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사람들에게는 밥 먹듯이, 숨 쉬듯이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 하지만 사람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만큼의 수명을 지닌 실장석들에게는 그조차도 꽤나 긴 시간이었다.
"헥헥..."
뽈뽈거리며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난 한 마리의 실장석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공원 내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봄에 피어난 꽃의 가루로 임신한 미도리는 오리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미도리가 입은 순백의 팬티는 조금씩 초록색으로 물드는 중이었는데 급똥을 참지 못하여 조금씩 흘린 게 아니었다. 크게 부풀어오른 복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출산을 앞둔 것이다.
"더, 더 서둘러야하는 데스우..."
이를 악물며 진땀을 흘리는 미도리는 바로 공중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예나 지금이나 출산이 임박한 실장석들에게 공중화장실이란 더할 나위없이 중요한 장소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계속 물이 공급되는 곳이니 식수를 공급할 때도 좋고, 실장석이 출산하기 위한 자세를 잡기에 좋으니 몇 번이나 설명해도 지나칠 게 없다.
- 덜컥!
"제때 도착한 데스. 그럼 지금 당장 출산을 시작하는..."
한숨 돌린 미도리는 초록빛깔로 얼룩진 팬티를 벗으며 구시대적인 화변기 위에 자리를 잡았다. 뒤로 누운 채 몸 전면부를 위를 바라보는 형태를 하면서 총배설강을 수중과 가깝게 해놓은 미도리는 바로 복부에 힘을 줬다.
- 퐁당.
어떤 물체가 물속에 빠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반투명한 녹색의 점막에 감싸진 대략 5cm 크기의 저실장이 변깃물에 안전하게 들어온 것이다.
"텟테레~♬"
세상에 갓 모습을 드러낸 저실장은 어서 자신의 탄생을 축하하라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인간들이나 다른 동물들은 태어날 때 울음소리가 다 다르며 아예 울지도 않는 개체가 있긴 한데, 유독 실장석은 미리 녹음이라도 한 것처럼 '텟테레~' 이런다고 한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과학자들이 연구중이라고 하니 참 미스테리한 일.
"테칫! 테치이이!"
"데스웃...!"
친실장인 미도리는 꽤나 민첩했다. 자신의 아이가 변깃물에 빠져서 버둥거리기도 전에 황급히 저실장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저실장의 몸을 뒤덮은 점막을 열심히 핥아댔다.
"테츄웅~♬ 와타시가 세상에 태어난 테치! 어서 마마가 보고 싶어서 마마의 뱃속에서 기다렸단 테치!"
어미의 혓바닥에 느껴지는 체온과 함께 저실장이 생긋 웃으며 어미와의 만남을 자기 나름대로 축복하고 있었다. 미도리는 자신의 첫 아이가 양충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장녀를 화장실 타일에 얌전히 내려놨다. 점막을 모조리 제거하자 어느새 8cm까지 자란 저실장은 이전보다 조금 더 몸집이 커졌다. 고작 점막을 핥았을 뿐인데 어째서 저실장이 이리도 빠르게 성장하는가에 대해서도 결과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실장이 서둘러서 점막을 핥지 못하면 자실장이 될 아기조차도 구더기로 퇴화한다는 것이다.
- 풍덩! 풍덩!
그러던 와중에도 미도리의 출산은 계속 되었다. 장녀 하나만을 신경쓰기에는 아직 뱃속에 남은 이물감이 가득했다. 그 아이들 모두 미도리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터. 다행히 장녀는 개념을 탑재한 양충이라서 어미의 곁에서 어미가 하는 그대로 동생들의 점막을 핥았다. 그렇게 10여분 동안 미도리는 총 8마리의 건강한 자실장을 낳는데 성공했다. 운이 좋았는지 "레치, 레치!"거리는 엄지실장들은 단 1마리조차 없었다. 구더기도 마찬가지.
"테츙! 테츙!"
"테에에에엥! 마마! 마마!!!"
화장실 내부는 그야말로 저실장들이 떠드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미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첫 출산을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 때문에 여운에 잠긴 것이다.
"와타시도 이제 마마가 된 데스..."
안타깝게도 시간은 미도리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도리는 모르고 있었다. 어지간한 친실장들은 출산을 한 직후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까먹었던 것이다. 첫 출산의 기쁨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잊어버린 거다.
"......"
어느새 아무런 기척도 없이 열려진 변기칸. 그리고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장본인은 또다른 성체실장이었다. 허나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미도리와 그 아이들은 모녀간의 첫 만남을 기뻐하기만 할 뿐이다.
- 퍽!
"데갸아아악!"
"테에에에엥! 마마!"
성체실장이 미도리에게 앞차기를 날렸다. 그러자 이제 몸을 일으키려는 미도리는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화장실 바닥으로 흉하게 자빠졌다. 출산을 마친 친실장은 대개 기력이 쇠해져서 돌발상황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다. 실장석들에게는 생태계의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제외하고도 천적들이 즐비했다. 들고양이, 들개, 날짐승 등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마귀나 말벌과 같은 곤충들에게도 허망하게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동족인 실장석들이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한 천적이다.
