기 바빴다.

‘잠깐! 거기....으앗! 냄새!’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 그제야 자실장들은 남자의 존재를 인지하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인간은 처음인
녀석들은 눈을 희동그랗게 뜨고 거인을 올려본다. 거인은 맹렬히 돌격해오는 듯 싶더니면 코를 움켜잡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데스우웃!! 데스우웃!!’

달아나는 데스! 도망가는 데스!!

부풀어 오른 팬티, 산만해진 배로 인해 일가는 뒤뚱거리며 들어왔던 문의 반대방향으로 냅다 달아난다. 따로 퇴로를
봐둔 것은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본능대로 반대쪽으로 뛰는 것일 뿐. 허나 그녀들에게
약간의 운은 있었는지, 보조주방 방향으로 쪽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데스우웃! 데스데수우웃!!’
도망가는 데스! 달리는 데스!!

바닥에 녹색선을 질질 흘리며 달아난다. 공포로 인해 총구 주변의 근육은 더더욱 이완되었고, 쓸데없는 부피를 늘린다.
흘러내리는 팬티를 고집스럽게 입기를 고집하며 달리는 일가. 인간은 아직도 창고에서 뭔가를 찾는 모양인지 우당탕
거리기만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아니 가능하다.

전신을 부딪쳐서 문을 밀어낸다. 열어진 틈으로 빠져나가는 자실장들. 한 마리, 두 마리 , 세 마리...세 마리?

‘데에...데에....데에.....데에엣?!’

한 마리가 부족하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자실장들을 다시 한 번 세어보지만 숫자는 확실하다.
막내가 보이지 않는다!

‘테칫!’

장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보면, 막내가 있었다.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입에 과자를 쓸어 담고 있었다. 뒤로는
과자색깔이 섞인 똥을 그대로 싸재끼며 쉴 새 없이 먹어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과자를 삽입하면 똥을 배출하는 기계와
같이 엄청난 기세로 먹고 있었다.

‘데숫! 데스데숫!’

막내에게 어서 오라고 소리쳐본다. 하지만 생애 첫 감미로운 음식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막내에게 닿지 않는다.
친실장은 고민한다. 그냥 막내를 두고 도망쳐야 하는가. 오만가지 생각이 오가는 친실장의 표정을 읽은 장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애원한다.

막내짱은 아기인 테치!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테치! 막내짱이 없으면 많이많이 슬퍼슬퍼한 테치!

다른 자매들도 어미의 스커트를 붙잡고 애원한다.

막내짱을 구해주는 테치! 가족은 함께인 테치!

애정이 깊고, 어리석은 가족이었다. 생존을 생각했다면 엄지따윈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답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러지 못 했다. 엄지짱은 소중한 막내였다. 다른 가족이었다면 스트레스 해소 내지는 비상식량으로 취급받았겠지만
그녀들은 달랐다. 가장 작았기에 가장 귀여움을 듬뿍 받았다.

친실장은 다짐한다.

걱정마는 데스! 와타시들은 언제나 함께인 데스!

결의를 다지려는 듯 꼭 안아주고 폭발적인 기세로 막내에게 달려간다. 눈으로는 쉴 새 없이 주변 장애물과 인간이 사라진
방향을 힐끔거리며 달렸다. 대체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지체시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된 일이다.

친실장은 막내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그대로 번쩍 들어올린다.

‘레엣...?! 레에에엣!’

입 주변엔 벌건 양념과 녹은 초콜릿으로 범벅이 되어있었고, 완전히 반죽이 된 음식물들이 들어있던 입을 크게
벌리고 꽥꽥 소리를 지른다. 어미는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인간이 왔으므로 도망쳐야 한다고 타이르지만, 모든
생각이 만찬에 쏠려있는 녀석에겐 마이동풍.

‘레에엥!!(우물우물) 레에에에엥(챱챱)!!!’

울기 위해 입을 버렸다가, 행여나 음식물이 쏟아질까 황급히 입을 다물고 우물거리는 짓을 반복하는 막내 엄지.
친실장은 인간의 동향을 확인하며 문으로 달려간다. 자실장들은 영웅적인 엄마의 활약에 박수를 치고 맹렬히 손을
흔들어댄다.

해냈다. 해냈다.

승리를 확신하며 달려가는 그 순간, 손에 격한 통증이 느껴진다.

‘데엣!’

