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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문(実生門)



어느 날 해질녘의 일이다. 한 중실장이 공원 쉼터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지붕 밑에는 이 실장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군데군데 붉은 칠이 벗겨진 커다란 둥근 기둥에 귀뚜라미가 한 마리 앉아 있을 뿐이었다. 쉼터는 공원 중심 산책로에 있으니 만큼 이 실장석외에도 비를 피하고 있는 닝겐들도 있을 법하다. 그런데 이 실장석 외에는 아무도 없다.

왜냐 하면, 요 2∼3년 동안 닝겐의 도시에서는 홍수나 태풍, 방화나 강.절도 같은 사건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났었다. 그래서 도시의 피폐상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시가 그 모양이니, 공원의 쉼터 같은 것은 애당초 버려 둔 채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그렇게 황폐해진 것을 잘 됐다 하고는 길냥이나 족제비가 와서 살았고, 유기견들이 와서 살았다. 드디어 마침내는 처치곤란한 실장석의 시체를 가져와서 탁자 밑이나 자판기 뒤에 버리고 가는 습관까지 생겼다. 그래서 그 시체 썩는 냄새 탓에 이 쉼터 근처에는 실장석을 빼고는 닝겐이든, 길짐승이든 발도 들여놓지 않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중실장은 돌계단의 맨 윗단에, 많이 빨아서 색이 바랜 감녹색 실장복 차림으로 걸터앉아 비가 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는 앞에서 "중실장이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중실장은 비가 그쳐도 특별히 어떻게 하려는 목적도 없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물론 골판지집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 친실장의 집에서는 4∼5일 전에 쫓겨 났다. 앞에서도 쓴 것처럼, 당시 공원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 있었다. 지금 이 중실장을 오래도록 키우던 친실장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도 바로 이 피폐의 작은 여파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중실장이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기 보다 "비에 갇힌 중실장이 갈 곳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라고 하는 편이 적합하겠다.

그런데다 오늘의 날씨도 이 중실장의 감성에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오후 4시쯤을 지나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중실장은 무엇보다도 당장 내일 살아갈 일을 어떻게든 해 보려고 ― 말하자면 어찌 되지도 않을 것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더듬으며 아까부터 산책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무심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쉼터를 둘러싸고 멀리서 쏴-하며 소리를 몰아온다. 땅거미는 점차 하늘을 낮게 만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비스듬히 내민 지붕 끝이 묵직하고 어두컴컴한 구름을 떠받치고 있다.

되지도 않을 일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고 있을 틈이 없다. 가리고 있다가는 벤치 밑이나 나무 뿌리 위에서 굶어 죽을 뿐이다. 그러고는 저 탁자 아래로 버려지고 말 뿐이다.

가리지 않는다면 ― 중실장의 생각은 몇 번씩이나 똑같은 길을 배회한 끝에야 간신히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 '한다면'은 언제까지나 결국은 '한다면'이었다.

중실장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이 '한다면'의 결말을 짓기 위해 그 후에 당연히 올 '동족식 실장, 강도 실장이 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라는 현실을 긍정할 만한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중실장은 크게 재치기를 하고 나서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일어났다. 저녁 공기가 쌀쌀한 공원은 벌써 핫팩이 있었으면 할 정도로 추웠다. 바람은 저녁의 어둠과 함께 사정없이 불어 제낀다. 붉은 칠은 한 기둥에 앉아 있던 귀뚜라미도 이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중실장은 목을 움츠리면서 두건을 올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바람 걱정이 없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하룻밤 옹색하게나마 잘 수 있을 만한 곳이 있으면 거기서 밤을 지내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행히 고장난 자판기 뒷켠으로 통하는, 폭이 좁고 지저분한 틈이 눈에 띄었다. 그 뒤라면 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실장석의 시체뿐일 것이다. 그래서 중실장은 어제 줏은 나무젓가락토막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 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분인가 뒤의 일이다. 쉼터의 자판기 뒤로 통하는 폭이 좁은 틈의 중간쯤에서 한 중실장이 저실장처럼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이며 안쪽을 동태를 엿보고 있었다. 천장에서 비치는 불빛이 희미하게 그 중실장의 오른쪽 뺨을 적시고 있다. 중실장은 처음부터 이 뒤에 있는 것은 시체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두세 걸음 들어가 보니 뒤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비오는 밤에, 이 공원 쉼터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 실장석은 아니다.

중실장은 도마뱀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좁은 틈으로 맨 뒤까지 간신히 진입해 갔다. 그러고는 몸을 될 수 있는 대로 납작하게 하고서 목을 가능한 한 앞으로 내밀고 조심조심 자판기 뒤쪽을 들여다보았다.

보았더니, 자판기 뒤에는 소문에 들은 대로 몇 구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는데, 불빛이 미치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아서 수효가 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온갖 시체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은 모두, 그것이 전에는 살아 있던 실장석이었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썩어서 흐물거리고 있었다.

중실장은 그 시체들이 썩는 지독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코를 막는 것 조차 잊어버렸다. 어떤 강렬한 감정이 이 실장석의 후각을 거의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중실장의 눈은 그때 비로소 그 시체들 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자실장을 보았다. 더러운 초록색의 실장복을 입고, 키가 작고, 비쩍 마른, 새끼 원숭이 같은 자실장 이었다. 그 자실장은 그 시체들 중에서 하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긴 것을 보니 아마도 성체의 시체일 것이다.

중실장은 60퍼센트의 공포와 40퍼센트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잠시동안은 숨쉬는 일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자, 자실장은 지금까지 바라보고 있던 시체의 목에 양 손을 대더니, 그 긴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빠지는 것 같았다.

