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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너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지



할머니와 친실장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자식들도 발길을 끊은지 오래.
마을에 사는 다른 노인들도 어느새 하나 둘 자식들의 손에 이끌려 요양원이니 하는 곳으로 사라지고 연락이 끊겼다.

쓸쓸했기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녹돼지라고 멸시하고 지나쳤을 그 녹색 짜리몽땅한 생명체에게 살짝 딱딱해지기 시작한 떡조각을 건넨 것은.

친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데슷 데슷 데스우.. 하는 소리와 함께 몇번이나 굽신굽신 허리를 숙이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노인이 논을 둘러보러 나가는 길 대문 옆에 작은 풀꽃 한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쩐지 기특한 마음에 꽃이 놓여있던 자리에 식은 밥 한덩이를 놓아두었더니 이번에는 밥덩이를 가져간 자리에 꽃과 함께 반쯤 삭은 도토리 몇알과 버섯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런 소소한 교류가 노인은 적막한 삶 가운데서도 즐거웠다.
이른 아침 일어나는 것이 기다려졌다.

그런 시간들이 흐르고 어느날
할머니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막내아들이 폐렴에 걸려서 입원했다는 전화였다.
아들은 별일 아니니 걱정 마시라고 전화 너머로 숨죽여 울었다.

할머니도 아들의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부여잡고 울었다.
언젠가 돈 많이 벌어서 새집 지어드리겠다고 큰소리 탕탕 치던 아들이었다.

언젠가..
옆집 금산댁이 뭐라고 했더라..

노인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광에서 라면상자를 찾아내 조립했다.

해도 뜨지 않은 어두컴컴한 새벽
대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뎃..뎃..뎃..뎃..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친실장이 나타났다.
움켜쥔 녹색 치맛자락 사이로 연보라색 들꽃 한송이와 상수리 열매 몇개가 보였다.

노인은 친실장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으며

이 기특한 것.. 너 새끼들이랑 내 집에서 살자꾸나

하고 말하자 친실장은 깜짝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노인을 올려다 보다가 곧 애교스럽게 데스웅~하고 귀를 쫑긋거렸다.

새끼들도 데려와야 하니 앞장 서거라

라고 하니 말을 알아들은 듯,
데승! 하고 콧방귀를 한번 뀌고 올때보다 씩씩한 소리로 뎃!뎃!뎃!뎃!하고 앞장서서 간다.
그렇다고 해도 자칫 방심하면 기력이 부족한 노인조차 앞질러가버릴 정도로 느린 속도다.

친실장은 굉장히 멀리 온 것처럼 쌕쌕거렸지만
사실 노인의 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의 경계쯤에 해당하는 산의 초입이다.
그 수풀 사이에 친실장의 집은 숨어있었다.

이미 골판지라고도 부르기 힘든, 물어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해서 녹아내리다 시피한 종이 상자였던 흔적.
그 안에서 무려 20마리가 넘는 자실장들이 튀어나왔다.

노인의 눈에는 크고 작은 새끼 녹돼지들이었지만
중실장도 있고 자실장도 있고 심지어 엄지실장과 엄지실장에게 안긴 구더기도 있는,
나름 구색을 갖춘 대일가였다.

어떤 녀석은 테프프프 하고 웃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테츄웅~하고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테챠아 하고 펄쩍 뛰며 빵콘을 하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일가를 모두 소중하게 상자에 넣어 안고 돌아왔다.

오자마자 커다란 대야로 일가를 옮기고 깨끗이 씻겼다.
늦가을의 추운 날씨에 차가운 수돗물이 닫자 친실장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데샤아..! 데스 데슷! 하고 항의하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할머니가 그래 착하지 곧 따뜻하게 해줄게 하고 달래자 금새 풀어져서 데프픗 하고 웃었다.

할머니는 실장석의 여린 몸뚱아리가 터지지 않도록 배를 살살 문질러서 야생의 분변도 제거하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도 제거했다.
얼마나 정성껏 씻겼는지 한 30초 정도는 실장석들이 머리카락이 사라진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노인은 깨끗하게 씻겨진 실장석들을 옆에서 펄펄 끓고 있던 가마솥 안으로 쏟아넣었다.

데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테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레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레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실장석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금산댁 할머니 말로 이 소리는 다 삶아질 때까지 들려야 좋은 실장석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들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솥뚜껑 위에 묵직한 돌 두개를 올려두고 약초를 가지러 갔다.

돌아와보니 돌덩이가 한개 굴러 떨어져 있고 뚜껑은 살짝 어슷해져 있는데 아직도 솥 안에서는 괴성이 울려퍼지고 있는 것이 아주 약이 되는 좋은 녀석들인 것 같았다.

황귀니 인삼이니 마늘이니 하는 것을 듬뿍 넣고 하룻밤 그대로 푹 고았더니 삼계탕보다 뽀얗고 구수해보이는 국물이 잘 우러나 있었다.

노인은 그 국물을 그릇에 옮겨담고 소중한 보물처럼 보자기에 싸서 몇번이나 차를 갈아타며 아들이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갔다.

아들은 노인을 보자 마자 엄마.. 하고 잠깐 목이 메이더니
힘든데 왜 왔어 하고 타박을 한다.

노인은 노인대로 혼자 있으면서 술이나 쳐먹으니 병이 나지 하고 잔소리를 한다.

엄마가 보약 해왔으니까 먹어
이게 그렇게 개소주보다 더 몸에 좋다더라

뽀얗게 잘 우러난 실장탕을 보고 아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엄마도 같이 먹어.. 하고 잡아 끈다.

노인은 망설이다가 숫가락을 들고 뽀얀 국물을 흐물하게 풀어진 살점과 함께 떠서 입에 넣었다.

노인의 집 앞에 노인을 위해 꽃과 버섯, 도토리를 가져다 두던 친실장의 상냥한 마음씨 덕분일까.

소금간만 살짝 했을 뿐인데도 진하고 감칠맛이 가득한 국물에 닭고기보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실장육의 육질이 어울어져서 맛이 좋을 뿐 아니라 뱃속이 후끈 달궈지며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기특한 것..

노인은 착한 친실장을 떠올리며 한숫갈 더 실장탕을 떴다.
친실장과 그 일가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한방울도 남김없이 아들과 나누어 먹었다.

실장탕을 먹은 덕분이었을까 항생제가 좋았던 것일까
아들은 며칠만에 언제 아팠냐는 듯 회복되어 퇴원 했고

할머니도 아들을 본 덕분인지 실장탕 덕분인지 이전보다 더 활력넘치는 걸음으로 시골집으로 향했다.

아들은 언제나 그렇듯 엄마, 내가 꼭 돈 벌어서 새집 사줄게 라며 노인을 배웅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정말로 노인은 아들이 장만해 준 새 집으로 향했다.
그 동안 살던 시골집은 팔리거나 꽤 오래 방치될 거다.

노인은 떠나기 전 항상 친실장이 꽃 따위를 가져다 두던 대문 옆에 작은 밥덩이를 두고 떠났다.
그 밥덩이는 오랫동안 햇빛을 쬐고 비와 바람을 맞고 개미들이 조금씩 물고 가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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