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실장석은 공원 안의 실장석 사회에서 평판이 몹시 좋은 실장석이었다. 녀석은 이기심의 화신이라 불리는 예사 실장석이 아니었다. 공원에서 위기에 처한 동족을 구해준 일도 몇 번 있었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것을 빼앗거나 동족식은 절대 하지 않는 고고함이 있었다. 분충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실장석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이 공원에 다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특별한 실장석에 대한 입소문이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 그 특별한 실장석은 자들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공원을 쏘다니고 있었다. 저 수풀은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조금 들어가면 달콤한 나무열매가 숨어있다. 떨어진 나뭇잎 밑에는 가끔 죽은 곤충이나 부드러운 애벌레가 있을 때가 있다. 쓰레기통 주변이나 벤치 밑을 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만약 운이 좋다면 부주의한 인간이 먹을 것, 더 운이 좋다면 진귀한 생활용품이나 반짝이는 보물을 떨어뜨리고 간 것을 주울 수도 있다. 공원 생활을 제법 한 베테랑 들실장으로서의 지식이었다.
그 중 모든 일에 있어 최우선순위로 중요한 점은 바로 인간, 정확히는 그 중에서도 학대파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낯선 인간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친실장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애호파들이 가끔씩 음식을 뿌리러 올 때를 제외하면 인간에게 결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실장석과 엮이는 인간은 불행해지고 만다는 속설이 있다. 이는 대부분의 실장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극소수의 행운을 타고난 개체가 아니라면 실장석 역시 인간을 가까이해서 좋을 일이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항상 주의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몰래 다가온 인간이 뿌린 네무리 스프레이를 맞고 기절하기 직전 친실장은 생각했다.
*
눈을 떴을 때, 무엇이 보일까? 벽지 대신 동족들의 피로 범벅이 된 벽이 보일지도 모른다. 거스러미가 일어나고 피로 범벅된 싸구려 탁자 위에는 용도조차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도구들이 늘어져있을 테고, 그 옆 더러운 수조 앞에는 내장이 파티 리본처럼 축 쳐진 채 늘어져 있는 동족이 입을 뻐끔거릴 수도 있다. 질끈 감고 있는 눈을 뜨면 학대파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볼 것이다. 친실장은 겨울의 서리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전력으로 달렸을 때보다도 격렬하게 콩콩 뛰었다. 어느정도 마음의 각오를 하고 한쪽 눈을 조심조심 뜨자, 눈 앞에 보인 것은 바로 별이 총총 박힌 검은색의 밤하늘이었다.
"데...?"
학대파도, 피도 고문도 없다. 어안이벙벙해지고 만 친실장은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공원이다. 밤까지 기절해 있던 것 뿐인가? 가끔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야생 실장석에게 네무리나 시비레를 뿌리는 장난을 치는 일이 있기도 하다. 친실장은 자기도 아마 그런 장난에 휘말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왠지 아까부터 위화감이 든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던 친실장은 자들을 떠올렸다.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귀여운 자들을 더 이상 걱정시키면 안 된다. 친실장은 공원 구석진 곳의 골판지 상자로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
"마마아~ 기다리고 있었던 테치! 오늘은 늦은 테치이..."
"어서 오시는 테치. 배고픈 테치. 그치만 와타치 배고파도 함부로 나가지 않고 참았던 테츄웅."
"오네챠의 프니프니도 좋지만 역시 마마의 프니프니가 제일 좋은 레후."
몇 번이고 당부한 대로, 자들은 골판지 집 안에서 얌전히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오는 길에 가져온 나무열매 몇 알을 치마폭에서 꺼내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잘 먹겠는 테치이!"
"감사한 레후~!"
"구더기는 이 부드러운 열매를 먹는 테치. 와타치가 먹기 좋게 잘라주는 테치."
"오네챠 고마운 레후. 오네챠 정말 좋은 레후!"
이 화목한 광경을 보며 친실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커다란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문득 하루종일 기절해있어 아침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이 기억났다. 당황해하는 친실장의 얼굴을 본 자실장들은 서로 마주보더니, 웃으며 자기 몫의 나무열매 조금씩을 떼어 친실장에게 나눠주었다.
"마마도 먹는 테치."
"와타시는 괜찮은 데스. 오마에들이야말로 어서 먹는 데스."
"그치만 마마가 배고픈 건 싫은 테치!"
