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의 전원을 끈 뒤 남자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나선계단의 최하층에 다다라 철문 자물쇠를 연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너머에 방향제의 상큼한 향기와 함께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방 안을 응시하고, 복잡한 표정을 띄운다.
원래는 콘크리트채로 방치된 지하 창고였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화려한 무늬의 벽지와 함께 크고 밝은 조명이 천장 중앙에 설치돼 있고, 다양한 가구와 책꽂이, 탁자, 그리고 크고 푹신한 침대가 놓여 있다.
오렌지색 카펫은 부드럽고 감촉이 좋으며 남자의 손으로 항상 청결하게 유지된다.
거친 철문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창고였던 장소는 지금은 어떤 사람이 사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침대 위 그림책을 펼치고 있던 소녀가 남자를 알아채고 달려온다.
가슴에 와락 안겨 바로 볼을 문지른다.
"좋은 아침, 하루카"
남자는 빙긋 웃으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하루카라고 불린 소녀는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남자의 두터운 가슴에 볼을 묻는다.
"배고프지? 자, 식사할 테니까 거실로 와."
남자의 말에 하루카는 끄덕하고 반응한다.
말없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우선 침대 위의 책을 책꽂이로 돌려놓은 후 흐트러진 이불을 가지런히 갠다.
그 모습에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아침은, 네가 가장 좋아하는 치즈 오믈렛을 구웠단다. 같이 먹자."
남자의 말이 매우 기뻤던 듯, 하루카는 그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즐거워한다.
뛰어오를 때마다 네글리제의 치맛자락이 올라온다.
남자는 허겁지겁 옷걸이에 다가가 적당한 블라우스를 집어들었다.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지, 자, 하루카가 좋아하는 색깔 옷이야."
네글리제를 벗기고 반나체가 된 하루카에게 핑크색 블라우스를 입힌다.
한참을 버둥거리다 겨우 소매로 손을 뺀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직 스스로는 무리인가"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준다.
반쯤 울듯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지만, 남자의 다정한 미소에 곧 기분이 좋아져 다시 생긋 웃어보인다.
길고 고운 머릿결, 투명할 정도인 하얀 피부, 날씬하고 가녀린 체구, 그리고 순진무구한 사랑스러운 미소...
그것은, 남자가 줄곧,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갈망해온 것이었다.
하루카는 남자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다.
그러므로 여기 - 강철문으로 닫힌 감옥- 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방을 나가려다 문득 발에 작은 탁구공이 걸린다.
더러워지고 군데군데 찌그러져 구르지도 못하게 된 그것은, 마치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아직 이런 게 남아 있었나?"
탁구공을 주워 손가락으로 짜부러트리려고 하자, 하루카가 울듯한 얼굴로 제지한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돌려달라는 몸짓을 한다.
"미안, 소중한 거였구나"
찌그러진 탁구공을 돌려받은 하루카는 다시 웃는 얼굴로, 그것을 책장 위에 소중히 놓았다.
◇◇◇
아침식사를 마친 남자는 하루카를 다시 지하실로 보낸 후 철문을 등지고 연회색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환경에 적응했는지 예전처럼 울면서 문을 두드리는 일도 없어졌다.
그녀를 가두어놓는 것은 큰 저항감이 들었지만, 지금부터 일을 가야 돼서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단단히 타이르고, 남자는 뒷통수에 달라붙는 생각을 털어내고 자기 방으로 뛰어올랐다.
지하실 안 작은 냉장고에 도시락과 음료, 간식이 담겨 있다.
오늘 밤은 잔업도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카가 배가 고파질 때쯤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닫기 직전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련한 표정을 띄운다.
남자는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여느 날과 같은 일상에 녹아들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회사에 도착하기 직전 갑자기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화면에는 가능하다면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이름이 표시된다.
――아까 막 걸었을텐데 ――
역에서 업무지구로 흘러가는 인파에서 벗어나, 남자는 가급적 인기척이 적은 곳에서 통화 버튼을 눌렸다.
약간 코막힌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여, 오늘 아침은 어땠어?"
익숙해진 태도로 떠드는 목소리에 약간 초조해지면서도, 남자는 드러내지 않고 "그럭저럭" 모호하게 대답한다.
"벌써 꽤 시간도 지났으니, 이제 괜찮겠지?"
빠르게 떠벌이는 말투와 방금 전과 똑같은 화제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태도가 신경을 곤두세운다.
남자는 "이제 곧 출근해야 돼서" 거절하고 용건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놈'은 그런 건 전혀 안 들리는것마냥 계속 이야기한다.
변함없이, 사람 사정을 생각해주지 않는 '놈'이다.
"빨리 결과 보고해줘. 나는 당신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즐거운 게 없으니까."
"진전이 있으면 이쪽에서 연락할게. 그니까 당분간 기다려줘", 시간을 신경쓰면서 대답한다.
통화를 끊으려 하자 귀가 먹먹해질 정도인 목소리가 더 커졌다.
"약속한 시간은 이미 지났어. 계속 그렇게 기다리면 김샌다고?!"
언제나처럼 일방적으로 끊지만, 과연 포기했는지 다시 걸려오는 일은 없다.
아침부터 우울한 기분을 느끼며 남자는 또다시 인파에 휩싸였다.
◇◇◇
예정보다 늦게 귀가한 남자는 서둘러 지하실로 향한다.
철문이 닫힌 방 안에서는 하루카라는 소녀가 울먹이며 뺨을 부풀리고 있다.
꽤나 기다리게 한 듯, 침대 옆에 좋아하는 그림책이 던져져 있다.
문을 열자마자 울며 달려드는 하루코를 붙잡고 남자는 사랑스러운 듯 고개를 쓰다듬었다.
"미안, 배고프지?"
품 안에서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언제나처럼 볼을 비벼댄다.
눈물과 콧물이 수트에 묻지만 남자는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몸에 전해지는 무게와 팔에 전해지는 탄력이 좋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면서, 남자는 시선을 낮추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서 푸딩이랑 슈크림 사왔어, 하루카가 엄청 좋아하는 후타바 제과점이야.
얼마든지 먹어도 돼."
그말에 반응해 울상이 순식간에 활짝 펴진다.
그 노골적인 태도 변화에 남자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남자가 살고 있는 집은 도심에서 전철로 한시간 반 가량 떨어진 아주 한적한 주택가에 있다.
살기 좋고 조용하며 아늑한 반면, 상점가나 오락시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극이 덜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남자에게는 오히려 좋은 점이다.
2층 건물로 큰 발코니와 차 두대가 들어가는 차고까지 있으며 넓은 마당에는 텃밭도 있다.
심지어 커다란 지하실까지 갖춘 호화로운 저택.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이 집을 남자는 과거 죽기살기로 겨우 손에 넣었다.
여기서 남자는 인생 최고 행복을 맛봐야 할 터였다.
한번에 네명이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과 의자, 이용하기 편리한 대형 식당이다.
거기에는 남자와 하루카의 모습밖에 없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요리를 먹는다.
때때로, 하루카가 얼굴을 들어 매우 기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을 보고 남자는 냅킨을 들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준다.
오늘 요리도 하루카의 입맛에 맞는 것같아 남자는 표정이 풀린다.
부엌 창문 너머로 1년 가까이 움직이지 않는 자가용 자동차가 보인다.
마당 구석에는 아직도 치우지 않은 작은 세발자전거가 놓여 있다.
남자는 싫은 것을 본 듯한 얼굴로 약간 거칠게 커튼을 쳤다.
식사와 디저트를 마치고 남자는 목욕 준비를 하고 물이 찰 때까지 하루카의 놀이 상대가 된다.
그렇다고는해도 무릎 위에 앉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뿐이다.
흔한 옛날이야기, 동화 또는 신기한 동식물의 이야기.
별로 어휘력이 풍부하지 않은 남자는 하루카를 위해서 재주좋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짜낸다.
하지만 하루카는 남자가 어떤 말을 해도 조용히 듣고,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루카는 스스로 몸을 능숙하게 씻지 못하기에 언제나 남자에게 기대고 있다.
긴 머리에 얽힌 거품을 꼼꼼히 헹구고 수건으로 정리하고, 남자는 욕조 안에서 하루카를 안는다.
깔끔해진 하루카는 아주 편안해진 모습으로 남자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춘다.
