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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공원: 익어버린 세계 (121.)

 

변화의 중대성을 깨달은 것은 오직 극소수 뿐이었다.


계절은 여름. 태양빛이 실장석의 오른 쪽 눈처럼 지구를 새빨갛게 달구는 시기, 찌는듯한 더위가 지구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인간들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나날. TV에서는 연일 폭염에 희생된 수백만 마리의 가축과 열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보도되고있다. 가장 인색한 자린고비도 부채를 내던지고 에어컨과 선풍기의 전원을 켜는 이상기후의 한복판에서 고통받는 것은 공원의 들실장도 예외가 아니다.

“이상한데스… 분명 이정도는 아니었던데스…”

공원 언저리, 나무그늘 밑에 위치한 한 골판지에서 나체인 실장석이 공허한 눈으로 중얼중얼 혼잣말을 되뇌고 있다. 실장석의 발치엔 마찬가지로 나체인 두 자실장이 신문지 위에 누워 혀를 쭉 내밀고 간신히 숨만 내쉬고있다. 

“테에에…”
“테휴우-...”

비록 꼬라지가 말이 아니라지만 친실장은 나름대로 공원에서 손에 꼽을만큼 애정 깊고 현명한 녀석. 몇 년이란 세월을 들실장으로 살아오며 여러 마리의 새끼들을 성체로 길러내 독립시키고 풍족한 세간살이를 갖춘 친실장은 그 실적만으로 공원의 들실장들에게 은근히 존경받아왔다. 

“장녀, 삼녀, 괜찮은데스? 마마를 향해 인사해보는데스.”

“테…”
“테후-...”

그런 친실장이었지만 작금의 더위엔 완전히 속수무책. 금지옥엽으로 키운 일곱 마리의 자들은 태풍과 장마가 끝난 후 찾아온 여름 무더위에 두 마리만을 남기고 모두 죽었다. 살아있는 두 마리도 아직 숨이 붙어있다 뿐이지 완전히 식욕을  잃어 제대로된 식사를 못하고 친실장이 꼭꼭 씹어서 흘려넣어주는 죽을 입에 머금다 토하기 일쑤. 이대로라면 두 자실장도 자매들의 뒤를 따라간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있었지만 단순한 실장석에 불과한 친실장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에 친실장은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지겨운 더위가 끝나고 선선한 계절이 오기만을 빌었다. 

“자들, 땀을 많이 흘려서 신문지가 축축해진데스. 마마가 옮겨줄테니 얌전히 하는데스요.”

“테…”
“테-...”

친실장은 드러누운 두 자실장을 조심스럽게 뒤집어 옆자리로 옮긴다. 한때 일곱 자매들이 누워있던 잠자리엔 썰렁한… 아니,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한 공기만이 남아 친실장의 가슴을 차갑게 도려낸다. 친실장은 뒤집어놓은 자실장들의 땀으로 번들번들한 등을 자실장들의 옷으로 부채질하며 조금은 더위가 물러가기를 바랐다. 

‘차라리, 닌겐상들에게 이 자들만이라도 부탁하는 편이 낫지 않은데스…’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친실장은 잘 사용하지 않아 녹슨 행복회로를 돌려본다. 인간의 집에서 시원한 목욕을 하며 맛읶는 간식을 배 커지게 먹는 자들과 자신의 모습은 상상만해도 달콤한 것. 하지만 곧 제정신이 돌아온 친실장은 말도 안되는 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해 두 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린다. 완전히 탈진해서 물먹은 걸레처럼 늘어진 자들을 데리고 불볕을 걸을만한 체력은 누구에게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시원한 계절이 올 때가 된다. 그같은 사실을 떠올리고 마음을 다시 다잡아보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친실장. 친실장의 얼굴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육수를 맞은 자들이 끄으응 신음소리를 낸다. 친실장은 자들의 등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깊게 한숨쉰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데스우…’ 




2
친실장이 다른 들실장처럼 다가올 더위를 대비하지 않고 넋놓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친실장은 여름을 맞는 것도, 견디기 힘든 무더위를 보내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기에 봄에 낳은 새끼들을 위하여 초여름부터 여름나기 준비를 했다. 친실장이 가장 우선시한 것은 물. 실장석에게도 치명적인 여름철 탈수증을 막기 위해, 기온이 가장 올라간 대낮에 골판지 주위에 뿌려두기 위해, 그리고 정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더울 때 자들이 몸을 식힐 수 있도록 쓰레기장에서 슬쩍한 양철 개밥그릇에 가득 채워넣기 위해 친실장은 식수용도를 제외하고 미리 일곱 병이나 되는 페트병에 물을 가득 채워놓았다. 성체인 친실장에게도 1.5리터들이 페트병을 나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중노동이기 때문에 작은 500ml들이 페트병에 물을 떠나르기를 스무 번이 넘도록 해야했지만 오직 자들의 쾌적한 여름나기를 위해 친실장은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집과 수돗가를 왕복했다. 친실장은 가지고있던 모든 페트병을 가득 채우고나서야 겨우 만족했다. 어쨌든 물이란 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대비는 만전, 무더위따위 올 테면 와바랏! 하며 뿌듯한 마음이 된 친실장은 이번 여름에야말로 한 마리의 낙오 없이 모든 자들을 잘 길러내겠다고 다짐했다.

