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락에 사는 모든 산실장들이 한 곳에 모여 있고, 긴장된 분위기가 흐른다. 조그만 대나무 막대기를 든 장로석이 옆에 자들을 거느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산실장들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살피다, 몇몇 성체들의 어깨를 막대기로 톡, 톡 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하나씩 장로석이 지목하고 지날 때마다 지목당한 실장석의 얼굴엔 낙담과 실망이, 지목을 피한 실장석의 얼굴엔 안도감과 여유가 떠오른다. 어느새 앞줄부터 맨 뒷줄까지 쭉 돌며 충분한 수의 실장석을 지목한 장로석이 큰일을 처리했다는 듯 후련한 얼굴로 소리친다.
“올해의 ‘봉사석’들도 이것으로 정해진데스! 지목된 실장석들은 관례대로 오늘 하루동안 열외이니, 마지막으로 자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데스!”
장로석의 말이 떨어지자 지목을 피한 일가들이 성체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환성을 지르며 일어나 서로를 껴안고 기뻐하고, 지목된 일가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거나 말없이 땅만 보며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방금 장로석의 지목을 피한 일가들은 올해도 아무 탈 없이 일을 하고, 때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도 즐기고, 겨울엔 가족들끼리 따스한 굴 안에 옹기종기 끌어안고 모여 우지챠 고기를 맛보는 호사도 누릴 수 있지만, 지목당한 일가는 군락 운치굴에 프니프니 담당으로 들어갈 아이들을 ‘선별’해야만 하는 잔혹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마마….”
한 지목된 일가의 장녀가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친실장을 바라본다. 규정상 지목된 일가에서 제공해야 하는 ‘봉사석’은 엄지 둘 아니면 자 하나, 이 일가의 막내 엄지 둘은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고 있다. 어느새 친실장도 짙은 눈물을 흘리며 앞에 모인 아이들을 껴안는다.
“걱정 마는데스. 걱정하지 마는데스……마마는 결코 너희들을 저버리지 않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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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캄캄하고 고요해진 어두운 밤, 눈에 잘 띄지 않게 교묘하게 설치된 땅굴 입구로부터 녹색의 작은 형체들이 연이어 튀어나온다. 먼저 지상으로 올라온 자식들이 눈을 깜빡이며 어둠에 적응하려고 하는 동안,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친실장이 소리를 낮춰 말한다.
“지금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마마만 따라오는데스. 소리를 냈다간 쫓길 수도 있고 위험한 짐승을 불러들일 수도 있는데스.”
친실장이 재빨리 장녀의 손을 잡고, 다시 장녀는 뒤로 차녀의 손을 잡는 식으로 곧 일가 전체가 한줄로 늘어서서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막내 엄지까지 잘 언니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친실장이 한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봉사석’ 선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며칠 전부터, 이미 이런 상황이 올 것에 대비해 군락 주변의 모습과 지형을 면밀히 관찰해오고 있었던 친실장이다. 그 덕분인지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시골밤의 산속에서도 별빛에 의지한 채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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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와타치 배고프고 지쳐서 더는 못가겠는레치…죄송한레츄….”
“5녀챠….”
고통과 피로가 역력한 얼굴로 호소하는 막내를 보며 친실장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진다. ‘봉사석’으로 냄새나는 운치굴 안에서 죽을 때까지 프니프니만 하다 마지막에는 고깃덩이로 생을 마감할 엄지들을 구하기 위해 군락을 도망나온지 이미 사흘째, 실장석의 조막만한 발로는 그 시간을 꼬박 썼음에도 이제야 산을 벗어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정도면 군락에서도 굳이 자신들을 계속 쫓지 않을만큼은 왔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약하디 약한 실장석의 몸을 가지고 살아나가려면 적절한 주거지는 아주 중요하다. 당장 힘들다고 별로 좋지 않은 자리에 안주했다간 추위에, 태풍에, 야생동물에, 인간의 손에 죽어나가는 것이 실장석의 삶. 마음을 굳게 먹고 5녀를 다그쳐 계속 걸음을 옮겨야겠다고 다짐한 친실장의 귀에 차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마, 와타치들도 힘든테치…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되는테치?”
“…….”