"구더기도 마마가 슬픈건 싫은 레훼엥..."
훈훈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친실장의 품성이 올바르고 고운 덕인지 자들 역시도 매우 착하고 배려심이 많았다. 자신은 복받은 어머니라고 느끼며 친실장은 나무열매 조금씩을 받아들어 입에 넣었다. 당연히 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허기를 약간 가시게 할 정도는 되었다. 무엇보다 자들의 배려가 고맙고 의미있는 것이다. 가슴이 따뜻하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따스한 밤이 깊어갔다.
*
친실장은 어느 순간부터 미묘한 갈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 있는 잊혀지고 버려진 우물이 제발 물을 달라고 조르는 듯한 느낌.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친실장은 잘 몰랐다.
친실장이 슬슬 이변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은 친실장이 알고 있는 애호파가 먹이를 뿌리러 나타난 날이었다. 애호파가 먹이를 줄 때, 동족간의 경쟁은 흡사 야생동물과도 같았다. 그래서 친실장은 평소 다툼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잽싸게 먹이를 주워가거나 하는 등의 틈새시장을 노렸다. 그러나 요즈음 먹이를 구하기가 힘들어진 탓일까, 오늘은 그 경쟁이 한층 더 치열했다. 개중에는 물고뜯고 다투다 옷이 찢기거나 상처를 입은 개체도 나타날 정도였다. 격렬한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 떨어진 먹이를 주울 틈을 노리는 친실장이었지만, 도무지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소중한 자들이 배고파한다.
근래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사정은 친실장도 마찬가지다. 초조해진 친실장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틈이 있는지 끊임없이 살폈다. 하늘이 도운건지, 던질 때 조금 멀리 날아간 실장푸드 몇 알이 친실장의 근처에 떨어졌다. 행운의 여신이 보내 준 미소에 신이 난 친실장은 곧장 달려가 푸드를 주웠다. 그 때, 친실장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채는 억센 힘이 느껴졌다.
"분충은 당장 와타시의 푸드에서 손을 떼는 데샤아아앗!"
"이, 이건 와타시의 것인 데스..."
내가 먼저 주운 건데. 친실장은 당황했지만 이것은 자신이 먼저 얻은 푸드라고, 조금 참으면 그쪽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차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막무가내였다. 난폭한 행위에 질려서 손을 빼려 해도 도무지 놓아주질 않았다.
"순순히 넘기지 않으면 쳐죽이는 데샤! 오마에도 죽이고 자들도 독라노예로 삼는 데프프프!"
자들을 들먹인 것 때문이었을까, 친실장은 가슴에 불이 확 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건방진 오마에나 나가 죽는 데샤아아앗!"
친실장이 채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푸드를 쥐지 않은 쪽의 주먹이 나가 상대방의 안면을 정확히 가격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힘이었다.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불꽃이 주먹 한 방으로 나간 듯했다. 돼지 멱따는 소리마냥 흉한 비명을 꽥꽥 지르며 이빨을 덜렁거리고 코피를 흘리던 상대방은 부리나케 도망쳐버렸다.
물론 친실장을 우습게 보고 방심하고 있던 상대방도 놀랐겠지만, 뜻밖의 상황에 더 놀라버린 건 오히려 친실장 쪽이었다. 주저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제법 오래 산 만큼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일도 분명 있긴 했다. 그러나 친실장에게 있어 폭력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어야 했다. 치고박는 것은 고상하지 못한, 그리고 장기적으로 봐도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폭력적인 실장석은 짧은 순간 군림하기는 편했지만, 인간의 눈 밖에 나 처분당할 확률이 컸다. 동족 사이에서도 평판이 바닥을 치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어느 날 집단으로 린치당한 참혹한 시체가 되는 일도 있었다.
친실장은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당황하며 쳐다보았다. 깨끗이 하려 무심코 손을 핥자 기분이 기묘했다. 가슴 속 깊이 버려져 말라붙은 우물에 누군가 물 한 컵을 부어준 듯한 상쾌함이 들었다.
이건 위험하다! 친실장의 이성이 외쳤다.
흠칫한 친실장은 고개를 붕붕 흔들고 손을 대충 근처 풀잎에 닦았다. 그것보단 자들이 기다린다. 친실장은 푸드를 소중히 안고 자들에게로 향했다.