무더위의 전조인 태풍은 올해도 여지없이 공원을 덮쳤다. 그러나 매년 공원의 수많은 들실장들을 그들이 웅크린 골판지집째로 나뭇가지, 전봇대, 지붕 모서리 등등에 꽂아놓는 태풍의 무서움을 여러 해 동안 경험한 노련한 친실장은 미리 대비책을 세워뒀다. 바로 공원 구석의 돌덩이와 흙더미 사이에 파놓은 여름용 별장. 먹이찾기의 도중 발견한 주인 없는 동굴에 친실장은 자들을 껴안고 들어가 거센 바람을 피했다. 

“바람씨 무섭지 않은테치~♬ 마마의 따끈따끈한 품만 있다면 얼마든지 와보라는것인테치~♬”
“별장이라니 세레브한테치~♬ 세레브한 마마를 둔 나는 세레브한테치~♬”
“우지쨩은 마마 살냄새가 나서 안심되는렛훙… 졸린레후… 한숨 자는레히…”
“레,레힛, 나도 들이는레치! 휘잉 휘잉 무서운레챳! 좀더 나를 안쪽에 보내는레치이잇!”

돌과 흙으로 된 지붕이 굳건하게 바깥의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틈새로 들어오는 소음, 찢어지는 듯한 바람과 그 바람에 휩쓸린 들실장들의 비명은 막아주지 못했다. 그리고 작은 엄지실장의 정신이 그같은 환경을 버티지 못하는 바람에 작은 엄지실장은 안전한 친실장과 언니들의 틈바구니를 빠져나와 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즉시 바람에 휘말려 친실장이 어찌 할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레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태풍에 휩쓸린 엄지실장은 새된 단말마를 내며 연약한 몸이 산산조각으로 찢어졌다. 비록 엄지실장이라도 차별 않고 귀엽게 여기던 친실장이었지만 그래도 엄지는 어디까지나 엄지에 불과한 것. 작은 엄지실장 하나를 잃고 여름의 가장 큰 위협인 태풍을 무사히 넘긴 일을 다행으로 여기며 자들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테, 마마… 집이…”
“테에에엥-  공씨가 없어진테치에에에엥-”
“우지쨩의 담요씨가 안보이는렛훙? 그게 없으면 우지쨩은 잠을 잘 수 가 없는레훼엥…”

“자, 자, 자들은 뚝 그치는데스요. 없어진 것들은 마마가 새로 얻어다주는데스. 자들이 멀쩡한 것만으로 마마는 다행인데스.” 

원래 거주하던 골판지집은 비바람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무너져 흐물거렸고 준비해둔 살림살이도 태반이 사라져 흩어져버렸지만 노련한 친실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태풍이 지나가면 공원의 경쟁자가 줄어드는 탓에 먹이나 잡동사니따윈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준비해둔 무거운 페트병들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자들이 무사히 남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친실장은 잃어버린 것들을 대체할 물건을 찾아 부지런히 공원을 누볐다. 

친실장은 공원 탐색을 하며 드문드문 아는 얼굴들을 보고 또 한 번 여름을 무사히 넘긴 것을 자축하는 인사를 나눴다. 들실장에게 있어 사계란 봄에 자들을 낳고 위험한 폭우와 태풍을 넘기면 잠깐 더운 기간 게으르게 보내다가 풍성한 가을에 겨울날 준비를 하고 겨울은 그동안 모아온 것들을 축내며 또 늘어지게 지내는 것. 평소엔 빈말로도 사이좋다고 할 수 없는 이웃들이지만 연중 가장 커다란 위험을 무사히 넘긴 기쁨은 과거의 앙금도 사르르 녹일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모처럼 찾아낸 물건을 이웃에게 양보하기도 하고 양보받기도 하면서 친실장은 적당히 전리품을 갈무리해 집으로 돌아갔다.



태풍의 뒤엔 친실장이 예상했던대로 기분나쁜 더위가 찾아왔다. 어쩐지 평년보다 조금 이르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노련한 친실장은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더위가 가실 때까지 일가의 옷을 모아 고이 접어두고 비축한 물을 아낌없이 풀어 더위를 호소하는 자들을 위로했다. 

“언니쨔앙-! 물대포 나가는테츄!”
“차녀주제에 건방진테치! 내가 쓰나미 맛을 조금만 보여주는테치!”
“우지쨩, 시원한레치?”
“참방참방 시원한렛훙~♬ 브리브리, 운치 나오는렛훙~♬”

아침이 되면 친실장은 땀흘려 끈적해진 바람에 기분나빠하는 자들을 양철 개밥그릇으로 만든 간이 수영장에 넣었다. 잔뜩 물장구를 치고 물장난하며 까부는 자들이 더위를 잊는동안 친실장은 나무에 기대 느긋하게 물을 마시며 쉬었다. 해가 중천에 뜨면 일가는 좁은 골판지 대신 나무그늘 밑에 신문지를 깔고 드러누워 뜨거운 해가 떨어질 때까지 잠을 잤다. 해가 지는 늦은 저녁이 되면 친실장은 하루종일 놀고 먹고 자느라 지쳐서 잠이 든 귀여운 새끼들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진한 입맞춤을 하고는 식수와 식료의 탐색을 위해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더위를 잊도록 잠자리에 들고싶은 것은 친실장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새끼들이 구김살 없이 즐겁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골판지를 나와 서늘한 밤바람을 몸에 걸쳤다.