먹이가 부족하고, 추운 겨울을 버티느라 잔뜩 독이 오른 실장석들은 따뜻해진 봄이 오길 벼르고 있다. 어서 한 년만 걸려라. 한 년이 출산하는 것만 걸려라! 만약 참으로 그렇게 된다면 저실장을 죽여서 식량으로 삼는 건 물론이고, 친실장도 평생을 자신의 식량을 공급할 가축 신세로 만들 수 있으니까!
- 퍽! 퍼퍼퍼퍼퍼퍽!
여기 미도리를 무자비하게 구타 중인 카탈리나도 그 목적으로 화장실을 습격한 거다. 남의 출산을 자신이 일용할 식량 확보의 기회라고 여긴 카탈리나는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마를 놓아주라는 테치!"
미도리의 장녀가 용감하게 카탈리나에게 덤벼들었다. 양충다운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장녀의 무분별한 용기는 만용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 덩치부터 압도적으로 차이나는데 대체 무슨 수로 적을 상대하란 말인가? 의지만 좋다고 해서 이길 수 있다면 개미조차 곰을 사냥할 수 있을 거다.
- 푸슉!
"텟...?"
카탈리나의 오른손에 있던 대못이 1번 반짝거리자 미도리의 장녀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세로로 등분되었다. 이어서 힘없이 옆으로 갈라진 장녀의 시체.
"테에에에에에엥! 장녀 오네챠!!!"
"도망치는 테치! 이대로 있다간 저 분충한테 죽는테치!"
그 모습을 본 미도리의 나머지 7마리 아이들은 패닉에 빠져 화장실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미조차 손도 못쓰고 얻어터지고, 큰언니는 반갈죽된 상황. 당연히 도망가는 것이 이 자실장들에게는 최선이었다.
"딱한 데스요? 거기서 도망친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스?"
카탈리나는 그런 미도리의 아이들을 비웃듯이 입꼬리를 틀어올리며 기절한 미도리의 머리를 잡아뜯고, 옷을 찢어버렸다. 마치 미도리의 도망친 자식들에게는 미련이 없는 듯한 행동이었고, 그게 정답이었다.
"테챠아아아아! 와타치는 맛없는 테치!"
"우리는 친구인 테치... 왜 우리를 해치는 테치?"
미도리의 아이들은 하나씩 장녀의 뒤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카탈리나와 같은 목적의 들실장들은 자신의 배를 채울 최고의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실장들에게 달려갔다. 이제 화장실 내부는 먹이를 얻기 위해 필사적인 야생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터지는 사냥!
"굳이 과한 욕심을 안 부리기로 한 건 좋은 선택인 데스."
기절한 미도리의 배 위에 여유롭게 앉던 카탈리나는 토막난 미도리의 장녀를 섭취하였다. 물론 욕심을 낸다면 최소 서너 마리 쯤은 더 식량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탈리나는 괜한 욕심을 부려서 모든 걸 잃는 것보다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것만 취하였다.
'상황을 조금만 더 지켜보고 나가는 데스.'
카탈리나는 학대파 인간의 집에서 탈출하여 공원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한 행운의 실장석이다. 물론 순전히 요행에 기대서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다른 동족에 비해서 굉장히 비상한 머리를 타고난 카탈리나에게는 어떤 상황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관한 통찰력을 갖춘 게 장점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근본적인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에 실망하였다.
아무리 똑똑하다지만 결국 실장석은 실장석. 무수히 많은 인간들은 대개 자신과 같은 실장석을 혐오하고, 운이 좋아서 그들의 손에 키워진다고 해도 문제다. 인간들은 자기 변덕 때문에 실장석을 내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당장 이 공원에 버려진 실장석만 해도 꽤 수두룩했고, 그 버려진 실장석들은 애타게 자기 주인을 찾아보지만 결국 동족들에 의해 먹히거나 독라노예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탈리나는 이 삶에 환멸을 느껴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잠잠해진데스. 먹이도 얻고, 독라 자판기도 얻었으니 오늘은 이걸로 충분한 데스."
카탈리나는 혹시나 이곳을 습격하는 들실장들이 있으면 어떡하냐는 생각도 해봤다. 카탈리나가 제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는 여럿을 상대로 벅차긴 하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들실장들은 배를 채웠으니 이제 이곳에 볼일이 없다는 걸까? 그렇기는 해도 카탈리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후...! 꽤나 살집이 오른 년인 데스. 이런 년이 토실토실한 구더기들을 잔뜩 만들어낼 수 있는데스."
한쪽 어깨에 자신의 자판기 노예가 될 미도리를 들처업은 카탈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집으로 향하였다. 타일을 밟고, 콘크리트를 넘어서 풀과 잎을 즈려밟은 끝에 카탈리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숲 깊숙한 곳에 위치한 카탈리나의 집. 땅에 묻다시피 고정시킨 초록색 플라스틱 재질 상자와 딱풀을 발라서 상자에 붙힌 낙엽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위장이었다.
