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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조우




비릿한 웃음을 띄운 남자가 등가방에 잔뜩 짊어진 페트병 중 하나를 꺼내어 위아래로 찰팍찰팍 흔든다.




내부에 가라앉아 있던 푸른색 용액과 투명한 용액이 금새 섞여 보랏빛의 묘한 색으로 발광한다.




남자가 모 싸이트에서 조사해내어 만든 염소용액과 용해액, 실장 코로리 등을 특수배합으로 조합해 만든,


그 용도가 극히 흉악한 제조물이다.



이것을 박스에 부어낸다면?



최소한의 섬유만을 남기고 고열을 내며 녹아내린 박스가 안에서 곤히 잠자고 있던 실장석들을 덮칠 것이다.

이윽고 그들의 피부를 서서히 긴시간 동안 태워갈 것은 물론이며,

위아래로 피와 똥오줌을 흩뿌릴 것이고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위석이 뿜어내는 생명력은 강제출산으로 이어질 것.


산채로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과 채액을 뿜어내며 생명력을 잃어가는 생생한 장면을 상상하며 남자는 공원의 가장 앞에 있는 박스에 당도했다.



슬쩍 박스에 귀를 대어 본다.



흡사 돼지 축사에서나 들려올듯한 게걸스런 숨소리. 어림잡아 친실장 하나에 자실장 네다섯.

우선 시운전을 해보기 위해 남자는 페트병의 뚜껑을 열었다.




- 재밌는 걸 보여줘.




서서히 기울어 가던 병목에 용액의 첫울렁임이 걸리려던 찰나,

무언가가 남자의 팔을 덥썩 잡는다.




- 그만하지.




사랑을 나누던 남녀가 카타르시스의 절정을 느끼려던 순간 방해를 받은 것 만큼, 남자의 불쾌감은 진했다.

서서히 자신의 팔을 낚아챈 손의 얼굴로 불쾌한 눈동자가 움직인다.



키는 160이나 될까.


옷소매 끝단이 낡아빠져 헤질 정도의 차림새에 변변한 외투도 없이 거적을 둘러써 추위를 피하려는 늙은 노숙자의 모습.


불결함을 참지못하고 팔을 획하고 후려 뺀다.




- 뭐야 당신



남자는 노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툭툭 털어내며 있는대로 살기를 뿜어낸다.




- 그런 짓 해봐야 무어 의미가 있어. 그만하지.


- 말릴거면 말로 하지 그랬수? 아 씨발 냄새...




노인의 손이 닿았던 소매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은 남자의 미간이 있는대로 구겨진다.



- 그런 일이 아직 즐겁나?


- 아직? 뭐야. 당신 나 알아?




안그래도 기대하던 순간을 방해받아 기분이 나쁜 참에 어줍잖은 훈계까지 곁들여지자 남자의 인내심이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한다.




- 대충 알 것 같아 그러오. 사람도 없는 새벽 시간대에 얼굴을 꽁꽁 감추고 가방에 이것저것 싸와 음흉하게 웃는 모양새면 말다했지 뭐해.



- 이봐요



- 뭐하러 그러고 살아.




남자의 표정이 없어진다. 팔다리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며 더이상의 대화는 없음을 몸으로 표현하려는데 노인이 자세를 푹 낮춘다.




- ?




쭈그려 앉은 노인이 박스를 열어 안을 보이자 남자가 멈칫 움직임을 멈춘다.



이런저런 얼룩이 잔뜩 묻은 친실장의 품아귀에 꼬질꼬질한 자실장들이 손가락을 빨며 세근세근 잠들어있다. 이런저런 이물이 묻은 낙엽 속에 몸을 묻고 누런 침을 흘리며 자는 모습엔 하루의 노곤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손톱조차 없는 손으로 무얼 그리 열심히 했는지 여기저기 피부가 까져 꺼매진 모습. 아쉬운 식사지만 만족스럽게 마쳤는지 주름이 많이간 비닐봉투는 텅 비어있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친실장의 잠든 표정에 뿌듯함이 자실장들의 표정엔 행복이 묻어있다.




- 게으르고 더럽다고 하지만 아침부터 일어나 고양이손 만도 못한 것으로 이것저것 모으러 다닌다네. 보잘 것 없는 것을 주워 모아와도 웃으며 품에 안기더구만.



- ........



- 다들 그렇게 열심히 살아.





어느덧 남자는 크게 할 말이 없어졌다.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왔던 화도 어느새 식어 있다.

그저 자신을 쳐다보는 노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조금은 부담스러워진다.




- 얼굴과 몸에는 살이 올라 있는데 팔 다리는 가늘고



- ???



- 표정에는 여유도 없어.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라도 생기면 화부터 내지.



- ?