뇌를 찌르는 듯 한 고통. 손을 움켜잡으며 바닥에 구른다. 동시에 벌어진 팔의 틈 사이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

‘데에....’

멀어져 가는 막내의 뒷모습. 아연실색한 자실장들의 얼굴.
4녀는 어미의 손을 깨물어 버리고 과자더미로 달려가는 것이다. 손의 통증도 잠시, 최악의 시나리오가 닥쳤다.

‘잠깐! 멈추라고!’

인간이 나온 것이다. 투명하고 부석거리는 뭔가를 손에 끼곤 달려오고 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커다란 케이지를 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허벅지가 케이지에 부딪치며 내는 굉음은 실장석 입장에선 너무나 기괴스러웠다.

숨을 헐떡이며 과자더미로 질주하는 막내는 고개를 돌려 인간을 발견한다. ‘렛!’하고 짧은 비명을 내지른 막내는...
더욱 속도를 높이기만 할뿐, 방향을 바꾸진 않는다. 작은 뇌로 고작 생각해낸 방책은 인간보다 빠르게 과자더미로
달려가 먼저 먹어치운다...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데에에...데스우우...데스우우우....!!’

억울하고도 속이 타는 심정이 친실장은 바닥을 팡팡 두들긴다. 뒤를 돌아보면 사랑스러운 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가족은 하나다. 헤어져선 안 된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자신이었다. 이를 악물고, 친실장은 지금껏 뛰어본 적이
없는 속도로 달려 나간다. 막내를 구한다. 구해내야만 한다.

과자 더미로 도착해 막 과자를 집어든 막내에게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레챠아앗!! 레챠아아앗!!’

인간에게 잡혔다는 충격일까. 과자를 먹지 못 한다는 충격일까.
실장석마저도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발광하는 막내를 낚아올리곤, 케이지 안에 가둬넣는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메아리 치는 케이지.

‘데스우웃!’
아가야를 돌려주는 데스우웃!

용감하게도, 허나 동시에 멍청하게도 친실장은 인간에게 전속력으로 돌진한다. 필승을 담은 일격에 인간은 간단히
옆으로 살짝 피해버렸다. 추진력이 붙은 친실장의 몸은 그대로 테이블로 처박힌다.

‘데갹!’

또그륵 굴러가는 이빨, 쏟아지는 코피. 황망한 그녀만큼이나 당황한 인간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진다.

‘어...어어...?’
[쾅! 쿠직!]

잠시 모두가 정지해버린다. 문밖에서 응원을 하던 자실장들도, 손을 뻗으려는 자세로 굳어버린 인간도. 그들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머리가 으깨진 친실장의 몸뚱이로. 테이블은 그대로 친실장 위로 쓰러져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으깨버린 것이다. 부들부들 하는 경련도 멈추고, 다리 사이로는 엄청난 양의 대변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레에에엥...! 레에에엥...!’

케이지 안에서 아직도 과자를 달라며 울고 있는 막내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곤 잠시간 정적이 방을 지배했다.
마마가 죽었다. 언제나 머리를 빗어주고, 몸을 닦아주고, 밥을 주던 마마가 죽었다. 엉엉 울고 있는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주던 밤, 특별히 하루 종일 놀아주던 봄날의 기억, 밤하늘을 올려보며 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밤의 기억이
스쳐간다.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던 자실장들의 볼 위로 적록색 눈물줄기가 소리없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분노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테챠아아아앗--!!’

장녀를 필두로 세 마리의 자실장들은 원수를 향해 돌진한다. 본인도 적잖아 놀란 듯 어벙하게 서있는 인간의 바지를
물어뜯고 발등 위로 올라가 콩콩 뛴다.

왜인 테치! 왜 죽인 테치! 상냥한 마마였던 테치!
마마를 살려내는 테치잇!! 마마를 살려내는 테치이잇!!

다리 밑에서 소용없는 짓을 하며 발광하는 자매들을 내려 본 남자는 말없이 그녀들을 모두 케이지에 넣는다.

‘테엣!’ ‘텟텟!’

이리저리 퉁기며 바닥에 콩 하고 처박히는 자매들. 바닥을 두들기며 울고 있던 엄지와 뜻하지 않게 재회한다.

‘레에에엥!! 레에에엥!!’
‘텟승...텟승....’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막내는 과자를 먹고 싶다고 조르며 언니들에게 안긴다. 불쌍한 막내. 불쌍한
마마. 장녀는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쳐대는 막내를 꼭 안아준다.