- 스으윽.
카탈리나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뭇가지로 자기 집 입구에 빗장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나를 원망하지 마는 데스. 너 같은 약자는 내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데스."
카탈리나는 담담하게 말하며 못으로 미도리의 오른팔과 두 다리를 모두 잘라냈다. 혹시나 독라노예가 탈출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확실한 마무리를 지은 카탈리나는 집안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운치굴에 미도리를 던졌다.
- 철퍽!
카탈리나가 평소에 싸지른 운치 덕분에 미도리가 중간에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깨어나는 순간 미도리에게 벌어지는 일은 그저 지옥을 겪게 될 뿐이다.
"새로운 독라노예인 레후?"
"마마, 프니프니해달라는 레후."
운치에 처박힌 미도리를 본 구더기들이 미도리에게 몰려들었지만 이 독라노예는 한동안 깨어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카탈리나는 가슴 깊숙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 저 독라노예처럼 되면 참으로 끔찍한 일일 것이다.
'나도 참...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다니... 그래서는 안 되는 데스.'
카탈리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저으며 패트병에 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런 잡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전에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 풀썩.
카탈리나는 자신이 사냥한 다른 실장석, 구더기들의 옷으로 기워서 만든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카탈리나만을 위한 소중한 공간. 의외로 카탈리나가 잠에 빠지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도 고된 하루인 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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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석도 꿈을 꾼다. 힘든 하루를 뛰어넘는 악몽을 꾸든, 아니면 행복회로에 기반을 둔 좋은 꿈을 꾸든 어쨌든 꿈을 꾸긴 꾼다. 카탈리나의 경우에는 명백히 전자였다.
"으으으... 그만하는레치... 와타치는 장난감이 아닌테치...!!!"
카탈리나는 야생이 아닌, 인간들의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실장석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사육실장의 삶이었다면 절대 아니었다.
[레엥! 레에에엥! 마마아! 마마아아아!!!]
[아, 씨발 또 지랄이네? 조용히 안 해?]
- 철썩!
[찌이이이!]
카탈리나는 실장석용 수조에서 태어나 자기 친실장이 자신의 점막을 제거하기 무섭게 바로 어미의 품에서 떼어졌다. 아직 어미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 그런데도 카탈리나의 인간 주인은 무슨 생각인지 엄마를 찾아 애타게 우는 카탈리나한테 가혹하게 굴었다.
- 애호용 참피 훈육도구 -
[레에에...!]
애호를 목적으로 실장석을 훈육하는 도구라지만 그냥 참피를 때려도 죽이지 않는 수준의 파리채. 그야말로 인간들 위주의 물건으로 몇 대 맞은 카탈리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체벌의 개수가 늘어날 뿐이었다.
[그만 울라고, 이 똥벌레 새꺄. 고작 1,000원 짜리한테 태어난 거라서 품질이 이따위였던 거냐?]
- 찰싹! 찰싹!
"찌이이이이!!!"
[그만 짖으라고, 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수모를 겪게 되다니... 이쯤 되면 카탈리나는 자기가 태어난 거 자체가 실수가 아닌지 의문을 품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이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마저도 사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투명한 수조 욕조를 통해 부엌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 산참피 성체 4마리 + 자실장 1마리 묶음팩 (20만원) -
[하, 산에서 자란 참피 새끼들은 더럽게 비싸네. 1팩에 20만원 실화냐? 양식장에서 키운 것들은 1팩에 고작 4만원인데 미친.]
[데스우... 뎃스우우우우우!!!]
카탈리나의 주인이라는 작자는 실장석을 먹어치우는 것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저기 줄에 대롱대롱 묶인 독라 산실장들의 표정을 보라! 하나 같이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면서 울고 있는데 그 와중에 덤으로 끼워팔린 자실장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데챠아아아아아아아!]
그 산실장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주인의 한 끼 식사가 되었다. 칼질 몇 번, 그리고 첨벙 소리와 함께 끓는 물에 들어간 실장석들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세상을 떠났다. 허나 이마저도 곱게 죽은 거라는 게 참 우스운 노릇이다.
- 라면 및 찌개용 식용 참피 -
또다른 실장석 가족이 있다. 이번에도 전부 독라였다. 다른 점은 저번의 산실장들은 관계가 불명이었는데 이번에는 전부 가족이었다.
[오로롱... 오로로롱...]
[치이이이...]
카탈리나의 집보다 훨씬 작고 비좁은 수조에 있는 독라 친실장이 자기 새끼들을 끌어안은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새끼들도 마찬가지였고. 카탈리나는 처음에는 독라가 되어서 저런가 보다 생각했었다.
'독라는 동족들에게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하는 테치...'
실장석의 본능은 머리카락과 옷이 없는 동족들을 노예로 보고 멸시한다. 그게 머릿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으니 카탈리나가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어쨌든 저것들은 주인이 키워주는 입장이니 저번의 식용 실장석들보다는 나은 입장이 아니던가? 허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인의 집게가 사정없이 새끼 실장석들을 잡아올렸다.
