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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꽃처럼



- 무얼 그리 빤히 보는거니?


남자는 뭇내 무시하지 못하고 자실장에게 물었다.


그저 공원 벤치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었을 뿐인데


왠 꾀죄죄한 자실장 하나가 멍하니 자기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니.




키워달라고 조르면 걷어차기나하고 먹을걸 달라고 조르면 담뱃재나 털어줄텐데


어째 그냥 입을 헤 하고 벌리고는 자신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건지 자실장은 그저 멍한 표정 그대로 단춧구멍 같은 눈을 떼지못하고 있었다.




- 거참.. 싱거운 녀석.




















조금 이르지만 남자는 재킷을 꺼내어입고 공원을 향했다.


아직 가을 초엽이지만 아침엔 입김이 나올 수준으로 서늘할 때가 있으니까.


평소대로 한바퀴 산책을 마친 뒤 다시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막 커피의 캔을 따려는데 어제의 그 자실장이 꾸물꾸물거리며 다가온다.




- .......




무언가 부탁을 하려는걸까.


손을 등뒤로 돌려쥐고 꾸물거리는 모습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 너구나. 요즘 자주 만나네.


- 테..


-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거니?





남자의 말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자실장이 뒷춤에 감추었던 꽃을 한송이 꺼내어 내민다.




- 받아주었으면 하는 테츄..




남자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커피를 한모금 달라고 한다던지, 날이 추우니 보살펴주었으면 한다던지 정도를 예상했지만



꽃을 내밀며 말을 걸 줄은 생각 못했다.







- 흠... 왜지?


- 닌겐상을 얼마전부터 지켜본 테츄.. 다른 사람들은 항상 밝게 웃고 우마우마한 것을 먹으며 걸어다니는데 닌겐상은 항상 아야아야한 뜨거운 막대불만 마시고 달콤씁쓸만 마시는 테츄.. 항상 어두운 얼굴 테츄..


- 그런데 꽃은?


- 와타치가 가장 좋아하는 꽃 테츄. 언제나 보면 기분 좋아지는 테츄. 닌겐상이 가졌으면 좋겠는 테츄. 와타치처럼 기분 좋아졌으면 하는 테츄.




남자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멍해졌다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자실장의 손에서 꽃을 빼어든다.




- 그래..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


- !!




자실장의 얼굴에도 화알짝 꽃이 피어오른다.


자신의 마마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 자신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감정으로 피어난 것.




- 그런데 이런 걸 받았으니 나도 무언가 돌려줘야겠구나. 무얼 갖고 싶니?




자실장의 미소가 곤란한 얼굴로 변한다. 무언가를 돌려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테츄. 그러면 와타치의 가슴이 이야한 테츄. 왜인지 아픈 테츄.




- ....닌겐상이 활짝 웃어주었으면 하는 테츄.


- 그래. 돌려줄 것이 있어서 기쁘구나.




남자가 조금 쓸쓸한 눈빛이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주자 자실장의 얼굴이 다시 미소로 피어난다.











그후로도 많은 날 남자는 아침마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캔커피를 마셨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옆에 자실장 하나가 앉아있다는 것.



- 그때 왜 나에게 꽃을 주고 싶었던걸까?


- 와타치도 잘 모르는 테츄. 여기가 두근두근 시키는 대로 한 테츄. 열심히 테츄.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길게 한숨을 내쉰 남자가 조금 안쓰럽게 웃었다.




- 니가 준 꽃의 이름은 민들레란다. 꽃의 높이는 너의 두배쯤 될까.


- 테.. 예쁜 이름 테츄.


- 줄기도 얇고 키는 높아서 너로썬 따기 힘들었을거야. 힘들게 힘들게 잡아당겨 꽃을 땃겠지.


- 그런 테츄. 힘낸 테츄.


- 보통은 말야.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일은 다들 하지 않는단다.





자실장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아직 작은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 오직 사랑에 빠진 사람만 그런 일을 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



자실장의 얼굴이 화악하고 달아오른다.


모르던 감정의 이름을 그것을 알게 해준 사람이 알려주었다.




- 난 알고 있단다. 한 때 나도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한 적이 있거든.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




자실장의 눈이 조금 슬퍼진다.




- 너만한 자실장이 혼자 꽃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었을테고 그 줄기를 타는 일도 굉장히 힘들었을거야. 넌 굉장히 헌신적이고 솔직한 마음을 가진 좋은 아이라고 생각이 드네.





남자의 칭찬에 자실장의 슬펐던 눈에 조금 기운이 돌아온다.

좀더 커피를 마신 뒤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자실장이 의외의 말을 꺼낸다.




- 지금 와타치처럼 닝겐상이 슬픈 얼굴을 했던 이유는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테츄?




생각치도 못했던 풍부한 감정의 언어에 남자가 놀란다.




- 글쎄. 사랑을 잃어서 슬픈 얼굴을 한건 아니란다. 다만 생각이 많아서야. 공원을 아침마다 걷는 이유도 슬픈 얼굴을 한 이유도.


- 어려운 테츄..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자실장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후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한번 빨아들인다.




- 그렇다면 하는 테츄! 와타치와 사랑하는 테츄! 닌겐상 항상 웃게 해주는 테츄!




순수함.

여느 미사여구나 현혹의 말을 단 하나도 곁들이지 않은,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말.




남자 자신도 한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 자실장의 마음을 거절해야할 말을 하기 난처해진다.


담배 연기 한줄을 길게 뽑아낸 뒤에 남자는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다.




- 사랑은 그렇게 냉큼 내밀어 이루어지는게 아니란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을 때 고백은 대답을 얻어 말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 닌겐상은 와타치가 싫은 테츄...?


- 싫지 않아. 싫다면 이렇게 나란히 앉아 너와 이야기할 이유도 없겠지. 넌 아주 좋은 아이야.


- 테... 슬픈 테츄.. 와타치 슬픈 테...




남자는 울고 있는 자실장의 옆에 앉아 한참을 침묵을 지키다 이야기를 꺼낸다.