그런 태도에 쓴웃음을 지으며, 남자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을 응시한다.
따뜻한 김 안쪽에서, 확실한 행복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
즐거운 한때를 보낸 하루카는 피곤한 듯 지하실로 돌아가기 전에 잠들어버렸다.
남자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여느 때처럼 그 잠든 얼굴을 내려다본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는 하루카를 보면 남자의 가슴 속에 매우 따뜻한 것이 퍼진다.
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사그라들고, 대신 어깨를 누르는듯한 중압감이 지배한다.
밖에 내리고 있는 비는 아직도 계속되는 것 같다.
지하실에서 돌아와 문단속을 확인하려던 남자는 문득 마당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문이 조금 열려 있고, 한쪽 구석에 무언가 낯선 것이 놓여 있다.
가랑비를 뚫고 종종걸음으로 대문까지 가보니 담 뒤에 뭔가 막대기같은 것이 꽂혀 있었다.
그것이 오래 써서 낡은 '빠루'인 것을 남자는 한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몇분 후 휴대전화가 울린다.
'놈'의 새된 목소리.
"여, 근처 들른 김에, 선물 놓고 간다.
안 갖고 있던 거지? 빌려줄테니까 써."
일부러 문을 비틀어 열고 이런 걸 두고 간 듯하다.
불평하려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놈'이 반성하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말을 듣고만 있다.
아무 말도 없는 남자의 태도에 제발저린 듯 '놈'은 조금 화난 목소리로 계속한다.
"뭐, 잊은 건 아니겠지?
당신이 원했으니까, 내가 "그녀석"을 제공했다는걸?
이제 와서, 정들었다느니 그런말 말아줘."
"밉잖아? 원망스럽잖아? 당신 원수니까!"
"빨리 죽여줘! 때려부숴줘...... 하아, 하아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 얼마나 엉망진창이 됐는지, 자세히 가르쳐줘...
사진 찍어서 보여줘... 사진이어도 좋아...
나... 당신 보고가 몹시 기다려진다고... 하아 하아"
'놈'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또, 평소처럼 이상 흥분 상태에 빠진 것 같다.
"정신병자!"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남자는 아무말 없이 통화한다.
그리고 빠루를 마당 구석에 숨기고, 다시 문 잠금 상태를 점검한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렸을 때 남자의 시야에 차 한대만큼 공간이 빈 차고가 들어왔다.
◇◇◇
그날도 오늘같은 비내리는 날씨였다.
아내와 딸을 태운 차가 대로 교차로변에서 대형 트럭과 충돌했다는 소식은 둘의 귀가를 기다리던 남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차는 전면부가 완전히 찌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신호는 파란불... 양쪽 모두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의 정면충돌.
물론 두 사람은 즉사했다.
경찰의 사고 조사 결과 아내와 딸이 탄 차에서 실장석의 잔해 일부가 발견됐다.
아내는 교차로상에 나타난 실장석을 피하려고 했지만, 핸들을 잘못 돌려 이것을 쳤고 일시적으로 통제를 잃어 마주오는 차와 충돌했다고 결론지어졌다.
신혼집으로 이사한 지 반년도 안 되어 벌어진 비극은 남자의 삶에 대한 바람과 활력을 모두 앗아갔다.
그리고 시체같은 생활을 그저 무기력하게 하게 된 남자는 몇번이고 두 사람을 따라가려고 생각했다.
동시에, 두 사람을 불합리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실장석을, 마음 속 깊이 증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근무하던 회사에 드나들던 청소업자 한 명이 살며시 귀띔해주었다.
남자의 증오를 부추겨 온몸의 피가 끓게하는 보고였다.
사고 현장 근처에는 큰 시립 공원이 있어 이전부터 야생 실장석이 다수 살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버림받은 원·사육실장'이다.
그것들은 순수한 들실장과 달리 위기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안일하게 공원을 나와 도로나 교차로를 횡단하려 한다.
그 때문에 이전부터 사고가 빈발했다.
남자의 아내와 딸을 죽음으로 이끈 실장석은 기성품인 핑크색 실장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가 사랑하는 가족은 그런 놈들에게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업자...'놈'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귀에 거슬리는 새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실장석에게, 복수해보지 않겠나"
'놈'은 실장석을 학대·학살하는 것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이상성욕자였다.
저지른 사건 때문에 집행유예를 받아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고, 다른 사람에게 학대의 기쁨을 전해 간접적으로 열락을 느끼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에 발을 디뎠다.
정신적으로 쫓기던 남자는 그런 '놈'에게 넘어가 그로부터 실장석 학대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였지만, 상대가 사람하는 사람들의 원수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놈'은 남자에게 조그만 자실장 한마리를 건넸다.
가족을 죽인 것처럼 분홍색 실장복을 입은 '사육실장'.
어디서 조달해왔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남자의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기 충분한 존재였다.
그가 가르친 것은 '올림'이라고 부르는 방법이었다.
겨우 행복의 절장에 올랐을 때 단숨에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남자가 실장석 때문에 맛본 그대로이며, 그야말로 원수를 갚기 적합한 프로그램이라 생각됐다.
'놈'에게서 자실장을 넘겨받아 '꼭 자기 손으로 죽이고 그것을 보고할 것'을 약속한 남자는 즉시 '올리기'를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무서운 증오가 소용돌이쳤으나, 표면상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남자는 정중하게 자실장을 다뤘다.
언젠가 그 손으로 궁극의 절망과 격통을 안겨주기 위해.
남자는 필사적으로 도살하고픈 원망을 억눌렀고, 때로는 술과 약에 의존해 견뎌냈다.
조금이라도 본심을 내비치면 자실장은 민감하게 알아채고 경계해, 올렸다 떨어뜨리기는 실패한다.
그렇게 '놈'에게 배운대로 남자는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인 '실장석 학대'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볼것없이 과도한 스트레스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그에게 힘을 주기도 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이전과 같은, 어쩌면 그 이상의 활력을 되찾아가는 남자.
그리고 자실장도 어느덧 그를 조금씩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자신의 진짜 부모에게처럼 어리광부리기 시작했다.
들은 바로는 실장석은 매우 불결하고 뻔뻔하며 제못대로인 하등 생물이었지만, 이 자실장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 얌전한 개체였다.
작은 탁구공 하나만 주어도 그걸 가지고 줄곧 즐겁게 놀았다.
식사도, 가장 가르치기 어렵다는 화장실도 금방 배워 남자는 번거롭지 않았다.
오히려 지식욕이 왕성하고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남자는 그런 자실장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고, 말하고, 때로는 인간 아이가 읽는 그림책을 사주고, 읽어주기도 했다.
자실장은 차츰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감정표현을 하게 되어 즐거운 이야기에는 손발을 까무러치며 웃고, 슬픈 이야기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등 사람같은 몸짓을 해보였다.
어느덧 남자는 그런 자실장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는 데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실장석에 대한 증오가 누그러져가는 것을 자각하고 당황스러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달이 지나 이제 자실장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시작할 때.
'놈'은 남자에게 '떨어뜨리기'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는 어느샌가 자실장의 육성이 지금 자신을 지탱하는 전부라는 것을 깨닳았다.
처음에는 그토록 활활 타올랐던 증오의 불꽃도 희미해지기 시작해, 탁구공을 갖고 즐겁게 노는 자실장을 보면 조금씩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자실장이 몸살이 나 병상에 누우면 남자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간호에 힘썼다.
연일 격무로 피로가 심해도 소중한 휴일을 자실장에게 쏟았다.
남자는 달콤한 애정뿐이 아닌, 올바른 버릇을 가르치는 방법도 스스로 익혀서 실천했고, 자실장 또한 그것을 솔선하여 몸에 익혔다.
세달이 흐를 무렵에는 둘 사이에 절대적인 신뢰가 성립해 이상적인 주인과 애완동물 관계가 될 정도였다.
'놈'의 독촉은 여전히 계속된다.
남자는 점점 '놈'의 존재에 시달리게 됐다.
지금이 바로 '떨어뜨리기'로 넘어갈 절호의 타이밍이며, '놈'이 재촉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분명히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원래 남들보다 배 이상으로 상냥하고 잘 돌봐주는 성격인 그는 차마 떨어뜨리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남자의 태도에 '놈'은 때때로 말투가 거칠어졌다.
