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닦이 실장석



나른한 수요일의 점심 시간.
오전 내내 혼자 외근을 가야 했던 바람에 점심도 간만의 혼밥이 되었지만,
일찌감치 혼자서 간단히 때운 덕에 오후 업무에 복귀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다.
직장 생활이 몸에 익으면 익을수록 이런 짜투리 시간이 귀중해지는 법,
산책을 겸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느긋하게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노라니


"데스데스~"


오랫만에 듣는, 그럼에도 대단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울음 소리가 발 밑에서 들려온다.
서울 한복판에 실장석이라?


일단 들실장은 아닐 것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이후 한때는 실장석 대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인간의 영역을 침입하던 놈들은 정부와 국민들이 실장석의 실체와 폐해를 깨달은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전 민관군 합동 대규모 구제와 그 이후 주기적으로 이어지는 철저한 구제 덕에
적어도 인간의 영역에서, 그것도 이런 서울 한복판에서 들실장을 볼 일은 이제 매우 드물다.
뭐 뉴스에 나오기로는 하수구에 숨어 사는 놈들이나 북한산 북악산 관악산 등의 도시 산지로 들어가 근근히 사는 놈들이 아직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키우는 사육실장이라는건데....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사육실장이 주인이 아닌 다른 인간에게 함부로 말은 거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놈은 아무리봐도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고....


음??


허리를 살짝 굽혀 자세히 보니 일단 사람이 기르는 실장석 같기는 한데, 뭔가 다르다.






실장복이라고 하던가? 그 녹색의 옷 위에 까만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한 실장석.
한 손에는 코팅된 종이를, 다른 손에는 어....구두약?
다시보니 까만 앞치마에도 흰색 손글씨로 "구두"라고 적혀 있다.



......뭐냐 이거.
근처의 구두 수선 가판대에서 실장석을 호객용으로 쓰고 있는건가?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과연 가던 길 앞쪽으로 구두 수선 가판대가 있다.
잠깐 당황하고 있자니


"뎃, 데스우, 데스데스"


실장석이 뭐라뭐라 말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코팅된 종이를 나에게 내민다.
틀림없이 호객 행위겠지만, 당황한 나는 무심코 받아든다.


거기에는, 큼지막하게 워드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구두 닦는데스'


어....음.... 이 실장석이 직접 키보드를 두드릴 줄 알았을 리는 당연히 없고.
아무래도 주인이 실장석의 말투를 흉내내어 적어놓은 것이겠지?


그리고 아래에는 약간 더 작은 글씨로 안내문이 적혀 있다.


'인간님의 구두를 직접 닦아드리는데스.'


.....단순한 가게 홍보가 아니라, 너가 직접 닦는거냐?


밑으로는 계속해서 안내가 이어진다.


'인간님이 하시는 만큼 꼼꼼하진 않지만 그만큼 저렴하게 해 드리는데스.'

'불광이나 물광 같은 어려운건 못 하는 데슷! 그런건 주인님께서 잘 하시는데스.'

'복잡한 디자인이나 특수 소재는 다루지 못 하는데스. 그런 구두는 주인님께 말씀하시는데스.'

'수선이나 밑창 교체 같은 어려운 작업도 못 하는데스. 필요하시면 주인님께 말씀하시는데스.'

.

.

.
실장석이 직접 구두를 닦는다고?
그러고보니 뉴스나 신문에서 종종 비슷한걸 본 기억은 있다.
실장석이 철저히 구제되기 시작한 이후, 실장석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두가지 뿐이라고 한다.

인간을 피해 깊은 산 속이나 무인도 같은 곳으로 들어가 철저한 야생으로 꼭꼭 숨어살거나,
아니면 인간에게 도움이 됨을 증명하거나.

전자에 속하는 놈들은 산실장이니 자연실장이니 하는 명칭으로 불리며 종종 다큐멘터리에나 나오게 되었다.

후자에 속하는 놈들은 또 몇 부류로 나뉘는데, 대표적인게 애완용으로 길러지는 애완실장(혹은 사육실장).
완전히 가축화되어 식용으로 키워지는 육실장(혹은 식실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생존을 허락받은 일실장(혹은 노동석).

주로 공장이나 농촌에서 단순작업을 한다지만, 종종 청소나 세탁 같은 조금 더 복잡한 일을 하는 녀석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놈이겠지?
아무튼 뉴스 같은데서 말만 들었을 뿐이고, 직접 보는건 처음이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노라니, 실장석은 또 데스데스거리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유도 있겠다, 그렇잖아도 슬슬 구두 닦을 시기도 다가오겠다,
재미있는 경험을 한다 치고 해볼까?