평소 응석 한번 부려본 적 없던 어른스런 차녀의 말에 친실장도 말문이 막힌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말만 안했다 뿐이지 다른 자들도 모두 변변찮은 식사량으로 쉴새없이 움직여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다. 잠시 고민하다 마음을 정한 친실장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좋은데스. 마침 오마에들에게 뭔가 먹여야겠다는 생각도 하던 참인데스. 저기 큰 나무 밑둥에 모여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스. 마마는 주변에서 먹을 것을 찾아서 돌아오겠는데스.”
친실장이 주의깊게 주변을 살피며 한쪽으로 사라져 가고, 남은 자들은 한숨 돌린 얼굴로 친실장이 말한 나무 밑쪽으로 가 모여앉는다. 잠시 숨을 크게 몰아쉬고, 쉴새없이 움직여서 저리고 아픈 다리도 눌러서 풀어주면서 시간을 보내던 자들이 갑자기 뒤에서부터 햇빛을 가리며 덮어오는 큰 그림자에 소스라치게 놀라 올려다본다.
“귀여운 실장석들이 여기 있었구나. …어미는 없니? 너희들 뿐이니?”
인간에 의해 심한 고통을 받은 사육실장과 들실장들을 기원으로 생겨난 산실장들. 그러한 산실장들은 하나같이 ‘가로되 인간과 얽히지 말라’는 말을 하나의 금언으로 위석 속에 새겨두고 있다. 태어나서 여태까지 쭉 산실장 군락에서 자라 산실장의 정신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던 어린 실장석들이 거대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패닉상태에 빠지고, 막내 엄지는 심지어 엄한 교육조차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는지 빵콘으로 팬티가 두둑하니 부풀어올라 있다. 동생들이 모두 두려움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동안, 다부진 장녀만이 대견하게도 살아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움직임을 취한다.
“닌겐상! 허락 없이 닌겐상이 있는 곳 근처로 와서 죄송한테치. 하, 하지만 와타치들 여지껏 아무 못된 짓도 하지 않은테치! 와타치들 그저 마마랑 같이 살 곳을 찾아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테치. 한번만 용서해주면 마마와 함께 최대한 빨리 지나가서 아무 폐도 끼치지 않겠는테치!”
고개를 조아리고 바들바들 떨며 자비를 구하던 장녀가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든다. 거대한 인간은 자신들의 예상과 달리 딱히 화가 나있거나 무섭게 굴지 않고, 기분좋은 미소를 띤 채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다. 생각지 못한 전개에 당황한 장녀가 말문을 잊고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인간이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 딱히 너희들을 학대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 그저 이런 곳에서 실장석들을 보니 신기해서 와봤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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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나무열매를 겨우 챙겨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친실장의 얼굴에 시름이 감돈다. 평소 자신들이 살았고 잘 알던곳을 떠나 오게 된 새로운 장소에서의 먹이탐색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자신은 커녕 다섯 아이들 먹이기에도 빠듯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양의 열매를 어떻게 나눠주면 좋을지, 과연 원래 살던 산만큼 살기 적합한 곳을 찾을 수 있을지를 떠올리는 친실장의 얼굴에 낙담한 기색이 가득하다.
어느덧 자들더러 모여있으라고 한 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위치까지 돌아온 친실장이,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괴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실장석 입장에서) 눈이 아찔해질만큼 거대한 인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자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자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달려오던 친실장이지만, 달려가는 와중에 점차 이성을 찾고 무력감에 젖는다. 자신이 달려간다 한들, 인간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신 목숨을 바치는 것?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시간을 끌면 장녀 하나라도 도망가게 할 수 있을까? 비장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달려온 친실장이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고 멈칫한다. 자들은 전혀 괴롭힘당하거나 공격당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고, 저마다 웃으면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다. 그 손에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마치 별처럼 생긴 형형색색의 물건이 저마다에게 들려 있다. 설마…군락의 전설로 내려오는, 군락을 위해 부지런하게 산 실장석이 낙원에 가면 맛보게 된다는 콘페이토?
“마마, 다녀오신테츄?”
“좋은 닌겐상이 와타치들에게 콘페이토를 준 테츄!”
