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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와 실장석 일가

 


어느 새벽 늦은 시간에 철웅은 어두컴컴한 자취방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노트북 모니터에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창이 하나 떠 있었고 그 가장 상단에는 '공학의 인문학적 이해 -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소제목이 한가운데에 가지런히 정열되어 있었다. 


철웅은 시계를 힐끗 보았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반. 해당 강의는 오늘 일 교시 아침수업이었고 제출 마감기한이 임박할수록 자꾸만 압박감은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겨우 교양 수업 주제에 교수는 지나치게 열정적이었고 그 덕분에 지금 철웅은 잠도 못 자고 과제에 매진해야만 했다.










'... 네, 그렇습니다. 흔히들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을 도구의 사용여부라고 말하곤 하죠. 인간은 약한 신체능력을 대체하기 위해 적절히 도구를 사용했으며 인류 문명의 발전은 도구의 발전과정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견해는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 쳐도, 인간 외에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게서 원시적인 도구의 사용을 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경우로...'


강의의 막바지에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 주었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의 생태에 대해 관찰한 후 레포트를 쓸 것'. 학생들의 원망섞인 탄식이 강의실을 채웠음에도 늙은 교수는 껄껄 웃으며 그들의 항의를 묵살할 뿐이었다.


'선배. 선배는 어떻게 할 거에요?'


'글쎄다.. 동물원은 가 봤자 소용없을꺼고. NCG 다큐멘터리라도 다운받아 봐야 하려나. 철웅이 너는 어쩔건데?'


'....'


'야, 너 설마..?'


학과 내에서도 괴짜라고 소문이 자자히 퍼진 철웅이었다. 물론 사람의 취미생활이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존중해야겠지만, 하필 그의 취미라는 것이 저 불결하고 더럽고 추악하기 짝이 없는 실장석의 관찰이었으니 남들의 이야기거리가 될 만은 했다. 선배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진짜 할 거냐? 라는 눈빛으로 철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철웅은 이번만은 자기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비록 실장석이 멍청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 생물일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현재 인류에 가장 근접한 사고를 가진 생물임은 틀림없다. 인정하든, 인정하기 싫든 말이다. 세상 어느 동물이 언어를, 문법체계가 잡혀 있고 추상적인 개념도 자유자재로 묘사할 수 있는 고도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동물들의 습성을 관찰함으로써 인간의 공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라면, 돌고래나 침팬지같은 원시적인 기술보다는 그나마 인간의 것을 어설프게 모방했을지언정 우리와 닮아 있는 실장석의 도구를 관찰하는 것이 더 학습의도에 맞는 활동이리라.


그래서 철웅은 공원으로 나섰다.


"야. 이 근처에 가장 똑똑한 일가가 어디 사냐?"


"데프프픗. 똥닝겐이 마침 잘 찾아 온데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 공원에서 가장 세레브한 와타시를 당장 데려가 아마아마한 콘페이토를... 데걋!"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보이는 것마다 골판지 상자 뚜껑을 열고 이리저리 물어 보았지만 대개 돌아오는 것은 보기에도 역겨운 분충성 발언이었고 철웅은 그럴 때마다 더 듣기도 싫어져서는 상자 채로 일가를 뻥 걷어찼다. 어쩜 실장석이란 다 이 모양일까, 하며 짜증이 몰려왔고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는 인내했다. 두 시간을 꼬박 써서 물어가면서, 때로는 고문에 가깝게 추궁한 결과 몇 마리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대답이 있었다.


그들의 어설픈 묘사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능이 뛰어난 실장석이라면 집을 외부 침입자가 발견하기 어려운 곳에 잘 숨겨 놓았을테니. 그래도 그는 부지런히 발품을 판 끝에 한 골판지 박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


"데, 데뎃..!!! 니, 닝겐인 데스! 자들은 모두 마마 뒤로 숨는데스!!"


철웅이 골판지 상자를 열고 인사했다. 별로 위협적인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고 나름 행동을 천천히 해 최대한 그들을 놀라지 않게 하고 싶었는데도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약간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성체실장은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면서 철웅에게 말했다. 꽤나 조심스러웠다.


"닝겐상이 여긴 무, 무슨 일인 데스..? 우린 닝겐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조용히.."


"아냐, 그런 거. 해치려고 온 건 아니니까 무서워할 것 없어. 잠깐 얘기나 하고 싶어서 말이지."


철웅은 잠시 일가를 둘러보았다. 자는 다섯 마리. 성체에 가까운 중실장 하나는 팔을 활짝 펼쳐 최대한 동생들을 숨기려 했고, 자실장 둘은 덜덜 떨면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엄지는 구더기를 품에 안은 채 언니들의 가장 뒤에 자리했다. 가족애는 있는 게 분명.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되 함부로 도발하지는 않는다. 도주에 방해가 될 뿐인 빵콘도 없다. 확실히 잘 찾아오긴 한 모양이었다.


읏차, 하며 근처 풀숲에 앉았다. 인간의 집이었다면 주인의 허락을 구한 후에 들어갔겠지만, 애써 찾은 실장일가의 집을 당장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실장들의 머릿수에 맞춰 여섯 개의 콘페이토를 집 안에 던졌다.


"일단 미리 선물. 내 이야기를 듣고 부탁 몇 개만 들어주면 이걸 다 주지."


그는 그들의 눈앞에 콘페이토 봉지를 흔들었다. 오늘 담배값마저 포기하고 산 고급 별사탕이었다. 아깝지만 별 수 있나.