마마가 죽어버린 테챠아....닝겐이 마마를 죽인 테치이이......

그 말을 들은 엄지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마마가 죽었다? 거짓말! 마마는 강하다. 마마는 언제나 곁에 있다. 똥닝겐
따위 마마한테는 한방이다!

‘레츄우~레츄우우우~~~레프프픗’

거짓말인 레치~분명 와타시의 과자를 독차지 하려는 속셈인 렛츙~♪ 마마는 절대 안 죽는 레치이~

그 순간, 케이지는 바닥에 내려졌다.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인간은 중얼거리며 비닐봉지를 가져온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담는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실루엣. 마마다. 하지만....머리가 없다.

‘레에에...? 레치이? 레치이?’
마마? 마마? 와타시인 레치. 대답하는 레챠

악취를 풍기는 고깃덩이로 변한 친실장은 차례차례 비닐봉지에 담겨졌고, 인간은 그것을 들고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엄지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현실부정을 하는 듯 두 귀를 꼭 막고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레에에....레에에에.....’

아닌 레치...마마는 살아있는 레치....마마는 강한 레치이......
막내짱....
싫은 레치이....싫은 레치이....싫은 레치이.....
막내짱!

장녀의 고함에 엄지는 퍼뜩 고개를 든다.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고, 언제나 쾌활하게 서있던 귀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렇게 강인하던 언니마저도 너무나 무력해보였다. 무섭다. 사방이 막혀있는 감옥에 갇혀있다. 싫다.
또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엄지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장녀는 말한다.

마마는 죽었다. 이제 우리들끼리 살아나가야 한다.

어미가 없는 것을 상상할 수 도 없는 엄지는 고개를 휘휘 내젓는다.

‘레챠아앗!! 레챠아아앗!!’
싫은 레치! 마마를 살리는 레치잇!

장녀는 엄지와 눈을 맞추고 계속 말한다.

엄지짱은 가족의 보배인 테치! 오마에게 희망인 테치잇! 막내짱이라도 살아남아 이 세상에 자들을 잔뜩잔뜩 낳아야하는
테칫! 죽은 마마의 몫까지, 와타시들의 몫까지 행복해져야하는 의무가 있는 테치!

멍하니 자신을 올려보는 엄지에게, 장녀는 계획을 설명한다.

확실히 케이지의 3면은 완전히 막혀있었다. 허나 인간이 열었다 닫았다 하는 문은 쇠창살로 되어있었고, 그 간격은
엄지실장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보통 개나 고양이를 운반할 때 쓰는 케이지로서 쇠창살의 간격이
제법 넓었다.

‘레에엣...!’

나갈 수 있다. 이 무서운 곳에서 나갈 수 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엄지는 토테토테 쇠창살로 다가간다. 두려움 반 희망
반으로 섞인 심정으로 몸을 구겨 넣더니, 쏙 하고 빠져나간다. 성공이다.

‘렛츄!’

기쁨에 박수를 치며, 창살 뒤에 있는 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어서 같이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하지만 자실장들은
고개를 내젓는다. 그녀들에 지나가기엔 비좁았다. 도저히 시도할 것도 없이 확실한 사실.

‘레챠아앗! 레치이이잇!!’
오네챠들이 가지 않으면 와타시도 가지 않는 레치! 언제나 함께인 레치잇!

장녀, 차녀, 삼녀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응석받이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비록 엄지짱은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테치. 착한 실장석은 죽으면 별이 되는 테치. 이미 별이 된 마마, 그리고 조만간
따라갈 와타시들이 엄지짱을 지켜줄 것인 테치

싫다....마마가 죽고 이젠 언니들과 헤어진다니 싫다.....레챠레챠 울먹이는 엄지. 과보호를 받아 언제나 응석받이였던
녀석. 그런 녀석에게 가족과 떨어지라 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다. 하지만 인간이 돌아온다면 자신들은 죽을 것이다.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인간의 집에 몰래 들어와 먹을 것을 훔쳐 먹고, 집까지 더럽혔다. 하지만 막내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

‘테츄테츄우!’
엄지짱 어서 도망치는 테치!

실장석 답지 않게 비장한 표정을 짓는 언니들.