아무리 콘페이토에 정신이 팔렸어도 그렇지, 인간에게 달라붙어서 위험하게 뭐하는 짓이냐고 호통치려던 친실장이 순간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한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들의 생사여탈은 인간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들을 혼내는 것보다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인간과의 문제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친실장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신데스 닌겐상. 와타시는 저쪽 산에서 내려온 실장석인데스.”
“그래, 친실장 없이 아이들만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같이 내려온 거였구나.”
“닌겐상, 와타시들은 닌겐상에게 폐를 끼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스. 와타시들 그저 산을 떠나 와타시들만의 보금자리를 찾을 생각일 뿐인데스. 이 근처가 닌겐상의 영역인 줄은 전혀 몰랐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겠는데스. 그러니 너그럽게 와타시들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는 데스우.”
“흠…그래? 너희들은 저 위쪽에서 내려온 산실장들인 거구나?‘
“그런데스. 하지만 군락에서 부당하게 와타시의 자들을 독라노예로 만들려고 하기에 산을 빠져나온데스. 아직 어리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들인 데스우….”
친실장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인간이 이윽고 말을 걸어온다.
“그렇구나. 그러니까 너희들은 원래는 산실장이었지만 지금은 산을 떠났고, 새로 살 곳을 찾고 있다 이거지? 그럼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떠냐? 내가 겉보기랑은 다르게 실장석을 좋아하는 편이거든. 그런데 여기는 워낙 시골구석이라 주변에 실장석도 안보이고, 밖에 실장샵이니 뭐니 찾아가려고 해도 한세월이니….”
산실장답게 인간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친실장이 전혀 생각지 못한 제안에 순간적으로 멍해진 표정을 짓는다. 반면 친실장이 오기 전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콘페이토를 받은 것으로 이미 경계심을 모두 풀었는지, 철없는 삼녀가 환호성을 지르며 말한다.
“닌겐상이 와타치들을 길러주는테츄? 와타치, 오늘부터 사육실장인 테츄? 닌겐상, 혹시 전설로 내려오는 ‘애호파’인테츄??”
애호파, 라는 말에 친실장과 다른 자들도 모두 깜짝 놀라며 인간을 올려다본다. 산실장을 가호해 주시는 산신령님이 부리는 종이자 실장석의 수발을 들어주는 존재인 ‘애호파’, 하지만 여지껏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단순한 전설로만 치부해온 그것이 실제로 있는걸까? 실장석들의 시선집중을 느끼며 남자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래, 나는 실장석을 좋아하는 애호파야. 어떻게 할래? 날 따라올래 말래?”
“따라가는테츄! 따라가는 테츄!! 와타시 애호파의 수발을 받는 사육실장이 되는테츄!!”
철없는 자들이 심지어 믿었던 장녀까지도 환호성을 지르며 인간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뛰어다니는 동안, 친실장은 애써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려 노력한다. 정말 이 인간이 전설의 ‘애호파’고, 자신들을 데려가 수발을 들어준다면 더 바랄것이 없다. 하지만…만약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못된 인간이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떡하지? 그러나 설령 이것을 거짓말로 치부하고 뿌리치고 가려해도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현실적으로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달아나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판단한 친실장이 말을 꺼낸다.
“알겠는데스. 닌겐상을 따라가기로 하겠는데스.”
“좋아, 그럼 결정된거다.”
일어서서 한쪽으로 모습을 감췄던 남자가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나, 큰 곤충채집용 박스를 들고 와서 자들을 하나씩 들어가게 한다. 장녀부터 막내까지 다섯 자들이 모두 들어가고 나자 오른손으로 박스를 든 인간이, 왼손으로 친실장을 받쳐들고 걸음을 옮긴다. 박스 안에서는 방금 받은 콘페이토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 자들이 기쁨의 환성을 지르고 있다.
15분정도 지났을까, 어느덧 산실장 일가와 남자는 널찍한 집에 도착해 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 남자가 거실 한구석에 놓인 큰 수조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수조 안에는 혼이 빠져나간 듯한 눈빛을 한 초췌한 실장석 하나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 별로 잘 대접받고 살았다고는 보기 힘든 실장석의 모습에, 남자의 양손에 들린 실장석들이 너나 할것없이 움찔한다. 두려움이 목소리로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억누르며 친실장이 천천히 남자에게 묻는다.
“닌겐상, 저 실장석은….”