"코, 콘페이토인 데스? 감사한데스. .. 자들은 함부로 손 대지 않는데스! 장녀는 어서 전부 모아 비상식 창고에 갖다 두는데스."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저 귀한 콘페이토를 눈앞에 두면서도 인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앞에서 먹어치우지 않는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또한 아무리 콘페이토라도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 그 경제적 가치를 생각하면 함부러 낭비할 수 없을 것이다. 철웅은 잠시 이 성체실장은 실장석 기준으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체실장은 철웅에게 꾸벅 허리를 숙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는 데스. 콘페이토를 주셨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성심껏 닝겐상을 돕는 데스."


"아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그냥 내 질문에 몇개만 대답해 주면 돼."


그리고 그는 휴대폰의 녹음버튼을 눌렀다. 자, 뭐부터 물어 볼까.


"너희는 도구를 쓰지?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한 너희가 맨몸으로 들에서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너희가 평소에 쓰는 도구를 나한테 보여줬으면 하는데. 아, 가져갈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잠깐만 보고 돌려줄께. 약속."


"정말인 데스? ... 알겠는데스. 닝겐상께 하나씩 보여드리는 데스."


성체실장은 잠시 불안한 눈으로 철웅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이내 한숨을 푸욱. 어차피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거절은 묵살될 것이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조금이라도 인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요구를 들어주어 얌전히 물러가게 하는 것이 낫다. 성체는 집 구석구석에 보관해 둔 도구를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 이건 뭐지? 전구 같은 건가."


"그런 데스.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안을 환하게 밝혀 집을 보수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데스. 단지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데스. 야생의 삶은 혹독한데스. 대비는 아무리 철저히 해도 과하지 않은데스."


"호오.. 좋아. 그런데 어떤 원리로? 전기가 통할 리는 없고, 건전지가 다 닳면 어떻게 새로 구해서 갈아끼우는 거야?"


실장석은 철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태도가 달랐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스. 와타시는 닝겐상들이 쓰고 버린 고철덩어리에서 재료를 모아 이걸 직접 만든데스."


이것은 생각 외의 성과였다. 실장석 입장에서는, 아니 웬만한 인간에게도 간단한 전자제품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철웅은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인간이 쓰고 버린데서 배선이나 회로를 긁어 모은건가?


하지만 실장석이 다시 말을 이엇다.


"닝겐상들의 쓰레기를 잘 뒤져 본 데스. 운이 좋은 날에는 이상한 빛이랑 열이 나는 따끈따끈한 철씨를 찾을 수 있었던데스. 가끔은 들고 집에 오는 길에 손 씨가 화상을 입긴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가져 온 재료를 모아서 이렇게 유용하게 쓸 수 있었던데스."


"이상한 빛이랑 열... 잠깐만. 그거 혹시 방사능 말하는 거 같은데? 뭐 우라늄이나 그런.. 하긴, 확실히 가전제품을 잘 찾아보면 극미량의 방사능 물질을 발견할 수도 있었겠지."


"그런 데스. 와타시는 닝겐상들이 쓰고 버린 것들을 잘 모은데스. 쉽지는 않았지만 촉매를 사용해서 원자핵 붕괴반응을 조금씩 유도한데스. 발산되는 에너지는 E=MC^2인 데스. 이 원리로 만든 아크 원자로를 이용해서 인간들이 쓰고 버린 전구에 접합해 빛 씨를 부를 수 있는데스. 아마 와타시의 자의 자의 자의 자의 자의 자가 평생 써도 꺼지지 않을 만큼 오래 갈 것인데스."


"... 뭐 좋아. 괜찮네. 다른 것도 좀 보여줄래?"


"알겠는데스. 닝겐상은 여길 보는데스."


성체실장은 집 한구석에 있는 운치굴을 가리켰다. 철웅은 불쾌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굴이나 파서 만ㄷㄴ 자기 화장실을 무슨.. 하는 와중에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저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보통 저 자리는 운치굴이 있을.."


"맞는데스. 운치굴인데스."


"하지만 아무것도 없잖아? 설마.. 배수처리를 잘 해서 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건가?"


"아닌 데스. 물은 귀한 데스. 함부로 쓸 수 없는데스."


실장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타시는 초끈이론에서 말한 다중우주론에 주목한데스. 와타시가 직접 양자역학에 입각한 방정식의 해를 구해서 운치굴 입구에 차원과 차원의 경계와 연결된 워프 포탈을 설치한데스. 저 안은 끝없이 넓어서 아무리 운치를 싸도 냄새가 나지 않는데스. 위생 관리에 이보다 더 유용할 수는 없는데스. 좌표를 조금만 바꾸면 창고로도 쓸 수 있는데스."


"워프 포탈. 다른 우주와 연결. 좋아. 계속."


실장석은 이번에는 커터칼을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이건 평범한 커터칼이잖아. 이 정도는 특별할 것도.."


"아닌 데스. 와타시는 날을 단분자 커터로 개조한데스. 정말정말정말정말로 얇은 데스. 이 날은 딱 분자 한 줄로 이루어져 0에 수렴하는 굵기를 지닌 데스. 그러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튼튼한데스. 이걸로 베지 못하는 물건은 없는데스."


이것도 제법 신기한 물건이었다. 말로만 듣던 단분자 커터라면 이 세상에서 베지 못할 물건이 없을 것이다. 과연 이 정도 무기가 있다면 실장석보다 훨씬 강대한, 어쩌면 중무장한 학대파의 습격도 잘만 하면......


