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누워서


[…그러나 큰 고양이는 듣지 않 다. 고양이가 어흥 하고 큰 소리. 무서움. 자실장 초록 은 무서움 울다 도망침.]

날이 춥다. 대신 달빛이 밝아 길을 환히 비춘다. 
이른 한파에 옷깃을 싸맨 채,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달마저 집으로 돌아가라 부추기는 사람잡는 날씨에, 나는 달랑 점퍼 한 벌 걸치고 슬리퍼 신은 채 생태공원 옆 길가에 쪼그려 앉아있다. 우연히 친구나 이웃이 이 길을 지나다 날 알아보는 일이 없길 바라며. 그리고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부디 이유를 묻지 않고 지나쳐주길 바라며.

[그 다음, 자실장 달콤한 많은 곳 가다. 인간 있는 거래 나누다 큰 집 이다. 자실장은 큰 소리. 몽땅 내놓는다 노예. 하지만 큰 인간 듣지 않 다. 큰 인간은 빗자루를 휘둘러 다. 몸 에 작은 상처. 자실장은 따끔함 울면서 도망. 자실장은 도망 멈추다 검은 길 만남. 큰 단단한 둥근 발 짐승 달린다 빠르다. 부딪힘 바람 아프다. 자실장은 울음 하면서 불러. 마마. 마마.]

나는 어느 골판지 상자 안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 있다.
사연을 듣는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어이없어할 것이 분명하다. 무슨 연애라도 하는 줄 알았다고, 이 한밤중에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대충 동의한다. 나도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번역기 앱이 맛이 갔나. 말을 제대로 옮기질 못한다. 스마트폰을 꺼내 켜보니, 역시나 배터리가 없었다. 이 미친놈의 폰은 날이 좀 춥다 싶으면 어김없이 주인을 배신한다. 이런 일이 있을까봐 미리 사놓았던 군옥수수에 스마트폰의 뒤통수를 지진다.

[그러나 마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마마는 나타날리가 없다. 자실장은 알고 있었다.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춥고 외로워서, 마마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누구든 그랬을 거야.]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까보단 낫군.
슬리퍼 신고 나온 양 발은 후회라도 하듯 연신 비벼대고, 군고구마의 온기를 간택받지 못한 다른 손엔 연신 입김을 분다. 누군가 내 꼴을 보고있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생각했다.
지랄, 가지가지 한다.

이 날씨에 집에 들어가 몸 누이는 대신, 나는 아닌 밤중에 공원 길에서 구연동화나 듣고 앉아있다. 내 스스로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무서워. 그래서 어떻게 끝나?]

[그 때, 마마가 나타났다. 그렇게 자실장과 마마는 다시 만났다. 자실장을 정말 열심히 찾아다닌 노력 덕분에. 뒷머리 다 뽑히고, 온몸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행복했다. 마마의 자실장이 살아있어서. 아직 안아줄 수 있어서.]

꼴값한다.

[미안. 나의 잘못. 마마…]

[괜찮다. 어서 잠 자자. 어둡다. 해님 뜨기 전에 잘 자야 큰 실장이 될 수 있어.]

[잠이 오지 않아.]

[하지만 더 해줄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다.]

[궁금한 게 있어. 주인 버린 이유 무엇이야 마마?]

그래, 뭐냐. 어느 막돼먹은 놈이 그러더냐.
남의 삶에 멋대로 비집고 들어와놓고는, 또 맘대로 나가도 되는거라고.

[내가 주인을 ‘버린’게 아니다. ‘버린다’는 것은 한때 가졌다는 뜻이야. 
나는 가진 적이 없다. 세상 무엇도 그저 무엇일 뿐 내 것인 적은 없었다.]

[그럴리 없다. 그럼 어째서 주인 옆에 살았어.]

[주인이 머무르게 허락해 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포기하고 떠난 것이다. 
나는 너를 우연히 가졌다. 그래선 안된다고 들어 슬펐지만, 동시에 선물 받은 것처럼 기뻤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너를 낳으면, 주인은 더 이상 나를 길러 할 수 없었다. 너도 가족이고, 주인도 가족이었다. 주인도 좋았지만…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었다.]