- 옛날에 말이야, 마을을 지키는 용맹한 기사가 있었단다. 모두가 믿고 따랐고 누구나 동경하는 사람이었지.



마마에게서나 듣던 옛날 이야기.

옛날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자실장은 눈물을 닦으면서 귀를 쫑긋 세운다.




- 그런 용맹한 기사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것은 그 마을 성주님의 딸이었어. 성을 감싸고 있는 장미덩굴의 장미만큼 아름답고, 그 가시만큼 아픈 사람이었지.

나날히 커져가는 마음을 남자는 참고 참다, 결국 어느날 밤 그녀가 나와있는 창가 앞에 무릎꿇고 앉아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어.



- 테... 그래서 어떻게 된 테츄?



- 그녀는 거절했어. 그녀의 눈에 그 남자가 용맹한 기사임은 중요치 않았던거야.

정확히는 눈에 차지도 않았던거지. 그렇지만 기사는 포기하지 않았단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겠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던거야.

건넛산 들끓는 화염의 강 성난 용의 목을 베어다 드리면 내 마음을 받아주겠소,

혹은 아랫산의 어두운 굴, 난쟁이들의 보화를 얻어오면 내 마음을 받아주겠소,

그것도 부족하다면 제일 가는 높은 산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바치면 내 마음을 받아주겠소.

하고 말이야.




자실장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 하지만 그녀는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지. 진귀한 공물이나 보화보다는 마음을 증명하라고 말이야.자신의 창가 앞에 앉아 꼼짝도 않고 100일을 버틴다면 그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한거지.

기사는 우직하게도 그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어. 비가 오면 젖고, 눈이 오면 잠자코 얼어붙으며 광풍이 불어도 바위처럼 꿈쩍도 않았지. 심지어 독충과 벌레가 자신의 갑주 안을 기어도 말이야.

그렇게 99일째가 되고 아침이 밝기전, 기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단다.



- 테?!? 어째서 테츄!??! 왜 일어나는 테츄아!??!



- 글쎄.. 잘 생각해보렴.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실장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돌아섰다.



이제 더 이상은 마음이 아파 보고 싶지 않은 뒷모습.



결국 자실장은 말도 안되는 일을, 오직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을 꺼낸다.





- 와... 와타치도!! 와타치도 이 자리에서 100일을 버티는 테츄!! 반드시 테츄!!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뒤돌았다가 더 이상은 웃을 수 없게되었다.

여느 실장석들처럼 값싼 허풍이거나 가치없는 언어를 가진 사람들처럼 가벼운 말이 아니었음을 자실장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 진심이로구나.



- 그런 테츄!!



- ...어떤 일이 있어도?



- 그런 테츄!!



- 내가 너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반드시 해낼 테츄!!






남자는 그대로 등을 돌려 공원을 빠져나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입을 꾹 닫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는 자실장을 뒤로 하고.





그렇게 어둑어둑해지려던 공원에 남자는 다시 나타났다.


모든 실장석들이 초가을의 저녁 추위에 오금을 떨며 박스에 꽁꽁 숨은 것과는 달리


가로수 아래에서 희미한 조명을 받으며 조그마한 몸뚱아리를 바들바들 떨며 자실장은 아직도 서있었다.




- 정말 100일이나 서있을 샘이니. 그건 미련한 짓 이야.




턱이 떨려 한마디 대답조차 하기 힘들어보이는 갸냘픈 모습.


남자는 한참 달을 올려다보다 말을 꺼냈다.





- 너는 그 이야기의 기사처럼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


하지만 깨지지 않는 마음이 있으니 괜찮은 테츄


- 너는 그 이야기의 기사처럼 비와 눈, 바람을 견딜 수 없어.


비님도 눈님도 바람님도 피해주실 테츄.


- 독충이나 벌레에 물려도 괜찮은거야?


괜찮은 테츄. 당신을 위해서라면 괜찮은 테츄.








남자는 커다란 상자를 하나 꺼내어 자실장의 앞에 내려놓았다.



- 하루.



남자의 알 수 없는 말에 자실장이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어올린다.



- 이 상자에 들어가 하루를 땅 속에 묻혀 버틴다면, 그 고독과 두려움을 겪은 뒤에도 여전히 나를 미워할 수 없다면.. 그 마음의 절반을 받아줄게.



- 저...절...반...테...츄....?



- 사랑을 받아주지는 못할테지만..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을 말이야.






남자가 무모한 짓은 그만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절반의 대답에 자실장은 얼어붙은 볼을 눈물로 서서히 녹이며 남자의 손에 스러지듯 기댄다.


말도 안되는 짓,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남자는 자신의 자실장에게 해주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 너처럼 조그마한 몸으로 여기 서있다간 내일 한나절이나 버틸까.





남자는 자실장을 소중히 상자에 넣어 공원의 가장 따듯한 목의 땅을 파 집어넣었다.


한나절 동안 자실장으로썬 견디기 힘들었을 모진 풍파 때문이었는지 자실장의 잠든 숨소리가 상자 밖으로 세어나온다.


남자는 그에 응답하듯 상자의 뚜껑을 톡톡 노크했다.





- 활짝 피어나렴. 처음 보여줬던 미소처럼 말이야.














얼었던 몸이 녹으며 따스하게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자실장은 꿈을 꾸고 있었다.


기사가 사랑했던 장미처럼 아름답고 가시처럼 아팠던 그녀처럼,


자신도 소중한 마음을 품고 흙 속에서 싹을 틔워 아름답게 피어나는 꿈을.





보드랍고 따듯한 흙에 쌓여 막 묻히기 전


누군가가 뚜껑을 톡톡톡하고 두드려 자상한 목소리로 해주었던 말처럼



피어나리라.



100일을 아파할 것에 마음이 쓰여 돌아와


증명의 고통을 따듯한 잠자리로 바꾸어준 그 사람의 상냥함을 위해서.


꼬옥 피어날 것 임을.


흡사, 아니 아마도 기도와도 같은 말을 주문처럼 읊조리며.
















































한편 남자는 군대에 갔다.