"닝겐상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을 지도 모르지만 와타시의 역작인데스. 와타시타시들은 이걸로 골판지를 도려내 창문을 낼 수 있었던데스. 줄기가 질겨 떼 내기 힘든 나무열매도 딸 수 있었던데스. 이 자의 옷을 보는데스. 와타시가 이 칼을 써서 옷을 예쁘게 도려내 레이스를 만들어 준 데스!"


.... 철웅은 할 말을 잃었다. 실장석은 약간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데에.. 사실은 플라즈마 빔 샤벨을 만들려고 했지만 재료를 아직 모으는 중인데스. 완성되면 닝겐상께 보여드릴테니 한번 더 찾아와도 좋은 데스."


".... 휴우. 좋아. 계속 설명해 줘. 다른 것도."


"반응이 왜 그런데스? 닝겐은 실장석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데스. 와타시도 알고 있는데스. 우리는 닝겐상에 비해 너무나도 멍청한 데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서 도구를 만들어도 인간들의 눈에는 한심하고 원시적이기 짝이 없을 것인데스. 어쨌든... 계속해서 이걸 보는데스."


"작은 고무공이잖아? 이건 뭐야?"


"그냥 공이 아닌데스. 와타시가 개발한 신소재인데스. 기본적으로 탄성 계수가 1이고, 자체적으로 주변의 모든 물리적 간섭을 무력화시키는 데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던져서 벽에 한 번 튕기면 운동에너지 손실 없이 던진 속도 그대로 돌아오는데스. 반복해서 튕겨도 마찬가지인데스. 와타시는 닝겐상들보다 멍청해서 열역학 제 2법칙을 극복하는데도 머리를 한참이나 써야 했던데스."


"정말로? 그럼 거의 영구기관이나 다름없는 걸 발견했다는 건데.. 이걸 어떻게 쓰는거지?"


"보여드리는데스. 엄지는 우지챠를 마마에게 데려오는데스!"


엄지실장이 짧은 다리를 뒤뚱거리며 마마에게 구더기를 내밀었다. 구더기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해맑게 '프니프니후-'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성체실장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엄지실장을 눕혔다. "보는 데스." 하고 공을 살짝 구더기의 배 위에 튕겼다.


"프니프니- 프니프니 기분 좋은레후♪"


"... 맙소사.."


공은 구더기의 배 위에서 튕겼다. 그리고 공중에서 정점을 찍고 중력에 이끌려 다시 내려와 구더기의 배에 튕겨올랐다. 보통의 고무공이었다면 점점 운동에너지를 잃고 그 주기가 짧아져야 했겠지만, 성체실장의 역작은 항상 같은 높이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도중에 멈추지 않는다면 평생을 이렇게 프니프니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엄지도 잘 쓰면 귀한 노동력이 될 수 있는데스. 그런 엄지를 구더기의 프니프니만 시키는 것은 낭비인데스. 차라리 이렇게 자동화된 프니프니 도구를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한 데스."


성체실장이 설명했다. 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근데.. 음.. 뭐. 다 신기하긴 했는데. 마지막으로. 혹시 무기 같은 건 없나? 다 편리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적으로부터 너희 몸을 지키려면 강한 무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는 데스. 끝까지 그 질문은 안 하기를 바랬지만... 물어보시니까 대답해드리는 데스. 아까 보여드린 원자로를 기억하는데스?"


전구의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있는 그것. 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게 만든 도구를 지금은 이렇게 집을 밝히는 데에나 쓰고 있는데스.. 하지만 가끔은 강한 적이 나타나는데스. 고양씨나 빠루를 든 학대파는 보검(못)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적인데스. 그럴 때는.. 슬프지만 저 원자로를 파괴적인 방향으로 쓸 방법을 마련해 놓은데스. 우라늄은 충분한데스. 와타시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악마가 될 각오를 한 데스. 너무 우마우마한 폭발이라 와타시도 일가의 손실을 각오해야 하긴 하지만.."


"너 설마..."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인 E=MC^2. 핵분열 현상을 유도해낼 수단만 있다면 약간의 물질만으로도 막대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었다. 성체실장은 말 없이 긍정했다. 철웅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실장석의 손에 무시무시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단 두 번밖에 쓰이지 않은, 수 십만의 인명피해를 낳은 비극을 불러일으킨.


철웅은 순간 빠루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불쌍하지만 이것들은 너무나 위험한 것을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머리를 날리고 저 원자로를 부수지 않는다면..


"... 단 한번 쓴 적이 있었던데스. 와타시는 적의 눈앞에 전구의 갖다대고 원자로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였던데스. 전구가 과부하로 터져버리면서 열이 열 개가 넘는 파편이 사방으로 튄 데스. 그렇게 전구 하나를 희생시켜서 고양씨를 사살한데스 ... 미안한 데스. 와타시가 끔찍한 얘기를 한 걸 알고 있는데스. 와타시도 다시는 쓸일이 없기를 바라는데스."


철웅은 그 때 삐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고 옆 자리에 두었던 휴대폰 액정에서 갤럭시 로고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런. 밧데리가 나가 버렸네. 어쩔 수 없지.. 이 정도로 자료수집은 끝내도록 할까.







"에라이. 씨발"


철웅은 잠시 한 실장 일가와 함께한 낮의 인터뷰를 회상했다. 화룡점정이라 했던가. 마무리는 항상 중요한 것이다. 그는 여태까지의 기록과 자신의 견해, 그리고 책에서의 인용구를 잘 정리했고, 이제 레포트의 마지막 부분에 짧게 결론을 지을 일만 남아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짧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 이처럼 실장석이라는 동물은 필요에 따라 도구를 사용하고 심지어 제작하기도 하나, 더럽게 멍청하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주목할 만한 의의는 찾기 힘들다고 간주된다.'









