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고문하기를 즐기며, 코즈믹 호러를 즐기는 변태들에게 알맞은 선물이 문득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TRPG로 실장석의 삶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보드 게임으로, 보드 게임임에도 미성년자는 구매할 수 없다는 특징으로 매니악한 인기를 끌었다.
의외로 실장석이라면 죽(이)고 못 사는 학대파들은 이 게임을 즐기지 못했는데, 학대파들은 학대와 고문을 즐겼으나 피학에는 약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실장석의 생태를 상세히 구현했다는 문구만 보고 애호파들이 자주 구매해가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게임을 즐기는 부류는 실험파들로, 대개 자신이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플레이하는 게임을 관음하는 것을 즐겼다.
대부분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꺼렸으나,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즐겼다.
"그래서 꽤 본격적으로 즐겨본 사람들이 없다는 거지."
"그렇다고 굳이 이 지저분한 생명체에 감정을 이입해야 되는 거야?"
"쓰읍, 구경거리라고 해. 이게 꽤 돈이 된다잖냐."
여기, 스스로 구경거리가 되어 구경값을 받으려고 자처하는 네 청년이 있다. 각각 A, B, C, D라고 하며, TRPG는 잘 모르지만 어렸을 적 공책 RPG를 즐겨본 적 있는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아들이다. A, B, C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에 게임 세트를 준비하고, 방송 송출 및 카메라 조정을 맡은 D는 묵묵히 방송 장비를 세팅하고 있다.
"요새 이런 걸 즐기는 사람들은, 변태라고. 알아? 보통은 온라인 게임에 돈을 쓰거나 하는 작자들을 좋아하지, 이런 보드 게임이나 하는 방송은 보지도 않는다니까?"
계속해서 투덜대는 B는 콧노래를 부르며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A를 노려보았다. A는 그런 B의 눈길을 느꼈다. 게임 세트에 동봉된 설명서를 힐끗 읽던 C가 B의 투덜거림에 대답한다.
"그래서 가치가 있는 거라니까. 매니아 층을 노리는 거고, 이런 매니아 층은 자신만의 취미에 수 천만원 쯤은 꼬라박을 만큼 돈이 썩어문드러지게 많단 말이지."
"그래서 그 돈이 우리한테 오겠냐고?"
"해 봐야 알지, 거 새끼 참. 어차피 할 것도 없고 알바도 없으면서 궁시렁궁시렁대기는."
C의 말에 A가 덧붙인다.
"변태들이라니까, 이런 방송 보는 놈들은.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끝이야. 나만 믿으라니까?"
"아, 씨발. 모르겠다 그냥."
"B 이 새끼, 그냥 해. 어차피 니가 제일 즐길지도 모르잖냐."
그렇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A, B, C 사이에 나직한 중저음이 끼어든다. D의 목소리였다.
"방송 세팅은 끝났으니까 일단 규칙이나 세트라도 다시 한번 확인해보지 그러냐."
"반박할 수가 없네."
그리하여, 네 명의 청년이 테이블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게 되었다.
<짓소세키 ~ 야생에서 살아남아 대대손손 번영하라 ~>
이 게임은 기본적인 TRPG의 룰을 적용받으며, 간단한 플레이 방식으로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습니다. 야생의 독라 저실장부터, 부유한 가정의 세레브한 사육실장까지 모두 체험할 수 있는 <짓소세키>!
※ 가학적인 묘사가 등장하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실장석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플레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게임의 마스터를 맡게 된 D입니다."
"닥치고 빨리 해."
"시청자들에게는 공손하게 나가야 댄디해 보이지. 아, 몰라..."
방송 장비를 체크하던 D는 어느새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채 세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D의 손에는 세 개의 주사위가 들어 있었고, 세 사람 앞에는 상세한 내용을 기입할 수 있는 용지가 놓여 있다.
"아무튼,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태어날 실장을 고르는 단계지. 단순히, 굴리는 주사위 눈금으로 인생 첫 스타트가 정해진다고 보면 돼."
"흠..."