*
한 번 채워지기 시작한 욕망은 날뛰기 시작한다. 요즘 친실장은 고뇌에 자주 잠겼다. 가끔씩 그 때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 때의 기억으로 자극되는, 피와 폭력에 대한 묘한 욕망이 친실장의 심상을 뒤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친실장은 마음의 소리에게서 귀를 막으려 노력했다. 가끔씩은 그것을 잠재우고자 벌레를 산 채로 조각조각내며 마음 속 괴물을 달래기도 했다.
친실장은 두려웠다. 문득 자기 속에 또다른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폭력적인 분충인 또 하나의 자신이 원래의 이성적이고 어진 자신을 서서히 좀먹어가는 것이다.
친실장이 내적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자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중한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것을 상냥한 자들은 가만히 손놓고 볼 수 없었다.
"마마, 요즘 안색이 안 좋은 테치."
"무슨 일 있으면 와타치한테 말해주는 테츄!"
"구더기 배는 만지면 말랑말랑 기분좋은 레후. 마마, 프니프니하면서 기분좋아지는 레후."
"마마는 괜찮은 데스요..."
자신을 걱정해주는 착한 자들의 말에 친실장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순진하고 상냥한 자들에게 이 일을 알게 해선 절대 안 된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친실장은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슬슬 자는 데스. 오마에들은 와타시의 제일 소중한 보물인 데스우..."
자들이 있는 한 절대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실장석에게도 신이 있다면, 최소한 자들이 독립할 때까지만이라도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게 해주길 바라며 친실장은 잠을 청했다.
*
"그 소문 들은 데스우?"
"들은 데스. 포식석이 나타났단 데스."
"앗, 친절한 실장상! 들은 데스? 오마에도 조심하는 데스요."
최근 공원 안에는 포식석이 돌아다니는 듯 했다. 어떤 이유로 인해 동족 고기에 맛을 들여 잡아먹는 포식석은 실장석들에게 공포의 존재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낮에는 숨어 있다가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나타난다더라, 부터 시작하여 키가 인간만하다더라, 입에서 불을 뿜어 실장석을 구워먹는다 등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나돌아다녔다. 영리한 친실장은 당연히 소문을 걸러서 받아들였다. 지나치게 과장되어 보이는 이야기는 거르고, 현실성이 있다 싶은 이야기만 추려내어 방책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둘도 없이 소중한 자기 자신의 생명과 그 생명보다도 소중한 자들을 잃을 수는 없다.
평소보다 더욱 조심하며 먹이를 모으고 집에 돌아온 친실장은 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골판지를 꼼꼼히 점검했다. 어디가 취약한 부분인지, 어디가 강한 부분인지, 어디를 어떻게 더 보강할 것인지.
"마마, 무서운 테치..."
"구더기는 차라리 태어나기 전의 마마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레후우우우..."
"걱정하지 마는 데스. 마마는 오마에들을 꼭 지키는 데스."
친실장은 불안해하는 자들을 껴안고 달래며 강한 의지를 다졌다.
*
포식석에 대한 이야기는 날이 가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잔인성과 대담함에 대한 소문과 목격담이 한층 더 자극적으로 나돌았다. 이젠 대낮에도 자실장 목을 따버린다더라. 저번에 발견된 시체는 팔다리랑 내장만 먹었다더라. 연한 저실장 고기를 제일 좋아해서 강제임신을 시키고 태아째 먹어버린다더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말들이었다. 공원 안의 분위기는 갈수록 차가워져만 갔다. 범인 실장석이 도통 잡히지 않으니 실장석들의 경계심들은 강해졌고, 이젠 이웃들마저 서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심하는 암묵적인 분위기도 있었다.
계속해서 그쪽에 신경을 쓴 탓인지, 친실장은 자주 피곤해했다. 최근에는 얼른 아침에 먹이를 구해오고 지쳐 돌아와 낮잠을 잔 후, 오후에 다시 먹이를 구하러 나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정신을 반쯤 놓고 살아서 그런지, 몸에 모르는 새 크고작은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오늘도 친실장은 먹이를 구하러 나갔다가 점심쯤 바로 돌아왔다. 먹이를 구하던 중, 뜻밖의 수확으로 못을 하나 줍자, 친실장은 보검이라도 주운 양 매우 기뻐했다. 녹슬고 휜 못이지만, 실장석 입장에서는 좋은 무기다. 자들을 지키기에는 그만인 것이다.