돌려말하려고 아주 애를 쓰는구만. 
나는 분명히 말했다. 새끼 까면 까는 족족 죽여버린다고. 인터넷에선 그렇게 해야 몇십 마리로 불어날 엄두를 못 낸다고 했었다. 
하지만 빨래를 널게 하지 말란 말은 없었다. 베란다에서 바람 좀 맞았다고, 바로 내 눈앞에서 눈깔이 녹색이 되는게 어디 있는가. 송화가루 날리는 봄도 아니고, 무슨 가을에...

[하지만 나 귀여움 같이 길러 실장 해 줄지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주인이 너를 사랑할지는 모른다. 인간에겐 인간만의 사연이 있다. 우리에겐 우리만의 사연이 있다. 인간은 우리처럼 살지 않는다. 고양이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고양이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는 방법이 다르다.
길러지는 기준은, 인간이 정한다. 인간은 걷다가 넘어진 자리에 작고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그걸 주워 길러 할 수도, 먹어 삼킬수도 있다. 우리는 먹기만 하는데 이상해. 잘은 모르지만, 그것과 같다. 너는 길러지지 못할지도 몰랐다. 네가 나쁜게 아니야.]

[이해 잘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우리가 사는 집, 이 집은 어디서 왔을까? 누가 버리고 간 골판지일까? 인간이 종종 가져가곤 하는데, 그 다음엔 어디로 갈까?]

“테에….” [모르겠다. 몰라.]
[그래, 몰라. 하지만 받아들여야 해. 그래야 살 수 있다.]

몸이 으실하게 떨린다. 못 견디겠다.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인 옥수수를 꺼낸다. 아직 따뜻하다. 이제 이 동네에는 길에서 옥수수를 파는 사람도 몇 없다. 어찌 보면 귀한 옥수수인 셈이다. 한입 베어 무니 견딜 만 하다. 낱알에서부터 뱃속까지 훈훈한 기운이 밀려든다.
이 계절에 구운 밤과 옥수수는 좀 태워도 맛있다. 옛날 생각처럼 훈곤한 향기가 난다.

[추워.]
[이리 와. 꼭 안으면 춥지 않아.]
[정말이었다.]
[이제 덜 추워?]
[덜 추워. 하지만 큰일 났다.]
[뭐가 문제야?]
[마마는 크다. 마마를 꼭 안아줄 수가 없어.]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옥수수를 구워주시곤 했다. 젓가락에 꽂아서, 그대로 가스불에 구워주셨다. 내가 길거리 옥수수에 사족을 못 쓰는건 어쩌면 습관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일러 없는 집은 몹시 추웠었다. 초겨울 밤에 온몸을 이불로 둘러싸고 코를 훌쩍이면, 어머니가 군옥수수를 물려주시곤 하셨지. 전기장판도 솜이불도 살 형편이 안되었던 그때는, 우리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으로 겨울을 났었다….

[왜 나를 버리지 않았어?]

어안이 벙벙하다. 왠지, 세상이 더 춥고 외롭게 느껴진다...
아니지, 아니야. 실장의 인지개념은 인간과 다르다고 했던가. 
나는 실장석을 잘 모른다. 아마 실장석 기준에서 저 정도 말은 막말 축에도 끼지 않는지도 모른다. 
태어난 지 일주일 된 녀석이, 어미에게 저런 말을 해도 이상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말했었다.]

[밖은 춥다. 하지만 인간 집은 따뜻하다고 마마가 말했었다. 이상해. 마마는 나를 낳은게 기쁘고 행복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마는 아프고 힘든 일 뿐이야.]

괜히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달빛을 돌려준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고 되묻듯이.

[나를 버리면 계속 길러지는 - ]
[마마는 원래 들실장이야. 길러지는 것은 선물이었다. 우연히 인간이 주웠다.
복잡한 것은 잘 몰라. 하지만 이건 안다. 선물 때문에 가족을 포기하면 나쁘다.]