B는 자기 앞에 놓인 용지 뒤에 그려진 그림 하나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야! 이게 뭐야! 씨팔, 이걸 게임이라고 만들어놨냐?"
B의 욕설에 A와 C도 황급히 뒷장을 확인해본다. 뒷장에 있는 것은 단순한 막대 그래프 모양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 위에는 눈금이 그려져 있는데, 1부터 20까지의 눈금이 마치 메스 실린더처럼 새겨져 있다.
눈금 1부터 눈금 14까지는 "야생", 14부터 17까지는 "공장", 18부터 19까지는 "산", 20은 "사육"이라는 말만이 적혀 있다.
"잘 봤네. 20면체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수에 따라 출신 성분이 정해지는 거야."
"지랄. 말도 안돼. 야생일 확률이 70%, 사육일 확률은 5%라고?"
"말도 안 되지. 이렇게 후한 확률일 리 없으니까."
D는 살짝 불만스런 표정으로 테이블 중앙에 D20을 가져다 두었다.
"일단, 한 번 굴려봐. A부터."
"흠..."
살짝 긴가민가하던 A는 테이블 위에서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D20을 손에 쥐고는 가볍게 테이블 위로 던졌다. 톡, 탁, 데구르, 구르던 D20은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1.
"아!!"
"A는 더러운 야생실장 확정이구요, 다음은..."
"아, 난 마지막에 할래."
질렸다는 표정인 B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차례를 C에게 넘겼다. 별 감흥없는 듯, C는 무심하게 주사위를 굴린다. D20도 심심하게 굴러가는 듯 하다.
7.
"...아."
"C도 미개한 야생실장이고. 이제 B."
"하, 씨발."
욕설과 함께 B가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는 이리 저리 흔들리며 구르는 듯 하더니, 문득 한 구석에서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20.
"...어?"
"아, 젠장."
칫 하는 D의 혀 차는 소리와 함께, B의 굳었던 얼굴 위에 천천히 웃음이 번져나갔다. 순전히 행복해서가 아닌,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이 웃음은, B가 두 사람을 농락할 여지를 주는 데 충분했다.
"...아무튼, 이렇게 정해졌습니다. A, 야생. C, 야생. 그리고 B... 사육. 그리고 정해진 숫자에 따라 실장석의 형태까지 정해지게 됩니다. 음... 1, 3, 5, 8, 16이 저실장, 2, 7, 18, 20이 자실장, 그리고 나머지는 성체실장인데..."
"씨발, 내가 야생 저실장이라고? 좆됐네 아주 그냥."
"난 야생 자실장이라고..."
"난 사육 자실장인데! 병신들아."
세 사람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는 방 바깥으로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 일단은 A부터 시작합니다. A는 야생 저실장이지만, 삶은 형편에 맞게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삶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면, 자신이 삶에 맞추는 수밖에요.
A는 게임 마스터 D의 말을 곱씹으며 8면체 주사위를 굴렸다. 이 주사위의 눈에 따라 야생 저실장인 A가 태어날 곳을 정해지기 때문이다. 8면체 주사위는 삐그덕대며 굴러가더니, 테이블 위에 펼쳐진 게임 내의 지도 한 변두리에서 멈췄다.
4.
- 아, 아쉽게도 4! 당신은 자판기로 전락한 어미에게서 태어난 수많은 저실장 중 한 마리입니다. 마침 어미를 사냥한 실장석이 배가 불렀던 탓에 운치굴에 처박히고 마는군요.
"너무 불공평하잖아."
"억울하면 사육실장으로 태어나든가."
주사위 운이 너무 구린 A는 결국 불만을 토로하고 말지만, 아까 전까지만해도 투덜거렸던 B가 만면에 웃음을 보이며 말허리를 똑 잘라먹는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기로 한 A는 가만히 D의 묘사를 경청했다.
- 당신이 눈을 뜨자, 어둑어둑한 공동이 보입니다. 빛이 거의 새어들지 않아 내부가 거의 보이지는 않지만, 심한 악취가 온 데에 진동하고, 주변에 찐득하게 들러붙는 혐오스러운 촉감이 온 몸에 엄습함을 느낍니다.