‘레에엥...레에엥....’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엄지는 문으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조금씩 속도를 붙여 전속력으로 달린다. 한번도
뛰어본 적도 없이, 나비씨를 쫓아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뛰고 또 뛴다. 달려가는 막내 뒤로는 언니들의
응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힘내는 테치! 할 수 있는 테치!
막내짱은 일가의 보배인 테치!
와타시들의 몫까지 행복해져야 하는 테치!

‘레에엥...! 레에에에엥...!!’
흘러내리는 눈물로 바닥을 더럽히며 막내는 달리고 또 달렸다. 뒤에서는 인간의 고함이 들리는 듯 한 느낌이 들었을
땐 옆에 있는 수풀로 뛰어들었다.


타박타박 걷고 있는 작은 녹색 생명체. 너무 작아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한참을 찾아봐야할 정도로 작은 녀석이
길을 걷고 있었다. 얼핏 보면 멈춰있는 것처럼 느린 속도로 꼬물거리고 있는 물체.

가까스로 지옥에서 빠져나온 막내는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짜고 단 것을 잔뜩 먹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격렬하게
달린 녀석을 엄습한 것은 극심한 갈증.

‘레에에.....’

마마를 부르려던 막내는 멈칫한다. 더 이상 마마는 없다. 오네챠들도 없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어중간한 시간대였기에 막내는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퇴근 혹은 하교시간이었다면, 그녀는 인파에
휩쓸려 바닥에 널려있는 적록색 얼룩 중 하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의도치 않은 행운에 무지한 채 계속 걷는 그녀의
앞에 뭔가가 눈에 띈다. 쓰레기 봉투였다.

‘레치이.....’

고양이들이 물어뜯어놓은 모양인지, 튿어진 구멍 사이로 길게 국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 행복에 겨운 미소를 띈 채 쭉쭉 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과자를 먹은 이상 그녀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때까진 쉽지 않을 것이다. 실장석의 입맛이라는 것은 실로 간사하여, 높아지긴 한 순간이지만 내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허나 타는 듯한 갈증에 굴복한 막내는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음식물 쓰레기 국물을 핥아본다.

‘레엣! 페! 페페펫!’

끔찍한 맛에 깜짝 놀라 황급히 헛구역질을 한다. 너무하다. 분명 이것은 맛있는 것이었을 터인데. 뭔가 착각이 있던
것으로 치부하고 다시 한 번 입을 갖다 대보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것은 못 먹는 것.

‘레에에......레츄우우.....’

올라갔던 어깨에 힘이 빠진다. 또 다시 정처 없이 길을 걷는다. 이따금씩 멀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몇 분 동안이나 위협을 가하다 다시 길을 걷거니 한다. 작은 막내는 적어도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고 생각했지만, 조그마한 보폭으론 고작 인간의 집 근처를 간신히 벗어났을 뿐이었다.

‘레츄우?’

생각보다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려보지만, 변하는 건 없다. 지칠 대로 지친 엄지는 잔디밭에 들어가 풀썩
주저앉는다. 몸을 쉬게 하니 머리가 움직인다. 죽어버린 마마. 끔찍한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는 그 무시무시한
모습. 갇혀버린 자매들.

‘레에에에엥....레에에에엥.....’

쿨쩍거리는 소리는 점차 흐느낌으로 바뀌었고 흐느낌은 통곡으로 바뀐다.

얼마간 울었을까.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는 꺼져 등가죽에 눌어붙을 정도였다.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서야
자신이 얼마나 배가 고픈지 깨달았다. 주변을 보면 꽃과 열매들이 떨어져 있었다. 허나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강렬한 인간의 화학조미료를 맛 본 이상 막내의 입맛이 내려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레치이.....’

코를 벌름거리며 어딘가 인간이 흘린 맛난 것이 있을 거라 믿으며 조금씩 전진한다. 하지만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테치이?’
‘레에...?’

눈을 감고 후각에 의존하던 엄지는 뭔가에 부딪쳤다. 그녀를 돌아본 것은 멍청한 표정의 들자실장.

‘테츄우?’
‘테치이?’

무슨 일인 테치?
마마가 벌써 돌아온 테치?

뒤로는 저 마다 한 마디씩하며 나오는 일가. 엄지는 다른 동족에게 전혀 면역이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눈앞의
자실장들은 자신을 도와주러온 천사였다.