뉴턴의 실장권법



옛날옛날에 한 무술가가 있었다. 그는 한평생 혹독하게 몸을 단련했고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는 데에 일생을 바쳐 온 참된 무술가였다. 이미 그는 왕가에서 인정한 챔피언이었고 그에 대적할 수 있는 이는 대륙을 통틀어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무술가는 오늘도 만족하지 않고 더 강해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아. 질렸다. 이건 버려야겠어."


고서점에서 발견한 무술책이었다. 당연히 기초 교본 정도로 익힐 수 있는 테크닉은 이미 마스터한 지 오래였지만, 혹여나 그가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었고 또한 지금의 경지에서 기본을 다시금 공부한다면 다른 깨달음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몰라 구입한 서적이었다.

물론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고, 남자는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책을 공원 한복판에 던져버린다.


"데스우?"


그리고 그 책은 때마침 공원을 배회하던 한 실장석의 눈에 들어왔다.

며칠이 지났다.








실장석이 이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데챠아아아앗!"


"아, 아니..?"


한 남자가 있었다. 어렸을 적엔 나름 촉망받던 인재였고, 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쳐 나름 명문대를 졸업하기까지 했지만, 이 나이까지 먹도록 취직도 하지 못해 고향에 있는 부모님의 집에서 몇 년 동안 밥만 축내던 백수였다. 

그는 오늘도 제 한심한 인생을 비관하며 하염없이 공원이나 거닐던 도중, 웬 겁대가리를 상실한 실장석 하나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장면을 보았다.


"실장권법. 똥닌겐은 이미 죽은데스!"


붕쯔붕쯔. 파파팟. 탁. 

제 모습이 나름 위협적이라 생각하는지 그것은 짧은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두른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수박 겉핥기로나마 격투기를 익힌 듯한 모습이었다.


"덤비는데스. 나한테 지면 집노예가 되는데스."


그것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남자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에 매진해 온 탓에 몸은 약했고, 운동이랑도 담을 쌓아왔던 그였지만 그래도 잘 쳐봐야 제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실장석에게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났는데, 발로 뻥 걷어차버리고 가던 길을 가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러려 했다.


"아아. 갈아입고 오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어요?"


"뎃. 도망치는 데스. 그러나 올바른 선택인 데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적당히 장단을 맞춰서 놀아주는 척이라도 해볼까. 남자는 왠지 온화한 어조로 실장석을 달랬고, 그것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남자의 뒷모습에 대고 비웃는다.


"어이. 왔다구."


"데젝. 갑자기 뒤에서. 무례한 놈 데스우.

데프프. 갈아입으면 더 강해지는데스?"


그는 집에서 무술복으로 갈아입은 이후에 다시 그 실장석을 찾았다. 그것은 어디서 발견했는지 누군가 먹다 버린 사과조각을 질겅거리며 불량하게 앉아 있었다. 어설프게 도복을 차려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그것과 그것의 자는 코웃음을 친다.


구더기 두 마리가 운치의 원을 그려 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실장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독라의 머리에 돌을 내려쳐서 벨로 갈음한다. 


때앵.


"닌겐. 흠씬 패주는데스."


데오오옷!


궤상망측한 기합을 넣으며 그것이 달려들었다. 풍차처럼 팔을 휘두르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제게 달려들어온다고 나름 속도를 내는 꼴이란, 그동안 따뜻한 차 한잔을 끓여서 마시고 와도 될 만큼이나 하품이 나온다.

하지만 남자는 혼신의 연기를 다해 아슬아슬하게 그것의 공격을 피했다. 


"아. 아으윽!"


"똥닝겐. 무술복은 통판인 데스? 폼인 데스? 데프프."


옆차기 세 방이 남자의 복부에 꽂혔다. 물론 타격감이래봤자 토닥토닥 정도. 솜방망이와 비교해도 솜방망이가 화를 낼 정도였지만. 남자는 무릎마저 꿇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가히 골든 라즈베리 남우주연상을 받을 만한 연기력이었다.


"평일 낮에 뭐하는 데스? 그러고보니 똥닝겐 인분충인데스?"

"우가아 !"


나름 피니쉬 무브를 치려는 것인지, 그것은 한쪽 다리를 든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남자를 난타했다. 세상 어느 무술에서 나온 동작인지 우스꽝스러울 뿐이었지만, 거의 남자는 핀치에 몰렸다. 그는 힘이 풀려 맨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정신의 끈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닝겐상! 일어나는데스!"


"우웃? 왓?! 독라투성이?"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 그는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에는 간절히 두 손을 모아 둘의 혈투를 보고 있는 독라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남자가 한 대를 맞을때마다 진심으로 탄식을 흘리고 있었고, 두 눈에서 적록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필사적으로 남자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 일가는 권법을 터득하고 나서 난폭해져서 선량한 우리들은 곤란해진데스."


"공원에 평화를 되찾는데스우!



노력하는데스. 니트라도 좋은 데스!

일어서는데스. 일어서는데스, 닝겐!"


납득이 갈 만했다. 그런 일이 있을 만도 하지.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기초적인 무술동작을 배웠다 정도로도 다른 실장석을 상대로 우위을 점할 수 있었겠지.


"결정타, 데샤뵷!"