당신은 사지가 거의 퇴화한 저실장으로, 이 불결한 곳을 온 몸으로 기어다녀야 하며, 다른 실장석들의 배변을 먹어치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목적은 그저 살을 불려 운치굴의 주인에게 먹히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부터 여러 행동을 취할 수 있어. 뭐... 이동한다던가, 무언가를 살펴본다던가. 게임 마스터가 개입하는 건 금기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행동을 추천한다면... 일단 이 동굴 내부를 살펴보는 일이겠지."
"너무 일리가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이 똥내나는 운치굴을 온 몸으로 뒹굴어야 하다니."
- 당신은 아등바등 기어가며 눈이 아닌 촉감으로 이 동굴을 살펴봅니다. 천천히 기어가며 판단한 바, 한 구석에는 엄청난 양의 운치가 쌓여있고, 그 위로는 살짝 빛이 새어드는 천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운치 옆에는 자신의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실장이므로 저 저실장들이 자신의 혈육임을 모릅니다.
- 여러 단서는 이 곳이 운치굴임을 알려주고 있지만, 저실장인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친구'에게 다가갑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어?"
"고찰, 기만, 설득, 전투... 등등이 있긴 한데, 저실장은 이 선택지들을 선택할 수 없어. 죄다 프니프니 로 도배되어 있거든."
"프니프니 해달라는 거냐? 이 게임 짱이다."
"그것보다, 여기를 살펴본다는 선택으로 포만도가 줄었으니 알아둬."
"뭐? 포만도? 그건 또 뭐야."
"뭐겠냐. 네가 시트지를 확인해보면 되겠네."
D의 말에 A는 곧장 시트지를 확인한다. 시트지에는 저실장 용 테이블이 있었으며, 이 곳에는 저실장의 상태를 체크하는 컨디션 항목이 있었다.
다른 실장석도 마찬가지로 이 게임에서는 실장석들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포만도가 필요하다. 이 포만도는 무언가를 섭취하여 채울 수 있는데, 크기와 취할 행동에 따라 소비되는 포만도가 결정된다. 그리고 이 포만도가 0이 될 경우, 체력이 1턴마다 줄어들게 된다.
저실장의 현재 체력은 2, 최대 포만도는 6, 그리고 이번 행동으로 소모된 포만도는...
"자, 육면체 주사위를 굴려봐."
A는 한숨을 쉬며 D6을 던졌다. D6은 힘없이 굴러갔다.
5.
- 아... 이제 포만도가 1밖에 안 남았군요. 저실장은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낍니다!
"아니 씨발, 이런 게 어딨냐고...!"
"그러니까, 꼬우면 사육실장으로 태어났어야지. 병-신."
계속해서 깐죽대는 B를 무시하고, D는 말을 이어간다.
- 이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딱 하나입니다. '먹기'. 이 곳은 운치굴이고, 저실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무심하게 쳐다보는 C, 히죽히죽 웃으며 파멸을 바라는 B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 A. 이대로 살 수는 없다, 나는 무조건 올라갈 것이다, 삶에 순응하지는 않겠노라 결심한 A는, D20을 쥐며 말했다.
"형제 자매들을 먹겠어."
- 어째서?
"동족을 사냥하는 건 먹이가 부족할 때 종종 벌어지지만, 배를 채울 정도로 사냥한다는 건 동족만을 먹는 실장석일 확률이 높아. 그리고 그렇게 사냥할 수 있으면서도 운치굴에 저실장을 넣는다는 건, 적어도 지금이 겨울은 아니라는 얘기가 되지.
동족 사냥이 가장 많이 벌어지는 때는 봄이니, 만약 봄이라면 내가 잡아먹힐 가능성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극히 적을 거다.
내가 다른 저실장들을 잡아먹으면, 운치는 저 빛이 새어나오는 구멍까지 닿을테고, 그렇게 되면 난 이 운치굴에서 탈출할 수 있어."
