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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 2 - 받아들일 줄 모르기에 슬픈 지성에 관하여

 

장생은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주인이었다.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주인을 위해 번식 또한 포기했다. 그 대가로 실장석이 살아서 바랄 수 없는 안온한 삶을 받았다.
그러나 장생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행복의 끝이 찾아 올 것임을.
썩 좋은 삶이었다. 칼날이 배를 파고들기 전에 장생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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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럽게 자신이 학대파라 말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화가 났다. 본인의 사명을 깨달은 마흔 살 이후로 오늘만큼 허망한 날이 없었다.
그 편안히 잠든 얼굴, 약 올리는 듯한 얼굴…

놈의 배를 깠었다. 선연히 빛나는 그것을 집으려는 순간, 위석이 부스러졌다.
손이 닿지 않을 지평선처럼.
뭘 해볼 틈도 없었건만 똥벌레놈은 허락도 없이 절명했다. 합의 없이 슈킹하고 도망간 윤락녀처럼.

그 시체에 분풀이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남자는, 악을 쓰며 책상을 걷어찼다. 정강이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악악대며 신음하던 남자는, 이내 일어나 자기 몸을 해치는 대신 선풍기를 집어 던졌다. 노란 땀을 질질 흘리며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 더위 속에 선풍기를 박살냈다는 것을 깨닫자, 천천히 진정이 되었다. 그제서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선생님, 안에 계십니까. 00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남자는 이를 갈았다. 잡것들이 왜 제집인 양 문을 두드려 대는지,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금수들의 하인을 자처하는 저급 인간들!

남자는 으르렁거렸다. 
물론, 혹여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고 작은 소리로.

[그놈의 실장 삼권…]



장생은 처음엔 재떨이였다. 주제를 배웠다.
좀 더 자라서는 밥벌레였다. 예의와 검약, 대가 없는 친절의 가치를 배웠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청소부였다. 노동과 청결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배웠다.
그 후엔 아파트 텃밭을 지키는 경비였다. 그 때서야 알 수 있었다.
세상엔 자살하는 종(種)도 존재할 수 있음을, 실장석은 이미 도태되었음을.
장생은 종적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실패가 뻔한 생물에게도 기회를 준 주인의 은혜에 감사했다.


경찰이 604호의 문을 두드린 것은 실장석의 권리 때문이 아니었다.
음침한 이웃의 집에서 들려온 비명에 겁에 질린 주민들의 신고 때문이었다.
한참을 두드려도 답이 없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이 경위는 조금 열린 문을 확 젖히려 했지만 실패했다. 손 끝에 느껴진 저항감의 정체는 현관문에 걸린 구식 걸쇠였다. 이경위의 눈가가 꿈틀했다. 도어락을 쓰지 않는 집이라.
문틈 너머엔 희번덕한 눈만 내민 남자가 있었다. 독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술, 양파, 어쩌면 분변의 내음. 수상하기로는 짝이 없었다.
이 경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계셨네요. 열라고 말씀 드렸는데 안 여세요?]

[내 아무것도 모르오. 아무것도 없소.]

[왜 안 열어요. 안에 뭐있어요?]
[아무것도 없다뇨. 이웃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는데. 이 문 여시라구요.]

경찰서 막내가 을러대는 사이, 이 경장은 무력시위처럼 문 틈을 거세게 열어젖히는 시늉을 했다.
집주인이 다급히 문고리를 쥐었다. 집 안에 있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 처럼.
경장은 보았다. 그 손에 묻은 피를. 경장의 미간이 경련했다.

[…선배님., 저거…]
[선생님, 이 문 안 열어요? 공무집행 방해에요.]

[무시하지 마라, 내 집이라고 말했다. 안된다 했다.]

[집행방해라고 다 고지했어. 부숴.
문에서 나와계세요 선생님.]


피투성이 방, 사방에 흩어진 적녹색 내장. 형편없이 해체된 고기덩이들.
시체를 다룬 방식에는 울분이 가득 담겨있었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 경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행한 막내가 헛구역질을 했지만,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도 토하고 싶었으니까.

이 경장은 겁 먹어선 안된다고 되새겼다.
사람의 시체가 아니다. 눈 앞의 사람은 영화 속 개싸이코가 아니라, 소형동물 학대범일 뿐이다.
태연한 척의 일환으로, 이 경장은 일부러 훈계조로 말했다.
[아저씨,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봅시다. 위 아래에 이웃집 있잖아요. 이러시면 안되는거죠. 이웃들 겁먹잖아요.]

쬐죄죄한 남자는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바지라도 벗고 있는 양, 혹은 자위를 하다 들킨 사람처럼.

그 때, 구경하던 주민들을 물러나게 하던 막내가 그를 불렀다. 탁상 위의 살점 같은것을 가리키며.
[경장님, 이거 보십쇼.]
[왜?]
[뒷목에... 사육실장 바코드 같은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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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가 되는 과정은 복잡했다.
주인은 장생이 ‘엄밀히 합법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장생은 지금까지처럼 같이 지내기만 하면 안되느냐 물었지만, 주인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만 했었다.
그 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입주민 회의에서 열변을 토한 주인 덕에 텃밭 경비로 채용되고 나서,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동족을 수도 없이 상대해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동족들은 손에 넣은 것을 너무 쉽게 잃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어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토록 약함에도 잔인하고 오만하고 포악했다.

주체성이 없는 것들은 길러지기만 바라며 면전에서 인간에게 투분했다.
주체성 넘치는 것들은 용감하게 인간의 샌들에 이쑤시개를 쑤셔넣었다.
두 부류의 본질은 그 최후만큼이나 닮아있었다. 배울 줄 모르고, 받아들일 줄도 모르는, 스스로를 무지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오만함과 아집.
동족들은 공생이 가능한 생물이 아니었다. 인간은 물론, 동족들끼리도.
스스로가 곧 한계인, 무엇을 해도 안될 비천하고 멍청한 생명들.