‘레치이잇!! 레치이이이....레치레치이이!’
오네챠! 와타시의 오네챠들이 잡혀간 레치! 그리고 배도 고픈 레치! 달콤달콤하고 새콤새콤한 것을 주는 레치!

지금 이 순간이 도망갈 때라는 것을 모르는 엄지는 서러운 점을 쏟아내었다. 듣는 입장에서도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엉터리 요구사항들이 쏟아진다. 단순히 사라진 가족들을 찾아달라는 요구부터 맛난 것을 달라는 요구, 슬프니깐 꼭
안아달라는 요구....종국에는 처음 부딪친 자실장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엉엉 우는 엄지였다.

‘테츄우??’
‘테치테치잇!’
‘테프프프.....’

그러나 들실장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그도 그럴 것. 들실장의 생태계는 철저한 약육강식. 동정과 연민은 실장석의
본능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러운 행색에 체구도 작은 엄지는 바로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비참한 실장생이지만
조금이라도 남보다 우월감을 느끼는 분야가 있다면 바로 얕잡아보는 것이 이들의 생태다. 엄지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멸시와....놀이의 대상.






‘테칫-!’
‘레챳!’

이제 막 콘페이토 동산에 데려가 달라고 재잘거리던 엄지는 뒤로 확 밀쳐진다. 뒷통수에 전해지는 아픔과 자신이
밀쳐졌다는 충격으로 울기 전에, 다음 타격이 들어왔다. 뒤에서 구경하던 자실장들이 공격에 합세하여 린치를 가하기
시작한 것.

‘레챳-! 레엣-! 치에엣-!’
‘치프프...치프프.....텟츄웅~♪’

꽃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 다닌다거나 공을 집고 놀기 좋아하는 이미지는 애호파에 의해 의도적으로 알려진 모습이다.
실장석들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동족학대. 어찌 보면 인간에 잡혀 학대당하는 실장석보다 다른 실장석에 잡혀
학대당하는 녀석들이 더 많을 정도로 녀석들은 자신보다 못 한 녀석들을 경멸한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무자비하게 주먹질을 가한다.

이빨은 빠지고 얼굴은 거의 2배로 퉁퉁 부어오르는 막내. 살아생전 체벌은커녕 꾸중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마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언니들의 보살핌을 받아온 엄지에겐 아픔 이전에 당혹감이 가슴을 메웠다.

어째서인 레치....와타시는 사랑받는 레치이....어째서 때리는 레치....아픈 레치이....마마...오네챠...!!

‘레챠아앗!! 레챠아아앗--!’

기세좋게 외치던 호통은 수그러드는 부탁으로 바뀌고 그것이 절박한 애원으로 바뀌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간만에 반응이 좋은 장난감을 얻게 되어 기쁨을 감추지 않고 환호성을 지르며 팔을 잡아당기고 옷을 강제로 벗긴다.

‘츄아아앗--! 츄아아앗!!’
‘테에? 테칫! 테치테치잇!’

강제로 벗겨지는 옷을 보곤 경악을 하는 막내. 머리카락 다음으로 소중한 옷이다. 안돼! 라고 외치며 손을 뻗어보지만
눈 앞에 별이 보이며 뒤로 발라당 자빠진다.

‘치프프프’
흉한 테치 이딴 놈은 버려진 테치. 오마에의 가족들은 다 죽은 테치!
아닌 레치! 아닌 레치!!

머리를 휘저으며 항변하지만 막내의 가슴속에는 점점 부정적인 생각으로 물들어간다. 가족들은 죽었을 것이다. 오네챠
들도 이미 각오를 하고 자신을 탈출시킨 것이 아닌가. 퉁퉁 부은 눈으로 인해 시야가 흐리다. 흐릿한 배경으로 치켜든
주먹을 보곤 눈을 꼭 감지만 충격이 오지 않는다. 두 눈을 꼭 감고 기다리던 막내가 이상함을 느끼고 실눈을 떳을 땐
커다란 성체실장의 얼굴이 보였다. 기쁜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성체실장의 모습에 엄지는 약간 희망을 갖는다.

자실장들은 아래서 재잘거리며 자신들이 잡아온 엄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혹시나 잡아먹히는 것은
아닐까....아픈 것을 싫다. 자신은 살아남아 행복해져야 한다 약속했다.

‘치이이....치이.....’