- 삶이 그렇게 순탄히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말한 적 있는데... 자신의 추리를 믿으시면 손에 쥔 주사위를 던지세요.
10 이하는 운치를 먹고, 11 이상은 형제 자매를 잡아먹는 걸로 하겠습니다. 대신, 10 이하가 나오게 되면, 평생 운치만 먹는 걸로 선택지를 고정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겨우 한 마리의 저실장, A.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다시 지도 위로 주사위를 던진다.
톡.
탁.
데구르.
D20은 테이블 위를 다시금 구르며 선택을 강요한다.
- ...A가 결정한 운명은 나중에 찬찬히 알아보도록 하고, 이제 슬슬 다른 실장석들도 알아봐야 하겠죠.
D의 눈짓에 C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고 주사위를 던졌다. 과연 어떤 야생 자실장으로 태어나게 될까, 주사위는 그것을 결정할 것이다.
7.
- 야생 자실장에 7... 다행히 들실장치고는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겠군요. 양충도 아니지만 분충도 아닌 어미 아래에서 차녀로 태어납니다.
친실장은 아는 것도 많고 생존을 위해 타협할 줄 아는, 의외로 현명한 개체이지만, 이것이 자식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친실장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지 않는 한, B는 어미에게서 생존 기술을 배워 이듬해 봄에 출가할 수 있겠지요.
주사위 눈에 의해 태어나자마자 어미는 자판기로 전락해 목숨을 잃고 자신은 운치굴에 처박힌 신세가 되어버린 A가 못마땅한 눈으로 C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테이블에 놓인 지도 상으로만 봐도 같은 들실장임에도 큰 차이가 났다.
A와는 달리, C는 골판지 하우스에서 시작하니까.
- A가 추측한대로 현재는 봄입니다. 화분(花粉)이 가라앉은 나른한 봄날이며, C는 장녀의 재촉을 받으며 친실장의 뒤를 따릅니다.
참고로 친실장은 장녀와 차녀 이외의 모든 자들을 습격으로 잃었습니다.
- 친실장이 말합니다. "데에, 장녀와 차녀는 잘 듣는데스. 오늘같은 따스한 봄날에는 출가하는 토모상들이 많은데스. 하지만 그런 날일수록 방심을 하게 마련이고, 방심한 틈을 타 사냥을 시작하는 무리가 있는데스."
- "그 무리는 이런 봄날에만 토모상과 오마에타치의 토모타치를 모조리 잡아가는데스. 대부분은 죽이는 데스가, 살려놓는 경우도 있는데스."
- "살아있는 토모상들은 자판기가 되어 죽을 때까지 우지쨩들을 낳는데스."
이 때, 장녀가 말합니다. "마마, 자판기가 무엇인테치?"
친실장이 대답합니다. "죽는 것 다음으로 피해야 하는 것인데스. 와타시가 겪기는 싫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토모상이나 오바상이 겪으면 매우 행복한 일인데스."
- "데슷, 아무튼 자들은 이제부터 잘 듣는데스. 이 집 주변에는 운치를 누는 구멍이 있는데스." 친실장은 그렇게 말하며 집 주변 나뭇잎으로 덮어놓은 곳을 가리킵니다.
"저 나뭇잎 아래에 구멍이 있는데, 잘 조준해서 싸는데스. 뒷처리는 나뭇잎으로 닦으면 되는데스."
"...이거 너무 더러운데 그냥 스킵하면 안되냐? 내가 어째서 이 똥벌레들 똥싸는 것까지 배워야 하는 거냐고."
"그러니까 리얼이지. 누구는 살겠다고 그런 것까지 먹어치우고 있는데... 풋."
얼굴을 구긴 C와, 묘하게 신이 난 B. D 역시 이 부분이 조금 역하다고 생각한 탓인지, 유야무야 넘어간다.
"대충 요약하면, 이런 거지. 넌 친실장의 자식으로써 친실장의 가르침을 받아야 돼. 물론 네가 기억하는 게 아니라, 교육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주사위를 굴려서 망각 곡선을 유지해야 하지."