그렇게 일가가 한가로이 보내길 며칠, 친실장은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바로 날씨가 풀어질 기미는커녕 오히려 더 더워진다는 것. 낮잠을 자다 왠지 숨이 가빠와 잠이 깬 친실장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빈 포대기를 시작으로 친실장의 반대 방향을 향해 이어진 녹색의 선이었다. 그리고 그 끝엔 직사광선 밑에서 말라비틀어진 고기 조각이 된 칠녀 구더기가 있었다.

“데, 데뎃? 이게 어떻게 된 일인데스? 우지쨩이 왜 저런 곳에 있는데스? 육녀, 일어나보는데스!”

오녀 엄지가 태풍에 휩쓸려 날아가고나서 구더기를 전담해 돌보던 육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장녀부터 사녀까지 모든 자실장도 친실장의 외침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친실장에게서 거리를 두고 드러누워 가쁜 숨을 내쉬며 진땀을 흘리는 자들을 발견한 친실장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다.

“뭐인데스, 왜이러는데스!”

친실장은 자들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파악하고 얼른 페트병을 뒤집어 물을 끼얹었다. 한바탕 물벼락을 뒤집어쓴 자들은 그러나 기운을 차리기는커녕 물을 머금은 걸레처럼 축 늘어졌다. 자실장들은 기도를 막은 물을 기침으로 뱉어내며 작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테복, 테베에…”

하지만 육녀 엄지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만히 두 눈을 감은 육녀 엄지의 입에는 친실장이 쏟은 물이 그대로 고여있었다. 

“데엣, 데엣끄, 오로롱…”

육녀 엄지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친실장에게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네 마리의 자실장들 또한 힘없는 표정의 얼굴이 발갛게 떠서 금방이라도 육녀 엄지의 뒤를 따라갈 것만같았기 때문이다. 친실장은 피눈물을 흘리며 엄지의 사체에서 팔다리를 비틀어 떼내어 자실장들의 입에 넣었다. 자실장들은 입에 들어온 고기를 힘없이 오물오물 빨아먹었다. 작은 육녀 엄지의 작은 팔다리는 아주 천천히 자실장들의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 자실장들의 얼굴에서 괴로운 기색이 조금씩 사라졌다. 한고비 넘긴 친실장은 곰곰이 무거운 머리를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낮잠을 잘 때만 해도 육녀 엄지에게 안겨있던 우지쨩은 더운 온도탓에 일가와 육녀 엄지의 품을 벗어나 꼬물꼬물 기어나갔다. 얼마 안가 목숨처럼 아끼는 포대기까지 벗어던진 우지쨩은 그대로 시원한 곳을 찾아 계속 기어서 친실장이 깔아놓은 신문지의 영역을 넘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맨 돌바닥까지 기어가버린 바람에 말린 멸치같은 모습이 되었다. 육녀 엄지는 낮잠을 자던 자세 그대로 살이 익어버려 자는듯이 죽어있었다. 두 새끼의 죽음에서 공통적으로 추정되는 사인은 바로 더위. 몇 해 전의 폭염에서 친실장이 새끼들을 모두 잃었을 때와 비슷하게 죽은 육녀 엄지를 보고 친실장은 나약한 우지쨩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육녀 엄지가 더위에 꺾여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실장이 상황 파악을 끝내고나니 새삼스럽게 더위가 느껴졌다. 주변 공기는 짜증나게 덥고 습해서 마치 한증막에 있는 것처럼 숨쉬기 힘들었다. 팔다리는 저릿저릿했고 머리는 어지러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튼튼하진 않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성체 실장석인 자신이 이정돈데 어린 자실장들은 오죽하랴. 친실장은 황급히 페트병을 열어 개밥그릇 가득 물을 채우고 자실장들을 담갔다. 물은 바깥의 공기만큼 미지근했지만 머리만 내놓고 온몸이 물에 잠긴 자실장들의 표정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테에에… 마마테치?”

“장녀쨩, 정신이 좀 드는데스우?”

“몸씨가 너무 뜨거운테치잉… 그래도 목욕 기분 좋은테츄웅…”

파리하게 시든 미소라도 띄워보내는 장녀에 다소 안심이 된 친실장은 조심스럽게 장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친실장의 부드러운 손길에 안정감을 느끼고 좋아했을 장녀는, 하지만, 친실장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마마, 더운테치이… 쓰담쓰담 괜찮은테치…””

“데이, 미안한데스우. 사과의 의미로 마마가 부채질을 해줄테니 너는 햇님이 떨어질 때까지 목욕하면서 쉬는데스. 햇님이 없어지면 제법 선선해질 것인데스.”

“텟츄웅...♬”

“...이 더위가 끝나면 곧 가을인데스. 가을이 되면 달콤달콤한 감이랑 맛나맛나한 밤이 떨어지는데스. 쌉쌀한 은행과 떫은 도토리도 입에 익으면 맛있는데스요. 데프프프, 그때쯤엔 딸들도 자라서 테스테스 하면서 마마를 도와 봉지 한가득 보존식을 모으는데스. 정말 기다리기 힘든 것인데스.”