[마마아!!! 마마!!!]
[레에엥!]
[와타시의 아이를 가져가지 마는 데스우! 닝겐사아아아아앙!!!]
독라 친실장이 어떻게든 자기 새끼를 구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단 하나도 구하지 못하였다. 쇠사슬에 묶인 탓에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그냥 원래 위치로 끌려오기 일쑤였다. 이때 카탈리나는 똑똑히 보고 말았다. 독라 친실장의 집은 주인이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 투성이라는 것을, 그리고...
[치이이이이이이!]
[레치이잇!]
컵라면 용기 안에 들어간 그 실장석들에게 뿌려진 뜨거운 물! 그리고 기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그들은 모두 주인의 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자신과 우연히 눈을 마주친 주인이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마치 카탈리나 자신을 향한 경고와도 같았다.
'너도 착하게 지내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도 있어.'
카탈리나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실감하고 말았다. 용케 똥을 지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물론 이는 주인의 사정없는 몽둥이 찜질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주인은 절대 강자다.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얼마든지 끔찍하게 죽일 수 있는 모습을 본 카탈리나는 이불인 낡은 헝겊에 들어가서 벌벌 떨었다. 이것부터 카탈리나가 보통의 실장석들과 다른 면모를 지닌 비범한 개체였다. 대개 다른 실장석들은 동족의 불행을 비웃으면서 세레브한 자기는 어쩌고 이랬겠지만 카탈리나는 그렇지 않았다.
'무서운 레치... 정말 무서운 레치...'
"아직 수업시간인데 대체 뭐하는 데스요?"
"헉!"
카탈리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의식을 되찾았다. 눈앞에는 흑발을 찰랑거리는 우아한 외모의 실장석이 자신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거렸다.
"내 수업이 그렇게도 재미없는데스? 너는 그래도 다른 분충들과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미안하게된 데스, 이사벨... 어제 악몽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만..."
카탈리나의 빠른 사과에 이사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카탈리나의 게으름이나 멍청함을 탓하는 한숨은 아니었다. 확실히 카탈리나는 실장석치고 유별나게 똑똑한 개체다. 아니었으면 구더기를 수업료로 바치면서까지 자신에게 공부를 배웠겠는가?
"또 그 무서운 인간의 집에서 학대받던 꿈인 데스?"
"......"
이사벨의 말에 카탈리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날을 잊으라고는 하지 않는 데스. 우리 모두 인간이든 어미든 간에 제멋대로의 이유 때문에 태어나서 힘든 삶을 보낸 데스. 하지만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는 마는 데스."
이사벨은 카탈리나보다도 더 기구한 운명의 실장석이었다. 이사벨은 분충인 자기 어미가 애호파 주인이 자위하다가 배출한 정액을 몰래 이용해서 태어난 개체였다. 그 결과 어미는 분노한 주인에게 찢겨 죽었다. 그나마 이사벨이 죽지 않은 건 어미의 죄를 연좌시키고 싶지 않은 주인의 마지막 자비 덕분이었다.
"절대 잊지 마는 데스.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는 데스."
이사벨은 자기보다 2살 어린 카탈리나에게 그렇게 조언을 남기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자신도 카탈리나도 지능은 뛰어난 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찌 보면 네가 나와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 데스...'
이사벨은 카탈리나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참으로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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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는 테치!!! 살려주는 테치이이이!!!!!]
[데프픗! 놓치지 말라는 데스!]
[간만에 포식을 하는 데스요!]
자실장 한마리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독라 실장 3마리에게 쫓기는 중이다. 자실장은 살려달라며 빌고, 또 빌었지만 저들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들실장들의 세계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에 충실하기에 어미도 없이, 집도 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어린 실장석 따위는 비참하게 죽어서 동족들의 먹잇감이 되기 일쑤였다.
[어째서 다른 실장석이 아니라 내가 이런 꼴을 겪어야 하는 테치...?]
어느새 막다른 곳까지 몰린 자실장은 벽에 등을 기대며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학대파인 주인의 부주의함으로 간신히 그 집에서 탈출한 기쁨도 잠시였다. 동족들의 냄새에 이끌려서 혹시나 이곳이 자신의 새로운 터전이 될까 싶어 공원까지 왔다. 하지만 그곳은 새로운 지옥에 불과했다.
'나... 괜히 탈출한 테치?'
[처음부터 얌전히 있었으면 좋았을 데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서 잡아먹자는 데스.]
[찬성인 데스. 이 분충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잘못을 저지른 데스.]
3마리의 독라들은 자기들 멋대로 자실장의 처우에 대한 의견 교류를 나눴다. 자실장은 이 틈을 노려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구석에 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와달라는 테치...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달라는 테치!'
자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공포에 짓눌려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에는 울기만 하면 사정없이 구타하던 주인을 떠올리며 뚝 그칠 수 있었지만 이제 주인은 더 이상 이 자실장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이제 독라 3마리의 그림자가 자실장의 온몸을 덮었다. 그들 모두 히죽거리며 자실장을 해체하기 위해 손을 치켜드는데...