~完









어느 챔피언의 위대한 비하인드



펑 펑 펑하는 관통성 있으며 섬뜩한 울림을 만드는 소리가 체육관을 연신 가득 채운다.
그 소리 사이의 공백이 콤마 몇초로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링 바닥을 끼익끼익하고 울리는 발소리가 젖은 면을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흠뻑 땀에 젖은 남자의 머리가 날아온 미트를 피하며 왼쪽으로 크게 위빙하자 기다렸다는 듯 코치의 남은 손의 미트가 오른쪽 관자놀이로 이동한다.




완벽한 타이밍, 저스트 카운터.

그곳을 정확한 템플로 가격하려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멈칫하고 흔들렸다가 힘없이 떨어진다.

코치의 미간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진다.




- .....

- .. 도저히 못치겠어요..

- 한심한 섀끼..!



코치는 미트의 집락도 풀지않고 신경질적으로 손에서 뽑아내 남자의 얼굴에 던져버린다.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잠자코 그것을 맞았다. 아주 침울한 표정이었다.




- 그래서 평생 스트레이트 없이 경기할거냐? 아니, 앞으로 경기나 하겠어?

- .......

- 사람을 때려야 이기는 경기를 한다는 놈이 그런 일에 그렇게 얽매일거냐? 그렇게 평생?!




남자의 팔을 확 잡아 당겨 글러브를 쫙쫙 벗겨내 땅바닥에 던지는 코치. 땀에 절은 밴디지 냄새와 아바테인 냄새가 물씬 풍겨나온다.




- 나가 임마.

- ...아... 런닝하고..

- 집에나 기어들어가 새끼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번주엔 나오지마. 그따위 정신머리로 나와봐야 뭘하겠어. 다음주에도 그 모양이면 내가 직접 발표할 샘이다. 세계 웰터급 챔프 서형두 은퇴라고.




멋대로 자신의 커리어를 박살내겠단 소리를 듣고도 남자, 형두는 힘없이 짐을 챙겨 체육관을 나섰다. 패기없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코치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 형두야. 죽이려고 한 경기가 아니었잖아. 그건 사고였잖아.







정신 없는 속도로 바디와 턱으로 컴비네이션이 쏟아져 들어온다. 배와 등이 관통되는 듯한 통증,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위력에 몸이 꺾여버린다.

머리까지 울려 땀방울이 튀어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 눈 앞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한방울의 땀 사이로 솟구쳐 올라오는 어퍼가 보인다.

ZONE.

인간이 생명을 건 순간에만 발생한다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그 순간.

한 분야의 일류, 그것도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자만이 경험할 수 있다는 주마등과 같은 영역.

형두에겐 그것이 찾아왔었다.

핏방울과 땀방울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어퍼가 슬로우모션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느려진 순간 속에서 두뇌만은 고속으로 회전한다.



코치와 만들었던 최상의 시나리오가 지금임을 번개처럼 깨닫는다.

턱을 비틀어 어퍼를 피하고 그 위로 우반신을 던질 기세로 몸을 회전시켜 오른 주먹을 똑바로 발사시킨다.

이 모든 판단과 행동이 이루어진 시간, 불과 0.34초.

+1도 -1도 없는 완전한 충격값을 완벽한 0의 순간에 대입시켜 적중시킨 그 순간,

형두의 손에서 으적 소리가 난다.


관중들의 환호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했던 그 순간, 오로지 들린건 그 소리 뿐이었고 형두는 자신의 오른 주먹이 부러진 것을 직감했다.

주무기를 잃어버렸다는 절망감이 온몸을 감싼 순간 그것이 오해임을 깨닫는다.

링바닥에 쓰러져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
그 섬뜩한 파열음은 상대의 두개골이 관자놀이를 기점으로 골절되는 소음이었다는 걸 말이다.

1도 부족하지 않고, 1도 과하지 않은, 완벽한 카운터였다고 세계의 중계진들이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낸 그의 라이트 스트레이트 카운터에 '퍼펙트 카운터'라는 별명이 붙은 그 날밤.

그의 허리에 감긴 것을 세계 챔피언 벨트였으나
그의 인생에 감긴 것은 살인자라는 평가였다.

그렇게 자신의 주무기가 피에 물든 흉도가 되고 자신은 한 가정의 가장을 죽인 살인자가 된 것이다.



형두의 눈이 번쩍 뜨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귀찮게 달라붙는다.

그에 못지 않게 시트 또한 땀에 잔뜩 젖은 채이다. 또다시 악몽으로 기상한 형두는 거울 안의 초최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살인자라고 과장해 기사를 낸 언론들도 모두 사과 기사를 내었고 대중들의 평가도 사건의 가해자가 아닌 공동의 피해자라고 돌아선 시기였지만 중요한건 자기 자신의 마음이었다.

형두는 아직도 링사이드에서 절규하며 울부짖다 정신을 잃던 전 세계 챔피언의 가족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방 한구석에 형편없이 팽개쳐져 있는 챔피언 벨트를 잠시간 멍하니 쳐다본다. 저 금속덩어리가 과연 한가정만큼 가치가 있었던건가. 내 주먹으로 이룬 것은 한사람의 죽음인가 한사람의 영광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잡생각을 떨구어낸 뒤 가방을 챙겨 체육관으로 향한다.

바로 오늘이 다시 체육관의 출입을 허가 받은 그 날이었기에.









코치는 계속해서 무어라 설명을 하고 있다. 모니터에 보이는 상대의 모션을 체크하며 습관을 체크하기도 모션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이윽고 그것이 형두에게 전혀 전달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 야 임마..!

- 네.. 듣고 있습니다.

- 듣긴 뭘 듣고 있는데..!! 내가 지금 뭘 설명했냐!!

- 오른쪽 리드를 날리고 습관적으로 왼쪽으로 한발짝씩 이동하는 군요. 그 과정에서 위빙하는 페인트를 넣는데 거기에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넣으면 결정지을 수 있겠어요.




코치가 짐짓 놀란다. 분명 설명을 듣고 있진 않고 있었을테다. 하지만 그저 눈을 모니터에 붙여둔 것 만으로도 상대의 습관을 무의식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역시 이 녀석은 천성이 복서다.