친실장의 소망과는 반대로 더위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오히려 기상 관측 사상 최악의 폭염이란 악명을 자랑하는 무더위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연일 계속되었다. 여름을 수차례 경험한 친실장도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처음으로 겪는 자실장들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땀을 흘려 열을 발산하기 위해 혈관은 한껏 확장되었고 심장은 넓어진 혈관에 피를 보내기 위해 밤에도 쉬지 않고 펌프질을 했다. 과부화된 심장은 뇌에 충분한 혈액을 보내지 못해서 자실장들은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심장은 콩닥콩닥 뛰는데 호흡은 가쁘고 정신은 혼미한 상태였다. 

과거의 경험에서 미루어보아 더위는 며칠 내 끝날 것으로 판단한 친실장은 힘들어하는 자실장들을 위해 비축해둔 물을 아낌없이 썼다. 하루에 서너 번 친실장이 선언하는 물놀이 시간이 되면 자실장들은 환호하며 일제히 개밥그릇에 들어가 친실장에게 물을 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실장들의 미소와 함께 비축해둔 페트병이 한 병 또 한 병 줄어들어도 더위가 사그라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내일에야말로, 내일은 기필코 더위가 물러날 것이라고 친실장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페트병 뚜껑을 열었지만 기승을 부리는 더위는 이제 가만히 누워있어도 등을 적시는 땀에 기분이 나빠지게 만들 정도였다. 

친실장이 모아둔 물은 오래지 않아 동이 났다. 얌전히 더위를 참고 물놀이 시간을 기다리던 자실장들은 친실장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개밥그릇에 기어올라 물놀이 시간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당장 마실 물도 부족한 마당에 귀중한 물을 낭비할 수 없어 친실장은 자실장들에게 부정의 뜻을 전했다. 격렬한 반대와 떼쓰기를 각오했건만 자실장들은 조용히 미지근한 개밥그릇에서 기어나가 아무데나 털썩 드러누웠다. 더위에 입맛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자실장들에겐 떼를 쓸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더위에 시들어만가는 자실장들을 바라보는 친실장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더위가 물러나도록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작은 구름 한 조각이라도 나타나길 바라는 친실장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실장은 결국 물을 찾아나서기로 마음먹고 자실장들에게 마지막 남은 물을 한 모금씩 나눠주고는 집을 나섰다.

사람에게 물이란 수도꼭지를 틀면 콸콸콸 쏟아져나오는 것이지만 들실장들에게 폭염의 공원에서 물을 구하기란 나름대로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다. 견디기 힘든 무더위와 무거운 물병의 무게는 말할 것도 없고 더위를 피하기 좋은 수돗가에서는 종종 자리나 물 쟁탈전으로 유혈사태가 발생하곤 한다. 태풍이 지나간 공원이 아무리 들실장이 줄어들었다고해도 폭염동안 황금처럼 귀중해지는 물의 공급처에는 사방팔방의 들실장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같은 이유때문에 친실장은 식수가 절실해질 때까지 더위를 호소하는 자실장들의 눈초리를 애써 외면해왔다. 자들의 더위를 해소해주기 위해 몇 번이나 수돗가를 왕복하는 리스크를 짊어질 수는 없었기 떄문이다. 하지만 결국 식수조차 바닥나버리고 물 없이 사흘도 못버티는 자실장들을 위해 친실장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무가 심어진 흙바닥을 벗어나 길가에 심어진 덤불을 헤치고 인간의 보행로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을 때

“데, 데갸앗!”

친실장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뒤로 나뒹굴었다. 

“뭐, 뭐인데스. 뭔가 있는데스…”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은 바로 태양으로부터 길가의 보도블럭이 내뿜는 반사열의 벽이었다. 친실장이 서있는 그늘진 흙바닥도 더웠지만 햇빛을 막을 그늘도 열을 흡수할 물방울도 없는 길바닥은 정오의 뙤약볕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그 열은 마치 투명한 장막처럼 친실장의 손을 가로막고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다. 수돗가로 향하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길을 어떻게 건너야할지 친실장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건너편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데데…?”

기척의 주인은 친실장과 마찬가지로 나체인 들실장. 친실장도 가끔 가다 본 기억이 있는 공원의 이웃 실장석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그 얼굴은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데...베…”

들실장의 눈은 초점을 잃고 풀어져 있었다. 열린 입에선 혓바닥이 늘어져 나왔지만 그 외엔 의미없는 신음소리 뿐. 더운 날씨에 고통받는데도 들실장의 몸에선 기이하게 한 방울의 땀이나 침도 흐르지 않았다. 팔은 좀비처럼 전방으로 치켜들었지만 눈앞의 덤불을 헤친다는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들실장의 팔은 내려가지 않고 허공에 걸려있었다. 덤불에서 과감히 나와 찜통같은 보도블럭 위에 선 들실장은 더위도 아랑곳않고 천천히 발을 끌었다. 그리고 단 몇 걸음만에 하수구 철망에 발이 끼어 앞으로 고꾸라졌다. 분명히 아팠을 텐데도 들실장은 비명소리 없이 잠깐 팔을 움찔움찔 하더니 총구에서 공기 빠져나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움직임이 멎었다.