“아, 내가 원래 기르던 녀석인데 지금 병에 걸렸나 봐. 상태가 별로 안좋아 보이지? 하하….”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린 남자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친실장부터 일가를 하나씩 수조 안에 내려놓는다. 성체실장의 머리보다도 한뼘 이상은 위까지 올라가는 큰 수조는 실장석들이 자력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일가로부터 불안해하는 기척을 느낀 인간이 메마른 웃음을 띠며 말한다.
“역시 환자가 옆에 있으니 기분이 좀 그런가?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겠는걸? 너희들, 콘페이토 좋아하는 것 맞지? 조금 더 갖다줄게.”
방금전에 먹은 태어나서 처음 맛봤던 진미를 더 준다는 얘기에 자들은 벌써 기분이 나아졌는지 초췌한 실장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고, 친실장 쪽은 수조의 높이를 살펴보며 반쯤 체념하고 있는 상태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저 인간이 ‘애호파’이길 바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친실장이 수조 바닥에 주저앉은 채 주변을 살펴본다. 집은 비록 넓기는 하지만 남자 혼자 사는지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고, 보기에도 약간 살풍경한 느낌이다. 어느새 돌아온 남자가 손에 쥔 콘페이토들을 일가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자식들과 달리 방금 콘페이토를 받지 못했던 친실장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콘페이토를 손에 얹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이게 정말, 전설에서 표현하던대로 ‘세상에 비길 것 없는 천상의 진미’일까?
호기심과 관심을 담아 한참 콘페이토를 들여다보던 친실장이 천천히 손을 입가로 올려 그것을 핥아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옆에서부터 자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자 자들이 너나 할것없이 배를 움켜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며 괴로워하고 있다. 그나마 몸집이 큰 자실장들이 괴로워하면서도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어떻게 해서든 몸을 추스르려고 하는동안, 조그만 엄지들이 그만 빵콘으로 팬티를 녹색으로 물들인다. 배변을 관리하는 것은 산실장의 기본이라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자신은 저녀석들을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군락을 나오기까지 했는데 저렇게 빵콘…빵콘? 엄지들을 살펴보던 친실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순한 빵콘이라고 보기엔 배설량이 너무 많다. 마치 몸 안에 든 모든 것을 배출할 기세로 계속되던 엄지들의 배설은 팬티가 벗겨져 나올때까지 계속된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하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친실장의 눈앞에, 어느새 인간의 거대한 손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돈파라고 했나? 여튼 요즘은 신기한 것들이 나와서 좋단말야. 따로 똥빼기니 뭐니 신경쓸 필요도 없고….”
어느새 자실장들 역시 더는 억제하지 못하고 총구로부터 대변을 뷰릇뷰릇 싸재끼고 있지만, 친실장의 눈은 인간이 집어서 들고간 엄지들에게만 향해 있다. 반강제적이고 격렬한 배설로 온몸의 힘이 빠진 상태의 엄지들을 맞은편에 보이는 부엌으로 가져간 인간이, 옷을 벗기고 머리털을 뽑아 독라로 만든 다음 물에 씻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친실장이 큰 소리로 외친다.
“무슨짓을 하는데스!! 오마에는 ‘애호파’라고 하지 않았던데스! 애호파면 애호파답게 신령님이 시키는대로 와타시들의 수발을 드는데스!! 어째서 제멋대로 자들을 독라로 만드는데스!?”
“…응? 신령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뭐…어쨌든 나는 애호파가 맞다구? 고기 사러 나가기도 힘든 이런 시골에 사는 내 입장에서 너희들은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식재료거든.”
“무, 무슨 말을 하는데스?”
인간으로부터 들은, ‘식재료’라는 표현에 정신이 아찔해진 친실장이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말을 꺼내지만 인간의 대답은 가차없다.