"당신이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해줄게!"
그 말을 계기로, 남자는 간신히 '떨어뜨리기'로 넘어갈 결심을 굳혔다.
그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끝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에 큰 위화감을 느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초심을 잊기 시작한 자신에게 답답한 점이 컸다.
남자는 직접 육체를 상하게 하는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실장의 마음을 동요하게 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다음날 남자는 자실장에게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 기억을 가르쳐주었고, 남자는 그들을 여전히 강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절절히 말했다.
아내와 처음 만나고 고백했던 때
결혼하기 위해 둘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수많은 경험
결혼식의 감동, 피로연에서의 지인·친구들의 축하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
자라나는 아이를 사랑하는 아내와 지켜볼 결심을 한 뜨거운 마음
- - 그리고, 그것이 전부 한꺼번에 빼앗긴 절망
남자는 자실장에게 말하는 사이 굵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 품었던 실장석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다시금 불타는 것을 느꼈다.
자실장을 향해 자신이 얼마나 실장석을 미워하는지,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집요하리만치 길고 세밀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자실장은, 그런 남자의 독백을 조용히 들으며 울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부드러운 맨손으로 남자의 손을 톡톡 치며 아내와 딸의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증오는 곧 '매도' '비방'이라는 무기로 바뀌어 자실장을 몰아세운다.
자신이 얼마나 잃어버린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실장석이 가증스럽고 용서할 수 없는지
미운 실장석을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계속 키워왔는지
자실장의 머리를 여러번 쓰다듬고, 앨범을 펼치면서 남자는 집요한 원망의 말을 쏟아낸다.
스스로도 구역질날 정도로 음습한 행위였지만 원한이 담긴 말을 멈출 수 없다.
"죽어, 죽어서 사죄해"
"이 똥벌레"
"쓰레기"
"해충"
"내 가족을 돌려내"
마치 뭔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더러운 욕설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자실장은 아무런 감정 표현 없이 계속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태도는 마치 완전히 각오한 사형수처럼 조용했다.
정신적 고문의 효과를 측정할 수 없자 남자는 일주일 이상을 자실장에게 증오의 말을 퍼부었다.
그 이외는 지금까지와 완전히 똑같이 행동했다.
평온한 생활을 주면서도 주인에게 깊이 미움받고 있다는 자각을 심음으로써 정신을 흔들 생각이었다.
십일이 넘으려고 할 무렵, 겨우 자실장의 태도 변화가 명확해졌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어리광부리는 태도가 사라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슬픈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게 됐다.
그 눈은 평소와 같지 않았지만 남자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슬픔을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자실장이 일절 울음소리를 내지 않게 된 것을 남자가 깨닳은 것은 기르기 시작한 지 넉달이 되려고 할 때였다.
사태의 급변은 넉달 반이 되려는 어느날 새벽 일어났다.
실내에 갑자기 생겨난 연회색의 거대한 '구체'
그것이 무수한 실에 의지해 마루에서 약간 떠올라, 맥동하고 있다.
자실장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체는 조금씩 꿈틀대고 열을 내면서,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비대해진다.
그것은 너무 크고, 또 기분나쁘기 때문에, 남자가 손을 댈 것이 아니었다.
실장석의 '고치' - -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 거기에 있다.
처분대책을 찾기 전까지 어쩔 수 없이 방치한 고치는 며칠 뒤 원래의 몇배로 팽창했고 주말 밤, 마침내 '부화'의 때를 맞았다.
갈라진 고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 - 사고사한 딸 '하루카'였다.
머리색은 아마색이 됐지만, 얼굴, 체격, 키 모두 남자의 기억 그대로다.
반투명 점액질에 온몸이 감싸였지만 '하루카'는 확실히 호흡하며 얇은 가슴을 오르내리고 있다.
남자는 황급히 '하루카'를 끌어안고 욕실로 향한다.
자실장의 행방같은 건 이미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남자가 '놈'에게 보고하기 전에 정보를 찾은 것은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애정을 받고 자란 실장석은 고치가 되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도시전설이 예전부터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환상담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해 초 일어난 한 사건이 그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 청년이 집안에 여성의 부패한 시신을 유기했다는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인터넷에 유출된 현장 사진으로부터 피해 여성은 사실 고치를 만든 실장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걱정해도 될까요' (http://cafe.daum.net/sweetjissouseki/avIl/484) 참고)
그것은 불과 반년도 채 안돼 진정될 정도로 작은 열기였지만, 남자는 우연히 그것을 정리한 사이트를 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실장과 교대하듯 출현한 '하루카'를 보이는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의식을 되찾은 '하루카'는 겉모양은 딸 그대로였지만 인간의 말은 전혀 하지 못했다.
두 눈은 투명한 보석을 연상시키는 녹색과 적색으로 물들었고, 또 귀 모양과 크기도 사람과 다르다.
남자는 왜 이렇게 됐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애정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격렬한 증오를 보였을텐데.
하지만 '하루카'가 된 자실장은 당황하는 남자를 보고 너무도 기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환하게 웃는 특징적인 미소.
그것은 남자가 소중히 앨범에 간직하고 있던 그 사진 그대로의 행동이었다.
전라로 안기려는 '하루카'를 남자는 반사적으로 밀어냈다.
놀라는 표정을 짓고, 곧 울음을 터뜨리는 '하루카'.
그 태도에 무심코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남자의 다리는 왠지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는 꿈에 그리던 딸과의 재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의 사랑하는 딸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놈은 내가 미워서 죽이기 위해 손에 넣었던, 죽어 마땅한 실장석.
그런데, 꼭 껴안아도 되는걸까, 꼭 껴안아 죽여야 되는걸까?
어째서 이녀석은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거지?!
남자가 훈육 이외에 손을 대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의 안에서 '하루카'의 모습을 본뜬 자실장은 '사랑하는 사람을 더럽힌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타일렀다.
남자의 손바닥이 뺨에 닿을 때마다 '하루카'는 짧게 비명을 질렀고, 그래도 곧바로 그 미소를 띄운다.
머리를 찔려도, 좌우 볼이 붉어질 정도로 잡아당겨도, 그럼에도 웃는 얼굴을 한다.
그것은 남자에게는 굴욕적인 반응일 뿐인데.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빼앗은 꺼림칙한 생물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더럽힌다.
그 용서할 수 없는 행위는, 곧 남자에게 명확한 살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자의 체벌은 선을 넘기 시작해 '학대'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루카'는 미소를 거두려 하지 않는다.
물도 식사도 못 받고, 깡마른 몸도 더러워지고, 게다가 따뜻하게 감쌀 헝겊조차 주지 않았는데.
그래도 '하루카'는 울음 한번 없이 남자를 볼 때마다 미소지었다.
그 눈에 눈물을 가득 글썽거리면서.
어깨와 팔, 다리를 덜덜 떨면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무리해서라도 웃는 얼굴을 계속 만드려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지배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 -
어느 추운 아침, 움직이지 않게 된 '하루카'를 발견한 남자는, 발작하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통곡이었다.
'하루카'가 한계였던 것처럼 남자의 정신도 학대할 때마다 너덜너덜해졌다.
자신을 복수자로 변모시키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동시에 그녀가 왜 지금껏 애써 미소지었는지 비로소 깨닳았다.
그리고 왜 그녀가, '하루카'의 모습이 되었는지도 - - -
그 순간, 남자는 다시 태어났다.
'하루카'를 극진히 간호하고, 팔을 걷어 치료에 나서 회복을 기도했다.
일도 쉬고, 한시도 떠나지 않고 '하루카'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손을 놓아버린다면 딸의 죽음을 두번째로 경험하는 느낌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이 실장석이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며칠씩 학대를 당하면서도 남자의 거칠어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고 목숨도 내던지고 미소짓던 그녀를 절대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루카'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놈'이 넘겨준 실장석 활성제였다.
훈육에 실패해 과도한 타격을 주었을 때 사용하라고 주었던 것.
인간이 된 '하루카'에게 효과가 있을지 불안했지만 남자의 기지는 주효했다.
'하루카'의 몸상태가 완전히 좋아지는 데는 일주일이나 걸렸지만, 남자는 반쯤 강제로 일을 쉬면서까지 줄곧 간호했다.