장생은 텃밭을 지켜냈다. 목숨을 걸고 미친 독라들의 머리를 수도 없이 부쉈고, 숨어든 도둑들의 실장취를 추적해 경비에게 알렸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썼지만, 주인은 ‘아직 네 존재가 불만인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장생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죽 시달렸으면 그렇겠는가, 하고.

주인은 가끔 장생을 관찰하다가 보온재에 보검을 휘두르거나, 빛나는 골판지를 두드렸다.
주인은 그것이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주인은 글을 쓰고 또 썼다.
장생의 눈엔 쓸모 있는 일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주인의 생각은 달랐다.
주인은 종종 글은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생이 실장석이기 때문에 주거에 거주해선 안된다는 조례를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무척 힘들고, 가능성도 적지만, 항상 시도해볼 가치는 있는 법이라고.

그 말이 장생의 심장을 울렸다. 그래서 장생은 그것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아아니 말이 심하십니다. 왜 짐승들이 똑똑하고 착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말을 해도 속은 다 분충입니다!
그렇게 선하고 좋은 새끼면, 벌써 실장인으로 우화라도 했겠지!]

분충은 무엇이고 실장인은 무엇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경장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짜증을 냈다.
[아,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합시다, 아저씨.]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네임벨에 적힌 연락처의 주인은 한 시간만에 경찰서로 왔다. 그리고 이 경위는 낯설지 않은 얼굴에 놀랐다. 실장석의 주인은 유명 작가라고 했다. 그리고 죽은 실장석은 다름아닌 ‘개정 애완동물조례 1호’ 실장석, 장생이었다.

[와, 저분이 ‘들실장놈’ 쓰신 분이에요?]
[막내야, 들리겠다. 다물자.]

작가는 말했다. 애초에 도리가 없었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었다고. 비를 맞아도 멍드는 몸뚱아리 때문에 천수를 누리기 힘든 슬픈 생물.
그 싹싹함에 정이 들어 키우기로 작정한 날부터, 본인도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그 결말이 이런 식이라니.



벌금형밖에 방법이 없다는 말에, 살해당한 실장석의 주인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러나 실장석을 죽인 남자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부당하다고 길길히 날뛰었다. 아무도 맞지 않을 주먹을 휘두르며.

[참피는 박멸을 해야 해! 지능이 있는 생물이 사람에 맞서면 얼마나 위험한 지 알아?
역사적으로 근본 잡힌 사람이 이래서 필요한 거야! 훈련을 받은 실장석은…]

그는 한참동안 떠들다가, 한국 말로는 논리적으로 말하기 힘들었는지 이내 외국어로 또 한참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골이 아파오기 시작한 이 경장은 한쪽 귀를 막고, 막내에게 물었다.
[뭐라는거야?]
[변호사 불러달랍니다.]

작가는 그 난동을 담담히 들어 넘겼다. 그리고 자칭 ‘학대파’가 지쳐 입을 다물었을 때, 비로소 조용히 말했다. 
형사님이 안쓰러운 사람이라고 설득하셨지만, 안되겠다고.
정해진 직업이 없다고 해서 합의를 해줄 순 없다고.

이 경장은 가슴이 답답했다. 
글러먹은 사람은 없다고 믿던 순진했던 시절처럼, 학대파라는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사람도 아닌 것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 그런 법률이 생겼다면, 필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버려진 구더기는 성체가 되었다. 재떨이는 식솔로 거듭났다.
처음엔 살아남기 위해, 그 다음엔 인정받기 위해, 주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지배나 번식과 같은 모든 생육의 본능을 거부했다. 스스로의 결단으로 한 눈을 뽑아버린 날, 주인은 정말 많이 놀라워했다.
정녕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장생의 업인 것 같다고 말하며.

남자가 가르쳐준 ‘글’은 장생을 진정 자유롭게 했다. 그로 인해 겸허를 깨달았다.
소통의 아름다움과 도덕의 아이러니, 그리고 하늘 너머의 무한한 세상의 경이를 배웠다.
장생은 종종 자신이 종의 한계를 넘을 가능성을 목격한 것 같다는 황홀함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이 메스를 멈추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칼날이 위석을 도려내기 직전까지, 장생은 다른 생각을 했다. 자신이 진정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허파는 정직하게 비명을 토했지만 머리 속으로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숫자 30씨는 2씨로도 3씨로도 5씨로도 만들 수 있다. 그것을 줄여서 2x3x5라고 쓴다.
우주는 넓다. 지구를 온 세상 실장석의 수만큼 담아도 인간의 입 속 빗물만큼도 안된다고 했다.
그것이 어쩌면 행복회로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순간, 장생에게 그것은 진실이 되었다.

장생은 감격했다. 일생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궁극적인 현실도피를, 마침내 위석이 허락했다. 
어느 실장석도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로. 마치, 불가능에 대한 기나긴 도전에 대한 보상처럼…
가르침을 받을 때의 숭고한 경이. 검은 공간 속에서, 장생은 그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장생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악의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이 순간, 위석이 지금 안락사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장생은 깨달음의 감정속에서 떠날 수 있게 해준 위석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직전, 장생은 담담히 생각했다.
그를 심판하겠다고 하던 자에 관하여.
손에 동족의 피와 똥이 묻은 사람, 동족의 냄새가 배어있던 사람, 어쩐지 동족과 닮은 사람.
자기혐오를 남에게 떠넘겨야 비로소 견딜 수 있는, 받아들임 없는 슬픈 지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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