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 그래. 아마 전초전에서 니 오른 스트레이트의 위력을 죽이려고 연습한 모션이겠지. 하지만 왼쪽으로 이동하며 위빙을 하는 나쁜 습관이 고쳐지지 않은게 분명하다. 니 말대로 노릴 점은 여기야. 니 레프트를 이용해 높은 확률로 이 모션을 뽑아내면 어렵지 않게 풀어나갈 수 있을거다.

- ......

- 니가 오른 스트레이트를 날.릴.수.있.다.면. 말이다.



공기가 싸늘하게 굳는다.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는 코치와 마른 침을 삼키는 형두.



- 형두야. 다음 경기에서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니 정신력 뿐이야.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날리는걸 회피하고 있지.

- ........

- 지금 너의 문제는 체력적 훈련 이전의 문제야. 그래서 준비해봤다.

- ...네?


코치가 손으로 가리킨 끝에는 초록색 꼬까옷을 차려입은 실장석이 있었다.
정확히는 썩은 미소를 띄우며 형두를 쳐다보는 실장석이.



- 오마에가 오늘부터 와타시의 똥노예가 되는 닌겐인 데스까? 뭐 면상은 그닥 나쁘지 않은 데스.

- ????? 코치.. 이게 대체???

- 오늘부터 너와 함께 먹고자고 훈련을 하게될 에메랄드다. 길에서 주워왔... 비싸게 사왔지.

- 지금 주워왔다고 하지 않았

- 사왔다. 비싸게. 200만...어... 500만원 주고.

- 지금 가격도 똑바로 말 못했잖아요??

- 무슨 말이 많니. 옷갈아입고 나와. 8킬로 미터 대시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피식피식 비웃는다. 비웃기만 하면 양반이다. 개중에는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배를 잡고 박장대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흡사 말의 얼굴에 고삐를 채우듯 형두의 얼굴에 줄을 달고 있는대로 철썩철썩 고삐를 치며 소리소리 지르는 실장석이 침을 튀기며 기분을 내고 있었기 때문.



- 속도가 겨우 이것 밖에 안나오는 데스야!?!? 정말이지 구제불능의 똥노예인 데스!!



형두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른다. 이마의 힘줄이 꾸불꾸불 올라오는데 정확하게 그 부분을 실장석이 발로 찬다. 말 옆구리를 걷어차는 카우보이의 소우 슈즈가 떠오른다.



- 이 자식이 지금 뭐하는거야아아!!!!


- 감히 어디다 소리를 지르는 데스까!! 한층 더 신나게 달려보는 데스아아아!!!


- 형두 이자식아! 어디다 소리를 질러! 시키는대로 더 빨리 뛰기나해!! 이번 상대의 라운드당 주먹갯수는 널 훨씬 상회한다. 스타일의 차이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을 수준이야! 스테미너를 위해서 고속의 대시로 단련한다!


싸이클로 따라오던 트레이너의 불벼락같은 고함에 형두는 이를 악물고 달린다. 스테미너 조절을 위한거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다만 어째서 실장석을 머리위에 앉혀두고..


- ????


형두의 이마에 초록색 진물이 흘러내려온다.


- 데... 시원한 데스. 역시 유산소운동을 하니 소화가 빠른 데스야.

- 자...잠ㄲ.. 잠깐 너 지금 내 머리 위에다 똥..!!

- 서형두!! 닥치고 뛰기나 하랬지!! 지껄일 여유가 있는걸 보니 아직 체력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 아니 관장님 그게 아니라 이 자식이!!

- 이자식이 뭐인 데스까!! 에메랄드님이라고 부르는 데스!! 건방진 똥노예에에에에!!!!

- 그래 임마! 에메랄드님이라고 똑바로 불러!!



코치의 장난기 없는 얼굴. 형두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뛴다. 얼굴에 흐르는 똥물을 닦으면서.





닭가슴살과 계란흰자, 브로콜리를 갈아만든 죽. 조미료라곤 후추 밖에 들어있지 않은 형두의 감량용 메뉴다.

그것도 역한 가슴살과 계란 흰자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넣었을 뿐 지우개를 씹는 듯한 맛은 변함없다. 안그래도 억지로 삼키고 있는데 그릇 안으로 파편이 튀어들어온다.


- 훌륭한 맛인 데스!! 하지만 굽기가 허술한 데스야!! 어째서 이 정도의 스테이크 밖에 대접하지 못하는 데스!!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는 쓰레기 똥노예인 데스!!!


훙컁훙컁 웃으며 게걸스레 스테이크를 썰어먹고 있는 실장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파편이다. 더군다나 그 스테이크는 감량 중인 형두가 구워준 것. 이것 역시 코치의 명령이었다.


- 야.. 닥치고 먹..

- 에메랄드님이라고 불러.



막 일갈을 하려는 찰나 코치가 또 태클을 넣어온다.



- 애매랄드님......... 입안에서 음식이 튀니 조용히 드셔주십시오....

- 데퍄퍄퍄퍄퍄!!! 조금더 정중히 부탁해보는데스!! 들어줄지도 모르는 데스아!!!!


대화를 포기한 형두는 죽 안에 떠있는 고기 파편을 떠서 옆에 덜어낸다.
먹을 것을 버리는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애매랄드가 슬쩍 그것의 맛을 본다.


- 데...데프....데프프프... 이런 똥같은 것을 먹고 있다니 과연 똥노예에 어울리는 데스!!


실컷 웃던 애매랄드가 형두의 식판 앞에 초록 똥을 푸직하고 싸낸다.


- 이 개자..!!!

- 서형두.

- .......

- 쓸데 없는데 신경쓰지 말고 식사나 해. 그거 다 안먹고 오후 훈련 소화할 수 있어?



트레이너의 싸늘한 일갈.

밑바닥 랭커였던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올려준 사람만 아니었다면 이미 뒤집어 엎었으리라.