희번덕거리는 눈길이 무섭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뼈가 부러졌는지 말을 듣지 않는다. 무거운 눈꺼풀을
꼭 닫고 그저 이것이 지나가기를 빈다. 분명 눈을 떳을 때는 상냥한 마마와 오네챠가 달콤한 간식을 준비해놓았을
것이다. 스스로 만든 행복회로에 잠식되기 직전, 귀쪽에 격한 통증을 느끼며 화들짝 눈을 뜬다.

‘레챠아앗--!’
‘뎃스웅~♪’

성체실장이 막내의 귀 끝머리를 물어뜯은 것이다. 아픔을 못 이기고 뼈가 박살난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막내.

성체실장은 그녀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것이다. 맛도 좋고 튼튼한 것을 보니 운치굴에서 비상식량으로 키우기 적당하다.
이런 귀한 식량을 잡아온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친실장. 방금 전까지 사나웠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귀여운
포즈로 애교를 부리며 친실장에게 안기는 자실장들.

‘레에엣--!’

운치굴로 집어던져진 엄지는 온몸을 뒤흔드는 격통에 한 번도 고함을 지른다. 고통을 모르고 자랐던 궁중 규수나 다름
없던 몸으로 하루 동안 얼마나 고초를 겪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막내의 시야는 점멸하다가 어두워진다.


‘.....후.....레후.......레후.....’
‘치이.....’

얼굴 표면에 느껴지는 까슬까슬한 감촉. 그리고 동시에 촉촉한 느낌. 누군가가 자신을 핥고 있음이라. 어쩌면 오네챠들이
살아 돌아와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일까?

오네챠! 오네챠! 사랑하는 레치! 역시 돌아와준 레치!

부어오른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 올려 눈을 떴을 때, 거기에 있던 것은 오네챠들이 아니었다.

‘레후?’

구더기짱. 처음 보는 구더기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한 번 더 레후~하고 울더니 막내의 얼굴을 마저
핥아주었다. 가족 중에 구더기는 없었고, 구더기를 데리고 같이 돌아다니는 실장석도 없는지라, 이것은 막내에게
있어 첫 조우. 그러나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각인마저 감추진 못 했다.

‘레츄우웃-! 레추우웃!’
‘레에에...레후웅~♪’

구더기가 호흡곤란을 호소할 정도로 꼭 껴안는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구더기짱! 구더기짱! 사랑하는 레치! 구더기짱 좋아하는 레치!
레후? 레후우우? 레후레후~

태어나자마자 운치굴로 버려진 녀석들이다.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멍청한 웃음을 방긋방긋 짓기만 할 뿐.
하지만 막내에겐 상관없다. 불행으로 점철된 24시간 중에 최초로 찾아온 행복이다. 구더기짱은 대체 뭘 먹었는지
냄새가 역하였다. 조금 씻어야할 필요가 있다.

‘레에...레에...레에.....’
‘레프프...레프프....’

정성껏 혀로 핥아주는 감촉이 기분 좋은지 구더기는 물똥을 찍찍 갈기며 기뻐한다.

‘레치레치...레치! 렛츄웅~♪’
구더기짱은 영원히 함께인 레치~음...와타시가 오늘부터 구더기짱의 오네챠인 레치~♪

구더기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다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쑥 내려와 구더기를 낚아챈다.

‘레에에?! 레에에엣?! 레챠아앗 레챠아아앗--!’

위를 보면 어제 보았던 무서운 아줌마. 주변으론 자신을 때리던 자실장들이 군침을 흘리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구더기짱을 돌려달라 팔딱팔딱 뛰어보지만 엄지실장의 신장으로는 어림도 없는 깊이.

‘레후웅~♪’

부양감이 흥분된 구더기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 방긋거린다. 다급하게 손을 뻗는 막내에게
꼬리를 흔들며 기쁨을 표시한다. 이렇게 즐거운데 왜 엄지 오네챠는 우는 걸까?


구멍 너머로 구더기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 풀석 주저앉는다. 지키지 못 했다. 가져가 버렸다.

‘레에에엥...! 레에에엥....!!’

그 순간 밖에 들려오는 끔직한 비명소리

‘레뺘아아앗--! 레뺘아아아앗--! [파킨!]’