골판지에 돌아와 친실장은 아침의 수확물을 배분하고, 미래를 위해 일부를 저장했다. 친실장은 또다시 극심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자들에게 못에 대한 주의를 준 후, 친실장은 곧바로 숙면을 취했다.
꿈 속에서도 친실장은 공원을 돌아다녔다. 풀내음이며 동족의 냄새 등 익숙한 감각이 생생히 느껴졌다. 왠지 달콤한 향기가 나서, 친실장은 그 향기를 따라갔다. 풀숲을 헤치고 오직 공원에 사는 실장석들만 아는 샛길을 건너건너 움직이자 향기의 근원이 느껴졌다. 무얼까 궁금해하며 친실장이 본 것은 작고 귀여운 자실장이었다. 혼자 앉아 풀꽃으로 화관을 만들며 노는 모습이 자신의 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친실장은 자들을 생각하며 자실장을 안아올렸다. 자실장은 별 거부감 없이 안겨왔다. 따뜻하고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살결에 향기도 달콤하다. 맛있다. 맛있어. 맛있다...?
어느새 친실장은 자실장의 머리를 물어뜯어 삼키고 있었다.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었다. 발광을 하고 용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석에 강제로 고정된 채 1인칭으로 관찰하는 듯했다.
그만둬, 멈춰! 마음 속 감옥에서 목이 찢어져라 외쳤을 때 친실장은 발버둥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몸에 땀이 흥건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꿈 속에서 입에 들어간 피가 실제로도 입 안에서 은은하게 맴도는 듯했다. 자실장들은 악몽을 꾼 친실장을 걱정하며 칭얼댔다.
"마마, 괜찮은 테츄우?"
"마마, 오늘은 쉬는 테치..."
"마마가 아픈 건 싫은 레후~"
저마다 친실장을 위로하던 자실장 중 장녀가 옷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마, 이것 받는 테치."
비즈로 된 반지였다. 본래 용도가 반지라는 것이지 작은 실장석 입장에서는 팔찌나 다름없었다. 비록 싸구려 비즈 반지지만 그마저도 없는 들실장에게는 귀중한 사치품이다.
"오마에...!"
"방금 차녀짱하고 집 근처에서 놀다가 주운 테치. 늘 고생하는 마마한테 주자고 생각한 테치."
비즈 반지보다도 소중한 보물이 눈앞에 있는데, 이 보물 앞에서 비즈 반지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친실장은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 고마운 데스. 마마의 부적으로 삼는 데스."
*
이상한 악몽은 그 뒤로도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하나같이 끔찍한 내용들이었다. 저실장들의 목을 마치 장난감처럼 한 마리씩 비틀어 따는 꿈, 공원 외곽을 산책하고 있던 실장석을 습격해 잔인하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꿈, 친실장 앞에서 자실장들을 도륙하고 그 살점을 음미하는 꿈. 마치 자신이 그 주인공의 몸 속에 갇힌 것마냥 진짜같고도 무시무시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그 잔혹한 환상들이 친실장의 비밀스런 갈증을 채운다는 사실이었다. 계속해서 저어하면서도 친실장은 마치 위험한 불륜 관계를 탐닉하는 귀부인처럼 욕망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늘의 꿈은 뭔가 달랐다. 꿈에서 평소보다 더욱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눈 앞에 있는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눈에 익은 골판지 상자가 나타났다. 오순도순 떠드는 자실장들의 말소리도 귀에 익었다. 가족에 대한 꿈인가?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이었다. 그러나 착각도 잠시, 친실장은 이번에도 몸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경악했다. 미친 듯이 설득하고 애원하고 분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친실장은 골판지 상자 문을 마치 선물받은 과자 상자를 뜯듯 열어젖혔다. 어두운 상자 안에서 자들의 눈만 적록색으로 어렴풋이 빛났다. 친실장은 차라리 졸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따스한 피가 온몸에 불경한 세례처럼 쏟아졌고, 자실장들의 비명은 골판지 벽에 반사되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울렸다. 이 모든 것을 강제로 지켜보게 된 친실장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지옥의 형벌 중, 가장 잔인한 형벌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친실장은 몸부림치며 의식을 잃었다.
"마마, 일어나는 테치."