은인이기에 쓴 침을 삼킨 형두는 더럽게 식사를 계속하는 실장석의 맞은 편에 앉아 온갖 조롱을 들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여전히 고삐로 채찍질 당하고 똥물을 맞으며 진행되는 대시.

역겨운 식습관을 감상하며 진행되는 식사.

시합 2주전부턴 셰도를 하는 형두에게 고무줄 총을 쏘면서 놀기까지한 애매랄드 덕분인지 감량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다만 그렇게 애매랄드와 함께한 4개월의 트레이닝이 진행되는 동안, 형두의 안은 자신의 손으로 저 세상에 보내버린 선수와 그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대신 시커먼 살의로 가득 찼다.












바늘을 삼키는 심정으로 체육관에 출근한 시합 전날.

형두의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애매랄드가 샌드백에 꽁꽁 묶여있다. 그리고 그 옆엔 코치가 서있다.



- 마음껏 치게 해주지. 다만..




-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 ...형 말하고 있잖니.



허공에 던져진 가방, 휘날리는 상의, 강렬한 대시, 그리고 바닥을 차는 듯한 왼발 스텝인. 그 모든 체중이 허리, 등, 어깨를 회전하여 오른손으로 쏘아진다.

그 순간, 코치가 나서서 그 오른손을 양손으로 쳐낸다.

형두의 번개같은 오른 스트레이트를 쳐내는 코치의 동물적인 움직임은 역시 형두를 세계적인 선수로 벼려낸 트레이너 다웠다.




- 다만, 내일 시합에서 승리하는게 조건이다.



형두의 벌개진 두 눈에 코치조차 움찔하고 만다. 흡사 소싸움전에 채찍질로 달궈진 황소의 벌건눈과 흘러내리는 침 그 자체였다.



- 그 말 확실히 지키는 겁니까?

- 그...그래... 너한테 통째로 주마.



이런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애매랄드가 깔깔 웃는다.



- 데프프프프프!! 어지간히도 학습능력이 없는 데스. 오마에는 와타시에게 손가락 하나 못대는 데스야.












환하게 밝은 천장.

아무것도 들리지 않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청력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환호성. 등이 매트에 닿아있다는 감각.
방금전 본인의 귀를 스쳤던 것이 꿈이 깨지는 소리였던가, 머리가 깨지는 소리였던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보였던 건 번개처럼 빠른 오른손 스트레이트였다.

비참하게도 스스로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던 도전자는 부축을 받으며 링 밖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경기 소감을 인터뷰하기 위해 승자인 형두에게 다가간 아나운서는 자기를 쳐다보는 형두의 벌건 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위축됨을 느꼈다.


- 저... 이... 매번 감량 때문에 힘들어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엔 상당히 감량이 순조로웠던 것 같습니다. 커트라인보다 2kg 더 감량해서 링에 오르셨는데요.


- 이번 감량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아주. 아주 특별했죠. 아주우우!!!!


카메라를 쳐다보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형두를 보며 아나운서가 식은 땀을 흘린다. 질문은 간단했는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가.



- 어... 그... 지난 경기에서의 사고 때문에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었다고 들었는데 이번 경기에선 시작과 동시에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KO를 얻어내셨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큰 문제는 없었던건가ㅇ..!!


형두가 마이크를 화악하고 빼앗아들자 아나운서가 움찔하며 물러난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카메라가 형두의 얼굴을 줌업했다.



- 제가 할 말은 하나 뿐 입니다. 다음은 너야...!!!



핏기와 광기가 서린 눈빛과 섬뜩한 멘트.
다음날 스포츠란의 헤드라인들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극복해낸 챔피언 서형두의 세계 랭커들을 향한 선전포고'

'피바람을 몰고올 세계를 향한 포효'



등등으로 장식되었으나,

형두와 코치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체육관의 샌드백에 묶인 채 TV로 그 멘트를 들으며 팬티에 똥을 지린 실장석의 이름이 애매랄드였다는 것을.









어느 펫숍의 재고 처리법

 

z펫숍의 주인장은 이마를 감싸쥐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지.


얼마나 썼더라.


350만원.


아니지 공임하고 원천기술, 금영 값까지 하면 700정도 던가.


아니지 700이 무어야 생각없이 특허까지 내버린 바람에 1000만원 정도는 쓴 듯 했다.


체인점까지 낼 수 있는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로 번뜩였던 아이디어는 멀고 먼 시장경제를 빙하고 한바퀴 돌아 주인장의 뒷통수를 강하고 치고야 말았다.


멍하니 턱을 궤고 수북히 쌓인 재고를 바라보던 주인장은 홀로 탄식했다.


- 실장석들에겐 행복을, 주인들에겐 안심을.


자신도 모르게 박스에 새겨진 로고를 따라 읽는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이리저리 고민해보았지만 방법은 이것뿐이지 싶었다.

여기저기 돈을 너무 많이 당겨써서 당장 다음달부터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 와 사장님 오셨다!

- 어서 어서 오세요~


z펫숍 사장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z공원 입구에서 신나게 손을 흔든다.

겨울을 앞둔 시점에서 공원의 들실장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자원을 제공하는, z펫숍의 사장이 나서서 만든 자원봉사 모임이었다.

그래도 실장석으로 밥벌어 먹는 자신의 위치도 있거니와, 사정상 반드시 참여해야하는 부분도 있기에 무리를 해서 물건을 챙겨온 것이다.


- 우왁... 사장님. 이... 이렇게나?

- 사료 봉지 몇개 준비해온 제 손이 부끄럽네요..

- 힘든 시기니까요. 조금 무리해서 마련해봤습니다.


실장 한가구당 하나의 물품박스를 준비해온 z펫숍 사장의 큰 배포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만다. 이 정도를 마련하려면 가게가 휘청할 정도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대충 들어보아도 가벼운 주전부리 수준이 아니라 묵직하다.


-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니에요?

- 지금이야말로 무리해야할 때죠.


z펫숍의 사장이 싱긋 웃으며 박스를 내리자 그 미소에 힘이난 자원봉사 인원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차에서 물건을 이어받는다.

모두의 얼굴에 환한 미소.