- 세상 사람들하고 썩 다른 차림새로 보면 세상 사람들 살아가듯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시간에 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 마주치기도 무섭지. 하도 오래 방 안에만 쳐박혀 시간을 보내온 탓일게야.




노인이 멍한 눈빛으로 늘어놓는 말에 남자의 화가 다시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 이봐요!! 당신이 뭔데 다 안다는 듯이


- 내 젊을 때 이야기일세.




울컥 목소리를 높이던 남자의 말문이 턱하고 막힌다.




- 원래 사람이란게 그렇다네.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대와 다르게 혼자서 멈춘 시간만 살아가다 보면 그렇게 돼.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남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성격이 되어버리고, 남을 피하고 남에게서 감추고 싶은 자신이 되지.



- ............



- 그러다보면 그렇게.




노인이 흉악한 용액으로 가득차 있는 남자의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 그렇게 아무의미 없는 일에 갈 길없이 맴돌고만 있는 의욕을 써버리게 된다네.





노인의 손이 다시금 남자의 어깨로 올라온다. 여전히 악취가 나는 손이지만 남자는 이번에는 그것을 뿌리치거나 하지 못했다. 아니 뿌리치지 않았다.




- 의욕이란건 살아가는 힘이고 살아가는 힘이란건 시간이란 화폐로 한정이 되어있어 젊은 친구.



- .........



- 자네 나이 때의 사람이 이렇게 살아선 안돼!





지금껏 멍해보이기만 했던 노인의 눈동자에 큰힘이 들어온다. 왜인지 어깨에 올라온 손도 좀더 무겁게 느껴졌다.





- 보아하니 자네는 주저 앉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평범하다고 무시하며 방안에 같힌 자신이 속한 세계, 자신이 관심을 가진 세계만이 특별하다고..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며 고압적으로 살아온 듯 한데..



- 그...렇지 않..



- 날마다 좋은 만남은 가지고 있나?



- 네?



- 꿈은, 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친구는? 꿈을 향해 같이 걸어갈 친구는 있나?



- 꿈은... 없어요..





남자는 문득 지난 2년 동안의 자신을 돌아본다.



군대를 전역할 무렵 넘쳤던 의욕이 무색하게 그가 내민 결과물들을 사회는 매몰차게 무시했다. 자신있게 거리를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아니 한낮의 거리를 걸어본 적이 최근에 있기나 하던가.


점점 작아져 가는 목표를 향해 좀더 작은 태도로 작은 보상을 바라며 자기 자신을 줄이고 줄여나갔지만 최저한의 기대감마저 사회에게 배신당했을 때,



어쩌면 자신은 네모난 방안에 홀로 남아 무신경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조금더 천천히 시간이 흘러갈 것이라고.



최선을 다하는 고통과 그것이 좌절되는 시련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조금이라도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화면 안의 작은 공간에 안주하게 되었을 때부터일까.



남자는 이렇게 으슥한 시간대에 음침한 짓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었을지도.



그렇게 길게 자신을 돌아본 남자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바닥으로 눈물 또한 떨어진다.





- 그렇게 고개 숙이면 안돼.



- ....네...



- 고개를 들고 앞을 보고 아주 작은 일부터. 그래 밝은 낮 아침에 일어나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



- 출근하느라 바쁜 사람들. 이것저것 들추어메고 통화하며 뛰는 사람들, 이미 땀투성이가 되어 빵우유로 목을 축이는 사람들을 주욱 둘러다보면 말이야. 자네도 알게 될거야.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어디에 아직 내 눈이 닿지 않았었는지, 세상에 그림자가 있는 이유는 밝은 곳도 많기 때문이란 것도 말이야.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땅을 쳐다본다.



- 어허. 고개 숙이면 안된다니까.



- 네..



- 그렇게 고개를 들고 주욱 걸어가다보면 자네도 만나게 될거야. 같이 걸어갈 사람. 같이 말을 나누어 볼사람. 놓았던 꿈이나 잊었던 꿈 다.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이 한동안 눈물을 쏟는다. 끄윽 끄윽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노인의 손이 상냥하게 남자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로 어느새 어수룩한 새벽이 겉히고 이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땀을 스윽하고 닦았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박스를 모아봐도 찢어진 것, 젖어서 허물어진 것 등 여간 훌륭한 것이 없지만 역시 실장석들이 덮어쓴 박스는 각도 살아있고 품도 커서 무게도 많이 나오고 훌륭하다.



새벽녘에 나타난 청년 한명이 노인의 소일거리를 몽땅 녹여놓을 뻔 했지만 잘 타일러 돌려보냈으니 다행이었다.



리어카를 가득채운 박스 한짐을 막 힘차게 잡아 끌려는데 친실장 하나가 설움에 눈물을 흘리며 노인을 간절히 올려다 본다.














- 뭘봐 씹새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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