놈은 이제 결정타를 날리려 하고 있었다. 남자가 이미 그로기상태라 판단했는지, 이제 끝장을 내기 위해 경계도 없이 큰 동작을 막 시전하려던 차였다. 뭐, 슬슬 질리기도 시작한 참이었고 때마침 저렇게 관객들까지 모였으니까.. 남자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킨다.


"나의 마음을 도려내는 분충은 용서하지 않아요!"


무술도 뭣도 아니었지만 신체능력 자체가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남자는 한참을 달려오던 그것의 머리채를 잡아채버리고는 인정사정없이 그것의 복부를 두드렸다. 불의의 일격임을 차치하고서라도 참피의 나약한 내구도로 견딜 만한 데미지는 아니었다. 놈은 순식간에 분대가 터져버렸고, 적록의 눈물에 입에서는 피까지 토해내며 단 몇 방에 전의를 상실했다. 마마의 승승장구를 지켜보던 자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달아났다.


"테치테치!"

"닝겐상.. 아, 아리가또 데스웅!"


연출이긴 하지만 꽤 극적이라고도 할 만했지.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리던 그가 독라들의 응원에 힘잆어 악의 보스를 처치할 수 있었으니. 지켜보던 독라들 역시 환호하며 남자의 주위에 몰려들었고 남자들은 독라 중 하나를 잡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마치 승자가 챔피언 벨트를 들어올리듯이.




"뎃데로게. 공원수호자의 탄생데스우!"

"아리가또레치!"

"사이코오레치!"


다만. 남자는 그 독라들이라고 특별취급을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어차피 그의 눈에는 똑같은 똥벌레일 뿐이었다. 심지어 옷까지 입고 있지 않음에 더 혐오스럽게 보이기까지 했으니. 남자는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독라를 내팽개쳤고, 그것은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곤죽이 되어버렸다.


"실장에게 격려받은 이 굴욕. 보고 있었던 놈들은 용서하지 않아요!"

"덱, 데갸아악!"

"테차아~!"


순식간에 백 팔십도 태도를 바꾸어버린 남자에게 독라들은 모두 경악했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빠른 것들은 당장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대로 남자의 발길질에 터져나갔다. 물론 어느 쪽이든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이 똥벌레새끼들! 안 그래도 기분 좆같았는데, 오늘 잘 걸렸다. 핫-햐!"









다리에 걸리는 대로 걷어차고, 팔을 휘두르다가 잡히는 대로 후려쳤다. 그 뚱뚱한 몸으로 도망쳐 봤자 남자의 부실한 체력으로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남자는 괴성을 질러가며 주변의 똥벌레들을 척살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던 마지막 녀석을 처리한 참이었다.


"하 씨. 그렇잖아도 이력서 또 떨어져서 열 오르던 참이었는데, 무슨 똥벌레놈들이 사람 기분 잡치게 하고 있어. 덕분에 시간낭비나 하고.."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담배불을 붙인다.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고 뱉는다.

안 그래도 취직은 언제 하냐며 집에서 닦달을 듣고 오던 차였는데. 이 꼴로 집에 들어오냐면 옆집 누구 아들은 어느 기업에 갔다고 자랑하는데, 넌 이제 대낮부터 녹돼지들이랑 놀고 오는 거냐며 욕을 얼마나 바가지로 처먹을지. 그는 욕지기를 씹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오늘은 특히 한심한 짓이었기도 했고. 

아씨. 전공이 그런데 어쩌라고.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이렇게 취직 안 될 줄 알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전망있는 공대나 갈 걸, 괜히 자연대나 가서는.. 머리 끝까지 짜증이 뻗쳐올라서는 남자는 쥐고 있던 참피 하나를 저 멀리 던져버린다.


"그래. 씨발. 날아가라. 짜식이, 멀리도 가네."


데갸악 하는 비명이 멀어지면서, 참피는 수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남자가 집어던진 힘을 실어 저 높이 솟구치다가도, 으레 그렇듯이 땅으로 이끌려 떨어진다.

잠깐만.

떨어진다? 


"아.. 하하. 그래. 그거였어. 그거였다고!"


불현듯 무언가가 그의 뇌리에 스쳤다. 그래, 왜 그걸 여태 당연하게 생각한거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이지만 왠지 모를 확신히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남자는 황급히 짐을 챙겨 집으로 달려간다. 실장석들을 두드려 패느라 이미 체력은 많이 소진된 상태였지만,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도 잊은 채로 무언가에 홀려 그의 서재로 우당탕 올라갔다. 

참피들의 운치를 잔뜩 묻힌 그 꼴에, 그리고 그 냄새에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그에게 향하는 힐끗거림, 그리고 쑥덕임. 심지어 주방에서 들려 오는 지긋지긋한 엄마의 욕마저 지금만은 귀 너머로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참을 잊고 있던 전공서적을 펼쳤다. 미친 듯이 노트에 무언가를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표했다.








완벽한 분충



"그럼, 미도리 회사 다녀올께."


"주인님. 다녀오시는데스."


"하하. 그래. 자들이랑 재밌게 놀고 있으렴."


토시야키의 말에 미도리는 짧은 다리를 총총거리며 현관까지 달려왔고 그리고 꾸벅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런 미도리의 뒤를 따라 여러 마리의 자실장들 역시 뒤뚱거리며 다가와 주인을 배웅했다.



그들을 볼 때마다 토시야키의 기분은 한 층 더 좋아졌다.

오늘도 지긋지긋한 출근이라는 생각에 하루의 시작부터 기분을 잡치기 십상인 아침마다

그가 기르는 사육실장들을 바라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이 나는 토시야키었다.