베푸는 자의 우월감이니, 다른 공원이용자들의 피해를 의식하지 않는 자기만족적이고 이기적인 행위이니 하지만 결국은 좋아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자아의 성취에 중점이 있다.

겨울을 앞둔 어려운 시기, z펫숍의 사장이 내어준 큰 배포에 사람들의 마음이 의욕으로 가득차 오른 것이다.



가을에도 본 익숙한 얼굴들과 반가운 물건들, 맛나맛나한 음식들.

들실장들이 슬슬 봉사인원에게 모여든다.



공원의 수도도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이 중지되었고 얼어붙은 땅 때문에 운치 처리도 제대로되지 않아 모양이 말이 아니다.


흰색인 부분보다 초록색인 부분을 찾는게 더 빠를 앞치마라던지, 롤 모양 그대로 버석버석 떡이 진 머리. 침자국이 굳어 버짐이 된 얼굴과 찐득거리며 안쪽 허벅다리에 달라붙는 녹색 속옷.


다만 모두 초췌하고 굶주린 표정이었다.


간절한 그 표정에 모두들 잠깐 얼굴이 굳었다가 다시 화악하고 펴진다.


'도와야 한다.'


저 이상 저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려선 안된다. 하고 말이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처음으로 손을 내미는 이가 좀 드물다. 사료와 사탕을 눈처럼 뿌려줄 것이라던 여자 회원이나, 보온제를 박스에 채워주기 위해 가져온 청년들 모두 마찬가지다.


- 겁먹을 것 없다. 추위에 지쳐보이는구나. 배도 고파 보이고.


z펫숍 사장이 먼저 말문을 연다. 손에 어느 정도의 사료를 쥐고 무릎을 낮춰 실장석 한가족을 불러본다.

경계심이 남았는지 꽤 잘 참는 모습이었지만, 사장이 사료를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거나 수건이 따듯하다며 볼에 부비거나 하자 어느 정도 다가오기 시작한다.


- 먹을 것이 너무나 빨리 떨어진 데스.. 바닥에 깔아둔 낙엽도 금새 부스러져 추워추워한 데스..

- 그래.. 가혹한 계절이지. 어디보자, 뭐가 좋을까.


사장이 비장의 박스를 꺼내어 든다. 아직 회원들조차 열어보지 않았었기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 자. 박스 바닥에 꼭 맞을 쿠션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줄거야.

- ...데...!


콧물을 주르륵 흘리며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쿠션을 쳐다보던 친실장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자신보다도 자들이 말이다. 얼음바닥 위에서 자는 느낌일진데,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 누구 하나 얼어죽은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쿠션을 꼬옥 하고 안아 얼굴을 뭍은 채 눈물을 흘리는 친실장 옆에서 엄지 하나가 비죽 모습을 드러낸다.

많이 야윈 모습이다. 젓가락 만도 못한 팔두께. 식탐의 종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가는 모습. 사장은 박스에 다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내민다.


아직도 조금은 겁이 나는지 움찔하고 엄지가 굳는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 화안한 미소가 퍼진다. 장난감 공이다. 그것도 엄지가 아주 좋아하는 분홍색. 그것을 들고 자실장 언니들을 돌아보자 모두가 공을 얼싸안고 뒹군다.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쿠션에 고개를 박고 울고있던 친실장이 돌아보고는 빙긋이 웃을 정도로.


- 이것도 받으렴. 쿠션만으론 안돼.


박스에서 제법 두꺼운 수건을 꺼내어 친실장에게 넘겨준다. 쿠션만으로 한품이 가득 찼기에 목에다 두번 정도 둘러서.

그 놀라운 온기에 친실장의 눈이 희망으로 가득찬다.


이 정도면 괜찮은 데스!


이 정도로 따듯하다면 올 겨울을 넘길 수 있는 데스!



그런 희망의 빛이 환히 보인다.

그때 사장의 얼굴이 장난스레 엄숙해진다.


- 에잇! 이 집 장녀는 누구야! 엄마만 짐을 들게 할셈인가!

- 테히... 와타치인 테치!


깜짝 놀라 튀어나온 장녀는 제법 몸집이 있다. 아쉽게도 겨울이 오기전에 중실장을 졸업하지 못한 모양이다. 먹성이야 이미 성체실장 정도였을테니 친실장이 얼마나 힘들었을지야 짐작이 간다. 물론 그럼에도 단 하나의 가족도 버리지 않은 그 모습이 기특하지만 말이다.


- 자 이것과 이걸 받으렴.


실장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 마법소녀 테치카 인형과 요술봉, 그리고 고열량의 사료를 건내준다. 짓소컴퍼니에서 실장석들의 간호식으로 만든 맛과 영양이 풍부한 훌륭한 것이다.

조금 단단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부수어서 나눠 먹다보면 겨울 쯤이야 문제 없이 넘길 수 있다. 단단할만큼 건조된 것이기에 상할 염려도 적고 말이다.


그렇게 박스 안의 물건을 모두 전달받은 가족은 서로를 꼬옥 한번 얼싸 안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장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가족으로써 파탄 직전이었을 것이다. 인간이나 실장석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궁핍하면 그 가정엔 금이 간다. 그리고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로를 탓하고 미워한다. 결국엔 파국.


하지만 지금 이들은 다시금 희망을 찾았고 그것을 통해 다행히도 끈끈히 뭉쳐졌다. 저 말 없는 포옹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사장은 조금 미안해질 정도였다.


이내 그 눈빛을 마주한 실장일가는 사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집을 향해 뛰어 사라졌다.


- 녀석들, 고맙단 인사는 좀 더 후하게 해도 좋을텐데.

- 아니 됐네. 친실장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 바닥엔 쿠션을 그 위엔 수건을 덮어 아이들을 따듯하게 해주고 싶어 마음이 급할 것이고, 자들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리고 맛난 음식에 허기가 돌아 그럴 정신이 없을거야. 이거면 됐네. 이거면 됐어.


멍하니 실장일가를 응시하는 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자원봉사자들은 가슴의 뭉클함을 느꼈다. 박스 안을 가득 채운 물건들 모두 그들에게 정말이지 간절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 또한 실장석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에게도 전달됐음은 당연했다.


