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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그녀는 일가의 오녀였다. 엄하지만 자상한 어미 밑에서 자란 자실장 다섯은 전형적인 오인조의 성격을 가졌다. 호기심 넘치고 리더십이 강한 장녀, 식탐이 강하고 불만이 많은 차녀, 얌전하고 겁이 많은 삼녀, 개구쟁이 사녀. 오녀는 가장 작고 약해 자매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이야기다. 지금 그녀는 고아 신세가 되어 과거 온가족이 들어가 있던 나무둥치 속에서 홀로 떨고 있다. 체온으로 그녀의 작은 몸을 꼭 감싸 덥혀주던 마마와 오네챠들은 이제 없다. 그리고 그 순간이 잊으려고 해도 또다시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녀는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치이이...."


그녀가 태어난 숲을 나오면 높다란 언덕이 봉긋봉긋 솟은 탁 트인 풀밭이 펼쳐진다. 인간들이 '공동묘지'라고 부르는 곳이다. 산에서 굴을 파고 살던 일족에서 독립한 마마는 지난 봄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실장석의 나쁜 기억력과 구술 능력 탓에 '힘들고 또 힘들었'다고밖에 설명해줄 수 없는 고난을 딛고 정착할 장소를 찾았다. 그 만큼의 가치가 있는 보금자리였다. 남향이므로 볕이 들면 따뜻했고 조금만 내려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가끔 오는 참배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과 버린 비닐, 음료수병을 주워 활용하니 산실장 시절보다 윤택한 삶이었다. 주저 없이 들꽃으로 임신한 마마는 그녀들을 낳고 길렀다.

최대한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게 조심했다. 물론 그런다고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서까지 굳이 실장석을 학대하려는 인간은 없기에 내버려둔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들의 행복을 묵인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마마는 먹이를 모으러 나가고, 자매들은 집 근처에서 놀며 기다리던 어느 날. 여기저기 찢기고 터지고 너덜너덜해진 마마가 기어서 돌아왔다. 팔은 거의 닳아 없어지고 배는 땅에 쓸려 금방이라도 내장이 쏟아져나올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가족의 묘비가 배설물에 더럽혀진 것을 발견한 사람에게 잡혀 몇번이고 차이고 두들겨맞은 것이다. 마마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잠시 보기만 해도 실장석이 아닌 떠돌이 개의 짓인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운나쁘게 화풀이 대상으로 근처에 알짱거리던 실장석이 보인 것뿐.

울부짖는 자매들을 달래며 마마는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은 곧 죽으며, 이제 자매끼리 힘을 합쳐 살아야 한다는 것. 이른 아침과 해가 질 무렵에만 먹이를 찾아 언덕을 내려갈 것. 절대 내려가서 운치를 보지 말 것. 인간이 남긴 음식이 없다면 숲 속의 버섯이나 풀을 먹을 것. 엄지와 구더기들을 잘 보살피고 정말 먹을 게 없을 땐.... 겨우 생존에 필요한 지식들을 알려주기를 끝마치고서 마마의 눈은 흐려졌다.

그날 이후로 자매들의 삶은 달라졌다. 가장 똑똑하고 행동력이 있는 장녀의 지휘로 마마의 시체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으로 옮기고, 그녀들만 들어갈 수 있게 나뭇가지를 모아 입구를 가렸다. 자실장인 그녀들은 성체인 마마보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좁았기에 묘지의 구역을 나눠 채집할 생각을 낸 것도 장녀였다. 마마의 역할을 대신한 장녀를 자매들은 믿고 의지했다.

어린 그녀들에게는 힘든 하루하루였지만 참아낼 수 있었다. 언젠가 마마처럼 커져 서로서로 자를 낳고 행복해지기를 꿈꾸며.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녀는 전날 넘어져 다리를 다쳐 회복할 겸 쉬면서 집인 나무둥치에서 자매들을 기다렸다. 자기 때문에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오네챠들을 걱정하며 입구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까마득히 먼 산을 응시했다. 언제쯤 밑에서부터 무덤처럼 둥근 오네챠들의 머리가 나타날까 하고.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뜻밖의 굉음이 들려왔다.

아픈 다리를 무릅쓰고 숲밖으로 나온 오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아비규환이었다. 인간들이 거대한 무언가를 들고 다가오자 잘린 풀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앞에 자신의 자매들이 있었다. 앞치마에 가득 든 떡조각들을 포기하지 못한 듯 어기적거리고 뛰다가 넘어진 차녀, 차녀를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녀, 한계인 듯 무너져 빵콘하고 있는 삼녀. 장녀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 앞에 뛰어나가 외치고 있었지만 예초기 소리와 흩날리는 풀 때문에 장녀의 부르짖음은 인간에게 닿지 않았다.

싹둑, 싹둑, 싹둑, 싹둑.

