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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석과 나무 (헤론)


숲의 언저리, 붉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고 그보다 약간 바깥에 있는 넓은 초원은 이미 늦가을을 맞아 누렇게 말라붙은 잡초로만 뒤덮혀있다. 거기에서 움직이는 조그만 형상 몇 가지. 실장석이다.

흔히 실장석은 인간에게 기생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넓고 탁 트인데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생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실장석 일가는 자신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이해보일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온갖 소란을 피우면서 자기네들이 할 일을 할 뿐이다.

[테에엥, 십삼녀 오네챠가 때린테츄!]

[아닌테츄! 십칠녀쨩이 와타치가 던진 열매를 못받은 것일 뿐인테츄!]

[뒤통수에 던지는데 어떻게 받는테츄악!]

옥신각신하는 자매 사이에 끼어든 친실장이 자실장들의 머리에 알밤을 하나씩 먹이고는 말했다.

[장난은 그만치고 어서 움직이는데스. 오늘이 벌써 다 지나가는데스. 더 추워지면 늦는데스!]

세번째 겨울을 맞는 베테랑 친실장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실장석 일가의 집은 숲에서 조금 떨어진 평지에 있다. 나무 뿌리 때문에 숲 안에는 땅굴을 팔 수 없었기에, 이 주변에서 살아가는 실장석들은 대대로 평지에 땅굴을 파고 살고 있다. 이 친실장 역시 마찬가지다.

친실장은 요즈음 매일 아침마다 자식들을 이끌고 숲으로 출근했다. 두건을 벗어다가 나무열매를 한가득 모아 주워담고 그걸 집에다가 가져다 놓는 사이에, 숲에 남겨진 새끼들은 다시 두건에다 담을 열매를 모아놓는다. 어린 실장석 특유의 낮은 집중력 때문에 친실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열매가 잘 모이지 않지만, 수가 많다보니 그럭저럭 모이기는 한다.

친실장의 자식은 총 스무마리. 일반적인 야생 실장석 기준으로도 많은 편이나, 이 부근에 사는 실장석들에겐 평범한 숫자다. 넓은 숲에서 나오는 수많은 열매들이 실장석의 대책없는 가족계획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장석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더더욱 많은 자식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 친실장 역시 봄이 되면서부터 임신하여 2개월마다 한 번씩 총 네 번 출산했다. 한 번에 보통 6~8마리 정도 낳다보니 태어난 새끼의 수도 서른마리에 육박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분충을 몇 마리 솎아내고, 자실장이 되지 못한 놈들도 몇 마리 있었기에, 지금 숲에서 일하는 새끼의 수는 스물.

스무마리 중에서 이른 봄에 태어난 녀석들은 벌써 중실장으로 성장했다. 이녀석들은 친실장을 흉내내어 두건을 벗어들고는 거기에 낙엽을 한가득 모은다. 작은 자실장들은 열매를 한두개씩 나르기에도 바쁘기 때문에, 옮기기 어려운 낙엽은 덩치 큰 중실장들의 몫이다. 아직 자실장인 놈들은 여기저기 떨어져있고 아직도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후두둑 떨어지는 나무열매를 주워다가 한데 쌓아놓는다.

보통 자실장들은 식탐 때문에 보존식을 거덜내버리지만, 이 자실장들은 그렇지도 않다.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열매를 맺는 시기는 천차만별이지만, 하나같이 단단한 껍데기에 둘러싸인 딱딱한 열매를 맺는다. 자실장의 힘으로는 도저히 깨먹을 수 없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성체실장이나 중실장이 돌을 들고 깨뜨려줘야하기에, 식량 통제는 잘 되는 편이다.

[이제 오늘 일은 끝난데스.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데스. 이리 모이는데스!]

돌아온 친실장이 모여있는 열매를 다시 두건에 한가득 담고서 외쳤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자실장들은 그 말을 듣고서는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실장석이 숨기에 딱 좋은 우거진 수풀을 덩치 큰 친실장이 앞장서서 헤치고, 중실장들이 중간중간에 서서 동생들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감시한다. 자실장들은 친실장이 만든 길을 따라서 즐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이 수풀을 이루는 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실장석에게 의존하고있다. 보통 실장석의 대변은 실장석의 낮은 소화흡수력 때문에 두번이나 분대를 거치면서도 양분이 대량으로 남아있어 양질의 비료로 여겨진다. 하지만 소화액 역시 듬뿍 들어있어 상당히 강한 산성을 띈다. 도시에서라면 차의 도장을 망쳤다면서 구제당할 정도. 보통 식물들 역시 숙성되지 않은 실장석 대변에 노출되면 죽어버린다.


하지만 이 풀은 다른 식물보다 산성에 강하여 실장석 주변에서 번성하는 특징이 있다. 실장석의 대변이 경쟁자를 없애고 다량의 양분을 제공하여 빠르게 성장하는 이 풀은, 실장석이 몸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실장석이 포식자에게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면 풀이 번성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매일 지나다니지만 늦가을이라 시들어가는 풀이 쓰러지면서 길을 막는 통에, 제일 앞에서 길을 뚫는 친실장의 몸은 온통 풀에 긁혀 생채기 투성이다. 하지만 실장석의 회복력이면 한두시간 안에 회복될 정도다.

마침내 집에 도착한 실장석 일가는, 친실장이 몸을 구부리고 기어들어가야할 정도로 낮은 굴 안으로 들어갔다. 실장석은 땅을 파기에 적합하지 않은 생물이라, 자기 키보다 깊게 땅을 파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작년부터 여기에 집을 만들기 시작한 친실장은 얕은 대신에 옆으로 넓은 집을 만들어갔다. 지표면에는 풀이 잔뜩 자라고 있어서 굴이 무너지는 일도 드물다.