꿈 속에서마저 기절해버린 친실장을 깨운 건 장녀 자실장이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온몸이 다 뻐근했다. 언뜻 위화감이 들어 팔을 보니 장녀가 주었던 비즈 반지도 사라져 있었다. 아까 먹이를 구하러 나갔을 때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험한 꿈자리에 몸부림칠 때 빠졌거나. 친실장은 그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데...? 장녀, 괜찮은 데스?"
"테츄? 와타치는 괜찮은 테치."
친실장은 장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장녀가 숨이 막히다며 작은 손으로 친실장의 팔을 토닥토닥 칠 때까지 포옹은 쭉 이어졌다. 장녀가 대체 친실장이 왜 그러는지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츄아아아아아악!!!"
가슴 속에 커다란 얼음을 던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녀의 비명소리를 들은 친실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자 문을 박차고 내달렸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 친실장을 맞이했다. 꿈에서나 보던 광경이었다. 아니, 그간의 꿈은 예지몽이 분명했다. 팔이 잘리고 하반신이 먹힌 차녀가 한 성체 실장의 다리 밑에 깔려있었다. 실장석의 질긴 생명력은 잔인한 족쇄가 되었다. 차녀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꼴이 되었건만, 죽지도 못하고 땅바닥에서 고통에 겨워 버르적거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친실장은 잠깐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러나 모성애와 분노가 친실장을 일으켰다. 이윽고 눈이 돌아간 채 친실장은 낯선 침입자에게 힘껏 돌진했다.
"데샤아아앗!"
"데샤아!"
친실장을 눈치챈 습격자는 잽싸게 방어 태세에 들어갔으나, 순식간의 일이라 몹시 당황한 듯했다. 습격자의 발이 조금 꼬인 틈을 놓치지 않고, 친실장은 그대로 돌격하여 안기듯이 습격자를 쓰러뜨려 눕혔다. 이성을 잃은 채 마운팅 자세로 습격자의 얼굴을 쳐 대던 친실장은 잔뜩 흥분했다. 흥분으로 만들어진 작은 빈틈을 습격자 역시 놓치지 않았다. 자식을 잃고 순간적으로 악에 받쳐 달려든 친실장이었지만, 잘 보면 체구도, 힘도 습격자가 더 우세했다. 어어 하는 사이 주도권은 슬슬 상대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앞머리를 잡고 안면에 박치기를 먹이자 친실장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이번에는 습격자가 친실장을 타고 앉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친실장은 온 힘을 다해 바둥거렸지만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무자비한 공격에 팔을 들어 미약한 방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슬슬 한계가 느껴질 때, 친실장의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장녀! 장녀!!! 그걸 가져오는 데-스!!!"
다급하게 소리친 친실장은 제발 장녀에게 이 외침이 닿았길,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물건을 장녀가 찾아서 제 때에 가져오길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실장석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고 있어서 그랬을까, 장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습격자는 친실장이 무엇을 노리는지 몰라 잠시 흠칫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비열하게 웃으며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한 대, 두 대, 세 대. 얼굴에 주먹이 내리꽃힐 때마다 친실장은 억울함과 분노, 고통에 눈물이 흘렀다. 차녀, 장녀, 그리고 구더기에게 속으로 미안하다고 빌며 친실장이 눈을 감았을 때였다. 눈 앞으로 다가온 주먹이 멈췄다. 습격자의 배에는 철로 된 나뭇가지가 자라나 있었다.
"데...샤?"
친실장도, 습격자도 숨을 멈췄다. 습격자는 배에 튀어나온 못을 만졌다. 이게 뭔지 궁금해하는 듯 습격자의 손이 못을 매만지자, 못은 장난치는 것처럼 도로 쑥 들어갔다. 이윽고 못은 몸의 다른 곳을 뚫고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친실장은 습격자의 표정이 허탈함, 고통, 그리고 분노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네 번째로 습격자의 몸을 관통한 못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습격자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뒤에 있던 장녀는 떨면서도 못을 잡으려 했지만 피로 손이 미끄러워져 그만 놓치고 말았다. 장녀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공포에 질려 빵콘을 하고 말았다. 걸음마도 못 뗀 아기처럼 기어가는 장녀를 습격자가 놓칠 리 없었다. 방해꾼을 처단하기 위한 한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죽는 데샤아아앗!"