명백히 죽음을 알리는 눈앞의 광경에 친실장은 소름이 돋았다. 여지껏 뜨거운 공기가 기분나쁘긴 했어도 그것 때문에 실장석이 죽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친실장이었지만 눈앞의 들실장이 말라죽는 걸 봐버린 친실장은 주변을 둘러싼 대기가 더이상 무해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한 친실장은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어느새 친실장의 몸도 열사병의 초기에 접어들어가고 있었다. 친실장은 더위에 몽롱해진 정신을 집중해 상황을 정리했다. 

생각이 정돈될수록 친실장의 마음은 무거워져왔다. 눈앞의 길은 덥다는 수준을 넘어 동족이 죽을 정도인 것. 하지만 옆구리에 낀 500ml짜리 페트병을 시원한 물로 채워가지 않는다면 소중한 자들은 물론이고 친실장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몸은 그늘과 휴식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지만 이성은 수풀을 헤치고 보도블럭으로 나갈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의 고통에 친실장은 욕지기를 느끼며 걸음을 떼었다.

직사광선의 햇빛은 친실장의 생각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마치 빛이 질량을 가지고 친실장을 억누르는듯한 느낌에 친실장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워 굽는듯한 느낌에 친실장은 숨도 쉬지 못했다. 친실장에겐 영겁같은 시간,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끝에 생명의 위기를 느낀 친실장은 목표로했던 수돗가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황급히 눈앞에 있는 벤치의 그늘 밑으로 몸을 던졌다. 

“데히이, 데히이, 데후우, 데후우우…보웨에엑-”

친실장은 맨땅에 고개를 쳐박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입에선 구토가, 총구에선 설사가 친실장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눈앞의 시야가 뒤틀리고 팔다리가 제멋대로 떨려왔다. 땅이 올라가고 하늘이 꺼지는듯한 감각에 친실장은 발라당 나뒹굴었다. 피부에 물집이 잡히고 속살을 지나 위석까지 뜨겁게 달궈진 듯했지만 더이상 벗을 것도 없어 친실장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은 듯 기절했다.

한참을 대자로 드러누워 호흡과 정신을 되찾은 친실장은 이내 자신이 너무 무방비하게 있었음을 깨닫고 주위를 살폈다. 힘이 바닥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들실장은 언제 동족들에게 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공원 한복판에서, 더위에 지쳐 옷을 챙겨입는 것을 잊은 나체상태이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그러나 공원은 죽은 듯이, 마치 친실장 외엔 아무도 없는 세계가 된 것처럼 조용했다. 

“데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모두 평소의 공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너무나 귀에 익은 매미 소리만 지루하게 울리는 공원에선 들실장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수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들실장들의 고통에 찬 신음, 환희에 찬 함성, 공포에 질린 비명, 위선에 찬 아양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실장석이 사라지고 친실장만이 남은듯한 감각. 그 완벽한 일상이 들려주는 낯선 비일상에 어쩐지 겁이 난 친실장은 익숙한 곳을 찾아 그늘을 따라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공원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광장에는 아기천사가 나팔로 물을 흘리는 분수, 몇 대의 자판기와 쓰레기통이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더위를 피해 나들이를 온 인간 일가족과 그들에게 아첨하고 먹이를 얻으려는 들실장들로 북적거리던 광장엔 역시 몇 마리의 들실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일상은 사라져있었다. 

집 근처 그늘에 쳐박혀 비축해둔 물을 마시느라 친실장이 알지 못한 것은 바로 공원이 며칠 전부터 폐쇄되었단 것. 살인적이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난에 가까운 폭염에 정부로부터 외출 자제 권고가 내려지고 폭증한 물 수요 때문에 공원의 수돗가, 분수와 화장실이 단수상태라는 것. 따라서 공원의 들실장 전체가 생존에 필요한 물을 며칠째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장석이 아무리 카오스적인 존재라고 해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면 죽는 것은 생물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진리. 공원의 들실장들 중 멍청하지만 운이 좋아 태풍에서 살아남은 것들은 폭염의 며칠만에 모아놓은 수분을 모두 땀으로 배출해버리고 체온 조절 능력을 잃어버렸다. 땀으로 열을 배출할 수 없게 된 들실장들은 열사병으로인한 무기력과 어지럼증을 호소하다가 쓰러져 그대로 구워졌다. 그밖에 친실장처럼 물을 비축해둔 들실장들은 가진 물이 동나자 갈증에 허덕이다못해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수분인 자실장의 목을 따 피를 빨았다. 엄지와 구더기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 침을 내보기도 하고 테치테치 울부짖는 자실장을 붙잡아 머리를 따내서 솟구치는 피를 마셔 목을 축여보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침을 마시는 것은 언발에 오줌누기고 염분을 포함하고 있는 피는 오히려 갈증을 부채질할 뿐. 결국 후세를 맡기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겨둔 소중한 자실장의 피와 뇌수를 남김없이 빨아먹은 들실장들은 타는 듯한 갈증으로 물을 찾아 광장으로 향했다. 