그들의 목적은 비상식량. 구더기는 오늘 자신이 태어난 목적을 달성한 것뿐이었다. 짧은 비명 뒤에는 정다운 가족 간
대화를 하며 구더기 고기를 먹는다. 입에 피갑 칠을 하고, 자신의 미성숙 자매를 먹어치운 자실장들은 애교 넘치는
얼굴로 어미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운치굴 안에서 엄지는 이 모든 것이 악몽이길 빌며 눈을 질끈 감는다.
그 순간 또 다시 들려오는 울음소리.

‘레후~레후레후우~’

어두운 구석에서 번득이는 적록색 눈동자 한 쌍.

‘치이? 레치이잇-!’
구더기짱이다! 구더기짱이 또 있는 레치! 이젠 놓지 않는 레치! 구더기짱은 반드시 지키는 레치!

‘레후웅~레후웅~’

멍청한 표정으로 처음 보는 엄지의 얼굴을 올려보는 구더기를 안아들고 다짐한다.


‘햣햐--! 얏호! 뒈져라!’
‘...데갸아악....!’
‘치벳!’
‘테챠아아아앗!!’

소란에 졸린 눈을 끔뻑끔뻑 떠본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막내는 더 이상 악취에 코를 찡그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버겁지만 똥도 그럭저럭 먹으며 버티게 되었다. 다리를 가슴팍에 끌어 모으고 구덩이 입구 쪽을 바라본다.
오늘 운치가 떨어지는 것일까? 왜 이리 소란스러운 걸까?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운치굴 안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운치굴 입구를 관찰하는 것. 언젠가 또 다시 손이 내려오면 자신의 차례라는 것도 모르는 녀석은 팔자 좋게
구멍을 응시한다.

[후드드득..]

이날은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았다. 단지 토사가 무너지며 완만한 언덕이 만들어졌을 뿐.

‘레에에.....’
‘레후?’

토사의 언덕으로 꼬물거리며 가는 구더기를 얼른 안아들고 조심스럽게 한발한발 내딛어본다. 아무런 고함도 주먹도
날아오지 않는다. 다 어디론가 가 버린 걸까?

‘레에엣!’

운치굴 밖으로 나오자 비극의 참상을 온전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하던 아줌마와 자실장들은 모두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하지만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더 이상 무서운 것은 싫다. 아픈 것은
싫다. 재빨리 등을 돌린다.

‘레츄웃!’

똥이 찔끔 나올 정도로 깜짝 놀란다. 품에 안긴 구더기가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할 정도로 큰 소리. 무리도 아니었다.
무너진 식량창고와 잡동사니 무더기 사이로는 제각각 사이즈의 옷들이 널려있었다. 그 동안 먹은 엄지실장과 구더기들
로부터 빼앗은 옷들을 바닥보온재로 쓰고 있던 것. 꿈에도 그리던 옷. 구더기를 내던지고 달려가 허겁지겁 손발을
쑤셔넣는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사이즈가 맞는 것을 찾아 헤매는 사이, 구더기는 처참한 몰골의 자실장의
사체를 뜯어먹는다. 옷을 막 입고 그 광경을 본 막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구더기를 떼어낸다.

‘레엣! 레츄! 레츄레츄우웃!’
동족을 먹는 것은 분충인 레치!

맛있는 것을 먹는데 왜 방해 하냐는 듯 반항스럽게 울어대는 구더기. 고집스럽게도 입안에 물고 있는 것을 기어코
꿀꺽 삼킨다.

‘렛후우웅~♪’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물똥을 지린다. 더 달라는 듯 입을 짝 벌린다. 동족을 먹는 것은 분충이다! 절대 안 된다!
이미 운치굴에서 게걸스럽게 똥을 먹는 주제 뭐가 더 추락할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막내의 긍지였다.

구석을 살펴보면 쓸모 있는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구석에 반쯤 부서져 있는 먹이창고. 그곳에는 익숙한 음식들이
보였다. 꽃망울, 말린 벌레, 나무열매, 잡초페이스트....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탄성을 내지르며 달려간 막내는
꽃망울을 집어 들어 잘 씹은 다음 구더기 입에 넣어주었다.

‘레후웃!’

너무나 맛있다는 듯 울어대며 기뻐한다. 막내 자신도 배를 채운다.


‘렛테로게로게~렛테로게에~’

잠시 후 엄지와 구더기라는 흔한 조합의 가족은 무너져 내린 골판지 하우스 안쪽에 앉아 행복의 노래를 부른다.
마마로부터 배운 노래.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맛난 것을 잔뜩 먹고, 자를 가져 온 세상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행복의 노래. 노랫소리에 흥이 난 구더기는 콧김을 내뿜으며 애교를 부린다.

