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참피 vs wild -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참들이 구덩이로 떨어져내린다. 그 크기는 각양각색, 며칠만 지나면 성체로 자랄 것 같은 중실장부터 아직 점막도 다 못 벗긴 구더기까지 다양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앞머리가 뜯겨나가고 없다는 것. 그것이 구덩이에 떨어지게 된 놈들의 표식이다. 험난한 삶 속에서 뒷머리는 자주 뜯겨나간다. 나뭇가지에 걸려서, 다람쥐 같은 소동물과의 사투 와중에 뜯겨서,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는 고된 노동 끝에 머리칼이 삭아서 등등. 때문에 이 마을에서 뒷머리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으로 취급받아, 머리카락 없이 돌아다니는 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앞머리는, 안 그래도 짧은데다 땀과 떼를 흡수해 이마에 착 붙은 앞머리는 일부러 뜯어내려고 하지 않는 이상 뜯겨나갈 일이 거의 없다. 때문에 실장석들은 구덩이에 새로운 멤버를 투하하기 이전에 놈의 앞머리를 뜯어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구덩이 분충의 증표이기에.

구덩이로 떨어지게 되는 이유는 다양한다. 마마의 교육도 소용없는 분충이 솎아내기를 당했거나, 마을의 규칙에 따라 제한을 건 숫자 이상으로 자를 낳은 친실장이 초과해서 낳은 자들을 넘기거나, 자신이 배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사고를 쳤거나, 아무튼 마을에 해를 끼치거나 끼칠 위험이 있는 놈들은 대부분 구덩이에 떨어진다. 흙먼지와 운치로 범벅이 된 구덩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떨어진 다음에야 이 분충들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다. 마마의 뱃속에 있을 때 들은 태교의 노래에서부터 들어온 구덩이, 이제 자신이 그 노래 속 분충이 된 것이다.

앞머리를 빼앗기고 구덩이로 던져진 분충들은 크게 두가지 양상을 보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멍을 때리거나, 구덩이 분충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애써 부정하며 발악을 하거나. 어느쪽이든 구덩이 안에서 대기하던 관리실장들의 손을 벗어나진 못한다. 다부진 체격에 이런 일에는 이미 이골이 난 전문가답게 관리실장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신참들의 목에 하나씩 밧줄을 감는다. 밧줄 한쪽 끄트머리부터 한 놈씩 묶어, 마치 굴비를 묶듯 한 밧줄에 여러 마리를 묶어놓으면 관리실장들의 일이 끝난다. 옷을 찢어버린다거나, 머리카락을 뜯어버린다거나하는 일은 없다. 마을의 규칙은 관리실장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구덩이 분충들을 괴롭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구덩이속 불결한 환경에 행여 옷이 상할까봐 벗어놓고 내려온 관리실장과, 앞머리를 제외하면 옷도 머리도 멀쩡한 구덩이 분충들의 모습을 비교하자면 오히려 주종이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구덩이 분충들도 이 사실을 깨닫고 머리카락도 옷도 없는 관리실장을 비웃곤 한다. 더럽고 비루한 구덩이 생활에서 스트레스 해소라곤 눈앞의 독라를 비웃고 욕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웃음의 강도는 강해져 거의 악을 쓰듯 관리실장들에게 욕을 퍼붓곤 하지만 관리실장은 아무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야생에서 목소리가 큰 놈은 언제나 약자다. 울부짖고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써봤자,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숨기려는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관리실장은 이 점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목이 밧줄에 묶여 다른 구덩이 분충들과 행동을 같이하게 된 분충들은, 의외로 불편없는 삶을 살게 된다. 먹이는 운치를 절반씩 섞어주긴 하지만 어쨌든 마을의 실장들이 먹는 음식을 주고, 관리실장들도 분충들이 무엇을 하든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관리실장들이 관여하는 경우는 두 가지, 분충들이 서로 잡아먹으려 들거나 목에 묶인 밧줄에 손을 가져다대는 경우다. 후자의 경우 특히 관리실장들은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 구덩이 분충들은 아예 목 위로 손을 올릴 수조차 없다. 음식도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입으로만 먹어야 하며, 머리가 간지럽다던가하는 이유로 손을 머리에 올리고 싶은 분충들은 흠씬 두들겨 맞을 각오를 먼저 해야 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규칙만 지킨다면 관리실장의 괴롭힘도, 구덩이로 떨어지기 전 감내해야 했던 짜증나는 교육이라던지 노동도 없기 때문에, 구덩이로 떨어진 직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난동을 부리던 분충들도 곧 이 생활에 적응하여 오히려 구덩이 밖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실장석들을 비웃으며 피둥피둥 살을 찌워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을의 실장석들이 바보 멍청이들이라서 분충들을 구덩이에 몰아놓고 호의호식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천상 호구라서 머리도 옷도 빼앗지 않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여 키우는 것도 아니다. 이 실장 마을은 인간과의 접점은 거의 없지만, 인간에게 매우 친숙한 개념은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축이다.