[그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은 데스.]
[???]
독라 3마리의 등뒤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들 모두 조용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얼굴의 흑발실장이 팔짱을 끼며 독라 3마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데엣? 오마에가 뭐라고 그만두라고 말하는 데스?]
[너희들을 위해서 그만두라고 말한 데스. 저 아이는 용모가 깔끔하니 아마도 사육실장 같은데 잘못 건드리면 인간들의 분노를 살 수 있는 데스.]
흑발실장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독라들을 설득시켰다. 보통 실장석이 당장의 욕망에 눈이 멀어서 감당할 수 없는 짓을 저질러 화를 자초하는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설득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했다.
[웃기지 마는 데스. 모처럼 자기 발로 찾아온 먹이를 와타시타치가 왜 포기해야만 하는 데스까?]
[그러고 보니 오마에는 소문으로만 들리던 흑발실장인 거 같은데스... 오늘 오마에를 죽이고 보스에게 그 목을 바치는 데스!]
[먹이도 얻고, 출세도 하고... 이거야 말로 개이득인 데스네?]
흑발실장은 자신을 앞에 두고 흉흉한 소리나 지껄이는 독라들에게 딱히 반응하진 않았다. 아니 '떠들려면 지금 실컷 떠들어라.' 라는 무시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게 도발처럼 보인 탓일까?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독라 중 가운데에 있던 놈이 발끈거리며 흑발실장에게 덤볐다.
[와타시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테샤악!]
- 붕쯔붕쯔!
독라는 흑발실장에게 기세 좋게 달려들며 라이트 훅을 휘둘렀다. 독라는 자신의 공격이라면 저 검은 머리 분충을 충분히 때려눕힐 거라는 생각에 푹 빠졌다. 하지만 그 생각은 독라만의 착각이었다. 가볍게 백스텝을 밟으며 공격을 피한 흑발실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검지를 흔들었다.
[말로 잘 설득하면 포기할 줄 안 내가 똥멍청이였던 데스네? 그렇다면 이제 더는 사정 따윈 봐주지 않는 데스.]
[오, 오마에!]
- 서걱!
흑발실장이 왼쪽 허리춤에 달린 대못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독라의 가슴팍을 강하게 베어냈다. 뭐에 당했는지 파악조차 못한 그 독라는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붉은색 액체를 보자마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데갸아... 감히 와타시타치의 동료를 죽이다니!]
[저 흑발실장은 그냥 죽이지 마는 데스!독라 달마로 만들어서 평생 자판기로 만들어주는 데스!]
[머릿수만 앞서면 이길 줄 아는 거라 생각하는 데스? 이래서 분충은 구제불능이란 말인데스...]
좌우로 퍼진 독라들이 순식간에 흑발실장과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흑발실장은 조금도 부정적인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독라들과 자신의 거리를 파악했다. 이어서 자신에게 먼저 다가온 우측의 독라를 걷어차 날린 뒤에 좌측 독라의 허리를 일도양단해냈다.
[데갹?]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독라는 짧은 단말마만을 남긴 채 그대로 절명했다. 이제 남은 독라는 1마리. 쓰러진 독라는 그 상태로 뒤로 포복하면서 목숨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중이었다. 힘의 격차를 확인했으니 필사적으로 살려는 몸부림을 보이는 중이다.
[사, 살려주는 데스! 살려주는 데스!]
[참으로 웃기는 데스. 자기가 먼저 남을 해할 때는 자신감이 넘치게 굴더니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하다니... 추한 데스.]
- 샥!
흑발실장은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마지막 남은 독라의 목을 잘라냈다. 떼구르르르. 잘린 독라의 머리가 자실장의 발앞까지 굴러가자 자실장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흉악한 독라들을 손쉽게 제압한 흑발실장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일까? 그 생각에 그만 빵콘을 하고 말았다.
[오마에는 사육실장인데 주인을 잃어버린 데스?]
[아, 아닌 테치... 와타치는 학대파 집에서 탈출한 테치...]
[......]
자실장이 정체를 밝히자마자 흑발실장은 바로 볼일 다 봤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자실장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혼자 여기에 남겨지면 위험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공원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토록 험한 꼴을 봤는데 그 뒤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서 자실장은 용기를 내어 흑발실장을 불렀다.
[잠시만 테치, 아줌마상!]
[무슨 일인 데스? 설마 너를 거둬서 키워달라는 말할 작정인 데스?]
[그런 테치!]
[참 순진한 데스? 내가 낳은 자도 아닌 너를 키울 이유가 도대체 뭐인 데스? 아닌 말로 너 같이 쓸모없는 것을 데려다가 잡아먹을 수도 있는 데스. 방금 죽은 독라 분충들처럼 말인 데스.]
- 와득!
흑발실장은 자실장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반토막난 독라의 하체를 들어서 씹어먹었다. 그 모습이 너무 기괴했고 무서웠으나 자실장은 다시 마음을 굳건히 먹었다.
