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순의 어느 날, 어느 도시의 이름없는 뒷산.
산실장은 사람을 피해 첩첩산중에 자리를 잡는다는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도시와 아주 가까운 이곳에도 산실장 군락이 있다. 그것도 꽤 큰 규모로.
처음으로 이 산에서 살기로 결심한 실장석 자매가 첫 삽을 뜬지 어느덧 10년, 이젠 성체실장만 30여 마리가 있는 최초의, 그리고 최대 규모의 중심군락과 이 중심군락의 개체수 과밀 및 단 한번의 습격에 의한 몰살을 방지하기 위해 여기서 떨어진 곳에 2~8마리의 성체실장들로 이루어진 위성군락 대여섯개를 거느리는 수준까지 확장되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위성군락 중 하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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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예상한 대로였던 데스.]
장로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다섯이 먹기엔 보존식이 부족했던 데스.]
지난 가을에 자신과 자매, 그리고 자신의 자 2마리와 자매의 자 1마리까지 총 5마리가 떨어져나와 위성군락을 형성하였다. 처음 굴을 파고 보온재와 보존식을 장만하는 것은 중심군락에서 지원해 주지만 산실장의 살림, 일손이 넉넉할리가 없으므로 중심군락의 지원은 언제나 조금씩, 혹은 많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아직 3월 초, 보존식으로 3주일을 더 버텨야 하는데 남은 보존식은 기껏해야 3일분 정도.
[오네챠...아니, 장로. 이젠 어째야 하는 데스?]
[밖에 나가 먹이를 구해야 하는 데스. 아직 밖은 춥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데스.]
[하지만 장로 말대로 아직 밖은 추운 데스. 추우면 먹을것도 없는 데스.]
[와타시도 아는 데스. 그래서 방법을 생각중인 데스.]
장로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위성군락이라 해도 엄연히 하나의 군락이다. 당연히 장로는 하나의 군락을 이끌만큼 머리가 좋고 이런저런 경험이 많이 쌓인 개체 중에서 선발한다. 장로의 기억 속에, 이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경험 역시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의 장로는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었는가?
일반적인 산실장들과는 다르게 도시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자신들만의 입지조건을 이용한 해결책. 최초의 자매들로부터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오는 수단...
[...역시 그 방법뿐인 데스.]
[장로?]
[이모토챠, 기억나지 않는 데스? 저저번 봄이 오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데스.]
[....생각해보니 그랬던 데스! 그때 마마랑 오바상들이랑 와타시타치랑 오바상들의 자들이랑...]
[이번에도 그걸 하는수밖에 없는것 같은 데스.]
[뎃...! 와타시타치 만으로도 괜찮은 데스?]
[자들이 있는 데스. 자들도 이미 다 컸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데스. 어차피 자들도 해봐야 하는 데스.]
[그럼 하는 데스. 언제 할 생각인 데스?]
[오늘 준비해서 내일 햇님이 뜨기 전에 할 생각인 데스. 와타시가 준비를 할 테니 이모토챠는 자들에게 설명해놓는 데스.]
[알겠는 데스.]
장로가 하려는 것은 바로 들실장 사냥.
최초의 자매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지식, 봄이 오기 전에 보존식이 다 떨어지면 들실장들을 사냥해라. 군락과 도시가 아주 가깝고 들실장이 없는 도시는 없다는 점을 활용한 이 산에 사는 산실장들만의 생존전략.
물론 산실장들은 동족식을 거의, 혹은 아예 하지 않는다.
구더기만 빼고.
그러므로 산실장들이 들실장을 사냥하는 것은 출산노예, 속칭 자판기를 마련하려는 것. 이맘때쯤에는 거의 모든 들실장이 성체 상태이기에 산 채로 잡기만 하면 자판기로 충분히 써먹을 수 있다. 물론, 들실장도 월동으로 인해 살이 많이 빠지고 기력도 약해져서 이런 시기에 잡은 것들은 최대한 관리해도 한달쯤 버티는 정도가 한계지만 그정도면 충분하다.
자매가 자들을 불러놓고 들실장 사냥에 대한 설명을 할 동안, 장로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산 속의 3월 초. 아직은 봄인지 겨울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살벌한 냉기가 장로를 휘감는다. 그러나 그런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냥의 준비물을 챙긴다.