‘레프프픗....’

그 보다 동떨어진 현실에 살며 끊임없이 환상을 바라는 두 자매의 밤은 깊어만 갔다.


[콰과광-! 쏴아아---!]

막내의 다짐은 몇 시간도 가지 못 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자 허물어져가는 골판지는 금방 무너져 두 의자매 위로
물벼락을 쏟아 부었다. 구더기는 심하게 기침을 하였다. 거기에 몸은 심하게 덜덜 떨었다.

‘레에에...레에에에......’

거센 빗줄기는 마치 채찍과도 같이 가녀린 몸을 후려갈기지만 막내의 정신은 오로지 구더기짱에게 쏠려있었다.
구더기짱이 아프다. 온 몸이 차가웠다. 누그러진 골판지 무더기 사이로 최대한 몸을 구겨보아도 소용없었다.
주변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만들어져 사방에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막내와 구더기는 흙탕물로 뒤집어 써 녹색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레챠아아앗--! 레챠아아앗---!’
마마아-! 도와주는 레치! 도와주는 레치이!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주는 레치이잇!!
구더기짱이 아픈 레치! 살려주는 레치잇!

[콰과과광-!]
‘레햐아아앗...!’

우렁찬 천둥소리에 몸을 금방 움츠려든다. 도움은 왜 오지 않은 것일까. 마마가 보고 싶다. 오네챠들이 보고 싶다.

‘레에에엥...레에에에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떨며, 최대한 몸을 웅크려 구더기짱을 감싼다. 구더기의 호흡은 아주 희미해
졌고, 이젠 떨림조차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을 사태가 진정되고 있다고 받아들인 막내는 천천히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내맡긴다.








‘레에....레에에......’

간밤의 폭우로 온 동네가 엉망진창. 완전히 무너져 내려 더 이상 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쓰레기 뭉치. 그 귀퉁이
한 구석이 들썩이더니 조그맣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레에엥...레에에엥......’

서럽게 울어대는 엄지실장의 목소리. 기운도 없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리의 막내. 마마와 오네챠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구한 목숨. 죽어간 가족들의 몫까지 행복해지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그녀. 구더기짱의 새로운 오네챠. 그런 막내는 서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세상이 끝났다는 듯 울어대는
그 목소리는 거슬려, 출근 중인 직장인마저 발걸음을 돌려 짓밟아버리고 싶을 정도.

‘레에에엥....레에에에엥.....’
어째서인 레치....왜 움직이지 않는 레치이이.....무서운 것은 끝난 레치이......

혀를 내밀고, 두 눈은 허옇게 된 구더기를 껴안고 우는 막내는 정신 나간 듯 중얼거린다.

세상에는 맛난 것이 잔뜩잔뜩인 레치....행복한 것이 잔뜩잔뜩인 레치이......움직이지 않으면 못 노는 레츄우?

부드럽게 흔들어보아도 축 늘어진 꼬리와 혓바닥만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어째서 일까. 어째서 마마가 죽어야만 했는가. 어째서 오네챠들이 죽어야만 하는가. 어째서....구더기짱까지 죽는 걸까.
세상은 행복한 일이 가득이라고 마마가 말했다. 언젠가 애호파에게 사육실장으로 받아들여져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엔 무서운 사람들도 많지만, 그만큼 착한 인간도 많다고 했다. 그런데...그런데 왜 그 인간은
마마를 죽인건가. 왜 오네챠들을 죽인건가. 과자를 먹은 것이 그렇게 잘못 된 것이가?

‘레샤아앗--! 레샤아아아앗--!’

밀려오는 부조리함에 사방에 소리를 질러본다. 청명한 아침공기는 고작 엄지실장 따위가 내는 가녀린 소리에 영향
받지 않고 평소처럼 흘러간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다보면 행복도 찾아오고 행운도 찾아온다고 했다.

그런거....거짓말인 레치이.....
사육실장 같은거.....거짓말인 레치이......

막내의 두 눈은 점차 회색으로 물들더니, 이내 [파킨...!]하는 건조한 음과 함께 축 늘어진다.

...







댓글 1개:

  1. 실장석이 현실에 저런 취급으로 있으면 재미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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