비척비척 겨우 일어선 친실장이 못을 바투 쥐고 힘껏 잡아찢었다. 크게 벌어진 틈새로 내장과 피가 쏠려 무너지듯 쏟아졌다. 습격자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날카로운 쉭쉭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습격자를 친실장은 몇 번이고 못으로 내리찍었다. 이미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법한데도 습격자는 여전히 꿈틀거렸다. 재생을 할 지도 모른다. 이대로는 안 된다. 친실장은 꿈 속에서 만났던 폭력적인 자신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기로 결심했다. 또 다른 자신이 욕구를 잔뜩 충족하게 되어 행복하게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친실장도 이번만큼은 거기에 동조하기로 했다. 친실장은 맨손으로 살을 찢고 비어져나온 내장을 짓밟고 피를 핥았다. 순수한 폭력이 작은 몸을 가득 메웠다. 아무 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데 입에 튄 살점만은 놀랍도록 달콤했다.
"마마, 그만두는 테치이!"
정신을 되찾았을 때, 장녀가 울며 뒤에서 친실장을 꽉 껴안고 있었다. 아직도 온몸에서 갈 곳 없이 날뛰는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장녀의 외침에 다시 이성을 찾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친실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잔악한 악마가 주위에서 끔찍한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차녀의 모습도 처참했지만,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침입자의 시체에 친실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흥분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지독한 놈이었으니 만에 하나라도 살아있으면 큰일이다. 친실장은 장녀를 달래고 시체에 다가갔다. 찢겨지고 토막난 상태로 보아 혹시라도 재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 때, 안도의 한숨을 쉰 친실장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이건..."
장녀가 주었던 비즈 반지에 있던 구슬들이었다. 피에 잠기다시피 했지만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해 친실장은 머릿속의 퍼즐 조각을 짜맞추었다. 포식석이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먹이를 구할 때 실수로 떨어뜨린 비즈 반지의 구슬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품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포식석은 비즈 구슬에 밴 냄새와 같은 냄새를 따라 추적했고, 그 결과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오...마에는 악마인 뎃...샤아악..."
곤죽이 되다시피 한 고깃덩어리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에 친실장은 펄쩍 뛰었다. 아직 살아있던 것이었을까. 경계하며 몇 번 쿡쿡 찔러봤지만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방금 전의 것은 그저 유언같은 저주에 불과했다.
"악마는 오마에인 데스."
친실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 사건 이후, 친실장은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다. 한순간에 차녀를 잃은 슬픔 탓일까, 더욱 수척해진 친실장에게서는 예전의 현명하고 상냥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녀도 쳐져버린 집안의 분위기에 침울해했다. 오직 멍청한 구더기만이 프니프니를 해달라고 천진난만하게 졸라댔다. 장녀는 재빨리 구더기를 눕히고선, 배를 고사리같은 손으로 꾹꾹 눌렀다. 장녀가 프니프니를 하면서 친실장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예민한 귀에 어떤 소리가 스쳤다.
"테? 마마, 들리는 테치?"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며 졸던 친실장은 그 말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또다시 자를 잃을 수는 없다. 친실장은 독기어린 표정으로 조심조심 밖으로 나가 주변 풍경을 살폈다. 무언가가 해질녘 속에서 달려들었다. 친실장은 반사적으로 팔을 날렸다.
"챠아앗!"
습격자는 허무하게 땅을 뒹굴었다. 연약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데...뎃?"
습격자는 바로 작은 자실장이었다. 넘어지며 뒤통수를 부딪혔는지 짧은 팔로 열심히 머리를 매만지던 자실장은 열심히 위협을 시작했다.
"테챠아아아앗!"
"오마에는 누구인 데스우?"
이 시간대에 홀로 돌아다니는 자실장이라니. 친실장은 당혹스러웠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크게 서너 가지로 나눠진다. 겁이 없거나, 분충이라 솎아내기 위함이거나, 친실장을 잃어버렸거나. 가설을 세워보다 저번의 포식석 사건에 생각이 미친 친실장은 갑자기 연민이 들었다. 포식석이 이 자실장의 가족을 죽였을 것이다. 어쩐지 이 자실장은 죽은 차녀와도 닮아있는 것 같았다. 친실장은 무릎을 굽혀 자실장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시간에 혼자 다니면 위험한 데스야."
"츄아아아! 와타치에게 손대지 마는 텟챠아악!"