그렇게해서 친실장의 눈앞엔 스스로 자실장을 모두 죽여서 미쳐버리고 갈증에 돌아버린 들실장들이 만드는 광란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광장에 오는 것으로 마지막 힘을 짜낸 한 들실장은 친실장이 광장에 오기 전에 본 녀석처럼 메말라 구토와 마른 방귀를 흘리며 쓰러져 절명했다. 조금의 여력이 있었던 한 들실장은 눈앞에 쓰러진 들실장의 목덜미를 물어 찢고 흐르는 피를 탐하다 햇빛에 몸이 익는 바람에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좀 더 여유가 있던 한 들실장은 완전히 달궈진 수도꼭지를 붙잡고 헛되이 돌려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 절망감에 위석을 자괴해버리고 말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는 공원의 광장엔 그럼에도 물을 찾아나선 들실장들이 뇌까지 달궈져 이성이 마비된 채 죽음의 행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죽음의 풍경에 오금이 저려온 친실장은 들고있던 페트병도 내버리고 온힘을 다해 도망쳤다.

40도가 넘어가는 기온, 그리고 그것을 상회하는 길바닥을 달리는 친실장의 몸도 이성도 천천히 고장나고 있었다. 무수한 들실장을 파멸시켜온 무모한 행복회로를 대신해 친실장의 목숨을 부지시켜온 이성이 마지막으로 내놓은 해답은 결국 인간에게 부탁하는 것. 그시점에서 친실장에게 남은 대안이 있었을까? 행복회로의 발로와 다를 바 없는 헛된 가능성에 기댈만큼 친실장에겐 더이상 시간도 선택도 남아있지 않았다. 스스로의 생명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집에서 기다리는 자들을 위한 일념 하나로 물을 구하기 위해 친실장은 쉬지않고 공원의 바깥을 향해 달렸다. 고기 썩는 냄새와 고요한 숲을 뚫고 도착한 공원의 입구엔 출입금지라 적힌 금줄만이 걸려있었다. 

‘물… 닌겐상… 물… 자들에게… 물…’

몽롱한 정신으로 친실장은 금줄을 넘어 공원의 경계 바깥에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곧바로 엄습해오는 강렬한 열기를 느끼고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나마 녹지가 있는 공원과 달리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자동차와 더운 바람을 뿜어대는 건물 실외기, 물을 순식간에 증발시키고 햇빛을 반사하는 아스팔트 바닥의 열은 친실장이 서있는 길에 아지랑이를 만들 정도였다. 

그같은 환경을 친실장의 나약한 몸이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고온에 뇌세포가 파괴되며 의식이 부분부분 단절되고 기억이 흐릿해지는 친실장. 흘러가는 주마등 사이에서 친실장은 겨우 자들을 기억해내고 마지막 힘을 짜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도 데스데스 무언가를 요구해오는 알몸의 들실장을 상대할 이는 드물텐데 하물며 이런 폭염 속에서는 학대파조차 걸음을 멈출 리 없으리라. 결국 몇 분을 허탕친 끝에 기력과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친실장은 마지막으로 횡단보도에 서있는 검은 색 옷을 입은 다리를 토닥토닥 때려 주의를 끌고 입을 열려는 찰나, 정신이 아찔해지며 피를 토했다. 

“데복! 데보엑! 데이, 데즈아아…”

내부 장기가 무너지며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친실장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걱정은 인간, 그것도 검은 인간의 양복을 더럽혔다는 공포였다. 점심시간에 공원에 찾아오는 직장인들은 대개 점잖고 때떄로 도시락의 찌꺼기를 양보할만큼 우호적, 적어도 공격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선의를 착각해버리고만 분충들이 그들의 양복을 더럽히기라도 하면 분충들은 변변찮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피떡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9회말 2아웃의 상황에서 찾아온 마지막 기회를 내야 뜬볼로 날려버린 것과 다름이 없는 친실장의 심정은 절망을 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 하고있었다. 이제 전부 끝났다. 나는 물론 봄에 태어나 행복한 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딸들도 고작 여름을 넘기지 못한 채 이대로 끝난 것이다. 체념한 친실장은 힘없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쓰러졌다.

“어머, 괜찮니? 안색이 많이 안좋아보이는구나.”

“...데뎃?”

하지만 단단한 구둣발 뒤축을 각오했던 친실장의 머리에 느껴진 감촉은 인간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시원한 그늘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 의외로운 손길에 어리둥절한 친실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로사리오를 쥔 손, 십자가 목걸이 그리고 검은 베일과 동그란 안경 밑에 걸린 인자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천한 들실장에겐 과분한 신의 인도였을까? 친실장이 건드린 인간은 다름아닌 근처를 지나가던 수녀였던 것이다.

친실장은 기대하지도 않은 따뜻한 손길에 감동했지만 눈물샘이 말라버려 동그란 눈만 휘둥그레 뜬 채 ㅛ수녀를 바라보았다. 수녀는 가방에서 손수건과 물병을 꺼내 손수건을 적셔서 주저없이 친실장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물을 먹여주었다. 목을 타고 흐르는 단순한 생수가 친실장에겐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신, 아련히 그리워지는 마마의 밀크와 같이 느껴졌다.

“너희들도 많이 힘들겠구나. 그래도 힘내서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을 거란다. 아가들은 키우고 있니?”