친실장은 먹이창고에다 두건에 담아온 열매를 쏟아붓고 나서, 이번에는 하나하나 숫자를 세어가며 다시 열매를 두건에 한아름 옮겨담았다. 오늘의 저녁식사다.

집으로 돌아온 일가의 삶은 단조롭다. 마땅한 놀잇감도 없고 다양한 먹을것도 없다. 그저 단단한 열매를 깨먹으며 어두운 굴속을 기어다니다가 잠드는 것이 전부다. 해가 길었을 때라면 열매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 자매들끼리 장난치며 놀기도 했을테지만, 요즘에는 실장석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면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밥을 먹고 난 다음에는 나가봐야 컴컴할 뿐이다.

가끔 중실장들이 자매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보름달이 떠서 밝은 날이면 밤중에라도 자매들끼리 웃고 떠들면서 뛰어다니기도 한다. 가끔씩은 메뚜기나 귀뚜라미 같은 가을 곤충을 잡아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날은 그믐달이 뜰 때라 그럴 일도 없다.



공원에 사는 들실장들과는 달리 이 숲 주변 초원에 사는 실장석들의 겨울준비는 손쉽기 그지 없다. 주변의 숲에서 나무열매를 되는대로 주워다가 모아놓고, 가을이면 되는대로 낙엽을 끌어모아 집안에 가득 채운다. 들실장들처럼 목숨을 걸고 돌아다니면서, 적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울 필요도 없다.

이 실장석 일가 역시 빠르게 겨울준비를 끝마쳤다. 이제부터 먹고 자고 싸면서 생활하기를 반복할 뿐이다.

[배가 아픈테츄... 춥지만 화장실에 가야되는테츄...]

슬슬 집안까지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벼운 복통에 잠에서 깨어나 덜덜 떨면서 화장실에 다녀온 십오녀는, 다시 포근한 잠자리에 누우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테엣, 누가 와타치의 낙엽이불을 가져간테츄!]

푹신할걸 생각해서 대책없이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십오녀가 울부짖으며 난리법석을 피우자 친실장이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일인데스? 어서 자는데스. 깨어있으면 배고픈데스.]

[와타치도 자려고 한테츄! 하지만 누가 와타치의 낙엽이불을 훔쳐간테츄!]

친실장이 십오녀의 말에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어두워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심각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십오녀쨩, 모두를 깨우는데스. 때가 와버린데스.]

[무슨 때인테츄?]

[나중에 설명해주는데스. 어서 깨우는데스!]

친실장의 말에 부랴부랴 일어나 깜깜한 굴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매들을 깨우는 십오녀. 처음에는 그 소란에 짜증을 내던 자실장들이 친실장의 목소리를 듣고 가장 큰 방으로 모여들었다.

[이제부터 모두 여기에서 같이 자는데스. 낙엽도 모두 가져오는데스.]

[마마, 그러기에는 너무 좁은테스. 낙엽도 집안에 가득한데 뭐하러 여기에 또 모으는테스?]

장녀의 말에 친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보이지 않았지만.

[낙엽이 집안에 가득찬데스? 하지만 오마에타치는 여기까지 오면서 낙엽을 만져본적이 있는데스?]

그제서야 장녀가 놀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낙엽이 걸리적거리지 않은테스. 그래서 빨리 올 수 있었던테스.]

[그런데스. 낙엽이 사라지기 시작한데스. 그러니 얼어죽지 않으려면 남아있는 낙엽을 모두 한데 모으고 다같이 모여서 온기를 지켜야하는데스.]

친실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하지만 시기상으로는 이미 조금 늦었다.

실상석 일가가 숲에서 주워모은 낙엽은 내구성이 약해 다른 나무의 낙엽보다 빠르게 부숴진다. 이는 이곳의 숲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낙엽에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살아남으려고 했다면 보다 빨리, 아니 애초부터 모든 실장석들이 비좁더라도 한군데에서 살을 부대끼며 체온을 보존해야했다. 낙엽은 그 보조용으로, 창고에다 쌓아놓고 주기적으로 꺼내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실장석들은 낙엽을 모아놓으면 따뜻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여러번의 겨울을 겪는다면 그 중에서 똑똑한 개체가 낙엽을 저장해두고 조금씩 꺼내는게 좋다는걸 깨달을테지만, 그렇게 오래 살아남는 실장석은 드문데다가 보통 다른 나무의 낙엽은 그정도로 할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



또다시 찾아온 봄. 실장석의 집안에서 누군가가 기어나왔다.

[데에.... 이번에도 살아남은데스.]

친실장이었다. 잘 먹어서 몸은 통통하지만 얼굴은 시꺼멓게 죽어있다.

[마마, 오네챠들은 어떻게 하는테츄?]

그리고 함께 살아남은 십구녀. 유난히 추웠던 올해의 생존자는 이렇게 둘 뿐이다.

[어쩔 수 없는데스. 모두를 옮기기에는 너무 힘든데스. 올해에는 새로운 집을 만드는데스.]

십구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친실장. 반대쪽 손에는 장녀의 두건으로 만든, 남은 열매 중 일부를 담은 꾸러미가 들려있다.

버려진 실장석의 집안에는 스무마리의 실장석이 먹을 생각으로 가득 모아놓았다가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야만 했던 나무열매와, 겨울철에 사용하기 곤란한 집 밖의 화장실을 대신할 실내 화장실에 싸놓은 대변이 가득하다.

부실한 내구성의 낙엽을 제공하여 실장석을 대부분 얼어죽게 만들고, 굴 속에 남은 나무열매는 실장석의 대변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이것이 이 숲, '실장석을 사육하는 나무'가 모인 숲이 성장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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