운 좋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사회 초년생 무렵에 처음 느낀 독신 직장인의 적적함을 그는 견딜 수 없었고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달래고 싶은 생각에 집에 들여놓은 사육실장은 요즈음 토시야키의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샵에서 추천하는 세레브 개념실장을 구입할 여력이 없어

오천 원 하는 일반 성체실장을 구입할 때 까지만 해도 큰 기대는 걸고 있지 않았으며

분충끼가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당장 처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 기적적으로 이 싸구려 성체실장석은 정말 예의가 발랐고 아무 데서나 빵콘을 하는 등의 일도 없었다.

오히려 토시야키를 주인으로 극진히 섬기면서 소소한 집안일을 돕기도 했고

지친 심신을 끌고 쳐져 있는 토시야키에게 와서 애교까지 부릴 줄 아는 완벽한 개념개체였다. 


그 덕분에 토시야키 또한 그의 사육실장에게 많은 편의를 베풀어 주었다.

실장석들의 꿈인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고 집을 어지럽히지 않는 선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좁은 우리의 문은 항상 열어 주었으며, 최고급 사육용품은 아닐지라도 여건이 되는 대로 그것이 좋아할 만한

놀이기구와 옷 역시 구입했다. 심지어는 그가 집을 비울 때에 심심할까봐

자를 가지는 것 역시도 허락해주었던 것이다.


"참. 깜빡했다. 자, 실장채널 여기 틀어 줄 테니깐 보고 있어."


심지어 미도리는 자실장들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엄격하게 훈육하기도 했다.

토시야키의 집에 분충 따위는 없었고, 한 인간과 여러 마리의 실장석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현관문이 닫혔다. 집 밖에서 토시야키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미도리는 잠시 멍하니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토시야키가 충분히 멀어졌다 싶을 때 쯤에

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놀랍게도 그것은 초승달 눈을 한 채 씨익 웃고 있었다.


"데프프프. 멍청한 똥닝겐인데스."


"치프프, 마마의 연기력은 언제 봐도 훌륭한테치.

똥닝겐이 감쪽같이 속아넘어간테치."


"데프프. 그런데스. 똥닝겐은 아직도 와타시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실장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한데스.

와타시의 천재적인 머리속에 우마우마한 계락이 있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데스."


분위기는 백 팔십도 변했다. 미도리와 자실장들은 전형적인 분충 미소를 띤 채로

이 자리에 없는 토시야키를 비웃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계속 데프프 치프프 거리면서

A자 모양 입에 손을 얹어 터져나오는 웃음을 가렸다.


영문을 모르고 있는 것은 우지챠 하나 뿐이었다.


"레후? 주인님 바보 레후? 우지챠 이해가 안 가는 레후. 왜 주인님이 바보인레후?

마마랑 오네챠들은 무슨 계략이 있는 레후? 우지챠 어려운 거 모르는레후."


"똥닝겐을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뎃샤!"


신경질적인 한 마디와 함께 강력한 실장 펀치가 구더기의 안면을 강타했다.

구더기는 렛뺘 하는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구르더니 입에 거품을 물었다.


"저런 멍청한 우지챠가 와타시의 자라니, 믿을 수가 없는데스. 우지챠는 입 다물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데스.

데프프.. 지금은 와타시가 똥닝겐을 방심시키려고 잠시 굽히고 있을 뿐인데스.

잠시만 기다리는데스. 똥닝겐이 빈틈을 보이기만 하면 와타시의 우마우마한 실장 권법으로 굴복시키고

단번에 독라로 만들어버리는데스. 똥닝겐은 우리 노예가 되고 이 집은 세레브한 와타시의 것이 되는 데스."


미도리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과연 그 깊이조차도 짐작할 수 없는 적록의 눈동자는 무시무시한 야망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천박한 웃음 속에는 조조 맹덕의 야망이 숨겨져 있었고 그 머리속엔 제갈공명의 지략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친실장과 자실장들은 사악하게 웃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며.




*    *    *    *




미도리 일가와 토시야키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는 미도리가, 그 뒤를 이어서 자실장들이 순서대로 가지런히 한 줄로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데스데스, 테치테치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리고 그 가장 뒷쪽에는 토시야키가 경호도 할 겸 통솔도 할 겸

그들을 높은 데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운치는커녕 때 하나 묻어 있지 않는 깔끔한 실장복과 잘 정리한 머리

그리고 목줄 하나 없음에도 누구 하나 대열을 이탈하는 일 없이 질서정연하게 걷고 있는 모습.

도중에 들실장이나 다른 닝겐을 만나더라도 비웃거나 투분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들실장에게는


다정하게 푸드를 나누어주며 격려하고, 닝겐에게는 한 쪽으로 길을 비켜 주며 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분충 들실장에게도 폭언이나 폭력을 가하는 대신에 그러면 안 된다고 엄하게 타이르곤 했다.


그들을 구경하는 공원의 다른 애호파의 얼굴에 웃음이 도진 것은 물론,

빠루를 들고 배회하는 학대파마저도 쉽게 시비를 걸기가 힘든 그림이었다.

타인의 사육실장을 건드렸을 적의 뒷감당도 그렇고, 비록 학대파의 본능에 걸려  찜찜하긴 했지만

저렇게 한 손에 비닐봉투를 한 손에 나무젓가락을 들고 공원의 작은 쓰레기들을 줍는 저 일가에게

학대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미도리의 생각은 달랐다.