그 머리카락이 한 올씩 빠짐에 따라, 중실장의 마음에서는 공포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자실장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이 조금씩 발동하기 시작했다 ― 아니, '이 자실장에 대한' 이라고 하면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실장생의 온갖 부조리에 대한 반감이 1분마다 강도를 더해 가는 것이었다.

이때, 누군가가 이 중실장에게 아까 이 중실장이 생각하고 있던, 굶어 죽을 것이냐? 강도실장석이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새삼 들고 나온다면, 아마도 중실장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굶어 죽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중실장이 실장생의 부조리를 증오하는 마음은 맹렬하게 타올랐던 것이다.

물론 중실장은 왜 자실장이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합리적으로는, 그것을 선악의 어느 쪽으로 보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중실장으로서는 이 비오는 밤에 공원 쉼터에서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악이었다. 물론 중실장은 조금 전까지 자기가 강도가 될 생각이었다는 일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중실장은 양다리에 힘을 주어 갑자기 자판기 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이 뾰족하게 손질된 젓가락을 잡으며, 성큼성큼 자실장 앞으로 다가갔다. 자실장이 놀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실장은 중실장을 힐끗 보더니, 마치 고무총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튀어올랐다.

"어딜 가는 테스우!"

중실장은,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쩔쩔매고 도망치려는 자실장의 앞을 가로막고 이렇게 소리쳤다. 자실장는 그래도 중실장을 밀치고 나가려고 한다. 중실장은 또 그걸 가지 못하게 하려고 되민다. 두 실장석은 시체 사이에서 잠시 동안 말없이 맞붙었다. 그러나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중실장은 드디어 자실장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비틀어서 그 자리에 쓰러뜨렸다. 마치 닭다리처럼 뼈와 가죽뿐인 팔이었다.

"뭘 하고 있었던 테스? 말하는 테스. 말하지 않으면 이걸로..."

중실장은 자실장를 밀쳐 버리고는, 갑자기 나무젓가락 칼을 뽑아 그 눈앞에 들이대었다. 하지만 자실장은 잠자코 있었다. 양손을 와들와들 떨면서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눈알이 눈꺼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벙어리처럼 끈질기게 잠자코 있었다. 이를 보자 중실장은 이 자실장의 생사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의지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명백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 인식은 지금까지 험악하게 타오르던 증오의 마음을 어느 사이엔가 식혀 버렸다. 뒤에 남은 것은, 단지 어떤 일이 원만하게 성취되었을 때의 안도감과 만족감 뿐이었다. 그래서 중실장은 자실장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약간 누그러뜨리고 이렇게 말했다.

"와타시는 공원의 관리실장 따위가 아닌 테스. 그러니 오마에를 관리인에게 넘기거나 하겠다는 건 아닌 테스. 단지 이 시간에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그걸 말만 하며 되는 테스."

그러자 자실장은 부릅뜨고 있던 눈을 한층 크게 뜨고, 그 중실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꺼풀이 빨갛게 날카로운 눈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주름살로 거의 코와 하나가 된 입술을 무언가 씹고 있는 듯이 움직였다. 그때, 그 목구멍에서 까마귀가 우는 듯한 목소리가 테치-테치- 중실장의 귀에 전해져 왔다.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이불을 만들려고 했던 테치. 너무 추웠던 테치!"

중실장은 자실장의 대답이 의외로 평범한데에 실망했다. 그리고 실망과 동시에, 다시 조금 전의 증오가 차가운 모멸감과 함께 마음속으로 치밀어 왔다. 그러자 그런 기색이 상대방에게도 전해졌던 모양이다. 자실장은 한 손에 아직도 시체 머리에서 뽑은 긴 머리카락을 쥔 채 두꺼비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이런 말을 했다.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이 다소 나쁜 짓인지도 모르는 테치. 하지만 여기에 있는 시체들은 모두 그 정도는 당해도 싼 실장석들 뿐인 테치. 지금 내가 머리카락을 뽑은 오바상 같은 건... 지렁이 잘라서 말린 것을 말린 구더기짱이라고 하면서 팔러 다녔던 테치. 역병에 걸려서 죽지만 않았으면 지금도 팔러 다녔을 것인 테치. 나는 이 오바상이 한 짓을 나쁘다고 생각치 않는 테치. 안 그러면 굶어 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짓인 테치. 그러니까, 이 오바상도 아마 와타치를 너그럽게 보아 줄 것인 테치."

자실장는 대략 이런 의미의 말을 했다.

중실장은 냉담하게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중실장의 마음에는 어떤 용기가 솟아 올라왔다. 그것은 아까 이 중실장에게 결여되어 있던 용기였다. 그리고 또 아까 이 뒤로 들어와서 이 자실장을 붙잡을 때의 용기와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용기였다.

중실장은 굶어 죽을 것이냐 도둑이 될것이냐로 방황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다. 이제 굶어 죽는 것 따위는 의식 밖으로 한참 밀려나 있었다.

"사실인 테스?"

자실장의 말이 끝나자, 중실장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서더니, 갑자기 오른손으로 자실장의 목덜미를 움켜쥐면서 잡아먹을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와타시가 강도짓을 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는 테스? 와타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몸인 테스우!"

중실장은 재빨리 자실장의 옷을 벗겨 들었다. 그리고 발을 붙들고 늘어지려는 자실장를 거칠게 걷어차서 시체위에 쓰러뜨렸다. 자판기 앞까지는 겨우 다섯 발짝을 셀 정도다. 중실장은 빼앗아 든 실장복을 겨드랑이에 끼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판기 사이의 틈을 걸어 나갔다.

한동안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자실장이 시체 가운데서 그 발가벗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자실장는 중얼거리는 듯한,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불빛을 의지하여 자판기 앞까지 기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깥을 쳐다보았다. 밖에는 칠흑 같은 밤이 있을 뿐이었다.

중실장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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