그녀가 회복되어 눈을 뜬 순간, 남자는 감격에 펑펑 울어버렸다.
그리고 '하루카'도 남자에게 안기자 처음으로 소리를 높여 울었다 - -
'두명'은, 겨우 서로가 요구하던 무언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하루카를 받아들인 뒤에도 고난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미 죽은이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다.
또 처자식을 잃었다고 알려진 남자가 딸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를 집에 살게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도 요즘 세상에 문제가 생긴다.
하물며 하루카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의 모습이 된 실장석의 존재라니,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본인들의 의향과 관계없이, 이후에도 주인과 실장석의 관계가 강요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닳은 남자는 고민을 거듭하다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된 지하 창고를 고쳐 그곳에 하루카를 격리하기로 했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곳은, 사실상 현대판 '자시키로(座敷牢)'
세상의 눈에 띄지 않는, 특수한 가족을 숨어살게 하기 위한 비정한 감옥.
남자의 심정과는 반대로, 지하실은 하루카를 살려두고 숨긴다.
몇개월을 몇년을 이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하루카는 불평불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남자가 두꺼운 문을 열 때까지 마냥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는 남자가 방을 찾았을 때 반드시 그 미소를 보여준다.
두사람 사이에 사람의 대화는 없다.
하지만 남자는 조금씩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한 실장석.
상냥한 실장석의 '인간'.
있을 수 없는 기적으로 탄생한, 남자의 '꿈'.
남자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놈'의 존재는 남자 안에서 그의 삶을 위협할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하루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는 기쁜, 그러면서도 어딘지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트등 불빛이 어둠과 강한 대비를 이루어 그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남자는 조금 허둥지둥하며 일어섰다.
만약, 이 아이의 존재를 '놈'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놈'이 아이의 정체를 알아차린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놈'이 이 아이를.....
불현듯 남자의 가슴 속에 시커먼 감정이 싹튼다.
그것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무서운 것이어서 등골이 오싹해진다.
과거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지켜야 한다 - -
최근 며칠 사이 남자의 마음 속을 맴돌던 말이 떠오른다.
지하실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자 찬 공기가 뺨을 때린다.
그 순간 남자의 뇌리에 또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 - 하지만, 저 아이는 실장석이야, 뭐냐고......
잔뜩 흐린 하늘으로부터 뚝뚝 차가운 빗방울 쏟아진다.
곧 거세진 비는 차고의 아크릴제 지붕을 세게 두드린다.
그 소리에 반응해 남자는 다시 차고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 한대의 공간이 빈 차고를.
◇◇◇
간밤의 비가 개어 쾌청함을 예감케 하는 상쾌한 아침.
남자는 하루카에게 아침식사를 주기 위해 여느 때처럼 지하실로 향한다.
두꺼운 문 너머로 방향제의 상큼한 향과 포근한 공기가 감돈다.
일찍 일어난 하루카는 벌써 침대에서 나와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안녕 하루카. 아침이야."
그림책을 내던지고 얼굴 가득 웃는 얼굴로 가슴팍에 뛰어드는 하루카.
남자는 허리에 들어오는 태클을 받아내며 살짝 신음했다.
"하하, 힘이 넘치네. 오늘 아침은 오트밀과 우유빵이야. 하루카가 좋아하는 치즈도 있어."
시판되고 있는 천연 치즈는 하루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하루카는 귀를 쫑긋 세우며 기쁨을 표현하고 남자의 가슴에 볼을 비빈다.
약간 부은 눈을 보고 또 밤울음을 한 것을 알아차린다.
자실장일 때부터 고쳐지지 않은 조금 곤란한 증상이지만, 지금은 그것도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
"자, 위로 갈까.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아."
콕콕 끄덕이고 하루카는 남자의 손을 잡는다.
하루카가 지하실에서 나오는, 아주 잠깐... 남자가 잃어버린 가족과의 추억을 재현할 수 있는, 한정된 순간.
하루카의 손을 꼭 잡고 남자는 따뜻한 아침 식사가 차려진 부엌으로 서둘렀다.
"파파"
남자가 부엌에 들어간 순간 뒤편에서 이상한 속삭임이 들렸다.
뒤돌아본 시선 끝에,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하루카가 있다.
남자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고 하루카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중얼거린다.
"파파..."
"하루카...?"
"파파, 파파!"
"........."
하루카가 처음으로 말하는 인간의 말이었다.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똑똑히 소리내어 말하고 있다.
진짜 하루카보단 약간 높고 깊이가 부족한 목소리.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남자를 부르는 '하루카의 소리'였다.
다소 위화감이 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남자의 가슴 속에는 아주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파파! 파파, 파파♪"
"하루카..."
당황한 남자를 부둥켜안고, 하루카는 다시 애정을 표현하며 볼을 내밀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날 저녁 남자는 저녁거리를 사러 역 앞 슈퍼마켓으로 발을 옮겼다.
남자의 얼굴은 무심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하루종일 그런 식이었다.
머릿속에는 하루카의 목소리가 여러차례 반복된다.
휴대전화 대기화면도 이미 그녀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문득 유제품 코너 끝자락에 있는 천연 치즈 라벨에 눈길이 간다.
상품에 손을 뻗으려던 남자의 시야 끝에, 뜻밖의 것이 보였다.
"꽤나 즐거워보이네?"
귀에 거슬리는, 지금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터져나온다.
- - '놈'이다.
얼굴을 들지 않고 눈만 치켜떠서 보자, 뒤룩뒤룩 살찐 지방범벅인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아무래도 억지로 웃음짓는 듯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섬뜩함을 부추긴다.
남자는 적당히 인사하고 떠나려 하지만 놈에게 손목을 잡힌다.
"설마 그거, 그 자실장에게 사줄거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약간 노기를 띤 목소리.
놈은, 분명히 남자의 태도에 화가 나 있다.
여기서 맞닥뜨린 것도 우연이 아니라 계속 따라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남자의 등골에 찬 것이 내려왔다.
억지로 손을 뿌리치고 "아냐"라고 대답하고, 남자는 되돌아보지도 않고 계산대로 향한다.
계산을 마치고 슈퍼마켓을 나오자 바로 눈앞에 놈이 히죽거리며 서 있었다.
"오늘, 죽이자"
"뭐라고?"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 죽이면 될지도 모르고 있잖아.
그래, 당신이 실장 죽이는 거, 나한테 직접 보여줘."
남의 시선도 개의치않고 과격한 발언을 해대는 '놈'.
하아하아 숨을 헐떡이며 개처럼 바짝 혀를 빼문다.
심한 혐오감을 일으키는 그 태도에, 남자는 혀를 차며 "부탁인데, 나에게 직접 찾아오지 말아줘." 라고만 전한다.
하지만 그 말이 '놈'의 신경을 건드린다.
"장난치지마! 나랑 약속했잖아! 실장석을 죽이겠다고!!
당신! 어째서 약속을 깨는 거냐고! 그러면 내 지금까지 한 고생은 - - !!"
갑자기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남자는 허겁지겁 놈의 입을 틀어막고 역 옆이 어둑어둑한 골목에 뛰어들었다.
몇명이 의아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입이 막혀서도 어린아이처럼 떠드는 놈을 겨우 인기척 없는 곳으로 데려간 남자는 옆구리에 강렬한 훅을 날렸다.
"욱 - - !!"
앞으로 숙여진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 더욱 강력한 보디블로를 명치에 날렸다.
고함이 비명으로 바뀌자 남자는 놈을 난폭하게 들이받고 풀어주었다.
"남들 앞에서 쓸데없는 말 하지마."
".....으으...윽......!"
입가를 비틀며 치밀어오르는 토사물을 참는지 남자는 지독하게 겁먹은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실력 행사까지 당할 줄 몰랐던 건지, 아니면 손보이면 아주 얌전해지는 성격인지, 놈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한심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대 더 때려줄까 했지만 올라간 발을 보고 반사적으로 웅크리는 놈을 보며 왠지 모르게 맥이 풀린다.
남자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놈을 그대로 두고 묵묵히 귀로에 올랐다.
수십초 뒤 등 뒤에서 겁에 질린 듯한 토하는 소리와 목소리가 들렸다.