"데프프. 자들은 보는데스. 똥닝겐들은 하나같이 전부 멍청한데스. 와타시가 조금만 연기를 해도 감쪽같이 속아서

헤벌레 하는 저 표정을 보는데스. 이러면 계략은 식은 죽 먹기인데스. 어쩌면 이 똥닝겐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똥닝겐을 우리 노예로 부릴 수도 있을 것인데스. 자들은 마마만 믿고 따르는데스."


"테치이.. 마마. 똥닝겐이 조금 이상한데스. 저길 보는데스!"


한 자실장의 짧은 팔이 어딘가를 향했다. 미도리는 무슨 말이냐며 얼굴을 살짝 찡그리다가

자실장의 팔 끝이 향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정 반대쪽에 있는 토이야키를 돌아보고 미도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똥닝겐이 저 암컷닝겐을 보고 있는테치. 움직이지도 않는 테치!"


"데프프. 똥닝겐도 꼴에 마라는 달린 데스?"


"무슨 말인 테치? 와타치는 잘 모르겠는테치."


"데프프. 모르는 것도 당연한데스. 마마처럼 나이를 먹으면 다 자연스레 알게 되는데스."


자실장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있었지만 미도리는 다 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킥킥거렸다.

자실장의 손 끝에서 토시야키는 입을 헤 벌린 채로 한 젊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장석인 미도리야 인간의 미적 기준을 알 수가 없었지만, 간간히 토시야키가 보는 티비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암컷 닝겐들과

비슷한 점이 많은 여자였다. 날씬하고 다리도 길고, 피부가 뽀얀 등등. 


"보는 눈도 참 없는 똥닝겐인데스. 저런 멍청한 암컷 닝겐이 어디가 예쁘다고 메로메로된 데스??


"메로메로? 메로메로인테치?"


"그런데스. 차라리 와타시에게 메로메로되어서 노예를 자처한다면 받아주려 한 데스. 괘씸한 닝겐인데스."


정황상 미도리는 저 여자가 똥닝겐들 사이에서는 꽤 매력적인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토시야키가 저 여자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지금이 와타시가 나설 때인 데스."


"테에? 마마 무슨 말인 테치?"


"아직도 모르겠는데스? 데프프. 수컷이란 다 똑같은데스. 암컷에게 메로메로된 수컷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해지는데스.

세레브한 와타시가 몸소 나서서 저 암컷닝겐이랑 똥닝겐을 이어주는데스. 그러면 똥닝겐은 암컷에게 푹 빠져서

빈틈을 보일 것인데스. 그 때를 노려서.... 확 하고 제압하는데스!"


'마마 똑똑한테치' '마마는 천재인테치' '너무 치켜세우지 마는 데스'등의 실없는 몇 마디를 나눈 후에

미도리가 데스데스 하고 여자에게 걸어갔다. 순간 토시야키가 정신을 차리고 어어 하며 만류하려고 했지만

미도리는 듣지 않았다. 




*    *    *    *



"어휴. 이 귀여운 짜식! 하하. 참. 요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 응?"


토시야키의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운 좋게도 그 여자 역시 사육실장을 데리고

산책을 하러 나온 애호파였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한 미도리의 접근은 큰 효과가 있었다.

뻔한 레파토리였다. 어디까지나 미도리는 같은 사육실장을 만나 반가워하는 척을 할 뿐이었고

토시야키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그녀는 토시야키에게 어떻게 이렇게 교육을 잘 시켰냐고 감탄,

마지막은 실장 사육에 관한 노하우를 교환하자는 핑계로 번호 교환.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연애라고는 전혀 하지 못한 토시야키에게는 꿈만 같은 날이었고

이 모든 것은 미도리 덕분이었다.


"그래. 돈이 문제냐? 오늘은 너희들이 좋아하는 스테이크 파티다. 

한 달치 월급 다 털어주지. 짜식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 형아가 가서 소고기 사 올테니까."


토시야키는 신이 나서 없는 형편을 짜내어 그들에게 특식까지 사 줄 작정이었다.

스테이크 스시를 입에 달고 살지만 세레브 실장이 아닌 이상에야 평범한 실장석들은 운이 좋아야

콘페이토나 가끔씩 입에 댈까 말까 한 형편이었다.

철저하게 개념실장 연기를 하고 있던 그들도 스테이크라는 말 앞에는 웃음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데프프. 똥닝겐이 소고기를 사러 간 데스."


"멍청한테치. 와타치타치들한테 얼마나 선물을 주고 싶었으면 문도 닫지 않고 간 테치?

마마. 이 정도면 저 닝겐도 똥노예로 인정할 만 하지 않은테치?"


"기쁜 마음은 알겠지만 자는 방심하지 않는데스. 데프프프. 아직은 때가 아닌데스.

일단 문을 닫는.... 데스? 오마에들은 누구인 데스?"


토시야키가 열어놓고 나간 현관문을 닫으려 나간 찰나에 미도리는 눈앞의 불청객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원에서부터 따라온 한 무리의 꼬질꼬질한 들실장이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잘 벼려진 보검을 들고 있었다.


"와타시가 이 집의 사육실장인데스?"


"그, 그런데스. 와타시타시들은 누구인 데스까?"


미도리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도리가 한 번 뒷걸음질을 칠 때마다 한 발자국씩 접근하며

서서히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데프프. 우리는 이 똥닝겐의 집을 점령하러 온 데스."


"데, 데에..?"


"길게 말하지 않는데스. 본론만 말하는데스.

오마에는 와타시타시들에게 협력하는데스. 우리랑 손을 잡아 똥닝겐을 죽이고 이 집을 차지하는데스.

와타시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는데스. 전리품은 함께 나누고 같이 살아가는데스.