[가족이 죽으면 끝이다. 대화할 수 없다. 하지만 다 같이 살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들실장으로 사는 것도 살 만 하다. 맞다. 좋은 일 있었어.
얼마 전에, 이 곳에서 핏줄을 만났다. 장녀. 죽었을 줄만 알았는데,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반가웠다. 살아있었다. 그런데, 눈물이 나왔다.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와서, 멈추어지질 않더라…]

사람과 다르지. 허나 똑같이 내던져져 사는 생끼리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이 험한 세상에 마음 놓고 부둥켜안을 수 있는 것이 가족 말고 얼마나 있던가. 그 눈물이 우리의 것과 얼마나 다를까.

내가 어떻게 알아, 씨발.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달과 눈싸움을 했다.

[그러니 미리 말해둔다. 살다보면 알게 될 것이 – 지직 -  
가족은, 한 명이라도 더 살아있는 편이 좋은데스. 그래서, 주인님도 다치지 않고, 너도 다치지 않도록, 집을 나온데스…]

산통이 다 깨지는 기분이다. 휴대폰이 온도를 되찾자 어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모양이다. 말꼬리에 울음소리를 붙이기 시작했다. 왠지 원래 그랬어야만 하는 것을 되찾은 것 마냥 편안하다. 동시에 징그러워서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말꼬리만 바뀌었는데도, 참으로 마성의 말투다.

[데프픗. 어느새 잠든데스… 맘 편히 자는데스. 자는 걱정할 필요 없는데스.
…주인님도 고민할 필요 없는데스. 나 하나면 되는데스.
나 하나만, 발에 치이도록 흔한 실장석 하나만 조금 더 힘들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스...]

대체 왜 시중에 이 따위 사족을 안 붙이는 어플이 없는거야? 말꼬리 없이도 방금까지 멀쩡하게 번역하고 있었잖아! 말꼬리 붙이는거, 솔직히 징그럽기만 하지 않나? 대체 무슨 집착이란 말인가. 일반 대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서다.
쓸데없는 주제에 필사적으로 신경쓰며 나는 온 힘을 다해 하늘을 노려본다.

마음 한 켠에서 누군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실장석 따위의 감성팔이에 눈물 맺힌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싫으냐고.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싫은 걸 어떡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무분별한 팩트에 반대한다. 내 머리속에서 꺼져.

나는 코를 훌쩍였다. 추워서 그런 것 뿐이라고 믿으려 애쓰며. 


[나… 하나…] – 도로로롱. 도로롱.

스스로 다짐하듯 되뇌인다.
개마냥 말을 잘 들어먹지도 않는다. 햄스터마냥 먹이만 줘도 되는 동물도 아니다. 실장석은 애초에 동물인지도 의심스러운 무언가다. 애초에 제 멋대로 가출한 것은 놈이 아니었나. 젠장, 내 집에서 먹이고 재워준들, 놈들은 은혜를 알아주긴 커녕 내 멘탈만 비참하게 박살낼 것이다…

앞으로 맞닥트릴 수많은 갈등이 머릿속을 스친다.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눈 앞에 선하다. 
그러나 불어닥친 찬 바람 한번에 그 모든 설득이 바람에 날아갔다.
바람이 묻는다. 춥잖아. 그냥 냅둘거야?

고로롱. - [ - 힘든 - 마마, 주인님 - ] - 고로롱.

담 너머에서 팔자 좋게 코를 고는 가출 애완동물.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길 저편에서 아직도 옥수수 냄새가 났다.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더 꺼냈다. 이번엔 내가 먹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 - 보고 싶은 - ]

먹일 입이 하나 줄어서 좋아했었다. 그랬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둘이 늘 것 같다. 자꾸 혹덩이가 들러붙는다.

골판지가 출렁여도 놈은 대가리를 벅벅 긁으며 뒤척일 뿐, 도통 깨어나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꼬박 한 달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녀석의 잠꼬대를 들으며, 골판지를 안아들고 나는 밤거리를 걸었다.

이토록 추운 날인데도, 달빛에 길은 참 밝다. 
집에 돌아가는 이들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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