- ....대단하세요 정말.


- 내가 무얼. 자 어서어서 나눠주세. 어느새 많이들 모였구만.


일가가 나누어받던 물품을 부러움으로 지켜보는 공원의 실장석들이 어느새 전부 모습을 드러냈다.

혹여 질투에 먼저간 일가에게 피해가 생길까 우려한 사장은 서둘러 스피커를 켜고 실장석 가족들을 일사분란히 줄세웠다.

물건들은 모두에게 돌아갈만큼 충분하며 올겨울도 싸우지 말고 행복하고 풍족하고 지내달라고 전한다.


오래간만에 받은 친절에 수건을 받아들고 눈물을 터뜨리는 친실장, 자신보다 조금큰 테치카 인형을 들고 낑낑대면서도 신이 난 엄지, 이미 봉투를 열어 사료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 욕심쟁이 자실장들의 얼굴에 활짝 핀 웃음꽃.

많은 감정들이 겨울,  z공원의 풍경을 수놓는다.

















그날 밤, 그날을 처음으로 생긴 도메인의 쇼핑몰에는 아주 많은 손님이 물 밀듯 밀려들었다.

별다른 상품은 판매하지 않는, 오히려 의아한 상품만이 즐비한 단촐한 쇼핑몰이었는데

썸네일에는 아기자기한 테치카 인형이나 장난감공, 푹신해보이는 작은 쿠션들, 조금 두꺼운 수건 등이 있었지만 정작 들어가서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은 오로지 해당 상품의 '내부에 들어있는 GPS' 칩으로 그 물건들을 추적할 수 있는 액정 레이더 뿐이었다.

매상이 잘 나오진 않을 법한, 내용물 없는 샌드위치를 파는 듯한 쇼핑몰이었지만 상품들은 금새 매진 마크가 달렸고,

모든 상품이 소진되었음을 알리고 도메인을 닫은 z펫숍 쇼핑몰 주인의 주머니는 다시금 두둑해 졌다.

관련 물품으로 굳이 금속 바나 꼬챙이, 전기 충격기 등등을 팔 필요는 없었겠지.

이미 모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구입했을테니까.



배송이 완료된 이튿날의 늦은 밤. z공원에 드물게 많은 사람들이 스산히 몰렸다.

다양한 연령대의 그들은 모두 일행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서로를 경계하다가 서로의 손에 든 작은 액정 탐지기를 보고는 피식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며 이내 공원의 곳곳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남는 건 적녹의 바닥들 뿐일 것이다.



~完






새벽의 조우




비릿한 웃음을 띄운 남자가 등가방에 잔뜩 짊어진 페트병 중 하나를 꺼내어 위아래로 찰팍찰팍 흔든다.




내부에 가라앉아 있던 푸른색 용액과 투명한 용액이 금새 섞여 보랏빛의 묘한 색으로 발광한다.




남자가 모 싸이트에서 조사해내어 만든 염소용액과 용해액, 실장 코로리 등을 특수배합으로 조합해 만든,


그 용도가 극히 흉악한 제조물이다.



이것을 박스에 부어낸다면?



최소한의 섬유만을 남기고 고열을 내며 녹아내린 박스가 안에서 곤히 잠자고 있던 실장석들을 덮칠 것이다.

이윽고 그들의 피부를 서서히 긴시간 동안 태워갈 것은 물론이며,

위아래로 피와 똥오줌을 흩뿌릴 것이고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위석이 뿜어내는 생명력은 강제출산으로 이어질 것.


산채로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과 채액을 뿜어내며 생명력을 잃어가는 생생한 장면을 상상하며 남자는 공원의 가장 앞에 있는 박스에 당도했다.



슬쩍 박스에 귀를 대어 본다.



흡사 돼지 축사에서나 들려올듯한 게걸스런 숨소리. 어림잡아 친실장 하나에 자실장 네다섯.

우선 시운전을 해보기 위해 남자는 페트병의 뚜껑을 열었다.




- 재밌는 걸 보여줘.




서서히 기울어 가던 병목에 용액의 첫울렁임이 걸리려던 찰나,

무언가가 남자의 팔을 덥썩 잡는다.




- 그만하지.




사랑을 나누던 남녀가 카타르시스의 절정을 느끼려던 순간 방해를 받은 것 만큼, 남자의 불쾌감은 진했다.

서서히 자신의 팔을 낚아챈 손의 얼굴로 불쾌한 눈동자가 움직인다.



키는 160이나 될까.


옷소매 끝단이 낡아빠져 헤질 정도의 차림새에 변변한 외투도 없이 거적을 둘러써 추위를 피하려는 늙은 노숙자의 모습.


불결함을 참지못하고 팔을 획하고 후려 뺀다.




- 뭐야 당신



남자는 노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툭툭 털어내며 있는대로 살기를 뿜어낸다.




- 그런 짓 해봐야 무어 의미가 있어. 그만하지.


- 말릴거면 말로 하지 그랬수? 아 씨발 냄새...




노인의 손이 닿았던 소매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은 남자의 미간이 있는대로 구겨진다.



- 그런 일이 아직 즐겁나?


- 아직? 뭐야. 당신 나 알아?




안그래도 기대하던 순간을 방해받아 기분이 나쁜 참에 어줍잖은 훈계까지 곁들여지자 남자의 인내심이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한다.




- 대충 알 것 같아 그러오. 사람도 없는 새벽 시간대에 얼굴을 꽁꽁 감추고 가방에 이것저것 싸와 음흉하게 웃는 모양새면 말다했지 뭐해.



- 이봐요



- 뭐하러 그러고 살아.




남자의 표정이 없어진다. 팔다리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며 더이상의 대화는 없음을 몸으로 표현하려는데 노인이 자세를 푹 낮춘다.




- ?




쭈그려 앉은 노인이 박스를 열어 안을 보이자 남자가 멈칫 움직임을 멈춘다.