어떤 데스? 오마에에게도 손해가 아닌 거래인데스. 거절하면.. 똥닝겐과 함께 죽음뿐인데스."


어느새 들실장들은 우르르 집 안으로 몰려와 미도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이 치켜든 보검 끝이 날카롭게 빛났고, 미도리는 긴장하며 자들을 감싸며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사육실장인 미도리가 알 리가 없었지만 그들은 최근에 공원에서 악명 높은 약탈자 무리, 즉 실장 갱단이었다.

그들에게 비상식이 털리고 동족식의 희생양이 된 골판지 상자만 해도 공원의 절반이 넘었으며

그 신출귀몰함은 공원의 보스실장마저도 쉽게 손을 댈 수 없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집단이었다.

하나같이 일반적인 성체실장보다 머리 하나 이상이 크고 강했으며

그들의 전투력과 조직력은 어느 날 방심한 한 학대파 인간에게조차도 중상을 입혀 물러가게 할 수준이었다.


"자아. 최후통첩인데스. 대답하는데스."


그들은 불길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미도리는 그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대략 열 명 가량. 하나같이 싸움에 익숙한 태세. 보검은 녹 하나 없이 잘 벼려 있었다.

싸움으로는 가망이 없었고 미도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웃기지 마는 데샤!!!!!!"


"데, 데에?"


"이 집은 오마에들이 없어도 세레브한 와타시가 충분히 독차지하는 데스!



오마에같은 분충들에게 나눠줄 것은 하나도 없는데스, 당장 그 더러운 발 떼고 썩 꺼지는 데스!!!"


미도리는 맹수처럼 포효했고 그 기세에 들실장들이 흠칫 하고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그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데프프프. 아량을 베풀어서 우리 무리에 끼워주려 했는데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분충인데스.

그렇게 똥닝겐을 보호하고 싶은 데스? 노예근성이 몸에 밴 분충이 분명한데스.

오마에들은 뭐 하고 있는 데스? 시작하는데스. 전부 죽이는데스. 그리고 매복해 있다가 똥닌겐도 죽이는데스."


"똥닝겐을 보호하긴 무슨 운치같은 소리인 뎃샤!!! 똥닝겐도 이 집도 와타시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스!!

해 볼 테면 해보는데스! 오마에들은 지나갈 수 없는데스!"


미도리가 마법실장 테치카 봉을 잡고 그들을 막아섰다.

마치 모리아의 발록을 막아서는 간달프처럼, 그의 눈은 분노에 타오르고 있었다.


어림도 없다. 이 집은 내 것이다. 똥닝겐도 너희 더러운 분충도

세레브한 와타시에게서 어느 하나도 빼앗을 수 없다.

미도리의 탐욕은 순간 그에게 하여금 스스로도 믿지 못할 기백을 주었다.





*




"이, 이게 뭐야! 미도리. 미도리!!"


토시야키는 소고기 봉투를 흔들며 룰루랄라 집으로 도착했다.

사육실장들이 기뻐하며 반길 모습을 생각하며 현관에 도달한 순간 그는 집 안의 참상을 보고 몸이 굳어 버렸다.


바닥에 녹색 피를 흘리며 늘어져 잇는 꾀죄죄한 들실장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고 있는 미도리가 있었다.

바닥에 꽂은 마법실장 테치카 봉에 의지해 상처투성이인 몸을 겨우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데프프.. 주인상 오신 데스?"


"테에에엥. 주인상. 마마가 다친 테치. 살려주는테치!"


적록의 눈물을 흘리며 자실장들이 토시야키에게 달려들었고

토시야키는 충격을 받아 새파래진 표정으로 그들을 밀어낸 후에 미도리를 안아들었다.


깜빡 잊고 열어놓고 간 문, 들실장들의 시체와 그들의 손에 쥐어진 못, 흩뿌려진 피.

그리고 몸 곳곳에 큰 상처를 입은 미도리. 짐작할 만 했다.


"빌어먹을. 맛있게 스테이크 나눠 먹으려 했는데... 미안하다. 젠장.

조금만 기다려. 지금 당장 실장병원으로 데려갈테니. 꼭 살려줄께. 목숨 걸고 살려줄테니까 다 안심해.

너희는 병원 도착할 동안 너희 엄마 간호라도 하고 있고!"


그는 허겁지겁 비상용 케이지에 일가를 밀어넣었다. 토시야키는 헐레벌떡 달려나가 택시를 잡았고

케이지 안에서 자실장들은 미도리를 편히 눕혀 작은 손으로 쉴새없이 상처를 틀어막았다.


"데프프.. 멍청한 똥닝겐인데스."


"마마. 말하지 않는테치!"


미도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웃었다.


"와타시의 계략은 완벽했던데스. 저 멍청한 똥닝겐을 보는데스.

아직도 와타시를 말 잘 듣는 사육실장으로 알고 있지 않은데스? 와타시의 우마우마한 계락은 꿈도 못 꾸고 있을 것인데스.

스테이크까지 사 오고, 마지막엔 와타시를 살리려고 이렇게 필사적인데스.

비록 굴복시키지는 못했지만... 쿨럭, 데프프.. 벌써 훌륭한 똥노예인데스."


"마마, 마마!!"


미도리의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졌다. 그의 작은 팔다리에서는 힘이 빠지고 있었고

조금씩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데프프.. 와타시의 실체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인데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똥닝겐인데스.

평생 와타시를 좋은 사육실장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데스. 데프프.. 와타시는 먼저 저승에 가서 비웃어주는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