“데, 데스! 데스!”

“후훗, 그래. 미안하지만 변변한 건 없고, 이거라도 가져가서 나눠주렴. 그럼 가볼게?”

신호등이 바뀐 걸 확인한 수녀는 생수병과 작은 쿠키 한 봉지를 친실장에게 주고는 길 건너로 사라졌다. 친실장은 선물을 꼭 껴안은채 수녀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친실장도 들실장으로서 수없이 많이 인간들에게 아첨을 떨고 구걸을 해왔다. 그 때마다 값싼 동정심에, 작은 우월감에 음식을 던져대는 사람들을 향해 친실장은 고마움 대신 모든 것을 가진 인간들이 통 크게 굴지 않고 짜투리만 내놓는다 생각해 아니꼬움을 느꼈다. 노련한 들실장답게 대놓고 그런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친실장도 자기중심적인 실장석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수녀의 자애와 헌신 앞에선 미물에 불과한 친실장도 따뜻한 감정으로 위석이 뭉클했다. 친실장은 수녀가 떠난 방향을 향해 길게 고개를 숙였다.


수녀가 준 물로 목을 축이고 몸을 닦아준 물티슈의 습기가 마르며 몸이 시원해진 친실장은 자들이 목이 빠지게 친실장을 기다리고있을 집을 향해 달렸다. 돌아가는 길 또한 덥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친절한 수녀를 생각하며 왠지 어렸을 때 사별한 그리운 친실장이 떠오른 친실장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친실장은 친실장으로서 또 하루 자들을 굶기지 않고 목과 배를 채워줄 수 있어 행복한 마음으로 크게 외쳤다.

“자드을~♡마마가 무엇을 가져왔나 보는데스~♡”

그러나 골판지 집의 분위기는 더운 날씨와 달리 얼음물이라도 쏟아진 것처럼 차가웠다. 더위를 견디는 것만으로 완전히 탈진한 장녀와 삼녀는 눈을 감고 죽은 듯 드러누워있었다. 그리고 차녀는 사녀의 배에 올라타 사녀를 죽어라 패고있었다.

”데, 차녀, 지금 뭐하는…”

“죽어테치! 죽어테치! 너같은 건 죽어버리라는테치!”

“테븟! 테벳! 치베! …”

“지금 뭘 하고있는데샤아앗!”

친실장은 차녀를 거칠게 밀쳐 골판지 구석으로 날려버리고 사녀의 상태를 살폈다. 얼마나 맞았는지 사녀의 얼굴은 붉은 피와 푸른 멍으로 얼룩져 모자이크처럼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남김없이 뽑히고 엉망진창으로 부어오른 사녀의 눈엔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마마앗… (파킨).”

사녀는 생명력이 바닥이 나 친실장의 손에 안기자마자 위석이 깨져버렸다. 분노한 친실장이 분노를 쏟을 대상을 찾아 고개를 돌려보니 차녀 역시 골판지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어있었다.

“이게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데스우우우! 오로로롱…”

분노, 슬픔, 혼란이 친실장의 마음에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감정에 몸을 맡길 만큼의 여유가 친실장에겐 없었다. 친실장은 장녀와 삼녀의 입을 열어 물을 흘려넣고 쿠키 부스러기를 넣어주었다. 

“테에에… 마마아… 살아있던테치…?”

장녀와 삼녀는 다시 한 번 실장석다운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두 자실장은 눈꺼풀을 움직일 힘도 없다는듯이 눈을 뜨지 못했다. 그저 친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릴 뿐인 장녀에게 친실장은 말을 걸었다.

“장녀, 대체 동생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데스? 왜 차녀가 사녀를… 그토록 사이 좋았던 자들이…”

“너무 더웠던테치이… 더운데 마마가 오지 않아서 나는 짜증이 났던테치.. 그런데 사녀가 잠에서 깨서는 마마를 찾아 울었던테치… 가뜩이나 더운데 시끄럽게 구는 사녀가 짜증이 나서 나는 화가 많이 났던테치… 차녀도 삼녀도 화를 많이많이 낸테치이이… 테끅, 하지만 사녀는 계속해서 울었던테치… 우리도 마마가 걱정되는데 사녀는 마마가 오지 않을 거라고, 마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계속해서 울었던테치이… 나도 차녀도 삼녀도 이제 고아가 됐다고 했던테치… 그래서 테끅… 차녀가 화를 못참고 사녀를 막 때린테치… 나는 뒤늦게 말리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던테치… 너무 더워서 아무런 힘이 나지 않았던… 테에엥... “

죽을 만큼 더운 날씨에 자실장들의 나약한 마음은 연약한 몸만큼이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정신이 붕괴되지 않도록 억압된 감정의 배출이 절실했던 사녀는 마음 속 비관을 늘어놓는 것으로, 차녀는 쌓인 짜증을 폭력성을 분출하는 것으로 해소한 것이다. 친실장이 계속 옆에 붙어서 자들을 안심시켜주었다면 자들의 정신이 코너에 몰리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실장도 딱히 놀러나갔던 게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물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외출을 감행한 것. 나아가도 죽고 물러서도 죽음 뿐이라면 두 자실장의 죽음은 필연이었을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답이 없는 현실속에 친실장은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다.