모처럼의 기분을 망쳐버렸지만 집에 돌아와 하루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남자는 아까 있었던 일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파파♪"
보훗! 소리를 내며 뛰어드는 하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남자는 "다녀왔어" 속삭이며 즉시 상대해주었다.
"늦어서 미안. 배 안 고파?"
"파파!" 씰룩씰룩
"응, 참고 있었다고? 그거 훌륭하네. 곧 준비할게."
"응-♪"
끄덕끄덕하며 하루카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갑자기 표정이 흐려졌다.
매우 불안한, 혹은 근심스러운 듯이 보인다.
남자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의문이 생겼지만 굳이 묻지 않고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이상하게도 그동안 '놈'의 연락이나 접근이 일체 없다.
지난번 대면이 효과가 있었나, 남자는 생각했지만, 그걸론 안심되지 않는다.
그토록 집요하게 쫓아오는 사나이가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것같지 않다.
남자는 최대한 경계심을 유지한 채 하루카와의 생활과 일에 매달렸다.
한편, 하루카는 남자와의 거리를 더욱 좁혀, 야간 한정이었지만 지하실에서 나와 있게 되었다.
남자가 외출하는 동안만큼은 여전히 갇혀 있지만 돌아온 뒤에는 줄곧 해방 상태다.
함께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목욕을 하고, 취침한다.
이미 하루카의 취침장소는 지하실이 아닌 남자의 침대로 바뀌었다.
그것은 단지 같은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위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매우 행복하고 소중한 스킨십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방 안에 암막 커튼을 쳐 빛이 바깥으로 새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카가 지하실에서 나와 있는 것은 야간이므로 확실히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지만, 실내의 불빛으로 그림자가 보여버린다.
남자는 원래 커튼에는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우연히 들킬 수도 있어 급히 백화점에서 대량 주문했다.
두 사람의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어 2주째가 되려고 할 때.
남자는 하루카가 이 집에 온 이후 전혀 햇빛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닳았다.
하루카는 건강했지만, 그 몸은 그렇게 건강해 보이진 않았다.
희고 거친 피부, 지나치게 마른 체격, 너무 희미한 머리색.
그 모습은 마치 인형같기도 했다.
충분한 영양과 운동을 제공하려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극복해야할 조건이 많이 남았다.
적절히 외출을 시키고, 새로운 자극을 주어 스트레스를 풀거나 햇볕을 쬐며 건강한 대사를 되찾는 것이 지금 그녀에게 필요하다고, 그는 다양한 조사를 통해 이해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한 끝에 남자는 유급휴가를 내고 하루카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는, 소위 촌스러운 온천 여관이 최고라 생각한 남자는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최적인 곳을 골랐다.
고생 끝에 다음 주말, 인근 현의 한 산골에 위치한 마이너한 온천 여관에 숙비할 준비가 되었다.
"하루카. 다음주엔 아빠랑 온천에 가자."
"온천? 응?"
"엄청 따뜻하고 큰 목욕탕이 있는 곳이야. 거기선 하루카가 햇님 밑에서 맘껏 놀아도 괜찮아."
"와-♪ 파파! 파파♪"
"하하하, 그렇게 기뻐? 좋아좋아"
보고를 받은 하루카는 매우 기쁜 듯이 남자에게 달려들어 볼을 비벼댄다.
체격에 비해 조금 가벼운 체중을 안은 남자는 할 수 있는 한 이 딸을 기쁘게 하겠다고 맘속으로 다짐한다.
어느덧 그는 죽은 딸과 아내에 대한 보상의 범위를 넘으려 하고 있었다.
그날 남자는 무릎 위에 하루카를 앉히고 함께 인터넷 화면을 보며 방문할 곳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야기라고는 해도 하루카는 단지 맞장구를 치거나 같은 단어를 반복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가슴에 기대 숨쉬는 하루카의 무게를 느끼는 남자의 머릿속에서 이제 놈의 존재는 완전히 없어졌다.
하지만 그 다음날, 남자는 곧 그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다.
◇◇◇
남자가 신변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서였다.
늘 그렇듯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현관을 나설 때 이웃집 부인과 마주쳤다.
동네에서도 유명한 실장석 애호가로, 오늘도 핑크색 옷을 몸에 걸친 큰 실장석을 데리고 걷고 있다.
이전처럼 실장석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남자는 부인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무 악의 없이 그저 평범하게 말을 걸었을 뿐이었지만, 왠지 부인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 - 가자, 테레시코쨩!"
데스우-
노골적으로 혐오하는 표정을 지으며 부인은 잰걸음으로 남자 앞을 지나갔다.
그녀의 실장은 잠시 남자를 돌아봤지만, 곧 다시 돌아서 부인의 뒤를 따라간다.
"뭐야? 내가 뭘했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는 평소처럼 역으로 걸어간다.
기분 탓인지 지나치는 사람들 중 몇몇이 의아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같았다.
아까 부인처럼 - -
그날 밤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집 앞에서 무언가 이야기하는 여자들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웃 부인처럼 모두 실장석을 기르는 사람들이다.
그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쳐 반사적으로 인사했지만 부인들은 마치 뭔가 꺼림칙한 것이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노려본다.
오늘 아침에 만난 부인이 남자 앞에 서슴없이 다가온다.
그 이마에는 선명하게 핏줄이 솟아 있었고, 남자에게 혐오스러운 예감이 맹렬히 엄슴했다.
"당신, 우리 앙투아네트쨩을 어떻게 했어요?!"
"네?"
"시치미 떼지 말아요! 오늘 아침 당신도 만났잖아요! 우리집 실장석쨩을!"
"그건 알겠지만, 그 아이랑 제가 무슨 상관이..."
"뭐, 이런 파렴치한, 언제까지 얼버무리려고!!"
남자는 뭐가 뭔지 이해가 안 된다.
이윽고 부인들은 앙투아네트의 주인인 부인의 뒤로 다가가 뭐라 불평하기 시작한다.
일로 피로해 일일이 그런 일에 귀를 빌려줄 여유는 없었지만, 그녀들의 말 속에 '없어졌다' '죽였다'는 위험한 말이 들려, 딱 잘라 말했다.
"돌려줘! 우리 앙투아네트쨩을!"
"당신이 숨기는 거 다 알아요!"
"당신, 실장쨩을 괴롭히는 게 취미라면서요! 도대체 왜 그런 몹쓸짓을 하는거야?!"
"우리집 마르가리타쨩도 어제부터 없어졌어요! 당신이잖아?! 경찰 불러요!!"
남자는 여기까지 와서야 자신이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를 알았다.
"기다려주세요! 어떻게 제가 실장석따위를 - -"
순간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그것이 부인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역시 당신이었어! 용서할 수 없어~!"
"경찰, 경찰을 부르죠!!"
"우리 마리 셀레스트쨩은 절대로 당신 손에 잡히게 두지 않을 거예요!"
"부탁해요! 내 딸이나 마찬가지야~! 돌려줘, 돌려달라고!!:
"기다려!! 나는 그런 짓 안 해요!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어요!"
다가오는 부인들을 밀어낼 듯한 기세로 남자는 무심코 언성을 높인다.
하지만 흥분한 부인들의 귀에 그의 말이 들릴 리 없다.
입씨름을 하다보니 인근 주민들이 줄줄이 모인다.
잠시 후 누가 불렀는지 순찰차의 사이렌 불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남자와 부인들의 말다툼은 달려온 경관에 의해 끊겼지만 남자는 꼼짝없이 간단한 심문을 받게 됐다.
이야기에 따르면, 괴한들이 "남자가 실장석을 유괴해 자택에서 심한 부상을 입히고 있는 것같다"는 소문을 흘리고 있었던 듯하지만, 그것과 연계되듯이 실제로 사육실장 몇마리가 행방 불명이었다.
게다가 그 중 한마리인 앙투아네트의 소지품이었던 파우치가 남자의 담 안쪽에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남자는 출근할 때 그런 건 못 보았다.
하지만 그의 알리바이 주장은 듣지도 않고, 기세에 쓸린 듯 경찰들도 부인들의 의견을 듣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가요, 당신?"
"할 리가 없잖아요. 도대체 왜 그런 걸."
"그럼 죄송하지만, 댁 안을 대충 보여주시겠습니까?"
"어?"