"망각 곡선? 주기적으로 외우지 않으면 다 까먹는다는 그거?"
"그렇지. 아, 그런데 처음에는 주사위 굴림이 꽤 후해. 음...
친실장의 가르침은 총 21단계인데, 각 단계에 걸맞는 주사위 눈이 나와야 가르침을 받았다고 인정이 돼. 10번째 가르침이라면 적어도 10 이상은 나와야 그전까지 배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치는 셈이지. 그보다 작은 수가 나오면, 9번째 가르침을 잊는 식이고."
D의 설명에 잠시 손가락을 구부리며 손계산을 하던 C는, D 앞에 놓인 주사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D20만 굴리는 건 아닐테고."
"D20만 굴리는 건 아니지. D8도 같이 굴려."
"후... 젠장, 뭔 놈의 계산이 이렇게 복잡해? 보드 게임 주제에."
"원래 TRPG라는 게 그렇지."
D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게임을 재개했다.
- 실장석의 가르침은 생략하도록 하고, 대충 이런 걸 배웠다는 느낌으로 갑시다. 이렇게 친실장의 가르침이 끝나면 나머지 시간동안은 자유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신은 너무 어린 자실장이기 때문에,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다녀오는 동안에는 둥지 바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됩니다.
- 장녀 자실장과 놀기, 혼자 놀기, 낮잠 자기 등... 성장기인 자실장은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스텟 상승을 꾀할 수도 있습니다.
- 체력, 지력, 지혜, 분충도. 이 네 가지 스텟은 어떤 실장석으로 자라날 지 결정하는 척도가 되며, 이 중 체력 스텟이 30을 달성하게 되면 자실장은 성체실장으로 자라납니다.
- 지력은 거의 오르지 않는 스텟이지만, 먹는 먹이에 따라 지력이 올라갈 여지가 있습니다.
- 지혜는 다른 스텟과 다르게 고정되어 있으며, 지혜 스텟은 극히 한정된 조건에서 상승합니다.
- 분충도는 네 가지 스텟 중에서 가장 오르기 쉬운 스텟입니다. 시도때도 없이 상승하며, 절대로 하락하지 않습니다.
- 저실장은 모든 스텟이 2로 고정되어 있고, 자실장은 체력 10, 지력 5, 지혜 5, 분충도 3으로 시작합니다. 최대 포만도는 20이며, 취하는 행동에 따라 포만도를 소모합니다.
- 설명이 너무 길었는데, 결론은 이겁니다. 현실의 실장석과 마찬가지로 지력이나 지혜 따위의 스텟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들실장에게 중요한 건 체력이니까요. 허약한 자실장 따위는 친실장에게 비상식량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체력을 높여 출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흠... 뭐, 나쁘지는 않네. 클리어 조건이 명확하니 그나마 좀 나아."
- 아무튼, 친실장의 첫 번째 가르침이 끝났으니 취할 행동을 선택해주세요.
"뭐, 딱히 할 일이 없잖아. 별 수 없이 장녀랑 놀아야지."
- 당신은 장녀에게 다가가 치근댑니다. "오네챠, 아타치랑 노는테치." 장녀는 웃으며 골판지 하우스 구석에 놓인 공을 가지고 옵니다.
"이걸 던지면 이모토챠는 그걸 받고, 다시 아타치에게 던지면 되는 테치." 장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토도도 달려가 당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섭니다.
장녀가 공을 던지면, 당신은 줍고. 당신이 공을 던지면, 장녀는 공을 줍고. 무미건조한 놀이이지만, 장녀와 당신은 매우 즐겁게 놀았습니다.
"...확실히 좀 무미건조하긴하네. 들실장이라는 놈들은 죄다 이렇게 사는 거냐?"
지루해하는 C의 말에, A가 팔짱을 끼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20% 정도만이야. 모든 실장석 중 99%는 야생실장이고, 그런 야생실장 중 20%만이 이렇게 둥지를 꾸리며 살아가지."
