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용도를 이해하기에 슬픈 지성에 관하여



녀석은 눈에 띄게 영민했다. 
그리고 녀석은 문지르기가 필요없다고 했다. 그 말 때문에 나는 담배를 물었다.

저실장에게 있어서 배를 문지르는 것은 단순한 교감이 아니다. 
휴식과 운동, 소화와 배설, 성욕과 건강, 1차적 욕구와 궁극적 자기확인. 
그 밖에 몇 달 남짓한 생애에 있어서의 모든 목표들. 그 모든 것이 함축된 행위.
그것들에게 문지름은 욕망이며 곧 삶과 같다. 

제 어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그 대가로 평생 프니프니를 받지 않겠노라고 말하기로 결심하기까지,
그 작달막한 머리로 얼마나 많이 번민해야 했을까.

그리고 어미에게 짧지만 한 많은 평생동안 가축으로 길러진 것이, 
그 원망을 어미에 대한 사랑으로 안아 덮기로 마음먹을 때까지.
 그 작디 작은 생에 있어 얼마나 큰 각오가 필요했을까.

그 깊은 고민과 모진 결심이 기특했다. 
그리고 애처로웠다. 안쓰러운 것. 
녀석은 이해하고 있을까.
낳아준 어미의 가축인 세상, 분변을 먹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 고되고 굳센 포기와 외침이 아무 짝에 소용이 없는 소음에 불과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비단 구더기에게만 어울리는 번민은 아니다.
나는 세상이라는 광장에 내던져진 생의 한계에 관해 생각했다. 마침내 두 개비가 다 탈때까지.

근래 들어 처음 씁쓸했던 담배를 털었다.
재가 처연히 바스러지며 재떨이에 젖어든다.
동류 구더기들처럼 어리석지 못해 더 애잔한,
우지(愚智)가 아니어서 더 슬픈 우지의 가여운 삶처럼.

“레삐아아악! 우지챠는 재떨이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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