자실장은 꼭 쥔 앙증맞은 주먹을 제 딴에는 힘껏 휘둘러댔다. 그러다 힘조절을 잘못했는지, 손에 있던 것을 놓쳐버렸다. 그게 친실장 쪽으로 튀자, 친실장은 물건을 찾아 건네주기 위해 몸을 굽혔다.
"데...뎃?"
피가 묻은 채 굳어버린 탓에 원래의 색을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분명 비즈 구슬이었다.
"악마 데챠아아앗!"
'오...마에는 악마인 뎃...샤아악...'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려 하자 친실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말버릇인 데스우...!"
자실장은 계속해서 외쳤다.
"모두 오마에가 죽인 테챠!"
"마마도 오네챠도 이모우토챠도 오마에가 죽인 테츄아아아앗!"
"악마 테챠! 손대지 마는 테치! 죽어버리는 테치이이!"
자실장이 목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친실장은 자실장에게 다가가며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친실장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깨달아버렸다.
'꿈'은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꿈이 아니게 되었다.
비즈 반지도 '먹이'를 구하러 나갔을 때 잃어버리고 말았다.
'먹이'가 반항해서 부서지고 말았다.
'먹이'의 어미는 그것에 밴 냄새를 찾아온 것이다.
악마는 오마에인 데스.
친실장은 세상이 빙그르르 도는 느낌을 받았다. 친실장은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친실장은 또다시 '꿈'을 꾸기로 했다.
*
"마마?!"
친실장이 돌아오자 장녀는 놀라 위석이 떨어질 뻔 했다. 친실장의 앞치마가 적록의 얼룩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설마 친실장이 끔찍한 일을 했을 리 없다. 열매와 나뭇잎을 으깨 먹기라도 한 것이리라. 평소처럼 장녀가 다가가려 하자, 친실장은 장녀를 막고는 넝쿨을 밧줄처럼 단단히 꼰 것을 조용히 건넸다.
"테츙?"
"이걸로 와타시를 집 밖에 있는 덤불 가지에 묶어주는 데스."
"마마, 무슨 소리인 테치? 재미없는 장난인 테츄우..."
"농담이 아닌 데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장녀는 긴장하며 친실장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었다. 장녀는 혼란에 빠져 넝쿨로 친실장을 덤불 가지에 묶기 시작했다. 친실장을 걱정해 느슨하게 묶자 전에 없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움직이기 힘들 만큼 꽉 묶고서야 친실장은 만족했다. 몸은 불편했지만 정신은 이상스러울만큼 몹시 맑고 평온했다.
"못과 구더기를 데려오는 데스."
"텟츄우?"
"어서 데스."
차분한 음성으로 친실장이 달래듯이 말했다. 왠지 거부하기 힘든 듯한 분위기에 장녀는 친실장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마마, 마마도 구더기가 되고 싶은 레후?"
"그런 농담은 재미없는 테치!"
"농담 아니었던 레히이..."
잠시 자들을 바라보던 친실장은 조용히 마음 속으로 매듭을 지었다.
"장녀, 못으로 와타시의 가슴을 찌르는 데스. 와타시의 위석이 거기 있는 데스."
"...테치이?"
장녀는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오마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줄 수는 없는 데스. 미안한 데스. 하지만... 이젠 이 방법만이 와타시가 온전한 와타시로 남는 방법인 데스. 와타시의 소중한 보물인 오마에들을 지키는 방법인 데스. 장녀, 보존식과 가재도구를 챙겨 구더기와 함께 살아가는 데스. 버려진 골판지 상자는 공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데스."
"마마, 무슨 소리인 테치? 싫은 테치이!"
"마마 죽는 거 싫은 레후!"
당연히 자들은 영문을 몰라하며 거부했다. 장녀는 못을 친실장 앞에 떨어뜨리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구더기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친실장은 자기도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팔을 힘껏 움직였다. 아무리 단단히 묶었다고 해도 자실장이 묶은 탓인지, 어느 정도 노력을 하자 오른팔이 쑥 삐져나왔다. 친실장은 못을 겨우 집어들고 자들에게 미소지었다. 마지막으로 전하는 자애롭고 따뜻한 사랑이었다.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다.
친실장이 위석을 정확히 겨누어 자신의 가슴을 힘껏 찌르자, 온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친실장의 영혼은 곧바로 사라졌다. 자애로운 미소를 여전히 머금은 채 영원히 잠든 친실장의 몸을 자들은 울며불며 껴안았다.