노예가 시끄럽게 소란피우지 않도록 입에 쑤셔박을 낙엽뭉치
노예를 묶는데 쓸 아주 질긴 덩굴
실패는 절대 용납되지 않으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꼼꼼히 따져서 가장 좋은 품질의 것만 챙긴다.
그렇게 신중하게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덧 해질녘. 아직 실장석에겐 낮이 너무 짧다. 굴로 돌아온 장로.
[남은 보존식은 오늘 다 먹는 데스. 내일 사냥에 쓸 힘이 부족하면 안되는 데스. 그리고 보존식을 오늘 다 먹으니 내일 사냥에 실패하면 군락실각인 데스. 자들은 반드시 기억해두는 데스. 실패라는 선택지는 없는 데스!]
[네 데스!]
보존식을 전부 먹어치운 후, 장로를 제외한 실장석들은 전부 일찍 잠들었다. 내일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야 하니까. 장로는 그 시절의 장로가 그랬듯이, 밤을 새며 내일 늦지 않도록 다른 실장석들을 깨우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어느덧 밤이 지나고, 해는 뜨지 않았으나 하늘은 서서히 밝아져 오는 박명의 때에 장로는 다른 실장석들을 깨웠다.
도구는 어제 전부 준비했고 식량은 어차피 없으니 일어난 후 몸이나 풀면서 잠을 깨우고 바로 출발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장로의 차녀가 굴 밖으로 나오길 거부한 것.
[차녀, 뭐하는 데스?]
[마마! 너무 추운 데스! 이런 날씨엔 움직일 수 없는 데스!]
[마마가 아니라 장로인 데스. 그리고 허튼소리 하지마는 데스. 빨리 따라나오는 데스.]
[말도 안되는 데스! 이런 날씨엔 가다가 얼어죽는 데스!]
[추운 건 알고있는 데스. 얼어죽을 수 있다는것도 알고있는 데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추워도 할 일이 있을땐 해야하는 데스. 마지막으로 말하는 데스. 빨리 나오는 데스.]
[와타시는 절대 못나가는 데스! 얼어죽기 싫은 데스! 갈려면 마마나 가는 데샤악!]
[...]
[데...]
[...]
[마마...?]
[...]
[마마...왜 그러는 데스?]
[...그러면 어쩔수 없는 데스. 오마에는 남아있는 데스. 절대 다른데 가지 말고 반드시 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데스.]
[알겠는 데스!]
예상치 못한 실랑이 때문에 쓸데없는 곳에서 시간이 낭비되어 버렸다. 이대로라면 사냥을 시작하기도 전에 해가 떠버릴 것이다. 해가 뜨면 들실장에게, 그리고 닝겐들에게 발견될 확률이 높아지고, 그러면 사냥은 실패한다. 차녀는 두고 갈 수밖에.
나머지 넷은 터덜터덜 산을 걸어 내려간다.
장녀, 그리고 자매의 자는 왜 차녀만 따뜻한 굴 속에 남겨놓고 자신들만 데려가는지 항의하고 싶었으나, 옆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장로의 섬뜩할 정도로 굳은 얼굴을 보고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한 20분쯤 걸어 내려가니 곧바로 나오는 공원.
여기가 목적지다.
장로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덤불 하나를 지목했고, 군락 전체가 우선 그리로 가서 몸을 숨겼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들분충들을 공격하는 요령을 다시 설명하는 데스. 첫번째는 습격 대상을 결정하는 것인 데스.]
어제 자매가 한번 알려주었지만, 장로가 다시 한번 설명을 시작한다.
[저기, 저 나무 밑의 열려 있는 골판지 보이는 데스? 저런건 무시하는 데스. 이런 날씨에 열려있는 골판지면 들분충들이 살지 않는 골판지일 가능성이 높은 데스.]
[저 풀숲 속에 있는 골판지도 어지간하면 넘어가는 데스. 골판지를 숨길 수 있는 위치를 잡을만큼 머리가 굴러가는 들분충이면 먹이도 잘 찾아먹고 힘을 쌓은 놈이라 의외로 격렬하게 저항하는 경우가 있는 데스.]
[그러니 어차피 널린게 들분충인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는 데스. 그냥 닫혀 있는 골판지 중에 눈에 잘 띄는걸 골라서 뜯어보면 어지간해선 맞아떨어지는 데스.]
그밖의 특이사항들
[여기 맞은편 덤불 속엔 아주 덩치 크고 힘센 들분충이 있는 데스. 예전엔 여기 사는 들분충들의 장로같은 녀석이었던 데스. 조심하는 데스.]