"아니, 가택 수사같은 게 아니라, 간단한 거니까 괜찮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쪽 분들도 납득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그건 곤란합니다. 우리집도 사정이..."
"들어가 보는 건 우리 경찰들 뿐입니다. 우리가 설명하면 납득해주지 않겠어요?"
젊은 경관의 말에 남자는 그만 고개를 끄덕여버렸지만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하실에는 하루카가 있다.
가장 의심받을 지하실을 들여다봤을 때, 그 안에 소녀가 감금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아버리면....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남자는 영문도 없이 경관의 말을 계속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
그날밤 남자는 하루카를 안고,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서가 아니라, 일부 짚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실장석을 학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잃은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실장석을 철저히 괴롭히려고 했으니.
하지만 이제 그 기분은 없다 - - 남자의 진짜 생각은 '다른 하루카'가 되어 여기에 있다.
억울한 마음에 몸이 떨리는 남자에게 하루카는 상냥한 표정을 짓는다.
두툼한 가슴팍을 작은 손으로 가볍게 문지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다.
"파파......파파"
하루카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다.
어느새 남자는 어떻게 하면 하루카를 계속 지킬 수 있을까,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따.
그것이 당초 자신의 맹세를 어기게 되는 것임도 잊어버리고.
그 후 며칠간 인근 주민들의 소요는 더 강해졌다.
특별히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 경찰의 수색 요청을 거부한 것이 불신을 키웠다.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다니는 생활을 강요당한 남자는 좁게 움츠러드러야 하는 괴로움을 일과 하루카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벌충한다.
'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러던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어때 상태가?
슬슬, 그녀석을 때려죽이고 싶지 않나?"
놈의 말에 묘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귀가 중에 전화를 받은 남자는, 그늘에 숨어 입을 손으로 가리고 주변에 목소리가 새지 않도록 주의하며 따진다.
"무슨 의미지?"
"당신, 완전 학대파라고 생각되고 있어.
어쨌든 집에서 남의 사육실장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잖아.
뭐,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잖아?
의심받고 있으니까 이제 와서 한마리 때려죽인다고 해도 대수야?
주변 사람들도 크게 신경 안 써."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 - "
"이봐, 적당히 좀 해!
나는, 당신이 실장을 죽이기 쉬워지도록 상을 차려준 거거든?
당신은, 이제 학대파라구!
학대파라면 실장석을 죽여도 주변에서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어때, 이거라면 이제 당신은 세상의 시선은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남자는 무심결에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닳았다.
놈은 - - 완전 미치광이야!
다시 휴대전화를 줍고, 남자는 최대한 동요를 억누르며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이쪽도 사정이 있어. 앞으로 2,3일 더 기다려줘."
"어째서! 지금 당장 죽여"
"그건 안 돼."
"알겠어. 하지만 거짓보고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실장을 죽이면 어떤 모습인지 난 잘 알아.
당신이 거짓말해도 금방 안다구."
휴대전화를 끄고, 남자는 평소의 귀로를 벗어난 방향으로 걷는다.
도중에 큰 마대를 구입해 가방에 넣고, 다시는 가기는 싫었던 곳으로 향한다.
행선지는 시립 '후타바공원' - - 아내와 딸이 사고사한 현장 근처에 있는 그 장소다.
◇◇◇
남자는 어둠이 깔린 공원 안에서 복숭아빛 형체를 찾았다.
놈이 말하던 '버려진 사육실장'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육은 커녕 들실장조차도 거의 없었다.
마대를 한손에 들고 여러 차례 공원을 돈 남자는 곧 지쳐서 벤치에 앉았다.
놈의 소망을 이뤄주려면 실장석을 정말 죽여야만 한다.
그러나 하루카에게 손을 댈 수 없는 이상, 다른 개체를 찾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남자는 실장석의 생태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들생활 경험이 있는 실장석이 눈에 띄기 어려운 장소를 확보해 은신했을 가능성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곳은 학대파가 상세히 알고 있을 정도로 실장 학대의 메카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연명하는 자들이 지혜를 짜내 사람 눈을 피하는 것은 당연했다.
부욱...... 땅!!
걋!!
고기를 찢는 듯한 소리와, 딱딱한 물건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계속해서, 소리 없는 비명.
눈앞의 참상에 겁먹고 소리지르기도 전에, 두마리째의 배에 딱딱한 끝부분이 박혀 있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웅크리는 성체의 뒷통수에 빠루의 끝이 천천히 꽂힌다.
젊은 남자는 모르는 눈으로 보아도 실장 학대에 숙련돼보인다.
삼십분쯤 시간을 들여 두 마리를 죽인 젊은 남자는 빠루를 닦으며 남자에게 다가왔다.
"당신, 아까부터 뭘 보는거야. 뭐 불만이라도 있어?"
전혀 교양없는 태도에 남자는 일순 비웃을 뻔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생각해내고, 일부러 서툴게 대응하기로 했다.
"- - 학대 초심자?
아아, 그래서 내 테크닉을 본 거구만."
"괜찮다면 조금만 가르쳐주겠어?
실장석을 어떻게 속이는지 몰라서 말야."
1만엔 지폐를 건네며 부탁하자, 젊은 남자는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귀에 거슬리는 혀를 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콘페이토 등 먹이를 써서 뛰쳐나온 실장석의 뒷통수를 가볍게 때려 실신시킨 뒤, 넓은 곳으로 데려가 심하게 다루는 것이 젊은 남자의 방법이자 정통적인 것이라고 한다.
모습을 드러낸 현장이 아니라 굳이 넓은 곳에서 죽이는 것은 실장석의 무참한 모습을 잘 보기 위해, 그리고 주변의 실장석에게 공포를 심기 위함이라고 한다.
현명하게 모습을 감춰야 할 실장석은 머리를 뿌리면 경계를 풀고 튀어나와, 동족이 괴롭힘당하면 구경하러 달려간다.
학습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인지, 같은 과정을 곧바로 반복해도 또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젊은 남자는 콘페이토 봉지를 꺼내 '당신도 한번 해보'라고 말한다.
시험삼아 한움큼을 쥐고 풀숲에 집어던지자 후드득거리는 소리를 듣고 데스데스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절믄 남자는 곧장 뛰어가 이번에는 실장석 세마리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모두 녹색옷을 입고 있고, 게다가 도저히 원사육실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들냄새가 배어 있다.
남자는 놈에게서 들은 '버려진 사육실장이 잘 보인다'는 이야기를 확인해보았다.
"엉? 사육실장을 여기 버리는 놈이 많긴 한데.
바로 들실장에게 붙잡혀서 잡아먹히고 죽는 게 보통이지.
지금은 즉시 보건소행이 정설인데, 당신 사육실장 잡으러 온 거야?"
그건 분명히, 누군가한테 속은 거라구."
◇◇◇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귀가한 남자는 집에 와 이변을 깨달았다.
입구 문은 반쯤 열려 있고 방의 불빛은 모두 꺼져 있다.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갔더니 문이 열려 있었다.
딸의 이름을 외치며 실내에 뛰어들자 캄캄한 방 안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는 하루카의 모습이 보였다.
"하루카, 괜찮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파, 파파아아..... 파파아아....."
어두컴컴해 잘 보이진 않지만 뭔가 매우 무서운 일을 당한 듯 끊임없이 떨고 있다.
울며 매달려 안기는 하루카를 진정시키려 남자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하지만 속으로는 격렬한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루카가 남자의 품안을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휴대전화 진동에 놀란 듯하다.
화면에는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이름이 있었다.
"어디에 숨겨논거야 - - 어이"
지금까지 듣지 못한 이상하게도 차가운 목소리다.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짐짓 상대편의 말을 기다렸다.
"집안을, 둘러보고 왔어.
그런데, 어디에도 실장이 없잖아!
대체 어디에 숨겨논 거야!
아니면 나에게 말도 없이 버리거나 죽인 거야?"
남자는 뭐라고 대꾸할까 생각했지만 무엇을 택해도 욕만 돌아올 것 같았다.
오로지 참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치는데, 놈의 목소리가 갑자기 늘 그렇듯 구질구질하고 야릇한 울림으로 바뀌었다.
"뭐, 지하실에 있더라, 당신 딸인가?
이상하네, 딸은 죽었을텐데."
심장이 두근대며 미친 듯이 고동친다.