[와타치를 키워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와타치가 아줌마상의 집안일을 다 도맡아 해주는 테치!]
[데흐흐흐흐... 흐허허허허... 다하하하핫!]
자실장의 말에 흑발실장은 폭소를 터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체실장에 못 미치는 크기의 자실장이 집안일을 도운다면 얼마나 잘 도울 수 있으려나? 하지만 저 자실장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다른 멍청한 동족들과는 궤가 다른 뭔가가 있었다. 대부분의 동족들은 저 상황에서 "어서 세레브한 와타치의 수발을 드는 테치! 흑발 노예!" 라고 지껄이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저렇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가며 부탁을 하는 것이 있다니 세상은 이래서 요지경이라는 건가 보다.
[좋은 데스. 하지만 일을 대충하거나 너무 못하면 그 자리에서 쫓아낼 테니 각오하는 데스.]
[테에엣? 그럼 아줌마상이 와타치를 받아주는 테치?]
흑발실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실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려온 한 줄기 희망을 보았으니 저 표정을 짓는 것도 실로 당연했다.
[그래도 마냥 오마에라고 하는 건 좀 그런 데스요. 이제부터 너는 카탈리나인 데스. 나는 이사벨이라고 불러주는 데스.]
[테에에에... 좋은 이름인 테치. 와타치의 새로운 이름도, 아줌마상의 이름도 테치!]
[아첨하지 말라는 데스. 이름이 없는 것보다 우연히 인간들이 묻어준 사육실장 무덤의 이름이라도 쓰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쓰는 이름인 데스.]
독라의 피와 시체로 얼룩진 공원의 어느 막다른 골목. 하지만 그곳은 카탈리나와 이사벨의 깊은 인연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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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공원은 지극히 평범한 공원이다. 여기 찾아오는 인간들도 애호파도 적당히, 학대파도 적당히, 학살파도 적당히 몰려든다. 물론 학대파와 학살파가 적당히 눈에 띠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덕분에 이루어진 불안정한 평화다. 실장석도 마찬가지. 인간 주인에게 떨어지지 않는 한, 사육실장이 여간해서 라라공원에 거주하는 들실장에게 봉변을 당할 일은 없다. 그럼 라라공원의 실장석들은 어떠냐고?
"데프프픗."
여기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성체실장 1마리가 있다. 이 실장석의 이름은 우르술라. 이 실장석이 웃는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나름 안정적인 주거 환경, 그리고 넘쳐나는 식량 덕분이다. 남들은 눈에 불을 키고, 뼈빠지게 인간들에게 구걸을 하든, 아니면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기 여념이 없었지만 우르술라는 실로 단순한 방법으로 식량 공급 문제를 해결했다. 이를 증명하는 중인 우르술라의 손아귀에는 독라 자실장 1마리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치이이이! 똥마마! 어째서 세레브한 와타치가...!!!"
"오마에 같이 마마에게 반항이나 해대는 똥벌레 따위는 와타시의 자가 아닌 데스."
우르술라는 번식 욕구가 강한 실장석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모성애가 단 1도 없는 개체다. 우르술라에게 있어서 자식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자신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식량에 지나지 않았다.
- 콰직!
"데챠아아아아아아!!!"
우르술라의 앞니가 자신의 정수리에 파고들자 자실장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주어진 식량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항의를 좀 했건만, 어미는 그런 자신에게 바로 머리를 죄다 뜯어내고, 옷은 찢어발겼다. 그리고 이렇게 잡아먹히는 것이다! 자실장의 머리 쪽 피부가 뜯기면서 피가 허공에 튀어올랐다. 집안 내부가 조금 더러워지겠지만 지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아쥰 은헤도 모르고 고귀한 와타시에게 말대끄나 하는 자는 산채로 먹어줘야 줴맛인 데스."
자실장의 머리 부분이 모두 우르술라에게 씹혀가면서도 우르술라는 더럽게 침까지 튀겨가며 소감을 밝혔다. 감히 자신에게 반항하는 건방진 실장석은 고통스럽게, 그리고 공포를 안겨주면서 자기 뱃속으로 처넣을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 그거야말로 극상의 별미! 일부 나약한 분충들은 어떻게 자기 자식을 먹을 수가 있냐고 질색을 해대지만 오히려 우르술라는 자식이 큰 잘못을 할 때 쫓아내는 걸로 끝내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솎아낼 거면 좀 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끄윽. 거슬리는 것도 쳐죽이고, 배도 채우고, 이런 좋은 일들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는데 굳이 망설일 이유가 뭐인 데스? 안 그런 데스, 노예?"
우르슬라가 걸레로 골판지 박스 내부를 열심히 닦는 중인 자실장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 자실장은 특이하게도 머리는 멀쩡히 남겨져 있고, 두건도 쓴 사태지만 나머지 옷들은 전부 벗은 상태다. 자실장은 그저 벌벌 떨 뿐이다.
"와, 와타치는... 잘 모르겠는 테치!"
"데프프프. 잘 대답한 데스. 오마에 같은 노예는 모르는 게 나은 일인 데스."