“음, 말 그대로 내가 너네들을 먹는 걸 아주 좋아한단 얘기지. 오늘 저녁은 ‘엄지 댓잎찜’으로 해볼까~♪”
독라가 된 엄지들의 몸에 한방울의 운치도 없게끔 세심하게 씻어낸 인간이, 도마에 엄지들을 그대로 올려놓고 부엌칼로 팔다리를 썰어낸다. 자식들이 부르짖는 단말마의 비명에 눈앞이 캄캄해진 친실장이 그만 바닥에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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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실장 굴속에서도 가장 깊고 아늑한 곳에 자리한 한 방 안. ‘봉사석’들로부터 벗겨낸 옷을 모아 만든 푹신한 보금자리에 누운 실장석 하나가 잠시 귀를 기울여 바깥 기척을 살핀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확신될때까지 그렇게 기척을 살핀 성체실장이,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빈 깡통으로부터 노란 빛깔의 별모양 과자 하나를 집는다. 세상 모든 실장석들이 바라마지 않는 진미, 바로 그 콘페이토다.
콘페이토를 입안에 넣고 천천히 혀로 굴리며 맛을 충분히 음미한 장로석이, 단맛이 충분히 빠지고 둥근 핵 부분만 남자 이로 콰직 하고 씹어 안에서 흘러나오는 즙을 음미한 다음 목으로 넘긴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이런 진미를 만들어낸 인간들에게 새삼 감탄하며 손을 뻗어 새 콘페이토를 집는 장로석의 생각이 도망실장 일가를 향한다. 지금쯤 무사히 내려갔을까? 닌겐이 제대로 회수해가기 전에 동물들한테 죽었다거나 하면 안되는데…….
장로석의 상념이 인간을 처음 만났을때로 되돌아간다. 원래 있던 터전을 너구리들에게 잃고 이쪽 골짜기로 처음 이주해왔을 무렵, 한참 새 터전을 만든다 뭐다 정신없던 상황에서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나왔다 홀로 인간을 마주쳤을 땐 혼비백산했었지. 그러나 의외로 인간은 그렇게 파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자신을 이 산의 ‘주인’(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다. 산과 물에 주인 같은게 어디 있단 말인가?)이라 소개해 온 인간은, 산실장들이 여기서 소란 피우지 않고 떨어진 산열매를 양식삼아 살아가게 해주는 대가로 매해 성체실장 하나씩을 출산석으로 바치라고 얘기해왔던 것이다. 이제 겨울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여기서도 정착하지 못하면 파멸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장로석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산실장 군락이란 엄밀히 말하면 ‘모두 공평하게 구더기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약속으로 성체들이 맺은 연합체’나 마찬가지, 어린 구더기나 엄지라면 모를까 성체를 자의적으로 희생시키는 것은 장로인 자신에게도 불가능했다.
장로석은 자신이 성체를 희생시킨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실제로는 희생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규율을 바꿨다. 군락의 규율을 어기고 단결을 저해하는 분충들만을 운치굴에 넣던 옛 규정을 폐기하고, 군락의 먹이인 저실장들을 잘 관리하기 위해선 더 많은 프니프니 노예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봉사석’ 제도를 만들었다. 처음엔 이 희생에 반발하던 대부분의 산실장들도 겨울이 되고, 분충들이 관리할 수 있는 숫자의 구더기들만 키우던 때와 달리 다수의 봉사석들을 이용해 살려서 키워낸 우지챠 고기가 입에 들어오자 잠잠해졌다. 그 후론 일사천리였다. 매년 봉사석들을 선발할 시기가 되면, 장로석은 일부러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유대감이 깊은 개체들만을 골라 지목했다. 그러면 설령 그 모두는 아니더라도, 한두 일가 정도는 매년 군락으로부터 도망쳐 내려갔다. 매해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장로석은 처음 인간을 만났던 장소로 나가 기다렸고, 그러면 인간은 아래로 내려간 실장석에 대한 대가로 콘페이토 한봉지씩을 지불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아래로 내려갈 만한 녀석들도 별로 안 남았단 말이야…하고 장로석이 속으로 투덜거린다. 2년 전부터는 봉사석으로 지목된 일가들은 그날 하루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등, 나름 탈주하기 쉽게끔 자신도 환경을 조성해주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모성애와는 별개로 바깥에 대한 두려움, 막내 한둘을 희생시켜서 남은 자들을 잘 기를 수 있다는 타산 등은 대부분의 실장석을 그대로 산에 남게 만든다. 조금 더 아래로 도망칠만한 유인을 강하게 조성해야 하나…하고 장로석이 고민에 잠긴다.
수발ㅋㅋㅋㅋㅋ 씹분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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