녀석에게 코팅된 종이를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종이를 받아든 실장석은 또 고개를 숙여 꾸벅꾸벅하고는 따라오라는듯 손짓을 한다.
그리고는


"뎃데로게~ 뎃데로제~"


이상한 노래 같은걸 흥얼거리며 구두 수선 가판대로 앞장서 향한다.



구두 수선 가판대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척봐도 비싸보이는 고급 브랜드 구두를 열심히 수선하는 중이다.
그리고 가판대 옆에는 플라스틱 의자와 발을 올릴 수 있는 작은 받침대가 두 세트.
실장석은 나를 안내해 의자에 앉게 하고는, 가판대 쪽을 향해 데스데스거린다.


그러자 가판대 쪽에서 훨씬 작고 동글동글한 실장석 두 마리가 고개를 쏙 내민다.
아마 이 큰 실장석의 새끼들이려나.
그 조그만 녀석들은 딱히 실장석에 관심 없는 무관심파인 내 눈에도 나름 귀여워보인다.
녀석들은 고개를 내밀어 아마도 그들의 어미일 실장석을 보더니


"텟!!"

"텟치텟치...."


구두닦이 도구가 든 바구니를 손잡이 한쪽씩 나눠들고는 열심히 걸어온다.
그리고 바구니를 발받침대 옆에 놓아두고는 큰 실장석 옆으로 가서 서더니


"데슷"

"텟치"

"텟치"


세 녀석이 동시에 고개를 꾸벅 숙인다.
이거 접객이 제법이잖아?


그러고는 큰 녀석이 본격적으로 구두를 닦기 시작한다.
먼저 바구니에서 솔을 꺼내어 구두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먼지를 열심히 털어낸다.
먼지가 어느 정도 털어지자 칫솔을 꺼내어 흙이 껴 있는 부분이나 뭔가가 눌러붙은 있는 부분을 꼼꼼하게 닦는다.

그러는 동안 작은 녀석들은 그 옆에서 그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큰 놈도 중간중간 새끼들을 보며 데스데스 뭔가 말하는게,
아무래도 새끼들에게 일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구두 표면이 어느 정도 깔끔해지자 솔을 바구니에 꽂고, 구두약을 꺼낸다.
그리고 작은 헝겊을 꺼내어 구두약을 묻히고, 구두에 구두약을 꼼꼼히 바르기 시작한다.

구두약이 다 발라지자 본격적인 광내기.
실장석은 바구니에서 라이터 기름을 꺼내 구두에 듬성듬성 뿌리더니
조금 더 긴 새 헝겊을 꺼낸다.

자세히 보니 흰 헝겊을 길쭉하게 제단해 다듬고, 양 끝에는 골무처럼 홈이 만들어져 있다.
주인이 실장석에게 맞춤으로 따로 만들어준 것인지,
녀석은 능숙하게 양 끝의 구멍에 팔을 끼우고는 힘을 주어 구두를 문질러 광을 낸다.








"데슷! 데슷!!"


제대로 광을 내려면 힘을 제대로 넣어 꽤 많이 문질러야한다.

사람도 하다보면 팔이 아파오는 작업, 실장석에겐 역시 힘이 드는지 얼굴도 제법 벌그레지고 호흡도 가빠오지만,
그럼에도 구령 같은 울음소리를 리드미컬하게 내며 필사적으로 뭉툭한 팔을 움직여 작업을 마친다.
그리곤 한숨 돌린다는 듯 숨을 크게 후우- 내뱉곤
연고 형태로 된 마감제를 새 헝겊에 짜서 구두에 꼼꼼히 바르고, 마무리.


반대쪽 구두도 똑같이 하는 동안 다 닦인 구두를 꼼꼼히 보니 제법 잘 닦였다.
군대에서 광내던 수준엔 다소 못 미쳐도 깔끔하고 반질반질한 것이, 실장석이 닦았다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새끼들도 다 닦인 구두에 희미하게나마 지들 얼굴이 비치는걸 보더니


"츄앗! 츄아앗!"


두 손을 들고 팔짝팔짝 뛰면서 탄성을 지른다.
실장석은 다 지저분하고 징그럽고 하는 짓도 역겨운 놈들이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이건 제법 귀엽다.
이래서 이놈들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건가.....
점심 시간마다 자기 애완 실장석 자랑에 여념이 없는 김대리가 처음으로 이해가 갈 것도 같다.