"테에..."
"손이 보이는 데스. 빨리 일하지 못하는 데스?"
"!"
우르슬라의 싸늘한 한마디에 자실장은 걸레질을 하는 손의 속도를 높였다. 한때 자기가 입던 옷으로 청소를 하는 이 자실장도 아까 죽은 독라처럼 우르슬라의 자식이다. 허나 이 개체 또한 우르슬라에게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하는 중이다. 그나마 눈치가 있고, 순종적이어서 비참하게 죽는 일은 면했지만 언젠가 우르슬라의 신경을 거슬리는 순간 이 자실장 또한 죽은 동생들의 뒤를 따라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차녀 이모토챠... 삼녀 이모토챠......'
자실장은 금방 죽어서 어미의 먹이가 된 삼녀, 그리고 저기 못에 박혀서 말라죽어가는 차녀를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차녀는 머리와 두건을 제외한 옷을 우르슬라에게 내놓는 걸 한사코 거부하다가 그만 저렇게 되었다.
"데끄으으으..."
자실장은 산 채로 보존식이 되어가는 동생을 보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분한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미는 다른 동생들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 따위는 우습게 제압할 수 있을 거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결과다.
"참으로 좋은 나날인 데스. 천국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인 데스."
우르슬라는 자신만을 위해 만든 특등석 침대에 누웠다. 다른 실장석들의 머리카락과 옷으로 만든 침대다. 그리고 그 지분의 상당수가 우르슬라의 자식들이었다. 허나 그 사실은 우르슬라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쁠 뿐이다. 이곳에 앉거나 누울 때마다 자신은 오늘도 살아남은 승리감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다른 멍청한 것들은 그냥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자신은 다르다!
"데프프프프."
우르슬라는 침대 정면 천장 부근을 쳐다봤다. 말린 구더기 다섯 마리가 자신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말린 실장석들은 오랫동안 썩지 않기 때문에 보존이 굉장히 쉽다. 물론 두고 두고 아껴먹을 것이다. 겨울까지 버틸 식량이 부족해서 큰일날 뻔했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텟테로게~♬ 텟테로게~♬ 세상은 아름다운 데스. 먹을 것도 넘쳐나고,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데스. 마마는 누구라도 좋으니 자들이 최대한 많이 나왔으면 좋은 데스~"
우르슬라는 언덕처럼 불룩 튀어나온 자기 배를 쓰다듬으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거짓된 태교를 지껄였다. 처음부터 꿈과 희망은 우르슬라 자신만을 위한 거였다. 결국 자식들은 다른 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르슬라의 한 끼 식사가 될 운명이니까!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르슬라의 뱃속에는 무려 10마리나 되는 자식들이 언젠가 만나게 될 어미와의 첫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 지는 우르슬라와 눈물을 애써 참는 노예 자실장만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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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트라 럭셔리 샵 -
라라공원의 감나무 쪽에 위치한 어느 으리으리한 플라스틱 상자 하우스. 세로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실장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중이다. 프랜신이라는 사육실장의 집이자 가게인 이곳은 구더기를 재화로 삼아서 프랜신에게 다른 물품을 받아오는 곳이다.
"프프붓. 어서오는데스요~ 오마에는 뭐가 필요해서 온 데스?"
프랜신은 사육실장답게 나름 우아하게 굴었다. 하지만 잔뜩 헤진 옷의 성체실장은 그런 프랜신의 예의 차린 인사에도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콘페이토~ 콘페이토를 원하는 데샤악!"
성체실장이 난폭하게 프랜신을 향해 도약을 감행했다. 그런데 프랜신은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저런 것 따위는 조금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자신감이었다.
"이런 미친 분충이!"
"그대로 죽는 데스!"
- 콰당! 퍽! 퍼퍼퍼퍽! 우지끈! 빠직!
입구를 지키던, 그리고 2층에서 대기하던 검은색 복장의 어른 실장석 총 4마리가 저 성체 들실장을 순식간에 때려눕혔다. 역시 다굴 앞에서는 장사가 없기 마련.
"프랜신, 이 분충은 어떻게 하는 데스?"
"푸풋. 독라로 만들어서 소피아에게 팔아먹는 데스요."
"OK데스."
프랜신의 말에 울트라 럭셔리 샵의 경호실장들은 조금도 지체없이 그 지시를 이행했다. 그리고 감히 주제넘는 짓을 하던 그 들실장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온 실내에 울려퍼졌다.
"데갸아아!!! 세레브한 와타시의 머리카락과 옷이!"
"왜 분충들이 지껄이는 소리들은 하나 같이 그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참 모를 노릇인 데스. 아~ 어서 오는 데스."
질질 끌려가는 성체 독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프랜신은 다음 손님이 자기 앞에 다가오자 좀 더 밝은 미소로 그 실장석을 맞이했다. 단정한 포니테일 머리가 인상적인 실장석이었다.
"우리 가게의 VIP 손님인 카탈리나가 온 데스네? 데흐훗."