[그리고 저기 저 가시덤불에 굴 파놓은 들분충! 저놈은 위험한 데스. 들분충 주제에 머리가 더럽게 좋아서 저 들분충을 노리던 와타시의 자매 중 하나가 역으로 당해버린 데스. 저 들분충 놈이랑은 언젠간 와타시가 직접 결판을 낼 것인 데스.]
[두번째로 사냥 방법은...이건 역시 직접 해보는 것이 가장 나은 데스. 이모토챠는 망을 보고 자들은 와타시와 함께 작업하는 데스. 이모토챠에게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은 들어놓은 데스?]
[네 데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는 데스. 저기 닝겐들이 벤치라 부르는 것의 아래쪽에 있는 골판지가 첫번째 목표인 데스.]
장로의 말대로, 자매는 망을 보고 장로와 자들은 조용히 골판지로 접근한다.
골판지 바로 앞에서 골판지에 귀를 갖다대는 장로. 살아있는 실장석이 있다면 숨소리나 뒤척이면서 부스럭대는 낙엽소리가 난다. 그리고 이 골판지에서도 그런 소리가 난다.
장로는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자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공격 개시.
자들은 굴에서 가져온 나뭇가지 창을 곧바로 골판지 뚜껑의 틈 사이에 찔러넣고 젖혀서 열어버렸고, 장로는 골판지가 열리자마자 뛰어들어가 순식간에 월동중인 친자의 입에 낙엽뭉치를 쑤셔넣었다. 뒤이어 뛰어들어온 자들이 합세해 반항을 하지 못하도록 들실장 친자의 팔을 분질러버리고 독라로 만든다.
23초. 골판지 하나를 털어버리는데 걸린 시간.
이번이 처음 습격인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입을 쑤셔막는 것은 습격조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실장석의 역할이기에 장로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산실장이라지만 그래도 실장석이라는 걸까. 다른 실장석을 공격하는 솜씨만큼은 타고났다고 봐야 할 수준이다.
곧이어 독라가 되버린 들실장 친자를 뒤집어 부러뜨린 팔을 다시 등 뒤로 꺾어서 가져온 덩굴로 묶고, 긴 덩굴 하나로 두마리의 목을 묶어서 끌고 갈 채비도 마쳤다.
첫번째 사냥은 깔끔하게 성공했다.
포획물은 성체급 들실장 2마리.
자판기 둘로는 5마리 군락이 한달을 버틸 만큼의 구더기를 만들기에는 약간 부족하다. 한마리가 더 있으면 좋겠지만 이미 해는 떠오르기 시작했다. 들실장 포획은 여기서 관두는 수밖에 없다.
군락은 포획한 노예들을 끌고 굴로 돌아간다
장로의 장녀가 앞을, 자매의 자가 뒤를, 장로와 자매가 각각 좌우를 살펴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산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산인데다 발걸음이 느린 노예들까지 데리고 있어서 굴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내려갈때의 3배 가량인 1시간 정도.
그리고 드디어 굴 앞까지 왔건만, 장로는 갑자기 군락을 멈춰세운다. 뭔가 할 일이 남았다는 듯.
혹은, 두번째 사냥을 시작하려는 듯.
[이모토챠, 도와줄 수 있는 데스?]
[...할 생각인 데스?]
[알고 있었던 데스?]
[뻔한 데스. 장로가 자를 '오마에'라고 칭하는 경우는 하나뿐인 데스.]
[...그런 데스. 해야만 하는 데스.]
자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들은 와타시타치가 다시 나올때까지 여기서 잠깐 기다리는 데스.]
라고선 장로와 함께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날 군락의 개체수는 성체실장 4마리로 줄었다.
출산노예 3마리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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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라는 환경은 실장석에겐 가혹하다.
지형은 험하고, 먹이는 부족하고, 천적은 많고, 겨울은 더 춥고 더 길다.
그래서 산실장들은 살아남기 위해 장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장로가 군락을 위해 내린 결정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래서 산실장들은 살아남기 위해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추워도, 더워도, 배고파도, 목말라도 참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합당한 이유 없이 장로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혹은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산실장으로 살아갈 자격이 없다. 후환을 막기 위한 처단만이 있을 뿐.
비정해 보이지만, 이것도 산실장들이 살아남는 비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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