지겨운 더위는 며칠 더 계속되었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더운 날씨에 한숨을 쉬며 친실장은 눈을 떴다. 수녀가 준 페트병이 바닥나도록 장녀와 삼녀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 구석엔 수녀에게 받은 쿠키가 조금 줄어든 채 남아있었지만 자들이 제대로 밥을 넘기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친실장은 그것을 감히 먹지 못했다. 더운 열기에 모든 욕구를 잃어버린 일가는 영혼을 빼앗긴 인형처럼 하염없이 누워있기만 했다.

“이정도로 더우리라곤 듣지 못했던데스… 마마가 말해주지 않았던데즈우…”

지친 친실장은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생각하는 대신 두 자실장을 잃은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는데만 골몰했다. 사실 어떻게 해도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방도가 달리 없는 것이다. 평범한 들실장이 자들을 쉬게 할 시원한 곳 따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애초에 자들은커녕 친실장부터 체력이 바닥났기 때문에 그늘을 벗어나 뜨거운 길 위에 설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런 상황에도 자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싶다.

“그래, 이정도로 덥진 않았던데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스… 분명 이정도는 아니었던데스…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는데스...”

친실장은 천천히 땀을 닦느라 뒤집어놓았던 자실장들을 바로 눕힌다. 뒤집한 장녀와 삼녀의 회색 눈동자.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팔과 근육의 힘이 풀어져 총구 사이로 주르륵 힘없이 흐르는 똥이 친실장에게 사실을 고한다. 장녀와 삼녀 또한 더위를 버티지 못했노라고.

“데프프프프프, 데퍗퍗퍗퍗퍄!”

엄밀히 따지면 오래 버텼다고 할 수 있다. 공원의 동족이 전부 더위에 타죽고 난 뒤에도 며칠을 더 버틴 친실장의 정신은 마침내 박살이 났다. 친실장은 등에 달라붙은 목숨과 같이 소중한 머리카락을 스스로 뽑아 던지며 외친다.

“더웠던데스! 이까짓 머리카락, 엉겨붙어서 성가신데스! 나는 독라라도 세레브한데스! 아름다운데스! 세상 모든 만물이 절세가인인 나의 알몸에 반해 경배하는데샤앗!”

식욕마저 사라져 물도 밥도 먹지 못한 친실장의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었는지 친실장은 모여드는 파리를 손으로 휘저어 내쫓으며 어두운 골판지를 박차고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밖을 향해 뛰쳐나간다. 친실장의 눈에는 이미 이성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를 속박하던 이성이 사라진 친실장은 한 마리의 훌륭한 분충이 되어 들어줄 이 없는 공원과 세계를 향해 절규한다.

“데갸앗! 데갸아아아악! 나오라는데샤아! 마마! 햇님! 닌게엔!! 공원이 왜이리 더운데스아아아!”
“나는 이런 더위에 있을 몸이 아닌데샤아! 나의 딸들도 시원한 그늘 밑에서 차가운 스시와 미네랄 워터를 즐겨야 마땅할 몸인데스아아아! 알았다면 당장 나의 앞에 도게자해서 그동안의 더위에 대해 사죄하는데샤아아아!”
광란에 빠진 친실장은 멈추지 않고 덤불숲을 헤쳐 직사광선이 작열하는 정오의 보도블럭 위를 달린다. 치명적인 고온을 직감한 몸이 생체 기능을 하나 둘 정지시킨다. 장기가 기능을 상실하고 체온 조절 능력도 떨어져 어느덧 땀도 흐르지 않는다. 무릎이 마른 장작처럼 역방향으로꺾여 뒤로 쓰러져버린 친실장의 행진은 끝이 났음에도 눈이 뒤집힌 친실장의 절규와 저주는 멈추지 않는다. 

“왜 나를 괴롭히는데스! 태어나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변변치않았던데스! 어째서 아름다운 나에게 콘페이토와 스테이크를 바치는 자가 없는데스!”

“마마는 나를 사육으로 만들 의무가 있었던데스! 똥닌겐이 불우한 나를 데려갈 책임을 져버린데스!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무엇인데스우!”

“고귀한 내가 이렇게 노력한데스우! 그런데 세상은 왜 이런 지옥인데스우우!  데아아아아! 나는 단지 행복해지고싶었을 뿐인데스우우! 왜 내가 이렇게 불행한데스우우우우우우!”

…[파킨]




온난화가 초래한 이상기온은 당연히 공원의 들실장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전국의 모든 공원에서, 산과 밭과 들에서 인간도 견디기 어려운 폭염에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있다. 하지만 폭염은 더이상 올해만 찾아오고 마는 일시적인 이상이 아니다. 빙하가 녹으며 그 속에 묻혀있던 온실가스가 해방되어 지구의 온도를 더욱 높이고 올라간 온도는 다시 빙하를 녹이는 악순환이 진행중이다. 여름의 긴 폭염과 겨울의 이상한파는 그 결과물일 뿐. 운이 좋아서, 혹은 고된 노력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들실장들이 과연 끊임없이 찾아오는 냉탕과 온탕의 세례를 견딜 수 있을까? 펄펄 끓는 지구를 위해 실장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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