"당신 딸과 아내분, 사고로 죽었지 않나?
실장을 치고 미끄러졌잖아.
그럼 거기 있는 닮은 분은 누구야?
가둬두다니, 왠지 수상한걸."
놈의 말에 미간이 꿈틀 반응한다.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 딸, 뭔가 여러가지로 알리기 싫은 녀석이겠지?
근처에 알려대면, 곤란하지 않겠어?"
"- -"
"빨리, 실장을 죽여.
내일, 이번에는 당신이 있을 때 갈게.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여줘.
아, 이렇게 기다리게 했으니, 괜찮지?"
"- - 알겠다"
전화를 끊고 남자는 분노를 억누르며 하루카를 안았다.
지금은 어쨌든 조금이라도 그녀의 공포를 없애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실을 나와 목욕과 옷을 준비하려던 찰나, 남자는 하루카에게 일어난 더 심각한 사태를 겨우 깨달았다.
하루카의 옷은 너덜너덜하게 찢기고, 게다가 그 아래 피부에는 얕은 상처와 물린 자국, 얇게 베인 흔적이 무수히 나 있었다.
게다가 얼굴도 맞은 듯 벌겋게 부어올랐다.
바닥에 흐르는 핏자국이 발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남자의 참을성은 임계점을 넘었다.
"이자식.... 그새끼가!!"
남자가 아까 지하실에서 다짐한 결의는 여기서 확실히 굳어졌다.
'놈'을 죽인다 - - !!
분노로 몸이 떨리는 남자에게 하루카는 등을 껴안았다.
그 얼굴은 어째선지 만면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웃는 거야?"
"파-....파.....♪"
"어째서.... 왜?"
"파-파......"
"도대체 왜, 웃는 거야!
넌 맞은 거라구, 혼쭐이 났다고!
게다가.... 당했다고?!
알기나 하는거야?!"
"파-.....파...."
"하루카, 너는 - - !!"
거기서, 남자의 성난 목소리가 멈춘다.
남자는 하루카의 웃는 얼굴의 뜻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하루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 이전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도 하루카는 공포를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눈에 가득 눈물을 담으면서도.
어깨와 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그럼에도, 웃는 얼굴을 절대 풀지 않았다.
남자의 가슴에 그때의 죄악감이 되살아난다.
"파파.... 파파, 파파!!"
하루카가 거듭 강하게 끌어안는다.
남자는 더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루카.... 하루카!!"
"파파!! 파파!! 우우, 우아아아아앙!!"
"용서해줘, 하루카! 나는, 또 너를....!!"
또 딸을 지키지 못한 분함과 안타까움이 가슴 속에 소용돌이친다.
모든 감정이 뒤섞여 남자는 눈물을 참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품은 하루카의 온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남자는 자신의 침대에 하루카를 불러 함께 잠을 잤다.
마지막에는, 진짜 하루카와 함께 잠을 잔 것은 언제였을까 -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니, 진짜 딸이란 - - 딸이란,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란, 무엇일까?
졸음 속에서, 남자의 마음은 큰 당혹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그날 회사를 쉰 남자는 하루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른 아침부터 지하실에 감금했다.
가두었다고는 하지만 열쇠를 놈에게 도난당했기 때문에 자물쇠를 잠가봐야 소용없다.
하루카는 남자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아니면 심상치 않은 상황을 이해했는지 순순히 남자의 말을 따랐다.
마치 최후의 만찬같은 답답한 분위기로 아침을 해결하고, 남자는 지하실에 점심식사를 준비해둔다.
이후엔 '놈'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내일 온다고만 말했으니 놈은 이쪽 사정은 상관없이 올 것이다.
품 속에는, 만일의 경우에 결정적 수단이 될 물건을 숨기고.
지하실 문에 기대 남자는 하루카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자신의 아내와 딸의 죽음, 그리고 하루카를 얻은 본래의 이유.
놈의 일, 하루카를 원인으로 놈과 다투고 있는 것.
그 후, 기분이 변한 것, 게다가 지금은 하루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남자가 하루카를 죽이려고 했다는 고백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하루카는 그 사실까지도 받아줄 수 있을 것이다 - - 그런 확신이 있었다.
문 너머로 대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게 끝나면, 정말 둘이서 온천에 가자.
그러니까 - -"
"......"
"그래서 나는 확실히 결착을 지을 거야.
내가.... 초래한 일이니까."
"......"
"이번에야말로, 나는 너를.... 지켜보이겠어."
길고 긴 시간이 조금씩 지나간다.
오후 6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거칠게 덜커덕거린다.
놈이 왔다 - -
남자는 필사적으로 심장 고동을 억누르고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손잡이가 철컥거리는 소리와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쿵쿵대는 소리, 의미불명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 남자는 자물쇠를 열었다.
거기에는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코트를 걸친 '놈'이, 큰 자루를 어깨에 걸쳐매고 있었다.
"빨리 열어, 뭐하는 거야"
"미안, 들어와"
"드디어, 그녀석을 죽이는 거군, 두근두근거려."
열쇠를 잠그고, 놈을 지하실로 이끌면서 남자는 조용히 묻는다.
"근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뭐?"
"왜, 그걸 건드렸는지."
"하하, 내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냐?
그녀석이 그 자실장이잖아?"
"어떻게 알았지?"
"알아봤지. 엉망진창 놀랐지만 말야!
눈색이 다르고! 실장 귀도 있고, 울음소리가 영락없이 실장이잖아!
뭐야, 그러면 그러다고 처음부터 말하지.
그렇게 돼버리면, 죽이고 나서 괴로워지잖아."
"어째서 어제 집에서 끝내지 않았지?"
"확증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구!
이제 사양하지 않겠어.... 헤헤헤, 인화한 실장을 때려죽일 수 있다니,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적이야.
아참♪
아아, 움찔움찔거린다.... 발기한다.
음, 죽이기 전에 한번 더 그놈을 범하게 해줘, 부탁이야."
놈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태도로, 진심으로 기뻐한다.
치밀어오르는 살의를 필사적으로 참고 참으며 남자는 재차 물었다.
품속에 감춘 '결정타'의 존재를 손으로 확인하면서.
"좀더 말해주지 않겠나"
"어이, 적당히 좀 해.
어서 그놈을 죽이게 해줘."
"어떻게, 내 아내와 딸의 사고 원인이 실장석을 치고 미끄러진 거라는 걸 알았지?"
"...."
드디어 확신에 다가선다.
남자는 어젯밤의 전화통화를 떠올린다.
"아내와 딸의 사고는 분명 뉴스에도 보도됐어.
하지만 보도된 사고 원인은 트럭과의 정면 추돌이야.
미끄러졌다는 것도, 실장석이 깔렸다는 것도 나만이 경찰에게 전해들은 사실이다.
보도가 안 됐으니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 리 없어."
"......"
"하나 더.
그 공원에 사육실장이 잘 버려진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너는 대체 무슨 죄로 집행 유예 중인 거지?"
"기다려, 그런 말보다 놈을 죽이는게 먼저야"
"질문에 대답해주실까?"
"시끄러-워. 그런 게 대체 무슨 소용이라고.
이미 죽은 놈들 일 따위, 상관없잖아."
놈의 한마디가, 남자의 살의의 스위치를 덜컥 올렸다.
무의식적으로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남자는 필사적으로 충동을 참았다.
태어나서 이만큼 절제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온힘을 다해 버텨냈다.
지금 손을 쓸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실에 있는 건가, 열겠어."
놈은 익숙한 솜씨로 지하실 문에 손을 댄다.
하지만 한순간의 틈을 타, 남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지하실 안에는 전에 놈이 떠맡긴 빠루가 놓여 있다.
그것이 있으면 비록 상처없이 나가지 못한다 해도, 놈이 하루카에게 손을 대는 일 없이 몰아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앗, 기다려!"
선수를 뺏긴 놈이 황급히 실내로 뛰어든다.
하지만 - -
남자는 빠루를 들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놈도 다음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눈 앞에 펼쳐진 실내의 이변에 시선을 빼앗겨 경직되고 말았다.
그곳엔 거대한 '고치'가 있었다.
하얗고, 크고, 격렬하게 진동을 반복하며, 주위와 무수한 실다발로 연결되어 있었다.
두근, 두근하고 맥동하는 측면에 무엇인가가 감겨 있었다.