프랜신은 그 멍청한 독라에게 짓던 미소는 완벽히 영업용 미소였다는 듯이 굴면서 자신이 직접 카탈리나가 앉을 자리에 안내해줬다. 보통 때였으면 저 경호실장들에게 시켰겠지만, 카탈리나처럼 자주 자신의 가게를 애용하는 실장석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업은 요새 잘 되는 데스, 프랜신?"
"나쁘지는 않은 데스. 신경 써줘서 고마운 데스요."
프랜신의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카탈리나가 나름 평온하게 말하였다. 아무래도 울트라 럭셔리 샵은 인간들이 운영하는 실장샵이 아닌 탓에 그렇게까지 다양한 품목은 없지만 그래도 프랜신은 사육실장인데다가 주인을 포함한 인간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실장석이며 라라공원의 들실장 보스인 소피아와도 제법 원만하게 잘 지내기에 그럭저럭 가게가 잘 굴러가는 중이다.
"이번에는 뭘 사러 온 데스? 또 무기 아니면 코로리?"
"탑승용 거대 구더기를 원하는 데스."
"호라... 요새 무슨 일이 있는 데스? 갑자기 평소에는 언급도 안 하는 품목을 언급하니 내일은 갑자기 눈이라도 펑펑 올 거 같은 데스."
카탈리나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프랜신은 두 눈을 계속 깜빡거렸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카탈리나는 다소 특이한 구석이 강하긴 해도 분충 기질이 있는 것도, 빈말하는 걸 좋아하는 실장석이 아니다. 카탈리나가 거대 구더기를 원한다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 농담이고, 오마에는 거대 구더기가 제법 비싼 건 알고 있는 데스까? 거대 구더기를 만들려면 구더기에게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실장석을 먹이로 던져줘야 하는 데스. 그것만으로도 꽤 값이 나갈 텐데스네?"
"구더기로 지불하기 힘들다면 언제나 그랬듯이 일해서 갚아주는 데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게 프랜신 쨩의 기본 생활 방침이 아닌 데스?"
"그게 오마에의 뜻이라면... 알았다는 데스."
카탈리나가 단호하게 나오자 프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랜신은 카탈리나와 제법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다른 실장석도 아니고, 카탈리나를 가장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도 자신의 생활 방침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카탈리나는 돈이 없으면 일을 해서라도 그 물건의 값을 하라는 프랜신의 말을 순순히 따라줬던 몇 안 되는 실장석이다. 대부분의 실장석들은 등가교환의 법칙도 모르고 세상의 모든 건 다 고귀한 자신의 거라며 미쳐 날뛰다가 결국 호된 응징을 다해 패가망신하거나 심하게는 죽는 경우가 많다.
"저번에 내 구더기를 50개나 빚져놓고 먹튀한 분충이 공원 북쪽 끝 밤나무 숲에 살고 있는 데스. 물론 그 분충년이 죽든 말든 빚만 잘 회수하면 거대 구더기 쯤은 얼마든지 오마에에게 넘겨주는 데스."
"알았단 데스."
프랜신의 말에 카탈리나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의뢰를 접수했다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문 밖을 나서려던 찰나, 프랜신이 그런 카탈리나를 불러세웠다.
"부디 조심하는 데스, 카탈리나. 한낱 장사치인 와타시의 말을 믿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카탈리나와 같은 특별한 동포가 죽었다는 소식은 듣고 싶지 않은 데스."
"...... 걱정해줘서 고마운 데스."
카탈리나는 놀랍게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프랜신에게서 걱정을 듣다니 정말 오늘은 폭설이라도 내릴 것 같다. 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끔 뜬금없이 눈이 팍팍 쏟아지는 날씨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래? 그런 실장석도 있다고?"
"물론인 데스, 주인님. 카탈리나는 와타시가 본 동포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인 데스."
해가 질 무렵에 프랜신을 픽업하여 집으로 데려온 이승훈이 아까부터 계속 카탈리나, 카탈리나 노래를 부르던 자신의 사육실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석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이승훈에게 있어서 특이한 성향을 지닌 실장석은 굉장히 흥미가 동하는 존재다.
"공원의 분충들은 죄다 자기는 세레브하게 살아갈 거라는 헛된 기대나 품으면서 살아가는 데스. 그런데 다들 오만하게 굴면 비참하게 죽는 꼴을 면할 수 없다는 건 모르는 데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도 모르는 데스."
"흐음. 그랬구나? 프랜신."
"네, 주인님?"
"혹시나 카탈리나가 구더기를 회수하지 못하더라도 너에게 구더기를 빚진 그 분충을 죽이고 오면 거대 구더기를 주도록 해."
"그렇게 하는 데스."
이승훈의 말에 프랜신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이를 반기는 기색이었다. 실장석들은 대개 뜻하지 않은 불행을 겪으면서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카탈리나는 자기가 지닌 특별한 성향 때문에 이 투쟁의 삶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좀 더 올려두고 있었다. 다만 카탈리나는 자신에 대해 어떠한 얘기가 오고 갔는지 모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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