나무구렁네 차녀가 어미를 도와 보존식을 모으다가 산비탈에서 굴렀다. 다행히 큰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그 와중에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험한 산지를 오고가야하는 실장석에게 신발은 매우 귀중한 자산이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목놓아 울부짖는 차녀를 달래며 친실장은 구덩이로 간다. 사정을 들은 관리실장은 곧 차녀의 남은 신발 한 짝을 들고 구덩이로 내려간다. 방금 밥을 먹어치우고 제멋대로 드러누워 빈둥거리는 구덩이 분충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관리실장은 차녀의 신발을 분충들의 신발에 일일히 대본다. 이윽고 사이즈가 맞는 신발을 발견한다. 신발의 주인은 자신의 친실장이 애써 모은 보존식을 몰래 훔쳐먹다 걸려 구덩이로 떨어진 자실장. 구덩이에 떨어질 때만 하더라도 거의 엄지 수준의 작은 분충이었던 녀석은 살만한 구덩이 환경에서 피둥피둥 살을 지워 거의 두 배 가까이 커졌다. 달리 말하자면, 나무구렁네 차녀만큼 커졌다. 관리실장은 곧 녀석의 신발 한 짝을 벗겨낸다. 난데없이 자신의 신발을 빼앗아가는 관리실장의 모습에 깜짝 놀라 분충이 달려들지만, 곧 관리실장의 몽둥이를 맞고 나가떨어진다. 다른 쪽 실발은 남겨놓는다.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구덩이를 올라온 관리실장은 차녀의 원래 신발 한짝과 분충에게서 뺏어온 신발 한짝, 온전한 한 켤레의 신발을 차녀에게 내민다. 울음을 그치고 신발을 조심스럽게 신어본 차녀는 신발이 발에 맞음을 깨닫고는 언제 울었냐는듯 웃는다. 고맙다고 거푸 인사를 하는 차녀와 오늘 주워온 나무열매로 사례를 하는 친실장, 그리고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라며 멋쩍게 웃는 관리실장, 매우 훈훈한 관경이다. 구덩이 밑에서 울부짖는 분충의 모습만 뺀다면.

구덩이로 떨어진 순간부터, 구덩이 분충의 모든 것,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은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귀속된다. 때문에 관리실장이 분충들에게 손을 함부로 대지 않는 것이다. 머리카락도, 신발도, 옷도 모두 쓸모가 있다. 옷과 신발은 나무구렁네 차녀의 경우처럼 옷이나 신발을 잃은 실장석을 위해서, 머리카락은 보온재로 쓰거나 지금 분충의 목에 묶여있는 바로 그 밧줄을 꼬기 위해서.  하지만 구덩이로 떨어트리는 즉시 바로바로 벗겨버리면 적당한 사이즈의 물건을 얻기가 어렵다. 때문에 그것들은 온전하게 분충의 몸에 남겨놓는다. 그것이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분충과 같이 커지도록. 그리고 그때그때 필요한 사이즈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분충에게서 그것을 하나씩 빼앗아간다. 처음엔 신발 한짝, 다음엔 옷, 그 다음엔 머리카락, 또 그 다음엔 좀 더 커진 나머지 신발 한짝, 하나씩 빼앗겨 어느새 독라가 될 때까지. 빼앗겨가는 순서는 구덩이 바깥의 사정에 따라 무작위지만 결말은 언제나 독라의 신세다. 그리고 독라가 되면, 더이상 빼앗을 수 있는 게 없다. 딱 하나, 몸뚱이를 제외하면 말이다. 가진 것을 빼앗긴 끝에 독라가 된 분충이 나오면, 그날은 실장마을의 잔치날이다. 놈을 구덩이 밖으로 끌어내 손질하여 마을의 일원들이 골고루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린 자실장들은 구덩이에서 피둥피둥하게 살찐 분충의 맛있는 고기를 뜯으며 친실장에게 저런 분충은 되지 말라는 설교를 듣게 된다. 물론 지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친실장들의 말을 경청하는 자실장들 중에서도 분명 구덩이로 떨어지는 놈이 나올 것이다. 

구덩이 한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분충들이 또 싸우나 싶어 달려간 관리실장들의 눈에 성체로 자라나 데스데스 울음소리를 내는 분충이 들어온다. 놀랍게도 놈은 머리카락, 옷, 신발 어느 것 하나 빼앗기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필요할 때는 다른 분충이 먼저 잡혀서, 옷이나 신발이 필요할 때는 그 때마다 절묘하게 사이즈가 안 맞아서 용케 아무것도 빼앗기는 일 없이 성체까지 성장한 것이다. 구덩이를 관리하다보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관리실장은 잠깐 서로를 쳐다보다가 곧 성체 분충에게 다가간다. 머리카락과 옷 모두 성하게 성체까지 자랐으니 이제 자신은 구덩이 밖의 세레브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며 짖어대는 분충의 머리통을 관리실장이 단번에 깨부순다. 성체로 자라난 이상, 머리카락도 옷도 신발도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계속 밥을 먹이며 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분충의 소유물은 곧장 벗겨내 마을의 공동 창고로 향하고, 머리통이 부숴진 채 쓰러진 몸뚱이는 또 한 번 마을의 모든 실장석들의 입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구덩이로 내려가는 건 쉽지만, 올라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댓글 1개:

무분별한 악플과 찐따 댓글은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