언니들의 몸뚱이가 허망하게 잘려나가는 순간이 오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어? 뭐야. 참피들이 죽어 있잖아."
"진짜네! 아직 새끼들이구만요. 여기 사는 놈들인가?"
"왜 저번에 관리인 양반이 요근처에 큰놈 하나가 어슬렁거린다고 그랬잖아. 그놈 새끼들인가 보지."
"어미가 죽었나보네. 보통 이만한 새끼들은 숨겨서 잘 안 보이지 않아요?"
"그럴거야. 뭐 곧 추석인데 잘 됐지. 아무리 그래도 참피가 이런 데 있으면 안 되지... 불쌍하지만 운이 없었구만."


벌초하러 온 지역 청년단원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베어낸 풀과 장녀들의 시체를 치우고 떠나갔다.

그늘에 주저앉은 오녀는 하염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다.


마마가 죽었다. 오네챠들도 죽었다. 엄지와 구더기 동생들이 뒤를 따랐다. 이미 마마가 죽은 뒤부터 자매들의 운치로는 충분히 먹지못해 여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녀는 둥지 속 깊숙한 곳에 숨겨둔 보존식의 일부까지 나눠주며 하나라도 살리려 했지만, 노력도 헛되이 차례로 숨을 거두었다. 불과 오일만에 오녀는 철저히 외톨이가 되었다.

마마의 마지막 가르침을 따라 오녀는 눈물을 흘리며 동생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것으로 며칠간을 더 집안에서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왔을 때 묘지를 떠들썩하게 만들던 인간은 모두 떠나간 후였다.

뜻밖의 운으로 당장의 위험은 넘겼지만, 오녀의 마음속은 외로움과 공포만이 가득해졌다. 갈수록 쌀쌀해지는 날씨도 원인이었다. 숲의 나무들의 잎은 그녀의 옷과 같은 녹색에서 빨갛게 변하고 떨어져 갈색으로 변해갔다. 언젠가 마마가 말하던 겨울씨가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오녀는 작은 몸으로 홀로 겨울씨를 넘기고 자신이 태어난 봄을 맞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면 누구도 이 작은 자실장이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스스로 될대로 되라며 인간에게 다가온 오녀의 속사정이었다.


아침에 묘지로 터덜터덜 내려온 오녀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숲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저 색을 잃어가는 잔디밭에 가만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밑의 무덤에 인간이 와 있었다.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주저앉아 물 같은 것을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무덤 쪽에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인간의 표정은 잘 모르겠지만 실장석인 그녀가 보아도 인간의 얼굴은 슬퍼보였다.

이윽고 결심했다. 오녀는 천천히 인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혼자 있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낀 건지도 모른다. 닌겐의 친구가 되어도 좋다, 닌겐에게 잔인하게 죽더라도 괜찮다. 이미 이 세상은 그녀에게 희망이 없는 공간이니까.

가까이 다가가자 인간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고, 인간이 떠들어대는 말도 잘 들렸다. 비록 몇 대째 인간과의 교류가 없어 그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어쩐지 그리움과 슬픔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남자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을 때, 오녀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감정이 점점 격해짐을 느끼며 오녀는 얼굴을 손에 파묻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테에엥, 테에에엥...."



남자는 무덤 곁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자실장을 눈치챘다. 어째서 이런 게 여기서 울고 있는지 의아해지며 남자는 말을 건다.

"운 좋은 줄 알어라. 저리 가"

"텟?"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는 자실장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왜 여기서 우는 거야? 엄마 찾아가라고."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던 자실장은 다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참. 잃어버리기라도 한거냐? 그런다고 안 길러줘. 돌아가."

반응 없이 가만히 있는 자실장을 남자는 특이한 놈이라 생각하고 무시하고 남은 소주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많이 말랐구만. 먹을 거도 없는데... 가만, 가족이 다 죽은 건가?"

갑자기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리는 자실장이었다. 죽음이라는 말을 겨우 알아들은 오녀는 남자의 말을 긍정하고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혼자란 말이지.. 나랑 똑같네."

못마땅한 얼굴로 오녀를 응시하던 남자는 중얼거렸다.

"형이 너희들을 참 좋아했었지..."

그러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남자는 오녀를 집어들어

홱.

자신의 외투 앞주머니에 넣었다.

"테칫?"

"똥싸면 버릴거야."

남자는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묘지 입구를 향한다. 오녀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떨어질까봐 주머니에 꼭 매달릴 뿐. 이 닌겐은 언젠가 마마가 말했던, 와타치타치를 괴롭히고 죽이는 닌겐일까. 하지만 너무 슬퍼보였다. 와타치와 같은 슬픔을 느끼는 닌겐이라면, 쓰다듬어주거나, 한번에 자비롭게 죽여줄 줄 알았는데..

"이것도 인연일까..."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은 오녀에게 닿지 않았다.

만약 남자의 오녀를 기르겠다는 즉흥적인 결정을 이해했다면, 그녀는 망설임없이 주머니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녀가 바란 결말 중 인간의 사육은 없었다. 마마의 가르침은 '닌겐에게 길러지는 것은 불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대로 남자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오녀에게 운명은 손을 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장은 혹독한 생존 문제에서 벗어났고, 사육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전제지만 다시 가족을 이룰 가능성도 생긴 것이므로.

운명을 비관하고 내던질 각오가 된 실장석에게, 얄궃게도 운명이 비로소 미소를 지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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