"그럼 나머지 80%는?"
"날 보면 모르겠냐?"
"아."
순식간에 납득한 C는 D를 바라보았다. 언제쯤 자신의 차례가 끝나냐는 무언의 신호를 던진 것이다.
- 어미가 돌아왔고, 다행히 먹을만한 것 몇 가지를 추려내어 가져왔습니다. 장녀는 장어 소스가 묻은 밥풀 몇 알을, 당신은 타르타르 소스가 묻은 생양파를 받았습니다. 생양파는 조금 맵긴해도 타르타르 소스의 시큰한 맛이 그 매운맛을 중화시키며 단맛을 극대화합니다.
- 당신의 체력과 지력이 각각 1씩 상승합니다.
"음, 이렇게 약 스무 번 정도를 더 해야 독립한다 이거지? 참 대작이야, 이 게임. 이런 부분에선 존나 디테일해."
- 친실장이 말합니다. "이제 우마우마도 먹었으니 슬슬 코-하는데스." 장녀와 당신은 그 말에 따라 잘 준비를 하고, 잠에 듭니다.
"...이제 끝이야?"
기다리느라 좀이 쑤신 B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D가 고개를 끄덕이자, C는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폈다.
아까 전 A의 플레이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자신의 삶은 무언가 평이하고 목가적이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C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찰나, 아까 전 D가 한 나레이션을 떠올렸다.
"아까, 체력이 1 올랐댔잖냐."
"어."
"음... 혹시 자고 있을 때 자실장만 몰래 깨어나서 행동을 취할 수는 없나? 그런 건 없어?"
"잠, 시마...안."
C의 질문에 GM용 시트지를 확인하던 D는 고개를 젓는다.
"딱히 그런 제한은 없어. 대신 이건 체력 제한과 연관되는 요소니까 주사위 굴림으로 결정하자. 음, 체력이 1 증가했으니 현재 체력이."
"11."
"그럼 D20을 세 번 굴려서 최소 한 번 이상 11 이상의 눈이 나오면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줄게."
D는 검은 D20을 C에게 넘겨주고는, 손 안에서 주사위를 흔들고 있는 C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밤중에 뭐하려고."
"그냥, 뭐..."
C의 손을 떠난 주사위가 테이블을 향해 낙하한다.
"내가 장녀가 되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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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가 나왔으므로, 당신은 형제 자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몸부림을 칩니다. 무언가 그리운 향취를 뿜는 그것들은 이미 반쯤은 악취를 내뿜는 진득한 덩어리이지만, 당신은 개의치않고 먹어치웁니다.
그것들은 반항을 할 수도 있고, 시끄러운 목청으로 울어댈 수도 있으나, 그저 커다란 눈망울과 어두운 곳에서 크게 열린 동공을 당신에게 비추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운명은 결국 이렇게 될 것이라며, 먹혀서 끝나는 것이 종결이라면, 차라리 혈육에게 먹히는 것을 선택하는 것만이라도 유일한 자신의 선택지였을지도 모릅니다.
- 당신은 형제 자매의 살을 파먹고 포만도를 최대로 채웁니다. 혈육의 정으로 체력이 1 증가합니다.
A는 어두운 운치굴 속에서 형형한 눈빛을 띄우며 잘근잘근 살을 씹었다. 운치보다는 덜 역하고, 그나마 맛이 좋은 것이, 입맛에 딱 맞았던 모양이다. 이제부터 A는 형제 자매와 운치를 파먹으며 체력을 올리고, 언젠가 찾아올 보름의 날에 자실장으로 우화하기 위해 이 운치굴을 탈출해야 한다.
-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은 프니프니를 받고 싶어합니다. 저실장은 먹이를 섭취한 뒤, 프니프니를 받지 않으면 체력이 1 줄어듭니다.
"아니, 그러면 기껏 올린 체력이 답이 없어지잖아."
"결국 저실장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거겠지."
A의 한탄에 D가 가볍게 응수한다.