어느덧 반대쪽 구두도 반질반질해져 있다.


안내문에 써 있던 가격대로 지갑에서 2천원을 꺼내준다.
확실히 사람이 닦는 것에 비해 저렴한 가격이다.

그만큼 광내기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실장석에게 불광 같은걸 요구할수도 없을테고, 그만큼 저렴하니까 오케이.
애초에 난 전형적인 사무직이라 영업직이나 접객업을 하는 사람처럼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하고 다녀야 할 필요도 없다.


실장석은 아직도 내 구두를 여기저기 들여다보는 작은 녀석들을 데스데슷! 자기 곁으로 부르더니 또 고개를 숙여 꾸벅꾸벅하고는 돈을 받아서는 쪼르르 달려가 작업 중인 주인에게 내민다.
주인은 그제야 얼굴을 들어 내 쪽을 보더니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어떻게, 이놈들이 솔찮이 닦습디까? 만족하셨을랑가 모르겠네-"


이제 슬슬 사무실로 돌아가야하지만, 말 붙인 김에 궁금한건 물어봐야겠다.


"아유, 제법 잘 닦던데요? 보는 재미도 있고, 가격도 저렴하고요. 어떻게 이놈들을 이렇게 가르치셨어요?"


구둣방 주인은 작업을 멈추고 허리를 통통 두들기며 설명한다.


"나가 나이를 먹으니 허리도 쑤시고 무릎도 아프고....
이렇게 앉아서 하는 일은 그래도 하겄는디, 쪼그려서 하는 구두닦이는 점점 힘이 부치는기요.
헌데 집에 딸아이가 어렸을 때 하도 졸라서 사다 키우던 요놈들이 눈에 띄지 않겄소?


그렇잖아도 딸애가 중핵교 들어가더니 이녀석들한테 관심도 시들시들혀지고
맨날 혼자 노는게 불쌍혀서 새끼를 까게 허락해줬더니 요 새끼들이 귀엽긴헌데 먹이값도 억수로 드는기요.
없는 살림에 이 녀석들을 어떻게 키워야하나....
그래도 정도 들었겄다,
비싼 돈주고 사온 품종 좋은 놈들이라 그런지 말도 잘 듣고 똑똑한 놈인디 어따 버리기도 그렇고.


헌디 이 영특한 놈이 우리집 사정을 눈치를 쳤는지
지 새끼 밥값 정도는 보태고 싶다고, 집안일이라도 돕겠다고 합디다?

머 가끔 티비보면 청소하고 빨래하고 하는 아들이 나오더만, 그거 보고는 자극을 받은거 가터요.
암튼 그려서 마음이라도 갸륵혀서 재미삼아 구두 닦는거 가르쳐봤더만, 또 금새 배워서 하는기요.
이렇게 헌지 2주 째인디, 손님들도 좋아허시고, 실장석 좋아허는 양반들은 팁이랍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가끔 좋은 구경 했다고 웃돈까지 주시는 손님들도 있습디다.

그러더니 이번 주부터는 지 새끼들도 일 가르친답시고 저렇게 데불고 나오지 뭐요.
덕분에 나도 이문 좀 더 남는 수선 같은데만 집중헐 수 있고, 손님도 늘었지.
아주 기특한 놈이여.

마누라 말로는 요놈들이 사람 손에 길러지면 금새 기고만장해가 멋대로 굴고 비싼거 요구하고 사람을 부리려 든다더만,
어쩌다 우리 집엔 그런 똥벌레 말고 이런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나 몰러. 허허 참!!"


영업용이 아닌 미소로 허허 웃으며 실장석을 쓰담쓰담하는 주인장.
그러자 녀석도 기분 좋은지 뭉툭한 팔을 파닥파닥하며 웃는다.


"데스웅~"


모처럼 상쾌한 기분이 든다. 구두도 깔끔하고, 발걸음도 왠지 가볍다.
또 오시소~하는 주인장과 데스데스거리며 고개를 꾸벅꾸벅하는 실장석을 뒤로하고 사무실로 향한다.
저 녀석.... 저러다 아니 세상에 이런일이나 동물농장 같은데라도 나오는거 아냐?
시원한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걸어가는 나는, 휴식을 마치고 업무로 복귀하는 직장인 답지 않게, 미소를 짓고 있다.


*몇 주 뒤 진짜로 동물농장에 나왔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녀석에게 구두를 닦으려면 줄을 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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