이런저런 얼룩이 잔뜩 묻은 친실장의 품아귀에 꼬질꼬질한 자실장들이 손가락을 빨며 세근세근 잠들어있다. 이런저런 이물이 묻은 낙엽 속에 몸을 묻고 누런 침을 흘리며 자는 모습엔 하루의 노곤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손톱조차 없는 손으로 무얼 그리 열심히 했는지 여기저기 피부가 까져 꺼매진 모습. 아쉬운 식사지만 만족스럽게 마쳤는지 주름이 많이간 비닐봉투는 텅 비어있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친실장의 잠든 표정에 뿌듯함이 자실장들의 표정엔 행복이 묻어있다.




- 게으르고 더럽다고 하지만 아침부터 일어나 고양이손 만도 못한 것으로 이것저것 모으러 다닌다네. 보잘 것 없는 것을 주워 모아와도 웃으며 품에 안기더구만.



- ........



- 다들 그렇게 열심히 살아.





어느덧 남자는 크게 할 말이 없어졌다.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왔던 화도 어느새 식어 있다.

그저 자신을 쳐다보는 노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조금은 부담스러워진다.




- 얼굴과 몸에는 살이 올라 있는데 팔 다리는 가늘고



- ???



- 표정에는 여유도 없어.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라도 생기면 화부터 내지.



- ?



- 세상 사람들하고 썩 다른 차림새로 보면 세상 사람들 살아가듯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시간에 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 마주치기도 무섭지. 하도 오래 방 안에만 쳐박혀 시간을 보내온 탓일게야.




노인이 멍한 눈빛으로 늘어놓는 말에 남자의 화가 다시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 이봐요!! 당신이 뭔데 다 안다는 듯이


- 내 젊을 때 이야기일세.




울컥 목소리를 높이던 남자의 말문이 턱하고 막힌다.




- 원래 사람이란게 그렇다네.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대와 다르게 혼자서 멈춘 시간만 살아가다 보면 그렇게 돼.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남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성격이 되어버리고, 남을 피하고 남에게서 감추고 싶은 자신이 되지.



- ............



- 그러다보면 그렇게.




노인이 흉악한 용액으로 가득차 있는 남자의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 그렇게 아무의미 없는 일에 갈 길없이 맴돌고만 있는 의욕을 써버리게 된다네.





노인의 손이 다시금 남자의 어깨로 올라온다. 여전히 악취가 나는 손이지만 남자는 이번에는 그것을 뿌리치거나 하지 못했다. 아니 뿌리치지 않았다.




- 의욕이란건 살아가는 힘이고 살아가는 힘이란건 시간이란 화폐로 한정이 되어있어 젊은 친구.



- .........



- 자네 나이 때의 사람이 이렇게 살아선 안돼!





지금껏 멍해보이기만 했던 노인의 눈동자에 큰힘이 들어온다. 왜인지 어깨에 올라온 손도 좀더 무겁게 느껴졌다.





- 보아하니 자네는 주저 앉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평범하다고 무시하며 방안에 같힌 자신이 속한 세계, 자신이 관심을 가진 세계만이 특별하다고..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며 고압적으로 살아온 듯 한데..



- 그...렇지 않..



- 날마다 좋은 만남은 가지고 있나?



- 네?



- 꿈은, 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친구는? 꿈을 향해 같이 걸어갈 친구는 있나?



- 꿈은... 없어요..





남자는 문득 지난 2년 동안의 자신을 돌아본다.



군대를 전역할 무렵 넘쳤던 의욕이 무색하게 그가 내민 결과물들을 사회는 매몰차게 무시했다. 자신있게 거리를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아니 한낮의 거리를 걸어본 적이 최근에 있기나 하던가.


점점 작아져 가는 목표를 향해 좀더 작은 태도로 작은 보상을 바라며 자기 자신을 줄이고 줄여나갔지만 최저한의 기대감마저 사회에게 배신당했을 때,



어쩌면 자신은 네모난 방안에 홀로 남아 무신경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조금더 천천히 시간이 흘러갈 것이라고.



최선을 다하는 고통과 그것이 좌절되는 시련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조금이라도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화면 안의 작은 공간에 안주하게 되었을 때부터일까.



남자는 이렇게 으슥한 시간대에 음침한 짓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었을지도.



그렇게 길게 자신을 돌아본 남자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바닥으로 눈물 또한 떨어진다.





- 그렇게 고개 숙이면 안돼.



- ....네...



- 고개를 들고 앞을 보고 아주 작은 일부터. 그래 밝은 낮 아침에 일어나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



- 출근하느라 바쁜 사람들. 이것저것 들추어메고 통화하며 뛰는 사람들, 이미 땀투성이가 되어 빵우유로 목을 축이는 사람들을 주욱 둘러다보면 말이야. 자네도 알게 될거야.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어디에 아직 내 눈이 닿지 않았었는지, 세상에 그림자가 있는 이유는 밝은 곳도 많기 때문이란 것도 말이야.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땅을 쳐다본다.



- 어허. 고개 숙이면 안된다니까.



- 네..



- 그렇게 고개를 들고 주욱 걸어가다보면 자네도 만나게 될거야. 같이 걸어갈 사람. 같이 말을 나누어 볼사람. 놓았던 꿈이나 잊었던 꿈 다.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이 한동안 눈물을 쏟는다. 끄윽 끄윽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노인의 손이 상냥하게 남자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로 어느새 어수룩한 새벽이 겉히고 이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땀을 스윽하고 닦았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박스를 모아봐도 찢어진 것, 젖어서 허물어진 것 등 여간 훌륭한 것이 없지만 역시 실장석들이 덮어쓴 박스는 각도 살아있고 품도 커서 무게도 많이 나오고 훌륭하다.



새벽녘에 나타난 청년 한명이 노인의 소일거리를 몽땅 녹여놓을 뻔 했지만 잘 타일러 돌려보냈으니 다행이었다.



리어카를 가득채운 박스 한짐을 막 힘차게 잡아 끌려는데 친실장 하나가 설움에 눈물을 흘리며 노인을 간절히 올려다 본다.














- 뭘봐 씹새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