그것이 오늘 아침까지 하루카가 입고 있던 옷이라고 깨닫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뭐지?
설마 - - "
"이게 실장고치냐, 처음 봤다......
근데, 뭐야? 그 딸은 어딨어?"
하루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대한 고치는 하루카가 화한 모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하루카는 이미 한번 고치를 거쳐 인화를 했을 터.
다시 한번 고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카, 하루카아앗!"
"끝내준다, 실장고치를 학대하는 것도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경험이잖아!!
이번 일은 이것으로....!"
그렇게 외치며 놈은 주머니에서 자기 빠루를 꺼내 실장고치로 날아올랐다.
순간 반응이 늦어진 남자는 놈의 일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거세게 휘두른 빠루의 끝이 고치 측면에 박혀 찢어진다.
동시에 안에서 대량의 점액이 분출한다.
"우와아아아앗?!"
그것은 갈색도, 회색도, 녹색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빛깔의 액채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내장 같은 것이나 모발까지 섞여 있었다.
그리고 하루카가 입고 있던 속옷까지......
의미를 이해한 남자는 부랴부랴 고치려 했다.
"하루카, 하루카아앗!!"
"너, 역시 애호에 눈떠버린거냐!!
죽여버려! 실장을!!'
"이자식, 그만해!
얼마나 우리를 괴롭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거냐!"
"시끄러! 나도, 너네 집 차에 흙탕물이 튀겼다고!
피차일반 아닌가!!"
남자의 미간이 꿈틀댄다.
자연히 그 시선은 놈을 노려본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좀 위협을 시켜줬더니만!!
사고는, 네 와이프가 운전을 못해서 벌어졌을 뿐이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역시, 네놈이.....!!"
"내가 아냐, 도로 한가운데로 달려간 실장석이 잘못이야!
그러니까, 실장석을 죽여버리면 당신도 복수를 하는 거잖아?
내말이 틀린 게 없잖아!"
"이자식..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로 - - !!"
드디어 한계에 다다라 놈을 때려눕히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치이-
라는 작은 울음소리가 두사람의 발 아래에서 들렸다.
두꺼운 점액에 싸인 작은 벌거벗은 자실장이 괴로운 듯 신음하고 있었다.
그 몸은 반이 붕괴했고 피부가 없어 새빨간 근육조직과 내장 일부가 노출돼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점액의 소용돌이를 탈출하려고 열심히 버둥대고 있었다.
테칫-
힘겹게 점액으로부터 얼굴을 내민 자실장은 겨우 뚜렷한 울음소리를 냈다.
남자와 자실장의 눈이 한순간 마주친다.
자실장은 만면에 웃는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할지라도 매우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남자와 '하루카였던 것'이 공유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있다아아아아앗!!"
부웅........!!
짓
자실장의 웃는 얼굴은, 놈이 힘껏 내려친 빠루에 의해서 순식간에 없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자실장은 완전히 납작한 고기덩어리가 되어, 점액과 섞여 흘렀다.
"하루카아아아아아아!!!
우오오오오오오오오!!"
놈의 얼굴에 강렬한 오른손 훅이 작렬한다.
남자는 즉각 마운트 포지션을 잡고 두팔로 쉴새없이 얼굴을 후려쳤다.
놈의 비명도, 애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욱....웩! 그만....!!"
"으갸아아아아아아!!!"
폭발하는 살의.
남자는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아니 끊어지지 않은 게 이상하겠다.
남자는 놈을 정말로 때려죽일 생각이었다.
여기서 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원한이 풀릴까!!
아내를, 딸을, 그리고 또다른 딸을 죽이고, 남자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간 '놈'.
주먹에 피가 배고 뼈가 아프지만 그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마구잡이로 얼굴을 내려쳤다.
처음 계획했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뭐하는거야! 그만둬!!"
돌연히 들은 기억 없는 목소리가 실내에 울린다.
동시에 강한 힘으로 떼어낸다.
경찰관들이 지하실에 뛰어들었다.
놈이 집에 들어오기 전 거동이 수상하다고 여긴 이웃이 신고했던 것이다.
처참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경관들은 난폭해진 남자를 붙잡고, 얻어맞은 놈을 간호했다.
얼굴을 심하게 구타당해 코가 부러지고 대량으로 피를 흘리면서, 놈은 경관에게 매달려 "도와줘요" 울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기억이 없다.
남자는 경관에게 결박당한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라, 이양반.... 이게 뭐야?"
"마이크다, 옷자락에 마이크가 붙어 있어 - - 보이스레코더인가 이거?"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 경관들의 중얼거림이 들린 듯한 기분이었다.
◇◇◇
그리고 - -
남자는 놈에 대한 과도한 폭행치상 및 상해죄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남자의 친족이 놈의 유쾌범·고의범적 행동으로 사망한 것, 또 그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다는 것, 죄에 대해 뉘우치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보이스레코더에 녹음된 대화로 입증됐다.
또한 대화내용에 따라 놈이 남자에게 실장석 학대를 강요했던 사실도 드러났고, 남자의 자택 내에서 실장석을 살해한 사실도 인정돼 명확한 계획성이 있다고 보아 정신장애 인정도 되지 않았고, 정식 재판으로 넘어갔다고 알려졌다.
놈은 이전에도 같은 수법으로 타인이 사고에 말려들 위험이 있는 과격한 실장학대를 한 죄로 체포된 바 있어 그 집행유예 기간중에 재차 학대(범죄)행위를 실행했다고 하여, 한층 더 중벌이 가해지게 되었다.
남자는 보이스레코더의 내용 때문에 실장 학대를 실제로 했다고 인정되지 않아, 참은 결과가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되었다.
또 놈에 대한 폭행치상·상해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어 당초 예상보다는 많이 감형되었다.
지하실의 점액과 내장·육편에 대해서도, 당초에는 사체 유기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었지만, 이후의 조사에서 인간의 사체가 아닌 실장석의 것이라고 판명되었다.
또 이 사건은 작년 초의 사건에 이은, 귀중한 실장석의 고치화 사례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루카'가 살해당한 건 자체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물 파손죄로밖에 다뤄지지 않았다.
'놈'은 가목에 갇혔고, '남자'에게는 - - 잠시 공백 뒤 평온한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남자는 꾀죄죄한 탁구공을 손에 들고 있었다.
조금 움푹 들어간, 하루카가 소중히 여기던 장난감.
사건의 파도는 이미 지나갔고 과거의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지만, 남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여전히 차갑다.
하던 일도 그만두고, 지하실도 폐쇄했지만, 그런데도 남자는 그 집을 떠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평생을 떠날 수 없으리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자는 어째서 하루카가 다시 고치를 지어 자실장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했는지 최근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하루카는, 전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장석인 자신이 왜 남자의 미움을 받고 있었는지를..... 그래서 남자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 위로하고 싶었다.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남자의 불안과 증오심을 떨치기 위해.
그런 만큼 그녀는 줄곧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호되게 당해도, 웃는 얼굴을 풀 수 없었다.
그러면 언젠가는 남자의 마음이 위로받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렇기에 놈이 범했을 때도 미소를 짓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품은 놈에 대한 증오를 지우기 위해.
아픔도, 공포도, 고통도, 모든 것과 바꾸어가며 계속 웃은 것이다.
하지만 하루카는 실장석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사람이 되어 행복을 얻었을텐데, 다시 실장석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루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남자에게 재앙을 안겨준다는 것을.
아무리 웃는 얼굴을 보더라도, 그것은 남자의 마음만을 위로할 뿐, 그에게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딸의 모습이 되고도 여전히 자신이 남자를 슬프게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하루카로 있는 것을 그만둔 것일까 - -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남자에게 웃어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카는 두번이나 기적을 일으켰다.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본래 지켜야 할 상대에게 반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 -
그 작은 자실장에게.
남자의 손 안에는 더러워진 탁구공이 있었다.
방 구석에 놓인 사진 속에는 미소를 짓는 하루카의 모습이 있었다.
그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 안에 남겨진 몇 안되는 물건이, 증오의 대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진 액자 옆에 탁구옹을 놓고 다정한 미소를 띄운다.
"다녀올게, 하루카"
그렇게 중얼거리고 남자는 차키를 움켜쥐었다.
끝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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