애초 저실장이란 소화기관이 미숙하여 몸을 쓰다듬는 것으로 저작작용과 음식물의 연동작용을 함께 처리하는 미숙아이므로. 성장하려면 극진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조차 없을 경우 저실장은 결코 우화할 수 없다.
- 그렇지만, 이건 게임이니 조금 형편좋게 나갈 수 있어. 운치굴에 엄지실장이 있다면 프니프니를 받고 체력을 온존할 수도 있고, 조금 단단한 흙더미에 몸을 비벼서 스스로 프니프니를 할 수도 있지.
"둘의 다른 점은?"
- 전자는 주사위 굴림없이 온존이 가능하다는 거야. 후자는 주사위 굴림으로 온존을 결정하는 거고... 뭐, 후자밖에 선택지가 없긴 하네.
D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블 위의 지도를 바라본다. 공원의 전경이 그려진 지도, 구석구석 퍼져있는 실장석 둥지들 중 하나. 그 아래에 처박힌 A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 그래도, 꽤 흥미로운 추리였으므로 재량껏 특혜를 드리겠습니다.
섭취효율이 나쁜 실장석이 그나마 소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동족상잔. 꽤 잔혹한 모습이긴 하지만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않는 저실장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당신은 몸이 굳건해지는 것을 느꼈고, 프니프니를 얼마간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간 버텨?"
"내성."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는 C가 툭 던지듯 말한다. 잠시 음료수 좀 가지러 간다, 한 마디를 덧붙이고는 냉장고로 걸어간다.
"흠, 그래서 결국 운치굴에 처박힌 채로 다른 저실장들을 잡아먹으며 살겠다는 말이구나. 비참하기 짝이 없네."
B는 낄낄대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하는 A를 비웃었다.
"이건 게임이니까. 어떻게든 이겨야지 않겠냐."
"근데 이건 빼박 회생불가라니까?"
"넌 대학교 다닐 때 시험칠 때마다 뭐라 말했는지 기억 안나냐?"
공부 조또 안했는데, 일단 시험지에 장문의 편지 정도는 써뒀지.
뭐? 에이, 어떻게든 점수는 잘 받아야 되지 않겠냐.
자신의 입버릇을 떠올린 B는 잠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C가 가져온 음료수 한 캔을 따고는 입을 씻었다.
- 저실장과 자실장은 특정 이벤트가 있기 전까지는 이렇게 반복적인 삶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저실장의 우화 이벤트는 [체력 5 이상], [생후 5주 이상], [만월을 눈으로 목격]하는 것으로 발동하며, 자실장은 돌발 이벤트에 따라 스텟의 변동이 발생합니다.
- 운치굴의 주인인 성체실장은 봄철을 맞아 풍족한 사냥이 가능하므로 운치굴 속의 저실장을 확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겨울이 가까워지면 저실장을 확인할테지요. 저실장의 목표는 추워지기 전까지 운치굴을 탈출하여 성체실장으로 거듭나는 각입니다.
- 둥지 속의 자실장은 이미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다만 [스텟 변동]은 상승뿐만 아니라 하락도 존재하므로, 체력이 낮아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음... 그럼..."
"A랑 C의 차례는 끝."
"오!"
심심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마시던 B가 자리에서 일어나 D의 손에 있는 주사위들을 냉큼 잡아채갔다. 하얀 D의 손에 살짝 발간 손자국이 남았다.
"그럼 이제 내 차례."
"...그렇지."
B를 흘겨보던 D는 잠시 손목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지금이 방송중임을 알아차렸다. 그래, 지금 송출중이었지. D는 잠시 쉬는 시간을 주고는 송출용 컴퓨터 앞에 앉아 시청자의 반응을 확인했다.
확인이 늦었지만, 현재 시청자의 수는 약 400명. 첫 방송임에도 이 정도의 시청자가 생겼다는 것은 좋은 징조임에 틀림없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D가 채팅 목록을 확인하자, 눈이 가늘어지며 살짝 휘었다.
수 십만원의 후원과 함께, 매니악한 변태들의 요구사항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사육 자실장에 대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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