그리고 이젠 오롯이 혼자 몸을 차지하게 된 다른 '영혼'이 기다렸다는 듯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장녀보다 구더기가 친실장의 자유로운 팔에 가까이 있던 것은 순전히 불운이었다. 죽었던 친실장은 갑자기 되살아나 구더기를 굶주린 짐승같이 물어뜯었다. 구더기는 잠시 파닥대다 죽어 씹혀 친실장의 탐욕스런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렸다. 아직 제물에 만족하지 못한 듯, 친실장은 자실장을 마저 잡기 위해 손을 거칠게 휘휘 저었다.
"마...마마?!"
자실장은 딸꾹질을 하면서 뒷걸음질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밀려들어오자 장녀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광기의 구렁텅이 속에서, 순전히 생존본능만 남은 장녀는 몸서리를 치고 울부짖으며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친실장은 가슴에는 여전히 못이 박히고 몸은 덤불 가지에 묶인 채, 몸부림치며 침을 흘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질러댔다. 지옥에서 가장 지독한 악귀가 실장석의 몸을 빼앗아 깃든 것 같았다. 몸을 생각하지 않는 거센 몸부림에 덤불 가지는 흔들리고 덩쿨은 서서히 풀려갔다. 조금만 더 몸을 움직이면 친실장이 덩쿨에서 빠져나올 것 같았다. 공원의 재앙이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퍼억.
재앙의 탄생은 정말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머리가 빠루에 맞아 터져나가자 친실장의 몸은 단박에 축 처졌다. 두꺼운 장화가 뒤이어 친실장의 몸을 짓이겼다.
장화의 주인은 멀쑥하게 생긴 갈색 머리의 젊은 남학도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 자신만만한 입매와 열정에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그는 무언가를 노트에 휘갈겨 써내려갔다.
실험 노트- 실장석 한 마리에 복수의 위석이 이식될 경우의 변화 관찰.
: 이성적이고 애정이 깊은 실장석에게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기른 포악한 동족 포식석의 위석 복수 이식 시도. 이식 무사히 성공. 처음에는 다른 개체의 위석을 인식하지 못하나 서서히 그 영향을 받기 시작함. 다른 개체의 위석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초기에는 본래 위석이 우세하여 자유롭게 다른 위석을 통제할 수 있음. 그러나 종래에는 다른 개체의 인격을 통제하지 못한 채 두 인격이 공존함. 이 시점에서 두 인격의 분리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움. 복수의 위석 중 하나를 파괴하면 나머지 위석이 육체를 지배함. 보다 정확한 표본을 얻기 위해 다른 개체의 실험이 더 필요할 것으로 사료됨.
p.s. 복수의 위석이 이식된 경우 에너지도 더 많이 소모하는 것으로 추정됨. 쉽게 지치는 모습을 관찰 가능.
노트에 마지막 문장을 적은 남자는 만족스런 작은 미소를 띄웠다. 만약 친실장이 이 남자의 얼굴을 봤다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는 친실장이 알고 있던 바로 그 '애호파'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사실, 실장석들 사이에서 '애호파'로 인식되고 있긴 했지만, 그가 실장푸드를 뿌리는 것은 순수한 이유는 아니었다. 남자는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아 실장석으로 여러 실험을 해 보길 좋아했고, 가끔씩 푸드를 뿌리며 그때그때 적절한 개체를 선발해내었다. 물론 그는 실장석이 밉거나 하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좀 짜증나지만 귀여운 생물체'라는 인식 정도였다. 다만 귀엽단 생각보단 순수한 지식욕이 앞서 있을 뿐이었다. 애호파가 본다면 앞에선 푸드를 뿌리는 척 하고 뒤에선 실장석으로 잔인한 실험을 해대는 이중인격자라고 욕할 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의 이중성은 모두에게나 있는 법이다. 아마도.
어쨌든 이번 역시 순전히 개인적 호기심에 못이겨 시작한 실험이었지만, 무척 흥미로운 결과를 맺었다. 어쩌면 의미 있는 기록이 될지도 몰랐다. 일을 끝낸 남자는 주변을 살폈다. 딱히 시체를 수거해 가져다 버리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 자연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 같았다. 본래 깔끔한 성격의 그는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빠루와 낡은 장화를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후련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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